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내게 다음 구절은 없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내게 다음 구절은 없다.
사망이 홀연히 저들에게 임하여 산채로 음부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저거처에 있고 저들 가운데 있음이로다.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그러나 신은 행동하지 않는다. 신은 언제나 호언장담하지만 내려오지 않는다.
책 안의 신은 책 안에만 존재한다. 책 밖으로 손을 꺼내 저들을 붙잡지 않는다. 그럴 수 없다. 신은 선하지 않으며 악하지 않으며 권위있지 않으며 권위 없지 않다. 책 속의 신은 무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형상을 빚고 그것에 고개를 숙이며, 남에게 해를 끼칠 능력이 없는 것을 선함으로 포장한다. 왼뺨을 맞아서 오른뺨을 내주는 것은, 뺨을 마주 때릴 힘이 없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신은 누구도 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다음 구절은 없다.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영화관의 화면에는 탑과 해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송출되었다. 그러나 늘 같은 사람을 비추지는 않았다. 마치 무작위로 채널이 바뀌는 텔레비전처럼, 화면은 자기 멋대로 다른 사람을 비추었다.
모노로그는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영화관 안에 혼자 남겨졌다. 어쩌면 내가 죽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화면에 나온 이들의 말에 따르면 내가 죽은 것만은 진짜 같았다.
영화관 안에선 잠을 잘 필요가 없었다. 잠을 자지 않더라도 졸리지 않았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이미 죽었기 때문일까.
이 곳이 가상현실 안이라 내가 죽어도 죽은 게 아니라는 가설은 일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내 처지가 좋아지지는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영화를 보듯이, 그들을 지켜보는 것 밖에 없었다. 어디로도 통화가 연결되지 않는 다이얼로그에 경주마 선택 항목이 생기기 전까지는.
토가를 선택한 이후에 그를 후원하는 동안에도 피해자 특전의 존재는 내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세 문 중 하나를 선택하라? 포털 조정 완료? 영문을 알 수 없는 그 문에도 분명 쓰임새가 있을 거라 생각해. 나는 문을 관찰하고 영화를 보았다.
토가가 시련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세 개의 문이 시련으로 통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첫 번째 시련 속에서 토가는 기절한 나를 들고 카이다 쿠로하에게서 도망치려 했다. 턱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가 카이다 쿠로하에게 노려진다면 반드시 막아야 했다. 하지만…
여기서 난입할 순 없어. 시련은 앞으로 두 개가 더 남았는데…
다른 시련에서 얼마나 큰 위기가 있을지 몰라. 그러니 지금 카이다 쿠로하가 노리는 건 나 하나 뿐이란 말이야.
미도리카와 아쿠토: 날 버리고 도망쳐. 그러면 시련 속에서 나갈 수 있다고… 토가.
칸나즈키 시노부: 버리고 도망치라고? 무슨 뜻이야?
뭐지?
미도리카와 아쿠토: 너 칸나즈키 시노부야? 지금 내 말이 들려?
칸나즈키 시노부: 응. 들려. 고민이 많이 되나 봐?
미도리카와 아쿠토: 내 쪽도 네 말이 들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난 죽었을 텐데.
칸나즈키 시노부: 나도 몰라. 그냥 옛날부터 들리더라고. 보살 언니 말로 한 번 들은 적이 있는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더라. 그냥 천기가 흘러들어온다는 느낌. 응. 의미 부여하지 마. 그냥 난 이런 체질 사람인 거야. 그게 다야.
미도리카와 아쿠토: 무당이라서 죽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거야? 지금 야가미에게 전해줘! 날 버리고 도망치라고!
칸나즈키 시노부: 미안하지만 나도 지금은 그 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라. 전해줄 방법도 없어. 난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어. 결국 미래는 안 바뀌거든…
칸나즈키 시노부: 우리 모두 고충이 많지. 안 그래?
정말 그랬다.
칸나즈키 시노부: 실패했지만. 그래도 야가미가 살아서 다행이지 않아?
미도리카와 아쿠토: 당연하지. 날 시련 밖으로 꺼내려다가 토가가 뇌사할 순 없어. 또 첫 번째 시련 말고도 아직 시련이 남아 있잖아.
칸나즈키 시노부: 네 말이 맞아. 기회는 남아 있으니까 어떻게든 될 거야. 야가미는 그래도 싹수가 있는 놈이라. 그런 선택을 하지만 않았으면 다 잘 됐을지도 모르는데…
미도리카와 아쿠토: …착오가 있었을 거야.
미도리카와 아쿠토: 칸나즈키? 할 이야기가 있어. 칸나즈키. 내 말 들려?
칸나즈키 시노부: 아니 왜 자꾸 깨우고 그래. 나도 잠 좀 자자니까. 이름 없는 남자 전화도 끊고 자려는데 대체 왜 그래…
미도리카와 아쿠토: 지금 카이다 쿠로하가 세 번째 시련에서 나왔어.
칸나즈키 시노부: 뭐? 카이다가 나가? 시련에서 나갔다고?
미도리카와 아쿠토: 지금 발견했어. 두 번째 시련의 문이 있던 곳으로 가는 것 같아.
칸나즈키 시노부: 이야… 그럼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누가 시련으로 가는 거고…?
칸나즈키 시노부: 몰라. 난 잘래. 여기서 알 수 있는 것도 없단 말이야. 너도 잠이나 자…
미도리카와 아쿠토: 칸나즈키. 정말 방법이…
칸나즈키 시노부: 매달려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니까!
칸나즈키 시노부: 아이고. 아이고… 팔 아파. 응. 히무로와 야가미는 아직 멀은 것 같다고? 그럴 만도 하지.
미도리카와 아쿠토: 언젠가는 도착하겠지만, 세 번째 시련까지는 아직 많이 남았어. 칸나즈키 넌 어때? 아직도 대부분이 네 예지의 선택지 안에 있어?
칸나즈키 시노부: 나는 그냥 열심히 하려 하고 있지. 무슨 변화가 생길까 해서. 아무튼 너도 몸조심해. 아. 몸조심하라는 표현은 너한테 조금 어긋나나?
칸나즈키 시노부: 아무튼 너도 말의 골자는 이해가 되잖아? 후회가 없게끔 해. 이번이 마지막 기회잖아. 잘해야 해…
미도리카와 아쿠토: 하나만 할 수 있다면 후회는 없어.
나는 기관총을 들고서 세 번째 시련의 문을 바라보았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토가를 도울 수 있다면 만족해.
오후 12시. 후루미나미는 칭얼거렸다.
후루미나미 나몬: 모노로그으으으. 이거 재방송 기능은 없는 거야?
모노로그: 그런 것 없다. 휴대용 송출기에서 지나간 영상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후루미나미 나몬: 마유즈미 얘가 내 히무로를 가져가려 하잖아! 난 뺏는 취향인데! 이대로 마유즈미가 죽기라도 하면 얘는 히무로의 마음속에 흉터처럼 남아버릴 거야. 이중 정절을 지키는 남자라니 아무런 여지도 없을 게 분명해!
후루미나미는 자신의 목소리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늦은 밤이 되었지만 어차피 기물파손 룰 때문에 문을 부술 수 없다. 그러니 자신들은 무적이라는 것이다.
