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시: …정말이야?
23T는 손목을 위잉 돌려 밑을 향한 엄지가 위를 보게 만들었다.
23T가 캐롤 씨를 좋게 생각하느냐는 말은. 카텟 기관에 소속되어 있는 23T가 캐롤 씨를 적대적으로 생각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과 같았다. 그리고 23T의 대답은: 좋지 않다.
23T5U130: 너는 믿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나나시: 아니야. 믿어. 그렇지만…
23T5U130: 너는 캐롤도 믿고 있지.
나는 반박의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23T5U130: 네가 기억을 떠올리는 편이 더욱 납득하기 쉬울 거야. 나나시. 그렇지만 캐롤에게 몸과 마음을 전부 바치진 마.
나나시: 표현이 조금… 내가 배우자한테 맞고 멍투성이가 된 채로도 미련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 같다는 투인걸.
23T5U130: 그렇게 말하는 게 맞으니까 그렇지.
나나시: …아야.
23T는 그렇게 진지한 투로 말하지 않았지만 신경이 쓰이긴 했다. 몸과 마음을 전부 바치진 말라니. 애초에 마음을 다 바치지도 않았잖아. 아직은 아니란 말이야.
그렇지만 캐롤 씨는 결국. 카텟 기관과 같은 편에 서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 되었다. 그럼 다른 기관 소속이라는 건가? 노네임과 인공지능의 사이가 멀어진 이후에 만난 사람… 캐롤 씨의 정체는. 정말로 뭘까…
나나시: 일단 지금은… 작은 열쇠에 집중하자. 소지 크레딧이 작은 사람만 살 수 있는 물건이라면 분명 특이한 쓰임새가 있을 거야. 우산 챙기고 모니터실로 가자!
23T5U130: 나도 지금은 그러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해.
23T는 우산을 들고 내 뒤를 따랐다.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던 나와 23T는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반쯤 올랐을 때 조금 속도를 늦추었다. 위에서부터 누군가가 계단을 통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누구지? 모니터실의 누군가겠지. 아마 전화가 끊어진 걸 알고 온 걸 거야… 라고 나는 생각했지만, 모니터실의 누군가가 아니라면? 이라는 경우의 수 또한 고려해야 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조금 의아했다. 탑에는 지금 사람이 몇 명 없고 대부분이 함께 움직이고 있기에 탑의 이곳저곳은 텅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기에 탑에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도 넓은 탑 내부에 울렸다. 우리가 내려오는 사람의 발소리를 들었다면 내려오는 사람 또한 우리의 발소리를 들어야 마땅했다.
아마 모니터실 안의 사람이라면 "나나시? 23T?" 라며 우리를 불렀을 거라는 생각에. 나는 계단을 빠르게 올라 누구인지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만약 카나리, 후루미나미라면…
후루미나미 나몬: 왜. 나 보고 싶어서?
후루미나미가 내 앞을 무심하게 지나가며 말했다. 카나리가 주변에 없다면 23T와 같이 후루미나미를 다시 붙잡자는 생각이 들었을 때. 후루미나미는 케이프 코트 속에서 길쭉한 무언가를 꺼냈다.
두 개의 지느러미가 쭉 빠진 몸체 밑에 달린 듯한 모양. 중간에 붙어 있는 두꺼운 접시 모양의 통. 뒤로 길쭉하게 뻗은 개머리판.
톰슨 기관총이었다.
나나시: 우왓!
23T5U130: 내 뒤로 와!
23T는 그렇게 외쳤다. 사실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23T는 내 뒷덜미를 잡아 자신의 뒤에 내던지다시피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바닥에 구른 나는 후루미나미가 기관총을 가지고 있음을 가까스로 연산했다.
나나시: 후루미나미. 역시 네가 기관총을!
23T는 팔을 넓게 펼치고 기관총의 사선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후루미나미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는 숙소 문에 열쇠를 넣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날 덮칠 생각 마. 도탄이 어디로 튈 줄 알고.
23T는 후루미나미의 말대로.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후루미나미는 한 손으로 기관총의 방아쇠를 잡고는 나머지 한 손으로 숙소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후루미나미가 자신의 잡동사니 가득한 요새로 쏙 하고 들어가버리기 직전. 그녀는 잠시 내 쪽을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왜 자리를 비우고 그래.
문이 닫히자 후루미나미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나시: …잠깐. 무슨 뜻이야.
자리를 비웠다고? 어디에서?
모니터실에서.
23T5U130: 후루미나미가 위층에서 내려오지 않았어?
다음 순간 나는 나선형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계단을 두 단씩 허겁지겁 오르다가 한 번 발목이 접질릴 뻔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나시: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된다고!
기관총을 쏘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단 말이야. 후루미나미가 기관총을 가지고 해도 쏘지는 못했을 거라고. 절대로.
