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나즈키 시노부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칸나즈키 시노부: 아니 왜 자꾸 깨우고 그래. 나도 잠 좀 자자니까. 이름 없는 남자 전화도 끊고 자려는데 대체 왜 그래…
칸나즈키 시노부: 뭐? 카이다가 나가? 시련에서 나갔다고?
칸나즈키 시노부: 이야… 그럼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누가 시련으로 가는 거고…?
칸나즈키 시노부: 몰라. 난 잘래. 여기서 알 수 있는 것도 없단 말이야. 너도 잠이나 자…
칸나즈키 시노부: 매달려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니까!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새벽. 다른 이들은 이미 잠에 들었으나 나는 침대에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수신기에선 별다른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괴로움에 몸을 뒤척이는 듯한 모리의 신음뿐이었다.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모리가 그토록 약해졌다는, 사지를 향해 서서히 가고 있다는 느낌에 나는 1초. 또 1초를 인식하고 세는 동안 내 목숨의 심지 또한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결국 생각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 바로 모리가 내 목숨의 심지와 같다는 것이었다. 기름을 먹여 조금씩 타들어가는 심지. 불꽃이 끝에 다다르면 심지 끝에 있는 화약이 폭발할 것이고… 내 모든 것을 불사르게 되는 것이었다.
나나시: 절대로 죽을 순 없어…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단지 죽을 이유가 없어서 사는 삶도 좋지만 왜 내가 살아남아야만 하지? 탑에 처음 온 당시의 나라면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 그런 걸 물어보냐며 얼굴을 긁적이고 말았겠지.
그러나 이젠 살 이유가 있었다. 나는 알고 싶었다.
내가 왜 이 살인 게임에 참가하게 되었는지를, 어째서 내 기억을 모두 지우고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야만 했는지를… 납득하지 못한다면 편히 죽을 수조차 없었다.
나나시: 모노로그의 정체도 마찬가지야. 카텟 기관도. 시라유키도. 23T도…
나나시: …캐롤 씨의 진짜 정체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게 산더미야.
나는 아무런 대책 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나시: 항생제를 구할 방법을 찾아야 해.
그러나 어떻게? 크레딧을 더 얻을 방법이 없었다.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해졌다. 카나리와 후루미나미는 도청기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읽고 있다. 두 사람을 덮치려 해 봤자 요리조리 피해 다니거나 우리에게 역습을 가할 게 뻔했다.
그렇다면 크레딧을 얻을 수 있는 장소로 갈 수밖에 없었다.
나나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전부 해 보는 수밖에.
두려움과 막막함 속에서 나는 천천히 빛을 향해 기어올랐다.
먼저 전용실에 들린 나는 내 전용실에 널려 있는 기계 부품 여러 개를 모아 도구를 하나 만들었다. 재료는 라이터 따위의 도구에 들어가는 압전기. 전선. 그리고 버튼이었다.
전선과 압전기는 절연 테이프로 감는다. 압전기에 달려 있는 트리거는 제거하고 대신 버튼을 달아서 용이함을 높인다. 디자인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원하는 기능만을 추구하자. 건전지에 긴 팔이 자란 것처럼 볼품없게 생긴, 버튼을 누를 경우 전선의 끄트머리에 티딕 하고 전기가 튀는 도구가 만들어졌다.
그걸 어디에 쓰는가?
카지노. 사람의 욕망을 빨아들이는 공간. 나는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을 품은 채 카지노에 발을 들였다.
나나시: 이것마저 안 통한다면 정말 끝이야 제발……
나는 중얼거렸다. 자기최면이었다.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이게 실패한다면 더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기능을 개선해야 했다. 넌 해내야 해. 나나시. 그리고 틱틱아… 해내야 해…!
나나시: 제발… 돼라…!
나는 틱틱이를 슬롯머신의 크레딧 투입구 안에 집어넣었다.
집어넣기보다는 버튼을 누른 채로, 내 의도대로 작동될 때까지 이리저리 움직인 편에 가까웠다. 나는 슬롯머신의 화면을 들여다보며 어떠한 조짐을 기다렸다. 당황하지 않되 천천히.
압전기. 전선. 그리고 내가 임의로 달아 놓은 버튼. 그 세 개를 적절히 합쳐서 크레딧이 들어가는 투입구 안에 넣으면… 크레딧이 들어가는 순간 돌아가는 전기 신호를 모사한다.
즉…
투여 크레딧: 10,000 크레딧
나나시: 크레딧 한 푼 안 쓰고 무한한 기회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거지.
나는 카지노의 바닥이나 천장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다가 미심쩍게 말했다.
나나시: 이게 문제가 되면 지금 말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 모노로그.
모노로그: 재미있는 편법이군.
내가 모노로그를 부르자 모노로그는 어느새 나의 곁에 있었다. 늘 보고 있는 거야? 으…
나나시: 문제가 되진 않는 거지?
모노로그: 문제가 되진 않는다. 그러나 허상의 돈은 몰라도 운명까지 네 손안에 들어있진 않아.
나는 모노로그에게서 눈길을 돌리고 슬롯머신의 레버를 세 번 당겼다.
사과. 포도. 쿠키.
완전히 실패였다. 크레딧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모노로그: 카를 조종할 수 있을 것 같나?
나는 애써 웃어 보이며 전기 신호 발생기를 다시 한번 크레딧 투입구 안에 집어넣었다.
