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카나리 케이토: 너. 우리랑 손을 잡아.
나나시: 뭐?
카나리 케이토: 그럼 너와 캐롤 브라이트의 목숨만큼은 해치지 않겠다고 보장해 주지.
'그게 무슨 뜻이야' 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내가 모든 상황을 이해해버렸다.
나나시: …크레딧을 많이 가진 자들끼리 힘을 합치자 이거야?
카나리 케이토: 얘기가 빨라서 좋네. 돈머리가 있구나 너?
카나리는 계약을 이미 다 따낸 듯이 여유롭게 웃고 있었고, 후루미나미는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로 나를 떠보듯 살짝 웃고 있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내가 거절할 생각이라는 것을.
후루미나미 나몬: 우리 편인 이상 네 목숨은 확실하게 챙겨줄 거야. 네 경주마는 당연하고. 그렇지만 너를 위해 혜택을 하나 더 얹어주는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너의 캐롤 씨. 그리고 그녀의 경주마까지 온 힘을 다해 지키겠어.
나나시: …못 믿겠는데.
난 칸나즈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칸나즈키 시노부: 후루미나미 걔는 물귀신처럼, 자기랑 엮이는 사람들을 자기 운명으로 끌어들여.
그런 사람과 한 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후루미나미는 또 어떤 사람이던가. 다른 사람이 실패하는 꼴을 보기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단지 누군가가 상처를 입고 다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열심히 행동해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카이다와 손을 잡고 만든 판 때문에. 캐롤 씨가 강제적인 터치를…
카나리 케이토: 표정 풀어. 내 옆의 이 자식 말고 나를 믿어. 나만큼은 믿어도 되니까.
나나시: 내가 네 뭘 보고 너를 믿어?
카나리 케이토: 내 신용. 난 거래 쪽에서는 단 한 번도 뒤통수친 적 없어. 단 한 번도. 모든 계약에 성실했고 진실했지. 그건 내 자존심이야. 앞으로도 그럴 거고.
카나리 케이토: 난 다른 건 몰라도 거래는 저버리지 않아.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나나시: 그건 믿을 수 있을지 몰라도. 애초에 거래의 내용이 구미가 당기지 않아. 사실 난 이미 크레딧이 많아서 내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어. 굳이 너희의 도움이 없어도 돼.
카나리 케이토: 그래. 너야 지금도 안전하니 괜찮다고 생각하겠지만. 넌 그보다 나아질 수 있어. 우리가 힘을 합치면 탑의 전부를 지배하고 해변의 상황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크레딧을 사용하면 뭐든 할 수 있어.
카나리 케이토: 권력을 가진 지배자. 왕이 되는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도 삼두정은 보통 머리 하나만 남고 몰락하는 거. 알지?
카나리 케이토: 양두정도 마찬가지니까 조용히 해. 나나시 너는 가늠이 안 되겠지만 넌 지금 말도 안 될 정도로 좋은 기회를 손에 넣은 거야. 사실 네가 제정신 박힌 놈이었다면 네가 먼저 우리를 찾아왔겠지. 제발 같은 편으로 받아 달라고 말이야.
카나리 케이토: 그렇지만 네가 그럴 놈이 아니니 우리가 기꺼이 와준 거야. 너도 우리와 같은 무대에 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 위해 온 거라고. 남들과 다른 높이에서 절대적인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해 봐. 네 주변 놈들은 감히 네게 말도 붙이기 어려워질 걸. 네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되니까.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나나시: 불공평하게 들리는걸…
카나리 케이토: 뭐? 불공평해? 인생은 원래 불공평한 거야. 그리고 그 불공평함을 극복하는 건 본인들 몫이지. 내가 했던 것처럼.
나나시: 그렇다고 해서 굳이 이럴 필요는 없잖아. 카나리. 시간만 지나면 결국 모두 탑으로 돌아올 거야. 굳이 우리가 물품을 보내지 못하게 막아서 해변에 있는 인원들을 곤경에 처하게 할 필욘…
카나리 케이토: 그럴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는 상관 없어. 내가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해. 왜 그래서는 안 되는데?
카나리의 어조는 서서히 거세졌다.
카나리 케이토: 내가 번 돈은. 치환된 크레딧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아? 내가 벌었어. 너희들 중 누군가는 운동을 하고, 누군가는 공부를 하고, 누군가는 재능을 펼치는 동안 나는 돈을 벌었어.
카나리 케이토: 그건 내가 얻은 내 자원이야. 그게 내 재능이라고. 내가 한 번이라도 너희만큼 웃기거나 머리가 좋다거나 몸이 좋거나.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 있나? 없지. 멍청이나 그러는 법이니까.
카나리 케이토: 그런데 난 왜 내 자원을 마음대로 못 쓰지? 왜 너희는 내 마음대로 하지 말라며 매달리고 있는 거냐고. 멍청이처럼.
나나시: 그걸 사용해서 남을 해치려 하니까 그렇지! 야가미나 카이다가 강한 몸을 이용해서 모노로그와 내통한 게 잘못된 거랑 똑같아!
후루미나미 나몬: 살인 게임에선 남을 해칠 수 있어야 해. 어설프게 성자 행세하다간 죽어. 나나시.
나나시: 캐롤 씨도 함께 죽을 거고?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굳었다. 아마 내 표정도 그럴 것 같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우리 모두 죽게 두고 싶지 않은 사람이 한 명씩은 있지. 난 내 달링이고. 너는 캐롤 씨고.
후루미나미가 스스로를 가리킨 뒤. 뚜껑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듯이 손을 내 쪽으로 돌렸다.
카나리 케이토: 우웩!
후루미나미 나몬: 그런데 정말 네가 그녀를 위한다면 그녀에게 도움이 되는 선택을 해야 하지 않겠어? 너와 함께 그녀를 지배자의 위치에 올릴 수 있는 기회라고.
나나시: 미쳤어? 캐롤 씨는 그런 걸 원하지 않아.
후루미나미 나몬: 핑계 삼지 마. 넌 그냥 미움받는 게 두려울 뿐이야. 정말 캐롤 씨와 네가 죽지 않길 바라면 그녀가 널 싫어하게 되더라도 온갖 수단을 다 써서 생존을 쟁취해야지. 난 그러고 있어!
카나리 케이토: 잘 생각해. 나나시. 잘 생각해 보라고.
팔짱을 끼고 거들먹거리는 카나리를 보자 나는 그들이 진정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눈치챘다.
나나시: 이제 대놓고 협박을 하는구나. 너희들… 너흰 애초에 계약을 하러 온 게 아니었어.
나나시: 내 거절을 듣고. 내 거절을 꺾으려고 온 거지. 목숨 목숨 운운하는 것도 그래… 거절을 하면 대놓고 우리를 해치겠단 거지?
카나리 케이토: 말로 할 수고를 덜었네.
후루미나미 나몬: 너랑 캐롤을 우선적으로 압박하겠다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가차 없어지겠지. 너는 주저 없이 견제할 수 있는 범주에 놓이게 될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지금 네가 우리 손을 잡겠다면야. 얘기는 달라지지. 우린 캐롤도 계약 상대로 간주하고 최선을 다해 지원할 거고. 너는 매일 밤 발을 뻗고 잘 거야. 안전함을 즐기면서…
나나시: 그렇게 협박을 하면 내가 순순히 응할 것 같아서 그래?
