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대로 모니터실에 남았다. 캐롤 씨와 이바라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모니터실에서 해변의 상황을 살피고 후루미나미도 감시하는 인원은 나, 토키와, 23T로 세 명이었다.
나나시: 23T. 정말 휴식 안 해도 괜찮겠어?
23T5U130: 괜찮아. 난 기계야. 휴식은 필요도 없고 의미도 없어.
23T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나는 왜인지 석연치 않았다. 전자 회로가 잠시 방해되었을 뿐 기능에 문제가 없다고 해도 분명 어느 정도는 부하가 걸릴 텐데…
그렇다고 점검을 하기 위해 23T를 분해하거나 잠시 작동을 중지시키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애초에 23T를 어떻게 중지시킬지는 아무도 모르기도 했고, 기억에 없을 뿐 내 친구였는데 그런 제안을 하는 것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23T는 자신이 기계라고 말했지만. 나는 23T를 온전히 기계로 대할 수 없었다. 적어도 사람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기계라도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할 자격이 있을 테니까.
그런데 왜…
23T5U130: 그렇지만 지금의 난 사람이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지. 난 그저 데이터 쪼가리일 뿐이니까. 네가 내게 직접 한 말이었어. 나나시.
내가 정말 그런 말을 했다고? 심지어는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을, 과거의 내가 모를 리 없었다. 심지어 노네임은 23T(당시에는 인공지능이라 불렸지만)가 자기 친구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고, 23T를 노바디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난 노네임에게 원망을 보냈다. 너 대체 뭘 한 거야? 네가 한 일 때문에 나는 지금 난처한 상황에 놓여 있단 말이야… 라며 불평해봐도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후루미나미의 동향을 감시하는 일은 당연히 즐겁지 않았다. 후루 미나미의 입을 막아놓는 건 어떻냐고 토키와가 제안했지만, 그가 후루미나미의 숙소에서 테이프를 하나 구해올 때 까지도 후루미나미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이제 1대 2네?
나나시: …….
후루미나미 나몬: 이 방 안의 캐롤의 신봉자 한 명. 불신자 두 명. 곧 2대 2가 되겠지. 언젠가는 1대 3이 될 수도 있어. 0대 4만큼은 안 됐으면 좋겠지만 정작 그녀가 손을 쓰면 옛 저녁에 전부 끝이었겠지
후루미나미 나몬: 그럼 자유의지는 없을지라도 모두 안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누군가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라고 한들 그런 처지로 만족하는 사람도 있을 거 아니야? 누구처럼.
나나시: 그런 비약을…
후루미나미 나몬: 대답하는 거야?
내가 입을 다물자 후루미나미는 탄력을 받은 듯이 계속 말을 늘어놓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지금 당장 위험한 건 나일 수도 있어. 그래. 난 당장 인플레이션의 권한을 쥐고 있지. 살인에도 꽤 영향을 미쳤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대로 몇 주일이 지나도. 몇 달이 지나도 내가 가장 위험할까?
후루미나미 나몬: 너에게 묻는 거야. 23T.
23T는 후루미나미의 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내가 23T의 반응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후루미나미의 말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너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잖아. 너는 그녀에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대항마야. 철의 몸을 가지고 있으니 터치가 통하지 않을 거라고.
나나시: 후루미나미. 그만 못 해?
후루미나미 나몬: 위기감 느끼는 것좀 봐. 23T. 너는 위기감 안 느껴? 언젠가는 움직여야 할 거야. 저런 전능한 힘과 부대끼면서 캐롤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것들은 그녀에게 반했거나, 생각이 없을 뿐이지.
후루미나미 나몬: 넌 둘 다 아니잖아. 23T. 넌 애초에 캐롤과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어. 애초에… 누구와도 될 생각이 없고.
23T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대단한 인내심과 무심함이었다. 나는 작은 도발에도 못 참고 말을 걸었는데…
어쩌면 인내심의 문제가 아니라 후루미나미의 말에 대해선 그저 신경 쓰지 않을 뿐일지도 몰랐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렇지만 네 옛 친구라던 나나시만큼은 그녀의 마수에서 구해야 하잖아. 이대로 그가 마음을 뺏긴 채이긴 너도 원하지 않을 거야. 더 마수가 뻗치기 전에… 네가 수를 써야 해.
23T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렇게 미뤄 둔다고 해도 진실은 사라지지 않아.
정말 견디기 어렵다고 느낄 때쯤 모니터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테이프를 손에 쥔 토키와가 나타났다.
토키와 아유키: 나 왔어. 얼마나 어지럽혀져 있던지 테이프 하나 찾는 것도 고되더라.
나나시: 어서 와! 토키와.
후루미나미의 피 말리는 화술에는 질려가던 참이기에 그의 등장이 내겐 반가웠다. 또 테이프의 등장 또한 그 못지않게 반가웠다. 후루미나미의 입이 막힌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가까스로 안심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아. 테이프? 테이프 좋지. 고전적이야.
토키와 아유키: 그래. 입을 막는 수단 치고는 고전적이지… 하도 시끄러우니까 어쩔 수 없었어. 말을 못 한다고 죽는 건 아니니까 잘 버텨 봐.
토키와가 테이프를 주욱 뜯어 그녀에게로 다가가자. 후루미나미의 눈동자에 순간 공포가 서렸다. 그녀는 밧줄로 묶인 몸을 발버둥 치며 놀랄 정도로 결백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이 나쁜 놈들! 그만 못 해?! 그만해! 그만 하라고!
토키와 아유키: 가만히 좀 있어. 후루미나미!
토키와가 당황하자 나도 그에게로 다가가 후루미나미의 발을 붙잡았다. 흔들림은 조금 멎었지만 여전히 상체 쪽은 저항이 심했다.
나나시: 아니 정말…!
후루미나미 나몬: 그만… 그만 하란 말이야…
몸을 비틀며 그만 하라고 소리치던 후루미나미는 이윽고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얼씨구!
나나시: 울지 마! 기분 이상해지잖아!
후루미나미 나몬: 너흰 진짜 나쁜 것들이야. 짐승만도 못한 것들…! 살려줘. 살려 주세요!
후루미나미가 눈물을 흘리며 도움의 손길을 애원했다. 아 진짜 마음 약해지려고 하는 내 약함에 진절머리가 나올 정도였다!
23T5U130: 도와 줄까. 토키와?
23T가 마침내 입을 열고 후루미나미에게로 다가갔다. 23T가 다가오자 후루미나미는 히익 하고 겁에 질린 듯한 소리를 내더니 더욱 세게 발버둥을 쳤다.
