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너무나 괴롭습니다… 너무 슬피 울어서 눈이 잘 보이지 않고, 몸과 마음이 슬픔으로 지쳐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 고통으로 인하여 나를 궁훌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번민으로 신음하면서 세월을 보냅니다… 근심으로 기운을 잃었으며, 슬픔과 탄식으로 내 뼈가 점점 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나를 업신여기고 비방하는 말들을 들었습니다. 사방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내게 들려 옵니다. 저들이 악한 계획을 세우고,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며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여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러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내 목숨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으니 나를 원수의 손아귀에서 건져 주시고, 나를 뒤쫓아오는 자들에게서 구하여 주소서. 주님의 얼굴을 주님의 종인 내게 비춰 주시고,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으로 나를 구하여 주소서. 아멘.
그러나 내게 다음 구절은 없다.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보급실에서 나와 휴게실로 다시금 모인 우리는 휴게실에 있는 소파에 각자 걸터앉은 채로 회의를 가졌다.
토키와 아유키: …일단 후루미나미는 계속 지켜볼게. 후루미나미의 플라잉 로봇이 해변에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나와 23T가 함께라면 후루미나미를 감시할 수 있을 거야. 모니터실에 두고 후루미나미를 지켜보겠어.
후루미나미 나몬: 갑갑하오!
후루미나미가 크게 소리쳤다.
캐롤 브라이트: 당신은 당해도 싸요. 후루미나미 씨.
나나시: 나중에는 풀어 주겠지만 지금은 가만히 있어야 할 거야. 적어도 모두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나는 수갑이 이미 묶여 있는 후루미나미의 손을 한 번 더 밧줄로 감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또 묶는 거요? 이제 손이 묶이는 것은 신물이 나오만.
나나시: 어차피 수갑은 너 혼자서도 풀 수 있잖아. 그러니까 만전을 기할 수밖에.
이바라 쿠리스: 흥. 후루미나미는 이렇게 둔다고 치고. 카나리는 어떻게 하지?
토키와 아유키: 카나리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적을 것 같아. 카나리는 후루미나미와 협력해서 자신이 생존할 방법을 찾으려 한 거니까. 앞으로 회유해보려 해 봐야겠지.
칸나즈키 시노부: 걔는 저번에 한 번 크게 틀어졌어. 너희를 믿지 않을 거야.
칸나즈키는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했다. 그녀는 후루미나미, 카나리와 한 편이었던 입장이었기에. 그녀 주변의 이들은 칸나즈키를 보며 조금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후루미나미 만큼은 아니더라도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 칸나즈키였다.
이바라 쿠리스: …아무튼. 이제 항생제도 해변으로 보냈으니까 다 잘 된 거겠지?
23T5U130: 맞아. 게다가 히무로와 야가미가 최대한 빨리 걷는다면 모리가 감염으로 죽기 직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되면 카이다가 모두를 습격한다고 해도 더 이상의 변수는 없어져.
23T5U130: 세 번째 시련은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지만, 시간제한이 있으니 세 번째 시련도 곧 닫힐 테지. 모두 탑으로 돌아올 거야.
토키와 아유키: 정말… 정말 괜찮은 거겠지?
이바라 쿠리스: 그래. 이제 모두 해변에 돌아오면… 나이토랑 모리는 목발을 짚어야겠지만, 그래도 이제 다 잘 풀렸어!
토키와 아유키: …네 말이 맞아. 여기서 해산하자.
나는 한결 후련해진 기분을 느끼며 하품을 했다. 우산. 펌프에 물을 튀기게 만드는 터빈까지. 힘든 작업은 아니었지만 하루 종일 깨어있다 보니 피로가 한 번에 나를 덮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건 나 말고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던 것처럼. 우리는 잘 자라는 인사를 서로 나누며 자신들의 방으로 향했다.
토키와의 표정이 이상하게 불안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지만. 일단은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이미 내가 할 일은 끝났으니까.
칸나즈키 시노부: 나도 간다. 모두들 잘 자.
토키와 아유키: …….
후루미나미 나몬: 그런데 우리 모니터실 안 가고 뭐 해? 휴게실에서 죽치고 있게?
토키와 아유키: 23T. 난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의구심이 들어.
23T5U130: 무슨 뜻이야?
토키와 아유키: 모두가 탑으로 돌아온 뒤 말이야. 지금 탑은 예전과 똑같아 보이지만. 어딘가가 달라.
23T5U130: …캐롤에 대한 이야기지?
후루미나미 나몬: 레스트레이드. 저 여기 있거든요? 이보세요.
토키와 아유키: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을까…? 신체적인 터치가 아니니 괜찮다는 건 그저 허울뿐인 이야기일지도 몰라. 정신까지 지배하지 않았을 뿐, 문을 열게 만든 건 육체의 지배였잖아.
후루미나미 나몬: 그 말에 찬성이야! 터치 컬트 소속이면서 너 정신을 제대로 차렸네!
토키와 아유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 나나시가 캐롤 씨의 버팀목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23T5U130: 이미 벌어진 일은 어떻게 할 수 없어. 그리고… 내가 있으니 어떻게든 될 거야.
23T5U130: 아무리 캐롤의 터치가 강해진다고 해도 내가 맞설 수 있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
후루미나미 나몬: 나도 널 믿고 있어. 23T. 정말이야. 언젠가 우리가 한 편에 서는 날이 올 것 같지 않아?
23T5U130: 이제 모니터실로 가자.
