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2

더 단크 타워 챕터 2 - 15

by 도타싫어! 2021. 8. 14.

 

무로 시라베: 너희들 정말 따라올 생각이야?

 

불신이 스며든 내 물음에 하기와라가 꾸짖듯이 외쳤다.

 

기와라 우시오: 갈! 돈이 있어도 쓸 사람이 없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냉장고를 사 달라는 요구는 안 할 테니까 적어도 구급상자는 사자고!

 

무로 시라베: 그 일은 나와 야가미만으로 충분히 가능해.

 

유즈미 나데시코: 카이다가 어디에 있을지 모르잖아. 한쪽에선 미도리카와를 찾고 한쪽에선 물건을 사야 역할 분담이 되지 않겠어?

 

가미 토가: 일리가 있긴 하군요. 제 손은 두 개 뿐이니까요. 손 여덟 개가 더 낫지 않겠습니까?

 

생각에 잠긴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모리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리 레이코: 그냥 데리고 가라. 어차피 카이다가 습격을 하면 코미디언도, 서예가도 전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인질이 되지 않으면 제 할 일을 다한 거지.

 

기와라 우시오: 누가 들으면 나리가 강하신 줄 알겠어요.

 

리 레이코: 나는 적어도 마음가짐이 강하지. 너희와는 다르다. 곧 너희도 그 차이를 알게 될 거다.

 

유즈미 나데시코: 모리마저 저렇게 말하잖아. 우린 갈 준비 됐어!

 

씨익 웃으며 엄지를 척 내보이는 두 명을 보며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위태로운 느낌을 받았다.

 

별 도리도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로 시라베: 대신 이번 시련은 빠르게 진행하는 거야.

 

나는 '미도리카와 아쿠토' 라 적혀 있는 두 번째 시련의 문을 바라보았다.

 

나시: 드디어 들어가는구나

 

내겐 휴대용 송출기가 없어 해변의 상황을 볼 수는 없었지만, 모리에게 심어놓은 도청 장치는 내 생각보다 주변의 소리를 더 잘 잡았다. 계속 들려오는 가재 괴물들의 "데드. 어. 체크? 덤. 어. 첨?" 은 무척 시끄러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정보량을 많이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히무로. 마유즈미. 하기와라. 야가미 네 명이 시련에 돌입하게 되는 것으로 들렸다. 내가 어딘가 도울 일은 있을까 궁금해 모니터실에 들른 뒤 모리에게 줄 물품들에 대해 생각하던 도중. 다이얼로그가 울렸다.

 

캐롤 씨에게서부터 온 전화였다.

 

이렇게 일찍? 나는 바로 어제의 늦은 밤까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다는 걸 기억했다. 단지 아침 인사를 한다거나 안부를 전하는 등의 용건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나시: 여보세

 

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조용히 할 말이 있어요.

 

캐롤 씨의 속삭임 직후 전화가 즉시 끊어졌다.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 머리카락 묶음을 붙잡았다.

 

나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캐롤 씨? 다급한 것처럼 들렸어요."

 

롤 브라이트: "내. 다급해요. 지금 어떤 상황인지 들려 드릴게요. 휴게실로 가면서 들어주시겠어요?"

 

나시: "네. 그럴게요!"

 

나는 문을 열고 카지노로 내려갔다. 휴게실로 가장 빠르게 향하기 위해서였다. 검은 돌로 이루어진 계단을 내려가고 1층에 도달한 뒤. 카지노의 시끄러운 음악을 따라가자 웅웅 거리는 소리 뒤로 먹먹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바라 쿠리스: 정말… 정말 방법이 없을까?

 

23T5U130: 적어도 우리에겐 없어. 휴대용 송출기도 모니터실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해변의 상황을 볼 수 있도록 돕는 도구야. 양방향 통신은 불가능해.

 

키와 아유키: 카이다가 바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전할 방법이 없다니

 

나시: "저게 다 무슨 뜻이죠? 카이다가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뇨?"

 

롤 브라이트: "말 그대로예요. 카이다 씨가 옆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다른 분들이 문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는데, 카이다 씨는 몸을 숨긴 채 기다리고 있어요."

 

롤 브라이트: "좀 전에 카이다 씨가 두 번째 시련으로 이어지는 문 옆에 굴을 파고선 그 안에 숨어들었거든요. 안으로 다른 분들이 들어가는 순간 남은 분들을 덮치려는 속셈 같아요."

 

시련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히무로, 마유즈미, 하기와라, 야가미. 남는 사람은… 모리와 나이토.

 

모리는 내 경주마고 나이토는 캐롤 씨의 경주마였다. 어느 쪽이라도 나는 방관할 수 없었다.

 

나시: "왔어요!"

 

마음만 급한 나머지 종이나 펜도 가지고 오지 않았지만, 나는 호기 넘치게 카지노를 지나 휴게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두 번 들어가 봤던 보급 창고였기에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데에는 찰나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기억 속 그 자리에 있는 비밀 통로를 향해 다가갔고

 

통로의 뚜껑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나는 당황했다.

 

나시: "이게 무슨…?"

 

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왜 그러세요?"

 

나시: 어떻게 된 거야…?

 

통로에는 뚜껑이 없었다. 말 그대로 뚜껑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뚜껑이 있던 자리를 만져 봤으나 내게 느껴지는 것은 딱딱한 바닥뿐이었다. 내가 정확히 기억하는 위치를 두드려 봐도 안이 비어 있는 듯한 통통 소리보다는 꽉 찬 무언가를 만지는 툭툭 소리가 퍼졌다.

 

나시: 막혀 있잖아

 

보급 창고로 들어갈 수 없다는 건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할 수 없고. 그것은 보급 특권을 내 멋대로 쓸 수 없다는 얘기가 되었다.

 

엄밀히 말해 후루미나미의 것이었으니 내겐 아쉬움을 느낄 정도의 권리가 없었지만, 타이밍이 얄궂었다. 왜 하필 지금이지? 모리와 나이토가 카이다와 맞닥뜨릴지도 모르는데 더 이상 해변에는 간섭할 수 없었다. 모리에게 심은 도청기로 상황은 볼 수 있지만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나시: 캐롤 씨가 막았을리는 없어. 설마 그럴리는 없어. 지금 막으면 내가 캐롤 씨를 의심할 게 뻔한데. 심지어는 약점까지 보여줬는데

 

캐롤 씨의 경주마는 나이토 유즈루.

 

즉 나이토에게 가해진 해코지는 고스란히 캐롤 씨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나이토가 죽으면 캐롤 씨도 함께

 

나시: 카이다가 나이토를 해칠 경우 큰일이 나는 건 캐롤 씨야. 이건 이간질조차 아니야나 말고 또 누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지?

 

후루미나미의 보급 특권을 간파한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리고 후루미나미가 갇힌 뒤. 그 사람은 후루미나미의 보급 특권을 틀어막았다. 대체 왜지? 왜 그럴 필요가 있었던 거야? 자신의 특권을 없애다니. 자신밖에 사용할 수 없는 특권이라고 여길 텐데도

 

자신밖에 사용할 수 없는 특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건가?

 

나시: 뭔가…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나는 다시 한번. 유령의 유령에게 쫓기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는 캐롤 씨가 아니었다.

 

나는 거대한 힘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었으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힘들은 서로 충돌하고 격동해왔으며 그 사이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응답하지 않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나시: 후루미나미 본인에게 갈 수밖에 없어.

 

가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보급 특권이 왜 잠겨있는지. 나 말고 누군가가 접근한 게 분명한데 어떻게 보급 특권의 봉인을 풀 수 있는지.

 

모니터실은 멀지 않으니 곧장 그곳으로 향하려던 찰나. 내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모노로그: 나쁜 시간을 보내고 있나. 이름 없는 남자?

 

나시: …모노로그.

 

나나시를 위한 오늘의 유령의 유령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금발의 여인이 아니라 입술을 씰룩거리는 반쪽의 얼굴을 가진 공중부양서(書)입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모노로그 쪽을 바라보았다.

 

나시: 안 불렀는데 왜 왔어? 오늘은 아직 슬롯머신 안 돌렸는데.

 

모노로그: 내 쪽에서 널 찾아오는 건 안 된단 말인가? 웃기는군.

 

나시: 정말 왜 왔냐니까. 내통자 일 제안하는 거면 거절할게. 카나리한테나 가 봐. 걔라면 얼마든지

 

모노로그: 보는 눈이 형편없군. 카나리 케이토를 내통자로 쓰란 말인가? 그런 자를?

 

나시: 그래. 그럼 네 세력을 뚫을 방법이 생기니까.

 

얼떨결에 흑막을 상대로 기싸움을 하게 되었지만 먼저 머리를 숙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모노로그가 무표정으로 나에게 둥실둥실 다가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시: 정말 왜 왔냐니까?

 

나는 모노로그에게서 눈길을 피했다.

 

모노로그: 시라유키 히메리에 대한 기억을 서서히 떠올렸겠지?

 

나시: 아닌데.

