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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2

더 단크 타워 챕터 2 - 27

by 도타싫어! 2022. 1. 3.

 

이상하게 그 하루는 길게 느껴졌다.

 

실제로 하루가 길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도구를 발명해 슬롯머신에서 크레딧을 뽑아낼 방안을 연구했고, 23T와 대화를 나누다가 캐롤 씨의 통화를 우연히 엿들었으며, 작은 열쇠로 지하의 지하에 들어가선 크레딧으로 이루어진 산과 살인 게임의 진실을 보았다. 그게 정오까지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러나 내 하루를 길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그 뒤에 벌어졌다.

 

사람들이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양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게 다음 구절은 없다.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기와라 우시오: 이거 무슨 개 같은 일이야?!

 

데드 어 첨과 신음 소리. 철썩이는 파도가 지배하던 해변에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하기와라는 공기가 순간 뜨거워지고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모래가 그들에게 살짝 날렸다.

 

이토 유즈루: 으윽… 뭐야?

 

유즈미 나데시코: 잠깐만 기다려. 정체를 밝혀내고 올 테니까! 하기와라! 가자!

 

기와라 우시오: 아이씨! 난 같이 간다고 한 적 없는데!

 

하기와라가 그녀의 뒤를 따르며(사실 추월하며) 투덜댔다. 마유즈미는 묘하게 자신이 조금 더 당당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하기와라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던 물건의 잔해로 달려갔다. 불이 붙은 채로 망가지고 있는 물체는 약간 광택이 도는 붉은 물체 여러 개(였던 것)로 보였다.

 

유즈미 나데시코: 이게 뭘까?

 

기와라 우시오: 뭔가 매끈매끈한 약 같은데

 

하기와라와 마유즈미는 해변에 떨어진 무언가에게서 불이 붙은 부분을 적당히 갈무리하고 남은 것을 모아 보았다. 이상한 가루 같기도 했고, 깨진 캡슐 약 같기도 했다. 하기와라는 모리와 나이토의 상황을 보고 감염을 막을 수 있는 약 같은 것이 내려왔으나, 모종의 사유로 그게 중간에서 저지되었다고 추측했다.

 

그들은 조각난 약의 파편을 모아 보았으나 결국 모아봤자 의미 있는 양은 아니었다. 거기다 모래가 섞여 있었다. 모리와 나이토가 당한 감염은 항생제를 한 번 먹는다고 낫지 않으며, 항생제의 지속적인 복용이 필요할 것임을 고려하면 전혀 좋은 전망이 아니었다.

 

리 레이코: 그게 뭐지?

 

이토 유즈루: 뭐가 터진 거야. 뭘 주워 왔어?

 

기와라 우시오: 나쁜 소식이지. 너희들 감염 낫기에는 틀린 것 같아. 히무로와 야가미가 빨리 오기를 바랄 수밖에 없어.

 

유즈미 나데시코: 하지만 두 사람이 출발한지 몇 시간도 안 지났잖아

 

기와라 우시오: 그럼 뭐 큰일 난 거고. 이거 약 같으니까 모리. 입 열어 봐. 나이토 너도.

 

하기와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긁어모은 약 조각을 모리와 나이토의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두 사람은 입 안에 들어간 약의 파편과 모래를 꿀꺽 삼키고는 어느 정도의 안심과 그럼에도 지속되는 불안을 얼굴에 드러내었다.

 

리 레이코: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나?

 

이토 유즈루: 네가 기력을 얼마나 아끼는 데에 달렸어. 그리고 기력을 아끼는 데에 성공한다면 계속 살아야지. 어쩌겠어? 죽을 것도 아니고.

 

리 레이코: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공리뿐인데. 공리를 이다지도 해쳐 놓고서 뻔뻔하게 삶을 바라게 될 줄이야

 

기와라 우시오: 그러니까 왜 공리를 위해 존재하려 들었냐? 나처럼 삶의 모토가 웃음이었으면 얼마나 좋아.

 

리 레이코: 기차는 원래부터 공리와 맞닿아 있다 트롤리 문제라고 들어 보았겠지.

 

기와라 우시오: 네가 트롤 새끼라는 건 들어봤어.

 

이토 유즈루: 트롤리? 교과서에서 배운 것 같은데… 원래 다섯 명이 죽는 걸 한 명이 죽게 만들 수 있는 선로 전환기를 누르냐. 안 누르냐.

 

리 레이코: 그렇다 그 문제에서 뿐만 아니다. 기차는 언제나 이득을 증진시키는 선로로 나아간다… 기차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공리주의적 환경이다. 그러니 공리를 내 삶에서 떼어낼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리 레이코: 공리 없이 나는 용서받을 수 없다

 

모리는 약기운이 도는 것처럼 곯아 떨어지고 말았다.

 

유즈미 나데시코: 코 자자. 코오. 모리도 잘 때는 되게 순하게 생겼어. 히무로랑 비슷해.

 

기와라 우시오: 비슷하게 둘 다 슬리데린에 들어갈 법한 이상한 자식들이지. 애초에 누구한테 용서를 받는다는 거야? 우리한테?

 

이토 유즈루: 우리 말고 다른 사람한테 용서를 받아야 한다면 누굴까. 궁금하긴 하네.

 

이토 유즈루: 나는 망할 용서받기 글렀어 몸을 어디서 막 쓰냐고 아빠한테 한 소리 듣게 생겼다. 진정한 기사가 되지도 못하고 그 꼴이 났냐면서 말이야.

 

유즈미 나데시코: 넌 이미 진정한 기사야. 나이토! 모리를 구했잖아. 해변에 처음 왔을 때 야가미한테서 우리를 지켰고.

 

나이토는 마유즈미의 말에 애써 웃어 보았다.

 

이토 유즈루: 말만은 고맙네 그래도 아빠의 기준선은 안 변해. 진정한 기사라는 기준선에 결국 난 미치지 못했다고. 앞으로도 그럴 걸.

 

이토 유즈루: 절대로 나를 인정해주는 일은 없을 거라고

 

나이토 또한 모리와 비슷하게 말을 중얼거리다가 차마 다 끝마치지 못하고 잠에 빠졌다.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기와라는 입을 샐쭉 내밀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와라 우시오: …가재 괴물 독에 취하면 원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 과거사를 의미심장하게 읊다 조는 증상이 생기는 거야?

 

유즈미 나데시코: 아니. 그런 증상이 생기지는 않을 것 같은데?

 

기와라 우시오: 마음만 같아서는 둘 다 깨워서 이 달달한 비밀들을 듣고 싶은데. 아으으윽!

 

유즈미 나데시코: 그러지 마. 하기와라! 둘이 곤히 자고 있잖아. 마치 두 명의 아기천사 친구들 같아. 잘 때만큼은 고통을 잊고 둘 모두

 

마유즈미는 하기와라를 만류하다 말고 자신의 고개를 홱 돌려 숲 쪽을 경계했다.

 

기와라 우시오: 응애 천사 같은 소리 하네. 난 이 둘이 친구 먹는 거 별로야. 나이토 이 자식이 모리 꼬임에 넘어간다고 생각해 봐. 공리를 실현하는 게 진정한 기사라 주장하는 괴물의 탄생이라고! 오 지저스 크라이스트 할렐루야. 뭐야. 마유즈미. 왜 그래?

 

마유즈미 쪽을 본 하기와라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마유즈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유즈미 나데시코: 그냥 기분이 이상해서

 

마유즈미는 머쓱하게 웃으면서도 숲을 계속 흘끗거렸다. 사실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만약 카이다가 근처에 있다면 그녀가 카이다를 주시하고 있다는 티를 팍팍 내서 카이다를 위축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생각에 마유즈미는 모리와 나이토를 간호하다 말고 주기적으로 고개를 홱홱 돌려 숲 쪽을 보았다.

 

사실 카이다는 아직 그곳에 없었기 때문에. 전혀 쓸모없는 일이었다.

 

 

 

 

 

 

후루미나미는 의기양양히 웃었다.

 

루미나미 나몬: 결국 내 덫이 이겼어! 플라잉 로봇을 보급 특권 안에 쑤셔 넣어서 23T는 하나로밖에 상대할 수 없었지만 이 정도 연출이면 충분히 가치 있었지. 그들은 어떻게든 항생제를 살 크레딧을 확보했지만, 꽈광! 후루미나미의 극적인 사보타주!

 

나리 케이토: 고작 그렇게 놀겠다고 그런 위협을 감수하는 게 말이 안 돼.

 

루미나미 나몬: 그래. 나도 이번에는 욕심을 너무 부린 것 같더라. 또 피곤해… 당분간은 다들 내버려 두자. 어차피 곧 누군가가 죽을 테니까. 분명 그렇게 될 거라고! 이제 구경만 하면 돼.

 

후루미나미와 카나리는 휴게실에서 숨을 골랐다.