나는 수상쩍게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두 주머니에 손을 넣고 두 명을 노려보았다. 무슨 불량배 같은 자세를 취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지만, 주머니에 손을 넣는 마땅한 자세가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카나리 케이토: 괜히 자존심 세우지 마. 그냥 받아들이면 서로 좋은 일이잖아?
나나시: 난 동의 못 하겠어.
후루미나미 나몬: 손 앞으로 꺼내. 나나시.
후루미나미의 말에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나는 웃음을 터뜨리는 체를 하고 그들에게 말했다.
나나시: 애초에 내가 도와서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어차피 실행하는 건 너희들 둘이 될 텐데…
후루미나미 나몬: 손 앞으로 꺼내라고 했어.
후루미나미가 내 주머니 속에 들어간 양손의 손목을 콱 잡고 말했다. 위협적인 어조였다.
나나시: …왜 그래?
후루미나미 나몬: 캐롤의 묶음머리 중에 한 단이 사라졌지. 네 방에 들어간 뒤 그렇게 됐어.
나나시: 그걸 네가 어떻게…
후루미나미 나몬: 난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희에게 관심이 많으니까. 그 방 안에서 캐롤은 머리 한 묶음을 잘랐어. 왜 자른 거지? 행운의 부적으로 건네주기라도 했나?
후루미나미 나몬: 그런 옛날이야기가 아니라면 왜 그녀는 머리를 자른 거야? 분명 이유가 있어. 네 성격에 캐롤의 머리카락을 받으면 분명 몸의 어딘가에 지니고 있을 테고.
후루미나미 나몬: 그러니 주머니에서 손 꺼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보여줘야겠어. 왜 그걸 가지고 다니는지는 뒷일이야. 자. 꺼내…
카나리 케이토: 뭔지는 몰라도 일단 꺼내고 봐. 당장.
후루미나미와 카나리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며 압박했다. 나 또한 그들을 바라보았으나, 이윽고는 고개를 떨구게 되었다.
나나시: 그래. 알겠어. 보고 싶다면야… 보여 주지.
시간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다이얼로그를 꺼내 그녀에게 보여줬다.
통화가 23T에 연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아아. 이럴 것 같더라니.
카나리 케이토: 이런 미친?!
카나리가 재빠르게 3층으로 향하려는 사이. 계단을 걷지도 않고 거의 뛰어내리다시피 도착한 23T는 이미 3층에서 2층으로 내려온 뒤였다.
23T5U130: 후루미나미 목소리밖에 못 들었는데. 카나리 너까지 있을 줄이야.
또 23T만이 아니었다. 23T의 통화를 들은 캐롤 씨와 이바라 또한 나를 영입하려던 두 사람에게 다가오고 있을 게 분명했다. 카나리도 그 사실을 알았는지 후루미나미에게 소리쳤다.
카나리 케이토: 너! 이럴 줄 알았으면서 말을 안 한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패닉하지 마! 다 후루미나미의 계획 중 일부니까. 어차피 우리한텐 로봇도 있잖아.
후루미나미는 23T에게서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
나나시: …로봇?
카나리 케이토: 그건 아껴두려고 했단 말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지금 안 쓰면 언제 쓰게! 다 잡힐래. 아니면 비장의 수 쓸래?
23T5U130: 너희 모두 저항하지 마. 해치지는 않을 테니까.
이바라와 캐롤 씨가 23T를 따라 계단을 내려왔다.
이바라 쿠리스: 드디어 찾았다! 카나리. 오랜만! 얼굴을 안 보여주니까 보질 못하네.
캐롤 브라이트: 저희 얘기 좀 나눠요. 두 분 모두.
후루미나미 나몬: 얘기는 다이얼로그로 하시죠. 여사님. 저흰 지금 할 얘기가 없으니까요. 그렇지 왓슨… 의 조카?
카나리 케이토: 내가 왜 조카야.
캐롤 브라이트: 그리고 전 왜 여사죠? …사실 그런 사항은 중요하지 않지만요.
캐롤은 카나리와 후루미나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캐롤 브라이트: 카나리 씨. 후루미나미 씨.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킨 건 두 분이죠? 두 분은 크레딧이 많으니 타격이 없겠지만, 저희에겐 타격이 있어요. 인플레이션을 줄여 주시면 안 될까요?
카나리는 가차 없이 고개를 저었다.
카나리 케이토: 안 돼. 인플레이션이 한 번 시작되면 멈출 수 없어. 돈의 가치는 항상 상대적이거든. 사람의 가치랑 똑같아. 폭삭 무너지기도 하고 미칠 듯이 치솟을 때도 있다고.
후루미나미 나몬: 이건 위증이야! 멈출 수 있어. 우리 둘 중 하나만 마음을 먹는다면 말이지.
카나리는 후루미나미의 입을 다급하게 틀어막기 위해 까치발을 딛고 팔을 쭉 뻗었다.
카나리 케이토: 미쳤어! 그걸 왜 말하냐고!
후루미나미 나몬: 말하면 어때. 어차피 풀어줄 생각은 없는데.
카나리 케이토: 이제 망할 협상을 해야 하잖아! 난 그러고 싶지도 않은데!
캐롤 브라이트: 최소한 인플레이션을 지속하시려는 이유만이라도 말해 주세요.
카나리는 캐롤의 시선을 스윽 피하고 딴청을 피웠다.
캐롤 브라이트: 제발요.
카나리 케이토: 매달리지 마! 멍청이처럼 그러지 말라고. 너희 입장에서야 지금 상황을 유지하고 싶겠지. 하지만 난 아니야. 난 불리한 상황을 타파하고 싶단 말이야. 그걸 위해서 내 자원을 쓰는 게 나빠? 내가 유리하도록 테이블을 돌리고 싶단 말이야.
카나리 케이토: 착한 사람들인 척 마… 너흰 착한 게 아니야. 그냥 나쁘게 행동할 힘이 없는 거야. 너희도 내 자리에 있었다면 나처럼 행동했겠지.
카나리 케이토: 너희도 나와 똑같아. 다 똑같아! 다 똑같이 추악해. 믿지 못하겠다면 내가 친히 보여줄게. 그럼 너흰 내 말이 맞았단 걸 느끼게 될 테니까.
나나시: 난 아니야. 카나리.
카나리는 내 쪽을 바라보고선 이를 꽉 악물었다.
카나리 케이토: 그러셔?
나나시: 난 너랑 달라. 그리고 너도 지금의 너랑 달라질 수 있어… 이제 그만 하자. 카나리.
카나리 케이토: 난 절대 그만 안 해. 내가 권력을 얻을 기회를 이렇게 놓칠 것 같아?
캐롤 브라이트: 외롭진 않으세요. 카나리 씨? 불안하진 않으세요?
카나리 케이토: 닥쳐!
카나리가 우악스럽게 소리쳤다.
23T5U130: 지금은 대화하고 싶지 않나 봐… 나중에 머리를 식힌 다음 다시 얘기를 나누자.
23T5U130: 그럼 전부 해결할 수 있을 거야.
