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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2

더 단크 타워 챕터 2 - 13

by 도타싫어! 2021. 7. 22.

 

 

나시: 노바디가 아니라고?

 

내 기억 속 나는 분명 23T를 노바디라는 사람인 것처럼 대했는데

 

그럼 여기 오기 전의 나는 완전히 헛다리만 짚으면서 산 거야?

 

나시: 그… 미안해. 내가 오해를 했나 봐.

 

23T5U130: 괜찮아. 네가 노바디라고 여기고 싶다면 노바디라고 여겨도 좋아. 그렇지만 둘 중 뭐냐고 묻는다면 난 노바디가 아닐 뿐이야.

 

나시: 으음?

 

23T는 작게 한숨을 내쉬는 듯한 소리를 냈다.

 

23T5U130: 그래. 네 입장에선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을 테니까… 잠깐 날 따라와 줘.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나시: 어디로 가는 건데. 23T?

 

23T5U130: 내 전용실.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나와 23T는 계단을 오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23T5U130: 너도 경험해 봤겠지만, 너는 기억을 완전히 잃은 게 아니야. 시냅스가 끊긴 것처럼 연결고리가 없을 뿐이야.

 

나시: 맞아. 그렇게 느꼈어. 계기만 있으면 충분히 모든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처럼

 

23T5U130: 맞아. 그렇지만 네가 자연스럽게 모든 기억을 떠올리는 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왜 이제야 기억을 되찾은 건지 후회가 될 정도로 늦은 시간이겠지.

 

23T5U130: 그러니 오늘은 기억을 떠올리는 일을 인위적으로 발생시키려고 해.

 

23T가 전용실의 문을 열었다.

 

23T의 전용실 또한 내 전용실처럼 기계로 넘쳐났다. 일종의 연구실이나 실험실처럼 보였다. 여러 모형들. 기계들. 전부 친숙했다. 나와 노바디는 같이 일했으니까 환경이 비슷한 거구나… 하고 스스로 납득하던 나는. 전용실에 놓여 있는 그 물체를 보자 기피감에 몸을 잠시 움찔했다.

 

23T5U130: 놀랐어?

 

나시: 전화 박스

 

나는 멍하니 전화 박스에게로 다가갔다.

 

23T5U130: 모형이라 작동은 안 돼. 네 것과 같아.

 

나시: 이 안에서

 

빛이 너를 산산조각낸다.

 

내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게 느껴졌다. 

 

나시: 이 안에서. 이 안에서… 빛이. 아아… 빛이 너를

 

23T5U130: 많이 힘들어?

 

23T가 내 어깨에 기계 손가락을 대자 차갑고 서늘한 느낌이 나를 깨워 주었다. 나는 눈을 끔뻑이며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23T에게 대답했다.

 

나시: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기억을 어떻게 떠올리게 하는 건데?

 

23T5U130: 너는 기억이 지워져 있으니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네가 10년 전에 놀이공원에 갔다고 생각해 봐. 그리고는 그 기억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의 시간 끝에 누군가가 10년 전에 갔던 놀이공원에 대해 언급한다면. 너는 아무 기억도 떠올리지 못할까?

 

나시: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뭐라도

 

23T5U130: 맞아. 뭐라도. 놀이공원에 가서 즐긴 기억. 또 무서웠던 기억. 그런 것들이 장기기억 속에서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를 거야. 내가 하려는 게 바로 그거고.

 

23T5U130: 다만 내 방법은 시각적이겠지.

 

23T는 의자의 앞에 말려져 있는 스크린을 돌돌 풀어 늘어뜨렸다. 그리고는 다른 책상에서 의자를 하나 가져와 스크린 앞에 놓고, 그것에 자신이 앉았다.

 

23T5U130: 내 머리를 만져 보겠어?

 

나시: 뭐? 뭐라고?

 

23T5U130: 내 머리 말이야.

 

나는 미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23T의 매끈한 마네킹 머리에 두 손을 올렸다. 뭔가 탈모가 온 사람의 머리를 만지는 느낌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 없었어?"

 

"시라유키가 날 찾아왔어."

"…뭐? 왜?"

"사과를 하던걸."

 

"사과…? 잠깐 시야 기록 좀 띄워줄 수 있을까?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

 

"따지고 보면, 내 눈으로 직접 본 걸 보는 거지만 말이야."

 

23T5U130: 내 머리를 오른쪽으로 밀면 안에 있는 버튼이 하나 드러날 거야.

 

견고해 보였던 23T의 머리 일부분을 오른쪽으로 밀자, 검은색 마네킹의 머리가 일부분 분리되어 오른쪽으로 쏠렸다. 그 안에는 연보라색 버튼이 하나 들어 있었다.

 

나시: 뭔가 이거 옛날에 해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내 착각일까?

 

23T5U130: 해 봤으니까 그렇게 느끼는 거야. 이제 버튼을 눌러. 그럼 매개체를 보여줄게.

 

조심스럽게 버튼을 누르자. 23T의 안면(눈은 없었지만)에서 한 줄기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살짝 놀란 나를 뒤로 하고 쏘아진 빛은 스크린에 맞춰졌고, 서서히 영상이 나타났다.

 

나시: 이거… 내가 만든 기능이야?

 

23T5U130: 맞아.

 

23T의 머리를 일종의 프로젝터로 쓰는 건가?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나시: 미안해. 23T. 이런 기능을 만들어서

 

23T5U130: 넌 옛날부터 그렇게 말하더라. 기억을 엿보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말이야. 그럴 필요 없는데

 

나시: 아. 정말?

 

그 말을 들으니 내가 탑에 오기 전에는 23T와 함께 활동했었다는 것이 더욱 실감이 되었다. 이미 알았고 기억으로도 보았으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단지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지금의 나와 카텟 기관에서의 내가 정말 같은 사람이라고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았지만서도

 

영상에 나온 화면은 놀라울 만큼 전용실의 풍경과 비슷했다. 기계와 책상. 의자. 설계도와 도구 또 기계가 있는 곳.

 

나시: 그보다 기억을 엿본다니

 

내 말이 나오던 도중 끊겼다. 23T가 무엇이라 대답한 것도 같았으나 내겐 들리지 않았다. 영상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나는 이상한 체험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영상의 테두리가 서서히 사라지며 누군가가 영상을 확대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말 그대로 영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우와… 우와… 이거… 뭐지?

 

마치 내 시각과 기억이 서서히 겹쳐지는 듯했다. 나는 그런 현상이 왜. 어떻게 벌어지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확대는 내 시야에서 영상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되었고, 이윽고 나는 내 앞에 펼쳐져있는 것이 영상인지 기억인지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가 내 머리를 열고 버튼을 툭 누른 것처럼. 내 머리도 23T와 같은 영상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기억을.

 

문을 열고 시라유키 히메리가 들어온다. 시점은 시라유키 히메리에게 고정된다. 그녀가 다가올수록 시점이 그녀를 따라 움직인다.

 

"안녕 노바디."

 

"날 그렇게 부르는 거. 누가 들으면 굉장히 싫어할 거야. 나도 싫어하고."

 

시라유키 히메리는 입술을 꼭 다문다.

 

"그렇겠지. 노네임이…"

 

"그 호칭도 마찬가지야. 우릴 어떻게 불러도 좋지만 그 이름으로는 부르지 마. 번거롭다고 느껴질 수 있겠지만… 우리가 왜 그 이름을 가명으로 정했는지 기억하잖아. 똑같아."

 

"…다른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주고 싶지 않아서."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시점이 위아래로 움직인다.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신변 보호라는 목적도 주됐지만… 대몰락을 겪었잖아.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마음이 맞더라. 이제 누구에게도 이름을 알려주고 싶지 않다고. 이름을 준 사람이 죽을 때마다 이름이 깎여나가는 기분이 든다고. 그래서 지은 게 노네임과 노바디였지… 노바디.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이름이야."

