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시와 마유즈미가 카이다에게 있어 어떻게 다른지를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카이다는 영안로에서 나온 이래 나나시에게 상당한 관용을 베풀었다. 물론 나나시를 매도하고 죽이겠다며 길길이 날뛰기는 했지만 그녀는 나나시가 아닌 다른 모든 이들에게 그렇게 했고, 그 적의는 나나시가 자신의 언니를 노리는 색욕의 마수라는 전제 하에 타오르는 것이었다. 오해가 풀리자 카이다는 나나시를 내버려 두었다. 왜? 캐롤에게 나나시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이 소중함과 그 소중함은 달랐다. 그리고 이 소중함을 받고 있는 카이다에게 있어 그 소중함이란 이해가 되지 않는 개념일 뿐. 그리 끔찍한 것만은 아니었다. 애정을 파이라고 친다면 두 사람은 같은 파이를 나누어 먹고 있는 게 아니었다. 때문에 카이다는 그녀에게 있어 유일무이한 동생이라는 이름의 파이를, 난생 처음 입을 댄 그 애정이라는 것에 코를 파묻은 채 탐닉할 수 있었다.
카이다는 그 파이 조각을 조금도 뺏기고 싶지 않았다.
만약 마유즈미의 성별이 남자이거나, 그 외모가 영락없이 건장했다면 카이다는 그렇게 마유즈미를 경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뇌리 속에서 여동생이라는 단어에 더 잘 부합하는 것은 그녀 본인이 아니라 마유즈미였다.
'나라도 나보다는 저 꼬맹이 년을 더 여동생 삼고 싶겠지.'
카이다는 이런 종류의 생각을 조금도 입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이곳을 후벼파라 조언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카이다는 그 속을 찔러대는 바늘을 먹어대면서 그렇게 아픈 만큼 가시 돋친 말을 뱉는 것이다.
"있잖아. 치나미.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마유즈미 씨가 나에게 있어 더 동생 같아. 너도 그런 것 같지? 우리를 좀 봐. 나는 이렇게 예쁜데 반해 너는 사람이 아니잖아. 사람 죽이는 기계로 개조됐지 않니? 너처럼 성격도 안 좋고 포악한 여자애보다는 언제나 방실방실 웃어주는 마유즈미 씨가 더 동생 같단 말이야. 너무 마음 상하지는 마. 어차피 너 나랑 같이 지낸 기억도 없잖아. 안 그래?"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캐롤 씨!"
"캐롤 씨는 무슨. 언니라고 불러. 마유즈미."
"응! 언니!"
만약 이런 일이 정말로 벌어져 버리면.
카이다의 가슴은 찢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카이다는 느껴본 적 없는 미지의 고통에 그저 숨이 가빠져 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크게 뜬 채. 어금니와 어금니게 맞물리게 둔 채. 입술을 바르르 떨며 내면에서부터 그녀 자체를 휘젓는 듯한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싫다. 싫다. 카이다는 캐롤이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캐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카이다도 알았다. 하지만 캐롤의 가장 깊은 마음속까지는 몰랐다. 그녀는 캐롤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걸 와닿게 느끼지는 못했다.
애초에 사랑이 무엇인가? 그것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동굴벽에 비친, 휘청거리는 형태를 보며 그게 어떻게 생겼거니 추측할 뿐이다. 카이다는 그 자신이 캐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귀신 년이 꼬맹이 몸에서 나가면 둘은 전보다 훨씬 더 친해지겠지? 내가 동생이라는 걸 알기 전부터 같이 놀았잖아.'
카이다는 자신이 가진 걸 지키고자 했다. 그녀가 포기하고 싶지 않은 단 하나의 얇은 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정말 캐롤이 마유즈미를 구한 뒤에 카이다에게 소홀해질 가능성이 그렇게 크지는 않다는 것은 카이다 또한 느꼈다. 아는 것은 아니었다. 느꼈을 뿐.
그렇지만 카이다는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싹을 짓밟을 수 있다면 카이다는 기꺼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캐롤의 여동생은 그녀 하나뿐이다. 어떤 년도 내게서 그것을 빼앗아갈 수 없다.
나에게서 그 무엇도 뺴앗아가지 마라. 나는 단 하나도 빼앗길 수 없다.
이 모든 게 다 소중한 사람이 생겼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강의 공포. 소중한 것은 곧 약점이었다.
더 단크 타워
챕터 4: < 황금 원숭이의 손길 >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다면 저희는… 저희끼리 혼례를 치른 거군요.
나는 대화가 원점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보다 나쁠지도 몰랐다. 여전히 마유즈미는 결혼이라는 사회 제도에 대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와 그녀는 혼인한 적이 없는 친구 사이에 지나지 않았다.
히무로 시라베: 우리는 그런 적이 없어. 마유즈미.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지만 저를 가장 많이 생각하는 건 히무로 씨고, 히무로 씨를 가장 많이 생각하는 건 제가 아닌가요?
히무로 시라베: 나를 생각하는 사람은 많아. 죽이려 하고, 내 자아를 없애 흉물로 만들고자 하고, 나를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 나는 그중 네가 나를 가장 많이 생각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엑…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는 건요?
히무로 시라베: 그 일에 한해서는 네가 나를 가장 많이 떠올릴 테지.
마유즈미는 대체 어느 부분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냐는 듯, 당연하게 말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다면 저희는 이미 결혼했어요.
히무로 시라베: 그런 적이 없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해가 뜨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으니 아침이 왔다는 걸 믿을 수 없다고요?
우리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뜻인가?
히무로 시라베: 내 의표를 찌르는 말이군. 우리가 정말 결혼했다면 분명 그랬을 거야. 하지만 우리는 사실혼의 관계조차 아니야. 그 과정을 밟기도 전에 우리는 떨어져 버렸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지만 당신은 여기 있잖아요. 제 꿈까지 왔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죠?