 

나즈키 시노부: 힘들어 죽겠어

 

칸나즈키가 후들거리는 팔을 공중에 휘적이자 그녀의 남는 소매가 허공에 펄럭였다.

 

나리 케이토: 이 녀석은 어떻게 할 거야? 감염으로 모리가 죽으면 같이 죽게 내버려 둬야 해?

 

루미나미 나몬: 살릴 방법을 잘 찾아봐야지. 아주 조금 배신하긴 했지만, 내 계획을 살짝 망쳐서 박진감이 생겼거든. 일단 방에 데려다 주자.

 

나리 케이토: 엑. 싫은데

 

루미나미 나몬: 그래도 해! 우린 착한 사람들이니까.

 

바라 쿠리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어. 토키와! 토키와. 전화 좀 받아!

 

이바라는 계단 위를 보며 소리쳤다. 나, 캐롤 씨, 이바라는 전혀 안심할 수 없었다. 누구도 계단 위에서 우리에게 답을 주지 않았고 나는 무엇인가가 바닥에 쓰러지는 듯한 꽈당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산이 있었음에도 플라잉 로봇의 전파를 막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롤 브라이트: 토키와 씨와 23T 씨가 전부 연락을 받지 않으시는 건 우연이 아니겠죠. 아마 두 분 모두 무력화되신 것 같아요. 빨리 가서 도와줘야 하는데.

 

나, 캐롤 씨, 이바라는 불이 여전히 활활 타고 있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올라가려 하다간 온몸에 화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나시: 불이 꺼지기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롤 브라이트: 적어도 지금은 올라가기 어려울 것 같아요. 크레딧 상점에 소화기가 있는 것도 아니니

 

바라 쿠리스: …진짜 짜증 난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인 이바라가 문득 그렇게 말했다. 캐롤 씨는 이바라의 말에 동의했다.

 

롤 브라이트: 상황이 무척 나쁘긴 해요.

 

바라 쿠리스: 무척 나쁜 정도가 아니라 최악이야. 산처럼 쌓인 크레딧을 써서 항생제를 사면 뭐해? 모리를 살리지도 못하는데

 

바라 쿠리스: 우리가 살아남으려고 얼마나 노력해봤자 후루미나미 한 사람도 이기지 못하잖아. 결국 모든 게 후루미나미 마음대로 돼.

 

나는 그녀가 단지 짜증을 내는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화가 났고, 또한 동시에 좌절하고 있었다.

 

나시: 기운 내. 이바라. 그래도 거의 성공할 뻔했잖아.

 

바라 쿠리스: 기운 내라고? 나나시.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너 곧 죽게 생겼다고. 어떻게 기운을 내!

 

아야.

 

롤 브라이트: 이바라 씨. 너무 극단적인 생각이신걸요.

 

캐롤 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표정을 살짝 굳혔다. 그녀 또한 부정은 하지만 이바라의 생각에 근본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

 

바라 쿠리스: 난 그걸 '사실'이라고 불러. 캐롤. 여기서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건 그냥 현실도피야.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지.

 

바라 쿠리스: 결국 초고교급 재능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 할 수 없어. 후루미나미는 인격을 바꾸는 것처럼 필요할 때에 필요한 사람이 되는데 나는 장의사조차 완벽하게 못 해. 난 그냥… 나야. 이바라 쿠리스. 초고교급들과 부대끼기엔 어중간한 사람.

 

바라 쿠리스: 차라리 후루미나미가 나를 연기하면 나보다 더 나은 장의사가 되겠지.

 

나시: …이바라.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건강한 일이 아니야.

 

바라 쿠리스: 그래.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렇지만 난… 이제 내가 뭘 해야 될지도 모르겠어.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

 

바라 쿠리스: 애초에 장의사는 사람이 죽기까지 기다리는 일이야. 죽음을 막는 일이 아니라. 그러니 나는… 사람 죽을 때까지 구경만 하는 사람인 거지. 태어나서부터 말이야.

 

바라 쿠리스: 도움이 못 돼줘서 미안해. 나나시. 그렇지만 내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 그러지 못할 테니까.

 

이바라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의 허리 옆에 꽉 쥐인 채 머무는 두 주먹이 작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바라 쿠리스: 사람 떠나보내는데 추억이 많으면 더 힘든데

 

우리는 23T가 깨어나서 소화기로 계단의 불을 끄기 전까지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실 불이 다 꺼지고 나서도 서로 할 말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명백하게 패배한 이상 농담도 희망도 우리의 입에는 오르지 않았다. 심한 꼴을 당한 토키와를 봤을 때도 우리는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했을 뿐이었다.

 

논의 끝에 우리는 토키와를 그의 숙소로 데려가, 그의 전신을 욕조에 넣고 물을 채워 소화기의 내용물을 씻어냈다. 옷을 벗겨야 하냐 말아야 하느냐를 놓고 우리는 불편하고 애매한 침묵을 잠깐 거친 뒤. 그냥 옷을 입은 채로 넣은 다음 옷째로 몸을 말리자고 합의했다.

 

그가 새하얀 몰골에서 원래의 모습을 되찾자 욕조 속에서 그가 눈을 떠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그것 말고는 무척 평이했다. 토키와는 자초지종을 들은 이후 스스로 몸을 씻었고, 온몸이 물로 푹 젖은 상황에서 머리만을 수건으로 말리며 욕실에서 나왔다.

 

23T5U130: 몸은 말려야 하지 않겠어? 모노로그에게 말하면 너한테 새 옷을 줄 텐데.

 

키와 아유키: 그럴 시간 없어. 얘기가 끝나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먼저 휴게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최대한 명료하게 말해볼게.

 

토키와는 그의 숙소에 있는 의자에 몸을 얹었다. 그의 전신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뚝. 뚝. 뚝. 두통이 있는 사람이 열을 재는 것처럼 자신의 이마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토키와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머리를 소화기로 맞아 기절했으니, 알고 보니 정말 두통이 있는 사람이 열을 재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었다.

 

키와 아유키: 계단으로 올라가기 전 일은 너희도 봤지? 그 뒤에 나는 휴게실로 들어갔어. 문을 열자마자 카나리가 휘발유를 몸에 끼얹은 다음 날 태우겠다고 협박했지. 나는 카나리를 역으로 회유하고 우리 편으로 만들고 싶었고 거의 성공했어. 후루미나미가 날 저지하고 몸에 불을 질렀지. 난 놀라서 날뛰다가 소화기 내용물을 온 몸으로 뒤집어쓰고 앞을 보지 못하는 사이에 머리를 가격당했어. 후루미나미가 소화기로 때린 걸 거야.

 

롤 브라이트: 세상에.

 

정말 세상에였다.

 

키와 아유키: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어. 난 분명 정신을 잃기 전에 항생제를 해변으로 배송했는데 항생제가 도착하지 않고 파괴되었다는 건, 아마 보이지 않던 후루미나미의 플라잉 로봇이 해변에 있다는 걸 의미할거야. 후루미나미의 것인 줄 알았던 플라잉 로봇이 카나리의 것이었고 정작 후루미나미의 플라잉 로봇은 줄곧 해변에 있었던 거지. 후루미나미가 항생제 사태를 예측하고 미리 해변에 보내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모리에겐 항생제가 도착하지 못했어.

 

바라 쿠리스: 아

 

나는 아… 조차 말하지 못했다.

 

키와 아유키: 작은 열쇠와 함께 나한테 주어진 구매의 권리도 사라졌고. 어차피 크레딧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더라도 항생제가 이제 없는 이상 해변의 모두는 도울 수 없고

 

토키와는 말을 잇다가 막막하다는 듯이 입을 다물고선 센 콧김을 내뿜었다. 한숨을 소리 없이 쉬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키와 아유키: 솔직히 말해서 더 이상 방법이 없어. 보급 특권은 후루미나미와 카나리가 가지고 있고 항생제를 보낼 방법 자체가 이젠 없어.

 

롤 브라이트: 양호실에서 항생제를 찾아서 보급 특권으로 보낼 수 있다면요?

 

나시: 후루미나미와 카나리가 보급 특권의 권한을 가진 이상 어려워요. 이제 두 사람은 다시 방에 틀어박힐 텐데 기물파손은 불가능한걸요.

 

키와 아유키: 그들을 강제로 꺼낼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토키와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 나를 꺼림칙하게 만든 것은 기력이 없지만 선량한 사람의 눈을 하고 있던 그가, 기력이 생겼지만 조금 꺼림칙한 결단을 내린 사람의 눈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몇 초만에 사람의 인상이 바뀌었다. 

 

키와 아유키: 우리 중 기관총을 가진 사람이 있을 거라고. 후루미나미와 카나리가 말했어.

 

기관총?

 

우리 중에?

 

나시: 그건 말도 안 돼!