 

모노로그: 내 말에 무작정 반대하지 마라. 네가 떠올린 것을 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떠올리게 될 테지. 안 그런가.

 

나시: 그래. 기억을 지운 장본인인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모노로그: 내가 네 기억을 지웠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모노로그 쪽을 바라보았다.

 

이게 지금 어디서 아닌 척을 하는 거야?

 

나시: 그럼 네가 지웠지 다른 사람이 지웠다는 거야?

 

모노로그: 나는 내가 지웠다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네가 잊어버렸을 뿐이다. 네가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내 일도 훨씬 쉬워졌겠지.

 

나시: 너 대체 무슨 소리야. 누가 들으면 너랑 내가 한 편인 줄 알겠어.

 

모노로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모노로그가 내뱉은 온갖 불안한 말보다도 내겐 그 침묵이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말 좀 해봐

 

나시: 말해. 모노로그! 그럼 누가 내 기억을 지운 거야?!

 

모노로그: 말 못 한다.

 

나시: 뭐. 말을 못 해? 그게 무슨… 네가 흑막이잖아! 넌 뭐든지 말할 수 있어야지!

 

네가 말 못 하는 게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마치

 

23T5U130: 이건 기능적인 문제야. 말 그대로 난 '말할 수 없어'. 모노로그가 금지한 탈출에 대한 정보니까.

 

모노로그: 이제 상황 파악이 되나. 이름 없는 남자.

 

모노로그 또한 꼭두각시일 뿐이야. 모노로그조차도 어느 정보는 내게 알려줄 수 없어.

 

모노로그 뒤에 누군가가 더 있는 거야.

 

저항할 수 없는 바람. 거대한 힘의 소용돌이 사이의 나는 연약하고 또 부질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유령의 유령을 조종하는 누군가는 지금도 날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에. 나는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사람의 기분을 이해했다.

 

모노로그: 본론으로 돌아가지. 시라유키 히메리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도 떠올렸겠지, 그렇지 않나.

 

나시: 그렇지만 지금의 나랑 시라유키 씨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 애초에 그 사람은 죽었

 

나는 말을 내뱉으려다가 다시 삼켰다.

 

나시: …이 탑에 없잖아. 시라유키 씨가 왜 그렇게 중요하다는 거야!

 

모노로그: 토끼를 들고 있는 시라유키 히메리.

 

나시: 느닷없이 그게 무슨 말

 

시라유키 히메리는 토끼를 들고 있다.

 

정확히는 토끼를 끌어안고 그 복슬복슬한 털에 얼굴을 묻고 있다.

 

"아우우우. 너무 귀엽다! 얘 털 복슬복슬한 것좀 봐. 너어어어무 귀여워! 귀여워귀여워귀여워!"

 

"시라유키! 또 애완동물이냐?"

 

할멈이 시라유키에게 소리친다.

 

"애완동물 아니라니까요! 이건 엄연히 실험체라고요!"

"지금 네 꼴이 어딜 봐서 실험체 만지는 사람이냐? 살판이 났구먼. 온갖 동물들을 데려오고 말이야! 토끼 그만 괴롭히고 그만 내려놔!"

 

"미워요 정말. 어휴! 융통성 하나도 없어. 이 칙칙한 실험실의 유일한 즐거움은 동물들이랑 교감하는 짧은 시간뿐이라고요! 다들 처음에는 이 시간을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이젠 나밖에 관심이 없어!

우쭈쭈. 그래도 이 누나만큼은 너한테 관심을 가질 거야. 다들 나빴쪄. 이렇게 귀여운 애한테 쓰담쓰담도 안 해주구. 나빴찌? 그치? 나쁜 사람들이라니까."

 

시라유키 히메리는 할멈에게 소리친 뒤 토끼를 든 채 전화 박스로 성큼성큼 다가간다. 전화 박스의 잠금 장치가 열리기까지 시라유키 히메리는 토끼의 털 촉감을 즐긴다.

 

치익. 장치 내부의 진공 상태 해제.

 

철컥. 세 철기둥 잠금쇠 해제.

 

철컹. 문을 붙잡는 갈고리 해제.

 

세 차례에 걸친 잠금 절차가 풀리고 전화 박스의 문이 열리자. 시라유키 히메리는 전화 박스 안에 토끼를 던져넣고 문을 쾅 닫는다.

 

"실험체 맞다니까 그러네."

 

전화 박스 안에 조명이 들어온다.

 

첫 번째 작용. 토끼는 화들짝 놀란다. 그러나 움직일 수는 없다.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두 번째로 토끼의 살가죽이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분해된 것들은 전기장 발생 장치의 양쪽 외벽으로 빨려 들어간다. 벌집의 육각형 구조를 연상시키는 외벽이 가루를 빨아들인다.

 

세 번째는 내장이다. 살가죽이 모두 사라진 찰나의 순간. 다른 것들마저 사라지기 직전의 순간에는 그 구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점토를 뭉쳐 만든 모형처럼 보인다. 피조차 튀지 않는다. 아마 피는 전기장이 토끼의 몸을 꿰뚫는 순간에 가열되어 고체화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은 골격이다. 텅 빈 골격. 화석이나 박제를 연상시키는 텅 빈 뼈들이 산산이 흩어진다. 그 단단한 물질조차 먼지처럼 사악 흩어진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다음은 도마뱀으로 할까 봐. 털 날려서 더러워. 복슬복슬하긴 해도 단점이 너무 커. 손에서도 얌전한 도마뱀이 아직 멸종 안 했던가? 요즘 파충류라고 하면 발견되는 것들이 전부 머리 두 개나 눈 다섯 개가 달린 것들인데. 행운의 네 머리 도마뱀은 언제 볼 수 있을지…"

 

시점이 옆으로 쏠리자 못마땅하고 약간 벙찐듯한 표정을 한 분홍색 머리의 남자가 보인다.

 

나다. 순진하고 유약한, 멍청한 나.

 

"노네임. 또 불만인가 보네. 또 실험체 가지고 나한테 무슨 말하게?"

"그럴 생각 없어."

"없긴 뭐가 없어!"

 

시라유키 히메리가 버럭 소리치고는 분홍색 머리의 남자가 화들짝 놀라자 씨익 웃는다.

 

"반응이 늘 재밌다니까. 그보다 진심인데 실험체 가지고 계속 징징대지 마. 진보를 향한 위대한 발걸음에 초를 치진 말자고. 알겠어?"

 

"그게 재미있어. 사라유키?"

 

"네 친구 놀리는 건 재밌지. 너 놀리는 것도 재밌고."

 

시라유키 히메리는 시점의 주인을 보며 웃음을 짓는다. 시점의 주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지만 좋지 않은 표정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계속 실험이나 하자고. 데이터 분석하러 갈 테니까 다들 여기서 기다려. 오늘은 다들 잘 생각 마. 들어올 동물들이 수도 없이 많거든."

 

노바디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또 밤을 새우란 말이야? 이번이 몇 번째야. 우리 팀 세이지 씨가 쓰러지신 지 얼마나 지났다고!"

 

"누가 너희만 새우래? 나도 항상 너희와 같이 밤새 실험하잖아."

 

"넌 잠을 적게 자도 버틸 수 있다지만 우리는 힘들어. 누구한테 쫓기는 것도 아니잖아. 왜 이렇게 작업을 서두르는 거야?"

 

"하루라도 빨리 성과를 보고 싶으니까.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를 알고 싶으니까! 그리고 다음으로 넘어가야지. 우리는 쫓기는 게 아니라 쫓고 있는 거야. 따라잡아야 하는 거야. 모든 것을!"

 

시라유키는 장광설을 늘어놓고선 뒷짐을 지고 실험실 너머로 사라졌다. 이제 그녀는 그녀만이 처리할 수 있는 방대한 데이터를 만질 것이다.

 

"이번에는 제발 잘 됐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하는 시라유키 히메리에겐 어떤 죄책감의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기대와 즐거움 뿐.

 

"이게 시라유키 히메리야."

 

히무로 시라베에게 인공지능의 기억을 보여줄 만큼 보여준 뒤 내가 먼저 그에게 말했다.

 

"늘 저런 식이었지. 내 생각에는 여전히 저런 식이야.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뭐. 저런 짓을 침팬지에게도 하는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아?"

 

히무로 시라베는 내 말을 들으면서도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이 약간 커진 것이 보였다.

 

겨우 그게 다야? 시라유키 히메리는 네 은인이잖아. 더 당황해야 하지 않아? 그래야 마땅하잖아.

 

그렇게 추궁하다시피 말을 건네기 직전에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알던 그녀와 무척 다르군."

 

"내가 지금의 시라유키 히메리를 보면 해야 할 말이야. 그녀야말로 내가 알던 사람과는 무척 다르지."

 

나와 히무로 시라베가 얘기를 나누던 찰나 시점의 주인과 분홍색 머리의 남자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향했다. 잠시 눕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이따금씩은 그 안에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 날의 대화 주제는 좋지 못한 것이었지만.