히무로 시라베: 우리의 운명이 한 곳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지.
나는 사실을 말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현상을 가장 정확하게 진술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한 말을 다시 떠올리고 있자니 그것은 마유즈미가 듣기에 다분히 혼례를 치렀노라 넘겨짚을 만한 말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세상의 누가 이럴 수가 있는데요? 히무로 씨 말고 다른 사람이 제 꿈에 들어올 수 있어요?
히무로 시라베: 없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럼 히무로 씨는 저 말고 다른 사람의 꿈에 들어올 수 있어요?
히무로 시라베: 아직은 불가능해.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테지.
하기와라 우시오는 블레인을 죽이며 스스로의 투쟁에서 승리했으며, 그의 육체에는 어떤 다른 사람의 영혼도 깃들지 않았다. 제츠보는 꿈을 꾸지 않는다. 이들 말고 다른 이 또한 카텟에 합류한다고 한들 마유즈미와 나의 유대란 그 어떤 후발주자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마유즈미는 한 번 나의 전용실에서 격리실이 어떤 공간인지를 보았다. 인권의 침해와 세뇌 과정이란 이해하기에도 거부감이 들고 실제로 들어다 보면 더욱 마음에 걸리기 마련인데, 마유즈미는 그곳에서부터 이해의 과정을 밟았다. 이만한 강심장은 드물었다. 그녀는 겁이 많음과 동시에 강심장이었다. 불편함을 무릅쓰고도 그녀는 나를 찾아왔다.
히무로 시라베: 나는 보통의 사람들과 판이한 성장 배경을 지녔는데, 너는 그 안에서 너와 닮은 부분을 들여다보았어. 그리고 너는 사람을 찾아냈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오호라. 그거 참으로 훌륭하네요… 그럼 저희는 서로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 아닐까요?
히무로 시라베: 그렇지만 결혼한 사이는 아니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래도요! 히무로 씨의 말 대로라면 저희는 이미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람이 됐어요. 그 뭐냐… 뭐더라… 하나로 묶여서요.
히무로 시라베: 네 말이 맞아.
마유즈미는 논쟁이 끝났다는 듯 손뼉을 두 번 쳤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러니까 저는 저희가 혼례를 치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인연이라 생각해요.
히무로 시라베: 그 기준은 무척이나 모호해. 나는 보통의 사람들이 언제 결혼을 하는지 몰라. 사람들은 결혼을 언제 하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으음… 저도 잘은 모르는데… 평생 한 사람과 함께하겠다고 맹세하는 거잖아요?
히무로 시라베: 그렇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러면 평생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을 때 결혼하는 게 아닐까요? 히무로 씨는… 어떠세요? 평생… 평생… 저랑…? 우와. 부끄러워…
마유즈미는 자신의 검지 두개를 맞대고 꼼지락거렸다.
히무로 시라베: 너와 함께하고 싶은 것보다도, 너와 내가 함께하는 것은 정해진 일이었어. 운명이 이미 우리를 한 곳으로 인도하고 있었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엑! 정해졌다니! 그럼 저희 진짜로… 그거 약혼 아니에요? 함께하고 싶으니까 서로 혼례를 약속한 거죠!
그녀의 말에는 어느 정도의 설득력이 있었다. 나는 여타 사람들이 어떨 때 결혼을 하는지를 얄팍하게나마 이해했다. 그 이해란 동시에, 내가 결혼과는 도무지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이해이기도 했다.
히무로 시라베: 함께하는 것이 동행의 의미라면 우리 또한 그 범주에 놓일 수 있겠지만, 나는 평생을 누군가와 함께할 자신이 없어. 나와 함께 있던 자들의 대부분이 제명에 살지 못했기 때문이야. 그러니 결혼은 하지 않아.
마유즈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입을 가렸다. 그리고 그녀는 말실수를 하지 않으려 애쓰듯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안 됐어요. 히무로 씨. 그래도 그런 말은… 너무 외롭게 들려요. 또 앞일을 너무 어둡게 보는 것처럼 들리고요.
히무로 시라베: 앞일은 이미 어두워. 나는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을 볼 뿐이야. 나는 이미 너를 구하지 못했어. 그 때문에 너는 이곳에 있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게 왜 히무로 씨 때문이에요?
히무로 시라베: 내가 너에게서 거리를 두었다면 어떤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내 경솔한 행동이, 동행을 바라는 이기심이 너를 위험한 곳으로 몰고 갔어. 네가 영락없이 죽은 줄 알았을 때 이런 생각을 했지.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이렇게 쉽게 놓쳐버릴 거라면 시작도 하지 말아야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그 생각만으로도 괴로움을 느꼈다. 내가 온전히 갈무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고통을.
히무로 시라베: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 마유즈미.
마유즈미 나데시코: …저는 알 것 같은데요.
히무로 시라베: 답을 말이야? 그게 무엇이지?
마유즈미는 새침하게 콧김을 내뿜고는 내게 삿대질을 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씨가 자기 아내를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요.
그녀의 말은 순간 나를 뒤흔들었다.
히무로 시라베: 외면한다니? 마유즈미. 나는 결코…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니라뇨? 꿈에도 찾아오구. 서로를 가장 많이 생각하구.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당신 아내예요. 이미 서로 좋아하면서 만나지 말 걸 후회한다니. 그만한 바보짓이 어디에 있어요?
그 답은 명쾌했다. 본질을 꿰뚫는 만큼 단순하며 효과적이기도 했다. 그녀는 결혼을 하기 싫다,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 따위의 담론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이미 결혼이 이루어졌으니 어찌할 것인가를 논했다.
히무로 시라베: 그렇지만…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됐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증거 있어요? 보여 주세요.
