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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2

더 단크 타워 챕터 2 - 10

by 도타싫어! 2021. 6. 22.


후루미나미 나몬은 도청기의 연결을 끊었다. 고막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왔고 어지러움 탓에 눈앞은 핑 돌았다.

루미나미 나몬: …재밌네. 재밌어.

후루미나미는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킨 뒤 땅에 발을 짚었다. 휘청이면서, 화가 난 듯 눈을 부릅뜬 채로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루미나미 나몬: 한 방 먹었어. 나나시. 정말 한 번 먹었어. 네가 이걸 간파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루미나미 나몬: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너야. 그러니까… 나랑 게임 한 판 하자. 나나시.

루미나미 나몬: 그 끝에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개인적인 감정은 없는 거다?

후루미나미가 문을 벌컥 열고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누군가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실 가로막았다기보단 후루미나미가 차마 그 사람을 보지 못한 것뿐이었다. 키가 꽤 작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땅에 콱 박힌 말뚝처럼. 후루미나미와 부딪힌 그녀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후루미나미가 점짓 놀라 뒤로 물러섰다.

나즈키 시노부: 어디 가?

칸나즈키 시노부는 무덤덤하게 물었다.

루미나미 나몬: 꺄악! 너 뭐야! 어디서 나타났어!

나즈키 시노부: 놀란 척 마. 내가 여기에 있는 거 거 들었으면서. 요기 받아.

칸나즈키는 검은 구슬을 후루미나미에게 건넸다. 후루미나미는 씨익 웃으며 구슬을 받아 들었다.

 

나즈키 시노부: 부숴 버리던가 나나시가 한 일을 나도 하려다가 참은 거야.

루미나미 나몬: 첫 번째 테스트는 합격일세. 칸나즈키 요원.

나즈키 시노부: 신나라! 그럼 출근은 언제부터 하면 될까?

루미나미 나몬: 그런데 정말 합격이야. 캐롤과 나나시가 힘을 합쳐서 한 일을. 혼자 알아채다니 대단해.

나즈키 시노부: 출근은 언제부터 하면 되냐니까.

 

루미나미 나몬: 내가 지금 바빠서 말이야. 출근에 대한 사항은 나중에

 

나즈키 시노부: 어디 가냐고도 내가 한 번 묻지 않았니?

 

루미나미 나몬: …난 네가 방관주의 노선인 줄 알았는데. 칸나즈키. 왜 이제 와서 날 견제하려 들어?

 

나즈키 시노부: 견제하려는 거 아니야. 네가 정말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서 이러는 거야.

 

나즈키 시노부: 네가 뭘 하려는 지도 몰라. 그렇지만 충고 하나만 할게. 후루미나미. 너 계속 그렇게 살다간 오래 못 가.

 

루미나미 나몬: 정말?

 

후루미나미는 그렇게 마음이 들뜬 적이 없었다.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나시: 샤이닝

'샤이닝'. 재단이 발견한 신물질.
인체에서 발견됨. 빛과 유사하게 관측 여부에 따라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함. 관측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설비 혹은 샤이닝 보유자들 사이의 교감이 필요함.
샤이닝을 타고난 사람들이 보이는 징조는 다음과 같음.
1: 흔하지 않은 머리카락 색의 자연발생.
2: 2차 성징 전후에 발현되는 특정 분야의 재능.
3: 비범한 사고방식, 행동양식, 사상 혹은 신념.
징조의 발현은 개인차가 있으며 징조의 발현이 드러나지 않음에도 순도 높은 샤이닝을 지닌 경우 또한 존재함.
감정의 변화에 따라 샤이닝의 힘이 점차 커질 수 있으며, 미약한 샤이닝의 소유자가 급격한 사건을 통해 재능을 발현할 가능성도 있음.
샤이닝의 보유자들이 긴밀하게 접촉하는 일 또한 샤이닝을 강하게 하는 데에 효과적.
재단은 샤이닝을 관측하고, 샤이닝 보유자에게서 샤이닝을 추출해 다시 특정 인물에게 주입할 수 있는 체계를 고안함.

"이게 주입된 결과물이 너다. 이거야?"

"그렇다."

내가 거래를 통해 얻은 권한은 터무니없는 정도였다. 모든 문서의 열람권. 나는 시라유키 히메리가 재단이라는 장소에서 알아낸 정보에마저 접근할 수 있었다. 내 앞에 선 남자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존재가 될 예정이었는지조차. 나는 알아내었다.

"너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죽었겠어. 아무래도 이 샤이닝을 빼앗긴 사람들은… 대부분 죽는 것 같으니까. 아니면 폐인이 되던가 말이야."

"그럴 가능성이 높다."

"죄책감 같은 건 안 느껴? 너 만들려고 사람이 죽었잖아."

"언제나 느끼지. 그리고 내가 만들어진 목적이 수행되지 않고 있어 그들의 목숨이 낭비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에도 죄책감을 느낀다."

 

난 히무로 시라베의 대답에 할 말이 없었다. 그의 화를 돋우려고 나쁜 말을 했지만 그의 대답을 듣고 나니 정말 몹쓸 말이었던 게 체감되었다.

만들어진 목적에 거스르기 위해 재단 놈들과 맞선 남자에게 이런 취급이라니.

 

"내 말이 경솔했어. 미안해."

 

"신경쓰지 않는다. 용건은 무엇이지?"

"그런 거 없어. 정말 후속 실험의 데이터가 없다는 점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게 그나마 용건이지. 네 속을 긁으면 어떻게든 실마리가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러나 그 문서들 중에서도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은 없었다.

"이제 네가 윽박지른 기관원에게 사과하고, 이 곳에서 나갈 생각이 드나?"

"그 사람한텐 개인적으로 사과할게. 여기서 나가기도 할 거야.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이거든."

"어디로?"

"창고. 지금부터 나는 창고로 갈 거야."

"나도 가지."

히무로 시라베는 끈질기게 나를 따라왔다. 누가 개조인간의 감시자 아니랄까봐. 라는 생각에 웃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결국 이 남자도 시라유키 히메리에게 이용당하는 처지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동정심이 들었다. 사람 가지고 실험하는 재단에서 그를 구조한 게 하필 카텟 기관에. 하필 현장 업무를 뛰던 시라유키 히메리라니.

세상에 이 정도로 지지리 운이 없는 남자가 있을까. 아마 어디엔가는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불공평하니까. 어디엔가는 그만큼 비루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어야만 했다. 억울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런 사람이 없다면 그런 사람을 만드는 수밖에 없겠지. 억울하지 않으려면.

아마 내가 하는 일도 그런 운명에 대한 반발심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실없는 생각임을 자각하고 떨쳐 버렸다.

복수의 대상은 운명이 아니라 한 사람이었으니까.

창고의 안에는 내가 모르는 물건이 많았지만, 내가 알던 물건도 몇 개 있었다.

"아. 이거 오랜만에 보네. 충전기. 에너지 방출기. 방사능 보호막…"

 

"찾는 게 무엇인지나 말하는 건 어떤가."