 

시점의 주인이 기계 팔을 철컥철컥 움직이며 시라유키 히메리에게 보여준다.

 

"몸이 없으니 노바디. 아무도 아닌 노바디."

 

"그 일에 대해서 말인데. 노바디…"

 

"노바디가 아니라니까."

 

시라유키 히메리는 흠칫 놀란다.

 

왜냐하면, 노바디라는 호칭을 쓰지 말라는 시답잖은 요구 따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달라지려 해 봐도 그런 자신의 뿌리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그가 없는 틈을 타서 날 찾아왔어?"

 

이번에는 놀라지 않는다. 그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상대가 멍청하지 않다는 걸 알고, 또 상대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어."

 

"그럼 해."

 

시라유키 히메리는 고개를 밑으로 푹 숙이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네가 겪은 일들은… 전부 나 때문이었어. 너와 이름 없는 그가 겪은 일들이. 전부 나 때문이야. 내가 너희들에게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대답은 없다. 시라유키 히메리는 계속 말한다.

 

"너희가 떠난 뒤 계속 생각했어. 내가 그때 실수를 했기 때문에 모든 일이 벌어졌다고. 내가 너희를 부당하게 대했어. 몰아붙였어. 그래서… 정말 미안해."

 

시라유키 히메리는 허리를 90도로 굽힌다.

 

"미안해…"

 

"그에게는 미안하지 않아?"

 

시라유키 히메리가 고개를 든다.

 

"왜 나만 있을 때 온 거야. 시라유키?"

 

"그건…"

 

"나는 너를 충분히 미워하지 않는 것 같아? 너를 미워하는 건 그뿐이고, 나는 그 사건에 대해 별다른 감정이 없는 것 같아서 그랬어? 그가 없는 사이에 사과하고 떠나면, 면전에서 욕을 들을 필요도 방해받을 가능성도 없이 네 죄책감을 털 수 있어서?"

 

시라유키 히메리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왜 그렇게 고분고분한 거야. 시라유키. 왜 아무 말도 없어. 정말 반성하고 있다는 거야?"

 

"정말… 정말 미안해. 너희 둘에겐 정말…"

 

위잉 소리와 함께 시점이 좌우로 움직인다. 고개를 저은 것이다.

 

무미건조하지만 머뭇거리는 듯한 음성이 뒤따른다.

 

"너는 너무 변했어. 시라유키. 예전보다 더 변했어. 예전에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미안해. 미안해…"

 

"사과는 그만해도 좋아. 난 네게 별다른 악감정도 없어."

 

"…뭐?"

 

시라유키의 당황한 듯한 눈빛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끝난다.

 

"고마워. 인공지능. 그리고 늘 미안. 기억을 엿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진 않네."

 

"그럴 필요 없어. 닳는 것도 아닌걸. 이렇게 쓰려고 이런 기능을 만든 거 아니야?"

 

"원래는 기억을 백업하려는 용도로 만든 기능이야… 또 너 혼자만을 위한 사과에 나도 끼어드는 것 같아서 그래."

 

"너도 사과를 받을 자격이 있어."

 

"과연 그럴까."

 

내 입에서 한 줄기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사과를 했어야지. 그렇지… 진작 했어야지. 기관에서 내가 나오기 전에. 우리를 그딴 식으로 내몰기 전에"

 

나는 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계속 혼잣말을 쏟아내었다. 말동무를 잃었던 시절 끝까지 내몰린 이후 내게 남은 버릇이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 같다는 인공지능의 말에 자제해왔지만, 어떨 때는 도무지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럴 때 나는 스스로의 꼬리를 쫓는 강아지처럼 도넛 모양을 만들며 제자리를 맴돌았다.

 

"그렇지만 사과를 하다니… 사과를 했어. 내가 없었지만 당사자에게 했으니 충분해…"

 

"왜. 의외야?"

 

인공지능이 고개를 위잉 돌려 내게 물었다.

 

"그래."

 

나는 삐걱이는 의자에 몸을 던진 뒤 고개를 뒤로 젖혔다. 여러 가지 생각이 겹치지만, 정리되지는 않았다.

 

내가 자리를 비운 뒤에야 인공지능에게 사과를 하러 왔다. 왜인지는 당연했다. 여기에 뭐 하러 왔냐. 이제야 사과하는 거냐. 이리저리 말을 늘어놓을 놈이랑 굳이 맞닥뜨릴 필요는 없으니.

 

그럼 내가 사과를 막아온 셈이었다.

 

"…있잖아. 내가 지금까지 시라유키 히메리라는 사람을 너무 나쁘게만 본 걸까?"

 

나는 고개를 다시 되돌려 인공지능을 보았다.

 

"너무 나쁘게 보다니?"

 

"내가 너무 시라유키 히메리를 몰아붙였느냐는 거야. 내가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마음이 너무 불편해. 계속… 죄책감 같은 게 들어."

 

"넌 누구를 미워하기에 너무 상냥해서 그래."

 

"상냥하다는 말 하지 마. 살면서 상냥했던 적이 없을뿐더러. 상냥하다는 건 곧 죽을 것 같다는 저주랑 똑같아."

 

인공지능이 날 보며 옅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좋은 사람들은 남을 도우려다 이미 다 죽었고, 남은 사람들은 나쁘거나 잠재적으로 나빠질 사람들뿐일지도 모른다?"

 

"그거 하미디언이 했던 말이잖아. 결국 걔도 행방불명됐어. 남을 도우려다가 죽은 거겠지. 상냥해봤자 좋을 일 없다. 그게 대몰락의 진리야."

 

입꼬리는 평형을 되찾고, 무표정만이 남았다.

 

"…그 사람도 그렇게 되었을 줄은 몰랐어."

 

"초고교급이라 불렸잖아. 진짜 초고교급이 아니더라도 믿을만한 곳에 몸을 의탁했어야지… 초고교급 사냥을 피하고 싶다면 말이야. 어쭙잖게 정의로운 것보단 이기적이고 악독한 게 차라리 나아.

시라유키 히메리는 그걸 옛날부터 알고 있었지. 그런 사람이 저렇게 변했어. 이제 와서 좋은 사람인 척을 한다고."

 

"그게 나쁜 걸까?"

"…모르겠어."

 

손에 입을 묻고 초조하게 발을 까딱거리는 나를 보자 인공지능이 말했다.

 

"그렇게 마음이 불편하다면 그녀가 거짓 사과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 봐. 그녀는 똑똑하잖아. 적어도 자신의 겉모습을 속일 만큼은."

 

"너무 똑똑하지. 자기 양심의 가책 따위가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걸 알 만큼 똑똑해. 애초에 옛날 시라유키 히메리였다면 양심의 가책도 안 느꼈겠지. 사과도 안 했을 거야. 애초에 사과를 한다고 우리가 그냥 용서해버리지도 않을 테니까. 사과해봤자 좋을 일이 없으면 굳이 머리를 숙일 필요도 없다. 그게 시라유키 히메리지.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사과를 할 바에야 그냥 우릴 무시하고 말 게 그녀였다고."

"우리 일을 겪고 나서부터 저렇게 변한 거 아닐까?"

"만약 정말. 정말 그 사건이 시라유키 히메리를 저렇게 퇴화시킬 정도로 충격이 컸다면…"

 

나는 말문이 막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을 계속 하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와. 나는 한 손으로 이마에 손을 댔다.

