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그녀가 성인이리라 생각했다. 178cm의 장신. 쉰 듯이 들리는 목소리. 할로윈 상점에서 가져온 듯한 스크림 가면은 흠이었지만, 그녀는 충분히 성인처럼 보였다. 애초부터 그녀는 스스로 차를 몰고 부두에 나타났던 것이다.
포터 트럭. 7개의 우리. 안에는 야생동물이 들어 있었다. 어디서 가져왔냐는 물음을 들었을 때 그녀는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창살로 어느 것은 유리로 이루어진 우리 안에는 희귀하고 구하기 어려운 동물종이 들어 있었다. 고라니, 난쟁이악어, 천산갑, 딩고, 사향노루, 바다이구아나, 그리고 바다뱀.
거래해서는 안 되는 동물들 뿐이었다. 경찰마저도 돈에 매수되는 부두에. 총을 가진 채 그녀가 나타났다. 전조도 없이 나타난 그녀는 자신이 가져온 희귀한 동물들을 거래하겠다고 말했다. 모두가 그녀를 우습게 보았다. 쥐도새도 모르게 바다에 담그면 희귀 동물들은 전부 한량이 될 처지에 있었다. 미친개 따위의 별명을 지닌 필부들이 칼을 번뜩이며 그녀에게 다가갔으나, 그녀는 개중 머리 노릇을 하는 한 남자를 귀신같이 찾아내어 총을 들이댔다. 이윽고는 그들을 물리쳤다.
그녀는 쉽게 거래하지 않았다. 우리 속 동물들이 지쳐가고 시름시름 앓는데도 차라리 죽는 편이 나으리라는 투였다. 그녀는 몇 시간동안 쉬지 않고 포터 트럭 옆에 서 있었다. 어차피 동물의 가치를 아는 자들은 그것들이 우리에서 죽기 전에 찾아와 거래를 하려 들 터니, 너희만 손해라는 식이었다. 그녀는 동이 트기 전 팔리지 않는 생물들은 전부 바다에 던져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쳤다. 주저하던 이들 사이로 새벽에 점점 소문이 퍼졌다. 그녀는 약재에 관심이 있는 이들, 동물의 가치에 관심이 있는 이들, 애완동물을 원하는 이들을 상대했고 그들 모두를 상대로 에누리 없는 거래를 진행했다. 차고 남을 정도의 값을 받아낸 것이다. 원래부터 부두에 속했던 것처럼 차가우며 오만한 티를 내는 그녀는, 아무리 봐도 외지인임에도 그곳에 자리를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동이 텄으나 바다뱀이 남았다. 그녀는 바퀴가 달린 수조를 포터 트럭에서 끌어내리더니 부두를 향해 밀어버렸다. 그렇게 바다뱀을 풀어주었다. 그녀는 새벽 사이에 마련한 목돈을 가진 채 능숙하게 차를 몰아 부두를 떠났다. 왜인지 훨씬 빠른 차를 가진 이들도 그녀를 찾지 못했다. 중간에 사라진 것만 같다고 그들은 말했다.
과연 그 정체가 무엇이고 어떻게 멸종 위기에 있는 희귀한 동물들을 가져온 것인지. 소문이 돌았다. 그녀가 동물원 주인의 딸이라는 이야기, 동물학자라는 이야기, 밀렵꾼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중 무엇도 사실이노라 확실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녀는 밑천을 마련해 부두를 떠났으며, 한 번 더 포터를 타고 왔을때는 그곳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동물을 팔고 샀으며, 발을 넓혔고, 동물보다 거래해서는 안 되는 것들까지 취급하며 몸을 키웠다. 모두 그녀가 최소 스무살 중반이리라 여겼지만 사실 그녀는 고등학생의 나이였다.
합의한 적은 없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바다뱀이라 불렀다.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나나시: 후루미나미! 할 얘기가 있어!
나는 호기롭게 모니터실의 문을 열고 외쳤다. 후루미나미는 내 쪽을 보고 무언가를 말했으나 그녀의 말은 테이프에 막혀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읍. 으읍. 읍?
토키와 아유키: 나나시. 왔구나. 지금 큰일이야. 모리가 카이다를 죽이려…
나나시: 그걸 해결할 방법이 후루미나미에게 있어. 잠깐 테이프 좀 뗄게!
후루미나미 나몬: 읍. 으으읍?
토키와의 허락을 구할 때가 아니었기에 나는 후루미나미의 입에서 테이프를 단번에 쫙 뜯어냈다. 후루미나미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약간 빨개진 입으로 비명을 질렀다.
후루미나미 나몬: 기야아아아악! 아파아아!
나나시: 미안한데 지금 당장 물어야겠어. 후루미나미! 보급 특권에 너 말고 접근한 사람이 또 있어?
후루미나미는 눈을 크게 뜨고 깜빡였다.
후루미나미 나몬: 내 보급 특권에 접근한 사람? 그런 사람을 찾는 거라면 제대로 찾아왔어. 내가 그 자라면 잘 알지.
나나시: 그게 누구야?!
후루미나미 나몬: 너.
후루미나미는 내 얼빠진 표정을 보고선 키득키득 웃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크흐흐. 네가 보급 특권이라는 말을 쓰면서 나한테 다가오는데 알 수밖에 없지!
나나시: 그건 당연한 얘기고! 아무튼 나 말고 또 누가 보급 특권에 대해 알고 있어? 너는 묶여 있잖아. 나는 아무것도 안 했고! 그럼 네 보급 특권에 대해 아는 누군가가 있어야 해!
이바라 쿠리스: 나나시. 갑자기 왜 그래?
토키와 아유키: 보급 특권? 그게 뭐야? 느닷없이 후루미나미의 테이프도 떼고…
후루미나미 나몬: 모노로그가 제공한 크레딧 상점에 국한되지 않는, 자기 재량대로 경주마에게 보내주고 싶은 물품을 보낼 수 있는 권리야. 내가 모노로그에게서 샀지.
토키와는 후루미나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눈치였다.
토키와 아유키: 그런 게 있었다고?! 나나시. 저걸 미리 알고 있었다면 왜 우리에게 말을 안 한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나나시는 현명했어. 너희들 중 내게 일러바칠 배신자가 있을 가능성을 상정하고 홀로 칼을 간 거야. 칭찬해주지 그래? 잘 했어 나나시!
후루미나미는 손이 풀려 있었다면 내게 박수라도 칠 것처럼 웃었다.
나나시: 안 고마워. 짐작 가는 사람 없어? 보급 특권에 대해 암시라도 준 사람이 있냐고.
후루미나미 나몬: 내가 대답 안 해 줄걸 알면서 왜 물어봐?
캐롤 브라이트: 말씀을 안 하시면 강제로라도 하게 만들 거예요.
캐롤 씨는 무릎을 굽혀 자신의 눈높이를 후루미나미와 맞췄다. 후루미나미는 약간 주춤하면서도 입으로는 피식 하고 캐롤 씨를 비웃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럴 깜냥도 없으면서. 아무튼 나나시가 여기에 달려온 걸 보니 일을 제대로 한 모양이지. 내 조력자가.
조력자…
나나시: 그러면 말이 돼. 밖에서 널 돕고 있다면… 그렇지만 내가 보급 특권에 접근한 건 어떻게 알고 보급 특권을 막아놓은 거지…?
후루미나미 나몬: 내가 만약 누군가에게 붙잡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미리 다 남겨두고 왔거든. 걔가 잘 처신한 것 같아.
