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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2

더 단크 타워 챕터 2 - 25

by 도타싫어! 2021. 12. 26.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토키와 아유키는 꽤 평범하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큰아들의 방은 조금 작지만 화장실은 두 개 있는 집에서 자랐고, 남동생과 적당히 투닥거리며 반에서 4등 안은 항상 드는 모범생이 되었다.

 

친구들과 무난히 잘 어울렸고 무난한 연애를 하다가 어쩌다 보니 헤어졌으며, 평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비범하지도 않은 꽤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취미는 TV 시청. 특별한 일(새벽까지 이어진 드라마 시청)이 없는 이상 수업시간에는 졸지 않으며 복습은 나름 철저히 했다. 그의 노트 필기는 친구들의 시험을 몇 번이나 구제했다. 축제에서 총으로 경품을 따 본 적은 없지만 금붕어는 많이 잡았다. 과학경시대회에 팀을 짜고 나가 3등을 땄다. 계주에선 상대 팀 주자를 앞질렀지만 결국 경기는 졌다. 상당히 우수하긴 해도 특출 나지는 않은 것이 토키와 아유키라는 사람이었고, 그는 그 사실에 만족했다. 누가 초고교급이 되고 싶은가? 누가 어깨가 으스러질 정도의 기대나 재능을 가지고 싶은가? 적어도 그는 아니었다. 평균 이상을 하면서 잘 살면 중세시대의 왕 부럽지 않게 행복할 수 있는 것이 현재라고 그는 생각했다.

 

모든 끔찍한 일의 시작은 학생회장이 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좋은 성적을 유지하면서 다른 이들과 잘 어울리는 토키와 아유키의 모습을 보고 선생님은 그에게 학생회장의 일을 제안했다. 토키와는 여러 경험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일 것이라 여겼다. 아마 친구들의 부채질 또한 토키와의 결정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야. 이번 후보들 진짜 별로더라. 네가 나가면 될 것 같은데?

 

한 후보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표가 땅에 떨어졌다. 한 후보는 말을 심하게 절었다. 한 후보는 토키와보다 여러모로 부족했다.

 

덕분에 토키와 아유키는 학생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특출 나지는 않지만 꽤 좋은 활동을 펼치며 2학년임에도 불구, 많은 학생들의 신임을 얻었다.

 

문제는 토키와가 학교의 회계장부를 들여다보던 도중 이상하게 비는 금액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몇백 명으로 불어난 학생 시위대의 시작이었다.

 

롤 브라이트: 토키와 씨. 제 말에 집중하고 계세요?

 

토키와는 눈앞에 있는 캐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잠을 잔 뒤 작은 열쇠를 써 보자고 합의한 직후 캐롤은 토키와를 자신의 방으로 부르고 홍차를 대접했다. 예고 없이 이루어진 상담 시간이었다.

 

토키와는 어째서인지 상담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키와 아유키: 아. 네. 그러니까

 

롤 브라이트: 리더의 책임감이 당신을 좀먹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토키와는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키와 아유키: 책임감을 가지는 건 당연하죠. 말만 리더지 저는 이 탑에서 아무것도 이룬 게 없어요. 뾰족한 방법 하나 없이 무력하게 휘둘리기만 했죠.

 

롤 브라이트: 그걸 만회하겠다는 생각이 당신을 몰아붙이는 거예요.

 

키와 아유키: 그럼 몰아붙여야죠. 그게 제 의무잖아요. 모두가 절 리더라고 생각하는 건 저에게 좋은 리더십이 있다던가 제가 믿을만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에요. 단지 저에게 초고교급 리더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굳이 거스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거죠.

 

키와 아유키: 전 리더 따위가 아니에요. 다들 존중하는 건 초고교급 리더라는 직함뿐이죠. 만약 제가 그런 칭호 없이 이 탑에 왔다면 누구도 저를 따르지 않았을 걸요. 초고교급 리더만 한 능력은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시도는 해 봐야 해요

 

롤 브라이트: 최근에 언제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토키와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다고 말하는 듯한 제스처였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지금 이 상담 자체가 조금 어이없게 느껴진다는 듯이 토키와는 웃었다.

 

키와 아유키: 늘 그렇게 생각해서 잘 모르겠어요.

 

롤 브라이트: 그래도 특정한 순간이 있지 않으신가요?

 

키와 아유키: 딱히 그런 건 없어요.

 

상담의 회피. 두루뭉술한 대답. 캐롤은 토키와가 상담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애매모호한 질문을 반복하면 상담사는 용이하게 상담을 이끌어나가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애매모호함 속에는 가끔 그 본질이 담겨 있기도 했다.

 

롤 브라이트: 그렇다면 토키와 씨는 저희와 함께 지내시는 순간 전부에서 무능력감을 느끼신다는 건가요?

 

토키와는 허를 찔렸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들이쉬었다.

 

롤 브라이트: 그러면 질문을 바꿔 볼게요. 어째서 저희와 같이 지내시는 것 자체에서 무능력감을 느끼실까요?

 

캐롤이 질문을 바꾸는 동안 토키와의 몸이 불편함과 스트레스를 감지해 의자의 팔걸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의 자세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조금 삐딱해졌고 그의 입 안은 바짝바짝 말랐다.

 

키와 아유키: 절 어린애처럼 대하지 마세요.

 

분노.

 

토키와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에 정작 그가 당황했다. 토키와는 뒤늦게 꼿꼿하게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자신이 순간 욱해서 터져 나온 말이 오해라고, 혹은 말을 잘못한 것이라고 해명하려 했으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저. 그게. 어어. 하는 단편적이고 의미 없는 웅얼거림 뿐이었다.

 

롤 브라이트: 당신을 어린애처럼 대하려는 의도는 없었어요.

 

캐롤은 언급하지 않음으로 대답했다.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니 계속해.

 

이 시점에서 무능력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항변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토키와는 알았으나, 그럼에도 그는 항변했다.

 

키와 아유키: 저는 무능력감을 느끼지 않아요.

 

부정.

 

롤 브라이트: 당신은 초고교급 리더라는 직함이 아니면 누구도 자신을 따르지 않았으리라고 말씀하셨어요. 토키와 씨. 당신에겐 지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상처가 있어요. 자아존중감과 자기효능감이 부족하고요. 당신은 지금 이 상담이 마음에 들지 않죠. 왜냐하면 잘 감추고 있는 비밀을 후벼 파이는 건 당신을 향한 개인적인 공격으로 느껴지니까요.

 

토키와는 당장 의자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자신의 약한 점과 마주하는 것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토키와는 캐롤의 방을 나가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잠에 빠진 뒤 다음 날에 아무렇지 않은 척 캐롤을 보고 싶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캐롤이 무시하는 것으로 암묵적인 합의를 거치고 싶었다. 문제는 캐롤에게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키와 아유키: …예.

