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시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피가 가득 찬 기침을 막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으나 한 번 그의 폐가 진동하고 몸 전체가 떨리는 순간마다 그의 손바닥 밖으로 핏방울이 꿀렁였다. 동시에 그의 코에서도, 귀에서도, 눈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결국 나나시는 쓰러지고 고통에 몸을 떨면서 목을 뒤로 젖혔다. 그는 입 안에서 피를 토해내며 눈이 반쯤 돌아간 채 신음을 내뱉었다.
나나시: 으븝. 커흑! 어윽! 큭…!
그의 입 밖으로 피의 거품이 부글부글 솟아올랐다. 고통과 쇼크로 인한 발작이 그의 몸을 불길한 방식으로 뒤틀어 놓았다. 눈의 흰자위를 보인 채로 나나시는 죽음을 맞이했다.
그보다 더 끔찍한 게 있다면 그 일을 겪는 사람이 나나시 한 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칸나즈키 시노부: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칸나즈키는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으로 아무 말 없이 토키와를 응시했다.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가더니 그만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피가 물감처럼 그녀 주위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토키와 아유키: 이… 이건 아니야… 이게 아니라고… 왜…
모리 레이코: 내가 말했을 텐데. 리더.
그리고 그가 두려워하는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본 순간. 팔과 다리가 모두 검게 괴사 되고 입술이 보랏빛으로 변한 모리 레이코가. 그녀의 시체가 토키와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은 무엇인지 모를 생물에게 먹혀 텅 비어있었고 눈이 있던 자리에 있는 것은 텅 빈 분홍색의 구멍뿐이었다. 그러나 토키와는 모리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고 느꼈다. 눈이 먹혔을지언정 원망의 시선은 그녀의 영혼 속에 남아 있었다.
모리의 몸이 기우뚱 기울고선 밑으로 덜컹 내려앉았다. 잘린 발목으로는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발이 잘린 쪽의 다리로는 무릎을 꿇은 채 모리는 자신의 팔을 걷었다. 그러자 검게 괴사 된 팔에 여전히 남아 있는 붉은 선이 보였다. 심장까지 이어져있을 선.
토키와는 공포에 떤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 모든 끔찍한 일. 모리의 죽음으로 인한 연쇄작용.
캐롤 브라이트: 당신 때문이에요. 토키와 씨…
캐롤은 피투성이로 죽은 나나시를 끌어안은 채로 눈물을 흘리며. 토키와를 보고 소리쳤다.
캐롤 브라이트: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요!
이바라 쿠리스: 너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죽었어. 토키와!
이바라 또한 장난기 하나 없이 토키와에게 말했다. 죽은 사람이 있을 때 이바라는 언제나 진지했다.
토키와 아유키: 아니야. 이건 내 잘못이…
후루미나미 나몬: 아. 토키와. 토키와. 넌 어째서 리더인 거냐! 비극의 구현자여!
히무로 시라베: 넌 내가 본 리더 중 최악이다. 토키와 아유키. 네 판단력이 이 많은 자들을 죽게 만들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내가 이 새끼 쓸모없을 줄 알았지.
23T5U130: 대체 밤새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야?
카나리 케이토: 미련한 놈!
토키와 아유키: 그만… 그만해…! 멈추라고!
모든 이들이 토키와를 사방으로 둘러싸고선 저마다의 모욕을 뱉었다. 토키와는 귀를 막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목소리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기는커녕 더 확실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모리의 보라색 입술이 움직이며 내뱉은 말조차. 토키와는 똑똑히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모리 레이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이다.
보라색은 죽음의 색이다.
토키와 아유키: 흐으윽…!
토키와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잠에서 깨어났다. 눕지 않고 벽에 기댄 잠. 토키와의 등허리와 어깻죽지에 뻐근함이 남았다.
23T5U130: 악몽을 꿨나 봐? 몸을 계속 떨었어. 내가 깨워야 할까 고민할 정도로.
토키와는 23T 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리더니 등을 벽에 기댄 채로 다리를 폈다. 벽을 의지하지 않고선 몸을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진 것 같았다. 23T가 아니라 다른 누가 보더라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23T5U130: 일어나서 네 방으로 가. 모니터는 내가 줄곧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사실 카이다가 세 번째 시련으로 향하고 다른 이들이 두 번째 시련이 있던 곳에 머무니. 더 이상 감시를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토키와 아유키: 후루미나미가 히무로. 카나리가 카이다. 나나시와 칸나즈키가 모리…
23T는 퀭하고 충혈된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는 토키와를 보며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23T5U130: 뭘 가늠하고 있는 거야?
토키와 아유키: 경주마와 후원자. 하기와라를 후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바라겠지… 두 사람이 친하니까… 그럼 지금 경주마가 확실하지 않은 사람은 나. 너. 그리고 캐롤 씨로 세 명이야.
토키와 아유키: 야가미. 마유즈미. 나이토… 해변에선 이 세 명이 남았지. 숫자가 맞아떨어져… 그런데 내가 마유즈미를 후원하고 있단 말이야.
23T5U130: 네가? 그 비밀을 그렇게 쉽게 밝혀도 돼?
토키와 아유키: 더 숨겼다간 사람이 죽어. 그럼 너와 캐롤 씨. 그리고 나이토와 야가미로 후보가 좁혀지지…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어. 히무로의 이름은 가장 먼저 두 명의 후원자를 확보해서 비활성화되었지. 그러니 히무로는 자동적으로 두 명의 후원자를 지녀. 즉 너와 캐롤 씨 중 히무로를 후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인데… 그럼 나이토와 야가미 둘 중 한 명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지.
