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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2

더 단크 타워 챕터 2 - 18

by 도타싫어! 2021. 9. 17.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모리의 발목이 잘리는 것을 본 이바라는 도저히 못 보겠다는 듯이 두 눈을 가리고 벽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륵 미끄러졌다.

 

바라 쿠리스: 무리… 이거 무리… 위험하다니까. 위험하다니까

 

카나리는 화면에 나오는 영상을 보고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기까지 했다. 카이다가 죽을 염려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었다. 모리가 죽는다면 그와 동업하고 있는 칸나즈키가 죽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칸나즈키 본인이 눈에 띄는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카나리 또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칸나즈키는 화면을 가끔 힐끔거릴 뿐 모리에겐 거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녀와 달리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모리의 부상을 가만히 볼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캐롤은 쓰러진 나나시를 계속 흔들다 말고 칸나즈키를 향해 소리쳤다.

 

롤 브라이트: 칸나즈키 씨! 이래도 괜찮아요?! 모리 씨가 죽을 거라고요!

 

캐롤이 다급함을 숨기지 못하는 데에 반해. 정작 모리를 후원하고 있는 칸나즈키는 걱정 말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나즈키 시노부: 안 죽는다니까 그러네. 아무리 다치더라도 지금 죽지는 않아.

 

롤 브라이트: 그런 무책임한 말씀을…!

 

캐롤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인 나나시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아직 흰 장갑을 다시 쓰고 있지 않았다.

 

눈은 마음을 반영하는 거울이고 유리창이기도 한데, 캐롤의 거울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캐롤이 몸을 일으키고 후루미나미, 카나리, 칸나즈키를 한 번씩 슥 돌아보자 후루미나미는 기시감을 느꼈다. 언젠가 느껴본 것 같은 기백이 모니터실 내부를 가득 채웠다.

 

너무 많이 미뤘어. 진작 이래야 했어….

 

거인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에 후루미나미의 입가에서 아주 잠깐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와 카나리가 슬그머니 뒷걸음을 치자 칸나즈키는 아무 말 없이 캐롤 앞에 섰다.

 

칸나즈키는 정신을 잃은 나나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즈키 시노부: 얘는 네가 그거 하지 않게 만드려다가 이렇게 된 거야. 우리가 가증스럽겠지만 그거 하나는 기억해 둬.

 

그 말을 들은 캐롤은 왼손을 부들부들 떨며 칸나즈키에게로 뻗었다. 카나리가 당장 피하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나 두 사람은 그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후루미나미는 팝콘을 꺼내 와그작 씹었다.

 

캐롤의 길고 새하야며, 섬세하게 얇은 손가락이 칸나즈키의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토키와는 얼굴의 솜털에 닿을 정도로 손과 얼굴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그걸 보고 있음에도 토키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몸은 굳어버렸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꿀을 손에 담고 있는 것처럼 토키와는 주변의 모든 것이 자신의 손가락 사이로 끈적이며 흘러 내려간다고 느꼈다.

 

캐롤의 오른손이 왼손을 확 낚아채고 자신의 몸 쪽으로 끌어왔다. 화와 울분을 삭이려는 듯이 캐롤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눈썰미는 겉으로 보기에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적어도 모니터실의 다른 모든 이들은 그녀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게 보였다.

 

캐롤이 입술을 깨물며 흰 장갑을 다시 쓰자 긴장을 푼 후루미나미는 화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이토가 카이다와 맞서기 위해 바다로 몸을 던지는 모습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후루미나미는 박수를 치며 해변에선 듣지 못할 외침을 내질렀다.

 

루미나미 나몬: 머어어어엇있다! 빠르다 나이토! 힘내라! 힘내라!

 

키와 아유키: 후루미나미. 지금 장난해?! 너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건데…!

 

루미나미 나몬: 무례하긴! 다 내 탓으로 돌리지 말아 주겠소. 무슈 토클ㄹㄹㄹㄹ와?

 

후루미나미는 콧수염을 붙인 채 도도하게 말했다.

 

루미나미 나몬: 이 게임에 선악이란 없소. 오직 승자와 패자만이 있을 뿐이오. 악은 원래 상대적인 개념이니. 그대들이 우리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다면 그건 착각

 

이토 유즈루: 뿌워어어!!

 

나나시의 수신기를 통해 나이토의 외침이 들렸다. 화면에선 나이토가 카이다의 관자놀이에 주먹을 정통으로 꽂아. 그녀를 바다에 내꽂는 장면이 나타났다. 후루미나미는 마이크 모형을 입에 가져다대고 속사포로 말을 쏟아냈다.

 

루미나미 나몬: 나이토 선수 제대로 한 방 날립니다아아아! 아! 그런데 이 선수 카이다 선수를 끝장내지 않는 건가요? 지금 끝내지 않으면 다시 돌아올 텐데요!

 

무로 시라베: 해변으로 돌아가야 한다니까. 야가미.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잖아.

 

대몰락 이후의 세계인지라 경찰 인력을 기대하긴 어려울 터였지만, 자칫 잘못해서 붕괴하는 시련 속 세계에 남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미도리카와가 죽은 이상 시련은 필연적으로 붕괴하기에, 우린 시련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러나 야가미는 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죽은 미도리카와를 내려다보았다. 하기와라는 그런 야가미가 괴상한 놈이라는 듯이 그를 흘겨보고는 나를 지나쳐 시련의 문으로 향했다.

 

기와라 우시오: 히무로이드! 야가미 챙겨서 문으로 들어와. 나랑 마유즈미가 먼저 갈 테니까! 지금 밖에서 뭔 일이 났을지 몰라!

 

유즈미 나데시코: 그런 소리 마. 하기와라! 불안하잖아. 구급상자를 쓸 필요는 없었으면 좋겠는데

 

마유즈미는 구급상자를 들고 하기와라의 뒤를 따랐다.

 

무로 시라베: 조심해야 해. 곧 나도 갈 테니까 위험한 일 하지 말고.

 

유즈미 나데시코: 알겠어!

 

마유즈미는 나를 돌아보며 발을 바쁘게 움직이려다 미도리카와 쪽을 보고선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에 서서히 습기가 차올랐다.

 

유즈미 나데시코: …미안해. 미도리카와.

 

마유즈미는 낑 하는 소리를 내며 총총 시련의 문을 향해 뛰어갔다. 하기와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문을 열고 해변으로 떠났다. 나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야가미의 옷소매를 잡아끌었으나 그는 시체처럼 묵묵했다.

