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나즈키 시노부: 실패했지만. 그래도 야가미가 살아서 다행이지 않아?
칸나즈키 시노부: 네 말이 맞아. 기회는 남아 있으니까 어떻게든 될 거야. 야가미는 그래도 싹수가 있는 놈이라. 그런 선택을 하지만 않았으면 다 잘 됐을지도 모르는데…
칸나즈키 시노부: 아. 그 이상한 문 세 개 중에서 하나는 닫혔어? 그럼 네 짐작이 맞는 모양이야. 응. 이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걸.
칸나즈키 시노부: 선택의 주체는 오직 너야. 그러니 후회가 적게 남도록 잘 선택해. 선택은 언제나 후회를 남기지만, 적어도 후회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을 테니까.
칸나즈키 시노부: 나 잠깐 어디 갈 테니까. 당분간은 얘기 나누기 어려울 거야. 아무튼 잘 판단해.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이바라 쿠리스: 하암… 흐음… 지금이 몇 시지…? 7시…
이바라 쿠리스: 모니터실 가서 상황 보고 하기와라 놈한테 아침 줘야지… 매번 도시락 먹이는 게 미안하긴 하지만…
이바라 쿠리스: 매 끼니 스테이크 먹였다간 나중에 쫄쫄 굶겨야 할지도 모른단 말이야. 나중에 식당으로 오면 배 터지게 먹여야겠어. 마유즈미도 나중에 꼭…
이바라 쿠리스: ……어. 뭐야. 밥값이 왜 올랐지?
두 배 가까이 비싸진 물품들의 가격을 보며. 이바라 쿠리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23T5U130: 안녕. 이바라.
이바라 쿠리스: 토키와! 23T! 이거 봤어?!
이바라가 모니터실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23T와 파란 머리의 누군가가 이바라를 반겼다.
토키와 아유키: 안녕. 혹시 물가가 올라간 것 말이야?
이바라 쿠리스: 우와악. 뭐야!!
이바라는 초췌한 누군가의 얼굴에 기겁했다. 좀비다! 좀비가 나타났다! 파란 머리카락을 가진 좀비가…
이바라 쿠리스: 설마 너 토키와야?!
토키와 아유키: …내가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어?
평소의 토키와의 모습과 그녀의 눈앞에 있는 그의 모습을 대조하자. 이바라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떡하니 벌렸다.
그래도 나름 볼만하게 생기던 놈이 순식간에 무슨 해골바가지가…
이바라 쿠리스: 완전 달라졌어. 뭐야?! 딱 봐도 잠은 제대로 안 잔 것 같고. 밥도 제대로 안 먹었지?
23T5U130: 나는 최대한 말렸어. 그런데도 토키와는 안 들었지. 자는 사이에 몰래 숙소에 옮겨 두기도 했지만, 곧 깨어나선 모니터실로 돌아왔어.
토키와 아유키: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토키와는 퀭한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 다크서클은 진하게 내려와 눈을 거의 덮었으며, 낯빛은 하얗게 보일 정도로 핏기가 없었다. 이바라는 그의 모습을 보며 눈이 까맣고 얼굴이 하야니 마치 판다 같다는 생각을 했다가 지금 그게 할 생각이냐며 스스로를 욕했다.
토키와가 커피잔을 기울이자 그 안의 향기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진하고 쓴 커피 향이 이바라가 맡기에는 약재를 마구잡이로 달여 나온 독한 용액의 향처럼 느껴졌다.
이바라 쿠리스: 어우. 뭐야 이거! 냄새가… 웩. 콜록. 콜록! 지금 뭘 마시고 있는 거야!
토키와 아유키: …샷이 추가된 아메리카노?
이바라 쿠리스: 커피콩을 무슨 냄비째로 들이부었나. 샷을 얼마나 넣었는데?
토키와 아유키: 다섯 번 정도…
이바라 쿠리스: 그딴 걸 쳐먹는 사람이 있다고?! 아니 여기 있네! 너 제정신이야?
23T5U130: 적어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아.
캐롤 브라이트: 무리하고 계실 줄 알았어요. 토키와 씨.
캐롤 브라이트가 모니터실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토키와는 그녀를 보며 손을 흔들었지만, 손을 흔들다기보단 흔들리는 손목에 손이 딸려 덜렁이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토키와 아유키: 안녕하세요. 캐롤 씨…
캐롤 브라이트: 충분히 쉬시지도 못 하고 다시 몸을 혹사시키시는데 몸이 나아질 리가 없죠. 몇 시간이라도 좋으니까 자고 오세요. 제가 대신 모니터실에 있을 테니까요.
이바라 쿠리스: 나도 여기에 있을래! 어차피 할 일도 없어서. 토키와 대신에 알바 뛴다고 생각하면 여유롭게 가능하지!
캐롤 브라이트: 좋네요. 함께 자리를 지키죠. 23T 씨는 괜찮으신가요?
23T5U130: 난 기계니까 지칠 염려 마. 너희들의 생존을 위해 난 뭐든 할 수 있어.
캐롤 브라이트: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이바라 쿠리스: 훈훈하고 좋은데 말이야. 캐롤! 지금 장난 아니야. 갑자기 크레딧 상점의 물가가 두 배로 뛴 거 있지!
캐롤 브라이트: 저도 알아요. 확인했어요. 여러분 모두 그렇죠?
토키와 아유키: 뭘 보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원금의 두 배가 되었으니. 다들 당황스러울 만도 해. 당황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겠지.
이바라 쿠리스: 사실 두 배 정도야… 어떻게든 될 수도 있어. 제 끼니대로 밥은 먹일 수 있다고.
23T5U130: 문제는 물가가 얼마나 더 오르는지에 달렸지.
이바라는 이마에 손을 얹고서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바라 쿠리스: 근데 다섯 배로 올라 봐. 진짜 감당이 안 될 거야! 밥 보내다가 내 크레딧이 다 거덜 날걸.
23T5U130: 해변에는 가재 괴물이 있잖아. 그것으로 식량을 보충할 순 없을까?
이바라는 23T를 향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바라 쿠리스: 어떻게 자라나는 애들한테 삼시세끼 가재를 먹여! 랍스터라고 생각하면 뭐. 나도 저기로 보내달라고 하고 싶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가재가 아니라 가재 괴물이잖아. 그 징그러운 걸 계속 먹일 순 없어.
23T5U130: 같은 걸 계속 먹으면 질리긴 하겠지… 양념이라도 보내 주자.
이바라 쿠리스: 양념 이지랄?!
토키와 아유키: 끼니만이 문제가 아니야. 지금에야 돌발 상황이 없지만 언젠가 비상 상황이 오면. 우린 해변의 인원들에게 그에 맞춘 물품을 지급해야 해.
토키와 아유키: 그렇지만 물품의 가격이 이렇게 올라간다면, 힘들어질 거야… 아주 많이. 크레딧을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지원을 주는 것 자체가 힘들어질 수도 있어.
이바라 쿠리스: 대체 값이 왜 이렇게 오른 거야… 공지도 없이 이렇게 올려 버리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모노로그! 이거 싸우자는 거지?!
모노로그: 그렇게 죽고 싶나?
모노로그가 바닥에서 솟아올라 이바라의 눈높이에 머물렀다.
이바라 쿠리스: 이거 어쩌자는 거냐고. 하룻밤 사이에 값을 이렇게 올리는 게 어디 있어?