 

"복잡해… 기분이 너무 이상해. 뭘 위해 이렇게 하는 건지 맥이 툭 끊기는 기분이야. 물론 네 몸을 되돌린다는 목적이 있지. 그런데 그것 말고도 난 하려던 일이 있었어."

 

"독하게 먹은 마음이 조금 약해진 거구나."

"나도 알아 이래선 안 되는 거. 그렇게 당해놓고 정신을 못 차린 거지. 아직도…"

 

나는 인공지능 쪽을 바라보지 않고 중얼거렸다. 인공지능의 존재 자체가 내 약해빠진 마음을 책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작 사과 하나에 마음이 약해져? 네가 없는 사이에 한 사과인데. 책망이나 비난 피하려 네가 없을 때 몰래 한 사과인데. 그게 마음을 울려? 정말 그녀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이제 용서도 하고 싶어 져?

 

안 돼. 안 된다고. 용서해선 안 돼. 내가 어떻게 됐는지 안 보여? 내 꼴을 봐 내 꼴을 보라고 노네임 네 노바디가 어떻게 됐는지를 좀 보라고 난 몸을 잃었어 목숨도 잃었지 나를 잊지 말라고 했는데 이런 나를 두고 어떻게 너 혼자

 

"아직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옷에 닿는 딱딱한 느낌에 나는 고개를 흠칫 들었다.

 

"진정해. 괜찮아. 그래도 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난 차라리 시라유키 히메리가 악인이기를 원한 걸지도 몰라. 아무런 실마리도 못 잡고 모든 걸 되돌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냥 마음껏 욕할 수 있는 허수아비를 원한 거지."

 

"…실마리가 없어?"

 

"아직은 없어. 우리가 나간 뒤에도 후속 실험이 있었다면 그 데이터에 가능성을 걸 수 있겠지만… 정말 시라유키 히메리가 그 사건을 계기로 다른 사람이 됐다면…"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막막함이 내 말허리를 끊어놓는 것 같았다.

 

"…정말 자기 잘못을 깨닫고 그만뒀다면. 아무런 데이터는 없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해선 안 되는 거 알지만난 시라유키 히메리가 아무런 교훈도 얻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직도 탐구와 발전을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그게 아니라면…"

 

"난 몸을 되찾지 못하겠지."

 

"되찾을 수 있어!"

 

말을 가로막듯이. 내가 외쳤다.

 

"할 수 있다고. 분명 할 수 있을 거야. 애초에 전화 박스에까지 접근했잖아. 데이터만 가지고 있던 옛날과는 차원이 달라! 구조를 직접 보면서 방법을 찾으면 상황은 분명 달라져."

 

"정말 그럴까?"

 

"할 수 있어. 아까 내가 한 말들은 다 잊어버려. 난 용서 안 하니까. 내가 없는 사이에 하고 간 사과 한 번으로 용서할 순 없어."

인공지능은 나를 보며 살짝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네가 만약 나를 위해 대신 분노해주는 거라면, 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

 

"뭐? 왜?"

 

"나는 시라유키에게 그다지 악감정이 없으니까."

 

나는 놀라고 할 말을 잃은 기색을 최대한 숨기며 고개를 저었다. 영상 속에서도 들은 말이지만 다시 들으니 그 말의 무게가 전해져 왔다.

 

나는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나를 위해서 이러는 거야. 오직 나만을 위해서. 그리고 악감정이 없다는 소리는 그만 해. 계속 상냥한 척하면서 살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이미 벌어졌는걸."

 

인공지능의 어조는 너무 침착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선 안 돼지만그 눈. 안구처럼 보이지만 카메라가 들어있는 눈. 시각 정보를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역할만을 하는 눈을 보면…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 인공지능이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노바디의 인상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여전히. 그녀와 남긴 사진을 보지 않고서도 그녀의 모습을 꾸며낼 수 있었다.

 

일전에 내가 인공지능을 위한 몸을 전부 만들었을 때. 나는 노바디와 그녀가 정말로 닮았다고 생각했다. 인공지능이 눈을 뜨기 직전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직후 내 생각은 바뀌었다.

 

내가 히무로 시라베를 꺼리는 이유가 시라유키 히메리와의 인연 말고도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의 감정 없는 눈동자 때문일 것이다. 인공지능도 가지고 있는 눈.

 

인간 같은 기계. 그리고 기계 같은 인간. 그리고 둘 모두 인간도 기계도 닮지 않았다. 그들은 둘의 중간에 있는 새로운 존재들처럼 보였다. 

 

나는 어떤 것에 더 놀라야 할까. 감정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던 그녀가 아무런 생기도 보이지 않게 변한 것? 한 때에는 사람이었을 그가 개조와 실험 끝에 기계와 같은 눈을 가지게 된 것?

 

어느 게 더 끔찍한 일이지?

 

한 번 비교해 보라는 듯이. 카는 내게 기계 같은 인간을 보내 주었다.

 

"분홍색. 혹시 지금 시간 괜찮은가?"

 

히무로 시라베가 연구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분홍색이 일종의 암호 같은 것인지 생각하다가, 나의 머리카락이 분홍색이란 것을 떠올렸다.

 

"너 지금 나 부른 거야?"

 

"다른 가명을 원한다고 들었기에 네 의견을 수용했다."

 

그것 참 직설적인 가명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히무로 시라베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갑자기 왜 왔어?"

 

"네가 요구한 것을 찾아냈다. 창고에 있더군."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무덤덤한 히무로 시라베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있었다고?

 

"…그래? 기계 동물을 찾아냈단 말이지?"

"그렇다."

 

난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인공지능에겐 사과를 했지만, 정작 그녀는 노바디와 노네임이 기관을 떠난 후에도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대체… 난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일단무슨 동물이 나왔는지 한 번 보자고."

 

"그게 중요한가?"

 

"쥐를 실험체로 쓰느냐 곤충을 실험체로 쓰느냐. 뭐… 윤리적 차이가 있을 거야."

 

"정확한 목적을 이해하기 어렵군. 일단 안내하지. 이리로 와라."

 

"다녀올게. 인공지능."

 

"응. 다녀와."

 

나는 최대한 밝게 인공지능에게 손을 흔든 뒤 히무로 시라베를 따라갔다. 인공지능은 연구실 안에서 좌우로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럼. 어떤 동물로 실험을 했을까… 

 

"히무로 시라베. 어떤 동물인지 내가 맞춰봐도 돼?"

 

"어차피 보게 될 텐데 왜 굳이 그래야 하지."

 

"내가 없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나 유추해보려는 거야. 어떤 동물을 가지고 승화 실험을 했을까? 어디 보자. 내 생각엔… 포유류야. 그렇지?"

 

"그렇다."

 

"개과야?"

 

"아니다."

 

"그럼 고양잇과?"

 

"아니다."

 

"토끼! 토끼 좋다."

 

"아니다."

 

나는 답지 않게 그 수수께끼를 즐기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전혀 즐기고 있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용납할 수 있을만한 실험체의 목록을 하나씩 지워나가며. 나는 시라유키 히메리가 대체 무엇으로 실험을 했을지 상상했다.

 

히무로 시라베를 앞서서 창고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싶은 기분과, 차라리 판도라의 상자를 닫듯이 외면하고 신경 쓰지 않으려는 기분이 상충했다. 그녀의 죄악을 확인하려는 기분과 그녀의 변화를 믿고 싶은 기분이 상충했다. 어느 한쪽의 편을 들면 한쪽에선 불쾌감이 치솟아 올랐다.