 

사실 야가미를 챙기라는 하기와라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나는 야가미를 굳이 데리고 나올 필요가 없었다. 시련의 주인인 미도리카와가 죽은 이상 두 번째 시련 또한 서서히 붕괴할 수밖에 없었으니. 살인 게임에서 벗어나 한정된 꿈속 세계에서 살려해도 몇 분도 채 남지 않은 셈이었다.

 

야가미가 제정신이라면 나 또한 두 사람을 따라 손잡이를 잡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설마 시련 속에 남아서 뇌사하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

 

…그가 제정신이라면 그럴 터였다.

 

그가 미도리카와의 죽음에 정신이 붕괴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설득이나 회유가 필요할지도 몰랐고… 또 다른 이유도 있었기에 나는 곧바로 시련에 나서지 않고 야가미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무로 시라베: 카이다가 밖에 있어. 야가미. 당장 나가야 한다고. 네 투정을 받아줄 시간이 없어.

 

가미 토가: 그럼 또 바다뱀을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첫 번째와 똑같습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 버린다니? 첫 번째 시련의 일에 대해 말하는 거라면 그것은 그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미도리카와를 버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녀를 시련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부상을 입고 거의 익사하면서까지 그녀를 살리려 애썼다. 그런데 버렸다고?

 

무로 시라베: 첫 번째 시련에서 미도리카와를 구출하지 못한 건 사고라고 생각해. 네가 바다뱀을 어떻게 여겼는지는 묻지 않겠지만. 붕괴하는 시련 속에서 그녀의 곁을 지키며 뇌사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당장 밖으로 나와. 언젠가는 나와야 할 테니까.

여기서 뇌사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겠지.

 

나는 미도리카와를 내려다보는 야가미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았다. 그와 동시에 나는 미도리카와의 손에 아직도 들려 있는 44mm 매그넘 권총 또한 지켜보았다.

 

무로 시라베: 네가 이러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해. 야가미.

 

가미 토가: …얼마나 알았습니까?

 

야가미는 조용히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뒤로 돌려 나를 보았다.

 

무로 시라베: 미도리카와의 손에 쥐어진 권총을 탈취하려는 것. 아니야?

 

야가미는 무슨 소리냐 되묻듯이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미도리카와를 보았다. 미도리카와의 집념이 계속 붙들고 있는 권총. 그것이 눈에 들어오자 야가미는 내 말을 이해한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가미 토가: 당신… 지금 진심입니까? 제가 그런 이유로 여기에 남은 것 같다고요? 저게 있는 줄도 지금 봤군요. 어차피 탄창이 다 떨어졌을 저 권총을 위해 제가 이러는 것 같습니까?

 

무로 시라베: 몇 발이 남아 있을지는 실린더를 열어보기까진 알 수 없어. 네가 우리를 배신할 거라고 추측한 건 아니지만, 네가 지금 순순히 협력하는 건 총상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지. 네게도 총이 생기면 다른 마음을 먹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야가미는 헝클어진 자신의 머리를 옆으로 쓸어내리고선 기가 찬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그런 표정을 보여준 기억이 없었기에 의외라고 느꼈다.

 

가미 토가: 당신 정말 프로파일러 맞습니까? 범죄심리학을 쓰면서 사람에 대해 이렇게 모르는 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고작 총을 위해서

 

무로 시라베: 사람의 감정은 늘 불안정하지. 게다가 난 네 감정에 대해 잘 몰라. 모르는 것을 토대로 판단할 순 없어. 야가미. 네가 말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무로 시라베: 넌 정확히 미도리카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이제 들어야겠어.

 

가미 토가: 악취미군요. 당신이라면 이미 분석을 마치셨을 텐데요.

 

무로 시라베: 나는 긍정적인 감정 분야에 취약해. 쾌락범을 제외한 범죄자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요인에 의해 범죄를 저지르지. 네가 미도리카와를 죽인 것도 부정적인 요인 때문이야. 복수심. 그렇지만 네가 그토록 복수심을 불태우던 그녀가 죽은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건 왜인지 알 수 없어.

 

무로 시라베: 그러니 네 입으로 말해. 야가미. 모노로그를 버리고 우리에게 합류하겠다면 네가 이제 와서 그토록 미도리카와를 살리려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들어야겠어.

 

야가미는 내게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미도리카와를 조금 더 내려다본 뒤 다리를 일으켰다. 부피가 잔뜩 줄어든 것처럼 보이던 그가 다시금 솟아올랐다.

 

가미 토가: 세 번째 시련에서도 실패한다면 그때 말씀드리죠.

 

무로 시라베: 그 전까진 너를 신뢰할 수 없다는 점 명심해.

 

가미 토가: 그러죠. 저 또한 당신을 신뢰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니까요. 당신은 현상과 현상 사이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인물이지만… 당신이 제 아군이 될지는 저에게도 미지수입니다.

 

아군? 그게 무슨 뜻이냐고 되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당장은 문 밖으로 나가는 게 최우선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시련의 문을 가리켰고 야가미는 무릎에서 미도리카와의 피를 뚝뚝 흘리며 터덜터덜 나를 지나쳐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다 야가미는 잠시 한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가미 토가: …히무로 씨. 지금 제게 약속 하나만 할 수 있겠습니까?

 

무로 시라베: 듣고 나서 결정할게.

 

가미 토가: 제가 저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 시련만큼은 반드시 성공합시다.

 

무로 시라베: 우리들의 생존에 위험을 끼치지 않는 이상 난 여태까지 그랬듯이. 시련을 통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가미 토가: 그래요. 그것만으로도 저는 큰 요구를 한 것이지요. 저는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지막 시련만큼은 성공해야겠습니다.

 

무로 시라베: 나도 그러길 바라. 미도리카와를 되살려서 카이다를 견제할 기회는 이제 하나밖에 안 남았으니까

 

가미 토가: 그것 말고 제겐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왜 이런 담소에 휘말려야 하느냐는 의문이 차올랐다. 왜 내가 그의 구구절절한 이유를 다 들어야 하는가? 나는 그의 말을 도중에 끊어 버리려 했으나, 뒤이은 그의 말을 듣자 그런 생각은 잠시 사그라들었다.

 

가미 토가: 세 번째 시련에서까지 실패한다면 제가 과연 시련 속에서 나갈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시련에서 미도리카와를 구하지 못하면, 정말 붕괴하는 시련 속 세계 속에서 뇌사하겠다는 뜻인가?