23T가 카나리와 후루미나미를 향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카나리. 더 아꼈다간 다 끝이야.
후루미나미는 카나리를 구경하듯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카나리는 후루미나미와 23T를 번갈아 보며 이를 갈다가. 결국 참치 못하겠다는 듯이 외쳤다.
카나리 케이토: 플라잉 로봇! 나와!
후루미나미 나몬: 나와라! 플라잉 로봇! 위이이이잉. 치키치키치킥! 삐리비리비리비리비 부와아아아앙
두 사람이 외치자마자. 바닥에서 흰색 실루엣이 확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모노로그와 똑같은 방식이었다. 나는 그런 식의 등장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모노로그와 다른 물체가 나타나니 당황스러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카나리가 플라잉 로봇이라고 부른 물체는 세 개의 터빈을 삼각형 포진으로 착용한 흰색 구체였다. 모노로그보단 훨씬 떠있을 수 있을법한 구조였지만,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였다. 모노로그와는 달리 플라잉 로봇의 정중앙에는 파란빛을 내는 카메라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눈과 비슷하게 보였다.
후루미나미 나몬: 잉~ 용~ 츄쿠츄쿠츄쿠츄. 푸브브브브브 쁘르르르르르르
카나리 케이토: 로봇! 23T가 못 오게 막아! 빨리!
"확인."
로봇은 서서히 다가오는 23T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우우웅 거리는 공명음을 내기 시작했다.
나나시: 23T. 잠깐! 뭔가 이상해.
뭔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에 나는 23T에게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는 동안 로봇이 내는 고동음은 점점 커져가더니, 이윽고는 공기가 진동되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커졌다.
23T5U130: 카나리. 후루미나미. 걱정하지 마. 우리는 모두 같은 편이니까. 모노로그를 상대하는 같은 편이야.
나나시: 23T! 잠깐 멈춰. 저 로봇한테서 멀어져!
23T5U130: 괜찮아. 우리 모두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회로방해 전파. 방출."
23T를 저 로봇의 시선에서 떼어내기 위해 달려가려던 찰나. 파란색의 섬광이 번개처럼 23T의 몸에 꽂혔다.
23T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덜컹 쓰러졌다.
나나시: …23T?!
나는 내 방을 박차고 나가 헐레벌떡 23T에게 향했다. 본능적으로 23T의 목에 손을 댔지만 맥박은 잡히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차갑고 딱딱한 금속뿐이었다.
그래. 23T는 로봇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23T가 무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카이다 이상의 힘을 가지고 부상도 입지 않는 무적의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그 생각들은 23T가 무너진 순간 함께 사라져 버렸다.
23T는 로봇이었다. 그렇지만 23T 또한 다칠 수 있었다. 우리는 23T에게 보호를 받고 있었지만 정작 23T를 보호해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바라 쿠리스: 뭐야. 갑자기 쓰러졌어!
캐롤 브라이트: 23T 씨를…? 저런 권한을 손에 넣으시다니…
이바라 쿠리스: 저게 플라잉 로봇이라는 거야?! 진짜 치트키를 주렁주렁…!
후루미나미 나몬: 다 계획의 일부라고 했지?
후루미나미와 카나리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펴고 웃었다. 그걸 보는 순간 머리에 피가 확 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게 웃긴가? 왜 웃기지? 이 광경이 재미있다고?
대체 저 둘은 뭐가 문제야?
카나리 케이토: 하! 속이 다 시원하네! 저 깡통 믿고 우리 손을 안 잡은 거였어? 멍청한 자식! 우리한텐 23T에게 저항할 수단이 있었다고!
후루미나미 나몬: 이렇게 잘 통할지는 얘도 몰랐다?
카나리 케이토: 알았으면 됐지! 이제 전기로 지져지고 싶지 않으면 다 앞에서 꺼지는 게 좋을 거야. 로봇! 한 발 더 준비해!
이바라 쿠리스: 오. 썅!
이바라가 기겁을 하며 3층으로 올라가려 몸을 돌렸다. 캐롤 씨는 그런 이바라의 팔 한쪽을 붙잡았다. 두고 보라는 무언의 표현을 받은 듯한 느낌에 이바라의 몸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회로방해 전파는 생물체를 상대로는 통하지 않음."
로봇이 무덤덤하게 말하자 카나리의 의기양양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꺾였다.
카나리 케이토: 그럼 달리 할 수 있는 거 없어?
"생물체를 상대로는 없음."
캐롤 브라이트: …카나리 씨.
표정을 싸늘하게 굳힌 캐롤 씨와 주먹을 꺾어 뚜둑 소리를 내려고 하는 것 같지만 계속 실패하고 있는 이바라가 함께 카나리와 후루미나미에게 다가갔다.
이바라 쿠리스: 카나리 넌 오늘 엉덩이랑 꿀밤 콤보를 아주 그냥 마음껏 먹을 줄 알아.
이바라 쿠리스: 후루미나미 너도 마찬가지야. 넌 오히려 좋아할 것 같긴 하지만 벌은 벌이야. 둘 다 각오해.
카나리는 웃음기를 거둬들인 채 서서히 물러났다. 그는 곁에 있는 후루미나미에게 속삭이듯 말했지만, 어조가 격했던 나머지 속삭임보다는 소리를 억누른 외침처럼 들렸다.
카나리 케이토: 다음 계획 말해. 다음 계획은 뭐야! 탈출 계획은 네가 준비하겠다고 했잖아!
후루미나미 나몬: 솔직히 말하자면. 어떻게 도망쳐야 할지 모르겠어.
카나리 케이토: 뭐?!
속삭임은 오래가지도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렇잖아. 23T는 얼어붙었지만 솔직히 캐롤은 키도 크고. 힘도 우리보단 셀 것 같고. 나나시도 있어. 2대 3인데 너는 전력으로 취급하기 어려우니 어딜 봐도 우리가 불리하지.
후루미나미 나몬: 하지만. 바로 그 때… 임병투자개진열재…
후루미나미가 두 손을 이용해 이상한 손동작을 만들어냈다. 여덟 개의 동작이 끝나자. 후루미나미는 어디서 꺼낸 것인지 여우 모양의 가면을 뒤집어쓰고는 몸을 굽힌 채 손을 바닥에 얹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닌자가 나타났다…
나나시: …이게 무슨?
후루미나미 나몬: 하이~ 야!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 몸이 멈춘 사이. 후루미나미는 주머니에서 작은 크기의 구체를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흰색의 연기가 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캐롤 브라이트: 콜록. 콜록! 이건…!
이바라 쿠리스: 켁. 켁! 뭐야! 연막탄을 써?!
정말 자판기에선 안 파는 게 없구나…!
카나리 케이토: 야! 이럼 우리 앞도 안 보이잖아!
후루미나미 나몬: 콜록. 콜록! 그렇네! 켁! 눈도 매워! 카나리 너 어디 있어?
카나리 케이토: 네가 쓴 거잖아! 난 여기 있으니까 정신 차려. 이리로 와!
후루미나미 나몬:박력 있는 남자! 날 데려가 줘요. 왓슨의 조카! 날 왓슨에게로 데려가 줘요!