나는 심문을 받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심문하던 수많은 자들과 비슷한 말이 기어코는 내 입에서 나올 때.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지금 당장 제시할 수는 없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죠? 저 하나만큼은 히무로 씨 때문이 아닐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지금 히무로 씨는 결혼한 적이 없다고 발뺌할 게 아니라. 저희가 이미 결혼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해요!
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는 못 했다.
호기롭게 나의 이론을 무력화시킨 마유즈미는 나를 향해 뻗은 손가락을 서서히 굽히더니, 자신의 두 손을 모은 채 다시금 갈 곳 잃은 손가락을 서로 비벼댔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치만 사실은 저도 남편을 받아들이기에는 좀… 당황스러우니까… 일단은 생각만 해 두고… 나중에 결정짓는 것으로 해 볼까요…? 싫은 건 아니구요. 다만 기억이 좀 애매모호하니까… 너무 쉽게 받아들이면 또 안 되거던요. 부모님한테서 허락도 맡아야 하고. 도장도 찍어야 하고… 네? 어때요?
그리고 나에게는 이런 일이 벌어졌다.
히무로 시라베: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마유즈미.
나는 논쟁에서 패배했다.
카이다는 자신의 입을 덮어버리는 딱딱하고 차가운 손가락을 느꼈다.
카이다 쿠로하: 으븝! 흐븝! 므으. 으 어애어어! 흐그 흐긍그!
그게 사람 손이었다면 카이다는 입을 벌려서 그걸 물어뜯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 손을 가지지 않은, 카이다보다 강하고 상처도 좀처럼 입지 않는 사람이 단 하나 있었으니 바로 제츠보였다.
제츠보: 조용히 해… 내가 너를 내버려 둘 것 같아?
제츠보는 카이다가 시라유키에게 뛰쳐나가려 했을 때부터. 그 손을 잡아챈 이래로 카이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카이다의 전조 행동들을 보며 언제라도 그녀를 막을 수 있게끔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건 별반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예를 들자면,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고 느닷없이 시라유키를 향해 눈을 부라리는 등의 일을 옆에서 보고 있자면 아 이게 곧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작정을 하고 있구나. 작정을 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면 옆에서 그걸 알아챌 시간도 길어지는 법이었다. 제츠보는 은근히 카이다를 잡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줬고, 이윽고 카이다가 숨을 크게 들이쉰 순간 그녀가 육성으로 방해를 할 심산임을 눈치챘다. 덕분에 방 안에 울려 퍼질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카이다의 입 안에서 웅얼거림으로 변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뭐. 뭐야 씨발. 왜 저래?!
제츠보: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조용히 좀 하라고. 카이다 쿠로하!
순식간에 난장판이 벌어졌다. 동요. 큰 동요. 심지어는 시라유키마저 카이다의 행동에는 당황했다. 이성의 화신을 자처하는 그녀는 느닷없이 찾아온 야만에 그저 눈을 치켜뜰 뿐이었다. 삼중의 당황이 의식의 수면에 차례대로 떨어지자 연결되어 있던 정신이 영락없이 흐트러져만 갔다. 정신력의 줄다리기 도중 그것을 헤집어 놓는 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는 당사자들밖에 모를 것이다.
나나시: 으…
캐롤 브라이트: 후우… 후…
카이다 쿠로하: 으브 어으어어! 으극그으! 흐으! 욱욱 으어어으!
하지만 꼭 그녀가 웅얼거리기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한 손이 카이다의 입에 붙어 있어야만 하는 제츠보에 비해 카이다는 사지가 전부 자유로웠다. 힘이 조금 부족할지언정 그것들로 발버둥을 치고 있으니 그녀는 제츠보와 원활하게 투닥거릴 수 있었다.
그 일로 이득을 본 건 한 명뿐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덕분에 빈틈이 많이도 생기네. 저게 갑자기 왜 저럴까?
시라유키는 쾌재를 불렀다. 캐롤과 나나시는 숨을 두어 번 같은 리듬으로 들이마시고 내쉬며 본래의 평정을 되찾으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등 뒤에서는 입이 막혀 웅얼거리는 카이다의 목소리와 애를 쓰는 제츠보의 음성이 들렸다. 돌아보고 싶지만 돌아볼 수도 없고 돌아봐봤자 달라지는 일도 없었다. 멈추라고 해봤자 카이다가 그 말을 들을지도 의문이었다.
제츠보의 완력은 분명 대단했다. 하지만 그 완력이 카이다를 옴짝달싹하지도 못하게 만들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몸부림을 치는 고양이 하나 붙잡아 놓기도 어려워하지 않는가. 그 고양이가 맨손으로 쇠도 구부릴 수 있는 175cm의 크기라면 더더욱 막기 어려웠다.
질식을 시킬까? 택도 없는 소리. 만약 제츠보가 카이다의 코까지 손으로 덮어 버린다면 카이다는 길길이 날뛰어댈게 분명했다. 카이다는 짐승과 같아 생존권 침해에 민감하게 반응하니, 조용히 시키는 본래의 목적과 완전히 틀어지는 일이었다.
카이다 쿠로하: 흐극그으! 흐흐! 흐극그 흔 흐으르르!
제츠보: 문 열어.
제츠보는 하기와라에게 가능한 한 조용히 말했다. 지체 없이 하기와라는 마유즈미의 숙소 문을 벌컥 열었고, 카이다의 입을 막은 채 통나무를 들어올리듯 제츠보는 비척비척 열린 문을 향해 다가갔다.
카이다는 결코 무력하게 끌려 나가지 않았다. 성립될 수 없는 문장이지만, 그녀는 강력하게… 끌려 나갔다. 위험하게 끌려 나가기도 했다. 카이다는 자신의 동생 권리 보호 시위를 중단시키려는 제츠보에게 끊임없이 저항했다. 제츠보가 그녀를 물리적으로 마유즈미의 숙소 안에서 분리하고자 한다는 걸 눈치챈 뒤에 그 저항은 더욱 극단적으로 변했다.