 

진심인가? 나는 몰랐고, 당장 알 필요 또한 없었다.

 

무로 시라베: 먼저 가. 우린 충분히 시간을 지체했어.

 

가미 토가: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야가미는 시련의 문을 향해 걸어가고선 마지막으로 미도리카와의 시체를 돌아보았다. 붉게 물든 바다뱀을.

 

아무 말 없이 야가미는 문을 열었다. 그의 정신은 다시 해변으로 향했다. 아마 내가 곁에 없었다면 그는 추도사라도 몇 분 동안 읊었을 것 같았다. 그를 조금이라도 빨리 해변에 보낸 것만으로 충분히 좋은 일이었지만, 미도리카와의 시체를 지켜보는 마지막 목격자가 사라졌다는 점 또한 그 못지않게 좋은 일이었다.

 

나는 싸늘히 식은 미도리카와를 내려다보고 해야 할 일을 처리한 뒤 문을 향해 달려갔다.

 

해변의 몸을 벌떡 일으키자 내가 가장 먼저 들은 것은 잔뜩 당황한 마유즈미와 하기와라의 목소리였다. 조금 익숙해진 해변의 바닷바람과 짠 냄새 너머로 어딘가 불길한 느낌이 몰려왔다.

 

유즈미 나데시코: 어어어. 어떻게…! 어떻게 하지!

 

기와라 우시오: 걱정 마! 히무로이드랑 야가미면 좋은 수를 생각해낼 테니까. 붕대를 갈아 준다거나 상처 부위를 소독한다거나 그런 거!

 

대화 내용으로 말미암아 나는 확신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무언가가… 나는 다리로 모래를 디디고 그들에게 달려갔다. 모리는 모래사장에 누워 있었고, 나이토는 상체만을 일으킨 채 손을 모래사장에 디뎌 몸이 넘어가지 않도록 지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마유즈미와 하기와라가 허둥지둥 대고 있었다.

 

무로 시라베: 무슨 일이야? 너희

 

나는 모리의 왼손, 오른발목. 그리고 나이토의 왼발이 붉은 천으로 감싸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그들의 신체를 감싸는 천이 원래는 하얀색이었으며, 붉게 물든 이유는 그들의 피라는 것을 눈치챘다.

 

절단상이었다. 야가미는 나보다 한 발자국 먼저 그들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가 막막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미 토가: …절단된 부위는 확보해 두셨습니까?

 

이토 유즈루: 여의치 않아서 못 챙겼어. 어차피 수술해서 다시 붙일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별 수 없는 거지.

 

유즈미 나데시코: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 누가 이렇게 나쁜 짓을!

 

마유즈미가 분기탱천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리 중에서 날붙이를 가진 이는 없었고, 모리와 나이토가 서로를 맨손으로 베었을 가능성은 없었다. 당연히

 

무로 시라베: 카이다 쿠로하 짓이겠지. 이럴 사람이 그녀밖에 없어. 어디론가 날아가나 싶더니 해변으로 나와선 모리와 나이토에게 부상을 입힌 거야.

 

리 레이코: 아니. 내가 이렇게 했다.

 

기와라 우시오: 뭐?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의기소침하게 말하는 모리를 보고 하기와라는 적잖이 당황한 듯한 목소리를 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나이토의 발을 절반이나 잘라냈단 말인가? 어떻게?

 

모리의 태도로 보아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리 레이코: 내 잘못이다. 전부 내가 이렇게 만든 거야…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 정도의 훼손을

 

난 그녀에게서 평소의 의연하고 꺾이지 않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심한 부상이니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법도 했지만, 내가 분석한 바에 의하면 모리는 이런 상황일수록 몸을 험하게 쓸지언정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사람이었다.

 

그런 모리 레이코가. 나나시를 발로 걷어차려 들며 일어나라고 압박하던 그녀가. 그 정도로 위축된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 눈앞에 보고 있음에도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다. 당장 첩자를 잡아 죽이겠다며 한쪽 발로 뛰어다니기는커녕 그대로 주저앉는다니.

 

무로 시라베: 나이토. 모리가 왜 이러지?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이토 유즈루: 그게… 좀 복잡해! 얘가 이럴 만한 일들이 조금 있었어. 그게 어쩌다 보니까… 아무튼 그랬어!

 

나이토는 모리의 눈치를 보듯이 횡설수설 말했다.

 

기와라 우시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힘이 펄펄 넘치던 귀족 아씨께서 이 꼴이 됐어? 카이다가 너무 세게 때려서 머리를 다쳤나? 이보쇼. 아가씨. 이거 몇 개로 보여?

 

하기와라는 모리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두 개 올려서 보여줬다. 모리는 그의 손가락을 멍하니 보더니 손가락 세 개가 없어진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리 레이코: …난 조롱받아 마땅하다. 그게 너를 기쁘게 한다면야 계속 그렇게 해라.

 

하기와라는 얼굴을 찌푸리고선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손가락을 다시 접었다.

 

기와라 우시오: 완전히 갔구만. 이거.

 

유즈미 나데시코: 모리. 갑자기 왜 그래? 너 원래 이런 사람 아니잖아. 기운 내!

 

리 레이코: …그러지.

 

모리는 마유즈미의 말에 짧게 대꾸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수심. 무기력. 겉으로 괜찮은 척을 하지만 속은 곪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런 표정을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삶의 희망을 잃고 시들어가다가 픽 하고 죽어버리는 자들. 모리는 그들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로 시라베: 잠깐. 마유즈미. 목의 그 상처는 뭐야?

 

유즈미 나데시코: 목? 상처?

 

마유즈미가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쓱 훑자 피가 손 끝에 묻어나왔다.

 

유즈미 나데시코: 와아아악!!

 

이토 유즈루: 그건 카이다가 그런 거야… 걔를 인질로 잡더니 목을 조금 그었어. 마지막엔 화들짝 놀라면서 놓아 줬지만.

 

무로 시라베: 화들짝 놀라? 뭐에 화들짝 놀랐다는 거야?

 

기와라 우시오: 마유즈미 머리 냄새?

 

유즈미 나데시코: 난 머리에서 냄새 안 나거든!