 

나는 그렇게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기관총은 3000만 크레딧인데. 그런 거금을 우리 중 누군가가 가지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키와 아유키: 난 너희를 의심하는 게 아니야. 그렇지만 후루미나미와 카나리는 기관총을 정말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에게 쏘고도 남았을 사람들이야. 적어도 경고사격을 하고도 남았을 테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나한테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지르는 게 아니라 총을 들이대는 게 더 편했을 텐데.

 

롤 브라이트: 그렇지만 저희에겐 그만한 양의 크레딧이 없는걸요? 기관총은 3000만 크레딧이었어요.

 

키와 아유키: 나나시가 후루미나미에게서 들었댔지? 카나리가 4억 크레딧. 후루미나미가 6000만 크레딧. 어쩌면 현실 세계의 재력에 비례하여 받는 크레딧이 달라지는 걸지도 몰라. 우리 중에서는 그만한 재력을 가진 사람이 없는 것 같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지.

 

키와 아유키: 그러니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어. 만약 기관총을 가지고 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쓰지 않은 거라면 마지막의 마지막에라도 사용하자. 제발.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잖아

 

나는 당황한 기색으로 토키와의 방에 모인 모두를 돌아보았다. 설마 정말 우리 중에 기관총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23T와 토키와가 당하는 것을 그저 지켜봤다는 뜻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무엇 때문에?

 

어차피 모리가 감염으로 죽을 테니까. 그럼 더 이상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으니까…?

 

키와 아유키: 굳이 어렵게 가자 이거지? 알겠어. 이해했어. 그럼 나부터 시작할게.

 

키와 아유키: 나에겐 4만 크레딧이 있어. 아. 다시 생각해보니 남은 크레딧의 양은 의미가 없네. 3000만 크레딧을 기관총에 쓰고 남은 게 4만 크레딧인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키와 아유키: 아무튼 난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용돈도 조금 받았어. 돈을 많이 쓰는 취미는 없어서 저축이 쌓이긴 했지만 많진 않았어. 그래서 4만.

 

키와 아유키: 다음은 23T인데. 로봇이 돈을 가질 수는 없을 테니 23T는 크레딧이 없을 테고

 

23T5U130: 뭐?

 

23T가 즉각적으로 반문하자 토키와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키와 아유키: 내 말은, 크레딧의 지급이 계좌의 입금 금액이라면 로봇이 계좌를 만들 수는 없으니 너에겐 크레딧이 없을 거라고.

 

23T5U130: …다들 나를 향한 멸칭으로 곧잘 깡통이나 로봇을 고르곤 하는데, 토키와. 난 로봇이 아니라 인공지능이야.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계 안에 들어간 사람에 가까워.

 

키와 아유키: …미안해. 내가 말실수를 했어.

 

토키와가 23T에게 고개를 숙였다.

 

23T5U130: 괜찮아. 내가 일찌감치 말을 안 한 탓이지.

 

내가 급격하게 싸해진 공기 속에서 멈추고 있던 숨을 다시금 쉬기 시작할 때. 토키와는 다음 말실수를 향해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다.

 

키와 아유키: 이바라. 네 재력은 어때? 혹시 부자야?

 

바라 쿠리스: 아니. 우리 집이 대대로 장의사 가업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부유한 편은 아니었어. 먹고살만한 정도.

 

바라 쿠리스: 용돈은 받는 족족 썼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것도 용돈을 받지 못하게 된 뒤론 내가 혼자 생활비를 벌었어. 내 생각보다는 수입이 괜찮았지만 3000만 크레딧이 들어올 만큼은 아니야.

 

키와 아유키: 어쩌다 못 받게 됐는데?

 

이바라는 머쓱하게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바라 쿠리스: …저기. 토키와. 이 분야는 조금 민감한 사안이라서 말이야… 나중에 개인적으로 얘기할게.

 

키와 아유키: 안 돼.

 

토키와는 이바라의 말을 단박에 잘라 버렸다.

 

바라 쿠리스: 안 된다니. 왜 안 된다는 거야?

 

키와 아유키: 단지 말하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 대화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되는 게 이상하지. 지금 우리는 후루미나미와 카나리에게 마지막으로 맞설 수 있는 수단을 누가 가졌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기분 때문에 예외를 줄 순 없어.

 

이바라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을 만면에 드러냈지만 토키와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뭔가 심상치 않은 사연이 있을 것 같다는 직감에 나는 토키와에게 무언의 마침표를 눈으로 쏘아 보냈다. 잠시 멈춰 보자고, 너무 빨리 나가는 것 같다는 마침표. 그러나 토키와의 문장은 쉼표조차 붙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바라 쿠리스: 그게. 용돈을 받지 못하게 됐다는 건 내가 큰 사고를 쳐서 용돈이 끊겼다는 게 아니라. 나에게 용돈을 주던 사람들이 여의치 않게 그러지 못하게 됐다는 뜻이거든. 그런데 우리 집안 수입은 괜찮았다고 내가 말했지? 그러니까 이해 가?

 

키와 아유키: 그래. 이해했어. 계속 말해.

 

토키와가 늦게 나오는 요리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박자를 맞춰 두드리기 시작하자 이바라는 표정으로 불쾌함을 표현했다. 누구나 눈치를 챌 법한 상황이었다. 늘 친절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있던, 적어도 우리에 대해서 생각하던 토키와가 누가 봐도 집요하게 이바라의 과거를 캐고 있으니 분위기를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라 쿠리스: 나 진짜 이 이상은 말하고 싶지가 않다니까.

 

롤 브라이트: 토키와 씨. 저도 이바라 씨에게 동의해요. 굳이 더 추궁할 필요가 있을까요?

 

토키와는 잠시 입을 닫은 채로 이바라를 응시하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얼굴의 근육이 거의 움직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키와 아유키: 이바라. 너 기관총 가지고 있는 거야?

 

바라 쿠리스: 말도 안 되는 억지야! 너 지금 무슨 히무로 흉내 내? 내가 걔랑 대화를 나눠 봤는데. 이거 하나만 말해두자. 걔는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정보를 캐려는 사람은 아니었어!

 

키와 아유키: 말 돌리지 마. 네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나 말해. 왜 용돈을 못 받게 된 거야?

 

나시: 너도 알잖아. 토키와. 이바라한테 3000만 크레딧이 있었다면 이바라는 기관총을 사기보다 상황을 잘 본 뒤에 항생제를 살 사람이야.

 

키와 아유키: 그건 아무도 몰라. 나나시. 그러니까 나는 들어야겠어. 이바라. 대답해.

 

바라 쿠리스: 그래. 말해줄게! 아빠랑 엄마랑 할아버지 할머니에 남동생까지 다 죽었어. 대가족이 다 같이 살던 집에 나만 남았지. 그러니 용돈을 못 받았다. 유령한테 돈을 어떻게 받아! 됐냐?!

 

토키와는 머리를 움찔 떨고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 토키와가 아닌 어느 누구더라도 그 자리에서 변명을 꺼내지는 못했을 것 같았다. 그럴 만한 내용이었다.

 

키와 아유키: 미안해. 이바라. 민감한 내용일 텐데 내가 너무 경솔했어… 그지만 그게 답일지도 몰라. 유산을 받았을 테니까.

 

나와 캐롤 씨는 동시에 허억 하고 놀라는 소리를 냈다. 이바라는 토키와의 말에 이마의 힘줄을 세우고서는 언성을 크게 높였다.

 

바라 쿠리스: 이 새끼가 지금 나랑 해 보자 이거지!

 

키와 아유키: 아니! 필요한 질문을 했던 거야… 미안하지만 이해해 줬으면 해. 아무튼 지금까지는 이바라가 가장 유력한 후보지만, 실증은 없어.

 

이바라는 이를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갈고는 토키와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녀는 이후 토키와의 숙소 안에서 나가기까지 한 마디도 더 하지 않았다.

 

키와 아유키: 나나시는 기억이 없으니까 증언에 무리가 있을 것 같고. 애초에 2000만 크레딧이 있다고 말했으니 후보에서 제외돼. 캐롤 씨는요?

 

롤 브라이트: 부모님이 유복하긴 했지만 저 본인의 자산은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상담사는 급료를 보며 하는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키와 아유키: 그럼 캐롤 씨일 확률도 낮네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네. 탑에서는 너희들의 진위를 확인할 수가 없으니까 진실과 거짓 여부를 계속 파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대답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아무런 진전도 없어.

 

키와 아유키: …그러니 제발. 뒤늦게라도 마음을 바꾸길 바랄게.

 

토키와는 그렇게 말을 맺으며 우리에게 허리를 숙였다.

 

23T5U130: 나도 그렇게 되길 바라. 일단 해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해야 하니 모니터실에 가려하는데. 따라올 사람 있어?