나나시: …결국 네게 크게 한 방을 먹일 순 없었던 거구나.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조력자가 있어서 그 모든 일이 가능했다. 후루미나미는 모니터실 안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난 그녀를 제대로 몰아붙이지 못했다. 그게 다였다.
후루미나미 나몬: 아. 그렇게 축 늘어지지 마. 괜히 미안해지잖아! 힘내라. 힘내! 그래 봤자 내 발밑이겠지만.
나는 그녀의 입에서 떼어냈던 테이프를 신경질적으로 다시 붙였다. 후루미나미는 테이프 안에서 쿡쿡대는 웃음소리를 냈다.
나나시: 될 줄 알았는데… 하.
토키와 아유키: 상황은 대강 이해했어. 나나시… 그녀의 특권에 접근했다면. 혹시 특정한 물품을 누군가에게 후원한 거야?
나나시: …후루미나미에게서 입수한 도청기를 그쪽으로 보냈어. 전파는 계속 연결되어 있고… 여기로 통할 거야.
나는 수신기를 꺼냈다. 모니터실에 들어오기 직전 켜 놓았던 음소거 모드를 끄자 나이토와 모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토는 모리가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모리는 농담을 하는 인물이 아니었고, 할 일이 있는 상황에서 농담을 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나이토 유즈루: 이런 또라이같은… 너 진심이야?! 아무리 네가 미쳤어도 살인은 아니잖아. 너 그렇게까지 나쁜 놈은 아니잖아!
모리 레이코: 살인이 죄라 말하고 싶다면 나는 그런 도덕관념에 시달리지 않는다. 내가 피에 미친 도살자처럼 보이나? 내겐 해야 할 일이 있을 뿐이다…! 이익…
모래가 서서히 움직이며 카이다의 몸 또한 천천히, 또한 확실하게 바다를 향해 가까워졌다. 모리는 카이다가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힘이 강한 편이 아닌 모리가 옮기고 있음을 상정해도 과했다.
모리는 사람 안에 통나무가 꽉꽉 채워져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아니면 거인을 175cm의 몸으로 압축시켜 놓았던가. 아무튼 상정 이상의 몸무게였다.
"데드. 어. 체크? 디드. 어. 치크? 덤. 어. 첨?"
바닷속의 가재 괴물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며 서서히 다가왔다. 모리는 가재 괴물들에게 발로 모래를 끼얹어 쫓아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리 레이코: 저것들이 방해를 하는군… 그러나 어떻게든 될 것이다.
나이토 유즈루: 야야야야야. 내 말 좀 잠깐 들어 봐! 그런 말도 있잖아. 손에 묻은 피는 씻을 수 있어도 영혼에 묻은 죄는 씻을 수 없다!
모리 레이코: 한심한 겁쟁이가 할 법한 말이군. 어떤 천치가 그런 말을 했지?
나이토 유즈루: …내가 지어낸 거야. 지금 너 말리려고.
모리는 나이토의 말을 듣고 혀를 쯧 찼다.
모리 레이코: 설명이 되는군.
나이토 유즈루: 모리. 너 공리 좋아하는 건 나도 알아. 그렇지만 아무리 너라도 선이 있을 거 아니야. 이것만큼은 해선 안 된다는 선 같은 거!
모리 레이코: 나도 내게 주어진 선이 어디까지인지는 알지. 그리고 그 선을 고의로 넘는 게 지금 나의 의무다.
나이토 유즈루: 난 그렇게 못 내버려 둬!
나이토는 카이다의 어깨를 콱 붙들었다. 그러자 다리를 잡고 자신의 체중을 전부 쏟으며 당기던 모리는 그 자리에 턱 하고 멈춘 꼴이 되었다.
모리 레이코: 거들 생각이 없다면 놓아라. 첩자를 놓아줄 생각인가…?
나이토 유즈루: 꼭 이게 방법은 아니야. 내 말 들어 봐. 지금 네 명이랑 합류해서 시련 속 카이다를 잡으면 돼. 그럼 카이다의 몸은 뇌사하잖아! 굳이 누가 죽을 필요가 없어지지 않겠어?
모리 레이코: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라. 그게 카이다라고 해도 누군가가 뇌사하는 꼴을 네가 두고 볼까?
모리 레이코: 네 무분별한 울타리는 상담사의 사람을 가려 받는 문보다 더하다. 상담사의 것은 사람을 가려 받기라도 했다. 도울 수 있는 이는 첩자라도 돕고 볼 너와는 달라.
나이토는 그녀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는 거의 상상할 수도 있었다. 만신창이로 피를 흘리는 카이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숨통을 끊으려는 세 명. 히무로 시라베. 야가미 토가. 그리고 모리 레이코.
"잠깐 기다려." 나이토가 그 앞을 가로막을 것이다.
"비켜." 세 명은 동시에 말하겠지. 하기와라는 지랄 말고 비키라며 웃을 테고 마유즈미는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른다며 그 결과를 받아들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그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진정한 기사가 되고 싶은 그가. 싸움 잘하는 승부사가 아닌 기사가 되려 애쓰는 그가?
나이토 유즈루: 썅. 그래! 아마 네 말이 맞겠지 넌 똑똑하니까! 그렇게 똑똑하면서 네가 어떻게 될지 몰라? 너 카이다 익사시키면 동귀어진이랑 다를 바가 없어. 재판에서 처형당할 거라고!
모리 레이코: 뿌린 대로 거둘 뿐이다. 공리에 대해 떠들어왔고 남에게 사상을 들이밀었다면 그 장본인이 앞장서서 활동해야 한다. 입으로 떠드는 철학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
나이토의 말에 성실하게 대답해주던 모리는 문득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모리는 격양된 감정을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냉혹하고 호된 눈빛으로 나이토를 주시했다.
모리 레이코: 여기서 계속 얘기나 나누고 싶나? 너는 시련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는 첩자를 죽이느라 시련 안으론 들어갈 수 없으니, 이대로면 첩자의 침입에 대해 모르는 네 명이 첩자를 맞이해야 한다. 누군가가 뇌사할지도 모르지. 네 명이 전부 뇌사할 수도 있다.
나이토는 문과 카이다를 번갈아서 바라보다가 카이다를 놓았다.
나이토 유즈루: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모리는 고개를 내저으며 계속 힘을 주었다. 카이다의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리 레이코: 협박이라기보단 주어진 상황으로 임기응변을 한다고 해두지… 어차피 넌 시련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만약 지금 살인을 막고 싶다면 내 손을 분지르고 가라. 그럼 살인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너는 그럴 담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녀의 말은 어느 정도 맞았다. 나이토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모리 레이코: 고민할 시간이 넘치는 모양이군. 승부사.
나이토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카이다와 모리, 그리고 시련으로 통하는 문을 번갈아서 바라보았다. 우선순위가 정해지지 않았다. 정말 꽁꽁 묶어놓기라도 할까? 그러다 카이다가 갑자기 돌아오면 모리는 어떻게 하지? 모리 몸을 상하게 할 순 없어. 네 명을 도우러 가야 해. 카이다를 상대해야 해.
모리 레이코: 빨리 가라. 승부사. 시련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다.
모리 레이코: 또. 무슨 일이 벌어져도 네 잘못은 아니라는 건 알아둬라. 너는 첩자를 막아야만 했으니 누구도 너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나이토 유즈루: 내가 날 비난하겠지. 그리고 곧 죽을 사람처럼 말하지 마. 모리. 그러지 말라고. 나도 인정하기 싫은데 너한테 정들었단 말이야.