후루미나미 나몬: 나를 질질 끌고 다닐 거면 차라리 대답이라도 해 줘… 아아. 갑갑하오!
세 명은 후루미나미의 말을 무시하며 휴게실의 문을 닫았다. 모니터실로 향하는 와중에 토키와는 잠시 걸음을 멈춘 뒤 등 뒤를 돌아보았다.
토키와 아유키: 뭐지?
그가 몸을 돌리고 휴게실의 문을 다시 벌컥 열었을 때. 휴게실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23T5U130: 왜 그래?
토키와 아유키: 지금 왜인지 카나리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아서…
후루미나미 나몬: 기분 탓이네. 단순한 고양이거나 잘못 들은 걸 거야. 휴게실 안은 생각보다 깨끗한걸?
나나시: 정말 할까요? 정말 할게요…
캐롤 브라이트: 네. 마음 내키실 때 해 주세요.
나나시: 크흠. 으흠…
새벽 2시경. 나는 목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나시: Am I blue? Am I blue…?
나나시: Ain't these tears in my eyes tellin' you.
나나시: Am I blue? You… would be too.
나나시: If each plan that you made. Done fell through.
나나시: There was a time… I was your only one. But now I'm sad and lonely one.
나나시: Was I gay? Till today. Now she's gone and we're through. Am I blue?
캐롤 브라이트: 잘 부르시네요! 괜히 점잔 빼셨어요.
칭찬을 듣자 입꼬리를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얼굴 또한 조금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적어도 웃음소리를 내진 않기 위해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서로 자신의 숙소에 누워 있으니 그녀에게 내 표정을 들키지 않으리라는 것은 위안이 되었다.
느닷없이 자장가를 들려달라는 그녀의 요청에 나는 뭘 불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문득 머리에 떠오른 노래를 그대로 불렀다. 반주도 없고 조금은 어색했지만 그렇게 끔찍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다이얼로그가 음을 이상하게 전달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우려가 남기는 했지만.
캐롤 브라이트: <Am I blue>. 좋은 노래죠. 제 세대 노래는 아니지만 부모님께 레코드 판을 모으는 취미가 있어서 들어본 적이 있어요. 나나시 씨는 이 노래를 어디서 들으셨어요?
나나시: 어디서 들었는지는 명확한 기억이 없는데… 옛날에 친구가 이 노래를 자주 불렀던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There was a time. I was your only one. But now I'm sad and lonely one…"
나나시: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요. 이걸 레코드 판으로 들었던가…? 다른 노래도 알고 있었겠지만 지금 당장에는 이게 제일 먼저 떠올랐어요. 기억을 더 많이 떠올린다면 다른 노래도 부를 수 있게 되겠죠.
캐롤 브라이트: 또 당신과 제가 어디에서 만났는지도 알 수 있게 될지도 몰라요. 혹시 모르죠. 이 탑에 오기 전부터 당신에 제게 <Am I blue>를 불러 주셨을지.
캐롤 브라이트: 앞으로 저에게도 기억이 돌아온다면 좋겠어요. 저는 사실 당신과 만난 적이 있다고 느끼긴 하지만 이 탑에 오기 전의 일은 떠올리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나나시: 언젠가는 돌아올 거예요. 이제 시간을 벌었으니까 급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러면 이 탑의 수수께끼의 해답에도 조금 더 가까워지겠죠.
캐롤 브라이트: 당신 말이 맞아요. 이제 급할 건 하나 없으니…
캐롤 브라이트: 내친김에 제 쪽에서 당신에게 자장가를 불러 드릴까요?
나나시: 네? 자장가를 불러 달라기에 곧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저야 좋죠!
나는 다급하게 덧붙였다.
캐롤 브라이트: 좋아요. 솔직히 말해서 좀 쑥스럽지만, 이래야 공평하잖아요? 으흠. 흐으음.
캐롤 씨가 목을 푸는 소리가 몇 번 들려오더니 그녀가 독백하는 듯한 소리가 다이얼로그 너머에서 들려왔다.
캐롤 브라이트: It sure is…
캐롤 브라이트: Everyone's trying to get out in the rain…
캐롤 브라이트: Oh, it feels so good…
나나시: 어. 캐롤 씨… 그게 가사인가요?
솔직히 반주가 없는 입장에서 음조차 없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딘가. 야릇한 느낌이 먼저 들었다…
캐롤 브라이트: 전주에요. 그리고 정말 가사가 이렇답니다. The rain and thinking of you…
캐롤 브라이트: Soon as I get home, I'm gonna call you.
캐롤 브라이트: And tell you, how much I love you…
캐롤 브라이트: Oh, I feel so good…
나는 들으면 안 되는 것을 엿듣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목소리를 죽였다. 그러는 동안 캐롤 씨의 목소리는 음을 갖추었다.
섬세하고도 잔잔한 목소리가 다이얼로그를 통해 들려왔다.
캐롤 브라이트: Oh, I just…
캐롤 브라이트: Walking in the rain with the one I love.
캐롤 브라이트: Feel so fine…
캐롤 브라이트: Walking in the rain with the one I love.
캐롤 브라이트: On my mind…
캐롤 브라이트: To each is own, I've heard them say.
캐롤 브라이트: Well, I got mine in so many ways, yeah… Like being together.
기이하게도 그녀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자니 내 눈이 스르르 감겨왔다.
잘 자라는 캐롤 씨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려왔던 것 같기도 했지만, 피로에 지친 내 몸은 대꾸하지 못했다. 노래 잘 들었다는 인사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런 모든 순간들이 내게 후회로 남았다.