토키와는 한숨을 쉬며 테이프를 23T에게 건넸다.
토키와 아유키: 부탁할게… 후루미나미는 정말 대책 없는 사람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꺄아아아아악!
후루미나미의 비명은 머리를 고정시키고 순식간에 테이프를 붙인 23T의 손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그럼에도 후루미나미는 계속 목소리를 내려 애썼다. 솔직히. 연기란 걸 알고도 애처로워 보일 정도였다.
후루미나미 나몬: 우웁! 우우웁…! 우웁… 웁!
후루미나미 나몬: 흐웁… 흐우… 흐… 흐훕…
나는 차라리 입을 막지 않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몇십 분 동안 그 애처로운 소리를 계속 들어야만 했다.
몇십 분이 지난 다음 후루미나미는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솔직히 그때부턴 조금 버틸 만했다.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자정이 되자 토키와는 내게 이만 숙소로 돌아가 보라고 말했다.
나나시: 진심이야? 나도 새벽까지는 여기 있을 수 있는데.
토키와 아유키: 묶인 사람은 감시할 필요도 별로 없어. 너는 오늘 몸을 심하게 다뤘잖아. 로봇에 매달리느라… 사양할 거 없어. 이만 가 봐.
나나시: 그래도 너는…
토키와 아유키: 나는 아까 자서 이젠 살만해. 이만 가. 좋은 꿈 꾸고.
토키와는 매몰차다시피 한 태도로 내게 말했다. 내가 모니터실을 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배려로 받아들였다. 토키와는 빈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23T와 토키와에게 인사를 한 뒤 모니터실을 나왔다. 23T는 내게 손을 흔들었지만 잘 가라거나 잘 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23T와 친했다고 그런 걸 신경 쓰냐고 묻는다면… 글쎄. 과거부터 친해왔지 않았던가. 그리고 얼마 전까지도 꽤 의지할 수 있는 동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3T의 머리에서 나온 영상으로 기억을 되찾자마자 23T의 태도는 묘하게 달라졌다.
내가 뭘 잘못했나…?
그 일에 대해선 일단 머리에서 지워둔 뒤. 나는 그 뒤부터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적어도 나에겐 일사천리로 느껴질 만큼 나는 재빨리 여러 일을 처리했다.
전용실에서 도청 수신기를 내 숙소로 옮겨 놓은 뒤, 나는 도청기를 가진 채 카지노로 후다닥 달려갔다. 휴게실로 향하는 데에는 카지노 쪽이 빠를뿐더러 다른 이에게 들킬 확률이 낮았다. 6층으로 올라갔다간 23T나 토키와. 심지어는 후루미나미에게도 내 움직임을 들킬 수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시끄러운 음악과 색깔이 지배하는 장소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혹시 몰라 카지노의 도박 기기들을 둘러보며 달려갔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휴게실을 벌컥 연 뒤 나는 덮개가 있는 장소를 기억하며 바닥을 더듬거렸다. 작은 홈에 손톱을 끼워 넣고 바닥의 뚜껑을 열자 사다리가 나타났다.
나는 사다리를 미끄러지다시피 하며 내려갔다. 날 쫓을 사람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난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고 느꼈다. 아무런 징조가 없었는데도 그랬다. 그것은 유령에게 쫓기는 기분이 아니라… 유령의 유령에게 쫓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컨베이어 벨트에 발 빠르게 도착한 뒤에. 나는 쪽지를 묶어둔 도청기를 벨트에 얹어 실어 보냈다.
그것으로 모리는 내 도청기를 받게 될 터였다. 그러면 나는 해변의 상황을 속속들이 알게 되는 셈이었다. 모리가 상황을 전달해줄 수 있으니 송출기가 없더라도, 모니터실에 없더라도 충분히 해변에 간섭할 수 있었다.
나나시: 이제 됐어…
만족감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다시 내 숙소로 향하기 위해 사다리를 올랐다. 마지막 사다리를 오를 때에는 숨이 가빠오는 게 격렬히 느껴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헐떡이며 덮개를 연 뒤 휴게실 안으로 몸을 꺼내자마자…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왜 바닥에서 나오시는 건가요?
카지노에서 휴게실로 들어오려는 캐롤 씨와 마주쳤다.
나나시: 앗…!
나는 놀랐지만, 화들짝 놀라서 팔을 파닥거리지는 않았다.
나나시: …헉… 헉… 안녕하세요?
캐롤 브라이트: 저야… 안녕하죠.
엄청나게 어색한 침묵이 나와 캐롤 씨 사이에서 맴돌았다.
잠시 호흡을 잊자 눈앞이 핑핑 도는 듯한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나는 휴게실로 다리를 꺼내고선 숨을 몰아쉬며 내 얼굴에 묻은 땀을 어색하게 닦아냈다.
캐롤 브라이트: 어떻게 바닥 속에서 나오신 건지 모르겠어요.
나는 전신이 뻣뻣해질 정도의 뻘쭘함을 느끼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나나시: 저기… 일단 카지노에서 대화해도 될까요?
캐롤 씨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캐롤 브라이트: 카지노로 에스코트라니 의도가 너무 투명하시네요. 저랑 놀고 싶으세요?
나나시: 부끄러우니까 그런 말 마시고… 6층으로 나갔다간 모니터실의 누군가와 마주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요.
캐롤 브라이트: 놀려서 죄송해요. 반응이 재미있으니 주체할 수가 없네요. 그럼… 카지노에서 얘기를 계속할까요?
앞선 캐롤 씨의 뒤를 따라 나는 카지노로 향했다. 당연히. 후루미나미는 없었다. 후루미나미는 모니터실에 묶여 있었다. 이바라는 자고 있을 테고 23T와 토키와, 후루미나미는 모니터실. 카나리와 칸나즈키는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방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즉 나는 캐롤 씨와 단 둘이서 카지노에 있었고 누군가가 카지노에 찾아올 확률은 무척 낮았다.
아. 이런 거 의식하면 안 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롯머신의 앞에 앉았고, 캐롤 씨가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캐롤 브라이트: 이런 거 좋아해요?
나나시: 많이 좋아하진 않아요. 그냥 시험 삼아… 해 보는 거죠.
나는 100크레딧 세 개를 슬롯머신에 넣고 게임을 시작했다. 사과. 오렌지. 포도. 체리. 쿠키. 그리고 7이 세 줄을 이루어 교차되며 어지럽게 돌아갔다.
캐롤 브라이트: 저도 한 판 해 볼까 봐요. 그림을 맞추면 넣은 크레딧에 비례해서 크레딧이 지급되는 게임이었죠. 아마?
