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나나시: …나와 23T 사이에 저런 일이 있었다니.
나는 내가 저지른 일들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맞아. 내 생각이 짧았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미안해."
"이 우주에 나를 혼자 남겨 놓고서… 내 마음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서. 미안하는 말로 해결할 순 없어. 노네임…"
노네임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를 노바디라고 여기지 않을 거라면 어째서 날 만든 거야… 애초에 뜯긴 판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노바디에 대해서 누구보다 네가 잘 알면서. 왜 기계 몸을 만들었어. 대체 왜."
"그런 작별은 납득할 수가 없었으니까."
"…노바디를 보고 싶었던 거지?"
인공지능이 문득 노네임에게 물었다.
"깨어난 노바디가 어째서 날 뜯긴 판자로 만들었냐며 고통스러워하더라도 너는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그녀를 다시 보고 싶었던 거야. 우리는 서로의 반쪽이었으니까."
"해선 안 될 일이었어."
"그렇지만 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인공지능이 자신의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며 말했다…
나나시: 와앗! 무… 무슨?!
"잠깐! 너 지금 뭘…! 옷 다시 입어!"
노네임과 내가 비슷한 반응(눈 가리며 소리치기)을 보이는 와중에 인공지능은 말했다.
"이런 걸 만들면서도. 다시 그녀를 보고 싶었던 거야. 생식에 관련된 부품은 차마 만들지 못할지언정 다른 모든 것은 노바디와 똑같이 만들어서라도. 넌 그녀를 되살리고 싶었어."
단추를 다시 채우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다시 눈을 떴다. 노네임도 비슷한 순간에 그렇게 했다.
"난 많은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노네임… 너는 이해할 수 있어. 난 널 동정해."
"동정한다고…?"
노네임은 얼이 빠진 얼굴로 반문했다. 그의 미간이 떨렸다.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난 네가 불행하다고 생각해. 어쩌면 노바디보다도 더. 난 이 우주에 외로이 홀로 남겨졌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다만 너는 외로움에 대해 알지. 홀로 남겨지는 일의 두려움을 알고 있어. 노네임… 넌 날 노바디라 여기지 않겠지만 적어도 내가 널 이해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줘."
인공지능이 그의 손을 잡자 노네임은 인공지능의 손가락을 뿌리쳤다.
"…오해하지 마. 난 불행한 적 없어. 노바디를 되살리려는 그 모든 시도 속에서도 나는 불행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지금 넌 불행해."
"노바디만큼은 아니지. 나 대신 전화박스 안에 들어가서 죽은…"
"너는 지금 노바디라는 사람을 스스로의 저주로 만들고 있을 뿐이야. 노바디가 그걸 원할 것 같아?"
"그만…"
노네임은 괴롭다는 듯이 자신의 귀를 막았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해. 과거는 사라지게 둬."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배우자의 상도 3개월 밖에 안 돼. 너는 이미 지나고도 남았잖아."
"함부로 말하지 마. 나는 절대 못 잊어."
"잊지 않고서야 네가 행복해질 방법은 없다고. 노네임!"
"그렇다면 차라리 평생 행복하지 않겠어."
노네임이 말했다. 어느새 그는 귀에서 손을 뗀 채였다. 애초에 귀를 막기는 한 건지 의문마저 들었다.
"아직도 모르는 거야? 난 네가 행복하길 바라는 유일한 사람인데… 이러니 내가 널 동정할 수밖에 없는 거야. 친구를 되살리려 했지만 흉물을 되살린 너를. 날 인정하지도 완전히 외면하지도 못하는 너를… 또 이해할 수밖에 없어."
노네임은 인공지능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알고 있음에도 부정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너를…"
"그만 해! 그만 하라고! 뭐? 동정? 이해? 네가 뭐라도 되는 것 같아? 넌 아무것도 아니야! 말 그대로!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왜인지 알아? 넌 그냥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하니까! 그러니까 내 앞에서 썩 꺼져!"
"…네 뜻대로 할게."
카나리 케이토: 야. 너 뭐 하냐고. 내 말이 안 들리냐니까! 아까부터 왜 입만 뻐끔거리고 아무 말이 없어?
칸나즈키 시노부: 조용…
후루미나미 나몬: 조용히 하라고? 싫소! 아하하하핫. 아하하하하하핫!
칸나즈키 시노부: 조용히 하래도… 지금 힘을 쓰려면 집중해야 한단 말이야… 연결이 언제 끊길지 모른다고…
칸나즈키 시노부: 조용히 하래도… 지금 힘을 쓰려면 집중해야 한단 말이야… 연결이 언제 끊길지 모른다고…
나는 눈을 감고 중얼거리는 칸나즈키를 잠자코 지켜보았다. 옆에서 말을 걸어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조용히 하는 편이 그녀 말마따나 나을 것 같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요. 칸나즈키. 귀 열고 내 랩을 들어봐! 헤이. 카나리! 비트 줘!
카나리 케이토: 뭐? 뭘 달라고?
칸나즈키 시노부: 조용히…!
칸나즈키 시노부: 조용히…!
칸나즈키 시노부: 아. 실수. 끊겼다.
나나시: …칸나즈키? 왜 그래?
칸나즈키 시노부: 이젠 나다.
나나시: 아… 안녕하세요?
칸나즈키 시노부: 시노부가 왔다 갔니? 굳이 필요 없는 짓을 하긴… 내가 없는 사이에 또 여러 일이 일어난 것 같구나.
내가 수호령 씨에게서 눈을 떼고 노네임이 있던 자리를 보자. 그곳에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히무로와 기계를 설계하고 있는 노네임이 있었다.
노네임은 이상하게 생긴 캡슐 같은 기계의 나사를 조이고 있었다. 히무로가 노네임의 뒤에서 그에게 물었다.
