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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2

더 단크 타워 챕터 2 - 26

by 도타싫어! 2021. 12. 2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내게 다음 구절은 없다.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토키와 아유키. 이바라 쿠리스. 캐롤 브라이트. 세 명은 카지노의 시끄러운 배경 음악과 함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롤 브라이트: …주변의 인기척은 없어요.

 

캐롤은 벽에 얹고 있던 손을 떼고선 말했다.

 

바라 쿠리스: 벽에 손 얹으면 그걸 다 알 수 있어? 진동을 감지하는 느낌?

 

롤 브라이트: 그건 아니에요. 되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안 되네요. 인간 탐지기 노릇을 하려고 했는데

 

롤 브라이트: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바라 쿠리스: 에에? 무슨 소리야. 아직 잠이 덜 깼어. 캐롤? 이제 아침이 거의 다 지나가는데. 아으암

 

이바라는 하품을 하며 토키와를 다시 돌아보았다. 토키와의 눈가 밑의 다크서클이 한 걸음 크게 물러선 것이 보였다.

 

다행이구만. 다행이야. 이바라는 영문은 몰라도 그가 건강해지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토키와 또한 탑에서 자신의 몸이 아까운 줄을 모르고 무언가에 매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나처럼 설렁설렁하자. 좀. 귀한 목숨 내버리지 말고…'

 

키와 아유키: 후루미나미와 카나리도 그러면 좋을 텐데. 잠에 취해서 우리가 여기에 모이는 줄을 전혀 몰랐으면 좋겠어.

 

롤 브라이트: 분명 알고 있으시겠죠. 도청기도 있고서니… 저희에게 개입해야 할 때를 노리고 계실 테죠.

 

키와 아유키: 그러니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왜 오지 않는 거야?

 

롤 브라이트: 23T 씨는 카지노에 계셨을 텐데 그 사이에 어디로 가신 걸까요.

 

바라 쿠리스: 카지노? 그걸 어떻게 알아?

 

롤 브라이트: 새벽에 잠이 일찍 깼는데 용건이 있어서 23T 씨께 전화를 걸었거든요. 그때 주변에서 카지노의 시끄러운 음악이 들렸어요. 그러니 빨리 오실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

 

키와 아유키: 저와 통화할 때는 카지노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요. 캐롤 씨의 전화와 제 전화 사이에 23T가 잠시 다른 곳으로 간 것 같네요.

 

롤 브라이트: 쉿.

 

캐롤이 입가에 검지를 대며 카지노로 내려오는 계단 방향을 향해 고개를 한 번 돌렸다. 캐롤이 몸을 낮춰 슬롯머신 기계 뒤에 숨자 토키와와 이바라 또한 그녀를 따라 했다.

 

바라 쿠리스: 누군가 오고 있어. 혹시 후루미나미일까?

 

키와 아유키: …아닌 것 같아.

 

나는 카지노에 내려오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토키와나 캐롤 씨, 이바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선가 플라잉 로봇이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23T와 나는 우산을 들고 주위를 경계했으나 우리의 눈에는 별다른 게 보이지 않았다.

 

23T5U130: 분명 카지노에서 모이자고 토키와가 말하지 않았어? 왜 아무도 없는 거지?

 

나시: 으아. 세상에! 우리만 두고 다들 먼저 갔나 봐! 작은 열쇠가 정확히 뭘 하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지?!

 

23T5U130: 진정해. 나나시. 작은 열쇠가 어떤 문을 열 수 있는 도구라면 분명 카지노 안에 그 문이 있을 테니까.

 

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23T 씨!

 

슬롯머신의 위로 캐롤 씨가 번쩍 솟아오르자 나는 깜짝 놀라 제자리에서 통 뛰어올랐다.

 

나시: 우왁! 안녕하세요?!

 

23T5U130: 놀라면서도 인사를 하는 거야?

 

키와 아유키: 왔구나! 잠깐. 나나시한테도 우산이… 그거 만드려고 늦은 거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시: 응. 후루미나미와 카나리가 뭘 할 수 있나 생각해 봤더니, 플라잉 로봇이 크레딧 상점에 두 개 들어온 게 기억났어.

 

23T5U130: 카나리 말고 후루미나미도 로봇을 꺼내지 않았을 뿐 가지고는 있었다면. 플라잉 로봇 두 개가 나를 노릴 때는 우산 하나로 막기 어렵겠지.

 

나시: 그래서 재빨리 우산을 하나 더 만드는 사이에 네가 우릴 부른 거야. 늦어서 미안

 

바라 쿠리스: 괜찮아! 빨리 작은 열쇠를 쓰면 돼. 모노로그! 나와라!

 

키와 아유키: 사실 모노로그를 부를 필요 없어. 미리 모노로그한테서 추궁을 해서 들어 뒀거든.

 

토키와는 그 말을 남기고 카지노의 벽에 손을 짚고 벽을 따라 다리를 움직였다. 미로에서 헤매지 않으려 한 벽만 짚고 이동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키와 아유키: 분명 이쯤인데…

 

그리고 벽에 손을 짚는 것이 멈추자 토키와는 바닥에 손을 짚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바닥에 떨어진 약혼 반지를 찾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키와 아유키: 분명 여기가 맞는데. 음. 여기가

 

바라 쿠리스: 모노로그 부를까?

 

키와 아유키: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자. 찾았다! 그리고 이제

 

토키와가 바닥을 더듬거리던 와중 팔에 힘을 주자 바닥에 홈이 쑥 하고 들어갔다. 그리고 곧 움푹 들어간 홈의 바닥 철컥이더니 작은 열쇠 구멍이 생긴 채로 솟아올라. 바닥은 원래 자신의 모습을 회복했다.

 

롤 브라이트: 저 안에 작은 열쇠를 넣는 거겠죠?

 

나시: 탑은 진짜 보면 볼수록 신기해.

 

키와 아유키: 어쩌면 앞으로 더 신기해질지도 모르지

 

토키와는 숨을 깊게 내쉬고 품에서 작은 열쇠를 꺼내. 열쇠 구멍에 넣고 돌렸다.

 

철커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카지노 전체에 울리는 진동과 함께 바닥이 열렸다. 그리고 유적의 통로가 열리듯이 밑으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23T5U130: 카지노 밑에는 뭐가 있을지 궁금한데.

 

나시: 23T 너 탑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23T5U130: 나는 이 탑의 근본적인 목적과 그 정체를 제외하면 탑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 못해. 그마저도 말을 할 수가 없고.

 

바라 쿠리스: 그럼 그럴수록 들어가 봐야지. 뭘 보기만 하고 있어? 자. 가자!

 

이바라가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우리 또한 그녀를 따랐다. 계단은 순간 어둡다고 느껴졌지만 암순응된다면 그렇게까지 어둡지 않을 정도의 밝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카지노에서 빛이 새어내려 왔으며 계단이 이어진 커다란 공간에도 또한 밝지는 않지만 조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단은 카지노로 통하는 계단과 비슷하게, 조금 긴 편이었고 나선 계단이 아닌 직선 형태의 계단이었다. 우리는 계단을 내려가며 주변을 무던히 살폈다. 계단과 이어진 공간의 가장 특이한 점은 바로 넓이보단 높이에 치중한 듯한, 카지노보다 조금 좁지만 천장은 높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어째서 천장이 그렇게 크게 만들어져야만 했는지를 한 번에 설명하는 듯한 물체가 있었다.

 

물체는 하얀 천 같은 것으로 묶여 있었다. 박물관의 공룡 화석이 사람들에게 공개되기 직전 덮어놓는 듯한 면포였다. 면보 너머로는 무언가가 쌓여 있는 듯한 윤곽이 보였으나 안에 정확히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롤 브라이트: 작은 열쇠의 방 안에 있는 건 이게 전부인 것 같아요. 주변에 또 다른 통로가 있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요.

 

23T5U130: 일단 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나 확인하자.

 

23T는 그렇게 말한 뒤 하얀 천을 당겨서 찢어버리고, 그 안에 있던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나시: 와아!

 

내 입에서는 그 한 마디밖에 나오지 않았다. 사실 조금 깜짝 놀라서 뒤로 몇 걸음을 물러서기까지 했다.

 

그런 물건을 보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가지각색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23T는 나와 비슷하게 뒤로 물러섰다. 토키와는 그 물체의 높이를 가늠하며 입을 크게 벌렸다. 캐롤 씨는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고, 이바라는

 

바라 쿠리스: 에에에에엑! 이거 좀 봐!

 

이바라는 말 그대로 화들짝 놀랐다. 산처럼 쌓인 크레딧 동전을 보면서.

 

바라 쿠리스: 크레딧이 이렇게 많아?! 여기 대체 뭐 하는 곳이길래 이렇게 많아?!