 

"그래. 알겠어. 전화 박스 크기의 기계를 하나 찾아 줘."

 

"저것 말인가?"

 

히무로 시라베가 창고의 깊은 곳을 가리켰다.

 

"바로 나와? 역시 대단하네. 내가 찾는 거랑 똑같은 물건인지는 봐야 알겠지만…"

 

나는 히무로 시라베와 함께 창고의 안으로 발을 디뎠다. 퀴퀴한 냄새. 먼지. 잊혀가는 것들의 냄새.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그것을 잊지 않았다. 한 순간도 잊지 않은 채 계속 그것을 속에 품어왔다. 화와 울분으로 가득 찬 채 스스로를 좀먹을지라도, 되새기려 애썼다.

 

"여기 있네"

 

두껍고 무거운 강철 문. 30cm 두께의 유리창. 전화 박스 정도의 크기.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문을 발로 있는 힘껏 걷어찼다. 그리고는 내 한쪽 발을 부여잡고 깡충깡충 뛰었다.

 

"아아아악! 망할!"

 

"왜 그런 행동을 한 거지?"

 

"나도 몰라! 다시 만나니까 화가 치밀어올랐나 보지 뭐. 아윽옛날에 노바디랑 난 이걸 전화 박스라고 불렀어. 그렇게 생겼잖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르지만."

"이게 승화 실험에 이용된 기계인가."

"그래. 맞아. 그렇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건 전화 박스 자체가 아니라. 전화 박스에 뭘 넣었는지가 중요한 건데. 내 생각이라면 분명 그 여자도 나랑 비슷한 걸 만들었을 거야. 데이터베이스 자체를 복사해서 가져왔던 거니까…"

"무슨 뜻이지?"

"이런 뜻."

나는 주머니 안에서 기계 메뚜기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정교하게 만들었군."

"움직임은 더 정교해."

머리 뒤의 전원 버튼을 누르고 가동하자 메뚜기는 내 손 안에서 버둥거리더니 다리를 세차게 움직였다. 몇 번을 봐도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당연하지. 메뚜기 자체를 기계 몸 안에 넣어놓은 건데. 나는 다시 전원 버튼을 기계 메뚜기를 잠들게 했다. 이게 언제 다시 깨어날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었다.

"혹시 이 안에 기계 동물 같은 거 있어? 내가 보여준 메뚜기나… 개. 고양이. 물고기나 박쥐 같은 거."

"그걸 찾는다면. 네가 기관에서 얻으려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겠나?"

"말해 줄게."

"그렇다면 고려해 보겠다. 대신 오늘 기관을 헤집는 건 여기까지 하도록 해. 아무리 기관을 증오한다고 해도 그 정도의 융통성은 가지고 있길 바라겠다."

"알겠어. 꼭 찾아줘야 해?"

창고 밖을 향해 몸을 돌리고 밖으로 나서려 하자. 등 뒤에서 히무로 시라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네가 찾던 것이 없다면, 이 짓을 계속할 텐가?"

"그런 건 가정할 필요도 없어. 내가 찾는 건 무조건 있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내가 아는 게 있으니까. 그러니 장담할 수 있어. 그 여자는 절대 그만 못 뒀을 거야. 실험 도중에 자기가 사람을 하나 죽였을지라도, 다른 생명을 가지고 실험했을 거라고."

 

나시: 샤이닝


롤 브라이트: 이… 기억은 뭐죠?

나는 가까스로 눈을 뜨지 않았다. 문득 기억이 떠올랐으나 그 기억이 캐롤 씨에게도 흘러들어 갔던 것이다. 꽤 긴 기억이 떠올랐지만 체감 시간에 비해 현실에선 2초도 채 지나지 않았다.

나시: 제가 카텟 기관에 속해 있었을 때의 기억 같아요.

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의 기관이군요.

나시: 네. 저는 노네임이라는 가명을 쓰는 엔지니어였고, 23T와 같이 행동했고… '승화 실험' 이라는 프로젝트의 데이터를 원하고 있었어요.

롤 브라이트: 승화 실험에 사용된 기계… 전화 박스

 

롤 브라이트: 맞아. 나나시 씨의 전용실에 전화 박스처럼 생긴 모형이 있지 않았던가요?

 

나시: 네. 그곳에 있었죠. 저와 관련이 있는 물건이라 전용실에 들어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내가 얻은 정보들을 최대한 종합해보았다.

 

전화 박스는 승화 실험이 이루어지는 기계.

 

즉 전화 박스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승화 실험.

 

"나 잊지 마... 잊으면 안 돼. 알겠지?"

빛이 너를 산산조각낸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승화 실험의 과정에서

 

"승화 실험은 물체를 분해시키는 실험인 것으로 아는데. 어째서 생명체를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고 가정하지?"

이미 폐기된 지 오래된 프로젝트로 알고 있다. 인명 사고가 났기 때문이다.

실험 도중에 자기가 사람을 하나 죽였을지라도

 

나시: 사고를 당한 거야… 그 뒤에 승화 실험은 중단됐고, 난 데이터베이스를 훔쳐서

 

"말도 안 돼… 네 뒤의 저건 노바디잖아. 노네임. 노바디. 너희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노바디에게 무슨 짓을"

"죽은 사람을 되살려냈다고 할 수 있지.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걸 보아하니 너도 양심이 없진 않나 봐? 뭐 자기가 죽게 만든 사람을 잊는 게 이상한 경우겠지만."

그 여자는 절대 그만 못 뒀을 거야. 실험 도중에 자기가 사람을 하나 죽였을지라도, 다른 생명을 가지고 실험했을 거라고.

 

나시: 노바디… 23T…?

 

롤 브라이트: 서서히 기억이 떠오르고 계신가 보군요. 나나시 씨.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시: 터치로 기억을 조금 보셨겠지만, 조금씩 떨어져 있는 기억들이라 아직은 확실하게 무어라 말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윤곽은 잡혔지만

 

롤 브라이트: 언젠가 모든 기억이 돌아오는 날도 올 거예요. 실제로 점점 더 많은 기억들이 돌아오고 계시잖아요.

 

나시: 네. 앞으로도 더 많이 떠오르겠죠. 히무로가 카텟 기관을 기억하고 있는데 저에게서 모든 기억을 빼앗아간 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시: 그럼 제가 기억을 되찾았을 때. 모노로그가 저에게서 앗아가려 했던 기억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알 수 있을지도 몰라요. 모노로그에게 맞설 수 있을지도.

 

롤 브라이트: …그렇지만 조심하셔야 해요.

 

나시: 맞아요. 살아남아야 기억을 떠올릴 테니

 

롤 브라이트: 그게 다가 아니에요. 당신이 기억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모노로그 씨는 당신을 제거하려 들 수도 있어요. 중요한 기억에 닿을 수 없도록

 

롤 브라이트: 23T를 부술 수 없는 것처럼. 모노로그는 규칙에 얽매여 있어요. 당신은 살인 게임의 참가자이기에 흑막의 입장에서는 어찌할 수 없겠지만, 반대로 직접적인 살해가 아니면 간접적인 어떤 방식으로라도 당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

 

롤 브라이트: 그리고 저는… 그게 두려워요.