모리 레이코: 그런가? 너 같이 쉬이 정을 주는 자가 이런 가혹한 일에 말려든 것은 유감이군.
나이토 유즈루: 일부러 거리 벌리려 하지 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모리 레이코: 모른다.
나이토는 자신의 이마에 손을 대고.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고. 미간을 짚은 채 답답함을 호소하더니 참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나이토 유즈루: 네가 내 친구 같다고!
후루미나미 나몬: 으흐으음!
후루미나미의 감탄이 테이프 속에서 울렸다.
나이토 유즈루: 남들 앞에서 물 공포증 얘기 꺼낸 거 처음이었다고! 내 생각엔 너도 납치된 얘기 같은 건 이번이 처음 말해보는 걸 텐데. 내가 이런 생각 하는 게 진짜 이상한 일이냐?
나이토 유즈루: 같이 밥 먹고. 옆에서 자고. 내가 잘 수 있도록 팔에 밧줄까지 번거롭게 매번 묶어줬는데 너한테 정이 안 드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니냐고! 너랑 친구 먹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단 말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흐으음. 흐음!
나나시: 많이 신났네. 후루미나미…
모리는 아주 잠깐 움직임을 멈추었다가 다시 카이다를 옮기기 위해 팔에 부들부들 힘을 주었다.
모리 레이코: 넌 그렇게 여길지도 모르나 내겐 친구가 없다. 그저 공리에 도움이 되는 자와 도움이 되지 않는 자 뿐이지. 그게 내 울타리다. 그것 말고 난 어떤 척도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 우리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다.
나이토 유즈루: 진심이야? 아니다. 넌 항상 진심이지. 그게 너란 사람이니까…
나이토 유즈루: …아으으윽!!
나이토는 무언가 말을 더 하려다가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쾅쾅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리고는 문을 향해 터벅터벅 다가갔다.
문고리에 손을 대기 직전 나이토는 모리에게 한 번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모리는 빨리 가기나 하라며 윽박을 질렀고 그대로 나이토는 자신의 의식을 시련 너머로 보냈다.
모리는 질문을 던지는 가재 괴물들과 함께 해변에 남았다.
모리 레이코: 결국 손을 분지르지 않았군. 스스로와 타협하지 않는 것. 그게 언제나 너와 나의 차이점이었지. 승부사.
모리 레이코: 이봐. 지금 내 말을 듣고 있겠지?! 나를 보고 있을 것 아닌가! 이름 없는 남자!
모리는 숨을 고르고선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정확히는 자신의 코트 안에 넣어둔 도청기에 대고 소리친 것이었다. 모리의 외침이 수신기로 확실하게 들려왔다.
토키와 아유키: 네가 도청기를 준 사람이란 걸 아는 거야?
나나시: 쪽지를 남겼으니까 알 텐데. 아아! 보급 특권만 그대로였다면 멈추라는 쪽지라도 보낼 수 있었을 걸…!
모리 레이코: 지금부터 나는 첩자를 죽이고. 다른 모든 이들은 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캐롤 브라이트: 모리 씨라면 정말 저질러버릴지도 몰라요. 아니. 저지르시겠죠. 그녀는 이제 와서 멈추는 사람이 아니니까…
이바라 쿠리스: 이건 아니야. 아무리 카이다라고 해도 죽이는 건 아니야…
이바라가 약간 핏기가 가신 얼굴을 한 채 작게 중얼거렸다.
이바라 쿠리스: 또 사람이 죽잖아… 내 눈앞에서.
나나시: 모리…! 멈춰야 해. 살인은 안 돼…!
양방향 통신이 되지 않는 그저 수신기. 나는 전해지지 못할 말을 외쳤다. 그리고 모리의 입에서 나온 내용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모리 레이코: 쪽지의 내용을 읽었다. 그래. 더 많은 이들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누군가를 버려야만 한다. 그리고 최상의 수란 버려지는 자가 애초에 우리를 적대하던 흑막의 끄나풀일 경우이지.
모리 레이코: 너도 드디어 나를 이해하게 되었군. 지금 나를 보고 있다면, 내게 도움이 되는 물품을 보내라. 당장 카이다 쿠로하를 바다에 묻을 테니.
쪽지?
내가 저런 쪽지를 언제 보냈다고?
토키와 아유키: 나나시. 저게 무슨 뜻이야? 모리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시킨 거야?
나나시: 아니야. 난 저런 내용 보낸 적이 없어!
내가 보낸 내용은 후루미나미의 보급 특권이랑 앞으로 상황을 자세히 얘기해주면 필요한 물품을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쪽지뿐이었다. 살인에 관한 내용은 일절 없었다.
이바라 쿠리스: 그럼 대체 모리가 받았다는 쪽지는 누가 쓴 거야. 대체 뭐가 적혀있길래 저래!
캐롤 브라이트: 잠깐… 뭔가 이상해요. 나나시 씨가 보낸 게 아니라면, 모리 씨에게 쪽지를 보낼 수 있었던 분이 또 계셨단 건가요?
모리 레이코: 일단은 수레라도 하나 보내줬으면 좋겠군. 옮기는 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
나나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모리?!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금…!
쾅하는 소리와 함께 모니터실의 문이 열렸다.
나를 포함한 모니터실 안의 모두는 활짝 열린 모니터실의 문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들이 모두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들의 키는 작았지만 위압감만큼은 대단했다.
칸나즈키가 손을 흔들자 팔에 비해 긴 무녀복이 허공에서 펄럭였다.
칸나즈키 시노부: 안녕. 모두들.
나나시: 너희가 여길 왜…?
카나리 케이토: 왜. 너흰 날 찾아오면서 난 너흴 찾아오면 안 돼?
카나리는 넓지도 않은 어깨를 의기양양히. 최대한 꼿꼿이 폈다. 상대를 위협하는 목도리도마뱀을 보는 것 같았다. 그의 곁에는 플라잉 로봇이 공중에 둥둥 떠 있었고 23T는 로봇을 보자마자 긴장한 듯 몸을 움츠렸다.
23T5U130: 또 저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으읍! 으으으읍!
후루미나미가 카나리를 보며 몸을 비틀었다.
카나리 케이토: 칭얼대지 마. 이 정도면 빨리 온 거야! 내가 처리할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 얼마나 까다로웠는지 아냐고!
후루미나미 나몬: 으흥! 으흡! 으흐흐음?
카나리 케이토: 으. 진짜 답답하네.
토키와 아유키: 칸나즈키. 안 보인 지 꽤 된 걸로 기억하는데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어. 여기 왜 왔는지 들을 수 있을까? 그것도 카나리와 함께 말이야.
칸나즈키는 다이얼로그의 메뉴를 몇 개 누르며 대답했다.
칸나즈키 시노부: 보디가드.
카나리 케이토: 난 약속을 지키러 온 거다.
이바라 쿠리스: 보디가드?! 카나리 너 나이토랑 야가미한테 그렇게 졸라대더니 결국 구한 거야?!
칸나즈키 시노부: 돈은 섭섭하지 않게 줘. 1일에 1만 크레딧.
이바라 쿠리스: 진짜?! 와. 진짜 많이 주네!
카나리 케이토: 말 끊지 마! 다시. 난 약속을 지키러 왔다. 동업자에게도, 그리고 내 뒤통수를 때린 멍청이에게도 말이야!
카나리 케이토: 그보다 너. 지금 다이얼로그 눌렀지? 뭐 보냈어?