 

크레딧이 쌓여있는 곳은 투명하지만 단단한 유리로 이루어진 탱크 안이었다. 천장이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높이. 나는 유리 탱크 안에 쌓인 크레딧의 양을 보며 경외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크레딧의 부족 때문에 허덕이고 항생제를 사지 못해 죽을지도 모르는 우리의 상황 앞에서. 마치 이 탑을 보는 것처럼 높게 솟아오른 크레딧의 더미를 보자 크레딧이 꽤나 신적으로 보였다.

 

키와 아유키: 대체 지하에 왜 이렇게 크레딧이 많이 쌓여있는 거지?

 

롤 브라이트: 저 위를 보세요. 유리 탱크와 탱크 위의 유리관이 연결되어 있어요.

 

나는 조금 더 고개를 들어 유리 탱크 위를 유심히 보았다. 그러자 고개가 거의 꺾여 나는 하늘 위의 신에게 기도하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사실 지하에 있었고 하늘은 천장에 막혀 있었지만 말이다.

 

캐롤 씨의 말대로였다. 탱크 안에 크레딧이 놓인 게 아니라, 쌓여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수십개가 넘는 것 같은 유리관이 유리 탱크와 연결되어 있었다. 유리 탱크와 달리 연결된 곳이 없었기에, 나는 유리관을 통해 넘어온 크레딧이 유리 탱크에 쌓이는 구조라 추측했다.

 

나시: 저 유리관들은 어디로 이어지는 거야?

 

이 유리 탱크 위에 뭐가 있더라?

 

23T5U130: 글쎄. 이 탱크 위에 있는 건 카지노뿐인데.

 

나는 23T의 말을 듣고 그 의미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입을 크게 벌렸다.

 

23T5U130: 그런데 슬롯머신 하나에서만 만 크레딧을 번 거야? 

 

나시: …어떻게 슬롯머신 하나에 만 크레딧이 넘게 들어있지? 

 

나시: 전부 연결되어 있는

 

나시: 전부… 전부 연결되어 있었어.

 

눈이 크게 떠졌다. 모노로그가 아주 대놓고 날 속였다는 생각에 소소하게 분노가 치미는 와중에 나는 지금까지 이런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하는 순수한 놀람과 깨달음을 느꼈다.

 

바라 쿠리스: 연결되어 있다니. 무슨 뜻이야. 나나시? 뭐 좋은 생각이라도 났어?

 

나는 적어도 몇천만 크레딧은 될 법한 그 양을 보면서 속으로 지금까지 크레딧 상점에서 사용되었을 비용을 가늠해 보았다.

 

나시: 지금까지 모든 게 전부 연결되어 있었다고. 카지노에서 사용되거나, 누군가가 지불한 크레딧은 전부 이 지하의 탱크에 쌓이는 거야! 또 지출이 생길 때는 이 탱크에서 밖으로 나가겠지. 그래서 슬롯머신 하나에서 만 크레딧이 나오는 거였어…!

 

모든 수수께끼를 풀자 생각나는 모노로그의 말이 있었다.

 

모노로그: 누가 슬롯머신에 900만 크레딧을 썼을 거라 생각하나? 

 

900만 크레딧. 있었잖아. 내가 그림을 맞췄으면 900만 크레딧은 우습게 벌어들일 수 있는 거였잖아.

 

나시: 잘도 날 속이다니. 모노로그.

 

모노로그: 속아 넘어간 사람 잘못 아닌가?

 

모노로그는 뻔뻔하게도 내 바로 옆에서 스르륵 솟아올랐다.

 

모노로그: 네가 스스로에게 진실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내가 옆으로 어떤 말로 끌어들인다 하더라도 너는 스스로를 관철했을 것이다. 그래서 너는 속은 것이다.

 

나시: 그래. 맞아. 완전히 속았어. 말 한마디에 지레 포기해 버리다니. 운이 좋았으면 그 자리에서 항생제를 살 수도 있었는데 날 믿지 못해서 실패라니. 진짜 어이가 없네.

 

나시: 이제 내가 항생제를 사는 건 시간문제야. 모노로그. 알지? 이렇게 된 이상 틱틱이를 만들어서 우리 다섯 명이서 계속 도박을 할 수도 있거든?

 

모노로그: 사실이다.

 

나시: 그런데 어차피 이 탱크 안에 있는 크레딧을 우리가 끌어 쓰는 거라면, 그냥 이 탱크에 있는 돈을 우리가 한 번 쓸 수 있게 해 줘.

 

모노로그: 우리? 그게 무슨 소리지? 이해를 하지 못한 모양이군. 선택권은 온전히 토키와 아유키에게 있다.

 

모노로그: 본래 작은 열쇠는 단 한 번에 한하여 저장된 크레딧을 특정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된다. 토키와 아유키. 너는 지금 무엇을 사려하지?

 

키와 아유키: 항생제를 사겠어!

 

토키와가 퍼뜩 말했다.

 

모노로그: 작은 열쇠를 가지고 있는 토키와 아유키는 항생제의 구입을 선택했다. 이 이상으로 크레딧을 소비하지 않은 채 물품을 구매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전할 말은 이게 전부다.

 

모노로그: 열심히 해 보도록.

 

모노로그는 의미심장하고 기분 나쁘게 웃으면서 바닥 속으로 사라졌다. 토키와는 자신의 크레딧 상점 목록에 떠오른 항생제를 우리에게 보여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키와 아유키: 이제 이걸 배송하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쉽네. 다들 고생 많았어.

 

그러나 캐롤 씨가 이런 제안을 건넸다.

 

롤 브라이트: 잠깐만요. 저희 조금 더 신중해 봐요. 해변의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본 뒤에 항생제를 보내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시: 그럴 수도 있겠죠…?

 

롤 브라이트: 사실 지금 보내는 게 맞는 판단이라고 저도 생각하지만. 뭐랄까 설명하기 어렵지만 어딘가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요.

 

바라 쿠리스: 말 나온 김에 나도 석연치 않은 거 하나 말해도 돼?

 

캐롤 씨에 이어 이바라 또한 손을 자신의 어깨 높이까지 들며 말했다. 캐롤 씨는 어서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 손을 이바라 쪽으로 뻗었다.

 

바라 쿠리스: 카지노가 열린 날. 다들 기억해?

 

나시: 당연히 기억하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데.

 

캐롤 씨랑 우연히 손이 맞닿았는데 내가 마비되고. 난리도 아니었지

 

바라 쿠리스: 내가 카지노에 처음 왔을 때 봤던 광경 중 하난데. 야가미가 빠칭코 기계 앞에 앉아서는 마구 돈을 뽑고 있는 거야. 구슬이 그냥 끝도 없이 나오고 그걸 크레딧으로 교환하고

 

키와 아유키: 그건 나도 봤어. 좀 대단했지.

 

바라 쿠리스: 그런데 우리가 사용한 크레딧이 그대로 유리 탱크에 쌓이는 거라면 어떻게 야가미가 돈을 벌어? 처음에 거하게 손해를 보는 사람이 없으면 밖으로 나오는 돈이 없는 거 아니야? 야가미보다 먼저 카지노에서 돈을 꼴은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그것 또한 일리 있는 질문이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카지노나 크레딧 상점을 통해 소비한 모든 크레딧은 자동적으로 지하의 유리 탱크에 쌓이며, 카지노에서 상금을 딸 때 크레딧은 유리 탱크에서 해당 기계로 이동한다.

 

자. 그런데 충분히 크레딧이 쌓이지 않았는데 크레딧을 뱉어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아무리 야가미가 빠칭코 기계를 사용했다고 한들 그 구슬을 크레딧으로 변환하려면 여유 크레딧이 필요하지 않던가?

 

나시: 어려운데. 정말 뭐지?

 

23T5U130: …내가 그 질문에 답을 찾은 것 같아.

 

어느새 벽 쪽으로 다가가 있는 23T는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23T5U130: 다들 이걸 좀 봐.

 

뭘 보라는 거지? 나는 조금 어리둥절해져 23T의 쪽을 자세히 보았다. 그러자 나는 23T가 벽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벽에 문이 있었다. 크레딧의 산 때문에 누구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유리 탱크를 중심으로 네 방향에는 작은 문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23T는 손잡이를 당겨 문을 열어. 그 안에 있는 것을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나는 또한 23T 쪽으로 다가가 23T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은 내 예상을 훌쩍 넘어가 있었다.

 

투명함. 밝음. 그리고 금색.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흰색 면포로 둘러싸여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유리관으로 연결되어 있는 크레딧의 산이 하나 더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나시: 이게 뭐야?

 

나를 따라 두 번째 크레딧 산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 모두가 그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롤 브라이트: 두 번째네요?

 

키와 아유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야. 이바라!

 

바라 쿠리스: 꼬집으면 아파하는 걸 보니까 꿈은 아닌가 본데… 아야! 진짜 꿈이 아니잖아!