"작업 진도는 어떤가?"
"걱정돼서 왔냐? 소문이 벌써 퍼졌어? 나와 인공지능이 틀어졌다고?"
"작업만 순조롭다면 소문 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다."
"걱정 마. 일에 지장은 없어. 오히려 잡담이 줄어서 더 능률이 좋아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야."
"알겠다. 지원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그보다. 이것들은 뭐에 쓰이는 거야?"
"네가 언젠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는 이상 알려줄 수 없다."
"그래. 그래."
"히무로. 필적 조회 끝낸 거 말해주러 왔어!"
검은 하카마를 입은 검은 장발의 여자아이가 문 밖에서 히무로를 불렀다.
나나시: 아니… 잠깐.
나는 그녀를 알았다.
나는 긴가민가함과 확신을 넘나들었다. 그리고 넘나들면 넘나들 수록 내 의견은 확신 쪽으로 쏠려갔다.
붉은색이 도는 눈. 머리 옆으로 살짝 삐져나온 머리카락. 순한 인상과 밝은 웃음.
"벌써 끝났어? 마유즈미."
히무로가 말했다.
"응. 필적을 모사해보려 시도한 것 같지만, 영어만 쓰면 티가 많이 나더라고."
"드디어 증거를 잡았어. 이제 심문만 하면 돼. 이번에도 고생 많았어. 마유즈미."
"히히히. 이 정도야 나한텐 껌이쥐!"
칸나즈키 시노부: …얼음물.
나나시: 으윽… 으으…
나나시는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댔다.
이바라 쿠리스: 악몽을 꾸나 봐. 불쌍한 녀석이야. 진짜루.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는 어째서 저런 고통을 겪으시는 걸까요. 기억을 전부 잃으시고…
이바라 쿠리스: 그러게 말이야. 모노로그가 지운 거면 나나시에게 가장 중요한 기억이 있는 건가?
캐롤 브라이트: 가장 중요한 기억… 하기야 모노로그 씨는 그걸 가장 먼저 견제하셨겠죠.
이바라 쿠리스: 맞워! 모노로그에게 가장 위협적인 기억을 중점적으로 없앤 걸 거야.
캐롤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문득 작게 중얼거렸다.
캐롤 브라이트: 저와 나나시 씨가 만난 경위가… 모노로그 씨에게 위협?
이바라 쿠리스: 잉? 뭐라고? 나나시 씨가 뭐?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이바라 쿠리스: 그니까. 그 나나시 씨 말이야.
캐롤 브라이트: 아니… 나나시 씨 말이에요.
이바라 쿠리스: 에에? 뭔 소리야?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가 깨어나셨다니까요!
캐롤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상체를 일으키고 침대에서 내려오는 나나시에게 다가갔다.
이바라 쿠리스: 엥? 뭐야. 일어났으면 말이라도 좀 하지 그랬어!
나나시: 두 사람은 아는 사이였어…
나나시가 이마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몸은 괜찮으세요?
나나시: 나와 히무로도 만난 사이였어. 23T는 왜 마네킹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거야? 23T에게 너무 미안해…
그의 입 안에서 정제되지 않은 생각들이 두부가 되기 직전의 콩물처럼 엉겨 붙은 채 쏟아져 나왔다.
이바라 쿠리스: 완전 안 괜찮나 본데?!
나나시: 잠깐… 잠깐… 내가 얼마나 잔 거지? 여긴 어디고…
캐롤 브라이트: 몇 시간 동안 정신을 잃으셨어요. 제 방이에요. 쓰러지셔서 잠깐 여기로 데려왔고요. 몸에 열은 없으세요?
나나시: 없어요… 재워 주셔서 고마워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됐죠? 제가 자는 사이에…
이바라 쿠리스: 헤이! 나나시! 진정 좀 해. 너 지금 혼수상태에서 겨우 깨어났다니까.
나나시: 모리는… 어떻게 됐어? 누가 죽었어? 재판이 벌써 끝난 거야?
나나시: 난 대체 어디서 언제…
나나시는 캐롤과 이바라가 말릴 새도 없이, 비틀거리는 몸으로 용케 캐롤의 숙소 문을 박차고 나갔다.
계단을 빠르게 오른 나나시는 너무 급하게 움직여 살짝 삐걱이는 다리를 무시하고 모니터실로 들이닥쳤다.
나나시: 토키와… 내 수신기. 수신기 어디 있어?
토키와 아유키: 나나시! 깨어난 거야? 몸은 괜찮아?
나나시: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수신기. 당장…! 그리고 23…T.
23T5U130: 수신기는 여기 뒀어요. 현재 모리의 발목과 손, 나이토의 발 반쪽이 가재 괴물에 의해 잘렸고 독에 감염되었어요. 나이토는 체력이 있으니 잘 버티는 것 같지만 모리는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23T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음성을 내었다.
23T5U130: 두 번째 시련이 끝나고 크레딧 상점에 세 개의 물품이 추가되었어요. 기관총. 항생제. 그리고 작은 열쇠. 작은 열쇠는 토키와가 가지고 있는데 기관총의 소유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어요. 아마 후루미나미, 카나리 둘 중 한 명이겠죠. 제가 막을 수도 있겠지만 플라잉 로봇의 전파 방해가 있는 이상 힘들 거예요.
23T5U130: 항생제는 지금 상황에선 모리와 나이토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도지만, 인플레이션이 부활하면서 우리 중 누구도 항생제를 살 수 없게 됐어요. 해변에선 감염을 치료할 방법이 없으니 모리와 나이토를 후원하고 있는 사람은 큰일 난 거죠. 바로 당신이.