하지만 만약 쏠 방법이 있었다면? 소음기라도 달아서 3층 밑의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계단을 뛰어 올라가던 나는 내 몸이 공중에 둥실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리가 땅에 닿지 않기에 내 몸이 넘어진 것 같다고 느꼈을 때. 나는 내 몸을 두르고 있는 23T의 팔을 느꼈다.
23T5U130: 모니터실로!
23T는 나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고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23T의 다리에서 한 번 치익 하는 소리가 나더니 23T의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라져. 4초도 채 지나지 않은 채 5층의 모니터실을 박차고 들어갔다.
다행히. 모니터실 안의 모두는 무사해 보였다. 겉으로 외상도 없었으며 그렇게 많이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23T는 나를 땅에 내려 주고서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23T5U130: 다들 괜찮아?
나나시: 후루미나미가 여기로 왔지?!
이바라 쿠리스: 그래. 다친 사람은 한 명도 없어.
이바라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발적으로 총기난사를 저지르지는 않았구나… 하고 긴장을 푼 내 쪽으로 캐롤 씨가 빠르게 걸어왔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갑자기 통화를 끊으시면 어떻게 해요!
캐롤 씨가 내 쪽을 보며 소리치자 나는 내 실책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나나시: 죄… 죄송해요!
토키와 아유키: 도청을 의식한 거겠지만 정말 깜짝 놀랐어. 23T가 없는 사이를 타서 오다니…
23T5U130: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어? 우린 후루미나미가 기관총을 들고 자기 숙소로 들어가는 것밖에 보지 못했어.
이바라 쿠리스: 기관총. 아.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네. 그게 말이지. 통화가 끊기고 나서 얼마 뒤에…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캐롤 브라이트: 통화가 끊어졌어요.
토키와 아유키: 도청당할 가능성을 고려한 걸까요? 그래도 23T와 연락이 닿아있는 편이 나을 텐데요.
후루미나미 나몬: 너희 전부 멈춰어어어어!
모니터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뇌성벽력 같은 후루미나미의 외침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경찰 모자를 쓴 후루미나미의 손이 그녀의 등 뒤로 사라진다 싶더니, 기관총 한 정이 그녀의 케이프 코트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캐롤 브라이트: 아니. 이런…!
토키와 아유키: 안 돼!
이바라 쿠리스: 끼야아아아악!
캐롤은 목구멍에서 솟구쳐 오르는 비명을 억누르며 후루미나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빠득 하고 작게 이를 가는 동안 후루미나미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기관총의 총구를 세 명에게 번갈아 겨누며 그들의 움찔거리는 반응을 즐겼다.
캐롤 브라이트: …역시 기관총을 가진 사람은 후루미나미 씨. 당신이었군요.
후루미나미 나몬: 손 머리 위로 올려! 손 머리 위로 올려! 반복한다! 손 머리 위로 올리라고!
이바라 쿠리스: 야! 세상에 저런 경찰이 어디 있어!
이바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팔을 올렸다. 토키와 또한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그렇게 했고, 캐롤은 팔을 올리려다 말고 팔짱을 꼈다.
당장 그들에게 총을 쏜다면 처형당하는 것은 그녀였다. 첫 번째 살인의 특전이 끝난 이상 누군가를 죽인 이상 학급재판장에 서고. 패배할 경우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 리스크가 있는 이상 기관총을 드는 것은 일종의 무력시위일 뿐이었다. 내가 죽을 각오 하고 쏘기 전에 내가 원하는 것을 하라는 시위.
그러나 후루미나미라면 방아쇠를 주저 없이 당긴 다음 "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방아쇠 한 번 당겼다고 덧없이 죽고 나 또한 사라지는구나. 너무 비극적이야!" 라고 외칠 것만 같았다. 후루미나미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기에 기관총 앞의 그들은 움츠러들었다. 캐롤 또한 최대한 저자세로 나가지 않는 것이 심리전에 유리할 것임은 알았기에 그녀의 말에 복종하지는 않았지만,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후루미나미 나몬: 생각해보니 지금은 무력진압이 필요한 것 같군. 오늘 나는 람보다 한 번 해 볼까?
이바라 쿠리스: 야! 하지 마아!
'지금 이 상황에 기관총을 가져와서 좋을 게 뭐지? 대체 후루미나미 씨는 뭘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거지?'
'너무 미숙해. 모니터실에서 나온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모습을 드러내다니. 그것도 탑을 크게 뒤흔들 수 있는 총기를 가지고…'
캐롤 브라이트: 후루미나미 씨. 정말 쏠 자신 있으세요?
후루미나미 나몬: 오! 이런 상황에 도발이라니! 간도 크지!
후루미나미는 감탄을 내뱉었다.
캐롤 브라이트: 당신이 뭘 요구하려 왔는지는 몰라도 저희가 가만히 당하고 있지는 않아요.
