어째서 초고교급 철학자인가? 나는 그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자라던 환경을 거부하게 되었을 뿐. 다른 이들의 생각만큼 숭고한 뜻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돌아와달라는 부친의 애원을 무시하며 빈민가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기자가 나를 찾아왔다. 번거로웠지만 나는 인터뷰에 응했다. 알려서 나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빈민가가 생긴 경위를 많은 이들이 안다면 공리가 증진되지 않겠는가?
나는 내가 어째서 내 자리를 버렸는지, 내 철학이 옳은 이유는 무엇인지를 상세히 설명했다. 그러자 이 기자는 내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책을 쓰고선 수익을 모조리 내 쪽으로 돌렸다. 멋대로 내 발언을 이용한 것은 달갑지 않았지만 내 철학이 널리 퍼진다면 그것 또한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만 내 생각과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이 책을 접한 이들이 내가 공리를 추구하는 이유가 아닌 내 태생과 처우에만 집중한 것이다. 철도 회사의 딸이 부친의 피해자와 부대끼며 살아간다는 것. 자신에게 주어진 부를 포기했다는 것.
와. 자기 철학을 저렇게 실천하다니. 난 저렇게는 못할 거야. 대단한 의지인걸. 정말 대단해. 옛날 철학자들이나 할 수 있을법한 일이잖아? 고등학생 수준을 뛰어넘었어. 모리 레이코는 초고교급 철학자야!
그렇게 나는 느닷없이 초고교급 철학자라는 비공식 명칭을 얻었다. 웃기지도 않은 일이지.
나보다 철학자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계몽시키고자 했으나 다른 이가 받아야 할 후광을 내가 가로챌 필요는 없었다. 하필이면 나였을 뿐.
내가 스스로를 부족하다 여기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내 위치를 아는 것일 뿐이다. 나는 초고교급 철학자라고 불릴 뿐 초고교급이라 불릴 만한 업적은 이루어내지 않았다. 나는 단지 흥미로운 배경을 가졌기에 초고교급 딱지가 붙은 가십거리에 불과했다. 3주일만 지나면 모든 이들이 관심을 끌 가십거리. 회사는 빈민가 문제를 해결할 압박을 느끼겠지만 공리주의에는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게 뻔했다.
나는 사람들이 내 철학에 시선을 쏟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빠르게 답이 나오더군. 누구도 내가 왜 공리를 숭상하고자 하는지는 몰랐다. 초면의 인터뷰에서 내 모든 속사정을 털어놓을리 만무했으니.
나는 누구에게도 그 당시의 일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 승부사에게조차 공리를 추구하게 된 최초의 일은 말하지 않았다.
최초의 기억이 있는가.
극히 소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유아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신생아 시절에 겪은 경험과 기억은 사라진다. 따라서 나에게 또한 최초의 기억은 없다.
다만 최초라고 여겨지는 기억은 있다. 5살 정도로 추정되는 날. 모친이 설계한 아름다운 저택을 처음 마주한 순간의 기억. 그 압도적인 자태는 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내 왼손을 붙잡은 남자. 부친. 내 오른손을 붙잡은 여자. 모친.
모친은 갈색 긴머리를 한쪽으로 땋아내렸고 몸의 굴곡이 드러나는 회색 긴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갸름했고 눈매는 순했다. 오똑한 코와 매력적인 입술. 그리고 웃음을 가지고 있었다.
철도 회사를 운영하던 부친과 건설 회사의 따님이던 모친. 둘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모친은 자신의 마음대로 딸아이가 살 집을 짜고 싶다고 부친에게 말했고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자 실용성과 예술적 감각을 동시에 만족하는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여기서 예술이란 그저 자신의 부유함을 뽐내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구조물들을 장난감 집 꾸미듯 더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호수. 수영장. 정원. 대문. 꽃밭. 레코드 판을 수집해놓는 방. 도서관. 유리로 막아놓은 천장. 집 전체에는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이 들렸다. 청소는 전문업체에서 처리하며 벽에 거는 종류의 커다란 텔레비전. 악기. 샹들리에. 냉장실. 그리고 철도 모형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이었다. 나는 길과 길을 효율적으로 또 극적으로 연결하는 일에 흥미를 쏟았다. 최선의 수. 머릿속으로 어떤 기차가 어떤 물품을 운반하며 어떤 변수 때문에 멈추고, 선로가 끊어지거나 다시 움직이는 등의 일을 상상하고 있자면 하루를 그렇게 보내는 일마저 가능했다.
내 신체적 한계 또한 나를 활동적인 어린이보다는 정적인 어린이로 규정했다. 내가 정원에서 뛰어놀다 느닷없이 정신을 잃은 날. 의사는 말했다.
"따님의 몸이 워낙 약하시니… 야외 활동은 삼가도록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안전을 위한 통제는 필연적으로 자유의 박탈을 동반한다. 내게 벌어진 일또한 그것과 같았다. 나는 안락하고 평화로운 삶을 보장받은 대신. 내 거동과 행동의 자유로움을 잃었다.