 

마유즈미는 잠시 목의 상처를 잊고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리 레이코: 우리도 모른다… 방금 그걸 못 봤냐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더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로 시라베: 듣기로는 나도 마찬가지야. 놓아 줬다면 다행이지. 목의 상처는 깊지 않아… 피도 멎은 것 같은데. 마유즈미. 잠시만 기다려. 두 사람의 상태가 먼저야.

 

유즈미 나데시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일단 상처 부위를 보자.

 

나는 나이토의 발에 감겨 있는 셔츠를 풀고 상처를 보았다. 발이 통째로 절단된 끔찍한 상처였다. 모리가 손가락과 발목을 잃은 것 또한 나이토와 똑같은 요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로 시라베: 대체 뭐에 당했길래 이렇게 된 거야?

 

이토 유즈루: 가재 괴물이야. 저것들 얕잡아보면 안 돼. 망할… 앞으로 두 발로 걷긴 글렀다니 믿기지가 않아. 아픈 건 둘째 치고… 무에타이를 영영 할 수 없다니.

 

리 레이코: 미안하다

 

불치병 환자가 마지막 숨을 내뱉듯이 모리가 말했다. 그녀는 나이토를 거의 바라보지도 못했고, 바라볼 때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은 고통도 나이토를 향한 반감 때문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정확히 무엇인지는 나도 읽을 수 없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나이토는 읽어낸 것 같았고. 그리 긍정적인 내용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는 모리를 달래듯이 허둥지둥 말했다.

 

이토 유즈루: 아니 너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왜 그래. 분위기 이상해지게. 상심 마. 응?

 

유즈미 나데시코: 이… 일단 붕대를 갈면 되나?!

 

마유즈미는 모래사장에 내려놓은 구급상자의 뚜껑을 열고 안을 뒤적였다. 섬유 뭉치가 그녀의 손에 들려 나왔다. 나 또한 응급처치에 필요한 물건들을 살펴보았으나 나온 물건들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무로 시라베: 구급상자에 왜 칼이 들어있는 거지? 이해가 안 돼. 심지어 항생제도 없잖아… 이게 구급상자라니.

 

대몰락 이후의 세계이기 때문일까. 많은 제약회사가 사라지고 약품의 공급이 충분하지 않았을 테니 이해는 되었지만, 칼이 들어있다니

 

청소년들을 위한 호신 무기를 지원해준 것일지도 몰랐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에겐 좋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칼을 들고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지 다른 이들을 돌아보며 무언의 질문을 던졌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유즈미 나데시코: 음… 뭘 하면 돼?

 

아무런 일 없다는 듯한 마유즈미의 물음으로 말미암아 결론이 내려졌다. 보류.

 

무로 시라베: 일단 지혈대를 사용하자. 하기와라. 잠시 작은 나뭇가지를 몇 개 꺾어와 줘.

 

기와라 우시오: 에이. 썅! 카이다 무서운데!

 

나이토가 셔츠를 사용해 임시적으로 지혈을 했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나는 붕대를 절단 부위의 5cm 이내에 맨 후 나뭇가지로 빙빙 꼬아 혈관을 압박했다. 지혈대를 사용하면 절단된 신체부위를 붙이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으나 재봉합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니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무로 시라베: 다음은 흐르는 생리식염수로 상처를 씻어낼 거야. 아파도 참아야 해. 곧 더 아픈 걸 경험해야 할 테니까.

 

이토 유즈루: 하… 그래. 한 번 가자고. 의연하게 버텨낼 테니까.

 

나와 하기와라는 모리를, 야가미와 마유즈미는 나이토를 맡았다. 나는 나이토의 셔츠를 모리의 발목에서 벗겨내고 생리식염수를 절단면에 졸졸 흘려보냈다. 모리의 몸이 잠시 흠칫하며 떨렸다. 그러나 소리는 없었다. 가공할 만한 정신력으로 고통을 참아낸 것인지 소리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좌절한 것인지. 난 구분이 되지 않았다. 손가락에 생리식염수가 흐를 때에도 모리는 표정을 찌푸릴 뿐이었다.

 

가미 토가: 참으세요. 나이토 씨.

 

이토 유즈루: 씁…  이것보다 더 아프다고…?

 

유즈미 나데시코: 저기많이 아파?

 

이토 유즈루: 그래. 상처가 더럽게 따끔거려… 가 아니라. 이 정도는 참을 만 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어.

 

무로 시라베: 다음은 소독약을 바를 거야. 포비돈 요오드를 상처에 바르면 돼.

 

기와라 우시오: 이건 진짜 따끔합니다. 잘 참으세요~?

 

하기와라가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며 나는 모리가 잘린 발목으로 발차기를 날리지는 않을까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다.

 

리 레이코: 윽

 

그녀의 작은 신음은 나이토의 우렁찬 목소리에 가려졌다. 그는 자신의 몸을 붙들고 있는 마유즈미가 잠시 몸을 크게 휘청일 만큼 버둥거렸다.

 

이토 유즈루: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유즈미 나데시코: 꺄아아악?!

 

무로 시라베: 의연히 버티겠다면서. 나이토.

 

이토 유즈루: 아니! 미친! 이건 안 돼애애애애! 미친 불에 타는 것 같아!

 

나이토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고 그의 팔은 청바지를 찢어버릴 기세로 자신의 허벅지를 붙들었다. 이를 악문 그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로 시라베: 엄밀히 말해서 비슷한 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맞아. 요오드는 세포막의 구성 단백질을 산화시켜 세포막을 파괴하거든. 그러니 불타는 느낌이 드는 거야.

 

기와라 우시오: 참 도움이 되네요! 아무튼 이 쪽도 손가락에 소독약 바르고… 자. 끝이야.

 

리 레이코: ….

 

모리는 계속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고통에 약간 익숙해진 눈치의 나이토가 막막한 듯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이토 유즈루: 설마 이다음에 더 아픈 게 있냐? 시발. 차라리 기절시켜 주라.

 

무로 시라베: 그건 어려울 것 같고. 진통제가 있는데 복용하겠어?

 

나이토는 망설이는 표정을 짓다가 당찬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저… 나이토. 많이 아프면 그냥 멋진 척하지 말고 먹는 게 나을 것 같아.

 

이토 유즈루: 멋진 척이기도 하지만 이건 그냥 내 고집인데… 옛날에 나나시랑 모리랑 불침번 설 때 나왔던 얘기거든. 뭐냐면

 

리 레이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수단을 사용하다 보면, 그 수단이 떨어졌을 때 고통을 버틸 수가 없게 된다그러니 고통을 피하지 않고 기사답게 맞서야 한다… 였던가.