 

바라 쿠리스: 같이 가. 나도 걱정돼. 제발 아무 일도 없어라

 

23T와 이바라는 토키와의 숙소를 떠나 모니터실로 향했다. 나는 허리를 다시 편 토키와를 보며 그가 평소의 토키와와는 어딘가 다른 것 같다고 느꼈다. 전신이 푹 젖어있었고 기절의 여파가 아직도 가시지 않아 묘하게 음울한 인상이 된 것은 차치고서도, 다른 사람의 감정을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 듯한 토키와의 태도는 정말 의아했다.

 

나시: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토키와? 너 마치 다른 사람 같아.

 

키와 아유키: 이제는 좋은 사람 말고 좋은 리더가 되고 싶어서.

 

롤 브라이트: 기준을 맞추기로 하신 건가요. 토키와 씨?

 

캐롤 씨는 토키와의 숙소에서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토키와에게 물었다.

 

키와 아유키: 네.

 

롤 브라이트: 행운을 빌게요.

 

키와 아유키: 고마워요. 저도 행운을 빌어 드릴게요. 캐롤 씨.

 

나시: 나도 행운을 빌게. 토키와.

 

정확한 맥락은 알 수 없었지만 행운을 비는 게 나쁜 결과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와 아유키: …나도 행운을 빌게. 나나시.

 

토키와는 내가 걱정된다는 눈빛을 보냈다.

 

 

 

 

 

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저희 이야기 좀 해요.

 

문을 두드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깨어났다. 잠을 청한 지 2시간 정도가 지나 있었다. 2시간! 죽기 전의 귀중한 시간을 잠에 낭비하다니 내 미련함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의자에 앉았는데 그냥 잠에 들어 버리다니.

 

토키와의 숙소에서 나온 뒤 나는 양호실에 들러서 항생제를 입수했고 희망에 매달리는 것처럼 휴게실에 들어갔다. 그러나 보급 특권은 활성화되어있지 않았다. 크레딧 상점을 통해 항생제를 배송하는 것이 실패한 이상 우리 쪽에서 더 줄 수 있는 도움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나는 막막함에 내 숙소 안으로 들어가 생각에 빠져 있다가 그만 2시간 동안 잠에 빠졌고, 깨어나 보니 내 숙소의 문 앞에는 캐롤 씨가 있었다.

 

일단 그녀가 내가 자는 사이에 얼마나 기다렸을지 모르니 일단 열고 봐야겠다는 생각과 그녀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내 결심이 논쟁을 벌였다. 나는 거절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그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어는 봐야 한다는 생각에 문을 열었다.

 

나는 어색하게 캐롤 씨를 반겼다.

 

나시: 들어오세요… 나나시의 방이랍니다.

 

롤 브라이트: 일전에 온 적이 있는데 새삼스레 왜 그러세요? 아무튼. 캐롤 브라이트입니다.

 

캐롤 씨는 멜빵치마를 살짝 옆으로 당기며 고개를 숙여. 드레스를 입은 숙녀처럼 인사했다. 나 또한 신사들이 곧잘 하는 팔을 한 번 흔들고 어깨까지 올리는 인사로 응하려 했으나, 나는 그걸 어떻게 하는 지 몰랐기에 이윽고 뻣뻣하고 어색하게 그녀를 맞이하게 되었다.

 

나시: 아무튼 할 이야기가 뭔지 알려주세요.

 

롤 브라이트: 오후가 된 이후로 사색하는 시간을 좀 가졌어요. 할 이야기가 많지만 일단은 당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해야 할 일로 시작해 볼까요?

 

나시: 넵.

 

나와 캐롤 씨는 앉을 새도 없이. 내 숙소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롤 브라이트: 상황을 직시하자면 당신은 지금 어떤 때보다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어요. 항생제를 보낼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가 무산되었고, 보급 특권에 접근할 수 없으니 항생제를 보낼 방법도 더 이상 없죠. 후루미나미 씨와 카나리 씨는 이제 방에 틀어박혀서 누군가가 감염으로 죽을 때까지 기다리면 돼요.

 

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와 야가미 씨가 빠르게 시련을 끝마치시지 못하신다면… 모리 씨에겐 가망이 없어요. 당신 또한 마찬가지고요.

 

나시: ….

 

나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내가 정말 곧 죽는단 말인가?

 

롤 브라이트: 졸리진 않으세요? 지금 새벽을 지새우신 채로 계속 깨 계신 것 같은데요.

 

나시: 사실 지금 2시간 졸았어요. 죽기 전의 시간을 잠으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하… 자면서 편안하게 죽는 건 괜찮을 것 같으니 그때 잠에 들어 볼게요. 그럼 영원히 자는 셈이 되겠지만요.

 

나는 공포에 떨기보다 차라리 유쾌했다.

 

이대로라면 곧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보자고 애쓰기 시작하자 나는 내가 이미 받아들인 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애초부터 나는 탑이 두려웠다. 절대로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죽은 모습을 상상했고… 그러다 자연스레 내가 언젠가 죽을 거라는 것을 대전제에 놓았다.

 

그것은 자포자기와 조금 닮아 있었다. 결정론적 자포자기. 지금 나는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힘껏 발버둥 치겠지만 현실적으로 내가 끝까지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사고방식 속에서 내가 죽음을 향해 느낀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더는 살지 못하리라는 아쉬움. 내 삶의 비밀. 캐롤 씨의 정체. 카텟 기관에서 벌어진 일 같은 것을 이제는 알 수 없으리라는 아쉬움. 그것이 공포 그 자체보다 컸다.

 

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는 안 죽어요.

 

캐롤 씨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게 단순히 내가 벌벌 떨면서 우는 것을 막기 위해 하는 말이란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나도 내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리면서 무섭다고 잔뜩 쪼그라들지 않는 이유가 의아했다.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며 처음부터 바닥에 쓰러져서 울더니 정작 죽음을 앞에 두자 초연하다니. 이렇게 이상한 꼴도 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올 게 오는구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이 마지막에서야 평화를 찾는 것 같은 기분이라는 생각이 뒤따르자, 그게 그야말로 나의 처지와 같다는 사실에 형연하기 어려운 기분을 느꼈다.

 

나시: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래도 마지막엔 잘 받아들이려 해 봐야겠죠?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다섯 단계가 있었던 것 같은데. 뭐였더라

 

롤 브라이트: 부정. 분노. 공포. 흥정. 그리고 수용이었어요.

 

나시: 네. 맞아요. 그런데 저는 처음 이 탑에 오자마자 공포까지의 단계를 너무 빠르게 겪었고, 흥정은 방금 하다가 실패했죠. 그러니 이렇게 빨리 수용하게 되네요.

 

롤 브라이트: 저는 아직 부정 단계에 있어요.

 

나시: 네? 캐롤 씨가 왜 죽겠어요. 물론 나이토도 감염되었지만 그렇게 위독하기까진

 

롤 브라이트: 제 죽음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의 죽음을 부정하고 있어요.

 

나시: 아까부터 무슨 일이 있으신지 신경이 쓰여요. 괜찮으세요?

 

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가 어떻게 되실지도 모르는데 괜찮을 리가 없죠.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채 말하는 캐롤 씨를 보고 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음. 캐롤 씨가 나를 걱정한단 말이지. 내담자와 상담사 사이의 유대감인 모양이야. 살인 게임이라는 극단적 환경에 있으니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기는 해.

 

그런데 내가 죽는 일에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건… 기쁘지만. 그 어딘가 너무 나가지 않았나? 내가 예상했던 캐롤 씨의 반응보다 조금 더 격한 것 같은데

 

나시: 제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생각하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시: 아… 싫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궁금해서

 

롤 브라이트: 일관되게 나를 도와줬고, 이 탑에서 날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죠. 지금까지는. 어쩌면 앞으로도.

 

내가 그런 사람이던가?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았고,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캐롤 씨는 내게 터치의 소질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내겐 아직 터치가 나타나지 않았다. 내겐 말솜씨도 부족했고, 다른 사람을 안정시키는 상담사의 일에 적합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무(無)에서부터 서서히 자신을 채우기 시작한, 미숙한 사람에 불과했다.

 

나시: 제가 캐롤 씨를요? 절 너무 과대평가하고 계신 것 같아요. 저는 그냥 감정이랑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좋은 점 하나 없어요.

 

롤 브라이트: 당신에겐 좋은 점이 많아요. 또 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죠. 23T 씨의 곁에서 제가 하는 말을 들으셨잖아요.

 

오싹함.

 

아주 잠시 동안 나는 태연하게 말하는 캐롤 씨를 보고, 오싹함을 느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라는 오싹함. 죄를 들킨 것 같은 위기감이었다.

 

일거수일투족을 엿보인 듯한 기분 속에서 오싹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자신을 엿본 사람과 친근하다고 한들 그럴 테고 또 친근함 탓에 오히려 오싹함을 느끼는 사람 또한 있을 터였다.

 

나시: 어떻게?

 

롤 브라이트: 23T 씨와 대화를 했을 때 카지노의 배경음악이 들렸어요. 그런데 크레딧의 저장고에서 나나시 씨의 말에 의하면 만 크레딧을 따신 것 같았어요. 그럴 시간은 새벽뿐이죠.