 

옷이 몸에 스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런 상황에 귀를 기울이는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미웠다.

 

나시: …음.

 

롤 브라이트: 이제 눈 뜨셔도 돼요. 잘 참았어요. 나나시 씨.

 

눈을 뜨자 주변이 눈을 감기 전보다 한층 밝아 보였다. 그 새 눈동자 안의 어둠에 눈이 암순응된 것 같았다. 캐롤 씨는 평소와 같았지만, 어쩐지 그녀의 모습은 평소보다 조금 더 밝게 느껴졌다.

 

롤 브라이트: 저는… 조금 걱정이 돼요. 당신도 미도리카와 씨처럼 제거당할까 봐. 무서워요. 그런 이별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데

 

미도리카와. 그녀는 자신의 방에 매달려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시체를 본 순간 기절한 바 있었다.

 

만약 캐롤 씨가 미도리카와처럼. 그렇게 싸늘해진다면

 

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괜찮으세요?

 

흰장갑을 다시 낀 그녀는 내 눈가에 손가락을 대었다. 물 몇 방울이 내 피부에 묻어났다.

 

나시: 어…?

 

나는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는 걸 그제야 인식했다.

 

롤 브라이트: 울지 마세요.

 

나시: 이건 슬픈 게 아니라… 그냥 왠지 눈물이 나왔어요. 왜인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캐롤 씨의 흰 면장갑이 내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는 내 뺨에 닿고 그곳에 머물렀다.

 

롤 브라이트: 난…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요. 마유즈미 씨도. 토키와 씨도. 마찬가지예요. 모두 생존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롤 브라이트: 내가 그렇게 만들게요.

 

캐롤 씨는 강단 있게 말을 끝마치신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묘하게 비장한 아우라를 풍기는 그녀를 보고 나도 몸을 일으켰다.

 

나시: 숙소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롤 브라이트: 그럴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바로 옆방인걸요.

 

나시: 아… 맞아. 그랬죠.

 

롤 브라이트: 네. 그리고… 맞아. 크레딧으로 살 수 있는 물품 중에 심상찮은 게 있었어요. 이미 품절되었으니 개입할 도리가 없지만… 우선 조심하세요.

 

나시: 크레딧이요?

 

롤 브라이트: 예감이 좋지 않아요.

 

나는 크레딧의 항목에 들어가 새 물품이란 것을 확인했다.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음과 같았다.

 

플라잉 로봇: 200,000 크레딧 0/2

인플레이션 권리: 200,000 크레딧 0/1 

각성제: 150,000 크레딧 0/1

보급 특권: 1,000,000 크레딧 0/2

 

나시: 이게 다 뭐야…? 플라잉 로봇. 인플레이션 권리. 각성제?

이미 전부 구매된 물품이라 무엇을 파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시: 보급 특권? 뭐지. 대체?

 

롤 브라이트: 지금 생각해봤자 의미는 없어요. 중요한 건 새로운 물품이 현재 해변에 계신 분들의 상황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겠죠. 그걸 보려면 아침이 되어야 하고요.

 

롤 브라이트: 우선 오늘은 별다른 고민 없이 주무시는 편이 좋아요. 그럼 내일 봬요. 나나시 씨.

 

쪽.

 

캐롤 씨가 내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볼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우와아아아아아아! 뭐야! 뭐지! 뭐야! 무슨 일이!

 

나시: 캐… 캐. 캐. 캐롤 씨…?!

 

롤 브라이트: 후후. 좋은 꿈 꾸세요.

 

캐롤 씨는 문을 닫고 사뿐히 사라지셨지만, 그녀의 입술이 닿았던 볼에서부터 퍼지는 열은 금방 사라지지 않았다.

 

진정해! 이건 별 뜻 없어. 캐롤 씨는 외국에서 자라셨으니까… 문화가 다른 거야. 볼에 입 맞추는 게 인사인 나라도 더러 있잖아. 이것도 그냥 잘 자라는 인사야. 그냥 그게 다야

 

나시: 정말 그게 다니까 괜히 이상한 생각 말라고. 이 멍청아…!

 

잠에 드는 순간까지도 두근거림을 떨쳐내지 못했던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뒤 하루 세 끼 식량을 주고, 상황에 맞춰 적절히 유용한 도구를 주며, 그들이 시련을 통과하길 두 손 모아 기다리는 매일은 영영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두 번째 문은 첫 번째 문처럼 가까운 곳에 있지 않았다. 첫 번째 시련을 끝마친 우리는 때때로 휴식해가며 계속 걸어갔다. 밤이 되어 야영을 한 뒤 일어난 뒤에는 다시 걸었다. 그러나 우리는 육안으로 두 번째 문을 확인할 수 없었다.

기와라 우시오: 히무로이드 씨. 천리안으로도 문이 안 보여?

무로 시라베: 안 보여. 내 시력이 그 정도로 뛰어나지는 않아.

이토 유즈루: 히무로한테 짓는 별명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기와라 우시오: 까도 까도 끝이 없으니까 그렇죠.

유즈미 나데시코: 그리고 두 번째 문까지는 가도 가도 끝이 없고?

기와라 우시오: …얘 이제 보니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아는 타입이네. 개그 유망주 마유즈미가 나타났다. 탑에 있는 새끼들 다 뒤졌다!

얼마나 더 나아가야 두 번째 문을 볼 수 있는지가 명확하지 않았기에, 우리의 의욕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언제까지 짠 냄새가 나고, 밤에는 추우며, 만족스러운 식사도 할 수 없는 해변을 나아가야 할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루. 이틀? 어쩌면 일주일?

가재 괴물들의 노래는 잠시도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가 그것들과 가까울 때도, 멀 때도, 언제나 단조로운 질문 소리는 우리의 귀를 후벼 팠다. 아름다운 성악조차 세 시간 동안 들으면 질리는 법인데 우리는 사흘 동안 질문 소리와 함께였다.

기와라 우시오: 데드. 어. 체크?

"데드. 어. 체크?"

기와라 우시오: 디드. 어. 치크?

"디드. 어. 치크?"

기와라 우시오: 덤. 어. 첨?

리 레이코: 닥쳐라.

하기와라가 피곤에 찌든 얼굴로 질문 소리의 패턴을 파악했다. 그러자 모두의 피로감은 두 배가 되었다. 입 닥치라는 모리의 말을 끝으로 하기와라의 입에선 질문이 더 나오지 않았다.

나이토는 가재 괴물들에게 또 다른 반응을 보였는데, 잠시 전진을 멈추고 모두 휴식을 취하는 동안 그는 맨손으로 가재 괴물을 잡아 손질해 먹겠다고 선언했다.

이토 유즈루: 아주 맛있게 먹어치워서. 우리한테 접근해선 안 된다고 똑똑히 알려줘야겠어! 그럼 아가리를 좀 닫겠지!