모노로그: 헛소리는 그만둬라. 벌어진 모든 나쁜 일이 내 탓이 되는 것은 아니다. 행동의 원인과 결과를 정확히 파악해.
이바라 쿠리스: 얘가 드디어 미쳤나!
캐롤 브라이트: …당신이 값을 올린 게 아니군요?
캐롤은 모노로그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모노로그는 그녀 쪽으로 방향을 돌리더니 자신의 몸을 구겼다. 책이 조금 굽어 마치 웃는 듯한 형상이 되었다.
모노로그: 눈치가 빠르군.
이바라 쿠리스: 캐롤. 그게 무슨 소리야. 모노로그가 올린 게… 아니라고?
캐롤 브라이트: 네. 크레딧 상품들의 물가가 오른 것은 모노로그 씨와 관련이 없어요. 물론 있겠지만, 모노로그 씨의 의지대로 값이 오른 건 아니에요.
캐롤 브라이트: 설명하기보다 보여드릴게요. 여러분. 크레딧 상점에 새로 들어온 품목들을 확인하셨나요?
토키와 아유키: 확인은 했죠. 플라잉 로봇. 인플레이션. 각성제. 보급 특권… 이었던가요.
이바라 쿠리스: 매일매일 새 품목들이 들어오니까 체크하는 것도 힘들긴 한데. 아무래도 그 정도로 비싸니까 관심이 안 갈 수가 없더라.
캐롤 브라이트:그중에서인플레이션은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이죠. 저희 상황과 같아요. 누군가가 '인플레이션' 을 구매했는데 탑에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닐 거예요.
이바라는 턱을 잡고는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이바라 쿠리스: 그건 맞지만. 인플레이션은 엄밀히 말해 물건이 아니잖아? 크레딧 상점에서 팔 것 같지는 않아.
캐롤 브라이트: 제 생각에. 이번에 새로 들어온 상품들은 상품이라기보단… 일종의 권리를 구매자에게 양도하는 것 같아요.
이바라 쿠리스: 권리?
캐롤 브라이트: 보급 특권과 같아요. 보급 특권은 이름부터 상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그것 또한 일종의 권리겠죠… 보급에 관련된 특권을. 모노로그가 구매자에게 부여하는 거예요.
캐롤 브라이트: 정확히 어떤 특권인지는 몰라요. 하지만 이렇게 큰돈이 오갔다면 그에 상응하는 가치가 있겠죠. 특별한 보급이 가능하다거나… 그렇죠. 모노로그 씨?
모노로그: 많은 크레딧을 지불하는 것에 상응하는 혜택을 주는 것이지. 방에 몰래 숨어서 음식만 먹자니 크레딧이 썩어 남치는 인원들을 위한 제도다.
모노로그: 크레딧도 엄연한 자원인데. 자원이 많은 이가 유리한 것은 당연한 순리 아니겠어?
이바라 쿠리스: 플라잉 로봇 권리 같은 건 처음 듣네… 그럼 대체 이거 산 사람은 누굴까? 그것만 알아내도 막을 수 있는 일이 있을 텐데.
토키와 아유키: 아마 카나리와 후루미나미일 거야. 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23T와 내게서 정보를 공유받고 해변의 인원들을 도왔지만, 두 사람은 아니야.
토키와 아유키: 모니터실에 나타나지도, 우리에게 모습을 좀처럼 보이지도 않았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일 거야. 그러지 않더라도 충분히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거겠지.
토키와 아유키: 아마 크레딧으로 휴대용 송출기를 구매해서. 그걸 통해 해변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가능성이 커. 그런 거액의 도구를 사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은 많은 크레딧을 가지고 있을 거야.
토키와 아유키: 그리고 많은 크레딧을 가진 사람이. 더 많은 특권을 거머쥐게 돼.
이바라 쿠리스: 걔들이 뭐길래 크레딧이 넘치는지는 둘째 치고…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물가를 올려봤자 좋을 일이 뭐가 있다고.
캐롤 브라이트: 저희들이 크레딧으로 살 수 있는 품목이 점점 줄어들잖아요. 반대로 물가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크레딧을 가진 분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죠.
캐롤 브라이트: 가지고 있던 재산의 양이 크레딧과 비례할 수도 있지만, 추측에 불과해요. 사실 지금부턴 크레딧의 기준보다 이제 지급된 크레딧을 가진 사람들의 행동에 집중해야겠죠.
캐롤의 말을 들은 이바라는 마음이 편치 않은 듯 한숨을 푹 토해냈다.
이바라 쿠리스: 우리가 카나리랑 후루미나미를 막을 방법은 없잖아. 자본의 차이가 너무 커…
모노로그: 카지노는 언제나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바라 쿠리스: 청소년 도박 조장 작작 해.
모노로그: 난 진심으로 충고하는 것이다. 자본의 차이를 좁히고 싶다면. 너희가 매달릴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은 바로 카지노일 것이다.
모노로그: 사실 이렇게 말해줄 필요도 없겠지. 바닥을 칠 때 너희는 내 말의 뜻을 알게 될 테니…
모노로그는 다시금 바닥 속으로 사라졌다.
토키와 아유키: …카지노는 일단 보류하고. 인플레이션을 멈출 수 있다면 멈추게끔 두 사람을 설득해야지. 분명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시련 세 가지를 전부 끝내면 해변의 모두도 돌아올 수 있으니까.
이바라 쿠리스: 그렇지만 그전에 살인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지? 카이다가 누군가를 습격할 수도 있고, 누가 어떤 짓을 벌일지 모르잖아. 보급 물품으로 살인이 조장될 수도 있어…
이바라 쿠리스: 생각하면 할수록 이거 진짜 큰일 났네!
토키와 아유키: 일단… 최대한 설득할 수밖에 없어. 그럼에도 두 사람이 완고하다면. 정말 우리의 활동 영역을 좁혀서 자신의 경주마를 유리하게 만들고, 누군가가 죽어서 해변의 모두가 탑으로 돌아오게 만들려는 심산이라면…
토키와 아유키: 우린 카나리와 후루미나미에게 맞서야 해.
토키와의 얼굴에는 전례 없던 비장함이 감돌았다.
이바라 쿠리스: …그 키 작은 카나리에게 싸움을 걸게 될 줄이야.
캐롤 브라이트: 싸워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거예요. 그보다는 좀 더 복잡하고, 더 어렵기도 하겠죠.
캐롤 브라이트: 인식하지 못할 뿐 이미 대립은 시작되었어요. 저희가 해야 할 일은 이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에요.
토키와 아유키: 난 가능한 모든 인원들을 데리고 가고 싶어서 사실 그렇게 내키지는 않지만… 만약 후루미나미와 카나리가 해변의 누군가를 죽여서 자신의 경주마를 살리려 한다면, 우린 최선을 다해 그 일을 막아야 해.
캐롤 브라이트: 막아야 할 일은 그게 다가 아닐 거예요.
이바라 쿠리스: 다가 아니라니?
캐롤 브라이트: 후루미나미 씨는 탑에도 많은 공작을 해 두었으니까요. 도청기 같은 것 말이죠.
나나시: 좋아… 됐다.
나는 후루미나미의 도청기에 수건을 잔뜩 감아 화장실의 찬장에 두었다. 마음 같아선 부숴버리고 싶었지만, 언젠가 쓸 데가 있을지 몰랐기에 우선은 부수지 않기로 했다.