토키와 아유키: …맞아. 애초에 인플레이션으로 우리를 완전히 묶어 놨으면서 기관총을 들고 위협하는 것부터가 이상해. 우리에게서 더 얻을 수 있는 게 있지도 않잖아.
후루미나미 나몬: 있는데? 작은 열쇠 내놔.
후루미나미는 토키와를 보며 싱긋 웃었다.
토키와 아유키: 거절하겠어.
후루미나미 나몬: 정말로?
후루미나미의 총구가 토키와에게 머물렀다. 후루미나미의 입에서 미소가 사라지자 공기가 한층 무거워졌다. 캐롤은 팔짱을 풀고 조용히 흰 장갑을 반쯤 벗었다.
당장 쏠 것만 같은 긴장감에 이바라는 졸도할 것 같은 표정으로 후루미나미의 총구와 토키와를 번갈아서 보았다.
토키와는 자신의 몸이 서서히 뜨거워지며 방 안이 한 층 더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땀이 그의 이마에 조금 맺혔다. 몇 초 동안의 정적 속에서 후루미나미는 조금도 손을 떨지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지금 작은 열쇠를 넘기는 게 좋을 거야. 그러면 너희가 원하는 일이 벌어지도록 해 줄 테니까.
이바라 쿠리스: 뭘 한다고?
후루미나미 나몬: 야가미의 죽음 말이야. 가장 원만하게 희생자도 없이 해변의 모두를 탑으로 불러올 수 있는 방법이지. 토키와 너 좋은 결단 내렸어.
토키와 아유키: 대체 어디까지 도청으로 듣고 있는 거야…
캐롤 브라이트: 그런 일은 벌어져선 안 돼요.
캐롤은 단호하게 말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늘 고결하신 캐롤 브라이트. 죽는 순간까지 고결하겠지. 그렇지만 죽는 걸 각오하고 고결한 건 아니잖아? 그러니 내가 손을 대신 더럽혀 주겠다 이거야. 나도 히무로가 죽는 불상사는 싫다고!
토키와는 깨달았다. 이건 함정이다.
토키와 아유키: 고통을 위해 행동하는 네가… 원만한 방법을 추구 할리가 없어. 보다 많은 사람이 죽기를 유도하면 모를까… 너는 작은 열쇠를 원할 뿐이야. 지금 그게 어떤 변수를 만들어낼지 모르니.
후루미나미 나몬: 들켰네? 쉬운 문제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작은 열쇠는 내놓는 게 좋을 거야. 너흴 죽이지 않더라도 총으로는 뭐든 할 수 있다고.
후루미나미 나몬: 캐롤. 손에 구멍 뚫려볼래? 토키와 너는 니 캐핑을 해 줄까? 그리고 이바라 너에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거야. 너는 상처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누가 죽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거지.
이바라는 몸을 뒤로 주춤하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배신감이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처음에는 영화를 같이 보며 농담을 나누었으나 이제는 악의가 잔뜩 담긴 말을 던지고 있었다.
이바라 쿠리스: 너 정말 머리 이상한 거 아니야…?
후루미나미 나몬: 맞아. 그러니 내가 이상한 짓 하기 전에 빨리 열쇠 내놓으라니까. 토키와.
토키와 아유키: …….
후루미나미 나몬: 네가 얼마나 힘들지 알아. 힘은 없는데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니 속이 곪아들 수밖에. 기껏 좋은 리더가 되려고 했는데 아무도 네 마음을 안 알아주고. 진짜 딱하다. 딱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야. 너한텐 다른 사람보다 특출 난 재능이 없잖아. 너 스스로도 재능이 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하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재능이니…
후루미나미 나몬: 지금 내게 작은 열쇠를 주면 내가 기꺼이 네 대리인이 되겠어. 내 말 들으면 모든 게 잘 될 거야.
캐롤은 후루미나미의 화술에서 무서운 점을 찾아냈다. 상담에선 내담자가 불편함을 느끼거나 트라우마를 자극당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불안정해진 심리는 쉽게 상담자에게 전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루미나미는 그런 상담의 법칙과 반대로, 트라우마와 약점을 최대한 끄집어내 매도하고 상대의 주권을 빼앗는 화술을 썼다.
토키와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후루미나미를 향해 걸어갔다. 파리한 입술과 초점이 맞지 않는 동공은 잠깐의 수면으로 회복하지 못했던 스트레스와 중압감을 그의 몸에 다시 현현시켰다. 토키와는 아주 잠깐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된 듯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몰골로 변했다.
캐롤은 토키와의 축 처진 어깨를 보고 소리쳤다.
캐롤 브라이트: 토키와 씨. 열쇠를 주면 안 돼요! 후루미나미 씨의 말에 넘어가지 마세요!
토키와 아유키: 이 방법밖에 없어요.
이바라 쿠리스: 안 돼. 토키와!
후루미나미 나몬: 토키와. 힘내! 넌 할 수 있어! 네 의지력을 보여 줘!