나나시는 23T의 존댓말이 불편한 듯이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나나시: …존댓말 쓰지 마. 23T. 어색해.
23T5U130: 알겠어.
토키와는 23T가 왜 나나시에게 존댓말을 쓰는지 이해하지 못해. 두 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나시: 감염에 기관총. 항생제… 인플레이션. 상황이 너무 안 좋아…
토키와 아유키: 나나시. 너 지금 많이 급해 보이는데 우선은…
나나시: 23T. 일단 너에게 해야 할 일이 있어. 내가 어떻게든…
나나시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모니터실 밖을 손가락질했을 때. 캐롤과 이바라가 모니터실의 안으로 들어왔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갑자기 왜 그렇게 급하세요?
이바라 쿠리스: 너무 빠르잖아. 아까까지 자고 있던 사람 맞아? 완전 위험한데요!
23T5U130: 개조 과정을 거친다 이거지?
나나시: 정확히는 아니야. 그냥 너한테 도구를 하나 만들어줄 거야. 방해 전파를 두 번 봤으니 어떻게 파훼할지는 명확해…
이바라 쿠리스: 무시하지 말고 얘기 좀 하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얘기하면 될 거 아니야!
나나시: 통화로 하자. 23T. 내 전용실로 따라와 줘.
23T5U130: 네 뜻대로 할게.
나나시: 다들 죄송해요. 지금 제가 겨를이 없거든요… 할 일이 너무 많아요.
나나시는 이바라와 캐롤을 능구렁이처럼 피하며 모니터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23T가 그의 뒤를 따랐다.
나나시: …살아남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나나시는 자신의 전용실로 향하며 다이얼로그를 확인했다. 항생제의 가격은 2800만 크레딧으로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떨어지지는 않았다. 충분한 크레딧만 있다면 항생제를 살 수가 있었다.
내가 용접모를 쓰고 구리선을 다루는 와중에 회의가 진행되었다. 시작은 이바라의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이바라 쿠리스: 다들 누구 후원하고 있는 거야?
토키와 아유키: 내가 마유즈미를 후원하고 있어.
다이얼로그 너머에서 토키와의 주저 없는 대답과, 그것을 듣고 놀란 이바라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바라 쿠리스: 에에엑!
캐롤 브라이트: 그랬군요. 토키와 씨가 마유즈미 씨를…
23T5U130: 그냥 말해버리는 거야. 토키와?
토키와 아유키: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으니까. 원래 서로 후원하는 사람을 숨기려는 건 서로를 견제하거나 파벌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서였어. 하지만 후루미나미와 카나리가 파벌을 이미 만들었으니… 협력해야 하는 우리들끼리 협력할 수밖에.
23T5U130: 내가 히무로의 후원자 두 명 중 하나야. 그는 카텟 기관의 일원이니까 내가 지켜야 했어.
이바라 쿠리스: 아~아. 이거 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하기와라를 후원하고 있었어. 왠지는 모르겠는데 골라야만 될 것 같더라고.
그리고 캐롤 씨가 나이토를 후원하고 있는데…
캐롤 브라이트: 제가 나이토 씨를 후원하고 있는데요. 그럼 야가미 씨의 후원자는 어떤 분이죠?
토키와 아유키: 야가미에겐 후원자가 없는 거야.
토키와가 단호하게 말하는 동안 나는 천에 철사를 붙이고 철사들을 한 곳으로 모아 용접한 뒤. 쇠파이프를 그 위에 올려 다시금 용접했다.
토키와 아유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우린 지금부터 야가미가 죽을 수 있도록 유도할 거야.
토키와의 말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나나시: 잠깐. 뭐?
이바라 쿠리스: 뭐어어어! 잠깐잠깐잠깐! 너 머리 이상해진 거 아니야?!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캐롤 브라이트: 저도 많이 당황스럽네요. 야가미 씨를 죽이자는 말인가요?
토키와 아유키: 간접적으로요.
다이얼로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토키와의 목소리는, 평소의 온화한 그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웠다.
나나시: …야가미에게도 후원자가 없는 건 확실한 거야?
토키와 아유키: 후원자 한 명은 경주마 한 명 밖에 후원할 수 없어. 그런데 우리는 이미 자신의 경주마를 밝혔잖아. 더 이상의 변수는 없어. 야가미에겐 후원자가 없는 거야. 그렇지만 거짓말을 하고 있지.
나나시: 그렇지만 야가미도 식사를 배급받았잖아.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야가미에게도 후원자가 있어.
토키와 아유키: 모닥불 주위에서 식사를 배급받을 때면 해변의 모든 인원들은 가까이 앉게 돼. 그러면 서로 누구의 배급인지를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하겠지? 그 때문에 후원자가 없는 야가미도 후원자가 있는 것처럼 보인 거야.
토키와 아유키: 즉 살인이 일어나게끔 우리 쪽에서 유도해서 야가미가 죽게 만들어야 해. 그렇게 해변의 모두를 탑으로 다시 불러온 다음 항생제를 놓으면 원만히 수습할 수 있어.
이바라 쿠리스: 웃기지 마. 토키와. 너 원래 이런 사람 아니잖아.
토키와 아유키: 지금 필요한 건 토키와 아유키가 아니라 리더야.
이바라 쿠리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토키와 아유키: 이 방법을 쓰면 야가미 말고 다른 사상자는 없어. 반대로 나머지 인원들은 후원자가 함께 죽을 위험이 있지. 그러니 야가미 말고는 대안이 없어.
나나시: 아닐지도 몰라. 토키와.
나는 임기응변을 해 보기로 했다.
나나시: 칸나즈키는… 엄밀히 말해 한 사람의 몸에 두 사람의 영혼이 들어가 있어. 칸나즈키 본인과 칸나즈키의 수호령. 내가 알아. 두 사람은 별개의 존재야.