 

이바라는 자신의 볼을 잡아당기면서도 두 번째 크레딧의 산 앞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것은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나와 다른 이들 또한 눈 앞에 떨어진 불가사의 앞에서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개? 두 개라고? 크레딧 동전 한 개는 100크레딧이다. 몇천만 크레딧이라면 몇십만 개의 동전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탱크 하나에 전부 몰아넣을 수는 없는 건가? 두 개가 필요했던 거야?

 

나시: 아닌데. 단지 그 이유는 아닌 것 같아

 

23T5U130: 잠깐다들 벽의 중앙에서 문을 찾아서 그 안으로 들어가 봐.

 

롤 브라이트: 벽의 중앙이요? 저희가 들어온 문 말고 나머지 벽 세 개의 중앙 말씀이시죠?

 

23T는 캐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두 번째 탱크가 있는 방의 벽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23T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나시: 그게 무슨 뜻이야?

 

키와 아유키: 일단 시키는 대로 하자. 나나시.

 

토키와는 23T가 간 쪽의 반대 벽을 향해 가볍게 뛰었다. 이바라 또한 얼굴에서 의문이 떠나지는 않았지만 일단 23T의 말대로 하는 것 같았다. 나 또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23T의 뒤를 따라가 보았다. 캐롤 씨 또한 나를 따라왔다.

 

검은 벽에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문손잡이가 있었다.

 

나시: 문이 또 있다니. 이 안에는 또 뭐가

 

키와 아유키: 안에 뭐가 있길래…?

 

바라 쿠리스: 이거 완전 느낌 안 좋은데

 

23T가 그것을 잡고 벌컥 열자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롤 브라이트: 또 있다고요?

 

키와 아유키: 또 있잖아?

 

바라 쿠리스: 에? 뭐야 이거? 뭐야 이거?

 

문을 연 우리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또 다른 유리 탱크였다. 크레딧이 잔뜩 들어있는.

 

23T5U130: 역시.

 

나시: 아니 설마…!

 

나는 유리 탱크를 뒤로 하고 다른 쪽의 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 안을 열자 또다시 유리 탱크가 있었다. 당연히. 크레딧이 잔뜩 채워져 있었다.

 

나는 순간 내가 꿈을 꾸고 있거나 이상한 환각에 걸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유리 탱크 안에 들어있는 크레딧의 양은 탱크마다 각각 달랐다. 7할 정도가 차 있는 탱크가 있는가 하면 반도 채 차오르지 않은 탱크 또한 있었다. 나는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고 있지 않았다.

 

그럼 대체 이 유리 탱크들은. 이 크레딧들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

 

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너무 멀리까지 가지 마세요!

 

문을 하나 더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자 유리 탱크가 하나 더 있었다. 끝도 없이 많았다. 우리가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본 것. 첫 번째 유리 탱크에서 네 방향으로 나 있는 문들. 그중 한 문을 열면 안에 유리 탱크가 있고, 열리지 않은 문 세 개가 있었다. 그것의 반복.

 

 

나는 크레딧 튜브가 지하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대체 얼마나 많이 있는 거냐고, 왜 이렇게 많이 있는 거냐고 갈 곳을 잃은 질문이 내 닫힌 입 안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나는 과거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모노로그: 살인 게임의 참가자가 사용한 크레딧은 전부 이 지하에 쌓인다.

 

모노로그의 말은 나에게 두려운 깨달음을 주었다.

 

나시: 우리가 이 탑에 온 첫 번째 사람들이 아니야.

 

이 탑은 우리가 오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어. 수많은 참가자들의 피를 마시면서.

 

그리고 우리가 끝내지 않으면, 마지막 또한 아닐 거야.

 

 

 

 

 

 

혼란이 있었지만, 우리는 결국 일어난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합의를 끝냈다.

 

롤 브라이트: 이 사안에 대해서는 해변의 다른 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니 우선은 항생제와 모니터실에 집중하는 편이 낫겠죠.

 

키와 아유키: 아무튼 이제 이걸 해변으로 배송하기만 하면 돼. 그럼 모리와 나이토의 감염도 낫겠지? 세 번째 시련이 끝나면 모두 돌아올 수 있어

 

롤 브라이트: 우리가 해냈군요.

 

나시: 그래. 우리가 해냈어! 해냈다고. 23T. 캐롤 씨!

 

솔직히 모든 게 끝나지 않았지만 단순히 시한부 신세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나는 기쁘다 못해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말 그대로 사형 집행일을 앞두고 있었는데 석방된 처지였다. 캐롤 씨에게서 조금 거리를 두자고 상의한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캐롤 씨가 손바닥을 내밀자 기운 좋게 손바닥을 맞때려 짝 소리를 낼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롤 브라이트: 다행이에요. 정말로.

 

23T5U130: 챙겨 온 우산이 무색해졌네. 그래도 안 쓴 게 다행이지.

 

바라 쿠리스: …잠깐 다들 너무 좋아하지 말아 봐.

 

이바라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시: 왜 그래?

 

바라 쿠리스: 아니. 이건 내 기분 탓일 수도 있는데. 아니 그냥 내 기분 탓이겠지만 아니 이거 완전 플래그 대사잖아? 플래그 상황에 플래그 대사.

 

바라 쿠리스: 캐롤. 캐롤-찌릿 같은 거 안 와? 위기 감지하는 메기처럼?

 

롤 브라이트: 그런 건 오지 않네요. 왜 우리가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처리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들지만요.

 

키와 아유키: …너무 쉬웠다는 건가요?

 

토키와의 말을 듣자 내 몸이 바짝 긴장했다. 너무 쉬웠다. 그래. 그 말대로였다.

 

모두가 알아낸 크레딧과 카지노의 역학. 우리가 탑에 온 첫 번째 사람들이 아니며 탑에서 죽어나간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 충격적이었다. 그렇지만 그중에 실패는 없었다. 우리는 크레딧을 손에 넣었고 이제 항생제를 해변으로 배송하기만 하면 모리와 나이토는 감염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후루미나미가 도청기로 얼마나 많은 정보를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원래 우리는 후루미나미가 나타나면 불안해했지만, 반대로 후루미나미가 나타나지 않아서 불안해지는 경우 또한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롤 브라이트: 찌릿함이 오는 것 같기도 하군요.

 

바라 쿠리스: 진짜 석연치가 않아서 그래! 정말로 언제 무슨 일이 날지 모르는

 

카지노에서부터 계단을 향해 새어 들어오는 빛. 그리고 느닷없이 나타난 그림자.

 

그 검은 실루엣을 보자마자 계단을 오르던 모두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누가 나타날지는 모두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다 되어갈 때 그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라곤 한 사람뿐이었다.

 

루미나미 나몬: 너희 여기서 뭐해? 미리 말해두지만 나 지금 기분 별로야. 내 히무로한테 무슨 도둑 강아지가 꼬이는 데다가. 히무로가 세 번째 시련을 향해 떠났는데 그거 집중 못 하고 여기로 와서 말이지.

 

나시: 또 너야?

 

당연히 그녀였다. 형식적인 질문을 던지며 그녀의 행동을 떠 보려고 했으나 먼저 자신의 수법을 마구 펼쳐놓는 평소의 그녀완 달리. 후루미나미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며 우리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후루미나미는 평소보다 큰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체구보다 그녀가 멘 가방이 더 크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대체 뭐 하려고 온 거야?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후루미나미가 외쳤다.

 

루미나미 나몬: 플라잉 로봇! 나와!

 

후루미나미가 자신의 팔을 위로 번쩍 들고 천장을 가리키자 바닥에서부터 로봇이 솟아올랐다.

 

루미나미 나몬: 위이이잉! 바라바라바라방!

 

나시: 역시 너에게도 그게 있었어

 

루미나미 나몬: 그럼 당연히 있지. 로봇! 전파 방해는 아직 쏘지 말고 기다려. 어차피 우산이 있는 이상 제대로 노리긴 어려우니까.

 

후루미나미는 플라잉 로봇을 자신의 근처에 머무르게 두는 채로 계단을 몇 걸음 올라섰다. 그녀의 등 뒤에서 카지노의 밝은 조명이 쬐어 내려왔다.

 

루미나미 나몬: 오늘 조명빨 제대로야.

 

키와 아유키: 무슨 일이 벌어지기 전에 빨리 항생제부터 보내야겠어.

 

루미나미 나몬: 잠깐. 잠깐! 기다려. 토키와!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잖아? 잠시 생각해보고 결정하자!

 

키와 아유키: ….

 

토키와는 곧바로 크레딧 상점에서 항생제 배송 버튼을 누르려다가 손을 멈칫했다. 그것은 토키와에게 배짱이나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 다이얼로그가 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또. 그의 다이얼로그에 한 문장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키와 아유키: '항생제는 특이한 물품으로, 땅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늘을 통해서 배송된다는 점 유의하십시오?'

 

칸나즈키에게서 온 전화였다.

 

나시: 칸나즈키? 아. 칸나즈키다!

