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의지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수갑을 채우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캐롤 브라이트 본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름 없는 남자를 향한 응보이다. 그리고 한 번 배신한 사람을 믿어보기 위한 시험이기도 했다. 만약 그가 여전히 캐롤 브라이트를 소중히 여긴다면, 남이 보는 앞에서 수갑에 묶이는 수모를 겪고도 그 처벌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시험. 캐롤 브라이트는 그에게 수갑을 채우면서 부디 그가 화를 내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이름 없는 남자의 마지막 시련이 아닐지도 몰랐다. 과연 그가 이것보다 나를 사랑할까. 이것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다음에는, 이 다음은? 이런 종류의 시험에는 끝이 없다.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시험이란 시험을 받는 이가 거부할 때까지 계속될 터.
그런 관계는 건전하다고 볼 수 없었다. 겉으로 보았을 때 모진 만큼 캐롤 브라이트는 이름 없는 남자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는 캐롤 브라이트에게 잔류 감정이 남았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녀 본인이 아직 화가 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화를 내기 위한 화고 이름 없는 남자에게서 애정의 증거를 요구하기 위한 화였다.
캐롤 브라이트는 본래 그토록 경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죽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런 파괴적인 의존에서 헤어나올 정도의 분별력을 가지지 못한다면 반복에 대해 알려줄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나나시: 뭐가 안 된다는 거야?
히무로 시라베: 아무것도 아니다. 수갑이 터치에 영향을 주지만 않았으면 좋겠군.
캐롤 브라이트: 그러지는 않을 거에요.
나는 그것 이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주제넘은 짓인데다가 내가 나선들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상황이 내가 보는 것만큼 암울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수갑의 의식이 오히려 장기적인 관계에 있어 이점을 제공할지 모르는 일이다.
나와 캐롤 브라이트, 이름 없는 남자는 서로 갈등을 빚지 않고 마유즈미의 숙소에 들어섰다. 메리는 다시금 우리에게 문을 순순히 열어 주었다. 천천히 관찰한 결과 어제에 비하여 그녀에게서 어떤 외상도, 특이점도 찾아내지 못했다.
히무로 시라베: 무사하군.
마유즈미 나데시코: 응. 무사해. 오늘은 네 모자란 동생 안 데려왔어. 제인?
캐롤 브라이트: 내 동생을 그렇게 부르지 마.
마유즈미 나데시코: …지금 나한테 화를 낸다는 게 웃기다. 네 동생이 반푼이라는 말을 들으면 화가 난다니. 정작 너도 터치를 방해하지 않게끔 방에 들여 놓지 않았으면서. 마치 사실이 아닌 것처럼 굴긴?
캐롤 브라이트: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어. 치나미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런다고 해서 너에게 치나미를 깔볼 지위가 주어지는 건 아니야. 네가 스스로를 아무리 우월하다고 생각할지라도…
마유즈미 나데시코: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나는 이미 우월해. 제인. 네가 아무리 강대한 샤이닝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내 자아를 여태껏 제압하지 못한 것만 보아도 증명된 일이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원한다면 또 몇 번이든 증명해 주지. 너희들의 그 찬란한 빛보다 내 그림자가 더 짙다는 것을. 자. 어서 시작해 봐.
캐롤 브라이트: 알겠어. 시라유키… 계속 말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이름 없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가방에서 둥그렇고 흰 헬멧을 하나 꺼냈다. 그 내부에는 젖은 스펀지가 촘촘이 채워져 있었다. 분명 소금물에 적신 스펀지이리라.
히무로 시라베: 스펀지를 머리에 밀착시키려는 건가?
나나시: 응. 사실 마유즈미의 머리카락을 깎으면 훨씬 효과가 좋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유즈미의 동의 없이 그럴 수는 없어서 보류하기로 했어.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의 신체에 너무 큰 부담을 주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는군. 인도주의적인 설계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나나시: 괜찮아. 터치의 출력을 조절하면 마유즈미의 머리가 받는 충격 자체는 줄일 수 있으니까. 또 헬멧은 스펀지를 머리에 더 잘 닿게 할 뿐, 그 이상의 기능은 없어. 원래는 헬멧 안에도 금속을 덧대서 이중의 전도 효과를 유도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좀 위험해 보여서 젖은 스펀지를 붙이기만 한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점점 더 달갑지 않은 모양새가 되고 있는데.
메리는 불편한 눈치로 곧 자신이 쓰게 될 헬멧을 바라보았다.
히무로 시라베: 그럼에도 마유즈미가 손상을 입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나?
마유즈미 나데시코: 맞아. 대체 누구에게 임상 시험을 한 거야? 탑에는 동물이 없잖아. 그나마 네 동생한테 하는 게 제일 나았을 텐데.
캐롤 브라이트: 미쳤어? 나랑 나나시 씨가 한 번씩 썼어. 따끔거리는 마사지를 받는 느낌만 들고 후유증은 남지 않으니까 너무 무서워하지는 말고.
나나시: 덕분에 우리 다 소금물에 머리가 흠뻑 젖긴 했지만…
마유즈미 나데시코: 사람한테 직접 임상 실험을 한다고? 이거 제정신이 아니네. 제인. 착한 사람 취급을 받으려고 너무 애쓰는 거 아니야?
캐롤 브라이트는 메리의 말에 고깝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캐롤 브라이트: 글쎄. 착한 사람이 되려는 시도를 아예 저버리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최소한 다른 사람한테 피해는 안 줄 테니까.
마유즈미 나데시코: 다른 사람 운운은 일찌감치 그만두지 그래. 제인. 너는 그냥 다른 사람한테 해를 끼치는 게 무서울 뿐이잖아. 다른 사람을 해쳐서 받을 비난이 무서우니 스스로를 억누르는 거야. 심지어는 뒤에서 누가 수군거리는 것도 무서워서 한 없이 착하고 싶을 뿐이지. 그건 노예의 사고방식이야. 늘상 그렇게 지내니 오히려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을 박하게 대하게 되는 거라고.
캐롤 브라이트는 메리의 말에 무심코 이름 없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메리의 말은 일부분 사실이었다. 캐롤 브라이트는 사회적 억압을 체화하여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살 만한 사람의 모습을 늘상 유지하고 있고, 정작 그녀를 이해하는 이름 없는 남자에게는 불신과 지지 호소를 함께 느껴 수갑을 채우게 되었다. 가면이 그녀의 얼굴에서 언제 흘러내릴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과 별개로 나는 두 사람의 사적인 대화를 가로막기로 했다. 생산적이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캐롤 브라이트의 능률이 떨어질 것이 다분해 보였기 때문이다.
히무로 시라베: 터치를 수행하는 것이 너희인 이상 너희들의 임상 실험 결과를 믿겠다. 착용법은 일반적인 헬멧과 같나?
나나시: 아. 응. 턱끈을 이렇게 씌우고서…
이름 없는 남자 또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메리에게로 헬멧을 가져갔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자면 너희. 굉장히 경솔한 짓이었어. 차라리 전류를 견딜 수 있을 만한 네 동생한테 먼저 써 봤어야지. 너희 둘끼리 알아서 해결하려 들었다가 사고라도 터지면 어떻게 하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꼭 그렇게 죽게 되는 거라고.
나나시: 어. 그래. 맞아… 좀 짜릿하긴 하더라. 그래도 나랑 캐롤 씨가 시행착오 겪으면서 조정한 덕분에, 이번에는 전처럼 소금물이 얼굴에 줄줄 흐르지는 않잖아? 우리한테 좀 고마워하면 좋을 텐데.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딴 식으로 모욕을 주는 게 의도였다면 너는 비열한 인간이고, 의도가 아니었다면 너는 무능해서 소금물이 흐른다는 당연한 일도 계산하지 못한 거야. 결함을 수리하는 것 가지고 칭찬을 바라는 건가?
나나시: 야박하네… 나도. 저번에 그렇게 된 게 조금 미안해서 이렇게 하려는 거야. 자…
이름 없는 남자는 메리에게 헬멧을 뒤집어씌웠다. 그러자 철퍽 소리와 함께 그녀의 이마부터 뒷목, 귀의 옆까지 헬멧과 접촉한 부위 밑은 전부 뚝뚝 흐르는 소금물 범벅이 되고 말았다.
히무로 시라베: …소금물이 흐르고 있다.
나나시: 아… 스펀지에 적실 양을 실수했나 봐. 으아. 막 흐르네… 누구 수건 있어?
히무로 시라베: 눈 뜨지 마라. 너만 손해를 볼 것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또야…? 프… 쓸모없는 반푼이 발명가 같으니. 퉤. 역시 고작 엔지니어는 이런 간단한 장치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건가?
이름 없는 남자는 메리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캐롤 브라이트: 기죽지 마세요. 나나시 씨. 저는 마음에 드니까요. 솔직히 말해서 저번 일은 옛날의 정이랑 이루어야만 하는 당위성이 뒤죽박죽이라 조금 심란했는데. 지금은 그저 통쾌해요.
캐롤 브라이트는 그를 북돋와주기 위해 말했을지 모르지만 이름 없는 남자는 그 말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설계 실수로 인해 누군가가 불쾌감을 느꼈는데, 그 누군가가 불쾌해지는 일이 캐롤 브라이트에게는 기쁨이라니. 제대로 된 위로라 보기는 어려웠다.
역시 캐롤 브라이트는 불안정하다. 이런 사소한 대화 속에서도 원한과 적의를 쌓는 것을 보면 결코 기우라 치부하고 넘길 수가 없었다. 나는 특정한 징조를 목격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해석한 끝에 그녀에게 반복을 알려주어서도 안 되고 개인적으로 척을 져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적어도 마유즈미가 돌아와 정신조작 보유자들과 나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캐롤 브라이트: 준비하세요. 나나시 씨.
나나시: 네. 준비 됐어요.
이름 없는 남자의 머리와 눈은 다시금 부분적인 금빛을 띄었다. 나는 눈을 감고서 정신의 틈새로 들어갈 채비를 했다. 그렇게 돌입이 몇 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있잖아. 시라베. 제인과 노네임에게는 언제 알려 줄 생각이야?
히무로 시라베: 무엇을 말이지?
메리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네가 숨기고 있는 이 살인게임의 진실 말이야.
메리에게서 가까워지던 캐롤 브라이트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캐롤 브라이트는 메리의 말을 무시하고 터치를 행하려다가 석연치 않다는 듯이 메리의 손을 잡기를 주저했다.
반복. 메리가 그런 가능성을 제기한 이상 그녀는 그 화두에 대해 이야기할 용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것따위 모른다고 했다가는 곧 덜미를 붙잡힐 것이고 안다면 이 자리에서 말하게 될 터였다. 터치를 앞둔 상황에서 내분의 조장. 메리는 좋은 수를 뒀다. 캐롤 브라이트와 이름 없는 남자는 이미 서로 손을 붙잡고 있었다. 생각을 서로 전하고 메리가 한 말에 대해 의논하고 있을 터였다.
나는 혀를 쯧 하고 차지 않게끔 나의 행동을 억눌렀다. 캐롤 브라이트와 이름 없는 남자에게 더 나쁜 인상을 심지 않고 터치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거짓말을 하면 몰리게 되고, 참말을 하면 더 숨길 수가 없게 되고 만다. 아무것도 정하지 않는다면 그저 의심과 불신이 더욱 커질 뿐이다.
히무로 시라베: 터치가 끝나고 난 뒤에 의논하도록 하지.
캐롤 브라이트와 이름 없는 남자는 내 말에 반절 정도밖에 납득하지 못했다. 나 또한 반절 정도의 설득이었기 때문이다. 유보. 하지만 당시 내가 내릴 수 있는 가장 나은 결정은 그것이었다.
더 단크 타워
챕터 4: < 황금 원숭이의 손길 >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마유즈미."
"이쪽. 이쪽이요! 히무로 씨! 저 여기 있어요!"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방향을 따라 후스마를 열었다. 미리 외워 두었던 마유즈미의 위치는 쓸모가 없게 되었으나 정신이 이어져 있는 이상. 나는 어렵지 않게 그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본래 양쪽으로 열리는 후스마의 오른쪽 부분만을 열며 나아갔다. 하지만 마지막 후스마만큼은 양쪽으로 열렸다. 반대편에서 후스마의 왼쪽. 그녀의 입장에서는 오른쪽일 후스마를 직접 연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무엇을 발견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잘 지내셨어요. 히무로 씨?
나와 그녀는 서로 다른 것에 대해 물었다.
히무로 시라베: 특별히 비참한 일은 없었어. 너는?
마유즈미 나데시코: 묘한 걸 찾아냈어요. 저거 보세요!
마유즈미는 양손의 검지로 흑백 투성이의 방 속 한 전경을 가리켰다. 안짱다리로 앉은, 마유즈미와 비슷한 키의 소녀와 그 키의 6할 정도 되는 유녀가 보였다. 유녀 쪽은 무릎을 꿇은 채 정돈된 채로 앉았다. 그러나 안짱다리로 앉은 사람은 마유즈미가 아니었다. 닮은 얼굴이었지만 세세한 부분은 달랐다. 마유즈미보다 눈매가 뚜렷했고 눈 안에는 점이 있다는 점이 그랬다.
히무로 시라베: 저 사람은 네가 아니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죠?! 그런데 저희 집에는 저렇게 입고 저렇게 저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없어요! 제 카게무샤(影武者)이기라도 한 걸까요?!
히무로 시라베: 너를 암살하려는 사람이 없으니 너 대신 칼을 맞을 사람은 필요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해. 분명 그저 다른 사람일 뿐이겠지.
"□□□. 언니가 말했지?"
앞 글자. 두 음절이라고 하기에는 길고 네 음절이라고 하기에는 짧은 시간. 세 음절이었다. 하지만 정확히 그 이름이 발음되는 순간에는 그녀의 입이 검은색으로 덧칠되어 입술을 읽을 수가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지금 너와 비슷한 체구의 소녀가 한 말을 들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어…? 아뇨? 언니가 말했냐는 말 밖에 못 들었어요. 그런데 언니라니…?
히무로 시라베: 저 사람이 네 언니일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마유즈미 가문의 진짜 장녀…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 언니라고?!
마유즈미는 나를 보고서 왁 소리를 지르고는 나와 그녀의 언니의 얼굴을 번갈아서 바라보았다.
"무릎 꿇고 있지 말래도. 우리 둘만 있을 때는 무릎 꿇지 않아도 된대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그럴 필요 없잖아?"
"그렇지만 이제 나는 이게 더 당연하다는 느낌이 들어. 언니. 오히려 아빠다리로 앉으면 조금 어색해…"
"…어휴. 애를 잡겠네."
마유즈미 나데시코: 언니라니?! 저한테는 언니가 없어요! 그리고 아마도 제가… 제가 마유즈미 나데시코에요!
히무로 시라베: 아니. 그건 너의 이름이 아니라 언니의 이름이었어. 그것도 나이 차이가 상당한 너의 언니. 지금 고등학생 나이인 네가 서류상 25살이라면, 8년 전후의 차이가 있는 거야. 이 시점의 네 언니가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저 아이 쪽이 너일 확률이 높아.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 저 꼬마가 나?!
나는 어린 마유즈미를 자세히 들여다본 끝에 그녀의 왼쪽 머리의 옆으로 머리카락이 삐져나오는 것을 식별해냈다. 그녀만의 특징이었다. 마유즈미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홱홱 고개를 돌려가며 바라볼 대상이 나, 그녀의 언니 말고도 어린 그녀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 그럴 수가…
"그보다 약속한 대로 서예 알려 줘. 언니! 나한테도 글씨 어떻게 쓰는지 알려 주기로 했잖아! 자! 먹도 다 갈았어!"
"어휴. 잘 갈았네. 우리 □□□. 솜씨가 굉장한데?"
"그렇지? 나도 언니처럼 서예가가 될 거야!"