사실 토키와가 카나리나 후루미나미의 방문을 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토키와의 피킹은 아직 미숙하고, 문을 열기까지는 2분이 넘게 소요된다. 그 정도 시간이면 후루미나미와 카나리가 창문 밖으로 밧줄을 타고, 혹은 플라잉 로봇을 붙들고 어딘가로 도망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은 아무런 소리 없이 이루어져야 했다.
후루미나미는 문 밖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줄 필요도 없었기에. 모노로그와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모노로그: 그가 네 것이 되는 게 이미 이루어진 일인 것처럼 말하는군.
후루미나미 나몬: 다른 사람이 꼬리 치는 거만 아니면. 결국 히무로를 가지는 사람은 내가 될 걸?
후루미나미 나몬: 뭐. 나나시가 지금 크게 치고 올라오긴 했지. 드디어 캐롤이랑 맺어진 것 같더라고. 덕분에 야가미는 3픽으로 밀려났어. 캐롤의 가드가 조금 단단하지만 나나시처럼 유약하고 남한테 의지 많이 할수록 빼앗기가 쉬우니…
나는 캐롤 씨의 소매를 잡았다. 캐롤 씨는 아무 말 없이 내 손목을 두 번 두드렸다. 반응해서 일을 망치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모노로그: 모든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아무렴. 그보다 히무로의 입술은 따뜻했지. 속살마저 차가운 남자는 아니었어. 아. 진짜 빨리 보고 싶다… 히무로와 야가미가 지금 시련 속에 들어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결판이 나면, 다시 탑으로 돌아오겠지? 아무도 안 죽는 건 아쉽지만.
후루미나미가 신이 났든, 춤을 추고 싶었든, 방심을 했든, 밖으로 나가야 할 용건이 있었든 간에 필요한 것은 한순간의 방심뿐이었다.
침대 밑으로 발을 내리는 순간.
숙소 안에는 신발장이 없다. 숙소는 신발을 신고 생활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침대를 더럽히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백이면 백. 침대 위로 올라갈 때는 신발을 벗기 마련이었다. 양말은 벗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신발을 신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캐롤 씨는 손에서 흰 장갑을 벗었다. 문 안으로 귀를 기울이자 작게 첨벙이는 소리가 들렸다.
후루미나미 나몬: 이건 뭐야. 기름인가? 아닌데. 물인데.
필요한 것은 커다란 양동이, 펌프(내가 급조한), 그리고 호스였다.
후루미나미는 방 안에 고인 물이 문의 틈새로 들어왔다는 것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완전히 봉합된 철제 문이 아니라 틈이 있는, 그렇기에 틈 사이로 호스를 넣어 물을 넣을 수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녀가 모든 정황을 눈치채고 물을 피한다면 주변으로 물방울이 튀게 만들 수 있는 기계. 터빈과 배터리를 써서 내가 엉성하게 만든 것을 문틈 안으로 넣었겠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문 밖으로 새어 나온 물 때문에 후루미나미의 숙소 문 밖은 물로 뒤덮여 있었다. 캐롤 씨는 스웨터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리고는 물의 표면에 두 손을 팍 접촉시켰다.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캐롤 브라이트: 문 열어요!
후루미나미 나몬: 아으으으윽!
아까보다 조금 더 크게. 첨벙이는 소리가 들렸다. 후루미나미가 넘어진 모양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여기까지 기어 와서. 문을 열어요!
후루미나미 나몬: 터… 터치를 쓰는 거야…?!
물은 전기가 통하는 매질이다. 전기의 형상을 띤 터치는 물에 통할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정신이 섞이게 되는 직접적인 신체의 접촉이 아니라 매질을 통해 이어진 터치라면, 정신을 완전히 침범하지 않을뿐더러 다른 이와 정신이 이어지는 일도 생기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터치는 아니었으니 그걸로 된 일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캐롤… 이게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해? 하와는 뱀을 해쳐선 안 돼. 그게 규칙이란 말이야…!
후루미나미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캐롤 브라이트: 팔을 땅에 짚고 몸을 일으켜요.
후루미나미 나몬: 그그그그그그극…
후루미나미는 과장된 투로 신음을 내뱉었다. 후루미나미가 느끼는 것은 몸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 그리고 찌릿함이 전부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유쾌한 척 연기를 계속하다니 그녀의 집념만큼은 다시 보게 되었다.
아무튼. 문이 열렸다.
나나시: 이렇게 간단했던 일을 지금까지 당하고만 있었다니…
캐롤 브라이트: 참는 사람만 억울해지는 법이니까요.
캐롤 씨는 물에서 자신의 손을 떼고는 후루미나미의 케이프 코트를 붙잡았다.
캐롤 브라이트: 드디어 잡았어요. 후루미나미 씨.
나는 지체 없이 그녀의 두 손을 한 곳으로 모아 수갑을 철컥 채웠다.
후루미나미 나몬: …이건 좀 너무하지 않아? 이런 식으로 해 놓고 강제적인 터치를 쓰지 않았다고 할 생각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인데. 이게 내가 원하는 거였어. 너희가 그 고결한 마음을 저버리는 것. 스스로가 정한 규칙을 깨 버리는 것!
나나시: 그러니 그만 하라고? 그럴 순 없어. 이미 멀리 왔으니까.
캐롤 브라이트: 아까 뱀과 하와의 비유를 쓰셨죠. 성경 읽으세요. 후루미나미 씨? 저는 많은 구절을 암송해요. 에제키엘 22장 31절.
캐롤 씨는 손이 자유롭지 않게 된 후루미나미를 벽으로 밀어내고는 어떠한 구절을 암송했다.
캐롤 브라이트: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후루미나미 나몬: 하. 무서워 미치겠네…
캐롤 씨가 표정의 변화 없이 자신을 몰아붙이자 후루미나미의 등이 서서히 벽을 따라 내려가더니. 그녀는 주저앉은 듯한 행색이 되었다. 암송은 멈추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에제키엘 26장 21절. 내가 너를 패망케 하여 다시 있지 못하게 하리니. 사람이 비록 너를 찾으나 다시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후루미나미 나몬: 하와는 뱀을 해쳐선 안 돼. 그게 규칙이란 말이야! 하와가 뱀의 위치까지 떨어지다니!
캐롤 브라이트: 미안하지만 이곳은 에덴동산이 아니거든요. 낙원도 아니죠. 이곳이 지옥인 걸요. 만약 이곳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는 게 착한 사람이라면, 착한 사람이 되는 건 그만둘 수밖에요. 그리고 하나 알려줄까요? 저 지금까지 착한 척 꽤 했어요. 미움받는 게 무서워서. 그런데 이젠 아니거든요.
캐롤 브라이트: 그러니 이제 나쁜 사람들끼리 놀자고요. 후루미나미 씨.
나나시: 후루미나미. 다이얼로그 어디 있어?
후루미나미 나몬: 내가 순순히 입을 열 것 같아?!
나나시: 열어! 네 장난에 어울리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해!
나는 그렇게 외친 직후 내 입을 손으로 막았다. 느닷없이 짜증이 끓어올랐다.