 

통화를 수락하자 곧장 칸나즈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즈키 시노부: 이름 없는 남자. 내가 좀 오래 잤어. 지금 어디야? 도움을 주려고 하는데.

 

나시: 도움? 아니. 사실 안 줘도 괜찮을 것 같아. 지금 토키와가 항생제를 샀거든? 이제 구입한 항생제를 해변에 있는 모두에게 보내기만 하면

 

나즈키 시노부: 안 돼!

 

칸나즈키가 다이얼로그 너머에서 날카롭게 소리쳤다.

 

나즈키 시노부: 안 돼. 토키와? 내 말 들어! 잘 들어야 해. 지금 항생제를 해변 쪽으로 배송시키면 안 돼! 배송을 하는 게 아니라 네가 항생제를 받은 다음 보급 특권을 통해서 보내야 해!

 

키와 아유키: 뭐? 칸나즈키? 왜 안 된다는 거야?

 

나즈키 시노부: 일단 휴게실을 향해 와. 도와줄 테니까!

 

다이얼로그에서 들려오는 칸나즈키의 목소리를 들은 후루미나미는, 싱글거리던 표정을 느닷없이 팍 잠재웠다. 그녀의 표정에 진지함만이 떠올랐다.

 

루미나미 나몬: …갑자기 왜 저럴까. 칸나즈키가 조금 엉뚱한 면이 있는 것 같아. 늘 그랬지. 명확한 배신의 카타르시스도 없이 누구 편인지 모르겠다니까.

 

롤 브라이트: 말을 돌리시네요. 후루미나미 씨. 저희 잠시 휴게실에 들리고 싶어서 그런데 비켜 주시겠어요?

 

루미나미 나몬: 오. 안 돼. 안 돼. 그렇게는 안 되지. 대업을 망치게 두진 않겠어.

 

캐롤 씨가 계단을 몇 걸음 더 오르자 후루미나미는 뒤로 몇 걸음을 물러섰다.

 

나시: 역시 뭔가 이상해. 토키와! 항생제의 배송은 막지 않던 후루미나미가 항생제를 보급 특권을 써서 보내는 건 막으려 하잖아. 뭔가 있는 것 같아.

 

나즈키 시노부: 내 말 들어. 이름 없는 남자! 보급 특권을 쓰지 않으면 항생제를 구매해 봤자 쓰지 못해. 보급 특권을 써야만 항생제가 모리 곁으로 바로 간단 말이야! 그게 중요해. 배송을 하면 항생제는 파괴되고 말 거야!

 

후루미나미는 칸나즈키의 외침에 머리를 부여잡고 중얼거렸다.

 

루미나미 나몬: 아. 짜증 나. 이러면 진짜 일이 많이 꼬이는데… 사실 그래서 좋아. 카나리. 휴게실로 가는 길목 좀 막아 봐. 부탁할게. 아니다. 그냥 내가 막지 뭐!

 

23T5U130: 카나리는 이 자리에 없나 보지?

 

23T는 계단을 올랐고, 그럴수록 후루미나미는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23T5U130: 플라잉 로봇이 두 개면 모를까. 하나라면 우산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어. 이리 와. 험하게 다루진 않을 테니까.

 

23T5U130: 너라면 우산에 대해서도 알겠지. 도청기가 많으니까. 그렇지만 네가 우산의 존재에 대해 안다고 해도 날 막긴 힘들 거야.

 

루미나미 나몬: 네가 지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23T5U130을 막을 생각이 없어.

 

후루미나미는 가방에서 흰색 통을 하나 꺼내더니, 뚜껑을 열고 그 내용물을 계단을 향해 쏟았다. 투명한 액체가 계단 밑을 향해 촤르르 흘러내렸다.

 

루미나미 나몬: 23T5U130을 제외한 나머지를 막으면 되는데. 내가 왜 무적의 로봇에게 맞서야 하지?

 

나는 그 냄새가 어딘가 익숙했다. 23T가 나와 똑같은 냄새를 맡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23T는 고개를 홱 돌려 우리에게 달려오며 이렇게 외쳤다.

 

23T5U130: 모두 물러나! 계단 밑으로!

 

나는 23T가 그렇게 외치기 전부터 토키와와 캐롤 씨의 손을 붙잡고 조금씩 밑으로 당겼다. 후루미나미가 성냥을 꺼낸 것을 보고서는 나 또한 23T의 외침을 반복하며 빠르게 두 사람을 밑으로 끌어내렸다. 영문을 모르고 있던 이바라는 23T가 잡고 계단 밑을 향해 달려 내려갔다.

 

루미나미 나몬: 매치포인트.

 

훅 하는 소리와 함께 성냥에 불이 붙자 어둠 속에 살짝 가려진 후루미나미의 웃는 표정이 드러났다.

 

나시: 계단 밑으로! 계단 밑으로 가야 해!

 

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바라 쿠리스: 이거 놔봐! 쟤를 아주 그냥 혼꾸멍을 내고 싶으니까!

 

23T5U130: 이런 짓까지 하다니… 후루미나미! 제정신이야?!

 

루미나미 나몬: 흥. 재빠르긴.

 

후루미나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쏟은 액체 위에 불 붙은 성냥을 던졌다.

 

내가 맡은 것은 휘발유의 냄새였다.

 

카지노의 조명에 의지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던, 침침한 계단은 다음 순간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열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계단이 활활 타올랐다. 위로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맹렬한 화염이었다.

 

휘발유가 흐르지 않는 높이까지 내려오자 우리는 거의 다 올라간 계단을 밑에서 열 걸음 정도까지 크게 물러선 꼴이 되었다. 후루미나미는 자신이 만들어낸 화마를 보면서 뒷짐을 지고 선 채. 고개를 살짝 들어 계단 밑의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루미나미 나몬: 굳이 이런 꼴은 보기 싫었는데 말이야.

 

나시: 다들 괜찮아? 어디 데인 곳은 없어?

 

키와 아유키: 나는 괜찮아. 캐롤 씨. 괜찮으세요? 이바라 너는?

 

롤 브라이트: 재빠르게 계단을 내려갔으니 괜찮긴 하지만, 이런 짓을 당연스럽게 하다니

 

바라 쿠리스: …진짜 소름 돋네. 우리 방금 저기서 다 죽을 수도 있었어

 

루미나미 나몬: 저기. 혹시 거리가 멀어서 안 들리나? 굳이 이런 꼴은 보기 싫었는데 말이야!

 

후루미나미가 계단 위에서 조금 다급해진 기색을 한 채 소리쳤다.

 

23T5U130: 난 저 위로 올라갈 수 있어. 방화 소재거든. 그렇지만 기름에 붙은 불은 언제 꺼질지 몰라. 다 꺼질 때까지 토키와는 계단 위로 올라가지 못할 거야. 휴게실까지 가지 못할 거고.

 

나시: 후루미나미 성격에 휘발유를 한 통만 챙겨 오진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언젠간 나갈 수 있겠지만 시간을 더 끌수록 저 쪽이 판을 더 크게 짤 가능성이 생기는 거잖아.

 

바라 쿠리스: 일단은 자극하지 말고 좀 잘 구슬려 보자. 쟤 생각보다 단순하잖아.

 

롤 브라이트: 절대 성공 못할 거예요. 후루미나미 씨인걸요.

 

키와 아유키: 그렇지만 실패를 좋아하는 습성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라요.

 

루미나미 나몬: 크흠. 크흠! 굳이! 이런 꼴은! 보기 싫었는데! 말이야!

 

후루미나미는 노골적으로 헛기침을 하고 손나팔을 입에 가져다 댄 채로 열심히 소리쳤다.

 

롤 브라이트: 하.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데 말이죠. 마음만 같아서는 구슬림이고 뭐고

 

나시: 캐롤 씨. 진정하시고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지 생각해 보죠.

 

롤 브라이트: 지금 계단 위에서 불을 지르고 있는데 진정하라뇨? 애초에 전 지금 충분히 진정하고 있…!

 

캐롤 씨는 내 쪽을 돌아봐 언성을 높이려다가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한 호흡 뒤 캐롤 씨는 입에서 손을 떼고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롤 브라이트: 죄송해요. 순간 욱했네요. 원래는 안 이러는데

 

루미나미 나몬: 사람 무시하는 것 좀 그만하지 못해?!

 

후루미나미가 보다 크게 소리를 치자 나는 그녀에게서 완전히 거두고 있던 관심을 다시 보냈다. 아니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자기 성격을 이기지를 못 하나? 속으로 불평하던 나는 후루미나미가 휘발유 통을 하나 더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시: 후루미나미! 멈춰!

 

루미나미 나몬: 간다아아아아!

 

후루미나미가 휘발유를 한 통 더 계단에 흘려보내자 불이 한층 더 거세게 타올랐다. 계단에 서 있던 우리 다섯 명은 출렁이며 내려오는 불의 파도를 피해 다시금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계단에는 발을 붙이지도 못한 채 우리는 바닥에 돌아오게 되었다.