새벽 5시.
마유즈미는 모닥불의 옆에서 몸을 뒤척이다가 침낭 속에서 호기롭게 팔을 뻗었다. 소매가 침낭의 끄트머리에 부딪히는 소리와 남는 하카마의 소매가 펄럭이는 소리가 작게 울렸지만, 모닥불 옆의 그 누구도 깨어나지는 않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후와암… 아으아음.
마유즈미는 기지개를 켜고선 침낭 안에서 애벌레처럼 꾸물거렸다. 허물을 벗듯이 침낭을 벗은 마유즈미는 침낭의 옆에 벗어놓은 자신의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었다.
게다를 신을 때에는 신경 쓰지 않던 신발의 뒤쪽. 발뒤꿈치를 감싸는 부분은 늘 발이 들어감과 함께 안으로 구겨지곤 했다. 발에 압박감을 느낀 마유즈미는 신발의 구겨진 부분에 손을 넣으며 운동화라는 건 참 번거롭다고 느꼈다.
그녀는 새끼 사슴이 연못으로 물을 마시려 가는 것처럼 숲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공포는 없었다. 긴장조차 없었다. 마유즈미마저 자신이 왜 그렇게 초연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느꼈다. 그녀는 운동화를 신은 채 모래사장을 사박사박 걸어갔다.
그리고 숲에 점점 가까워지는 도중. 어둠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조차도 마유즈미는 놀라지 않았다.
카이다 쿠로하: 오줌 싸러 나왔으면 동행해 줄게.
마유즈미 나데시코: …카이다? 너 어디야?
살짝 당황하긴 했지만 언젠가 오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유즈미는 아직 어두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카이다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두리번거렸다.
허벅지에 숨겨둔 총으로 마유즈미의 손이 슬금슬금 움직였다. 그렇지만 마유즈미는 곧바로 총을 꺼내지 않았다.
네가 그러지 않을 사람이란 건 알지만 장난으로 다른 사람에게 겨눠선 안 돼. 꼭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숨겨두는 게…
카이다 쿠로하: 순순히 알려줄 순 없지. 아무튼 인질로 삼기 전에 오줌은 싸게 해 줄 테니까 걱정 마. 내 옆에서 지리기라도 하면 짜증 나니까 배려해 주는 거야.
카이다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모래가 파헤쳐지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밑에서 위로 올라왔다. 와. 얼마 동안 저러고 있었던 거야? 하고 마유즈미는 작게 감탄했다.
카이다 쿠로하: 그런데 하필 네가 오냐. 꺼림칙한데 말이야…
내가 왜 꺼림칙해? 마유즈미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우선 눈앞에서 꺼림칙하단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도 네가 꺼림칙하거든?
카이다 쿠로하: 내가 그러는 이유도 모르잖아. 닥치고 있어. 따라오기나 하라고. 아니면 그냥 네 치마에 지리고 싶어?
카이다에게 반박하려 했다간 치마에 지리고 싶은 이상한 사람처럼 비칠 거란 생각에. 마유즈미는 일단 잠자코 카이다를 따라가기로 했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자 마유즈미는 자신 앞의 그녀가 옅은 달빛 아래에서 표범처럼 걷는 것을 보았다.
카이다는 어떤 사람이지? 마유즈미는 해변에서 잠을 자기 전. 다른 이들에게서 카이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러고 보니까 카이다는 어떤 사람이야?
하기와라 우시오: 야 말도 마. 걔 장난 아니야. 땅에 숨어 있다가 우릴 덮치려 들었어.
모리 레이코: 총을 피할 만큼 재빠르다. 그녀를 꺾을 수 있는 자는 인공지능밖에 없을 것이다.
히무로 시라베: 애초에 파괴력이 강하지 않은 총이라면 맞춰도 카이다의 피부를 뚫을 수 없어. 사람이 아니라 맹수라 생각해야 해. 해변에서는 만나지 않는 게 상책이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입 안의 침이 바싹 마를 뿐이었기에, 마유즈미는 카이다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근데 왜 우리 쪽으로 왔어?
카이다 쿠로하: 닥쳐.
마유즈미 나데시코: 말도 못 하게 해… 그치만 우리 쪽으로 온 건 실수야. 히무로랑 야가미가 세 번째 시련으로 갔거든? 여기에 있으면 두 사람을 못 막겠지!
카이다 쿠로하: 세 번째 시련? 하!
카이다는 마유즈미를 뒤돌아보며 코웃음을 쳤다.
카이다 쿠로하: 거기에 가서 두 새끼가 뇌사하지 않기를 빌어야 할 걸.
마유즈미 나데시코: 하! 하! 히무로와 야가미는 그렇게 쉽게 안 당해.
함께 코웃음을 치자 마유즈미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마유즈미는 카이다의 표정을 보지 않고도, 그녀가 자신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카이다 쿠로하: 내가 왜 세 번째 시련을 막으러 안 갔는지 알아? 어차피 세 번째 시련에서 미도리카와 아쿠토를 데리고 나올 수가 없으니까 안 간 거야. 나도 어떻게 할 수 없었는데 그 두 명이 가능할 까봐?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라면 어떻게든 해낼 거야.
카이다 쿠로하: 이 새끼 말을 안 듣네. 불가능할 거라고! 너를 구하러 오는 새끼도 없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최선을 다해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어. 그러니까 돌아올 거야.