아무리 후루미나미의 장난에는 이미 질려 있었다고 해도, 내가 남에게 윽박지를 수 있는 사람이던가?
칸나즈키 시노부: 불에 너무 가까워졌어. 이름 없는 남자.
나는 칸나즈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나나시: …칸나즈키. 몸은 괜찮아? 보급 특권이 닫히는 걸 몸으로 막으려 했다며. 아직 팔이 아플 것 같은데.
칸나즈키 시노부: 불과 기름은 서로를 돕지. 그렇지만 어느 방향으로는 서로에게 파괴적이야. 어느 쪽도 멈추기를 원치 않으니까.
칸나즈키 시노부: 원래 너희는 서로가 서로를 붙잡을 수 있었어. 한쪽이 칼을 들면 나머지 한 쪽이 칼집을 가지고 왔지.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칼을 빼들었어. 이제 더 이상 칼집은 없는 거야.
나나시: 지금 시비 걸려고 왔어? 칸나즈키.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고 했지? 그래서 넌 카나리와 후루미나미에게 가세했어. 그럼 나와 캐롤 씨도 결국 함께할 미래였던 거야? 그게 바뀌지 않으면. 왜 내게 경고했어?
칸나즈키 시노부: 바뀌길 원했으니까. 언제나 바뀌지 않더라도 다른 결말이 나오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칸나즈키 시노부: 지금도 마찬가지지. 유감이야. 캐롤.
캐롤 브라이트: 유감만 표하지 마세요. 확실히 말해 두자면 전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아요. 칸나즈키 씨.
칸나즈키 시노부: 나도 싸울 생각 없어. 후루미나미 놔줘. 내가 보급 특권이 있는 곳까지 안내할 테니까.
칸나즈키는 총총 후루미나미를 향해 다가오더니 그녀의 등 뒤로 손을 집어넣고 다이얼로그를 꺼냈다.
뭐야. 등 뒤에 무슨 수로 다이얼로그를 숨겼대?
칸나즈키 시노부: 아무리 후루미나미가 사람 같지 않게 굴어도 너희는 사람처럼 남아야지. 포기해버리면 결국 똑같아지는 것뿐이야…
칸나즈키 시노부: 아. 그리고 얘들과 이야기도 안 한 것 같더라.
23T5U130: 나나시!
23T. 토키와. 이바라가 윗 계단에서 우리가 있는 층까지 내려왔다.
이바라 쿠리스: 뭐야. 이건 웬 물바다… 잠깐! 후루미나미 잡았어? 너 잘 걸렸다. 요놈. 요놈!
후루미나미 나몬: 이바아아아. 사혀져어어어…
이바라가 후루미나미를 보자마자 달려와 볼을 늘리자. 후루미나미는 조금 긴장이 풀린 기색으로 발음이 새어나가게 두며 말했다.
23T5U130: 어디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전화를 받아도 어디에 있는지 말 안 해주고. 걱정했잖아.
토키와 아유키: 후루미나미를 어떻게 잡으신 건가요?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의 힘을 조금 빌렸다고 해 두죠.
캐롤 씨가 내 팔짱을 끼자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숫기 없는 놈…
23T5U130: 너희… 조금 가까워 보인다?
이바라 쿠리스: 23T. 너도 두 사람 여지 있다고 보는 모양인데. 택도 없어! 캐롤 언니는 상담사 윤리 강령이란 걸 지키고 있어서, 나나시랑은 5년 안에 그런 관계가 되지 않거든.
캐롤 브라이트: 그건 무시하기로 했어요.
이바라 쿠리스: 에에엑?! 거짓말!
이바라와 토키와는 놀란 눈빛으로 나와 캐롤 씨를 보았다. 23T의 눈빛과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분명 나를 좋게 보지는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새벽에는 그녀와 멀어져야겠다고 말해 놓고서. 밤이 되니 그녀와 가까워진 모습을 본다면 누구나 내 우유부단함을 비난할 것이다. 나 또한 이런 내가 싫었다. 착한 것이 아니라 나약한 내가.
그러나 오늘 내 선택을 다시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나는 캐롤 씨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
토키와 아유키: 어쩌다 그렇게…?
23T5U130: 그래. 나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듣고 싶어.
나나시: 지금 당장은 해야 할 일이 있어.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칸나즈키. 다이얼로그 나한테 줘.
칸나즈키는 내 생각보다 순순히 내게 다이얼로그를 넘겨주었다.
칸나즈키 시노부: 휴게실로 가자. 계단을 올라가는 편이 빠르겠지?
캐롤 브라이트: 후루미나미 씨. 당신도 따라오세요. 당신을 혼자 뒀다가 또 예상외의 사태가 벌어지면 안 되니까요.
캐롤 씨가 손에 묻은 물을 스웨터에 문질러 닦고 흰 장갑을 낀 뒤 후루미나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후루미나미는 수갑이 묶인 두 손을 엉성하게 캐롤에게 뻗어 몸을 일으켰다.
이바라 쿠리스: 진짜 이거로 된 거야? 끝을 본 거야?
이바라는 손이 묶인 후루미나미의 모습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나와 캐롤 씨를 번갈아서 보았다.
이바라 쿠리스: 진짜 다행이다. 여기서 멈췄으니 망정이지.
후루미나미 나몬: 그렇지만 캐롤은 터치를 썼어. 물에 손을 대고 나를 거의 감전시켰다구…
토키와 아유키: 캐롤 씨? 강제적인 터치를…?
세 명은 생각대로 반응했다. 놀람. 위화감. 그리고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
나나시: 둘의 정신이 이어진 건 아니야. 캐롤 씨는 물을 통해서도 터치를 행사할 수 있었지만 후루미나미는 그럴 수 없지. 그러니 일방적으로 후루미나미가 캐롤 씨의 명령을 받은 것에 불과해.
나나시: 둘이 기본적으로 똑같다는 말을 하고 싶겠지만. 강제적인 터치가 어떤 건지는 너희도 알잖아.
23T5U130: 알긴 하지만 걱정이 돼.
나나시: 걱정하지 마. 괜찮아.
23T5U130: …정말 괜찮은 거야?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나시: 괜찮으니까 이제 휴게실로 가면 돼. 조금이라도 빨리 모리에게 항생제를 보내 줘야지…
나와 캐롤 씨는 이미 양호실에서 챙겨 둔 항생제 여러 개를 주머니에서 꺼내 확인했다. 이대로 모리와 나이토에게 항생제를 보낸다면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나를 터치로 감전시키고, 쫄딱 젖게 만들고, 내 다이얼로그까지 빼앗아가다니… 이 굴욕은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카나리가 날 구하려고 올 거야!
후루미나미는 수갑을 찬 채 우리를 보고 소리쳤다. 그러나 누구도 후루미나미의 말에 관심을 주지는 않았다. 새빨개진 얼굴로 몇 번 씩씩거린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다시 원래의 얼굴을 착용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사실 안 와.