나나시: 운이 없어도 시도를 여러 번 할 수 있으면 돼. 몇 번만 성공하면 충분한 크레딧이 쌓일 거야. 이거면 항생제를 사서 모리에게로…
모노로그: 너는 거의 2000만 크레딧을 가지고 있지. 그리고 지금 항생제의 가격은 2900만 크레딧이다. 900만 크레딧만 벌면 되겠지만…
모노로그: 누가 슬롯머신에 900만 크레딧을 썼을 거라 생각하나?
나는 슬롯머신의 레버를 당기려다가 그만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슬롯머신 안의 크레딧은 누군가가 소비해야만 쌓인다. 가장 돈이 많이 들어있는 슬롯머신이라 할지라도 10만 크레딧조차 들어있지 않을 거야. 후루미나미는 자판기를 많이 돌렸지만 그 돈은 자판기에 쌓여 있어…'
나는 카지노의 슬롯머신을 조작해서 크레딧을 벌겠다는 전제 자체가 허상임을 깨달았다. 카지노는 크레딧을 벌 수 있는 기회의 땅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반대였다. 누구나 기회를 노리지만 충분한 기회는 없는. 희망고문의 땅이었다.
크레딧을 더 얻을 방법이 없어.
그냥 눈을 뜨고 죽어야 한단 말인가?
모리가 마지막 숨을 뱉을 때까지 그냥 관망만 하고 있어야 한다고?
나나시: 이런 개 같은…
나는 내 입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비속어에 흠칫 놀라 내 입술을 막았다.
모노로그: 그로 돌아가는 건가?
나나시: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나나시라고.
모노로그: 네가 그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의 외로움을 알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삶. 누구에게도 자기 자신을 주지 않는 삶 말이야. 이름을 주고받는 것조차 원하지 않기에 누구와도 맞닿지 않는 왜성의 삶.
모노로그: 네가 언젠가 그렇게 될까 봐 두렵지. 그러나 너는 결국 서서히 그로 변해갈 것이다. 그것이 너의 카다. 막을 방법은 없어. 유보만 가능할 뿐…
나나시: 좀 닥쳐!
느닷없이 짜증이 솟구친 난 모노로그에게 소리쳤다.
나나시: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도 지금 내가 사라지지는 않아. 그냥 하루아침에 내가 얼굴을 알던 사람들을 멀리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재수 없는 소리 그만 하고 저리 가!
모노로그: 그러나 언젠가 너는 네 곁의 모든 사람을 잃겠지.
나나시: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너 다른 사람한테도 그런 식으로 매도하고 다녀? 모노로그 너머의 당신한테 하는 말이야. 대체 당신 정체가 뭐야? 왜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고!
나는 화가 난 나머지 모노로그의 면전에 대고 삿대질을 했다. 나답지 않았다. 소리를 치고 있는 건 나인데도 진짜 나 같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어서 조금 소름이 끼쳤다.
나나시: 내가 그렇게 미워? 내가 뭘 했다고…
모노로그: 당연히 증오스럽다. 하나 알려줄까? 너 뿐만이 아니다. 나는 너를 포함한 모든 이들을 증오한다.
나나시: 뭐?
모노로그: 하기와라 우시오. 아직도 아버지에게 맞는 악몽을 꾸나? 웃음을 주지 않고서는 스스로의 존재 이유조차 알 수 없고?
모노로그: 야가미 토가. 아무리 몸을 키워봤자 결국 너는 목표하는 것에 닿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애쓴다고 해도 불가능해.
모노로그: 칸나즈키 시노부. 네 어미는 널 사랑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지. 자신이 죽고 신이 네게 옮겨가리란 걸 알았다면 널 낳지도 말았어야 했어.
모노로그: 카나리 케이토. 네가 믿을 건 돈 밖에 없지. 그러나 언젠간 돈도 너를 떠날 거고 너는 혼자 남겨질 것이다. 그때 처럼.
모노로그: 토키와 아유키. 아직도 바람이 안 빠졌나? 네가 억지로 부풀어올린 책임감과 부담감 말이야. 곧 뻥 터져버릴 텐데.
모노로그: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는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
모노로그: 나이토 유즈루. 아무리 겉을 꾸민다고 해도 약해빠진 내면은 숨길 수 없는 법이지. 흉터 남은 불쌍한 영혼 같으니.
모노로그: 네겐 말을 하고 싶지도 않군.
모노로그: 모리 레이코. 너는 여전히 약해빠졌다. 그리고 절대 진정한 의미로 강해질 날은 오지 않아. 그게 네 한계다.
모노로그: 미도리카와 아쿠토. 피로 피를 씻는다고 해서 네가 고결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모노로그: 이바라 쿠리스. 가족들이 지금 너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감이 오긴 하나? 그렇게 얼빠지게 사는 널 보고?
모노로그: 캐롤 브라이트. 너는 괴물이다. 누구도 너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 그런 면에서 터치는 네게 축복이지. 남을 조종해서 곁에 둘 수 있으니.
나는 멍하니 모노로그가 남들에게 퍼부은 매도를 들었다. 사실 들었다고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대체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우리가 이토록 증오스럽다고 말하는 거지?
나나시: 대체 뭐냐고…
모노로그: 그리고 나나시. 네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 네게 행복한 미래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에라도 포기하는 걸 추천하지. 그럼 마음이라도 편할 테니까.