카이다 쿠로하: 약속? 너 그거 괜히 했다. 어차피 못 지켜질 약속인데 말이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럼 대체 왜 우리 쪽으로 온 거야? 너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세 번째 시련이 힘들다고 해도 우리 쪽에 와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카이다 쿠로하: 너희들을 인질로 삼아서 많은 일을 할 수가 있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뭘 할 건데? 그냥 우리 기분 상하게 하는 게 다잖아. 내 기분도 상하게 하고!
카이다는 마유즈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마유즈미는 카이다에게 항의하듯이 한 자리에 멈춘 채로 카이다에게 소리쳤으나, 정작 카이다는 마유즈미를 버려둔 채로 앞장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마유즈미의 목소리가 커졌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해가 안 돼. 넌 나한테 뭔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렇지?
카이다의 몸이 우뚝 멈췄다.
마유즈미는 몸을 숙이고 치맛자락 속에 손을 넣었다. 지금이 아니면 늦는다는 직감에 그녀의 턱이 덜덜덜 떨렸다. 이는 서로 반발하는 것처럼 딱딱 부딪혔다.
카이다 쿠로하: 됐어. 그냥 너는 한 번 지려야 정신을 차릴 것 같다.
언제 덮쳐올지 모르는 맹수. 금수. 그것을 눈앞에 두자 마유즈미는 검은 그림자와 안개의 중간에 있는 무언가가 카이다를 중심으로 밖으로 서서히 퍼진다고 느꼈다. 혹은 한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유즈미는 허벅지에 묶인 붕대를 풀고 그것과 함께 묶여있던 총을 손에 쥐었다.
카이다는 서서히 마유즈미를 향해 다가갔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오지 마! 나한텐 총이 있어. 쏠 거야!
마유즈미는 말했다. 다급하게 뒷걸음질을 쳤으나 마유즈미와 카이다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마유즈미의 목소리가 더 높아지고 그만큼 다급해졌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허풍이 아니라 정말 총이 있다니까! 진짜 쏠 거고!
카이다 쿠로하: 나도 보여. 누가 빌려줬나 보네? 그렇지만 넌 총을 들어봤자야.
마유즈미는 카이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곧. 이해하게 되었다.
어둠 속 카이다의 윤곽이 한 번 빠르게 움직인다 싶더니, 마유즈미는 자신의 머리에 커다란 쇳덩이가 부딪힌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윽!
마유즈미는 순간 자신의 몸이 높은 하늘에서 추락한다고 생각했다. 의식이 몽롱한 채로 몸이 이리저리 뒤집히고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빙글빙글 돌아가며. 공포를 느낀 채 추락한 끝은 텁텁한 모래사장이었다.
카이다 쿠로하: 총을 쥔다고 해도 그걸 누가 가지고 있냐에 따라 판가름이 나는 거야. 너도 모리 그 년이랑 똑같아. 가지고 있어 봤자 나한텐 안 닿는다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으윽… 아으으… 웩. 퉤. 퉤!
마유즈미는 입에 들어간 모래를 뱉어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카이다 쿠로하: 고개 들어. 그렇게까지 세게는 안 때렸어. 내가 진심으로 때렸으면 넌 비명도 못 지르고 뻗었을 걸. 그러니까 개기지 말고 내 말 듣자고.
그래.
이거야.
원래부터 이러는 게 맞는 거야. 약한 것들은 내 발 밑에 설설 기어야 마땅해. 히무로 그 새끼도 마찬가지지.
이 꼬맹이를 인질로 잡기만 하면 그놈의 총도 빼앗을 수 있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 줄까? 손을 분질러 놔? 다시는 총을 못 쏘게? 그래. 그게 낫겠다.
카이다는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지으며 쓰러진 마유즈미에게로 몸을 숙였다.
카이다 쿠로하: 내 말 안 들려? 고개 들라니까.
카이다는 승리를 확신했으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아주 작은 의구심이 남아 있었다. 별로 중요하지는 않았고, 당연히 별다른 일로 이어지지는 못할 법한 의구심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유즈미의 입에 있는 모래알처럼 카이다의 마음속에서 버적거렸다.
아직 모래사장에는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어.
마유즈미는 아직 손에서 총을 놓치지 않은 채였다.
마유즈미는 카이다가 충분히 가까워졌음을 느끼고 몸을 빙글 돌렸다. 주변이 어둡더라도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그림자가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물러서! 퉤!
마유즈미는 얼굴 옆으로 모래를 뱉어내며 말했다. 카이다는 졸지에 마유즈미가 총알을 당기기만 하면 그걸 가슴팍에 바로 맞게 될 처지에 놓였다.
카이다의 몸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마유즈미는 총을 한 손으로 들며 나머지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모래사장 위에 다시 섰다. 그녀는 여전히 머리에서 아픔이 가시지 않은 듯 끙끙거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으… 머리야…! 아파…!
카이다 쿠로하: 조금 더 세게 칠 걸 그랬나 봐.
마유즈미 나데시코: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말고 물러서. 네가 왜 여기로 왔는지는 모르지만 우리한테는 손가락 하나도 못 건드려!
카이다 쿠로하: 이미 건드렸어.
그 말을 남기고 카이다는 마유즈미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그녀의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크고 또 생생하게 들렸다.
카이다 쿠로하: 그리고 더 건드리게 될 거다.
마유즈미는 카이다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떨어진 카이다는, 더더욱 위험한 존재였다. 마유즈미가 눈을 한 번 감고 뜬 사이 카이다는 어둠 속에 녹아들었고 자신의 송곳니를 드러낸 채 마유즈미에게 달려들 수 있게 되었다.