나나시: 그럼 두 사람의 정신이 칸나즈키 시노부라는 사람의 육체를 경유하는 셈이지. 두 사람 각각의 정신이… 다른 경주마를 정할 수 있다면. 말이 돼.
캐롤 브라이트: 칸나즈키 씨의 수호령 분과 칸나즈키 씨는 서로 다른 사람을 후원하고 있는 건가요? 그럼 후원자 한 명이 모자라다는 의문점이 해결돼요.
이바라 쿠리스: 어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이상하지 않아? 난 그런 거 안 믿지만 일단 칸나즈키의 수호령이 진짜 있다고 치자. 그런데 칸나즈키의 수호령은 다이얼로그로 물건을 보낼 수 있어?
나나시: 수호령 씨가 몸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면 수호령 씨가 보낸 거라고 취급될지도 몰라.
토키와 아유키: 그런 불확실한 확률에 너와 칸나즈키의 목숨을 걸 순 없어.
나 또한 알고 있었다.
나나시: 그렇지만 죽일 방법이 없잖아. 지금 보급 특권까지 막힌 우리 입장에선 간접적으로라도 해변에 영향을 미칠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게?
토키와 아유키: 그러니 지금 그 방법을 생각해보자는 거야.
나나시: 그 방법을 생각할 시간에. 우선 모리의 감염을 치료할 항생제를 사는 게 먼저 아니야?
이바라 쿠리스: 뭐야! 아직 항생제가 안 떨어졌어?!
이바라가 놀란 채로 소리쳤다. 그래. 아직 크레딧 상점에서 항생제를 구입할 수 있는 기회는 남아 있었다. 2800만 크레딧. 내 모든 크레딧을 소비하고도 살 수 없는 금액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이걸 살 수만 있다면 모리 씨도 치료할 수 있을 텐데요…
토키와 아유키: 불가능하니까 애초에 말을 꺼내지 않은 거야. 나나시. 2800만 크레딧은 너무 많아.
나나시: 그렇지만 후루미나미와 카나리에겐 아니야. 3000만 크레딧의 기관총을 살 수 있다면 2800만 크레딧의 항생제도 사야 일리가 맞지 그런데 왜 그 둘은 항생제를 사지 않는 걸까?
이바라 쿠리스: 자기한텐 필요하지 않으니까 그런 거겠지. 우리는 사람 살리려면 그게 꼭 필요한데!
나나시: 아니야… 그냥 항생제를 사 버리는 편이 그들 입장에선 훨씬 이득이 돼. 그러기만 하면 해변에서 모리와 나이토의 감염을 치료할 방법은 없어지잖아. 우리와의 협상에서 완전한 우위를 점할 수 있어. 왜 항생제를 남겨두고 있는 거지?
캐롤 브라이트: 무엇보다 항생제를 모리 씨에게 보내지 않는 칸나즈키 씨가 제일 이해되지 않아요. 지금 모리 씨의 감염이 더 심각한데. 그녀가 죽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대체… 왜 아무것도 하지 않죠? 칸나즈키 씨는 동맹이 아닌 건가요?
뭔가 생각은 있을 거야. 칸나즈키도 자기가 죽기를 바라진 않을 테니까. 정말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이미 칸나즈키의 무행동 자체가 그녀의 죽음을 막는 수단일지도 몰라.
항생제를 사지 않는 이유… 그게 뭐지?
나나시: 일단 작은 열쇠를 써 보자… 그걸 쓰면 뭔가 실마리가 생길지도 몰라. 살인을 유도하는 건 최후의 수단으로 써야 해.
토키와 아유키: 흠… 그래. 일단 쓸 수 있는 수단은 전부 써 봐야지. 다만 모노로그 말로는 작은 열쇠를 쓰려면 특정한 장소로 와야 한댔어. 도청 때문에 이 자리에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23T5U130: 그럼 우리가 조만간 모니터실로 다시 올라갈 테니까. 내가 합류하면 그 뒤에 그 장소로 가는 것으로 하자.
캐롤 브라이트: 그런데 두 분은 지금 뭘 하고 계세요?
나나시: 저도 이 자리에서 말할 수는 없어요.
나는 다이얼로그의 통화를 끊어 버렸다.
23T5U130: 정확히 뭘 하려는 거야. 나나시?
나나시: 네 몸은 기계지만 회로 방해 전파가 네 몸에 흘러야 네 작동이 멈춰. 방해 전파는 말이 전파지 사실상 전기를 작은 번개처럼 네 몸에 흘려서 회로를 어지럽히는 거야. 그러니 전파를 중간에 막을 수 있는 수단만 있으면, 이론상 회로 방해에 맞설 수 있어.
나는 우산을 만들었다. 평범한 우산 같이 생겼지만 우산의 끝부분에는 뾰족한 구리를 대어서 피뢰침 역할을 할 수 있을 터였다. 마지막으로 손잡이에 고무를 덧대는 작업을 하고 있을 때 23T가 내게 물었다.
23T5U130: 기억. 어디까지 떠올린 거야?
나나시: …네가 사랑을 구걸한 적 없다고 말한 곳까지.
23T는 놀란 듯이 몸을 한 번 움찔한 뒤 말을 이었다.
23T5U130: 그럼 노네임이 되기엔 충분히 떠올린 것 같은데. 어떻게 아직 나나시로 남아있을 수 있지?
나는 23T의 질문이 무슨 의도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내 생각을 말했다.
나나시: 기억을 전부 떠올렸지만 나는 지금의 나인걸. 노네임은 과거의 나고.
23T5U130: 아니야. 나나시. 네가… 현재의 노네임인 거야.