아마 후루미나미도 도청기가 파훼당했음을 알아챘다면, 연결을 끊어두었을 것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뜬 나는 후루미나미가 내 문 여는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생각하며, 재빨리 밖으로 나섰다.
문을 열자마자 나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줄곧 내 숙소의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칸나즈키 시노부: 안뇽.
나나시: 칸나즈키…!
나는 비명을 지르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나나시: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칸나즈키 시노부: 두 발로 서 있기.
나나시: …그게 아니라. 왜 내 숙소 앞에 서 있어?
칸나즈키 시노부: 네가 나오기까지 기다렸어. 네가 방에서 나오면 해줄 말이 있어서.
나나시: 나한테 해줄 말? 그게 뭔데?
칸나즈키 시노부: 네 앞가림부터 잘해. 다른 사람 위하지 말고.
나는 움찔 놀랐다. 칸나즈키는 무심한 어투로 말했지만, 그녀의 말은 전혀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무표정한 칸나즈키는 마치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솔직히 말해 좀 당황스러웠고, 약간은 무섭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재빨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먼저 말을 이은 것은 그녀였다.
칸나즈키 시노부: 지금 어디로 가려는 거야?
나나시: 그게. 잠깐 할 일이 있어서…
칸나즈키 시노부: 뭔가 해 보려고 그러는 거잖아. 누군가를 쫓으려 하고 말이지. 네가 막을 수 있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직접 움직이려고 하지. 의도는 좋아. 의도는 좋지만… 과연 결과마저 좋을까.
칸나즈키가 옷 섬에서 유리구슬을 꺼냈다. 내가 선물로 준 그 물건이었다.
칸나즈키 시노부: 아브라. 카다브라…
내가 장담하건대, 유리구슬이 조금 빛났다. 칸나즈키가 이상한 주문 같은 것을 외자마자 그녀가 잡고 있던 유리구슬에서 묘한 빛이 새어 나왔다.
나는 이상하게 그 빛의 파장이 캐롤 씨의 터치와 조금 닮았다고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순간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빛… 샤이닝…?
캐롤 씨는 탑의 모든 이들에게 샤이닝이 있다고 말했다. 아마 칸나즈키에게도 샤이닝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빛을 보자 나는 그녀가 단지 샤이닝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캐롤 씨가 터치를 가진 것처럼, 그녀 또한 샤이닝을 활용하는 일종의 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녀의 힘은…
예언인가…?
칸나즈키 시노부: 후루미나미 걔는 물귀신처럼, 자기랑 엮이는 사람들을 자기 운명으로 끌어들여. 그건 단지 그녀에게 협력하는 사람들한테만 적용되는 얘기가 아니야.
칸나즈키 시노부: 자신한테 맞서는 사람도, 자신을 막으려는 사람도 가리지 않고 끌고 가지. 더없이 귀찮은 경우야. 정말이지.
나나시: 갑자기 나한테 왜 그런 얘기를…
칸나즈키 시노부: 후루미나미가 어떠한 공작을 펼칠 것 같아서. 그러니 누구도 죽지 않게 하기 위해 행동하고 있다면, 그건 완전히 헛수고야. 최소한의 숫자가 죽을 순 있어도 아무도 죽지 않을 순 없어.
나나시: …….
칸나즈키 시노부: 받아들여. 그 해변의 누군가는 죽을 수밖에 없어. 그럼 탑의 누군가도 죽을 수밖에 없고. 그건 네가 막을 수 없는 일이야.
나나시: 그래도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칸나즈키. 후루미나미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칸나즈키 시노부: 귀를 심어놓는 일 말이지. 알아.
도청기를 알고 있다고?
나나시: 알았다니… 그럼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도 이해할 거 아니야. 지금 안 막았다간 후루미나미는 더 많은 정보를 손에 넣을 거야. 영향력도 더 강해질 테고!
칸나즈키 시노부: 후루미나미는 너를 더 이상 건드리지 않을 거야. 그러니 이제 손을 떼.
나나시: 탑에 있는 모두가 어떤 일을 겪을지 알고 손을 떼. 너도! 너에게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
칸나즈키 시노부: 나는 경고했어. 이름 없는 남자. 남을 위하지 말고 이기적으로 행동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남을 속여. 자신의 편을 비호하고 다른 편은 견제해. 위협하고 빼앗아. 그게 이곳에서의 미덕이야.
내가 몸을 틀어 그녀를 스쳐 지나가려 하자, 칸나즈키는 빠르게 총총 달려와선 다시 내 앞을 가로막았다.
칸나즈키 시노부: 그러다간 후루미나미의 팔자를 누군가가 뒤집어쓰게 될 거라고. 어쩌면 네가.
칸나즈키의 목소리에 서서히 위엄이 서렸다. 칸나즈키의 몸 안에 그녀의 육신보다 큰 무언가가 들어가는 듯했다. 그녀를 찾아갔을 때 예언을 내리던, 그녀를 지배하던 무언가가 말할 때와 똑같았다.
나는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고 멈추려고 했으나…
후루미나미 나몬: 내 말 흘려듣지 마. 너. 죽을 거야. 네 캐롤 씨도 죽을 거야. 어쩌면 토키와도 죽을지 모르지. 히무로 빼고 해변의 모두가 죽을지도 몰라. 농담 아니야. 진심 어린 충고야.
후루미나미 나몬: 내가 장담할게. 내가 언젠가 너희들에게 말하는 때가 올 거야. 너랑 캐롤 씨 말고도. 다른 사람한테 속삭이는 때가 언젠가는 와. 바닥에 주저앉고 무릎을 꿇은 너희들에게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일 거야.
나나시: 어?! 악마다!
칸나즈키 시노부: 뭐? 어디?!
내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외딴 방향을 가리키자 칸나즈키는 고개를 홱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너무 빨랐던 나머지 순간 그녀의 목이 반대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일 만큼의 속도였다.
그 틈을 타 나는 칸나즈키를 따돌린 채 계단을 향해 달렸다. 이상한 점은, 그녀가 충분히 나를 막을 수 있을 터인데도 나를 막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서서히 작아졌다.
칸나즈키 시노부: ……미련한 놈 같으니.
칸나즈키 시노부: 어떻게 할 거니. 시노부?
칸나즈키 시노부: 경고는 충분히 남겼으니까… 일은 그대로 진행할래.
칸나즈키 시노부: 결국 미래를 바꾸려고 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지.
발걸음은 카지노로 향했다. 후루미나미는 시간이 나올 때마다 그곳에서 자판기를 돌리며, 온갖 물품들을 입수했다. 도청기도 카지노의 자판기에서 나왔다. 왜 자판기에 그렇게 집착하는지는 몰랐지만, 후루미나미라면 분명 무언가를 꾸미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녀가 주로 어디에 머무는지 안다면, 추격의 시도 또한 가능했다.
연기자라지만 탐정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발소리를 숨겨봤자일 터였기에. 나는 오히려 최대한 빠르게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곧 카지노의 양탄자를 달려가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카지노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수단은 두 개 뿐이었다. 6층으로 통하는 휴게실, 그게 아니라면 1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 그게 전부였다.
사실 이 수법으로 몇 번이고 실패해왔지만, 오늘만큼은 반드시 잡을 수 있도록 나는 전속력을 다해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전부 내려가자, 휴게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나시: 후루미나미! 얘기 좀 해!
예상한 바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양탄자 위를 후다닥 달려가 휴게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벌컥.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를 반기는 것은 소파. 침대. 그리고 약간의 다과 용품뿐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설마 이곳에 숨었을까 싶어 침대 밑과 소파의 뒤까지 확인했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휴게실의 다른 문. 6층으로 통하는 문을 향해 다가가 다시 문을 열었다.