마유즈미가 총을 겨눈 채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그러나 카이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로 추정되는 윤곽은 마유즈미의 시야 각도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그녀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뛰는 소리는 있었고 모래도 튀었지만 마유즈미는 카이다가 어디에 있는지 볼 수 없었다. 쏠 수 없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유즈미는 침착하려 애썼지만, 마음가짐만으로 순식간에 사람이 바뀌지는 않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마유즈미 나데시코였다. 헌신적인, 보수적인, 순결하고 수동적인, 아름답고 순종적인 사람.
마유즈미는 나데시코로 사는 일에 조금 염증을 느꼈다. 갇혀 사는 일은 질색이었고 누가 그녀에게 시키는 대로 하는 일도 싫었다. 그녀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총을 쉽게 다룰 수 있는 멋진 사람이.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가 한 말. 그거. 그게 뭐였더라. 뭐였더라…!
히무로 시라베: 나는 손으로 겨누지 않는다. 손으로 겨누는 자는 아버지의 낯을 잊은 자니…
마유즈미는 이전에 들었던 히무로의 목소리를 생각했다.
히무로 시라베: 이 신조를 욀 때마다. 나는 네 곁에서 함께 네 적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을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는 손으로는 안 겨눠. 손으로 겨누면 아빠의 얼굴을 잊게 돼…
세세한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총잡이의 신조는 말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가짐에 있는 법이라고 마유즈미는 생각했다. 사실 입으로 말하자니 가물가물한 구절들에 신경을 쓸 만큼 그녀에게 여유가 없었던 탓도 있으리라.
눈을 떠. 마유즈미.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쏠 수 없어. 네가 눈을 감고 아무 생각 없이 겨눈 곳에 카이다가 있지는 않아. 겨눈다면 늘 확실하게 겨누어야 해.
마유즈미는 몸의 양쪽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호흡은 안정되어 있었다.
조준을 조금 더 높게. 자세는 낮추고. 총을 두 손으로 잡아. 그렇지. 이제 찾아. 그녀가 오는 것을 줄곧 보고 있을 필요는 없어. 봐야 할 때 보는 것으로 충분해.
마유즈미는 보아야 할 곳을 보았다. 카이다는 또다시 그녀의 앞을 노렸다. 아까 그녀가 때린 곳을.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는 눈으로 겨눌 거야.
마유즈미의 두 팔과 총은 독립적인, 그러나 하나의 생물처럼 함께 움직였다. 바람에 하카마가 한 번 펄럭하는 소리를 냈다. 그 펄럭임이 끝나자. 마유즈미는 카이다의 얼굴 바로 앞에 총을 겨누고 있었다.
카이다는 막 팔을 내리치려던 참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잡았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는 순간 쏴 버릴 거야.
카이다는 놀라거나 쏘지 말라고 설득하는 대신. 낮게 웃는 것을 선택했다.
카이다 쿠로하: 누가 누굴 쏴? 너한텐 감히 날 쏠 깜냥도 없으면서.
마유즈미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 내기할까?
어둠 속에서도 눈이 밝았던 카이다는 마유즈미가 그녀의 쪽으로 걸어온 순간부터 그녀의 모든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겁에 질린, 그러나 겁이 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 카이다는 마유즈미가 실금 하게 만드는 것을 몰래 도전과제로 삼았다. 스스로와의 내기였다. '내가 이 겁쟁이한테 손가락 하나 안 대고도 지리게 만들 수 있을까?'
때문에 카이다는 마유즈미의 말에 코웃음을 치고 그녀에게 다시 팔을 휘두를 생각이었다. 어차피 마유즈미가 그녀를 쏠리는 없기 때문이다. 손가락은 떨리며 눈은 커지고 조준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총을 쏘기라도 한다면 그녀의 손에서 총이 튕겨져 나올 게 뻔했다. 아까 얻어맞은 대로 또 모래사장에 뻗겠지.
적어도 카이다는 그렇게 생각했다. 당연히 그녀가 감히 카이다 쿠로하에겐 거스르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의 처지에 걸맞게 그녀를 보고 벌벌 떨면서 기고 완전히 복종할 처지라고 여겼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마유즈미의 모습은 카이다가 원하는 대로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얼굴에는 긴장과 공포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손에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커다란 총구는 겨눠야 하는 곳을 겨누었고 입은 꼭 다물어져 있었다. 그리고 눈동자.
마유즈미는 카이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유즈미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카이다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그대로 팔을 내리쳤다간 눈앞의 겁쟁이에 의해 얼굴에 총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카이다 쿠로하: 지랄하지 마… 내가 너 같은 새끼한테도 질 것 같아? 내가 널 죽이고 싶었으면 몇 초만에 끝났어. 못 죽이니까 이런 개 같은 그림이 나오는 거라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뒤로 물러서. 카이다. 네가 나 때문에 다치는 건 싫어…
카이다 쿠로하: 너는 망할 남을 해치고 싶지도 않잖아. 그럴 깡다구조차도 없어. 약해 빠진 주제에 남을 생각하는 척을 하고서… 그게 제일 역겨운 거야! 알아?! 위선자 새끼들!
카이다는 총을 눈앞에 두고도 겁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카이다 쿠로하: 너희들을 보고 있으면 짜증이 치밀어올라. 좋은 사람인 척하면서 자비를 베풀려는 꼴이 역겹다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이토와 캐롤 씨는 착한 척을 하는 게 아니야. 착한 일을 할 뿐이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라도.
