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리 케이토: 가만히 안 둘 거야… 가만히 안 둘 거라고. 감히 이런 식으로 엿을 먹이다니…
의기양양한 기세를 되찾기 얼마 전. 카나리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힌 채 두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분함과 짜증. 또 불안감이 그의 심장 박동을 빠르게 만들었다. 카나리가 가슴팍에 차고 있는 회중시계의 바늘이 빠르게 빙글빙글 돌아갔다.
시계가 아니라 시한폭탄을 목에 매고 있더라도 카나리만큼 긴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시계를 되감으려 해도 심장의 시계는 손목의 시계를 홀로 두고 달려 나갔다. 그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시간 맞추기를 포기하고. 애꿎은 침대와 배게에 연달아 주먹을 날렸다.
카나리 케이토: 아으으으! 이해가 안 돼. 자기 복을 그냥 걷어차다니. 멍청한 자식! 얼마나 멍청한지 가늠도 안 돼! 내가 이런 기회를 아무한테나 주는 줄 알아? 멍청해. 완전 멍청해!
침대에 대고 몸을 굴리던 카나리는 벌떡 일어나 자신의 방 안을 뚜벅뚜벅 걸었다.
그것은 좁은 공간에서 휴식하던 사람들 특유의 버릇이었다. 한 방향으로 몇 발자국 나아가고. 몇 발자국 나아간 뒤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몸을 반대편으로 홱 돌리고 다시 몇 발자국을 나아간다. 그는 자기 자신조차 알지 못하면서 몸을 돌릴 때마다 네 걸음을 걸었다.
뚜벅. 뚜벅. 뚜벅. 뚜벅.
카나리 케이토: 불공평해…? 불공평하다고? 혼자 잘난 척 하긴. 멍청한 자식. 넌 네가 잘하고 있는 거라 생각하겠지만 아니야. 넌 그냥 생각이 짧은 놈이야… 내가 당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말라고…
뚜벅. 뚜벅. 뚜벅. 뚜벅.
카나리 케이토: …왜 아무도 내 제안을 안 받아주냐고. 멍청한 자식들… 내가 얼마나 선심 써서 좋은 거래를 해 주는데… 아무도 내 말은 안 들어… 왜냐고…
뚜벅… 뚜벅…
카나리는 흘러내리려는 눈물 탓에 더 짜증을 냈다.
카나리 케이토: 씨잉… 왜. 왜냔 말이야…! 대체 왜! 왜…
카나리는 눈물을 닦으며 창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하려다가, 창가에 떨어진 한 장의 종이를 보았다.
종이라기보단 편지였다. 아이보리색의 편지지. 카나리는 그런 잡동사니를 산 기억이 없었다. 아니. 샀던가? 긴가민가한 자신의 기억을 되새기던 카나리는 편지지에 적혀 있는 문구를 읽었다.
카나리 케이토: '네가 이행해야 할 일'…?
카나리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펼쳤다.
후루미나미 요원이다. 네가 이 편지를 보고 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겠지.
농담이고. 내가 잡혀 있는 상황일 거야. 아마도?
카나리 케이토: …뭐야?
카나리는 유령에 홀린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나나시는 도청기에 걸리지 않고도 캐롤과 소통할 수단을 가지고 있어. 머리카락이랑 관련이 있는데 정확히는 나도 몰라. 그냥 되는 것 같아.
그래서 아마 우린 나나시에게 협력을 권유했을 테고. 나나시는 캐롤과 소통해서 내가 붙잡혔을 거야. 그렇지? 붙잡힐 위기가 없었더라도 내가 일부러 잡혀줬을 테니까 이 점만큼은 확실해.
카나리 케이토: 미친 건가?!
카나리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는 읽으면서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편지를 읽는 것과 그의 갈 곳 없는 외침은 기이하게 거의 대화의 형태를 가졌다.
카나리 케이토: 그럼 알고서도 잡혔단 거야?! 제정신이냐고!
지금 상황이 막막하고 힘들겠지만 걱정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나중에 더 설명하겠지만 내겐 보급 특권이 있어. 아마 칸나즈키가 모리의 후원자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개를 회유해서 네 편으로 만들고 쪽지를 보내. 나나시는 아마 쪽지를 보냈을 거거든. 수신기 만드는 건 계속 눈여겨봐 왔으니까… 무조건 쪽지를 보냈을 거야. 다른 수단은 생각하지 못할 걸.
쪽지를 보낸 다음 보급 특권을 막아 버리면 모리는 우리 말을 믿고 움직이게 되겠지. 막는 방법도 나중에 알려줄게.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쪽지에는 남겨져 있었지만 카나리는 그 내용을 거의 이해하지도 못했다. 아무튼. 그는 계속 읽었다.
나나시가 무슨 쪽지를 보냈는지는 알 수 없어. 알 필요도 없지. 너흰 그냥 나나시가 보낸 것처럼. 감쪽같이 편지를 날조해서 보내면 돼. 카이다는 미도리카와의 부활을 막기 위해 시련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어. 우린 모리가 카이다를 죽이도록 유도하면 돼.
그럼 살인을 막으려는 착한 사람들의 노력은 완전히 무용지물이 될 거야. 모리는 자기가 조종당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카이다를 죽이려 들겠지.
카나리 케이토: 그러다 카이다가 정말 죽으면 나까지 죽는데…
어차피 네겐 각성제가 있잖아. 위험하면 그걸로 카이다를 깨워. 그리고 사실 나도 꼭 누군가가 죽는 걸 바라는 건 아니야. 다만 충분히 긴장되고 목숨이 위기에 놓이는 무대가 만들고 싶은 거지.
너도 협력해봤자 나쁠 것 없잖아? 지금 처지대로 방 안에 갇혀서 살고 싶어? 좁디좁은 방 안에서 사는 건 감옥에서 사는 거나 다름이 없지.
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거 알아. 어차피 지금 네겐 그 수밖에 없거든.
이제 밑에 쓰여 있는 대로 해.
카나리는 모든 내용을 읽었다. 후루미나미의 편지를 읽으며 카나리의 심장 박동은 서서히 안정되다가 마지막에는 조금 빨라졌다. 다가올 역전과 설욕의 시간에 그의 심장이 떨려왔다.
시계를 뒤로 돌려서. 전화를 끊은 나이토는 핏자국을 따라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것은 뾰족한 수가 있다기보다는 현실 도피에 가까운 달리기였다. 카이다보다 빨리 갈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 했다.
그 자신조차 인식하고 있었다. 모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도. 왜 행동하지 않았던 건지 그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는 도망치듯이 달렸다.
살인은 막아야 한다. 그러나 카이다를 살렸다가 누군가가 더 죽을지도 모른다. 친구가 죽지 않게 막아야 한다. 그러나 친구의 손을 분지를 순 없다. 설령 모리가 그녀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고 해도.
모리는 살인을 하려 한다. 살인은 막아야 한다.
온갖 가치와 생각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를 휘감았다. 우선순위를 정할 수 없었고 조금 정한다 싶으면 곧바로 다른 가치체계가 고개를 들어 그를 가로막았다. 나이토는 난생처음 느끼는 혼란 속에서 그것이 울타리를 제대로 정하지 못해 생기는 일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모리가 말했던 울타리. 그 비유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확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전부 돕고 보면 진정한 기사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던 것이다.
나이토는 생각을 떨쳐버리려 애쓰며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달렸다. 자신의 숨이 차오르는지도 모르던 나이토는 한계에 다다란 순간 갑자기 가빠오는 자신의 숨을 느꼈다. 땀을 흘릴 줄 모르는 짐승들이 입으로 열기를 내뿜듯 나이토는 잠시 후들거릴 정도로 혹사시킨 다리로 땅을 디딘 채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생각이 사라진 것 하나는 좋다며 약간 편안함을 느끼던 순간. 나이토는 짜증에 가득 찬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또라이들 뭐야?! 내 차를 가져가고!"
나이토 유즈루: 헉… 헉… 아저씨. 무슨 일이에요?
나이토는 땅을 내려다보아 핏자국을 확인했다. 핏자국이 끝난 곳 바로 옆에 그의 차가 있었다. 분명 예삿일이 아니라며 그의 본능이 냄새를 맡았다. 분명 일행들과 관련이 있다는 냄새를.
"웬 미친놈들이 총을 들이대고선 차를 내놓으라고 날 협박했어! 웬 여자가 그걸 뒤쫓아가던데. 정말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니까! 총은 옛날에 이미 멸종한 거 아니었냐고!"
나이토 유즈루: 어느 방향으로 갔어요?
"이쪽인데. 왜?"
나이토는 차를 잃어버린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이 문과는 정반대인 것을 보았다.
왜 저기로 간 거지? 저기로 가면 문에서 멀어지게 될 뿐인데…
카이다한테서 시간을 벌려는 건가? 모리가 카이다를 죽일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그건 안 돼.
사람이 죽는 건 물론이고. 모리가 처형당하잖아.
나이토 유즈루: 망할… 왜 생각도 안 하고 뛴 거야!
나이토는 멍청한 자신을 저주하며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갔다.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검은색.
칠흑. 심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무것도 손에 닿지 않았다.
우…와… 뭐야…?
나는 몸을 휘적여 내 몸을 만졌다. 그럼에도 주변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뭐야…? 칸나즈키에게 달려들어서 머리카락을 댄 이후론 기억이 없는데…
나나시: 여긴… 어디지?
칸나즈키 시노부: 깨어났구나.
나나시: 우와아아아!
나 밖에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칸나즈키도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또 칸나즈키지만 칸나즈키라는 사람 그 자체의 목소리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머뭇머뭇 물었다.
나나시: 수호령… 씨세요?
칸나즈키 시노부: 그래. 나란다. 여기가 어디인지 궁금해하고 있는 모양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령 씨에게 보이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 입을 열려는 순간 수호령 씨가 먼저 말했다.
칸나즈키 시노부: 네 몸이 탈 거라고 얘기하지 않았니. 이름 없는 아이야.
잠깐. 잠깐.
머리카락을 가져다 대고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 주변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안 보임.
그리고 수호령 씨… 령(靈)… 영혼…?
나나시: 무슨…!! 제… 제가 죽은 건가요?! 안 돼요! 안 돼! 이렇게 죽을 순…
칸나즈키 시노부: 그런 게 아니란다. 넌 지금 정신을 잃었을 뿐이야. 숨도 제대로 쉬고 있어. 그렇지만 깨어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테지.
죽은 것은 아니란 말에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으나 의문은 남아 있었다.
난 어디에 있는 거지? 아니. '나' 말고 또 다른 사람도 있으니…
나나시: 저희가 어디에 있는 거죠?! 전 분명 칸나즈키에게 터치를 쓰고…
칸나즈키 시노부: 그걸 썼다고 부르는 거냐!
버럭 소리와 함께 나는 순간 몸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박력이 칸나즈키의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선생님에게 벌을 받는다는 느낌에 지레 겁을 집어먹고선 몸을 살짝 웅크렸다.
나나시: 으읏…! 갑자기 왜 그러세요!