겉에 연보라색이 덮인 23T의 검고 광택 도는 손가락이 나를 향했다.
나나시: 그게 뭐가 달라?
23T5U130: 달라. 많이 다르다고. 나나시… 네가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너를 규정한단 말이야.
나나시: 나는 아직 나야. 나나시. 아직 내 인식은 그래.
23T5U130: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는 노네임과 동일해져야 해. 기억이 같은 이상 너는 노네임과 똑같은 사람이야. 그런데 어떻게 나나시의 자아가 남아있을 수 있지? 너의 인격은 기억의 부재에서 비롯된 거잖아. 너의 정체성보다 노네임의 정체성이 점차 커져야 이치가 맞는데…
나나시: 그 짧은 사이에 노네임의 기억을 전부 보진 못한 데다가… 탑에서 내가 겪은 경험들도 있잖아? 히무로를 만나고, 캐롤 씨를 만나고, 너를 만났어.
나나시: 탑에 온 뒤로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지만 그 모든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거야. 언젠가 노네임을 닮아가게 될지도 모르지만 당장 내 인격이 완전히 노네임과 동일한 것으로 변하길 바라지는…
23T5U130: 나는 안 속아. 너는… 너는 노네임이야.
나는 23T의 음성이 조금 떨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23T5U130: …네가 지금 남들에게 상냥한 건 네가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야. 늘상 가시가 돋치게 만들었던 모든 경험이 사라졌으니 너라는 사람의 본성이 드러난 거지. 늘 상냥하던 네가…
23T5U130: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일에 불과해. 네가 기억을 더 되찾을수록 넌 노네임으로 변할 거야. 지금의 순진하거나 겁 많은 모습들은 온데간데없이. 다시 불친절하고 남을 경계하는 사람으로 돌아가 버리겠지.
23T의 음성으로 말미암아 나는 알 수 있었다.
23T5U130: 그렇지만 지금의 난 사람이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지. 난 그저 데이터 쪼가리일 뿐이니까. 네가 내게 직접 한 말이었어. 나나시.
프로젝터를 통해 23T의 기억을 봤을 때.
나나시: 그때 네가 한 말은… 내가 당연히 노네임으로 변해갈 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거리를 두기 시작한 거였어.
나나시: 그럼 그때의 나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겠지?
23T5U130: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아.
나나시: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우리는 완전히 틀어져 버렸으니까. 미안해. 23T.
23T5U130: 사과 안 해도 돼. 어차피 네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노네임 잘못을 네가 뒤집어쓰는 것처럼 느낄 테니까. 필요 없어. 그렇지만 네가 정 사과하고 싶다면… 그 대신에 부탁이 하나 있어.
23T5U130: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날 노바디라고 불러 줘.
나나시: 노바디.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이목구비가 아무것도 없는 23T의 표정은,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23T5U130: ……노네임도 이런 기분이었던 걸까.
나나시: 무슨 기분?
23T5U130: 테세우스의 배를 보는 기분.
나나시: …….
난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면전에서 다른 사람의 대체품으로, 그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썼지만 완전히 다른 존재 취급당하는 일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느끼고 있는 기분을 23T 또한 나에게서 느꼈다고 생각하면 나는 23T 앞에서 섣불리 불쾌함을 드러낼 수 없었다. 결국 내가 23T에게 준 상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도 이런 기분이었던 걸까. 자신을 테세우스의 배 취급하는 사람을 보는 기분.
23T5U130: 노네임이라면 절대 나를 노바디라고 부르지 않았을 거야. 나는 내가 노바디이길 바라고, 너는 네가 노네임이길 바라지 않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해. 우리 모두 그때의 그 사람들이 아니야. 노바디와 노네임은 죽었어.
23T5U130: 우린 그저… 잔상이야. 나나시. 낡은 판자의 자리에 뻔뻔히 들어서선 테세우스의 배 행세를 하고 있지. 그렇지만 결코 동일하지 않아. 누구보다 닮았지만 지금의 우린 그들이 아니라고.
나나시: 그건 받아들이기 나름일 거야. 어떻게 보기에 따라 달라질 거고. 나도 많이 혼란스러워서… 너에게 만족스러운 답을 주진 못하겠지만…
나나시: 잔상일지라도 살 자격이 없는 건 아니잖아? 우리가 그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냥 우리만의 새로운 삶을 만들면 되는 거 아닐까… 미안. 나도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너랑 완전히 틀어지는 게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란 건 확실해.
23T5U130: …내가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명쾌하네. 나나시.
23T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아서 나는 멋쩍게 침묵을 깼다.
나나시: 노네임도 나처럼 솔직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하…
23T5U130: 이런 급한 때에 내가 널 붙들어 뒀어. 카텟 기관 실격이야. 나.
나나시: 괜찮아! 어차피 내 쪽에서 얘기하고 싶었고. 너한테 물어볼 것도 있거든…
23T5U130: 물어볼 것? 뭔데?
나나시: 내 기억 속에서 마유즈미를 봤어. 카텟 기관 소속의 마유즈미를.
23T는 이목구비가 없는 얼굴로 내 눈을 바라보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23T5U130: 거기까지 떠올렸구나.
나나시: 응. 그런데 의문점이 생겼어. 내가 탑에서 마유즈미를 봤을 때. 난 나와 마유즈미가 만난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적이 없어. 모노로그가 내 기억을 주물러 놔서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의 위화감이 있어.
나나시: 카텟 기관에서 만난 마유즈미도 알아보지 못했던 내가. 캐롤 씨는 알아봤다는 것.
나는 탑에 왔을 때 히무로와 캐롤 씨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23T도 알아보았다. 히무로와 23T는 카텟 기관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캐롤 씨는 아니었다.