 

모리의 말에 나이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토 유즈루: 그러니까 나는 안 써. 어이없는 고집처럼 보이겠지만… 나한텐 중요한 일이야.

 

리 레이코: 진통제의 사용은 나도 거부하겠다. 이유는 묻지 마.

 

무로 시라베: 너희 자유지. 알겠어.

 

모리와 나이토의 상처 부위에 거즈를 대고 깨끗한 붕대를 감는 것으로 응급처치는 마무리되었다. 그 모든 과정은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면서도 매우 길게 느껴졌다. 마유즈미는 응급처치가 끝나자마자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고 시름시름 몸을 휘청였다.

 

유즈미 나데시코: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힘들지

 

기와라 우시오: 글쎄. 시련 속에서 카체이스 한 판 해서 그런 거 아니야? 몸은 안 피곤해도 정신은 존나 지친 거지. 나도 그렇고.

 

무로 시라베: 세 번째 시련은 이것보다 덜 험난하면 좋겠는데 말이야.

 

가미 토가: …세 번째 시련하니까 말입니다. 저희. 이제 어떻게 하죠?

 

이토 유즈루: 어떻게 하냐니. 하던 대로 하는 거지. 세 번째 시련까지 가서

 

가미 토가: 어떻게 갑니까?

 

정적이 있었다.

 

가미 토가: 지금 두 분이 안정을 취하는 것은 별개로 놓죠. 절단상을 당하셨으니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이 근처에서 야영을 계속해야 할 겁니다. 식수와 식량은 어떻게든 구할 수 있겠죠. 그렇지만 그 뒤에는 어떻게 할 겁니까?

 

가미 토가: 나이토 씨와 모리 씨는 이제 혼자만의 힘으로 걸을 수 없습니다. 목발을 사용하신다고 해도 예전만큼 빠르게 가실 순 없어요. 저희의 속도도 그만큼 지연될 것입니다.

 

유즈미 나데시코: 미리 말하는데 두고 가는 건 안 돼.

 

마유즈미가 목소리를 크게 냈다.

 

기와라 우시오: 어떻게 두고 가? 지금 둘이서 2인2각하게 생겼는데.

 

가미 토가: 당연히 두고 갈 순 없죠. 그러니 속도가 지연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목발이 오지 않을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세요. 저흰 두 분을 들쳐 매고 세 번째 시련까지 가야 하는 겁니다.

 

리 레이코: 애초에 목발이 오지 못할 수도 있다.

 

무로 시라베: 크레딧 상점 목록에 목발이 없으면 그렇게 되겠지.

 

모리는 아주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리 레이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우리를 도우려는 어떤 물품도 내려오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식사를 포함한 모든 것이.

 

내가 반문하기 전에 모리는 주장의 논거를 천천히 말했다.

 

리 레이코: 이름 없는 남자가 내게 보낸 쪽지에 의하면, 첫 번째 시련이 끝난 뒤 크레딧 상점에 새로운 물품이 추가되었다. 그중 하나가 인플레이션의 권리이다. 그것을 구매한 두 사람이 동의하면, 물건을 사는 데에 드는 크레딧의 양이 현저히 늘어나게 돼지. 크레딧을 많이 확보한 자가 그러지 못한 자보다 월등한 우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무로 시라베: 쪽지?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리 레이코: 긴 이야기다. 

 

난 긴 이야기를 보았다.

 

노네임은 울음을 그친 뒤에 잔뜩 화가 난 듯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몇 년 동안 우리 참 열심히 했지. 주위에서 아무리 너랑 날 보고 별종이라 욕해도. 목표 하나만 보고 달려왔어. 정말정말 열심히 했다고."

 

"네 마음 나도 알아."

 

"정말정말 열심히 했어 그런데 그 노력이 다 무슨 소용이야? 결국 우리 연구는 의미 있는 결과를 내지 못했어. 그게 다야…"

 

"괜찮아. 더 노력한다면"

 

"난 안 괜찮아! 안 괜찮다고! 이게 탈무드야?! 남자와 여자는 서로 소중한 물건을 잃었지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이런 얘기 같아?! 고작 그 정도 교훈으로 웃고 넘어갈 순 없다고. 우리는 그것보다 더 나은 걸 얻을 자격이 있었어! 너에겐 몸을 되찾을 자격이 있었다고!"

 

인공지능은 소리치는 노네임을 보고선 눈을 지그시 감고 침묵했다. 분을 못 이기고 씩씩거리는 노네임에게, 인공지능은 정적 뒤에 결국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또 그 얘기야…? 괜찮다니… 그건 아니야. 넌 괜찮으면 안 돼.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어…? 나는 안 괜찮단 말이야…"

 

"인간의 몸이 없는 것뿐이야. 나는 예전과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잖아. 우리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

 

"틀렸어… 인공지능. 너무 많이 바뀌었어. 너도. 나도 말이야."

 

나시: 잠깐. 인공지능이라니

 

방금 전까지 노바디라고 불렀으면서… 왜?

 

"그날 뒤로 모든 게 달라졌다고."

 

서러운 듯이 외치는 노네임은. 여전히 울고 있었다.

 

내 기억 속은 기이한 공간이었다. 시간이 휙휙 제멋대로 지나갈 때가 있는가 하면 지나가긴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천천히 흘렀다. 몇 시간이 지나고 체감상 거진 하루가 지났는데도 난 여전히 기억 속에 있었다.

 

23T의 전용실에서 영상을 보았을 때 나는 과거를 꽤 오랜 시간 동안 보았음에도, 현실에선 몇 초조차 흐르지 않았다. 그것과 비슷한 현상이 내 기억. 꿈의 세계 속에서도 벌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시: 저 곧 깨어날 수 있겠죠? 

 

나즈키 시노부: 지금 너라면 오히려 깨어나지 않길 바라는 게 낫지 않겠니? 이곳에서 더 많은 기억을 떠올려야 할 테니까.

 

나시: 그래도 여기에 계속 있을 순 없잖아요. 떠올리면 뭐 해요. 되살아나지 못하면 그냥 죽는 것과 마찬가진데

 

나시: 뭣보다 제가 여기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몰라요. 모리가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니터실 안의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몰라요.

 

나즈키 시노부: 내가 너라면 깨어나고 싶지 않을 게다. 탑은 잔혹한 장소야. 일찌감치 안식을 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탑은 네가 쉬게 두지 않겠지만.