이바라 쿠리스: 후루미나미! 적당히 좀 해!
토키와는 여러 명의 외침을 들었지만 정작 머릿속에서 이해하지는 못했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후루미나미는 기관총을 들고도 조금도 팔을 떨지 않았다.
꽤 무게가 나갈 터인 기관총을 들고도 조금도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기관총이 가벼웠던 것 아닌가?
캐롤 브라이트: 아무리 무겁고 두려운 짐일지라도, 타륜을 다른 사람에게 줘 버려선 안 돼요. 토키와 씨…
아까의 외침보다 작은 소리였지만 토키와는 캐롤의 속삭임을 들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옳지. 잘한다. 착하지. 우리 착한 토키와. 우쭈쭈?
후루미나미는 머리를 서서히 아래쪽으로 내리는 토키와를 보고 눈을 빛냈다. 내 즉흥극에 어울리다니. 자질 있는 녀석!
그러나 토키와의 머리는 후루미나미의 손을 피하고, 그 반대편에 들려 있는 기관총을 향했다.
한 손으로 들었다. 기관총은 가볍다.
토키와는 재빠르게 기관총의 총구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후루미나미가 반응하기 전에 총구를 자신의 머리에 댔다.
토키와는 후루미나미가 아무리 팔을 움직여도 빠지지 않을 만큼 단단히 총구를 붙들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뭐야?!
토키와 아유키: 쏴 봐. 후루미나미. 쏴 보라고…
후루미나미는 기관총을 두 손으로 붙잡고 토키와를 떼어내기 위해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토키와의 몸은 기관총이 움직이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닐지언정 기관총을 놓지는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이거 놓지 못해! 내가 진짜 쏘면 어떻게 하려고!
토키와 아유키: 그러니까 쏴 보라는 거잖아!
캐롤 브라이트: 후루미나미 씨. 쏘지 마세요!
이건 가짜 기관총이야. 처음부터 블러핑이었어. 진짜 기관총이라면 고작 23T와 떨어졌다고 습격을 감행하진 않았을 거야. 로봇과의 연계가 필요하니 내일까진 기다려야 해. 굳이 지금 온 건 그냥 욕심이야. 우리에게서 작은 열쇠를 손쉽게 빼앗으려는 사기극.
그게 아니면 내 목숨을 써서 모두를 탑으로 불러오는 거야. 나쁘지 않은 죽음이겠지. 나 하나랑 후루미나미의 교환이야. 지금 후루미나미가 뭘 할 수 있는지를 감안하면 괜찮아. 괜찮아. 전부 괜찮아. 난 이걸로 충분해.
이바라 쿠리스: 토키와 너…!
토키와는 그런 생각을 한 채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토키와에게서 기관총을 떼어내려던 후루미나미는 그의 표정을 얼핏 보더니 아주 잠깐 당황과 놀람. 그리고 약간의 기대감을 보냈다.
후루미나미 나몬: 재밌네. 토키와.
후루미나미는 토키와를 향해 싱긋 웃고 방아쇠를 당겼다.
'설마.'
토키와의 눈에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토키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방 안에 통과 피융의 중간에 있는 듯한 소리가 울리며 토키와는 자신의 이마에 따가운 것이 닿는 것을 느꼈다.
총구를 놓자 이마에서 무언가가 바닥에 틱 하고 떨어졌다. 하얀색의 작은 플라스틱 구슬이었다.
토키와는 자신이 순간 진정코 삶을 포기할 각오를 했다는 사실에 다리가 풀릴 만큼 동요했다.
토키와 아유키: 하아… 하아… 하…
후루미나미 나몬: 잘 알아챘어. 그렇지만 다음에 올 때는 진짜 들고 올 거야. 그러니 허튼수작 좀 그만 부려.
후루미나미 나몬: 나 자러 갈 테니까 너희도 자러 가. 밤새서 싸우기는 사양이야.
이바라 쿠리스: 장난감이야? 장난감으로 우릴… 농락한 거야?! 야! 너 이리 와!
후루미나미 나몬: 지금은 토키와나 돌봐 줘. 흉기가 있긴 하거든?
후루미나미는 케이프 코트 속에서 작은 나이프를 꺼내고 빙글빙글 돌렸다. 이바라는 후루미나미의 케이프 코트가 사실은 도라에몽 주머니는 아니었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에 빠졌다가 고개를 저어 그것을 떨쳐버렸다.
캐롤 브라이트: 토키와 씨. 괜찮으세요? 일어날 수 있으시겠어요?
토키와 아유키: 잠깐만… 잠깐만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후루미나미 나몬: 죽음을 각오하는 사람의 눈빛. 그러나 순간 떠오른 좌절과 후회… 잘 먹었습니다. 토키와 씨. 맛있는 한 끼였습니다.
캐롤 브라이트: 언제까지 그렇게 의기양양하실 순 없을 거예요.