내 모친과 마찬가지로.
모친은 나만큼이나 병약했다. 사실 나보다도 병약했다. 그녀는 하늘하늘하고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고 처연한 웃음을 짓곤 했다. 소화력이 부족하고 잔병치레가 잦은지라 그녀는 늘상 건강하지 않았다. 그녀를 보고 있자면 어딘가로 사라져버릴 것 같은 아득한 느낌이 밀려왔다. 그것은 음울하기도 했다. 나와 그녀는 눈동자를 맞대고 웃으며 떠들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언젠가 그런 시간은 사라지리라는 것을. 어린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어느 날 헬륨 풍선이 손아귀 안에서 벗어나 하늘 위로 추락하는 것을 본 뒤로. 모친도 그런 식으로 날아가지 않게끔 그녀의 손을 꽉 붙들었다. 그럼 그녀도 내 손을 마주 잡아 주었는데- 과연 우리가 같은 생각을 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내가 그녀의 뱃속에 있을 때. 많은 이들이 모친을 걱정했다. 버티지 못할 거라고. 아기와 산모 둘다 위험해질 거라고. 차라리 지우는 게 나을 거라는 금기의 조언이 그들의 목구멍이나 혀 밑에서 달싹거렸을 것이다. 냄비 뚜껑이 끓어오르는 증기의 압박에 아주 잠깐 덜컹이고 다시 잠잠해지는 것처럼.
모친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었다. 자신의 몸은 그녀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겠지. 그녀의 심정이 어떤지 내가 알 도리는 없지만 아무튼. 그녀는 외세계로부터 승리했다. 내게 생명을 준 것이다. 어찌 대단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모두가 불신할지라도. 심지어 부친마저 나를 지우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때도 그녀는 나의 목숨을 포기하지 않았다.
모친이 죽은 뒤에 알음알음 들려오는 풍문에 의하면, 그날 모친은 부친에게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그토록 여리고 부드러운 사람이 말이다.
사람들과 모친 스스로가 말하길. 그것은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레이코. 내 딸. 난 세상에서 너를 제일 사랑한단다. 너를 사랑하기에 내가 살 수 있었던 거야. 내가 너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그녀가 하는 말에. 난 거역할 수 없었다.
"레이코. 너는 작고 연약하단다. 밖은 위험해.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얌전히 있으렴."
사랑은 곧 내가 얌전히 묶여야만 할 이유. 즉슨 족쇄가 되었다.
나도 밖에 나가서 놀고 싶었고, 자유롭게 뛰어보고 싶었다. 너무 빠른 속도로 달려 석양 너머로 사라지고 우주의 티끌이 될지라도. 넓은 도로와 빠른 다리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달리고 싶었다. 모친을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나는 내 바람과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번갈아 보았고. 결국 납득했다. 아. 나는 연약한 거구나. 라고.
유리창과 텔레비전. 투명 유리와 검은 유리 밖에는 내가 사는 곳과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나는 나가서 그 곳을 누비고 싶었다. 온갖 산과 바다. 모래로 이루어진 또 다른 장소를 정복하고자 했다. 멈추지 않고 늘 바쁜 기차의 역동성은 곧 집 안에 닻을 내리고 움직일 수 없게 된 나에게 대리적인 만족감을 주었다. 나는 매일 기차를 타고 어딘가를 누비는, 멋진 모험의 꿈을 꾸었다.
내 허무함을 달래준 것은 부친과 모친의 친구였다. 그는 부친이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두 사람과 친했다. 또 시간이 지난 이후에도 부친이 가장 신임하는, 유능하다고 평가하는 작업반장이기도 했다.
"네가 레이코지. 많이 컸구나?"
나를 만난 그의 첫마디였다. 나와 그도 곧 친밀해졌다. 사업을 가꾸느라 바쁜 부친 대신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내게 장난감을 주었으며 장난감을 가지고 나와 놀아 주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의 어깨 위에 올라타 온몸을 덜컹거리며, 아주 짧게 바깥세계를 산책하고 돌아올 때면 그 짜릿함에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었다.
"레이코. 재미있니?"
나는 재밌다고 대답했다. 아저씨는 정말 최고라고. 아저씨가 우리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푸하하. 그런 말 하면 못써."
그런 말은 해선 안 됐다.
즐거운 시간 속에서 나는 건강을 조금씩 회복했다. 그 뒤론 학교에 다닐 수도 있었다. 내 바람에 따라. 소위 평범한 초등학교였지. 그런데 그곳에서 나는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어디서도 듣지못했던 소문을.
나의 부친이 다른 이들에게서 땅을 갈취했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악독한 사업가라는 것도 들었지. 내가 알고 있던 부친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나는 그날 모친에게 달려가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아저씨. 정말이에요? 아빠가 나쁜 사람이에요? 미안해서 나 어떻게 해요?