 

결국 토키와는 두 손에 깍지를 껴고 편집증에 걸린 사람처럼 엄지의 위치를 서로 휙휙 뒤바꾸며 말했다. 시선은 캐롤과 마주치지 않았다. 애초에 캐롤은 눈동자를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토키와는 캐롤의 눈이 있어야 할 자리를 바라보면 그녀의 심안을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키와 아유키: 그냥 터치로 제 문제를 없애 주시면 안 되나요?

 

협상.

 

롤 브라이트: 터치는 당분간 금지예요. 그럼 질문을 한 번 더 바꿔 볼까요. 무능력감의 기준은 당신 스스로의 기대인가요, 아니면 남의 기대인가요?

 

키와 아유키: 둘 다 어느정도 섞여 있죠.

 

애매모호한 대답을 한 번 더. 토키와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거의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저 생각대로 말이 나왔다. 앉은 채로 잠꼬대를 하는 꼴이었다.

 

키와 아유키: 이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거에 못 미칠 때도 있고, 남들은 저렇게 하는데 난 아무것도 못 하는구나. 싶을 때도 있고.

 

롤 브라이트: 그 감정에서 괴로움을 느끼시는군요. 힘드셨겠어요. 저도 학창 시절에는 치어리더 팀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몸이 느려서 동작을 수행하지 못했거든요. 시험에서 턱 없이 떨어지고 집에서 운 기억이 있어요.

 

키와 아유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나 봐요.

 

토키와는 조금 편해진 듯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캐롤 또한 입에 손을 얹고 쿡쿡 웃음을 지었다.

 

롤 브라이트: 정말 부끄러웠다니까요! 박자는 하나도 못 맞추지, 넘어지지, 팔다리는 마구 휘적여지지. 절도 있는 다른 치어리더들의 발끝도 못 따라갔어요!

 

키와 아유키: 그거 진짜 기분 나쁘죠… 다들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나한테만 별다른 무기가 없을 때. 그냥 막연하게 남이 부럽고 내가 못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롤 브라이트: 당신에겐 리더십이 있는걸요.

 

키와 아유키: 저에겐 그런 거 없어요. 이 호루라기를 불고 다니면서 마치 내가 양치기인 것처럼 굴지만 저는 그냥… 고등학생이에요. 아무 재능도 없죠.

 

롤 브라이트: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초고교급 리더라 인정하는데도요?

 

키와 아유키: 초고교급 리더라는 호칭은 공식적인 게 아니에요. 절대 아니죠. 초고교급이라는 표현이 비단 희망봉 학원에서만 쓰이는 건 아니에요. 지역이나 학교 신문에서도 쓰이죠. 저는 그런 의미에서 초고교급 리더예요. 그냥 다른 사람이 그렇게 부르는 리더. 심지어는 확실한 지표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롤 브라이트: 그럼 어쩌다 당신이 초고교급 리더라 불리게 된 지를 듣고 싶어요.

 

토키와는 이미 미지근해진 홍차를 몇 모금 꿀꺽꿀꺽 삼키고 기억을 되짚었다.

 

키와 아유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어쩌다 학생회장이 됐어요. 그냥 제가 가장 무난한 후보라 다들 제게 투표하더라고요. 사실상 거저먹은 거죠.

 

키와 아유키: 솔직히 선거 공약을 다 이행할 생각은 없었어요. 누가 이행해요? 적당히 학생들이 좋아할 법한 공약을 이행하면 다들 잊어버리잖아요. 저도 1학년 때 그랬어요. 아무튼 학교에 자판기를 설치하고 나니까 무슨 학교 부패 척결 그런 공약이 생각나더라고요.

 

키와 아유키: 제가 만든 공약인지도 기억이 안 났어요. 그 정도로 별 의미를 안 담았는데 회계 장부를 좀 둘러봤더니 이상한 공백을 보고 만 거죠.

 

롤 브라이트: 대단하신데요. 부패를 척결하신 셈이잖아요.

 

토키와는 캐롤의 말에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저었다.

 

키와 아유키: 안 봤으면 차라리 좋았을 걸

 

키와 아유키: 본 이상 못 본척 하기도 그렇고. 교장 선생님한테 1대1로 다가가 해명을 부탁했어요. 솔직히 최대한 마찰 없이 끝내고 싶었는데 그 자리에서 먹물이 든 벼루를 집어던지셨어요.

 

키와 아유키: 저한테는 안 맞았는데 대신 바닥에 깨지면서 제 바지가 조금 젖었고요. 그 소리를 들은 다른 선생님이 와서는 무슨 상황인지 추궁한 거죠. 교장 선생님은 저를 내쫓으셨어요. 이 선생님은 왜 하필 들어와서 목격자가 되선… 일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어요.

 

롤 브라이트: 그게 달갑지 않으셨던 거죠?

 

키와 아유키: 이제 아무 일 없다고 치부할 수가 없잖아요. 보는 눈이 있고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는데… 어떻게 할까 하다가 교무실 창문을 앞에 두고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시작했어요. 방과 후에 몇 시간 정도 그렇게 했죠.

 

롤 브라이트: 계속 원만한 해결을 바라셨는데 일이 그렇게 되지가 않았군요.

 

키와 아유키: 네! 맞아요. 보여주기 식이었다고요. 학생회장이 꾸준히 시위를 하면 아무리 무시해도 적당히 징계를 내리며 넘어가겠지. 그런 생각으로 가볍게 한 거였다고요. 정말 내가 무슨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토키와는 캐롤의 말에 바로 그거라는 듯이 손가락질을 했다. 한 번 터지기 시작한 그의 속내는 멈출 기세가 없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제방으로 막혀 있던 물이 터져 나오는 것만 같았고, 불이 마른 초원 위로 정말 들불처럼 번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이마에 얹으며 말을 흐렸다.

 

키와 아유키: …그런데. 친구들이… 절 돕고 나섰어요. 제가 담담하게 외친다면 걔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죠. 그렇게 열심힌데 어떻게 그만 하라고 말을 해요. 같이 몇 시간 동안 그러고 있다 보니 소문이 퍼지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사람이 불어나더라고요? 하루가 지날수록 학생 수가 점점 늘어나더니 어느 순간부터 몇십 명이 됐어요

 

롤 브라이트: 부담감을 느끼셨나요?

 

키와 아유키: 그럼 당연하죠. 마음만 같아선 그만 빠지라고 하고 싶었거든요. 마음뿐만이 아니라 저는 실제로 그렇게 말했어요. 이제 빠져 달라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까지 싸잡아서 교장한테 징계당하는 일을 막으려 하는 것이라 생각하더군요. 일이 더 커지면 나만 골치가 아픈데 내 속은 모르고. 다들 분위기가 마구 과열됐죠… 그러다 누가 빈 유리병을 교무실 창문에 던져서 창문을 깼어요.

 

롤 브라이트: 토키와 씨가 책임을 뒤집어썼고 그러자 반발이 더 커졌겠군요.