이바라 쿠리스: 홈즈는 그런 사람 아니거든?! 너 진짜 홈즈 어디서 배웠어! 대체 뭐로 홈즈를 접한 거냐고!
이바라는 연기 속에서 콜록거리며 열심히 후루미나미를 향해 소리쳤다.
캐롤 브라이트: 이바라 씨! 움직이지 마세요! 저흰 3층으로 통하는 이 계단을 막아야 해요!
이바라 쿠리스: 이걸 어떻게 참아. 홈즈를 어떻게 저런 인물로 묘사할 수 있어. 가만 안 둘 거야!
나나시: 너도 홈즈라는 사람 되게 좋아하는구나?! 아니 그보다. 잠깐만 조용히!
상황이 상황이었기에. 이바라도 곧바로 침묵했다. 나는 카나리와 후루미나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청력을 집중했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른 무엇의 소리보다도 내 숨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구름처럼. 안개처럼 뭉게뭉게 퍼진 침묵 속에서 나는 작은 발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숙소. 3층으로 통하는 계단은 캐롤 씨와 이바라가 막고 있었다.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거지?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움직이지 마세요. 자칫 잘못했다간 당신이 인질로 잡혀요.
나나시: 지금은 도망치는 데에 급급할 거예요. 인질을 잡을 여력도 없이…
나는 순식간에 2층을 전부 덮어버린 연막을 손으로 휘휘 내저으며. 벽 쪽으로 몸을 붙였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벽에 얹은 채 벽을 따라 천천히 나아갔다.
후루미나미라면 지금 탑에 없는 누군가의 숙소나 전용실의 문을 따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점을 염두에 둔 수색이었다. 그렇지만 어느 문도 열리지 않았다. 문을 여는 작은 소리조차 없었다. 문을 연 게 아니라면…
나는 벽을 밀고선 반대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나아가. 기둥을 만졌다. 기둥을 따라 다시 벽을 짚고 이동한 끝에 나는 1층으로 통하는 계단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 순간.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고 나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나시: 탑 밖으로 도망쳤어…!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졌다고 판단한 뒤 카나리가 신호를 주자. 두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탑 밖으로 달려 나갔다.
카나리 케이토: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망했어!
후루미나미 나몬: 전화로 해도 되는 걸 굳이 얼굴 보고 얘기하자한 건 너인데!
카나리 케이토: 네가 탈출 계획을 담당하겠다고 해서 마음을 굳힌 거라고. 기껏 23T까지 멈췄는데 탑 밖으로 밀려났잖아!
후루미나미 나몬: 돌아갈 방법이 없다 이거지. 하지만 방법이야 만들어내면 그만이야. 카나리. 로봇 불러.
카나리 케이토: 로봇은 왜?
후루미나미 나몬: 토 달지 말고 네 소중한 둥지로 가고 싶으면 불러. 빨리!
카나리 케이토: 로봇. 여기로 나와!
"확인."
로봇이 카나리의 앞으로 솟아올랐다. 후루미나미는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로봇을 가리키며 카나리에게 다시 소리쳤다.
후루미나미 나몬: 로봇 내 쪽으로 붙여. 로봇 내 쪽으로 붙여!
카나리 케이토: 알겠어. 알겠다고! 로봇. 후루미나미 쪽으로 가!
"확인."
자신의 시야 아래로 로봇이 내려오자 후루미나미는 그것에 재빠르게 밧줄을 묶었다. 생존 전문가의 솜씨로 순식간에 견고한 매듭이 생겨났다. 후루미나미는 자신이 로봇에 묶어놓은 밧줄을 몇 번 당겨 잘 묶였는지를 확인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제 이름은 베어 그릴스입니다. 그리고 전 오늘 밀림이 아닌 탑에서…
카나리 케이토: 이제 어쩌냐고!
후루미나미 나몬: 밧줄 잡으세요 카메라맨. 아니아니. 크흠. 꽉 잡아야 해? 이걸 타고 도망치는 거야.
카나리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카나리 케이토: 뭐?! 계획이 이거야? 미친년!
후루미나미 나몬: 그럼 여기서 카이다처럼 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고립되고 싶어? 계단 말고 다른 입구는 없어. 이제 연막탄도 없고!
카나리 케이토: 이런 미친 짓을 하자니…
후루미나미 나몬: 탑은 수직 구조야. 계단을 막으면 우린 못 가! 로봇의 명령권을 가진 건 너니까 네가 선택해!
카나리는 망설였지만 곧 그럴 여유조차 없어졌다. 나나시가 계단을 내려오며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슨 이바라와 캐롤도 곧 그들을 향해 도착한다는 의미였다.
후루미나미 나몬: 빨리!
후루미나미는 로봇에 묶인 밧줄을 붙잡은 채 카나리에게 외쳤다. 카나리도 결국 눈을 질끈 감은 채 밧줄을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카나리 케이토: 로봇! 날아올라!
"확인."
나나시: 안 돼! 멈춰!
후루미나미 나몬: 제군들 오늘을 기억하시게! 캡틴 후루미나미를 거의 다 잡을 뻔한 날로!
로봇이 카나리와 후루미나미를 매단 채 서서히 상승하는 동안. 나나시는 그들을 향해 최선을 다한 속도로 달려갔다.
달려가면서. 나나시는 자신이 그들의 비행을 막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직감을 받았다. 몇 초만 빨랐어도 로봇을 잡고 바닥에 끌어내리려 노력할 수 있었겠지만, 그 몇 초가 모자랐다.
그렇지만 나나시의 발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그들의 비행을 막을 수 없으리란 걸 알았지만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른 것은 23T의 모습이었다. 번개에 맞고 멈춰버린 23T. 그리고 그걸 보며 웃던 두 사람.
뭐가 그렇게 재미있지?
나나시는 이를 악물었다.
카나리 케이토: 으아아아아아!
로봇이 서서히 상승하자 카나리가 멀어지는 땅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이미 충분히 겁쟁이처럼 들리는 비명이었지만, 그는 추후 더 큰 비명을 지르게 되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어머. 얘 좀 봐!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나나시: 못 가…! 너희 둘 다!
카나리 케이토: 너 뭐야?! 미쳤냐?!
카나리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분홍대가리 놈의 목소리에 밑을 내려다보았다가 그 높이에 경악했다. 그리고는 후루미나미의 다리에 나나시가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고는 다시 경악했다.
나나시: 못 가… 내려와야 할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하. 예쁜 건 알아가지고. 그렇게 내 발에 키스하고 싶었어? 그보다 진심으로 좀 떨어져 줄래. 나나시! 너 지금 엄청나게 일을 망쳐놓고 있거든! 완전 당황스럽단 말이야!
카나리 케이토: 떨어져. 이 자식아! 꺼지라고!
나나시: 떨어져 달라고? 이 높이에서? 그래 볼까? 내가 여기서 떨어졌다가 목이 부러지면, 누가 검정이 될 것 같아?!
나나시는 자신의 팔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카나리 케이토: 너지. 이 멍청아! 네가 올라탔잖아!
후루미나미 나몬: 사실 카나리 너 아니야? 로봇을 움직여서 나나시를 공중으로 올린 게 너니까.
카나리 케이토: 뭐?! 그런 걸로 치면 네가 작전을 세웠으니 네가 범인이야!