모친은 입을 열지 않았다. 오히려 난처했겠지. 군림하는 지배자로 키우려 했던 딸아이가 연약해 빠진 소리나 하고 있으니.
아저씨는 말했다. 아빠의 회사를 나중에 물려받는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회사의 힘을 쓰라고. 그럼 된 거라고.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선택. 더 나은 선택. 모든 이들이 보다 행복할 수 있는 선택. 그게 선이겠지. 나는 그 말을 듣고… 비로소 울음을 그칠 수 있었다.
그게 공리에 눈뜬 진짜 계기는 아니다. 씨가 뿌려진 것일 뿐. 싹은 나중에 틔웠지.
그날은 악몽의 날이었다. 언제인지는 모른다. 나는 그 날짜를 기억한 적이 없다. 저주스러운 날을 기억한다고 해서 좋을 일은 없으니.
아저씨가 나와 놀아주다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뒤의 일이다. 나는 왜인지 그날밤 좀처럼 잠에 들지 못했고 부친은 여전히 사업을 돌보기 위해 여기저기를 쏘다녔지. 딸아이는 뒷전이었다.
뒤로 밀려난 딸아이는 그날 홀로 화장실에 가려다 들어서는 안 될 소리를 들었다.
기억은 과도하게 생생하다. 슬리퍼가 바닥에 스치며 내는 소리. 어두운 실내. 잠자기 전 들었던 조금 오싹한 이야기들. 새벽에 싸돌아다니지 않고 얌전히 잠들어야 할 이유들. 그리고 그것을 어기고 있는 일탈에 대한 고양감. 벽에 걸린 미술작품 속 사람들은 나를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떨렸다. 화장실에서 나온 뒤에도 집안을 쏘다녀볼까? 하는 생각이 미쳤을 때. 내 귓가에 모친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린아이들은 오히려 모든 자극을 너무나도 쉽게 알아차린다. 무뎌지지 않은 직관은 말투의 변화만으로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알아낼 수 있다. 나 또한 그랬다.
모친이 침실 안에서 내는 목소리는 괴로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는 모친이 악몽을 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문을 열고 그녀를 깨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랬으나… 내 직관은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봐선 안 되는 무언가가 앞에 있다고 말이다.
문 안에서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는 잘못 듣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불안이 어떤지 아는가? 유쾌하진 않다. 알 만큼 아는 성숙한 자들의 불안과 다르다. 왜인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며 무섭고 불편하지. 답답하고 몸의 어딘가가 간지러워진다. 몸 위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느낌. 그런데 이유는 알 수 없지. 왜 아저씨가 여기에 있는지. 집에 안 간 건지. 날 놀래키려고 안에 있는지. 생각해봤자 떠오르는 답은 없다.
왜 아직도 이 집에 남아 있는지. 왜 단둘이 침실에 있는지.
뭘 하는 건지.
있어서는 안 되는 자가 집에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단지 그가 오늘은 집에서 묵고 가나보다. 하고 다시 잠에 빠질 순 없었다. 난 외면하지 못했다.
그건 내가 선택한 게 아니었다.
나는 문을 조금 열고 말았다. 열어서는 안될 문. 한심한 호기심. 그렇게 모든 것이 변화했다.
나는 다리가 네 개 달린 괴물이 달빛 아래에서 번들거리는 몸을 빛내는 것을 보았다. 몸 두 개가 악어 따위의 입처럼 이어져 있었다.
나는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문도 닫지 않고 내 방으로 도망쳤다. 그날 난 이불을 적셨다. 꿈에 나온 괴물은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으로 이루어진 아가리를 내 앞에 들이밀었다. 나는 꿈 속에서 몇 번이고 구토했다. 그리고 일어났을 때는 안도하기보다 좌절했지. 이 집이 저주받아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모친이 설계한 집.
나중에 확인해본 결과. 침실에서 1층까지 내릴 수 있는 비밀 사다리를 발견했다.
처음부터 외도를 설계하고 만든 것이다.
그녀는 어디서부터 상정한 것일까? 언제부터 죄를 짓기 시작하고. 딸마저도 기만하며 내 손을 뻔뻔하게도 잡을 수 있었던 것일까?