 

"아직도 시라유키를 몰라? 노네임. 우리는 보기 좋게 속은 거야! 카텟이 되자고 말해 놓고서 기계를 다 만드니 우린 찬밥 신세잖아!"

 

화면 속 분홍색 머리의 남자는 시점의 주인의 기세에 밀려 뒤로 한 발자국을 물러섰다. 하지만 이내 분홍색 머리의 남자 또한 약간 목소리를 높였다.

 

"너야말로 시라유키를 모르는 거야. 시라유키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찬밥 취급해! 잘 대해주는 것처럼 보여도 꾸며낸 행동일 뿐이야.  걔가 카텟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얽매이는 것도 자기가 다른 사람을 아끼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그러는 거야! 난 시라유키가 처음관 다르게 변했다고 생각해 왔었지만 이제 보니 아니었어. 시라유키 히메리는 변하지 않을 거야. 늘 저런 사람이니까."

 

"인공지능. 이제 기억 재생은 꺼도 돼."

 

인공지능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굳이 더 보여줄 필요 없잖아. 우리 둘 사이의 일일 뿐인데."

 

"히무로 시라베는 다른 사람 입장에서의 그녀도 알고 싶다고 했지. 나는 도움을 주는 것뿐이야."

 

할 말이 없었다. 화면 속의 치기 어린 나는 시점의 주인에게 계속 말을 늘어놓았다.

 

"시라유키한텐 선의도 악의도 없어. 걘 그냥 하나의 폭풍 같은 사람이야! 목적이나 이유를 지닌 재앙이 없는 것처럼 누구도 그녀에겐 똑같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그녀에게 의미가 있는 게 존재한다면 그건 채워지지 않는 호기심뿐이야."

 

"그녀가 정말 우리한테 아무런 생각도 없다면 왜 우리에게만 이렇게 대하는데?"

"나도 몰라… 혹시 모르지. 우리 관계를 질투하는 걸지도."

 

급격하게 정적이 흐른다.

 

"…대답 좀 해! 분위기 이상하잖아."

"아니… 관계라는 단어를 쓰니까 우리 사이에 뭐가 있는 것처럼 들리잖아! 노네임 너 좀…"

 

"노바디. 제발 우리 우정을 이상하게 변질시키려 하지 마."

 

"난 그런 마음 없어. 노네임.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어."

 

시점의 주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분홍색 머리의 남자에게 손을 건넸다.

 

"우리 우정만큼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분홍색 남자는 약간 안도하는 기색을 보이며 시점의 주인이 건넨 손을 붙잡았다.

 

"다행이야. 노바디."

 

히무로 시라베는 미래에 벌어질 일은 아무것도 모른 채 수줍고 따뜻한 미소를 짓는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히무로 시라베와 시라유키 히메리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냈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 그러면서 무언가를 중요하게 여기려 애처롭게 군다는 것.

 

"노네임. 계속 버텨 볼까? 버틸 수 있을까?"

 

"정말 연구가 막바지에 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나갈 수 있을 거야. 급여도 좋긴 하잖아. 영혼을 깎아먹는 기분이지만서도…"

 

스크린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집중하는 히무로 시라베를 보며 나는 그에게 드라마 애청자의 소질이 있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재밌냐. 히무로 시라베?"

 

"왜 다른 사람의 기억에서 재미를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넌덜머리를 냈다.

 

"됐어."

 

"이봐. 핑크핑크. 저게 보이나?"

 

왜 가명이 이상해진 거야? 나는 히무로 시라베의 손이 스크린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그가 기억 속의 물건에 대고선 '이거 사줘' 라고 말하는 장면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히무로 시라베는 그것과 비슷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저 문 앞에 보이는 하얀색 실루엣은 무엇이지?"

 

나와 노바디가 이야기를 나누던 휴게실의 문 앞. 굳이 꺼내볼 필요가 있던 기억이 아니었기에 이제야 다시 봤으나… 히무로 시라베의 관찰력은 무시할 게 아니었다. 내가 간과하고 있던 것을 순식간에 찾아내었으니.

 

"흰 머리카락듣고 있던 거였어. 시라유키 히메리."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이를 부드득 갈았다.

 

모노로그: 기억을 계속 떠올려라. 이름 없는 남자. 스스로의 파편을 채워 넣어라. 그리고 기억을 잃기 전의 너로 돌아와라.

 

모노로그:그때가 오면 많은 양식이 바뀔 때가 올 것이다. 기대하고 있겠다.

 

모노로그는 내게 다른 어떤 말도 남겨두지 않고 바닥 속으로 사라졌다.

 

나시: 대체 뭐야. 모노로그… 의문거리만 잔뜩 남겨주고 가는 게 어디 있어. 키워드로 내 기억을 자극하기나 하고

 

나시: 덕분에 머리도 이상하게 어지럽잖아

 

나는 혼란스러움밖에 느끼지 못했다. 유령의 유령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기억은 겉잡을 수 없이 떠오르며 나를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변화시키려 하고 있었다. 게다가 모리와 나이토의 곁엔 카이다가 숨어 있고, 카나리는 아직 자기 숙소에 있어 건드릴 수 없고, 내가 아닌 누군가가 후루미나미의 보급 특권에 접근해 그걸 차단해버렸으며, 보급 특권을 쓸 수 없게 된 나는 모리에게 위험을 알릴 수 없게 되었으니

 

…정말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주변의 풍경을 보았다. 하늘의 색이 조금 혼탁했고 거리가 황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빛이 바랜 색. 칠이 벗겨진 지붕들과 상쾌하지 않은 공기. 주된 색은 회색.

 

그리고 바닥에는 붉은 구슬이 수 놓여 있었다. 나는 무릎을 구부리고 붉은 흔적에 손을 대었다. 습기가 있었다.

 

무로 시라베: 핏자국인데.

 

가미 토가: 문까지 이어져 있군요.

 

정확히는 문에서 끊겼다.

 

피를 흘리던 사람이 문으로 들어갔다는 뜻이었다.

 

카이다가 분명했다.

 

무로 시라베: 카이다가 피를 흘리면서 도망친 건가?

 

가미 토가: 미도리카와 씨를 암살하시려다가 실패한 거군요.

 

기와라 우시오: 뭐! 카이다가 여기 왔다고?! 야 이거 좆됐다. 아마 여기 근처에 있을 거야!

 

무로 시라베: 문 앞에 의식이 빠져 있는 카이다가 없었으니 그럴 가능성은 낮아. 해변에서 나이토와 모리를 보고 있겠지

 

두 번째 시련은 포기해야 하는가?

 

카이다가 두 사람을 죽일 순 없고, 나이토도 간단히 당하지는 않겠지만 카이다는 두 명에게 심각한 상해를 입힐 수 있었다.

 

무로 시라베: 카이다 때문에 미도리카와를 포기하기엔 세 번째 시련도 포기할 수밖에 없을 텐데

 

가미 토가: 포기라뇨? 안 됩니다.

 

유즈미 나데시코: 포기는 안 돼! 미도리카와를 살릴 수 있는 기회인걸!

 

야가미와 마유즈미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무로 시라베: 확실히 모노로그에 대항할 사람이 한 명이라도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야.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위험에 처할 필요는 없어.

 

기와라 우시오: 나도 히무로봇 말에 찬성. 아무리 나이토랑 모리여도 카이다 상대론 못 버텨. 이건 해변으로 돌아가야

 

가미 토가: 아닙니다. 지금 미도리카와 씨를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유즈미 나데시코: 카이다가 노리는 건 미도리카와잖아. 카이다가 아무리 문 밖에서 열심히 나쁜 짓을 해도 결국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어.

 

유즈미 나데시코: 우리는 최대한 빨리 미도리카와를 데리고 나와서 카이다가 미처 두 사람을 제압하기 전에 다 같이 덮치면 돼.

 

무로 시라베: 카이다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미도리카와의 배제니 일리는 있는 말이지만

 

기와라 우시오: 그럼 뭔갈 바리바리 싸들고 가는 건 포기하는 편이 좋을 걸. 저기 약국에서 구급상자라도 하나 사 가는 게 한계야. 과자 사 먹을 생각은 다들 접어 둬.

 

유즈미 나데시코: 쩝

 

마유즈미가 입맛을 다셨다. 아쉬운 건가… 확실히 이런 상황만 아니었어도 찹쌀떡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쉬운 일이었다. 전용실로 돌아가기만 하면 만족할 수 있을 때까지 먹을 수 있음 되새기니 작게나마 위안이 되었다.

 

우리는 하기와라가 가리켰던 약국 안으로 들어갔다. 약국에는 유용한 약이 많을 터였으나 오히려 탑에서 약물에 의존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 것 같아. 우리는 일단 구급상자를 구매하기로 했다. 의료품만큼은 다이얼로그와 크레딧을 통해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약국은 이상할 정도로 황량했다. 빼곡해야 할 약의 진열들은 중간에 끊겨 있거나 비어 있었다. 주인이 게으르더라도 이렇게 운영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카운터를 살폈지만,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은 계산대에 몸을 엎은 채 코를 골고 있었다.