 

키와 아유키: 네. 정학을 당했어요. 솔직히 너무 값이 컸지만 이거로 멈춘다면 만족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모두들 학교 측의 만행을 용납할 수가 없다며 점점 소문을 크게 내더라고요. 여기서 해산하라고 해봤자 아무도 제 말을 듣지 않을 테니 저는 단기전으로 끝내고 싶었죠. 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통제할 수가 없었어요. 일본 문부과학성 앞에서 시위하자는 의견이라니. 미친 거죠. 제정신이 아닌 거죠. 그런데 전 막을 수가 없었어요. 그 의견에 결국 따르게 됐죠.

 

키와 아유키: 정신을 차려보니 몇백명 앞에서 제가 앞장서서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어요. 무슨 다른 학교에서도 저를 돕겠다며 나섰다고요.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순식간에 다들 저희를 주목하고 저는 어느 새인가 몇백명을 이끌어서 학교의 부정을 폭로한 초고교급 리더가 된 거죠.

 

키와 아유키: 무슨… 뉴스에서도 취재를 와선 관심이 집중되더니, 교장이 징계를 당하고 학교를 떠났어요. 저는 그냥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어요.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학교에 돌아오고 일상이 다시 시작된 뒤에도 초고교급 리더라는 꼬리표가 절 떠나지 않았어요.

 

키와 아유키: 리더? 리더요? 초고교급 리더?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한 결과가 초고교급 리더라뇨. 이런 농담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이 칭호가 절 떠나지를 않았어요. 정학이 취소되었으니 학교에 돌아온 첫날에 제가 교실에 들어서니 친구들이 박수를 쳐 줬어요. 좋긴커녕 당황스러웠죠. 엄마랑 아빠는 제가 자랑스럽다는 얘기를 했어요. 선생님들은 초고교급은 역시 대단하다며 저에게 기대를 거셨고요.

 

키와 아유키: …그리고 이제는 초고교급만 있는 장소에 불려 와선, 얼떨결에 나도 진짜 초고교급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얼떨결에 기죽지 않으려 초고교급인 척을 하다가 진짜 리더를 맡게 됐죠.

 

토키와는 홍차 잔을 들어 홍차를 마시려 했지만 손이 벌벌 떨려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입에서 어이가 없는 듯한 웃음이 한 번 새어 나오고 입꼬리는 허탈감에 비스듬히 올라갔다.

 

키와 아유키: 살인 게임…? 초고교급이 죽고 죽여…? 엄마랑 아빠가 죽었어요. 학교는 완전히 망했어요… 그리고 이제 내가 리더라고? 조금만 얕보이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내가 초고교급을 이끌어서 살인을 막으라고…? 이제 와서 어떻게 꼬리를 내려요. 무서워 죽겠는데

 

토키와의 고개는 그가 말을 할수록 밑으로 내려갔고, 그의 눈가에는 그늘이 드리워졌다.

 

키와 아유키: 밤을 새 봤자 후루미나미를 머리로 이길 수도 없어… 모리는 너무 극단적이야. 내 리더 자리를 자꾸 빼앗으려고 들어… 히무로 쟤는 뭐야. 미도리카와 너는 또 뭐고 하기와라는 느닷없이 왜 저래. 카나리 제발 우리 친하게 지내면 안 돼? 카이다 진짜 무섭다… 아니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해. 뭘 해야 하냐고… 매일같이 밤을 지새워서 보여주기 식 노력을 하는 방법밖엔 아무것도

 

토키와는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고 머리카락의 끝을 손에 쥐었다.

 

키와 아유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난 초고교급 같은 게 아니야. 초고교급이란 이유로 죽는다면 그런 거 줘도 안 해. 그런데 다들 날 믿고 있어. 내가 제대로 된 때에 말을 안 해서 나에게 기대를 주고 있어. 그런데 나는 초고교급 리더 따위가 아닌데… 애초부터 단추를 잘못 넣었어. 그렇지만 이미 사람 한 명이 죽은 상황에서 이런 얘기. 누구에게도

 

토키와는 피폐해진 사람 특유의 자포자기하는 웃음을 지었다. 눈가에는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자신의 자조적인 꼴이 서글프면서 우습다는 듯이 그는 팔을 양쪽으로 살짝 벌리며 물었다.

 

키와 아유키: …대체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요?

 

롤 브라이트: 토키와 씨. 혼자 힘내셨군요. 지금까지 마음고생 많으셨어요.

 

캐롤은 어딘가에서 손 모양 스티로폼이 붙어 있는 막대기를 꺼내더니 토키와의 어깨를 막대로 토닥였다. 막대기에 팡팡 먼지가 털리는 이불이 된 것 같은 느낌에 토키와는 잠시 어리둥절해졌지만, 아무튼 일단 위로되는 감각에 어리둥절함은 금방 잊혔다.

 

키와 아유키: 하… 이런 말 정말 어디에서도 해본 적이 없어요. 다들 날 진짜 초고교급이라고 여기니까요. 다 제 잘못이죠

 

롤 브라이트: 아뇨. 제가 지금까지 터치에 너무 의존한 탓이에요. 다른 분들을 일단 진정하게 만드는 식으로 쓰니 정작 속에서 곪아가는 문제는 파악하지 못했어요. 너무 늦었지만 죄송해요. 토키와 씨.

 

키와 아유키: 아뇨… 아니에요. 마음이 조금은 후련해졌어요… 감사해요.

 

롤 브라이트: 이번 만남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죠. 일단 토키와 씨는 초고교급 리더라는 자리에서 내려오기, 혹은 초고교급 리더라는 기준을 맞춰 버리기. 크게 두 가지를 선택하실 수 있으세요. 어떻게 하실지는 나중에 저와 다시 상의해 봐요.

 

키와 아유키: 아. 넵. 홍차 잘 마셨습니다.

 

토키와는 한결 밝아진 얼굴색을 한 채 캐롤에게 고개를 숙였다. 의자에서 어색하게 일어나서 캐롤의 숙소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 토키와는 우뚝 서서 캐롤에게 물었다.

 

키와 아유키: 그런데 왜 이런 늦은 밤에 상담을 진행하신 거예요. 캐롤 씨?

 

롤 브라이트: …원래는 제가 터치를 써서 당신들을 조종하지 않았다고 말하려 했지만, 당신의 고통을 그저 넘어갈 수가 없었어요. 또 죽을지도 모른다는 실감이 드니 한 분이라도, 한 번이라도 더 상담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키와 아유키: 죽다뇨!

 

토키와가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사이 캐롤이 손사레를 저었다.

 

롤 브라이트: 가정법이에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건 사실이잖아요? 첫 번째 재판이 끝난 직후에 생각했어요. 내가 내담자분들을 조종한 게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틈이 안 나더군요. 마유즈미 씨는 해변으로 갔고요

 

키와 아유키: 아. 그럼 나나시와는 이미 대화를 나눠보신 건가요?

 

롤 브라이트: 맞아요. 틈이 잘 맞아서 꽤 일찍 말할 수 있었죠

 

토키와는 고개를 끄덕인 뒤 캐롤에게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남기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간단히 세안을 하고 잠에 곯아떨어졌다. 캐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들었지만 그는 토키와만큼 잘 자지 못했다.