가미 토가: 그걸 이해할 정도의 지성이 있는 생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응원해 드리겠습니다.

이토 유즈루: 잘 봐 둬.

나이토는 그대로 바다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리 레이코: 스스로의 공포를 극복했나. 승부사?

이토 유즈루: 바다가 무섭지 가재가 무섭냐. 그리고 발 정도 담그는 건 문제없어.

나이토는 해변으로 얇게 들이쳐오는 바닷물에 발을 넣으며 말했다. 신발이 젖지도 못할 정도로 얕아서 파도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였으나, 나이토는 의기양양하게 팔을 옆으로 벌렸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는 듯한 동작이었다.

이토 유즈루: 봐. 멀쩡하지!

리 레이코: 퍽이나.

모리의 말처럼. 그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는 가재 괴물을 잡기 위해 깊은 바다로 얼굴을 돌린 순간 굳어져선 사라져 버렸다.

이토 유즈루: … 좋아. 가 보자고. 자

유즈미 나데시코: 나이토. 무리하지 말고 나와도 되는데…?

이토 유즈루:  뭘 무리해! 난 무리 안 해! 여유롭다고!

나이토는 주먹만 한 크기의 돌을 손에 쥐고 해변의 가재 괴물들을 돌아보았다. 한 개체를 향해 성큼성큼 그가 다가가던 때에. 느닷없이 그 개체가 나이토를 향해 빠르게 기어갔다.

솔직히 말해. 위협적이라기보단 불쾌하게 느껴지던 생물이 그런 속도를 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위협을 감지한 뒤 먼저 선수를 취하려고 하는 동물적 본능 때문인지. 물살을 거세게 가르는 소리까지 내가며 가재 괴물은 나이토에게 커다란 집게발을 가져다 대었다.

나이토는 놀란 기색을 내며 옆으로 몸을 물린 뒤 가재 괴물의 머리에 돌을 던졌다. 머리가 깨지며 질문 소리를 내지 못하게 된 가재 괴물은, 몸을 떨다가 축 늘어졌다.

이토 유즈루: 썅. 이 자식들 원래 이렇게 빨랐어?

무로 시라베: 이제 돌아오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죽은 가재 괴물을 나이토가 들어 올리자. 머리에서 빠져나온 체액이 바닷속으로 뚝뚝 떨어졌다. 우리 모두는 그 순간 볼 수 있었다. 다른 가재 괴물들이 체액이 떨어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스멀스멀 기어 오기 시작하는 것을.

나는 가재 괴물들의 생태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했다. 집게발의 크기. 미약하지만 언어 발달의 가능성. 그리고 빠른 움직임으로 보아 저들은 타고난 포식자였지만, 시체 청소부로서는 그보다 더 타고났을 게 분명했다. 상어가 피 냄새를 맡듯이 저들은 시체와 부상의 냄새를 맡고, 약해진 사냥감을 급습하는 것에 특화된 생명체였다.

기와라 우시오: 와. 개징그러! 큰일 나기 전에 빨리 오셔!

이토 유즈루: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나이토는 머리가 뭉개진 가재 괴물을 들고 우리에게로 돌아왔다. 모닥불을 작은 크기로 하나 피우고 가재 괴물을 나뭇가지로 꿰뚫은 뒤. 나이토는 가재 괴물을 불에 구웠다.

전부 구워진 가재 괴물의 고기를 시식해 본 사람들의 평은 다음과 같았다.

이토 유즈루: 아니 이거 진짜 맛있는데?!

기와라 우시오: 완전 물건이야. 존나 기똥차! 야가미 미각이 이상한 줄 알았는데 맛잘알이었어!

유즈미 나데시코: 우. 우와… 나 이런 거 처음 먹어봐!

그들은 앉은자리에서 가재 괴물을 다 먹어치웠고, 이후 가재 괴물을 보면 피하기보다 기대를 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것들을 바라보곤 했다.

이토 유즈루: 모리. 히무로. 너희도 먹어 봐. 진짜 맛있어!

리 레이코: 복용 당시에는 괜찮을지 몰라도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으니 너희끼리 먹도록.

유즈미 나데시코: 그러지 말고 조금만 먹어 봐. 히무로 너도!

무로 시라베: 나도 사양할게.

기와라 우시오: 왜 안 먹는겨? 이렇게 맛있는데. 냠냠.

리 레이코: 난 미각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너희는 다르지. 고로 너희가 섭취하는 편이 더 많은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

무로 시라베: 나도 마찬가지야.

기와라 우시오: …이거 뭐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던 "엄마랑 아빠는 너희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 같은 느낌을 모리랑 히무로이드한테서 느끼다니 이런 좆같은 일이?

기와라 우시오: 그럼 저 둘 대신 너라도 먹을래?

하기와라의 물음을 들은 야가미는 고개를 저었다.

가미 토가: 전 예전에 먹어 봤으니 여러분들끼리 드세요. 지금은 입맛이 없군요.

기와라 우시오: 알겠어요 아빠.

가미 토가: 소름 끼치는 소리 마세요.

그런 소일거리가 있었음에도,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모두의 눈에 서서히 피로감이 떠올랐다. 첫 번째 시련에서의 실패가 사기 저하에 큰 영향을 끼쳤다. 목숨의 위협을 받아가며 미도리카와를 되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한 명에게 가로막혔다.

두 번째 시련이 첫 번째 것보다 쉬울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첫 번째 시련에서 우릴 가로막았던 카이다 쿠로하가 어디에서 나타날지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임하는 건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끄응… 낑… 헤엑

긴 고행이 익숙지 않은 듯 다리 통증의 기색을 보이던 마유즈미는 거친 숨소리를 숨길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녀만큼 지치지 않았을 뿐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이토는 바다를 보지 않으려 눈을 게슴츠레 뜬 채 귀를 막고 있었고, 하기와라는 욕설을 내뱉을 힘도 없는 듯이 터덜터덜 걸었다. 야가미 또한 영혼의 총량이 줄어든 사람처럼 몸에 기운이 없었다. 모리는 그나마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 일종의 허세나 의지력이 만들어낸 산물일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무로 시라베: 1시간 30분 동안 계속 걸었지. 이쯤에서 휴식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 다들?

기와라 우시오: 걍 나 죽여. 영원히 휴식할래.

가미 토가: 점점 휴식 사이의 간격은 짧아지는데 휴식 시간은 길어지는군요. 그렇지만 일단 휴식합시다.

기와라 우시오: 그래요. 아빠.

 

가미 토가: 소름 끼치는 소리 말라고 분명 말했습니다.

 

리 레이코: 다시 숲으로 들어가 식수를 보급하도록 한다.

 

우리는 셋으로 인원을 나누었다. 하기와라와 야가미, 나이토와 모리, 마유즈미와 나였다.

 

가미 토가: 왜 하필 이렇게 나누어지는지

 

기와라 우시오: 카이다랑 마주칠 시 싸울 세 명이랑 버스 타는 세 명이 있는데. 모리랑 마유즈미가 둘 다 너를 싫어하잖아. 사실 나도 너 싫어. 걍 참는 거지.