 

직원들이 본받을 수 없을 만한 태도였다. 직원들이 있는지도 의문이었지만.

 

무로 시라베: 구급상자를 사러 왔습니다.

 

약국 주인의 앞에서 말하자 그는 퍼뜩 몸을 일으켰다. 술 냄새. 딸꾹거림. 상기된 얼굴. 만취였다.

 

무로 시라베: 구급상자가 있습니까? 저흰 구급상자를 사러 왔습니다.

 

입에 늘어붙은 침을 옷으로 문질러 닦은 뒤 약국 사장은 잠시 자리를 비운 뒤 우리의 앞으로 흰색의 상자를 건넸다.

 

"구급 상자? 이거나 받아. 돈은 주지 마. 그냥 가져가."

 

기와라 우시오: 뭐야. 개꿀이네. 이왕 주는 김에 하나 더 주지 그래요?

 

유즈미 나데시코: 하기와라. 이럴 때는 고맙다고 해야지! 고맙습니다. 아니 감사합니다!

 

가미 토가: 돈을 왜 안 받으시는 겁니까?

 

"돈? 됐어. 어차피 힘들게 살고 있을 텐데 뭐 하러 돈을 받아. 딱하기도 하지. 어린것들이… 이런 꼬락서니의 세상에 놓이다니"

 

오해가 있는 게 분명했지만 나는 약국 주인의 말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딱하다? 힘들게 살고 있다? 어째서 그렇게 추측한 것이지?

 

"그 안에 든 게 다 돈인가?"

 

약국 주인은 술기운에 딸꾹거리며 고개를 까딱거려 야가미가 든 가방을 가리켰다.

 

야가미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기에 하기와라나 마유즈미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약국 주인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대답 안 해도 좋아. 그렇지만 충고 하나 하지. 어디서 주웠는지는 몰라도 그 정도 돈이면 빨리 쓰는 게 좋을 거야. 밤이 오면 누가 그 가방을 노리느라 너희에게 올 지 모르니까… 살아남을 재간이 있다면 살아남아 봐라. 응원한다!"

 

무로 시라베: 그러죠.

 

우리는 흔쾌히 구급상자를 들고 약국을 나섰다. 다시 길을 건너 핏자국이 이어진 곳을 따라가던 때 마유즈미가 내게 물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약국 아저씨랑 아는 사이야?

 

무로 시라베: 아니. 모르는 사람이야. 내게 왜 말을 걸었는지는 몰라. 알 필요도 없지.

 

가미 토가: 묘한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무래도 이 지역은 치안이 좋지 않은 편 같습니다. 일본에 이 정도로 치안이 안 좋은 곳이 있다니 놀라워요.

 

기와라 우시오: 무슨 세상이 멸망한 것처럼 말하던데? 여기 거리도 묘하게 한산하고 황량해. 전염병이라도 돌았나? 존나 기분이 나쁜데.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설마

 

무로 시라베: 이유는 나중에 알아보자. 미도리카와가 급선무야.

 

기와라 우시오: 그렇겠지 뭐… 어차피 우리랑은 별 상관도 없는 곳이잖아. 시련만 끝나면 나갈 거니까.

 

나는 다른 이들을 재촉하며 핏자국을 따라 빠르게 걸어갔다. 곧 다른 이들이 나를 따라왔다. 그러는 와중에 나는 주위의 누군가가 우리를 노리지는 않을까. 안주머니에 넣은 한 정의 총을 의식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닐 가능성이 높았지만, 만약 내가 생각하는 가능성이 옳다면

 

이곳이 대몰락 이후의 세계라면, 나는 다른 이들에게서 대몰락의 정보를 숨겨야만 했다.

 

 

 

 

기와라 우시오: 겉으로 보기엔 생각보다 깨끗한걸.

 

나는 발을 조심스럽게 움직이려는 세 명을 보고 그들을 만류했다.

 

무로 시라베: 발소리 죽이지 마. 우리는 당당하게 들어간다.

 

유즈미 나데시코: 왜? 몸을 숨겨야 하지 않아?

 

가미 토가: 저야 당당하게 들어가도 되겠지만, 여러분들은 몸을 숨기는 편이 좋을 텐데요?

 

기와라 우시오: 이 친구들이 바로 어제 하드보일드물 찍어 놓고 정신을 못 차리네. 여기도 하드보일드물이잖아. 너희 존 윅 잡으러 온 히트맨들이 당당하게 초인종 누르고 오는 거 봤어?

 

유즈미 나데시코: …….

 

마유즈미는 대꾸 없이 하기와라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기와라 우시오: 아. 그래. 이번 건 내 실수. 내 말은: 미도리카와라면 자연스럽게, 선량한 민간인인 것처럼 오는 사람들보다 발소리를 죽이고 오는 쪽을 더 경계할 거란 뜻이야.

 

무로 시라베: 하기와라의 말대로야. 우리는 네 명이야. 아무리 기척을 숨겨도 한 명은 들켜. 한 명이 들키면 전부가 들킬 테고.

 

무로 시라베: 그러니 우리는 당당히 들어가는 거야. 야가미의 재회를 도와주고 있는 야가미의 친구로서.

 

기와라 우시오: 고등학교 친구? 고등학교 친구로 하자.

 

무로 시라베: 그게 자연스럽겠지. 우린 고등학생의 모습이니까. 한 명은 성인이지만.

 

유즈미 나데시코: ?

 

마유즈미는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가미 토가: 하무로 씨는 당신이 아니라 절 말씀하시는 겁니다.

 

유즈미 나데시코: 아. 그렇구나. 미안. 자꾸 누나라는 명칭에 기분이 이상해져서

 

무로 시라베: 그럼 정리하자. 우린 야가미의 친구고. 야가미의 사정을 알고 있어. 그러니 야가미가 친구와 재회할 수 있도록 그를 도우며 바다뱀이라는 사람의 행방을 찾았지. 그 결과 이 건물로 온 거야. 자. 시작.

 

건물 안에 미도리카와가 산다는 것은 꽤 분명해졌기에 우린 1층에서부터 그녀의 행방을 찾았다. 1층에는 성인 남성이. 2층에는 노파가 살고 있었다. 남은 것은 3층뿐이었다.

 

하기와라가 3층의 문을 두드렸다.

 

기와라 우시오: Knock. Knock?

 

하기와라가 문을 두드리자 문 너머에서 즉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리카와 아쿠토: 누구세요.

 

경계. 나는 목소리의 크기에서 그녀가 문 앞에 서 있음을 눈치챘다. 역시 카이다가 다녀갔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우리 중 누구보다 월등히 빠르고 핏자국을 남길 사람도 그녀밖에 없었다.

 

습격에 실패했다면 차라리 시련 안에서 죽는 편이 그녀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나았을 터였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기와라 우시오: 경찰입니다. 댁 친구가 사람을 죽였어요. 그래서-

 

가미 토가: 장난치지 마세요. 하기와라 씨. 제 친굽니다. 문 여세요.

 

잠깐의 정적이 있었다.

 

가미 토가: 당신이 제대로 들은 거 맞으니 문 여세요. 바다뱀.

 

문이 그 즉시 벌컥 열렸다. 문 안의 미도리카와는 탑에 있던 그녀와 놀랄 정도로 닮아 있었다. 물론 동일인물이었지만, 

 

가미 토가: 오랜만입니다. 바다뱀.

 

도리카와 아쿠토: 토가너야?

 

미도리카와는 자신의 마스크를 벗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남성의 목소리는 마스크를 벗자마자 여성의 목소리로 돌변했다.

 

그녀는 야가미의 뺨에 손을 올렸고 야가미는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가미 토가: 네. 접니다.

 

도리카와 아쿠토: 아니야… 넌 토가가 아니야. 토가가 언제 이렇게

 

가미 토가: 당신의 토가 맞습니다. 어른이 되었을 뿐이죠. 저희 둘 다 그렇지 않습니까.

 

야가미가 옅은 미소를 건넸다.

 

도리카와 아쿠토: 이렇게나 변하다니

 

미도리카와 또한 묘하게 미소를 띄었다. 그러나 단지 재회의 기쁨만으로 해석하기에는 어딘가 어색했다. 어디가? 바로 낯빛이.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보고 나는 설득이 마냥 쉽지만은 않겠다고 직감했다.

 

도리카와 아쿠토: 어떻게… 날 어떻게 찾아낸 거야?

 

가미 토가: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도리카와 아쿠토: 아니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토가. 내가 하려는 일에 휘말리면 안 돼.

 

도리카와 아쿠토: 이제 와서 얘기하면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너 없이 복수를

 

가미 토가: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게 중요한 것이죠.

 

야가미가 두 팔을 벌린 채 아주 천천히 미도리카와에게로 다가갔다. 목을 꺾여 죽이려는 심산일까 총을 뽑을 준비를 했으나. 야가미의 손은 미도리카와의 등과 어깨에 머물렀다. 미도리카와의 팔 또한 야가미를 감싸려는 듯이 그의 날개뼈를 더듬었다.