나나시: 말싸움은 나중에 해. 내 말 들어! 날 어딘가에 내려놓지 않으면. 너희 둘이 검정이 될 거야! 너희도 죽을 거라고!
이바라 쿠리스: 뭐야! 쟤들 저기서 뭐 해?!
나나시는 이바라의 외침이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탑 밖으로 나온 캐롤은 후루미나미의 다리를 잡고 있는 나나시를 보자. 얼굴이 새파래진 채로 소리쳤다.
캐롤 브라이트: 세상에. 나나시 씨?!
나나시: 땅으로 내려와. 내려와서 얘기하자고!
후루미나미 나몬: 죽을 자리를 찾아 헤매니. 나나시?! 그럼 더더욱 내 손을 잡았어야지!
카나리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나나시를 보며 미쳐 버릴 것 같은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카나리 케이토: 망할 자식들 같으니…! 로봇! 내 숙소로 안내해! 창문으로 진입한다!
"확인."
후루미나미 나몬: 나나시. 너도 죽고 싶진 않잖아? 일부러 놓으면 네 자살이야. 그러니 살고 싶으면 꽉 잡아! 꺄아아아아!
플라잉 로봇이 세 명을 매달고 카나리의 숙소를 향해 올라갔다. 후루미나미는 자신의 뺨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과 불안정한 기우뚱에 환희의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녀와 같은 것을 체험하고 있는 두 남자는 공포로 가득한 절규를 내뱉었다.
나나시: 으아아아아아!
카나리 케이토: 흐아아아아아악!
캐롤 브라이트: 안 돼요! 나나시 씨!
이바라 쿠리스: 쟤들 진짜 미쳤나 봐! 캐롤 넌 또 어디 가?!
이바라는 그들을 보며 아연실색하다 날아오르는 세 명의 밑으로 뛰어가는 캐롤을 보았다. 그리곤 캐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더 아연실색해졌다.
이바라 쿠리스: 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일 하려는 거면. 너도 다쳐! 저 높이에서 떨어지는 사람 잘못 받으려다가 너도 다친다니까!
이바라 쿠리스: 캐롤! 내 말 안 들려?!
캐롤은 이바라의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제발.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제발…
이바라 쿠리스: 어휴 정말이지… 몸 좀 내던지지 말라고.
후루미나미 나몬: 이거 진짜 재밌다! 안전벨트가 없어서 더 재밌어!
나나시: 우와아아아아!
카나리 케이토: 흐어어어어어억!
허공으로 한 없이 떠오르는 느낌은 엄청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나나시는 무심코 자신의 발밑을 내려보았다가 정신이 아득해지는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최악은, 그가 팔에 힘을 풀자마자 그가 자유낙하를 시작하게 될 거라는 점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남자에게는 오래 지속되는 고통이었다. 마침내 로봇이 움직이기를 멈췄을 때. 카나리는 자신이 숙소에 도달했음을 깨닫고는 철창으로 휙 착지했다.
카나리 케이토: 창문 잠가뒀으면 큰일 날 뻔했네!
카나리는 철창에 발을 걸치고 창문을 열어. 간신히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 그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카나리 케이토: 제기랄. 또라이들 진짜…
후루미나미 나몬: 카나리. 욕은 나중에 하고 잠깐 로봇 좀 위로 올려서 나나시를 철창에 올리자. 얘 죽겠어.
나나시: 끄응… 으윽… 이익…
나나시의 얼굴은 힘이 들어가느라 잔뜩 새빨개져 있었고, 로봇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힘이 빠져 그의 몸이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카나리는 귀찮아 미치겠다는 듯이 그렇게 하라고 로봇에게 명령했다.
나나시의 다리 또한 잠시 철창에 디딜 수 있게 되자 무던히 덜덜 떨려왔다. 그는 물기를 말리기 위해 널어놓은 이불처럼 몸을 굽히고선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벙찐 채 숨을 헐떡였다.
나나시: 허억… 헉…
후루미나미 나몬: 진짜 큰일 날 뻔했네.
철창 너머로 다리를 올리는 후루미나미를 보며 카나리가 와악 윽박을 질렀다.
카나리 케이토: 꿈도 꾸지 마. 너희 둘 다!
후루미나미 나몬: 에엥? 이렇게 철창에 방치해놓게? 이건 좀…
카나리 케이토: 로봇! 후루미나미 숙소까지 가! 걔를 숙소에 내려놓고 다시 돌아와! 나나시 너도 마찬가지야… 저거 타고 꺼져.
"확인."
카나리 케이토: 계약은 파투다. 네가 거절한 거야… 이런 꼴을 겪게 한 이상. 이젠 절대 안 받아줘. 로봇. 가.
나나시는 헐떡이느라 카나리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지만, 밧줄을 잡는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공포에 질려 새파래지고 핏기가 빠진 그의 얼굴을 보며 후루미나미는 웃음을 터뜨렸다.
후루미나미 나몬: 널 다시 보게 됐어. 나나시. 뭐. 저번에 도청기를 찾았을 때도 다시 봤지만 이번에는 더욱 그래. 이걸 따라오다니…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도 여기 까지지만 말이야. 난 널 내쫓을 자신이 있거든. 힘 다 빠진 나나시 정도야 할 만하지.
후루미나미는 그렇게 말하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나나시는 가능한 한 의연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지만 사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는 팔이 점점 떨어져 나갈 것 같이 아파오는 걸 느꼈고, 곧 힘이 다 떨어지리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다리. 다리가 문제였다. 후루미나미가 창문을 열자 나나시는 그녀의 숙소 안으로 발을 디딜 수 있었지만, 그의 다리는 힘이 풀려 똑바로 설 수가 없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내 은신처에 어서 오라!
후루미나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팔을 벌렸다. 나나시는 놀라울 정도로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온갖 물품들을 보았다. 아마 자판기에서 뽑아왔을 많은 물건들이. 방 한 구석에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리고 이제 갈 시간이다. 하찮은 것아! 제 발로 나갈 테냐, 엉덩이 걷어차이고 쫓겨날 테냐?
프로레슬러처럼. 후루미나미가 양팔을 벌린 채 서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나나시의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고, 팔도 혹사당해 쑤셔왔다. 후루미나미 또한 팔이 아파오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녀의 기세는 흉흉한 그대로였다.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후루미나미의 에고에겐 약점이 있었으나, 다른 사람을 주눅들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는 더없이 유용했다.
나나시 또한 자신의 풍선에 바람을 넣었다.
나나시: 나는…
엉덩이를 걷어차일 각오를 하며 나나시는 어설프게 자세를 잡았다. 시한부 환자에게 글러브를 씌운 듯한 꼴이었다.
나나시: 어느 쪽도 선택 안 해.
후루미나미 나몬: 그럼 지금부터는 엉덩이의 시간이다!
토키와 아유키: 선택할 필요 없어. 나나시.
나나시는 자신이 토키와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후루미나미의 숙소 안에 있었기에. 나나시는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들었으리라고 추측했다.
그래도 확인해두기 위해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나시는 우중충한 몰골의 토키와가 침대 밑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여전히 지치고 피곤에 찌든 듯한 얼굴. 평소의 온화함이 조금도 드러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나나시: 어?!