 

누적된 피로와 풀린 긴장에 베개를 머리에 대기만 해도 깊은 잠에 빠진 그와 달리. 캐롤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은 채로 번뜩 잠에서 깨어났다.

 

롤 브라이트: 아아 제기랄. 미쳐버릴 것만 같아… 이제 질렸어. 질렸다고.

 

롤 브라이트: 이런 얘기. 누구에게도 할 수 없어… 누구에게도. 내담자 분들은 물론이고, 내 적에게도 할 수 없고, 이바라 씨에게마저

 

캐롤은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고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문득 다이얼로그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살인게임에 참가하고 있는데 새벽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로. 나 혼자만 있는 공간에 발소리가 울린다면 그것은 꽤 두려운 일일 것이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내게 접근하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 공포를 유발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 있는 지표가 있다면 공포는 덜해지고, 그 자가 무서울 이유가 없다면 공포는 아예 사라지곤 했다.

 

23T5U130: 토키와 흉내 내는 거야. 나나시? 밤을 지새우는 거 말이야.

 

23T가 기계 관절의 소리와 함께 내게로 다가왔다.

 

나시: 내가 무슨 토키와를 흉내 내. 토키와 흉내를 낸다면 몇 밤을 새울 각오를 해야지. 나처럼 그냥 새벽 동안 깨어있는 건 토키와가 하는 일 축에 끼지도 못해. 걔가 얼마나 우리를 위해 열심인데

 

23T5U130: 그렇지만 잠을 덜 자서 해결되는 문제는 없지.

 

나시: 잠을 잘 시간에 다른 걸 할 수 있다면 문제를 풀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어.

 

23T5U130: 널 보호할 사람 하나 없이 몇 시간 동안 이러고 있었나 봐? 말이라도 남겼으면 더 좋았을 거야. 캐롤에게라던가, 내게라던가.

 

23T5U130: 살인 게임 한복판이잖아. 과보호하는 것 같지만 걱정이 돼서 그래.

 

나시: 내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거짓말이니까. 응. 그럴 수도 있었겠지

 

내가 말끝을 살짝 흐리자 23T는 내가 돌리고 있는 슬롯머신의 옆 의자에 철컥 걸터앉았다.

 

23T5U130: 왜인지 고민이 많아 보이네.

 

나시: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와서 그런가 봐. 고민도 고민이지만, 뭣보다… 하아. 몰라. 나도 왜 이러는지… 기절했다가 깨어나니까 생각이 조금 바뀐 것 같아.

 

나는 슬롯머신의 레버를 당겼다. 사과. 오렌지. 쿠키. 나는 덤덤하게 틱틱이를 동전 투입구 안에 다시 넣고 버튼을 눌렀다.

 

나시: 노네임한테 씌기라도 했나 봐.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혼자 해야 할 것 같더라고. 평소에는 캐롤 씨에게 나 어디 간다. 어디 간다라고 일일이 보고했을 텐데 말이야.

 

23T5U130: 오오오. 나나시. 드디어 개인으로써 사고할 수 있게 된 거야? 울던 네 모습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인데!

 

나시: 윽. 그만 놀려… 사실 맞는 말이긴 해. 그때는 진짜 앞이 너무 막막해서 눈물밖에 안 나왔지. 모리가 날 발로 걷어차려 했었고 말이야. 캐롤 씨가 많이 도와주셨어. 그건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하지만

 

말끝을 흐리지 않으려고 의식해도, 내 말에 이을 문장을 떠올리지 못해서 나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23T5U130: 그래서. 왜 캐롤 씨에게 보고하지 않은 거야?

 

나시: …그냥. 이제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앞으로도 조금씩 더 없어질 것 같고

 

나는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23T5U130: 너 설마. 그녀에게서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왜?

 

나시: 어느 정도 네 조언을 받아들인 거지. 뭐

 

나는 슬롯머신의 레버를 당겼다. 오렌지. 포도. 포도였다.

 

나시: 아윽. 아까워라…!

 

23T5U130: 이럼 내 입장이 조금 불편한데. 내가 너와 캐롤 사이를 이간질한 것만 같잖아.

 

나시: 난 개인으로써 사고한 것뿐이야. 깨달은 것도 있고

 

23T는 자신의 슬롯머신 자리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더 말해보라는 듯한 무언의 권유에 나는 갈팡질팡하는 내 생각을 최대한 정제했다.

 

내가 왜 캐롤 씨에게서 조금씩 멀어지는 편이 좋다고 판단했는가. 그 나나시가 어째서?

 

나시: 내가 깨달은 건… 내가 캐롤 씨한테 감정이 있다는 거야.

 

23T5U130: 좋은 감정?

 

나시: …말해서 뭐해.

 

진부하고 남에게 들려주기에 부끄러운 이야기였다. 기억을 전부 잃어서 울먹이던 한 소년은 처음 보는 여인을 만나고 의지한 끝에

 

그만 그렇게 된 것이다.

 

나시: 그렇지만 내가 그러면 안 되잖아. 캐롤 씨는 상담사고 난 내담자야. 5년동안은 연애관계가 있어선 안 된대… 말이 돼? 5년이라니. 터치 없이도 상담사가 전이를 쓰면 사람 감정을 마음껏 지배할 수 있어서 그렇대.

 

나시: 마음만 먹으면 기다릴 수도 있지만, 윤리 강령이 생긴 이유를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애초에 상담을 해줬더니 좋다고 꼬이는 게 상담사 입장에서 어떨지 생각해 보면 정말 내가 한심해져. 캐롤 씨를 대놓고 무시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내가 품어선 안 되는 감정은 억누르려 애써야

 

나시: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지식인데. 가끔씩 어린아이들은 친밀감과 사랑을 구별하지 못한대. 내가 무슨 어린애가 된 것 같은 느낌이라 부끄럽긴 하지만 솔직히 나도 그런 경우일지 모른다고 생각해. 캐롤 씨를 선망하는 마음을 연애감정으로 착각한 꼬마. 그게 나인 것 같아.

 

나시: 게다가 터치는 정신이 섞이는 작용이니 금방 착각에 빠진 것 같고… 한 번 기절한 다음에 깨어나고 나니 늘 캐롤 씨 생각만 하는 걸 조금은 경계하게 되더라. 내가 터치에 의해 조종당하지 않는다는 건 나도 알지만 다른 것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거지… 내 뇌가 만드는 화학물질에 의해서.

 

애써 슬롯머신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나는 23T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머쓱함과 어색함 탓에 그만 쥐구멍에 숨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내 얼굴이 빨개지고 귀가 달아올랐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나시: 애초에 내가 이걸 왜 구구절절 말하고 있지… 미안해. 23T.

 

23T5U130: …너 정말 사랑앓이 많이 했네.

 

나시: 놀리지 말래도. 부끄럽지만 난 진지해

 

23T5U130: 나도 네가 가벼운 사람이 아니란 건 알아. 애초에 이미 알고 있었지.