마유즈미의 언니는 어린 마유즈미의 코를 붙잡고서 웃었다.
"안 돼. □□□. 너는 서예 말고 다른 거 해."
"우씨. 왜? 나도 언니처럼 잘 할 수 있어!"
"아직 너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다른 거 하는 편이 나아. 서예가의 짐은 내가 혼자 짊어질 테니까 너는 여기를 떠나."
마유즈미 나데시코: 앗…
"싫어. 나 앞으로도 언니랑 같이 놀고 싶어!"
"안 돼. 너는 언젠가 떠나야만 해. 그래서 무릎을 꿇지 말고 나처럼 앉으라는 거야. 이 집에서야 무릎 꿇고 앉는 게 옳다고 하겠지만 다른 곳에서는 아니니까. 그때가 되어서 다른 방식으로 앉으려 하면 바꾸기가 힘들 테니까."
어린 마유즈미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저 버릇은 어릴적부터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래도 돼. 일단은 약속이니까 언니가 어떻게 쓰는지 알려줄게. 그렇지만 너는 나 대신에 자유로운 일을 마음껏 하는 거다. 알겠지?"
마유즈미의 언니.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폐쇄적인 가정환경 속에서의 갑갑함. 한계와 그 일을 일종의 짐이자 의무로 여기고 있었다. 분명 나이에 비해 높은 수준의 현명함과 인격적 성숙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마유즈미가 언니의 신분을 뒤집어 써 본인의 정체성을 잃고, 원하지 않는 서예를 계속하게 된 일은 그저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토록 긍정적인 기억을 쌓은 사람을 잊어버리다니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그보다 더 달갑지 않은 일이 있다면 결국 이 기억 속에서는 마유즈미의 본명을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더 깊은 기억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타인이 억압한, 어쩌면 마유즈미 본인이 억압한 기억을 전부 찾아내야만 했다.
그러는 와중 나는 내 옆에서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마유즈미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괜찮아. 마유즈미?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어…? 훌쩍. 어? 제… 제가 왜 이러죠…?
히무로 시라베: 슬프기 때문일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슬프다뇨… 저. 저는… 저 분이 누구인줄도 몰라요…
히무로 시라베: 너는 알고 있어. 마유즈미. 아무리 너에게 너의 것이 아닌 운명과 신분을 뒤집어씌우려 해도 네가 완전히 꺾이지 않았기 때문에. 억압될지언정 그녀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 기억을 볼 수 있었던 거니까.
마유즈미 나데시코: 모르겠어요. 히무로 씨. 그냥… 저 사람을 다시 보고 싶어요…
그러나 마유즈미는 영영 저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다. 가문 내에서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신분을 마유즈미에게 덧씌운 것을 생각하면, 마유즈미 나데시코 본인은 분명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일 터였다.
그 기억 사이를 누비고 마침내 자신의 죽은 언니를 영영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유즈미가 깨닫게 된다면, 그녀는 큰 상처를 입을지도 몰랐다. 본래 이미 깨어진 것을 다시 짜맞추려면 고된 노력이 필요했다. 그것은 상처를 받을 자리를 미리 마련해 둔 뒤 그 자리에 칼을 맞는 일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이곳에 멈춰 있을수는 없어. 마유즈미. 다른 기억을 향해 가야만 해.
마유즈미는 자신의 언니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훔쳤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만약 그런다면… 저 사람에 대해서 더 많이 알 수 있을까요?
히무로 시라베: 너 스스로에 대해서도 알아낼 수 있을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러면… 갈게요…
마유즈미의 말에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서 다음 후스마를 향해 갔다. 당시의 우리에게 있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에게 그것은 남녀간의 신체 접촉보다 영적인 인도처럼 느껴졌다. 이미 두 사람의 운명은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마유즈미가 자신을 깨닫는 일뿐만이 아니었다. 나 또한 마유즈미를 깨달아가는 과정이었다.
일찍이 그렇게 해야만 했다. 영안로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녀가 보인 징조를 찾고서 관심을 가져야만 했다. 그랬다면 마유즈미가 의식의 저편에 갇혀 버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뒤늦게나마 나는 그녀의 마음 속에 발을 디뎠고, 그녀가 겪고 있는 고난을 나의 것처럼 여기며 그녀를 돕기로 정했다. 그녀가 나를 이해한 만큼 나도 그녀를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분명 같은 방향으로 걸어 같은 장소에 함께 설 수 있을 것이다.
히무로 시라베: 힘내. 마유즈미.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씨도 힘내세요.
그리고 나와 마유즈미는 다른 방을 통하는 후스마를 열었다. 그녀가 왼쪽을, 내가 오른쪽 후스마를 열어 두 사람이 지나갈 만한 틈을 만들었다. 그 수많은 방 안에는 어린 마유즈미와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있었다. 단편적인 정보들이 대다수였지만 우리 둘 중 그것을 해석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낀 사람은 없었다. 나에게 그 시각 정보는 마유즈미 나데시코라는 인물을 알아내기에 충분한 양이었고, 마유즈미는 본래 그녀가 지내던 집이었기 때문에 장벽 없이 정보를 흡수하고 또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한 없이 억압당하던 마유즈미보다는 더 나은 환경에서 자랐다. 예술가의 재능이 있었기에 가문의 원로들을 상대로도 발언권을 가졌으며, 차기 당주가 될 것임이 당연해 보였기에 어느 정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기도 했다.
"짜자쟌. 이거 봐라. 언니가 받아온 상! 대단하지?"
"와! 언니! 대단해!"
"무슨 상을 받았는지는 알고?"
"몰라!"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고등학생의 나이에도 예술적인 두각을 드러냈다. 희망봉 학원에 발탁될 가능성 또한 높아 보였다. 이미 마유즈미와 이해관계가 통해 있는 예술계의 여론은 그녀를 초고교급 서예가라고 불렀다. 이미 정해진 1등. 그런 부정행위 없이도 재능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서예가의 일을 싫어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런 물건이 왜 필요하지? 천박하고 도무지 우아한 면이 없는 서구 사회의 상품이."
"작품 활동에 필요합니다. 이 미약한 계집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부디 뜻대로 해주시길…"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전통과 권위를 중요시하는 가문 내 인물들에게는 훌륭한 이단아였다. 차라리 능력이 없었다면 지위와 경제적 자원을 이용해 허수아비로 세우고 그만이었겠지만 그녀는 본인만의 주관과 예술을 향한 개방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종종 그녀가 원로들과 말싸움을 빚는 것을, 어린 마유즈미는 작게 열린 하카마 너머에서 엿보기도 했다.
원로들은 마유즈미 나데시코에게 경시의 대상일 뿐이었다. 반면 어린 마유즈미는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친근함과 사랑을 받았다. 그저 정적인 가옥에서 누군가가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은 마유즈미 나데시코와 마유즈미가 서로 숨바꼭질을 하는 소리였다.
"와아아악!"
"끼야아악!"
"놀랐지? 히히히. Mea Culpa."
"나데시코! □□□를 망칠 셈이냐!"
가문의 중역처럼 보이는 이가 마유즈미 나데시코에게 그렇게 소리쳤지만 그녀는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사용인들은 그 누구도 마유즈미와 놀아주지 않았기에 마유즈미와 긍정적인 체험 기억을 형성한 것은 그녀의 부모가 아닌 언니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마유즈미가 접하지 못하는 것들을 접할 수 있게끔 돕기도 했다. 이 대목에 와서는 기억의 정보에 따라 작게 울거나 웃기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이던 마유즈미마저 입을 크게 벌리고서 감탄하고야 말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 토마스… 패트와 매트… 가제트 형사! 너무너무 오랜만이다. 우와아…!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텔레비전에 비디오 테이프를 넣고서 어린 마유즈미와 함께 영상을 시청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씨! 토마스 아세요? 저게 토마스에요! 토마스와 친구들!
나는 마유즈미가 가리키는 화면을 들여다보고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전경에 그저 거부감을 느꼈다. 화면 안에는 사람의 얼굴을 가진 기관차들이 서로 의지를 가진 채 소통하고 있었다. 갈등을 빚기도 했다. 나는 그 형체들을 보며 폭주기관차 블레인을 떠올렸다. 심지어는 사람의 얼굴이 붙어 있는 블레인이라니. 이게 어린아이에게 보여줄 만한 물건이란 말인가?
마유즈미 나데시코: 토마스를 모르세요? 패트와 매트도요?!
히무로 시라베: 몰라. 본 적이 있을지 몰라도 본 기억은 없어.
그 영상 매체를 잠시 본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 마유즈미의 본명을 알아내는 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유즈미는 생각이 달랐다. 어린 마유즈미만큼이나 눈을 반짝이며 그 영상을 들여다보는 마유즈미는 좀처럼 텔레비전 앞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조. 조금만 더 볼래요. 히무로 씨! 한 편만 보고 가면 안 될까요?
히무로 시라베: 그걸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면 해야 할 일을 못 하게 돼.
마유즈미는 내가 그녀의 손을 당기는데도 발로 땅을 단단히 딛고 서 나의 힘을 버티려 했다. 나는 그녀의 발을 다다미에 질질 끌고서 그녀를 다른 방으로 끌어당기려다가 대신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앗…!
히무로 시라베: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지금은 네 기억을 더 찾는 게 급해. 나중에 다시 보자.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 그렇게 할까요…?
히무로 시라베: 그래. 저 열차는 빼고.
마유즈미는 쩔쩔매다가 내 말을 듣고 순간 왈칵 성을 냈다. 나와 그녀는 다시 한 손을 잡은 채로 다음 후스마를 향해 걸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안 돼요! 토마스가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한 편을 다 보신 뒤에 그런 말을 해요!
그 기이한 영상을 향한 그녀의 관심은 진심이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등 뒤를 곁눈질로 확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무로 시라베: 사람 머리가 붙은 기차의 이야기는 재미있지 않아. 어떤 제작 과정을 거쳐 그렇게 되었는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사람 머리가 붙은 게 아니라 기차를 사람처럼 표현한 것일 뿐이에요!
그녀에게는 그것이 유년시절의 기억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이미 나는 그녀의 꿈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기에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보고만 있을 여유가 없었다. 캐롤 브라이트의 정신 건강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이번의 터치에는 방해꾼이 없었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유지될지에 대한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후스마에 도달하고 우리가 그것을 각각 왼쪽과 오른쪽으로 밀었을 때. 후스마는 열리지 않았다.
지금껏 거의 모든 후스마는 쉽게 열렸고 그 안에는 어린 마유즈미가 있었다. 열리지 않는 후스마는 처음이었다. 나와 마유즈미는 서로 눈길을 한 번 주고받았다. 우리는 이 너머에 있는 물건에 어떠한 실마리가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봉인이다. 억압된 기억이다. 우리는 서로 손을 놓고 후스마를 각자의 방향으로 당겼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끼잉… 왜 이렇게 안 열렷…! 좀 열려라…!
누가 억압했는지는 알 수 없는 기억. 그것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숨기고 싶었던 것이 이 안에 있었다. 나는 문을 뜯어낼 각오로 후스마를 당겼다. 나무의 이음새 사이에 접착제가 붙은 듯 꿈적도 하지 않는 후스마를. 나는 힘을 주어 서서히 밀어냈다. 듣고 싶지 않은 마찰음이 들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영차… 영차…!
마유즈미는 내 방향이 진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보자 작은 틈새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넣고 나와 같은 방향으로 당겼다. 그러자 서서히 후스마 사이의 틈새가 커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팔을 옆으로 밀자 그것이 활짝 열려 반대편 벽에 부딪히며 쿵 소리를 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열렸어요! 히무로 씨!
히무로 시라베: 그래. 안에 뭐가 있는지 볼까.
그 안에는 바퀴가 달린 캐리어를 옆에 둔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있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
"이번 미술전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 비단 일본 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도 마유즈미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을 거야."
"우와…! 진짜 가는거야?! 나는 절대 허락 못 받을 줄 알았어! 그런데 언니. 원래 가문을 위해 일하는 건 싫어하지 않았어?"
"여전히 싫어. 핑계야. 다른 미술가들을 본받고 배울 점을 찾으러 가는 거지. 앞으로도 쭉 일본에만 처박혀 지낼 수는 없잖아."
"언니가 없으니까 당분간은 많이 쓸쓸해질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어린 마유즈미의 볼을 잡고 당겼다.
"으에에에엑! 하지 마아!"
"언니도 그나마 말 통하는 사람이랑 같이 못 가게 돼서 너무 슬프다. 그래도 곧 올 거야. 너무 걱정하지는 마."
어린 마유즈미는 자신의 뺨을 주무르며 물었다.
"언니. 어디로 가?"
마유즈미 나데시코: 가지 마.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첫 결행지는 지중해로 가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원로 분들께서는 자본의 중심지를 원해서 말이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미국에 가면 안 돼. 언니…
마유즈미는 멍하니 말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미국으로 가면 안 돼. 미국에 갔다간…
우리가 열고 온 쪽의 반대편 후스마가 문득 텅 하고 활짝 열렸다. 그 안에서는 비통한 울음이 들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다시는 못 오게 된단 말이야. 언니…
"내 딸!"
장이 끊어지는 외침.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이름. 눈물을 흘리는 중년의 여인. 전화로 윽박을 지르는 남성. 혼란에 빠진 원로들과 마유즈미 가옥. 나는 그들이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마유즈미 나데시코를 사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제발 가지 마. 언니. 가지 마…
마유즈미 나데시코: 가지 마. 언니!
가옥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그 순간. 연결이 끊겼다.
나나시는 캐롤이 더없이 불안해하는 것을 느꼈다. 지난 시도에서 카이다가 난동을 부릴 때만큼은 아니지만, 분명 터치는 불안정하게 이어져 있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힘드나 봐. 제인?
캐롤 브라이트: 후우… 후…
나나시는 그녀가 마음의 평온과 일정함을 잃은 과실이 자신에게 크게 있음을 알았다. 나나시는 캐롤에게 있어 최후의 보루였다. 다른 모든 이들이 등을 돌려도 그만큼은 그녀의 편에 서서 그녀를 지켜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캐롤에게서 카이다를 잘라내려 했다.
수갑을 채운 것은 캐롤 나름대로의 확신을 되찾기 위해 애쓴 결과였다.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방법이지만 캐롤은 그런 방식밖에 떠올리지 못했고, 그런 방식을 통해서 겨우 안정감을 얻었다. 그녀는 온통 무너지고 있었다. 그에 더하여 살인게임에서 그녀와 나나시를 적대하는 히무로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말을 듣자. 캐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살인게임 속 경쟁자, 그리고 정신조작 보유자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숙적을 향한 불신과 공포가 커져갔다.
캐롤 브라이트: 괜찮아요. 아직 할 수 있어요. 아직…
캐롤은 자신을 걱정하는 나나시의 눈빛을 보자 울컥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를 포함해 어떤 사람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녀는 왜인지 모든 일에서 주르륵 미끄러지고 있었다. 도무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호르몬. 호르몬 때문에 다 망쳤다. 캐롤은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그녀 또한 예민한 성질을 죽이고 숨기며 남들에게 맞춰 주려 하고 있으니 그녀만큼 애쓰지 않는 사람들은 무책임하고 또 배려심이 부족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불만은 그녀 스스로가 분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 순간 자기혐오가 되어 그녀를 찔렀다.
캐롤은 진위여부도 알 수 없는 메리의 말 한 마디에 자신이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분이 나빴다. 아니. 말 한 마디가 아니었다. 착한 척을 한다던 그 촌철살인의 말. 그게 그녀의 마음을 헤집고 어지럽혔다. 너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의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나시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가 그녀를 미워할 만한 일을 하게 되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는 나를 못 이겨. 제인. 너처럼 밝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태어난 나를 압도할 수 없어.
캐롤은 그 말을 듣고서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억눌렀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추한 마음을 가진 미숙하고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나나시는 캐롤의 이 모든 감정을 함께 느꼈다.