 

루미나미 나몬: 그러니까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 무시당하면 기분이 울적해진다고!

 

진짜 성격에 문제 있네!

 

키와 아유키: 이제 저 불이 꺼지기까지 시간은 더 오래 걸릴 거야. 휴게실까지 어떻게 가야 하지?

 

나즈키 시노부: 어떤 수단을 써서도 와야 해. 일단 오기만 하면 내가 도와줄 테니까.

 

나리 케이토: 야. 너! 느닷없이 배신 때리기냐?! 

 

다이얼로그 너머에서는 떽떽대는 카나리 특유의 불만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칸나즈키와 카나리가 함께 있는 모양이었다.

 

나즈키 시노부: 분명 우린 내 안전에 대해서도 합의하지 않았어? 그 권리를 지켜줄 생각이 없다면 내가 얻어낼 수밖에.

 

나리 케이토: 개소리야! 저 놈들이 가만히 죽기만을 기다리겠어? 분명 서로 죽고 죽일 거라고!

나즈키 시노부: 그럴 미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어. 게다가 난 그냥 개인적인 빚을 청산한다고 해야 하나. 큰 그림에서는 다 정해진 일이라고 해도 작은 그림에서는 내가 저지른 일이 있기 때문에 이러는 거거든.

 

나리 케이토: 그냥 배신이잖아. 우린 서로 계약을 했어. 너는 배신하려 하고 있고! 그게 다야!

 

나즈키 시노부: 맞아. 그냥 배신이야. 그러니 이제는 너의 손에 달렸어. 여기서 후루미나미에게 협력하고 해변의 누군가가 감염으로 죽기까지 기다리던가, 혹은 항생제를 해변으로 보내는 걸 돕던가.

 

나리 케이토: 진짜 어이없는 소리밖에 안 하네… 내가 이러려고 보급 특권을 활성화한 게 아니란 말이야. 알아?!

 

나즈키 시노부: 이건 단순히 네가 생존하기 더 유리한 쪽의 선택이 아니야. 네가 이후에도 스스로를 의탁한 채 쉬운 길을 택할지에 대한 분기점이지. 네가 정해! 앞으로도 이 탑에서 배신당하고 싶지 않기 위해 뭘 할지!

 

칸나즈키의 언성이 높아지자 카나리는 더 언성을 높이려 애썼다.

 

나리 케이토: 지금 넌 큰소리칠 입장이 아냐! 알아?! 비활성화 버튼 하나면 보급 특권은 못 쓰게 된다고! 자. 이제 누구도 못 들어가!

 

카나리의 목소리는 다음 순간 당황으로 잔뜩 얼룩지게 되었다.

 

나리 케이토: 야! 그걸 힘으로 하면…!

 

나즈키 시노부: 으으으으윽…! 토키와. 휴게실로 와. 빨리!

 

다이얼로그 너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는 칸나즈키가 우리를 위해 기회를 만들고 있다고 직감했다. 문제는 계단이 여전히 휘발유로 뒤덮인 채 타고 있었고, 그 위에 후루미나미가 버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롤 브라이트: 저걸 좀 봐요. 저걸 상대로 어떻게 구슬림 같은 게 통하겠어요? 저 쪽이 우릴 구슬리고 있는 걸요. 마치 뱀과 같아요. 너도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라고. 이제 고결함 따위는 집어치우라고 말하는 뱀

 

캐롤 씨는 후루미나미를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후루미나미는 오히려 칭찬을 들었다는 듯이 머쓱한 웃음을 짓다가 순식간에 위풍당당한 표정을 꾸며냈다.

 

루미나미 나몬: 뱀! 선악과의 뱀을 일컫는 게로군. 성경 읽나 보네. 캐롤? 내가 암송하는 구절이 있지. 에제키엘 25장 17절. 의인의 길은 탐욕스러운 자들의 불의와 사특한 자들의 횡포로 둘러싸여 있나니. 의인은 축복받은 자라, 자비의 이름과 굳은 의지로 약한 자들의 목자가 되어 어둠의 계곡을 통과하며. 그는 진실로 형제를 지키는 자요 길을 잃은 아이들을 찾는 자다.

 

후루미나미의 목소리 톤이 점점 커지며 그녀는 손으로 권총 같은 모양을 만들고선 계단 아래를 향해 겨누었다.

 

루미나미 나몬: 그리고 나는 내 형제들을 음독하고 파괴하려는 자들에게 거대한 분수와 맹렬한 분노를 내릴 것이니. 내가 네게 복수를 내릴 때!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롤 브라이트: 에제키엘서의 25장 17절은 그렇게 길지 않아요. 그런 구절 없다고요.

 

후루미나미는 캐롤 씨의 말에 잠시 아무 말을 하지 않다가 작게 말했다. 대강 영화가 틀렸다는 중얼거림 같았다.

 

롤 브라이트: 이 한 구절만큼은 맞네요. 분노의 책벌로 내 원수를 그들에게 크게 갚으리라 내가 그들에게 원수를 갚은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 캐롤 씨는 후루미나미의 말을 어떻게 들은 거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런 의문은 빠르게 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토키와가 내게 손을 건넸기 때문이다.

 

키와 아유키: 나나시. 우산 좀 줘.

 

나시: 우산? 이거로 뭘 하려고 그래?

 

비장하게 우산을 집어 든 토키와를 보자 좋지 않은 예감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키와 아유키: 23T. 미안한데 나 좀 도와줘. 계단을 올라가야 해. 지금 낌세를 보아하니 칸나즈키가 어떤 방식으로든 힘으로 버티고 있는 것 같아.

 

나즈키 시노부: 으그그극…! 빨리 와!

 

나리 케이토: 야! 그러다 손 으스러져! 그만 못 해?! 그만 하라고!

 

칸나즈키의 상황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는 몰라도, 그녀가 영원히 버틸 수는 없으리라는 것만은 명확했다.

 

23T5U130: 좋아. 어떻게 도와줄까?

 

키와 아유키: 날 좀 업어 줘. 우산을 펼친 채로 돌진하는 거야.

 

롤 브라이트: 가능하시겠어요?

 

키와 아유키: 초고교급 리더 한 번 해 보죠. 뭐

 

토키와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초조하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세찬 숨을 몇 번 훅훅 내쉰 그는 불바다가 된 계단을 보면서 토키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루미나미 나몬: 돈키호테 작전인가.

 

23T5U130: 우산은 네가 두 개 들어. 토키와. 난 널 업느라 바쁠 것 같으니까.

 

토키와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우산 하나를 펼치고 남은 하나는 자신의 겨드랑이 사이에 끼운 채로 23T의 등 위에 올라탔다.

 

23T5U130: 내가 낙오되더라도 휴게실까지 가서 보급 특권을 손에 넣는 거야.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게 요점 같으니까.

 

키와 아유키: 알겠어. 23T.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23T5U130: 타 죽기 싫으면 우산이나 제대로 펼쳐.

 

그대로 23T는 토키와의 다리를 팔로 붙잡은 채 자신의 등에 얹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뛰어가기 시작했다.

 

루미나미 나몬: 어딜…!

 

후루미나미는 휘발유 통을 바닥에 부어버리지 않고, 휘발유 통 안에 성냥을 넣은 뒤 그것을 통째로 23T에게 내던졌다.

 

우산이 찌그러지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부서질 만큼 약하게 만든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산의 천에 기름이 묻고 불이 엉겨 붙자 우산이 타오르며 구멍이 숭숭 뚫리게 되었다.

 

루미나미 나몬: 전파 발사 준비. 하지만 발사는 하지 말고!

 

키와 아유키: 후루미나미. 새 우산을 써야겠어!

 

23T5U130: 기다려. 전파를 쏘는 순간 우산을 펼쳐서 대응해!

 

키와 아유키: 나… 나는 못 해! 반응하지 못할 거야!

 

23T5U130: 해야만 해. 토키와. 아. 천이 다 타 버렸네. 그거 내버리고 우산 펼칠 준비만 하고 있어. 바로 올라갈 테니까.

 

23T는 한층 속도를 냈다. 후루미나미는 23T의 움직임에 당황한 듯이 가방을 뒤적이더니 볼링공을 꺼냈다.

 

키와 아유키: 펼칠 필요 없어. 23T! 우산을 찌그러트릴 생각이야. 뚫고 가기만 하면 돼!

 

23T5U130: 됐다. 잡았어.

 

후루미나미는 볼링공을 대충 던지고 계단 위를 향해 뛰어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그것보단 23T가 더 빨랐다. 23T는 후루미나미의 가방을 붙잡았고, 뒤로 당기더니

 

내 시야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은 거기까지였다. 그 이후로는 대략적인 소리를 통해 상황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루미나미 나몬: 지…!