그곳에도 후루미나미는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나나시: …….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만약 발소리를 숨기고 있는 거라면 나보다는 느릴 거라는 생각에 계단에까지 내려가 보았지만, 후루미나미는 찾아낼 수가 없었다. 고작 20초 정도의 틈에 불과했는데. 그녀는 내 시야에서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멀리 사라진 것이었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모니터실에까지 들어갔다.
이바라 쿠리스: 도청기?! 그런 건 또 어디서 챙겼대! 아. 나나시 안녕!
물론. 그곳에도 후루미나미는 없었다. 모니터실 안에는 캐롤 씨. 23T. 토키와와 이바라만 있을 뿐이었다.
뭐지. 그럼 대체 후루미나미는 어디로 사라진 거야? 증발이라도 했나? 나는 혼란을 느끼며 모니터실에서 오간 대화를 추측했다. 도청기. 후루미나미에 대한 얘기가 오가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몰래 주머니에 손을 넣어 캐롤 씨의 머리카락 묶음을 잡았다.
"캐롤 씨. 들리세요?"
"나나시 씨? 왜 갑자기… 누군가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대화인가요?"
나는 그녀의 쪽을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몰래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혹시 제가 오기 전에. 계단으로 내려가는 소리를 낸 사람이 있나요?"
캐롤 씨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문을 열고 계단으로 잠깐 내려간 발소리는 당신 것이잖아요. 그것 말고는 별다른 소리를 못 들었어요."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찾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위험한 일인가요?"
나는 어깨를 살짝 으쓱하곤 머리카락 묶음을 놓았다. 그 뒤론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이바라가 그런 나를 후려치며 물었다.
이바라 쿠리스: 너 뭐 해?
나나시: …잠시 생각 중이던 게 있었어.
이바라 쿠리스: 지금 딴생각할 때가 아니야. 나나시. 잘 들어! 후루미나미가 도청기를 풀어놓고 있었다니까! 그거 진짜 소름 돋지 않아? 내가 지금까지 방에서 부른 노래들을 걔가 다 들었다는 거 아니야! 으아. 쪽팔려 진짜!
나나시: 아… 사실 나는 알고 있었어.
이바라 쿠리스: 뭣?!
토키와 아유키: 정말?!
모니터실에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나리와 후루미나미를 회유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탑에 있는 자들이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하지만 않는다면, 함께 생활하고 있는 해변에선 살인이 일어나지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나왔다.
토키와 아유키: 모리와 히무로. 나이토가 살인이 일어나게 두지 않을 거야.
이바라 쿠리스: 나이토 정도면 꽤 든든하지. 히무로도 사람은 좋은 놈 같고. 모리는… 뭐. 모리니까.
후루미나미의 도청기는 최대한 수색해서 수거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왔다. 그러나 그녀가 어디에 도청기를 숨겼는지는 알 수 없으므로. 숨겨야만 하는 기밀이 있다면 필담을 나누거나 작은 목소리로 대화해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으로 의견이 오갔다.
캐롤 브라이트: 그녀를 설득할 수 있다면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23T5U130: 강제적인 터치를 사용할 생각이야?
캐롤 브라이트: 아뇨!
캐롤 씨는 23T의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최근 그녀의 표정에선 고민과 수심밖에 볼 수 없었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그녀의 모습에선 지금만큼 상황이 심각하지 않던 시절의 그녀를 얼핏 볼 수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 하고 싶지 않아요. 터치만큼은… 사용해선 안 돼요. 다시는.
이바라 쿠리스: 정신에 간섭하는 일을 쉽게 할 수도 없는 거잖아. 우리끼리 열심히 하자. 힘내자고!
나나시: 나도 후루미나미에게 터치를 사용하는 건 반대야. 터치는 반드시 쌍방향으로 영향을 미치니까… 부담이 심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후루미나미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탑에 두 명 생기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토키와는 결국 모두의 만류로 잠시 수면을 취하러 숙소로 향했다. 나 또한 모니터실에 남으려고 했지만 세 명이면 충분하다는 캐롤 씨의 말에 결국 나는 모니터실을 나섰다.
"달리 할 일이 있으시죠. 그렇죠?"
"네. 맞아요."
23T5U130: 힘내. 나나시.
23T의 느닷없는 격려는 캐롤 씨와의 대화를 엿들은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나나시: 고마워. 23T. 힘낼게!
나는 그대로 내 숙소에서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렸다. 단지 시간을 죽이지만은 않았다. 그녀가 남겼던 도청기를 다시 꺼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파는 어떻게 수신하는지, 그리고 이 전파를 수신하려면 어떤 부품이 필요한지를 살피자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한 시간이면 경계를 풀고 굴에서 모습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토키와는 자러 갔고. 캐롤 씨와 23T, 이바라는 모니터실. 카나리는 항상 자기 숙소 안. 나도 숙소 안으로 들어왔고. 칸나즈키라는 변수가 있긴 했으나… 그녀라면 숨어있던 곳에서 나올만했다.
나는 카지노 쪽으로 향하지 않고 6층을 통해 휴게실로 들어갔다.
휴게실은 언제나 똑같은 풍경이었다. 쉬라는 듯한 소파와 침대. 잠시 긴장을 풀라는 듯한 다도 용품.
아까 후루미나미를 쫓았을 때.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휴게실 너머 6층과 그 계단에도 아무도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나보다 훨씬 빠르게 어딘가로 사라진 걸까? 혹은 창문을 열고 또 로프라도 탄 걸까?
그것도 가능성 중 하나겠지만, 나는 한 가지 더욱 유력한 가능성을 떠올려냈다. 애초에 후루미나미는 휴게실에 있었지만 내가 찾지 못했을 가능성.
그러나 소파와 침대를 샅샅이 찾았을 텐데? 그곳에도 후루미나미는 없었다. 엄폐물이라곤 그 두 개가 전부인 휴게실에. 몸을 숨길 수 있는 공간이 어디에 있을까.
반대였다. 내가 모르는 엄폐물이 있기에 그녀가 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바닥과 벽을 샅샅이 훑으며 위화감을 찾던 나는. 휴게실의 한쪽 바닥을 두드리던 도중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통통통.
안이 비어있는 듯한 소리였다.
나나시: …혹시.
바닥을 손으로 이리저리 훑고, 만지고, 밟는 등 여러 방법을 시도한 끝에 견고하던 바닥이 일부분 열렸다. 뚜껑이 있다기보다는 바닥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탑의 수수께끼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찾아냈다.
나는 환호하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열린 바닥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은 깊었고, 깊은 만큼 내려갈 수 있도록 흰 사다리가 입구에 붙어 있었다. 핵전쟁에 대비해 만들어진 벙커 같다는 인상마저 느꼈다.
내가 서서히 사다리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자 바닥이 다시 닫혔다. 조금의 소리도 나지 않고 바닥은 언제 열렸냐는 듯이 자신의 형태로 돌아왔다. 이러니 잠시 숨는다면 내가 못 찾을 법도 했다.
그보다. 이 장소는 대체 무슨 장소지…?
사다리를 다 타고 밑으로 내려간 나는, 커다란 자판기에 빠진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나나시: …이게 무슨.