카이다는 탑으로 돌아온 이래 흉기를 반납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놀랄 일은 아니다. 빼앗아봤자 카이다가 고분고분해지고 사람을 쉽게 죽일 수 없게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걸 사용할 만한 상황이면 그걸 사용하지 않더라도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며. 제츠보에게는 어차피 무력이건 날붙이건 통하지 않는다.
카이다 쿠로하: 흐으 흐그그를 그으! 그으으으!
하기와라 우시오: 어. 야. 야! 떨어져! 썅! 튀어어!
이바라 쿠리스: 히. 히에에엑!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통한다. 제츠보는 카이다가 그녀의 자켓 안에서 단검을 꺼내 이리저리 휘둘러대려는 것을 보고 그녀의 몸을 한 팔로 꽉 조였다. 사실 그 힘은 평범한 사람의 갈비뼈를 부숴 놓을 만한 힘이었으나, 카이다의 몸은 별 문제 없이 그 압력을 버텼다.
카이다 쿠로하: 흐글! 흐그그를! 느으으으! 그윽그으!
제츠보: 나와… 으으… 나오라고!
제츠보는 카이다를 끌어내 마유즈미의 숙소 문지방을 지나자마자 카이다를 뻥 걷어찼다. 제츠보는 최선을 다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도 최선을 다했다. 하기와라와 이바라는 지체 없이 문을 닫았다. 그러자 문 너머에서는 카이다가 괴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걸 어떻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
캐롤과 나나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마디 말이 그들의 정신을 흙탕물처럼 흐려 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나시는 자신을 샤이닝의 추가 출력 장치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기계공학도의 비유만큼 간단하게 작용하지 않았다. 배터리는 의지가 없는 데에 반해 나나시는 의지가 있고 정신력의 배터리인 이상 그 의지는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쪽 다리를 서로 묶은 채 걷는 일이었다. 그것은 서로 한 단어씩을 말해 온전한 문장을 끝도 없이 말하는 일이었다. 탁구대 없이 탁구공을 주고받는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터치를 사용한다. 다크닝을 압도하기 위해 터치의 세기를 강하게 하는 감각이란 터치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일곱 번째 감각이다. 전신의 근육에 줄곧 힘을 주고 있는 일과 같이 피로했으며. 그러는 와중에 뒤에서는 온갖 잡소리가 터져 나왔다.
캐롤과 나나시는 동시에 생각했다. 제발… 제발 좀…!
마유즈미의 가옥 안이 한 차례 덜덜덜 떨렸다. 나와 마유즈미의 발 밑이. 머리 위가. 눈앞과 등 뒤까지의 모든 방향은 전부 요동치고 있었다.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히무로 시라베: 무슨 일이 벌어졌군.
그게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캐롤 브라이트와 이름 없는 남자의 집중력이 흐트러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들의 행동을 방해하는 어떤 변수가 발생했을 수도 있었다. 마유즈미 또한 좋지 않은 징조를 느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고… 곧 가세요. 히무로 씨?
히무로 시라베: 아니야. 아직은 아니야. 마유즈미. 내 말을 되새겨. 네 이름을 기억해 내. 이 안에서 네가 누구인지 찾아. 너를 위해서 그렇게 해. 다시 꺠어날 너를 위해서…
마유즈미 나데시코: 흠… 으음… 일단 해 볼게요. 오랜만에 집 탐방이나 해 볼까… 어으. 이거 왜 이래. 기분이…
마유즈미는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 또한 그녀 만큼의 불길함을 느꼈다. 일전 마유즈미의 정신 안에서 깨어나는 일이 언제라도 곧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함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감각 자체는 없었다.
나는 나의 동요가 커지지 않게끔 숨을 작게 몰아쉬었다. 내가 흔들리면, 곧 케프 또한 흔들릴 터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정신을 따라 함께 떨리고 있는 마유즈미의 손을 붙잡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꺅! 저. 저 허락 맡아야 해요! 먼저 여쭤 봐야지만…
히무로 시라베: 내가 곧 사라지더라도, 다시 너를 찾아올게. 마유즈미. 꼭 다시 올게.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 그 얘기군요. 네. 계속 기억하고 있을게요! 나중에 오면 꼭 웃어 주세요. 알았죠?
히무로 시라베: 웃을 일은 없지만 노력해 볼게. 다음에 올 때까지…
그 순간 나는 등 뒤에서 손가락이 나를 찌르는 것 같은 감각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씨. 왜 그래요? 뒤에 뭐가 있어요?
히무로 시라베: 아니. 기분 탓인 모양이야. 너 스스로의 과거를 찾아내. 그리고 회복하는 거야. 그렇게 된다면…
손가락이 다시금 등 뒤에서 나를 찔렀다. 나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나는 분명 무언가를 느꼈다. 등 뒤를 계속 노려보고 있자 마유즈미는 내 반응에 기이함을 느낀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무슨 일 있어요?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지금 누가 등 뒤에서 나를 찌르고 있는지를 보지 못하는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저한테는 히무로 씨밖에 안 보여요.
나는 나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를 어느 정도 짐작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마유즈미에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에게만 존재하는 인간인 것이다.
직후 나는 등 뒤에서 나를 찔러대는 열 개의 손가락을 느꼈다. 나는 다시금 몸을 돌렸다. 반쯤 뒤를 보았을 때. 내 등 뒤에 있는 존재는 내 목 부근의 옷깃을 부여잡고 내 얼굴을 제 것으로 홱 끌어당겼다.
그것은 초록색의 눈을 가진. 티 하나 없이 창백한 피부의 괴인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워!
그녀는 단지 내 얼굴만을 당기지 않았다.