칸나즈키 시노부: 이 어리석은 것아! 너는 빛을 쓴 게 아니다. 턱도 없이 실패했지!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높은 전압에 연결되려다 터져버린 기계 꼴이야! 네 역량도 모르고 멋대로 빛을 쓰려하니 될 리가 없지 않으냐!
나나시: 그렇지만…
칸나즈키 시노부: 변명하지 마라! 넌 그래서는 안 됐어. 그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면 그 아이가 했던 것을 똑같이 할 수 있는 줄 알았느냐?! 어리석을뿐더러 잘못된 행동이다!
나나시: 잘못됐다뇨! 저는…
칸나즈키 시노부: 그럼 그게 잘못이 아니면 무엇일 것 같으냐? 멍청한 짓? 그래. 그렇게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수호령 씨가 계속 내 말을 끊으며 윽박지르자 기분이 상했다. 상하다 뿐이 아니라 반감과 화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나쁜 말이 생각났지만 최대한 억눌러가며. 나는 대들듯이 수호령 씨에게 소리쳤다.
나나시: 그럼 제가 뭘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요! 저 말고 누가 뭘 할 수 있었는데요? 토키와는 강제적인 터치가 뭔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쓰라고 말했다고요! 정신 자체가 연결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
칸나즈키 시노부: 네가 알면서 이런 일을 벌인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니?
나나시: 화제 돌리지 마세요. 동의 없이 그런 일을 벌이는 게 반복되었다간 캐롤 씨라는 사람은 서서히 흐려질 뿐이에요. 우유에 물을 타서 싱거워지는 것과 똑같이 '캐를 씨' 라는 사람 자체의 정체성은 흔들리고 서서히 작아지겠죠. 그러다 캐롤 씨가 캐롤 씨가 아니게 되어버리면, 과연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할까요? 글쎄. 모르죠! 그 사람이 누구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거라고요!
칸나즈키 시노부: 그래서. 그 아이를 위해 네가 빛을 대신 쓰는 게 옳다는 말이냐! 네 스스로의 몸이 탄다고 해도?!
나나시: 옳냐고요? 하나만 되물을게요. 그럼 뭐가 옳을까요? 캐롤 씨에게 행동할 걸 강요하는 게 옳다는 얘긴가요? 말은 쉽죠. 나한테 피해가 오는 게 아니니까. 강제적인 터치밖에 방법이 없다. 라며 캐롤 씨에게 떠넘기면 자기가 상처를 입을 일은 없으니까요. 그걸 무턱대고 비난할 순 없어요. 자신이 다치는 걸 꺼리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나나시: 그런데 캐롤 씨가 받게 될 피해는 그냥 보고만 있으란 얘기인가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뒤집어쓰는 게 힘을 가진 사람의 의무라도 되나요? 제 생각은 똑같아요. 전 뭐라도 시도해야만 했어요. 네. 저도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지만 이게 가장 나은 선택지였다고요!
나는 말을 계속 쏟아내었다. 언성을 높인 정도가 아니라 화를 내고 있었다. 뭐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는 나 자신도 알지 못했다. 수호령 씨가 내게 말했던 것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불이 확 타오른 것처럼 느껴졌다.
나나시: 터치를 하려거든 생각을 깊게 하라는 충고라면 얼마든지 듣겠지만, 내 은인을 도울 사람이 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내린 판단에 옳다 그르다를 논할 생각 마세요! 대놓고 해변의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카나리와 후루미나미에게서 떡고물이나 받아먹고 있으면서 자기가 더 현명한 사람인 양 굴지 말라고요!
마음 가던 대로 말하던 나는 말할 마음이 사라지자 급속도로 차분해졌다. 나는 뒷머리를 쓸어내리듯이 긁적이며 어색하게 말했다.
나나시: …죄송해요. 제가 말이 너무 심했죠?
칸나즈키 시노부: 신경 쓰지 마렴. 일부분은 맞는 말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휘둘리는 것보다는 받아치는 게 더 보기 좋구나. 빛을 그렇게 쓰는 건 위험하니 다시는 하지 마렴. 그런 건 역량을 기른 뒤에 하는 거야.
칸나즈키 시노부: 또 네 질문에 대답하자면, 우리는 지금 네 기억 속에 있는 거란다.
나나시: 제 기억이라고요?
칸나즈키 시노부: 말했잖니. 네가 기절했었다고. 넌 잠들거나 기절할 때마다 기억을 떠올리지 않았니? 똑같은 거란다. 네가 터치를 시도한 덕분에 나까지 딸려 들어와 네 기억을 같이 보게 됐지만 말이다.
아… 수호령 씨가 그래서 여기에…
나나시: 그런데 제정신 안에 갇혀계신 거면 칸나즈키에게서 떨어져 나오신 건가요? 어… 어떻게 다시 돌려드려야 할까요.
칸나즈키 시노부: 돌려준다고? 그럴 필요는 없어. 우주가 반으로 쪼개진다고 가정해보자. 그럴지라도 우주는 여전히 우주 아니니?
나나시: 어… 그렇죠?
칸나즈키 시노부: 그런 거란다.
난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나나시: 내 기억 속…
주변을 둘러보며 기억 속에서 정보를 찾아 보려던 나는. 느닷없이 나타난 분홍색 머리의 남자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가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나나시: 나잖아?!
그는 나였지만 내가 아니었다. 그는 나나시가 아니라 노네임이었다. 그리고 그와 나란히 걷고 있는 누군가 또한 알아볼 수 있었다.
나나시: 인공지능…
두 사람을 중심으로 처음 보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실내가 퍼지듯이 나타났다. 카텟 기관의 실내. 나는 즉각적으로 기억해냈다. 내 기억은 지금까지 1인칭 시점으로 나를 보고 있었지만, 나는 수호령 씨와 함께 처음으로 '나' 를 제3의 시선에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 배경 안에 들어 있었다. 칸나즈키의 모습을 하고 있는 수호령 씨를 보고서 나는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나나시: 왁! 아. 죄송해요!
칸나즈키 시노부: 괜찮아.
나는 서서히 가까워지는 두 사람을 보며 설마 저 둘도 나를 볼 수 있을까 긴장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나와 수호령 씨는 풍경 안에 들어가 있을 뿐. 풍경과 상호작용을 할 순 없었다. 마치 유령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안 죽었지만!
나와 인공지능은 일종의 슈트처럼 보이는 연보라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상표는 없었다. 나는 피곤하지만 행복한 듯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나… 아니. 노네임을 보았다. 손에 USB를 들고 있는 노네임은 호쾌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침팬지 실험 결과! 아. 실력도 안 되는 것들이 감히 덤비긴. 저 놈들은 이 데이터가 뭘 의미하는지조차 모를 걸. 내기에서 이긴 값으로는 꽤 쏠쏠하지 않아?"
"나랑 상의 없이 내기를 한 게 좀 걸리지만 말이야."
"그 점은… 나도 미안하게 생각해. 그렇지만 시비가 붙었을 때 네가 근처에 없었잖아? 뭐… 있었어도 내기에 대해서 듣는 건 내가 막았을 거야. 그 놈들 너를 아주 싫어하거든. 믿기지 않을 정도라니까."
"기계라며 욕을 한 거야?"
노네임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인공지능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그보다 훨씬 심했지. 그 얘기는 조금…"
"내가 기계라고 멸시받는다고 해도 시비를 일일이 다 받아줄 필요는 없어. 있잖아? 나를 위해주는 게 고맙지만 안 그래도 돼."
노네임은 인공지능의 말에 잠시 대답하지 않다가 천천히 물었다.
"대체 왜?"
"난 신경 안 쓰니까. 기관과 굳이 마찰을 일으키지 말자. 거래를 한 이상 우리도 프로젝트에 계속 참여해야 할 텐데… 기관을 적대하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야. 명망 높은 시라유키를 적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
노네임은 입에 바람을 채워 넣고 푸우우 하는 소리를 내며 손을 내저었다.
"애초에 널 위해 이러는 것도 아니거든. 데이터가 걸려 있으니까 했던 거야. 우리에겐 이 데이터가 필요했잖아. 이걸 요구했더니 그대로 받아들이길래 상품을 타 갔다. 그게 다야."
칸나즈키 시노부: 저 때는 솔직하지 않았구나. 이름 없는 아이야.
나나시: 옆에서 보니까 되게… 아닌 척하는 게 보이네요.
23T는 이런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도와준 걸까…
약간 뭉클한 마음과 우정을 느끼던 도중 나는 한 가지 의문을 느꼈다.
인공지능 아니 23T는 노네임이 자신을 기계 쪼가리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노네임을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는 인공지능을 기계 쪼가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공지능을 기계라고 멸시하는 자들을 고깝게 여겼던 것 같은데…
여기까지 노네임과 인공지능의 사이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둘의 사이가 더없이 친한 것 같다고 느꼈다. 내가 그렇게 착각하는 게 아니라 정말. 노네임은 좀처럼 표현하지 않았고 인공지능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존중과 친숙함이 감도는 것을 보았다.
나나시: 그런데 왜?
"침팬지는 불쌍하지만 시라유키 히메리의 생각도 이해는 돼. 그 여자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했던 거야. 사람을 되살릴 방법을 찾기 위해선 사람과 비슷한 침팬지로 실험을 하고 침팬지를 되살려보려는 거지."
나는 기계 침팬지를 떠올렸다. 그 흉물스럽게 느껴지던 기계 침팬지가 승화 실험을 당할 당시의 데이터를. 노네임이 입수한 것일까?
나와 수호령 씨는 일단 노네임과 인공지능이 향하는 곳으로 함께 발을 디뎠다.
노네임과 인공지능은 그들의 작업실에 들어오고선 사각형 상자같이 생긴 하얀색 기계에 USB를 꽂았다.
"자자자자. 그럼 한 번 볼까…"
그리고 다음 순간. 노네임이 식사를 눈앞에 둔 사람처럼 두 손을 비비며 입맛을 다신 다음 순간. 나와 수호령 씨가 본 노네임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노네임은 의자에 앉은 채 자신의 이마에 손을 올리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성과 없음."
모니터에 94%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노네임의 혼잣말이 대신 내 의문을 설명해 주었다.
"연구의 완성까지 94%… 그러나 6%는 여전히 찾을 수 없어. 여기까지 왔는데…"
"아쉽네. 나도 이번에는 실마리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인공지능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인공지능의 말을 들은 노네임은 그 말에 괴로움을 느끼듯이 자신의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분해된 몸을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이 있어야만 해… 있어야만 한다고."
노네임은 모니터를 계속 들여다보았지만 그가 원하는 답은 모니터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와 수호령 씨는 망연자실하게 얼굴을 자신의 손에 묻는 노네임과 아무런 표정 없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인공지능을 바라보았다.
"그게 없으면 어떻게… 어떻게…"
"괜찮아. 노네임. 그러니 신경 쓰지 마."
"왜… 왜 자꾸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해. 노바디. 나는 신경을 써야 해… 누구보다 네가 신경을 써야 해. 네 몸이잖아. 되찾기 위해 지금까지 연구를 했던 거야! 옛날로 돌아가기 위해서…!"