나는 모노로그를 한 번 흘겨보고는 틱틱이를 슬롯머신의 투입구 안에 넣고 버튼을 눌렀다.
나나시: 싫어. 조금의 크레딧이라도 더 얻겠어.
모노로그: 그게 의미 없는 일일지라도?
나나시: 의미 없는 일 따위는 없어. 내가 의미를 찾지 않으면 누가 찾아…
나나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볼 뿐이야.
그리고 레버를 세 번 당겼다.
사과. 사과. 쿠키였다.
마유즈미가 총을 소지해 카이다를 억제하는 방법의 가장 큰 맹점은, 마유즈미에게 자켓 안주머니처럼 총을 휴대하기 용이한 공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내 가방에서 붕대를 꺼냈다. 만약의 사태에 구급상자에서 꺼내 놓았던 물건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이걸 끈으로 삼아서 네 다리에 감는 거야. 치마를 입고 있으니 겉으로 윤곽이 드러나지도 않고 누군가가 들춰보는 일도 없겠지. 엄폐로는 확실해.
나는 살짝 얼굴을 붉히는 마유즈미를 보고 덧붙였다.
히무로 시라베: …다른 생각이 있으면 지금 제안하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나 붕대 묶을 줄 아니까 걱정 말라는 얘기 하려고 했어. 치마 들추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히무로 시라베: 뒤돌아 있을게.
나는 마유즈미에게 붕대를 건네고 해변의 파도를 바라보았다.
밀물과 썰물. 프로그램 세계 안임은 알았지만 두 눈으로 보니 늘 새롭게 놀라운 작용이었다. 행성의 표면을 염분과 온갖 미생물이 포함된 물을 덮고 있으며, 달의 인력이 그 물을 커다란 그릇을 흔들듯이 출렁이게 만들었다.
파도를 바다가 땅에 건네는 입맞춤에 비유한 글을 읽어본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어째서 긴밀한 신체적 접촉이 무생물에게도 적용되는 것인지 의아함을 느꼈지만. 파도를 자세히 보자 그 비유의 의미를 이해할 것도 같았다. 절대 보답받지 못하는 입맞춤.
이제 돌아봐도 좋다는 마유즈미의 말이 들린 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으… 묘하게 차가운 느낌이 들어서 기분 나빠…
히무로 시라베: 금속이 몸에 닿는 건 별로 유쾌하지 않겠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거 진짜 안 들킬까? 들키면 그냥 사실대로 말해버리면 되려나…
히무로 시라베: 그렇겠지. 어차피 네가 누군가를 해치려고 숨긴 게 아니라는 걸 모두 이해할 테니까. 하지만…
히무로 시라베: 너에게 모든 것을 맡기게 된 점은 정말 미안해.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럼 당연히 미안해야지! 나한테 총만 달랑 주고 가겠다는데…
히무로 시라베: …….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지만 모리가 죽게 생겼으니까 잡을 수도 없어서 그냥 믿어야 하는데.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단 얘기나 하고. 사람 걱정되게…
히무로 시라베: 미안해.
그것 말곤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마유즈미는 앙 다문 입에 힘을 빼고 누그러뜨리더니 날 걱정하는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적어도 돌아오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마유즈미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보였다. 정작 걱정해야 하는 건 자기 자신인데 내가 돌아오는지의 여부를 걱정하다니? 자신보다 남을 우선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설령 아주 짧은 순간일지라도.
만약 마유즈미가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내가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히무로 시라베: 지금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어. 이뤄질지 확신할 수 없는 약속이니 하지 않을게.
마유즈미는 팔짱을 끼고 눈썹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럼 돌아오려고 애써야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씁! 못 써! 사람 얘기하는데 입으로 대답해야지! 나중에 안 돌아오면 나 진짜 너 미워할 거야. 눈에서 피가 나오게 미워할 거야.
히무로 시라베: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럼 네 말 믿을게.
마유즈미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내 팔에 주먹을 날렸다.
히무로 시라베: 그렇게 해서 네 화가 풀렸다면 이제 돌아가자.
마유즈미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두 손으로 내게 주먹을 퍽퍽 꽂았다.
히무로 시라베: 이제 됐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대충! 그럼 가자.
히무로 시라베: 아직 화가 덜 풀린 것 같은데.
마유즈미 나데시코: 풀렸대두!
안 풀린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달리 해줄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마유즈미가 다시 나를 만나서 남을 화를 풀겠다는 일념으로, 카이다에게 잘 맞서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는 콧김을 내뿜으며 본 대로 돌아가는 마유즈미의 뒤를 따랐다. 보폭의 차이가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그녀의 바로 옆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돌발 상황에 대해서 말인데.
마유즈미 나데시코: 알겠어! 알겠다구. 만약 네가 나한테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물으면 적당히 꾸며낼게. 알아서 말 맞춰 줘야 해?
히무로 시라베: 이해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니다. 그냥 지금 꾸며내자! 음… 그러니까…
마유즈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와중에 하기와라가 모래 위를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히무로 시라베: 시간이 없는 것 같아. 모든 걸 너에게 맡길게.
마유즈미 나데시코: 에엑! 하기와라!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나다!
하기와라는 나와 마유즈미의 얼굴에서 다른 점을 찾으려는 듯이 두 개를 번갈아 두리번거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둘이 뭔 얘기 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 굳이 들어야겠어?