나나시: 사실이 아니에요. 캐롤 씨.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캐롤은 나나시의 말을 들었으나 그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녀가 귀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더욱 주눅이 들었다.
나나시가 터치를 돕는다고 한들 본래의 의도대로 나나시는 샤이닝의 출력을 지원해줄 뿐. 터치를 맡고 제어하는 사람은 캐롤 본인이었다. 그녀의 정신이 어수선하고 뒤숭숭한 만큼 터치는 그것을 그대로 반영했다. 정신의 연결이 서서히 느슨해지고 약해졌다. 다스리지 못하는 정신으로 다른 사람과 겨루겠다니. 턱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녀가 불안하여서 마유즈미가 깨어나는 일이 늦어질 터였다. 이제 다 틀렸다. 그녀 때문에 다 망해 버렸다. 캐롤은 서럽게 울고 싶어졌다. 너무 짜증이 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가슴과 머리 속에 박힌 멍울이 숨막히게 그녀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잘 하고 싶었는데. 이런 바보같은 감정 따위 쉽게 조절하고 싶은데…
그러던 순간. 캐롤은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 자신의 감정 속에서 아주 조금씩. 평온한 호수에 물방울을 떨군 듯이 퍼져나가는 조용한 파문을 느꼈다. 그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나나시: 괜찮아요. 괜찮아요… 캐롤 씨. 걱정 마세요.
터치. 정신의 연결. 나나시는 캐롤이 그에게 했던 일을 그녀에게 되돌려주었다. 나나시는 캐롤에게 평안을 심었다. 캐롤은 달음박질치던 자신의 심장이 서서히 잦아들고 어느새 잔뜩 가빠져 쌕쌕거리던 숨소리 또한 멎어가는 것을 전부. 온전히 느꼈다.
나나시: 당신이 나에게 이 일을 해준 거야.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을 주었잖아요. 그러니 누가 뭐래도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야.
캐롤은 나나시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기분이 아무리 비참할지라도, 미움받지 않고 싶어서 해온 선일지라도 그 위선으로 도움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녀 또한 가치 있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캐롤은 서서히 마음을 다잡았다.
캐롤 브라이트: 저… 힘낼게요.
터치는 지난 시도보다 오래 이어졌다.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
손을 뻗었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정신의 연결은 끊어져 버렸다. 캐롤 브라이트는 내가 소리를 낸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메리에게서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변명조로 소리쳤다.
캐롤 브라이트: 죄… 죄송해요! 히무로 씨! 제가 오늘따라 조금. 집중이 안 돼서… 정말 죄송해요! 이러면 안 되는데. 이번이야말로 정말 절호의 기회였는데…!
왜인지 캐롤 브라이트는 그녀 탓에 터치가 끊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캐롤 브라이트가 마유즈미의 복귀에 훼방을 놓을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설령 캐롤 브라이트가 집중하지 못했다고 해도 그것은 마유즈미의 정신이 봉인된 기억을 보고 불안정해진 요인의 결과이기도 했다.
캐롤 브라이트가 힘겨워하는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매일 샤이닝을 미세조정하여 메리와 힘겨루기를 하는 일의 피로가 터져 나왔고, 또한 메리가 남겨 두었던 불신의 씨앗이 그녀의 마음 속에서 자라 그녀를 어지럽혔을 터.
히무로 시라베: 너무 마음 쓰지 마라. 연결되어있던 정신 자체가 흔들렸기 때문이기도 하니까.
캐롤 브라이트: 그렇지만 저 때문에 마유즈미 씨가…
나나시: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캐롤 씨. 히무로도 말하잖아요. 너무 자기 탓만 하지 마세요. 매일 이렇게 열심히 하고 계신걸요?
이름 없는 남자는 캐롤 브라이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캐롤 브라이트는 그의 말을 듣고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없는 남자는 캐롤 브라이트가 진정하는 것을 확인한 뒤에 내게 천천히 말을 걸었다.
나나시: 히무로. 오늘도 고생했어. 마유즈미가 빨리 돌아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히무로 시라베: 고맙다. 너희들이 마유즈미를 위해 매일 노력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분명 마유즈미 또한 너희에게 고마워하고 있을 것이다.
히무로 시라베: 그러니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숨기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할 때가 되었다.
이름 없는 남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물었다.
나나시: …히무로. 사실이 아니지? 전부 시라유키가 저희를 갈라놓기 위해 하는 말이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뻔하게 드러난 사실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건 천박한 이들이나 하는 짓이야.
캐롤 브라이트: 너한테 물은 적 없어.
캐롤 브라이트는 메리에게 말했다. 눈가는 찌푸려진 채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저 내분을 조장할 뿐이라 치부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제인. 하지만 나는 사실을 말하고 있어. 이미 시라베는 너희들에게 대몰락에 대한 내용을 숨기지 않았던가? 그 이유는 너희가 대몰락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똑같은 이유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희를 좀 봐.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관계로는 보이지가 않아. 게다가 너희들은 정신조작 보유자들. 자신의 흔들림이 곧장 다른 사람들을 뒤흔들 수 있는 사람들이지. 당연히 그런 정보라면 너희들에게서 숨겨야 하지 않겠어? 믿기지 않는다면 히무로한테 물어 봐. 왜 탑의 지하에 그토록 많은 크레딧이 쌓여 있었는지를.
캐롤 브라이트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시라유키의 말이 사실인가요?
히무로 시라베: 나는 탑의 지하에 크레딧이 많이 쌓여있는 이유를 알고 있다.
나나시: 그건 우리도 알아. 우리 이전에도 이 탑에 살인게임이 벌어졌기 때문이잖아? 크레딧 탱크에는 살인게임의 참가자들이 사용한 만큼의 크레딧이 쌓이는데, 그토록 많았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 이전 참가자들이 자신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나는 영영 그들을 속일 수는 없었다. 메리가 반복에 대해 아는 이상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었다. 메리는 그들이 나를 추궁하도록 유도할 수도, 내가 거짓말을 거듭한다면 직접 반복에 대해 전해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포기할 수 있는 것은 포기해야만 했다.
히무로 시라베: 그게 전부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너희들에게는 말해줄 수 없다.
캐롤 브라이트: 왜죠?
글쎄. 왜일까. 제인. 나라면 시라베가 대답하기만을 기다리는 대신 직접 알아내보려 애쓰겠어.
나나시: 아니. 나는 안 물을래.
이름 없는 남자는 메리의 말을 그렇게 일축했다.
나나시: 만약 히무로가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속이고 있다면, 나는 히무로에게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어. 시라유키.
나는 메리만큼이나 그의 반응을 기이하게 여겼다. 메리는 이해하지 못할 현상을 관측한 듯이 목을 앞으로 빼고서 이름 없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게 무슨 생각 없는 소리야? 너를 기만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어. 너와 제인에게만 불공평한 취급을 하고 있다고. 그런데 너는 시라베를 변호하는 거야? 시라베가 말을 잘 한다고 하지만, 사람을 언변으로 홀리고 지배하기에는 아직 모자랄 텐데?
마유즈미 나데시코: 혹시 시라베가 너를 총으로 쏜 기억 때문에 도무지 시라베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건가? 무서워서?
캐롤 브라이트: 그러실 필요 없어요. 나나시 씨. 제가 있으니까요! 저희는 같이 싸울 수 있어요!
나나시: 그런 게 아니에요. 캐롤 씨.
이름 없는 남자는 캐롤 브라이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메리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나나시: 나는 히무로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 만큼. 네가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이유도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해. 그 때문이야. 네가 정말 우리의 행복을 바라고 있을리 없잖아. 시라유키. 나와 캐롤 씨는 마유즈미에게 본인의 몸을 돌려주려 하고 있으니까.
나나시: 너는 우리가 히무로와 협력하는 일을 막아야 해. 아무리 우리와 히무로가 서로 입장 차이가 있다고 해도… 대체 어떻게 마유즈미 몸에 들어가 있는지 알 수 없는 너보다야 히무로를 한 번 더 믿는 게 낫겠어.
이름 없는 남자는 메리의 분열 시도에 잘 대항했다. 사실 메리는 타당한 의문을 제기했다. 나는 분명 그들에게 살인게임의 반복이라는 정보를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름 없는 남자는 그것을 들쑤시는 것이 분명 메리에게 득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곧 신중한 판단으로 이어졌다.
애석하게도 캐롤 브라이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저는 히무로 씨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기만을 빌지 않을 거에요. 저 자신을 위해 일어날 거에요.
모든 사람이 이름 없는 남자처럼 온순하며 이성적이지는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는 정상 범주의 행동을 했다. 그녀는 메리를 믿지 않았고, 나 또한 믿지 않았다. 살인게임에서 개인은 살아남기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무언가를 알고 있는 이상 그녀는 서 있는 조건을 동등하게 세우기 위해서라도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래. 그렇게 해야지. 일어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너는 한 번 겪어 봤잖아.
캐롤 브라이트: 숨기지 말고 말해 주세요. 왜 저희에게는 알려주지 않으시는 거죠? 말씀해 주세요.
캐롤 브라이트는 한 번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다. 그 사실 또한 자신이 모르는 정보를, 그리고 이 살인게임의 진상을 알고자 하는 마음에 큰 영향을 주었다.
히무로 시라베: 너희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성을 잃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 말은 캐롤 브라이트와 이름 없는 남자의 성질을 건드릴 터였다. 하지만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없었고, 꾸며내봤자 분명 설득력이 떨어질 터였다. 그래서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두 사람의 성질을 건드렸다. 이름 없는 남자은 납득이 되지 않는 듯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고, 캐롤 브라이트는 얼굴을 굳힌 채 그녀 자신의 분노를 삭였다.
캐롤 브라이트: 저희를 무시하시는 건가요? 그건 불공평해요. 히무로 씨. 저희도 알 자격이 있어요.
히무로 시라베: 너희가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뒤에 알려 주겠다.
캐롤 브라이트: …마유즈미 씨를 구하기 위해 협력했는데. 끝까지 히무로 씨는 저희는 믿지 않으시는 군요.
히무로 시라베: 믿음이라는 단어를 쉽게 말하지 마라. 우리는 마유즈미를 위해서 협력할 뿐이다. 이 계약은 서로 더 깊은 신뢰 관계를 가지기 위한 초석이 아니라 이해 관계에 의해 우리가 합의에 이른 지점이다. 마유즈미를 위한 너희들의 헌신은 존경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감사하기 때문에 내 이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라는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은 나를 믿지 않았다. 나도 그들을 믿지 않았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정신조작 보유자였고 나는 그들을 억누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또 나는 캐롤 브라이트의 부활에 반대했으며 이름 없는 남자에게 총을 쏜 사람이었다. 이토록 어긋나왔는데도 그들이 나를 믿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이 스스로 가지고 싶은 믿음일 뿐, 진실은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간의 믿음이라는 단어로 인해 이름 없는 남자는 캐롤 브라이트를 수갑에 묶을 수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는 정작 이름 없는 남자를 온전히 믿지 못해 수갑을 채웠다. 그런 사람들이 나에게 믿음에 대해 조언을 준다고 한들 귀담아 들을 여지가 있을리 만무했다.
나나시: 그렇다면 적어도 다른 누가 알고있는지만큼은 말해 줘. 히무로.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으니까.
나는 그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나 혼자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메리가 바로 옆에 있었다. 그녀는 나의 거짓말을 짚을 수 있었고, 섣부른 기만은 그저 두 사람이 나를 향해 반감을 더 크게 가지는 결과를 낳을 터였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히무로 시라베: 알려줄 수 없다.
캐롤 브라이트: 왜요? 저희들이 그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터치를 악용해서 정보를 캐낼 것 같아서요? 계속 그런 식으로 저희를 악당 취급하다니. 너무하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히무로 시라베: 나는 내가 막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일을 방지할 뿐이다.
나나시: …그렇지만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합의점을 찾아야 해. 히무로. 우리는 네가 그 정보를 혼자 알고 있는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한 적이 있는지조차 몰라. 너는 그저 판도라의 상자를 닫아 두듯이 내버려 두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겠지만, 우리는 네가 말했듯이 너를 믿을 수 없어. 이대로 가다간 서서히 파국이야.
이름 없는 남자의 주장은 타당했다. 나야 그들이 이성을 되찾고 호기심을 억누르기를 바랐지만 영영 내 말을 믿으며 자신의 행동을 억누르는 것은 생불에게나 기대할 만한 일이었다. 합의점. 그곳은 어디인가? 도달할 수는 있는 장소인가?
나는 반복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인물을 캐롤 브라이트와 이름 없는 남자가 알게 될 경우 그들에게 터치를 사용할지 모른다는 위험성을 전제에 두었다. 하지만 문득 나는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탑에 있는 이들에게 무작위로 터치를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그들이 찾는 정보가 나올 때까지 끄집어내는 것이다.
메리는 터치에 독자적인 저항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들은 메리에게 터치를 쓸 수 없다. 터치가 통하지 않는 제츠보를 제외하면 탑에 남은 하기와라 우시오, 이바라 쿠리스, 카나리 케이토, 토키와 아유키, 카이다 쿠로하는 전부 터치의 위협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그 중 세 명이 반복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내가 대상을 제시하지 않을 경우 오히려 피해가 더 커질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장담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그들이 이미 내가 제시한 대상을 겁박하리라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그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누군가가 강제적인 터치를 당할 바에야 그들에게 살인게임의 반복을 알려주는 편이 나았다.
히무로 시라베: 이해했다. 내가 이 정보를 숨기는 것은 이 탑에 있는 이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지만, 너희들의 입장에서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겠지. 살인게임에서 다른 이들에 비해 뒤처진다는 것은 생존 경쟁에 불리한 일이기도 하니 너희가 민감하게 반응할 만한 일이다.
히무로 시라베: 그러니 너희들이 터치를 사용할 수 없으나, 이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의 명단을 제공하겠다. 마유즈미와 제츠보. 이상이다.
제츠보는 반복이라는 정보가 끼칠 위험을 알고 있으니 두 사람에게 설득되지 않을 터였고, 마유즈미는 아직 의식의 저편에 있는 데다가 그들이 차마 겁박할 수 없는, 또 캐롤 브라이트의 흔들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돌아온다면 두 사람에게 반복에 대해 알려주는 일을 고려할 수 있게 될 정도였다.
돌아온 마유즈미가 강제적인 터치를 당할 우려는 하지 않았다. 내가 결코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 마유즈미가 돌아온다면 나는 걱정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마유즈미 씨와 제츠보 씨요…?
히무로 시라베: 그렇다. 이제 합의가 된 건가?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희가 이런 반쪽짜리 결과로 만족한다면 합의가 된 거겠지.
내 안에 남은 후루미나미 나몬 또한 그들이 터치를 쓸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굳이 그녀를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듯한 눈치였지만, 이름 없는 남자는 그녀 대신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나서며 내게 말했다.
나나시: 내 말을 이해해 줘서 고마워. 히무로. 우리가 준비된다면 곧장 우리에게 말해주러 와줘. 네가 그렇다고 판단했다면 분명 네 도움이 될 수 있을 테니까.
히무로 시라베: 그러지.
하지만 당분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임을 그도 알았다. 그리고 나는 캐롤 브라이트와 이름 없는 남자가 자신의 영향력을 펼쳐 살인게임에서 살아남으려는 본인들만의 노력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로 알았음에도 그것을 들추지 않은 채 우리는 헤어졌다.
하기와라 우시오: 어. 뭐야. 전화 왔다.
이바라 쿠리스: 히무로한테서 온 전화야? 마유즈미가 돌아왔대?!
하기와라 우시오: …나나시한테서 온 전화인데? 잠깐만 조용히 해줘.
이바라 쿠리스: 에에. 굳이 그래야 해? 나나시 옆에 캐롤 있으면 나도 같이 수다 좀 떨래!
하기와라 우시오: 뭔가 느낌이 안 좋아서 그래.