나나시: 네. 그림을 맞추는 전제 하에 더 많은 크레딧을 벌 수 있죠. 안에 크레딧이 있다면의 얘기지만요.
나는 레버를 세 번 당겼다. 사과 한 줄이 만들어졌고, 서른 개의 크레딧 동전이 슬롯머신의 배출구 밖으로 떨어졌다.
캐롤 브라이트: 솜씨가 있으시네요.
나나시: 과거에 이런 게임을 해봤을지도 몰라요. 기억이 없을 뿐… 혹시 모르죠. 만들어봤을지도. 모노로그. 이 크레딧 내 계좌 안에 넣어 줄래?
모노로그: 그렇게 하지.
허공에 대고 얘기하자 모노로그가 바닥에서 쑤욱 솟아오르고선 입을 쩍 벌렸다.
나나시: …이거 뭐 하자는 거야?
모노로그: 넣어라.
농담하는 건가 싶어 나는 모노로그의 눈을 들여다보았지만, 모노로그는 입을 벌리고 있는 게 피곤하다는 듯이 몸을 살짝 위로 까딱일 뿐이었다.
반신반의하며 나는 두 손 안에 크레딧 동전을 담고 모노로그의 입 안으로 쏟아 넣었다. 모든 동전을 집어삼킨 모노로그는 꺼억 소리를 내더니(웩) 다시금 바닥 속으로 스르르 사라졌다.
캐롤 브라이트: 이럴 때는 모노로그 씨도 꽤 고분고분하시네요.
나나시: 살인 게임만 끝내 주면 매일매일 불같이 화를 내도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캐롤 브라이트: 아까 제게는 나나시 씨가 저렇게 이동하신 것처럼 보였어요.
나나시: 되게 이상하게 보였겠네요…
캐롤 브라이트: 그래서 정말 놀랐어요. 그런 식으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거짓말.
캐롤 브라이트: 그래서… 어떻게 바닥을 통과하신 건가요?
나는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캐롤 씨의 머리카락 묶음을 꺼냈다.
후루미나미의 숙소를 수색했지만, 우리는 그녀의 도청 수신기를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아마 우리가 찾을 수 없는 곳에 이미 숨겨두었을 테고, 곧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도청의 가능성을 최대한 낮추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 같았다.
캐롤 씨는 내 얼굴과 자신의 머리카락을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머리카락을 꽉 붙들자 몸에 찌릿하는 감각이 퍼져나갔고, 내 머리에는 캐롤 씨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캐롤 브라이트: "말씀하세요."
난 그녀에게로 목소리를 쏘아 보냈다.
나나시: "휴게실의 지하에 있는 건 크레딧으로 살 수 있는 물품이 배송되는, 하나의 커다란 창고예요."
캐롤 브라이트: "창고요?"
나나시: "네. 커다란 자판기처럼 온갖 물건이 안에 빽빽하게 쌓여 있어요.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야 할 정도로요."
나나시: "그리고 그곳에 컨베이어 벨트 하나가 놓여 있는데, 그 안으로 물품을 넣으면 그 사람에게로 해당 물품이 전해져요. 아마 이게 후루미나미가 얻은 보급 특권의 권리인 것 같아요."
캐롤 브라이트: "그럼… 엄청난 발견이에요!"
캐롤 씨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생각만으로 말을 전할 수 있지만 순간 그걸 잊을 정도의 놀라움 탓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나나시: "그렇죠. 이제 후루미나미는 모니터실에 갇혀 있으니까 제가 보급 특권에 접근한 것도 모르고 있겠죠. 알고 있다고 해도 절 막을 순 없을 거예요. 그럼 살인 게임의 판도 자체가 바뀌겠죠."
나나시: "크레딧을 많이 쓸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이점을 살릴 수 없게 묶였고, 그녀의 권리를 제가 쓸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제가 그녀의 보급 특권에 접근했다는 게 밝혀지면 분명 이점을 이용할 수 없을 테니까… 몰래 움직일 수밖에 없었어요."
캐롤 브라이트: "그랬군요… 이해가 되네요."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선 자판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캐롤 씨는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자판기에 크레딧을 넣었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도 자판기에 관심을 가지시나 봐요?
나나시: 후루미나미가 붙어 있으니 느낌이 좋지 않았거든요. 왜인지는 몰라도 위험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죠. 후루미나미는 위험한 일을 벌이기 위해서만 행동하니까요.
자판기의 버튼을 누르자 덜컹이는 소리와 함께 배출구로 물건이 하나 떨어졌다. 캉 하는 금속성의 소리가 들렸다.
배출구로 나온 물건은 동전보다 조금 큰 크기의 금속 배지였다.
…카?
캐롤 브라이트: 이건 또 무슨 물건일까요?
캐롤 씨가 어느새 내 등 뒤에서 묻자 나는 그녀와 배지를 번갈아서 보며 고민하다가, 그녀에게 배지를 건넸다.
나나시: 음… 이거 가지세요. 캐롤 씨 드리려고 자판기 돌린 건데 가치 있는 물건이 아닌 것 같아서 아쉽네요.
캐롤 브라이트: 그럴 리가요! 감사한 마음으로 받을게요. 당신이 준 선물이니까 저에겐 가치가 있어요.
나나시: 맞아요. 선물… 이죠.
나나시: 선물이기도 하고… 사실은 입막음의 값이기도 해요. 통할지는 모르겠지만요.
캐롤 브라이트: 입막음이요?
나나시: 제 뒤를 봐주시고 본 것에 대한 입막음 말이에요.
사실 나쁘게 말하면 미행이겠지만, 캐롤 씨를 앞에 두고서 그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캐롤 씨는 흠칫 움직임을 멈춘 뒤 내 표정을 읽었다. 그것만으로 내 이론은 증명되었다. 읽어야만 했던 이유는 내가 제대로 짚었기 때문이었다.
캐롤 씨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캐롤 브라이트: …알아채셨군요.
나나시: 따라오시는 걸 느낀 건 아니에요. 따라오셨을 거라고 추측한 거죠. 기척 자체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으니… 아마 다른 사람한테도 들키지 않았을 거예요.
캐롤 브라이트: 네. 만약 누군가가 다가오면 크레딧을 벌기 위해 도박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끔 슬롯머신 앞에 계속 앉아있었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죠. 주변엔 아무도 안 계셨으니까요.
나나시: 왜 그러셨어요. 캐롤 씨?
이야기가 좋지 않게 흘러가 유감이었지만 나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나나시: 몰래 절 따라오신 게 이번이 처음인 거 저도 알아요. 사실 저희 사이에 어떻게 비밀이 오래 있겠어요.