마유즈미가 멋쩍게 웃으며 말하자 하기와라는 즉각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으악! 럽코 냄새잖아! 아니! 어으! 절대 말하지 마! 히무로맨 저거 저거 표정 봐봐! 저 표정으로 꿀 떨어지는 말 했다고 생각하면 토가 나와!
그의 말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왜인지 좋지는 않은 표현일 것임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히무로 시라베: 그것 말고 다른 용건은 없어?
하기와라 우시오: 없어! 없어. 니들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그렇다면 잘 되었다. 모든 사전작업이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로써 마유즈미가 총을 가진 사실은 나를 제외한 누구도 모르게 되었다.
하기와라는 나와 마유즈미에게서 시선을 피하며 본대 쪽으로 먼저 돌아갔다. 그의 뒤를 따라 마유즈미와 내가 도착하자 나이토가 하기와라를 한심하다는 듯이 보며 하는 말이 들렸다.
나이토 유즈루: 가지 말라니까 그걸 가냐.
하기와라 우시오: 궁금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이바라 말로는 마유즈미가 탑의 마지막 양심이라잖아. 그래서 가 봤던 건데 이런 개 같은! 니글니글 거리는 분위기 진짜 최악이야!
모리가 천천히 박수를 쳤다. 비꼰다는 의미보다는 힘이 없어서 느리게 박수를 치는 것 같았다.
야가미 토가: 히무로 씨. 남길 말은 이제 없으신 건가요? 전 없습니다.
히무로 시라베: 이제 없어. 지체되었으니 지금이라도 출발할게. 야가미. 가자.
야가미는 검은 정장으로 덮인 두꺼운 어깨를 두둑 돌리더니 다른 이들에게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했다.
야가미 토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여러분. 항생제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죠.
나이토 유즈루: 둘 다 카이다 조심해라. 그리고 항생제 좀 부탁해…
모리 레이코: 공리의 증진을 우선해라.
하기와라 우시오: 아! 또 지랄 나셨네. 그냥 모리는 죽게 둬. 농담이고 빨리 가셔. 한시가 급하다며?
히무로 시라베: 출발한다.
야가미 토가: 그러죠.
나와 야가미는 빠른 걸음으로 세 번째 시련을 향해 나아갔다. 몇 초가 지났을 때 등 뒤에서 마유즈미가 외쳤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오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마유즈미가 손나팔을 입에 가져다 댄 채. 옅게 웃으면서 소리쳤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중에 보자!
히무로 시라베: 알겠어.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더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야가미 토가: 마유즈미 씨가 당신을 걱정하는 모양이군요. 정작 걱정해야 하는 건 본인 같은데 말입니다.
히무로 시라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야가미 토가: 혹시 당신도 그녀를 걱정하시나요?
히무로 시라베: 나중에 약점으로 쓰려고 묻는 거면 대답하지 않겠어.
야가미 토가: 그냥 순수하게 물어보는 겁니다. 그렇게 날 세워서 반응하지 않아도 괜찮잖아요.
히무로 시라베: 나는 지능 높은 살인자가 순수하게 개인적인 애착에 대해서 물어보는 일 따위는 없다고 생각해.
야가미는 내 쪽에서 고개를 돌려 세 번째 시련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야가미 토가: 제가 살인자라는 생각에 갇혀 계신다면 대국적인 흐름을 보지 못하실 겁니다.
히무로 시라베: 그럼 바라볼게. 지금부터 내가 잠깐 쉬자고 할 때까지. 우린 빠른 걸음으로 걷는 거야.
야가미 토가: 좋습니다. 빠른 걸음 말이죠?
야가미는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전혀 좋지 않게 되었다.
조명이 없는 밤바다는 놀라울 정도로 어두웠다. 나와 야가미는 하늘에 떠 있는 달. 그저 환상일 뿐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실적인 달빛에 의지해 해변을 걸었다.
밤이 되자 가재 괴물의 울음소리는 조금 누그러들었지만 그것들의 공격성은 여전했다. 파도를 타고 느닷없이 나타나는 가재 괴물은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기에 우리는 파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통해 걸었다.
숨을 헐떡이던 야가미도 어느 순간부터는 숨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리에 피로가 쌓여 언젠가 툭 하고 끊어질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나와 야가미는 일종의 각성 상태에 빠진 사람처럼 걸었다. 비틀거리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발을 땅에 디딘 채로 다른 발을 옮겨 간다기보단 몸이 앞으로 쏠려 넘어지는 동안 다리를 땅에 짚는 것 같았다.
나와 야가미는 가속도라는 신의 마리오네트에 묶여 달그락거리는 인형이 되었다.
시야는 흐릿할지언정 정신과 감각은 극도로 곤두세웠다. 내 얼굴에서 흐르는 땀 한 방울 한 방울을 느끼고 그 움직임을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주변에서 카이다가 온다면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피로 탓에 긴장을 풀더라도 가재 괴물의 작은 목소리만 들으면 즉각적으로 정신이 들었다. 그런 행군이 몇 시간 동안 계속 이어졌다.
그러던 도중 문득 뒤에서 털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야가미 토가: 허억… 허억…
검은 그림자가 모래사장에 무릎을 꿇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히무로 시라베: 잠깐 쉬자.
나 또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야가미는 무릎을 꿇은 채로 몸을 뒤로 젖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모래가 주변으로 튀어올랐다.