 

23T는 후루미나미가 문장을 말하려던 찰나 그녀의 입을 막았다.

 

23T5U130: 플라잉 로봇은 음성 인식으로 움직이는 것 같더라. 후루미나미.

 

루미나미 나몬: 흐느느! 흐으으은!

 

후루미나미는 23T의 손을 떼어내려 노력했지만 카이다마저 꺾을 수 있는 23T의 완력 앞에서는 턱도 없는 시도였다. 토키와는 23T의 등 위에서 내려오더니 23T에게 우산을 던져 건넸다.

 

키와 아유키: 혹시 모르니까 가지고 있어!

 

23T5U130: 그래. 빨리 휴게실로 가. 토키와. 칸나즈키가 기다리고 있어. 우리가 이겼다고…!

 

토키와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후루미나미와 카나리를 상대로 거둔 승리. 그 기쁨. 내 손으로 누군가를 드디어 살릴 수 있다. 그 생각에 토키와는 날아갈 것만 같았다.

 

캐롤 씨가 말했지. 초고교급 리더라는 자리에서 내려오던가 초고교급 리더라는 기준을 맞춰 버리는 것. 그래. 난 지금 충분히 초고교급 리더 같을까?

 

나는 초고교급에 가까운 사람이 전혀 아니다. 다들 빛나는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내겐 아무것도 없어. 그냥 껍데기뿐이야. 그렇지만 적어도 겉보기에는 가까워졌을까?

 

다른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토키와는 휴게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나즈키 시노부: 토키와. 위험해애애애애!

 

나리 케이토: 우와아아아악!

 

토키와가 칸나즈키의 외침을 듣고 카나리의 손에 들린 무언가를 보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 있었다.

 

키와 아유키: 큭…!

 

카나리가 양동이에 담긴 휘발유를 토키와에게 끼얹었다. 토키와는 코를 찌르는 지독한 기름 냄새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으나 이미 그의 몸은 휘발유가 뚝뚝 떨어질 만큼 젖어버리고 말았다. 카나리는 양동이를 바닥에 던져 버리고선 라이터를 토키와에게 가져다 대고선 말했다.

 

나리 케이토: 가만히 있어! 불 붙인다?!

 

그곳에서 단순히 어휴. 그럼요. 하고 항복해 버리기에 토키와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키와 아유키: 넌 못 붙여. 내가 여기서 불에 타서 죽으면 너도 처형당하는 거 알잖아.

 

나리 케이토: 흥. 소화기 있거든? 네가 좀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끄면 그만이야. 그냥 항복해! 너만 고통스러울 테니까.

 

카나리는 자신의 바로 옆에 둔 소화기를 의기양양하게 가리켰다. 토키와는 카나리의 손에 들려 있는 라이터와 카나리의 얼굴을 교차해서 힐끗거렸다.

 

그리고 그동안 카나리는 후루미나미와 연결된 다이얼로그 통화를 통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전부 알 수 있었다.

 

23T5U130: 미안하지만 아주 잠깐만 잠들어 줘야겠어. 후루미나미.

 

루미나미 나몬: 흐느느! 흐느느으으!

 

23T의 기계 손가락에 의해 후루미나미가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임을. 카나리는 알게 되었다.

 

그랬기에 카나리는 허공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어차피 플라잉 로봇을 다루는 데에 거리의 조절은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리 케이토: 플라잉 로봇. 회로 방해 전파 발사해! 확인이라는 대답 하지 말고!

 

후루미나미와 연결된 통화 탓에 23T 또한 카나리의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23T는 바닥이나 천장. 도구나 어떤 사물에서 플라잉 로봇이 나타나지 않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단 한 번. 한 번만 몸을 피한다면 완전한 승리가 찾아왔다. 전파를 피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후루미나미의 플라잉 로봇은 어차피 움직이지 않을 터이기에. 23T는 후루미나미를 거의 인간 방패로 삼다시피 하며 같은 자리를 돌며 또 다른 플라잉 로봇을 찾았다.

 

그러나 또 다른 플라잉 로봇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푸른빛의 회로 방해 전파를 발사한 것은 후루미나미의 플라잉 로봇이었다.

 

23T5U130: 잠깐. 이게 무슨

 

전파가 23T에게 퍼졌다. 23T는 말을 반도 끝마치지 못하고 꽈당 쓰러졌다. 그 품 안에서 같이 쓰러진 후루미나미는 23T의 기계 팔을 끼리릭 밀어내더니 숨을 자유롭게 쉬지 못한 만큼 보상받듯이 상쾌한 호흡을 내쉬었다.

 

루미나미 나몬: 휴우!

 

키와 아유키: 23T. 어떻게 된 거야? 대답해. 23T!

 

나리 케이토: 대답 못 해. 뻗었으니까. 날 엄호해. 플라잉 로봇. 어차피 네가 할 일은 없지만 이리 와.

 

"확인."

 

후루미나미의 근처에 있던 플라잉 로봇은 바닥으로 사라졌다가, 휴게실의 바닥에서 스르르 떠올라 카나리의 곁에 머물렀다. 휘발유에 몸이 젖은 토키와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표정이 토키와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는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 이기지 않았던가? 분명 승리한 게 아니었나? 이제 휴게실로 들어왔고, 후루미나미의 명령 또한 막았다. 그들의 승리였을 터였다. 그런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키와 아유키: 이… 이게 뭐야? 후루미나미의 로봇을 어떻게 네가

 

나리 케이토: 전제가 잘못됐잖아. 이건 내 플라잉 로봇이야. 멍청이들아.

 

토키와의 눈에 허탈함과 자신을 향한 책망. 작은 깨달음이 떠올랐다.

 

작은 속임수. 후루미나미의 말에 적당히 맞춰서 플라잉 로봇이 움직이게끔 카나리는 자신의 플라잉 로봇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 속임수는 결정적이었다. 23T는 자신이 후루미나미의 플라잉 로봇을 봉쇄했다는 생각. 그것에서 비롯된 방심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나리 케이토: 23T는 멈췄고, 나머지는 지하에. 넌 불붙을 참이니까 우리가 이겼어. 멍청아. 다 끝났다고! 칸나즈키 너도 뚜껑에서 손 떼! 그러다가 진짜 손 작살난다니까!

 

나즈키 시노부: 아직 안 끝났어…!

 

나리 케이토: 끝났대도!

 

카나리는 무언가가 바닥에 쿵 떨어지는 소리에 그쪽을 바라보았다. 토키와가 있던 방향이었다.

 

토키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어둡지만 힘 있는 목소리였다.

 

키와 아유키: 제발 우리 한 번만 도와줘. 카나리

 

카나리는 놀란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며 그를 비웃었다.

 

나리 케이토: 무릎을 꿇어? 너 무릎 값이 싼가 보다?

 

키와 아유키: 맞아. 난 무릎이 싼 편이지. 목숨 값도 이 탑의 누구보다 싸고. 왜냐하면 내 목숨에는 충분한 가치가 없으니까.

 

나리 케이토: 자기 목숨 값을 박하게 재는 놈은 처음 보네. 야. 일어나. 일어나서 다이얼로그나 내놓으면 되잖아.

 

나리 케이토: 왜 느닷없이 무릎을 꿇는 거야. 네가 그렇게 졸라댄다고 해도 내가 봐줄 것 같냐고! 날 무시하는 거잖아. 카나리 너는 이렇게 무릎 꿇으면 마음 약해지지 이런 식이잖아. 후루미나미한테는 안 이럴 거면서!

 

키와 아유키: 후루미나미에게선 선의를 기대할 수 없어. 그렇지만 너에게는 아니야. 카나리… 단지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갔을 뿐. 네가 우리 모두와 신뢰를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언젠간 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키와 아유키: 우릴 도와줘. 카나리.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야.

 

나즈키 시노부: 토키와! 그냥 달려와아아아!

 

카나리는 칸나즈키의 비명에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닫히려는 보급 특권의 비밀 문을 힘으로 붙들어 든 그녀. 그녀의 팔과 무릎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으며 칸나즈키의 손가락은 당장이라도 보급 특권의 뚜껑에 으스러질 것처럼 몇 cm의 공간밖에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즈키 시노부: 그게 더 가능성이 높아! 라이터를 피하며 달려!

 

나리 케이토: 너는 손을 빼기나 하라고! 애초에 내가 여기서 마음 약해지면 후루미나미가 날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포기하고 다이얼로그나 내놔!

 

키와 아유키: …그녀는 널 신뢰하는 게 아니야. 카나리. 널 이용하는 거야. 너도 후루미나미와 함께하던 이들이 어떻게 배신당하는지 알잖아.

 

키와 아유키: 세상의 모든 약속이 영원히 이어지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만 이 살인 게임 속에서 우리에겐 서로가 필요해. 우리 모두에게… 서로가 필요해.

 

키와 아유키: 난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카나리. 내겐 대단한 재능도 뛰어난 말솜씨도, 높은 지능도 없어. 너보다 나은 건 키 밖에 없지.