23T5U130: 이바라가 하기와라를 후원하고 네가 지금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말이야.
토키와 아유키: 그래.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니까 들어주기만 해. 나도 혼자선 생각 정리가 안 돼서 입 밖으로 말하는 거야. 그게… 그러니까…
23T5U130: 내가 히무로를 후원하고 있어.
23T5U130: 히무로는 카텟 기관 소속이니 내가 지켜야 했거든. 후루미나미가 워낙 열성적이라 내 도움은 거의 필요하지도 않았지만.
토키와 아유키: 그럼 나이토와 야가미 둘 중 한 명이 캐롤 씨의 경주마고… 나머지 한 명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지.
토키와 아유키: 후원자가 없으니 죽어도 되는…
23T5U130: 죽어도 된다니? 토키와. 너 지금 농담하는 거지?
토키와 아유키: 이런 말을 어떻게 가볍게 하겠어. 당연히 진담이야. 나도 이런 생각 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어. 해야만 했던 거지…
23T5U130: 너 지금 잠을 제대로 안 자서 이성적인 판단이 안 되는 거야. 내가 자라고 계속 말했지? 잠깐 자고 일어난 다음에 다시 밤을 새우려니까 사람이 이상해진 거야. 모니터실에서 졸지 말고 네 침대로 가서 자.
토키와 아유키: 아니. 이 선택이 옳아. 후루미나미는 살인을 조장하는 무책임하고 쾌락 중심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단 하나만큼은 그녀가 옳아. 모든 사람이 살 순 없어. 그리고 꼭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가장 죽어도 되는 사람을 골라야겠지.
23T5U130: 네가 리더가 되어서 내린 결정이 모두 좋게 끝나지는 않았지만, 지금 네가 내리려는 결정은 최악이야. 단언할 수 있어.
토키와 아유키: 모리가 저번에 나한테 한 말이 생각나네. "너는 좋은 리더가 되고 싶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나?" 였지. 난 둘 모두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선 아무리 최악의 결정이라도 내려야만 해.
23T5U130: 캐롤과 이바라가 그 일을 받아들일 것 같아? 나나시는?
토키와 아유키: 그러니 그들을 설득하는 게 내 역할이야. 또 동의하지 않더라도 내가 그들을 설득하면 돼. 내게 동의하도록.
23T5U130: 지금 캐롤이 둘 중 누구를 후원했을지 모르고, 캐롤이 후원하지 않는 쪽을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얘기 같은데.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지?
토키와 아유키: 맞아.
23T5U130: 너 지금 캐롤한테 조종당하는 거 아니야?
토키와 아유키: 그게 무슨 뜻…
23T5U130: 너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캐롤의 힘에 대해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알 테지. 몸으로 느껴 봤으니까.
토키와 아유키: 캐롤 씨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
23T5U130: 그 생각마저 심어진 걸 수도 있어. 넌 스스로를 믿을 수 없어.
토키와 아유키: 아니. 지금 나는 확신에 차 있어.
23T5U130: 어떻게 치부할지는 네 마음이지만 내 말 잘 들어. 지금 모리가 감염으로 죽으면 위험한 사람은 나나시와 칸나즈키야. 그런데 캐롤은 나나시가 죽길 원치 않지. 그러니 감염으로 그녀가 죽기 전에.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거야.
토키와 아유키: 아니. 23T. 만약 그런 식이었다면 캐롤 씨는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안 썼을 걸.
23T5U130: 뭐?
토키와 아유키: 만약 캐롤 씨가 선을 넘으려 했다면… 이미 탑에서 누군가가 죽고도 남았을 거야. 그래서 난 캐롤 씨가 터치를 살인에 쓰거나 날 조종하고 있지 않다고 믿을 수 있어. 탑의 모두가 조종당하지 않는 시점에서 이미 그렇게 믿을 수 있지…
23T5U130: …네 말이 맞아. 우리가 자유의지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캐롤이 지금은 잠잠하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그게 더 문제일지도 몰라. 너 스스로가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게 되는 거 말이야.
토키와 아유키: …모리가 했던 말이 하나 더 떠올라. 주어진 선이 어디까지인지를 인식하고… 그 선을 고의로 넘는 게 지금 나의 역할이다.
토키와 아유키: 정말 좋은 말이야. 모리.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모리는 다른 이들이 잠들었다고 느끼자 뜬 눈으로 조용히 침낭 안에서 몸을 꺼냈다. 손가락과 발목은 잘려 있었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많이 굼떠지지 않았다.
모리 레이코: …….
부시럭. 나는 실눈을 뜬 채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거동이 여의치 않기에 생리적 현상이 발생하면 우리 중 누군가가 그녀를 돕는다. 나이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아무런 소리 없이 움직이려는 것은 번거롭게 세 발로 모래바닥을 기어갈 정도로 수치스럽던가, 혹은 조용히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의미했다.
만조. 높아진 바닷물들에 가재 괴물들의 질문 소리가 들렸다. 우리 모두는 이미 이 질문들에 익숙해져 그 시끄러운 소음 사이에서도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또 가재 괴물의 질문은 아주 작은 생활소음들을 감춰 주는 역할도 했다.
나이토가 그녀를 부르는 것 또한 생활소음 중 하나였다.
나이토 유즈루: 어디 가.
모리 레이코: 승부사…
나이토 유즈루: 화장실 가고 싶으면 아무나 불러. 화장실 아닌데 어디 가려는 거면 다시 생각해 보고.
모리는 나이토에게 들키자마자 침낭 속을 파고들어 갔다. 나이토는 자신의 몸을 침낭과 함께 움직여 그녀에게 다가간 뒤, 두더지를 꺼내는 것 같은 느낌으로 그녀의 머리를 쿡 찔렀다.