 

롤 브라이트: 이후에 카지노로 내려오실 때도 23T 씨와 두 분이서 내려오셨고요. 그러니 정황상 두 분이 함께 계셨다고 봐야겠죠. 당신 뒤를 밟은 건 아니에요. 미행은 당신이 보급 특권을 처음 찾은 날의 것만으로 족하니까.

 

롤 브라이트: 오직 추론으로 알아냈어요. 당신은 제가 한 말을 들은 거죠? 숨기려고 했던 비밀들. 제 혼란과 두려움들을.

 

나시: …저 지금 조금 소름 돋았어요.

 

추론으로 그 사실을 들은 것은 그렇게 무서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지금 이 대화와 캐롤 씨와의 관계 자체가 어딘가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정확히 무엇이라고 정의하긴 어렵지만, 무언가가 변화하고 있다는 직감이 나를 스쳐갔다.

 

롤 브라이트: 당신도 제가 무섭나요?

 

캐롤 씨가 한 발자국 내게 다가오면서 물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것도 드러나있지 않았다. 그녀의 질문은 뒷부분의 어조가 잠깐 높이 올라갈 뿐. 무언가를 궁금해하는 듯한 기색은 드러나 있지 않았다. 마치 질문의 답을 미리 정해두고 질문하는 듯했다.

 

나시: 화난 얼굴로 제게 말씀하실 때만큼은요

 

캐롤 씨는 아무런 표정 없던 얼굴을 한결 풀며 말했다.

 

롤 브라이트: 화난 게 아니에요.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어요. 그러니 절 무서워하지 마세요

 

나시: 변명을 한 마디만 하자면, 일부러 들은 건 아니었어요.

 

내 말은 내가 듣기에조차 변명처럼 들렸다.

 

롤 브라이트: 저도 알아요. 주변에 듣는 이가 있는 줄은 몰랐던 제 잘못이었죠. 또 당신이 듣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요.

 

캐롤 씨는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나는 그 표정 안에서 안심과 후련함을 보았다. 그게 왜 그 안에 있는지는 감을 잡지 못하는 채로.

 

롤 브라이트: 그렇게 숨기고 싶었던 비밀이었는데, 내담자 분들을 생각하면 숨겨야만 하는 비밀이었는데. 사람 마음이 어찌나 간사한지 드디어 나와 가까운 누군가가 내 속내를 들었구나 하고 해방감이 들더군요.

 

롤 브라이트: 마음을 썩이던 나의 비밀을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건, 무척 불안하면서도 안정을 주는 일이었어요. 누군가는 내 그림자를 알고 있지만, 그러니 세상에 홀로 남겨지지 않은 기분

 

나시: 캐롤 씨는 원래부터 혼자가 아니었던 걸요? 토키와랑 마유즈미도 있고, 이바라도 있고.

 

롤 브라이트: 당신도 있었죠. 그렇지만 터치에서도 숨긴 제 공포를 들은 건 당신과 23T 씨뿐이에요. 그중 23T 씨는 절 경계하시죠. 당신밖에 없어요. 내 가장 깊은 비밀을 알고서도 내 곁에 있는 건 오직 당신뿐이에요.

 

롤 브라이트: …지금 당신은 내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미련이고,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고리예요.

 

그녀가 내게 한 걸음씩 내딛자 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씩 뒤로 나아갔다. 그녀가 왜 다가오는지도 알지 못하고 그렇게 했다. 아니면… 본능적으로 알아챘기에 뒤로 나아간 것일지도 몰랐다.

 

롤 브라이트: 제가 가지고 있던 욕구와 감정이 무엇인지 당신은 어쩌면 짐작할지도 모르죠.

 

내가 뒷걸음치는 것을 따라 그녀가 서서히 내게 다가오자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마 캐롤 씨가 아무런 말 없이 내게 얼굴을 가까이 하셨더라도 달아오르기는 마찬가지였겠지만. 내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며 서서히 나를 막다른 길목으로 몰자 더 빠르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마침내 내 등이 벽에 닿고 뒤로 물러날 구석이 더는 없게 되자 캐롤 씨는 나와 단 한 걸음을 남겨두고 내 앞에 섰다. 심장은 쿵쿵 뛰어서 주체가 되지 않았다. 흉곽을 뚫고 심장이 터져 나올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게 두근거림 때문인지, 묘한 긴장감과 두려움 때문인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캐롤 씨가 왜 내게 다가오는지조차 감을 잡지 못해 그녀를 올려다보며 눈만 깜빡이고 있자. 그녀는 천천히 내게 말했다. 두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섬세한 눈매. 높게 솟은 코. 비단처럼 흩날리는 머리카락. 태양같은 빛을 뿜어내는 여인이 내 앞에 있었다.

 

롤 브라이트: 모든 사람의 본능 안에 그것이 잠재되어있다면, 제가 그것을 똑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나시: 이건 옳지 않아요. 캐롤 씨

 

캐롤 씨는 고개를 저었으나, 내 의견을 어느 정도는 수용하겠다는 듯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롤 브라이트: 옳음과 옳지 않음 같은 건 없어요.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이 있을 뿐.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원하는 쪽, 원하지 않는 쪽?

 

롤 브라이트: 저는 원해요.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거의 파악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내 사고는 '에엑? 응? 뭐야? 뭐지?' 에 머물러 있었다. 정확히는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 보려는 사고가 '에엑?' 에 밧줄로 묶여 있는 것 같았다. 때문에 일정한 거리 너머로 벗어날 수 없었다. 본능? 캐롤 씨가 원해? 누구? 나를?

 

나는 거절할 이유를 떠올리려 애썼는데 그것은 내가 솔직하게 말해서 그냥 고개를 열렬히 끄덕이고 눈을 꽉 감아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은 채 일단 동의하고 싶었다. 뒷일 따위는 의식의 저편으로 묻어버리고 일단은 그녀가 내민 손을 나 또한 맞잡고 싶었다.

 

감정을 착각했다고 해서 안될 건 없다며 일단 그녀를 긍정하고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새벽에 23T와 나누었던 대화에서 나는 그녀에게서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이미 말한 바 있었다. 그것은 나 나름대로의 이유와 각오가 만들어낸 결론이었다.

 

캐롤 씨가 다가온다고 한들 옳다꾸나 나도 다가가야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평소의 그녀라면 이런 상황에 어떻게 말했을지 생각했다.

 

나시: 옳지 않음은 있어요. 윤리 강령이 있는걸요! 전이의 위험성에 대해 얘기하셨잖아요.

 

내 말은 절도 방지법이 너에게서 날 지켜줄 것이라며 강도 앞에서도 당당한 부자 같았다.

 

롤 브라이트: 상담사 캐롤은 지금 이 자리에 없어요. 잠시 죽었죠.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억눌려온. 캐롤 브라이트라는 사람이예요. 내 그림자.

 

나시: 그림자라뇨…?

 

나는 그 말을 듣고 칼 융의 그림자에 대해 떠올렸다. 기억을 잃기 전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지식은 캐롤 씨의 말을 계기 혹은 트리거로 삼아 내 의식의 심해 안에서 보물 상자처럼 끌어올려졌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사회적 가면.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 이 페르소나는 자신이 언젠가 거울을 봐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을 때 겁에 질려서 도망치지 않게 만드는 가면이다. 자신의 악에 대한 폭로는 누구에게도 불편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림자는 이 페르소나가 가지고 있지 않은 모든 것을 가지게 된다. 대부분의 그림자는 공격적이고 이는 극도로 우호적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경향성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동의하는 와중에 그림자는 페르소나의 행동에 상응하듯이 내면에 독을 축적한다

 

나는 엔지니어였는데 이런 심리학적인 개념들은 어디서 배운 걸까? 어쩌면

 

롤 브라이트: 제가 지금까지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가 많지 않았나 봐요. 당신이 상담사 쪽을 더 좋아했다면, 제 입장에선 유감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군요. 지금 그 여자는 당분간 자리를 비웠으니까.

 

롤 브라이트: 당신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에요. 제가 당신을 보며 어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충동을, 그리고 환상을 가지는지

 

어쩌면 이 지식은 기억을 잃기 전 캐롤 씨에게서 배운 것일지도 몰랐다. 그림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자 캐롤 씨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나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캐롤 씨는 탑에 온 이래로 다른 이들에게 믿음직스러운 버팀목으로써의 인물이 되었다. 초고교급 상담사는 남에게 보여주려는 캐롤 씨의 페르소나였다.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담사.

 

그것은 지킬 박사가 남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자신의 점잖고 멋진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지킬 박사에게 하이드가 있듯이 캐롤 씨에게도 그림자가 있었다. 여기서 지킬 박사와 캐롤 씨의 차이점이란 지킬 박사라는 페르소나가 강해진다고 해서 하이드가 약해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캐롤 씨가 혼란과 불합리한 의심 속에서도 더욱 완벽한 상담사를 연기할수록 그 그림자 또한 강해졌다.