터치는 정신이 하나로 묶이는 일이다. 그것은 터치 당시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터치 당시에만 이해할 수 있고, 터치 당시에만 떠오르지만 끊기면 잊어버리는 일도 있었으나 터치가 끊어져도 몇몇 것들은 이어지곤 했다.
서로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일은 필연적으로 서로를 향한 깊은 이해심을 동반했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상대에 대한 일을 알아낸다기보다는, 상대도 모른 채 보이는 사소한 행동. 말투.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읽어내는 일에 가까웠다.
나나시: 무엇보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카지노에서 휴게실로 들어오는 건 너무 작위적이었어요.
나나시: 나쁜 의도로 하지 않으신 걸 아니까 말씀해주세요. 왜 저를 따라오신 건가요?
캐롤 씨가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자 나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나나시: 선물은 마음에 드세요?
캐롤 씨는 살짝 고개를 들고 조용히 말을 꺼냈다.
캐롤 브라이트: 네. 당신이 저를 위해 준 걸요.
나나시: 그럼 다행이네요. 사실 값이 모자랄까 봐 좀 걱정했어요. 만약 모자란다면 하나 더 뽑을까요?
캐롤 브라이트: 아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캐롤 씨는 배지를 주머니에 넣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캐롤 브라이트: 여기서는 불편하니까… 제 방에서 계속 이야기할까요?
나나시: 캐롤 씨도 에스코트의 의도가 너무 투명한걸요.
캐롤 브라이트: 그런 말 마요… 이런 기분이셨군요. 꽤 부끄럽네요.
사실. 말하는 입장에서도 부끄러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내 기억에 따르면 그것이 캐롤 씨의 숙소로의 두 번째 방문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은 첫 방문과 똑같았지만, 모든 게 같지만은 않았다. 조금의 위기감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할 순 없었다.
모든 미행이 악의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행 다음에 이루어지는 일에는 보통 악의가 실려 있다. 나와 토키와, 마유즈미를 지키겠다고 선언한 그녀였으니 내게 해코지를 할 심산은 없을 터였다. 만약 그랬다면 내가 누구보다 먼저 그녀의 진위를 느꼈으리라. 입 안의 음식에 첨가된 유리가루를 알아채는 것처럼.
그런데. 왜?
내가 물어야 할 건 무슨 짓을 할 생각이냐가 아니라 왜 그랬느냐였다. 내가 어디에 향하는지도 몰랐으면서 일단 따라와 봤던 거라면 왜 굳이 그래야 했느냐가 가장 알고 싶었다.
나는 침대에 앉아 있는 캐롤 씨를. 책상 의자에 앉은 채로 가만히 바라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캐롤 씨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녀의 입에서 힘겹게 말이 흘러나왔다.
캐롤 브라이트: …제게 실망하셨나요?
나나시: 미리 그러지는 않았어요. 솔직히… 소름이 끼치긴 했지만요.
분명 내가 카지노를 둘러보았을 때는 아무도 없었는데 내 뒤를 따라 카지노에 들어온 뒤 우연히 그 순간 휴게실로 들이닥칠 확률은 낮았다. 그래서 난 캐롤 씨를 마주쳤을 때 그녀의 미행을 깨닫고 약간의 오싹함을 느꼈다.
그러나 소스라치게 놀라지는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가 내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할지언정 느끼고 있었다. 인지적인 영역으로까지는 확장되지 않을지언정 나는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터치… 이어진 정신 때문일지도 몰랐다.
계속 터치를 했다간 우리 둘의 자아가 완전히 합쳐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사실 없지만은 않았다. 캐롤 씨의 표정이 아까부터 어두운 것은 단순히 자신의 미행이 들켰기 때문만이 아닐지도 몰랐다. 혹시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생각들이 그녀에게로도 빨려 들어가는 것일까?
나나시: 저에게 숨기는 일이 있으신 건 아니잖아요?
캐롤 브라이트: 그건 아니에요.
나나시: 저도 알아요. 그렇지만 제가 아는 게 아니라 믿는 걸지도 모르죠. 그래서 알려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지 않으면 몰라요.
캐롤 씨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캐롤 브라이트: 오늘… 아니. 어제는 무척 용기 있으셨어요. 나나시 씨. 그 상황에서 두 분을 붙잡기 위해 몸을 던지셨어요.
나나시: 용기보다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 일에 가까웠는걸요.
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그게 사실이었다. 나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우선 후루미나미에게 매달렸다. 두 사람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과 23T를 정지시킨 것에 대한 화가 합쳐졌을 뿐. 용기보다는 만용에 가까웠다.
그리고 내가 아는 것이라면 캐롤 씨도 알 터였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내 바보짓을 보았으니까…
캐롤 브라이트: 맞아요. 당신은 아무 생각도 없었어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면서 일단 달려들었어요. 그 두 사람이 지레 겁을 집어먹고 로봇에서 내려오기를 바라셨겠지만 통하지 않았죠.
캐롤 브라이트: 거기서 떨어지셨으면 몸의 어딘가가 부러지셨을 거예요. 목이 부러지셨다면 즉사였겠죠. 다른 곳이 부러져도 부상은 오래갔을 테고요.
캐롤 브라이트: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몸을 던졌죠.
캐롤 씨가 장갑을 낀 자신의 두 손으로 손깍지를 만들곤 내려다보았다.
캐롤 브라이트: 사실. 좀 무서웠나 봐요. 당신이 어떻게 될까 봐.
나나시: 또 과감한 짓을 저지를까 봐 따라오셨단 말인가요?
캐롤 씨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의기소침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런 목소리는 처음 들어볼 정도로 우중충하게 들렸다. 평소의 그녀가 태양이라면 구름에 비유될 수 있을 만큼 어둡고, 또한 축축했다.
캐롤 브라이트: 한심하죠? 당신들은 내가 지킬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으면서 아무것도 못 하고, 위만 바라보고 있다가. 뒤늦게 당신 뒤나 캐는 내 모습이요.
나나시: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다고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울며 징징거리는 것도 한심한 일이죠.
캐롤 씨는 웃지 않았다.
나나시: 저를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렇지만 매복은 이걸로 끝내시면 좋겠어요.
캐롤 브라이트: 당연하죠. 이제 그만둘게요. 사실 제가 의심병 환자가 된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거든요. 이런 비유를 써도 되나 싶지만 의부증에 걸린 것처럼…
나나시: 쓰면 안 될 것 같아요.
나는 재빠르게 말했다.
아… 그냥 말리지 않을 걸 그랬나?