질문은 나를 떠나지 않았고. 그대로 나를 득득 갉아먹었다. 악몽 또한 나를 괴롭혀왔다. 나는 모친과 아저씨가 잠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남몰래 피어오르는 공포를 삭여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생각했다. 어떻게 원만하게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을지를. 아무런 붕괴나 괴로움 없이 모든 게 제자리로 되돌아올지를 말이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적어도 원만한 해결은 불가능했다. 묵인할 것인가?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을 유보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후 더 큰 반향이 되돌아올 게 분명했다. 그럼 폭로할 것인가? 그럼 모친. 아저씨. 부친 모두가 상처를 입게 된다. 가족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겠지. 우정도. 날 포함한 모든 것들이. 난 그들의 배신감 찬 표정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럴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난 기차의 선로 변경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선로를 변경하거나 그대로 둘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몰랐다. 그 방향만 알 수 있었다. 부정적이리라는 방향만을. 어린아이를 위해 정교하게 지어진 지옥이 있다면 바로 그런 형태를 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의탁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가족에게서 어떤 정서적 만족감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식탁에서 모친과 부친을 보며 웃더라도 나 홀로 잠에 들 때면, 언제까지 그들과 부대끼며 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에 가족이란 내가 가위질 한 번만 하면 실이 끊어지고 후두둑 풀려버릴 매듭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서서히 차가움을 담은 채로 성장했다. 나는 내게 오는 그 어떤 사랑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모친과 아저씨의 사랑은 가면을 쓴 가짜로 느껴졌고, 부친은 사랑을 좀처럼 주지 않았지. 무엇도 내 가슴을 뛰게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늘상 다른 가치들을 보며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라며 다른 것들을 깔보고 냉소했다. 씨에 물을 준 격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나는 자연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 때의 내가 서서히 자란 결과에 불과하다.
나는 모든 것과 반발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나의 속사정을 털어놓을 수 없다는 확신이 설수록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떠들지라도 결정적인 무언가에서 내가 화합하지 못한다는 감각이 커져갔다. 나와 다른 이들은 종 자체가 다른 생물 같았다. 나는 모든 이들에게서 거리를 두었고 그럴수록 점점 나 자신의 사고에 매몰되었다.
모친은 나의 변화를 눈치챘지만 차마 왜 그러느냐고 묻지는 못했다. 자신의 과오를 알기 때문이겠지. 그녀는 나를 사랑했지만 자기 딸에게 외도를 털어놓을 만큼 사랑하지는 않았다. 아저씨 또한 마찬가지였다. 쉽게 보이는 사실을 어떻게든 외면하려 애쓰는 그들을 보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기차 선로 이야기를 했던가? 곧 나는 기차의 선로를 변경할 기회를 얻었다. 말 그대로.
어느 날 나는 부친의 권유를 받고 철도 공사 현장에 참관했다. 기차가 잘 가기 위해서는 어떤 설비를 갖춰야 하고 어떤 작업을 통해 철도가 완공되는지를. 아저씨와 다른 인부들의 멋진 솜씨를 통해 배워갔다. 아저씨는 특히 능력이 뛰어나서. 인부들 여러 명이 터널의 철도를 놓으려 끙끙대는 동안 반대편 터널의 철도를 스스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터널과 반대편 터널은 한 선로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 구조였지.
나는 이상하게도. 선로 변경 레버 앞에 있었지.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왜 부친이 나를 그 자리에 두었는지도, 왜 나를 보는 사람이 어디에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기억나는 것은 하나 뿐이다. 터널 밖에서 작업을 하던 인부 중 한 명이 터널의 안쪽에 대고 소리쳤다.
"빨리 터널에서 나와! 기차가 오고 있어!"
누가 일처리를 했는지 모르지만 기차가 출발했고. 터널을 덮치려 오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쁜 소식은 기차가 너무 빠르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인부가 소리를 친 것은 가까워지는 기차를 본 뒤에 소리친 것이었지. 다들 나태해진 건지 무전기를 챙기지 않았던 것 같다. 인부들이 기차를 피할 시간은 정말 짧았다.
터널 하나를 희생할 수밖에.
그런데 나는 선로 변경의 레버 앞에 있었다.
인부 여러 명. 적어도 다섯 명은 넘는 수. 그리고 아저씨.
유능한 작업반장. 부친과 모친의 친구. 나의 친구. 내가 부친으로 삼고 싶었던 인물. 내게 삶을 주었던 남자. 나를 어깨에 태우고 달렸던 남자.
괴물의 반쪽. 모친이 외도하는 자. 나를 기만했다. 배신자. 뻔뻔하게 나와 부친 앞에서 웃을 수 있었던 자. 거짓으로 범벅된 자.
나는 어느 쪽을 선택했던가. 그의 어떤 면을 보겠다고 선택했던가?
나는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그 상황에.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나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선로를 변경했다. 반대편 터널을 향해 기차가 빨려들어가자 내 머리가 흩날렸다. 나는 굳은 채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째서인지 나는 모친과 아저씨가 추악하게 움직이던 순간을 떠올렸다. 남성기가 질내로 들어가는 순간을.
그러니 그 일을 즐기던 아저씨에게 있어서는, 어울리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대편 터널 안에서 비명이 한 번 들리더니 끔찍한 충돌음과 함께 땅이 울렸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귀를 틀어막았다. 그럼 그 비명이 잊힐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인부들의 비명. 무언가가 끼이이익 하고 긁히는 소리와 뒤이은 충돌음조차도 아저씨의 비명을 내 고막 내부에서 밀어내진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여러 명을 살렸을 뿐이다. 사람을 죽인 게 아니다. 그 행위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있는 것은 가치판단 뿐이었다. 다수. 그리고 소수.