나는 벙커 같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렸다. 그곳은 공장 같았다. 적어도 규모만큼은 공장이었다. 체육관의 강당을 통째로 옮긴 것 같은 넓은 방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강당의 2층에 있는 형색이 되었다.
떨어지지 않도록 난간은 설치되어 있었지만, 꽤 높았던지라 조금 불안했다. 1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사다리를 또 찾아낸 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1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커다란 공간의 구조에 감탄하게 되었다.
자판기라고 표현을 한 이유는, 온갖 물품들이 자판기의 구조처럼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견고해 보이는 투명한 장벽 뒤로 온갖 물품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도열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버튼을 누르면, 그 도열에 있는 물품 중 하나가 자판기 밖으로 떨어지는 그 구조마저 똑같았다.
다만 크기가 엄청나게 컸다. 버튼이 달려 있지도 않았지만, 만약 버튼이 달려 있었다면 승강기를 통해 오르내려야만 버튼을 누를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물품도 그 크기만큼이나 많았다. 내가 알아본 것만 해도 사과. 도시락. 물. 우유. 컵. 로프. 리어카. 책. 조각배. 노. 수갑… 끝도 없었다.
잠깐. 이거 설마…?
나나시: 설마… 설마.
나는 긴가민가하는 기분을 느끼며 다이얼로그의 메뉴를 조작해. 모리 쪽으로 생수를 한 통 보냈다. 평소보다 비싸기는 했지만 시험 삼아 보내는 값으로는 아깝지 않았다.
나는 어떤 움직임이 있는지 눈에 힘을 주어 관찰했다. 곧 수 없이 도열된 생수 묶음에서. 생수 한 통이 빠져나와 자판기의 밑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 커다란 기계에는 자판기와 다른 큰 점이 있었는데, 바로 배출구가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었다.
나나시: …먹을 사람이 따로 있다 이거지.
곧바로 나는 모리에게 생수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시기 위해 메뉴로 생수를 하나 주문했다.
생수가 한 통 더 떨어졌다.
그 직후 내가 딛고 있는 바닥에서 생수 한 통이 솟아올랐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생수를 잡고 한 모금을 마셨다.
한 모금을 마시는 시간이 매우 천천히 흘러간다고 느꼈다. 나는 꿀꺽 물을 삼킨 뒤 작은 한숨을 내쉬고. 내가 무엇을 찾아냈는지를 진정 받아들였다.
나나시: 오… 세상에.
나는 배급 시스템을 찾아냈다. 엄청난 놀라움과 흥분이 나를 사로잡으려 했으나.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사고를 멈추지 않았다. 배급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알아냈지만, 어차피 투명한 장벽으로 막힌 이상 후원에 간섭할 방법은 없었다. 그럼 이 장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지?
애초에 이 방은 후루미나미가 사용했다. 내가 쫓아오니 후루미나미는 잠시 이 곳으로 몸을 숨긴 게 분명했다. 어제까지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어설프게 추격을 하면 후루미나미는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도망치는 것과 숨는 것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왜 오늘에 와서야 숨은 거지? 이 장소를 오늘 찾아냈나?
이 장소가 오늘 열렸기 때문일까. 모노로그가 이 장소에 대한 정보를 오늘 전달했기 때문에. 구매한 권리에 대해 오늘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녀가 얻은 권리는 플라잉 로봇. 인플레이션. 보급 특권 중에서…
나나시: 보급 특권…
나는 보급실(이라고 이름을 붙였다)의 한편에 놓인 컨베이어 벨트를 발견했다. 러닝 머신처럼 컨베이어 벨트는 끝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더 조사를 해 보았으나. 무언가를 넣을 수 있는 구조물은 그 컨베이어 벨트가 전부였다.
나나시: 여기에 넣은 것들이 모리에게 전달된다면… 이 장소라면 물품 목록에는 없는 것들도 보낼 수 있어. 그게 보급 특권이야.
나나시: 후루미나미를 저지할 수도 있고, 반대로 후루미나미의 어드밴티지를 없앨 수도 있어. 내가 비밀을 알았으니까…!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혼잣말에 뒤늦게 입을 막으며, 나는 생수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재빨리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손에 힘을 단단히 주되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는 않았다. 휴게실의 바닥으로 거의 도착하자 휴게실에 누가 있는지 듣기 위해 귀에 신경을 기울이기도 했다.
아무 소리도 안 난다는 걸 확인한 후 나는 사다리를 끝까지 타고 올랐다. 아무 소리도 없이 바닥이 사라져 내가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 생겼다. 나는 몸을 꺼내고, 6층으로 통하는 문을 살짝 열었다. 카지노 쪽으로 향했다가 후루미나미를 마주칠 용기가 없었다.
마치 입장이 바뀐 것 같았다. 나는 후루미나미의 약점을 손에 쥐었다. 분명 그럴 터였으나 정작 나는 그녀를 피해야만 할 신세가 되었다. 손에 무기를 쥐는 것은 바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내가 내 숙소로 달려가는 동안. 후루미나미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안도할 수 있었다.
야가미. 하기와라. 나이토가 목욕을 마쳤다는 신호가 오자 히무로는 그들의 벗은 옷을 꺼내 연못의 반대 편으로 전달한 바 있었다. 그대로 그는 자신의 원래 위치로 사라졌다.
거 새끼 참 부지런하네. 하기와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옷 빨 시간은 없겠지?
야가미 토가: 지금은 몸을 씻은 것만으로 만족합시다.
모리 레이코: 이제 다 입었나?
모리는 수건으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물었다. 그들은 여전히 약간 낡고 더러워진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 마음가짐이나 옷을 입고 있는 신체는 물속으로 들어가기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짧은 목욕이었으나
나이토 유즈루: 다 입었어. 이제 히무로 쪽으로 돌아가자. 설마 카이다가 마유즈미를 노리진 않겠지?
모리 레이코: 첩자가 아무리 빨라도 총알보다 빠르진 못하다. 프로파일러가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난입할 수 있다.
나이토 유즈루: 그럼 다행이고. 어휴. 머리 더럽게 안 마르네. 이거 진짜…
야가미 토가: 그런데 나이토 씨도 긴 머리이지만, 저희와 비슷한 시간에 목욕을 마치셨습니다. 왜 마유즈미 씨는 더 시간이 걸리는 걸까요?
하기와라 우시오: 이 새끼는 진짜 눈치가 없구만.
야가미 토가: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기와라 우시오: 됐어. 일단 히무로 쪽으로 가기나 하자고.
그들은 목욕하는 마유즈미를 구경하는 꼴이 되지 않도록 연못과 조금 거리를 둔 채 히무로가 있던 방향으로 걸어갔다.
하기와라 우시오: 근데 우리가 히무로 쪽으로 가면 걔 목욕할 때 우리한테 히무로 알몸이 보이는 거 아니여? 와! 모리 그녀의 큰 그림은 대체 어디까지…
모리 레이코: 그럼 난 반대편을 보고 있도록 하지. 그러면 충분한가?
야가미 토가: 마유즈미 씨가 다 씻은 뒤에 히무로 씨가 씻으실 테니. 히무로 씨를 바위 반대편으로 보내면 되죠. 그러면 저희 쪽에선 히무로 씨의 모습이 더 이상 안 보이지 않겠습니까.
나이토 유즈루: 그것도 말이 되네. 마유즈미도 곧 오겠지 뭐.