카나리가 고개를 돌려 칸나즈키에게 묻자 칸나즈키는 웃으며 대답했다.
칸나즈키 시노부: 수레! 보내달라잖아.
나나시: 보내달라고…?
카나리 케이토: 야! 장난해?! 지금 카이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단 말이야! 너까지 뒤통수를 치는 건 아니겠지!
칸나즈키 시노부: 카이다가 죽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빨리 움직이자. 죽진 않아도 심하게 다쳐서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니까.
카나리 케이토: 망할… 빨리빨리 일 끝내고 각성제 보내면 되겠지 뭐. 그러니 빨리 시작해.
나는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보았다. 모리의 옆으로 수레가 하나 떨어졌다.
모리는 카이다의 몸을 밀어 올려 수레에 싣기 위해 신음을 토했다.
모리 레이코: 으윽… 고맙다. 이름 없는 남자… 네 도움으로… 탑은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수신기에서 애를 쓰는 모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카나리 케이토: 쟤도 참 열심히네. 어차피 힘이 부족해서 바다로 가지도 못할 것 같은데.
칸나즈키 시노부: 모리는 성실한 아이니까.
칸나즈키의 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린 뒤 나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말했다. 놀라움 탓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목에 걸렸다.
나나시: 칸나즈키. 네가 모리의 또 다른 후원자였어…!
칸나즈키 시노부: 그래. 맞아. 널 이용하게 된 꼴이라서 미안해.
나나시: 대체 왜…?
칸나즈키 시노부: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더 이상 얽히지 말자고.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원해서 그랬던 거야. 그렇지만 넌 결국 후루미나미에게 계속 간섭하며 비밀을 알아챘지…
칸나즈키 시노부: 그녀가 당연히 심어뒀을 도청기에. 네가 걸린 줄도 모르고 말이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머리로는 모든 것을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나시: 말도 안 돼. 그걸 언제 다…! 자기 보급 특권이 들킬 걸 상정하고 미리 도청기를 두었단 말이야?
칸나즈키 시노부: 그녀는 모든 상황을 상정했어. 나나시. 너보다 앞서 있었지. 너에게 들킨 걸 상정한 게 아니라 들키도록 일부러 허술하게 움직인 걸수도 있고.
나는 바둑 고수를 상대로 대패한 것 같은 허탈함과 막막한 전망을 느꼈다.
내가 열심히 쌓아올린 반격이나 역전의 포석은. 결국 후루미나미가 깔아놓은 함정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확히는 내가 함정에 걸리는 일을 돕기까지 한 것 같았다.
나나시: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었네…
캐롤 브라이트: 칸나즈키 씨. 처음부터 두 분과 협력하고 계셨던 건가요?
칸나즈키 시노부: 아니. 그렇지만 모든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알고 있었어. 미래는 좀처럼 안 변해. 그리고 난 미래를 그대로 따르고.
칸나즈키 시노부: 그게 다야. 난 카나리, 후루미나미와 손을 잡게 돼. 카이다는 안 죽어. 그리고 우린 여기서 후루미나미를 꺼내 가는 거야. 모든 게 다 정해져 있어. 앞으로 일어날 일들도 말이야.
캐롤 브라이트: 그게 이유라고요? 미래에 그런 일이 벌어지니까 그걸 따라 행동한다뇨…?
칸나즈키 시노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지. 나도 알아. 나마저도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는걸. 그냥 내 안위를 위해 이들과 손을 잡았다고 생각해 줘. 아마 내가 봤던 미래의 나도 내 안위를 위해 그랬을 테니까.
칸나즈키는 종종 나이토와 나를 질질 끌고 다닐 정도로 센 힘을 보여줬다. 23T라면 그녀에게 맞설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카나리에겐 플라잉 로봇이 함께였다. 23T는 무력화될 터였고… 우리 중 누구도 칸나즈키에겐 맞설 수 없을 터였다.
23T는 칸나즈키에게 말했다.
23T5U130: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칸나즈키. 지금 후루미나미를 데리고 가면 인플레이션이 다시 활성화돼. 그러면 언젠가 우린 해변으로 어떤 물품도 보내지 못하게 될 거야.
23T5U130: 그럼 이 모니터실 안의 누가 죽게 될지 몰라. 그걸 원해?
칸나즈키 시노부: 원하지는 않아. 그래도 살인 게임에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해야 해. 모르겠니? 그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야. 너희 모두. 남을 위하는 마음만 앞서다간 그 무엇도 지키지 못할 거야.
칸나즈키 시노부: 너에게도 마찬가지란다. 인간이 아니라 슬픈 기계야.
23T5U130: ……
이바라 쿠리스: …칸나즈키. 미래를 알고 우리 중 누가 죽는지도 알면 왜 그런 말을 해? 성질이라도 돋우는 거야?
이바라가 칸나즈키에게 묻자. 칸나즈키는 손사래를 내저으며 옷자락을 펄럭였다.
칸나즈키 시노부: 왜냐하면 난 이 모든 게 변하길 바라거든. 고정된 미래가 변하기를 바라. 그리고 너희 모두가 덧없이 죽지 않길 바라지…
칸나즈키 시노부: 너희들에게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유감이야. 정말로.
칸나즈키는 나를 바라보다 말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
카나리 케이토: 야! 빨리 시작이나 하라고!
칸나즈키 시노부: 알겠어. 시작한다. 다들 다치기 싫으면 비켜. 불필요한 힘은 쓰기 싫으니까.
우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칸나즈키의 뒤를 카나리와 플라잉 로봇이 따라 들어왔다.
카나리 케이토: 로봇. 23T를 얼려버려!
"확인."
23T5U130: 가만히 안 당해줘. 절대…
23T는 바닥에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세게 발을 디디고 플라잉 로봇을 향해 달려갔으나…
"회로방해 전파. 방출."
그 뒤 한 마디 말도 남기지 못하고 얼어붙어선. 바닥에 쾅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말았다.
카나리 케이토: 다들 가만히 있어! 칸나즈키 힘 알지? 너희를 다 두들겨 패 줄 수도 있어! 그렇지만 너희 다치게 해 봤자 얻는 것도 없으니 우린 후루미나미만 데리고 나갈 거야. 알겠어?
후루미나미 나몬: 으읍! 으으으으읍!
카나리 케이토: 뭐라는 거야? 야! 후루미나미 입의 테이프 좀 풀어 봐. 말 좀 듣자.
카나리가 내 쪽을 보고 소리쳤다. 내가 머뭇거리자 카나리가 다시 한번 크게 소리쳤다.
카나리 케이토: 빨리빨리 하라고!
나나시: 아. 알겠어! 하면 될 거 아니야!
나는 후루미나미의 입에서 테이프를 떼어냈다. 아까 한 번 떼어냈던 테이프였기에 쉽게 뜯어졌다. 후루미나미가 혀로 테이프를 움직였다면 자력으로 뜯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 입술을 꼭 다문 채 목소리를 냈다.
후루미나미 나몬: 으읍! 으으읍! 으으으으읍!
카나리 케이토: 아. 얘 진짜 미쳤네… 잠깐. 그보다 카이다는…!
나이토 유즈루: 이것들아! 카이다가 그쪽으로 가고 있다고!!
나이토가 답답하다는 듯한 커다란 성량으로 쩌렁쩌렁 외쳤다.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가 시련 속으로 들어왔단 말이야?