 

노네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인공지능에게 사람의 몸을 되돌려주는 일은 불가능하단 걸 알게 되자마자 기관 내에서 노네임의 평판은 점점 떨어져 갔다.

 

가십이 쌓여 탑이 되었다.

 

"기관의 시초를 이끈 사람이었다는 말은 진짜인 것 같아. 그래서 노네임이라고 불렀더니 왜 날 그렇게 부르냐고 화를 내더라니까!"

 

"그 사람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점점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기도 하고… 매사에 날이 선 것처럼 보여서 말도 제대로 못 걸겠더라고요."

 

"친해지려고 해도 마음을 안 여셔. 늘 그 로봇이랑만 함께 다니신다고. 실력은 확실하시지만…"

 

"아닌데? 요즘에는 그 로봇이랑도 사이가 그렇게 좋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어."

 

"그럼 대체 그 사람은 누구를 가까이하려는 거야? 대체 우리를 왜 멀리하는 건데?"

 

기관 내에서 노네임은 설계도를 그리고, 그 설계도를 바탕으로 기계를 만들어냈다. 그가 원하는 정보를 얻지는 못했지만 계약은 계약이었다. 그 일을 원하는 것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생기를 잃은 얼굴로. 의무적인 동작으로 업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그가 인공지능과도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노네임이 그나마 순하고 친근한 태도를 보이던 대상이 인공지능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노네임은 인공지능에게서 멀어졌다. 말을 거는 것을 꺼리더니, 말을 걸지 않으려 애쓰다가. 결국에는 눈길도 주지 않으려 애썼다.

 

보는 입장에서는 대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공지능을 무심코 볼 때마다 노네임의 얼굴에는 우울감과 근심이 차올랐다. 인공지능이 왜 그러냐고 물어도 노네임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 하는 순간 다시 들어가 버리는 것처럼. 그는 인공지능을 외면했다.

 

한 번은 인공지능이 그것을 견디다 못해. 자신을 피하는 노네임의 시선을 집요하게 따라간 적도 있었다. 그러자 노네임은 인공지능을 바라보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결국 몇 바퀴를 돈 뒤에야 노네임은 그 어이없는 상황에 서글픈 웃음을 토해내고 무릎을 굽혔다.

 

"왜 이러는 거야? 그래서 좋은 일이 있어. 노네임?"

 

노네임이라는 이름을 듣자, 노네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인공지능을 보았다. 형연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약간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당황하기도 했으며,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부를 거야. 네가 나를 노바디라고 불렀던 것처럼 나도 널 노네임이라고 부를 거야."

 

"그건 잘못 부른 거야… 널 그렇게 부를 생각은 없었어."

"어째서?"

 

루미나미 나몬: 아.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오. 잔혹한 세상이여! 흔들리는 촛불이여. 차라리 꺼져라!

 

후루미나미는 드라마틱하게 팔을 벌리며 탄식했다. 모니터에는 나이토의 발이 잘리는 장면이 나타났다. 카이다가 죽지 않을 것이 확실시되자 카나리의 이기심 아래에 짓눌려있던 도덕심의 싹이 고개를 들었다. '저건 심하지 않나? 저건 너무한 일이잖아.' 그리고 다음 순간 싹이 짓밟혔다.

 

나리 케이토: 야. 언제까지 여기서 구경만 할 거야? 빨리 도망쳐야지!

 

나즈키 시노부: 이름 없는 남자 조금만 더 살피고 가면 안 돼? 나 막으려다 이렇게 된 거라서 그냥 가기는 좀 미안한데

 

나리 케이토: 착한 척 마! 여기에 더 있어봤자 아무것도 못 해주잖아. 그냥 버려!

 

나즈키 시노부: 알겠어… 나중에 개인적으로 도와주는 거로. 그럼.

 

루미나미 나몬: 진짜 멋있었는데… 용감하게 바다에 뛰어들어서 모리를 구해냈는데! 저런 불의의 사고를 당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아. 너무 잔혹해. 이제 나이토의 멋있는 모습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거야. 아아!

 

바라 쿠리스: 너 진짜 제정신이야? 나이토를 보고 드는 생각이 그거라니. 완전 인간말종이잖아!

 

후루미나미는 가방에서 양말을 꺼내 자신의 손에 씌웠다. 양말에는 인형 눈이 두 개 붙어 있었다. 그 상태로 손을 움직이자 귀여운 캐릭터가 쫑알거리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루미나미 나몬: 인관말좡이좌나~ 블라블라블라. 신경 안 쓰네요. 살인 게임이면 원래 이렇게 하는 거 몰라?

 

바라 쿠리스: 으엑. 기분 나빠…! 맨날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산다니. 밤에 발 뻗고 잘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잖아. 그딴 식으로 정당화나 하고… 최악.

 

나리 케이토: 그만 하고 가자니까! 전략을 세워야 할 거 아니냐고!

 

카나리의 다급한 말에 후루미나미는 흥이 깨진 듯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결국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니터실에서 줄행랑을 쳤고 그 바로 뒤를 칸나즈키가 따랐다.

 

나리 케이토: 가. 같이 가!

 

자신이 혼자 남겨진 걸 뒤늦게 안 카나리는 허겁지겁 모니터실에서 나갔다. 모니터실의 안에 남은 것은 정신을 잃은 나나시. 그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캐롤. 긴장이 풀리자 털썩 주저앉은 이바라. 그리고 잔뜩 퀭해진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는 토키와 뿐이었다.

 

키와 아유키: 크레딧 상점… 크레딧 상점을 제일 먼저

 

토키와는 조금씩 떨려오는 손으로 다이얼로그를 쥐고 그의 딴에는 가장 빠른 속도로 크레딧 상점에 새로 들어온 상품들의 목록을 둘러보았다. 두 번째 시련이 끝났으니 첫 번째 시련에서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물품이 들어왔을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인플레이션이 적용되고 있더라도 그의 자금 안에서 구매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유용한 물건이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토키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기관총이었다.

 

3000만 크레딧으로 살 수 있는, 그러나 이미 품절된 기관총.

 

모리의 이야기가 끝나자 나를 포함한 해변의 모두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두 명이 중상을 입었고 언제 회복될지 알 수 없는데. 도움은 언제 올지 모른다. 그 사이 카이다는 세 번째 시련 속으로 들어가 그 안의 미도리카와를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아얏. 아야… 익. 따가

 

무로 시라베: 조금만 참아. 당분간은 물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고.