나나시: 노네임의 기억 속에서 캐롤 씨랑 비슷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 초고교급 재능 수준이 아니라 초능력을 가지신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야. 그런데 카텟 기관에 들어가기 전에도, 나온 뒤로도 캐롤 씨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어.
나나시: 그럼… 나와 캐롤 씨는 대체 언제 만난 거야? 애초에 만나보긴 한 거야?
23T5U130: 앞의 질문은 몰라도 뒤의 질문은 대답할 수 있어. 너희는 만난 적이 있어. 그것만큼은 확실해.
나나시: 그럼 캐롤 씨는 카텟 기관 소속인 거야?
23T5U130: 그렇게 물어보면 나는 직접적으로 전해줄 수 없어. 너도 알잖아.
모노로그가 걸어놓은 제약 때문인가?
그렇지만 23T의 말을 반대로 해석하면, 이런 식이 아닌 질문은 충분히 답할 수 있다는 뜻이 되었다. 나는 간접적으로 그녀의 출신을 설명할 수 있는 질문을 생각하다가 하나 좋은 것을 떠올렸다.
나나시: 너는 캐롤 씨라는 사람을 좋게 생각해?
23T5U130: …….
23T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손가락으로 의사표현을 할 수는 있었다.
23T는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밑으로 내렸다.
모리 레이코: 내가 입 밖으로 중얼거리기까지 했단 말인가?
시름시름 앓으며 깨어난 모리는 왜 히무로와 나이토가 그녀의 곁에 있는지에 대한 대답을 들었다.
히무로 시라베: 그래.
모리 레이코: 그건 아무래도 좋다. 감염이 팔꿈치까지 올라온 것이 문제일 뿐. 혹시 내가 감염 때문에 죽으면, 내가 가재 괴물에 의해 감염되게 만든 카이다 쿠로하가 검정이 되나?
히무로 시라베: 나도 그게 궁금했어.
나이토 유즈루: 정말 신경 안 쓰는구만…
나이토가 작게 중얼거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죽으면 안 돼. 모리!
모리 레이코: 그게 내 마음대로 되면, 내가 죽음을 선택할 것 같나? 나는 선택할 수 있는 것만 선택한다.
야가미 토가: 히무로 씨에게도 말했지만 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기와라 우시오: 세 번째 시련! 썅! 얘는 진짜 머릿속에 그것밖에 안 들었어. 아직도 정신 못 차렸지! 앞으로 세 번째 시련에 가야 한다는 얘기 꺼내면 걔는 양심이랑 도덕이 쥐뿔만큼도 없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히무로 시라베: 세 번째 시련을 향해 가야겠어.
하기와라는 자신의 머리를 탁 소리가 나오게 때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하! 지랄.
마유즈미 나데시코: 지… 진짜 가겠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히무로 시라베: 해변에서 항생제를 만들어낼 순 없어. 난 약초학 분야에 문외한이고 숲 속에 약초가 있는지도 알 수 없어. 세 번째 시련이 어떤 환경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가만히 기다리고 있기보다는 시련 안에서 운 좋게라도 항생제를 얻을 가능성에 기대야 해. 확실하지 않을지라도.
야가미 토가: 좋군요. 그러나 당신 대신 제가 가겠습니다.
야가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히무로 시라베: 어째서?
야가미 토가: 어째서라뇨. 당신에겐 총이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만 카이다 씨가 이곳을 습격하더라도 당신이라면 저지할 수 있습니다. 저는 힘을 키웠지만 그녀에게 맞서기엔 역부족이에요. 당신이 이곳에 남아 다른 분들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히무로 시라베: 어째서 너 혼자 가야 하지?
야가미는 내 말을 이해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야가미 토가: …당신도 세 번째 시련에 따라오시겠다는 겁니까?
히무로 시라베: 세 번째 시련만큼은 반드시 성공하자고 약속했으니. 지킬 수밖에.
야가미 토가: 그건 그때의 약속입니다. 해변의 상황이 이렇게 좋지 않을 줄은 몰랐죠. 게다가 당신이 꼭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나이토 유즈루: 야… 그럼 여긴 누가 지켜?
히무로 시라베: 지킬 필요 없어. 카이다는 세 번째 시련에 참가하고 있을 거야. 모리가 감염으로 죽으면 카이다가 처형당할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만약 가재 괴물의 독이 살해 무기로 취급된다면 카이다가 죽을지도 모르지.
하기와라 우시오: 그거 모노로그한테 물어보면 안 돼? 카이다가 범인인지 아닌지 말이야.
가만히 나와 야가미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기와라가 웃음기를 뺀 얼굴로 물었다.
히무로 시라베: 범행을 저지른 본인이 아니라면 답해주지 않을 걸.
하기와라 우시오: 넌 그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하기와라는 내게 한 번 더 물었다.
그는 이따금씩 눈치가 빨랐다.
모리 레이코: 지금이 말꼬리를 잡을 때인가. 코미디언.
하기와라 우시오: 개인적인 궁금증이야. 이 새끼 이상하게 살인 게임과 관련해서 전문가 같아서 그래. 이건 차치하고. 모노로그 얘는 자기 내통자랑 놀고 있다 치자고. 정말 확실해? 카이다가 여기에 오지 않을 거라고?
히무로 시라베: 80% 확신해.
하기와라 우시오: 하! 결혼이랑 비슷하네. 목숨을 걸기에는 좀 불안해요! 카이다가 원격으로 시련에 참여할 수 있다던가. 무슨 포털이 있다던가. 사실 세 번째 시련으로 안 가고 우리 옆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게?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는 세 번째 시련으로 한 명만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만에 하나를 대비해야 하잖아.
히무로 시라베: 네 말대로야. 마유즈미.