야가미 토가: ……저희 대체 몇 시간 동안 걸은 거죠…?
히무로 시라베: 대략 13시간 정도…
야가미 토가: 저도 이렇게 지치는데… 허억… 어떻게 그렇게 움직이시는 겁니까…?
히무로 시라베: 열심히 했어. 넌 신진대사량이 높아서… 이렇게 오래 걷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몸이야. 힘든 것도 무리는 아니지.
히무로 시라베: 말을 하지 그랬어…? 힘드니 쉬어 가자고.
야가미 토가: 제가 말을 해도 되는… 처지였습니까?
히무로 시라베: 말없이 따라오라고 한 기억은 없어.
야가미 토가: 말장난을… 허억… 헉…
야가미는 아무 말 없이 계속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상태로 말미암아 정말 쓰러지기 직전까지 몰린 것처럼 보였다. 나 또한 지친 건 마찬가지였기에, 잠시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히무로 시라베: 가방에 땔감과 부싯깃을 조금 넣어 왔으니… 1분만 기다려.
나는 주위를 경계하며 숲에서 적당하게 큰 돌을 주웠다. 그리고 해변에서 가재 괴물 한 마리를 향해 내던졌다. 제대로 노리자 가재 괴물의 머리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찌그러졌다.
체액이 바닷물에 퍼지고 다른 놈이 꼬일 때까지 기다린 뒤. 나는 가재 괴물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돌을 다시 들어 지근거리까지 온 가재 괴물에게 내던졌다.
나는 사후 경직 탓에 부들거리는 집게발들을 잡고 야가미에게로 돌아갔다. 두 마리의 가재 괴물이면 두 명이서 충분히 먹고도 남는 양이었다. 그는 내가 떠났을 때와 똑같이 모래사장에 무릎을 꿇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나는 부싯깃에 총을 쏴 불을 붙이고 땔감을 넣었다. 작은 모닥불이 태어나자 가재를 위에 올렸다. 기름진 냄새와 함께 가재 괴물은 붉은색으로 변해갔다.
다 익었다는 판단이 서자 야가미와 나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가재 괴물의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야가미 토가: …바로 묻지 못했는데. 짧게 휴식을 취한다뇨? 야영하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히무로 시라베: 지금 많이 먹어 둬. 이걸 양분으로 써서 계속 걸어갈 테니까.
야가미는 눈을 감고 고통스럽게 얼굴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야가미 토가: 정말 고행이군요.
히무로 시라베: 모리가 죽기 전에 세 번째 시련으로 가야 하잖아. 어느 정도 무리할 수밖에 없어. 미도리카와를 되살리고 싶으면 이것보다 더 힘내야 할지도 몰라.
야가미 토가: …그럼 힘낼 수밖에요.
해변은 사람을 상하게 만들었다. 사람의 살을 뜯어먹는 맹수를 지근거리에 둔 채 잠에 드는 매일 밤. 스트레스와 중압감 그리고 긴장 속에서 달아날 방법조차 없었다. 당연히 초췌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야가미는 13시간을 걸었다.
말쑥하고 점잖은 분위기의 야가미는 얼굴에 모래와 먼지가 묻어 더러워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에는 다크서클이 내려왔고 당장 쓰러질 것처럼 눈빛이 퀭했다. 머리카락 또한 윤기를 잃었으며 뒤로 넘긴 그의 머리카락들은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해 여기저기로 부스스 튀어나왔다.
나 또한 비슷한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가재 괴물의 고기를 뜯었다. 손이 델 것처럼 뜨거운 고기를 밤공기가 식혀 주었다. 나는 붉게 물든 껍질을 입으로 깨고 그 안의 속살을 질겅질겅 씹었다. 맛은 좋다 뿐만 아니라 훌륭했다. 야가미 또한 고기의 맛에 질리는 기색 없이 게걸스럽게 가재 괴물을 삼켰다.
아무런 말이 없는 식사 시간이었다. 나는 말을 할 이유가 없었고 야가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배를 충분히 채운 뒤. 야가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가 물을 마시고 마른 입술을 축인 직후였다.
야가미 토가: 이 살인 게임의 흑막은 무슨 사람일 것 같습니까?
히무로 시라베: 모노로그를 조종하는 사람 말이지. 짐작 가는 바가 있긴 하지만…
모노로그. 폭도의 마스코트와 닮은 기계. 모티프가 그 곰인형이라면 폭도가 이 살인 게임의 배후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초고교급을 죽고 죽이게 만든다고 해서 어떤 의미가 있지? 알파걸의 살인 게임은 세상의 희망이 서로 죽고 죽이는 장면을 생중계해 사람들의 희망을 꺾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탑의 초고교급들은?
희망봉 학원에 스카우트된 적도 없을 이들이 죽는다고 해도 세상이 그렇게 충격받을까? 초고교급이 범람한 세상이다. 차라리 새로운 희망봉 학원의 요직원들을 노리는 편이 나았을 텐데…
히무로 시라베: 다시 생각해 보니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어.
야가미 토가: 저 또한 그렇지만, 이 살인 게임이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할 겁니다. 살인 게임의 흑막이 룰에 얽매이는 것을 보고 알았고 처형에서 확신했습니다.