그녀는 불청객이었다. 카텟이기에 가능한 케프에 멋대로 올라탔다. 그녀는 마유즈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에. 마유즈미는 그녀를 인식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오직 나의 안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다리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게끔 굳게 뿌리를 내렸다. 그런데도 몸은 나의 의지와 상관이 없이 움직였다.
방해꾼이다. 나는 나를 잡고 있는 팔을 세게 붙잡고 그녀를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웃음을 지으며. 팔을 덜덜 떨어대면서 나와 힘을 겨루었다. 그럴 수가 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정신은 엄밀히 말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물리법칙에 구애를 받지도 않았다.
히무로 시라베: 꺼져라!
노성을 토하며 그녀를 밀어내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틈새가 좁아졌다는 느낌.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꼈다. 여기까지다. 이번 시도는 여기까지다… 분명 이전 시도보다 길었다. 훨씬 길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모자랐다. 턱도 없이 모자랐다…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나는 등 뒤를 돌아보았다. 마유즈미가 멀어지기 직전이었다. 그것은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다. 다시 오겠다는 말도 전하지 못할, 아주 찰나의 시간… 그런 한마디 말도 내뱉을 수 없는 순간의 사이에서…
나는 마유즈미가 내게 손을 흔드는 것을 보았다.
당황했지만, 아쉽지만, 그럼에도 흔들리는 작고 하얀 손짓.
그 손짓이야말로 일필휘지였다. 그녀는 단숨에 무언가를 내리 쓰듯이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을 다시금 규정지었다.
단지 두 번의 케프만으로 마유즈미의 본명을 알아내고 그녀를 의식 밖으로 끌어낼 수는 없었다. 또 몇 번의 케프를 더 겪은 뒤에야 그녀가 깨어날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확실하지가 않았다. 그 사실과 나의 무력함에 분통을 느끼던 와중. 그녀는 내게 말한 것이다. '나중에'. '다음에'.
그것 하나로 많은 것이 뒤바뀌었다. 나에게는 그 작은 손놀림이 다시 만날 수 있노라고, 다음 기회는 또 올 것이니 초조해할 것이 없다는 선포로 보였다. 내가 영안로에서 빠져나오기 직전 마유즈미에게 뻗은, 닿지 못한 애처로운 손과는 달랐다. 내가 추락하던 그녀에게 뻗은 손은 영영 만나지 못할 좌절과 한계를 담고 있었다. 마유즈미의 나중에는 다음의 만남을 기약함과 동시에 서로 헤어지는 자들의 무운을 바랐다.
나중에. 그저 나중에. 다만. 나중에… 그 명제 앞에서 나는 모든 강박이 내 몸을 잠식하지 않게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듯 했다. 한 번의 손짓만으로 사슬이 끊어졌다. 마유즈미의 말대로였다. 나중에. 분명. 나중에… 그리고 찰나의 시간 사이에. 나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에서 또 다시 새로운 감정을 느꼈다.
마유즈미는 그저 낙관주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마유즈미는 희망을 가진 것이다.
돌아온 뒤. 나는 서서 잠에 든 뒤 겨우 중심을 잡은 사람처럼 몸이 한 차례 강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다시금. 되돌아왔다. 마유즈미는 깨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마유즈미의 꿈 안에서 보았다. 또 그녀였다. 죽어서도 나를 놓아주지 않는, 죽었기에 이제는 떼어낼 방도도 없는 그녀를.
이상하게도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시도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간섭할 수 있다니. 그녀는 또 언제 나타난단 말인가? 다음 시도에도? 또 다음 시도에도? 터치의 연결이 약해졌을 때만 나타날 수 있는가. 그저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인가?
히무로 시라베: 질투심 많은 요부가 기어코 일을 망치는군.
하기와라 우시오: 뭐. 뭐야?! 야. 히무로. 돌아왔냐?
히무로 시라베: …돌아왔다. 이제 터치를 멈춰도 된다.
캐롤 브라이트와 이름 없는 남자는 나의 말을 듣고 메리에게서 손을 뗐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캐롤 브라이트의 몸은 주르르 내려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으며, 이름 없는 남자는 벌벌 떨리는 다리를 억누르려 애쓰고 있었다. 금색의 머리카락 묶음에서 손을 떼자 그의 머리와 눈은 서서히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나나시: 으으… 히무로…! 하아… 하… 성공한 거야?
이름 없는 남자의 물음에 캐롤 브라이트는 퍼뜩 마유즈미가 돌아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마유즈미에게 질문을 던졌다.
캐롤 브라이트: 마유즈미 씨! 제 말 들리세요? 저예요! 캐롤 브라이트! 제가…
마유즈미 나데시코: 안 됐지만. 아직 나야. 제인.
이름 없는 남자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키려던 캐롤 브라이트는 그 대답을 받고, 몸에 잔뜩 쥐고 있던 힘을 풀어 버렸다. 이름 없는 남자 또한 한탄을 하며 캐롤 브라이트의 옆에 걸터앉았다.
나나시: 이것도 안 통할 줄이야… 하아… 이러면 안 되는데…!
히무로 시라베: 이전의 터치보다는 오래 이어졌다. 안타깝지만, 그 사실 하나만큼은 고무적이다. 고된 일을 해냈군.
캐롤 브라이트: 분명 그렇지만… 마유즈미 씨는 여전히…
메리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캐롤 브라이트의 말을 끊었다. 입가에는 웃음이 감돌았다. 안도와 거들먹거림이 정확한 절반의 비율로 섞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하… 저 반푼이 때문에 겨우 살았다. 나중에 전해 줘. 정말 고맙다고. 앞으로도 그렇게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하기와라 우시오: 아. 그년 때문에 또 지랄이다. 진짜. 어지간히 좀 죽어 주면 안 되려나! 아아!