 

나는 노바디를 생각해서라도 시라유키 히메리를 용서할 수 없지만 정작 인공지능은 그녀를 용서해도 좋다고 말했다. 노바디를 기리려는 나의 마음은 시라유키 히메리를 향한 증오로 치환되었고 그것이 시라유키 히메리의 사과를 막아 왔을지도 몰랐다.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한 거지? 내가 뭘 해야 했던 거야. 그 모든 복잡한 생각 속에서 나는 수수께끼를 계속 내며 창고로 향해야만 했다. 사형대에 오른다면 비슷한 느낌을 받을까.

 

"비단털쥐과."

 

"아니다."

 

"호저과."

 

"아니다."

 

"이건 어때. 멧돼지과!"

"아니다."

 

만만한 포유류과는 다 대본 것 같은데. 내 입술이 점점 바짝 말랐다. 느닷없는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내가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지. 시라유키 히메리라는 사람의 윤리적 과오에 내가 왜 이렇게 신경을 써야 해.

 

오직 하나의 이유뿐이었다. 내가 약해서. 누군가를 악독하게 증오하지 못할 정도로 약했기 때문이었다. 당사자가 어떻게 생각하고 그녀가 얼마나 달라졌다고 한들 계속 증오할 수 있는 마음이 부족했다.

 

증오를 품는 것마저 괴로울 때면 그녀를 용서해버리고 싶은 생각이 솟구쳤다. 용납할 만한 실험체를 썼는지 계속 물어보는 것 또한. 그녀를 용서할 건덕지를 찾고 있는 셈이었다. 증오를 기꺼이 품고 싶을 때 복수심을 표출하는 것은 그런 나에 대한 반발이었다.

 

아무리 마음이 약해진다고 해도 절대 그 모든 일을 없던 체하고 살지 않겠다는. 스스로를 향한 시위이자 나의 행적에 낙인을 새기는 일이었다. 내가 계속 증오했노라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설령 내가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 못하도록.

 

그런 상반되는 감정 앞에서 시라유키의 실험체는 내게 있어 희망도 절망도 될 수 있었다. 불을 키울 연료인가? 불을 꺼버릴 이산화탄소, 모래, 물인가? 계속할 것인가 그만할 것인가. 나는 결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사람이 죽은 후에 어떤 실험체를 썼는지가 그토록 알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아무리 심해봐야 소나 말 정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창고에서 히무로 시라베의 안내를 계속 따라간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물건을 보았다.

 

"여기 있다."

 

회색 광택을 지닌 그 기계를 보자마자 내 눈이 커졌다. 나는 자신도 모른 채 두 발자국을 뒤로 물러섰다.

 

"이건…"

 

히무로 시라베가 스위치를 누르자. 불안하게 서 있던 물체가 기우뚱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는 고개를 마구 움직이며 몸을 덜덜덜 진동시켰다. 마치 발작을 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우스꽝스러움에 쓴웃음이 나왔으나 내 앞에 무엇이 있는지 깨닫자 웃음이 멎었다. 그리고 멎어버린 웃음은 이윽고 혐오스러운 기피감으로 변이 되었다.

 

다리가 있어야 할 곳에는 관절이 녹슬어버린 막대가 붙어 있었다. 발은 넓적하지 않고 캔을 붙인 것 같은 원형이라 무게를 지탱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팔도 마찬가지였다. 그 기계는 애초에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게 설계되지 않았고, 되었다고 한들 녹슬어 움직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어설프고 엉성하게 만들어진 기계일지라도 난 그 원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푹 들어가고 주름이 있는 눈. 납작한 코. 넓은 하관 밑의 큰 입. 탬버린만큼 큰 귀. 상당히 큰 몸

 

"…침팬지라."

 

나는 잘못 설계된 기계 침팬지가 딱딱한 바닥에서 헤엄을 치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다만 제대로 된 기능은 하지 못한다."

 

"그렇겠지. 내가 기관에 없었으니까. 움직일 몸이 제대로 안 만들어졌으니 이렇게 될 수밖에."

 

나는 바닥에서 몸을 꿈틀거리는 기계 침팬지를 보며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히무로 시라베가 침팬지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침팬지가 단지 로봇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카메라로 된 눈, 축음기로 된 귀, 금속과 전선으로 몸을 이루고 있는 기계 침팬지가. 사는 것이 고문인 것처럼 몸을 부들거리고 발광하는 건 누가 봐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광경일 테다. 적어도 불쾌함만큼은 누구나 느낄 법했으나. 히무로 시라베는 그 무엇도 느끼지 않았다.

 

아주 기본적인 인간의 요소조차 그에게는 결여되어 있었다. 아마 동정심도 유감스러움도 느끼지 못할 테지. 히무로 시라베의 무정함은 절대로 미덕이 될 수 없었다. 누군가는 미덕이라 착각할 수 있을지 몰라도 히무로 시라베에게만큼은 아니었다.

 

숭고함도 고결함도 없는 단절, 차단, 그리고 고립.

 

"나는 시라유키에게 그다지 악감정이 없으니까."

 

"아니야. 아니야… 그런 생각 마…"

 

"왜 그러지. 분홍색?"

 

안으로도 밖으로도 나를 들들 볶으려는 듯이. 히무로 시라베가 내게 물었다.

 

"이거… 알면서 보고 있으니 불쌍해서 미칠 것 같아서 그래. 아… 침팬지. 침팬지… 하"

 

내 입에서 허탈함과 오싹함이 섞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음 같아선 쪼그려 앉은 채 내 어깨를 껴안고 싶었다. 이 기계를 만들어낸 신의 잔인함에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싶었다. 차라리 신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난 납득할 수 있었으리라. 신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대몰락을 내릴 만큼 잔인하니까. 그러나 침팬지를 만들어낸 것은 사람이었다.

 

사람일 텐데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사람이… 사람 대신에 침팬지를… 그것도 이 꼴로 만들어서…"

 

문득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 하하…"

 

"왜 그러지. 분홍색? 불쌍하다고 하지 않았나?"

"무척 불쌍하지만… 기뻐. 시라유키 히메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증거를 찾아서. 기뻐. 기름이 다 떨어져 가는 상황에 주유소를 만난 기분이야… 하

일단 그 침팬지부터 좀 꺼 버려. 다시는 켜지 마. 차라리 영원히 잠자는 처지가 나을 테니까."

 

"기계는 잠을 자지 않는다. 작동을 멈출 뿐."

 

"침팬지의 입장에선 잠을 자는 것처럼 느낄 테니까 그렇지. 사실 잠이라고 느끼지도 않을 거야. 그냥 정신이 끊겼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뿐. 아무튼… 꺼 버려. 부탁이야."

 

"그렇게 하지."

 

침팬지의 움직임이 멈추자 비로소 몸의 긴장이 풀렸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는 나를 히무로 시라베가 계속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날 구경거리로 보는 것 같아서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으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꽤 엉뚱했다.

 

"기계에 대해 가지는 생각이 남다른 것은 네가 엔지니어이기 때문인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기계를 보고 불쌍히 여기며 동요하는 것은 네가 기계와 함께 일하는 엔지니어이기 때문에 기계에 대한 공감력이 남다른 것인지 묻는 것이다."

 

"…전혀 아니야. 제대로 잘못짚었어."

 

"그런가. 어렵군."

 

 

"뭐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 거야?"

"그럼 거짓으로 생각할 이유는 어디 있나."

 

"아니… 됐어. 이상한 부분에서 감수성을 발휘하려 했나 보네. 내가 이렇게 반응하는 건 말이야… 이 기계가 살아있기 때문이야."

 

히무로 시라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기계에 대한 공감력이…"

 

"그게 아니라고! 이거. 말 그대로 살아있단 말이야. 이건 프로그램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자아를 가지고 정신을 가진 채로 말도 안 되는 로봇 몸 안에 갇혀있단 말이야!"