하기와라는 본인 또한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 때문에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하필 터치가 끝난 직후에 전화를? 히무로놈이 아직 반복에 대해 알려주었는지에 대한 연락도 안 되는 와중에?
그냥 잠시 잠수타는 척 해? 이걸 받아. 말아?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있던 하기와라는 우선 경계를 풀고서 전화를 받았다. 혹시 좋은 소식을 전해주려 한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여보세요. 나나시? 무슨 일이야. 마유즈미가 돌아왔어?
나나시: 안타깝지만 이번에도 성공하지는 못했어. 나쁜 소식만 전해주게 되어서 미안하고, 또 당황스러운 질문을 던지게 되겠지만… 너에게 물어볼 게 있어. 하기와라.
하기와라 우시오: 어. 뭔지는 몰라도 물어 봐. 내 인터넷 검색 기록 말고 다 알려 줄게.
이바라는 왜인지 몰라도 그 말이 우스워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도 나나시는 그녀가 작게 낸 푸흡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나시: 히무로가 우리한테서 뭘 숨기고 있는지 알고 있어?
하기와라 우시오: 뭐? 뭐라고?
하기와라는 그 말을 듣자마자 못 알아들은 척을 하며 시간을 벌고서, 그 동안 나나시가 어떤 저의로 그런 물음을 던지는지 파악하고자 했다. 우선 그에게 물어봤다는 건 나나시가 반복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뜻이며 모르고 있다는 건 히무로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알려주지 않는 조건은 캐롤과 나나시의 불안정함이었다. 히무로가 보기에는 두 사람이 받아들일 각오가 안 되었기에 반복에 대해 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에게 전화를 했는가? 그것은 지금 히무로과 가깝다고 볼 만한 사람이 하기와라이기 때문이라는 것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나시: 히무로가 우리한테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가 궁금해. 시라유키는 히무로가 대몰락을 우리에게서 감추었던대로, 또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고 말했어.
하기와라 우시오: 엥? 그래?
여기서는 오리발을 내미는 게 상책이었다. 그야 나나시는 모르고 있을 테니까. 이쯤 가면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대강 짐작이 되었다. 시라유키가 히무로랑 캐롤, 나나시 사이를 갈라 놓으려 분탕질을 한 것이다.
나나시: 모르는 척 할 필요 없어. 하기와라. 나도 시라유키가 그런 말을 꺼낸 목적이 우리 사이에서 내분을 일으키기 위함이라는 건 아니까. 자기가 직접 말하지 않고 히무로가 털어놓도록 몰아가고 있잖아. 이간질이야. 그리고 히무로는 이미 인공지능과 마유즈미, 그리고 네가 그 비밀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전해 주었어.
하기와라 우시오: 어? 뭐라고?
다시 하기와라는 시간을 벌었다. 같은 농담을 두 번 하면 재미가 없듯이 같은 속임수를 두 번 쓰면 상대방이 속임수를 알아챌 가능성 또한 높아졌다. 그러니 시간을 버는 건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하기와라는 벌어둔 시간동안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히무로가 말해줬을리가 없는데. 히무로 본인이 말을 안 했더라도 그걸 아는 사람을 추궁하면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캐롤과 나나시한테 터치가 있는 이상 걔들이 마음만 먹으면 존나 날로 먹듯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으니 그건 표적을 지목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아 그건 저희 과 말고 저기 밑에 행정과 가서 문의하세요'? 히무로가 그럴 리 없었다.
나나시: 히무로가 직접 말했어. 네가 그 사실에 대해 알고 있다고.
그걸 대놓고 말해? 히무로라면 안 그럴 텐데? 그럴 바에야 자기 선에서 해결하고 말지. 그리고 제츠보, 마유즈미와 나랬나? 이바라랑 토키와는? 히무로가 그 두 사람만 따로 감쌌을리가 없잖아. 히무로가 두 사람을 숨겨 놓고서 나한테 짬을 때린다니 말이 안 돼. 그러니 나나시 혼자 히무로랑 친한 사람인 나를 떠본 거지. 하기와라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감과 열심히 머리를 굴린 끝에 나온 추론에 따라 행동하기로 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히무로가 그렇게 말했단 말이야? 왜?
하기와라는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정말 그 자신도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나나시: 하기와라. 이제 정말 그만 숨겨도 돼. 히무로가 그렇게 말했어.
하기와라 우시오: 숨기는 게 아니라. 나는 진짜 아무것도 몰라. 그 새끼 속내는 마유즈미밖에 모를 걸? 잠깐. 마유즈미는 또 어떻게 알아? 히무로가 직접 알려줬대?
나나시에게 근거가 없는 이상 그는 하기와라에게 제대로 된 압박을 할 수 없었다. 나나시는 자신의 의혹에 대한 증거를 그 스스로 제기해야만 했다. 나나시의 추론은 사실 타당했고 하기와라 또한 나나시를 속이게 되어서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히무로가 그 나름대로 판단을 내렸고 하기와라가 그에 동의하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나시: …사실대로 말하자면 히무로는 인공지능과 마유즈미 말고는 이야기해줄 수 없다고 말했어. 히무로랑 친한 너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전화한 거야. 나랑 캐롤 씨만 정신조작 보유자라는 이유 때문에 차별받고 싶지는 않아서. 미안해.
하기와라 우시오: 됐어. 그놈이 좀 히틀러스러운 면이 있기는 하지. 내가 잘 얘기해 볼게. 잘 하면 내가 그놈이 숨기고 있는 걸 캘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야. 근데 제츠보한테 물어보면 바로 알려주지 않을까? 너 걔랑 친하잖아.
나나시: 아니… 꼭 그렇지는 않아. 그래서 혹시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너에게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이제 별 방도가 없네… 실례했어. 이만 끊을게.
하기와라 우시오: 어. 알았다. 들어가고.
하기와라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 직후 하기와라의 다이얼로그가 다시금 울렸다. 이번에는 히무로에게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하기와라 우시오: 뭐야. 오늘? 대체 뭔일이 터졌길래 얘들이 나한테 이러지?
하기와라가 전화를 받으려던 찰나. 히무로 쪽에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 직후 이바라의 다이얼로그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히무로였다.
이바라 쿠리스: 에엑. 이번에는 나한테 걸었는데?
하기와라 우시오: 이쯤 가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이바라가 전화를 받자 히무로는 말했다.
히무로 시라베: 하기와라 우시오가 옆에 있나?
하기와라 우시오: 어. 있다. 갑자기 왜 그래?
이바라 쿠리스: 마유즈미 돌아왔어?! 아. 만약 그랬으면 지금쯤 알려줬을 테니까… 이런…
히무로 시라베: 진전은 있었으니 절망하지 마라. 방금 마유즈미의 숙소에서 나왔다. 나는 그들에게 제츠보와 마유즈미가 반복에 대해 알고 있다고 전했다. 네가 다른 이와 통화중인 것으로 보아 네가 반복을 알고 있는지에 대한 추궁이 들어왔다고 판단했다. 너와 내가 동시에 통화중인 것을 들킨다면 너 또한 위험해진다. 만약 너의 다이얼로그로 통화가 걸려온다면 그 즉시 이 통화를 끊겠다.
하기와라는 히무로가 하는 말을 가까스로 이해… 하지는 못했고. 대충 감은 잡았다. 즉 히무로는 마유즈미의 방을 떠나고 적당한 곳에서 하기와라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이미 통화 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건 나나시나 캐롤 둘 중 하나가 히무로와 친해 보이는 하기와라가 그 정보를 알고 있는지 넌지시 알아보았다는 뜻이다.
히무로는 하기와라에게 지속적으로 전화를 걸어 그들의 통화가 끊어졌는지를 확인했고, 통화중이 아니다. 즉 통화가 끊어졌다는 것을 알자마자 하기와라와 함께 있을 확률이 높은 이바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히무로가 하기와라의 통화중 여부를 알아내려 한 것처럼, 캐롤이나 나나시가 다시금 하기와라에게 전화를 걸어 히무로와 그 사이에 모종의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들은 하기와라 또한 히무로가 숨기고 있는 정보를 알고 있다 판단할 것이고. 그러면…
하기와라 우시오: 어우 썅. 니기미. 더럽게 복잡하네. 어쩌자고?!
히무로 시라베: 안부 전화다. 잘 대처했나? 의심을 여지를 주었다면 네가 정신조작의 위험에 노출된다.
하기와라 우시오: 어. 알아서 잘 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물어볼 거 있는데 나나시랑 캐롤 상태가 좀 많이 심각하냐? 적어도 나나시는 멀쩡해 보이던데. 걔한테만 넌지시 전하는 건 어때?
히무로 시라베: 이름 없는 남자는 캐롤 브라이트와 마음이 열린 사이이다. 이름 없는 남자에게 전한다면 캐롤 브라이트 또한 알게 된다. 또 캐롤 브라이트의 정서적 지지자가 혼란에 빠진다면 캐롤 브라이트 또한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이바라 쿠리스: 상황 한 번 복잡하네! 히무로 너. 너무 두 사람을 못 믿는 거 아니야? 너무하네! 안 되겠다. 나도 나중에 찾아갈래!
히무로 시라베: 동정심에 사로잡혀 반복에 대해 전해주는 것은 그녀가 감당하지 못할 짐을 떠넘기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공평한 사람이 되기 위해 어리석어질 필요는 없지 않나?
이바라 쿠리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캐롤과 나나시 멘헤라 지수가 그렇게 높은 거야? 우리는 근거가 없으니까 받아들이기가 조금 어려워.
히무로 시라베: 무슨 지수라고?
이바라 쿠리스: 멘헤라 지수. 멘헤라 농도라고 표현해야 맞나?
히무로 시라베: 처음 들어보는 단위값이다. 무슨 기준으로 책정되는 거지?
이바라 쿠리스: 으음… 그 사람의 멘탈 헬스. 즉 정신 건강이 얼마나 나쁜지에 대한 지수야.
히무로 시라베: 그런 지표라면 수치가 상당히 높다.
하기와라 우시오: 이 괴상한 대화가 아무 문제 없이 이어졌다는 게 너무 신기하네.
히무로 시라베: 무엇이 이상하지?
하기와라 우시오: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말해 봐.
히무로 시라베: 내가 그들을 보았을 때. 캐롤 브라이트는 이름 없는 남자에게 수갑을 채우고 죄인처럼 끌고 다니고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정상적인 범주의 행동은 아니었지. 터치 또한 불안정했다. 어쩌면 캐롤 브라이트의 건강 상태에 따라 다음 터치 세션을 미뤄야 할지도 모른다.
이바라와 하기와라는 오묘한 표정을 주고 받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수갑? 씁. 쉽지 않은데.
이바라 쿠리스: 아. 아니야! 이상한 방향으로 생각해서 그렇지 두 사람 기준으로는 별일 아닐 수도 있어!
히무로 시라베: 수갑은 보통 죄인을 묶기 위해 쓰인다. 이 대화는 언제든지 발각될 수 있으니 잡담을 계속하겠다면 끊겠다.
이바라 쿠리스: 정말로! 수갑을 서로의 행복을 위해 쓰는 사람들도 있어! 나는 아니지만! 나는 절대 아니야!
히무로 시라베: 그런 헛소리는 또 처음 듣는군. 어떻게 하면 수갑이 긍정적으로 쓰일 수 있다는 거지?
하기와라 우시오: 내가 봤을 때 그 긍정적인 사용은 아닌 것 같아. 히무로 네가 찾아왔을 때도 수갑을 차고 있었다며? 사적인 공간에서 하는 게 아니라 네가 보는 와중에도 그러고 있으면, 부정적인 요인이 어느 정도 기인했다고 생각해. 캐롤이 공공장소에서 자기 취향을 드러내는 변태는 아니잖아.
하기와라는 좋은 지적을 했다. 이바라 또한 납득했다. 히무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바라 쿠리스: 서로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캐롤 쪽에서 나나시를 붙잡아 놓으려 하고 있다면… 엑. 이거 조금 위험할지도?
히무로 시라베: 살인게임에서 생사여탈권을 맡겼다는 것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너희가 두 사람을 찾아가는 것을 말리지는 않겠지만, 너희가 반복에 대해 알고 있음을 들키거나 터치에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라. 위험해지는 것은 너희다. 정신조작의 위험에 놓인다면 나에게 전화를 걸어라. 그 즉시 가겠다.
하기와라 우시오: 존나 든든하네. 나중에 또 통화하자. 고생했어!
히무로 시라베: 오늘의 논의 내용과 결과는 제츠보에게 내가 직접 전하겠다. 그리고 당분간 통화는 없다. 나와 관련이 있는 자들에게 마수가 뻗치니.
히무로는 통화를 끊었다.
이바라 쿠리스: 쌀쌀맞네…
하기와라 우시오: 진심이야? 이정도면 엄청 따뜻한 편인데?
이바라 쿠리스: …너. 따뜻함이라는 기준이 맛이 갔구나?
마유즈미의 방을 나와 캐롤 씨의 숙소에 도착한 직후. 나는 하기와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기와라는 너무 대답을 잘 했다. 군더더기 없었고, 내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과도하게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기와라는 심지어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의심이 더해졌다.
나나시: 아무래도 하기와라는 알고 있는 모양이에요.
나 또한 그 판단은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하기와라는 탑에 처음 왔을 때 극단적인 면이 있었지만, 히무로와 함꼐 영안로에 들어갔다 나온 이후로는 줄곧 안정되어 있었으니까.
당초의 목적은 정말 캐롤 씨와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기에 히무로가 숨기는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그저 캐롤 씨와 나를 배척하려는 시도일 뿐인지를 가려내는 것이었다. 인공지능, 마유즈미, 하기와라라면 꼭 우리만 차별받는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애초에 그 명단을 알아낸다고 해서 딱히 그를 찾아가 추궁할 수도 없었다. 제대로 된 근거가 없으니까 실례이기도 했고,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다그쳤다간 나와 캐롤 씨의 입지만 좁아질 뿐이었다. 히무로는 왜인지 수갑을 유심하게 보고 있던데… 수갑 때문에 우리에게서 나쁜 인상을 얻었나?
캐롤 브라이트: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죠…?
캐롤 씨는 초조한 듯이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그토록 자립심이 강한 그녀가 어쩔 줄 모르고 있다는 것은 캐롤 씨가 위태롭고 피로하다는 증거가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컨디션을 낫게 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해서 그녀를 침대에 눕혔지만, 캐롤 씨는 좀처럼 잠에 들려 하지 않았다.
나나시: 일단 쉬신 다음에 같이 얘기해요. 많이 피곤하시잖아요. 주무세요.
상체를 일으키고 있는 그녀의 이마를 검지와 중지로 약하게 밀었다. 그녀의 머리가 베개에 떨어져 폭 하고 파묻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일어서려는 찰나 그녀는 내 소매를 붙잡았다.
캐롤 브라이트: 수갑 채워서 미안해요. 나나시 씨.
나나시: 지금은 풀어 주셨잖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니까.
캐롤 브라이트: 그래도 미안해요…
캐롤 씨는 내 말을 듣고도 한동안 손에 힘을 풀지 않고 있다가 스르르 잠에 빠졌다. 그 순간 나의 눈에는 사람과 손이 닿기만 해도 정신에 간섭할 수 있는, 탑에서 가장 강대한 샤이닝 능력자가 한 없이 연약하게 느껴졌다.
누구나 약해지는 순간이 있고 그것은 캐롤 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순간에 내가 조금이나마 힘을 보탤 수 있어서 다행일 뿐이다. 그녀가 빠른 시일 내에 기운을 차린다면 좋겠지만 나 또한 그럴 가망은 희박함을 알았다.
나는 캐롤 씨의 숙소를 나서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그저 막막함을 느꼈다. 단지 히무로가 우리에게서 그 비밀을 숨기는 것이 타당한 일이라면, 나는 차라리 앞으로도 그 비밀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정말 나와 캐롤 씨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묻어두는 편이 나을지도.