 

가미 토가: 고맙게 됐군요. 물소리나 찾읍시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찾아. 나와 마유즈미는 숲을 가로질러 들어갔다. 아무리 보아도 몸을 숨기기에 좋은 장소였다. 우거진 나뭇가지 위에서 카이다가 누굴 덮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에 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로 시라베: 힘들지는 않아. 마유즈미?

 

유즈미 나데시코: 이제 조금만 있으면 쉴 수 있는데 뭘… 히무로 너야말로 힘들잖아. 계속 주위 두리번거리고. 어젯밤엔 잠도 제대로 못 잤으면서.

 

무로 시라베: 나는 원래 잠자리를 가리지 않아. 마음만 먹으면 선 채로도 잘 수 있으니 괜찮아.

 

유즈미 나데시코: …진짜? 한 번 보고 싶은데 나중에 보여줄 수 있어?

 

무로 시라베: 해변에서 나간다면 한 번 보여줄게. 탑에서 나간다면 얼마든지 보여주고

 

유즈미 나데시코: 약속한 거야.

 

무로 시라베: 그래. 약속.

 

그 뒤로는 잠시 대화가 끊겼다.

 

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혹시 내 얘기 잠깐만 들어줄 수 있어?

무로 시라베: 무슨 얘기를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일단 말해 봐.

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네가 저번에 한 얘기랑 관련이 있는 건데.

이토 유즈루: 다들 여기로 모여어어!

 

리 레이코: 승부사. 큰 소리 마라. 첩자가 듣는다.


유즈미 나데시코: 거기로 모이라고오오오?!

마유즈미가 나이토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외쳤다.

 

리 레이코: 제기랄.


청각을 열어뒀다는 것을 감안해도 나이토와 모리는 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나중에 다시 물어볼게. 지금은 빨리 가자!

 

마유즈미가 날 앞지르고는 나이토와 모리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나는 등 뒤를 살피며 그녀를 따랐다.

 

무로 시라베: 짧은 용건이라면 지금 짧게 말해도 돼. 빨리 대답할게.

 

유즈미 나데시코: 알겠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며누와아아아아아아!

 

마유즈미의 입이 떡하니 벌어지며 그녀의 말이 이상하게 늘어졌다.

 

무로 시라베: 대체 무슨 일

무로 시라베: 동감이야. 마유즈미.

그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했기에 나는 그녀에게 동의했다.

무로 시라베: 연못이다.

 

초록색 안의 파란색 위에는 작은 갈색. 그보다 위에는 흰색.

 

초록은 잡풀과 땅. 파랑은 물. 작은 갈색은 수면 위로 드러난 큰 바위. 그리고 흰색은 상류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

 

몸을 담글 수 있을 정도의 넓고 깊은 연못이 우리들의 앞에 놓여 있었다. 물소리 치고는 상당히 격렬하다고 생각했는데 폭포일 줄이야.

 

유즈미 나데시코: 예쁘다! 진짜 예쁘다! 무슨 그림 같아! 아. 시라도 한 편 쓰고 싶어!

 

가미 토가: 이건 정말 대단한 발견이군요.

 

기와라 우시오: 개쩐다. 썅!

 

야가미와 하기와라 또한 합류한 뒤 제각각의 방식으로 감탄했다.

 

리 레이코: 이 연못은 넓다. 허리까지는 담글 수 있고, 물도 깨끗하다. 몸을 씻어도 되고, 식수로 활용해도 되겠지.

 

기와라 우시오: 세상에 씨발. 드디어 씻는구나!

유즈미 나데시코: 드디어 씻을 수 있는 거야? 드디어?!

이토 유즈루: 좀 깊은데… 그래도 이제 좀 살겠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정상이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모닥불 옆에서 노숙을 한 결과. 사흘째 오후가 되었지만 우리의 체감 피로는 씻지 못한 지 일주일은 지난 것과 비슷해졌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지도 못했고, 바다를 옆에 두다 보니 얼굴을 씻는 것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그런 우리의 앞에 몸을 담글 수 있는 연못이란. 거역할 수 없는 오아시스였다.

가미 토가: 이건 정말 대단한 발견이군요. 큰 일을 하셨습니다. 나이토 씨.

리 레이코: 식수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다. 물고기가 사는 걸 보아 누군가가 독을 타진 않은 모양이군.

무로 시라베: 독을 탔다가 누가 먹기라도 하면 카이다는 곧바로 검정이 돼. 대상을 특정하지도 못하는데 그런 도박은 할 수 없어. 그럴 필요도 없고.

무로 시라베: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충분히 물을 확보하고, 몸을 씻도록 하자.

리 레이코: 나는 씻지 않을 테니 그동안 내통자가 접근하지 않는지 계속 지켜보겠다.

이토 유즈루: 더러운 소리 말고 씻어. 임마!

 

나이토가 기겁한 채 소리쳤다.

 

리 레이코: 마음대로 씻지 못하는 생활은 익숙하다. 사양하겠다.

가미 토가: 몸을 씻는 일은 위생 상태를 좋게 하니. 공리를 증진시키지 않겠습니까?

리 레이코: 내가 감시를 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공리를 증진시킨다.

기와라 우시오: 씻으라니까 뭔 개소리야! 어쩐지 조금 이상한 냄새가 난다 했더니 너 원래도 잘 안 씻냐?

리 레이코: 냄새가 난다고 했나?

모리는 하기와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로 시라베: 그래. 나.

유즈미 나데시코: 아니야. 모리. 냄새 안 나! 오히려 좋은 냄새. 아니 향기가

리 레이코: 악취가 나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어쩔 도리가 없지. 몸을 씻도록 하겠다.

기와라 우시오: 아 ㅋㅋ 공리는 못 참지 ㅋㅋ

 

 



몸을 씻는 것은 지독히 개인적인 일이다. 내가 아는 바로는 그랬다.

그렇기에 우리는 특이한 방법으로 카이다의 출현을 대비했다. 커다란 바위를 중심으로 두고 함께 몸을 씻기로 한 것이다.

바위는 연못의 조금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기에. 과연 목욕을 하는 동안 총을 소지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카이다의 습격을 상정에 둔 이상 언제나 발포 준비를 갖춰야 하지만, 동시에 어떤 불의의 사고가 총을 앗아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우선 나를 제외한 5명이 바위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여 몸을 씻은 뒤, 그 뒤에 내가 씻는 것으로 합의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바위 뒤에 숨었어. 이제 들어와!

리 레이코: 조용히 말해라. 서예가.

유즈미 나데시코: 조용히 말하면 못 듣잖아.

기와라 우시오: 사인 떨어졌다! 때가 왔다!

뭍에 옷을 벗어둔 하기와라는 물에 뛰어든 뒤 환호성을 내질렀다.

기와라 우시오: 우하하하학! 존나 시원해! 살 것 같다 이제! 와우!