나이토 유즈루: 그래! 너희 대체 어디에 있어? 미도리카와랑은 만난 거야? 아니 애초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빨리 문 밖으로 나오라고! 내가 카이다를 막아줄 테니까!
히무로 시라베: 문 밖으로 나왔다면 핏자국이 보일 거야. 그걸 따라와. 그럼 미도리카와의 집으로 통해. 카이다도 그걸 따라올 테지.
히무로 시라베: 아니. 카이다는 이미 왔던 곳이니 더 빨리 찾아올 거야. 자신만의 지름길을 따라올지도.
하기와라 우시오: 와 진짜 산 넘어 산도 아니고 산을 넘는 도중에 산이 하나 더 생기네?! 좆됐어 이거!
미도리카와 아쿠토: 너희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미도리카와의 입장에선 우리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을 터였다. 난생처음 보는 자들이 자신과 토가의 사이를 알고 자신이 추적하던 암살자의 진명도 알뿐더러. 그녀와 친한 것처럼 굴고 있으니.
나이토 유즈루: 그리고 모리가 카이다를 죽이려 하고 있어. 막아야 해!
히무로 시라베: 모리가 카이다를? 그래. 카이다가 시련 안으로 들어오면 의식이 사라지니까 그런 일도 가능하겠지. 우린 지금 미도리카와와 만났어. 힘들게 설득하고 있지.
나이토 유즈루: 일단 빨리 거기서 나와! 카이다랑 마주치면 무슨 일이 날지 몰라. 너희 다 뇌사할 수도 있다고! 내가 그쪽으로 갈게. 너희 어디로 갔어? 이 핏자국 쪽이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지만 미도리카와를 두고 갈 수는 없어…
야가미 토가: 당연히 두고 갈 순 없습니다. 절대로요. 여기까지 와놓고 곧바로 포기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마유즈미와 야가미는 확고하게 말했다. 하기와라는 미도리카와의 총구를 앞에 두고 다시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야. 나 했던 얘기 또 해야 해?
하기와라는 첫 번째 시련에서 미도리카와를 버리자고 제안했다. 또 그녀에겐 목숨을 버릴 만한 가치가 없다고도 말했다. 나 또한 그의 말에는 동의했다. 카이다에게 맞서서 누군가가 죽을 위험을 감수하기보단 미도리카와를 포기하는 게 낫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시련의 카이다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카이다 본인이었다. 게다가 해변의 카이다가 목숨의 위기에 놓여 있으니 단순히 미도리카와를 포기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굳이 미도리카와를 두고 갈 필요는 없어. 우리 목숨을 걸 필요도 없고. 우리는 모리가 카이다를 죽일 때까지 미도리카와를 호위하며 시간을 벌기만 하면 돼.
다이얼로그 너머에선 나이토가 기함을 하듯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이토 유즈루: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의 육체가 죽을 때 의식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해변으로 나간 뒤에는 카이다로부터 안전할 수 있어. 우린 굳이 카이다와 맞설 필요도 없이 잠시 도망만 다니면 돼. 카이다는 죽을 테니까.
마유즈미 나데시코: 죽인다고…?
나이토 유즈루: 죽이는 건 안 돼. 그랬다간 모리도 같이 죽을 거라고!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를 누가 후원하고 있는지 모르니 무고한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지만, 그녀를 후원하는 이가 아무도 없을지도 모르지. 모든 경우를 상정하다간 사람이 죽어.
히무로 시라베: 우리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 지금 카이다를 뚫고 해변으로 돌아가자고? 그러다 미도리카와가 죽을 수도 있어.
하기와라 우시오: 지금 여기서 말싸움할 때가 아니야. 일단 튀자고! 미도리카와. 지금 상황 파악 좀 해 봐. 우리도 정리가 안 돼긴 하는데 무슨 눈치나 냉혹한 감 같은 거 발동해서 파바박 얘기 끝내자!
미도리카와 아쿠토: 조금만 기다리면 그 여자가 죽는다고? 찬성이야.
하기와라는 입을 쩍 벌린 채 짝짝 박수를 쳤다.
하기와라 우시오: 바로 그거야! 이게 어둠의 세카이에 사는 사람들인가?! 그냥 이해 속도가 미쳤어요!
나이토 유즈루: 죽이는 건 안 된다니까!
히무로 시라베: 애초에 모리가 카이다를 죽이는 걸 막고 싶다면 네가 해변으로 다시 돌아가면 돼. 카이다와 너 사이의 거리는 멀고 우리에겐 총이 있어. 야가미까지 있으니 네가 없어도 그녀를 상대할 수 있다고.
나이토 유즈루: 그건 모르는 일이지!
히무로 시라베: 아니. 넌 알고 있어. 너는 지금 모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고 너 자신도 그걸 알아. 왜 그녀를 막지 않아? 왜 시련에 남아있지?
나이토 유즈루: 그. 그건…
히무로 시라베: 네가 정말 해야 할 일을 선택해. 나이토. 넌 지금 뭘 하고 싶어?
나이토는 잠시 침묵하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에게도 할 일이 있을 터였다.
모리 레이코: 끄으… 말도 안 되게 무겁군. 첩자… 그건 네가 짊어진 죄의 무게인가? 밀수업자가 말했던 네 업보의 무게는 이 정도란 말이냐.
모리 레이코: 그리 억울하게 생각 마라… 곧 나도 무거워진 채 그쪽으로 갈 테니까.
모리는 수레에 카이다를 실은 채 서서히 바닷속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카나리 케이토: 옮기고 있잖아?!
칸나즈키 시노부: 어차피 가재 괴물이 있으니 여기에 집중해.
카나리 케이토: 너나 집중해! 빨리 가서 후루미나미를 데려오기나 하라고!
야가미 토가: 집중하세요. 바다뱀… 아니. 미도리카와 씨라고 부를까요. 믿기지 않겠지만 당신은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곧 카이다 쿠로하가 당신과 우릴 죽이러 이곳으로 찾아올 거예요.
야가미 토가: 절 한 번만 믿어주시면 안 됩니까…? 당신이 신중한 사람이고 복수를 혼자 이루려는 마음은 알지만. 제발 절 따라와 주면 안 되냐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믿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당신을 카이다 쿠로하에게서 지켜야 한다는 점에는 완벽하게 동의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미도리카와는 야가미의 쪽을 잠시 바라본 뒤 천천히 총을 내렸다. 그녀는 총잡이가 하듯이 손가락을 끼워넣어서 총을 허공에서 돌린 뒤 자신의 주머니에 꽂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오. 멋있는데?
하기와라는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감탄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카이다는 어느 방향에서 오는 거야. 맞서 싸울 방법은 없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믿어줘서 고마워. 미도리카와!
미도리카와 아쿠토: 착각하지 마. 내가 믿는 건 어디까지나 토가뿐이야. 너희가 누군지도 모르고 너희를 믿지도 않는다고. 토가. 여기서 맞서 싸울까. 아니면 잠자코 널 따라갈까?
야가미 토가: 어차피 문을 통해 나가야 할 테니 이곳에 머무르기보단 이동하는 게 좋겠지만…
미도리카와 아쿠토: 문이라니 그건 또 뭐야.
야가미 토가: 곧 알게 될 겁니다.
나이토에게 문을 지켜줄 수 있냐고 물으려 했으나 그와의 통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아마 그 자신만의 할 일이 있을 터였다.