캐롤 브라이트: 그럼 쓰지 않을게요. 걱정이 된다면 이렇게 직접 말하는 편이 좋았을 거예요. 당신 뒤를 쫓기보단.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나 머리가 아파왔는데. 어떻게든 수습이 되는구나… 하는 안도감이 퍼져나갔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해 지끈거려오던 머리도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나나시: 아무리 걱정하셨어도 보급 특권만큼은 계속 숨겼을 거예요. 숨겨야 하니까요.
캐롤 브라이트: 조금 의아하네요? 보급 특권을 숨기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다른 분들께도 보급 특권에 대해 언질을 드리면 전부가 후루미나미 씨의 특권을 공유할 수 있을 텐데요.
나나시: 그건… 정말 개인적인 이유인데요.
캐롤 씨는 말해보라는 듯이 턱을 끄덕 움직였다.
캐롤 브라이트: 어려우시면 굳이 말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나나시: 그런 개인적인 이유가 아니라… 다른 모두를 믿기가 어려워서요.
그랬다.
후루미나미와 카나리마저 서로를 믿을 수 있었지만, 나는 섣불리 다른 사람을 믿기가 어려웠다.
나나시: 또 누가 후루미나미와 내통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요. 또 누가 모노로그의 내통자일지 모르고요.
캐롤 브라이트: 토키와 씨나 23T 씨마저도요?
나나시: 여지를 준다면 어디라도 새어나갈 수 있는 게 정보인걸요. 저는 아무리 보급 특권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 해도, 후루미나미가 알아채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비밀은 새어나가지 않을수록 좋은 법이니까요.
나나시: 또 탑의 모두는 그저 잠시 뜻이 맞아서 함께 행동하고 있는 거죠. 아직 저는 탑의 모두를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라면 없다는 쪽이에요. 서로 믿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 제 자신도 전부 믿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을 어떻게 믿겠어요?
캐롤 브라이트: 확실히… 힘든 일이죠.
나나시: 제 생각에 탑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단순한 협력 체계가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결속이 필요해요. 더 강한 유대감이요. 그게 언젠가는 생겨나겠죠. 지금도 서서히 생기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게 완성되기 전까지는… 믿기가 힘들어요.
나나시: 사실 저는 당신도 믿지 않아요. 캐롤 씨가 상대라면 속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뿐이에요.
캐롤 브라이트: 저는 당신을 믿어요.
나는 캐롤 씨의 즉답에 이기적인 놈이 된 죄책감을 느꼈다. 캐롤 씨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라는 듯 주머니에서 자신의 다이얼로그를 꺼냈다.
캐롤 브라이트: 미행한 입장에서 뻔뻔하게 저를 믿어달라고는 하진 않겠지만, 저는 몰라도 진실만큼은 믿을 만하지 않겠어요?
나나시: 무슨 말씀을…
캐롤 씨가 다이얼로그 화면을 조작하더니, 다이얼로그를 내 쪽으로 들고 화면을 보여주었다.
다이얼로그의 화면에 떠오른 내용은…
< 당신의 경주마는 나이토 유즈루입니다. >
놀란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나시: 캐롤 씨?! 왜… 왜 이걸 저에게?
캐롤 브라이트: 제가 보급 특권에 대해 떠들고 다닌다면, 나나시 씨도 이걸 떠들고 다니세요. 그럼 제 입지는 좁아질 테고 당신 입장에서 견제하기도 편해질 테니까요.
캐롤 씨는 다이얼로그를 다시 자신의 쪽으로 가져왔다. 과감한 그녀의 제안을 본 나는 기가 막힌 나머지 잠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나나시: 느닷없이 상호확증파괴 전술을…
캐롤 브라이트: 공동의 파멸을 향한 두려움이 평화를 불러일으킨다면, 기꺼이 두려워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거예요.
캐롤 브라이트: 당신의 말 한마디면 캐롤 브라이트는 누군가의 방해 공작을 통해 나이토 유즈루가 죽을 때 함께 죽겠죠. 쉽게 제거될 거에요. 그러니… 보급에 대해서는 이렇게 매듭을 짓는 것으로 하죠.
나는 조금의 공포도 없이 평상시의 말투로 말하는 캐롤 씨를 보며 거의 감탄까지 했다. 그녀는 평상시에 온화하고 여유롭지만, 이따금씩은 놀라울 정도로 화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칸나즈키 시노부: 그리고 캐롤은 불이다.
칸나즈키 시노부: 하지만 여느 불이 그렇듯이. 그녀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간 화상을 입게 될 게야.
…나. 너무 가까이 있는 걸까?
캐롤 브라이트: 그리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자면, 23T와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나나시: 역시 묘하게 태도가 달라진 것 같죠? 캐롤 씨도 느끼셨죠?
캐롤 브라이트: 묘하게 달라진 정도가 아니던걸요. 두 분 사이에 큰 마찰이 있었던 걸까 싶었어요.
역시 다른 사람이 느끼기에도 그렇구나. 나와 23T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나나시: 23T가 제게 자신의 기억을 보여줬어요. 카텟 기관에 있던 시절의 기억 같은데, 제가 그걸 보고선 계기로 제 옛 기억을 조금 떠올렸어요. 그 뒤로는 저를 조금 멀리하는 것 같아요.
캐롤 브라이트: 제가 듣기로는 특정한 계기가 없는 것 같은데요… 신경 쓰이는 사건은 없으신가요?
나나시: 사실 하나 있어요. 과거의 제가 23T를 데이터 쪼가리라고 불렀다고…
캐롤 씨의 눈썹이 쓰윽 위로 올라갔다.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적잖이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심하게 말씀하셨네요. 여태까지 원만히 참아오신 게 대단할 정도로… 당신이 기억을 떠올린 뒤에야 그렇게 말하신 게 마음에 걸리긴 하네요. 왜 이제 와서…?
나나시: 아니. 애초에 전 그런 말 한 적이 없어요! 정확히는 기억이 없는 거긴 하지만…!
캐롤 브라이트: 과거의 당신이 할 말이라지만, 당신은 기억이 없으니… 책임을 지는 게 달갑지만은 않으시겠죠. 이해해요.
캐롤 씨는 더 말하지 않았다.
더 말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나나시: 그래도 어쩔 수 없겠죠. 어떻게든 제가 잘못한 걸 되돌려야죠. 저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캐롤 브라이트: 아쉽지만 전 당신을 도와드릴 수 없어요. 제가 관련이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23T 씨에 대한 일이 아니라면 제가 가능한 한 도와드리겠지만…
나나시: 당연하죠. 저희가 카텟 기관에서 만나본 적이 있는 것도 아
히무로와 비슷하게. 묘하게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을 주었지만 그렇기에 더 이질감이 들었다. 이미 만나본 사람 같은데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나시: …닌걸요…?