 

캐롤 씨는 잘 해보려고 노력했다. 터치는 사람을 조종할 수 있고 상담사는 내담자와 사적인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되기에, 캐롤 씨는 남에게 해를 입힐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힘을 가지고 있지만 기꺼이 사용하지 않는 사람.

 

그러나 모리와 나이토의 감염을 치료하고 날 시한부 신세에서 꺼낼 수 있는 모든 수단이 실패한 결과. 스트레스와 불안감 속에서 캐롤 씨의 그림자는 페르소나를 압도했다. '내가 왜 계속 초고교급 상담사로 남아야 하지? 나도 사람인데?'

 

심리적 균형의 붕괴. 그림자 동화였다. 캐롤 씨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림자는 상담사가 가지려 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내담자를 향한 애착. 욕망을 향한 솔직함. 연애의 감정

 

나시: 어째서 이렇게 급하신 건가요? 더 시간을 들일 수도 있잖아요.

 

롤 브라이트: 더 기다릴 수는 없어요. 당신이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걸요. 이대로 당신을 보내면 전 영원히 후회할 거예요. 그렇다면 차라리 후회가 남지 않도록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처럼 그녀의 그림자가 폭발하기에 난처한 시기가 또 있을까? 하필 그녀가 나를 원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녀에게서 멀어져야만 하는 상황이라니. 또 하필 그녀가 급해질 수밖에 없는 시한부 신세가 되다니.

 

결국 이렇게 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아니냐는 정당화를 억누르며,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나시: 진정하세요. 캐롤 씨. 당신도 지금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시잖아요?

 

롤 브라이트: 당신은 지하에서도 내가 진정해야 한다고 말했죠. 그때와 똑같은 대답을 할게요. 전 충분히 진정하고 있어요.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을 알 뿐. 솔직해진 것뿐이에요.

 

나시: 궤변이에요. 캐롤 씨. 저는 이게 건강한 일인지 잘 모르겠어요.

 

롤 브라이트: 어째서죠?

 

나시: 무슨 뜻인지 아시잖아요. 저희 터치를 너무 많이 나눈 걸지도 몰라요. 터치는 사람의 정신을 연결하는 일이니 당연히 서로를 반영하죠. 거울처럼!

 

롤 브라이트: …맞아요. 터치를 나눈 사람은 서로를 닮게 되곤 하죠. 그렇지만 그 사실이 당신을 향한 제 감정과 어떤 관련이 있죠?

 

나와 캐롤 씨는 우연하게도, 서로의 그림자에 대해 23T에게 털어놓았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캐롤 씨의 그림자는 좋은 사람이자 상담사가 하지 못했던 공격적이고 욕망적인 면모였고 내 그림자는 내담자가 가져서는 안 될 사적인 감정이었다.

 

남에게 그림자를 털어놓는 것은 조금도 재미있지 않았다. 그 상대가 캐롤 씨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렇지만 그녀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시: 제가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죠

 

그래도 진짜 말하기 싫긴 했다.

 

나시: …제가 가진 감정에 캐롤 씨가 영향을 받으신 걸 거예요. 제가 탑에서 캐롤 씨를 처음 만나고선 당신을 향한 존경심과 친근감을 애정과 혼동한 것처럼. 당신도 그냥 친근한 내담자인 저를 사랑의 대상으로 착각하신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보니 처음부터 이건 내 잘못인 셈인가? 하는 생각이 뒤따랐다.

 

롤 브라이트: …저에 대한 당신의 감정은 사실 무척 놀라운 정도까진 아니군요. 저도 어느 정도 추측은 했으니까요.

 

진짜인가? 나 정말 티 많이 냈나 봐. 죽고 싶다

 

롤 브라이트: 사실 저도 당신을 향한 감정이 가족애라고 생각했어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한 결과 생긴 가족애. 그런데 아니더군요. 제 눈을 스스로 가리고 있는 꼴이었죠. 솔직히 말해서 제가 여지를 줬으니까.

 

나시: 여지요?

 

롤 브라이트: 당신의 뺨에 한 입맞춤. 잘 자라는 인사가 아니었어요. 저는 누구에게도 그런 식으로 인사하지 않아요.

 

쪽.

 

캐롤 씨가 내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볼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나는 내 얼굴이 터져버리던가 열이 올라서 정신을 잃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시: 그… 그게

 

롤 브라이트: 더 심한 것도 있어요. 서로의 샤이닝을 들여다볼 때의 신체적 접촉. 너무 노골적이었죠? 나를 여자로 의식하라는 추한 몸부림과도 같았어요.

 

롤 브라이트: 흑심 가지지 마시고… 한 번 해 보세요.

롤 브라이트: 아… 정말이지.

롤 브라이트: 손 움직이시면 변태 취급할 거예요.

롤 브라이트: 풋. 알겠어요. 노력하시는 거 아니까 다른 생각 하셔도 돼요. 숫기가 없으셨는데 이렇게 보니까 당신도 남자네요?

롤 브라이트: 아니에요. 저희 나이엔 그게 정상인 거죠.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착한 생각을 했다.

 

롤 브라이트: 그런 관계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정작 저는 당신이 오해하기를 바랐어요. 그러니 이제 와서 이 감정이 무엇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는 논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지네요.

 

피의 흐름을 심호흡으로 가라앉힌 뒤 나는 다시 눈을 떴다.

 

나시: 논할 필요가 있어요! 그게 전이의 효과인지 아닌지 논해야 그 결과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할 수 있어요. 어쩌면 제가 당신의 비밀을 우연히 들은 일이 나나시에겐 비밀을 털어놓아도 된다는 심리로 이어졌을지도

 

롤 브라이트: 그 부분만큼은 틀렸어요. 전 당신만 알았으면 했으니까요.

 

캐롤 씨는 내 말을 가차없이 잘라 버렸다. 미용사의 비유를 들자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리는 미용사의 가위 같았다.

 

롤 브라이트: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이 아는 건 무서워요. 사실 당신이 아는 것조차 두려웠지만 이제 당신만이 알고 있으니 다른 사람은 더더욱 몰랐으면 해요. 이렇게 불안한 느낌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이어진다니 생각조차 할 수 없어요.

 

롤 브라이트: 당신밖에 없었어요. 지금까지 나와 우호적이면서 내 가장 깊은 공포를 아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오직 당신뿐.

 

나시: 오직 저뿐이라고요?

 

나는 농담 말라며 너스레를 떨지 않았다. 캐롤 씨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음을 눈치챘는데 겸손을 떠는 것은 멍청이나 하는 짓이었다.

 

나시: 그래도 누군가에겐 알려 주시지 않으셨어요?

 

롤 브라이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어요. 오히려 내담자 분들에겐 말씀해드릴 수 없죠.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겨주는 꼴이 될 테니까. 그렇다고 내담자가 아닌 분들에게 말씀드리자니 터치에 대해 모르고요. 제가 먼저 알려드릴 필요도 없었죠. 뭐가 자랑이라고.

 

나시: 그럼 이번 기회에 저에게 한 번 알려 주세요.

 

내가 호기롭게 말하자 캐롤 씨는 의구심을 가지는 듯한 눈빛으로 날 보았다.

 

롤 브라이트: 괜찮으시겠어요? 또 상담 도중에 전이가 일어나면 당신. 저를 어떻게 설득하시게요.

 

나시: 이제 와서 그걸 논할 필요는 없다고 느껴요. 제가 23T와 당신 사이의 통화를 엿들었을 때 제가 한 생각은 캐롤 씨도 사람이란 걸 모두가 잠시 잊고 있었다는 거였어요.

 

나는 내 숙소 안에서 캐롤 씨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는 것처럼.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상황에서 벗어났다. 캐롤 씨는 당신의 위성과도 같이 움직이는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결국 내가 털썩 앉은 곳은 작은 탁자와 함께 있는 의자 위였다. 내가 잠에 들었던 곳.

 

나시: 캐롤 씨는 상담사니까 모두가 괜찮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약점을 보이지 않으니 약점이 없다고, 화를 잘 내지 않으니 화가 없다고, 무서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무섭지 않다고 착각했죠. 그렇지만 그 모든 화는 분명히 존재했어요. 그러니까… 상담사를 위한 상담사가 필요했던 거예요.

 

나시: 누군가가 아는 것만으로 마음이 놓인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말씀해 주세요. 당신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롤 브라이트: 지금 저와 이야기만 하는 게 맞는 일인지 모르겠네요. 솔직히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만큼 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려 온 거라서요.

 

나는 내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캐롤 씨를 흘끗거리다 내 드러난 어깨를 팔로 감쌌다. 물끄러미 보는 시선 앞에서는 꽤 민망한 옷이었다. 모노로그는 왜 이런 옷을 나한테 준 거야?