나나시: 노바디…?
노네임은 인공지능의 손길을 밀어내며 거의 울음을 터뜨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또 다른 방법이 있을 테니까 상심 마."
"또 다른 방법…? 노바디. 그런 건 없어. 없어. 알잖아. 우리가 끝까지 이 분야를 뚫고 나간 거. 정신을 프로그램화하는 과정 전부를 분석했잖아. 이제 몸을 재구축할 방법만 구하면 다 끝나는 거였어…! 그거 하나만 남아 있었는데 그 하나를 아무리 해도 이뤄낼 수 없다니 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노네임의 말을 듣던 도중 내 입에서도 멍하니 말이 흘러나왔다.
나나시: 정신의 프로그램화… 승화 실험… 옛날… 자아… 노바디… 인공지능… 본디 사람… 손상된 육체…
"진정해. 노네임."
"진정 못 해… 이대로라면 진정 못 한다고. 네가 그저 기계가 아니란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해내야만 해…! 네게 사람의 몸을 돌려줘야 한단 말이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23T는 단순히 인공지능이거나 내 동료. 내 친구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복잡했다. 모든 게 더 복잡했다. 섬유가 엮여 밧줄이 된 것처럼 모든 일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래. 밧줄처럼.
또 머리카락 묶음처럼…
23T는 노바디라는 가명을 쓰던 사람이 승화 실험을 거쳐. 정신이 프로그램화된 결과물인 것이다.
"미안해… 미안해 노바디… 실패해서 미안…"
위로의 팔을 뿌리친 채 노네임은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자신의 몸을 웅크렸다. 마치 주변 환경에 맞서 자신의 몸을 마는 아르마딜로 같았다.
칸나즈키 시노부: 저렇게 보면 정말 너와 같은 사람이구나.
나나시: …그러게요.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썅 저게 사람이야?!
생물학적으론 그럴 터였으나 사회학적으로는 그러지 않을지도 몰랐고, 보이는 바에 따르면 절대 사람 같지 않았다. 자동차보다 빠르게 달리는 그녀를 사람에 범주에 놓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초인의 범주에 있었다.
야가미가 차를 상당히 빠르게 몰았기에 자동차보다 빠르다는 것은 사실 과장을 보탠 서술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자동차에게서 적어도 뒤처지지 않았다. 다른 자동차, 주차된 자동차. 불이 제대로 들어오진 않았지만 신호등 등의 여러 변수를 피해 가려면 의도치 않더라도 속도를 줄여야 할 때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카이다는 빈틈을 놓치지 않고 간격을 빠르게 좁혔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미친년… 지치지도 않나 봐.
마유즈미 나데시코: 널 죽이러 오는 거야. 미도리카와! 무서워해야지!
미도리카와 아쿠토: 무섭긴 뭐가 무서워. 그토록 찾던 사람을 만났는데… 이 멀리서도 알 수 있어. 반신반의했지만 너희 말대로야. 저 년은 나와 토가를 잡으러 왔던 그 암살자야…
미도리카와는 자동차의 뒷창문으로 카이다를 노려보며 말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정말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이것도 다 운명이겠지.
운명. 카이다와 미도리카와, 야가미가 엮이는 것은 정말 운명일지도 몰랐다. 카. 만약 카라면 이토록 기이한 카로 묶인 이들은 드물 터였다. 복수로 묶인 세 명의 카라니…
하기와라 우시오: 이야. 슈퍼맨 다음에는 스파이더우먼이야! 스파이더 센스로 위험인물을 탐지한답니다. 대애단해요!
미도리카와 아쿠토: 웃기는 소리 집어치워.
하기와라 우시오: 그럼 안 웃긴 얘기 하자고. 야가미! 이렇게 대책 없이 도망치다간 문에서 멀어질 뿐이야! 모리가 카이다 못 죽이면 이거 위험해지지 않을까?!
야가미 토가: 분명 그렇지만 이 편이 안전합니다. 카이다 씨는 빠르지만 자동차를 따라잡을 순 없어요. 결국 일정 거리 이상은 카이다 씨에게서 멀어질 수 있단 겁니다.
히무로 시라베: 그렇겠지…
나는 납득하며 카이다를 돌아보는 일을 그만두었다. 차의 머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는 기이한 위화감을 느꼈다.
히무로 시라베: …잠깐. 왜 도로가 끊겨 있지?
야가미 토가: 네? 뭐라고요?
내 시력으로도 긴가민가한 거리가 서서히 좁혀지자 나는 그 정확한 윤곽을 볼 수 있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히무로 시라베: 도로가 끊겨 있어. 저길 봐!
야가미 토가: 이런 제길…! 시련의 끝에 도달했군요!
도로가 끊겨 있는 게 다가 아니었다. 건물. 땅. 하늘마저 끊겨 있는 그곳은 지구가 평면이라 믿던 자들이 상상해왔던 세상의 끝을 연상시켰다. 그들의 생각처럼 세상의 끝에는 끝없는 낭떠러지가 있을지 의아했지만, 그런 것을 궁금해하기에는 우리 모두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나는 실감했다. 시련 속 세계는 사람. 구조물. 자동차. 건물까지 완벽하게 구현된 또 하나의 가상현실이었다. 그러나 시련 속의 공간이 결코 무한하지만은 않다는 걸. 우리들은 직접적으로 깨우치게 되었다.
히무로 시라베: 좌회전. 야가미! 좌회전해!
하기와라 우시오: 이거 방향 꺾어야 해! 모노로그 이 새끼 일처리 꼬락서니 봐! 맵을 만들다 말았어?! 환불. 환불해 줘!
야가미 토가: 저도 압니다! 그리고 제발 조용히 좀 하세요. 집중력 흐트러지니까!
야가미가 핸들을 돌렸다. 차 안에 있는 모두가 자신의 몸이 오른쪽으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꽤 불쾌하고 바로 뒤를 카이다가 따라오고 있는 이상. 불길한 일이기도 했다. 마유즈미에겐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팔을 쭉 뻗은 채 환호성을 내질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와아아아! 신난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제기랄. 너희 대체 뭐야. 생각이 없는 것들이야?!
하기와라 우시오: 뒷좌석은 생각 없음 구역. 앞좌석은 생각 너무 많아서 인생 피곤하게 삼 구역입니다. 아가씨.
미도리카와 아쿠토: 이봐. 나도 뒷좌석에 앉아 있거든?
하기와라 우시오: 알고 한 말이야. 하하하하! 찢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뭘 찢어?
미도리카와는 괴로움과 한심함.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짜증을 느끼며 신음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으… 토가만 아니었어도 이런 멍청한 짓을 할 일이 없었을 텐데…!
하기와라가 말했던 대로. 앞좌석의 나와 야가미는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말을 나누기도 했다.
히무로 시라베: 한 방향으로 계속 도망갈 순 없어. 한 번 더 방향을 틀어서 이번에는 문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 같아.
야가미 토가: 일리가 있으시군요. 어차피 카이다 씨는 저희를 쫓아올 수 없으니까요. 세 블록을 더 간 뒤에 왼쪽으로 꺾겠습니다. 그럼 문으로 향할 수 있겠죠.
히무로 시라베: 그래… 아무리 카이다라고 해도 자동차를 따라올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 나의 말을 짓궂은 신이 듣기라도 한 것일까.
몇십 초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빠른 속도로 가까워져 오는 한 트럭을 보았다.
야가미 토가: 뒷차가 꽤 빠른데요? 저도 최대한 빨리 가고 있지만 저 쪽은 더하군요.
히무로 시라베: 잠깐… 설마. 아니겠지.
그러나 트럭이 우리에게 가까워져 왔을 때. 나는 짓궂은 신에게 저주라도 내리고 싶은 심정에 빠져들었다. 트럭의 운전자는 나이가 들었지만 노인이라 불리기에는 아직 먼, 약간 다부지면서도 믿음직한 인상을 주는 남성이었다.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울상을 짓고 있지만 않았다면 미남으로 보일 것 같은 남성.
조수석에 앉은 카이다가 그의 목에 단도를 들이대고 있었다.
야가미 토가: 아. 정말!
야가미는 차를 빠르게 몰았으나 그 속도에 맞춰 트럭 또한 우리를 바짝 쫓아왔다. 나는 트럭의 바퀴를 쏘아 터뜨리기 위해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러자 카이다는 조수석에서 자신의 팔을 창문 밖으로 뻗었다.
내가 머리를 다시 창문으로 넣는 데에 1초만 늦었어도 그녀의 쿠나이가 내게 박혔을 터였다. 뒷창문을 깨고 쏘는 것 또한 염두에 두었지만 그랬다간 카이다의 쿠나이 투척에서 뒷좌석의 모두를 보호할 방법이 없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꺄아아악! 히무로. 안 찔렸어?!
히무로 시라베: 난 괜찮아. 어려운 상황이야. 야가미!
야가미 토가: 저도 압니다! 애초에 이건 좋은 자동차가 아닌 모양이네요. 빠른 줄 알았더니 트럭한테 따라 잡히다니!
하기와라 우시오: 카이다 저저저 미친 새끼 보게! 시련 속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었나 봐! 그런데 어떤 히치하이커가 차주를 저따구로 취급한대?!
뒷창문을 통해 카이다를 살피려던 나는 미도리카와가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는 것을 보았다. 44mm 매그넘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뭘 하려고 그러는 거야. 미도리카…
미도리카와는 주저하지 않고 뒷창문에 총구를 들이대고 카이다를 겨냥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귀가 터질 것 같은 격발음이 차 안에서 울려 퍼지자 마유즈미와 하기와라는 귀를 막은 채 꽥 비명을 질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야야야야! 내 귀가!
하기와라 우시오: 내가 말했잖아. 생각 없댔지!
미도리카와 아쿠토: 해야만 했어. 야가미. 저 년이 뭔갈 던지면 운전 부탁할게!
야가미 토가: 저도 그러고 싶지만 지금 백미러를 보고 투척물을 용케 다 피할 자신은 없습니다!
히무로 시라베: 하기와라. 머리 숙여!
하기와라는 귀가 어깨에 닿도록 머리를 홱 돌렸다. 나는 트럭의 바퀴를 향해 내가 입수한 총을 발사했다. 44mm만큼의 격발음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컸다.
그러나 타격점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옆이나 비스듬히 맞은 총알들은 타이어를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카이다의 협박을 받고 있는 트럭 운전자가 가능한 한 핸들을 흔들어 조준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총알을 아껴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카이다는 트럭의 문을 확 열어젖힌 뒤 문틀을 손으로 단단히 잡고 하체를 내던졌다. 그러나 카이다는 트럭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니었다. 카이다는 자신의 몸으로 궤도를 만들고 추진력을 내어선 트럭 위로 올라선 것이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죽어어어어!
미도리카와는 잔뜩 분노에 처한 외침을 토하는 와중. 트럭은 야가미가 운전하고 있는 차에 가까워져 왔다.
그리고 카이다는 몸을 내던졌다. 이번엔 트럭 밖이었다.