 

나는 머쓱함과 부끄러움에 차마 23T 쪽을 돌아보지 못하고 슬롯머신만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다시  투입구에 틱틱이를 넣고 버튼을 눌렀지만, 그 대화 속에서 내 관심을 가져가지는 못했다.

 

나시: 내가 그렇게 티를 냈어…?

 

23T5U130: 차고 넘치게 냈지. 아무튼 그녀에게서 멀어지겠다니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야. 널 응원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미안해. 네 입장에선 남일이니 쉽게 말한다고 여길지도 모르지.

 

23T5U130: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네가 계속 그 길로 나아간다면 넌 언젠가 반드시

 

23T는 말을 잠시 끊었다.

 

23T5U130: 후회하게 될 테니까.

 

무게가 조금 실려있는 23T의 말에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틱틱이를 투입구에서 꺼낸 뒤 슬롯머신의 레버를 당겼다. 포도. 사과. 오렌지.

 

23T5U130: 말할 좋은 때를 놓쳤는데. 지금 그거 뭐 하는 거야?

 

나시: …크레딧이 투입구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의 전기 신호를 외부에서 흘려보내서, 크레딧을 투입하지 않더라도 슬롯 머신이 크레딧을 투입받았다고 인식하게 만들어 슬롯머신을 무한히 돌리고 있었어.

 

23T5U130: 대단한데. 무한한 시도가 있다면 항생제도 살 수 있을지 몰라. 지금 항생제가

 

나시: 3000만 크레딧.

 

23T가 다이얼로그를 들여다보려는 사이에 내가 먼저 말했다.

 

23T5U130: 또 값이 올랐네.

 

나시: 맞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오르고 있어.

 

나는 슬롯머신의 레버를 당겼다.

 

쿠키. 7. 포도.

 

나시: 또 실패야.

 

나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끙하는 소리를 내고서 틱틱이를 다시금 투입구 안에 넣고 버튼을 눌렀다. 나는 계속 슬롯머신을 돌렸지만 기이하게도 그림 세 개가 맞춰지지 않았다.

 

모노로그가 카를 조종할 수 있을 것 같냐며 의기양양했던 게 느닷없이 생각났다. 운이 없어봤자일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몇 시간 동안 슬롯머신을 돌려도 크레딧을 벌지 못했다. 모노로그를 불러내서 기계에 무슨 수작질을 부린 거냐고 추궁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뿐이었다.

 

정말 수작을 부렸다면 난 이걸 대체 왜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에 열이 받아. 나는 슬롯머신에 대고 소리쳤다.

 

나시: 아니 좀 돼라! 야! 지금 장난해?!

 

슬롯머신의 그림이 차례대로 돌아갔다. 철컥. 철컥. 철컥.

 

사과. 사과. 사과.

 

나시: 앗! 됐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슬롯머신에서 크레딧 동전이 우수수 떨어졌다. 100크레딧. 100개. 그것들이 카지노의 바닥으로 떨어지고 땡그랑거리고 굴러다녔다.

 

나시: 하하하! 됐다! 됐어!

 

모노로그: 신이 나나?

 

모노로그가 바닥에서 솟아오르자 나는 즉각 대답했다.

 

나시: 그럼 당연하지! 카를 조종할 수 있을 것 같냐고 했지? 봐. 했어! 꼴좋다. 크레딧이나 내 계좌에 넣어 놔!

 

모노로그: 대단한 위업. 축하드리지.

 

모노로그가 입을 열자 그것의 입 안으로 세게 바람이 일었다. 주변의 크레딧이 모노로그의 입 안으로 빨려들어가며 차곡차곡 쌓이는 모습을 보고 난 기이한 만족감을 느꼈다.

 

모든 크레딧이 모노로그의 입 안으로 사라졌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쳤다. 됐어! 역시 무한히 시도할 수 있다면 언젠가 성공할 수밖에 없어. 할 수 있을 거야!

 

…라고 낙천적으로 생각해 봤자 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시: 만 크레딧 추가요… 너무 신나라. 이럴 줄 알았으면 이번에는 만 크레딧까지 입력한 다음 돌릴걸 그랬어. 그럼 10만 크레딧이 나왔을 텐데.

 

23T5U130: 앞으로 몇 크레딧이 남은 거야?

 

나시: …999만 크레딧 정도. 나 혼자 항생제를 사기 위한 비용을 다 낸다면 말이야.

 

23T5U130: 결국 작은 열쇠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걸까.

 

나시: 아쉽지만 지금은 그것 말고 별다르게 떠오르는 게 없어. 후루미나미나 카나리 중 총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완전 발이 묶여있는 거야.

 

토키와가 가지고 있는 작은 열쇠가, 나에게는 작은 희망이었다.

 

내일을 볼 수 있게 만드는 희망.

 

명확하지 않았고 흔들리고 있지만 그것마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23T5U130: 그런데 슬롯머신 하나에서만 만 크레딧을 번 거야?

 

나시: 맞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 만 크레딧이 한 번에 나왔으니 만 크레딧을 번 거지… 어휴. 만 크레딧을 넣었으면 10만 크레딧이 나왔을 텐데 아쉽다니까.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슬롯머신 안에는 10만 크레딧이 없겠지…? 그럼 별 상관없었겠네.

 

나는 그 말의 뜻을 곰곰이 생각하며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기다가 이상함을 느꼈다.

 

나시: 어떻게 슬롯머신 하나에 만 크레딧이 넘게 들어있지?

 

이상했다. 분명 이상했다. 슬롯머신을 돌리고 크레딧을 딴다는 생각에 잠깐 잊고 있었지만, 슬롯머신 안의 크레딧은 누군가가 넣어야지만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었던가?

 

한 슬롯머신에 만 크레딧을 넘게 넣은 사람이 있다고? 100크레딧 동전으로 100개를? 10만 크레딧은 당연히 없었겠지. 그런데 만 크레딧은 있었을까?

 

나시: 뭔가 이상해. 이치에 안 맞는 것 같은데

 

슬롯머신은 저장된 크레딧을 뱉는 기계가 아닌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던 와중. 진동음이 공기 중에 울렸다.

 

나시: 어. 전화 왔네.

 

23T5U130: 나한테 온 거야.

 

솔직히 말해 나는 좋지 않은 예감밖에 느끼지 않았다. 다이얼로그의 시간은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 5시에 누가 깨어있고, 왜 하필 23T에게 전화를 건단 말인가?

 

나시: 이 새벽에 무슨 전화지? 후루미나미만 아니면 좋을 텐데…

 

만약 전화를 건 사람이 후루미나미라면, 내가 23T와 나눈 대화를 도청기로 전부 듣고선 무슨 만행을 저지를지에 대해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또 설득하던가 회유할 수 있을지

 

23T는 자신의 손목에 다이얼로그를 철컥하고 장착시키고는 다이얼로그의 화면을 보고 잠시 몸을 멈칫했다.

 

23T5U130: 캐롤로부터 전화가 왔어.

 

나시: 이 새벽에?