휴게실까지 가는 계단은 분명 길게 느껴졌지만 그 싸움과 고난이 드디어 끝난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은 가벼웠다. 인플레이션. 두 사람의 스카우트. 협상의 결렬과 플라잉 로봇. 후루미나미를 잡았으나 칸나즈키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난 정신을 잃음. 다시 깨어난 뒤 재도전. 불타는 계단과 또다시 실패.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잡은 것이었다.
솔직히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이 확실해 보이는 승리조차도 후루미나미의 계략 앞에서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나는 이긴 것 같은 싸움을 두 걸음 차이로. 후루미나미가 늘 우리보다 앞서있는 두 걸음 차이로 지는 것을 겪었다. 그러니 발걸음이 급해질 수밖에.
나는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올라가다가 성에 차지 않아 세 칸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바라가 왜 그렇게 빨리 올라가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나는 듣지 못한 척을 했다. 또 말도 안 되는 역전을 당할 바에야 홀로 보급실로 달려가서 항생제를 던져 넣어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누군가가 바짝 따라왔다.
캐롤 브라이트: 치마를 입고 따라가는 건 조금 힘든데요. 나나시 씨?
나나시: 그럼 조금 더 느리게 갈까요?
캐롤 브라이트: 아뇨. 그대로 가요. 충분히 따라갈 수 있으니까!
나는 캐롤 씨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바라 쿠리스: 아주 호흡이 척척 맞으시네. 이제!
계단의 밑에서는 이바라가 휘파람을 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휴게실의 문을 벌컥 열고 캐롤 씨와 함께 그 안으로 달려갔다. 후루미나미의 다이얼로그를 눌러 보급 특권을 다시 활성화한 나는 이제 친숙하게까지 느껴지는 휴게실의 바닥 뚜껑을 열고 보급실로 내려갔다.
나를 압도할 정도로 큰 보급실. 승리가 눈앞에 왔다고 생각하니 사다리를 잡고 내려가기보다는 거의 미끄러지거나 떨어지는 형색이 되었다.
나나시: 저기 있어요. 컨베이어 벨트! 저기에 물건을 넣으면 곧장 후원자에게로 가요!
나는 컨베이어 벨트가 있는 보급실의 구석을 가리켰다. 숨이 조금 벅차게 느껴졌지만 나와 캐롤 씨는 멈추지 않고 컨베이어 벨트 위에 작은 항생제 통 여러 개를 올려 놓았다. 그리고 그것이 어둠을 향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캐롤 브라이트: 끝났군요.
정말 끝이었다. 후루미나미는 배달되는 항생제를 중간에서 격추할 수는 있어도 이미 보급 특권을 통해 전해진 항생제에 간섭할 수는 없었다. 칸나즈키도 통화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칸나즈키 시노부: 내 말 들어. 이름 없는 남자! 보급 특권을 쓰지 않으면 항생제를 구매해 봤자 쓰지 못해. 보급 특권을 써야만 항생제가 모리 곁으로 바로 간단 말이야! 그게 중요해. 배송을 하면 항생제는 파괴되고 말 거야!
자. 보급 특권을 통해 항생제를 보냈다. 그러니 후루미나미조차도 뒤집을 수 없는 승리가 된 것이었다.
나나시: ……끝났군요. 이제 살았어요.
나나시: 이제… 살았어요.
내 얼굴을 타고 눈물 두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캐롤 씨의 앞에서 울었다고 해서 부끄럽다던가 하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됐다면 좋았을 걸. 그래도 지금에서야 이렇게 됐으니 다행이야. 전부 끝났어. 위기가 지나갔어…
흰 장갑을 낀 캐롤 씨의 손과 내 맨손이 맞닿았다. 그녀는 나만큼이나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캐롤 브라이트: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건. 참 멋진 일 같지 않나요?
나나시: 정말 그래요. 정말…
정말. 모든 것이 잘 되었다. 잘 해결되었던 것이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토가한테서 떨어져. 정신 나간 새끼들아.
미도리카와 아쿠토와 똑같은 목소리. 그러나 다른 사람이었다.
기관총을 들고 있는 미도리카와 아쿠토. 탑에서 죽은 그녀와 똑같이 닮은 사람이 나의 눈앞에 나타났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나와 야가미 토가가 눈앞에 있는 그녀의 형상을 보며 스스로의 눈을 의심할 때. 미도리카와 아쿠토가 들고 있는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귀청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실험실 안의 자재들에 구멍이 뚫리고 탄흔이 남았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쿠, 쿠로하!
미래의 미도리카와 아쿠토에게 총알이 닿으려는 찰나 미래의 카이다 쿠로하가 잽싸게 그녀를 낚아채 실험실 너머로 사라졌다. 실험실 안에는 그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카이다 쿠로하: 다들 도망쳐! 잠깐만 시간을 주면 내가 막을 테니까!
미도리카와 아쿠토: 여기서 반가운 얼굴을 다 보네. 카이다 쿠로하!
미도리카와 아쿠토가 외쳤다. 미래의 카이다 쿠로하는 모습을 감추었다. 나는 그들의 행방을 눈으로 쫓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이 시련 속에서는 더 볼 일이 없었다. 세 번째 시련의 미도리카와 아쿠토가 재단에 협력하고 있다면 그녀를 해변으로 끌어올 필요 자체가 없었다.
그러니 나는 눈앞의 문제에 집중했다. 야가미 토가 또한 그런 모양이었다. 그는 느닷없이 우리의 앞에 나타난 미도리카와 아쿠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야가미 토가: 바다뱀…? 당신. 내가 아는 바다뱀입니까…?
미도리카와 아쿠토: 맞아. 나야. 탑에서 죽은 나.
나는 눈 앞의 미도리카와 아쿠토를 바라보았다. 두 번째 시련의 미도리카와 아쿠토. 즉 탑에서 우리와 만나고 죽은 그녀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었다. 다만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다.
의문이 의문을 물자 자는 미도리카와 아쿠토에게 직접 물었다.
히무로 시라베: 네 시체를 내가 직접 봤다. 어떻게 살아있지? 기관총은 어디서 얻었고?
미도리카와 아쿠토: 나도 몰라. 깨어나 보니 영화관 안이었거든. 세 가지 문을 봤는데 하나는 항구, 두 번째는 내 은신처, 세 번째가 여기였지.
항구와 미도리카와 아쿠토의 은신처. 그리고 이곳. 초고교론자의 연구소…
…시련의 장소가 아닌가?
미도리카와 아쿠토: 기관총은 다이얼로그를 통해서 샀어. 기관총이 3000만 크레딧이라 많이 아슬아슬했지만 아무튼 살 수 있어서 다행이야. 네 쪽으로 보내기보다는 내가 가지고 위험한 순간에 너를 돕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이렇게 뛰어들어왔어.
미도리카와 아쿠토: 뒤늦게나마 너를 도울 수 있어서 다행이야. 정말로.
야가미 토가의 쪽으로 보낸다? 크레딧? 돕는다고?
히무로 시라베: 지금까지 네가 야가미 토가의 후원자였단 말인가?
미도리카와 아쿠토는 내 쪽을 보았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래. 맞아. 놀랐어?
히무로 시라베: 죽은 사람이 내 앞에 버젓이 살아있는 것은 납득할 수 있다. 어차피 가상현실 안이니까.