카이다 쿠로하: 입 닥쳐! 네가 그중에서 최악이니까!
아무리 마유즈미가 총을 들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카이다의 완강한 욕설은 마유즈미를 주눅 들게, 또 조금 의아하게 만들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한테 왜 그래…?
카이다 쿠로하: 총을 쏠 수가 있잖아. 그럼 쏘라고. 내가 네 머리 때린 거 기억 안 나? 언제까지 착한 척할 거야. 개수작 부리지 말고 일단 쏘고 보라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 쏘면 또 쐈다면서 나한테 욕할 거잖아. 쏘든 말든 너한테 미움받으면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마유즈미는 카이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귀를 막으려는 충동을 억누르며 말했다. 카이다는 마유즈미의 권총에 자신의 머리를 가져다 대면서 계속 소리쳤다.
카이다 쿠로하: 쏴! 쏘라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싫어!
마유즈미는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총구는 여전히 카이다의 방향으로 겨누고 있었지만, 카이다는 아마 그녀가 쏜다면 얼굴이나 심장이 아니라 팔이나 어깨에 맞게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널 죽일 수 있는 일은 하기 싫다고… 나는 누구에게도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네가 계속 다가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그러니 이제 다가오지 마.
카이다 쿠로하: 남을 해칠 수 있는데 해치지 않는 사람은 없어. 너희들이 그러지 않는 이유는 그냥 그럴 능력이 없어서 그런 거야.
카이다 쿠로하: …오직 나만 너희들 전부와 싸울 역량이 있지. 그래서 난 기꺼이 그렇게 해. 너희들관 달라. 서로 엉겨 붙어서 애처롭게 서로의 발목에 매달리는 너희들관 다르다고.
카이다 쿠로하: 가장 약하고 뻔뻔하게 남들한테 기생하는 너는. 도무지 봐줄 수가 없어!
마유즈미는 자신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카이다 쿠로하: …내 말 이해하냐? 너는 그냥 쓰레기야. 사람이 아니라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틀렸어! 나는 기생충이 아니야. 쓰레기도 아니야! 나는 더 이상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 살진 않을 거야. 난 사람이니까!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리고 사람이 아닌 건 너겠지. 카이다 쿠로하.
카이다 쿠로하: 뭐?
표정을 싸늘하게 굳힌 마유즈미는 키득거렸다. 카이다를 얕보는 미소가 마유즈미의 얼굴에 감돌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미안한데 멍청한 네 꼴을 좀 봐. 네가 지금 뭘 하는지도 모르겠지? 그렇지만 일단 하고 보는 거야. 명령을 받았으니까. 그게 대등한 관계 같아?
마유즈미 나데시코: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아. 남에게 지배받는 일에 익숙해져 버렸지. 그런 걸 사람이라고 부를 순 없어. 그냥 장기말일 뿐. 쓰이기 위해 살아가고, 누구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그런 장기말.
카이다는 불같이 화를 내려다 말문이 턱 막힌 듯이 입을 벌렸다. 그리고 쉽게 닫지 못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이런 말을 할 사람이던가? 이런 말을 할 수조차 있던가?
아니. 분명 아니었다. 카이다는 전에 없었던 경계의 기색을 담은 채 마유즈미를 바라보았다.
카이다 쿠로하: …야. 너 정체가 뭐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누가 봐도 나잖아.
카이다 쿠로하: 거짓말 마. 날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다른 두 새끼는 내가 헛것을 봤다고 말했지만, 내가 제대로 본 거였다고.
카이다 쿠로하: 그때 나한테 소리친 거. 그게 너였지?
"손 떼! 내 거야!"
카이다 쿠로하: 너 대체 누구야? 너는 이 순둥이가 아니야. 다른 사람이지. 그 새끼 안에 들어있는 너. 넌 대체 누구냐고.
카이다 쿠로하: 이중인격 뭐 그런 게 아니라면 유령이냐?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네가 누구인지 말해!
마유즈미는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카이다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유령? 어디? 내 뒤에?! 아! 내가 뒤를 보는 사이에 기습하려는 거구나! 비겁한 녀석!
카이다 쿠로하: 다시 이 새끼를 면전에 세워? 뻔뻔하게 도망칠 생각 마. 난 너를 똑똑히 봤으니까.
마유즈미의 머릿속은 카이다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혼란으로 가득 찼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내가 어디 도망을 가…?
카이다 쿠로하: 너도 신세 한 번 기구하게 됐어. 탑은 미쳐 돌아가는 장소지만 네가 겪는 건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상상할 수도 없겠어. 아마 너는 너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모를걸?
카이다 쿠로하: 왜냐하면 내가 너한테 귀띔을 해주지 않을 거거든. 네가 싫으니까.
마유즈미 나데시코: 카이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뭐 잘못 먹었어?
카이다 쿠로하: 마음대로 생각해…
카이다는 마유즈미의 뒤. 모닥불 곁에 누워 있는 이들 쪽에 한 번 눈길을 주었다.
카이다 쿠로하: …이건 이미 내가 이긴 게임이거든.
마유즈미는 카이다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그녀에게서 계속 멀어졌다. 모닥불 쪽에 가까워질수록 카이다의 위치를 더 잘 볼 수 있을 테고, 어차피 그녀의 목적은 카이다를 사살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이었다. 굳이 그녀를 쏘는 일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카이다는 팔짱을 끼고 조소를 지으며 조용히 마유즈미를 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뒤로 하고 몸을 돌려 모닥불 쪽으로 가던 마유즈미는 자신을 뒤따라오는 카이다를 보고 질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따라오지 말라니까. 훠이. 훠이! 대체 왜 계속 따라오는 거야?