야가미 토가: 이런 세상에! 다들 꽉 잡으세요!
쾅하는 소리와 함께 자동차의 천장이 흔들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와아아앗!
하기와라 우시오: 무친련…무친련…무친련…
미도리카와 아쿠토: 날 잡으려고 왔나? 응?!
미도리카와는 천장에 대고 마구잡이로 총을 쏘았다. 탕 탕 귀청을 찢는 총성이 울릴 때마다 천장에는 그에 비례하는 구멍이 생겨났다. 카이다는 미도리카와를 직접적으로 노리지 않았다. 뒷창문으로 몸을 넣기에는 총을 들고 있는 미도리카와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카이다는 모두의 생명줄을 잡고 있는 이에게 다가갔다. 야가미 쪽의 창문이 쨍그랑 깨지더니 카이다의 손아귀가 야가미의 팔을 붙잡았다.
야가미 토가: 크윽…!
미도리카와 아쿠토: 안 돼! 이 개새끼가!
미도리카와는 카이다에게 총을 겨누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야가미는 체구가 클뿐더러 카이다는 사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차 문에 붙은 채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니 내 쪽에서도 카이다를 쏠 수가 없었다.
카이다는 밖에서 손잡이를 당기고 발로 자동차를 차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는 누군가가 반응할 새도 없이 야가미의 몸을 붙들고 밖으로 끌어내려했다.
야가미 토가: 카이다 씨…! 이러지 마세요. 저흰 같은 편입니다!
카이다 쿠로하: 웃기는 소리 마! 네가 미도리카와를 되살리려 하는 거 모를 줄 알고? 우린 다른 편이다. 그러니 너도 죽어줘야겠어!
야가미의 몸이 점점 밖으로 끌려나가자 차는 더없이 불안정하게 움직였다. 우리는 차체가 흔들거리고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휘청이는 것을 느꼈다. 뒷좌석에서 마유즈미와 하기와라의 비명이 들렸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토가! 안 돼!
히무로 시라베: 야가미. 최대한 끌려나가지 않는 것에 집중해. 다른 것을 잡아! 운전대는 내가 잡을 테니까!
내가 운전대를 붙잡으며 말하자 야가미는 약간 안도한 기색을 보였고, 그는 두 손을 완전히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한쪽 손으로 카이다를 밀어내고 나머지 하나로는 자신이 딸려나가지 않도록 좌석을 붙잡았다.
야가미 토가: 당신도 운전을 할 수 있으신 것 같군요! 운전대를 잡아 주세요!
히무로 시라베: 이론상 운전할 수 있어. 최선을 다할게.
하기와라 우시오: 잠깐. 이론상? 야! 이론상이라니!
야가미가 여전히 운전석에 앉아 있었기에 내가 운전에 쓸 수 있는 공간은 얼마 없었다. 나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선 간신히 엑셀과 브레이크까지 한쪽 다리를 집어넣었다.
나는 주저 없이 액셀을 밟았다. 차 안의 모든 이들의 고개가 잠시 뒤로 꺾였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속도를 나타내는 바늘이 오른쪽으로 홱 꺾이는 것을 보고 나는 운전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우와아아아! 세상에 이거 진짜 엄청 빠르다!
하기와라 우시오: 흐어어어어어어!
미도리카와 아쿠토: 이런 미친…!
야가미 토가: 히무로 씨?! 너무 난폭하지 않습니까!
히무로 시라베: 사고만 안 나면 안전운전이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래?! 그렇구나!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야! 아니야아아아! 우와아아아아아앙!
카이다 쿠로하: 미친 자식…!
히무로 시라베: 떨어져 줘야겠어. 카이다!
카이다 쿠로하: 꺼져어어어어어!
나는 일부러 카이다를 떨어뜨리기 위해 엑셀을 밟던 도중 브레이크를 밟거나 차체를 전봇대 가까이로 가져다 대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녀는 차를 꽉 붙들거나 잠시 차체 위에 올라가는 등 갖은 방법을 사용해 떨어지지 않으려 애썼다. 집념과 완력 하나만큼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리고 그녀가 차체 위로 올라갔을 때. 야가미가 팔을 뻗어 문을 닫았다. 나는 그에게 다시 운전대와 엑셀, 브레이크를 맡겼고 나는 대신 총으로 차체의 천장을 겨누어 쏘았다. 몇 번 맞는 소리가 들렸지만 치명적인 타격은 아닐 것 같았다.
미도리카와도 카이다를 쏘기 위해 그녀의 위치를 특정하려 했다. 천장 위에 난 구멍을 통해 카이다가 어디에 있는지 보려던 순간…
카이다 쿠로하: 잡았다. 이 새끼야!
카이다 쿠로하는 미도리카와를 붙잡았다.
사실 거의 붙잡지 못할 뻔했다. 그녀의 옷에 손이 닿기 직전. 카이다는 누군가가 자신의 꼬리를 잡고 당기는 듯한 인력을 느꼈다. 그녀에게 꼬리가 없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다음 순간 꼬리를 잡는 듯한 인력은 그녀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무언가가 그녀를 잡고 어딘가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카이다는 영문을 알지 못했지만. 순간 온 힘을 다해 미도리카와를 향해 팔을 뻗었고 그녀의 옷을 붙들었다.
그리고 곧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힘이 카이다와 미도리카와를 함께 끌어당겼다. 미도리카와는 자신의 부순 창문을 통해 차체 밖으로 딸려나갔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우와앗?!
야가미 토가: 바다뱀!
야가미가 손을 뻗었으나 미도리카와에겐 닿지 않았다. 카이다와 미도리카와는 자동차를 가공케 하는,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날아갔다.
카이다 쿠로하: 크으으윽…! 이 씨발. 이게 각성제야?!
카나리한테서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일 것까진 없잖아! 카이다는 속으로 원성을 토했다. 미도리카와는 생전 처음 보는 경험에 눈을 크게 뜨고는 놀란 듯한 비명을 마지막으로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카이다는 미도리카와를 붙든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채, 미도리카와와 함께 공중을 갈랐다. 찰나의 순간 끌려가고 있는 것은 자신뿐이며, 미도리카와는 그녀가 잡고 있기 때문에 함께 오는 것임을 눈치챈 카이다는 미도리카와를 확 잡아당긴 뒤 옷이 아니라 허리를 붙들었다.
미도리카와는 난데없이 도로 위를 날아다니는 꼴이 되어 적잖이 당황했으나, 우선 눈앞에 보이는 적이자 자신을 붙잡은 카이다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사실 발버둥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미도리카와는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카이다의 몸에 겨누었다. 언젠가 카이다를 잡기 위해 구비한 44mm 매그넘이었다. 곰에게서 몸을 피하는 데에도 쓰이는 권총을 사람에게 겨누었으나 미도리카와는 전혀 과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총구를 본 카이다는 당장 미도리카와의 손을 내려쳐 총을 떨어뜨리려 했지만, 미도리카와 쪽이 더 빨랐다.
탕. 탕. 탕.
카이다 쿠로하: 끄아아아아악!
카이다의 복부와 흉부에서 울컥 피가 터져 나와 미도리카와의 몸을 적셨다. 무겁고 두꺼운 탄두는 카이다의 몸을 뚫기보다는 짓뭉개며 그녀의 몸에 박혔다. 미도리카와는 최대한 심장이나 머리를 노리려 했으나 서로의 몸이 흔들리고, 돌아가고, 이리저리 꺾이며 뒤집히는 상황에선 조준이 흔들렸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죽어. 죽어! 죽으라고!
탄창이 빌 때까지 총을 쏘며, 미도리카와는 악에 받혀 소리쳤다. 머리가 터질 정도의 뜨거움과, 생살이 파이는 고통을 느끼며 카이다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죽음의 맛. 자신이 토하는 피의 맛을 혀로 느낀 순간 카이다는 자신의 증오를 되새겼다.
카이다는 허벅지에 수납된 쿠나이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한 바퀴 돌린 뒤 그대로 미도리카와의 가슴팍을 찔렀다. 미도리카와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지며 가슴팍에서는 축축한 피가 배어 나왔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크흑…!
미도리카와는 격통에도 총의 방아쇠를 놓지 않았다. 탕. 탕. 탕. 한 발 더 쏠수록 흔들리지 않던 카이다의 몸에도 점차 구멍이 생겼고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들은 서로를 붙잡은 채로, 이쯤에서 그만두자는 양보 따위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으며 순수한 증오를 쏟아냈다.
미도리카와는 총알이 떨어진 44mm 매그넘을 던져버리고 뒷주머니에서 44mm 매그넘을 하나 더 꺼냈다. 몸에 날붙이가 박혀 있는데 공중을 날아다니며 장전을 하겠다는 건 꿈같은 소리였다. 자신에게로 향하는 총구를 본 카이다는 그 손을 내려치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미도리카와를 놓칠 게 분명했다. 한 손으로는 미도리카와를 붙들고 나머지 손으론 쿠나이를 잡아야 했기에 카이다에겐 총을 내려놓게 할 방법이 없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를 죽여라. 해변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아라. 그게 카이다의 임무였다. 모노로그가 그녀에게 내린 임무. 카이다는 그것을 완수해야만 했다.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듣기 위해.
카이다 쿠로하: 몸에 구멍이 나더라도 말이야아아아아아!
미도리카와 아쿠토: 크으윽. 흐윽!
카이다는 눈을 부릅떴다. 날아가기 시작한 지 십수 초도 되지 않았는데도 두 사람은 온 도로에 피를 흩뿌렸다. 다시 총구가 그녀를 향하고 탕. 탕. 탕. 탕. 총탄이 카이다의 몸에 날아왔다. 어깨뼈. 폐. 늑골. 쇄골이 차례차례 본래의 형태를 잃어갔다.
카이다는 괴성을 내지르며 미도리카와의 몸에 박아 넣은 쿠나이를 촤악 뽑아냈다. 그리고는 이를 악문 채 미도리카와의 몸에 다시 찔러 넣기를 반복했다. 피가 사방으로 튀며 그들의 몸이 흠뻑 젖어갔다. 얼굴에마저 마구 피가 튀어 그들은 어느 게 자신의 피이고 어느 게 상대의 피인지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고함을 지르고 신음하고 피를 토하며 날아가는 두 사람은 붉은 은하수를 가로지르는 한 쌍의 혜성 같았고, 서로의 영역을 다투는 악마와 마귀 같았다.
카이다 쿠로하: 그르르아아악! 악! 악! 아악! 악! 끄아아악!
카이다의 피가 폐에 차올라 가래가 끓는 듯한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죽어어어어! 카이다 쿠로하! 죽어어어어어!
순수한 악의의 대결 속에 승자는 없었다. 미도리카와의 총알이 카이다의 경동맥을 꿰뚫었을 때. 카이다의 목에는 휑한 구멍이 생겼다. 그녀는 팔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미도리카와 또한 심장에 쿠나이가 꽂히자 눈에 초점이 흐려지며 그대로 총을 놓치고 말았다.