카이다는 여태껏 만난 적 없는 적과 맞닥뜨렸다.
그들의 이름은 지루함과 심심함이었다. 이들은 카이다가 외출 금지를 당하자 그녀에게 찾아왔다. 본래 그녀는 언제나 외출을 했고 자신에게 모든 것을 허용했다. 그게 카이다의 생활이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 위해 자신의 방에만 갇혀 있게 된 카이다는 답답해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식사를 하기 위해 자신의 방에서 나오는 것만큼은 허용되었지만, 식사를 다 마치고 나면 그녀는 다시금 식당에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리고 또 단조롭게. 졸린 채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게 된 카이다 쿠로하였다. 그렇게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어느새 밤이 되었으나 카이다는 여전히 잠에 들지 못했다.
카이다는 몸이 근질거리고 답답하고 어딘가 화를 풀고 싶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감각을 정확히 어떤 단어로 묘사해야 할지 몰랐다. 애초에 카이다의 어휘 사전에는 그런 단어가 없었다. 그 사전에는 에멘탈 치즈처 구멍이 숭숭 뚫려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전의 두께가 얇다는 점 또한 요인 중 하나겠지만.
그래서 카이다는 이런 복합적인 불편함 속에서 욕설을 했다. 카이다가 언제나 욕설을 하는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그녀의 분노는 발화점이 낮은 게 아니라, 100도에 끓는 물로 비유를 했을 때 기본적으로 80도 정도의 고온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툭하면 화가 나는 경솔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불이 올라오는 순간 온갖 종류의 모욕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카이다 쿠로하: 아 씨발 좆같다아아.
카이다는 제츠보 쪽으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제츠보는 카이다에게 눈동자를 고정해둔 채 제대로 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제츠보는 카이다의 감시역일 뿐, 굳이 기분을 맞춰주거나 놀아줄 필요가 없었다.
카이다 쿠로하: 야. 너 앞으로도 그렇게 나를 지켜만 보고 있을 거냐?
제츠보: 앞으로도 그럴 거야.
카이다 쿠로하: 내가 진짜 징징거리기 싫긴 한데. 잠이 안 온다니까? 이러다가 죽겠어! 씨발. 존나 짜증나네! 다 죽여버리고 싶게!
제츠보가 보기에도 카이다가 피곤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카이다의 눈가에 다크서클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고,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겁게 그녀의 눈을 게슴츠레 짓눌렀다. 심지어는 토키와마저 하루에 몇 시간은 수면을 취했다. 한 숨도 자지 않고 삼일을 버틴 사람은 전용실 안에서 농성하던 미도리카와 아쿠토 뿐이었다.
카이다가 아무리 개조되어 강력한 몸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한계가 올 터였다. 숙소에 있는 카이다는 전용실 내부에서 버티고 있었기에 자칫 졸면 처형당할 수 있는 미도리카와에 비해 훨씬 상황이 나았지만… 정말 카이다의 야성 감각이 밀려오는 잠보다도 강하다면, 카이다는 잠을 못 자서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될지도 몰랐다.
여기서 더 포악해지는 건 상상조차도 하기 싫은데. 제츠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잠을 자지 못하게 하는 건 고문으로 쓰일 수도 있는 일이다.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한 카이다가 헤까닥 돌아버린다면? 안 그래도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제정신이 아니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것이 제츠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카이다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보면 잠을 자지 못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카이다에게서 눈을 뗄 수는 없었다. 아무리 딱할지언정(사실 별로 딱하지도 않지만) 카이다가 저지를 수 있는 패악질을 고려하면 그녀를 풀어놓아서는 안 되었다.
카이다 쿠로하: 졸려. 피곤해. 짜증나. 씨발 좆같아 그냥. 아 좆같다. 개새끼들.
제츠보: 결국 시간이 지나면 잠을 잘 수 있을 거야. 몰려오는 잠은 네가 어떻게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있는 게 아닐 테니까.
카이다 쿠로하: 그런데 여기에서 더 불편하면 나만 짜증이 존나 나서 뭐든 다 집어치우고 싶단 말이야!
제츠보: 네 언니도?
카이다는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으나 제츠보의 말에 그저 이를 득득 갈며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제츠보는 그 모습을 보며 조금 안도했다. 적어도 캐롤을 우선순위로 놓을 정도의 이성은 아직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일 뿐.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결국 아무도 몰랐다.
일단 한 번 재우면 좋은데… 잠을 못 자겠다고 저렇게 난리니까… 다 집어치우고 그냥 재울 수 있는 방법은 없나? 기절이라도 시켜? 그런 되먹지 않은 생각마저 떠오르던 와중. 제츠보는 쓰기 간편하고 또 효과적일 수단 하나를 생각해냈다.
제츠보: 네가 잠을 잘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해.
카이다는 누워있던 침대에서 몸을 펄쩍 일으켰다.
카이다 쿠로하: 뭐?! 그게 뭔데?! 진짜 있기는 한 거냐?! 진짜 있는 거지!
제츠보: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잠시 네 방에서 나와야 해. 외출 금지 명령을 어기게 되겠지만 네가 더 난폭해지는 일을 막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니까… 아마 캐롤도 이해해줄 테지.
카이다 쿠로하: 뭐? 방에서 나가야 해? 그러면 좀… 곤란한데. 나 언니한테 혼나기 싫단 말이야.
제츠보: 그러면 어떻게 해? 나 혼자 가면 너 봐줄 사람이 없고, 다른 사람이 가져오게 시키기에는 미안하고. 게다가 다른 사람을 시켰다면 너는 분명 그 사람을 못 믿을 테니까.
카이다 쿠로하: 다른 사람이 가져오게 시킨다는 게 무슨 뜻이냐? 내가 잠을 자는데 왜 다른 사람이 필요해? 뭘 가져오고?
제츠보: 수면제를 가져오게 시킨다는 뜻이야. 너는 잠을 자기 위해 수면제의 힘을 빌릴 거고, 수면제는 네 방이 아니라 양호실에 있으니까.
제츠보는 손가락을 까딱여 카이다를 불렀다.
제츠보: 따라와. 양호실로 간다.
제츠보는 선반에서 하얀 색의 통을 하나 꺼내서 카이다에게 건넸다.
카이다 쿠로하: …야. 이 글자를 뭐라고 읽냐?
제츠보: 수면제라고 읽는 거야. 진정제랑 비슷하게. 먹으면 잠이 오기가 쉬워져.
카이다 쿠로하: 먹으면 잠이 오는 약? 뭐. 마취제 비슷한 거야?
제츠보: 아니. 마취랑 잠은 많이 다르잖아. 그걸 먹는다고 해서 마취제처럼 곧바로 몸이 굳어 버리지는 않지만, 잠에 드는 데에는 큰 도움을 주지. 그러니까 잠을 자고 싶은데 잠을 자기가 불편한 너한테는 좋은 선택 아니겠어?
카이다는 제츠보의 말을 듣고 만족스러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왜인지 비열해보이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카이다 쿠로하: 오… 개년. 대갈통 좀 떽데굴 굴릴 줄 아네?
제츠보: 칭찬은 고맙지만 꼭 그렇게 표현해야 하나 싶다.
카이다 쿠로하: 좋아. 그러면 오늘은 이걸 먹고서 한 번 잠에 들… 아. 잠깐. 썅.
카이다는 수면제를 공중에 휙 던지고 받기를 반복하다가 문득 표정을 굳혔다. 중요한 무언가가 생각난 것처럼 보였다.
제츠보: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카이다 쿠로하: 어어… 그래. 문제라고 할 만한 게 하나 있네… 나는 약이 잘 안 들어.
제츠보는 카이다가 거짓말을 하는구나 싶어서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왜 거짓말을 하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막상 수면제를 손에 쥐고 먹어야 할 때가 되니. 자신이 잠에 들면 제츠보가 무방비한 그녀를 어떻게 해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먹지 않으려고 발악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려니 카이다에게서 시선을 돌리고서 제츠보는 위험한 약이 추가되지는 않았나 한 차례 약물 선반을 훑었다.
카이다 쿠로하: 진짜야. 이 씹년아! 믿어. 믿으라고!
제츠보: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 제 발 저리지 마.
카이다 쿠로하: 지랄! 누가 봐도 내 말을 안 믿고 있으면서! 진짜라니까!
제츠보: 그러면 왜 네 몸에 약이 잘 안 드는지나 말해 봐.
카이다 쿠로하: 왜냐면 약은 독이니까!
제츠보는 카이다의 헛소리를 욕하기 전에 그녀가 정말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한 번 더 참고서 들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문득 카이다가 약이라고 표현했을 뿐 그리고 잠들지 못하는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뿐, 수면제는 약이라기보다 향정신성의약품이었다.
카이다 쿠로하: 나한텐 독이 안 통해. 방울뱀 독이든 복어 독도 안 통하고 그 뭐냐. 벌레 독도 안 통해. 그냥 다 안 통해. 정확히는 내가 움직이는 데에 방해가 될 만한 모든 게 안 통하는 거야. 그래서 마취제도 안 듣고 자백제도 안 들어… 수면제를 먹어본 기억이 없기는 한데 이것도 안 들 것 같아. 그럼 어떡하지? 나 진짜 자고 싶은데.
제츠보: 그러면 너한테 잘 안 드는 만큼 많이 먹으면 되잖아.
카이다 쿠로하: 아. 그런가?
카이다는 제츠보의 명쾌한 말에 납득하고서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제츠보는 수면제를 많이 먹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카이다에게 덧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수면제가 그렇게 안 드는 사람이라면 많이 먹는다고 해서 픽 죽어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카이다는 자신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벌써 뻔했다. '뭐?! 죽을 수도 있다고? 진작 말해 줬어야지. 병신아!' 자신의 몸이 그런 약도 못 이길 정도로 형편없다고 생각하냐는 식으로 도발을 하면 또 모르는 일이었지만… 제츠보는 굳이 모험을 하지는 않기로 했다.
제츠보: 한 알을 먹으라고 돼 있으니까 우선 두 알 정도 먹어 봐.
카이다 쿠로하: 그래. 한 두 배 정도는 돼야 나한테 들을까 말까 하지.
카이다는 물과 함께 수면제 두 알을 삼키고서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달콤한 잠이 자신에게 찾아오기를 기대했다.
곧 카이다는 말했다.
카이다 쿠로하: 야. 잠이 안 온다.
제츠보: 1분도 안 지났어. 최소 30분 정도는 가만히 있어 봐.
카이다 쿠로하: 3분.
제츠보: 25분.
카이다 쿠로하: 5분.
제츠보: 20분.
카이다 쿠로하: 7분.
제츠보: 양심 없어? 마지막 제안이야. 15분.
카이다 쿠로하: 10분!
제츠보: 15분으로 해.
카이다 쿠로하: 알겠어. 그럼 15분. 대신 내 방에서 꺼져.
제츠보: 20분.
카이다 쿠로하: 뒤질래?! 내 방에서 꺼져! 이 방해만 되는 년아!
제츠보: 너 그냥 여섯 알 더 먹어라.
카이다는 결국 수면제 여섯 알을 더 먹었다.
카이다 쿠로하: 이제 진짜 잔다.
제츠보는 대답하지 않았다. 괜히 책을 잡혔다간 또 몇십 분을 또 말싸움으로 보내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카이다는 이런 제츠보의 의도를 이해했는지 하지 못했는지. 정말 눈을 꼭 감고서는 움직이지 않고서 몇십 초를 보냈다.
카이다 쿠로하: 진짜 잔다고.
그리고는 기어코야 잠에 들었다.
나는 죽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나의 모든 적과 아군이 나에게 박수를 보냈다. 온갖 방향에서 그들이 쏟아졌다. 하나같이 그들은 웃고 있었다. 이름 모를 재단의 연구원들. 열다섯 명의 죽은 감시자 후보들. 행운아. 카텟 기관의 구성원. 메리. 행운아. 마유즈미. 이름 없는 남자. 제츠보. 하기와라 우시오. 살인게임의 모든 참가자들. 판단자. 제어자. 조율자. 개척자. 선각자. 대적자. 이치노세 신지로. 시게루. 쌍둥이 아이. 찰리. 알파. 델타. 나에게 총을 쏘았던 자. 내 팔 안에서 죽어갔던 자. 시체를 수습하지 못했던 자들. 내가 죽인 자들. 내가 죽인 동물들도 있었다. 그들은 내 주변에 원형으로 선 채 이 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섰다. 시야가 전부 사람으로 차서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을 지경이었다. 그 모든 이들이 나를 반기기며 동시에 환호했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히무로 시라베! 히무로 시라베! 히무로 시라베! 히무로 시라베! 히무로 시라베! 히무로 시라베! 히무로 시라베! 히무로 시라베!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우와아아아아아아!와아아아아!꺄아아아악!이야아아아아아!호오오오오오!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그 울음에 귀가 아팠다. 모든 비현실적인,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는 로를 향한 내 적개심도. 죽은 이가 살아 돌아왔다는 위화감도 흐려져 버렸다. 나는 그저 그 모든 일의 경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답을 알아내고자 생각에 잠길 때쯤. 인파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장미색 눈을 가진 그녀. 마유즈미였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마유즈미 나데시코: 정말 축하해. 히무로! 지금껏 정말 잘 해줬어. 정말 대단했어!
우어어어어어어!와아아아아아아아아!꺄아아아아아아아악!우와아아아아아아아!
히무로 시라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마유즈미? 어떻게 네가 내 앞에 있지? 조율자에게서 떨어져. 로에게서…!
마유즈미 나데시코: 걱정하지 마. 다 괜찮으니까! 지금까지의 모든 게 연극이었어. 히무로!
히무로 시라베: 연극이라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와 흰 옷을 입은 남자가 앞으로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그래. 동생. 대몰락이라는 사건은 일어나지도 않았다. 이 세상은 황폐하지 않아. 문명의 시대가 언제나 그랬던 대로 풍요로우며 평화롭지. 사실 너는 내 동생도 아니야."
"당연히 재단도, 로도 없지. 네가 맞서야 할 강대한 적도 없어. 너는 고아가 아니라 평범한 가족이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나는 그들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잃은 모든 사람들은…
찰리. 알파. 델타가 내게 환호를 던졌다.
"우리 또한 살아있다. 히무로! 우리는 죽은 적이 없다! 임무도 없고 오퍼레이션 블러디 메리도 없고 타겟 메리도 없고 오버룩, 딕테이트, 터치도 없다! 우리는 모두 살아있다!"
시라유키 히메리: 네가 구하지 못하고 죽어버린 사람도 없어. 시라베. 그 모든 것이 연극일 뿐이었으니까. 누구도 너를 두려워하지 않아. 그저 연극일 뿐이었으니까.
마유즈미 나데시코: 네가 지금까지 겪은 모든 일은 사실이 아니었어. 히무로. 그러니까 괜찮아.
하기와라 우시오: 맞아! 그 누구도 죽지 않았고, 고통받지 않았어! 심지어는 살인게임마저도 없어! 나에게는 나를 사랑해주시는 아버지랑 어머니가 있지!
후루미나미 나몬: 그 말대로야. 후루미나미 일족은 근친혼을 한 적이 없어. 후루미나미 일족도 없고! 나는 극단적인 환경 속에서 빚어진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야. 그리고 그거 알아? 너도 평범한 사람이야! 우리 모두 행복하고 평범해!
나는 그들의 말을 믿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죽은 이들과 살아있는 이들이 전부 내 앞에 나타난 것을 보면 그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무로 시라베: 정말 그 모든게 그저 연극이었나…?
히무로 시라베: 너무도 생생한 연극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지만 연극이었어. 더는 괴로워하지 마! 이제 평범하게 사는 거야. 그래도 돼! 이제 아프지 않고 평범하게 살 수 있어!
제츠보: 그래. 나도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니까 앞으로는 평화롭게 살 수 있겠지.