 

히무로 시라베는 백치처럼 기계에 대한 공감력이라는 주제에 묶이지 않았다. 그는 내 말을 듣고선 눈을 잠시 크게 뜨더니 반문했다.

 

"말 그대로의 의미인가?"

 

"말 그대로야. 그냥 고문이랑 똑같아. 네가 눈을 떠보니 팔다리도 못 움직이고 몸에 적응하지도 못하는데. 의식만큼은 또렷하다고 생각해 봐. 이건 할 짓이 안 된다고…"

 

"확실히 끔찍한 일이다."

 

"사람 대신에 침팬지를… 쓰다니"

 

히무로 시라베가 내 작은 중얼거림에 고개를 스윽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지?"

 

"믿기 어렵겠지만 히무로 시라베. 난 여기 오기 전에 시라유키 히메리를 어느 정도 용서했을지도 몰라."

"과거형이군."

 

"복잡해. 그녀의 태도가 날 놀라게 한 건 맞지만. 이건… 이건… 사람 대신에 침팬지로 실험하고. 이딴 몸에 가둬버려…? 아무것도 배운 게 없었던 거야. 우리들은 그녀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라고

이것만큼은 확실해졌어. 지금의 시라유키 히메리는 용서할 수 있어도, 과거의 시라유키 히메리는 용서가 안 돼."

 

히무로 시라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네가 기관에서 얻으려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겠나."

 

"승화 실험의 과정에서 손상된 육체를 다시 복구하는 방법."

 

숨겨봤자 의미도 없었기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사실 손상이라고 할 수도 없어. 산산이 분해돼서 시체를 찾을 수도 없게 되는 걸 손상의 범주에 놓긴 어렵잖아."

 

"혹시 '인공지능' 은. 본디 사람이었나?"

 

나는 이를 부드득 갈며 히무로 시라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아무런 악감정이 없었지만, 그 일을 떠올리면서 아무렇지 않게 감정을 조절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정확하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해줄 수 있겠나."

 

"왜 들으려고 해? 눈치를 챘으면 그거로 된 거 아니야? 시라유키 히메리 탓에 사람이 죽었고, 그 사람은 노바디야. 그게 다지. 굳이 들을 필요 없어."

 

"정황을 전부 듣고 나 스스로 판단하고 싶은 것이 있다."

 

히무로 시라베는 침묵으로 내 대답을 기다린 뒤 덧붙였다.

 

"부탁한다."

 

"모든 일은 시라유키 히메리가 나랑 노바디에게 접근하며 시작됐어."

 

23T5U130: 뭔가 떠올랐어?

 

23T의 말과 함께 나는 현실로 되돌아왔다.

 

나시: 기억났어! 엄청나게 많이…! 시라유키 히메리. 아니 시라유키 씨가 너한테 사과했고. 나는 그걸 보면서 시라유키 씨를 싫어했고

 

들뜰 수밖에 없는 정보량이었기에 나는 거의 웃음을 터뜨리다시피 하며 23T에게 내가 본 것을 말해 주었다.

 

나시: 히무로 시라베… 아니. 히무로가 기계 침팬지를 보여주고. 승화 실험에 대한 얘기를 해 주고. 이제 시라유키 히메리. 아니 시라유키라는 사람이 나와 노바디에게 접근하는 얘기를 시작하던 참이었어. 정말 많이 떠올렸어…! 이대로라면 모든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정말 가능할 거야!

 

23T5U130: 네 말대로야. 많이 떠올렸어. 다 됐으면 이제 모니터실로 가자. 그곳에 후루미나미가 묶여 있다니까.

 

23T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향해 다가갔다.

 

나시: 23T. 네 덕분이야. 네가 영상을 보여준 덕분에 이렇게 많이 떠올렸어.

 

23T의 다리가 아주 잠깐 멈추었다. 그리고 23T는 다시 문으로 향했다.

 

23T5U130: 감사할 필요 없어. 난 그저 인공지능이니까. 도구일 뿐이지 사람이 아니야. 날 사람처럼 대하지 않아도 돼.

 

나시: 그렇지만… 넌 사람이었잖아. 그리고 너 덕분에 이렇게 기억을 많이 떠올렸는데. 고마워해야지!

 

23T는 고개를 저었다.

 

23T5U130: 그렇지만 지금의 난 사람이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지. 난 그저 데이터 쪼가리일 뿐이니까.

 

나시: 아니야… 왜 그렇게 심한 말을 해?

 

23T5U130: 네가 내게 직접 한 말이었어. 나나시.

 

나시: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23T는 전용실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나시: 앗. 23T

 

나시: …

 

나시: …노바디?

 

난 23T가 어딘가 차가워졌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느낌이 아니었다.

 

 

 

 

 

 

 

루미나미 나몬: 경찰한테 붙잡히다니. 괴도의 체면이 다 죽었군!

 

루미나미 나몬: 바로 그 말일세. 천하의 캡틴 후루미나미가 고작 해군 놈들에게 잡히다니 이런 빌어먹을!

 

루미나미 나몬: 레스트레이드. 저 말고 범인은 따로 있다고 계속 말했잖습니까!

 

토키와는 연기 소품이나 의상 없이 표정과 말투만으로 후루미나미가 각기 다른 인물을 어떻게 연기하는지 보았다. 그녀는 팔과 발을 밧줄로 묶인 채로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몸을 만족스럽게 움직이지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후루미나미는 아주 조금으 ㅣ영향도 받지 않은 채 성질이 다른 세 명의 등장인물들을 즉시 완벽하게 따라했다.

 

키와 아유키: …완전히 폭주하는 것 같아.

 

바라 쿠리스: 자꾸 홈즈 인용하지 말라고 했지. 그보다 토키와를 왜 자꾸 레스트레이드라고 불러? 레스트레이드는 완전 무능하잖아.

 

후루미나미는 한쪽 눈을 감아 찡긋 윙크를 보냈다.

 

루미나미 나몬: 바로 그겁니다.

 

롤 브라이트: 당신을 잡을 정도면 꽤 유능한 경감 아니겠어요? 후루미나미 씨.

 

캐롤은 팔짱을 낀 채 후루미나미를 내려다보았다.

 

롤 브라이트: 저희를 위해 모니터실에 계속 있으셨어요. 그 뒤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고요. 그런 상황인데도 깨어나시자마자 당신의 숙소 문을 열려 애쓰셨어요. 그래도 무능한가요?

 

루미나미 나몬: 그 점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 아무런 신호도 없었고 언질도 없었을 텐데. 내가 확인했는데… 하필 그때 토키와가 일어나다니.

 

루미나미 나몬: 대단한 일이지. 응. 다들 나와 카나리에게 정신이 팔려서 토키와를 깨우려 갈 시간이 없었을 테니까. 그건 토키와 본인의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감각이 작용한 결과일 테야.

 

루미나미 나몬: 그에겐 머리카락을 안 줬으니까

 

후루미나미는 캐롤을 올려다보며 한 번 더 찡긋 윙크를 보냈다. 캐롤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바라 쿠리스: 머리카락? 무슨 머리카락?

 

루미나미 나몬: 운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머리카락 없이도 누군가를 움직일 수 있었던 걸까?

 

롤 브라이트: ….

 

후루미나미는 불길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혀가 비수로 만들어졌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자신이 한 번 폭로해 버리면 전부 끝이라는 듯한 정신적 우위가. 그녀의 표정에 숨길 수 없을 만큼 드러났다.

 

루미나미 나몬: 난 은밀한 비밀을 알아. 캐롤… 네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을 거야.

 

롤 브라이트: 숨길 생각도 없어요.

 

루미나미 나몬: 사실 그냥 되는대로 말한 건데. 정말 비밀이 있나 보네?

 

캐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23T5U130: 후루미나미. 안녕.