카이다 쿠로하: 모리와 나이토는 그 감염 때문에 원래보다 조금밖에 힘을 못 내지? 그런데 모리는 원래부터 약해빠진 년이었으니 아무것도 못할 테고.
마유즈미는 카이다의 말이 어딘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마치 나이토와 모리에게 해코지를 하겠다는 정정당당한 선언처럼 들렸다. 그러나 마유즈미는 카이다가 전혀 정정당당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저것은 예고가 아니라, 후통보일 가능성이 컸다.
카이다 쿠로하: 갓난아기한테도 살해 협박을 당할 수 있을 걸.
마유즈미는 이상한 직감을 느끼며 모닥불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면서 크게 소리쳤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이토오오오! 모리이이이이이! 하기와라아아아! 일어나아아!
하기와라 우시오: 므으으으… 뭐야. 왜 저래…
하기와라가 신음했다. 마유즈미는 모닥불에 비추어 본 모리, 나이토, 하기와라가 전부 자신의 자리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다 쿠로하: … 이럴 리가 없는데? 설마 이 새끼가.
카이다가 작게 중얼거렸지만 마유즈미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카이다를 뒤로 하고 모닥불 바로 앞에 도달한 마유즈미는 카이다가 있는 방향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모두들 걱정 마! 내가 지켜줄 테니까!
모리 레이코: …서예가…?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래. 걱정하지 마. 히무로는 여기에 없지만 내가 있잖아. 나이토. 몸은 괜찮아? 다친 곳 없어?
기다려도 나이토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마유즈미는 잠시 카이다에게 한 눈을 팔고, 그의 몸을 흔들어 깨우려 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이토! 지금 자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일어나야…
그러나 마유즈미가 나이토의 몸을 만졌을 때. 그의 몸은 이상할 정도로 차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이토…?
캐롤 브라이트: …어째서?
캐롤 브라이트: 모든 게 다 해결됐을 텐데. 어째서 이런 일이… 아아…
캐롤 브라이트: 죽고 싶지 않아. 죽기 싫어… 이제야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어째서…!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나나시 씨…!
나는 숙소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리고 다급하게 쿵쿵 울리는 노크음을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얕은 잠이었다. 몇 분도 지나지 않고 깨어나자 피로감은 덜했지만 졸린 건 마찬가지였다.
나나시: 캐롤 씨? 갑자기 무슨 일…
캐롤 브라이트: 열어… 문을 열어 주세요! 지금! 부탁할게요!
캐롤 씨의 목소리가 다급했기에 나는 일단 이불을 박차고 문을 향해 후다닥 달려갔다.
나나시: 괜찮으세요? 무슨 일이길래…
내가 문을 열자 캐롤 씨가 무너지며 내게 몸을 기댔다. 말 그대로. 그녀의 몸이 앞으로 쏠리며 나를 껴안는 듯한 행색이 되었다. 나는 외마디 비명을 한 번 지르고 중심을 잃은 채 꽈당 쓰러졌다.
졸지에 그녀를 온몸으로 받치게 된 나는 바닥에 몸을 찧고 입에서 조금 원망하는 듯한 신음을 냈다. 상체만큼은 뒤로 넘어가지 않았으니 다시 몸을 일으키려던 때. 캐롤 씨는 바닥에 뻗은 내 다리 옆으로 몸을 뻗고 내 팔을 손으로 잡았다.
나나시: 으윽… 캐롤 씨. 갑자기 이러시면…
캐롤 브라이트: 오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올 수밖에 없었어요. 나 정말 못됐죠…?
캐롤 씨는 내 말을 자르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어딘가 처연하고 쓸쓸해 보였으나 나는 영문을 알지 못했다. 그녀가 왜 나를 찾아오면 안 되는 것인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캐롤 브라이트: 당신에게 상처로 남을 게 뻔한데도 당신을 보고 싶었어요. 상담사 실격이라고 해도 이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안 되는 건데… 내 욕심이 너무 커진 거죠.
나는 캐롤 씨의 등 뒤로 이상한 것을 보았다. 정확히는 바닥에 무언가가 떨어져 있었다.
금빛의 유리. 반투명하면서 빛을 내는 무언가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건 내 방문 밖으로도 이어져 있었다. 마치 캐롤 씨의 족적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캐롤 씨의 어딘가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것은,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본 직후였다.
나나시: 캐롤 씨. 얼굴이…?
캐롤 씨의 볼이 금빛 유리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나는 왜 캐롤 씨가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나를 붙잡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다리를 자세히 보았다. 신발이 없었다. 레깅스의 끝부분도 없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금빛 유리조각뿐이었다.
그녀의 다리 일부분은 옷을 포함해서. 금빛 유리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나나시: 왜…? 어어… 어떻게…
캐롤 브라이트: 나이토 씨가… 죽은 것 같아요. 저는 여기까지예요.
그 사실을 연산하는 동안 피와도 같은 시간이 뚝뚝 지나갔다.
왜지? 항생제를 보냈잖아. 나이토의 몸 상태는 그렇게 급한 것도 아니었어. 이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고.
금빛 유리로 변한 그녀의 얼굴 일부분이 떨어졌다. 유리조각은 바닥에 떨어지자 부서져 더 작은 조각으로 변했다. 놀랄 정도로 가녀리고 약한 유리였다. 분명 악몽일 것이라 생각했다. 느닷없이 이런 재앙은 분명 악몽일 것이라고.