 

나 또한 주머니에서 다이얼로그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5시였다.

 

23T5U130: 너는 좀 거리를 두는 편이 좋겠다고 말했지만, 나 또한 그녀를 노골적으로 멀리할 이유는 없지. 일단 받을게.

 

23T가 다이얼로그의 화면을 누르자 캐롤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롤 브라이트: 안녕하세요. 23T 씨.

 

23T5U130: 안녕. 캐롤. 일찍 일어난 거야? 아니면 잠을 안 잔 거야?

 

롤 브라이트: 잠에서 일찍 깨니까 생각이 많아져서 전화드렸어요. 나쁜 꿈을 조금 꿨거든요.

 

23T5U130: 나쁜 꿈? 어떤 꿈이었는데? 나는 꿈을 해몽하는 데에는 재주가 없지만 듣고 싶은걸.

 

롤 브라이트: 아마 그렇게 유쾌한 내용은 아닐 거예요. 간단하게만 말할게요.

 

롤 브라이트: 저는 꿈속에서 왕이에요. 여왕이죠. 멋들어진 옷을 입고 큰 왕관에 지팡이까지 들고 다녀요. 저는 탑에서 느닷없이 궁전으로 온 것이라 생각하고. 영문을 모르니 여왕은 그만 하고 싶다고, 다들 날 섬기지 말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용인들이나 신하들은 당치도 않은 말이라며 저를 떠받들죠.

 

롤 브라이트: 왜 그런가 하고 그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저랑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몸은 굳고 부들부들 떨죠. 제 앞에서 재채기만 해도 잘못했다며 큰절을 해요. 그럼 전 꿈속에서 생각하는 거예요. 아. 이 사람들이 내가 좋아서 따르는 게 아니구나. 내가 무서워서 따르는 거구나.

 

23T5U130: 여왕이 되는 꿈. 내가 꾸었다면 기분 좋은 꿈이었을 텐데. 난 꿈을 꿀 수 없는 몸인지라.

 

다이얼로그 너머에서 헉하고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롤 브라이트: 아… 죄송해요. 제가 경솔했어요.

 

23T5U130: 농담이니 사과할 필요 없어. 아무튼. 불쾌한 꿈이었겠네.

 

롤 브라이트: 여기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죠. 아무튼 신하들이나 백성들한테서 도망가려 하니까 다들 절 쫓아와요. 저는 드레스에 걸려 넘어지는데 사람들은 저에게 몰려오고. 그러니 무서워져서 저는 멈추라고 소리쳐요.

 

롤 브라이트: 그러니 정말 표정이 무표정하게 굳은 채로. 눈은 동그랗고 생기 없게 뜬 채로 다들 멈춰버리는 거예요. 소름이 끼쳤어요.

 

23T5U130: 그게 용건의 전부는 아니지 않아? 여왕이 되기 싫은 캐롤이 왜 이 시간에 내게 전화를 걸었을지가 궁금한데.

 

23T는 대화를 조금 유쾌하게 이어나가려 하는 듯 보였지만, 캐롤 씨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이 단칼에 말했다.

 

롤 브라이트: 느닷없지만 23T 씨. 당신은 저를 좋아하지 않죠?

 

23T는 잠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표정 변화를 알 수가 없으니 23T의 반응이 정확히 무엇인지 지켜보는 내 입장에서는 알기가 어려웠다. 당황? 인정? 경계?

 

솔직히 말해 나는 당황스러웠다. 왜 저런 걸 갑자기 물으시는 거지?

 

롤 브라이트: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이미 알고 있어요. 오히려 그 사실 덕분에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야만 했던 거니까요.

 

23T는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천천히 말했다.

 

23T5U130: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는 당신을 경계해야만 해. 캐롤.

 

롤 브라이트: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대강 알 것 같아요. 위험하니까요. 사람의 정신을 섞고 악용할 수 있는 터치. 위험하기 짝이 없잖아요.

 

23T5U130: 맞아. 사실 난 네가 토키와를 조종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 토키와가 야가미를 죽이자는 강경책을 내놓는 건, 너와 나나시를 지키게끔 네가 토키와의 심리를 장악한 거라고 추측했지.

 

23T5U130: 그리고 계속 의심하고 있고.

 

나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표정과 손짓으로 최대한 내가 하려는 말을 전달하려 애썼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23T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한 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너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잖아."

 

롤 브라이트: 그런 일은 없었어요. 토키와 씨는 지금 많이 혼란을 느끼시지만 그를 조종한 적은 없어요. 여태까지 그를 방치했다니 상담사 실격이죠. 사실.

 

23T5U130: 네가 지금까지 힘내 왔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어. 네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모리와 야가미 같은 이들은 너를 경계하고 단정 지었지. 그렇지만 너는 항상 탑에서 살인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 했어.

 

23T5U130: 하지만 터치는 위험해. 그 사실 또한 변하지 않아.

 

롤 브라이트: 맞아요. 터치는 위험하죠. 저도 어느 정도는 동의해왔어요. 왜 다들 그토록 날 믿지 못하는 거냐고 의문을 가지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납득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터치는 제 얕은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23T5U130: 어떤 점에서?

 

롤 브라이트: 지금에 와서는 강제적인 터치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와 23T는 잠시 캐롤 씨의 말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간신히 이해한 뒤 나는 캐롤의 목소리가 꽤 싸늘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23T5U130: 캐롤. 지금 무슨 말을

 

롤 브라이트: 제대로 들으셨어요. 저 자신도 놀랐죠. 모순되는 의견이 동시에 떠올랐다가 다시 잠드는 게 반복되더라고요. 어지럽다고 느낄 정도였죠.

 

23T5U130: 

 

롤 브라이트: 왜 이걸 당신에게 말하냐고요?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알려져선 안 되는 내용을 함구하리라고 생각하니까요. 누구에게도 알려져선 안 되는 내용. 특히 내담자 분들이 알아선 안 되는 내용을.

 

캐롤 씨는 23T의 말을 끊고는 자신이 말을 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숨소리 한 번도 내지 않으려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의 험담을 엿듣는 것 같은 희미한 죄책감을 느꼈다.

 

지금이라도 귀를 막을까. 아니면 자리를 떠 버릴까 생각하던 나는 그게 지금 무슨 멍청한 생각이냐며 속으로 욕지기를 냈다. 그것은 선함이 아니라 무엇도 책임지고 싶지 않은 회피에 불과하리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미덕이 아니었다. 그녀가 내담자의 혼란을 염두에 두고 숨겨온 내용이라면, 개인의 나나시는 그녀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

 

롤 브라이트: 상담사가 정신적으로 문제를 호소하면 내담자들은 어떻게 해요? 완전히 길을 잃겠죠. 그래서 상담사는 언제나 잘 숨겨야만 해요. 자신의 모든 약점과 혼돈을 확실하게 묻어둬야 하죠.