누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나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한 사람을 희생했겠지.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설령 터널 안에 있는 이가 아무리 소중한 이였다고 하더라도, 반대로 얼마나 증오스러운 이였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내 자리에 누굴 놓았더라도 그들은 당황했을 것이고, 머리를 빨리 굴리려 했을 것이고, 레버를 당긴 뒤…
죽을 만큼 괴로워했겠지.
나는 장례식에서 한 번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영정사진 안의 아저씨가 어떤 표정을 하는지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나는 낙엽처럼 흔들렸다. 해야 할 일을 했노라고 확신을 가졌음에도 수시로 공황이 찾아왔다. 내가 아저씨를 죽였다는 생각이 들 때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를 어깨에 태우고 나와 그렇게 잘 놀아줬던, 내게 사랑을 준 남자에게 기차로 보답했다. 사람을 한 명 죽였다.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었지.
아니. 두 명이라고 해야 할까?
모친은 아저씨가 죽고 한 달도 채 버티지 못했다. 완치된 줄만 알았던 폐렴이 재발하고 3주. 그녀는 목구멍 안에서 피를 울컥 토해냈다. 컵으로 받친다면 컵 안이 다 차오를 듯한 양이었다.
내가 가정부를 부르기 전. 나는 모친의 고통스러운 기침과 헐떡임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음성은 촘촘한 면보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끈적한 액체 같았다.
"레이코. 우리 딸… 우리 예쁜 아이… 너만 남겨두고 갈 순 없는데… 엄마가 미안해…"
그녀는 날 끌어안으며 울었다.
아저씨의 장례식에서도 모친은 울고 있었다.
부친 또한 울고 있었고 눈에 보일 만큼 자책하고 있었지만 그 둘의 슬픔은 결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눈치챘다.
그녀가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미 슬픔과 죄책감으로 닳아빠진 마음조차 산산히 부서뜨릴 수 있는 공포를 마주했다.
대전제: 그녀가 나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나를 낳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녀는 아저씨가 죽고 한 달도 채 버티지 못했다.
사랑이 그녀를 살아있게 했고 사랑이 나를 낳게 만들었다.
그녀는 아저씨를 사랑했다.
여기서 떠오르는 질문이란, 그녀가 나를 사랑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이다.
내가 그녀의 딸이기 때문에?
아니면, 아저씨의 딸이기 때문에?
나는 아저씨의 유품에서 DNA를 채취했다. 그러나 차마 유전자 감식 기관에 의뢰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얻을 이득이 없었다. 아무리 나라도 그런 결단을 내릴 용기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단은 하나 뿐이었다.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행복할 수 없다면 차라리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만큼은 하지 않는다.
사랑은 약한 자들을 위한 아편이다. 거기에 매달리기 위해 소중한 가족마저 내팽개치지. 사랑으로 이루어진 가족이라도 더 큰 사랑 앞에 부서진다면 그것만큼 파괴적인 힘은 없다.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경멸하고 그것을 경계한다.
조금 건강한 송장 같은 여자도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힘. 자기 피붙이의 볼에 정부와 입맞춤한 입술로 잘 자라 인사해도, 그 사실을 숨길 수 있는 힘. 그것에 의존해선 안 된다.
사랑에 의존하는 자들은 해체되어야 한다. 사로잡힌 남자는 그 아편에 취해 있었다. 나아가기 위해 그에겐 남의 힘이 필요했다. 그러니 누군가를 잃었을 때 동요하는 것이다. 상담사와 얽힌 이들이 그랬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내게 정을 준 어르신들에게마저도 사랑을 준 적은 없다. 그러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다가오는 모든 이들에게 가시를 세워 마땅하다. 고슴도치를 넘어서 호저가 되리라.
오직 공리를 위해서 살아야만 한다. 나는 행복할 수 없다. 만약 공리를 저버린다면, 그저 가진 것에 안주하고 보편적인 삶에 만족해버린다면 레버를 당긴 어린아이는 살인자가 되어 버린다. 내가 레버를 당긴 것은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리를 위한 선택이어야만 한다. 그러니 길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과 상실감을 잊기 위해 어린아이는 새로운 가치를 바라보아야 했다. 나는 그 어린아이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녀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나마저 그녀를 버린다면, 그녀는 누구에게도 구원받을 수 없다.
아저씨와 모친은 내 양어깨에 달라붙은 독수리다. 그들은 내가 공리를 저버리는 날을 기다리며 나를 옥죈다. 나를 위해 준비된 저주지. 마음껏 저주하게 두어라. 내가 이 길에서 내려오는 일은 없을 테니.
어린 마음에 외로움과 자책 속에 짓눌릴 때면 그들은 항상 날 찾아왔다. 항상 그 침실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외설적인 소리를 내고, 각각 남자와 여자의 머리가 달려 있는 윗턱과 아랫턱을 부딪치며 내게 다가왔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입술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전신은 땀과 기이한 분비물로 뒤덥혀 있었고 남자와 여자의 머리 말고 턱의 안쪽에서도 뒤틀린 음성이 들려왔다.