 

나리 케이토: 키 얘기하지 마.

 

당황한 채로 토키와의 말을 듣던 카나리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키와 아유키: 그렇지만 이런 나조차도 다른 사람을 위해 조금 더 강해질 수 있어. 우리 모두에게 그럴 가능성이 있어. 제발. 카나리… 우리와 함께해 줘. 우릴 한 번만 도와줘!

 

나즈키 시노부: 토키와아아아윽…!

 

카나리는 라이터의 점화기에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다이얼로그의 버튼을 눌렀다.

 

나리 케이토: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뒤에서 소리나 질러대고. 신경 거슬리게!

 

카나리는 과장되게 화난 태도를 칸나즈키에게 쏟아냈다. 칸나즈키는 보급 특권의 뚜껑이 쉽게 열리고 닫히는 것을 보자 눈을 크게 떴다.

 

나리 케이토: 칸나즈키. 손가락 빼. 이제 그거 열려고 애쓸 필요 없잖아. 보급 특권 다시 닫아 버리기 전에 손가락부터 빼.

 

나즈키 시노부: 아이고… 나 진짜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겠어

 

칸나즈키는 휴게실의 바닥에 벌렁 눕더니 그대로 쥐 죽은 듯이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키와 아유키: …고마워. 카나리. 내 말을 들어줘서.

 

나리 케이토: 네가 나보다 못난 놈이 아니었으면 이런 거 조금의 가능성도 없었어. 내 옛날 생각났으니까 한 번 봐준 거야너 앞으로 나 극진히 모셔.

 

카나리가 툴툴댔다. 토키와는 무릎을 다시 펴며 카나리를 보고 웃음을 지었다.

 

키와 아유키: 알겠어. 카나리. 너는 앞으로 우리와

 

루미나미 나몬: 이렇게 작은 꼬마를 꾀어내려 하면 쓰나. 토키와.

 

기척 없이 나타난 후루미나미. 그의 귀가에 바로 꽂히는 그녀의 목소리에 토키와는 몸을 틀었다. 사실 틀다 못해 팔꿈치로 그녀를 후려치려 했다. 꽤 친절했던 토키와도 후루미나미에게만큼은 질릴 대로 질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토키와는 자신의 등이 순간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졌다고 느꼈다.

 

루미나미 나몬: 매치포인트.

 

그게 정말 불이 붙은 것임을 깨닫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토키와는 늘 입던 회색 자켓을 벗어 버리려고 몸을 휘적이며 비명을 질렀다.

 

키와 아유키: 흐으아아아아악!

 

나리 케이토: 으아악! 이런… 이런 미친! 진짜로 지르면 어떻게 해?!

 

카나리는 허둥지둥 자신의 옆에 둔 소화기의 노즐을 뺐다.

 

루미나미 나몬: 좋은 비명이에요. 토키와 씨! 이제 여기 보시죠!

 

화마. 몸에 묻어있던 휘발유를 타고 불이 서서히 번져나가자 토키와의 평온한 의지조차도 고통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무뎌지고 퇴색되었다. 자신이 타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불이 얼마나 번졌는지 눈을 거의 뜨지도 못한 토키와는. 그대로 웃고 있는 후루미나미에 의해 소화기의 내용물을 온몸으로 뒤집어썼다. 카나리의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카나리는 공포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토키와를 조준하고서 소화기를 흩뿌렸다.

 

키와 아유키: 으아! 으아아아아악!

 

나리 케이토: 가만히 좀 있어 봐! 끄기 어렵다고!

 

루미나미 나몬: 이쪽 봐! 토키와! 불 제대로 꺼줄 테니까! 그래요. 계속 비명을 지르세요! 좋습니다. 좋아요! 자. 페이드 인

 

토키와는 얼굴에 엉겨 붙는 흰색의 화학용품 탓에 눈을 뜨지도 못했다. 혼란이 잠재워질수록 토키와의 몸에 묻은 화마들이 소진되어갔다. 불은 옷을 까맣게 태우긴 했지만 그의 몸까지 태워버리지는 않았다.

 

파란색. 피부색. 회색. 흰색. 약간의 빨간색과 녹색까지 다채로운 색을 가지고 있던 토키와는 순식간에 백색과 검은색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되었다. 마치 눈사람 같았다. 눈을 뜨지 못한 채 계속 분사되는 소화기 세례에 토키와는 자신의 얼굴을 팔로 가리고 몸을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를 향해. 후루미나미는 아주 잠깐 동안 소화기의 분사를 멈추고 발소리를 죽인 채 토키와의 뒤로 다가갔다.

 

나리 케이토: 너 또 뭘 하려고 그래?!

 

키와 아유키: 어. 어디. 어디에

 

루미나미 나몬: 앤드 페이드 아웃!

 

후루미나미는 소화기의 허리와 윗부분을 잡고는 토키와의 머리를 소화기의 모서리로 비스듬히 내리쳤다.

 

깡 하는 소리와 함께 토키와는 다리에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루미나미 나몬: 이제 상황 끝!

 

상황 끝이라고 말한 직후 후루미나미는 기지개를 쭉 하고 펴다가.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는 카나리에게로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루미나미 나몬: 너 아까 조금 망설이더라. 보급 특권도 잠시 활성화하고. 무슨 생각이야?

 

나리 케이토: 그건 칸나즈키 저 멍청이 손이 으스러질까 봐…

 

루미나미 나몬: 칸나즈키!

 

후루미나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칸나즈키는 이미 곯아떨어진 뒤였다.

 

루미나미 나몬: 저건 보류. 카나리 넌 변명 마. 넌 그냥 토키와에게 동정이 간 거야. 칸나즈키의 말에 무슨 바람이라도 불었나? 무슨. 네가 이 탑의 다른 사람들이랑 진짜 믿음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봐?

 

후루미나미는 카나리에게 얼굴을 가까이하면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카나리의 표정이 최소한의 자존심을 부려 보려는 심술에서 점차 겁에 질린 것으로 바뀌자 그녀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루미나미 나몬: 아하하! 웃기게 하지 마. 진짜. 캐롤과 나나시. 하기와라와 이바라. 히무로와 나 같은 관계를 원했던 거야? 네가?

 

루미나미 나몬: 돈 말고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면서! 네 주제를 좀 알아. 카나리. 분수에 안 맞는 꿈 좀 그만 꾸고!

 

후루미나미가 카나리의 이마에 검지를 대고는 그의 머리를 뒤로 확 밀었다. 카나리는 모멸감과 화에 얼굴을 잔뜩 붉혔으나 반박의 말은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루미나미 나몬: 그런데 정말로. 저것들한테 동정심 가질 필요 없어. 카나리. 신뢰 관계 같은 건 믿을 게 못 된다고.

 

나리 케이토: 왜?

 

루미나미 나몬: 왜냐하면 나한테 기관총이 없거든. 너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카나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사실을 곱씹었다.

 

나리 케이토: 그래서?

 

후루미나미는 조금만 더 생각해보라고 재촉하듯 자신의 손목을 안쪽으로 돌렸다.

 

루미나미 나몬: 보아라. 만약 나한테 기관총이 있었으면 저것들은 죽진 않았겠지만, 구멍은 몇 개 났을 거야. 그런데 나한테는 정말 기관총이 없어. 너에게도 없고. 즉 다른 누군가가 기관총을 산 거지.

 

루미나미 나몬: 내 말뜻이 이해 가? 기관총을 가지고 있는 게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 사람은 이 모든 일을 방관한 거야.

 

카나리는 후루미나미의 말을 이해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잠시 뒤 그의 고개는 다시 굳어 버렸다. 하나를 이해하자 또 다른 의문이 생겨났던 것이다.

 

나리 케이토: …왜지? 진짜 기관총을 우리한테 겨눴으면 우린 분명 패배하고도 남았는데? 기관총으로 플라잉 로봇만 제거해도 우리는 아무것도 못 해. 23T를 못 막잖아.

 

루미나미 나몬: 우리가 패배하는 걸 원치 않은 거겠지.

 

나리 케이토: 아니. 정말 이해가 안 돼… 토키와 저 놈이랑 같은 편이면서 우리가 이기길 원했다고? 감염으로 사람이 죽는 걸 원했다는 거야?

 

후루미나미는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루미나미 나몬: 그래! 그 자가 우리한테 편승했어! 우릴 막을 수 있는 수많은 기회와 힘이 있었는데 나쁜 짓은 우리한테 다 시키고 방관만 했지. 그 사람도 죽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해변에서 내 경주마가 아닌 아무나 빨리 죽어 줬으면 했으니. 우리를 방관할 수밖에!

 

카나리는 그 말을 부정하고 싶다는 듯이 고개를 작게 저었다.