가미 토가: 목소리를 죽이세요. 카이다 씨가 들으면 우린 알몸으로 그녀에게 맞서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기와라와 야가미는 가슴께까지 오는(야가미에겐 갈비뼈까지 오는) 수면을 헤치고 들어가 바위에 몸을 기댔다.

리 레이코: 그럼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겠지.

기와라 우시오: 최신형 히무로이드가 총 들고 보초 서는데 카이다가 온다? 오면 시련 돌입할 때 오겠지. 걔가 여기 있으면 지금 씻고 싶어서 안달이나 내고 있을걸. 나이토! 바위로 오라니까 뭐 해!

나이토는 물속에서 한 발자국씩을 매우 천천히 내딛고 있었다. 그의 몸은 잔뜩 굳어서 그만 물속으로 잠겨 버리지는 않을까 우려가 될 정도였다.

이토 유즈루: … 썅…! 후욱… 후… 발이 닿아… 발이 닿아. 괜찮아

가미 토가: 진정하세요. 이 연못에서 익사할 위협은 없습니다.

리 레이코: 이 정도 깊이의 물에선 서예가도 시계공도 안 빠져 죽는다. 걱정 말고 오도록 해.

유즈미 나데시코: 모리 너 날 갑자기 왜 끌어와!

이토 유즈루: 그게 말이나 쉽지. 젠장

나이토는 지속적으로 익사의 위험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표본을 더 집계할 필요도 없었다. 트라우마 때문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물에 빠져서 뒤질 뻔했다. 됐냐?

그렇지만 그게 사고로 벌어진 일이라면, 저 정도의 트라우마를 보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리 레이코: 도움이 필요한가. 승부사?

이토 유즈루: 무슨 도움?

첨벙. 첨벙.

유즈미 나데시코: 모리. 어디 가?

리 레이코: 할 일이 있다.

이토 유즈루:  야. 지랄 마!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멈춰! 너 지금 차라리 안 씻고 말 것 같은 일 꾸미고 있지?!

리 레이코: 씻어라. 그렇지 않으면 악취를 풍기게 될 거다.

이토 유즈루: 알겠다고. 내가 알아서 가겠다고. 뭐든 좋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

두 사람은 여전히 앙숙이었다. 다만 모리가 일방적으로 나이토를 대하는 것만큼은, 앙숙에서 악우를 대하는 듯한 태도로 변했다. 나이토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 차이는 컸다.

분명 칸트주의라고 그를 한심하게 여겼던 모리가 아니었던가? 나이토의 행동이 공리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 그를 인정한 것이라면, 탑의 다른 이들 또한 모리에게서 호의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리 레이코: 그럼 됐다.

이토 유즈루: 기분 탓인가? 계속 쟤랑 이상하게 얽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야.

기와라 우시오: 운명의 붉은 실로 얽혀 계신 가봐요오옹.

카처럼?

빡. 첨벙.

기와라 우시오: 아아아악! 존나 아파아!

유즈미 나데시코: 나이토! 그럼 못써!

이토 유즈루: 아니 이걸 어떻게 참으란 말이야?! 너희는 이런 말 듣고 참을 수 있냐!

리 레이코: 내 몫도 부탁하지. 승부사. 심각한 부상을 입히지는 마라.

이토 유즈루: 그렇단다. 이 새끼야. 어디에 맞을래?

기와라 우시오: 아 진짜 잘못했어요! 진짜 잘못했어요! 봐주세요!

가미 토가: 하아아

크게 울리는 야가미의 한숨을 듣자. 카이다에게 들키지 않고 몸을 씻는 일은 이미 불가능해졌다는 직감이 들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물이 진짜 시원해. 히무로도 빨리 씻고 싶을 텐데

 

리 레이코: 그렇다고 해도 첩자를 견제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을 거다.

 

가미 토가: 습기는 총을 해친다고 하지만, 어떻게든 물에서 총을 멀어지게 할 방법은 없었을까요?

 

기와라 우시오: 그냥 단순히 쟤가 0등 시민이라 열등한 애들 땟국에는 몸 담그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지.

정적이 흘렀다.

기와라 우시오: 아 조크야 조크. 진짜 총이 젖을까 봐 저러는 거면 너무 독종이잖아. 그리고 아마 이 대화도 듣고 있을 테니까 이건 뒷담 아니다? 저렇게 떨어져 있고 폭포 소리도 있지만 저 친구에겐 우리 말이 들릴 거야.

가미 토가: 히무로 씨라면 아마 그럴 겁니다.

기와라 우시오: 정말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뭐 0등 시민이 이유겠지.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하자고. 그거 말고 달리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리가 저번에 몸수색할 때 윤곽을 잠깐 봤는데 남자의 자존심도 정말 대단

유즈미 나데시코: 응?

기와라 우시오: …아니다. 이 얘기는 취소. 없던 걸로!

이토 유즈루: 뭐라는 거야! 너는 그 사이에 그걸 봤냐? 에라이 이 새끼야!

기와라 우시오: 이 바위 너머에는 그걸 직접 만진 아가씨도 있어.

유즈미 나데시코: …?

 

리 레이코: 은밀한 신체부위 말이다. 서예가.

 

유즈미 나데시코: 그… 그게 무슨…?! 대체 언제!

 

가미 토가: 꽤 오래전이었죠. 아마… 히무로 씨의 전용실이 개방된 다음 날이었던가요.

 

유즈미 나데시코: 그. 그렇게 빨리

 

마유즈미가 말끝을 흐렸다.

 

리 레이코: 저속한 상상 마라. 몸수색을 했을 뿐이다.

 

기와라 우시오: 그치만 만진 건 팩트지.

 

리 레이코: 그때 당시에는 그래야만 했다. 프로파일러는 당시에 신뢰할 수 없었다. 지금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지만, 당시에는 더했다. 몸수색을 해야만 했다. 탐사를 나간 이들이 습격당해선 안 되니까.


이토 유즈루: 중간부턴 내가 대신하긴 했지만 솔직히 보는 입장에선 깜짝 놀랐다니까. 생각해보니 얘 아주 상습범이야. 아침에 일어났는데 갑자기 내 방에도 쳐들어오고

 

리 레이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네가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인지 조사해야만 했으니. 그리고 전에도 말했다시피, 네 몸은 자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다.

 

기와라 우시오: 아니 시발 둘이 진도를 어디까지…?

 

이토 유즈루: 넌 지랄 마! 그리고 옷을 다 벗었는데 어떻게 자부심을 느껴!

 

리 레이코: 왜 그렇게들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군. 거세라도 당했나? 몸을 내보이는 것이 부끄럽다는 발상은, 그 수치심은 학습의 결과일 뿐이다. 통제하기 좋도록 구성원들을 규범 안에 가둬놓고 태초의 두 벌거벗은 원시인과 뱀의 설화로 억압한 결과지.

이토 유즈루: 아니 그럼 매일 알몸으로 다니기라도 하라고?