반푼이. 도움. 그리고 마유즈미의 정신 속에서 겪었던 진동. 특정한 변수. 나는 방 안에 있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마유즈미의 정신 속으로 진입하기 전과 무엇이 달라졌는지가 한눈에 보였다.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 쿠로하와 제츠보는 어디에 있지?
상황이 전부 어수선했다. 마유즈미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비해 인물들의 배치 간격이 넓어졌다. 누군가가 중앙에서 난동이라도 보인 것처럼 보였다. 그 정도라면 캐롤 브라이트와 이름 없는 남자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려 놓기에 충분하겠지.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 쿠로하 때문인가.
나나시: 맞아. 또 카이다의 짓이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아… 아니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끔 해야…
캐롤 브라이트: 나… 나나시 씨. 괜찮으신 거죠…?
히무로 시라베: 일단 일어나서 생각해라.
나는 이름 없는 남자의 몸을 일으켜주기 위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그는 내가 날붙이라도 들이댄 것처럼. 신경이 매섭게 솟아오른 사람처럼 외마디 소리를 내뱉으며 파들짝 몸을 튕겼다.
나나시: 악! 히. 히무로! 괜찮아! 내가… 알아서 일어날 테니까!
히무로 시라베: 알겠다.
나는 그의 손을 놓았다. 이름 없는 남자는 정말 그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내가 그를 총으로 쏘았던 일이 그에게 어느 정도의 거부감을 심었으리라는 예상을 했다. 이름 없는 남자는 식은땀을 닦으며 숨을 골랐고, 이바라 쿠리스의 손을 잡고 일어선 캐롤 브라이트 또한 체력을 갈무리했다.
캐롤 브라이트: 고마워요. 이바라 씨.
이바라 쿠리스: 고맙긴! 마유즈미 불러오려고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당연히 도와줘야지. 에엑. 땀난 것좀 봐! 괜찮아?! 마라톤 뛰다 온 것 같은 느낌이야. 지금!
하기와라 우시오: 나나시. 괜찮냐?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힘든지 모르겠으니까 무슨 말을 할지 감이 안 잡힌다. 지금 기분이 어때?
나나시: 피곤하고… 몸에 힘이 안 들어가고… 머리도 아프고… 막 내 속이 비는 것 같은 느낌이야…
하기와라 우시오: 뭐야. 그거 숙취 증상 같은데.
나나시: 숙취에 걸려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 술을 마시면 이런 느낌이 든다는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내가 본 바로는 그렇더라.
마유즈미 나데시코: 다들 지쳐 있는 와중에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제 그냥 나를 내버려 두는 건 어때?
메리는 그녀 또한 지친 기색을 내며 고개를 저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매일을 이렇게 찾아올 작정이야. 너희? 그만 포기해 주면 좋겠어. 너희들이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나도 살고 싶단 말이야. 이 몸은 사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적어도 몸이니 어떻게든 만족해보려고 하고 있어. 너희도 만족해 봐.
하기와라 우시오: 이거 히무로 과라고 그냥 비슷하게 쳐 미치셨구만. 개소리 집어치우고 마유즈미나 내놔. 마음에 안 든다고? 우리는 걔가 존나게 마음에 드는데 어디서 폄하에 불평불만을 늘어 놔? 애초에 왜 마유즈미 몸에 쳐 들어간 거야? 진짜 이해가 안 된다. 왜? 그리고 어떻게?
나나시: 그건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우리는 다시 찾아올 테니까.
이름 없는 남자는 메리를 보며 말했다.
나나시: 나는 또 다른 방도를 가져올 거야. 터치가 안정적으로 길게 이어지는 방법을 연구해 낼 거야. 그때가 오면 결국 너도 꺾일 수밖에 없을 걸. 너는 시한부야. 시라유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 저능아 하나 어찌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와중에 나를. 어떻게 하겠다고? 나 같은 천재를?
메리는 고개를 젖힌 채 웃었다. 나는 그녀가 그렇게 웃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하하! 그래. 잘해봐. 그런데 나보다 먼저 그 열등종자를 어떻게 해야만 하지 않을까? 아니. 못 하겠지?
메리는 목을 쭉 내밀고 거들먹거렸다. 고개를 살짝 젖힌 그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자신감과 확신이 드러났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여기 제인과 생이별한 안타까운 사연의 소유자를 너희가 어쩌겠어. 차라리 죽었으면 싶을 텐데 제인이 보석이라도 다루듯이 애지중지하니까 정말 방도가 없잖아! 날뛰게 둘 뿐이지. 저기 싸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데! 말리러 가지 그래?
마유즈미 나데시코: 응? 피곤해 죽겠는데 이렇게 괴롭혀대지 말자고. 다들 내 방에서 꺼져!
히무로 시라베: 네 방이 아니다. 마유즈미의 방이다. 그녀에게 돌려주기 위해 다시 올 테니. 두려운 게 아니라면 우리를 기다려라.
나는 이렇게 예고를 한다면 메리가 탑 어딘가에 잠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사색을 이어나간 끝에 곧 그런 가능성을 지워 버렸다. 탑에 있는 메리는 탑에 있는 모든 이들을 자신의 밑으로 보기 때문에. 자신의 안위를 위해 몸을 숨기는 일은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 아무튼 간에 그녀는 누구보다 똑똑하다고 하니까. 그 압도적인 지성이라면 모자란 것들이 몰려와도 지성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어야겠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래. 이 목 빼고 기다릴게. 하지만 나는 이미 다 알아. 너희같이 간단한 인간군상들의 연구에는 변수가 거의 없지. 너희는 마유즈미를 구해내기에 앞서 스스로 무너져 버리고 말 거야.
히무로 시라베: 예언인가?
마유즈미 나데시코: 분석이야. 잘 새겨 들어. 내가 경고하지 않았다면서 탓하지 말고.