야가미 토가: 해변에서 다이얼로그가 통하기만 했어도 이렇게 소통이 불편해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아쉽군요. 전화를 거는 것만으로 쉽게 상황을 보고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야가미의 말에 나이토와 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야가미 토가: …그리고 다이얼로그 하니까 말입니다.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하기와라 우시오: 전화번호?
야가미 토가: 당신도 이상한 점을 느꼈군요.
나이토 유즈루: 뭐가?
야가미 토가: 하기와라 씨의 전화번호가 0000. 제가 0001. 칸나즈키 씨: 0002. 카나리 씨: 0003. 토키와 씨: 0004. 마유즈미 씨: 0006. 나이토 씨: 0008. 후루미나미 씨: 0009. 모리 씨: 0011. 미도리카와 씨: 0012. 이바라 씨: 0013. 캐롤 씨: 0014. 카이다 씨: 0015. 히무로 씨: 0016. 나나시 씨: 0017. 23T 씨: 0020이었죠.
모리 레이코: 그렇다.
야가미 토가: 0005, 0007, 0010, 0018, 0019는 어디 갔을까요?
나이토 유즈루: 그건 무슨 소리야.
하기와라 우시오: 23T가 번호 읊어줄 때 내 0000부터 자기 0020까지 순서대로 얘기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 전화번호는 일종의 순서를 나타내는 것 같아.
야가미 토가: 아마 그럴 겁니다.
모리 레이코: 내통자. 애매하게 말하지 말고 제대로 대답해라.
야가미는 자신도 모른다는 듯이 눈썹을 으쓱 들어 올렸다.
야가미 토가: 모노로그 씨에게서의 정보를 기대하신다면 저 말고 카이다 씨를 찾으세요. 전 흑막에게서 버려진 것 같으니까요.
나이토 유즈루: 순서대로인데 왜 그 번호들만 비어 있느냐…? 그러게. 왜지?
하기와라 우시오: 흑막 마인드로 생각해 보자고… mastermind의 mind로 말이야. 다이얼로그의 전화번호는 흑막이 우리한테 배정한 거야. 각 번호에 배정된 사람이 있었을 거라고. 그런데 왜 이 탑에 없을까?
모리 레이코: 번호가 비어있는 게 아니라, 연락만 되지 않을 뿐 이 탑 어딘가에 존재할 수도 있다.
하기와라가 짝짝 박수를 쳤다.
하기와라 우시오: 좋아! 그런 추측 아주 좋아! 그럼 다음. 초고교급 떡대 내통자 빠칭코 전문 가재 포식자. 야가미. Hit it!
하기와라가 야가미를 지목하자 그는 난처한 기색을 보였지만, 일단은 그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야가미 토가: 어쩌면 그들은 저희와 달리 살인 게임에서 빠져나가는 데에 성공했고, 그랬기에 번호가 비어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기와라 우시오: 오케이. 여기까지! 머리 좀 쓰는 애들 두 명이 의견 냈으니까 둘 중 하나는 맞겠지 뭐.
모리 레이코: 너는 의견이 없나. 코미디언?
하기와라 우시오: 내 의견은 왜 궁금해해. 의견 두 개 나왔으면 다 됐지. 아. 히무로이드 목욕 끝나면 걔한테도 물어봐야겠다.
모리 레이코: 난 네 의견을 물었다. 코미디언.
하기와라 우시오: 내 의견은 왜 궁금해하냐고 물었다. 싸이코.
나이토 유즈루: 꽁트 그만 하고… 아무거나 말해 봐. 생각나는 대로.
하기와라 우시오: 생각나는 대로라. 흠…
하기와라는 하품을 한 번 하고 말을 꺼냈다.
하기와라 우시오: 납치하려는 사람 명단을 입수하고 번호를 미리 정해 놨는데. 몇몇 사람들을 납치하지 못한 거 아니야?
우는 사람을 대하는 일은 익숙하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던 후루미나미를 대하는 때와 마찬가지였다. 내가 느낀 것은 순수한 당혹감이었다.
그녀의 눈물 자체가 내 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듯했다.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좋은 판단은 무엇인가를 생각했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마유즈미의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고, 그녀가 격렬하게 세수를 한 뒤에야 나는 입을 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푸르르르르르르! 킁! 킁!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마유즈미 나데시코: 내가 먼저 말할게! 들어줘서 고마워. 역시 누구한테 털어놓고 나니까 기분이 조금 나아졌어!
마유즈미는 쾌활한 어투를 되찾은 듯이 말했다. 그러나 내겐 전혀 되찾은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마유즈미 나데시코: 알아. 힘내야 하는 거. 어쩔 수 없잖아? 아무튼 목욕하니까 피로가 싹 날아가네! 히무로 너도 여유롭게 씻고 나와?
히무로 시라베: 아직 가지 마. 마유즈미.
첨벙첨벙 소리를 내며 바위에서 멀어지려는 그녀에게, 나는 말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엑.
히무로 시라베: 말동무가 되어 주겠다면서. 그러니 넌 나와 조금 더 얘기를 나눠 줘야겠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게…
히무로 시라베: 조금만 더 있어주면 안 될까.
잠깐의 정적 이후 다시 첨벙거림이 들려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위에 가까워지는 첨벙거림이었다.
수면에 입을 대고 숨을 내뱉어. 부글거리는 듯한 소리가 첨벙거림에 뒤따랐다.
히무로 시라베: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었을 때. 너는 이 상황이나 앞으로의 전망이 아니라 내가 어떤 요소를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은 거였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지.
히무로 시라베: 나 또한 카텟 기관에 대해 생각해. 메리에 대해 생각하고…
카텟 기관에 대한 정보를 외부인에게 말하는 것에. 내 안의 완고함이 잠시 혓바늘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마유즈미는 이미 카텟 기관에 대해 상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말을 해도 문제는 없을 듯싶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도 되게 대단한 사람이더라.
히무로 시라베: 그래. 초고교급 연구가였어. 걸물이었지. 카텟 기관의 토대를 세운 인물 중 하나야. 그리고 끝까지 날 믿었지. 나조차 나를 믿지 못했는데도.
그렇기에 그녀가 살인자라는 사실은 믿기가 어려웠다.
확증이 나온다면 나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을 모르는 이상 더 이상의 판단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나시의 말만 믿고 전과자 취급하기에. 메리는…
…내가 떠올리고 있는 과거는 노네임을 만나기 이전 시점 뿐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새로운 정보가 유입되었을 때. 그것에 초점이 쏠려야만 했다…
…머리로는 나나시의 증언을 믿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난 그토록 편협했다.
히무로 시라베: 네가 마유즈미 가문을 걱정하는 것처럼. 나도 그녀를 걱정하고 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런 점에서는 우리도 닮았네. 그치?
히무로 시라베: 교집합이 있지. 그 교집합에 의거해서 말할게. 그들이 무사하길 바라자.
마유즈미 나데시코: …좋아! 이제 제정신 차려야지. 푸르르르르!
다시 격렬하게 세수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계속 씻기 위해 수면을 내려다 본 순간. 나는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사과를 하나 발견했다.
히무로 시라베: ……,
사과. 그리고 시나몬. 잘 어울리기로 유명했다.
불안함을 느끼며 몸을 움직이지 않자 사과 열댓 개가 수면 위로 더 솟아올랐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왓. 이게 뭐야! 사과잖아? 땡잡았다!
마유즈미 쪽에까지 떨어질 만큼. 그 양은 많았다.
과시하고 있군.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치부마저 드러내고 있는 장면을 누군가가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내게 수치보다 불쾌함을 먼저 느끼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왜 사과를 보냈지? 굳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뭐야?