후루미나미 나몬: 엑?! 너는 분명…
토키와는 곧바로 후루미나미에게 다가가 팔을 붙잡고 꺾은 뒤. 그녀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바닥에 꽈당 넘어진 후루미나미는 신음하며 어깨 너머로 토키와를 올려다보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Ouch! 너…
토키와 아유키: 잡았다. 후루미나미. 드디어 붙잡았다…
토키와의 목소리는 아무런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삭막했다. 후루미나미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몸을 비틀어 저항하다가 그만 멈추었다. 팔을 붙들린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을 테고, 곧 다른 사람들도 도우러 오리라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레스트레이드. 지금 엄한 사람 잡는 겁니다. 범인은 따로 있다고요!
나나시: 토키와. 언제 온 거야? 너 자고 있었잖아.
토키와 아유키: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일어났어. 후루미나미와 카나리의 목소리가 2층에서 들려오길래 기회를 타서 문을 땄고.
토키와 아유키: 조사만 할 생각이었지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낌새라 미리 숨었어.
후루미나미가 입술에 바람을 넣어 작게 푸르르르르 하는 소리를 냈다.
후루미나미 나몬: 문을 따는 솜씨가 성장했다 이거지. 하. 재미없어. 클리셰 투성이야 아주… 성장형 캐릭터 납시셨어.
토키와 아유키: 난 전혀 나아지지 않았어. 후루미나미.
후루미나미 나몬: 뭐?
토키와 아유키: 그냥 시간을 들인 거야… 노력과 시간을 들여서 간신히 연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절대 널 잡지 못했을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더 재미없어요. 레스트레이드.
후루미나미가 몸을 한 번 비틀자 토키와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에휴… 진짜 김 빠져. 나 요즘 왜 이렇게 당하고만 살지? 누구한테 미움이라도 샀나?
나나시: 그렇게 쏘다녔는데 미움이 안 쌓이는 게 이상한 거야. 후루미나미.
후루미나미는 토키와에게 눌려있는 채로 나나시를 돌아보며 낄낄거렸다.
후루미나미 나몬: 업보론이다. 이거지? 미도리카와가 좋아했겠어. 그렇지만 정작 업보론을 주창한 미도리카와는 죽었고. 그녀를 죽인 야가미와 죽이려 든 카이다는 아직 해변에서 살아 있지. 가재도 먹고 목욕도 해.
후루미나미 나몬: 물론 행동이 결국 돌아오는 건 당연한 이치지. 그런데 너는 그것에서 자유로운 듯이 말하지 마. 나나시. 카나리는 거래에 있어서는 엄격해.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겁쟁이지만 계약을 따내기 위해서 널 직접 찾아왔지.
후루미나미 나몬: 자기 얼굴을 보여가면서까지 성의를 보였는데. 넌 이런 수모를 겪게 했어. 그 업보가 곧 너에게도 돌아올 걸.
문득 나나시의 등골이 섬뜩해졌다.
나나시: …너희를 막을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어. 그러니 후회 안 해.
후루미나미 나몬: 정말 안 하는지 두고 보자고. 나나시.
카이다 쿠로하: 미도리카와 그 자식은 어디에 있지?
모노로그: 말해줄 순 없다.
모노로그는 카이다가 아닌 다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카이다는 피식 웃으면서 모노로그의 머리가 향하는 쪽의 건물로 다가갔다.
두 번째 시련은 첫 번째 시련의 장소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첫 번째 시련은 부둣가의 범죄도시. 비밀과 모략이 오가는 장소였다. 바다뱀과 야가미 토가가 벗어나려다 붙들렸던 곳. 바다뱀에게 어울리던 장소였다.
그렇지만 두 번째 시련은 바다뱀이 산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와 맞닿아 있었다. 거리에는 노점상이 있었고, 술에 취한 사람들은 어깨동무를 했고, 누가 부르는지 모를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밤거리였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듯이 사람들 사이에 숨어들은 걸까. 카이다는 생각했다.
카이다 쿠로하: 여기에는 현재의 미도리카와가 있다고 했냐?
모노로그: 납치당할 시점의 그녀가 있지. 모습도 똑같을 거야.
카이다 쿠로하: 좋아. 그 정도면 할 만하지. 3층이 있는데 몇 층이야?
모노로그: 말해줄 수 없다고 그랬지 않나?
모노로그가 3층 높이로 떠올랐다. 카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3층에선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자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일은 무척 쉬워질 터였다.
발소리를 죽이고 계단을 올랐다. 접지면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줄이기 위해 그녀는 동물처럼 사족보행을 택했다. 소리 없이 스산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은 거미나 뱀과 닮아 있었다.
건물은 바퀴벌레가 있을 만큼 낡았지만, 쥐는 없을 만큼 깨끗했다. 주위에 동일한 아파트가 몇십 개는 널려 있는 흔한 건물 속에. 미도리카와 아쿠토가 있었다. 이번 시련에선 어떤 모습을 할지 몰랐지만 카이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자신이 터져버릴 것 같다고 느꼈다.
이미 죽는 꼴을 직접 본 사람을 다시 죽이는 건 말도 안 되게 쉬울 거라고. 카이다는 생각했다. 계란을 까는 것 만큼이나 쉬울 터였다. 바닥에 내려친 다음 쪼개면 끝.
2층.
그리고 3층.
카이다는 문의 종류를 살폈다. 철문. 열쇠로 열리는 간단한 고리. 세게 쥐어서 꺾으면 부서지는 종류의 잠금이었다.
잘 숨었지만 막는 건 꽝이라고 생각하며 카이다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이걸 부순 다음 어떻게 할지를 잠시 고민하던 찰나.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내 문이랑 사랑에 빠졌나?
카이다는 숨을 참았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좀도둑이면 그대로 나가. 털 집을 잘못 골랐으니까. 그렇지만 더 안으로 들어온다면 각오가 됐다고 여기겠어.
이걸 눈치챘다고? 카이다는 자신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런 소음도 내지 않았다. 이 자식은 어떻게 날 눈치챈 거지?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을 느끼고 카이다는 어느 정도 알 것 같다는 생각을 받았다. 직감. 살기. 동물적 본능. 모노로그가 탑에 있는 인원들을 빛을 가진 자들이라고 한 것에서 인용하자면, 빛? 뭐라도 좋았다. 미도리카와는 그것에 접속할 수 있는 인물이었고, 카이다도 그랬다. 그게 전부였다.
카이다는 주저하지 않고 문고리를 세게 비틀어 부쉈다. 상대에게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게 그녀의 방식이었다. 문을 당긴 뒤 안으로 진입한 카이다는 어디에 미도리카와가 있는지 살폈다.
침대가 있는 방. 화장실. 그리고 거실이 있는 구조의 집. 카이다는 거실에 있는 비취색의 머리카락을 보고 그곳으로 달려들었다. 얼굴에 갑주를 둘러싼 팔을 X자로 올리고 달려드는 전법은, 몇 발의 총알을 맞더라도 생존하기만 하면 해변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카이다는 주저하지 않고 머리가 있는 곳을 손으로 붙잡고 홱 꺾었다. 나뭇가지를 꺾듯이,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목뼈가 부러져 즉사.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만져지는 것은 딱딱한 플라스틱. 그리고 허무할 정도로 쉽게 빠지는 마네킹의 머리뿐이었다.