 

23T는 모니터실을 박차고 들어가자마자 주저 없이 후루미나미에게로 다가갔다.

 

23T5U130: 아까는 잘도 저질러 주더라.

 

루미나미 나몬: 네가 잘 당한 거 아니야?

 

나시: 헉… 헉… 엄청 빠르네. 23T

 

내가 모니터실에 발을 디뎠을 때는 이미 모니터실의 모두가 후루미나미를 둘러싸고 있는 상태였다.

 

나시: 후루미나미는 여기에 있고. 토키와. 혹시 카나리의 숙소는

 

토키와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나시: 실패했구나…?

 

키와 아유키: 안에서 문이 열리지 않아. 아무래도 의자 같은 것으로 문이 열리지 않도록 막아둔 것 같아.

 

롤 브라이트: 괜찮아요. 대신 후루미나미 씨를 잡았으니까.

 

바라 쿠리스: 이제 인플레이션을 취소해 줘야겠어!

 

루미나미 나몬: 그러기 싫다면?

 

우리 모두가 후루미나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제법 위협적으로 느껴질 법도 하다만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리는 것 말고는 계속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루미나미 나몬: 왜 그렇게 인플레이션을 막으려는지 모르겠는걸.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잖아?

 

나시: 곧 벌어질 테니까 그렇지.

 

루미나미 나몬: 카나리가 나한테 한 번 말해준 내용 그대로네: 가난보다 무서운 건 가난의 유령이라고.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미래가, 좁아진 입지 자체보다 사람을 몰아세운다고 말이야. 돈 얘기에 있어서는 상당히 명석해. 카나리도 말이야.

 

후루미나미는 묶인 두 손을 토키와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루미나미 나몬: 그보다 이걸 풀어줘야 인플레이션을 해제하지.

 

바라 쿠리스: 또 굳이 실패하려고 카나리랑 결탁한 거였어?

 

루미나미 나몬: 지레짐작 마. 네 보 후퇴를 위한 세 보 전진이니까. 빨리 안 풀고 뭐해?

 

토키와는 후루미나미를 의심쩍게 바라보며 그녀의 손에 묶은 밧줄을 풀었다. 후루미나미는 밧줄 자국이 남은 자신의 손목을 문지르며 다이얼로그를 조작해. 인플레이션 항목에 취소를 눌렀다.

 

나 또한 재빠르게 크레딧 메뉴에 들어갔다. 상품들의 금액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나시: 금액이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어! 우리가 해냈어!

 

바라 쿠리스: 어휴. 망할! 드디어 해냈다아!

 

롤 브라이트: 정말 다행이에요.

 

루미나미 나몬: 그래. 좋아할 수 있는 건 지금 뿐이지. 하지만 기억해 둬. 내가 다이얼로그에 손을 대기만 하면 다시 인플레이션이 시작된다는 걸!

토키와가 후루미나미의 손에 있는 다이얼로그를 낚아채고는 매몰차게 말했다.

 

키와 아유키: 네 다이얼로그는 지금부터 내가 관리하겠어.

 

루미나미 나몬: 아. 치사해이이잉!

 

 

 

 

 

몸을 씻자 모든 이들의 신체와 마음가짐에 확연히 생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아마 그들 모두도 실감했으리라. 단지 몸을 씻고 피로를 잠깐이라도 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우리는 언제 지쳐 있었냐는 듯이 의욕을 내며 해변을 나아갔다.

 

마유즈미 또한 그랬다. 가족을 걱정하는 그녀가 나도 걱정되었지만 그녀는 지친 기색을 내지 않았다. 

 

노을이 지는 와중에 걸어가던 도중. 내 눈에 간신히 두 번째 시련으로 통하는 문이 포착되었다.

 

기와라 우시오: 드디어! 이제 일어나서 꽤 걸으면 두 번째 시련으로 가겠네!

 

이토 유즈루: 그럼 오늘은 여기서 침낭 펴자. 쉰 다음 내일 쭉 가는 거야.

 

우리는 도시락으로 식사를 하고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았다. 노란색 섬광과 온기가 모든 이들의 얼굴과 몸을 덥혀 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카이다가 우리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마저 아주 약간 잊히는 것 같았다.

 

기와라 우시오: 야 사과 이거 되게 맛있다. 후루미나미는 참 착하기도 해. 사과를 이렇게 많이 보내주고.

 

모닥불 앞에 앉은 채. 하기와라는 아그작아그작 씹어 먹었다.

 

이토 유즈루: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이 보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도 먹으라고 보내줄 애가 아닌데

 

기와라 우시오: 히무로와 마유즈미 사이의 오붓한 대화를 방해하기 위해 그런 거지.

 

리 레이코: 농담인가?

 

기와라 우시오: 이건 농담 아니야. 후루미나미가 할 법한 일이잖아. 시'나몬' 이랑 궁합이 잘 맞기로 유명한 사과. 뭉텅이로 보내서 내가 널 지켜보고 있다고 과시하기.

 

무로 시라베: 네 생각이 맞을 거야. 그녀는 내게 집착하고 있으니까.

 

이토 유즈루: …걔 대체 왜 그러는 거냐? 아무리 널 좋아한다고 해도 이 정도로 대시하는 건 좀 이상하잖아.

 

가미 토가: 이상한 수준이 아니죠. 비상식적입니다.

 

리 레이코: 살인자가 혀가 길군.

 

야가미는 입을 다물었다.

 

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는 엄밀히 말해 내게 호감을 가진 게 아니야. 내 은인과 내 관계를 착각하고선. 날 유혹하면 내 은인과 나 사이의 관계가 무너지는 비극이 발생하는 걸 원할 뿐이야.

 

무로 시라베: 그녀의 존재에 대해 몰랐다면 내게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겠지. 난 그런 접근을 원하지 않아. 

 

이토 유즈루: 그 은인이 메리라는 사람이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 레이코: 프로파일러 너는 네게 주어진 영상을 보며 메리라는 이름을 불렀었다. 그게 그 사람이겠지?

 

무로 시라베: 맞아. 여러모로 내게 도움을 줬지. 후루미나미는 나와 메리의 사이를 연인이라고 착각 했지만, 아니야. 이제 와서 오해를 정정한다고 한들 후루미나미는 거짓말로 간주할 테지만

 

리 레이코: 애초에 네가 오해를 정정할 필요는 없다. 그녀가 정신만 차리면 해결될 사안에 네가 끌려들어 갈 이유는 없다. 네 기력 낭비이다.

 

무로 시라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해.

 

기와라 우시오: 미친 새끼들 사고방식을 이해하려 할 필요 없지. 뭐 막상 저렇게 말하는 쟤들도 충분히 미친 새끼들이지만 말이야.

 

무로 시라베: 넌 그녀의 사고방식에 항상 근접하던걸. 하기와라.

 

기와라 우시오: 뭐야. 디스배틀이야? oh shit! 히무로이드 오늘 세게 나오는데? 그러는 너야말로 후루미나미의 사고방식에 가까우면서!

 

유즈미 나데시코: 와! 세상에!

 

발언의 수위에 마유즈미가 감탄했다.

 

무로 시라베: 난 그녀의 행동 원리를 가늠할 뿐. 그녀와 동일한 사고를 하는 것은 아니야. 그것은 잔혹함이나 광기 없이도 가능해. 통찰력이 있는 누구나.

 

무로 시라베: 너도 그러고 있어. 하기와라.

 

유즈미 나데시코: 허억! 잠깐. 이건 칭찬이네.

 

기와라 우시오: 하하핰! 오늘 폼 미치셨네. 히무로 vs 하기와라 농담 대결은 히무로가 1점을 가져갑니다!