 

롤 브라이트: 지금까지는 잘 해왔어요. 심지어 터치 도중에도 그림자 속으로 생각을 숨겼죠. 석연치 않던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의지할 만한 인물의 모습을 보여주려 애썼고 내가 무슨 괴물 취급을 받더라도, 누구나 나랑 맞먹으려 들고 예의 따윈 갖추지 않더라도 참았어요.

 

롤 브라이트: 그러고 있다 보니 갑자기 의문이 들더군요. 왜 항상 내가 참아야 하는 거지? 진흙탕 싸움을 하자고 온갖 치졸한 방법을 쓰고 우릴 죽이려 드는데. 기꺼이 어울려도 되잖아? 나에게 그럴 권리도 없나?

 

롤 브라이트: 나도 사람인데? 내게도 욕구가 있고, 감정이 있는데? 자존심을 개미굴 쑤시듯 찔러대는데도 화 한 번 낼 줄 모르는 사람이 나인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내가 하고 싶은 건? 이제 다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걸 손에 넣고 싶어.

 

내가 듣기에 캐롤 씨의 목소리는 뜨겁게 달군 니켈구 같았다. 주변을 마구 태우면서 들불처럼 열이 번지지는 않았지만, 손에 쥐는 순간 살가죽을 태우는 금속.

 

롤 브라이트: 지금까지 지켜왔던 가치도 그냥 내 위선에 불과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다 무슨 소용이냐는 거죠. 토기가 올라오는 것처럼 싸늘한 느낌이 뱃속에서부터 퍼지면 잔혹한 마음을 먹게 돼요. 만약 내가 괴물이 되는 것이 그렇게 두려워 나를 겁박하려 들겠다면 기꺼이 괴물이 되어 드리겠다고요.

 

롤 브라이트: 저희가 중심에 해하기를 꾀하고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나이다. 내가 저들을 심히 미워하니 저희는 나의 원수나이다

 

23T5U130: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캐롤.

 

다이얼로그 너머에서 놀란 듯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캐롤 씨와 23T가 암송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기에 눈만 조금 크게 뜰뿐이었다.

 

롤 브라이트: 성경을 외우시는군요.

 

23T5U130: 데이터베이스에 구절이 조금 들어 있어서 그래.

 

성경 구절? 그러고 보니 미도리카와에게 터치를 쓰실 때 하신 말씀도

 

롤 브라이트: 여호와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너무나 괴롭습니다… 너무 슬피 울어서 눈이 잘 보이지 않고, 몸과 마음이 슬픔으로 지쳐 있습니다.

 

롤 브라이트: 번민으로 신음하면서 세월을 보냅니다… 근심으로 기운을 잃었으며, 슬픔과 탄식으로 내 뼈가 점점 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나를 업신여기고 비방하는 말들을 들었습니다. 사방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내게 들려 옵니다. 저들이 악한 계획을 세우고,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롤 브라이트: 내 목숨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으니 나를 원수의 손아귀에서 건져 주시고, 나를 뒤쫓아오는 자들에게서 구하여 주소서. 주님의 얼굴을 주님의 종인 내게 비춰 주시고,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으로 나를 구하여 주소서. 아멘.

 

23T5U130: 네가 힘든 건 알지만 결국 네가 의지하는 구절의 끝은 용서야. 그걸 기억해야만 해. 캐롤.

 

롤 브라이트: 기억하고 있어요. 용서. 그리고 사랑이죠. 절대적인 사랑. 아가페. 그게 무엇보다 강한 건 저도 알아요. 그렇지만 사특하고 악한 일이 제 눈앞에서, 하와를 유혹하던 뱀처럼 어른거리곤 해요.

 

롤 브라이트: 더 얄궂은 점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시도할 수 있다는 거죠. 그치들이 아무리 내 머리 위에서 뛰어 논다고 해봤자 내가 손만 한 번 잡으면 그럴 수 없게 된다는 것.

 

롤 브라이트: 어떻게 보면 그 사람들은 내가 허락한 만큼만 날뛸 수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23T와 내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자 다이얼로그 너머의 캐롤 씨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롤 브라이트: 이런 오만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들더군요. 다른 사람들이 날 경계하고 시한폭탄처럼 여기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했어요. 이렇게 생각이 쉽게 바뀌면 저 같아도 안 믿죠.

 

23T5U130: 믿는 사람도 있을 거야. 너를 끝까지 믿을 수 있는 사람 말이야.

 

23T는 내 쪽으로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롤 브라이트: 그랬으면 좋겠지만 제가 언제까지 다른 분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네요. 변해가고 있으니까요. 더 차가워졌고, 가차 없어졌고, 야망을 위해 뭐든지 하고 싶다고 느끼게 되었고, 내 욕망에 조금 더 충실해졌으니… 다시 보면 저에게 어느 정도 미도리카와 씨의 성격이 섞인 걸지도 모르겠어요.

 

롤 브라이트: 내담자 분들과도 조금씩 섞였지만 이렇게 큰 변화는 없었는데. 이게 미도리카와 씨가 이야기하던 업보인 걸까요… 남을 해친 만큼 저에게 해가 돌아온 거죠.

 

23T5U130: 넌 미도리카와를 이해했잖아. 터치로 그녀의 내면을 본 만큼 그녀의 죽음에 누구보다 괴로워했어. 근거 없는 생각이야.

 

롤 브라이트: 과연 그럴까요… 그저 터치가 정확히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옛날의 제가 원망스러워요. 왜 남들과 다른 걸 알면서도 터치에 대해 더 알아보지 않으려 했을까요? 후후. 그렇게 별종 소리를 들어봤으면서… 내가 정말 별종일 가능성이 무서워서 외면해온 대가가 돌아왔다면, 그것이야말로 업보겠죠.

 

롤 브라이트: 과거의 제가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더 이상 외로운 건 싫어요. 이제 질렸다고

 

23T5U130: 캐롤

 

나오지 못한 중얼거림이 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캐롤 씨.'

 

롤 브라이트: 하아푸념만 늘어놔서 죄송해요. 거울에 대고 말동무라도 구해볼까 봐요. 그리고 거듭 죄송하지만, 또 염치가 없다는 거 저도 알지만.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요.

 

부탁? 23T에게?

 

23T5U130: 웬 부탁이야? 그것도 널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난 너를 응원하는 마음은 있더라도 네 부탁을 덥썩덥썩 들어주고 싶진 않아.

 

롤 브라이트: 그럴지라도 당신에게 밖에 할 수 없는 부탁이에요. 당신은 이 탑에서 유일하게 기계의 몸을 가지고 계세요. 그러니 터치는 당신에게 통하지 않죠. 힘도 카이다 씨보다 강하니 저 하나 꺾는 건 일도 아닐 테고요.

 

23T5U130: 잠깐. 캐롤? 나에게 뭘 부탁하려는 거야.

 

23T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눈치챘다. 23T는 캐롤 씨가 자신에게 하는 부탁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나 또한 짐작할 수 있었다.

 

롤 브라이트: 제가 언젠가 터치에 잡아먹힌 괴물이 된다면, 저를 막아 주세요.