 

나리 케이토: 말도 안 돼. 그럼 토키와 저 놈은 대체 뭘 위해 이런 꼴을

 

루미나미 나몬: 아무런 의미도 없었지. 그는 단지 동료를 믿었어.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너에게마저 손을 내밀었지만 돌아온 것은 이 꼴이 될 때까지의 방관뿐.

 

카나리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이 자신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나리 케이토: 기관총을 살 수 있었으면 항생제도 살 수 있었는데. 기관총은 처음부터 3000만 크레딧이었는데

 

루미나미 나몬: 우리야 항생제를 굳이 우리 크레딧으로 사지 않아도 됐고, 내가 개인적으로 하고픈 일도 있으니 안 산 거지만 그 사람은 그냥 안 산 거야. 모리와 나이토? 죽게 두라고 그래. 내 경주마가 죽을지도 모르는 일말의 리스크가 있다면 난 모험 안 해. 죽게 둬.

 

루미나미 나몬: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 따위 없어. 모두 추악한 내면을 감춘 채 서로 가면을 쓰면서 살지. 누구도 예외는 없어. 공허한 약속이라고. 약속과 신뢰는 그저 통제, 금지의 또 다른 이름이지. 그리고 그 누구도 깨도 불이익 없는 속박에 얽매이려 하지 않아. 모든 실타래가 서서히 풀어지지

 

후루미나미는 카나리를 달래듯이 그의 머리를 토닥였다.

 

루미나미 나몬: 너도 아는 것 같더라. 믿음이 허무한 거. 결국 외로운 세상이잖아.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온전히 믿을 수 없어.

 

'부모' 대목에서 카나리의 몸이 한 번 움찔했다. 옳지. 부모 문제가 있을 줄 알았어. 후루미나미는 내심 약간 쾌재를 불렀다.

 

루미나미 나몬: 그러니 세상에는, 특히 이 탑에는 더욱이나 신뢰 관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다들 서로의 등만 노릴 뿐… 이래도 토키와에게 동정이 가?

 

카나리는 몸이 축 늘어진 채 옷이 그슬리고, 타고, 전신은 소화기의 흰색 내용물로 뒤덮인 토키와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경멸을 담아 말했다.

 

나리 케이토: 저것들은 신뢰 관계 같은 게 아니야. 그냥 토키와 저 멍청이가 독박을 뒤집어쓴 거였어. 자기 동료에게 기관총이 있는 줄도 모르고 혼자 달려들다가 저 꼴이라니.

 

카나리의 눈에 허무가 여렸다.

 

나리 케이토: 역시 사람 따위는 못 믿어

 

루미나미 나몬: 맞아. 너도 이해하는구나! 결국 모든 신뢰는 부서지기 위해 존재한다구.

 

나리 케이토: 장황하게 말하는 것좀 그만 해. 그럼 너. 언젠가 날 배신할 거냐?

 

후루미나미는 곰방대에 불을 붙이고는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나리 케이토: 딴청 피우지 마. 내 말에 대답해! 날 배신할 거냐고!

 

루미나미 나몬: 글쎄. 솔직히 말해서 그건 나도 모르겠어. 배신의 카테고리는 생각보다 넓고 다양하거든.

 

나리 케이토: 나쁜 자식

 

루미나미 나몬: 히히. 오늘 칭찬 많이 듣네

 

후루미나미는 머리를 긁적이며 연기를 마시고 내뱉기를 몇 번 반복한 후. 편안한 얼굴을 한 채 말했다.

 

루미나미 나몬: 하지만 괜찮아. 너 정도의 비극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거든. 재미도 없단 말이야. 그러니 네가 계속 하찮고 편협한 세계관 속의 작은 새로 남아 있겠다면. 네게 해코지하지 않을 거야. 네 작은 금빛 낙원을 향유하게 두겠다고. 그거면 되지?

 

나리 케이토: …그래. 지금은 그걸로 됐어. 그보다 너무 아슬아슬했어. 휘발유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몽롱한 의식 속. 몸이 움직이지 않음에도 간신히 붙든 정신. 토키와는 소화기의 내용물에 뒤덮인 채로 후루미나미와 카나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토키와에겐 몇몇은 불확실하게 들렸고 확실하게 들리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어. 우리 중에 기관총을 가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어. 다 알고서 나를 이런 위험에 빠트렸을 리가 없다고. 나는 믿을 거야. 믿어야만 해

 

네 곁에 있는 게 카나리의 플라잉 로봇이었다면. 네 플라잉 로봇은 어디에 있는 거야. 후루미나미. 왜 네 플라잉 로봇은 부르지 않은 거지?

 

부를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거야? 그곳이 어디지? 어디인지는 몰라도

 

토키와에겐 몸을 일으킬 힘이 없었지만, 정확히 손가락 하나를 까딱할 힘이 남아 있었다.

 

토키와는 다이얼로그를 조작해 항생제를 해변으로 배송했다. 후루미나미는 토키와에게 다가오던 도중 그의 손가락이 다이얼로그에 가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루미나미 나몬: 어. 뭐야. 너 항생제 보냈어?

 

키와 아유키: 나한테서 항생제를 빼앗진 못해. 이제 해변으로 갔으니

 

토키와는 바닥에 픽 하고 쓰러졌다.

 

루미나미 나몬: 상관은 없지. 자자. 그럼… 큐!

 

기와라 우시오: 미친. 지금 봤네. 너 손이 왜 이래?

 

하기와라는 검붉게 물든 모리의 손바닥을 보고선 기겁을 했다.

 

리 레이코: 감염된 것이다 보면 모르나?

 

기와라 우시오: 진짜 병세가 심각하긴 하시네요. 아가씨. 이러다가 진짜 죽겠어요.

 

리 레이코: 강경책 없이는 정말 그렇게 되겠지 그럼 이름 없는 남자와 나의 또 다른 후원자는 죽게 될 것이다. 최악의 상황 아닌가…?

 

리 레이코: 지금 정해두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최후의 순간에 나를 죽일 자를.

 

이토 유즈루: 미친 소리 하지 마. 모리.

 

유즈미 나데시코: 널 죽인다니. 그런 거 못 해

 

리 레이코: 답은 이것 하나뿐이다. 공리를 증진시키지 못한 자는 공리를 위한 제물이 되어야 마땅하다

 

리 레이코: 누구라도 좋으니 날 죽여라. 그러면

 

이토 유즈루: 너 혼자만 죽는 게 아니잖아. 또라이야!

 

나이토의 일갈에 모리는 그의 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토 유즈루: 나나시와 적어도 후원자가 한 명은 더 있는데. 그 두 명을 너랑 같이 데리고 가자고? 길동무로 삼자는 것도 아니고!

 

리 레이코: 그런 게 아니다나는

 

이토 유즈루: 그건 공리를 위한 선택조차 아니야… 모리 넌 그냥 살기 싫어서 죽고 싶은 거야. 죽음을 도피처로 삼는 짓이란 말이야. 나는 그런 거 용납 못 해.

 

리 레이코: 그런가. 내 자기만족일 뿐이란 말인가

 

모리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리 레이코: 애초에 난 지금 뭘 원하는 거지

 

이토 유즈루: 감염으로 죽기 전에 얘기해 보자고. 죽는다, 날 죽여라 그딴 개소리 하지 말고.

 

기와라 우시오: 야. 잠깐. 저거 봐봐! 저게 뭐야?

 

하기와라가 그들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공중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낙하산 같은 천에 묶여서 내려오는 상자였다.

 

유즈미 나데시코: 어… 새인가?

 

루미나미 나몬: 자. 하늘에서 항생제가 떨어집니다. 공중 보급. 이것으로 너희는 모두 치유될 수 있어. 저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항생제인 줄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루미나미 나몬: 저렇게 둥실둥실 떨어지는 게 마치 표적 같지 않아? 날 맞춰주세요 하는 표적. 과녁이라고 해야 하나.

 

나리 케이토: 악취미야. 그거. 빨리 할 일이나 해.

 

후루미나미는 개인 송출기의 화면에 빨려들어갈 듯이 몰입하고 있었다.

 

루미나미 나몬: 나도 동의해.

 

루미나미 나몬: 당장 격추시켜 버려. 마이 플라잉 로봇. 액션!

 

"확인."

 

하늘에서 느릿느릿하게 떨어지는 상자에 한 기계가 접근했다. 흰색 몸체와 파란 눈을 가진 로봇이었다.

 

로봇이 작은 폭탄 같은 것을 항생제에 발사했다.

 

 

 

 

 

 

일주일 텀 연재에서 그냥 속도를 내서 3일컷!!!!!!

 

종강을 한 나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우와아아앙

 

단크 타워를 쓰면서 느낀 거지만 비중이 없던 캐릭터들도 쓰면 쓸수록 재밌어지네요 토키와가 진짜 쓰는 재미가 너무 쏠쏠하다는 걸 느꼈어요

 

아무튼 이제 서서히 비일상편을 향해 달려가는 타워입니다… 계속 힘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