히무로 시라베: 여기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문이야. 말 그대로. 그게 우리가 가야만 하는 곳이지. 우리가 핏자국을 찾으며 천천히 오긴 했지만 분명 먼 거리야. 카이다라도 오려면 5분 정도 걸릴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여기서 시간을 썼으니… 이젠 3분 정도 아니야?
하기와라 우시오: 곧 여기로 도착하긴 하겠지. 이대로 어설프게 뛰어서 도망치려 들었다간 오히려 기습을 당할 거야. 존버 할까!
야가미 토가: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겠죠.
야가미가 베란다로 다가와선 밖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간 곳에는. 길가에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들이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이 중에 면허가 있는 사람. 있어?
야가미 토가: 저요.
히무로 시라베: 그럼 자동차를 구하자.
마유즈미는 이해하지 못한 듯이 나와 야가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지금 차를 어디서 사?
히무로 시라베: 사는 게 아니라 설득을 해서 잠깐 빌리면 돼. 어차피 이 안에 있는 건 전부 환영일 뿐이니까.
미도리카와 아쿠토: 뭐라고?
하기와라 우시오: 아무것도 아니니까 걱정 마셔!
하기와라는 혀를 낼름 내밀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나는 총을 안주머니에 집어넣지 않고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마유즈미, 야가미, 하기와라에 뒤따른 미도리카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하… 좋지 않은 예감밖에 안 드는데…
토키와 아유키: 이대로라면 좋지 않아… 캐롤 씨.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아요.
캐롤 브라이트: …….
서서히 다가오는 칸나즈키와 카나리를 보며 토키와가 작게 말했다. 나는 어렴풋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알아챘다. 가능하지만 절대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일.
캐롤 씨는 자신의 흰 장갑을 벗었다.
칸나즈키 시노부: 시노부. 조심해라. 불이야. 너까지 탄다.
나나시: 캐롤 씨…!
토키와 아유키: 나나시. 가만히 있어. 캐롤 씨를 말리지 마.
토키와가 그녀에게 말을 걸려는 내 팔을 콱 붙들었다.
칸나즈키 시노부: 그러기로 마음을 정했어. 캐롤?
캐롤 브라이트: 해변에 계신 분들 중 누구도 죽지 않길 바라니까요.
칸나즈키 시노부: 또 남을 위해서 그러는 거구나.
나는 캐롤 씨를 보며 소리쳤다. 내가 듣기에도 호소하거나 애원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나나시: 안 돼요! 미도리카와와 캐롤 씨에게 벌어진 일을 되풀이할 순 없어요!
후루미나미 나몬: 맞아. 캐롤! 너 많이 힘들었잖아! 터치가 뭐고 너는 터치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 많이 했잖아? 또 터치로 너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 생각이야? 그저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후루미나미는 하필 그 순간에 입을 열고는 얄밉게 말했다.
토키와 아유키: 조용히 하지 못해. 후루미나미!
토키와는 내 팔을 놓지 않은 채 윽박지르기 거의 직전까지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게선 보기 드문 절박한 모습이었다. 잠을 자지 못해서인지는 몰라도 내 눈에는 토키와가 무척 퀭하고 창백해 보였으며. 그만큼 절박해 보이기도 했다.
이런 표현을 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토키와는 평소의 멀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걸어 다니는 시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토키와 아유키: 나나시. 너도 정신 차려! 지금 캐롤 씨가 힘을 안 쓰면 인플레이션이 다시 생겨나! 그걸 원하는 건 아니잖아?
나나시: 그렇지만 토키와…
내 말을 토키와에 의해 중간에서 끊기고 말았다.
토키와 아유키: 그렇지만 같은 건 없어! 나도 터치가 이렇게 쓰여선 안 된 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죄송하지만 캐롤 씨. 모두를 위해서는 강제적인 터치를 쓰실 수밖에 없어요.
캐롤 브라이트: …그래요. 저도 이해해요.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
아무런 방법이 없단 말이야? 강제적인 터치 말고는? 또 캐롤 씨가 움직여야 한다고?
나는 바닥에 쓰러진 23T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23T에게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어쩌면 내가 아닌 다른 이들도 의존했던 것 같았다. 가장 강한 사람이 지켜주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게 괜찮을 거라고. 우리 모두 안심해버렸던 것이다.
23T는 쓰러졌으니 다음은 캐롤 씨란 말인가? 그다음은? 또 다음이 있을까?
난 그저 누군가를 도울 뿐. 예상치 못한 행동을 가끔 할 뿐. 정작 누군가와 맞서 싸우는 것은 늘 남의 일로 돌린단 말인가.
칸나즈키 시노부: 카나리. 어떻게 해? 이건 계획에 없었잖아.
카나리 케이토: 어떻게 하긴. 정면으로 돌파해! 그러라고 널 고용한 거니까. 미래를 알 수 있으면 캐롤의 움직임을 피하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잖아!
칸나즈키 시노부: 캐롤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진 않은데… 아무튼 알겠어.
칸나즈키가 옷소매로 덮여 있던 팔을 밖으로 꺼내자 고무장갑을 낀 그녀의 손이 나타났다.
캐롤 브라이트: 나름대로 대책을 세워 오셨다. 이건가요?
칸나즈키 시노부: 불을 만지려면 손을 감싸야하는 법이지.
양손에서 흰 장갑을 벗은 캐롤 씨는 생전 무술을 배워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팔을 뻗었지만 그녀보다 힘이 세고 고무장갑을 낀 칸나즈키에겐, 정전기의 형태를 취하는 터치가 통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캐롤 씨는 우리의 앞에 서서 칸나즈키와 맞서고 있었다. 그녀 본인은 싸움과 연이 없는 사람인데. 어째서?
캐롤 브라이트: 난…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요. 마유즈미 씨도. 토키와 씨도. 마찬가지예요. 모두 생존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캐롤 브라이트: 내가 그렇게 만들게요.
캐롤 씨는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었다. 탑에 있는 사람들과 해변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는 것을 그녀는 원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강제적인 터치 뿐.
나나시: 그렇지만 이런 방법은 싫어… 그럼 캐롤 씨는 누가 지켜주는 거지?
토키와 아유키: 나나시. 받아들이고 싶지 않겠지만…
나나시: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돼. 난 받아들이지 않아. 이런 식으로는 못 받아들여…
내가 총을 만들어 미도리카와에게 쏘는 시늉을 한 것은 그녀가 강제적인 터치를 사용하겠노라고 마음을 먹었기에, 그녀의 뜻을 존중했던 것이었다. 설령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키더라도… 또 그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캐롤 씨의 각오를 무시하는 것은 이치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었다. 캐롤 씨는 이제 강제적인 터치의 사용을 원하지 않아. 미도리카와에게 사용한 이후로 그녀는 늘 그래 왔어.
문득 모리가 해변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모리 레이코: 스스로와 타협하지 않는 것. 그게 언제나 너와 나의 차이점이었지.
나나시: 다 자기변명이야.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해변의 누군가를 위해. 인플레이션을 막거나 탑을 지키기 위해… 이유는 많고 또 많았다. 온종일 읊을 수도 있었다. 고결하고 멋진 이유들. 도덕적이고 옳은 이유들.
그런 이유로 내 욕망을 저버리는 일이 나는 싫었다.
캐롤 씨가 터치를 사용해봤자 칸나즈키를 이기지 못할 수도 있다. 고무장갑에 막힐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을 차치하고서 나는 주머니에 들어있는 머리카락 묶음을 손에 꽉 쥐었다.
토키와 아유키: …저건…? 캐롤 씨의… 나나시. 너 무슨…?