카이다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숙여 총구의 사선에서 벗어났다. 그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미끼를 내세우고 엎드려있던 미도리카와의 몸이 서서히 일으켜졌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혹시 자객이 찾아오면 쓰려고 만들어둔 거야. 정말 올 줄은 몰랐지만.
카이다가 다가올 새도 없이 미도리카와는 그녀에게서 멀어지며, 총구를 그녀에게로 다시 겨누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또 누가 내 뒤를 밟나 했더니… 너라니.
아음속탄은 중량과 장약량을 줄여 의도적으로 속도를 줄인 탄환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총알은 음속의 속도를 초월하기에 격발 시 소닉붐 현상이 일어나지만, 아음속탄은 아니다. 게다가 가스 분출음에 방해를 주는 소음기를 더할 경우 격발음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공기를 울리는 총성이라기보단 피식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그러나 날아오는 총알만큼은 분명히 살상력이 있었다. 아음속탄은 명중률과 사거리가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대상이 먼 거리에 있어야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카이다는 주저 없이 총을 쏘는 미도리카와를 보고. 사실 조금 당황했다. 눈앞의 미도리카와 아쿠토는 바다뱀 가면도 가발도 없던 탑에서의 미도리카와와 똑같았다. 사실.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쏘고 있는 마음가짐은 확연하게 달랐다.
탑에서의 미도리카와는 카이다를 죽여버리고 처형되지 않기 위해, 이후에는 야가미 토가와 함께 복수하기 위해 그녀를 사살하지 않았다. 카이다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가 무적 초인이라고 해도 중과부적이라는 것을. 아마 미도리카와가 그녀를 죽이겠노라고 마음을 먹었다면, 그녀는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렇지만 카이다의 안에서 미도리카와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미도리카와를 거꾸로 매달아선 차갑게 식혀버렸다. 내가 이겼다. 저 새끼는 결국 내 상대가 안 됐다. 라는 생각에 카이다는 방심해버렸다. 시련에서 다시 만날 미도리카와는 사살에 거리낌도 없고 거리낄 것도 없는, 다시 살아난 미도리카와 그 자체와 같다는 것을 몰랐다. 이해했지만 정작 알지는 못했다.
카이다는 몸을 비틀어 총알을 피했다. 얼굴을 스치는 총알의 쓰라림을 느꼈다. 카이다는 계속 날아오는 총알을 팔로 막았지만, 허벅지나 옆구리를 뚫는 몇 발의 총알은 맞게 되었다. 피를 흘리며 카이다는 뒤로 한 바퀴를 돌며 침대가 있는 방으로 몸을 피했다.
방심했다. 방심했어. 카이다는 자신의 미련함에 목의 모든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분노했다. 그녀는 종아리에 있는 작은 홀스터에서 단도를 꺼냈다. 한 없이 날카로운 도면이 미약한 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났다.
죽인다… 여기서 죽이면 그 누구도 두 번째 시련에서 미도리카와를 꺼내갈 순 없어… 재빨리 죽이고 빠져나간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설마 아직까지 나를 쫓고 있는 줄은 몰랐어.
방의 근처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카이다의 몸이 그쪽을 향해 날아갔다. 카이다의 단도가 미도리카와의 가슴팍을 노렸지만, 미도리카와의 가슴팍은 단단한 갑옷 같은 것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이다의 괴력은 갑옷을 어느 정도 뚫고 피부를 얕게 뚫는 상처를 냈다.
지근거리를 확보한 것은 미도리카와도 마찬가지였다. 카이다는 순간 미도리카와의 팔을 흔들고 몸을 움직여 총알을 피하려 애썼지만, 어깨나 배에 총알이 박히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총을 가진 상대에게 기습이 통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벌어진다. 카이다는 미도리카와의 목을 붙잡을 작정으로 팔을 내질렀다. 일단 잡기만 하면 목을 꺾어 죽일 수 있었다. 미도리카와는 그런 카이다의 움직임을 읽은 듯이 다리를 무너뜨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카이다 쿠로하: 이런 개새끼…!
카이다는 욕지기를 내뱉으며. 갑옷은 둘째치고 왜 미도리카와가 방독면을 쓰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는 어딘가 지독한 냄새를 맡자마자 숨을 참았지만, 지독한 냄새를 맡았다는 것부터 그녀가 가스 안에서 숨을 쉬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마 한 모금 더 숨을 쉬려고 해도 숨이 막혔을 터였다.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동안 카이다의 입 안에서는 내뱉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카이다 쿠로하: 커헉… 컥…
카이다와는 반대로 미도리카와는 방독면 안에서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카이다는 흐려져가는 정신을 붙들으려 입술을 세게 깨물었지만, 그녀의 몸은 중력을 이겨내지 못하는 듯이 서서히 무너져갔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난 항상 준비가 되어 있었어. 네 이름도 모르지만 단 하루도 너를 죽이는 생각을 안 한 적이 없어.
카이다 쿠로하: 컥… 우웩…!
미도리카와 아쿠토: 제 발로 찾아와 주니 고맙게 됐지. 잘 죽어.
카이다 쿠로하: 지랄 마… 이대는 못 죽어…
숨을 쉬지도 못할 가스 속에서. 카이다 쿠로하는 망자처럼 몸을 일으켰다.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미도리카와는 카이다의 다리를 쏘았다. 그녀의 무릎과 허벅지에 구멍이 났지만, 카이다는 휘청일지언정 쓰러지지 않았다.
카이다는 어깨너머에서. 창문을 보았다. 미도리카와에 의해 가슴에 총을 맞은 직후였다.
카이다 쿠로하: 커헉… 못 죽는다고… 난 못 죽어…!
카이다는 손에 쥐고 있던 단도를 미도리카와에게 내던졌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속도는 느렸지만, 틈을 만드는 데에는 충분했다.
카이다는 창문을 뚫고 밖으로 떨어졌다. 등 뒤에 총알을 몇 발 더 맞으며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진 그녀는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휘청거렸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부상이었지만 카이다는 미도리카와가 자신을 쫓아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주저할 틈은 없었다. 총을 맞아 덜그럭거리는 한쪽 무릎을 무던히 움직이며. 의식이 희미해진 카이다는 일종의 고양 상태에 빠져들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고통마저 없이 자신이 할 일을 행하는 시체. 그녀와 마주친 운이 없는 행인은 그녀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그녀를 피해 가기도 했다. 카이다의 입장에선 어느 쪽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자신 말고 그 누구도 인식할 수 없는 기묘한 평화를 느꼈다. 증오와 모든 복수심. 절박함에서 벗아난 듯한 평화였다.
이대로 죽는 건가.
카이다는 자신이 지나며 남긴 핏자국을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받았다. 어떤 의뢰에서도 그 정도의 부상을 입은 적은 없었다. 그녀에겐 의뢰 수행의 기억조차 몇 없지만,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껴졌다. 이렇게 치명상을 허용한 게 처음이라는 것을.