후루미나미는 대꾸하지 않고 떠났지만, 캐롤은 후루미나미가 나간 뒤에도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나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여기에도 도청기를 뒀던 거야…?
나는 다른 모두의 말을 듣고 모니터실을 두리번거렸다.
이바라 쿠리스: 그거 찾을 시간에 여기서 나가는 게 빠르겠어.
23T5U130: 기관총이 가짜였다니… 그때 바로 잡아야 했는데 말이야.
나나시: 장난감을 가지고 그렇게 감쪽같이 우릴 속이다니. 들키면 또 잡혀서 인플레이션의 권한을 빼앗길 텐데… 참 과감해. 정말로.
토키와 아유키: 우릴 깔보고 있는 거야. 완전히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니… 도청기가 얼마나 있는지도 파악할 수가 없어. 모이려 할 때마다 후루미나미가 우릴 추격하려 한다면 작은 열쇠를 쓸 틈은 없을 텐데.
23T에겐 이제 우산이 있기에 플라잉 로봇에 저항할 수 있을 터였지만, 다른 모두가 그 사실을 알리가 만무했다. 나는 고민하다가 토키와에게 수첩처럼 뭔가 쓸 거리가 있냐고 몸짓으로 말했다.
토키와는 아무런 말 없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수첩과 펜을 꺼내 건넸다.
나는 수첩에 23T가 들고 있는 우산의 쓰임새에 대해 간단히 적고 모니터실의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었다. 모두들 놀란 기색이었지만 도청을 당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나나시: 후루미나미에게 진짜 기관총이 있다면 정말 위험해질 거야. 거짓말인 것 같지만. 23T가 멈춘 사이에 후루미나미가 기관총을 들이대면 우린 피할 겨를이 없으니까.
이바라는 목소리가 떨리는 기색 없이 거짓말을 하는 날 보고 두 손에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23T5U130: 내일이면 방해 전파가 다시 충전될 텐데. 차라리 지금 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바라 쿠리스: 아. 그거. 지금 모리가 죽을 것 같은 상황이란 건 우리도 알지만. 오늘은 우선 정비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작은 열쇠가 어디로 통하는지는 몰라도 해변처럼 무슨 시련 속으로 진입하는 거라면 지금 토키와가…
토키와 아유키: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아서 미안해.
나나시: 아니야. 괜찮아. 위험에 처한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니까.
그래. 칸나즈키 또한 모리가 죽으면 함께 죽는 처지다. 그것만큼은 칸나즈키가 후루미나미와 카나리에게 협력하고 있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내가 그 사실을 소리 내어 말한 것은 도청하고 있을 후루미나미를 향해 내분의 불씨를 붙이기 위해서였다. 결국 칸나즈키와 나는 협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네 쪽에 서지 않을 거야.
나나시: 내가 방법을 찾을게.
깨어나면 전화해. 칸나즈키의 말이었다. 나는 전파 수신기를 들고 내 숙소로 향했다. 잠깐 사이에 녹초가 된 토키와. 캐롤. 이바라와 나는 서로 인사를 나누며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내 숙소에 들어가려 했으나 그 직전. 탑 안을 서성이는 23T를 보았다.
23T5U130: 좋은 꿈 꿔. 나나시.
나나시: 너도 좋은 꿈 꾸라고 말하고 싶지만, 힘들겠지?
내가 멋쩍게 웃자 23T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흔들었다.
23T5U130: 그렇게까지 불편하지는 않아. 심심함을 느끼는 것도 아니야. 나는 계속 탑을 감시할 테니 걱정 말고 자. 이제 우산도 있으니까.
나나시: 아까 많이 누워 있어서 잠은 안 오는데. 같이 불침번 서 줄까?
23T5U130: 아침에 골골대려 그래? 그냥 잠이나 자러 가. 나중에 꾸벅꾸벅 조는 것보다 지금 조금이라도 누워 있는 게 나아.
23T는 협상의 여지없이 완고했다.
나나시: 그럼 자 보려고 노력할게… 늘 고마워. 23T. 미안하고.
23T5U130: 미안해하지 말고 네 몸을 잘 지키기나 해.
나나시: 알겠어!
나는 23T에게 웃으며 짧게 경례하고는 다이얼을 돌려 칸나즈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나시: 칸나즈키. 내 말 들려? 나 깨어난 지 조금 되긴 했는데.
칸나즈키 시노부: 아. 미안. 나 지금 잘 거거든. 내일 얘기하자.
칸나즈키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나시: …맞다. 너도 제멋대로였지…
큰일이다. 칸나즈키와의 협력. 잘 안 될지도 몰라…
히무로 시라베: 슬슬 멈출까? 너무 멀리 떨어지면 모두가 위험에 처했을 때 바로 갈 수 없으니.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 맞네? 빨리빨리 말 끝내고 빨리 돌아가자. 아. 넌 세 번째 시련으로 가야 하지만…
히무로 시라베: 사실은 그 때문에 너를 이곳까지 불러온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응?