 

살인자와 피해자의 포옹이라니. 두 번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세 번째 시련의 미도리카와는 이런 사전작업 없이 데리고 나올 수 있다면 좋을텐데… 라고 생각하는 동안, 하기와라는 내 옆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기와라 우시오: 휘유! 저게 친구야? 저런 걸 친구라고 부르는 거면 난 친구 없어.

 

무로 시라베: 나 또한 그렇지.

 

유즈미 나데시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생기지 않을까?

 

무로 시라베: 글쎄… 확신할 순 없어.

 

기와라 우시오: 히무로 넌 눈치가 없냐?

 

세 명이 눈앞에서 떠드는데도 야가미와 미도리카와는 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가미 토가: 차라도 한 잔 어떻습니까? 오랜만에요.

 

도리카와 아쿠토: 오랜만에… 좋아. 바로 준비할게. 찻잎은 그렇게 좋은 게 아니지만

 

미도리카와가 주방으로 달려간 동안 야가미가 우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가미 토가: 여러분. 저희 둘만 안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회포를 조금 풀고 싶군요.

 

유즈미 나데시코: 재회니까… 이번만큼은 허용ㅎ

무로 시라베: 허용할 수 없어.

 

그렇지만 야가미가 미도리카와에게 어떤 말을 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가미 토가: 히무로 씨. 필요한 일입니다.

 

기와라 우시오: 번지수 잘못 찾았어! 여기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앞뒤 꽉 막히기가 머리카락 뭉치 삼킨 하수구 저리 가라야. 재회? 꿈 깨시지!

 

기와라 우시오: 그거랑 별개로 단둘이 두는 건 나도 반대야. 우리도 그쪽 소문을 알음알음 들어왔거든. 또 야가미를 데리고 어딘가로 가려는 속셈이면 가만히 못 있어 줘.

 

도리카와 아쿠토: 그건 너희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우리 둘 사이의 일이지. 왜 너희가 그렇게까지 간섭하는 거야?

 

나는 총이 있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으려 몸을 의식했다. 그녀에게 위협적인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총띠마저 풀고 품 안에 총을 넣었지만 공기 중을 서서히 감도는 긴장감에 내 신경이 반응하고 총으로 손이 움직이려 했기 때문이다.

 

도리카와 아쿠토: 거기 너. 손이 근질거리나?

 

그리고 내 어색한 동작을. 그녀는 간파해냈다.

 

무로 시라베: 조금은.

 

도리카와 아쿠토: 그 나이에 잘도 총을 차고 있네…? 나조차도 자주 보기 어려운 게 총인데.

 

무로 시라베: 피차일반이야.

 

이미 충분히 예민한 것 같은 미도리카와와 기싸움을 하는 것은 좋은 판단이 아니었다. 또 그녀를 해변으로 데려가야 하는 입장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것은 매우 나쁜 판단이 분명했다.

 

나는 먼저 뜻을 굽히고 그녀에게 제안했다.

 

무로 시라베: 이렇게 하자. 우리는 발코니에서 너희를 바라볼 거야. 그러는 동한 너희는 회포를 풀도록 해, 대화를 전부 숨기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남에게 들려줄 수 없는 말이라면 속삭일 수 있겠지.

 

도리카와 아쿠토: 누구 마음대로 협상을 해?

 

나는 야가미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다. 그랬다간 미도리카와에게서 큰 반감을 살 게 분명했다. 또한 야가미는 명석한 편이었기에 굳이 지시를 내릴 필요도 없었다.

 

협상을 하는 것은 협상가의 마음이었고, 협상을 제멋대로 수락하는 것 또한 협상가 마음이었다.

 

가미 토가: 제 친구들입니다. 바다뱀. 한 번만 허락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야가미가 미도리카와의 눈을 바라보며 얘기하자 그녀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손가락으로 베란다를 가리켰다.

 

도리카와 아쿠토: 나중에 토가한테 고맙다고 말해.

 

무로 시라베: 잊지 않겠어.

 

나와 마유즈미, 하기와라는 그대로 신발을 벗은 채 발코니로 향했다. 마유즈미는 어색하게 미도리카와를 바라보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안녕하세요. 실례합니다…

 

기와라 우시오: 안녕하쇼. 반가워요. 야가미가 댁 얘기 많이 했어! 진짜로. 당신한테 얼마나 마음을 쓰던지 넌덜머리가 나더라.

 

도리카와 아쿠토: 정말이야?

 

가미 토가: 불필요한 소리 덧붙이지 마시고 베란다로 나가세요.

 

기와라 우시오: 봤지? 얘가 이 정도로 당신 얘기를 많이 했다 이거야.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그래. 얘 감정표현 서투른 거 댁도 알잖아.

 

도리카와 아쿠토: 누구보다 잘 알아.

 

야가미는 미도리카와의 웃음기 서린 눈동자에서 고개를 돌렸다.

 

무로 시라베: 빨리 오기나 해. 하기와라. 문 닫을 테니까.

 

기와라 우시오: 간다 가! 얼굴 좀 트려는데 초를 치고 그래.

 

하기와라가 들어오자 나는 발코니의 문을 드르륵 닫았다. 

 

기와라 우시오: 그런데 굳이 엿들어야 해? 어차피 우리가 여기에 있으니 중요한 말은 하지 않을 것 같은데.

 

무로 시라베: 둘의 입장에선 몇 년만의 대화야. 중요한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아? 저 둘은 우리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을 거야.

 

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저걸 봐!

 

마유즈미가 가리키는 방향에 나는 시선을 돌렸다. 미도리카와가 홍차로 추정되는 액체가 담긴 컵에 우유를 붓고 있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아까 분명 차를 준비한다고 했는데 우유를 붓고 있어. 차에 우유라니?! 저런 끔찍한 짓을

 

무로 시라베: …관점에 따라 무척 끔찍한 일이긴 하지.

 

미도리카와 아쿠토는 우유를 넣은 홍차 잔을 야가미에게 건넸다.

 

가미 토가: 이것도 오랜만이군요. 전 본래 커피를 더 좋아했지만 계속 마시다 보니 밀크티 또한 매력적인 음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리카와 아쿠토: 그거 기억나? 내가 타피오카 펄을 사 왔더니 네가 흑진주를 이렇게 싸게 샀냐며 놀랐던 거.

 

가미 토가: 그 정도 크기에 광택이 있는 물체는 흑진주밖에 생각나지 않았단 말입니다.

 

도리카와 아쿠토: 결국 넌 타피오카에까지 빠져 버렸었지. 아마?

 

미도리카와가 웃으며 얘기하자 야가미는 못마땅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가미 토가: 오해 살 말은 마세요. 빠진 적은 없습니다. 즐겼을 뿐입니다. 다만 최근 몇 년간은 먹을 일이 좀처럼 없었죠. 지나친 당분은 근육에 독이니까요.

 

야가미가 차를 홀짝 마시자 미도리카와는 서서히 운을 떼었다.

 

도리카와 아쿠토: 토가. 그 몸은

 

가미 토가: 네. 다른 사람 같죠. 몇 년을 들인 결과물입니다. 과시할 생각은 없지만 놀랍지 않습니까? 그 토가가 이렇게까지 커지다뇨.

 

도리카와 아쿠토: 재활도 힘든 부상이었을 텐데…

 

가미 토가: 고통스러운 몇 년을 들였죠. 

 

도리카와 아쿠토: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거야?

 

야가미는 다시 한번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내게는 그 행동이 대답을 뒤로 미루려는 것처럼 보였다.

 

야가미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가미 토가: 큰 계기가 하나 있었죠. 누군가의 발목만 잡는 자신이. 그래서 버려진 자신이. 한심하고 미워서 견딜 수가 없더군요. 이상하게 당신을 향한 원망보다도 스스로를 향한 원망이 더 컸습니다.

 

가미 토가: 내가 조금만 더 강했다면, 내가 당신에게 충분한 이용 가치가 있었다면. 그래서 당신과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요? 다 당신 때문입니다. 왜 충분히 강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녀를 지킬 만큼 강인하지 못했습니까. 왜 약해 빠져서 짐짝이 된 겁니까.

 

전부 당신의 약함이 잘못된 겁니다. 그래서 바다뱀이 당신을 버린 겁니다. 총질 두어 번을 더 당했다간 죽을 게 명백했기에 버려진 거란 말입니다!

 

무로 시라베: 그랬던 건가. 그래서 야가미는

 

기와라 우시오: 히무로. 저거 연기 같냐?

 

하기와라가 내 어깨를 툭 하고 치며 물었다.

 

무로 시라베: 기막힌 연기 같지 않냐고 묻는 거라면, 얼핏 진짜 같아 보인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기와라 우시오: 진지하게 묻는 거야. 내가 보기엔 저거 연기가 아닌 것 같아.

 

유즈미 나데시코: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지금 야가미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어.

 

무로 시라베: 그런 것처럼 보여. 놀라운 일이지.