빛을 가진 이들…
눈이 천근만근 무거워 잠겨오고 다리는 풀려오는 상황에서. 카이다는 억지로 이승에 남은 미련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떠오르는 것은 별반 없었다. 고작 해봐야 맛있는 음식이 전부였다. 실험의 부작용으로 무뎌진 혀를 만족시킬 만한 맛있는 것들. 그것 말고 또 뭐가 있지?
카이다 쿠로하: 내가 사는 목적…
목적이 없으면 결국 이 자리에서 죽는다. 미련을 가져야 살 수 있어. 뭐지? 내가 사는 이유는 뭐지?
몸에 도는 산소가 부족해지자 카이다는 아주 찰나의 시간 동안 죽음을 느꼈다. 주마등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그 안에서 카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말하고 있었다.
"찾고 싶어요. 만나고 싶어요. 만난 다음에 죽여버리고 싶어요."
이런 나에게도 살 목적이 있어. 누군가를 죽이는 게 내 목적이야. 난 유용한 비수니까. 그게 내 존재 이유… 그것에 기대어서만 난 살아갈 수 있어…
불특정 다수를 향한, 그녀 자신도 누구한테 향하는지 모를 증오심이 차오르자 출혈이 서서히 멈추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연료로 삼고 카이다 쿠로하는 발걸음을 옮겼다.
카이다는 미도리카와의 거주지를 확실하게 기억해둔 뒤. 시련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찾았다.
23T5U130에게 꿈이란 허상과도 같다. 기계 몸에겐 의식의 휴식이 없다. 23T5U130은 탑에 온 이래로 1분 1초가 흘러가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며 시간을 보내왔다. 잠도 없고 꿈도 없는 기계.
그러나 카나리의 로봇에 의해 회로가 방해된 공백 동안. 23T는 꿈과 닮아 있는 무언가를 체험했다. 데이터베이스 안에 들어있던 자료들이 재생된 것이다. 장기기억이 다시 떠오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시점은 어딘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문이 열리는 소리. 문에 걸려 있는 종이 울리는 소리. 누군가가 찾아온다. 고개를 돌리자 분홍색 머리를 가진 남자가 보인다.
"노바디. 노바디! 나 왔어."
노바디라고 불린, 분홍색 머리의 남자를 보고 있는 시점의 주인은 말한다.
"콜록. 콜록… 노네임? 여긴 무슨 일이야?"
"사정 설명했더니 보내주더라. 뭐… 우린 둘이서 일하잖아. 빨리 낫도록 돕고 두 명이서 일 해라 이런 건가 봐. 정작 너를 위해 보내준 사람이 나 밖에 없지만…"
"너 하나면 충분해… 더 이상 누가 와봤자 불편할 뿐이야."
노네임이라고 불린 분홍색 머리의 남자는 수건에 물을 묻혀 시점의 주인의 이마에 얹는다.
"네가 그랬지. 우리 이렇게 일하다간 언젠가 쓰러질 거라고? 정말 그렇게 됐네…"
그 뒤로 잡담이 조금 오가지만 노네임은 계속 고민하는 듯한 얼굴이다.
"노바디. 네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해."
"내 말은 대부분 맞는데. 그중에 무슨 말?"
"기관에서 떠날 때가 온 것 같다는 말."
정적.
"시라유키는 너무 변했어. 사실 늘 그대로였을지도 몰라. 늘 호기심이 넘쳤지만 이젠 그 호기심을 해소할 방법이 생긴 거야…"
"호기심 때문에 그런다고 해도 우리를 이렇게 취급할 순 없어. 노네임. 우리 둘을 영입한 게 시라유키 본인이었잖아. 이제 우릴 봐. 완전히 뒷전이야.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네 감기가 다 낫자마자 기관을 나가자."
다시금 정적.
"아니야. 노네임. 생각을 바꿨어. 조금만 더 버텨보자."
"정말? 나가자고 제안한 건 너면서?"
"실험 프로젝트는 마치고 떠나야지. 그래야 새 출발을 할 때 개운하지 않겠어?"
"그렇긴 하지만… 괜찮겠어?"
"괜찮겠지 뭐. 별일 없을 거야…"
23T5U130: 노네임…
나나시: 23T! 깨어났구나… 괜찮아?
23T가 음성을 내자 나는 23T에게 다가갔다. 번개에 맞고 1시간 정도가 흐른 시점이었다. 영영 깨어나지 않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23T와는 나눌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23T5U130: 무슨 일이 벌어졌어? 카나리는. 후루미나미는?
나는 23T가 멈춘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23T에게 전부 말했다. 23T가 쓰러진 일. 카나리와 후루미나미의 도망. 로봇을 타고 탈출. 내가 저지해봤지만 역부족이었고, 토키와 덕분에 후루미나미는 생포할 수 있었다는 것.
23T5U130: 그래도 후루미나미는 붙잡아서 다행이야. 이제 한 시름 놓겠어.
나나시: 후루미나미는 곧 모니터실에 묶일 거래. 계속 감시할 수 있을만한 곳이 거기랬던가. 그보다 23T는 괜찮아? 뭐라고 해야 할까… 작동에 문제는 없어?
23T5U130: 없으니 괜찮아. 모니터실이랬지. 곧 모니터실로 갈 테니. 팔이 아프면 일단 쉬어.
나는 몸을 일으키려는 23T를 붙잡고 말했다.
나나시: 잠깐. 23T! 하려던 얘기가 있었어. 내가 기억을 하나 떠올린 것 같은데 말이야…
23T5U130: 어디까지?
나나시: 승화 실험이 사람 몸을 분해한다는 거랑… 내가 시라유키 히메리를 싫어하는 게 노바디라는 사람과 관련이 있다는 것. 그리고 기계 동물…?
나나시: 미안해. 사실 나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해서 중구난방이야.
23T5U130: 전부 사실이니까 계속해.
나나시: 그리고 무엇보다. 기관에서의 나는 인공지능이라는 파트너를 데리고 있었어. 아마… 너일 거야. 그것만큼은 알아봤거든.
나나시: 그런데 시라유키 히메리는 인공지능이라 불린 네 모습을 보고선 노바디라는 사람을 연상했어. 네 말투라던가 그런 게 아니라. 겉모습을 보고 착각한 거야.
나나시: 왜일까? 왜 난 인공지능을 노바디의 모습으로 꾸민 걸까? 내 생각에 그건…
23T5U130: 결국 내가 노바디냐고 묻고 싶은 거야?
나는 23T가 곧바로 결론을 얘기하자 조금 당황하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나시: 응.
23T5U130: 내가 노바디냐고 물으면, 난 아니라고 대답할 거야.
23T5U130: 그렇지만 내가 노바디라는 사람의 기억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으면. 그래. 그렇게 대답할 거야. 난 노바디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 가끔 내가 노바디라고 생각할 정도로.
23T5U130: 난 그저 기계일 뿐이지만. 내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말이야.
'곧 올라옴' 없이 서프라이즈~랍니다
초고교급들 사이에서 혼자 엑스맨 찍고 있는 뮤턴트 캐롤캐롤입니다
이 작가님 커미션 고대하고 있었는데 열려서 후다닥 신청하니 기분이 좋네요 행복행복해요
마유네즈까지 커미션 연계… 정신을 못 차리죠?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마유즈미는 용서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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