리 레이코: 그게 아니다. 만약 네 행동을 막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네가 할 일은 그 무언가를 부수는 일뿐이라는 것이지. 설령 그게 남근을 내보이는 일일지라도, 그래야만 한다면 저지를 강단이 네겐 필요하다.

가미 토가: 이 얘기 굳이 계속하셔야만 하나요?

 

야가미가 불편한 투로 말했다.

 

이토 유즈루: 그래. 관두자. 관둬! 아 진짜 열 받네… 다들 왜 이상한 문제가 하나씩 있는 거야?

 

리 레이코: 화는 나더라도 공포는 사라졌지 않은가.

 

이토 유즈루: 자기가 다 의도한 것처럼 말하고 자빠졌네… 안 믿어 이것아.

 

리 레이코: 그건 네 자유지.

 

기와라 우시오: 그보다 지금 한 분 말수가 되게 적어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이야?

유즈미 나데시코: (뽀골뽀골뽀골)

리 레이코: 서예가. 할 말이 있다면 물속에 입을 담그는 일은 그만둬야 할 거다.

 

유즈미 나데시코: 하…할 말 없어.

 

기와라 우시오: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에에에?

 

유즈미 나데시코: 없대도! 그보다 빨리 씻자. 수다 그만 떨고!

 

가미 토가: 하기야 여기서 시간을 낭비해서 좋을 게 없군요. 마유즈미 씨의 말대로 합시다.

 

기와라 우시오: 그래. 좋아. 해변에서 탑으로 돌아가서 이바라랑 합류하면. 그때부터 진짜 추궁의 시작이다. 우하하하하

 

리 레이코: 입 닥치고 씻어라.

 

 

 

 

 


목욕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도중 물에 띄울 수 있는 플라스틱 대야가 내 근처에 떨어졌다. 누군가가 후원을 보낸 모양이었다.

 

설마 이 곳마저 보이고 있는 건가? 애초에 이 연못뿐만 아니라 숲에서 보았던 모두의 볼일이 생중계되었다면, 참 낭패가 아닐 수가 없었다. 모노로그가 적당히 편집했겠지만… 아닐 수도 있었다.

 

후루미나미가 내 신체를 엿볼 가능성을 생각하니 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후루미나미가 보냈을 가능성이 높은 대야에도 손을 대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미 파이어스틸에서 빚을 진 겸 이용할 것은 전부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다른 이들이 물 밖으로 나와 수건으로 몸을 말리는 동안, 나는 대야를 물에 띄우고 위에 습기를 흡수할 수 있는 부싯깃 따위를 놓은 뒤. 그 위에 총을 올렸다. 아마 습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총이 순식간에 망가질 일은 없을 터였다.

대야를 바위 쪽으로 밀며 천천히 나아가자. 느닷없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즈미 나데시코: 나 까꿍 할 거야. 놀라지 말라고 미리 말할게?

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유즈미 나데시코: 하나. 둘. 셋. 까꿍!

마유즈미가 얼굴의 일부분조차 보여주지 않은 채 살짝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무로 시라베: 왜 남았어? 아직 다 씻지 못한 거라면 물 밖에서 기다릴게.

유즈미 나데시코: 아. 그런 건 아니야! 이미 다 씻었어! 머리카락도 예전의 윤기를 되찾았다구. 찰랑찰랑. 머리가 길어서 오래 씻어야 한다고 하니까 다들 납득해주더라.

무로 시라베: 그럼 남아있을 이유가 없을 텐데.

유즈미 나데시코: 사실 그냥… 히무로 너 혼자 씻으면 적적하잖아. 내가 말동무가 돼 주려고 남았지. 히힝.

 

마유즈미는 천진하게 웃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역시 이 누나밖에 없지. 히무로. 그치? 후흥!

무로 시라베: 누나라고?

마유즈미는 묘하게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챈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아 내가 정말 누나라는 게 아니라. 이거 이바라랑 하기와라한테서 배운 건데. 뭐라고 할까… 자신이 네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할 때 스스로를 누나나 언니. 형이나 오빠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더라고.

무로 시라베: 그래. 누나.

바위 너머에서 마유즈미의 악 쓰는 소리가 들리자 조금 유쾌한 기분을 느꼈다. 전신욕이 내 기분에 영향을 미친 것일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무로 시라베: 정말 우리 또래 맞아? 동안인 20대가 아니라?

유즈미 나데시코: 아니래두 그러네!

무로 시라베: 나한테 만큼은 말해도 돼. 무덤까지 비밀을 지키겠어.

유즈미 나데시코: 불길하게 무덤 같은 소리 말고

무로 시라베: 그리고, 일전에 하다 말았던 할 얘기란 다른 이들이 들어서는 안 되는 용건인가 봐?

누군가와 말동무가 되고 싶다. 저런 실없는 이유만으로 행동할 사람은 아마 없을 터였다. 마유즈미에겐 엉뚱한 면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그랬다. 당연한 추론이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들어서는 안 되는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한테 들려주고 싶지는 않아.

무로 시라베: 그렇다면 할 일은 명확하지. 아까 못 한 얘기를 하자.

마유즈미 쪽에서 질문이 나오지 않자 나는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나는 대야가 물에 가라앉거나 떠내려가지 않도록 두 손으로 잡은 뒤. 내 머리를 수면 안으로 넣었다.

차가운 물이 몸에 닿자 근육이 굳었으나, 몸에 누적된 피로는 점차 녹듯이 사라졌다. 다시 물 밖으로 머리를 꺼낸 뒤 나는 얼굴에 묻은 물기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무로 시라베: 후우

그 사이에 마유즈미는 할 말을 정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그… 우리가 지금 바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목욕하고 있잖아.

무로 시라베: 물리적으로 그렇게 분리되어 있지.

유즈미 나데시코: 지금 무슨 생각 해?

마유즈미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무로 시라베: 두 번째와 세 번째 시련에서는 카이다가 우리에게 개입할지도 몰라. 카이다는 지금도 우리의 지근거리에 있을 거야. 그렇지만 첫 번째 시련에서는 개입하지 않았지, 우리를 관찰한 거야. 곧 관찰한 바를 토대로 우리를 찾아올 테고.

유즈미 나데시코: 아.

무로 시라베: 미도리카와를 데려와야 하는 이상. 그녀와 친했던 야가미를 시련에 계속 투입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설득이 쉬워질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가 날뛰거나 우릴 배신할 시 제압할 인원은 반드시 필요해. 나이토 혹은 내가 되겠지.

무로 시라베: 또 두 번째, 세 번째 시련의 미도리카와에도 시련 속 카이다가 개입한다면 총을 가진 내가 맞서는 편이 시련 참여자들의 생존율을 올릴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나와 야가미는 시련에 우선적으로 참여해야 해.

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넌 무슨 생각을 하지?

유즈미 나데시코: 나? 나는 지금… 여러 가지 생각 중이야.

 

무로 시라베: 간단하게 말해 줘.

 

유즈미 나데시코: 탑에 있는 사람들. 캐롤 씨. 나나시. 토키와. 이바라… 이 탑에서 나갈 방법, 옛날 생각이라던가. 집 생각… 네 생각도 물론 하고. 친구잖아.