카이다의 손이 미도리카와를 놓았다. 공중을 날아가던 미도리카와는 심장에 쿠나이가 꽂힌 채로 땅에 떨어졌다. 바닥에 그녀의 몸이 끌리며 회색 아스팔트에 새빨간 자국이 남았다. 언젠가 검은색으로 변할 핏자국이었다.
미도리카와의 몸은 바닥을 몇 바퀴 구른 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미도리카와는 눈을 감지 못한 채 숨이 멎었다. 카이다 또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옆으로 숙였다. 폐로 가지 못한 호흡이 목의 구멍에서 새어 나오며 피리를 부는 듯한 피이익 소리를 냈다. 그리고 한 번의 무산된 호흡마다 한 번씩. 피가 울컥이며 흘러나왔다.
카이다 쿠로하: 그으으윽… 크르륵… 커흑…
카이다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그녀의 몸이 문을 향해 날아가고 있기 때문. 그것 하나뿐이었다. 시련 속에 십 초만 더 머물렀다면 카이다의 의식은 그 자리에서 죽고 해변의 카이다 또한 뇌사했을 터였지만, 각성제의 영향으로 카이다의 의식은 문을 향해 나아갔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 그녀의 의식은 해변의 육체로 다시 들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문 밖의 상황이 그녀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 또한 아니었다.
카이다 쿠로하: 꼬르르르르륵?!
카이다는 눈을 뜨자마자 사라진 통증. 그리고 새롭게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무언가. 괴로움. 호흡의 불가능. 물. 바다를 느꼈다. 어지러운 수면 위로 그녀의 호흡이. 공기 방울이 보글거리며 올라갔다. 카이다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누군가를 어렴풋이 보았다.
모리 레이코: 제기랄. 결국 깨어났나.
모리는 카이다의 목을 잡고 일어나지 못하도록 붙들었다. 하지만 턱도 없이 부족했다. 카이다가 몸을 일으키고 폐에 가득 찬 바닷물을 토해내는 것을. 모리는 막을 수 없었다. 사실 카이다가 일어나는 힘에 밀려나 몇 발자국을 물러서기까지 했다.
카이다 쿠로하: 커흐아아악! 콜록! 콜록! 큭…! 카학!
모리 레이코: 이것에도 안 죽는다니…
다리가 녹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열심히 빠른 걸음으로 걷는 나이토는 많은 사람들의 비명을 들었다. 그는 숨을 내쉬며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다.
"사람이 날아다녔다면서?"
"서로 싸우며 날아다닌 것 같대!"
"비취색 머리는 죽었는데 검보라색 머리는 어디 간 거야?"
나이토 유즈루: 썅. 뭐야…?!
영문은 몰랐지만 문이 있는 방향으로 들려오는 웅성거림이었다. 검보라색 머리는 십중팔구 카이다를 의미할 터였고 그럼 비취색 머리는 미도리카와일 터였다.
결국 실패한 건가? 망연자실하게 걸음을 멈추었던 나이토는 의식이 문 손잡이를 잡으면 다시 해변으로 돌아감을 되새겼다. 그것은 자취를 감추었다는 카이다의 행방과 분명 관련이 있을 터였다.
카이다가 깨어나면 가장 근처에 있는 사람은 모리다.
나이토 유즈루: 모리이이이이이!
나이토는 이를 악물고 문을 향해 달려갔다.
모리 레이코: 어차피 살 가치도 없는 인생. 내게 죽어주면 안 되겠나?
모리는 나이토의 움직임을 모방하듯이 머리 위로 주먹을 올리는 하이 가드 자세를 취했다. 카이다는 자신이 마셨던 물을 바다에 토해내며 고통과 호흡곤란에 몸부림을 쳤다. 그리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자신을 이 꼴로 만든 모리를 향한 증오로 치환되었다.
카이다 쿠로하: 콜록. 지랄이 나셨어들. 지랄이… 마스크. 깡통. 그리고 이젠 땅꼬마. 너 말이야. 너 같은 새끼마저 나한테 꼬인다니까… 하이에나랑 벌레 새끼들이 끝도 없이 꼬여들어서는…
카이다 쿠로하: 다 날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야… 다들 내가 밉지. 응? 안 그래. 개 같은 년아?!
카이다가 허벅지에서 쿠나이를 꺼내 모리에게 내질렀다. 모리는 다리를 뒤로 내딛고 고개를 돌렸다. 쿠나이가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고 핏방울이 바다에 떨어졌다.
피의 냄새를 맡은 가재 괴물들의 시선이 한순간 모리에게로 쏠렸다.
카이다는 다리로 바다를 박차고 뛰어올라 모리에게로 몸을 부딪혔다. 카이다의 몸무게로 인한 충격으로 바닷물이 사방으로 퍼졌다. 대포알을 떨어뜨린 것만 같았다. 곧 카이다는 몸의 중심을 잃은 모리의 양손에 자신의 손을 올리고선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
모리 레이코: 큭…!
카이다 쿠로하: 너희는 날 미워하잖아. 누구도 날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까 내가 너희를 미워해도 나한텐 아무런 잘못도 없는 거다. 알겠지?!
카이다는 자신의 몸무게로 모리를 누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모리는 카이다에게 붙잡힌 자신의 두 손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그것들은 땅에 고정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완전히 들뜬 미소를 짓는 카이다를 보자 모리는 그 가증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외쳤다.
모리 레이코: 이거 놔라. 더러운 내통자! 놓으란 말이다!
"데드. 어. 체크?"
모리는 카이다에게 소리친 직후. 가재 괴물 한 개체가 어느새 자신의 옆까지 온 것을 눈치챘다.
다음 순간 모리는 자신의 손에 불같은 통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모리 레이코: 크흐윽!
팔을 휘둘러 가재 괴물을 내쫓으며 모리는 몸을 한 바퀴 둘리고 다리로 바다를 박찼다. 집게에 잡힌 건가? 카이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카이다가 손을 풀어준 것에 가까웠지만)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짚고 미간을 찌푸린 채. 손가락에 입은 부상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은 그 자리에 없었다.
모리는 자신이 내쫓았던 가재 괴물을 바라보았다. 왼손의 절반이 가재 괴물의 아가리로 스르륵 사라지고 있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테니. 작별인사로 입 맞추세요. 쪽. 뒤늦게 쓰라린 통증에 모리는 주먹을 꽉 쥐었지만 그녀의 왼손에 남은 손가락은 약지와 소지뿐이었다.
모리 레이코: 이… 이런 빌어먹을…
그녀의 손이 잠시 부르르 떨렸다.
카이다 쿠로하: 이걸 어쩌나. 이제 손이 병신이 됐네?
모리 레이코: …날 해치면. 그것으로 네가 더 나은 존재가 될 것 같나?
카이다는 모리의 말에 뒤틀린 미소를 만연히 지어 보였다. 그러면 자신이 우위를 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이다는 손가락 일곱 개를 펴 그녀 앞에 보여주며 조롱조로 웃었다.
카이다 쿠로하: 하하하하! 앞으로 10점 만점에 7점짜리 인생을 살게 된 주제에. 뭐?
모리는 아무 말 없이 일곱 손가락을 그녀에게 마주 보여주었다.
모리 레이코: 이제 내게 있어서는 7점이 만점이다. 나의 기준은 나다. 그 누구도 아니야. 너와 달리 말이다.
모리 레이코: 넌 다른 사람의 고통 말곤 자신을 긍정할 방법이 없다. 그것 말고 원하는 것도 없다. 삶의 자원은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다지만. 네 것은 시기가 전부군.
나이토 유즈루: 모리이이이이!
모리는 뒤에서 들려오는 성량 큰 외침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나이토가 문 앞에서 눈을 뜬 채 그녀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곧 그가 모래사장을 가르며 달려왔다.
나이토 유즈루: 너무 늦게 왔어. 망하아아아알!
공수증 탓에 내게 도움을 줄 순 없겠지만 적어도 마지막 눈도장은 찍겠군. 이라 생각하며 모리는 옅게 웃었다. 그 웃음마저 카이다를 보자 경멸로 치환되긴 하였지만.
모리에겐 할 말이 많이 남아있었다. 사실 그녀는 한심하고 전망 없는 삶을 사는 이들에게 몇 시간이고 설교를 늘어놓을 수 있었다. 상대가 도덕적으로 어긋난 흑막의 내통자이자 암살자라면 인격모독적인 말도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카이다는 그녀가 더 말하게 두지 않았다.
카이다는 모리의 목을 잡고선 그녀를 바다에 밀어붙였다. 그리고는 모리가 일어나기 전 재빨리 그녀의 상체에 올라탔다. 벗어나기 위해서는 몇 배의 힘이 필요한. 그래서 사실상 빠져나갈 수 없는 풀 마운트였다.
코와 입. 눈에 바닷물이 들어오자 모리는 고개를 들려했으나 카이다는 자신이 붙잡고 있는 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입에서는 짐승이 분을 이기지 못하는 듯한 크르릉 소리가 흘러나왔다.
카이다 쿠로하: 닥쳐… 이 새끼야… 넌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선생님처럼 설교나 해대고… 네가 어디까지 그딴 소리를 내뱉을 수 있나 보자고!
"데드. 어. 체크?"
모리는 자신의 머리가 거의 다 물에 잠기는 것을 느끼며 주변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피 냄새를 맡은 가재 괴물이 모리를 향해 스멀스멀 몰려오고 있었다. 그것들은 모리의 살 맛을 보고 피를 원하는 맹수였다. 멍청하고 둔하며 징그럽게 생긴 외관과 다른 날카로운 부리와 집게. 그것들이 사방에서 모리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가 저항할 방법은 없었다.
카이다 쿠로하: 너 같은 새끼들은 한 번 호되게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응? 한번 좆돼 봐. 그 뒤에도 그렇게 떠들 수 있을까? 못할 걸?
모리 레이코: 그래. 똑똑히 봐라. 네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니까.
모리는 지지 않겠다는 듯이 응수했지만, 사실은 조금 자신이 없었다. 과연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공리를 위해. 이런 한심한 열망에 연료를 주지 않기 위해 비명을 참을 수 있을까?
사실. 비명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다음 순간 분을 이기지 못한 카이다가 모리의 목을 더 바닷속으로 밀어 넣어 그녀의 머리를 잠기게 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가짐과는 관계없이 벌어질 일이 벌어졌다.
가재 괴물들은 살과 의복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것들은 집게발과 부리로 그녀의 신발을 발이 들어있는 채로 찢어발겼다. 칼 같은 부리는 구두의 가죽을 손쉽게 뚫고 그녀의 발가락을 빼앗아갔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전부. 그 뒤에도…
모리 레이코: 꼬르륵…!
의지력만으로는 참을 수 없는 통증이었다. 모리는 실신할 것 같은 격통 속에서 입술을 깨물며 몸을 움직이려 애썼다. 그러나 상반신이 카이다에 의해 눌린 이상. 모리가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손톱으로 자신의 목을 붙잡은 손을 할퀴어도 카이다의 피부에는 흠집 하나 남지 않았다.