캐롤 브라이트: …다시 찾아올게. 시라유키.
메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나는 마유즈미의 숙소 내부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그러자 나는 한 사실을 깨닫고 내가 증오해 마지않는 그녀를 더욱 증오하게 되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녹색 눈을 가진 이를.
후루미나미 나몬은 코빼기도 비추지를 않았다. 마유즈미의 정신 안에서 나를 방해해 놓고서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숨어버렸다.
히무로 시라베: 어디 있지? 신의 저주를 받을 인간아. 모습을 드러내라. 그러지 않는다면 기어코 너를 빛 한 줌 들지 않는 망각의 저편으로 묻어 버리겠다.
캐롤 브라이트: …네? 네? 히무로 씨? 지금 누구한테 말씀하신 거죠?
하지만 후루미나미 나몬은 자신은 이미 저주를 받았다는 양. 조금의 대답도 하지 않았다. 또 제 성질이 내킬 때에 나를 찾아오겠지. 결국 나는 허깨비에 화를 내기보다 더 생산적인 일을 하러 가기로 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어? 히무로. 어디 가냐?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 쿠로하는 이 밖에 있겠지. 할 일이 있어서 간다.
나는 제츠보가 카이다 쿠로하를 붙잡고 그녀를 마유즈미의 숙소에서 내보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리고 아직 그들이 탑의 2층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캐롤 브라이트: 자. 잠깐만요!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향해 다가가던 찰나. 캐롤 브라이트가 나를 만류하고자 다가왔다. 신발은 채 신지도 못했다. 나는 그녀 쪽으로 손을 뻗었다.
히무로 시라베: 할 말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해라. 3보 이내의 간격 안에 들어오는 것은 허용하지 않겠다.
급하게 나를 말리기 위해 신발을 신지 못했을 테지만, 낮아진 전기저항으로 인해 터치가 강해졌을 그녀에게는 접근을 허용할 수 없었다. 마유즈미에게 터치를 사용하여 기력이 떨어졌겠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정신조작 보유자는 본의가 아닐지언정 누구나 위협이다.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진정하세요. 제가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 테니까…
히무로 시라베: 나는 이미 진정하고 있다. 카이다 쿠로하에게 할 말이 있을 뿐이다.
캐롤 브라이트: 저. 정말 진정하신 거 맞으시죠…?
하기와라 우시오: 걱정 마. 캐롤. 싸이코 박사 학위가 있는 내가 보기에는 평소의 히무로이드 상태야. 이게 무슨 뜻이냐? 바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확실하게 끝낼 결의를 이미 다졌다는 뜻이지.
이바라 쿠리스: 꽤 불길하게 들리는데?!
하기와라 우시오: 그렇지만 진정해도 돼. 캐롤. 히무로한테 지금 총이 있어. 칼이 있어? 그냥 몸뚱이 뿐이잖아. 카이다를 개처럼 후두려패도 카이다한테는 멍 하나 안 생길 거라고.
나는 카이다 쿠로하에게 해를 가하겠다는 어떤 징조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캐롤 브라이트는 여전히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문 너머에서는 카이다 쿠로하와 제츠보가 싸워대며 소리를 질러댔다. 카이다 쿠로하가 야성을 버리고 인간처럼 살기에는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사료되었다.
히무로 시라베: 할 말이 있을 뿐이다. 나가지.
그리고 문을 열자 그 밖에서는 제츠보가 카이다 쿠로하의 머리를 자신의 팔 안에 가두고 목을 조르고 있었다. 카이다 쿠로하는 켁켁대며 저항했지만, 제츠보의 팔을 풀지는 못했다.
카이다 쿠로하: 윽… 놔… 놔… 놕…놓으라고! 이 새끼야악!
제츠보: 좀 가만히 좀 있어… 잠깐. 끝났어?! 어떻게 된 거야? 마유즈미는 돌아왔어?
제츠보는 문을 열고 나오는 나와 일행들의 모습을 보고 물었다.
히무로 시라베: 아니. 실패다. 연결이 서서히 약해지고 끊어지고야 말았다.
제츠보는 내 말에 가라앉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러자 카이다 쿠로하는 더 크게 저항했으며.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카이다 쿠로하: 악! 아아악! 이 개새끼! 놓지 못해! 씨발아! 나한테 화풀이를 해봤자 달라지는 건 하나도…
나나시: 카이다 쿠로하아아아!
내 앞을 박차며 카이다 쿠로하에게 성큼성큼 달려가는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이마에 핏줄이 불거지고 미간은 찌푸려진 이름 없는 남자였다. 카이다 쿠로하는 의기양양한 비웃음을. 우리가 실패했다는 말을 듣자 어느새 입가에 떠올린 그 미소를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카이다 쿠로하: 뭐. 뭐야?! 왜 그래!
그 얼굴에는 당황이 떠올랐다. 캐롤 브라이트의 얼굴에도 비슷한 게 떠올랐다. 이름 없는 남자가 숨결마저 느껴질 것 같은 거리에서 카이다 쿠로하의 얼굴에 대고 이와 같은 말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나나시: 어디서 망발이야. 카이다! 생각 없이 장난질을 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일을 망쳐?!
카이다 쿠로하: 미. 미쳤어?! 어디서 나한테 소리를 질러! 이 개새끼! 머리를 줘 뜯어버려야 정신을…!
카이다 쿠로하는 이름 없는 남자를 붙잡기 위해 몸을 버둥거렸으나 그 시도는 번번이 제츠보의 노련한, 이제는 카이다 쿠로하의 제압법을 어느 정도 익힌 듯한 몸놀림에 저지당할 뿐이었다.
제츠보: 물러서! 나나시. 괜히 다치지 말고! 성질을 돋궈 봤자야! 달라지는 건… 아니. 물러서래도! 그러다가 진짜 잡히겠어!