야가미 토가: 저희들은 지금 누군가의 유희거리인 겁니다. 해변의 경주마와 탑의 후원자는 그걸 반영하는 거울과도 같죠. 탑의 다른 분들이 저희를 지켜보는 만큼. 살인 게임 밖의 누군가도 살인 게임 안의 참가자들을 구경하고 있겠죠.
그는 살인자였지만 명석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히무로 시라베: 다만 그게 무슨 의미냐가 문제겠지. 우리가 서로 죽고 죽일 경우 이루어지는 목적… 모노로그는 살인 게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살인 게임이 벌어지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했지.
야가미 토가: 그게 가장 어렵습니다. 목적 없이 이런 대규모의 일을 벌일 수는 없어요. 가상현실?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살인 게임 자체가 목적이라니.
수학에 능통하지 않은 사람을 방에 가둔 채 아무것도 주지 않고, 미적분을 깨우쳐 보라고 강요할 경우 이 사람이 미적분을 통달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가?
정답은 '아무리 많은 시간을 줘도 불가능하다'이다. 개인의 지식이 특정 선에 머무르는 이상 사고는 확장되지 않는다. 아무리 추론 능력이 좋다고 한들 없는 증거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결국 언젠가 추론은 정보의 한계 속에서 끝물에 도달하고, 사고는 확장을 멈춘 채 매몰된다.
야가미 토가: 특히 함께 협동해서 이겨내야 할 시련들을 준비하는 것은 무척이나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게임을 만든다면 협력하지 않는 사람이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어서 신뢰가 깨어지게 만드는 구조여야 합니다.
야가미 토가: 하지만 저희의 상황을 보세요. 시련 속에 들어간 사람은 정신을 잃기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시련에 참여한 동안 위험에 처하죠. 카이다 씨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야가미 토가: 만약 카이다 씨가 모종의 수단을 써서 두 번째 시련을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그녀는 모리 씨에게 죽임을 당했을 겁니다.
히무로 시라베: 네 말이 맞아. 해변에 온 당시에는 솔직히 서로를 온전히 믿기 어려웠어. 늘 너희들을 감시하고 있었지. 하지만 이제 우리 꼴을 봐. 감염으로 죽어가는 모리와 나이토를 위해 카이다가 있을 세 번째 시련을 향해 가고 있어.
히무로 시라베: 내가 흑막이라면 이런 작용이 일어나지 못하게 서로 이간질을 시킬 거야. 나이토와 모리가 서로 밧줄을 통해 신뢰 관계를 어느 정도 구축한 것을 보면 당장 잘라 버리려 기를 쓰는 게 흑막답지.
야가미 토가: 이런 공간에 사람들을 모아 놓으면 의심암귀의 상황이 벌어지지만, 그것을 극복하면 두터운 신뢰 관계가 형성되죠. 그게 이상합니다. 여러모로 마치 저희들을 성장시키려는 것 같아요.
나는 바늘에 찔린 듯 몸을 움츠렸다.
히무로 시라베: 성장시킨다고?
야가미 토가: 네. 다분히 그렇게 느껴지더군요. 언어와 화술은 무척 정밀한 도구입니다. 화자의 말에 자신도 의도하지 못한 본질이 숨어 있기 마련이죠.
야가미 토가: 만약 흑막이 바다뱀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우리가 휩쓸려 죽길 바랐다면, 고난이나 환난 같은 단어를 사용했을 겁니다. 그러나 시련. 시련은 시험을 의미합니다.
야가미 토가: 이것을 뛰어넘어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느냐를 보기 위한 시련이죠.
"과연 세 장 중에서 몇 장이나 뽑을 수 있을까…"
나는 그의 말을 잠자코 듣다가 모래사장에서 몸을 일으켰다.
히무로 시라베: 이제 가자. 시간이 없어. 충분히 쉬었겠지?
야가미 토가: 충분히 쉬지 않았더라도 가야 하는 길입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한 번 쉬고 나니 한동안은 걷기가 수월했지만 조금 지나지 않아 다리는 자신이 놓인 피로를 다시 떠올렸다. 야가미 또한 그런 눈치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다이얼로그의 통화 기능이 그토록 필요하다고 느낀 순간은 없었다. 지금 본대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 마유즈미는 무사한가? 카이다가 습격하지는 않았나?
전서구라도 있었다면 이토록 절박함을 느낄 일도 없었을 텐데… 머릿속에서 긴장과 불안이 차오르는 것을 억누른 건 카이다의 습격을 대비하려 하는 이성이었다.
캄캄한 칠흑 속에서 앞을 보며 나아가는 도중 나는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시야의 위화감이었다. 흔들림. 왜곡. 시야의 왜곡.
일그러드는 아지랑이. 허공이 흔들거리는 듯한 그것은. 시련의 문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벌써?
야가미 토가: 뭐가 벌써입니까?
히무로 시라베: 시련의 문이야. 우린 벌써 세 번째 시련에 거의 도달했어.
야가미 토가: 정말이십니까? 제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설령 당신의 시력일지라도 이 암흑 속에서 시련의 문을 정확히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데요.
히무로 시라베: 시야는 대부분 검은색이지만 검은색에서 일렁임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아. 시야가 없기에 이제 본 것에 가까울 정도야.
야가미 토가: 당신이 신기루를 본 게 아니라면 정말 다행이군요. 계속 가도록 하죠.
그리고 50분 정도가 지난 뒤 우리는 문 앞에 섰다. 세 번째 시련의 문.