그토록 내게 집착하는 이유가 뭐냔 말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나는 수면 위에 떠 있는 사과 중 하나를 붙잡았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자 손가락이 사과의 과육을 파고들었다. 사과는 서서히 내 손에 들려 있는 게 아니라, 내 손에 잡혀 있는 듯한 형태로 변해갔다. 과즙이 관통부 안에서 새어 나왔다.
두고 볼 수 없던가? 너의 것이 되어야만 하는 자가 친우와 대화하는 것조차도?
'난 언제나 너를 보고 있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네가 내 것이 되지 않는 한은.'
그녀의 목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끈적한 과즙이 내 손을 적신 뒤 흘러내려갔다. 문득 미지근한 내 체온을 느끼며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조각만이 남았다. 사과의 다른 파편들은 내 손 안에서 벗어난 채 물에 둥둥 떠 있었다.
나는 손에 들려 있던 조각마저 놓아버리고 끈적해진 손을 물에 씻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왁! 뭐야! 어디서 사과 쪼개는 소리가…
히무로 시라베: …내가 낸 거야. 놀랐다면 미안해. 아까 말은 취소할 테니. 당장 여기서 나가자. 아무래도 탑에서 우리를 볼 수 있는 모양이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뭐?! 아니 세상에. 나 지금 아무것도 안 걸치고 있는데!
히무로 시라베: 나도 마찬가지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빨리 나가자. 밖에서 얘기하지 뭐! 그 혹시. 나 먼저 밖으로 나가도 될까?
히무로 시라베: 그렇게 해.
마유즈미 나데시코: 고마웟!
첨벙거림.
바위 뒤에 홀로 남은 나는 다시 몸 전체를 수면 안으로 담갔다. 숨을 쉬지 못하는 차가운 환경에서 불쾌함이 사라지리라고 생각했지만, 잠깐 눈을 떴을 때 내가 본 것은 수면 위에 부표처럼 떠 있는 수많은 사과들이었다.
그것들이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후루미나미가 보낸 수하들처럼 그것들이 내게 말을 걸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후루미나미가 내 감정을 조종하려 들고 있다면, 나는 완전히 말려들어간 셈이었다. 수면 위로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상념들이 약간 누그러졌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왜 그토록 기분이 나쁜 것인지는 나 자신도 알지 못했다. 나와 메리의 관계를 멋대로 오해해선 나를 빼앗으려 드는 게. 메리를 향한 모욕이라고 느끼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런 느낌을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감시자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역정 탓에 질끈 감기던 눈이 떠졌다.
히무로 시라베: 신호!
하기와라 우시오: 저 또라이는 다 씻으면 신호를 보내랬더니 신호! 이지랄 하고 있네. 알겠어. 곧 간다!
하기와라가 내 옷을 들고 바위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안녕. 하기와라!
하기와라 우시오: 댓츠 마이 네임. 저 사과들은 다 뭐야? 아. 후루미나미가 보낸 건가? 진짜 걔도 어지간하네… 옷 입고 우리 쪽으로 다시 와!
그렇게 하기와라는 다시 사라졌다. 내 후원자가 후루미나미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그도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마유즈미가 등을 돌리고 있는 사이 난 뭍으로 올라온 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옷을 다시 입었다.
몸은 깨끗해졌고 기분 또한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회귀했지만 마음은 계속 석연치가 않았다. 이게 그녀가 원하는 바였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생각을 다잡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메리라면 나의 상황에 적합한 대응을 생각해냈을까. 메리라면 어떻게 행동할까. 메리가 내게 조언을 해 준다면, 그녀가 나와 함께 있다면… 하는 생각 또한 영상 속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점차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이 되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새롭게 다시 느꼈다. 나는 살인 게임에 떨어져 있다고.
알파걸의 살인 게임을 알고 있던지라 일종의 관찰자의 마음가짐을 가져왔던 나였으나. 나 또한 참가자에 불과했다. 규칙에 얽매이고 동기에 휘달리는 한 명의 참가자. 그게 내 전부였다.
히무로 시라베: 이제 뒤를 돌아봐도 돼.
마유즈미 나데시코: 오께.
내 쪽을 바라본 마유즈미는 사과를 아작아작 씹어먹고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그 사과.
마유즈미 나데시코: …왜 그래? 설마 독사과야?
마유즈미의 입이 멈추고 동공은 커졌다.
히무로 시라베: 아니. 평범한 사과일 거야. 아마 후루미나미가 우리 대화를 방해하기 위해 보낸 거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 왜 그랬을까?
히무로 시라베: 자신은 구경할 처지에 놓여 있는데 내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게 질투 났던 거겠지. 불쾌한 일이야. 우리를 엿보고 있는 데다가 너희 모습이 보기 싫다는 표현을 이렇게 하다니.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네?! 우리가 얘기 나누는 걸 쭉 보고 있었던 거구나!
히무로 시라베: 우릴 구경거리 삼고 있었어. 나는 그 사실을 몰랐고. 이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했어. 치명적인 사항은 아니지만 내 실책이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좀 부끄럽다…
마유즈미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면서 사과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달콤한지 얼굴에는 아주 조금이지만 배시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 히무로는 사과 안 먹을래?
히무로 시라베: 먹고 싶지 않아.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지만, 그녀가 내게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아.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런 이유로 안 먹겠다구? 그렇지만 사과는 사과잖아.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가 준 사과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다고 해도 히무로가 맛있는 사과라고 받아들이면. 맛있게 먹을 수 있어.
히무로 시라베: 내가 받아들이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사과를 준 건 후루미나미일지 몰라도 먹는 건 우리잖아. 그러니까 사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우리 마음일 거야.
……
그녀를 넘어설 것인가. 그녀의 의도대로 움직일 것인가.
본래 그녀가 보냈던 사과도 먹었다. 그런데 왜 이 사과들은 먹을 생각이 들지 않는가.
내가 다르게 받아들였기 때문인가.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해도 결국 주체는 나다. 결정하는 건…
히무로 시라베: 네 말도 설득력이 있지만, 이미 사과는 대부분이 떠내려갔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 하나 더 가지고 올 걸 그랬네.
히무로 시라베: 개의치 마. 또 이야기라도 나누지 뭐. 그럼 사과가 또 배급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마유즈미 나데시코: …한 입 먹을래?
마유즈미가 멋쩍게 웃으면서 사과의 입을 대지 않은 쪽을 내밀었다.
나는 사과를 향해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하려다, 마비된 듯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나는 사과 안에서 후루미나미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비웃는 목소리. 내가 재미있는 구경거리 같다는 듯한 목소리.
"어여쁜 당신에게 사과를…"
히무로 시라베: …미안. 아직은 안 되겠어.
내가 사과에게서 멀어지며 고개를 살짝 아래로 떨구자. 사과 열댓 개가 다시 땅 속에서 솟아올랐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괜찮아. 나중에 먹으면 되지 뭐. 사과 많이 왔네! 하나는 남겨둘 테니까. 언젠가 꼭 먹는 거다?
히무로 시라베: 그래… 그것만큼은 약속할게.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녀도, 그녀를 향한 마음도.
마유즈미는 주섬주섬 자신의 가방 안에 사과를 넣었다.
열댓 개의 사과들은 나를 제외한 모두가 나누어 먹고도 남았다.
잊었던 특기를 되살렸는데, 너무나도 익숙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떤 기분을 느낄까?