 

기와라 우시오: 그래. 놀랍긴 하네.

 

도리카와 아쿠토: 버리다니. 토가. 그런 게 아니야

 

가미 토가: 병원에서 의식이 드니 이틀이 지났고 당신은 제 곁에 없었습니다. 뭔가 착오가 있었다는 생각에 당신을 기다렸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더군요. 버려졌다고.

 

가미 토가: 퇴원 후 관계자에게 뇌물을 주고 나서야 당신이 나를 병원에 맡기고 떠났다는 것을 알았죠.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않고 목숨이라도 붙여준 건. 마지막 옛정 같은 것이었습니까?

 

도리카와 아쿠토: 그 괴물에게서 도망친 건 순전히 행운이었어. 너와 함께 계속할 순

 

가미 토가: 계속 도망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당신의 신변은 누구도 모르니까요. 내가 깨어난 뒤 부모님에게 연락했다면, 우린 어느 나라로도 도망칠 수 있었을 겁니다. 바다뱀의 조직이 와해된 이상 당신을 더 쫓을 사람도 없었을 테고요.

 

가미 토가: 난 어디까지고 당신이 도망칠 수 있게 도와줄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내가 아닌 복수를 선택했죠.

 

미도리카와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가미 토가: 당신은 복수가 더 소중했던 겁니다. 당신 입으로 말하세요. 나는 복수가 더 소중했다고.

 

도리카와 아쿠토: 네가 더 이상 나에게 엮이는 것을 바라지 않을 줄 알았어. 그런 일을 당했다면

 

가미 토가: 내가 당신을 싫어한다고 한들, 아무 말 없이 사라져 버리면 제가 후련하다고 느끼기라도 할 줄 알았습니까? 멍청했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그런 식으로 간단히 매듭짓고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요?

 

가미 토가: 그럴 순 없어… 난 우리가 그런 식으로 간단하게 끊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난 당신의 얼굴도, 진짜 머리색도 몰랐지만 그렇기에 서로를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가면 한 겹을 덮어둔 당신의 본질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겉모습을 숨기고 있을 뿐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당신 그 자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미 토가: 내 착각이었죠.

 

무로 시라베: ….

 

두꺼운 가면.

 

카텟.

 

그리고 메리는 살인자. 내가 몰랐던 그녀의 모습.

 

남이 처한 상황을 자신의 경우에 적용하는 것은 나의 나쁜 버릇이었다. 내가 겪은 경험에서 비롯된 감정을 근거 삼아 그를 이해해보려 하다니… 살인자를.

 

그를 감정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과정이었음에도 나는 거부감을 느끼고 사고에 제동을 걸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선을 그었다. 그의 행동 계기를 알아보더라도 이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것은 카텟 기관에서 면담해본 수많은 범죄자들과 같은 경우였다. 모두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를 죽인 것에 대한 복수. 생계의 위험에 의한 절도. 이유가 없는 쾌락범일지라도 그렇게까지 이성을 잃은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정당화되지는 않는 법이었다. 아무리 처절하고 딱한 사정일지라도 깊이 들여다보지는 않는 것이 심연을 감시하는 자의 자질이었다.

 

사실 공감하고 싶어도 공감하지 못할 터였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도리카와 아쿠토: 토가. 아니야. 나는 너를

 

야가미는 책상을 툭 하고 내려쳤다. 마음 같아선 온 힘을 다해 내려치고 싶지만, 간신히 힘을 제어하는 듯이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가미 토가: 듣기 싫습니다. 아십니까? 당신은 나를 버린 게 아닙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저버린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따라갈 유일한 사람을. 당신 스스로 저버린 겁니다.

 

야가미의 이마에 굵은 혈관이 하나 불거졌다. 그의 미간은 찌푸려졌고, 이는 꽉 다물어지다 못해 마찰로 인한 뚜둑 소리를 냈다.

 

자신의 이마에 손을 대고 미도리카와를 노려보는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가미 토가: 당신이 당신을 버린 거란 말입니다

 

도리카와 아쿠토: 미안해. 토가.

 

미도리카와는 의자에서 일어나 야가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의 머리를 당겨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다 안기에는 벅찬 체구였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야가미는 미도리카와를 돌아보지도 않고 밑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가미 토가: 이거 놓으세요. 당장… 놓아요.

 

도리카와 아쿠토: 네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

 

가미 토가: 이제 와서 달래 봤자 늦었습니다 늦었다고요.

 

도리카와 아쿠토: 네 말이 맞아.

 

얼핏 보기 좋은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살인자와 범죄자의 촌극이라는 생각 또한 피어올랐다. 살인을 저지르기 전의 야가미라면 몰라도, 지금 그들의 재회는 그저 서로에게 걸맞은 친구를 사귄 악한들의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재회마저도 진정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미도리카와가 탑에서 야가미의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면, 그는 모노로그에게서 미도리카와의 정체를 듣기도 전에 자신의 복수를 끝맞추었을 테니까. 눈물이라도 한 방울 흘려주고 싶은 광경이었지만 전부 허상일 뿐이었다.

 

그들이 감동의 재회를 나누고 입이라도 맞춰도 대단히 감격스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것과는 별개로 누군가를 죽일 정도의 복수심을 가진 사람이 복수를 끝마치고 나니 그 사람에게 안겨 있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그래도 이걸 언제까지 보고 있어야 할까?'

 

도리카와 아쿠토: …그러지 말걸 그랬어. 너와 함께 갈 걸 그랬어.

 

미도리카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바다뱀과 토가 시절부터 친했던 것은 알았지만, 몇 년 사이의 재회가 그 살기등등하던 바다뱀에게서도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는 것인가? 저게 친구라고?

 

유즈미 나데시코: 미도리카와… 다행이다. 그치?

 

무로 시라베: 맞아. 저 정도 애착이라면 쉽게 문으로 데리고 갈 수 있으니까.

 

유즈미 나데시코: 아. 그 얘기가 아닌데

 

가미 토가: 이제 와선 전부… 의미 없는 일입니다. 과거의 일 따위 전부. 의미 없습니다.

 

취해버린 것처럼 말을 늘어놓던 야가미가 문득 자신의 목적을 다시 떠올린 것처럼, 고개를 들고는 미도리카와에게 말했다.

 

가미 토가: 그러니 잊어버리죠. 전부 잊어버리는 겁니다. 누가 배신했느니 누가 떠났느니, 그런 것들은 잊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합시다. 당신도 원하지 않았습니까? 새 시작 말입니다.

 

도리카와 아쿠토: 새 시작…?

 

가미 토가: 네. 밀수업을 계속하지는 못할 겁니다. 하지만 당신의 수완은 여전하지 않습니까? 합법적이고 안전한 세계로 들어갑시다. 그 안에서도 당신은 최고일 겁니다. 제가 장담하죠.

 

가미 토가: 다시 함께 시작하는 겁니다.

 

미도리카와는 자신의 두 손이 깍지를 낀 채 서로 맞물리게 둔 뒤로 잠시 말을 멈췃다.

 

도리카와 아쿠토: 그건 어려워. 토가.

 

가미 토가: 왜인가요? 저와 다시 일하고 싶지 않습니까?

 

도리카와 아쿠토: 당연히 그러고 싶어. 하지만 그냥 잊어버릴 순 없어. 네가 날 미워한 시간을 그냥 없던 셈 취급할 순 없다고. 내가 네게 남긴 상처들이잖아.

 

도리카와 아쿠토: 그걸 정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 너도 원하지 않잖아. 안 그래. 야가미? 그러니 완전히 잊고 다시 시작할 순 없을 것 같아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는 것 같아서.

 

미도리카와는 야가미를 보던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베란다의 세 명을 바라보았다.

 

도리카와 아쿠토: 베란다에 있는 저것들. 너와 무슨 사이야?

 

나는 순간 가슴팍을 얼음송곳으로 꿰뚫는 듯한 살기를 느꼈다. 다시 느껴볼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는 미도리카와의 파장이었다. 경계. 위협. 그리고 살의.

 

나는 품 안으로 파고들려는 손에 힘을 주어, 총을 쥐려는 본능을 억눌렀다. 총으로 대화하려 해 봤자 좋을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그녀를 문까지 데려가야 하는 입장이었으니.

 

마유즈미와 나. 나와 하기와라는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베란다는 싸우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피할 곳도 사각지대도 없었으며, 떨어지면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문 밖으로 나가면 모든 부상이 사라지겠지만. 다리가 부러진다면 얘기가 다를 터였다. 문에 도달하기 어려워질 테니.

 

도리카와 아쿠토: 눈 굴리는 소리 다 들려.

 

우리가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자 야가미가 재빨리 미도리카와에게 말했다.

 

가미 토가: 말했잖습니까. 친구라고요.

 

도리카와 아쿠토: 난 함께 다니면 서로 긴장하게 되는 친구 관계를 본 적이 없어. 한 놈만큼은 긴장하지 않고 있지만

 

나는 재빠르게 가슴팍에 힘을 주고 숨을 들이쉬어 심장의 박동을 빠르게 만들었다. 그래 봤자 이미 의심을 사고 있던 판이라 의미는 없었다.