 

유즈미 나데시코: 집 생각… 맞아. 집이랑 우리 가족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 요즘은.

 

가족

 

감시자로 길러지던 또래는 전부 죽었다, 재단의 연구소는 파괴되었다, 기관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도 그들은 나와 동료일 뿐 가족은 절대 아니다.

 

마유즈미가 어떤 기분일지는 알 수 없었다. 공감하기 이전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내겐 결여된 것이 많고 결여되었으나 이해하려 애쓸 수 있는 것도 많지만, 나는 가족만큼은 도무지 다른 이들과 같은 시각으로 볼 수 없었다.

 

몸은 바위를 사이에 둔 채 맨몸을 드러내고 같은 물에 몸을 담그고 있을지언정. 내가 진정 그녀에게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소외감이 다른 로로 하여금, 하나의 거대한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막는 장벽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문득 나와 마유즈미 사이의 바위가 산처럼 크고 높아진 것처럼 느끼던 도중. 마유즈미가 말을 이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네가 이 탑이 가상현실일지도 모른다고 한 거 말이야.


유즈미 나데시코: 하기와라한테 자세히 설명을 들었는데, 가상현실은 지극히 현실로 느껴지는 인공 환경이래. 우리가 스스로 그렇게 느낄 뿐이지. 실제로는 다르대.

무로 시라베: 맞아.

유즈미 나데시코: 모리 말로는 우리가 스스로를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할 뿐이지. 현실의 우리는 그러지 않을지도 모른댔어. 기억이 삭제되었을 뿐이랬어.

유즈미 나데시코: 그럼… 마유즈미 본가가 정말 불탔을지도 모른다는 거 아니야?

 

유즈미 나데시코: 마유즈미 본가가 활활 타는 일은 없어. 시종만 몇 명인데 우리 집을 그냥 타게 냅두겠어? 여기서 나가기는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마유즈미 본가는 타지 않으니까 난 안 흔들려. 이건 당연한 이치라고. 날 뭘로 보는 거래! 난 이런 거에 안 속아!

 

무로 시라베: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 가능성이 무척 높았다. 대몰락은 모든 문명 체계를 반달리즘의 대상으로 지목했다. 절망 그 자체 말고는 모두 절망시켜야 할 대상으로 치부되었다. 심지어는 더 큰 절망을 추구하며 극단적으로 치닫는 자들도 많았다.

 

마유즈미 가문이 강대했다면, 그리고 그들이 예술가들이었다면 대몰락의 여파에서 절대 무사할 수 없었을 터였다. 그녀에게 말해줄 수는 없었지만.


유즈미 나데시코: 나. 안 믿겼어. 믿을 수가 없었어. 왜냐면… 말이 안 돼서. 난 거기서 평생을 살았는데, 거기가 아니면 테레비에 나오는 게 내가 아는 곳의 전부였는데. 불에 탄다니

 

유즈미 나데시코: 그런데 정말 이 곳이 현실이 아니라면, 이미 마유즈미 본가는 탄 지 오래일 수도 있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뿐…

 

바위 너머에서 훌쩍거림이 들려왔다.

 

나는 차마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었다.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위로는, 그저 울음소리를 멈추려는 속 빈 수단에 불과할 터였다. 나는 친구에게 그런 것을 주고 싶지 않았다. 마유즈미 본가가 무사할 거라는 거짓말을 지어낼 수도 있겠지만, 그녀를 속이던가 이후에 더 큰 충격을 안겨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그녀에게 뭘 줄 수 있지.

 

아무것도 없었다.

 

공포. 충격. 동요. 당황. 현실 부정. 수용. 불안. 결과는 알았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경위로 그것을 느끼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족을 사랑했기 때문인가? 살던 터전에 애착을 느꼈기 때문인가?

 

내가 마유즈미에 대해 과연 무엇을 아는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결괏값은 도출할 수 있을지언정 그 값을 어디에 적용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단지 마유즈미의 곁에 머무른 것일 뿐.

 

유즈미 나데시코: 흑정말… 정말 마유즈미가 몰락해 버렸다면…

"끔찍한 일이야."
"정말 잘 된 일이야."

 

순간 그녀의 말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그건 기분 탓일 뿐이었다. 마유즈미는 '몰락해 버렸다면…' 까지밖에 말하지 않았다.

 

적어도 귀로 듣기에는 그랬다.

 

 

 

 

 

유즈미 나데시코

 

초고교급 서예가. 특기는 글씨를 통해 글쓴이의 정보를 알아내는 일이다. 글쓴이의 인격과 의도마저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한 기예이다.

 

마유즈미는 억압적이고 과보호적인 가정에서 자라났다. 다도, 서예, 식사, 의복, 목욕, 수면에 특별한 규칙이 있을 정도라면 그녀가 이 탑에서 혼란을 느끼는 이유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캐롤이 마유즈미에게 도움을 줘 다행이다.

 

나는 미도리카와의 신분을 위조하는 과정에서 그녀를 끌어들이고 말았다. 마유즈미는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말했지만 역시 후회가 든다. 그녀는 스스로를 무능하고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듯 보인다. 사실이 아니다.

 

그녀는 내가 이 탑에 온 이래. 처음으로 사귄 친구다. 언젠가 그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길.

 

마유즈미의 가문은 그녀가 태어나기 전임에도 그녀의 출생을 신고했다. 그녀는 스물 다섯살의 신분이지만, 실제로 그녀는 나의 또래다.

 

하나의 지성체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는 존재로 자라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그러면서 동시에 그런 가족을 사랑하려 애쓰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안 체를 하고 그녀에게 말을 얹을 수가 없다.

 

대몰락이 그녀의 가문을 앗아갔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과연 내가 해줄 수 있을까?

 

아니. 지금의 시점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마음의 짐을 덜려는 나약함에 불과했다. 모든 이들의 생존을 위해 그들을 기만해왔다면, 앞으로도 그래야만 했다.

 

설령 나 자신의 과오에 잠겨 죽는다고 해도.

 

 

 

 

호감도 측정

마유즈미의 호감도: 24

-50=원수 / -30=앙숙 / -15=상극 / 0=무관계 / +15=친구 / +30=연인 / +50=배필

 

 



히무로이드


2챕터는 나나시 중심으로 가는 챕터가 될 줄 알았는데 쓰다 보니까 후원자들은 경주마들 구경하고 물품 지원해주고 경주마들은 살아남기 위해 뛰는 입장이니까 얘들에 더 중점이 쏠리게 되네요

그래도 나나시 분량은 아직 죽지 않았다구~

단크 타워 방문자수가 마참내 10000명을 넘어서 오우~ 좀 신나는데 어디에 단크 타워 대회라도 열어볼까 생각 중입니다

 

커미션 나온 애들 말고 와꾸나 디자인 제시도 안 해놨으면서 뭔 개조또 말도 안 되는 걸 구상하고 있냐… 하는 문제 때문에 일단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돈부터 모아야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