히무로 시라베: 내가 없으면 본대가 위험에 대처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을 이젠 없애야 하기 때문에. 그러니 이야기를 하자.
나는 품 안에서 44구경 리볼버를 꺼낼 준비를 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 갑자기 무슨 얘기를 하려고… 무게를 잡고 그래?
마유즈미는 멋쩍게 웃으면서 딴청을 피웠다. 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되 강압적인 눈길은 주지 않도록 의식하며 말했다.
히무로 시라베: 내 말에 집중해. 이게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으니까.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런 말 하지 말고 꼭 돌아와. 히무로.
히무로 시라베: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러지 못할 수도 있어. 살인 게임은 늘 그래. 평화로운 게 오히려 비정상적이지. 인식하지 못하지만 우린 언제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으니… 네가 이걸 맡아줬으면 해.
나는 옷의 안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어리둥절한 눈치의 마유즈미에게 보여주었다.
반응은 즉각적이고 또 격렬했다. 마유즈미는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몸을 뒤로 쏠리게 하고 놀란 소리를 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초. 초. 총?!
나는 칠판에 손톱을 긁는 듯한 소리를 내는 마유즈미를 보며 내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히무로 시라베: 쉿. 마유즈미. 다른 사람이 듣겠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 이거 네가 가지고 있던 총이 아니잖아. 그것보다 더 커…
히무로 시라베: 맞아. 44구경이야. 그래서 대인 저지용으로는 오히려 비거리도 짧고 장탄량도 많지 않아 그리 용이하지 않지. 그렇지만 보통 사람보다 강인한 몸을 가진 카이다에게 타격을 주려면 이 총이 적합할지도 몰라. 미도리카와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고.
총구를 잡고 그녀에게 총잡이를 건네려 하자 마유즈미는 내가 부지깽이를 건네줬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내 손목을 붙잡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 이걸 왜 나한테…
히무로 시라베: 너희가 카이다에게 맞설 수단이 필요하니까. 장탄량은 다섯. 격발음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클 거야. 미리 귀를 보호할 만한 준비를 갖추는 게 좋아. 자칫하면 고막이 파괴될 수도 있어. 반동으로 손목이 부러질지도 모르니 꼭 두 손으로 쏘고. 네가 그러지 않을 사람이란 건 알지만 장난으로 다른 사람에게 겨눠선 안 돼. 꼭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숨겨두는 게…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야. 히무로?!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가 너흴 습격할 우려가 있기에 너희에겐 호신용 총기가 필요해. 그런데 모리는 공리를 위해서 돌발행동을 벌일 염려가 있고, 하기와라도 도덕심과는 거리가 멀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럼 나이토에게 주면 되잖아!
히무로 시라베: 나이토는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아. 감염이 더 악화되면 제대로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워질 거야. 네가 나이토보다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는 안 돼. 난… 이런 걸 감당할 수 없어…!
히무로 시라베: 뭘 말이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거! 손가락 하나만 당기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도구가 내 손에 들어온다는 거… 난 그런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생각하기만 해도…
마유즈미는 식은땀을 흘리며 헛구역질을 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토… 토할 것 같아…
히무로 시라베: 그 기분을 없앨 수 없다면 익숙해져야 할 거야. 적임자는 너 밖에 없고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마유즈미 나데시코: 싫어…! 나는 안 받을 거야!
마유즈미가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감시자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받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 그녀가 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없다. 나이토 유즈루에게 맡기는 것은 어렵고, 다른 둘에게 맡길 바에야 44구경은 버리는 편이 낫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떻게든 그녀에게 강요해서라도 총을 받게 만들어야 한다. 어떤 모욕과 협박으로 그녀를 상처 입히더라도 할 일을 해야 한다. 상대방의 심리에 간섭하고 자주성을 무너뜨려야 한다. 그게 가장 효율적인 길이다. 만약 부탁을 거절한다면 나와 친구가 되고 싶지 않다는 뜻이라 말해라. 그럼 마유즈미 나데시코를 크게 흔들 수 있다. 그녀는 또래 친구가 없었으니 몇 없는 친구인 너를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 점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히무로 시라베: 총이 주는 공포에 대해서는 나도 알아. 나 또한 이게 네 손에 들어가서 나쁜 용도로 쓰일까 봐 두려워.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러면 왜 나한테 주는 거야?!
히무로 시라베: 그보다 두려운 일이 있기 때문이야.
나는 44구경의 손잡이를 그녀의 쪽에서 조금도 돌리지 않았다.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 쿠로하에 의해 네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는 것.