나는 캐롤 씨의 앞으로 걸어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핑계 삼지 마. 넌 그냥 미움받는 게 두려울 뿐이야. 정말 캐롤 씨와 네가 죽지 않길 바라면 그녀가 널 싫어하게 되더라도 온갖 수단을 다 써서 생존을 쟁취해야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왜 갑자기…?"
칸나즈키 시노부: 네 앞가림부터 잘해. 다른 사람 위하지 말고.
칸나즈키 시노부: 살인 게임에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해야 해.
칸나즈키가 하나 간과한 점이 있다.
난 언제나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놈이었다.
나나시: 당신을 걱정하는 마음에 여러 이유를 붙였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전 캐롤 씨를 걱정한 게 아니었어요. 캐롤 씨가 잘못되었을 때 아픔을 느낄 나를 걱정한 거였어요. 당신이 내 약점인 것처럼. 그래서 보호하려 들었죠.
나나시: 캐롤 씨가 괴로워하는 것을 견딜 자신이 없었어요. 캐롤 씨가 자신과 대상자 분의 괴로움을 감수하고, 손을 더럽힐 각오를 가질 가능성은 고려하지도 않았어요. 동경하는 사람이 성인(聖人)으로 남길 바랐어요.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는 항상 이기적이었다. 멋대로 남을 위하고, 남을 지키려 들었다. 칸나즈키는 내가 남을 위한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 모든 것은 나를 위해서였다.
남의 고통에 지레 상처 받을 나를 위해서… 언제나 그래 왔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슬픔이나 아픔보다 내 것이 더 커지는 순간이 온다면 얘기가 달랐다. 그렇지 않은가? 두 번은 용납할 수 없었다.
후루미나미나 카이다는 늘 제멋대로 행동한다며 나 자신을 정당화할 필요조차 없었다.
나나시: "설령 이게 잘못 되어도 이건 내 선택이에요. 오직 나 자신을 위해 한 일이니 제게 마음 쓰지 마세요."
나는 남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에서 늘 이기적이었고…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그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것이 옳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자로 재고 스스로를 깎는 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적어도 그게 내 은인을 위해 해줄 수 있다면 기꺼이 나는 죄를 지을 각오를 했다.
내가 생각해도 급작스러운 생각이었지만 나는 칸나즈키와 카나리. 플라잉 로봇이 동시에 들이닥치고 캐롤 씨가 다시 강제적인 터치를 사용하게 될 때는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무기마저 없는 상황에서 내가 떠올린 해결책은 좋은 게 아님이 분명했다.
그러나 내겐 그것 말고 아무런 수가 없었다. 나는 캐롤 씨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캐롤 브라이트: 이번 실험으로 확실해졌어요. 나나시 씨. 당신은 터치의 소질을 가지고 계세요.
나나시: 네? 터치의 소질이요?
캐롤 브라이트: 네. 사실 이 탑의 모두가 터치의 소질을 가지고 계세요. 히무로 씨와 칸나즈키 씨는 더욱 그렇고요. 그렇지만 특히 당신의 소질이 누구보다 탁월해요.
캐롤 씨가 샤이닝이라고 부르는. 내 안의 빛을 깨우는 감각을 최대한 되새기며 나는 서서히 다가오는 칸나즈키에게로 확 달려들었다.
칸나즈키 시노부: 이름 없는…?
나는 말 그대로.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나나시: "내 정신에서 당장 나가요!"
그게 통할지는 나 자신도 확신하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통했다. 머리카락으로 이어진 터치는 원래부터 이어짐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순간 정신력을 집중해 고함을 지르다시피 하자 그녀와의 연결이 잠시 희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잠시 캐롤 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아마 캐롤 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칸나즈키에게로 팔을 뻗었다. 칸나즈키가 뒤늦게 손을 들어 내 팔을 붙들었다. 척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은 고무장갑에 잡혀 더 이상 움직이거나 나아가지 못했다.
칸나즈키 시노부: 네가 이러는 미래가 있긴 했지만. 아주 희미했는데…
나나시: 그럼 이건 얼마나 희미해?
나는 고무장갑을 끼지 않은 칸나즈키의 소매 안 팔에 캐롤 씨의 머리카락 묶음을 쥔 손을 대었다.
캐롤 씨의 머리카락을 매개체로 삼으며 나는 터치를 받을 때의 그 감각을. 정전기가 튀는 듯한 감각이 어땠는지를 떠올렸고…
파직.
그리고 암전.
모리는 오금까지 차오른 바닷물을 느끼며 계속 이를 악물고 수레를 밀었다. 주변에서 가재 괴물들이 몰려들었으나 그녀는 발재간을 놀리거나 발을 굴러 그것들을 위협했다.
그러나 모리는 서서히 가재 괴물들이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포식자들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상대를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없는 존재라 인식하고. 공격 의사를 가진 채 가재 괴물은 서서히 포위망을 조여왔다.
모리 레이코: 후우…
히무로 시라베: 차를 빌리겠습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네 차키 내놔.
나와 미도리카와는 근처에 차를 주차시키는 운 나쁜 사람에게 총구를 들이밀어 차를 구했다. 다섯 명이 타기에는 약간 비좁았지만 차를 탈 수 있는 것만으로 감지덕지였다.
야가미가 운전석. 내가 조수석. 그리고 뒷좌석엔 하기와라, 미도리카와, 마유즈미가 순서대로 탔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죄송해요오오! 곧 돌려드릴게…
마유즈미가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차 주인을 향해 소리치려는 순간. 미도리카와가 그녀의 입을 콱 막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으으읍? 으브븝!
미도리카와 아쿠토: 이봐. 너 정신 나갔어? 조용히 움직여야 한다니까!
히무로 시라베: 그녀라면 마유즈미의 소리를 듣지 않고도 우릴 쫓아오고 있었을 거야.
야가미 토가: 어디로 가면 될까요? 문으로 향할까요?
히무로 시라베: 그쪽으로 향하긴 해야겠지만, 카이다가 우리 앞에 나타날 텐데…
하기와라 우시오: 야. 저기 봐봐!
하기와라가 도로 앞을 가리켰다. 누가 자신을 부른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카이다는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척 먼 거리였으나 그녀는 우리 앞을 가로막았고. 즉 우릴 발견한 뒤라는 뜻이 되었다.
야가미와 미도리카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차 안의 공기가 냉랭해진 것을 느꼈다.
야가미 토가: 차로 밀어버리겠습니다.
야가미는 그 말만을 남기고 엑셀을 밟았다. 세고 빠른 속도로 치고 문을 향해 도망치면 이론상 카이다를 따돌릴 수 있겠으나 나는 카이다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히무로 시라베: 잠깐. 야가미. 멈춰!
나는 창문 밖으로 총구를 내밀고 그녀를 향해 두 발을 쏘았다. 먼 거리라 권총이 닿지는 않았지만 경고 사격의 의미가 있었다. 또 바로 옆에서 운전을 하고 있는 야가미에게 확실한 경고를 남길 수 있기도 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왜 그러는데?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가 손에 쥐고 있는 것. 스파이크 스트립이야. 평소에는 접혀 있지만 도로에 놓으면 빠르게 펼쳐져 가시를 드러내지. 달려들어봤자 그녀가 몸을 피하고 스트립을 펼치면 타이어가 터져버릴 거야.
야가미 토가: 그럼 어떻게 합니까? 이 길로는 나갈 수 없다. 그겁니까?
히무로 시라베: 다른 길을 찾던가, 그녀와 교전하던가를 선택해야 해.