히무로 시라베: 그렇지만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후원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그런 게 가능할 줄도 몰랐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아마 그건 피해자 특전 때문일 거야. 여기서의 개입이 끝나면 너희는 탑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 저승에서 토가를 돕는 것도 이게 마지막인 셈이지.
피해자 특전? 그 단어의 의미를 전부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모노로그가 첫 번째 피해자인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살인 게임에 관여할 권리를 주었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상황을 전부 파악한 뒤 나는 눈앞의 미도리카와 아쿠토에게 총을 겨누었다. 자신을 죽인 사람; 야가미 토가에게 에게 보복하려 든다면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야가미 토가에겐 아직 쓸모가 있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다르게, 미도리카와 아쿠토는 기관총을 고정할 수 있는 끈을 자신의 어깨와 허리 사이에 걸쳐 매고는 야가미 토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짧게 끌어안았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두고 가서 미안했어. 토가.
야가미 토가: 바다뱀. 저는…
미도리카와 아쿠토: 쉿. 말하지 마. 그건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거지? 오해가 있었던 거야…
미도리카와 아쿠토가 야가미 토가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쇳소리를 냈다. 야가미 토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야가미 토가: …저는 멍청했습니다. 나 자신이 흑막보다 한 수 앞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미도리카와 아쿠토: 네 잘못 아니야. 네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를 봤어.
야가미 토가: 정말입니까? 계속 지켜보고 있었단 말입니까?
미도리카와 아쿠토: 늘 지켜보고 있었어. 너는 항상 날 살리려고 애써왔잖아. 늘 최선을 다했어. 네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조차도 포기하지 않았어.
미도리카와 아쿠토가 야가미 토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많이 힘들었지… 고마워.
야가미 토가: 저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전부 실패했으니까요.
히무로 시라베: 재회 도중에 정말 미안하지만 우린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 해변으로 통하는 문으로 간다. 따라와.
미도리카와 아쿠토는 내 쪽을 째려보았으나 반박의 말은 꺼내지 못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러지 뭐. 그러고 보니까 토가 너 두 번째 시련 속의 나랑도 이렇게 껴안았잖아. 감정을 털어낼 필요도 없겠네.
야가미 토가: 보고 있었습니까?
미도리카와 아쿠토: 바로 난입해서 둘 사이 갈라놓으려는 걸 참았지.
야가미 토가: 당신 본인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또 두 번째 시련의 당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바람을 피우다 걸린 남편처럼 쩔쩔매는 야가미 토가를 보며 나는 아무 말 없이 실험실을 나갔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저 녀석은 정말 성격 한 번 짜증 나네…
야가미 토가: 솔직히 말해 당신과 닮은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농담하지 마.
야가미 토가: 농담 아닙니다만.
카이다 쿠로하는 숲 속에서 숨을 죽였다. 어차피 자신이 발각될 리는 없었지만 만전을 다해서 나쁠 일은 없었다.
카이다는 자신의 가방 안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주사기는 모노로그의 디자인처럼 반은 흰색, 반은 검은색이었다. 사용법은 뾰족한 바늘을 정맥에 꽂고 주사하는 것이다.
카이다 쿠로하: 이걸로 문 없이도 세 번째 시련으로 진입할 수 있어.
그 때문에 카이다 쿠로하는 두 번째 시련이 있던 곳. 해변의 일행들이 머물던 곳으로 향했다. 세 번째 시련의 문 앞에 의식을 잃고 눕는 것보다, 안전한 위치에서 미도리카와의 부활만을 저지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카이다 쿠로하: 어차피 그놈들은 절대 그 년을 못 살리겠지만.
카이다는 지혈을 할 때 사용하는 실리콘 막대로 자신의 팔 위를 감고 매듭을 지었다. 피가 잘 통하지 않게 막은 뒤 카이다는 바늘을 자신의 정맥에 찔러 넣었다. 그녀의 피부를 뚫을 만큼 강하게 찔러야 했기에. 부득이하게 깊이 난 상처가 카이다의 이빨을 부드득 갈리게 했다.
주사기의 뒷부분을 쭉 눌러 안에 들어있는 정체불명의 액체가 그녀의 몸에 전부 주입되었다.
카이다는 그대로 몇 초를 기다렸다.
그리고 카이다는 자신의 의식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실험을 통해 쿠로하는 우리 조직의 날카로운 칼이 되어줄 거야."
"그렇지만 그 수상쩍은 자식들을 믿어도 되겠어? 무슨 사이비 조직 같았는데요 이 실험도 애초에 확실하지 않잖아. 무슨 초기 실험이라던데."
"그러니까 더 싸잖아. 아무리 엉성한 초기 실험일지라도 이 아이는 견뎌낼 거다. 그럼 몇 배의 이익이 돌아오는 거지."
"그걸 어떻게 알아?"
"이 아이에겐 증오가 담겨 있거든."
카이다 쿠로하: 제기랄. 머리가 아프잖아. 여긴 또 어디야?
카이다는 자신의 얼굴에 다시금 가면을 쓴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탄흔과 당황한 듯한 목소리. 매캐한 연기와 깨진 유리. 분명히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카이다 쿠로하: 대체 어떻게 이런 짓을 했지?
그리고 불시에 그녀를 향해 주먹이 날아들었다. 카이다의 반사신경이 그녀의 지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목을 살짝 숙여 주먹을 피한 그녀는 땅을 뒤로 세게 차 자신에게 접근하는 이를 확인했다.
카이다 쿠로하: 아. 하필 너냐!
카이다 쿠로하: 모두 조심해! 일전에 나타났던 그 침입자다! 엄호사격 부탁해!
미도리카와 아쿠토: 걱정 마. 계속 몰아붙여!
카이다 쿠로하: 이 개새끼들아!
카이다가 거리를 벌리려 하는 것보다 미래의 그녀가 더 빨랐다. 또 뛰어오르려 하거나 미래의 그녀를 붙잡으려 할 때는 미래의 미도리카와가 정확한 부근을 권총으로 쏘았다. 총알을 전부 튕겨내자니 계속 달려드는 자신을 떨쳐내기 어려웠을뿐더러 도망칠 방법도 없었다.
카이다 쿠로하: 젠장. 말로 하자고. 말로! 난 지금 침입한 자식들을 잡으러 온 거란 말이야!
미도리카와 아쿠토: 날 죽이려 했으면서 무슨 소리지?
카이다 쿠로하: 그러니까 오해를 풀자는 거야!
카이다가 그 자리에 떡하니 멈춰 서자 미래의 카이다와 미도리카와는 그녀에게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에 누구보다 놀란 건 카이다였다. 이 자식들이 참는다고? 나랑, 탑에서 날 그렇게 괴롭힌 이 자식이 참는다고?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나 씨발 대체 뭘 하다가 여기로 납치된 거냐고.
카이다 쿠로하: 너 정체가 뭐야. 매발톱이면서 왜 재단을 적대하는 거야?
카이다는 첫 단추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카이다 쿠로하: 애초에 매발톱이 뭐야!
카이다 쿠로하: 네가 매발톱이잖아. 내가 몰라볼 것 같아? 높은 근밀도. 빠른 몸. 몸놀림에 특화된 육체를 가지고 로를 수호하며, 로의 명령대로 다른 이들을 찢지. 명예로운 임무야!