모리 레이코: 뭐냐.
나이토 유즈루: 이거 하자고.
나이토는 그녀에게 밧줄을 들이밀었다.
모리 레이코: 물에 대한 공포는 극복한 것 아니었나.
나이토 유즈루: 밤이 되니까 다시 도졌어.
모리 레이코: 뻔한 거짓말 마라. 이런 것으로 날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나이토 유즈루: 묶는 게 아니라 연결하는 거야.
나이토는 모리의 팔에 밧줄을 묶었다. 모리는 그렇게 거부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럴 기력 자체가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이토 유즈루: 이게 이어진 이상. 우리는 동료야. 그리고 난 내 동료가 곤경에 처하면 절대 내버려 두지 않아.
모리 레이코: 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
나이토 유즈루: …네가 일찍 죽을 거라는 생각 따위는 접어두고 이겨내자고. 왜. 나빠?
모리는 나이토와 밧줄. 자신의 잘린 손가락을 번갈아서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다시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모리 레이코: 이런 짓을 할 시간에 체력이나 보존해라. 공리를 증진시키는 꿈을 꾸도록.
나이토 유즈루: 그게 마음대로 되겠냐?
나는 악우가 된 두 사람을 보며 이상한 안도감을 느끼며, 서서히 아주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카이다 쿠로하: 으아아아아악! 제기랄!
모노로그: 무슨 일인가.
카이다 쿠로하: 무슨 일이긴! 이딴 임무를 성공하라고 나한테 내준 거야?!
모노로그: 힘이 부치나.
카이다 쿠로하: 내 능력 부족 같은 개소리 마! 이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디에도! 혼자가 아니라고? 그래. 정말 도움 되는 조언이네! 안에 사람이 많다고 했어야지. 웃긴 말장난을 하고 있어!
모노로그: 그럼 어쩔 생각이지? 이대로 포기할 건가?
카이다 쿠로하: 야. 시련의 문 손잡이를 만지지 않고도 시련 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지?
모노로그: 그렇다. 쓸 생각인가?
카이다 쿠로하: 그래… 일단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겠어. 어차피 세 번째 시련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어디에 있든 상관없잖아.
모노로그: 내 말대로 되었군. 죽이기 쉽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전화 박스에 참둘기를 넣고 흔적도 없이 태워버리는 게 인류의 미래를 책임질 실험이라니. 어이없어. 그렇지?"
옥상에서 바람을 쐬며 노바디가 노네임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시라유키를 필두로 한 연구원들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노네임이 미래에 '할멈' 이라고 부르게 되는 지부장은 두 사람과 꽤 친분을 쌓았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지곤 했다.
"너희 대체 왜 그러는 거냐? 기관이 여전히 못 미더워서 그러나?"
"이유가 있는 거야. 할멈. 그럼 할멈은 왜 시라유키 히메리랑 같이 일하는데?"
"별걸 다 궁금해하는구나. 그야 어린놈들끼리 일 하는 게 영 불안해서 도와주는 거지. 너희도 똑같아."
"오지랖도 넓으셔요."
"오지랖이 넓은 게 아니라 정상적인 거다. 너희 나이대의 꼬맹이들이 어른처럼 구는 게 비정상인 거야. 너흰 아직 세상에게서 제 발로 멀어질 수 있는 나이가 아니야. 너흰 등을 돌리고 있는 거다. 정말 그대로도 괜찮은 거냐?"
노네임과 노바디는 대답을 망설였다.
사내 연애를 한다며 휘파람을 불어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노바디와 노네임은 그 스캔들에 대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인격이 모독당한 듯한 표정을 보였다. 두 사람은 서로 사귀는 일 자체를 꿈에도 꾸지 못한 것처럼 손사래를 내저었다.
알음알음 가십이 불어났지만 두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시라유키 씨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내게 있어서는 수많은 시간이 눈앞에서 휙휙 지나간다고 느꼈다. 정확히는 몇 분만 단편적으로 보았다. 청사진을 받은 노네임과 노바디. 기계를 완성한 두 사람. 첫 번째 실험. 두 번째 실험. 그런 짧은 순간들만이 휙휙 지나갔다.
말 그대로 화면이 전환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단편의 모음집 속에서 모든 정보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정보들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노바디와 노네임은 순식간에 기계를 완성했고 두 사람을 향한 시라유키 씨의 신임은 하늘을 찌를 정도가 되었다. 시라유키 씨는 실험을 진행할 사람들에게 두 사람을 소개하고 친해지도록 유도했지만, 두 사람은 다른 이들과 데면데면 통성명을 할 뿐 친해지지는 않았다.
그 뒤로부터 시라유키 씨는 이상하게 노바디와 노네임을 낯설게 대했다. 실험에 윤리적인 반대를 내비치는 두 사람을 비웃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나조차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시라유키 씨는 미묘하게. 그러나 조금씩 두 사람을 박하게 대했다.
기계를 이렇게 순식간에 만들어낼 수 있는 인재는 드물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던 그녀와 두 사람을 멀리하기 시작한 그녀. 그것은 한 존재의 두 가지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래도 프로그램화는 진행되었대. 문제는… 그걸 담을 그릇이 잘못된 거지만."
"그릇?"
"연구원 아저씨들이랑 얘기를 좀 해봤는데 단지 프로그램화를 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래. 프로그램화한 정신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그 육체와 굉장히 흡사한 기계를 만들어서 그 안에 적용시켜야 제대로 가동한대. 그렇지 않고 그냥 아무 데에나 넣어버리면…
"개한테 날개를 달고 벌레한테서 다리를 떼는 일이 되겠지. 제대로 움직일 리가 없어."