"레이코. 사랑해. 우리 딸. 우리 딸. 우리 딸."
나는 비명을 질렀다. 그것이 내게 달려와서 입을 크게 벌리고 내 상체를 집어삼키면, 내 눈에 보이는 마지막 광경은 두 짐승의 접합부다. 그만큼 토기를 부르는 모습은 또 없었다. 나는 땀으로 침대를 흠뻑 적신 채로 댐이 터져나오는 듯한 감정들. 아무리 억제하려 하여도 그 순간만큼은 겉잡을 수 없게 된 공포, 역겨움, 죄책감 등에 몸을 떨며 스스로를 끌어안았다. 한없이 타자로 느껴지는 부친에게 다가가 그 품 안에서 잠을 자더라도 모든 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결국 타인에 의해 괴물을 무찌르는 일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나는 모든 타인과 결부되어야 했기에 괴물을 죽이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물론.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나는 수없이 비명을 지르며 악몽 속을 헤멜 수밖에 없었다.
처음 그 꿈을 꾸었을 때는 괴로웠지만, 그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꿈은 서서히 변화했다. 내가 문을 열고 그것이 내게 다가오는 것은 똑같았지만, 다음 순간 내가 서 있는 장소는 철도 공사의 현장으로 변해 있었다. 그 뒤에는 기차가 경적 소리와 함께 달려와 모친과 아저씨가 합쳐진 무언가를 선두로 밀어내고 바퀴로 짓이겼다. 그럼 나를 딸이라 부르는 그 목소리가 가려졌고 더 이상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오직 해방감만을 느꼈다. 숨을 헐떡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죽음의 증거처럼 남은 핏자국을 몇 번이고 본 뒤에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 꿈은 내 심리적인 안정감을 기점으로 변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 공리를 위한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스스로 믿은 뒤부터. 공리의 길에 오른 뒤부터 말이다.
꿈에서 자신을 습격하는 괴물을 죽이기 위해 시작한 철학일지라도, 나는 이어나가야 했다. 그것이 유일한 가치였으니까. 다른 것은 마음에 둘 필요가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외로운 삶일지언정 후회는 없었다. 나는 적어도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추악한 이들과 다른 선로를 탔다고 말이다. 나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파멸시킨 그들과 달리 사랑하지 않는 채로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자 했다. 어린 나이의 죽음이지만 그럼에도 정부들의 삶보다는 나았다고 나는 믿는다. 의심하지도 않는다. 아무런 불평도 없이 망각에 들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단 하나. 내게는 의문이 남아있다.
승부사. 왜 네가 죽어야 했지?
왜 너 같은 걸물이 반푼이인 내게 휘감기게 된 거냐.
왜 더러운 외도의 부산물일지도 모르는 내가. 의욕만 앞섰고 아무런 능력도 없었던 내가 네 죽음의 원인이 된 것이지? 왜 나를 살렸나?
단 한 번이라도 나를 포기할 수 없었던 건가. 대체 왜? 나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었다. 적어도 네 발목과 목숨을 바쳐서 구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단 말이다.
내가 바다에 빠졌을 때 내가 죽게 두어야 했다. 이게 무슨 꼴인가? 내가 죽는 결과는 똑같은데 첩자의 자리에 네가 들어갔다. 너도 날 버려야 함을 알고 있었겠지. 첩자는 네가 할 수 없는 일을 시켰으니 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단 말이다.
너의 철학은 무분별하다. 가치의 경계가 없다. 선을 긋지 않는다. 모든 이들을 돕지. 곤란과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철학이었다. 너의 울타리는 너무나도 낮았단 말이다. 아는가?
그런데도 너는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았다. 세상 앞에서 한 번도 침묵하지 않았다. 똑바로 두 눈을 뜬채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내리지 않았다.
몸이 스러지는 순간까지도 너는 당당했다.
솔직히 말하지. 승부사. 나는 너를 질투했다. 네 사지에 담긴 힘을, 강력한 완력과 의지, 하늘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 몸뚱이와 반사신경. 그리고 자신의 철학을 관철할 수 있는 능력. 차갑지 않은 심성까지. 너는 거친 모습을 보였으나 그 내면은 누구보다도 부드러웠다. 나는 그것을 안다.
될 수 있다면 너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네 칸트주의를, 기사주의를 경멸했던 것은 너를 향한 열등감의 투사다. 어쩔도리 없이 우월한 것을 상대로 우자는 부정밖에 할 수 없기 마련이다.
뒤늦게 생각할 수밖에 없군. 정말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던 건가?
정말 내가 선택할 도리는 어디에도 없었다고? 내가 맹목적인 공리의 추구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다른 이와 협력하고자 했다면, 보다 더 큰 선을 위해 장기적인 선택을 했다면, 네가 수없이 건넨 손을 한 번이라도 맞잡았다면 어땠을까?