카이다 쿠로하: 씨발! 좋았어! 나랑 언니도 잘 살아야겠다!
토키와 아유키: 마. 맞아. 히무로. 연극이었어. 우. 우후! 히무로 최고!
대몰락은 없었다. 재단은 없었다. 로도 없었다. 죽어버린 열다섯의 감시자 후보도, 영혼을 적출당한 초고교급들도, 살인게임도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하지만 증거가 없다. 증거가 없다면 믿을 수 없다.
후루미나미 나몬: 우리가 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는 게 증거 아니야?
캐롤 브라이트: 맞아요! 지금까지의 모든 게 연극이었으니까 안전한 거죠!
히무로 시라베: 믿을 수 없다. 이것은 정신조작이 아니란 말인가? 너희들이 정신조작에 당한 것인가. 내가 정신조작에 당한 것인가?
"손을 대어 봐라. 히무로 시라베."
조율자의 중성적인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손톱이 긴 손가락을 내게로 뻗었다. 나는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조금의 정전기를 느끼는 순간 조율자의 손가락을 꺾어 그 정신에 틈을 내리라는 생각을 한 채 그것을 덥썩 붙잡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내 의지대로 나의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율자는 여전히 금색 머리카락과 금색 눈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정신조작도 나에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히무로 시라베: 어째서…? 정신조작의 조짐이 있었다면 내가 알았을 것이다. 설계상 감시자가 터치를 당하면 그것을 알 수 있다. 분명 그렇다. 어째서…?
"연극이었기 때문이지. 너는 감시자가 아니고, 나는 조율자가 아니다."
조율자의 손가락이 나에게서 떨어졌는데도 나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로에게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재단의 사상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히무로 시라베: 정말… 사실이 아니었단 말인가?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래. 히무로. 정말이야!
히무로 시라베: 그게 사실이라면…
마유즈미의 말을 듣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히무로 시라베: 다행이군. 하마터면 속을 뻔 했다… 그 모든 게 연극이니 괜찮다고 한 번쯤 언질을 줄 순 없었나?
마유즈미 나데시코: 연극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래도 이제 끝났잖아. 이제 다 괜찮아!
히무로 시라베: 이제 가짜는 영영 끝이 난 건가?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래. 잘 됐어! 이제부터가 진짜야. 히무로! 지금까지의 일은 전부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하자. 연극이 아니라 새로운 진짜 삶을 말이야!
"그 말이 맞아. 히무로 시라베. 저 문을 열고 나가면 된다. 가짜의 삶은 이제 끝내고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 무엇에도 구애받을 필요 없다. 누구도 죽이지 않아도 되는 인생이다. 정말 멋질 것 같지 않나?"
후루미나미 나몬: 이야아아아! 듣기만 해도 신나고 좋은데?! 다들 히무로에게 박수!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히무로 시라베! 히무로 시라베! 히무로 시라베! 히무로 시라베! 히무로 시라베! 히무로 시라베! 히무로 시라베! 히무로 시라베!
야아아아후우우우우우!꺄아아아아아악!와아아아아아아아!워어어어어어어어!와아아아아아아아!호오오오오!꺄아아아아악!
히무로 시라베: 그래. 멋지다. 더없이 멋진 일이다. 아직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내가 누리기에는 과분하리만치…
나는 모세가 홍해를 갈랐듯이 인파를 헤치고 빛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는 동안 내 거짓된 삶 속에서 나에게 무수한 괴로움을 주었던 자들이 여전히 나를 향해 환호성을 보냈다. 가증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나의 체험 속에서 다쳤던 상처가 아팠던 만큼 나는 위안을 얻었다. 애초부터 연극이었다면 그것은 실재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하마터면 벌어질 뻔한 일이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운도 좋지…
토키와 아유키: 자. 잠깐. 이 살인게임에 대해서 아는 걸 말해 줘! 히무로! 가기 전에 말하고 가!
환호성 사이에 한 외침이 두드러졌지만 나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따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세계로 나아가는 일이었다.
나는 밝은 빛이 나를 반기는 그 문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나는 승리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모든 비현실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점에 더없는 해방감과 자유가 나와 함께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었다. 히무로 시라베의 여정은 여기서 막을 내린다. 빛이 나를 감쌈과 동시에 나는 엄숙한 따스함이자 편안함이 나를 감싸는 것을 느꼈다. 사실일 수도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자 그 일들의 끔찍함만큼 안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내가 겪을 뻔했던 일들이란 얼마나 터무니없었단 말인가. 비로소 나는 말할 수 있었다. 만족한다고. 모든 것에 만족하고 또 기뻐한다고. 눈물을 흘릴 수만 있다면 흘리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거의 웃을 뻔했다.
그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기 직전까지는 기뻤다. 깨달음은 내 의지와 관계 없이 그저 당연하게 나에게로 찾아왔다.
히무로 시라베: 이렇게 형편 좋은 이야기는 없다.
히무로 시라베: 이것은 가짜다.
가짜일 뿐더러 질 나쁜 환각이자 나를 우롱하는 눈속임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모든 기쁨은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꿈일 뿐이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느껴지는 꿈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순간 느꼈던 안도감과 기쁨은 그 배 이상의 허탈감과 그 주모자를 향한 반감으로 치환되었다.
나는 빛에서 등을 돌리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말했다.
히무로 시라베: 나는 이런 꿈을 꾸지 않는다. 누군가가 꾸게 만든 것이다. 누구냐. 후루미나미 나몬인가? 모습을 드러내라.
후루미나미 나몬: 멋있어! 히무로! 나는 해피엔딩을 사랑해!
후루미나미 나몬이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녀는 진짜가 아니었다. 남들과 같은 웃음과 환호는 그저 기계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활짝 웃으며 나에게 꽃다발과 축하를 던지는 이들을 지나쳤다. 진짜 후루미나미 나몬을 찾아서 나는 다른 환상들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그 꿈의 설계자를 찾고자 했다.
진짜 후루미나미 나몬이라면 분명 내 꼴을 비웃고 있을 것이다. 그녀 같은 악취미를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 그렇게 할 터였다. 틀린 그림 찾기를 하는 것과 같았다. 일관된 얼굴들. 그 속에 하나 진짜 적이 있었다. 나는 여전히 내게 환호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그 중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찾으려 했다.
내 시선을 느끼자 본래 얼굴에 남아 있던 당황을 지운 채 미소를 띠려고 하는 사람. 나는 그를 곧바로 찾아냈다. 차라리 원래 짓고 있던 표정을 계속 짓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남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는데 홀로 얼굴을 바꾸니 식별하기 쉬울 수밖에.
토키와 아유키: 축하해! 히무로! 축하해! 정말 멋있다. 히무로! 다 연극이야! 히무로!
토키와 아유키. 초점을 잃은 눈. 꾸며내는 것 같은 단조로운 어휘. 당황한 듯한 땀방울. 뻣뻣하게 굳은 몸의 위화감. 나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디까지 떠들어댈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더 그가 꿈의 설계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히무로 시라베: 날 봐라.
나는 토키와 아유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것은 사람이다. 스스로 통제해보려고 해도 이러한 본능적인 반응은 쉽게 통제되는 게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포식자에게 자신의 시선 정보를 들킬 수 있는 안구 형태를 가지게 된 이유는 그 이상으로 서로간의 소통 능력을 발달시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토키와 아유키: 그… 추. 축하해?
히무로 시라베: 왜 너만 사람이지? 행운아와 조율자와 후루미나미 나몬까지 기계처럼 환호하는데. 너만이 사람이다. 이 환상은 대체 뭐지? 네가 만들었나? 나를 향한 공들인 모욕인가?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라.
토키와 아유키: 히… 히무로. 진정해. 나도 이런 내용이 나올 줄은 몰랐어. 그저 너에게서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히무로 시라베: 내게 이런 장난질을 치고도 빠져나갈 수 있을 줄 알았나? 의도가 무어냐? 무대응을 허용으로 여기는 것은 후루미나미 나몬과 똑같군. 그리고 이내 내가 대응하게 만든 것까지.
나는 어떻게 하면 그 꿈에서 나갈 수 있을지 생각했다. 하지만 나가기 전에. 대체 어떤 방도를 써서 그런 일을 행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목에 손을 대기도 전에 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것을 인식했을 때 나는 이미 숙소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무척 불쾌한 꿈을 꾸었다는 자각이 나를 찾아왔다.
정작 그것이 무슨 꿈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불쾌하다는 사실 말고는 그 무엇도 내게 남아있지 않았다. 분명 5초 전까지만 해도 알았지만, 깨어난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가 않았다.
잠이 깨어 버렸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어둠이 내려앉은 나의 숙소에 가만히 섰다. 내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어떤 꿈이었길래 이렇게 기억해내야만 한다는 직감이 드는지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은 내 손아귀에 담겨 있다가 바다로 퍼져 버린 모래알처럼 사라져 버렸다.
토키와 아유키: 허억… 헉… 헉…!
어… 어떻게 안 거야…? 토키와는 무섭게 말을 걸던 히무로를 떠올리며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훔쳤다. 일대일로 마주하니, 그리고 드물게 화가 난 히무로 본인과 마주하니 토키와는 너무도 큰 공포를 느꼈다. 그 이유에선지 백일몽은 유지되지 못했다. 어쩌면 사랑의 열쇠는 서로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환상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 그 꿈을 무너뜨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토키와 아유키: 사랑의 열쇠. 이거 순 엉터리 아니야…? 후루미나미 나몬은 어떻게 이런 걸 야가미한테 쓰고도 정보를 알아냈다는 거지? 다 이런 식인가? 설마… 내가 잘못한 건가?
토키와는 잠시 생각해본 끝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 없어. 나는 아무 실수도 안 했어. 히무로 앞에서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다른 사람들도 누구나 할 법한 일이었잖아. 애초에 히무로가 그런 식으로 느닷없이 깨어나지만 않았어도 내가 당황할 일 자체가 없었어!
토키와 아유키: …잠깐. 이럴 때가 아니야!
토키와는 후다닥 도청기의 수신기에게로 달려갔다. 헤드폰을 쓰고 히무로의 방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기울였다. 토키와 아유키를 죽여 버리겠다며 비장하게 방을 나서는 등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조용했다. 깨어있는지 자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상 토키와는 자신이 안전하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토키와는 안도하며 자신의 가슴팍을 토닥거렸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럴 때가 아니었다. 히무로에게 사용하여 살인게임의 비밀을 알아내고, 카텟 기관이 살인게임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캐내려던 토키와의 계획은 턱없이 실패했다.
이 살인게임과 탑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 사람은 히무로였다. 제츠보가 있기는 하지만, 제츠보는 기계였고… 잠도 자지 않기에 정보를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달리 살인게임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던 후루미나미 나몬은 이미 죽어버렸으니 토키와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히무로를 집중적으로 캐거나, 시라유키 히메리에게도 사용하는 것을 고려해볼만 했지만… 왜인지 토키와는 시라유키가 히무로처럼 쉽게 백일몽을 간파해낼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랑의 열쇠는 크레딧으로 구매하는 물건이었다. 여기서 토키와는 애로사항을 하나 겪었는데, 토키와 아유키는 부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자본이 없어서 사랑의 열쇠를 구매하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즉 토키와는 사랑의 열쇠를 흥청망청 낭비할 수 없었다. 이미 한 번 실패했으니 토키와는 다음 사랑의 열쇠를 다루기 까다로운 사람에게 쓰는 대신, 그들에 비해 정신력이 낮은 사람에게 쓰기로 정했다. 그 대상은 카이다 쿠로하였다. 분명 무언가 중요한 물건을 가지고 있을 그녀.
본래 카이다는 잠을 결코 자지 않았던지라 사랑의 열쇠를 쓸 기회조차 없었지만, 그녀가 수면제를 복용하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어쩌면 행운이 비로소 토키와에게 찾아온 것일지도 몰랐다. 카이다의 방으로 채널을 돌린 뒤 토키와는 도청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카이다 쿠로하: 크어어어억… 커어어… 피유우우우우… 드르렁… 커어어억커커커커
자고 있다. 꿈이 연결될 수 있다! 토키와는 헤드셋을 빼고 하트 모양 장식이 달린 열쇠를 손에 쥐었다.
토키와 아유키: 좋았어! 이제 카이다한테 사랑의 열쇠를 사용… 으. 어감이 이상한데… 아무튼 열쇠를 사용해서 카이다한테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를 알아내면 되는 거다.
토키와는 침대에 누워 베개에 머리를 올린 지 5초도 채 되지 않아 잠에 빠져들었다. 토키와는 사실 언제나 졸리기 때문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따위 그에게는 없었다. 잠이 미친듯이 오는데 깨어있어야만 하는 수많은 낮밤이 있었다.
한 번 사랑의 열쇠를 사용해본 경험에 따르면, 그 또한 사랑의 열쇠 속에 어떤 종류의 환경이 나타날지는 알 수 없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표현 대로라면 꿈 속의 상대는 그를 소중한 상대로 인식하게 된다고 했다. 그림에 그린 듯한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토키와는 히무로가 그리는 히무로 본인의 행복이 그토록 제정신 아닌 광경일 줄은 몰랐다. 그는 대체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히무로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 중에는 그가 처음 보는 사람도 많았는가 하면, 그런 종류의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는데 묘하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나와서는… 뭐? 연극이라고? 그게 어떻게 기쁠 수가 있지…? 토키와가 느끼기에는 그것이야말로 두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의미가 부정당하는 것이니까. 사실상 살인게임의 반복과 똑같은 일이 행복한 환상이라니…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있다면 히무로 본인이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이다. 물론 토키와 또한 여태껏 꿈을 꾸다가 어딘가 이상한데? 이게 꿈이구나. 싶었던 적이 두세번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히무로는 그토록 우연하게 알아챈 게 아니라 조금 더 근본적인 어떤 깨달음 때문에 그런 인식이 가능했던 것 같았다.
꿈의 세계가 생겨나는 과정이 꿈 속에 드러나지 않듯이. 공유된 그 꿈은 몇 초만에 형태를 이루었다. 즉 꿈의 맥락을 파악하고 자연스래 녹아드는 일이 꼭 쉽지만은 않았다. 이미 그는 웬 기이한 꿈 속에서 주변 환경에 곧바로 적응하지 못해 한 번 욕을 보았다.
토키와는 카이다마저 히무로처럼 눈치가 좋지는 않기를 바랐다. 그는 전혀 실수를 하지 않겠지만, 설령 실수를 하더라도 꿈이 곧잘 그렇듯이 카이다가 꿈 안에서는 별반 위화감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 다른 사람들 또한 히무로가 하던 것처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카이다는 직감과 육감이 굉장히 강한 편이니까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분명 괜찮으리라. 히무로처럼 허무하게 실패하지는 않을 터였다. 사실 카이다의 정신력이 정말 약한지 강한지는 토키와가 알 방도가 없었다만, 후루미나미가 야가미를 상대로 성공했다면 그 또한 카이다를 상대로 성공할법하지 않은가?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꿈이 시작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한 곳을 보고서 토키와는 예상치 못한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자신이 헛것을 보는 줄만 알았다. 카이다가 꾸는 행복한 꿈이라면 사실 정상적이지 않은 장소일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 몸 조각이 굴러다니는 사고 현장이라던가, 그녀가 편하게 쉴 수 있는 호텔 스위트룸이라던가, 암살 대상의 집이라던가… 그런 곳이 나올 줄 알았다. 분명 자만감, 허영심, 잔인함이라는 카이다의 개성이 들어가 있는 장소일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곳은 어린아이에게나 어울리는 유치하고 또 아기자기한 장소였다.
토키와 아유키: 놀이공원이잖아…?
토키와는 그의 시선을 믿지 못하고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그는 순간 자신이 실수로 카이다 말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의 열쇠를 쓴 줄 알았다. 누구일까? 이바라? 어쩌면 이바라일지도 모르겠다. 놀이공원처럼 밝고 즐거움이 가득찬 장소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이바라에게 어울리는 일이었으니까.