야가미 토가: …정말 너무 가까웠는데요.
히무로 시라베: 휴식 없이 도착해서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지만. 확실히 가까워.
야가미 토가: 다섯 명이 걸었을 때는 먼 거리가 두 명이 걸었을 때는 가깝다. 이것도 탑의 불가사의한 현상 중 하나일까요?
히무로 시라베: 거리 왜곡이 해변에도 적용된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다만 해변의 거리 왜곡은 방향이 아니라 사람의 수에 적용되는 것인가?
야가미 토가: 어느 정도는요. 두 번째 시련까지는 하루가 더 걸렸던 것 같은데 세 번째 시련은 새벽에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다섯 명이 해변을 걸을 때와 두 명이 해변을 걷는 것은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히무로 시라베: 그렇기에 매번 카이다가 시련에 일찍 도착한 거야… 육체가 무방비해지는 약점 탓에 시련에 적극적으로 임하지는 못했지만. 카이다 본인의 신체능력에 더해서 거리 왜곡이 적용되었던 거지.
히무로 시라베: 이 정도로 가까울 줄 알았다면 휴식 없이 가는 편이 나았을 텐데.
야가미 토가: 농담이시겠죠? 적어도 그 자리에서 2시간 30분은 족히 걸어야 할 거리인데요.
히무로 시라베: 농담 아니야. 적어도 시련 안에선 육체의 피로가 적용되지 않으니 몸을 혹사할 대로 혹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겠지.
세 번째 시련의 문에는 어떤 문구가 적혀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달빛만으로는 읽기가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야가미를 보며 손가락으로 문고리를 가리켰다.
히무로 시라베: 지체할 시간이 없어. 당장 들어간다. 야가미 네가 먼저 들어가.
야가미 토가: 그러죠.
야가미는 주저 없이 문고리를 잡았다. 그의 몸이 털썩 쓰러졌다. 나는 문고리를 잡는 척을 하고 모래 위에 털썩 쓰러져 보았다.
아무런 인기척도 소리도 없었다. 그대로 몇십 초를 더 기다린 뒤 나는 재빨리 문고리를 잡았다. 내 의식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나는 마지막으로 각오를 다졌다.
돌아가야 한다.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지 못하면 안 될 이유가 있기에.
그리고 시련 속에서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든 느낌은 의아함이었다.
시련 안은 어두침침한 건물 안이었다. 회색과 흰색의 콘크리트. 희미한 조명. 먼지가 일지는 않은 것에서 사람의 발길이 끊기지는 않은 곳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여긴 어디지? 미도리카와가 있던 장소들과는 너무 다른데.
마치 병원이나 학교를 연상시키는 공간. 첫 번째 시련은 그녀와 야가미가 머물던 부둣가. 두 번째 시련은 그녀가 몸을 숨기고 있던 집. 그러나 세 번째 시련에선 그 두 개와 눈에 띄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다.
야가미 또한 세 번째 시련의 배경에 집히는 점이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벽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야가미 토가: 의외로군요.
히무로 시라베: 네가 아는 장소가 나올 거라고 생각한 거지?
야가미 토가: 네. 당신 또한 패턴을 파악하셨습니까?
히무로 시라베: 어렴풋이 알 수밖에. 우리가 첫 번째 시련에서 만난 건 과거의 미도리카와. 즉 아직 카이다에게 습격당하지 않은 바다뱀. 두 번째 시련에서 만난 건 현재의 미도리카와. 살인 게임에 참가한 지금의 모습과 똑같은 사람이지. 과거. 현재. 그다음은…
야가미 토가: 미래죠. 네. 저 또한 세 번째 시련에선 미래의 미도리카와 씨가 나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희 시점에선 이미 지난 것을 미래라고 하니 표현이 조금 그렇지만 적어도 그녀의 마지막 순간, 저에게 죽기 직전의 그녀가 나오리라고 생각했는데요.
나는 얼마 전 내가 꾼 꿈에 대해 생각했다. 행운아가 내게 타로 카드 세 개를 건넸다. 첫 번째는 매달린 남자. 두 번째 또한 매달린 남자. 세 번째 또한 매달린 남자였다.
꿈은 모든 것을 의미하던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세 장의 매달린 남자 카드. 그것만으론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눈을 크게 뜨고 보도록 해. 내가 자네의 미래를 점쳐줄 거거든."
세 번째 매달린 남자 카드를 바닥에 놓은 뒤. 행운아는 웃었다.
"이게 뭘 의미하는 것 같나. 총잡이? 이 카드는 너와, 네 카텟이 될지도 모르는 자들의 운명이야."
"과연 세 장 중에서 몇 장이나 뽑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 꿈은 내게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모닥불. 카텟이 될지도 모르는 자들과의 시련. 매달린 남자. 매달려서 살해당했으면 남자인 척을 하고 있던 미도리카와 아쿠토.
매달린 남자는 자기희생과 통과의례를 의미하는 카드였다.
통과의례는 곧 시련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나도 이 장소는 몰라. 아무래도 세 번째 시련의 미도리카와는 살인 게임에 납치당하기 전 시점의 그녀 같아.
야가미 토가: 그럼 그녀의 행방으로 말미암아 제가 기억을 잃고 여기 오기 전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조사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히무로 시라베: 왜 그렇게 확신해?
야가미 토가: 이곳에 오기 전의 저일지라도 바다뱀을 찾아서 헤맸을 테니까요.