캐롤 브라이트: 왜 그러세요?
나는 이제 와서 이 가능성을 떠올린 내가 바보 같다고 느꼈다. 캐롤 씨는 나와 만나본 듯한 기색이 없었고 23T와 히무로에게 생각이 쏠렸다지만. 어떻게 이걸 잊을 수 있지?!
나나시: 캐롤 씨. 혹시 절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드세요?
캐롤 씨는 고개를 저었다.
캐롤 브라이트: 아뇨. 전 당신을 이 탑에서 처음 만났어요.
나나시: 저는 이 탑에 왔을 때 당신을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와서 보면. 캐롤 씨를 카텟 기관에서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캐롤 브라이트: 제가 카텟 기관에요…?
나나시: 아. 캐롤 씨는 기억이 없으니 아닐 수도 있지만요.
캐롤 씨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이 자신의 턱을 잡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점점 내 안에서 떠오르는 이 가설이란… 나나시가 카텟 기관을 적대하는 입장에서 게임에 참가했다는 거야.
캐롤 브라이트: 제가 만약 나나시 씨와 함께 행동했다면, 그래서 면식이 있는 거라면…
캐롤 브라이트: 그럼 저도 당신과 같은 입장에서 납치된 걸까요…?
나나시: 이미 같은 입장인걸요. 서로 기억을 잃고 살인을 강요당하고 있으니까요. 전 모든 기억을 잃었다는 것 정도가 차이점이겠죠.
캐롤 브라이트: 저도 당신처럼 특정한 기억들을 떠올리지 못하는 걸 수도 있어요. 만약 그렇다면 빨리 떠올려야 할 텐데요.
캐롤 브라이트: 카텟 기관에 소속된 당시의 기억을 제가 모르고 있었다면. 이 탑에 계신 모든 분들 또한 카텟 기관과 연관되어 있지는 않을까요?
나나시: 설마요. 초고교급 학생들은 꽤 희귀했을 텐데, 이 탑으로 납치된 모든 초고교급들이 카텟 기관과 연관이 있을 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만약 그렇다면…
나나시: 모노로그마저 카텟 기관과 관련이 있다고 해도 놀라울 일은 없을걸요.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막상 내뱉고 보니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캐롤 씨 또한 웃지 않았다.
콰아앙!
은신처 전체가 흔들렸다.
"침입자가 있어. 노바디!"
"나도 알아! 경보 울리잖아!"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나와 노바디의 얼굴에 붉은빛이 비쳤다. 나는 허둥지둥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다시피 하다가. 주변에서 쇠파이프 하나를 챙겨 들었다.
노바디가 내게 소리쳤다.
"쇠파이프 내려놔. 총을 들어! 저쪽에도 총이 있을지 모르니까!"
"벙커 문을 따고 들어오다니 대체 뭐 하는 폭도야? 전기톱을 가지고 와도 미끄러지는 반구(半球) 형 티타늄인데!"
"벙커를 딴 게 아니야. 입구 주변의 땅을 판 다음 통로에 구멍을 낸 거지."
멀리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폭도들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폭도를 피해서 도망 왔어요. 살려주세요. 그런 말에 속아 받아주던가 벙커 문을 여는 순간 숨어있던 어깨들이 나타나 슈슉. 퍽. 퍽. 빠직. 푹. 푹. 푹. 푹. 푹 꺄아아악 으아아악
나는 노바디가 전기작살총을 꺼내 드는 것을 보며 놀랐다.
"노바디! 그거 아직 출력 저하 안 시켰잖아. 사람한테 쓰면 죽어!"
"어쩔 수 없어 노네임. 그리고 살인자는 사람으로 안 쳐!"
"살인자? 난 폭도 아니야. 난 걸스카우트야."
여성의 목소리는 서서히 가까워져 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스카우트하러 왔다는 뜻이지. 너희 둘을."
빨간 사이렌의 빛을 한 몸에 받으며 그녀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약간 더러워진 흰색의 실험실 가운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긴 백발이었다. 대몰락의 시대에 저렇게 순백의 옷을 입다니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이 분명했다. 머지않아 잔뜩 더러워질 게 분명한데…
"내 이름은 시라유키 히메리야. 히에 불 화(火)를 써서 히메리. 연구가지."
"시라유키 히메리…?"
노바디는 총을 내렸다가 퍼뜩 다시 시라유키 히메리라는 여자에게 겨누었다.
"그 이름 들어봤어! 폭주 기관차의 설계자. 맞지!"
"뭐? 블레인을 설계했다고? 쟤가?!"
나 또한 화들짝 놀랐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미친 기차를…
"정확히는 공동 기획자야. 블레인도 기관차가 아니고 정확히는 모노레일 열차고. 폭주 기관차라고 부르는 게 편하겠지만 뭐… 사실 별 상관은 없으니 기관차는 그대로 불러."
"지금 그게 중요해? 당신의 미쳐버린 기차 때문에 폭도들이 더 미쳐 날뛰고 있어!"
"그렇지만 희박지대와 방사능 오염 구역을 넘을 이동수단은 반드시 만들어져야 했어. 실제로 성능도 뛰어났는걸? 네 말대로 미쳐 버리기는 했지만 그전까지는 훌륭했지."
시라유키 히메리는 비무장 상태로 보였지만, 그럼에도 뒷짐을 진 채 서서히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생각이 모자란 것인지, 혹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생각을 하고 있는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폭도들이 언제 미쳐 날뛴 적이 없다고 그래? 그저 절망을 믿던 신도들이 기차를 믿는 신도로 변한 것뿐이야. 하는 일도 똑같지. 사람 죽이고 물건 부수고. 뭐… 알잖아? 서로 죽이고."
"머리에 나사가 풀렸나… 그걸 그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어?"
"할 수 있지. 죽음을 가볍게 말하는 게 아니라 가벼워진 죽음에 대해 말하는 거니까."
나는 시라유키 히메리의 말에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변질된 세상. 가벼워진 죽음.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죽음들. 알고 있던 사람들의 죽음.
처음에는 본명을 썼다. 본명을 쓰는 편이 아는 사람과 연락이 닿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노바디도 처음엔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만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았고… 서로를 만난 뒤에도 그것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한 번 큰 위기를 겪고 둘만 살아남은 뒤 우리는 뜻을 맞췄다. 이제 진명을 쓰지 않겠노라고, 진명을 알고 있을지언정 과거는 죽은 채로 두자고.