"그리고 몸이랑 정신이 제대로 일체화되지 못하면 서서히 망가진대. 환상통이라고 알아?"
"이미 절단되고 없는 신체 부위가 아프다고 느끼는 현상. 유령한테 수술을 할 수도 없으니 치료하기가 까다롭지."
"맞아. 상자에 참둘기를 가둬 뒀는데 참둘기는 상자에 없는 날개와 다리. 부리와 온갖 관절들을 상상한다고 생각해 봐. 그런데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아. 생각할 수 있을 뿐…"
"무서운 얘기 마. 노네임."
노바디가 얼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얘기가 무서워? 부우우."
노네임은 종이컵을 들고 있지 않은 손을 문어의 발처럼 꾸물거리며 노바디를 놀렸다. 노바디는 웃으며 말했다.
"무서운 수준이 아니야. 겁에 질리지…"
노네임은 어째서인지 노바디가 입만 웃고 있을 뿐. 실제로는 무서워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왜 그래? 노바디."
"노네임. 테세우스의 배 문제에 대해서 알아?"
"테세우스? 그리스 신화의 그 사람? 글쎄…? 자세히 아는 건 아니라서."
"사실 신화와 관련된 문제는 아니야.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테세우스의 배' 라는 이름의 배가 한 척 있다고 가정하자. 사람들은 이 배를 잘 타고 다니다가 판자 하나가 낡은 걸 발견했어. 그러면 어떻게 하지?"
"그 판자를 떼어 내고 튼튼한 새 판자를 붙이겠지."
"맞아. 그런데 모든 판자는 언젠가 낡게 되어 있어. 그럴 때마다 판자를 하나씩 교체하면, 어느 순간부터 원본의 판자는 단 하나도 남지 않아. 이 배를 처음의 그 배와 똑같은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에 대한 문제야."
"…난 잘 모르겠는데?"
"나는 이름이 테세우스의 배를 정의한다고 생각해."
"이름?"
"그래. 이름. 배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테세우스의 배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면. 그건 테세우스의 배야. 사람이랑 똑같아. 팔이 잘리거나 다리가 잘려도, 심지어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더라도 이름만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이름으로 불릴 수 있어. 그 사람을 정의하는 것은 이름 그 자체야."
"그럼 우린 큰일 났네. 노바디. 노네임. 우린 이름 없는 존재들이잖아. 아무도 우릴 기억하지 않을 걸. 다른 사람을 잃는 걸 두려워하고 벽을 세웠으니. 스스로를 잃더라도 누군가가 우릴 기억해주는 일은 바라면 안 되겠지…"
"난 널 기억할 거야."
"내가 먼저 죽을 것처럼 말하지 마."
"너도 날 기억해 줘."
"…그렇게 말하지도 말고."
"적어도 우리 둘에겐 서로가 있잖아. 그것 만큼은 확실하지 않겠어?"
노네임은 노바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노바디는 작게 한숨을 쉬며 이어서 말했다.
"나는 내가 뜯긴 판자가 되는 게 무서운 것 같아."
"뜯긴 판자라니?"
"테세우스의 배에서 뜯겨진 판자 말이야. 낡아서 교체되는 판자. 하나하나 떼어내고 새로운 판자로 교체해봤자 큰 틀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이지. 설령 모든 판자가 교체되더라도 사람들은 그게 테세우스의 배라고 생각하겠지만… 교체되는 판자의 입장에서는 아니잖아. 설령 낡아서 교체된 판자를 다시 모아서 배를 만들어도. 그 배는 태세우스의 배라고 불릴 수 없어. 그렇게 인식되지 못하니까.
왜인지 그게… 너무 무서워. 우리가 나아갈 새로운 세상에서 몸이란 그저 벗어던져야 할 거추장스러운 감옥에 불과할까? 조금만 삐걱여도 문제가 확연히 드러나고 늙으면 늙을수록 기능이 저하되다가 사라지는. 그냥 감옥? 만약 정신을 프로그램화하더라도 그건 삶의 연장선일 뿐 그 사람 자체는 아닐지도 몰라. 만약 그렇다면…
나는 내가… 사람들을 전부 죽이고 그 전자 복제본만 남기는 세상의 지평을 열어젖힌 것 같아서 너무 불안해."
쭈그려 앉은 채 고개를 숙인 노바디의 옆얼굴을 보고 노네임이 말했다.
"그래서 시라유키를 따르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걸지도 몰라."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뜻이야?"
"시라유키는 과격해. 윤리따윈 생각도 안 해. 그러니까 연구원들은 딜레마와 불안에서 자유롭잖아. 무언가가 잘못되더라도 그건 온전히 시라유키 탓이라는 자기 방어기제가 그들 모두에게 나눠져 있어. 그러니 아무리 위험한 실험이라도 그들은 기꺼이 따르지. 이런 비유를 써도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그게 상부에서 명령을 받는 아돌프 아이히만 같다고 생각해."
"그래. 우리가 보기엔 전혀 정상이 아닌 일이야."
"…노바디. 우리는 세상에 장벽을 세웠지. 관계를 잃는 게 두려워서 관계 자체를 가지지 않기 위해 새 이름을 지었어. 그렇지만 노네임과 노바디라는 가명도 결국 이름일 뿐이야. 요새에 있으며 가명을 쓰는 건 몰라도… 기관에 있으면서 계속 다른 모든 것들과 결부되려는 건. 모순 같아."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래?"