손과 발이 잘리고 완전히 패배했을 때. 나는 모든 것에 회의감이 들었다. 감염되어 서서히 죽어가는 송장. 살아있는 1분 1초가 공리를 좀먹는 존재가 된 뒤에 자유로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사색 뿐이었다. 과연 나는 무엇을 했는가. 내 공리의 길이란 처음부터 틀려 있었나. 의문이 수도 없이 떠올랐고 의문은 곧 의심이 되었다. 나는 공리를 자기합리화의 수단으로 삼았던가? 그 가능성에서 멀어지기 위해 내가 누구보다 노력했더라도 그것 또한 합리화를 합리화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회피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의심이 찾아올 때를 놓치지 않고 그들이 내게 찾아왔다.
나는 침실 문 앞에 서 있었다.
"또 여긴가?"
나는 문을 열었다. 문을 열지 않고 도망친다면 저것들이 열고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차라리 그들과 당당히 마주하고 싶었다.
"레이코."
악어의 윗턱을 이루는 아저씨가 말했다.
"우리 딸."
악어의 아랫턱을 이루는 모친이 말했다. 그들을 만났을 때 하고 싶었던 말은 수도 없었기에 나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너흰 내 부모가 아니다. 나를 약하게 만드는 장애물에 불과하다. 내 약해빠진 죄책감. 그럴 가치조차 없는 너희들을 죽였다는 생각에서 날 자유롭게 못하게 만드는 기억 속 망령이다. 꺼져라. 꺼져!"
나는 꿈속에서 언성을 높였다. 괴물은 대꾸하지 않고 턱을 헤 벌린 채로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억누를 수 없는 원성이 입 안에서 터져나왔다.
"너희들을 증오한다. 더러운 욕망에 굴복한 돼지같은 것들아. 그렇게 여자의 쾌락이 좋았나? 그 약해빠진 몸뚱이로 정인 몰래 만든 아이를 품고, 결국 세상에 나오게 만들 정도로?"
"우리 딸."
"날 딸이라고 부르지 마라. 내가 내 삶에서 부정하고 싶은 게 있다면 바로 너희들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뿐이다. 그것만큼은 내가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나는 이를 악물었다. 불안감이 서서히 내 턱을 떨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차가 오지 않고 있었다.
이 시점에 철도 공사 현장에서 달려나와 괴물을 쳐죽여야 하는 기차가. 오지 않았다. 전조조차 없었다. 나는 곧이어 납득했다. 내가 기차를 의심하기 시작했기에 기차가 오지 않았음을 말이다.
그래. 공리를 해치고 더 이상 그 사자로 움직일 수 없는 나이니. 공리에게 버려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철학과 걸어온 길 전부가 무너졌기에 기차는 꿈에 간섭하지 못하고 있었다. 감염으로 인해 신체의 면역 체계가 엉망이 되었듯이, 내 정신적인 면역 체계 또한 무너지고 있었다.
"오지 마라."
"우리 딸. 많이 컸어. 사랑한다."
"너희들의 사랑을 거부한다."
"안아줄게."
악어가 남자와 여자의 음성으로 말하며 입을 벌렸다.
"오지 마…"
그들에게 안긴다고 해서 온기는 없다. 시체의 몸은 더없이 차가웠다. 포옹은 늘 혐오스럽고 텅 비어있었다.
그것이 내게 다가왔다. 위아래로 얽힌 다리가 발발거리며 바닥을 밀어냈다. 그것이 입을 벌릴 때면 원래 그것의 크기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기차를 부르지 못하고 이대로 끝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 나는 그 더러운 접합부를 피하지 않을 요량으로 눈을 부릅떴다. 나는 적어도 내 행동의 결과에서 영원히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해변에서처럼 손발이 잘리고 반송장 꼴이 되더라도, 그것을 마주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떠올랐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모든 이들에게 좋은 일이었을 텐데."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내가 본 것은 괴물의 입 안에 있는 그들의 음부가 아니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
"뿌워어어!"
모양새 빠지는 외침과 함께. 네가 나타났다.
네놈이 꿈에서마저 나를 구했단 말이다. 승부사.
네 주먹 한 번에 뼈마디마디가 부러지는 둣한 빠드득 소리가 들리더니, 괴물은 저택의 벽에 부딪치고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날 부르는 목소리도 내지 못했지. 꼭 기차에게 치인 것만 같았다.
"모리. 괜찮아?"
네놈은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너를 올려다보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네가 어떻게 이곳에 있지?"
"네가 곤경에 처했잖아. 난 그럴 때 너를 내버려두지 않아."
어안이 벙벙한 채 잠에서 깨어난 뒤, 그 꿈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내 꿈에까지 나타나는 거냐. 승부사. 그렇게 내 정신을 혼잡하게 만들어야 속이 풀리는가?