 

유즈미 나데시코: 알겠어요. 히무로 선생님

 

소독약과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자 마유즈미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피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성 싶었다. 카이다에겐 이 일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있었지만, 과연 해변에서 다시 그녀와 만날 수 있을지조차 내게는 미지수였다.

 

무로 시라베: 흑막의 입장에선 어느 편이 유리할까? 우리 중 누군가가 죽어서 학급재판이 열리며 세 번째 시련에 참가할 기회도 없어지는 것. 혹은 카이다가 세 번째 시련에 진입해서 미도리카와를 죽이고 해변의 모두가 탑으로 돌아가는 것.

 

가미 토가: 아마 전자겠죠. 모노로그 씨는 이 살인 게임으로 무엇을 이루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살인 게임 자체가 목적인 것 같았어요. 저희가 죽고 죽일 경우 모노로그 씨에게 어떤 이점이 생기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모노로그 씨라면 살인이 벌어지길 바랄 겁니다.

 

리 레이코: …누군가 한 명 죽어야 한다는 얘기군.

 

기와라 우시오: 결과적으론 두 명이지. 피해자 하나. 검정 하나.

 

리 레이코: 그건 모를 일이다.

 

모리의 목소리는 불길함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결코 그녀를 오래 보지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봤던 모리 레이코 중에서는 손가락과 발목이 잘린 모리가 가장 의기소침했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사실 이해되지 않는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공리를 중요시하고, 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 행동해왔다. 초고교급 철학자라고 불릴 정도라면 그 집착에는 별다른 증명이 필요 없을 터였고. 그럼에도 그녀는 수 없이 증명했다. 공리를 위해 그녀는 온갖 무모한 짓을 저질러왔다.

 

남에게 설교를 하고 계도하려 드는 그녀의 성향은 자신이 공리를 증진시키고 있다는 믿음과 자신감으로 스스로를 긍정하는 것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카이다를 죽이려고 든 것 또한. 자신이 처형당할 것을 알면서 그렇게 행동한 것 또한 공리를 증진시킨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리는 다른 이들보다 자신에게 공리의 규칙을 더 엄격하게 적용해왔다. 그녀를 가장 괴롭게 만드는 것은 그녀의 부상이 아니라 그녀의 생각이었다. 공리를 증진시켜야 할 자신의 살인 시도가 최악의 훼손으로 돌아오자 그녀를 구성하던 모든 체계는 한순간에 부서져버렸다. 애석하게도 내가 도울 방법은 없었다. 철학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이상. 곁에서 아무리 응원하고 위로해봤자 그녀 스스로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토 유즈루: 불길한 소리 마. 살아나갈 방법을 생각해야지.

 

유즈미 나데시코: 맞아. 나도 제정신을 차려야겠어… 살아남아야지!

 

마유즈미는 두 주먹을 꽉 쥐고 허공에 휘둘렀다.

 

기와라 우시오: 사망 플래그는 거기까지 세우고. 모리. 잠깐 묻자. 나나시가 너한테 쪽지를 보냈댔지?

 

리 레이코: 그렇다.

 

기와라 우시오: 그런데 지금 나나시에게선 쪽지가 안 오고 있어. 왜야?

 

리 레이코: 나도 알 수 없다. 이름 없는 남자는 첩자를 죽이는 일에 동의했는데, 그녀를 놓쳤음에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같은 지시가 내려오지 않고 있다.

 

무로 시라베: 나나시가 동의했다고?

 

리 레이코: 동의한 것만이 아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나를 도왔다. 카이다 쿠로하의 몸을 싣고 바다로 들어갈 수 있을만한 수레까지 보내줬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확률은 무척이나 적었다. 마유즈미 또한 내 의견에 동의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그건 좀 이상해. 나나시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닌데

 

기와라 우시오: 좀이 아니라 존나 이상하지. 나나시는 사람 죽이고 발 뻗고 잘 만한 깜냥이 안 되는 사람이야. 아마 누구랑 말싸움하면 내가 너무 심하게 말한 건 아닐까 자기 전에 고민하는 타입일 걸. 걔가 적극적으로 도운다니 말이 안 돼.

 

기와라 우시오: 정말 나나시가 보낸 쪽지 맞아? 쪽지 아직 가지고 있어?

 

리 레이코: 그래. 여기에 있다.

 

모리는 트렌치 코트의 품 속을 뒤적인 끝에 쪽지 두 장을 꺼냈다. 한 장은 평범한 흰색 종이인 데에 반해 나머지 한 장은 구깃구깃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내가 읽어봐도 될까?

 

리 레이코: 필적 감정인가. 얼마든지.

 

모리에게서 종이를 건네받은 마유즈미는 3초도 채 지나지 않아서 외쳤다.

 

유즈미 나데시코: 다른 글씨체잖아! 누가 봐도 다른 글씨체인데!

 

무로 시라베: 그렇지만 본 사람이 착각하기에는 충분하지.

 

기와라 우시오: 잠깐. 잠깐… 정리하자. 모리한테 다른 사람이 쓴 쪽지가 왔다는 건. 모리한텐 두 명의 후원자가 붙었단 얘기지? 나나시랑 다른 한 사람.

 

가미 토가: 그렇게 되겠죠.

 

하기와라는 자신의 턱을 붙잡고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않고 조각상처럼 얼어붙었다.

 

가미 토가: 느닷없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십니까.

 

야가미의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하기와라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기와라 우시오: 내가 지금 뭘 따라 하고 있게?

 

무로 시라베: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야. 하기와라.

 

기와라 우시오: 반대지. 인마. 이럴 때일수록 농담할 때인 거라고. 지금 초상집 분위기인데 니들도 지금 이게 좋아? 나 밖에 농담을 할 사람이 없잖아. 아무튼 스피드 퀴즈. 똑딱똑딱똑딱똑딱. 정답 안 맞히면 말 안 해 줘요!

 

가미 토가: 완전히 시간 낭비군요.

 

이토 유즈루: 아니 힌트를 더 주던가 맞추든 말든 하지! 그 포즈 하나로 어떻게 맞춰?

 

기와라 우시오: 맞춰 보라니까? 최선을 다해 봐! 귀족 아가씨! 이게 뭐일 것 같아? 응? 이거 안 맞추면 개쩌는 아이디어 하나가 그대로 묻혀 버릴 텐데 할 말 없어?