고개를 숙이고 있던 노바디가 고개를 들어 노네임을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지금 카텟 기관에서 미친 과학자와 함께 일하고 있지. 이미 스카우트를 받아들인 시점에서…"
"이런 실험을 할 줄 알았으면 기관에 합류하지 않았을 거야. 카텟 좋아하시네…"
"시라유키가 우릴 뒷전으로 취급하는 건 시라유키라는 사람 자체가 이상한 것도 있어. 그런데 내가 봤을 때… 시라유키는 정말 우리 사이를 질투하는 것 같아."
"…네가 농담하는 게 아니란 거 알아. 그런데 네가 보기에는 시라유키 그 괴짜가. 우정을 질투한다는 거야? 난 걔가 그런 거에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시라유키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는지조차 모르겠어. 그렇지만 시라유키는 카텟이라는 관념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아. 시라유키는 괴짜 다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잖아? 게다가 다른 사람의 기분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아. 당연히 친구를 사귀는 것도 어렵지."
"자기는 친구 사귀기 어려운데 우린 친구니까.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그런다는 거야? 시라유키 같은 사람은 친구를 걸림돌로 여길걸."
"걸림돌이라도 곁에 있어야 걸림돌이지. 시라유키는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사람이고…"
"그러니까 오히려 외로움을 덜 타는 거야. 시라유키가 저번에 기차 얘기하면서 한 말 들었잖아. 시라유키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분류하고 기준에 차지 않는 사람은 경멸하는 부류야. 뒤틀린 공주 같은 성격인데 어떻게 외로움을 타겠어?"
"그건 성격의 문제가 아니야. 생물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능이야. 우리가 요새에서 카텟 기관으로 온 것처럼… 결국 우리 나이대의 사람에겐 집단 속에서 어울리려는 본능이 있어. 그렇지만 시라유키는 너무 비범한 정신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과 다른 타인에게 거리감을 느끼며 의식하지 못한 정서적 외로움을 가지고 있고… 그걸 카텟이라는 동료의식으로 메우고 있다는 게 내 추측이야. 이 추측이 맞다면 시라유키는 우리 둘을 싫어하는 게 아니야. 카텟이랑 하나가 되지 않으려 하고 멀어지려는, 카텟을 기만하려는 듯한 행동을 싫어하는 거지."
"제정신이 아니야. 어울려줄 필요 없어."
"아니야. 노바디. 이제 어울려야 할 때가 온 거야."
노바디는 굽히고 있던 다리를 쭉 펴고 일어난 뒤 노네임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안 그래."
"적어도 시도할 가치는 있잖아. 시라유키가 우리 능력을 이용할 생각이었다면 진작 우리를 내쫓았을 거야. 시라유키는 우리가 카텟의 일원이 되길 원해. 우리도 그럴 수 있어… 할멈에게 했던 걸 똑같이 하면."
"정신 차려. 노네임. 이 기관 사람들한테 마음을 다 주겠다고?"
"그만큼 돌려받을 수 있다면."
노바디의 목소리가 점차 커져갔다.
"시라유키는 네가 그렇게 생각하기를 원하는 거야! 우리를 카텟에 흡수시키려고! 우린 절대로 마음을 돌려받지 못해. 이 사기꾼들한테선 어떤 의리도 기대할 수 없어!"
"그렇다고 두려워해선 아무것도 바뀌지 않잖아…! 우린 늘 무시받고, 사람들 속에서도 외롭고, 너는 늘 불안할 거라고."
"그런 식으로 바뀌는 건 원하지도 않아."
"우리도 조사를 해 봤으니까 알잖아. 카텟 기관은 우리 생각보다 튼튼해. 마음을 줬더니 또다시 부질없이 사라져 버리지 않을 거란 말이야. 이제 바뀔 수 있다니까…! 노바디!"
"난 싫어!"
"대체 이유가 뭔데 그래?"
노바디는 당혹감을 느꼈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왜인지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불안해서 그래. 그렇지만 이제 우리도 성장할 때가 온 거야.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봐. 둘만 몰래 빠져나와선 둘만 얘기하잖아. 사실상 가는 길마다 요새를 세운 거야."
"…불안함을 없앤다. 아이히만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아니. 그건 비유일 뿐이야! 우리가 하는 일이 나치가 하는 일처럼 악독한 건 아니잖아! 또 우리는 연구원 분들처럼 명령을 받고 충실히 이행하는 존재가 아니야. 엄연히 시라유키와 같은 직책을 맡고 있어."
"새 친구를 사귀어보면 되는 거지?"
노바디는 한숨을 쉬었다.
"잘해보자. 노바디."
"너야말로 잘해. 노네임. 이제 팍팍 인맥을 넓혀서 카텟 기관을 우리가 먹어버리자고! 이제 내려가자!"
나나시: 드디어 얘기가 잘 풀리기 시작하나 봐요. 일도 잘 풀리겠죠?
칸나즈키 시노부: 그럴까?
"아직 이 장치는 안전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어. 그러나 그 단계에 이른다면, 그리고 이 기술을 상용화할 수 있게 된다면, 정신의 정의 자체가 바뀔지도 몰라."
시라유키 씨는 카텟 기관을 견학 온 사람들에게 전화 박스를 보여주며 그 용도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정신을 프로그래밍한다는 과격한 내용을 제외하자 전화 박스는 정말 인류의 새 지평을 열 것만 같았다.
"저기 노네임! 노바디! 나 좀 도와줄래!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할 일이 있으면 너 스스로 해."
노바디가 시라유키 씨에게 매몰차게 말했다. 시라유키 씨는 흥 하고 콧김을 내더니 견학자들을 다른 방향으로 보냈다.