토키와 아유키: 대체 왜 이바라한테 사랑의 열쇠가 쓰인 거지? 나는 분명 카이다를…
세상 어디를 뒤져도 놀이공원에서밖에 들리지 않는 음악이 앵앵 울렸다. 그 또한 어디에선가 한 번쯤은 들어본 적 있는 음악 같았지만, 음정과 가사는 전부 어긋나 있었다. 그 7할의 음악과 3할의 소음을 뚫고서 잘 포장된 바닥을 부술 듯한 또각또각 소리가 토키와의 귀에 울렸다.
그리고 그가 뒤를 돌아보려던 찰나. 무언가가 비어있는 그의 손을 낚아챘다. 토키와는 야생마의 몸과 이어진 올가미에 다리가 묶여서 질질 끌려가는 사람 꼴이 되었다. 그는 가까스로 땅에 발을 디뎠고 겅중겅중 뛰며 전력질주를 하는 묘기를 보인 뒤에야. 손을 낚아챈 사람을 겨우 따라갈 수가 있었다.
그 사람은 장난스래 이런 핀잔을 던졌다.
카이다 쿠로하: 빨리 가자. 이 다리 느려 터진 병신아! 개병신. 모자란 새끼! 내가 아니었으면 빌빌거렸을 패배자야!
토키와는 자신을 잡아 끄는 카이다의 보폭을 따라가느라 바빠서 도대체 카이다가 왜 놀이동산에 오고 싶어 하는지를 생각하지 못했다.
질주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토키와는 자신의 숨이 차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꿈 안이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카이다는 회전목마(모형 말이 아니라 진짜 말이었다) 앞에 서서 그를 놓아주고선 토키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만큼이나 당황스러운 게 있다면 그것은 카이다의 옷차림이었다. 카이다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평범하게 예쁜 순백색의 원피스. 팔꿈치를 드러내고 삼각근만 간신히 가릴만치 짧은 소매에 허리를 한 번 조이는 끈이 있어 부드럽고도 맵시 있는 선을 만들어내는 옷이었다. 토키와는 카이다의 팔이 그가 상정했던 두께보다 훨씬 얇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그 나이토를 이길 만한 힘을 가진 사람이 그토록 우락부락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토키와는 이 시점에서 카이다가 왜 원피스를 입었고 그들이 놀이공원에는 왜 왔는지에 더하여 카이다가 평소에 보이지 않던 모습까지 보인 덕분에. 정보를 전부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니 굳어 버렸다. 그러나 카이다의 점점 더 강렬해지는 눈빛 앞에서 그는 경직을 사르르 녹이고서 그에게 반응을 보였다.
토키와 아유키: 어… 왜 그래?
카이다 쿠로하: 안녕… 병…신아. 만나서 반가워. 좋은 아침이야. 너는 어때?
카이다는 미리 써온 듯한 문장을 어색하게 말하고서 끝에 웃음을 덧붙였다.
카이다 쿠로하: 으하하하하하하!
토키와 아유키: 어어… 나도 만나서 반가워. 카이다. 오늘 재밌게… 놀자? 응. 놀자.
카이다 쿠로하: 그래! 좋은 생각이다. 이 새끼야. 그 전에 잠깐.
카이다는 원피스의 하체 부분을 손끝으로 잡고서 그 자리에서 몸을 한 바퀴 휘리릭 돌렸다. 캐롤이 살아 돌아온 이후에 한 동작이 무의식속에서 그녀에게 우아함의 예시로 남아 꿈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허나 카이다의 동작은 마치 팽이를 돌린 듯이 빨랐다. 발과 허벅지 근육만을 사용해 몸을 회전시키는 것은 군대의 제식을 연상시켰다. 따라서 그녀를 본 사람은 우아하다기보다 신기하다, 깔끔하다라는 인상을 느꼈다.
카이다 쿠로하: 야. 어떠냐?
토키와는 카이다의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카이다는 본인이 듣고 싶은 대답을 그에게 직접 들이댔다.
카이다 쿠로하: 죽이지? 씨발 존나 죽이지? 응? 장난이 아니지?
토키와 아유키: 어… 어. 맞아. 카이다. 정말 멋져.
카이다 쿠로하: 옳거니. 씨발!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이거 봐! 언니가 입는 거랑 비슷한 거야. 역시 씨발 나한테도 잘 어울려. 흐. 당연한 일이지. 나랑 언니는 닮았으니까. 자매니까 닮는 게 당연해.
그렇게 말하고 나서 카이다는 한 번 더 몸을 팽이처럼 돌렸다. 사실 토키와는 그녀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카이다는 키가 크고 다리가 길었던지라 원피스가 잘 어울렸다. 정말 안 어울리는 것만 같아도 그것은 카이다가 본래 가지고 있는 야만적이고 잔인한 모습이 덧씌워 보이기에 그럴 뿐. 좋은 옷을 입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카이다는 야성미를 갖춘 미녀였다.
카이다 쿠로하: 야. 더 칭찬해 봐. 너 같이 모자란 놈은 내 언니만큼이나 예쁜 사람이랑 같이 놀 수 있는 걸 죽여주는 행운으로 여겨야 하니까. 당연히 나를 떠받들어야 하지 않겠냐?
카이다는 흡족한 표정으로 콧대를 높이 세웠다. 토키와는 과연 오만하고 다른 사람의 인정을 원하는 걸 보니 분명 카이다 본인이 맞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내키지는 않았지만 토키와는 카이다를 계속 칭찬해주기로 했다. 적어도 카이다의 꿈 안에서 토키와와 그녀는 함께 노는 모양이었으니. 우호적으로 원하는 바를 들어주면 그 또한 목적을 이룰 수 있을 터였다.
토키와 아유키: 정말 예쁘다. 카이다. 음. 우아하고 아름다워서 내가 너 같은 사람이랑 어울리나 싶을 정도야.
카이다 쿠로하: 그럼 그렇지! 바로 그거야! 더 말해 봐!
토키와 아유키: 이렇게 다시 보니까 사실 너는 무슨 옷을 입어도 대부분 잘 어울릴 것 같아. 옷맵시가 있잖아. 머리카락도 길고 예뻐. 카리스마도 넘치는 데다가 솔직하기도 하고 순수한 면도 있어.
카이다 쿠로하: ……그래? 보. 보는 눈은 좀 있는 바보병신이었네. 너.
카이다는 몇 초만에 그의 시선을 피하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고 배배 꼬아댔다. 어린아이의 자만에 맞춰 생각나는 대로 칭찬을 하던 토키와는 느닷없이 피어난 미묘한 기류에 조금의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사실 그는 사랑의 열쇠를 통한 꿈을 그저 정보를 알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루미나미의 선례 또한 사랑의 열쇠를 상대의 감정적 범위 내부로 침투할 수 있는 도구로 보는 일에 영향을 미쳤다.
카이다는 여태껏 사람이 아니라 난폭한 짐승이나 순수한 악마 같은 면모를 보여 왔다. 또 몽매한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그리하여 토키와는 자신이 대하는 것이 사람이라는 자각 없이 사랑의 열쇠를 사용했다. 히무로가 백일몽을 간파하고 꿈이 무너져 버렸을 때 토키와가 히무로의 모욕감을 이해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대신 그의 비범한 꿈과 자각에 불만을 느낀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토키와에게는 자신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조종하고 있다는 자각이 없었다. 머리로는 분명 그런 작용이 벌어질 거라 이해했지만, 그게 정확히 어떤 일인지를 의식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카이다 앞에서 토키와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는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 있었다. 토키와는 사랑의 열쇠가 그저 속임수를 통한 효과적 심문의 수단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도구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적어도 사랑 없이 쓰이는 이상 사랑의 열쇠로 만들어진 백일몽이란 그 사람의 감정을 향한 모욕에 불과했다.
토키와는 범인(凡人) 중의 범인이었던지라 마음이 여전히 모질지가 않았다. 따라서 순수한 카이다의 정신을 마주한 토키와는 아무리 그녀가 많은 악을 자행한, 분명 중요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인물이라고 해도 그 마음까지 우롱하는 일에는 거부감을 가졌다.
그러나 토키와는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토키와는 자신이 졸렬하고 지저분한 일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탑에 오기 전의 그였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는 카텟 기관과 살인게임이 관련이 있고 그 연결 관계를 밝혀내어. 위험 인물을 식별한 뒤 격리해 탑에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자신의 사명을 온 마음으로 믿었다. 그 일 때문에 잘린 목을 옮기고 음료에 독을 탄 것이다. 그런 일까지 저질렀는데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었다.
과오가 토키와의 행적에 관성을 부여했다. 이제 와서 그만두겠다고? 그럼 그가 죽인 사람들은 뭐가 된단 말인가? 개죽음이 된다. 토키와 본인은 후루미나미의 꼬임에 넘어간 머저리가 되어 버린다. 토키와는 그 수치스러움과 죄책감을 정의로움의 가면을 벗고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랬다간 연약하고 또 연약한 그의 자아는 무너지고 말 터였다. 어쩌면 토키와의 무의식이 그것을 알고서 그가 자신의 길을 관철하도록 종용하는 것일지 몰랐다.
그러나 그를 종용하는 것이 과오만은 아니었다. 그의 자기긍정적인, 자기중심적인 패도를 하루에 몇 번이나 방해하고 괴로움을 주는 무언가. 바로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었다.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의식이 팽창해 자신을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기기 전의 그 자신. 도덕심의 만류를 한 번이라도 들었다면 그는 멈출 수 있었다. 적어도 옷의 얼룩을 가리기 위해 더 큰 얼룩을 만드는 일은 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과거의 그와 눈이 마주친 뒤. 토키와는 그 스스로를 외면했다. 그 모든 것이 탑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면서…
카이다 쿠로하: 보는 눈이 좋은 상으로 내가 아이스크림이라는 걸 사 줄게. 야. 아이스크림 내놔.
"드. 드리겠습니다!"
아이스크림 장수는 카이다에게 고분고분하게 바닐라 소프트콘을 두 개 건넸다. 카이다는 웃으면서 자신이 받은 소프트콘을 토키와에게도 건넸다.
카이다 쿠로하: 먹어. 이 새끼야! 이게 아이스크림이라는 거야!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이게 맛없다고 한 사람은 본 적이 없거든? 그러니 분명 엄청나게 맛이 있겠지. 이걸 먹을 수 있다는 걸 행운으로 여겨라. 나 덕분에 그럴 수 있었던 거니까!
토키와 아유키: …정말 고마워 카이다. 잘 먹을게.
소프트콘을 쥐고 있는 카이다의 손가락과 그의 손가락이 서로 맞닿았을 때 토키와는 분명 온기를 느꼈다.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온기를. 그러나 그것이 진짜 사람이라고는 느끼지 않았다.
나는 퍼랭이와 위로 회전하는 커다란 수레바퀴에 갔다. 수레바퀴에는 고작 네 명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옛날에 거래하는 거 지켜보려고 한 번 탄 적이 있는데… 아니. 거래…? 뭐였더라. 내가 이걸 탄 적이 있었나?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수레바퀴는 천천히 올라가는 재미가 있었다. 퍼랭이놈은 내가 관람차를 좋아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죽이게 재밌냐고 하면 그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구경하는 맛이 있으니까.
나는 퍼랭이랑 같이 해가 저무는 와중 하늘을 온통 주황색으로 물들이는 걸 보았다. 그 주황색은 욕조에 피가 튄 걸 방치해 둬서 생긴 주황색 얼룩과는 뭔가 달랐다.
그건 밝았다. 밝고… 치워야 하는 거슬리는 흔적이 아니라 더 큰 뭔가였다. 그걸 보며 나는 뭔가가 내 가슴 속을 후비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아프지는 않았고… 오히려 내가 다친 곳을 어루만져 주는 듯한… 그건 너무 예뻤다. 계속 보고 싶을 정도로 모든 게 좋았다. 아무것도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것을 즐기며 나는 앞으로도 쭉 그 안에서 해가 지는 걸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잘 모르겠다. 아무튼 좋았다. 수레바퀴를 타고 나자 나는 잔뜩 만족해서 내리자 마자 콧노래를 불렀다.
카이다 쿠로하: 으흠. 으흠. 흐흠.
아 씨발 재밌다.
대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서 언젠가 한 번은 꼭 오고 싶었는데 오니까 존나 좋아.
아이스크림도 먹고 말도 타고. 줄곧 하기 싫은 거만 하면서 살게 될 줄 알았는데 결국 나한테도 좋은 일이 벌어지네. 그렇지. 나도 잃어버린 걸 다 되찾을 자격이 있어. 있고말고. 씨발?
토키와 이 새끼 학교에서는 그냥 평소처럼 꼴통이었으면서 여기 오니까 나를 잘 대해주고 놀기도 잘 노네. 다시 봤다. 보는 눈도 있고.
그런데 이 샌님 새끼가 웬일로 나한테 놀이공원을 가자고 얘기해 줬네… 이런 곳을 친구랑 오는 건 처음인데. 아니. 그냥 사람이랑 오는 것 자체가 처음이지. 친구도 없고…
그런데 이 정도면 친구 아닌가?
놀이공원에서 놀았으면 친구라고 볼 수 있겠지. 친구 사귀기 존나 쉽네. 왜 내가 지금껏 친구를 하나도 못 만들었을까? 이렇게 쉬워 터진 일을 왜 한번도 못 해냈지? 나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있었는데… 왜 그토록 쉬운 일을 한 번도 할 수가 없었던 걸까?
모르겠다. 재미 있었으면 됐어. 나중에 언니랑 또 와야지! 그 다음에 얘랑 다시 또 오고. 그럴 기회가 충분히 많으니까 다시 올 거야.
꼭 다시 와야지.
토키와가 카이다와 놀이공원을 함꼐 즐긴 이유는 카이다랑 노는 게 즐겁기 때문도, 그가 여전히 양심의 가책 탓에 주저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그녀의 자켓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을지를 골똘히 생각했다.
본래의 계획은 그냥 꿈에 들어가서 적당히 비위 맞추다가 자켓 안에 있는 물건의 정체를 캐물을 생각이었다. 엉성한 계획이었지만 카이다 본인이 자켓을 입고 나오면 그것에 대해 물어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계획이기도 했다.
그런데 카이다는 그녀의 꿈에서 본래 입고 다니던 자켓 대신 원피스를 입었다. 그는 카이다의 자켓 안주머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런데 자켓을 입고 있지 않다면 물어볼 방도가 없었다. 무슨 자켓? 이라는 대답만 돌아올 터. 그리하여 어찌할지를 고민하다가 놀이공원을 같이 즐기고야 만 것이다.
진짜 어쩌면 좋지? 진짜 이대로 놀이공원에서 놀다가 끝인가?
토키와는 멍하니 무력감을 느끼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니지. 그는 카이다의 꿈 안에 있었다. 꿈이 어떤 곳인가? 맥락 없이 모든 일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곳 아니었던가? 토키와는 좋은 방도를 하나 떠올려 냈고 그 아이디어를 그대로 시험해 보았다.
토키와 아유키: 카이다. 혹시 지금 입고 있는 자켓 안에 들어있는 게 뭐야?
카이다 쿠로하: 뭐? 자켓?
토키와 아유키: 그래. 네가 지금 입고 있는 그… 무슨 색이지 이게. 블루베리색 자켓.
카이다는 눈 깜짝할 새애 그녀가 탑에서 입던 옷을 다시금 입고 있었다. 보라색 피가 튀어 있는 것 같은 자켓. 분명 자신이 원피스를 입고 있는 줄만 알았던 카이다는 그 옷소매를 이리저리 바라보면서 그저 의아함을 느꼈다.
카이다 쿠로하: 내가 이런 걸 언제부터 입고 있었더라…? 응? 이상한데…?