 

23T5U130: 막다니. 무슨

 

롤 브라이트: 저를 힘으로 제압하세요. 독방에 처넣으세요. 저를 억제할 방법을 찾으시고 제게 조종당하고 있는 분들을 도와주세요.

 

캐롤 씨는 23T를 자신의 마지막 감시자로 삼으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23T5U130: 그러지 마.

 

롤 브라이트: 이것밖에 떠오르는 방법이 없어요.

 

롤 브라이트: 부탁이에요. 23T 씨. 저마저도 저를 믿을 수 없어요. 확신을 가지지 못하겠어요. 언젠가 변해버린다면 아무도 나를 막지 못할까 봐… 너무나도 무서워요.

 

23T는 한숨을 쉬는 듯한 음성을 내고선 다이얼로그를 장착시킨 손 말고 다른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기는 듯한 동작을 했다. 23T의 매끈거리는 머리에 23T의 기계 손가락이 닿았다.

 

23T5U130: 치사하고 일방적인 부탁이야. 캐롤. 어차피 터치에 당하지 않을테니 네가 막을 수 밖에 없을 거란 식이잖아.

 

롤 브라이트: 죄송해요.

 

23T5U130: 그래야지. 네가 지금 해야 하는 건 절대로 변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세게 먹는 거야. 자신이 없다고 내게 짐을 다 떠넘기다니

 

23T5U130: 그렇지만 거절하지 않겠어. 나도 나 말고 할 사람이 없다는 거 아니까. 네 의지를 존중하는 거야. 너도 힘들었겠지.

 

23T5U130: 약속할게. 네가 언젠가 자신을 잃어버리고 선을 넘는다면, 반드시 네 앞을 가로막겠어. 나뿐만이 아니야. 다른 사람과 함께 너에게 맞설게. 그리고 꼭 막을 거야.

 

나는 골머리를 썩히는 사람처럼 머리에 손을 올린 23T의 팔에 내 손을 얹었다.

 

바닥에서 고개를 들어 올려 내 얼굴을 본 23T가 어떤 표정을 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나도 내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 몰랐다.

 

만약 캐롤 씨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변한다면 내 손으로 직접 맞서겠다고 결의한 순간.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던 것일까.

 

다이얼로그 너머에서는 캐롤 씨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롤 브라이트: …고마워요. 23T 씨. 다른 분들껜 제가 이런 고민 하소연했다고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내담자 분들께는 더욱이요. 최후까지 숨겨주세요.

 

23T5U130: 노력해볼게.

 

나는 그 말을 똑똑히 들었음에도 이 대화를 엿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듣지 않았다면, 그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지레 귀를 막아버렸으면 아무것도 몰랐을 테니까.

 

23T가 전화를 끊은 후에야 나는 안도와 막막함이 뒤섞인, 복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반쯤은 탄식 같기도 했다.

 

나시: 하아 캐롤 씨가 저런 생각을 하고 계실 줄이야. 우리에겐 캐롤 씨가 있었지만 정작 캐롤 씨에겐 누구도 없었던 거야. 저렇게 흔들리고 계신데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어

 

23T5U130: 있잖아. 나나시.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지금 네가 캐롤과 거리를 두는 게 맞을까? 캐롤은 지금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는 것 같은데.

 

23T5U130: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녀가 얼굴을 묻을 만한 어깨를 제공하는 건 어때. 네 거는 뽀얗고 매끄러워서 탑승감도 좋아 보이는데.

 

23T가 내 어깨를 가리키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손을 써서 밖으로 드러나 있는 내 어깨를 감쌌다. 23T에겐 눈이 없었지만 나는 왜인지 집요하고도 끈적한 시선을 받은 것 같다고 느꼈다.

 

나시: 너 그거 성희롱 아니야? 왠지 조금씩 노바디의 성격이 나오는 것 같아

 

23T는 얄밉게 어깨를 으쓱였다. 너 진짜 왜 그래… 아니 너는 원래 그랬던 거구나

 

23T5U130: 적절할 때 밀고, 적절할 때 당기는 거지.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나시: 솔직히 말하자면 그게 건강한 관계일지 잘 모르겠어. 내가 캐롤 씨에게 의존하는 만큼 캐롤 씨가 나에게 의존하게 된다면… 내가 캐롤 씨를 한 자리에 고정하는 닻처럼 작용한다면. 내가 죽었을 때 캐롤 씨는 정말 멈출 수 없는 존재가 될 걸. 내 유령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죽은 사람과의 관계는 이따금씩 산 사람보다 강하게 작용하니까.

 

나는 노바디와 노네임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노바디의 유령을 끊어내지 못하고, 노바디를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로 만드면서까지 그녀를 되살리려 했던 노네임을.

 

23T5U130: 왜 네가 죽는 걸 계속 염두에 둬? 불길해지게.

 

나시: 그야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니까 그렇지. 모리가 감염에 허덕이는 이 상황에서는 더욱 그래. 다른 사람의 마음에 깊게 들어가는 건 그만큼 내가 사라졌을 때 마음에 깊게 상처를 낼 수 있다는 거야.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 말 또한 노네임과 노바디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시: 그렇지만 지금 캐롤 씨를 믿어줄 사람이 필요해. 캐롤 씨는 늘 우리를 돕는데 캐롤 씨에게 도움을 줄 사람은 없잖아. 내가 은혜를 입은 만큼 그녀를 지지하는 게 맞는 일일지도 몰라. 점점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걸 알고 있더라도, 할 수밖에 없는 걸까

 

나시: 또. 내가 죽기 전에 모든 것을 쏟아내 보고 싶은 마음도

 

23T5U130: 그리고 또?

 

23T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처럼 기계 손가락을 꼬아 다리를 만들고 그 위에 자신의 턱을 올리고 있었다.

 

나시: …이제 말 안 해.

 

23T5U130: 왜?

 

나시: 왜라니. 네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정말 캐롤 씨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렸잖아

 

23T5U130: 그냥 지금에 와선 네 생각이 바뀐 것 같은데. 어깨 빌려주고 싶다고.

 

나시: 어깨 운운 좀 그만 하라니까!

 

23T는 최대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려 주었지만, 그 의문은 모두가 잠에서 깨어나 모이는 와중에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캐롤 씨를 향하려는 시선을 억누르려고 애쓰며 계속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소소하게 즐겨 보아요 메리 크리스마스(크리스마스 지남)

 

작은 열쇠 사용까지 나가보려고 했는데 너무 진행 진행 진행만 하면 등장인물 심리 묘사를 너무 버리는 것 같아서 심리 묘사하다 보니 배보다 배꼽이 더 커졌습니다 ㅈ됐습니다 한 번 끊고 계속 진행합시다

 

나나시의 독립 시행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뒤늦은 캐롤을 즐기며 크리스마스+1 일요일을 집에서 따뜻하게 지내보아요

 

TMI: 캐롤 브라이트의 캐롤은 진짜 캐롤에서 따온 이름임 이렇게 지은 이유가 있었는데 초기 설정이 바뀌면서 그냥 캐롤이라는 이유만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