"우리가 써먹기 좋은 말단이야? 우린 이런 취급받으려고 널 따라온 게 아니야. 시라유키 히메리."
"알아. 너흰 자랑스러운 카텟 기관의 원년 멤버 중 하나야. 당연히 그만큼 대우해 줄 거야. 그런데 너희에겐 문제가 있어. 하나는 자꾸 내 앞길을 가로막으려 한다는 거랑. 나머지 하나는 너희가 카텟에서 떠나고 싶은 사람처럼 보인다는 거지."
그 순간.
나나시: 아악?!
내 머리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두통이 느껴졌다. 심지어 두통은 사라지지도 않았다. 사라지기는커녕 내 머리에 정말 구멍이 뚫리고 하나의 동공을 만든 듯이. 고통은 심해져만 갔다.
칸나즈키 시노부: 왜 그러니. 이름 없는 남자.
나나시: 머리가… 너무 아파요. 너무…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내 머리를 붙잡았다. 중심을 잡지 못해 내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콘크리트의 감촉이 느껴졌다.
느껴졌다.
느낄 수 있었다고? 어떻게…?
나나시: 나는 분명 유령 같은 상태로… 기억을 보고만 있을 텐데…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픈…
칸나즈키 시노부: 이름 없는 남자. 네 몸이 끌려가고 있어.
수호령 씨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눈에 고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닦아내려 애쓰자 나는 정말 내가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음을 알아챘다. 노네임에게로. 내 몸이 천천히 콘크리트에 쓸리며 이끌리고 있었다.
나나시: 이… 이게 무슨… 아아악… 으윽…!
내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정확히는 땅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위치까지 떠올랐다. 노네임이 있는 위치. 그곳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게 작용하는 힘에 저항하려 했지만, 너무 강했다. 나는 다리를 콘크리트 바닥에 질질 끌며 일어날 일에 저항했지만 벗어나지는 못했다.
나나시: 아아… 아아아…!
나는 절규했고…
나나시: 으아아아아아아아!!
나는 노네임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강요로 카텟에 들어오게 만들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너희 선택에 맡길게. 그보다 너희가 거절했으니 이 일은 내가 처리해야겠구만…
시라유키는 늘 입고 다니는 가운을 전화 박스 안에 벗어놓은 채 반팔 와이셔츠만을 입고 작업했다. 전선을 몇 개 건드리는 간단한 작업으로 보였다.
"뭐 하는 거야. 시라유키?"
"보면 몰라? 전화 박스를 조작하려는 거지… 이 부분을 안 만지면 언젠가 절전 모드로 바뀌거든. 출력이 안 떨어지게 하려면 시험 가동을 계속 돌려줘야 해. 이 발전기를 한 번 식힌 다음 다시 예열시키려면 막대한 수준의 에너지를 다시 공급해야 하니. 그것보단 전기장 형성이 더 싸게 먹혀… 여기를 건드리면…"
시라유키는 스프링을 밟고 튀어오른 것처럼 몸을 쭉 피더니 쾌활하게 전화 박스 밖으로 걸어나왔다. 전화 박스 안에 들어간 생물이 어떻게 되는지 아는 사람 치고는 무척 태연한 행동이었다.
"난 이제 잠깐 쉬러 간다. 너희 둘도 마음껏 쉬어!"
"잠깐 쉬긴… 그런 식으로 우리를 뒷전으로 취급할 순 없어. 시라유키 히메리."
팔짱을 낀 노바디의 말이 시라유키에게는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깐. 시라유키. 가운은 어쩌게?"
"어? 내 정신 좀 봐! 미안한데. 노네임! 내 가운 좀 가져다 줄래?"
얼굴을 찌푸리며 후다닥 전화 박스 안으로 들어가려는 내 가슴팍에 누군가의 손이 닿았다.
노바디는 팔을 뻗어 나를 가로막고는 저벅저벅 전화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넌 저 여자가 시키는 걸 다 하니까 문제야. 노네임."
"시키는 걸 다 하는 건 아니야…"
"다 하는 것 같던데."
노바디는 피식 웃었고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나는 잠시 한눈을 팔았다. 잠시 책상 위의 설계도와 보고서들을 두 손으로 잡고 바닥에 툭툭 내리쳐 반듯하게 만들었다. 전화 박스의 문이 위잉 닫히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나는 전화 박스를 돌아보았다.
파멸은 언제나 전조 없이 찾아온다.
"아니 저렇게 빨리 닫히게 설정해놓으면 어떡하잔 거야? 저러다 누가 안에…"
나는 30cm 두께가 넘는 유리 너머로 노바디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보았다.
"…갇힐 수도 있잖아."
"어… 노네임?"
나는 전화 박스로 달려가 유리와 그 문을 마구 두드리고 발로 찼다.
"노바디! 노바디! 아아아! 안 돼! 노바디!"
"뭐야. 무슨 일이야?"
멀리서 시라유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가 그녀를 향해 드러낸 적 없는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빨리 여기로 와! 노바디가 기계 안에 갇혔다고!"
복도를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시라유키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나와 전화 박스 안의 노바디를 번갈아서 보았다.
"아니 어떻게 이런…"
"기계 꺼! 시라유키! 기계 끄라고! 당장 끄라고!"
내가 시라유키에게 윽박지르자 그녀는 처음으로 내게 당황한 표정을 보여주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모… 못 꺼… 끌 수가 없다고. 안전 프로토콜이 작동한 거라서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상황을 파악한 노바디가 유리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안 돼. 안 돼. 안 돼!"
"노바디. 다 괜찮을 거야. 다 괜찮아… 아니야…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잖아. 응?! 시라유키! 이건 사람을 죽이려고 만든 기계가 아니잖아!"