카이다는 해수 탓에 따가울 텐데도 부릅떠진 모리의 눈에 공포가 서리는 것을 보기 위해 그녀를 응시했다. 산채로 가재 괴물에게 뜯어 먹히는 와중 생기는 깨달음. 마지막 가면과 존엄성이 벗겨지는 순간. 정말 죽을 수 있겠다는 한 줄기의 자각이 그녀의 눈에 떠오르는 것에. 카이다는 누구보다도 굶주려 있었다.
아마 그것은 일종의 반달리즘 심리와 닮아 있었을 것이다. 현저하게 약한 몸에 같잖게도 큰 뜻을 품고 실천하려 드는 그녀를. 설설 기지 않고 강대한 자신보다 자기가 더 낫다는 듯이 구는 모습. 선생님처럼 설교를 하려 드는 모습. 그 자기 주제를 모르는 모습을 카이다는 도무지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머지 한 발만은 먹히지 않으려 마구 휘적이는 동안. 한 가재 괴물은 먹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다른 가재 괴물들이 입을 대고 있는 부위에 집게발을 가져다 댔다.
뼈를 부러뜨릴 정도의 강한 악력을 가진 집게가 모리의 오른쪽 발목을 잘라냈다.
모리 레이코: 꼬륵… 꼬륵…!
카이다 쿠로하: 그래. 그래… 내 눈을 똑똑히 봐라. 죽어가는 꼴을 보게…
카이다는 방울뱀 같은 웃음을 지었다. 그럼에도 모리의 눈에는 공포가 서리지 않았다. 서리는 것은 분노뿐이었다. 고통과 실패에 대한 분노로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서서히 절박함 또한 떠올랐다. 익사에 대한 절박함. 부상에 대한 절박함이었다. 그것은 생물인 이상 보일 수밖에 없는 반응이었다.
카이다는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누군가가 직업 만족도를 조사하기 위해 종이를 들이민다면, 카이다는 주저하지 않고 만점이라고 써넣었을 터였다. 바닷물에 코와 입이 빠진 채 괴로워하는 모리의 모습이 카이다에게는 너무나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정신적으로 그녀보다 고결한 자의 신체를 추악한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것. 꺾어버리는 것. 훼손시키고 상처를 입히는 것.
카이다는 그만 그 일에 열중하고야 말았다.
나이토 유즈루: 뿌워어어!!
나이토가 괴성을 내지르며 카이다의 머리에 정통으로 주먹을 날렸다. 관자놀이에 직격이었다.
카이다의 목이 한 번 주먹의 방향으로 쏠린다 싶더니 그녀의 몸이 옆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그녀의 얼굴 반쪽이 바닷속으로 빠졌다. 눈에 바닷물이 들어왔으나 카이다는 따가움을 거의 느끼지도 못했다. 몸의 감각이 둔했기 때문이었다.
'뭐지? 뭐에 맞은 거야.'
끔찍한 수술의 과정 이후로. 카이다는 그런 충격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자동차에 제대로 한 번 치였던 것이 비슷할 것이다. 그마저도 자동차의 파손이 더 심했다. 핸들을 잡고 있던 놈도 카이다는 그 자리에서 처리했다. 아마 그것은 충격의 표면적이 넓으며, 급소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터였다. 비교적 작은 면적의 강한 충격이 급소에 정확히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몸이 안 움직이잖아.'
나이토가 간신히 발로 바다에 발을 디디자 그는 무심코 자신의 발과 그 주위를 둘러싼 바다를 바라보았고, 자신이 바다에 있음을 인식하자는 그 즉시 부들부들 떨려오는 몸을 최대한 억눌렀다. 입을 다물어보려 애쓰는 그의 윗턱과 아래턱이 부딪혀 딱딱딱 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이토는 이가 떨리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악문 뒤. 당장 쓰러질 것 같은 낯빛을 한 채로 모리를 향해 달려갔다.
나이토는 모리의 발을 먹어치우던 가재 괴물들의 머리를 세게 밟아 터뜨렸다. 푸확 하는 소리와 함께 담갈색 체액이 바다에 퍼졌다. 그러나 먹힌 발가락은 돌아오지 않았다. 잘린 발목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나이토는 더 빨리 움직이지 못했던 자신을 탓했다.
모리 레이코: 콜록. 커흑! 스… 승부사…?
나이토 유즈루: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내가 늦게 와서 네가 이 꼴이 됐어!
모리 레이코: 틀렸다. 윽… 스스로의 공포를 극복했군.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임을 알고 있었지…
모리의 몸에 힘이 빠지며 그녀의 눈이 서서히 게슴츠레하게 변해갔다.
나이토 유즈루: 안 돼. 죽지 마! 지금이라도 빨리…
모리를 들어 해변으로 옮기려는 찰나. 수면 위로 상반신을 일으킨 모리가 그에게 소리쳤다.
모리 레이코: 콜록! 큭! 난 괜찮다. 그렇게 쉽게 죽진 않아. 승부사. 싸움에나 집중해!
카이다는 반쯤 잠긴 얼굴로 바닷물을 마시며 생각을 계속했다.
'몸이 안 움직인다. 왜지? 난 무적이야. 저 놈 벌벌 떨고 있잖아. 바다를 무서워하는 거야. 어쩐지 팔에 밧줄을 묶고 자더라니. 내가 저런 약해빠진 정신머리를 가진 놈한테 질 리가 없어. 바다 같은 걸 무서워하는 저딴 새끼한테 어째서 내가…'
나이토 유즈루: 야. 무슨 개소리를…
모리 레이코: 쓰읍… 한눈팔지 마! 팔과 나머지 발 하나는 남아있으니 움직일 수 있다. 너는 첩자를 상대해라. 너라면 할 수 있다!
나이토는 모리에게 순간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통증이 끔찍할 텐데도 모리의 어조는 조금밖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제대로 싸우지 못할까 봐 염려한 것이리라.
공리의 화신이 따로 없네. 나이토는 생각했다. 모리는 주변에 가재 괴물이 오는지 살피며 무릎을 굽히고 남은 손가락과 손바닥을 해변에 얹은 채 내륙으로 나아갔다.
그동안 머리가 반쯤 물에 잠긴 카이다는, 다른 먹잇감을 찾은 가재 괴물들이 자신의 쪽으로 기어 오는 것을 보았다.
'꺼져. 개자식들. 너희가 날 먹을 순 없어. 너희 따위가 감히 그럴 순 없다고.'
"데드. 어. 체크? 디드. 어. 치크? 덤. 어. 첨?"
가재 괴물이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이렇게 됐을까? 네 결핍에서 비롯된 열등감을 투사해서? 나이토 유즈루를 얕봐서? 아니면 또 방심 때문에? 무분별한 증오와 시기심이 업보로 돌아온 건가?'
'닥쳐. 닥쳐. 개새끼들아. 난 최강이야. 내가 탑의 누구보다 강해. 너흰 다 내 밑이라고… 너흰 다 나보다 하등해. 아무것도 아닌 새끼들아… 감히 날 건드리고 무사할 것 같아?'
카이다의 몽롱한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제기랄. 움직여. 움직여. 움직이라고!'
카이다가 몸을 일으키며 가로로 단검을 휘두르자 그녀에게 다가오던 가재 괴물 셋의 머리에서 담갈색의 체액이 터져 나왔다. 가재 괴물들은 몸을 까뒤집은 채 다급하게 질문을 내뱉으며 거품을 꼬륵꼬륵 내뿜었다.
"대드. 어. 채애애애앰…?"
나이토 유즈루: 모리. 최대한 빨리 도망가! 시련 안에 있는 녀석들도 곧 올 거야! 그때까지 조금만 버텨!
모리 레이코: 너야말로 버텨라. 너라면 할 수 있다! 승부사!
카이다 쿠로하: 지랄을 해요. 지랄을.
몸을 일으키며 불안한 기운을 내뿜은 카이다를 본 나이토는 하이 가드 자세를 취했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나이토는 서서히 떨려오는 몸을 다시금 진정시켰다.
나이토 유즈루: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언젠가는…
카이다 쿠로하: 아가리 닥쳐. 손을 병신으로 만들어놓을 테니까.
나이토 유즈루: 그렇겐 못 하지.
가재 괴물들은 그들을 향해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은 동족들이 처참히 죽는 것을 눈앞에서 본 뒤의 공포 같은 게 아니었다. 가재 괴물들에겐 그런 관념이 없었다.
가재 괴물들은 단지 아무 말도 없이 서로 맞부딪히고 공방을 나누고, 바다를 가르고 물을 튀기며 싸우는 그들을 도무지 먹잇감으로 볼 수 없었다. 그것뿐이었다.
야가미 토가: 바다배애애앰!
야가미는 공중을 날아간 미도리카와를 따라. 자동차를 거세게 몰았다. 그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바다뱀이라는 외침이 들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저거 대체 뭐야? 자동차보다 빠르잖아!
히무로 시라베: 여긴 의식 안의 세계야. 카이다가 문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건 기분 탓일까?
마유즈미 나데시코: 카이다가 해변에서 깨어나니까 시련 속의 정신이 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라고?
어느새 미도리카와와 카이다는 내 눈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멀어졌지만, 우린 도로에 남은 카이다의 핏자국을 쫓아 미도리카와의 행방을 쫓았다. 이번에 벌어진 일도 미도리카와의 거주지를 찾던 방법과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피가 훨씬 많았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카이다의 피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핏자국을 따를수록 우리는 출혈량에 놀라게 되었다. 처음에는 조금 많다고 보이는 출혈은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피칠갑이라는 단어로밖에 묘사할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한 사람이 흘렸다기에는 너무 여기저기에 퍼진 출혈을 보며 나는 피가 두 사람 모두의 것임을 알아냈다.
카이다와 미도리카와가 어디로 향했는지는 몰라도 그들이 서로의 몸을 해쳐 놓았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세상에. 안 돼. 미도리카와…
하기와라 우시오: 젠장. 아무래도 이번 시련에서도 미도리카와는 못 구한 것 같아. 글렀어! 세 번째 시련도 마찬가지일 거야. 카이다가 사사건건 방해를 하는데 방법이 있을 리가 없지!
히무로 시라베: 우리가 하기 나름이야. 그리고 야가미 앞에선 그렇게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
하기와라는 자신의 머리 옆에 오므린 손을 대고는 펑하는 소리를 내며 손바닥을 폈다. 자신의 머리가 터진 것 같다는 표현이었다. 야가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러나 절박하게 차를 몰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대체 왜야? 왜 그러냐고. 야가미 너는 미도리카와한테 복수를 하고 싶어 했잖아. 자기를 버렸으니까!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무슨 자기 전여친인 것처럼 굴어?
히무로 시라베: 글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야가미가 미도리카와를 친구로 생각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아. 그 이상의 정보는 몰라도… 두 사람이 껴안는 거 봤잖아.
하기와라 우시오: 마유즈미 너 뭘 착각하고 있는데 평범한 친구들은 저런 거 안 해. 저런 건 특별한 사이인 것들이나 하는 거야! 그런데 야가미는 미도리카와를 증오하면서 또 미도리카와랑 아주 훈훈한 분위기를 풍기잖아. 씨발 뭐냐고. 야가미. 대답 좀 해 봐!