카이다 쿠로하: 매발톱? 개소리야. 나는 실험을 당하긴 했지만 그런 거 안 들어봤어. 애초에 로는 또 누구야. 망할! 이놈이고 저놈이고 이해 안 되는 소리를. 이것 봐!
카이다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가면을 벗었다. 그러자 미래의 두 사람은 눈을 크게 떴다.
카이다 쿠로하: 토가. 아쿠토에 이번엔 나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미도리카와 아쿠토: 쿠로하. 너 네가 매발톱인 것도 몰랐던가?
카이다 쿠로하: 나는 매발톱이 아니라 재단이 후원을 받고 제공한 초기 실험체였어. 육체 강화만 받았다는 걸로 기억해. 재능을 주입받을 필요도 없이 내게 충분한 재능이 있어서. 재단은 초기 실험을 싼 값으로 진행해줬고 내 조직은 강력한 스파이를 얻은 거지.
카이다 쿠로하: 잡담은 작작 해. 지금 상황 파악됐잖아? 내가 왜 미도리카와 이 새끼랑 같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희들도 저것들을 잡아야 하잖아! 저렇게 총을 쏴 놓고서 도망가게 두진 않겠지.
카이다 쿠로하: 잘 들어. 키가 작은 놈의 이름은 히무로 시라베고. 큰 놈의 이름은 야가미 토가야. 히무로 시라베는 총을 잘 쏘는데…
미도리카와 아쿠토: 잠깐. 잠깐. 뭐라고?
미래의 미도리카와가 카이다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히무로 시라베? 카텟 기관의 그 히무로 시라베란 말이야?
카텟 기관?
카이다 쿠로하: 그래. 그놈이 분명 그 카텟 기관이라는 곳 소속이랬는데 그게 왜?
미도리카와 아쿠토: 쿠로하. 그는 분명…
카이다 쿠로하: 붉은 머리. 싸늘한 표정. 총을 소지한다… 인상착의는 일치해.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래. 조율자 씨의 말대로야. 카텟 기관에 있다던 로의 감시자. 히무로 시라베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카이다 쿠로하: 감시자? 그게 누구인데?
미도리카와 아쿠토: 지금 이 자리에서 잡아야 해. 가자. 쿠로하!
카이다 쿠로하: 그래. 아쿠토!
카이다 쿠로하: 이런 씨발. 이제 알았네. 너희 서로 이름으로 불러?! 진짜 기분 거지 같아!
야가미 토가: 말할 기회가 지금밖에 없으니 말하겠습니다. 당신을 많이 원망했어요.
내가 총으로 다른 이들을 위협하며 문에 달려가는 찰나. 야가미 토가와 미도리카와 아쿠토는 용케 달리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야가미 토가: 그렇지만 제가 그날 이후로 다시 초고교급 협상가로 복귀하고, 이런 몸을 만든 것은 전부 당신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나는 영화관에서 늘 복수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우리가 어떻게 됐을지에 대한 생각을 해.
나는 야가미 토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죽인 사람에게 뒤늦은 동정심이라도 든 것일까? 다른 경우의 수 또한 있겠지만 그것들을 고려하기에는 눈앞에 너무 많은 초고교론자가 있었다.
당장은 혼란스럽고 상황을 알 수 없기에 그들은 적극적으로 우리를 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의 정체를 알기라도 하면 그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어 나를 붙잡으려 들 터였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랬다면 지금 같은 결말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렇지?
야가미 토가: 전 영원히 당신을 기억할 것입니다.
히무로 시라베: 입을 열 시간에 더 빨리 뛰어라! 이러다간 언젠가 붙들릴 것이다!
야가미 토가: 왜 그렇게 급하신 겁니까?
정말 그게 지금 궁금하단 말인가? 이런 대목에서? 욕지기가 나오려고 할 때. 재단의 스피커에 미도리카와 아쿠토의 목소리가 울렸다.
"재단의 모든 이들에게 고한다. 지금 시설을 활보하고 있는 세 명의 침입자가 있다. 그중 감시자. 히무로 시라베로 추정되는 이가 있다. 최선을 다해 그를 생포해야 한다!"
시련의 문까지 가야 할 거리를 계산한 결과. 100m가 족히 남아 있었다. 그 말은 100m의 늪을 헤엄쳐야 간다는 것과 동일했다. 다만 이 늪은 흙이나 모래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사람으로 이루어진 늪이었다.
"로?"
"히무로 시라베?"
"감시자?"
나는 군체 의식처럼 움직이는 그들의 움직임을 본 기억이 있었다. 어디선가 이런 움직임을 마주쳤다. 분명 어디선가… 그러나 그 기억은 지워진 것처럼 흐릿하게 느껴졌다.
복도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안에서 재단의 인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민간인처럼 보이는 이들, 연구원처럼 보이는 이들 가릴 것 없이 나타나 시련의 문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감시자 님! 감시자 님!"
"감시자 님이 돌아오셨다! 감시자 님. 저희를 도와주세요!"
"로의 총! 로의 심판! 로의 영원한 감시자여!"
야가미 토가: 인기 많으신데요?
히무로 시라베: 입 닥쳐.
나는 그에게 쏘아붙였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비켜. 쏜다!
미도리카와 아쿠토는 그들이 자리를 잡지 않은 벽 쪽에 총알을 난사했다. 그러자 홀린 듯이 대열로 몰려들던 이들의 절반이 와해되고 비명을 질렀다. 그것만으로 나머지 대열은 신경 쓸 가치조차도 없었다. 사살 없이 야가미 토가의 완력만으로 돌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짜 위협은 뒤에서 오고 있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뭔가 아쉬워. 이 안에서 카이다 쿠로하를 죽이고 싶은데.
히무로 시라베: 욕심부리지 마라. 우리의 일차적 목표는 생존이다. 포위되기 전에 빨리…
나는 다급하게 말하다가 그만 멈추고 말았다. 귀에 신경을 집중하자 바닥을 부술 것처럼 빠른 속도로. 체중을 실어 쇄도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소리가 두 개였다.
그리고 이미 가까워질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카이다 쿠로하: 감시자 씨이이이이!
미도리카와 아쿠토: 거기 서세요! 저희와 함께하자고요!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미래의 카이다 쿠로하는 미래의 미도리카와 아쿠토를 업은 채 달려오고 있었다.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그녀의 옆에 우리가 알던 카이다 쿠로하가 함께 달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야가미 토가: 설마 그녀도 시련에…
히무로 시라베: 설마가 아니라 확실하다. 내가 미래의 카이다 쿠로하를 맡겠다!
사실 내가 그렇게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미도리카와 아쿠토는 어차피 카이다 쿠로하를 자신이 노리겠다고 내게 선언했을 터였다. 어쩌면 그녀는 내 말을 아예 듣지도 않고 카이다 쿠로하를 노렸을지도 몰랐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완벽해! 이봐! 오랜만이다!
카이다 쿠로하: 씨발. 네가 왜 여기에…?