 

무로 시라베: 내 말이 농담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네가 잘 알 텐데.

 

하기와라가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기와라 우시오: 갑자기 왜 이래. 뭐 잘못 먹었어? 넌 가재 괴물도 안 먹었잖아.

 

무로 시라베: 사과도 안 먹었지.

 

기와라 우시오: 그런데 왜 농담을 자꾸 하고 그러냐고.

 

무로 시라베: 농담이 아니야.

 

하기와라는 내 의견에 대해서 어떤 간접적인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치 대답을 피하는 것만 같았다.

 

 

 

 

 

 

리 레이코: 흐으음.

 

모리는 자신에게 보급된 주머니를 풀었다. 그 안에는 작은 검은색 구슬 같은 것과 메모가 들어 있었다.

 

메모를 읽은 모리는 고민한 뒤. 검은색 구슬을 침낭 깊은 곳에 넣고 침낭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트렌치코트는 벗어서 이불로 사용하기 위해 몸 위에 덮어 두었다.

 

그녀가 눈을 감은 찰나. 모리의 곁으로 나이토가 다가왔다. 둘의 침낭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이토 유즈루: 모리. 잠깐 괜찮냐?

 

리 레이코: 왜 부르지?

 

나이토가 자신의 한쪽 팔에 밧줄을 묶은 채 밧줄의 반대편을 그녀에게 건넸다.

 

이토 유즈루: 그… 부탁할게.

 

그는 꽤 쑥스러운 것처럼 그녀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리 레이코: 그렇게 저자세로 부탁할 필요 없다. 공리를 위해서라면 이런 일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다.

 

모리는 자신의 팔에 매듭을 묶고는 몇 번 당겨. 얼마나 밧줄이 견고하게 묶였는지 그에게 보여 주었다.

 

리 레이코: 보이나? 너는 떠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이토 유즈루: 고마워… 이제 좀 자겠구만. 으으음

 

침낭에 긴 머리카락을 욱여넣으며 나이토가 기분 좋은 신음을 뱉어냈다. 긴장이 풀리면서 코에서는 깊은 콧김이 후욱하고 뿜어져 나왔다. 눈을 감고선 순식간에 곯아떨어질 준비를 마친 나이토는, 자신의 팔이 덜렁덜렁거리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모리가 팔을 움직여 나이토의 팔을 흔들고 있었다.

 

리 레이코: 승부사. 잠깐 괜찮나.

 

모리가 그에게로 몸을 굽히고 속삭였다.

 

이토 유즈루: 그. 미안한데 지금은 좀 자는 거 어때?

 

나이토도 속삭이며 대답했다.

 

리 레이코: 나도 너처럼 용건이 있다. 네 것과 달리 내 용건은 하찮은 것이라 판단 마라.

 

이토 유즈루: 아오. 그러니 할 말이 없네. 도움도 받았고… 용건이 뭔데?

 

리 레이코: 왜 이렇게까지 물을 두려워하지?

 

나이토는 낭패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토 유즈루: 왜 그렇게 들으려는 거야. 공리 운운하기엔 너무 끈질기잖아. 무슨 일이라도 있어?

 

리 레이코: 극복을 도우려는 내 오지랖이라고 생각해라.

 

이토 유즈루: 너 계속 그러는 거 나한테는 그냥 부담스러울 뿐이라고. 그리고 난 도움 필요 없어.

 

리 레이코: 그런 사람은 없다. 누구에게나 도움이 필요하다. 언제나 다른 이들을 돕는 누군가에게도 약점이 있듯이. 네게도 도움이 필요하다.

 

이토 유즈루: 뭐야. 다른 이들을 돕는 그 누군가가 나라고?

 

리 레이코: 아니. 나다.

 

이토 유즈루: 이런 씹. 양심이 없나!

 

리 레이코: 네게 남은 약점을 없애려는 의도 또한 있지만, 네게 도움이 필요한 것은 사실 아닌가. 승부사. 평생 숨기면서 살아갈 순 없다. 누군가에겐 말을 해야 할 것이다.

 

리 레이코: 그것은 네 배우자일 수도, 네 친우일 수도, 네 동료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해변에 있는 자들은 많지 않다. 또한 먼저 살인 게임을 타파해야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네 비밀을 숨긴 채 살고 싶나?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생각은 없나?

 

리 레이코: 만약 그렇다면 차악으로. 내게 말하는 것은 어떤가?

 

나이토는 입을 닫은 채 모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리 레이코: 내 입은 무겁다. 장담하지.

 

이토 유즈루: 네가 졸라대는 게 짜증 나서 말해주는 거야.

 

나이토는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리 레이코: 그럼. 그렇고말고.

 

처음은 진짜처럼 보이는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보며. 간신히 내뱉은 한 마디였다.

 

이토 유즈루: 나도 약했던 적이 있어서. 정확히 말하면 약해 빠졌던 적이 있었지.

 

리 레이코: 지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말인가?

 

이토 유즈루: 아니. 절대적으로 약했다고. 몸의 뼈를 전부 겉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말랐어. 누가 툭 치면 부러질 것 같다고들 다들 말했고.

 

이토 유즈루: 사실. 아빠가 가장 많이 말했어. 왜 형들의 반도 못 따라가는 거냐고 말이야. 형 셋이 다 엄청난 스포츠맨이었거든. 초고교급은 아니지만 초고교급에 가장 가까운 정도였지.

 

이토 유즈루: 남을 돕고 지키는 '진정한 기사' 라는 가르침에 걸맞은 사람들뿐이었어. 그런데 나는 유래 없이 약했지. 나만 친아들이 아닌 것 같았다니까. 어렸을 땐 정말 그렇게 느꼈어.

 

리 레이코: 정말 끔찍한 기분이었겠군.

 

이토 유즈루: 그 정도야 끔찍한 것도 아니었지. 형들은 알게 모르게 날 도와주고 잘 대해줬지만, 아무리 그래도 초등학생들의 수영 교실에까지 들어와서 날 도와줄 순 없었어. 그날 나는 좀 짓궂은 장난을 당했고.

 

이토 유즈루: 애들이 날 들어서 어른용 수영장 풀에 넣고선, 같이 뛰어들어서 날 밑으로 잡아당겼어. 수영할 줄 아는 입장에서야 내 머리를 잠깐 넣었다 빼는. 숨을 쉬지 못하게 하는 악랄한 장난이라도 내 입장에선 죽음의 위기였지.

 

이토 유즈루: 발이 안 닿았다니까. 수면 위로는 빛이 보이는데 닿지 못하자 물속은 분명 빛이 들어오는데도 더없이 차갑고 어둡게 느껴졌어. 허우적대다가 그대로 힘이 빠져 죽겠구나 싶더라고.

 

이토 유즈루: 아직도 그 때 기억이 생생해. 차가운 물 속에서 팔다리를 휘적이는데 디딜 곳이 없는 거야. 위에서는 웃음소리가 물을 통해 먹먹하게 들려오고, 눈을 떠도 따가워서 제대로 볼 수가 없어. 그런데도 계속 뜨고 있으려 했지. 감고 있다가는 밑도끝도 없는 심해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거든. 그게 눈의 따가움보다 더 무서웠어.

 

이토 유즈루: 정말 죽기 직전에 겨우 살긴 했지만… 그 뒤로는 빠질 수 있는 물에 들어갈 엄두가 안 나더라.

 

이토 유즈루: …그게 다야.

 

리 레이코: 단순한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니로군. 승부사.

 

이토 유즈루: 나도 마음을 고쳐 먹으려 해 봤지. 잘 안 고쳐지더라. 응.