나는 시라유키를 향해 소리쳤다. 시라유키는 창백해지는 노바디의 얼굴을 보았다. 몇 발자국을 뒷걸음치던 그녀는 어딘가로 후다닥 달려갔다.
"끄… 끌 방법을 찾아볼게!"
"가지 마! 시라유키 히메리! 대체 어딜…"
"노네임! 이쪽 봐!"
나는 바람에 흩날리는 시라유키의 흰색 가운에 대고 소리치던 도중 노바디의 외침을 들었다. 창백해진 얼굴.
"…아무래도 여기서 작별인 것 같아. 우리 지금껏 열심히 뛰어다녔지. 안 그래?"
"아니야. 아니야…"
"너만 먼저 두고 가는 것 같아서 미안해. 곁에 있어줘야 했는데. 우린 늘 하나였는데…"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날 두고 가지 마. 제발…! 카텟 따위는 필요 없어. 노바디! 카텟에 네가 없어선…"
"There was a time. I was your only one. But now I'm sad and lonely one…"
노바디는 날 달래 주려는 듯이 블루스 노래의 구절을 흥얼거렸다.
"나 없이도 건강해야 해… 줄곧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웠어. 넌 나의 반쪽과도 같았지… 그리고… 널 꽤 좋아했어."
나는 그녀의 말에 반응할 여유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날 버려두지 마… 날 떠나지 마!"
도저히 못 보겠다.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만약 이대로 작동된다면 네가 어떻게 될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기에. 그러나 나는 눈을 감지 않는다. 눈이 감기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이해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것이 너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네 마지막을 잊어서는 안 되기에 그 끔찍한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노바디…"
"나 잊지 마… 잊으면 안 돼. 알겠지?"
빛이 너를 산산조각낸다.
뼛가루조차 남지 않는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살려 내. 살려 내라고! 살려 내란 말이야!"
"진정해라. 노네임! 그렇게 시라유키를 괴롭혀 봤자…"
"괴롭혀? 뭘 괴롭혀요. 누가 누굴! 지금 이 살인자가 내 친구한테 저지른 짓을 보고도 내가 시라유키를 괴롭히는 것 같아요?! 야. 말 좀 해봐!"
"되… 되살릴 방법은 없어… 아직 우리도 그 정도 단계까진 이르지 못했다는 거. 너도 알잖아… 몸이 분해된 이상…"
"그래. 넌 또 다른 실험체를 데리고 프로그램화 실험이나 진행하겠지. 노바디를 되살릴 실험 따위 수지타산에 맞지도 않아… 당연히 그렇겠지. 넌 노바디를 되찾을 생각이 없어. 눈엣가시 하나가 사라졌으니 이제 춤이라도 추지 그래?"
"아… 아니야. 노네임. 이건 정말 가슴 아픈 사고야. 내 실수였어. 맞아. 그렇지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 바란 적은 없었어. 노바디가 이렇게 되길 바란 건…"
"그래! 그 자리에선 내가 죽었어야 했나 봐?! 노바디가 날 가로막지만 않았어도 내가 죽었겠지. 네가 설정해놓은 덫에 걸려서. 나로서는 네가 대체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돼. 왜야? 대체 왜? 왜 날 죽이려 들었어!"
"덫이 아니었어. 정말 타이머를 너무 짧게 잡았을 뿐이야! 노네임. 제발… 이해해줘."
"사실 이해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감히 어떻게 이해하겠어? 왜냐하면 넌 사람의 사고방식에서 한참 어긋난 존재니까. 넌 누구와도 어울릴 수 없어! 카텟이라는 공동체에 몸을 의탁할 뿐 네 진심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앞으로 영원히 없을 거야. 그 안은 끔찍한 괴물의 공상으로 가득하니까! 널 저주해! 시라유키 히메리. 이 살인자!"
난 처음으로 시라유키가 반론할 생각도 없이 멍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다.
그날 밤 나는 카텟 기관의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 노바디의 프로그램화된 정신을 USB에 담았다.
"조금만 참아. 노바디. 조금만…"
그리고 카텟 기관을 떠났다.
"살려 낼 거야.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당신이 이 근방에서 가장 유능하다는 정형외과 의사죠?"
"그런데… 총은 내려놓고 얘기하면 안 되나?"
"기계를 하나 만들고 싶은데, 설계를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당신 혼자 일하는 건 아니니 안심하세요. 보수도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기계를 만드는 일에 왜 나를 부르는 건가?"
"최대한 인간과 닮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금기를 범하는 일이라도 좋아.
이런 식의 죽음은 받아들일 수 없어.
몸을 다시 되살릴 순 없어. 적어도 지금은 불가능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를 잠시 담을 그릇을 만드는 일뿐.
가재 괴물에 의해 신체를 잃고 감염에 걸린 사람은 모리와 나이토. 두 명.
모리를 후원하는 사람은 쓰러져 있는 나나시와, 지금은 후루미나미와 카나리의 편에 속한 칸나즈키였다. 또 나이토를 후원하는 사람은 캐롤. 그녀 본인이었다.
모리의 감염 진행 속도가 더 빠르다는 점을 생각하면 나나시와 칸나즈키가 죽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설령 모리가 감염에서 회복한다고 한들 나이토 또한 회복되지 않는다면, 언젠가 캐롤 또한 죽게 될 터였다.
즉 두 사람의 모두의 감염이 해결되지 않으면 캐롤과 나나시 둘 중 한 명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캐롤은 갈등했다. 갈등한다는 사실 자체를 수치로 여겨야 할 만큼 그것은 저급했고 일차원적이었으며, 또 금기를 넘는 일이었다.