 

도리카와 아쿠토: 넌 어른이 됐을 뿐. 여전히 토가야. 그런데 내가 토가를 못 읽을 것 같아? 너희들은 토가의 친구가 아니야.

 

무로 시라베: 이 일을 야가미 토가가 원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도리카와 아쿠토: 내가 알고 싶은 건. 너희가 뭘 원하냐는 거야. 토가를 미끼로 썼으니 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길 바라지. 그게 아니라면 각오해야 할 거야.

 

나는 환상 속의 신수 용에겐 단 하나의 비늘이 다른 비늘과 반대의 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역린은 용의 약점이기도 하지만 용의 격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무로 시라베: 우리 또한 야가미 토가와 같은 것을 원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협력하는 것이다.

 

도리카와 아쿠토: 너희가 우리 둘의 화해를 좋아할 일이 어디 있다고.

 

무로 시라베: 너에게도 좋은 일이다. 최근 살수(殺手) 한 명이 찾아오지 않았던가?

 

미도리카와 아쿠토의 입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눈만으로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었다. 눈이 커졌고 그다음에는 의심이 뒤따랐다.

 

도리카와 아쿠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기와라 우시오: 진짜 개답답하네. 걔가 여기로 온다고! 튀어야 한다니까?

 

하기와라가 문을 벌컥 열고 거실로 발을 디디자 미도리카와가 총을 뽑았다. 충분히 빠른 속도였다. 나는 그녀의 움직임을 보고 그녀가 하기와라를 겨누기 전에 그녀에게 총을 겨누었다.

 

기와라 우시오: 오. 썅! 둘 다 진정. 진정해 이 새끼들아 진정! 진정 뜻이 뭔지는 알지? 신나갔냐고 이 새끼들아!

 

가미 토가: 히무로 씨. 여기에 왜 왔는지를 기억하세요.

 

야가미 토가가 자리에서 일어난 채 나를 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긴장이 스며 나왔다.

 

무로 시라베: 안다. 다만 그녀를 위해 우리 중 누군가가 죽을 순 없다.

 

도리카와 아쿠토: …너 정체가 뭐야.

 

무로 시라베: 둘 모두 진정해라. 제대로 정신을 차리면 카이다 쿠로하 두 명이 와도 대처할 수 있을 테니.

 

카이다. 카이다. 미도리카와 아쿠토는 그 명칭에 관심을 가졌다. 그 덕에 내 정체에 대한 사안은 2순위로 밀려났다.

 

도리카와 아쿠토: 이제 그 고아는 카이다 쿠로하라는 가명을 쓰나 보지?

 

유즈미 나데시코: 잠깐! 말이 너무 심하잖아!

마유즈미가 기겁했다.

 

무로 시라베: 가명이 아니라 진명이다. 카이다 쿠로하.

 

사실 그게 진명인지 어떤지는 알 방도가 없었으나. 그녀에게 그 사실까지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도리카와 아쿠토: 정말이라면 좋은 정보네. 더할 나위 없어. 정말이라면.

 

가미 토가: 옛날 그 암살자의 뒤를 캔 겁니까? 바다뱀.

 

도리카와 아쿠토: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거든. 이것 말고도 아는 게 많아. 어쩌다 고아원에서 마피아 쪽으로 흘러들어 가고. 이상한 조직에 실험을 당해선 개조당하고

 

나는 순간 이상한 위화감이 들어 미도리카와 아쿠토의 말을 가로막았다.

 

무로 시라베: 이상한 조직? 재단에 대해서 아는 건가?

 

도리카와 아쿠토: 재단. 그래. 그렇게도 불리지. 초고교급을 사냥해선 재능을 빼앗고 죽이는 놈들.

 

초고교론자들은 대몰락 이후에 나타났다.

 

또 그녀는 초고교론자를 인식하고 있었다. 탑으로 떨어졌던 것과 같은 시점의 미도리카와였으나, 가지고 있는 기억은 달랐다.

 

그녀는 대몰락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두 번째 시련의 배경은 대몰락 이후의 세계였다.

 

기와라 우시오: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저러는 미친 놈들이 있다고?

 

가미 토가: 저 또한 처음 듣습니다.

 

도리카와 아쿠토: 농담 마. 가짜든 진짜든 초고교급들은 재단을 피해 도망 다니는 신세야. 나도 마찬가지지. 그리고 우리 중 한 명은 나를 쫓는 입장에 있는 것 같단 말이지

 

미도리카와는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도리카와 아쿠토: 너… 너는 카이다 쿠로하와 똑같은 느낌을 풍겨. 너. 뭐야? 날 어떻게 하려고 왔어?

 

기와라 우시오: 어쩐지! 둘 다 싸이코다 싶더라.

 

유즈미 나데시코: 하기와라. 그만!

 

무로 시라베: 내 이름은 히무로 시라베다. 카이다 쿠로하와 나는 특정한 관계에 있지 않다. 기원은 같지만, 카이다 쿠로하와 내가 맡은 역할 자체가 다를뿐더러 나는 역할에서마저도 멀어졌다. 완전한 타인이지.

 

무로 시라베: 우리는 엄밀히 말해 너를 카이다 쿠로하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왔다. 야가미 토가와 네 사이의 화해는 부수적인 일이다.

 

미도리카와 아쿠토는 어리석지 않았다.

 

도리카와 아쿠토: 카이다 쿠로하는 내가 이미 처리했어. 몸에 구멍이 잔뜩 났지. 다시 돌아오려면 그 자식이라도 한 달은 걸릴 걸. 어쩌면 과다출혈로 뒈졌을지도 모르지.

 

기와라 우시오: 생각해보니 걔가 너한테 진 것도 웃기다. 얼마나 무지성으로 덤볐으면 그 몸뚱이를 가지고 지지?

 

도리카와 아쿠토: 기억 소거를 계속 당하면 생각이 없어지나 봐. 그러니 그 여자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 없어.

 

유즈미 나데시코: 아니야. 미도리카와. 카이다를 죽이지 않고 보낸 거라면, 카이다는 부상을 순식간에

 

아.

 

이런.

 

도리카와 아쿠토: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유즈미 나데시코: 앗

 

가미 토가: 바다뱀. 진정해요.

 

야가미의 말에도 불구하고 미도리카와는 하기와라를 겨누고 있던 총을 내게로 겨누었다.

 

도리카와 아쿠토: 토가도 내 이름은 몰라. 토가에게도 알려준 적 없는 걸. 너희들이 어떻게 알고 있지?

 

무로 시라베: 그건

 

기와라 우시오: 여기까지구만. 그래도 재밌었어. 웃겼고. 다 농담이야… 내 죽음조차도 말이야.

 

하기와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에 나는 그의 얼굴을 손등으로 때려 눈을 뜨게 만들었다.

 

기와라 우시오: 아. fuck! 왜 그래!

 

무로 시라베: 정신 차려. 여기서 죽을 순 없어. 할 일이 있잖아. 이바라를 다시 만나고 싶다면 포기하지 마!

 

하기와라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뻐끔거렸다. 나는 아주 잠깐동안 그가 할 말을 꺼내지 못해 입을 뻐끔거린 거라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아니었다. 그는 입모양으로 내게 계속 욕을 하고 있었다.

 

마유즈미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것처럼 미도리카와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우리가 수상하게 보이겠지만 우린 나쁜 사람들이 아니야. 너와 야가미의 재회도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어!

 

도리카와 아쿠토: 너희… 대체 정체가 뭐야. 무슨 일을 하러 왔어?

 

유즈미 나데시코: 너를 도와주러 온 거야. 미도리카와!

도리카와 아쿠토: 또 내 이름을

 

유즈미 나데시코: 넌 우릴 모르겠지만 우린 널 알아! 그리고 우린 널 살리고 싶어. 미도리카와. 우릴 믿어주면 안 될까?

 

미도리카와는 눈 앞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유즈미는 즉흥적인 거짓말에 서툴렀다. 미도리카와도 기척을 읽는 능력이 탁월한 것처럼 보였으니 마유즈미의 그런 면은 간파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즉흥적인 진실을 말하는 것은 누구보다 잘 했다. 마유즈미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가장 어려울 때에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도리카와 아쿠토: 이해가 안 돼

 

미도리카와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살짝 저은 순간. 내 다이얼로그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무로 시라베: 나이토…? 여보세요.

 

전화를 받자 나이토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토 유즈루: 여보세요! 여보세요?! 히무로. 들리지? 여기선 다이얼로그가 터지잖아!

 

무로 시라베: 들리다시피. 네 말이 맞아. 무슨 일이야?

 

이토 유즈루: 너희 지금 당장 거기서 나와야 해. 빨리! 빨리 나와!

 

기와라 우시오: 빨리 가라고? 지금? 왜 갑자기 그러는데?

 

도리카와 아쿠토: 제멋대로 얘기를 진행하지 마. 대체 이런 행동에 어떤 이유가 있는 거지?