나는 마유즈미가 적절한 순간에 말을 꺼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곧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
모리 레이코: 지금은 만에 구천 구백 구십 구를 대비해야 한다. 지금은 안전 따위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다…
모리 레이코: 내통자를 함께 보내는 건 꺼림칙하지만 어쩔 수 없다. 빠른 시일 내에 너희 둘은 세 번째 시련으로 향해야 한다. 도박수를 두지 않고선 이 불리한 구조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지만 지금 가장 위독한 건 너인데…
하기와라 우시오: 그냥 히무로이드 혼자 보내자고. 어차피 혼자서 다 쏴 죽일 수 있을 테고 야가미가 여기에 남으면 카이다랑 싸울 수도 있잖아.
모리 레이코: 승부사는 첩자를 압도하지 못했다. 그런데 내통자는 승부사한테 패배했지. 어차피 남아봤자 내통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내통자와 첩자가 손을 잡을 가능성도 있다.
야가미 토가: 억측입니다. 아직도 저를 신뢰하지 못합니까?
모리 레이코: 네가 행동으로 우리 편임을 증명하기 전까진 절대로.
모리와 야가미는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히무로 시라베: 모리가 감염으로 죽게 둘 순 없어. 그러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야. 너희들 중 누가 반대한다고 해도 난 이미 결정했고, 야가미가 거부한다면 따르게 만들 거야.
야가미 토가: 총으로 협박하시는 건 좀 비겁하신 것 같은데요.
히무로 시라베: 비겁하지만 살인자를 상대로는 유용하지. 그러니 갈등 없이 합의하자.
야가미 토가: 어쩔 수 없죠. 네. 그럽시다.
하기와라 우시오: 초고교급 협상가(협상 못 함). 대단해요.
나는 가방 안에서 파이어스틸을 꺼내 마유즈미에게 건넸다.
히무로 시라베: 모닥불이 꺼지면 이걸 써서 다시 불을 붙여. 불티가 부싯깃에 닿으면 돼.
마유즈미 나데시코: 오케바리!
나이토 유즈루: 아니 잠깐. 고맙긴 한데. 불을 피울 도구를 우리한테 주면 너랑 야가미는 어디서 쉬려고 그래?
히무로 시라베: 쉰다니?
몇 초 이어지던 정적은 야가미의 한숨으로 깨졌다.
야가미 토가: 하아…
히무로 시라베: 야가미. 짐부터 싸. 지체할 시간이 없어. 바로 출발할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잠깐. 히무로. 그럼… 지금 가는 거야? 진짜로 가는 거야? 언제까지 돌아오게?
히무로 시라베: 모리가 감염으로 죽기 전이니 3일 전까진 돌아와야 할 거야.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고.
모리 레이코: 그럼에도 갈 수밖에 없기에 가는 것이군.
모리는 내 대답을 듣기 전에 작게 박수를 쳤다. 손가락 세 개가 잘려서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지만, 그녀가 팔을 벌리는 정도로 말미암아 무척 공을 들인 박수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야가미 토가: 저는 애초에 별다른 짐이 없습니다. 당신한텐 총이 있으니 그걸 써서 불을 피운다고 치죠. 바로 출발합시다.
히무로 시라베: 잠깐. 정말 미안한데 가기 전에 마유즈미에게 개인적인 말을 남기고 싶어. 잠시 둘만 있게 해 주겠어?
내 말에 하기와라는 눈을 크게 뜨고 나와 마유즈미를 번갈아 보았다. 나머지 인원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약간 의외라는 듯한 놀람이 조금 머물 뿐이었다.
야가미 토가: 저야 상관은 없지만, 꼭 지금 하셔야 하는 말입니까?
히무로 시라베: 지금 말고는 기회가 없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런데 왜 단둘이야? 남들이 들으면 안 돼?
히무로 시라베: 맞아. 다른 사람이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자 나머지 인원의 놀람이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의도한 반응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럼 알겠어. 어디까지 갈까?
히무로 시라베: 해변을 따라서 가자. 저 방향으로.
나는 우리가 나아가 온 방향의 반대. 첫 번째 시련으로 향하는 쪽을 가리켰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무슨 얘기를 하려고 날 부르는 거야. 응큼한 얘기 하려고 그러지! 푸하하하!
히무로 시라베: …….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니지?
나는 마유즈미의 옆을 따라 걸었다. 우리가 모닥불과 본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들의 목소리 또한 커졌다. 내가 생각해도 노골적인 연기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했다.
나이토 유즈루: 야. 혹시 히무로가 마유즈미를… 그…
모리 레이코: 본인들이 행복하다면 말릴 이유는 없다. 공리를 증진시키니까.
야가미 토가: 그렇지만 평소 히무로 씨를 생각하면 너무도 부자연스럽군요. 늘 아무런 감정을 내비치시지 않았는데요.
하기와라 우시오: 내 생각도 그래. 내가 보기엔 지금 저 둘의 상태는 겨우 사랑이 피어날까 말까 하는 상태던가.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야가미 토가: …그런 두 분이 대체 무슨 얘기를 하러 가신 건지 모르겠군요.
그들은 들리지 않게끔 말했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들었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사람은 야가미와 하기와라뿐. 나이토와 모리는 내 행동에 속아 넘어갔다.
그들에겐 정보가 충분하지 않기에 내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조금도 추측할 수 없었으리라.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마유즈미와 해변을 따라 걸었다. 가재 괴물들의 질문 소리가 귓전을 때리자 마유즈미는 질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으. 저 데드 어 체크 소리 너무 짜증 나! 저렇게 말할 수 있는데 사람 말은 못 하는 거야?