 

캐롤 씨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내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상담사를 위한 상담사가 된 거구나. 나 말고 할 사람이 없어. 그건 그냥 비유였는데 내가 상담사 역할을 어떻게 하지. 으아아아 아으아아 으와아아악

 

나는 우선 입을 여는 것부터 시작했다.

 

나시: 그럼 어째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건가요? 내담자가 아닌 사람에게 터치를 털어놓을 수는 없었나요?

 

롤 브라이트: 한 번 말씀드렸죠? 저는 입양되었다고요. 제인 캐롤 브라이트라는 이름을 받고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죠. 아마 초등학생 중반 정도일까요. 그때부터 교육받은 것으로 기억해요.

 

롤 브라이트: 학교에서 피부가 온전히 희지 않은 사람이 저 혼자는 아니었어요. 여러 인종의 사람이 있었죠.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터치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어요. 백설 공주에서도, 신데렐라에서도 터치를 가진 공주는 나타나지 않았죠.

 

롤 브라이트: 세상 어디에서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 없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캐롤 씨는 탁자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롤 브라이트: 의아하더군요. 나 말고 어떤 사람도 저와 닮은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게 말이에요. 그렇지만 티를 내며 살지는 않았어요. 이전에는 터치도 미약해서, 손을 오랫동안 잡고 있는 게 아니라면 터치가 이어지지 않았어요. 그러니 부모님은 제가 터치를 숨기는 편이 낫다고 하셨죠. 그냥 아무도 모르게 두면 괜찮을 거라고

 

롤 브라이트: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어요. 의사를 찾아가도 생체 전기와 비슷하다는 진단을 받을 뿐 터치라는 현상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 뒤로 사춘기가 찾아오자… 뭐. 아시잖아요. 사춘기는 대부분 혼란스럽기 마련이죠. 그런데 제 경우에는 정말 혼란스러웠어요.

 

나시: 터치를 가진 사람이 없으니 반석으로 삼을 사람도 없었겠죠. 그때 당시의 캐롤 씨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돼요. 그런데 특별히 더 혼란을 느끼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롤 브라이트: 우선 2차 성징이 시작되자 머리가 서서히 금빛으로 변하기 시작했어요.

 

실례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놀랐다.

 

나시: 그 머리색은 염색이 아니셨어요?

 

롤 브라이트: 네. 원래는 평범한 흑발이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뿌리부터 금빛이 퍼져나가더니 결국 금발이 되었어요. 또 터치가 제 성장에 맞춰서 점점 더 강해졌죠. 오랫동안 잡고 있는 게 아니라 10초 정도만 잡고 있어도 터치가 이어졌어요. 때문에 일상생활에 점점 지장이 생겼고요.

 

롤 브라이트: 그런데 이런 제 상황을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어요. 터치에 대해 아는 사람도, 터치를 이해하는 사람도 없었죠. 아직 상담사 일을 시작하기 전이니 부모님과 의사 선생님을 제외하면 누구도 터치를 몰랐어요.

 

롤 브라이트: 세상에서 분리된 것 같았어요.

 

캐롤 씨는 작게 한숨을 한 번 더 내쉬었다.

 

롤 브라이트: 캐롤은 어딘가 이상한 것 같다며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도 터치에 대해 털어놓을 수 없었어요. 분명 모두가 날 배척할 것이라는 생각에 시달렸어요. 나는 모두와 다르기 때문에 누구와 진심으로 가까워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러니 저는 반대로 나와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을 누군가와 멀어져 있는 사람들에게서 찾아 보기로 했어요.

 

롤 브라이트: 그런 사람들은 곧잘 카운슬링 클럽을 찾곤 하더군요.

 

나시: 그게 상담사 일의 계기가 되신 건가요?

 

롤 브라이트: 어느 정도는요. 지금은 진심으로 상담사가 할 수 있는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상담사라는 일에 거룩한 뜻이나 의미를 두고 시작하지 않았어요. 단지 터치가 쓰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뿐이었죠. 나와 같은 처지의 외톨이와 친해지는 건 덤이고요.

 

롤 브라이트: 그러다 미셸이라는 제 또래 아이와 한 번 상담을 진행해 보았죠. 미셸은 자존감이 부족하고 외로움을 잘 타며 남과 어울리지 못했어요.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상담이 조금 이상하게 흘러갔죠. 지금에 와서는 이유도 기억이 안 나는데 언쟁도 했네요. 아무튼 그때 될 대로 돼라 하는 식으로 손을 10초 잡고 터치를 쓰자. 저는 미셸은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어요.

 

롤 브라이트: 미셸도 저를 이해했죠. 상담은 그 뒤로 2분도 안 가서 끝나버렸어요. 그 뒤 미셸은 제 터치가 대단하다고. 이런 일이 가능한 사람은 처음 본다고 말했어요. 처음 보겠죠. 나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미셸은 제가 가진 것이 축복이라며, 다른 친구들에게도 제 터치에 대해 말해줄 것이라며 신이 나 있더라고요.

 

롤 브라이트: 제가 그런 건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미셸은 말을 듣지 않았어요. 다들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너의 터치를 드러내 보라며 제게 권유했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공포를 모르는 채로. 외계인이나 괴물 취급이 얼마나 두려운지는 모르는 채였죠.

 

롤 브라이트: 제가 미셀을 어떻게 했을 것 같으세요?

 

캐롤 씨는 내 쪽으로 손을 살짝 뻗고 손바닥을 완전히 펴 보였다.

 

나시: 잊게 만드셨군요.

 

롤 브라이트: 네. 지워 버렸어요. 미셸의 기억 속에서 나에 대한 모든 걸 지웠어요. 그런 게 가능한지도 몰랐죠. 되는 대로 나에 대해 잊어 보라고 했는데 성공해 버렸어요. 그때는 정말 무서워서 눈물이 나오더군요.

 

롤 브라이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두려운 것도 있었지만 미셸이 내 비밀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 두려웠어요. 당신이 알고 있기에 안심이 되는 지금과는 정반대였어요. 잊었지만 미셸이 알고 있을까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무서워 덜덜 떨었죠.

 

롤 브라이트: 설상가상으로 이 사건 이후로 터치는 더더욱 강해져서 손이나 몸이 5초만 닿아도 터치가 발동하게 되더군요. 이쯤 되니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캐롤 씨는 흰 장갑을 살짝 벗고 나에게 보여준 뒤 다시 쓱 자신의 손에 씌웠다.

 

나시: 신체의 접촉을 막자는 결론이 나왔군요.

 

롤 브라이트: 이런 형태를 통해 받아들이게 되었죠. 저는 다른 사람들과 가까이 갈 수는 있지만 닿을 수는 없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그 뒤로 상담사 일을 계속하면서, 아주 드물게 터치를 사용하게 될 때면 터치에 대해서는 반드시 함구하라고 내담자 분들께 신신당부했어요.

 

롤 브라이트: 이렇게 되니 친해질 수 있는 사람에겐 터치에 대해 말할 수 없었고, 터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과는 친해질 수 없었죠. 누구와도 진정으로 가까이 가지 못한 채 두 세계 사이에서 고립된 채 둥둥 떠다니게 된 거예요. 풍선처럼.

 

흰 장갑에 덮인 캐롤 씨의 손이 내 손을 붙잡자 나는 그녀를 떨쳐낼 수가 없었다.

 

롤 브라이트: 그러나 이제 당신이 있어요. 두 세계의 교집합에 있는 당신. 그 자리에 도달한 게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었기 때문에 나는… 마침내 누군가와 맞닿을 수 있게 되었어요.

 

롤 브라이트: 피부가 맞닿아서 터치가 이어질 필요도 없어요. 내 마음을 아는 단 한 사람과 가까이 있을 수 있다면 전 그걸로 족해요.

 

터치에 먹혀서 괴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를 조종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땅에 내려올 수 있게 된 것뿐이었다. 누구와도 닿지 못하는 밤하늘의 별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땅으로.

 

상담사 사이의 전이란 상담사가 내담자 쪽으로 일방적으로 보내는 게 아니었던가? 나는 내담자의 입장에 있을 캐롤 씨의 말을 듣자 이 모든 일이 잘못되었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터치를 가진 사람의 애환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전례가 없으며 조언해줄 사람도 없는 막대한 힘이 한 사람의 몸 안에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성장하는 과정에서 캐롤 씨는 외로움과 소외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기에 들어간 카운슬링 클럽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상담사와 내담자는 어떤 사적인 관계도 맺을 수가 없었다.

 

옳음과 옳지 않음 따위는 없다는 캐롤 씨의 말이 맞았다. 나는 무언가가 옳고 옳지 않음을 감히 판단할 수가 없었다. 늘 두꺼운 페르소나를 쓰고 자신의 속을 삭이던 캐롤 씨의 모습이 옳단 말인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소외감에서 자유로워지고 평범한 사람처럼 욕망을 표출하는 캐롤 씨의 모습이 옳지 않단 말인가?