그렇게 이름 없는 두 사람은 누구에게도 이름을 주지 않은 채로 살아남아왔다. 고독한 요새 안에서.
"이 요새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언젠가 나와 비슷한 수법을 쓰는 사람들이 나올 거야. 알잖아? 두더지처럼 버틴다고 해도 언젠가는 끝난다는 거. 너희들은 초고교급이기도 하잖아. 초고교급 기술자와… 초고교급 엔지니어."
'기술자' 에서 시라유키 히메리는 노바디를, '엔지니어' 에서 시라유키 히메리는 나를 바라보았다.
"너희 소문을 많이 들었어. 노바디와 노네임. 지하벙커에 숨어 있다는 금속의 지배자 두 명. 도시를 정상화하려는 수많은 노력들. 감시 로봇 배치. 대규모 적외선 분사를 통한 폭도 색출. 호신용 테이저건 배포… 초고교급의 재림이라더군."
"우린 희망봉 학원한테서 연락 안 받았어. 중학생일 때 대몰락이 터졌다고."
"나도 그래. 그렇지만 일단 초고교급이라고 불리잖아? 그럼 초고교급이 되는 거야. 세간의 평가가 너희를 좌우하지. 네가 그럴 능력이 없더라도 말이야. 그럼 너희가 원하지 않더라도… 너희는 신경을 써야만 해.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초고교급 사냥의 표적이 되니까."
"너. 설마 사냥꾼이야?"
시라유키 히메리는 내 말에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를 바보로 알고 깔보는 듯한 웃음 같아서 불쾌했다. 심지어 그 오만함을 숨기려는 기색조차 없어 보였다. 총과 무기를 든 사람은 우리였지만 대화의 흐름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있는 것은 시라유키 히메리였다.
"사냥꾼? 하. 나도 초고교급이라 불려. 우리는 이분법적으로 나눌 때 같은 편이라고. 재능을 빼앗는 재단을 피해야 하는 동지."
"끼어들지 마. 우리의 같은 편은 서로밖에 없어."
노바디의 말에 우리 둘은 발을 움직여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동작이었다. 초식동물이 뭉치듯이 우리 둘은 위협으로 보이는 누군가에게 맞서 서로에게 의지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남아왔듯이.
"너희 둘은 이미 카텟이구나?"
"카펫?"
"카. 운명. 가지 않으면 안 될 곳. 그리고 카로 하나 된 이들이 카텟이야. 너희 둘의 카는 이미 하나가 되었어. 죽음 또는 배신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심지어 그마저도 카의 일부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뭐 하러 우리를 찾아왔어."
"재단이 너희에게 찾아오면 나처럼 뒷짐을 지고 서 있지만은 않겠지? 영원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지인들한테서 도움 좀 받은 너희 또래 한 명에게 뚫리는 요새에서 말이야."
지인.
"역시 패거리를…"
노바디가 말을 거의 시작할 때쯤에 시라유키 히메리는 말 허리를 잘랐다.
"걱정 마. 나 혼자 얘기 좀 하고 오겠다는 말대로 얌전히 기다리고 있거든. 폭도들이 오면 우리도 자기 방어를 해야겠지만… 그래서 빨리 결정해줬으면 좋겠어. 나 블레인한테 미움 산 몸이라 기차 신도들에게 잘못 걸리면 목 잘려."
"무슨 결정?"
"아. 그 얘기를 안 했네. 미안."
시라유키 히메리는 씩 웃더니 입 앞에 주먹을 대고 헛기침을 했다.
"우리는 기관을 하나 세울 거야. 카텟 기관이라고 불리겠지. 우리는 카를 통해 하나 되어. 세상을 바꿀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어."
시라유키 히메리가 작업 탁자 위에 K와 A가 합쳐진 듯한 상징이 새겨진 배지를 던졌다.
"그리고 너희가 큰 힘이 될 거야. 우리는 카텟이 될 거고."
우리는 왜 그녀의 손을 잡았던 걸까.
정말 한계가 보이기 때문에? 초고교급은 그저 오해라고 해도, 초고교급이라고 불리는 자들을 추적하는 재단에게서 우리를 보호해줄 공동체가 필요했기 때문일까? 그것도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부수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우린 빛을 그리워했다. 예민한 감수성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법한 그 기이한 갈망에는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우리는 사람들과 이어지고 싶었다. 온기에 중독된 듯이 우리는 따뜻한 것을 원했다.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노바디와 나는 알고 있었다. 둘 밖에 없는 매일은 외롭다는 것을. 몇 년 동안은 몰라도 평생을 지하기지에 틀어박혀선, 차갑고 생기 없는 기계만 만지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사람의 본능과도 맞닿아 있을 터였다. 의지할 수 있는 무언가를 원한다는 본능. 우리는 자신보다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되고 싶었고… 다른 사람과 이어지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따뜻한 것을 찾아, 빛과 불을 향해 날아들었다.
"놀랍군."
히무로 시라베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표정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는 그가 비꼬고 있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가 표현하지 못했을 뿐 정말 놀랐다는 걸 눈치채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과감한 인물이었다.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재단의 연구소에서 날 데려갈 때도 그것은 느꼈지만, 내가 알던 그녀와 과거의 그녀는 서로 다른 과감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군."
"오만한 과감함이었어. 에고에서 비롯되는 자신감. 그게 그녀였지… 남에게 설설 기는 모습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화신 같은 인물."
히무로 시라베에게 제공받은 커피를 마시며 나는 말했다. 애용하던 브랜드가 멸종하기 전까진 질리도록 마신 게 믹스 커피였기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다음엔 무슨 일이 벌어졌지?"
나는 다 마신 종이컵을 구긴 채 옥상에 내던졌다. 히무로 시라베의 책망 섞인 눈빛이 뒤따랐지만 무시했다.
"따라 와. 보여줄 테니까."
"물리적으로 말인가?"
"그래. 물리적으로."
나나시: ……전부터 신경 쓰이는 게 있는데… 대몰락이 대체 뭐야?
꿈에서 깨어난 뒤 나는 꿈의 내용을 잊지 않도록 종이에 간단히 적었다. 후려갈겼다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종이에 쓰고 나니 확실히 정보를 더 잘 정리할 수 있었다.
카텟 기관 - 히무로와 나, 시라유키 히메리와 인공지능이 몸을 담았던 곳. 시라유키 씨가 나와 노바디를 스카우트했고 노바디는 모종의 이유로 죽은 뒤 인공지능으로 변했다…? 나는 시라유키 씨에게 악감정이 있지만 정작 시라유키 씨가 죽였다던 노바디는 악감정이 없었다.