5년이라는 시간의 장벽을 넘는 일.
캐롤은 잠든 나나시에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에게 다가갔다.
캐롤 브라이트: 결국 나나시 씨 아니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다면…
캐롤은 잠든 나나시의 얼굴 바로 옆에 두 손을 얹었다.
캐롤 브라이트: 차라리 짧은 시간일지라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캐롤이 두 손을 부르르 떨며 자기 자신과의 줄다리기를 하고 있던 찰나. 누군가가 캐롤의 숙소 문을 경쾌하게 두드렸다.
이바라 쿠리스: Knock, Knock? 와이! 캐롤. 이바라가 왔지롱!
캐롤은 퍼뜩 문 쪽을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이 이바라임을 인식한 뒤 캐롤은 동요한 티를 내지 않고 물었다.
캐롤 브라이트: 아. 네. 무슨 일이세요?
이바라 쿠리스: 무슨 일이긴! 잠시 걸즈 토크하려고 들렀지. 그… 혹시 지금 들어가기 어려운 타이밍이야?
캐롤은 아무 말 없이 문으로 다가가 흔쾌히 문을 열었다.
캐롤 브라이트: 아뇨. 들어오세요.
이바라 쿠리스: 좋았어. 실례합니다아!
이바라는 당장 쫓겨날 것 같은 사람처럼 캐롤의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바라 쿠리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초고교급이니까 걸즈 토크의 그림이 잘 안 나오더라고. 칸나즈키는 마이웨이. 후루미나미는 좀 싸이코 같고. 모리도 싸이코 같고… 아니 험담하려고 온 게 아닌데 이렇게 됐네?! 아무튼. 차분하신 연상의 언니랑 얘기라도 좀 나눠 보려고 왔어요. 언니!
캐롤 브라이트: 저야 좋죠. 모처럼 오신 손님이신데 차라도 한 잔 드시겠어요? 제 전용실에서 홍차 세트를 찾았는데…
이바라 쿠리스: 홍차?! 사양 안 할래! 한 번 먹어보고 싶었거든! 진짜 빨간색이야?
캐롤 브라이트: 어떤 곳에선 찻잎이 검은색이라 블랙 티라 부르지만. 네. 정말 빨간색이에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캐롤은 방문을 나서면서 이바라와 나나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오기까지 이바라는 다리를 떨면서 휘파람을 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바라 쿠리스: 킁킁. 킁킁. 뭔가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은… 아앗! 나 완전 아저씨 같았다! 그것도 기분 나쁜 아저씨! 우웩!
얼굴을 한 번 일그러뜨린 뒤 이바라의 시선은 캐롤의 침대에 곤히 누워 있는 나나시에게로 향했다.
이바라 쿠리스: 와. 침대에서 재우고 있네. 이거… 이래도 되는 건가?! 오히려 외국에선 이게 정상인가…? 우와. 순간 몹쓸 상상을 해버렸어…
이바라 쿠리스: 이 멍청아. 사람 오해하게 만들고 있어! 빨리 좀 깨! 잠자는 숲 속의 공주님은 들어봤어도 왕자님은 처음 듣는단 말이야.
캐롤 브라이트: 누구랑 대화하고 계세요?
이바라 쿠리스: 나…나 자신?!
캐롤은 나나시를 흘끗 돌아본 뒤 당황한 눈치의 이바라를 보고 웃었다.
캐롤 브라이트: 저도 이 탑에 온 뒤로는 혼잣말을 자주 하게 되더군요. 숙소에서 대화할 사람이 좀처럼 없기 때문인지. 상담사의 천성이 저 자신에게로도 향하는 건지…
캐롤은 말을 함과 동시에 찻주전자에 홍차 티백을 넣고 물을 부었다.
캐롤 브라이트: 이제 3분에서 5분을 기다린 뒤 마시면 돼요.
이바라 쿠리스: 에엑! 라면보다 쉬워!
캐롤 브라이트: 그러면서도 라면보다 맛이 있을지는 장담 못 한단 말이죠. 후후. 찻잎한테 달려 있으니…
캐롤은 티스푼의 손잡이를 흰 장갑을 낀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캐롤 브라이트: 그보다 걸즈 토크는 정확히 뭘 하는 건가요? 고유명사화된 단어 같은데. 말 그대로 저희가 대화를 나누면 걸즈 토크가 되는 건가요?
이바라 쿠리스: 맞아! 동시에 소녀들이나 할 법한 이야기 소재에 대해 말하는 걸 의미하기도 하지. 갸루들의 수다라고!
캐롤 브라이트: 전 "갸루" 가 아닌데 괜찮은 건가요?
이바라 쿠리스: 당연히 괜찮지! 그럼 풋풋하고 쾌활하며. 이런 상황이지만 아직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걸즈 토크를 시작해 보자고. 그럼 처음 토픽으로는… 음…
이바라 쿠리스: 사랑 얘기하지 않을래?!
캐롤 브라이트: 아…
캐롤이 이바라를 포함한 다른 사람과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
당분간 단크 타워는 휴재할 예정입니다(10월 말 정도까지)
1월부터 지속되던 흉통에 최근에는 소화력 저하 목의 염증 이젠 기원을 알 수 없는 어지럼증까지 심신 양면으로 최근 너무 건강하지 않은 느낌이 들어 잠시 단크 타워의 부담을 덜어 보려고 합니다 중간고사 기간이기도 하고요
저도 2챕터를 빨리빨리 써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오히려 이런 마음이 저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느낌이라 조금 무섭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저도 2챕터 1년 걸리기 싫은데… ㅠㅠ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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