 

리 레이코: 미안하지만 내가 쉽게 네 상처를 낫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네게 줄 수 있는 도움도 크지 않다. 네 삶에 대해 모르는 내가 몇 마디 말을 던져봤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이토 유즈루: 아니야. 됐어. 털어놓고 나니까 뭔가 부끄러우면서도 마음이 편해. 그거면 됐어

 

이토 유즈루: …에라이. 모르겠다. 그냥 잠이나 자.

 

리 레이코: 그러도록 하지.

 

 

 

 

 

 

 

 

유즈미 나데시코: 저기요오? 아무도 없어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캐롤 씨? 나나시? 응? 아무도 없어요오?

 

유즈미 나데시코: 있으면 대답을 했을 테니까… 아무도 없나 봐. 여기 대체 어디지…?

 

"그건 네 삶이 아니야."

 

유즈미 나데시코: 와아악! 뭐야! 방금 누구야?! 귀신인가?!

 

"네 자리에는 내가 있어야만 했어. 그건 원래 내 자리야. 내 삶이야…"

 

유즈미 나데시코: 대… 대체 누구신데 이러세요?! 누구신데

 

알아볼 수 없는, 마치 끊임없이 움직이는 검은색 곡선들이 가리고 있는 듯한 한 여자의 얼굴이. 마유즈미를 덮쳤다.

 

"내놓으라고!!!"

 

유즈미 나데시코: 으아아아아아아아!

 

마유즈미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공포에 가득 찬 비명을 질렀다. 그녀를 깨우러 가던 도중 벌어진 일이라 조금 놀랐지만, 그녀가 악몽을 꾸었다는 정황을 파악하자 당황은 사그라들었다.

 

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괜찮아?

 

유즈미 나데시코: 헉… 헉… 꿈이었구나… 다행이다. 꿈이

 

유즈미 나데시코: 꿈이었어…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마유즈미가 몸을 웅크리자 그녀의 눈가에 서서히 눈물이 맺혔다.

 

무로 시라베: 진정해. 괜찮아.

 

유즈미 나데시코: …엄마 보고 싶어.

 

울음을 터뜨리지는 않았지만 마유즈미는 울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존중받을 가치 없는 그들조차 자신의 가족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사실 존중받을 가치 없는 그들밖에 사랑할 사람이 없는 쪽에 가까울 것 같았다. 그녀는 감금당하다시피 하는 삶을 살았으니

 

그녀가 그리워하는 가족의 이미지와 그녀가 처한 상황을 연결시켜. 그녀를 진정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골몰하던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지금부터 날 네 엄마라고 생각해.

 

기와라 우시오: 미친 새끼야. 지금 그걸 위로라고 하냐!

하기와라가 마유즈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며 소리쳤다.

 

가미 토가: 비정상적인 위로긴 하군요.

 

기와라 우시오: 네가 그렇게 나오면 마유즈미가 마망~ 하면서 진정할 것 같아? 로봇이라도 보모 역할은 해주겠다!

 

하기와라의 말을 듣던 마유즈미가 푸흡 웃음을 터뜨렸다. 

 

유즈미 나데시코: 아하하하. 엄마래. 엄마! 그럼 엄마라고 부르면 되죠?

 

하기와라는 충격을 받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기와라 우시오: 뭐야. 이게 통해?

 

무로 시라베: 농담이겠지.

 

유즈미 나데시코: 누나라고 부른 거에 대한 복수야.

 

그녀가 활기를 되찾은 것은 희소식이었지만, 그 호칭을 직접 들으니 앞으로 그 호칭을 들을 생각에 잠시 막막함을 느꼈다.

 

기와라 우시오: 이 참에 우르르르르 까꿍을 시도해 봐. 한 방에 풀릴 걸.

 

무로 시라베: 그녀는 어린아이가 아니야. 하기와라.

 

기와라 우시오: 아이고 이걸 어째? 카나리 친구가 한 명 줄었네. 그럼 야가미. 네가 나서!

 

가미 토가: 제가 생각하기에 전 지금 나설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유즈미 나데시코: 괜찮아. 꿈인 거 알았으니까 됐어. 좀 무서운 꿈이긴 했어도

 

마유즈미는 침낭 안에서 몸을 빼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야가미에게서도 위로의 말을 듣는 건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도리카와의 살인범이니.

 

리 레이코: 무슨 꿈을 꾸었길래 그러지?

 

밧줄을 푸느라 뒤늦게 마유즈미에게 다가온 모리가 물었다.

 

마유즈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누군가가 자신에게 그건 네 삶이 아니고 네 자리에는 내가 있어야 했다며 소리치는 꿈을 꿨다고 말했다. 그리고 삶을 내놓으라는 말까지. 내용을 설명하는 동안 그녀의 얼굴이 공포에 서서히 창백해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무로 시라베: 삶을 내놓아라…?

 

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이게… 무슨 뜻일까? 넌 이런 분야에 별 흥미가 없겠지만… 내 꿈이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까?

 

무로 시라베: 꿈은 네가 억누르고 있는 무의식이거나 그림자일 뿐이야. 굳이 신경 쓸 필요 없어. 재미없는 영화를 한 편 봤다고 생각해.

 

유즈미 나데시코: 그렇지만 너무 기분이 나쁜걸

 

리 레이코: 그냥 잊어버려라. 꿈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무로 시라베: 모리의 말이 부분적으로 옳아. 꿈은 모든 것을 의미하던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던가. 둘 중 하나야. 네 꿈이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어?

 

마유즈미는 고개를 저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아니. 애초에 그 여자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안 보였는걸.

 

무로 시라베: 그럼 아무것도 아닌 거지.

 

유즈미 나데시코: …알겠어! 납득했어!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꿈에 투영되는 이미지는 땅에서 그저 솟아나지 않는다.

 

아무리 이상하고 별난 꿈이더라도 그 뿌리가 있기 마련이었다. 친구가 나오는 꿈을 꾸려면 친구가 있어야 하고, 음식을 먹는 꿈을 꾸려면 그 음식을 먹어 봐야만 했다. 물론 그런 것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꿈도 있겠지만, 마유즈미가 스스로를 온전하게 의식할 수 있는 상황에서 꾼 꿈이라면 분명 그 원형이 있을 터였다.

 

모두 자신만의 무의식과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삶을 내놓으라고 그녀에게 소리친 커다란 빙산은. 대체 어디에서 유래된 것이지?

 

 

 

 

23T5U130

 

인공지능. 카텟 기관의 일원이며, 내 친구이기도 했다… 23T의 말에 의하면.

 

엄밀히 말해 23T는 단순한 인공지능이 아니라, '노바디'라는 이름의 사람이 변모한 존재에 가깝다. 사람이 기계가 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다만 신경이 쓰이는 점은 과연 내가 노네임과 나를 같은 사람으로 인식할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23T는 노네임의 친구였다. 그러나 나는 모든 기억을 잃었기 때문인지. 노네임을 나의 과거라고 인식하기가 어려웠다. 내게 있어 노네임은 차라리 나와 똑같은 얼굴을 지닌 누군가처럼 느껴졌다. 23T는 도움이 되었고 또 의지할 수 있는 존재지만… 내 친구일까?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내가 23T의 전용실에서 송출된 영상을 보고. 기억을 떠올린 뒤… 이상하게 23T의 태도가 차가웠던 것으로 느낀 건 내 착각일까?

 

그리고 데이터 쪼가리라니. 내가 그런 말을 직접 했다고? 나와 23T는 분명 친구였을 텐데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호감도 측정

23T의 호감도: 불명

-50=원수 / -30=앙숙 / -15=상극 / 0=무관계 / +15=친구 / +30=연인 / +50=배필

 

 

 

동맥경화식 연재법 ON

 

두 번째 시련으로 가즈아

 

늘 사랑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