전화 박스 - 뭔지는 몰라도 몸을 분해시킨다. 노바디가 이 안에서 불의의 사고를 겪은 것 같다.
대몰락 - 시대를 뒤흔드는 대사건이었던 것 같은데. 경제 대공황 비슷한 건가…? 아마 그런 것 같았다. 폭도니 기차 신도니… 대체 얼마나 큰 사건이었던 거야? 경찰은 파업한 건가? 경찰이 망했을 리도 없고…
재단 - 초고교급을 납치한다?
초고교급 사냥 - 초고교급을 사냥해서 어디에 써먹게??
희박지대 - 아니 이건 진짜 뭐지? 방사능 오염구역은 또 뭐야. 어디서 방사능이 터졌다는 거야? 믹스커피 브랜드는 왜 멸종해? 진짜 대공황인가? 블레인은 또 뭔데? 왜 기차가 미쳐? 그리고 카는 대체 뭐 하는 거길래 저 배지가 자판기에서 나온 거야? 그 배지가 왜 여기에 있냐고. 모노로그랑 카텟 기관은 적대하는 사이 아니었어? 그냥 넣어놓은 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걸까? 십자가가 자판기에서 나온다고 한들 모노로그의 기독교 신앙을 암시하진 않듯이? 배지가 나온 이유는 그냥… 카 때문인가?
가면 갈수록 필기의 내용은 엉망진창이 되어갔고, 내용도 내가 떠올린 것들을 정리한다기보단 의문점을 나열하는 미치광이의 중얼거림 비슷한 것으로 변해갔다.
23T에게 물어봐도 23T는 대답할 수 없을 터였다. 애초에 왜인지는 몰라도 23T의 화가 풀리기 전까지는 대답다운 대답을 들을 수 없을 터였다. 결국 기억이 떠오르기까지 기다려야 할 텐데…
살인은 나를 기다리지 않을 터였다.
모리 레이코: 이봐. 이름 없는 남자. 들리겠지?
나나시: 아아악!! 모리?!
나는 무심코 모리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어디에도 모리는 없었다. 모리는 해변에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은 내가 급조했던 수신기였다. 그래. 분명 통했다. 나이토의 약점이나 물을 싫어하는 이유까지 어느 정도 엿듣게 되어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도청기와 수신기가 제대로 상호작용하는 것을 확인한 바 있었다.
모리 레이코: 네 선물들은 잘 받았다. 편지에 적혀 있더군. 통신 수단이 생겨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양방향 통신은 안 되지만 충분하다.
모리 레이코: 모니터실에서 보고 있겠지만, 우리는 식사와 가재 괴물 그리고 푸성귀를 먹으며 버티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시련을 목전에 두고 있지. 카이다 쿠로하는 주변에 없다. 더 정확히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모리 레이코: 특이사항이 생길 경우 계속 보고하겠다. 다른 이들에게 송신기에 대한 정보는 전하지 않았다. 내통자와 부대낀 채로 틈을 보일 순 없으니.
모리 레이코: 네 판단은 무척 적절했다. 그 사기꾼을 묶고 이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곧바로 두 번째 시련에 돌입할 테니 잘 처신해라.
나는 수신기에서 들려온 음성을 듣고 내 귀를 의심했다.
나나시: 모리가 날 칭찬한 거야…?
나는 그 직전까지 느꼈던 혼돈과 의문을 순간 전부 잊고, 어안이 벙벙해진 채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나나시: 우와…!! 세상에!
그리고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모리의 끔찍한 비명을 듣게 되었다.
고통과 분개심으로 가득 찬, 그녀에게서 듣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소리와 함께.
놈들이 왔다. 카이다 쿠로하는 미세한 진동과 말소리를 느끼며 씨익 웃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두 번째 시련아. 우리가 왔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겉보기에는 다를 바가 없어 보여. 첫 번째 시련이랑 똑같아.
야가미 토가: 그렇지만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르겠죠.
모리 레이코: 말소리를 좀 낮춰라. 언제 첩자가 들이닥칠지 모른다.
나이토 유즈루: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저 멀리까지 코코넛을 먹으러 가?
모리 레이코: 코코넛은 공리를 증진시킨다.
나이토 유즈루: 코코넛은 따오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소리야!
히무로 시라베: 모리의 말이 옳아. 카이다가 있을지도 몰라. 적어도 우리를 엿보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해.
그래. 보고 있다. 너희들을 아주 잘 지켜보고 계시다고… 네놈들을 내 앞길에서 치워 버리려 말이야.
카이다는 그들이 도착하기 몇 시간 전. 한 바위 뒤에서 굴을 하나 발견했다. 담비나 족제비과 동물이 잠시 머물렀을 법한 굴 안에는 작은 동물의 뼈가 잔뜩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그녀의 손으로 살짝 쥐면 가루가 되기까지 부서질 만큼 오래된 뼈였다.
그 굴 안에 다시 자리를 잡은 것은 족제비보다 위험한 무언가였다. 사실 그녀가 한 일은 족제비가 다져놓았을 법한 모래굴을 거의 부수다시피 하며 안으로 파고드는 일이었다. 모래가 그녀의 몸을 묻으며 동시에 그녀의 몸을 덮어 주었다.
굴의 대부분이 카이다의 확장 공사에 무너지고 175cm의 몸은 굴이 아니라 모래에 파묻혔지만, 입구만큼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고 카이다는 입구마저 무너뜨렸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생활터가 아니라 그저 몸을 숨길 수 있는 공간뿐이었다. 카이다가 입구를 부숴 모래가 내려앉자 밖에서는 카이다의 존재를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은신처가 만들어졌다.
카이다는 모래에 손가락으로 살짝 구멍을 내고 그 사이로 숨을 쉬었다. 아주아주 작은 틈이라도 괜찮았다. 공기가 조금이라도 통한다면 카이다는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버티기 시작했다. 충분한 이들이 시련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회를 기다리는 점에 있어서는 카이다 쿠로하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사실 아니었지만 카이다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 그것만이 중요했다.
님들아 저 진짜 많이 쓰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시련의 끝부분까지 쓰기에는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일단 절반 분량까지만 올립니다
그리고 혹시 모르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인데… 단크 타워는 지금 더 단크 타워 그림대회를 열고 있습니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dgrp&no=1300051
참가자 없는 게 슬퍼서 여기에라도 홍보해 봅니다 더 좆망 타워를 봐주시는 분들껜 늘 감사합니다…
더 단크 타워는 3차 창작을 늘 적극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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