카이다 쿠로하가 눈을 크게 뜨고 달려오는 속도를 줄일 때. 미도리카와 아쿠토의 기관총이 그녀를 향해 불을 뿜었다. 나는 미래의 카이다 쿠로하에게 집중했다.
로를 보호하고 로의 적을 사살하는 매발톱들은 높은 신체능력과 근밀도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확실한 약점이 있다. 물이다. 그들의 몸은 물에 뜰 수 없다. 쇳덩이처럼 턱도 없이 가라앉기에, 매발톱들은 자신의 키보다 5cm만 더 깊은 바다에 빠지면 이론상 그 자리에서 익사할 수도 있다.
그럼 이곳에 바다가 없으니 매발톱에게 맞설 방법이 없느냐? 그것 또한 아니다. 매발톱은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갑주를 착용하기에 전면전에서 사살하기는 어려우나, 관절 부위만큼은 여전한 약점이다. 그것들은 아무리 감싸 봤자 한계가 있으며 용이한 움직임을 위해 감싸는 것조차 어렵다.
히무로 시라베: …내 마음으로 쏘리라.
나는 낮게 읊조리고 미래의 카이다 쿠로하의 왼쪽 무릎을 향해 방아쇠를 다섯 번 당겼다.
미래의 카이다 쿠로하는 갑주로 감싼 팔을 이용해 두 개를 쳐냈지만 세 개는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 기울더니 미래의 미도리카와 아쿠토와 함께 그녀는 바닥에 우당탕 떨어지고 말았다.
그들이 방심하지 않았더라면 더 길고 어려워질 승부였다. 아무리 가상현실 속의 적대적인 인물이라지만 사람처럼 행동하고 사람처럼 보이며, 내가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는 존재를 쏘는 것임에도 별다른 죄의식은 느껴지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런 것을 느낄 필요도 없으나 그런 종류의 깨달음은 늘 모든 상황이 끝나고 감시자가 고개를 숙인 뒤에야 나타났다.
카이다 쿠로하: 제기랄. 나 좀 도와줘! 이 자식 기관총을 가지고 있단 말이야!
미도리카와 아쿠토: 쿠로하. 괜찮아?!
카이다 쿠로하: 큭… 괜찮아. 저것들은 어차피 이 연구소 안을 벗어날 수 없어. 곧 조율자 씨가 오시면 저것들 따위는…
조율자. 무언가가 곧장 생각날 것만 같은 감질나는 느낌과 함께 두통이 내게 찾아왔다. 그러나 내 조준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재단이 내게 준 감시자라는 존재는 나보다 잔인했다. 나는 왼쪽 무릎을 붙든 미래의 카이다 쿠로하의 입이 열렸을 때 그 안으로 총을 쏘았다. 내 눈으로 겨누리라.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미래의 카이다 쿠로하가 컥컥거리며 피를 토했다. 미래의 미도리카와 아쿠토는 애초에 미래의 카이다 쿠로하를 살피느라 전의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카이다 쿠로하: 크학. 컥!
미도리카와 아쿠토: 감시자 씨. 조율자 씨는 당신 또한 우리와 하나가 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었어요. 어째서 이러시는 건가요! 조율자 씨를 통해 로는 진정 한 몸이 될 수 있단 말입니다!
조율자? 하나?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제 우리를 쫓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들은 나에게서 조금의 동정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무고한 이들에게서 재능을 빼앗는 이들은 조금의 위로도 받을 자격이 없었다.
카이다 쿠로하는 팔을 빠르게 놀리며 기관총의 탄환을 자신의 몸에서 비껴나가게 하고 있었으나, 기관총의 연사 속도에 지치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미도리카와 아쿠토는 탄창을 여러 개 가지고 있었다. 카이다 쿠로하는 탄환을 다 썼다고 판단해 미도리카와 아쿠토에게 달려들려 할 때마다 새로운 총알 세례를 맞았다. 귀가 먹먹할 지경의 총성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카이다 쿠로하: 도와 달라고! 이 쓸모없는 것들아!
미도리카와 아쿠토: 카이다 쿠로하. 널 죽이는 여자의 얼굴을 똑똑히 봐. 내 목소리를 들으라고. 이래도 내가 기억이 안 나나?!
카이다 쿠로하: 안 난다고. 이 개 같은 새끼야!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치는 카이다 쿠로하의 얼굴에 총알이 스쳤다. 빨간 자국이 남았다. 곧 카이다 쿠로하는 총알을 몇 개 놓치기 시작했다. 팔. 다리. 피부 위로 하나 둘 총상이 생겼다. 그럴수록 카이다 쿠로하의 몸은 더더욱 느려졌다.
미도리카와 아쿠토는 마지막인 것처럼 보이는 탄창을 기관총에 끼워 넣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네 패인은 네가 혼자 덤볐다는 거다. 보아하니 너는 이것들과 한 편이 된 게 아니었어. 이 미래의 망령들은 애초에 널 신경조차 안 썼거든.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게 전부 네 업보야. 네 잘못이고. 그러니 여기서 끝내자. 카이다 쿠로하! 모든 악연을 여기서 매듭짓는 거야!
카이다 쿠로하: 좆까! 모노로그으으으! 날 꺼내!
그 말만을 남기고 카이다 쿠로하는 바닥을 통과한 채 사라졌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뭐야! 어디로 갔어?!
카이다 쿠로하는 모노로그를 불렀다. 흑막만의 편법 같은 것이리라 생각하고 나는 야가미 토가에게 소리쳤다.
히무로 시라베: 지금 문을 향해 가야 한다. 카이다 쿠로하가 먼저 깨어나면 우리 모두 무방비다!
야가미 토가: 그래요. 갑시다! 바다뱀… 아니 미도리카와… 아쿠토. 당신도요!
미도리카와 아쿠토는 자신을 아쿠토라 부른 야가미 토가를 보고 옅게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나는 못 가.
야가미 토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도 시련의 문을 통해 해변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아니. 피해자 특전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게 아니야. 난 못 가. 이미 죽었잖아.
히무로 시라베: 미도리카와 아쿠토의 말이 옳다. 시련 속에서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시련 속 미도리카와 아쿠토뿐이다. 지금 시련 속 카이다 쿠로하 옆에 있는 그녀 말이야.
미도리카와 아쿠토: 걱정 마. 쿠로하! 다 괜찮을 거야…
야가미 토가는 시련 속 미도리카와를 흘끗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야가미 토가: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기껏 다시 만났는데 이대로 끝이란 말입니까? 아쿠토…
미도리카와 아쿠토: 끝이 나야만 해. 넌 나처럼 되지 마. 과거에 묶여 있다가 그것과 함께 가라앉지 말라고. 이 시련 속의 미도리카와는 너희가 지나온 문으로 나올 수 있겠지만, 그게 나는 아니야.
미도리카와 아쿠토: 이제 그만 가. 너흰 살아있으니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
야가미 토가: 그렇지만. 아쿠토…
히무로 시라베: 해변으로 돌아간다. 항생제를 손에 넣었으니 지체할 시간이 없어!