 

다른 이들의 말에 의하면 그러했다.

 

나즈키 시노부: 너무 그녀에게 가까이 가지 마. 네 몸이 탄다.

23T5U130: 차고 넘치게 냈지. 아무튼 그녀에게서 멀어지겠다니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야. 널 응원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미안해. 네 입장에선 남일이니 쉽게 말한다고 여길지도 모르지.

23T5U130: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네가 계속 그 길로 나아간다면 넌 언젠가 반드시… 후회하게 될 테니까.

 

내가 캐롤 씨에게서 멀어지려 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 같았다. 내가 캐롤 씨를 생각하는 만큼 캐롤 씨가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 거절할 수 없는 그녀가 내게로 가까워지는 것. 나는 그런 순간이 온다면 내 욕망 때문에 그녀를 거부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쳐오니 욕망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내가 그녀를 거부할 수 없게 된 이유는 그녀를 향한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내가 필요한 이 상황에 내가 그녀를 외면한다면, 내게 그녀가 필요할 때 나를 도와주었던 그녀는 누구에게서 보답을 받는가?

 

평생 동안 이어진 고독과 소외감 속을 매미의 유충처럼 뚫고 나타난 그녀의 감정을 죽이는 것이 그녀의 대가 없는 자애에 대한 보답인가?

 

롤 브라이트: 이제 윤리 강령 같은 건 상관없어요. 이 감정이 터치에서 비롯된 착각이라고 해도 상관 없어요. 그 가능성 때문에 무작정 부정해야 하나요? 그럴만치 터부인가요. 그럼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모든 게. 내일이면 깨어날 백일몽일 뿐일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난 도저히 그녀를 거부할 수 없었다.

 

내가 그녀와 멀어지려 한다면 캐롤 씨는 그 누구에게도 구원받을 수 없었다.

 

롤 브라이트: 저는 지금 마침내 살아있는 것 같아요. 이제 멈추고 싶지 않아요.

 

나즈키 시노부: 아. 오해의 여지가 있는 말이었구나? 아니야. 내가 말한 불은 분노가 아니야. 오히려 분노랑은 조금 동떨어져있지. 분노는 해소할 수 있는 데에 비해 불은 해소할 수 없거든. 오히려 땔감을 먹이면 먹일수록 거세게 타오르지.

나즈키 시노부: 욕망.

 

욕망은 불 같이 타오른다. 작은 불씨는 메마른 초원에서 들불이 되어 번진다. 모든 것을 태운다. 자기 자신조차도 태워버린다.

 

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지금까지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몸이었지만 뒤늦게 눈을 떴어요. 그러니 이제 억누르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요.

 

내 손을 붙잡고 얼굴을 붉히는 그녀를 보고. 나는 깨달았다. 나와 캐롤 씨는 서로의 반영이었다. 터치가 서로를 반영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닮아 있었다.

 

가져서는 안 될 부적절한 감정을 가졌으며, 그것을 외면했다. 직시하거나 자신의 일부로 삼지 않고 그저 부정하려 했다. 우리는 극도로 우호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좋은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저 나약해서, 겁이 많아서 해를 끼치지 못하는 것을 좋은 사람이기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것으로 둔갑하려 했다. 그녀의 흰 장갑은 다른 이들을 지킨 게 아니라 또다른 불상사에게서 그녀를 지킨 것이다.

 

그림자는 우리의 내면에서 점차 밖으로 빠져나왔다. 우리는 어느 쪽도 무적의 초인이 아니었다. 우주를 가로지르는 무적의 혜성이 아니었다. 우리는 스스로조차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그림자를 직면했을 때… 우리는 스스로도 인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운 환상을 보았다. 내가 이런 추한 생각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숨겨야 할 비밀이 되는 것 같았다.

 

행운인지 불행일지는 모르지만, 우리 둘 모두 서로를 만났다. 그림자가 생겨난 원인. 그림자를 쏟아낼 대상. 그림자 탓에 감정이 생겨난 것일까. 감정 탓에 그림자가 생겨난 것일까는 영원한 난제로 남을 터였다.

 

손을 맞잡은 채로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와 캐롤 씨는 다시금 선 채로 대화를 나누었다.

 

롤 브라이트: 당신은 저를 사랑하지 않나요? 저와 함께 있는 미래는요?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캐롤 씨는 웃으면서 내 손목을 잡고선 보라색 옷으로 감싸인 내 팔을 그녀의 얼굴에 약하게 문질렀다

 

롤 브라이트: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일게요.

 

마침내 그녀를 받아들였으나 나는 할 말을 좀처럼 찾지 못했다. 결국 내 느린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진부한 것들 뿐이었다.

 

나시: 캐롤 씨. 전… 당신을 너무 좋아해요. 그래서 지금 기절할 것만 같아요.

 

나시: 현실감조차도 없어요 

 

나는 영혼을 캐롤 씨에게 빼앗긴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

 

롤 브라이트: 저기. 나나시 씨. 기억나세요? 이 탑에 처음 왔을 때 제게 말씀하셨죠? 우리가 이전에 만난 적이 있냐고요.

 

나시: 그랬죠.

 

롤 브라이트: 그때의 제가 느끼기에 당신은 처음 만나는 사람 같았어요. 당신과 만났다는 기억 자체가 없었죠. 그런데 지금은 어떤 지 아세요? 당신과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정말이냐고 묻듯이 눈을 크게 떴다.

 

롤 브라이트: 네. 당신이 낯익어요. 어디에서 어떻게 만났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지만 당신과 만난 것만은 알고 있어요. 어째서 제가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요? 당신의 심리 게임에 제가 말려들기라도 한 걸까요? 제가 그렇게 느끼고 싶어서 그렇게 느끼는 걸까요?

 

롤 브라이트: 아니에요. 나나시 씨. 당신과 저는 이 탑에 오기 전부터 서로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그 뜻을 모르시겠어요?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에게 이끌리게 되어 있었죠. 그건 금기도 부도덕한 일도 아니에요.

 

롤 브라이트: 가지 않으면 안 될 곳. 운명과 숙명. 우리는 카텟이예요.

 

나시: 여럿이서 하나가 된 자들

 

나와 캐롤 씨의 몸이 서로 가까워졌다.

 

나는 더 이상 캐롤 씨에 대한 그 무엇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녀가 카텟 기관 소속인지. 카텟 기관가 대립하는지.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악인인지 혹은 선인인지. 나와 어디서 처음 만났으며 우리는 왜 서로가 만난 적이 있는 것 같다고 느끼는지. 터치는 무엇인지. 내가 조종받고 있는지. 이게 맞는 일인지. 내가 캐롤 씨를 밀어내야 하는 게 아니었는지. 완강해야 하는 게 아니었는지. 장기적으로 그녀를 위한다면 아무리 그녀가 괴로워한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마음에 응하지 않고, 거리를 두려 해야 하는 게 아니었는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좋았다. 사람은 한 명 한 명이 커다란 우주이며, 그 우주를 여행하는 일에 비해 어떤 일들은 하찮기 때문이었다.

 

이것으로 된 것이다. 강제적인 터치도 없었다. 심리의 간섭도 없었다. 오직 대화만으로 오간 결론. 그렇다면 이것으로 된 것이었다.

 

묘한 자포자기의 감정과 의구심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내가 잘못 선택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과 불안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았으나. 그것은 포기가 주는 씁쓰름한 안정감 속에서 티끌이 되어 사라졌다.

 

가슴은 뜨거웠지만, 머리는 차가웠다. 나는 내 감정에 먹혀 저질러 버린 것이 아니었다. 나는 캐롤 씨를 이해하고, 캐롤 씨를 받아들였다. 어쩌면 감정에 먹히는 것보다 그게 더 좋지 않은 일일지도 몰랐지만 이젠 상관없는 일이었다.

 

당신이 나를 원한다면 그렇게 되리라.

 

터치가 이어지지 않은 포옹을 나누며, 나는 맨살이 드러난 내 어깨에 뜨거운 눈물이 닿는 것을 느꼈다.

 

 

캐롤의 호감도: 39

-50=원수 / -30=앙숙 / -15=상극 / 0=무관계 / +15=친구 / +30=연인 / +50=배필

 

 

롤 브라이트

 

우리는 거울을 사이에 둔 서로의 반영이다.

 

우리는 서로의 기연이다.

 

우리는 서로의 가지 않으면 안 될 곳이다. 우리는 운명과 숙명이다. 우리는 여럿이서 하나 된 자들이다.

 

우리는 카텟이다.

 

 

 

 

 

 

 

터치 없이도 결국 일어나버렸다

 

솔직히 급한 감이 있었지만 전개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음 지금 급해서 빌드업 쌓을 시간이 부족함 칙칙폭폭 가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