미도리카와 아쿠토: 난 교전이 마음에 드는데.
미도리카와는 주머니에서 커다란 권총을 꺼내며 말했다. 야가미는 서서히 가까워지는 카이다를 한 번 본 뒤 백미러로 미도리카와를 흘끗였다.
야가미는 핸들을 옆으로 확 꺾어 차의 방향을 180도 돌렸다. 미도리카와를 잃을 수 있는 도박은 하지 않으려는 판단은 상당히 정확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미도리카와를 되살리겠다는 목적이 단순히 흑막에 맞서는 일이나 생존을 위해서인지, 혹은 그저 개인적인 일인지 궁금해졌다. 내가 개인사에 참견할 자격은 없었지만… 내통자의 심리 프로파일을 알아내서 나쁠 일은 없었다. 적어도 그가 미도리카와를 친구로 생각한다는 것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이상은 섣불리 결론을 내기 어려웠다.
가능하다면 우리가 타고 있는 자동차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자마자. 자동차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카이다 쿠로하의 심리 프로파일도 알아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괜찮으세요? 제발 정신 차려 보세요… 나나시 씨…!
캐롤은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어깨를 흔들며 그의 가명을 불렀다. 외상은 없었다. 누군가에게 받은 충격도 없었다. 옆에서 보기로는 나나시가 느닷없이 몰려온 잠에 빠져 쓰러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정전기. 그리고 캐롤의 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그의 행동에서 모니터실의 모두는 알 수 있었다. 나나시가 터치와 관련된 무언가를 시도했고… 실패해 저렇게 되었음을.
나나시는 곤히 잠이 든 것처럼 맥박과 호흡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옆에서 아무리 소리를 치거나 몸을 흔들어도 나나시의 의식 자체는 돌아오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제발… 이건 아니잖아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캐롤은 나나시가 쓰러진 순간 칸나즈키를 향한 저항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게 되었다. 칸나즈키 본인도 후루미나미의 탈환을 위해 움직이기보단 쓰러진 나나시와 그 곁의 캐롤에게 다가가는 것을 먼저 했다.
칸나즈키 시노부: 그리 걱정하지 마렴. 자기 자신을 그슬리게 만들었을 뿐… 언젠가 깨어날 테니까.
이바라 쿠리스: 정말이야. 칸나즈키? 괜찮은 거지? 나나시가… 죽은 게 아니지?
캐롤 브라이트: 괜찮아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싫어…
토키와는 캐롤이 그 정도로 슬퍼하는 목소리를 처음 듣고선 놀랐다.
칸나즈키 시노부: 죽은 건 전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카나리 케이토: 칸나즈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 한눈팔 때야!
후루미나미 나몬: 목소리 높이지 마. 카나리. 그럴수록 없어 보이니까.
토키와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후루미나미가 왜인지 일어서서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후루미나미는 팔과 손목을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뭉친 근육이 풀어지는 느낌이 기분 좋은지 후루미나미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토키와 아유키: 후루미나미 너. 언제…
후루미나미 나몬: 깨어났냐고? 이봐. 입을 풀어주고 나 혼자 이렇게 방치시켰는데 밧줄 정도야 이로 열심히 뜯으면 풀 수 있지. 그렇게 단단히 묶은 것도 아니더만.
후루미나미는 유유히 카나리 쪽으로 다가가며 발레리나처럼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러면 돌아온 후루미나미의 계획 떠벌떠벌 말하기 시간… 은 나중으로 미룰까? 그럴 상황이 아니네.
후루미나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쓰러진 23T와 나나시. 쓰러진 나나시를 보는 캐롤과 칸나즈키. 짜증을 내는 카나리. 긴장하는 토키와와 이바라. 어지럽고 또 묘한 상황이었다.
카나리 케이토: 네가 나한테 없어 보이니 마니 할 때냐? 아까까지 묶여있었던 주제에. 내가 널 구하러 왔다고!
후루미나미 나몬: 그걸 시킨 게 나잖아. 보급 특권에 뭘 넣고 언제 닫아야 하는지 알려준 것도 나고. 그보다 카나리. 카이다 안 봐도 괜찮아?
카나리 케이토: 아. 맞아! 젠장!
그들이 모니터를 바라보았을 때. 모리는 수레를 자신의 무릎 높이까지 몰고 카이다를 물에 담그기 직전이었다.
카나리 케이토: 안돼! 안돼애애애애!
후루미나미 나몬: 안돼애애애앵.
후루미나미는 다급하게 다이얼로그의 화면을 두드리는 카나리를 곁눈질하고선 그의 움직임을 우스꽝스럽고 촐싹이게 따라 했다.
카나리 케이토: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각성제! 각성제! 빨리! 제발 빨리 좀 가라…!
토키와 아유키: 각성제? 그건 또 뭐야?
이바라 쿠리스: 내 기억으로는 인플레이션이랑 보급 특권 같은 게 추가될 때 크레딧 상점에 올라오긴 했던 것 같은데…
후루미나미 나몬: 자자자자. 그 효과가 궁금하면 우리 다 같이 구경하자. 바로 지금 말이야! 와아아아우!
후루미나미는 환호성을 내지르며 두 손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모니터실에 모인 모두가 모니터에 눈을 집중했다.
모니터의 화면은 카이다를 끌고 그녀의 머리를 바닷속에 담그고 있는 모리 쪽을 비췄다. 그러나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 화면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에서 어떻게 촬영하는지 모르는 해변의 풍경이. 정지해있는 그 풍경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정체는 몰라도 해변의 상황을 지켜보는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모리 레이코: 저건…
모리는 이상한 위화감에 고개를 들었다. 모노로그와 비슷한 느낌의, 하지만 다르게 생긴 기계가 하늘에 떠 있었다. 모리가 카나리의 플라잉 로봇에 대해 알았다면 그 기계가 플라잉 로봇과 매우 닮았다고 생각했겠지만, 그 존재를 모르는 모리는 공중에 드론이 떠 있다고 느꼈다.
드론은 모리 쪽을 바라보며 공중에 머물렀다. 드론의 외부가 위이잉 하고 열리더니 내부의 구조물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모리는 그 드론이 무엇에 쓰이는지는 모르더라도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드론에서 돌출된 쇠 원통이나 관의 중간에 있는 것 같은 물체가 어째서인지 총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각성제. 투여."
모리는 퓨웃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들었다. 드론의 총구에서 녹색의 탄환이 발사되어 카이다의 목에 꽂혔다.
주삿바늘은 경동맥에 꽂혔고 그 주사를 따라 캡슐 안의 약물이 카이다의 혈관에 투여되었다. 혈관에 투여된 약물은 중추신경계를 자극하며 교감신경계를 활성화시켰다.
그리고 그녀의 몸 전체를 돌며, 뇌를 자극시켰다.
깨어날 수 있도록.
이번 편은 파트 변경을 구분하는 줄 변경 없이 시점이 휙휙 전환되면서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구성을 한 번 해봤는데 제대로 재미가 살았는지 모르겠네요 쓰는 입장에서야 재밌긴 했음
너무 길어지고 뒷부분에 쓸 게 많은 것 같아서 일단 반으로 끊고 나머지도 빨리 완성하려 애쓰는 쪽으로 가는 절차를 밟겠습니다 전 원래 중요한 장면들 작업하고 중간을 잇는 식으로 작업하는데 중간중간에 계속 추가하니까 시발 글이 안 끝남
기다려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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