나는 그를 보며 윽박질렀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잠깐! 이 말만 하게 해줘. 토가. 그때 내가 바다뱀으로써 손을 씻을 수 있게 도와준 거. 고마웠어. 초고교급 밀수업자한테 느닷없이 찾아와서 내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도. 정말 고마웠어. 말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항상 네가 존경스러웠어…
야가미 토가: 저 또한 당신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쿠토.
야가미 토가와 미도리카와 아쿠토는 두 손으로 악수를 나누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꼭 오래 살아남겠다고 약속해 줘. 토가.
야가미 토가: …약속하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지켜봐 주세요. 아쿠토.
더 지켜볼 필요도 없이 마무리되었다. 나는 지체 없이 문 손잡이를 잡고 해변에서 깨어났다. 몸을 벌떡 일으키고 나는 내 몸과 머리카락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어냈다.
히무로 시라베: 미도리카와의 난입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를 시련이었어. 미도리카와와 카이다. 그리고 네가 함께하고 있는 미래라니. 불가사의하지만 이제 더 알 필요는 없어.
히무로 시라베: 항생제를 얻었으니 이걸로 된 거야. 이제 모리와 나이토에게 이걸 주기만 하면…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야가미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대체 왜 우는 거지?
야가미 토가: …무뚝뚝한 태도가 사라지셨군요.
야가미는 훌쩍임이나 소리 없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히무로 시라베: 이제 위기 상황이 아니니까. 그런데 대체 왜 우는 거야?
야가미 토가: 당신은 들어봤자 이해하지 못할 이유입니다.
히무로 시라베: 아니. 네가 지금까지 미도리카와를 향해 보인 태도를 생각하면 답은 알 수 있어. 여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히무로 시라베: 너는 지금까지의 시련에서 미도리카와를 살리려고 애써 왔지.
야가미 토가: 저희는 미도리카와 씨를 되살리기 위해 시련에 참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를 버리자고요? 그럼 지금까지 저희가 했던 일들은 다 뭐가 됩니까?
야가미 토가: 바다뱀… 바다뱀. 정신 차리세요. 바다뱀.
야가미 토가: 이건 아니야…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절대로. 어떻게… 어째서 또?
히무로 시라베: 나는 네가 한심하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복수하고 싶어 했던 그녀에게 복수했잖아. 왜 뒤늦게 그녀를 되살리려 하지? 그렇지만 다시 보니 모든 의문이 풀려.
히무로 시라베: 너는 애초에 미도리카와에게 원한을 가진 적이 없었던 거야. 아마 모노로그에게서 명령을 받고 그녀를 죽이고 난 뒤에 깨달았겠지. 네가 죽인 수수께끼의 남자가 사실 바다뱀이라는 것을. 재판에서 복수에 집착하던 모습은 연출일 테고.
야가미 토가: …억측입니다. 당신도 결투에서 보지 않았습니까. 복수 운운하던 제 모습을요.
히무로 시라베: 그러나 복수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지. 네가 미도리카와를 죽이게 만든 모노로그를 향한 복수일지도 몰라.
야가미는 잠시 침묵을 고수하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야가미 토가: 그날 이래 내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뿐이었습니다. 바다뱀을 붙잡을 수 있는 남자가 되는 것.
히무로 시라베: 이 탑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네가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던 자가 바로 미도리카와 아쿠토였단 거군.
야가미 토가: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여러 사연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군요. 저는 미도리카와 씨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히무로 시라베: 어째서?
야가미 토가: 흑막은 저를 오래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지금도 저를 지켜보고 있겠죠. 왜냐하면 저는 알려져선 안 될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약 당신에게 이 진실을 전하려 한다면 전 그 자리에서 숙청될 테고요.
야가미 토가: 그러니 제가 할 말은 이게 전부입니다. 큰 그림을 보세요. 히무로 씨. 그게 제가 남길 말의 전부입니다.
히무로 시라베: 그렇게 할게.
적어도 그와 나는 같은 자를 노리고 있었다. 살인 게임의 흑막을. 그 점에서만큼은 야가미 토가 또한 아군이 될 수 있었다.
큰 그림을 봐라… 라.
야가미 토가: 그런데 당신. 이미 제 안을 다 들여다본 뒤면서 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겁니까?
히무로 시라베: 얼마나 친하면 그 사람의 죽음에 눈물을 흘릴 수가 있는 건지가 이해되지 않아. 내 입장에서는 아무리 내게 소중한 누군가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더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테니까.
히무로 시라베: 또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어떤 이점이 있지? 스트레스를 줄이는 화학 물질이 분비된다는 하지만 애초에 슬픈 일 자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눈물을 흘릴 필요조차 없어. 왜 망각하지 않고 그것을 굳이 곱씹는 거지?
야가미 토가: 망각하면 누구도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니까요. 그 사람이 내게 자신이 존재했다는 흔적을 남겼다고 생각하면.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모르는 것 같군요.
야가미 토가: 그게 당신이 지불한 값이고요.
나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내게 주입된 것들. 그에 대한 반작용을 내 몸에 심듯이 내게서 사라진 것들.
그것 없이 나는 그 누구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나의 한계였다.
잡담이 끝나고 야가미와 나는 모두가 있는 해변으로 돌아가려 했다. 시련 속에서 보낸 시간 동안 육체는 휴식을 취했겠지만, 열 시간이 넘게 다시 걸어야 하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시작하기 전보다 더 고된 행군이 될게 분명했지만 나는 불평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애초에 초고교론자가 얽힌 그 시련 속에서 항생제를 얻은 것만으로 기적이었다.
문득 나는 지금까지의 시련의 문 앞에는 특정한 문구가 쓰여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첫 번째는 바다뱀. 두 번째는 미도리카와 아쿠토였다. 주변에서 미도리카와가 어떻게 불리는지나 그녀의 정체성이 시련의 문 앞에 적힌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나는 세 번째 시련의 문을 향해 다가갔다. 우리가 시련 속에서 빠져나왔을 뿐. 엄밀히 말해 세 번째 시련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초고교론자 미도리카와는 절대 부활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를 시련 안에서 꺼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 이유 탓에 여전히 남아있는 세 번째 시련의 문. 나는 그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뒤늦게 문 앞에 적힌 문구를 읽었다.
달빛이 밝지 않아 읽지 못했던 문구였으나, 새벽이 조금 깊어지며 주변이 아주 조금 밝아지자 나는 그 문구를 읽을 수 있었다. 세 번째 시련의 문 앞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매달린 남자'
단크 타워 2챕터는 실패입니다
2챕터 최악의 단점은 탑/해변/시련이라는 세 가지 시점이 동시에 진행되다 보니 시간대가 잘 안 맞게 되고
그 때문에 오전에 한 번 지랄 난 다음에 오후에 다시 지랄 나는 등 끝도 없는 사건이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결국 시간대는 비슷하게 진행해야 하는데 탑 해변 시련은 다른 상황이니 시간대 사이를 메울 사건이 또 발생하고 그러니 원래 구상했던 것보다 더 사건이 많이 일어나며 분량도 길어지고…
빌드업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진행하니 방향을 점점 잃고… 등장인물들을 한 번씩 조명해주려니 끝이 없고…
너무 욕심이 많았고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 많았는데 역량이 부족했습니다
아마 다음 편에서 비일상편 시작하고 진행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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