그렇게 단정 지을 정도로 자신의 복수심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다니. 기이한 자신감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그럼 미래의 그녀는 아직 너와 만나지 않았겠지? 살아있으니까.
야가미 토가: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군요. 제가 그녀를 찾았다면 이미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겁니다.
히무로 시라베: 그러시겠지…
인간 백정 노릇을 왜 저렇게 과시하는 것이지? 별다른 이유라도 있는 걸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히무로 시라베: 미도리카와가 그렇게 미운 거야?
야가미 토가: 저는 그녀를 찾는 날을 위해 이렇게 몸을 키운 것입니다.
복수. 복수. 결국 야가미의 목적은 그것이었다. 정작 미도리카와에게 복수하고 난 뒤에는 바다뱀을 되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시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이 참 촌극처럼 느껴졌다.
평소에는 이성적인 사람조차도 사람을 죽이게 만드는 게 복수심이란 말인가.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원한으로 인한 살인은 대몰락 이전에도, 대몰락 이후에도 수도 없이 많았으니.
히무로 시라베: 일단 아무 방에라도 들어가서 숨자. 외부인에게 적대적인 장소일 수도 있으니까.
야가미 토가: 좋은 생각입니다.
주변에 사람의 목소리나 인기척은 없었다. 나와 야가미는 근처에 있는 방의 문고리를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여러 개의 침대가 있었고, 벽에는 책장이 놓여 있었다. 책이 꽤 많이 꽂혀 있었다. 침대와 책장? 누군가의 숙소일까? 아니. 그러기엔 편의시설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방에 창문은 있었지만, 시간이 늦은 것인지 밖의 풍경이 보이지는 않았다.
히무로 시라베: 대체 무슨 공간이지?
야가미 토가: 조사해 보죠.
나는 책장을 향해 다가갔다. 책. 책은 귀했다. 정확히는 책의 취급을 받는 책이 귀했다. 수많은 책들은 겨울을 이겨내기 위하여 사람들의 땔감이 되었다.
현재의 미도리카와는 이미 대몰락을 경험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미래의 미도리카와가 있는 세 번째 시련 속 또한 대몰락의 현장일 터였다. 그런데 책이 지식의 기록물 역할을 하고 있다고? 드물고 또 기이한 일이었다. 적어도 규모가 큰 공동체가 아닌 이상 이런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난방과 식량 문제가 해결된 공동체가 아닌 이상, 자원을 빼앗기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지 않은 이상…
책장에 꽂힌 책들은 고전소설, 작법서, 우주과학, 격투술 교본, 에세이, 철학서 등 넓은 풀을 가지고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대체 여긴 무슨 장소지…?
야가미 토가: 음?
야가미 쪽에서 의아한 목소리가 들리자 난 그의 쪽을 바라보았다.
히무로 시라베: 찾은 거 있어?
야가미 토가: 네. 조금 힌트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여기에 있습니다. 침대에 조금 가려졌지만 이 벽에 중지가 조금 잘린 노란색 손 같은 표식이 있어요.
중지가 조금 잘린 노란색 손? 어떤 그림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는 야가미가 가리키는 표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직후 나는 자신도 모르게 두 걸음을 그 표식에게서 물러섰다.
야가미 토가: 벽에 있는 걸 보아하니 이 장소를 상징하는 문양 같은 것일까요? 여긴 특정한 기업일지도 모르겠군요.
히무로 시라베: 제기랄.
여기만큼은. 여기만큼은 안 돼. 난투극의 한복판일지라도 여기만큼은.
카이다 쿠로하가 시련을 돌파하지 못한 이유가 이것인가? 나는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사람은 성숙하지 못하다지만 압도적인 신체능력을 가진 그녀가 미도리카와를 죽이지 못했다면, 미도리카와를 죽이더라도 무사히 헤쳐나갈 수 없는 환경이라는 말이 되었다.
위험했다. 세 번째 시련은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어떤 시련보다도 위험했다. 긴장을 풀고 활동했다간 빠져나가지 못할 가능성이 그 어떤 시련보다도 높았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마유즈미와 나눈 말에 대해서 생각했다.
정말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자 나와 감시자는 손을 잡았다. 공동의 목적인 생존을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이게 왜?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것이지? 미래의 미도리카와는 무슨 사람이기에 그녀는 이곳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거지?
야가미 토가: 왜 그러십니까? 아는 모양인가요? 이건 무슨 뜻입니까?
히무로 시라베: 앞글자 U다.
야가미 토가: 네?
히무로 시라베: …알파벳 U. 이건 중지가 잘린 손 같은 게 아니다. U로 시작하는 집단을 대표하는 상징이지.
나는 주저 없이 권총을 뽑았다.
Ultimatarian.
히무로 시라베: 초고교론자들의 표식이다…
정말 쓰고 싶었던 파트에 도달했습니다
기말고사 기간에 조별과제 콤보로 살짝살짝 어지러워지겠지만? 어쩔 수 없이 휴재하겠지만? 그래도 다음 전개를 기대해주십사… 쓰는 입장에서 봐도 캐릭터 몇몇의 빌드업이 조금 개같이 멸망한 것 같지만? 일단 갈 수밖에 없겠네요
요즘 써둔 분량을 실수로 백업 안해두는 일이 잦아서 스스로가 한심해 미치겠습니다 진짜 죽고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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