 

리 레이코: 나 또한 모르겠군.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한다.

 

모리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 없이 공허하게 누워 있었다.

 

기와라 우시오: 지랄 나셨어요. 참.

 

무로 시라베: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신곡을 주제로 한 지옥의 문 가운데에 자리 잡은…

 

유즈미 나데시코: 정답! 어… 히무로?!

 

기와라 우시오: 정답이다! 서예가! 마유즈미 없었으면 너희 다 어쩔 뻔했냐! 이래서 유머감각을 가진 친구들이 중요하다니까.

 

하기와라는 과장되게 박수를 짝짝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해변에 남은 사람들 중엔 웃을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나와 모리, 야가미는 늘상 진중한 편이었고 나이토 역시 특출 나게 유머를 즐기지는 않았다. 카이다는 내통자인 데다가 우리에게 적대적이었으니 남은 것은 가장 낙천적이고 잘 들뜨는 마유즈미뿐이었다.

 

나는 그들의 역할을 이 살인 게임에서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저 둘마저 침울했다면 우리는 끊임없는 우울과 고민. 딱딱한 논리와 어두운 전망 속에서 닻처럼 끊임없이 침전하게 되었을 테니.

 

유즈미 나데시코: 나도 한 건 했다! 하하하… 하

 

멋쩍게 웃는 마유즈미를 보고 나는 두 명의 노고를 존중하기로 했다.

 

무로 시라베: 일리 있는 답이긴 했어. 하기와라. 재미있었어.

 

기와라 우시오: 맘에도 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내 말 들어봐. 모리의 후원자가 두 명이라는 건. 한 경주마한테 두 명의 후원자가 붙는 일도 가능하단 거잖아.

 

유즈미 나데시코: 맞아.

 

기와라 우시오: 카이다까지 포함해서 해변의 인원은 7명이야. 그런데 탑에 있는 사람은 8명이지. 이바라. 나나시. 캐롤. 후루미나미. 카나리. 토키와. 23T. 칸나즈키. 그런데 모리한테 두 명의 후원자가 있다는 건 다른 사람한테도 후원자가 있을 수 있다는 거고.

 

무로 시라베: …반대로 후원자를 가지지 못한 경주마가 있을 수도 있단 거구나.

 

기와라 우시오: 그리고 그 사람이 야가미 너 아니야?

 

가미 토가: 아뇨. 제게도 후원자가 있습니다.

 

야가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나도 있어!

 

이토 유즈루: 밥 보내주는 사람이면 나도 있는데.

 

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가 내게 후원하는 것만큼은 확실해.

 

기와라 우시오: 뭐? 나한테도 있는데. 카이다는 뭐 존나 세니까 한 명쯤은 붙었을 테고. 스테이크 보낸 거 생각하면 분명 있겠지. 그럼 모리에 두 명. 나머지에 한 명 씩인가…? 에이. 기껏 세운 가설인데 조또 의미 없어졌네.

 

기와라 우시오: 그보다 야가미 계속 지지하는 새끼 대체 누구야? 살인자를 왜 자꾸 감싸줘!

 

무로 시라베: 확실히 의아해. 아무리 급작스럽게 정해진 후원자와 경주마라고 해도 야가미가 살인자인 이상 거부감을 느꼈을 텐데. 거짓말 아니야? 야가미.

 

가미 토가: 거짓말을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말 그대로 메리트가 없습니다. 그보다 결국 이 대화의 결론은, 우린 살아남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러나 세 번째 시련으로 가는 일은 무척 어려울 것이다. 인가요?

 

무로 시라베: 그렇지.

 

두 번째 시련으로 들어가기 전에는과는 상황이 너무나도 달라져버렸다. 이제 해변의 모든 인원은 큰 역경 속에 놓였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피를 머금은 모래를 내려다보며 나는 생각했다.

 

"디드. 어. 치크?"

 

"덤. 어. 첨?"

 

"대드. 어. 챔?"

 

"데드. 어. 체크?"

 

저것들은 우리에게 줄곧 질문을 던졌다. 저 생물들만의 언어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해석할 방법은 없었다. 의문문밖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가 있을 리 없었으니.

 

해석할 수 없음에도 내게는 저 음성이 조롱처럼 들렸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니? 어떻게 이렇게 되었니? 라고. 우리를 보며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문득 탑에서 나나시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프로젝트. 강경파와 온건파의 합작. 살인자 메리.

 

대몰락 이후. 정당방위로 남을 사살한 자들은 살인자로 취급받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목숨의 위협을 빈번히 겪었기에 모든 살인을 동등히 취급할 수가 없었다. 나는 메리의 모든 것을 전부 알지는 못했다. 알았더라도 기억을 잃었을 터였다.

 

그러니 곧바로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늘 그렇듯이 판단 유보였다. 표본이 쌓이기 전까지는… 그렇다면 어째서 나나시와의 대화를 떠올렸는가? 바로 내가 카이다를 죽이려는 모리를 방관한 장본인이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장려했다면 장려했다.

 

내가 두 번째 시련 속에 있어 그녀를 막지 못했더라고 해도, 내 의도만큼은 카이다를 죽이려는 쪽으로 쏠렸다. 만약 카이다가 정말 죽었다면 나는 그 선택을 후회했을 것인가. 아니었다.

 

저지른 것은 모리지만 그것을 방조한 것은 우리였다. 인식하지 못했더라도, 그 순간 시련 속의 모두는 '살인자' 가 된 셈이었다.

 

어쩌면 그런 관념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이 중에 살인자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무조건 생기리라고 나는 거의 직감했다. 모리의 말에 따르면 더 이상 탑에서 해변으로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모리와 나이토의 회복이 언제까지 걸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과연 모두가 제정신을 유지할 것인가?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일은 막아야만 했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미도리카와가 잡고 있던 44mm 매그넘을 자켓의 품 안에 숨긴 채. 나는 언젠가 나타날 카이다에 대해 생각했다.

 

 

 

 

 

 

 

이번 편 오래 걸린 거 진짜 죄송합니다 개강이랑 후두염 걸려서 먹는 약기운 나른함이 겹쳐서… 라고 하기엔 그냥 요즘 게임이 재밌기도 했음 죄송합니다… 백신을 맞았지만 타워는 계속됩니다

 

과연 제대로 좌절해버린 모리코인은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