마유즈미 나데시코: 애초에 카이다는… 카이다는 우리 쪽으로 오지 않을 거라면서…
히무로 시라베: 아니. 올 거야. 이틀이 지났어. 우리가 참여했던 시련들은 대부분 몇 시간 안에 결판이 났지. 내부의 미도리카와가 죽으며 시련이 붕괴했어. 그러나 카이다가 세 번째 시련을 돌파했다면 우린 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거야.
히무로 시라베: 나는 카이다가 시련을 돌파하는 데에 실패했다고 추측하고 있어. 어쩌면 누군가가 감염으로 죽는 걸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지만 카이다가 해변에 찾아올 가능성 또한 없지는 않아. 만약 카이다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시련이 가혹했다면, 카이다는 자신에게 맞설 인력이 없는 사이 너희를 노릴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럼 가지 마! 카이다가 돌파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우면 너희들이 위험해지잖아! 해낼 수 없을 거야!
히무로 시라베: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야. 할 사람이 나밖에 없어. 너 또한 마찬가지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안 돼. 나는 못 해…
히무로 시라베: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야… 마유즈미. 이야기가 빙빙 돌고 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말이 안 되잖아. 내가 어떻게 총을 다뤄! 절대 못 맞출 텐데!
히무로 시라베: 총을 쏘아 카이다에게 맞추라는 얘기는 한 적 없어. 단순히 총을 그녀에게 겨누고. 손을 떨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카이다는 겁이 많으니까.
마유즈미 나데시코: 내가 더 겁이 많아! 오늘도 꿈에 귀신 나와서 무서웠단 말이야. 눈에 보일락 말락 하면서 너는 내 거라며 중얼거렸어…
귀신. 그녀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이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마유즈미는 두려움이 많은 개인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눈에 띄게 큰 두려움은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자신이 소속될 수 있고 몸을 의탁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버리고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실현시킬 힘이 있을지라도.
히무로 시라베: 아무리 겁이 많더라도 마음가짐을 다잡을 수 있다면 누구나 총잡이가 될 수 있어. 그 총잡이의 솜씨가 좋으냐 나쁘냐의 문제가 아니야. 아무리 실력이 떨어지더라도 총을 겨눈 그 순간만큼은 두려움을 잊을 수 있느냐. 그게 중요한 거야.
두려움 없는 총앞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위축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내가…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마유즈미는 몸이 쪼그라드는 듯한 동작으로 44구경을 받았다. 꽤 용기를 낸 결과 같았지만 그녀의 손은 계속 덜덜 떨렸다.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할 움직임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 안 될 것 같아…
히무로 시라베: 너는 할 수 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히무로 시라베: 내가 널 믿고 있으니까.
그것은 마유즈미의 순종성 때문이 아니었다.
내 이기적인 믿음 때문이었다. 그녀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개척해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유즈미 본인은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어딘가에 종속되길 바라는 자신이 좋을지도 몰랐다. 만약 그게 마유즈미의 행복이라면 내가 감히 행복의 형태에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았다. 누가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도 날 못 믿는 처지인데 무슨 말이야!
히무로 시라베: 네가 스스로를 믿지 못할지라도 나는 너를 믿고 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치사해. 히무로. 치사하다구… 그런 말로 내가 네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거잖아…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가 너희들의 앞에 나타났을 때 네가 앞장서서 카이다에게 총을 쏘지 않아도 괜찮아. 이 총을 받는 것만으로 충분해.
마유즈미 나데시코: 거짓말. 히무로 너… 설마 우릴 버리려는 거야? 세 번째 시련으로 가야 하는데 우리가 발목을 잡고 있어서?
히무로 시라베: 아니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맞잖아! 마음만 같아서는 우리를 저버리고 싶잖아. 하기와라 말처럼!
하기와라의 말.
하기와라 우시오: 히무로봇 이 친구는 우리한테 숨기고 있는 분명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우릴 가차 없이 버리고 떠날 위인이거든.
히무로 시라베: …그런 게 아니야. 마유즈미.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에겐 그런 것처럼 보여. 우리가 짐짝이라서 그나마 도움이 되는 야가미와 함께 가려는 것처럼 보인다구!
그 만큼 내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인물이라는 반증이었다.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카텟 기관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숨기고 있으면서 남이 내게 과분한 믿음을 가지길 바랄 수야.
히무로 시라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히무로 시라베: …아니고 싶지.
마유즈미는 내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우! 표정이 왜 그래! 그렇게까지 풀이 죽을 필욘 없잖아. 사람 무안하게…
히무로 시라베: 내 표정은 늘 이래.
마유즈미 나데시코: 안 그래! 평소보다 더 심하단 말이야. 얼굴 좀 펴봐.
마유즈미가 내 뺨에 두 손을 올렸다. 손이 닿는 것은 익숙하지 않아서 조금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만하라는 말 한 마디면 되었을 테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적절한 때에 개입하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뒷걸음질을 치거나 고개를 살짝 움직여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일 뿐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도망치지 말고! 아. 표정 돌아왔네. 옳지… 잘 했어.