히무로 시라베: 지금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야가미 토가: 바다뱀… 바다뱀…
야가미의 허탈한 목소리가 서서히 작아졌다. 차를 꽤 몰았다고 생각했을 때 마침내 핏자국이 끝나며 동시에 가장 큰 핏자국이 남은 곳이 우리의 앞에 드러났다. 야가미는 제일 먼저 차에서 내린 채 피투성이가 된 미도리카와에게 달려갔다. 그는 미도리카와의 몸을 흔들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야가미 토가: 바다뱀… 바다뱀. 정신 차리세요. 바다뱀.
야가미는 붉은색으로 물든 미도리카와의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바닥에 닿고 있는 그의 무릎이 미도리카와의 피를 천천히 머금었다. 나는 낭패감을 느끼며 아주 조금 전까지 미도리카와였던 것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부릅뜬 채 죽은 미도리카와의 어깨를 흔들며 야가미는 중얼거렸다.
야가미 토가: 이건 아니야…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절대로. 어떻게… 어째서 또?
히무로 시라베: 돌아가야 해. 야가미.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순 없어. 해변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야가미 토가: 또… 또 구하지 못했습니다. 또…
미도리카와의 손에는 여전히 권총이 들려 있었다. 사후 경직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죽기 직전에도 손에서 총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이게 복수심인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 복수란 말인가?
또 이게 그녀의 카란 말인가.
나는 충분히 강하지 못했던 나의 행동이 죽음에 영향을 주었을 탑의 미도리카와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와 똑같이 생긴 사람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나는 죄책감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상황의 급박함과 해변으로 돌아가기 위해 야가미를 효율적으로 설득할 방법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 말고 또 무언가가 필요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말씀드리는 순간 나이토 선수 크게 칩니다! 아. 카이다 선수 아까보다 아파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역시 격투기를 배운 자가 타격점을 제대로 잡으면 카이다를 상대로도 선전할 수 있는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게다가 두 선수 모두 페널티를 가진 채 경기에 임하고 있죠? 카이다 선수는 아직 폐에 물이 차 있고 나이토 선수는 물을 무서워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토 선수! 대단한 역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후루미나미는 마이크를 입가에 댄 채 빠른 속도로 말을 늘어놓았다. 그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카이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
카이다 쿠로하: 꽤 잘 싸운다. 너…? 대체 왜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랑 맞서는 거야?
나이토 유즈루: 사람을 돕는 게 내 사명이거든.
카이다의 얼굴에 경멸이 차올랐다. 그녀는 나이토가 잠시 가드를 허술하게 둔 사이 쿠나이를 들고 그의 발을 찍었다.
나이토 유즈루: 악! 이 비겁한 새끼!
카이다 쿠로하: 원래 사람은 비겁한 거야. 너 같은 새끼들은 모르겠지만!
나이토는 카이다가 자신을 노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바닷물이 차 있는 모래사장은 쿠나이를 꽂을 만큼 단단한 장소가 아니었지만 잠시 쿠나이를 빼느라 걸리는 시간을 버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카이다는 나이토를 뒤로 하고 모래사장을 기어가고 있는 모리에게로 향했다. 모리는 상처 부위가 모래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앉아 있었고 동시에 두 손을 자신의 등 뒤에 숨기고 있었다.
카이다가 자신에게 도달했을 때 모리는 두 손에 쥐고 있던 모래를 흩뿌렸다. 그러나 많은 양은 아니었다. 왼손가락이 두 개밖에 남지 않았을뿐더러. 많은 양이었다고 해도 순간적으로 눈을 감은 카이다에게는 통하지 않았을 터였다.
모리 레이코: 빌어먹을…
모리는 카이다가 자신을 들어 올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작게 말했다. 나이토는 발에서 쿠나이를 빼내고 고통과 분노로 얼룩진 얼굴을 한 채 카이다에게로 달려갔다. 카이다는 모리를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선 웃으며 그에게서 도망쳤다.
카이다 쿠로하: 아하하하하하! 이 새끼는 지금부터 내 인질이다!
나이토 유즈루: 아니 이 나쁜 새끼가!
모리 레이코: 아니다. 승부사… 내 상처가 악화되어 죽으면 첩자가 검정이 된다. 처형이다. 결과는 같아…
그 말이 또다시 카이다를 자극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의 옆으로 불룩한 혈관이 불거졌다.
카이다 쿠로하: 말은 번지르르하네. 아무것도 없는 새끼가! 그럼 너희 둘 다 행동으로 보여 봐. 행동으로 너희 신념을 증명해 보라고! 응?!
카이다는 어깨에 들쳐 매고 있던 모리를 내리고선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잡기 편한 지지대가 될 발꿈치가 없으니 어색하긴 했지만 그녀의 힘이 있다면 불가능할 일이 없었다.
카이다 쿠로하: 그렇게 사람 구하는 게 좋냐? 그렇게 좋으면…!
카이다는 자신의 몸과 모리를 돌리며 원심력을 모았다. 나이토는 그녀가 하려는 일을 깨닫고선 화들짝 놀라 더 빨리 다리를 움직였다.
나이토 유즈루: 하지 마. 카이다! 하지 말라고!
나이토는 그의 외침이 오히려 카이다를 자극한다는 것을 몰랐다. 카이다는 나이토가 아연실색할수록 큰 쾌감을 느끼며. 통쾌한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다는 모리를 두 손으로 잡고선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몇 바퀴 돌려 원심력을 받아가며 모리를 바다 멀리 집어던졌다.
모리 레이코: 아아아…
모리의 비명이 먼 곳에서부터 들려왔다.
풍덩.
나이토 유즈루: 이런 썅…!
카이다 쿠로하: 그냥 두던가! 둬 봐! 그러면 검정은 내가 되고 처형당하겠지만. 네가 두고 보진 않을 거 아니야?! 사람을 돕고 싶다며! 그리고 저 년은 자기가 죽어서라도 날 죽이려 하지. 그럼 둘 중 하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그리고 넌 어차피 바다도 무서워하잖아!
나이토 유즈루: 그걸 네가 어떻게…
카이다 쿠로하: 난 사람의 공포에 대해 잘 알거든!
카이다는 나이토를 향해 의기양양한 조소를 보냈다. 마지막 대목에서는 고개를 위로 젖히고 입을 쩍 벌린 채 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나이토는 잠깐 기다리라는 듯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카이다는 매몰차게 중지를 올렸다.
카이다 쿠로하: 아하하하하하하하! 잘해봐라. 병신아!
카이다는 유유히 숲 속으로 떠났다. 나이토는 그녀와 모리가 떨어진 바닷속을 번갈아서 보았다. 그곳은 발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바다 밑의 모래를 밟는다는 생각으로 걸을 수 있는 해변과는 달랐다. 걸어갈 수 없는 곳. 빠질 수밖에 없는 곳.
깊은 수심. 끝을 알 수 없는 차가움과 암흑. 괴물이 도사리는 곳.
바다.
내 유일한 약점.
내 공포의 근원.
그리고 카이다.
당장 붙잡을 수 있다. 달려가면 따라잡을 수도 있어. 사실 붙잡을 필요도 없다. 카이다는 이대로 처형이다. 세 명이 시체를 보기만 하면 카이다 쿠로하. 내통자는 그대로 처형이야. 저 녀석은 너무 흥분해서 저질러버렸어.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도 말이야. 난 바다를 무서워해서 모리를 구할 방도가 없는데 모리를 죽여버리려 했어.
카이다가 죽으면 마지막 미도리카와의 시련도 쉽게 통과할 수 있다. 가장 큰 적이 사라지면 되살아난 미도리카와를 데리고 다시 탑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어.
모리가 익사하고 가라앉아. 가재 괴물들한테 갈가리 찢기는 걸 기다리면 모두 잘 될 거야.
여기서 눈을 감기만 하면 돼.
눈을 감고 모리가 죽는 걸 기다리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야. 모든 게… 그거면 되는 거야.
나이토는 눈을 부릅뜬 채 바다에 뛰어들었다.
공포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나이토는 수영을 억지로 배웠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형과는 다르게 약해빠진 막내 놈이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의 부친은 그를 걱정하기보다 먼저 그가 수영을 배우도록 절차를 밟았다. 나이토에겐 수영 수업이 지옥처럼 느껴졌다. 그는 물에 전혀 뜨지 못했다. 이론은 들어도 물속으로 들어간 순간 그의 몸이 굳어 버렸다.
그러나 수영장보다 훨씬 깊은. 정말 사람이 빠져 죽을 수 있는 바다에 몸을 던지자 나이토는 처음으로 수영을 했다. 본능적으로. 몸에 불필요한 힘을 주지 않고. 바닷물을 밀어내며 호흡을 하는 형태는 그가 배운 수영을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하고 있나 나이토를 잠시 돌아본 카이다가 놀랄 정도로 빨랐다.
카이다 쿠로하: 수영을 해…?
카이다는 자신이 절대로 하지 못할 일을 해내는, 자신보다 약한 자를 보았다.
그녀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이 자신의 머리를 작게 내저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였다.
그녀가 할 수 없는 수영을. 그녀가 할 수 없는 극복을.
카이다는 더 볼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고는 숲 속으로 도망쳤다.
나이토는 눈이 따가운 것을 참으며 바다에 빠진 모리를 잡고 수면 위로 헤엄쳐 올라왔다.
나이토 유즈루: 콜록! 컥! 모리. 괜찮냐?! 모리!
나이토는 모리의 뺨을 양쪽으로 찰싹찰싹 때렸으나 반응은 없었다. 물을 먹은 탓일까.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충격을 입어 기절한 걸까. 나이토는 알 수 없었으나 모리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나이토는 모리의 미약한 호흡을 느끼며 더없이 안도했다.
나이토는 어색하게 구조 수영을 시연했다. 카이다와 싸우며 남은 생채기에 바닷물이 들어오자 더없는 따가움이 느껴졌다. 모리를 구조하기 위해 수영을 할 때에는 아드레날린 탓에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고통이었다. 그렇지만 손가락이 잘리고 발목을 잃은 모리의 고통에 비할 바가 있을까… 라고 생각하며. 나이토는 해변에 다다랐다. 어떻게 그녀를 옮길까 고민하던 도중 나이토는 공주님 안기 자세보다 그녀를 생선처럼 자신의 어깨에 얹는 것을 택했다. 그럼 유사시에 한 손을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해변에서는 가재 괴물이 그를 반겼다. 그러나 그가 더 빨랐다. 쿠나이에 상처를 입은 발일지언정 나이토는 적재소에 가재 괴물들을 뛰어넘고 빨리 걸어가며. 피와 살에 굶주린 질문들을 제치며 첨벙첨벙 뭍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는 모래 속에 숨어있던 가재 괴물이 피 냄새를 맡은 것은 알지 못했다.
"데드. 어. 체크?"
나이토 유즈루: 아니 잠깐 썅…!