내가 공리를 손에서 놓치자 너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이용해 내 트라우마를 억눌렀다니. 내가 공리를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말과 똑같지 않은가. 결국 나는 괴물을 죽일 무언가를 원해왔고. 하필 그게 네가 된 것이다. 누구보다 남을 밀어내고 싶었던 나. 고립되고자 했던 내 심층심리는 다른 것을 원했던가.
그림자. 내가 억눌러왔던 모친의 유전자. 남에게 정을 줄 수 있는 그 능력이 내 핏줄 사이를 돌며 결국 내 이성을 무너뜨린 꼴이었다. 나는 치욕감에 침낭 속에서 부르르 떨었다. 최악 밑의 최악을 보자 스스로가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너는 네 그림자에 먹힌 것 같은데. 네가 네 그림자 그 자체로 변한 것 같아."
너는 그렇게 말했던가. 나는 너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고 대답했지. 우리 모두 틀렸다. 나는 그림자와 통합되지 못했다. 도무지 끌어안고 싶지 않은 것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우정. 나는 그것을 수치스럽다 여겨야 마땅했다. 육욕에 지배되어 나락까지 떨어진 두 사람과 나 사이의 차이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꼴이었으니.
내 그림자가 원하는 것을 본 나는, 도무지 그것의 결론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로 목소리를 죽인 채 내게로 유전된 감정의 체계를 저주했다. 이타적 유전자. 남과 함께하고자 하는 수렵 및 단체생활의 본능이 나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순순히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나를 관철해야만 했기에…
이럴 때 사람들은 자신과 대화를 해보곤 하던가. 내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 자신을 상대로도 타협은 불가능했다. 나는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것으로 그림자의 염원을 제압했다.
"공리를 저버리는 것은 나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늘 똑같지. 나는 이런 삶을 선택한 적이 없다. 처음부터 이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 삶을 완성하기 위해선 네가 내미는 손을 뿌리칠 수밖에 없다고. 따라서 그렇게 했지…
"그게 왜 다행이지? 난… 도무지 너를 이해할 수가 없다. 승부사… 이게 무슨 꼴이냐. 제기랄. 대체 무슨… 왜 이 결과에 만족하냐는 말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더없이 한심하게, 공리를 최대한 해치는 형태로 끝나버렸다. 편협한 독선.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패배자였다.
학을 따라가려다 떨어져버린 뱁새 꼴이지. 그런 내가 하기엔 지나치게 한심한 생각이지만, 그럼에도 이 생각을 버리기가 힘들군.
그때 내가 공리를 넘어선 철학을 새로 만들었다면 무언가가 변했을까. 단지 나 자신에게 매달리지 않았다면… 적어도 최악의 결말만큼은 피할 수 있었을까?
"곧 죽을 사람처럼 말하지 마. 모리. 그러지 말라고. 나도 인정하기 싫은데 너한테 정들었단 말이야."
그랬나.
"일부러 거리 벌리려 하지 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네가 내 친구 같다고!"
"남들 앞에서 물 공포증 얘기 꺼낸 거 처음이었다고! 내 생각엔 너도 납치된 얘기 같은 건 이번이 처음 말해보는 걸 텐데. 내가 이런 생각 하는 게 진짜 이상한 일이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처음 이야기한 것이었으니… 처음으로 이야기할 그 다음도 입에 담을 수 있었을까.
"같이 밥 먹고. 옆에서 자고. 내가 잘 수 있도록 팔에 밧줄까지 번거롭게 매번 묶어줬는데 너한테 정이 안 드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니냐고! 너랑 친구 먹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단 말이야!"
이야기했어야 했나. 너에게 공포에 대해 털어놓으라 종용했음에도 정작 나는 내 심연을 조금밖에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너와 한 박자씩 발에 맞지 않았던 것일지도.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했던 거지?
나는 알 수 없다. 앞이 보이지 않아… 근시안적이고 무턱대고 나와 맞지 않는 것을 거부하는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늘 도망치면서 살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죽기 직전의 순간에 와서야 그것을 깨닫는다. 나는 사람을 넘어 철인이 되고 싶었지만, 온전히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나는 공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세 명을 죽였다… 그 자리에 내 시체가 오른다고 해도 달라지는 일은 없지만, 적어도 너만큼은 공리의 제단에 오르지 않았으면 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너는 옳은 답이 아닐지라도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혹시 지혜가 남는다면… 제발 알려다오. 승부사.
나이토 유즈루.
"나…이토…"
나를 가로막은 내 천적, 내 벗이여…
'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 > 챕터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2챕터 후기 + 돌아온 인기투표 (4) | 2022.02.04 |
---|---|
더 단크 타워 챕터 2 - 完 (6) | 2022.02.03 |
더 단크 타워 챕터 2 - 30+6 (6) | 2022.01.30 |
더 단크 타워 챕터 2 - 30+5 (4) | 2022.01.27 |
더 단크 타워 챕터 2 - 30+4 (4) | 2022.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