 

이토 유즈루: 이것들아! 카이다가 그쪽으로 가고 있다고!!

 

나이토가 답답하다는 듯한 커다란 성량으로 쩌렁쩌렁 외쳤다.

 

 

 

 

 

이다 쿠로하: 오기만 해 봐. 이 년 목을 그어버릴 테니까!

 

카이다 쿠로하는 마유즈미의 목에 단도를 들이대며 외쳤다. 그녀의 전신에는 모래가 묻어 있었다. 심지어는 귀에도 모래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옆으로 쏠리게 하고 머리를 털어내 모래가 쏟아지게 만들었다. 나이토는 자신이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 일에 분함을 느끼는 듯이 몸을 떨었다.

 

모리 레이코는 카이다의 말에 주저하지 않고 카이다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나이토는 뒤늦게 그녀의 팔을 붙잡았지만, 모리는 잠시 당황을 내비치는 카이다의 얼굴에서 그녀가 누군가를 해칠 상황이 아님을 파악했다.

 

이토 유즈루: 멈춰! 마유즈미를 죽일 셈이야?!

 

리 레이코: 마음껏 그으라고 해라. 서예가의 목숨은 아쉽지만 지금은 내통자를 처형시켜 하나라도 줄이는 일이 더 중요하다. 값진 희생이 될 테지. 우리 모두는 해변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카이다는 모리의 말에 블러핑인지 진심인지 파악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모리는 가식을 떤 적이 없었고 마유즈미가 죽는 것쯤은 신경도 쓰지 않을 인물이었다. 그 점이 카이다의 입지를 서서히 좁혀갔다.

 

이토 유즈루: 무슨 말도 안 되는…!

 

리 레이코: 그리고 저걸 봐라! 난 다섯 걸음은 족히 내디뎠다. 그 정도라면 서예가와 다른 이를 죽이고 세 번째 표적을 잡아도 이상하지 않지. 그런데도 첩자의 손은 그대로다. 허풍에 불과하다!

 

좋지 않아. 이런 대치 구도는 전혀 좋지 않아. 카이다는 자신의 입에 침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문 밖으로 나온 후. 카이다는 모래 안에 자신의 몸을 파묻은 채 다른 이들을 기다렸다. 탐색조가 미도리카와에게 도달할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 카이다는 모래 속에서 뛰쳐나와. 문을 향해 달려갔다.

 

나이토와 모리는 충분히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그렇게까지 가까이서 나타날 줄은 몰랐다. 모리는 손 두 움큼에 모래를 잔뜩 쥐어 카이다에게 뿌렸지만 그것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그렇게 카이다는 문 앞에 떨어진 네 명의 육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인질을 잡는 것 말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점에 있었다.

 

당장 시련에 돌입해야 하는데. 지금 당장 들어가도 모자랄 판에 두 명을 상대해야 한다니… 차라리 죽일 수 있다면 그렇게 했겠지만, 카이다는 누구도 죽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죽이는 순간 본인도 처형. 내통자의 위치에서도 그 규칙만큼은 지켜져야만 했다. 첫 번째 살인의 특전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두 명을 협박해 그녀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보내고, 재빨리 시련에  들어가 미도리카와를 죽여버린 뒤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리. '개 같은 년' 때문에 카이다의 계획은 틀어져버렸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성큼 발을 내딛다니 카이다마저도 혀를 내둘렀다. 모리는 카이다와 협상할 생각이 없었고 흑막의 내통자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다만 그 행동은 마유즈미의 안위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상황의 위험성을 직시시키기 위해선 설령 카이다가 원치 않는다고 해도, 그녀는 인질에게 상처를 입힐 수밖에 없었다.

 

이다 쿠로하: 물러서

 

칼이 마유즈미의 피부를 살짝 찢자 안에서 붉은색의 피가 배어 나왔다.

 

그 순간 카이다는 곤히 눈을 감고 있는 마유즈미가 단도를 쥔 자신의 손을 꽉 붙잡는 것을 느꼈다.

 

이게 자는 척을 한 거냐며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려는 찰나. 카이다는 마유즈미가 머리를 180도로 우두둑 꺾고 고개를 홱 들어 그녀를 바라본 뒤 소리치는 것을 보았다.

 

"손 떼! 내 거야!"

 

이다 쿠로하: 워아아아아아아악!

 

카이다는 탑에 온 이래 처음으로 화들짝 놀란 채 꼴사나운 비명을 내지르며, 모래를 박차고선 뛰어올라 7m는 족히 뒤에 착지했다.

 

나이토는  카이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토 유즈루: 저 새끼가 마유즈미 목을 그었어!

 

리 레이코: 아니. 상처만 냈을 뿐이다! 피부만 다쳤다. 지혈을 하지 않아도 아무는 상처다. 지레 겁을 먹은 건가?

 

저것들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카이다는 눈이 빠질 만큼 눈썹을 위로 당겨 올렸다. 아까 그걸 못 봤냐고 소리치기 직전. 카이다는 마유즈미가 목에서 한 방울의 피를 흘리며 모래사장에 드러누운 채인 것을 보았다.

 

눈은 감고 있었으며, 손은 허리 쪽에 놓여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고개는 약간 옆으로 떨어졌을 뿐 목뼈가 부러질 정도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뭐야.

 

뭐냐고.

 

이다 쿠로하: 내가 미친 건가?

 

가재 괴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 건가? 아니면 저 새끼들이 미친 거야? 이걸 못 봤다고? 못 들었단 말이야?

 

이다 쿠로하: 너희… 지금 아무것도 못 본 거냐?

 

리 레이코: 내게 보이는 것은 추하고 비겁한 내통자 한 명뿐이군.

 

카이다는 바닥에 쓰러진 마유즈미에게서 몇 발자국을 더 물러나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다 쿠로하: 좆까. 허깨비일 뿐이야… 너흰 날 절대로 어떻게 못 해. 절대 못 건드린단 말이지

 

이다 쿠로하: 난 누구보다 강하니까. 너희 버러지 새끼들이랑은 달라!

 

카이다는 문 옆에 떨어져 있는 다른 이들을 제쳤다. 모래가 사방으로 튀었다. 나이토가 보기에 카이다는 궁지에 몰린 짐승 같았다. 쥐구멍을 찾아 달아나는 시궁쥐처럼. 카이다는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마자 그녀의 육신도 모래에 털썩 고꾸라졌다.

 

이토 유즈루: 이걸 들어갔네! 미친 새끼. 가서 막아야 해! 모리 넌 위험하니까 여기 남아있

 

나이토가 문고리를 향해 터벅터벅 걷자 모리가 그와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나이토는 지레 '뭐야. 지금 들어가면 첩자와 마주칠 테니 위험하니까 같이 가 준다는 거야?' 라며 그녀와 친구가 된 것 같은 기분에 벅차올랐다. 그것은 무도가들이 자신의 기술을 겨루되 서로를 인정하며 우정을 다지는 듯한 느낌과 닮아 있었다.

 

그의 착각이 무색하게 모리는 바닥에 떨어진 카이다를 내려다보았다. 문고리에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리 레이코: 마침내. 절호의 기회가 왔다.

 

이토 유즈루: 시련 내부에선 다이얼로그가 통한다고 했거든? 일단 들어가서 히무로한테 전화를 걸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나이토는 옆에서 용을 쓰는 모리의 목소리를 듣고는 그녀를 돌아보았고, 카이다의 발목을 붙잡은 뒤 잡아끄는 그녀를 보자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이토 유즈루: 야! 지금 너 뭐해?!

 

리 레이코: 보면 모르나? 이대로 첩자를 바다에 담가 죽일 것이다! 너도 도와라!

 

모리는 카이다를 거의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것은 모리의 완력이 부족하다기보단 카이다의 몸무게 때문일 것이라고 나이토는 짐작했다. 카이다의 몸은 모래에 묵직한 궤적을 남겼다. 마치 사람 안에 쇠기둥을 통째로 넣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나이토는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이토 유즈루: 미쳤어?! 난 그런 짓 못해!

 

리 레이코: 해야만 한다. 첩자가 우리 앞에 무방비하게 놓이는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다음은 없다!

 

나이토는 묶어 두자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카이다 쿠로하에게 포박이 의미 있을 리는 없었다. 밧줄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게 끊어버리리라는 것을. 나이토는 알고 있었다.

 

리 레이코: 첩자는 감당하기 어려운 적이다. 지금 육체를 죽이면 의식 또한 시련 안에서 죽을 것이며, 살아남더라도 시련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지금 우리의 손에 살인 게임의 판도가 걸려 있다! 강대한 내통자를 쓰러트릴 기회가!

 

나이토는 그만 정신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생일날에 대가리 아파오는 나이토 유즈루군입니다

 

다음 편엔 두 번째 시련 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게임의 분위기도 슬슬 바뀔 것 같네요 큰 거 온다 큰 거 온다~ 두근두근두근두근

 

진짜 재밌게 한 번 살려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