모래 속에서 가재 괴물이 불쑥 나타나 그에게 달려들었다. 나이토는 재빠르게 가재 괴물에게서 발을 물러섰지만, 카이다에 의해 상처가 난 발은 조금 늦게 움직였다.
가재 괴물의 날카롭고 강한 집게가 신발과 함께 나이토의 발 절반을 앗아갔다. 그는 기우뚱하고 뒤로 넘어졌고 상처의 고통에 확 비명을 질렀다.
나이토 유즈루: 아악! 이 새끼가!
나이토는 몸을 앞으로 일으키고 가재 괴물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쳐 박살 냈다. 그는 그제야 뒤를 돌아봐 자신의 발이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했다. 나이토는 경악했다. 발 절반이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고 상처 입은 발의 발가락은 단 한 개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를 악 물자 언제 어디서 들어온지는 모를 모래가 까드득 씹혔다. 나이토는 모래를 퉤 퉤 뱉어냈다. 뒤늦은 통증이 다리를 찔러왔다. 충격에 빠질 새도 없이 나이토는 가재 괴물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어섰다.
그러나 엎드린 사람이 한 다리만으로 온전히 몸을 일으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부축할 사람이 있다면 더더욱 그랬다. 나이토는 지옥을 맛볼 각오를 한 뒤 초라하게 남은 나머지 한 발을 모래사장에 대고 멀쩡한 쪽의 다리와 함께 짚어 몸을 일으켰다.
힘이 가해지자 출혈이 한층 더 심해졌다. 나이토는 비명이 나오는 고통을 참고 발걸음을 옮겼다. 피 맛을 본 가재 괴물들은 모리와 그를 먹이로 인식했다. 파도를 타고 가재 괴물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한쪽 발이 그렇게 절실했던 기억이 나이토에겐 없었다. 그는 몸을 뒤틀며 한쪽 팔을 뒤로 빼 가재 괴물들에게 모래를 퍼부었다.
가재 괴물들이 주춤한 사이 나이토는 자신의 어깨 위에 놓인 모리를 두 팔로 붙잡고 한 쪽 발로 중심을 잡았다. 모래는 끊임없이 움직였기에 발을 디디기 어려웠고 통증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민첩하게 달려드는 가재 괴물에게서 도망치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 발로 뛰는 어색한 경험을 하며 나이토는 자신의 모든 의지력을 끌어냈다. 마침내 가재 괴물들을 따돌리고 문의 바로 앞까지 도착했을 때. 나이토는 모리를 조심스럽게 모래사장에 내려놓고 자신도 몸을 뉘인 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입에서는 억누를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이토 유즈루: 망할. 내 발. 내 발이…
두 번 다시는 원래대로 싸우지 못하리라는 두려운 깨달음이 그의 뇌리에 스쳤다.
나이토 유즈루: …제기랄. 내 다리…
나이토는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진정한 기사는 울지 않는 법이다.
무엇보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이토 유즈루: 그래도 좀 멋있었어.
혼잣말을 하며 나이토는 피식 웃었다. 그러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앞으론 두 발로 걸을 수 없으리라는 비관적인 상황을 잊기에는 충분했다.
나이토 유즈루: 아 맞다. 모리!
나이토는 모리의 상처 부위를 보았다. 발목 절단과 손가락 절단. 화들짝 놀랄 정도로 끔찍한 상처였다. 끊임없이 나오는 피를 보며 나이토는 과연 그녀가 살아있기는 한지 의심스러웠다.
나이토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러닝셔츠를 찢어 그녀의 상처 부위를 감쌌다. 소독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에겐 어떤 의료 용품도 없었다. 지혈이 끝나자 한 시름을 덜었지만 모리를 살리기 위해 할 일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얘 물 먹지 않았을까? 나이토는 기절한 사람을 험하게 다루는 게 맞는 일일까 생각하면서. 나이토는 모리의 갈비뼈 바로 위를 깍지 낀 손으로 강하게 압박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인공호흡했다가 나중에 별 잔소리 듣긴 싫은데. 나이토는 모리가 희미하지만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코 앞에 손을 대어 느꼈다. 희미하지만 그녀는 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그녀는 곧바로 반응으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온전히 증명했다.
모리 레이코: 커헉! 컥. 콜록. 콜록! 크헥! 우욱…!
나이토 유즈루: 깼냐! 야. 진짜 다행이다!
모리 레이코: 케흑. 컥! 콜록. 콜록…
모리는 고통스럽게 콜록이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물을 토해냈다. 나이토는 한숨을 푹 내쉬며 러닝셔츠를 한 번 더 찢어 남은 반쪽 발에 감았다.
상황을 확인하던 모리의 눈이 나이토의 온전한 발이 있던 곳에 머무르며 점차 커졌다.
모리 레이코: 승부사 너… 발이…
나이토 유즈루: 내 발 볼 때야…? 넌 발이랑 손이 날아갔어. 이 또라이야. 몸 좀 사리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나이토 유즈루: 아우… 망할… 진짜 개아프네… 아으윽…
나이토는 진이 빠진 채 고통에 신음했다. 눈을 감고 정신이라도 잃고 싶었지만, 왜인지 그랬다간 다시는 깨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나이토는 눈을 감지 않았다.
모리는 한 번 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물어물 물었다.
모리 레이코: 첩자는… 내통자는… 도망친 건가…?
나이토 유즈루: 미안하게 됐다. 잡아 두려고 했는데 도무지 안 되더라. 저기로 갔어.
모리 레이코: 아니다… 아니야. 너는 자기 몫을 다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인명을 중요시하다니 경의를 표한다. 존경받아 마땅해…
모리 레이코: 하지만 그 때문에…
모리는 나이토의 발을 잠자코 보고 있다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그녀의 몸은 반쯤 일어나지도 못한 채 풀썩 꺼져버렸다.
모리 레이코: 크윽…!
왼손가락을 세 개 잃었음을 잊고 모래사장을 손으로 딛었기 때문이다. 섬뜩한 상처 뿌리의 고통에 모리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이토 유즈루: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화장실 갈 거면 좀 참아. 나도 발이 이래서 너 못 옮겨줘.
모리 레이코: 푼수 같은 소리 마라… 첩자를… 첩자를 잡아야 한다…
모리는 한 팔과 한 다리로 몸을 일으키고 나이토가 가리킨 방향으로 나아가려 했다. 나이토는 질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나이토 유즈루: 야! 너 정신 못 차려?! 지금 카이다 잡으러 갔다간 너 죽을 수도 있어!
모리 레이코: 첩자를 잡아야 한다. 이렇게 놓칠 수는 없다… 훼손된 채일 수는 없어. 그건 용납하지 못한다…
나이토 유즈루: 정신 차리라고! 네 꼴을 봐! 내 꼴도 좀 보고! 우리가 어떻게 멀쩡한 카이다를 쫓아!
모리는 왼쪽 손의 절반과 한쪽 발목 전부를 잃었다. 나이토는 발 반쪽을 잃었다. 두 사람이 합심한다고 해도 두 다리로 온전히 도망치는 카이다를 추적하는 일도, 그녀를 붙잡는 일도 불가능할 터였다.
모리 레이코: 난 타협하지 않는다. 스스로와도 타협하지 않으리라.
기어이 한 발로 뛰어 나아가려는 모리를, 순간 몸을 일으킨 나이토가 등 뒤에서 붙들었다. 모리는 바닥에 사뿐히 쓰러지고는 나이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팔과 다리를 휘적였다.
모리 레이코: 또 이건가…?! 또 이렇게 나를 붙들려하는 거냔 말이다… 이거 놔라! 놓으란 말이다. 승부사!
나이토는 모리의 힘이 놀랍도록 약해진 것을 느끼고는 그녀의 겨드랑이에 넣고 단단히 고정한 팔을 풀지 않았다.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이토 유즈루: 악! 내가 놔줄 것 같아? 망할. 진정 좀 해. 상처 터질라! 진짜 욕 나오게 할래?! 넌 지금 공리 따위를 신경 쓸 게 아니라 쉬어야 한단 말이야!
모리 레이코: 공리 없이 내겐 아무런 가치도 없다!
"진정한 기사가 되어라. 유즈루. 그럼 이 아비가 널 인정해 주마. 그러지 못한다면 넌 내게 있어서 아무런 가치도 없다."
나이토는 자신의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을 느꼈다. 과연 모리가 내 생각만큼 내몰려 있다면.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할까. 나이토는 생각을 하고 싶었으나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결국 그는 그녀를 회유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이토 유즈루: 받아들여! 받아들이란 말이야. 우린 지금 카이다를 쫓아갈 수 없어! 아무리 분해도 말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러니 진정해. 진정하고 여기서… 카이다를 잡을 계획을 세우자.
모리는 나이토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몸에 쥐고 있던 힘을 잘린 발목을 내려다보고는 저항을 그만두고 축 늘어졌다. 나이토는 이상하게 그녀가 시체가 된 것 같다고 느꼈다. 체온이 높지는 않을지언정 차갑지도 않았지만, 나이토는 순간 모리의 내부가 텅 비어버려 껍데기만 남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기분 탓이겠지만… 아닐지도 몰랐다.
모리 레이코: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이군. 잃기만 했다. 나 때문에… 넌 이제 활동할 수 없다. 발을 잃었으니…
모리 레이코: 내가… 전부 망쳤어… 내가… 해결했어야 했는데 이 모든 일을…
나이토는 모리에게 두른 팔을 놓고 그녀를 조심스럽게 모래사장에 뉘었다. 다음 순간 그는 살면서 절대 보지 못할 것 같았던 광경을 보았다.
바로 철혈의 모리 레이코가 울음을 참는 모습이었다.
모리 레이코: 제기랄… 제기랄… 흐흑…
나이토 유즈루: 야. 울고 싶은 건 나거든? 이 또라이야…
핀잔을 늘어놓으면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모리의 눈에 차오르는 눈물은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나이토는 난처함을 느끼며 두 손을 들고 그녀를 진정시키는 듯한 제스처를 만들었다.
나이토 유즈루: 진정해. 조금만 진정하고 심호흡을…
모리 레이코: 아아아아아아악!
모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악에 받혀 비명을 질렀다.
나이토 유즈루: …심호흡 하라니까.
모리는 목표 의식과 다른 사람을 위해야 한다는 마음은 크지만 능력이 부족한 케이스입니다
결국 파멸적 결과가 나왔네요
요즘 강연을 좀 봤는데 얘가 카이다 캐릭터성이랑 좀 닮은 것 같음
단크 타워에선 시련 안에서 뭔 일을 겪어도 문 밖으로 나오면 자동 치유라(1시련 야가미, 2시련 카이다도 빈사인데 살아남) 부상에 대한 긴장감이 좀 떨어지는 편이었는데 이젠 좀 달라질 겁니다
개강 전 마지막 단크 타워인데 그래도 세 번째 시련은 꽤 빨리 끝날거임
캐롤 팬아트를 받았읍니다…
눈물이 주륵주륵 나옵니다 단크 타워를 읽어 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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