마유즈미가 뺨에서 손을 떼고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휴… 네가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히무로 시라베: 정말?
마유즈미 나데시코: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알아…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어. 무서워서. 네가 우리 생각하는 건 나도 잘 아는데. 무서워서…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무리 카이다라지만 총을 대고 쏜다는 게. 너무 무서웠다구…
히무로 시라베: 나야말로 강요하다시피해서 미안해.
마유즈미는 여전히 떨리는 자신의 손과 그 안에 잡혀 있는 44구경을 내려다보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정말 그냥 들고 겨누는 시늉만 해도 카이다는 겁을 집어먹을거다 이거지? 그냥 가지고 있기만 해도 되는 거지…?
히무로 시라베: 무리할 필요 없어. 적절한 순간에 꺼내기만 하면 카이다도 널 경계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리고 정말 극한의 상황이 와서 힘들어진다면 총잡이의 신조를 외워. 한결 나아질 테니까.
마유즈미 나데시코: 총잡이의 신조?
히무로 시라베: 태곳적에서부터 총잡이에게 전해 내려 오는 교리도문이야. 어느 나라에서 시작되었는지는 몰라. 그렇지만 누군가가 만들었고 구전되었던 말에는 지혜가 담겨 있지.
나는 마유즈미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품 속에서 첫 번째 시련에서 얻었던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바다를 향해 겨누었다.
히무로 시라베: 재단은 그 신조를 받아들여 감시자 후보들에게 주입시켰어. 고결한 정신을 표방하면 자신들의 목적 또한 고결해지리라는 얄팍한 수작이었지만, 감시자 후보들은 이 총잡이의 신조를 욀 때마다 실제로 정신과 감정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마법…? 인가?
히무로 시라베: 어느 정도 그 영역에 있다고도 볼 수 있겠지. 아마 그건 감시자 후보들이 이 신조에 담긴 내용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재단이 어떻게 이용한다고 해도 총잡이들의 영혼은 변질되지 않은 채 나에게 온 거야.
히무로 시라베: 내 말을 잠시 암송해 주겠어?
마유즈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두 손으로 44구경을 잡고 똑같이 바다를 향해 겨누었다.
히무로 시라베: 나는 손으로 겨누지 않는다. 손으로 겨누는 자는 아버지의 낯을 잊은 자니…
히무로 시라베: 나는 내 눈으로 겨누리라.
마유즈미 나데시코: …눈으로 겨누리라?
마유즈미는 내 자세를 따라 하려는 듯이 내 쪽을 힐끗거리며 어물어물 말했다.
히무로 시라베: 나는 손으로 쏘지 않는다. 손으로 쏘는 자는 아버지의 낯을 잊은 자니…
히무로 시라베: 나는 내 마음으로 쏘리라.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는… 마음으로 쏘리라.
마유즈미는 나에게서 눈길을 떼고 자신이 쥐고 있는 총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히무로 시라베: 나는 총으로 죽이지 않는다. 총으로 죽이는 자는 아버지의 낯을 잊은 자니.
히무로 시라베: 나는 내 심장으로 죽이리라.
마유즈미 나데시코: …내 심장으로 죽이리라.
나는 어느새 낮은 목소리를 내는 마유즈미 쪽을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히무로 시라베: 이 신조를 욀 때마다. 나는 네 곁에서 함께 네 적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을 거야.
내가 총을 내 품 안에 넣고 마유즈미를 돌아보자 그녀는 느닷없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건 좀 소름 끼쳐. 히무로! 귀신 두 명이 붙는 건 사양이라구.
히무로 시라베: 그럼 내가 없다고 생각해.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 취소. 그건 좀 불안하니까 네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로 할게. 그치만 총잡이의 신조는 조금 웃겨!
마유즈미 나데시코: 눈으로 겨눌 수는 있어도 어떻게 마음으로 쏠 수가 있겠어. 심장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야! 피유!
히무로 시라베: 사실 네 말이 맞긴 하지.
……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혹시 지금 내가 웃고 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응? 아니. 평소랑 똑같이 무표정이야.
히무로 시라베: 아쉽네.
웃고 싶은 기분인데 자연스러운 웃음이 나오지 않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다.
사실 이번 편에 작은 열쇠의 쓰임새가 나올 예정이었는데 생각해보니 나나시 시점은 자정~새벽이고 히무로 시점은 아침이라 한 번 시점을 통합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단크 타워의 고질적 문제임: 여기 중간에 에피소드 필요한데? 이거 시간대 맞춰야 하는데? 등등의 이유로 중간에 사족 막 붙여 넣다가 길어지는 거임)
적은 분량이지만 부디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사실 총잡이 신조 암송 씬은 원래 적어둔 게 있었는데 예전에 수정하는 과정에서 날려먹었음 진짜 피눈물 나옵니다 이것보다 그때 쓴 게 느낌 잘 살았던 것 같은데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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