히무로 시라베: 차라리 단조로운 소리가 나을지도 몰라. 각각의 개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지금보다 배는 부산스러울걸.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것도 맞는 말이네…
히무로 시라베: 그리고 언어 체계는 다른 종의 입장에서 모방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거야. 아무리 지성을 부여한다고 해도 자음과 모음이 조금씩 바뀌고 말 걸. 앵무새 같이 특이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마유즈미 나데시코: 앵무새가 사람 말을 따라 한다는 새지? 들어본 적 있어! 잘만 가르치면 옆에서 말동무라도 같이 할 수 있을까 싶어서 꽤 관심 갔거든.
히무로 시라베: 맞아. 잘 가르친다면 상황에 따라 언어를 구사하게 만들 수도 있어. 앵무새가 살인 사건을 목격하고 증인 역할을 한 사건도 있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우와. 그건 좀… 무서워. 역시 동물은 말하지 않는 편이 가장 나은 것 같아. 내 옆에 계속 붙어 있으려면 어디에 가둬 놔야 할 텐데 그것도 좀 불쌍하니까. 여기서 나가도 애완동물은 안 길러야지.
여기서 나가도?
히무로 시라베: 이 탑에서 나가도 계속 갇혀 있을 생각이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마유즈미 가문이 망하지 않고 멀쩡하다면 그렇게 될 것 같아.
히무로 시라베: 넌 갇혀 있는 일을 싫어하잖아. 감금당하는 일의 공포를 알지. 너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갈 필요 없어. 전에 했던 말대로 그들은 이미 멸망했을지도 몰라.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지만… 나한텐 달리 갈 곳이 없어.
마유즈미 본인도 그녀의 말이 틀리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녀의 재산이라면 갈 수 있는 곳은 어디라도 있다. 예술가로 독립하는 것도 가능하다.
마유즈미에게 그럴 의지만 있다면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쟁취할 수 있었다. 대몰락 이후일지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한 사람 몫도 제대로 못 하는데 가긴 어딜 가겠어… 그리고 난… 내가 독립을 원하는지도 잘 모르겠어. 그냥 마유즈미가 멀쩡하길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애초에 내가 가문을 떠나면 내 여동생이랑 남동생이 내 자리를 대신할 거야. 이미 대신했을지도 몰라. 우리 집은 어린애들을 이용하고도 남아… 그러니까 결국 내가 돌아가야만 해.
히무로 시라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동생들을 돌아가야 할 이유로 삼은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돌아가야 할 이유로 삼다니… 쉽게 말하지 마. 히무로. 그 사람들은 진짜 그러고도 남아!
그녀의 말이 타당할지도 몰랐다. 내가 그녀의 이야기에 온전히 공감하지 못하고 이 난제를 해결할 방법이나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와 그녀의 차이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카텟 기관이 연구소에 침투하고 날 재단에게서 빼앗았을 때. 내가 최소한의 연대심을 가지고 있던 감시자 후보들은 이미 죽은 뒤였다. 난 연구소에 아무것도 두고 오지 않았다.
반대로 마유즈미에겐 동생들이 있다. 그녀의 심성상 자신의 혈육이 자택에 감금당한 채로 그림과 글씨를 제공하고 가문이 부를 불릴 수 있도록 돕는 도구 역할이 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몰락이 터진 이상 애초에 가문 자체가 남아있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녀의 동생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그녀의 비눗방울을 터뜨리는 것은 옳은 일인가? 집으로 돌아가야 할 희망이자 이유가 되는 동생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게? 애초에 그녀에게 돌아갈 장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게? 그녀는 둘 중 무엇이 사실인지 모르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마유즈미 가문은 아마 이미 멸망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유령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루어질 가망이 없는 일에 대해서.
히무로 시라베: 내가 카텟 기관의 모든 힘을 써서 너와 네 동생들의 신변을 지켜줄 수도 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 그렇다고 많이 도움받기에는 조금 미안한데… 마음은 고맙지만 거절할게.
히무로 시라베: 나는 지금 네가 진심으로 말하는 건지, 진심을 다하지 않는 것인지 몰라.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당연히 진심이지!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해?
히무로 시라베: 그들은 정상적인 가족이 아니니까.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네가 빠져나와야 할 수렁일 뿐이야. 그들은 네 능력을 필요로 할 뿐. 네게 있을 장소를 제공하지만 너를 진정코 사랑하지는 않지. 가짜 투성이야. 내가 당했던 것과 똑같아.
그러나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조언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일과 맞서야만 했다. 그녀는 번데기였다. 아직 우화 하지 않은. 언젠가 우화 할.
마유즈미는 몸을 움츠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난 아직 잘 모르겠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줘.
히무로 시라베: 시간을 나에게서 받을 필요 없어.
결국 마유즈미가 납득할 수 있는 답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카텟 기관으로 그녀를 영입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카텟 기관조차 멸망했을지 모르는 상황에선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꺼낼 말은 따로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슬슬 멈출까? 너무 멀리 떨어지면 모두가 위험에 처했을 때 바로 갈 수 없으니.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 맞네? 빨리빨리 말 끝내고 빨리 돌아가자. 아. 넌 세 번째 시련으로 가야 하지만…
히무로 시라베: 사실은 그 때문에 너를 이곳까지 불러온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응?
히무로 시라베: 내가 없으면 본대가 위험에 대처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을 이젠 없애야 하기 때문에. 그러니 이야기를 하자.
나는 품 안에서 44구경 리볼버를 꺼낼 준비를 했다.
너무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심지어 분량조차 짜다 이게 사람새끼냐??
세 번째 시련에 갈 준비가 이제 시작되니까 대강 70%정도 진행된 거 아닐까 하네요 제 생각인데 단크 타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어드벤처물에 추리물 조금 섞어놓고 단간이라고 우기기 때문인듯 합니다 좀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걸 참…
아직도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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