추억에 젖을까? 새로운 감회를 느낄까? 아직 녹슬지 않았다며 묘한 회상에 빠질까?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셋 중 그 무엇도 느끼지 않았다. 사실 작업 중에 내가 느낀 것은 약간의 혼란뿐이었다. 왜 그렇게도 잘 되는지, 왜 설계도 없이도 그렇게 쉽게 만들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내 손은 제멋대로 부품을 조립했다.
철판. 안테나. 회로. 모스 코드 회로. 배터리. 확대 스피커. 그리고 물론 버튼들. 수많은 버튼들.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은 내 오랜 친구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나시: 오랜 친구…
"나 잊지 마... 잊으면 안 돼. 알겠지?"
빛이 너를 산산조각낸다.
내 손이 잠시 멈추었다.
나나시: 23T랑도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어. 내 과거에 대해서…
다시 일에 집중하자 내 머리에는 청사진이 떠올랐다. 명확한 형태는 없었지만 어떤 기능을 할지는 머릿속에 전부 들어 있었다. 마치 내가 기계를 만들고 있는 게 아니라, 신이 정해 두었던 계획에 단지 내가 손을 움직여 그 계획을 마무리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모든 일이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마침내.
나나시: 완성했다…
나는 급조한 무전기를 손에 들었다. 그것은 내가 입수한 후루미나미의 도청기와 연결되어 있었다.
후루미나미의 보급 특권을 악용해 도청기를 해변으로 보내면, 그것으로 해변과의 통신이 가능해질 터였다. 후루미나미가 모르는 새에 나 또한 해변의 모두에게서 현재의 상황을 보고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모니터실에 갈 필요도, 휴대용 송신기를 쓸 필요도 없었다.
모리는 공리를 다른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내 쪽에서 그녀에게 통신을 보낼 수는 없었지만, 어떻게든 사정을 전달하면 그녀는 열정적으로 통신 기능을 사용하며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해줄 게 분명했다.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들과 전화 통화가 가능해진 것이었다. 이 비유가 맞는지는 모르지만…
내 유일한 걱정은, 해변과 탑 사이의 전파가 닿지 않을 가능성이었다.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일이라면 후루미나미도 가능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왜 후루미나미는 아직 도청기를 자신의 경주마에게 보내지 않은 거지?
보냈는데, 닿지 않았나? 혹은 경주마가 도청기를 버렸나? 보급 특권이 개방된 것은 오늘이니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일까?
그 시점에서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무언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보급 특권을 이용해 도청기를 모리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후루미나미의 위치를 특정하거나 어딘가로 유인한 뒤 몰래 도청기를 보내려는 마음을 먹었을 때. 누군가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나나시: 어. 누구야?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후루미나미 나몬: 뭐 만드나. 나나시 요원.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으나, 그랬다간 의심만 더 살 게 분명했기에 곧바로 태연한 목소리를 내었다.
나나시: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잖아. 후루미나미.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문 너머에선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처음에 후루미나미가 낸 다른 성대모사 비슷한 것이리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후루미나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
카나리 케이토: 그런 걸 왜 물어. 성질 건드려서 좋을 일 있어?
후루미나미 나몬: 기분이 좋아져.
카나리 케이토: 한심하긴. 정신 나갔네 진짜.
나는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인지 의아함을 느꼈다. 전용실의 문을 열자 그 앞에 두 명이 서 있었다.
나나시: 카나리…?
카나리 케이토: 그래. 보다시피 나다. 그렇게 놀랄 일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사실 일찍 오려했는데 볼거리가 좀 있어서 좀 늦었어. 쏘리!
카나리 케이토: 그러니까 나만 온다고 했잖아! 왜 너까지 온다고 고집을 부리냐고!
후루미나미 나몬: 너같이 모자란 애는 어른이랑 같이 다녀야지. 농담이니까 용서해 줘.
카나리 케이토: 네가 무슨 어른이야… 하. 나도 너랑 손 잡기 싫어. 원래라면 너 같은 싸이코의 반경 15m 안으로는 들어가지도 않았어. 이번이 특수한 경우라고.
카나리 케이토: 애초에. 모자이크 된 영상을 봐서 무슨 소득이 있다고 거기에 매달려있는 거야? 넌 그 시간을 그냥 내다 버린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도 시도는 해 보고 싶었고… 방해해야 하는 일도 있었거든. 그렇지만 결국 방해에 실패했어. 이러다간 내가 빼앗기게 생겼다고. 이것도 나름 좋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던 건 아니란 말이야…
카나리 케이토: 쯧. 진짜 한심하긴.
나나시: …너희가 왜 나를 찾아와?
날 피해서 달아나던 후루미나미 쪽에서 내게 접근한 것도 의외였지만, 카나리까지? 나는 내가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인지 의심했다. 뭍으로 나와서 걷고 있는 물고기를 보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방에 틀어박혀. 밖으로 모습을 내비치지 않은 그 카나리가. 방 밖으로 나왔다고? 게다가 후루미나미와 같이?
어떤 상황인지는 짐작이 갔다. 많은 크레딧을 가진 두 사람이 연합한 것이었다. 사실 놀랍지는 않았다. 후루미나미 본인이 이런 상황을 내게 예견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많은 크레딧을 가지고 있는 고래들이 해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지.
두 사람이 연합을 한 건 알겠다. 그런데 왜 굳이 내 전용실에. 심지어 카나리까지 찾아와야 했던 것인지. 난 이해하지 못했다.
곧 후루미나미가 입을 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오해 마. 이번 건 내 아이디어 아니야. 카나리가 추진했어.
카나리가 어깨를 쭉 펴고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자신을 뽐내는 듯한 몸짓이었다. 어느 부분을 뽐내려 하는지는 몰랐지만…
카나리 케이토: 거래를 뚫을 거면 얼굴을 보는 게 에의라서. 고민하다가 결국 오기로 했다.
나나시: 무슨 거래?
카나리 케이토: 너. 우리랑 손을 잡아.
나나시: 뭐?
카나리 케이토: 그럼 너와 캐롤 브라이트의 목숨 만큼은 해치지 않겠다고 보장해 주지.
카이다 쿠로하: 미도리카와 아쿠토…
어둠 속에 숨은 카이다는 작은 주택들의 지붕을 타면서 미도리카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카이다 쿠로하: 찾아서 죽이기만 하면, 너희들이 무슨 수를 써도 되살려내진 못하겠지.
픽시브에서 벼르고 있던 작가님이 이번에 첫 커미션을 넣으셨길래 후다닥 신청했습니다… 캐롤 그림이 또 온답니다
요즘 후루미나미 캐릭터에 대해 생각이 많은데 얘가 1챕에 깨어나서 재밌는 점도 많지만 너무 얘 중심으로 흘러가서 후루미나미가 판을 다 먹는 그림 나올까봐 좀 쫄리는 점도 있네요
후루미나미가 최근에 자꾸 당하는 것도 그 영향이 좀 있음
그보다 시점 전환하는 입장에서도 존나 어질어질하네요 대충 끝부분 나나시 후루미나미 카나리는 저녁 시간대에 가깝다고 생각해주세요 군상극 좋아하는데 쓰는 입장에선 진짜 최악임 더 재미있게 쓸게요…
조만간 더 단크 타워 대회 진짜로 열 수도 있을 것 같음 쓰는 사람 본인이 대회 여는 거 좀 추하긴 하겠지만… 방문자수 10000회는 참을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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