토키와 아유키: 그. 그건 중요하지 않아. 안주머니에 뭐가 있는지 알려주지 않을래? 부탁할게.
부탁. 토키와 본인은 알 수 없지만 부탁은 카이다의 자존심을 상당히 올려 주었다. 따라서 부탁을 받은 카이다는 상당히 관대해지기도 했다.
카이다 쿠로하: 흥. 비굴한 병신. 잠깐만 기다려 봐. 안에 뭐가 있는지 좀 꺼내 보자.
카이다는 자켓의 안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토키와는 그 안에서 무엇이 나오는지 눈을 크게 뜨고 주목했다.
카이다 쿠로하: 아. 씨. 뭐야? 잠깐 기다려 봐.
토키와는 깜짝 놀랐다. 카이다의 자켓 안주머니의 그녀의 팔이 통째로 쑥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제야 그는 일이 그가 설계했던 만큼 쉽게 굴러가지는 않을 거란 걸 직감했다. 그야 그것은 꿈 안이었으니까. 무엇이든 불가능한 건 없었다.
카이다 쿠로하: 야. 아이스크림이다. 먹을래?
카이다는 자켓의 안주머니에서 조금도 모양이 상하지 않은 바닐라 소프트콘을 꺼냈다.
토키와 아유키: 마음은 고맙지만 괜찮아. 아이스크림 말고 나는…
카이다 쿠로하: 뭐어?! 내가 직접 꺼내줬는데 못 먹겠다고?!
토키와 아유키: …괜찮다는 건. 아주 좋은 생각처럼 들린다는 거야. 당연히 먹지… 카이다. 너무 고마워.
카이다는 토키와의 말을 듣자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토키와는 단 하나의 일만을 떠올렸다. 카이다가 연주를 하는 것에 맞춰 적절한 춤을 추어야 한다는 것. 그는 카이다의 장단에 계속 맞춰주기 위해서 아이스크림을 입 안에 꽂아 넣었다.
카이다는 과시적인 사람이었고, 자신이 명령을 받으며 살아왔던 사실에 대한 보상 심리로 인해 그녀의 명령이면 무엇이든 따라 주는 충실한 사람을 원했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간도 쓸개도 다 뺴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 카이다의 생각과 토키와의 비굴한 면은 어느 정도 잘 어울렸다.
카이다 쿠로하: 그렇게 나와야지. 자. 다음은… 어. 단검이네. 너 이거 쓸래? 되게 편해. 사람 가슴팍에 쑥쑥 들어가.
토키와 아유키: 그… 그므으.
토키와는 단검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가 보기에 카이다는 그가 그녀를 거절하지 않을 때 만족감과 기쁨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럴 수록 카이다는 자신의 자켓에서 무언가를 꺼내 토키와에게 주었다. 온갖 잡동사니가 그의 주머니에 가득 차서 빵빵해질 정도였다. 단검. 보석. 초밥. 비누. 마시멜로와 비스킷. 화장품. 머리빗. 다음에는 뭘 줄까? 또 뭘 주지? 신이 난 카이다는 자켓에서 생각나는 물건이라면 전부 꺼내 버렸다.
따라서 카이다의 요구에 잘 응하던 토키와마저도 카이다를 만류하고 어느 정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토키와 아유키: 정말 미안하지만, 금색이랑 관련이 된 건 없을까?
카이다 쿠로하: 금색과 관련된 거? 이거?
카이다는 금화 동전을 하나 토키와에게 건넸다. 그가 찾는 것은 금화가 아니었다. 정작 그도 자신이 어떤 물건을 찾는지는 몰랐지만, 그게 금색이고 또 금화는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금화를 거절하면 안 된다. 자기가 준 걸 거부하냐며 길길이 날뛸 게 분명하니까. 반대로 행해야 했다.
토키와 아유키: 고마워. 카이다. 특별한 선물을 받으니까 너무 기쁘다.
이렇게 말을 하면 분명 카이다는 다른 금색 물건을 찾아서 줄 것이다. 토키와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너무 기쁘다고? 그럼 더 기쁘게 해줄 테니 나를 더 칭찬해 봐! 카이다는 토키와가 열 가지의 금색 물건을 떠올린 듯이 의식의 흐름대로 금색 물건을 떠올리고 또 꺼냈다. 금화. 금괴. 골드키위. 금가루. 레몬.
골드키위는 그렇다 치고 레몬은 뭐야? 아무래도 카이다는 금색이라는 단어와 관련된 물건들을 몇 개 모르는 모양이었다. 사실 토키와도 페레로로쉐를 금색 물건이랍시고 말한 적이 있지만, 적어도 금박 포장지가 있는 페레로로쉐와 다르게 레몬은 그저 노란색이 아니던가?
카이다 본인마저도 레몬은 주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녀는 다음 물건을 좀처럼 떠올리지 못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자켓 안주머니에 팔꿈치까지 집어넣은 그녀는 미묘한 얼굴을 하고서 그 안을 기약 없이 뒤적거렸다.
카이다 쿠로하: 금색… 금색… 금…색? 아. 이거 있다!
카이다는 막막하던 과제를 해결한 것 같은 통쾌함을 느끼며 자켓 안에서 무언가를 주욱 뽑아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꺼낸 물건은 금색이 아니었다.
토키와는 카이다가 꺼낸 물건을 보고 의아함을 느꼈다. 그것은 분홍색 고무장갑이었다. 설마 색맹이었던 건가? 금색과 관련된 걸 내놓으라고 했더니 웬 분홍색 물건을…?
카이다 쿠로하: …그런데 나 이거 너한테 보여주면 안 되는데. 언니가 그랬어. 다른 사람한테 닿아서는 안 된다고. 특히 너한테 닿아서는 안 된다고 그랬어.
카이다는 고무장갑을 거꾸로 잡고 툭툭 털어 그 안에 있는 물건을 보여주려다가 몸을 멈추었다. 토키와는 카이다에게 물었다.
토키와 아유키: 캐롤 씨가 정말 그렇게 말한 거야?
카이다 쿠로하: 응. 그렇게 말했다. 아쉽지만 이건 못 보여줘.
왜인지는 몰라도 캐롤이 직접 그렇게 말한 거라면, 토키와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고무장갑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것이 비밀을 알아내는 것의 첫걸음이 될 터였다.
그리하여 토키와는 조금 더 자신의 긍지를 팔고 비굴해지기로 했다. 자기 자신을 팔아 넘긴다는 게 이토록 위험하다. 이미 한 번 팔아 보았기에 다시 팔지 못할 이유가 없을 뿐더러 가면 갈수록 자신을 헐값으로 팔게 되기 때문이다.
토키와 아유키: 그렇구나… 약간 쓸쓸하네… 오늘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카이다가 나한테 그걸 보여주면 정말 기쁠 텐데… 앞으로도 카이다가 하는 말은 뭐라도 들어줄 텐데…
카이다는 토키와의 말을 듣고 귀가 솔깃해졌다. 그런 간단한 일만으로 그런 충성과 주도권을 얻을 수 있다니. 꼬붕을 하나 만들 수 있다니? 카이다에게 이보다 날로 먹는 일은 없었다. 하라는 대로 다 한다면, 학교에서도 잔소리 안 들을 수 있고 또 놀이공원에 올 수도 있잖아!
카이다 쿠로하: 저. 정말? 진짜 그럴 거야? 그보다 오늘 재밌었냐?
토키와 아유키: 당연히 재밌었지. 너도 그랬잖아.
카이다는 신이 나서 짝짝 손뼉을 쳤다. 모든 일이 잘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카이다 쿠로하: 맞아. 맞아.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럴 것 같더라고! 그리고 너 아까 뭐랬냐? 앞으로 내가 하는 말은 뭐든 들어주겠다고?
토키와 아유키: 응. 카이다. 당연히 그래야지. 너랑 같이 이렇게 즐거운 시간도 보내고 아이스크림도 먹여 줬는데.
카이다 쿠로하: 쯧. 딱하다. 딱해!
카이다는 아무래도 자신이 시기질투할 만한 여지가 없는 사람에게는 질투를 느끼지 않고. 따라서 조금(사실 많이) 무시를 할 지언정 그 사람에게는 약간 관대해지는 모양이었다. 베풀기 쉽고 또 이득을 볼 수도 있는 적선. 카이다는 흔쾌히 토키와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녀는 고무장갑 밑에 손바닥을 받치고서 그 안에 있는 물건을 살살살 털어 손바닥의 위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툭 떨어진 그것을 토키와에게 보여 주었다.
카이다 쿠로하: 자. 이게 들어 있어.
토키와는 고무장갑 안에 들어갈 만한 금색의 물체가 있다면 그건 분명 금괴나… 목걸이나… 반지 같은 금 장신구일 거라고 생각했다. 왜 그게 고무장갑 안에 담겨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토키와는 상식의 범주에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토키와는 카이다가 그것을. 피가 묻어있는 그것을 꺼냈을 때 제자리에서 뛰어오르며 놀라고야 말았다.
토키와 아유키: 으아아아아악!
카이다 쿠로하: 응? 왜 그렇게 놀라? 괜찮냐?
꿈을 꾸는 당사자는 꿈이 이상한 줄 모르지만, 꿈이라는 걸 알고 있는 토키와에게 있어서 그 물건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카이다는 손가락을 들고 있었다. 잘린 사람의 손가락. 길이로 봐서는 중지였다. 그것과 금색이라는 단어를 연관시키지 않더라도 토키와는 그것이 누구의 손가락일지 대강 짐작이 갔다. 최근 왼손의 중지가 잘린 사람이 한명 탑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토키와 아유키: 그. 그건 대체…!
카이다 쿠로하: 아. 이거? 이거 우리 언니가 나한테 맡긴 거야. 언니가 느닷없이 잘라냈어. 그리고선 고무장갑 안에 넣으라고 했어.
토키와 아유키: 그렇지만 왜…? 대체 왜…? 잠깐. 손을 부상당한 게 스스로 자르신 거라고? 자해하신 거야? 왜? 나는 당연히 사고를 당한 줄 알았는데…
카이다 쿠로하: 나도 몰라. 사실 너한테 왜 닿아서는 안 되는 줄도 모르겠어. 너 언니한테 뭐 잘못한 거 있냐?
토키와 아유키: 그런 거 없어! 캐롤 씨는 나한테도 은인이니까! 그런데 대체 손가락이 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가설은 그녀가 자켓 안에서 바닐라 소프트콘을 꺼낸 것처럼. 캐롤의 손가락을 꺼낸 것 또한 그저 무작위로 상영되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이 자켓 밖으로 딸려 나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더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토키와는 분명히 금색과 관련된 물건을 꺼내 달라고 했다. 뭐든 꺼내 달라는 두루뭉술한 설명이 아니었다. 금색이라는 단어 속에서 카이다가 떠올린 사물이 그 손가락인 이상. 토키와가 찾고 있는 물건은 캐롤의 손가락일지도 몰랐다.
문제는 대체 그게 어쨌냐는 것이다. 카이다가 숨기고 있는 물건의 정체를 그가 알고 싶어했던 이유는 대체 그 물건이 무엇이길래 그것이 필요하다는 당위성을 그토록 강하게 느끼는지 궁금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 정체를 알아내면 그것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알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물건은 잘린 손가락이었다.
이걸 대체 어디에 쓰라는 거지? 토키와는 자재를 받았는데 어떤 건물을 만들어야 할지는 몰랐다. 재료는 준비가 되었는데 어떤 요리의 주문이 들어왔는지는 몰랐다. 그처럼 스스로를 향한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은 더더욱 자율적으로 무언가를 결정하기가 어려워진다. 토키와는 그로테스크한 난제와 마주했다. 손가락? 어떻게 해. 삼키기라도 해야 하나?
카이다 쿠로하: 왜 그래? 기분이 나쁘냐? 속이 안 좋아? 누구 죽여 줘?
토키와 아유키: 아. 아니야. 괜찮아. 카이다. 걱정할 필요 없어…
카이다 쿠로하: 진짜 걱정할 필요 없는 거지?
자신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는 카이다를 보며 토키와는 부담스러움을 느꼈다.
토키와 아유키: 그래. 걱정할 필요 없어. 카이다. 괜찮아.
카이다 쿠로하: 그럼 다행이다.
카이다가 만족한 얼굴로 그에게서 멀어졌다. 토키와는 속으로 계속 손가락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느꼈던 직감과 꿈은 그저 상상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대체 그 손가락이 자신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캐롤이 직접 당부한 그 손가락으로의 접촉을 통해서야 겨우 알 수 있게 될 터였다.
카이다 쿠로하: 야! 우리 밥 먹자. 밥! 평범한 학생처럼 밥 먹자. 우리는 완벽하게 평범한 학생이잖아. 보통 우리가 뭘 먹더라? 맛있는 거 먹자고!
토키와는 카이다의 말을 들으며 그녀 자신이 저질러온 잘못을 모르는 그녀는 얼마나 천진난만하며 순진무구한지를 보았다. 그것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행복을 바랄 수가 있지? 어떻게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뻔뻔하게 바랄 수 있지?'
그런 생각을 하던 토키와는 순간 그의 사고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깨달음의 경지에 올랐다.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행복을 바랄 수가 있지? 어떻게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뻔뻔하게 바랄 수 있지?'
'이건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카이다 쿠로하: 야. 대답 안 해? 맛있는 거 먹자니까. 야! 왜 이래. 너?
카이다는 멍하니 대답이 없는 토키와의 어깨를 뒤흔들었다. 열 번 정도 흔들린 뒤에야 토키와는 말했다.
토키와 아유키: 아니. 못 먹어.
카이다 쿠로하: 뭐어?! 아. 배가 부르기라도 하냐? 그래도 먹다 보면 들어갈 거야! 다 그런 법이라고!
토키와 아유키: 우리는 좋은 음식을 먹을 처지가 못 돼. 우리는 굶주려야 마땅해. 우리는 평범한 학생이 아니야.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길 위에 선 사람들이지.
카이다는 토키와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불길함이 등골에서 치솟아올랐다. 왜 토키와의 그 발언이 그토록 사실같다고 느끼는 건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평범한 학생으로 평범하게 살아왔는데. 왜 그녀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도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기분이 드는 걸까?
토키와 아유키: 우리는 행복할 자격이 없어. 어떤 종류의 위안도 얻지 못해. 어떤 대의와 악의가 있었다고 해도 우리가 저지른 일에는 반드시 업보가 따르게 되어 있어.
업보. 그 단어를 듣자 카이다는 정말 불안해졌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더 불안했다. 이해할 수 없는 공포마저 느낄 정도였다. 카이다는 슬며시 토키와를 놓아 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카이다 쿠로하: …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우리가 뭘 어쨌다고?
토키와 아유키: 앞으로 터놓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리고 이런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을지라도 우리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려주려는 거야. 이 뻔뻔한 꿈을 보면서 대체 너와 나 사이에 차이가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애썼거든. 나는 내가 너와 전혀 다를 줄 알았어.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너를 닮아 있더라. 네가 남들에게 마음 없는 사과를 하러 다닐 때 내가 너를 만류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던 거지.
토키와 아유키: 너와 나는 똑같아. 우리는 모두 살인자야. 추하디 추한 피투성이라고. 그에 걸맞은 야망을 품은 채 살아가야 해. 행복이 아니라 숙원을. 위안이 아닌 끝없는 추구를.
사자의 송곳니도, 하마의 엄니도, 독수리의 발톱도 넘보지 마라. 썩은 고기를 먹고 탈이 나지 않을 위장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뼈를 씹어라.
토키와 아유키: 나도 언젠가 벌을 받겠지. 하지만 그 전까지는 이 탑에 차고 넘치는 혼란을 종식시킬 거야. 어떤 비열한 수를 써가면서라도.
토키와는 생각했다. 나는 카이다 쿠로하랑 똑같은 인간이다.
그러니 카이다 쿠로하처럼 임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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