나나시: 캐롤 씨. 제… 제가 어떻게…
캐롤 브라이트: … 보러 오지 말 걸 그랬어요. 조용히 죽었으면 당신이 받아들이기도 쉬웠을 텐데. 마지막까지 민폐만 끼치고 가는군요.
나는 그때 말해야만 했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캐롤 씨가 나에게 있어 어떤 의미인지 말해야만 했지만 나는 말하지 못했다. 캐롤 씨의 형상은 내 생각보다 더 빠르게 부서지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부서지고, 손가락이 부서졌으며 다리도 서서히 갈라지고 있었다. 덧없는 금빛의 유리가루.
나나시: 캐. 캐롤 씨…!
결국 내 입에서 나온 것은 무력한 외침뿐이었다. 나는 그 무엇에도 준비되지 않았는데 캐롤 씨는 너무나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조차 부족했다.
내가 소중한 누군가를 잃었을 때와 똑같았다. 파멸은 언제나 전조 없이 찾아왔다.
캐롤 브라이트: 미안해요. 작별하기 전에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당신을 보고 싶었어요.
캐롤 브라이트: 당신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당신과 하루라도 더.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요…
캐롤 브라이트: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는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어요. 아쉬움에 쓴 맛을 곱씹을 뿐…
나나시: 이럴 리가 없어요. 아니야…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허탈하게 말하며 눈물을 흘릴 뿐. 아무것도 막을 수 없었다.
나나시: 이럴 수는 없잖아요. 당신이 그림자를 드러낸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사람처럼 살게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럴 수는 없어요! 너무 불공평해…
나나시: 전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캐롤 씨…! 저는…
캐롤 브라이트: …잠깐 입술 좀 닫으세요.
캐롤 씨는 그렇게 말하며 내 목 뒤로 팔을 넣어 나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얼굴이 내게 가까워졌다.
그리고 나와 그녀의 입술이 이어졌다.
입술은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또 어느 정도 따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마지막 터치는 마치 백일몽 같았다.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 기뻤어요. 정말 아쉽네요. 노래를 더 듣고 싶었는데, 더 들려주고 싶었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신은 제게 반쪽 같았죠. 당신은 마지막까지 나의 곁에 남아 있었고… 내게 그만큼 고마운 일은 없어요. 계속 곁에 있어야 했는데… 이제 당신만 남겨두고 나만 떠나네요.
내 최후의 미련이었던 당신에게. 나의 일부를 남깁니다.
입술이 떨어지자 호흡을 잊고 있던 나는 다급하게 숨을 쉬었다.
나나시: 흐읍… 콜록. 커흑!
캐롤 브라이트: 이제… 남은 아쉬움은 없는 것 같아요. 당신은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그리고 언젠가 내세에서 만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만약 그때까지 저를 기억하고 계시다면 반드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녀의 팔이 부러지고 바닥에 부서져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렸다.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그녀의 어깨와 허리에 손을 얹었을 때. 나는 캐롤 씨의 하반신이 거의 사라진 뒤임을 깨달았다. 그녀의 몸도 서서히 투명한 금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말고 다른 세계도 있으니까요…
그녀의 마지막에 내가 아닌 영웅이 있었다면 반드시 그녀를 다시 만나겠다고 소리쳤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편히 쉬라고 이야기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내게는 어떤 영웅의 모습도 없었다.
나는 그저 약해빠진 외톨이였다. 그런 나는 울먹이며 그녀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그녀를 지킬 수 있으리라는 것처럼. 그녀가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것처럼.
나나시: 안 돼. 제발. 날 떠나지 마… 날 두고 가지 마!
뒤로 넘어가는 캐롤 씨의 머리를 받치자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졌다. 내 하의를 뚫고 유리조각이 내 무릎을 찔렀다.
내 눈물이 어딘가 편안한 듯한 표정을 짓는 캐롤 씨의 얼굴에 떨어졌다. 사방에서 금빛 유리가 그녀를 침식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웃음만큼은 앗아갈 수 없었다.
캐롤 씨가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말은, 저주였다.
캐롤 브라이트: 절 잊지 마세요… 잊으면 안 돼요…?
캐롤 씨는 그 말을 남기고 유리조각이 되었다. 그녀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는가 싶더니 목이 꺾였고, 몸도 토막나듯이 서로 떨어져 산산히 부서졌다.
당신은 산산조각나 빛이 된다.
나는 모래처럼 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유리조각을 그러모으려 해 봤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캐롤 씨의 형체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입이 벌어지고, 짐승처럼 구슬픈 울음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슬픔과는 달랐다. 애통함과도 달랐다.
나나시: 아아… 아… 아…
내가 느낀 것은 상실감이었다. 내 몸이 반으로 쪼개졌고, 산산히 부서졌다.
캐롤 씨는 이제 죽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 대한 모든 기억들. 그녀를 처음 만나고 이별할 때까지의 순간들에 끔찍할 정도로 크고 붉은 표시가 하나하나 붙는 걸 가만히 보고 있느라 바빴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표시가. 모든 기억에 붙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더 이상 탑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죽음이며, 그것이 상실이다.
그것은 진실이다.
나나시: 아아아아아아아아악!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우리는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어요. 아쉬움에 쓴 맛을 곱씹을 뿐…"
놀랍게도 이 전개는 급전개가 아니라 1챕터 집필 도중에 머릿속에 팍 하고 떠오른 2챕터 노선입니다
비일상편은 짧고 간결하게 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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