나나시: 내 몸에 손이라도 대 봐. 카이다. 해 보라고. 장담컨대 그 자리에서 전기를 먹여줄 테니까!
하기와라 우시오: 오! 그것은 빌어먹을 야생의 나카츄가 나타났다 입니다!
이름 없는 남자는 자신이 터치의 사용에 지친 적이 없다는 것처럼 눈을 사납게 뜬 채로 금색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 즉시 그의 모습이 변했다. 카이다 쿠로하는 몸을 주춤 떨었고, 어떻게든 그를 해치기 위해 하던 발버둥을 멈춘 채 조용히 그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 분노가 정치적으로는 좋은 한 수라는 생각을 했다. 캐롤 브라이트는 내가 카이다 쿠로하에게 분노를 느껴 그녀에게 징벌을 내리려 한다고 오해했다. 또한 캐롤 브라이트가 혈연을 보호하는 와중 카이다 쿠로하가 저지른 실책은 캐롤 브라이트의 책임소재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이름 없는 남자는 그런 캐롤 브라이트의 정치과학적 상황을 이해했고, 내가 카이다 쿠로하를 해치지 않고 캐롤 브라이트에게도 비난의 화살이 가지 않게끔 집단의 내에서. 그러니까 캐롤을 필두로 한 사조직 속에서 그 스스로가 카이다 쿠로하를 강하게 규탄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나서지 못하게끔 막은 것이다.
캐롤 브라이트: 저… 나나시 씨… 치나미가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나나시: 잠깐만요. 이건 짚고 넘어가야겠어요. 내가 너 날뛰는 걸 보려고 머리 싸매며 터치를 강화할 방법을 찾아낸 줄 알아? 대체 무슨 생각인데. 한 번 들어나 보자! 아니. 말하지 마. 닥쳐. 되도 않은 이유면 더 화가 날 텐데 십중팔구 되도 않은 이유일 테니까!
이바라 쿠리스: 우. 우와…
하기와라 우시오: 워호호호!
……
카이다 쿠로하: 어. 언니 말 들어! 내가 잘못한 건 맞지만 그래도…
나나시: 그래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한테 하지만이나 그래도는 없어! 그저 악한 사람 하나만 있을 뿐이라고. 영안로에 있었던 때보다 나아진 게 하나 없다니! 어떻게 사람이 이럴까?!
하기와라 우시오: 말 잘한다! 이거지! 썅! 할 말은 한다. 나나시! 독기 제대로 품었구나! 씨발 믿고 있었다고!
제츠보: 그래. 말 잘했다. 나나시. 이제 좀 남자답네.
………
나나시: 자기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도 모르지? 바람 앞의 등불처럼 휘청휘청 대는 주제에 대체 이런… 어디서 눈을 돌려. 이봐. 내쪽을 봐! 어디서 눈을 돌려! 왜. 그렇게 꽁해있으면 내가 과자라도 줄 줄 알았어? 내가 신경이라도 쓸 것 같아?! 뻔뻔하긴!
………어쩌면, 그게 아닌가?
이바라 쿠리스: 어. 엄청 화났네. 나나시…
정치적인 의도가 담긴 행동이 아니라. 정말 화가 났을 뿐인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의 화가 두 사람과 묘하게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리고 생각 없는, 부정적인 행동에 대한 규탄에는 모리 레이코를. 꺼림과 미워함을 담은 점에서는 카이다 쿠로하를.
이름 없는 남자는 문득 내 쪽을 뒤돌아보고서는 씩씩거리는 숨을 잠재우며. 카이다 쿠로하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떼어냈다. 그리고 카이다 쿠로하를 향해 자신의 한쪽 팔을 펼쳐 보였다.
나나시: 미안. 나만 성을 냈네. 이제 너도 구워 먹든 삶아 먹든 해.
캐롤 브라이트: 그러지 마세요. 히무로 씨! 때리는 건…
히무로 시라베: 육체적 징벌을 줄 생각은 없다. 부상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는데, 그녀는 부상을 입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 없는 남자만큼은 아니었지만. 나 또한 카이다 쿠로하가 나를 무시할 수 없게끔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카이다 쿠로하: 뭐… 뭐! 이제 뭐 그냥. 얼굴 들이대면 내가 겁이라도 먹을 줄 아나 본데! 이 깡통한테 기대고 있으면서 감히 나한테 까불어?! 네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히무로 시라베: 네 행동의 동기는 이해할 수 없다. 카이다 쿠로하. 중요하지도 않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
카이다 쿠로하: 하! 네가 뭘 어떻게 하게? 나는 다음에도 이럴 건데?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 제발 좀! 히무로 씨! 정말 죄송해요… 치나미도 진심은 아닐 거예요!
카이다 쿠로하: 나는 진심이야! 언니! 나는 또 방해할 거야! 아무도 나를 못 막아! 너희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그대로일 거라고!
나나시: 이걸 봐. 이렇다니까?
히무로 시라베: 이는 강요가 아닌 권장이다. 너의 모든 시도는 무의미하다. 카이다 쿠로하. 너처럼 미약한 인간보다는 마유즈미가 더 강하다.
카이다 쿠로하는 내 말을 듣자 크게 노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카이다 쿠로하: 어이이! 왜 그딴 소리를 하는 건데? 그 계집이 나보다 강하다고? 미친 소리를 하고 있어! 왜 걔가 나보다 강한데! 나는 씨발 맨손으로 곰도 죽이는데 왜 그년이 나보다 강하냐고!
히무로 시라베: 왜냐하면 너에게는 비전도, 미래도, 어떤 희망도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질 생각이 없는 자는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 너 같은 인간에게 나의 시간을 소모하는 것 자체가 낭비지. 내버려두면 머지 않아 파멸할 인간에게. 내가 뭐하러?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다. 카이다 쿠로하. 그녀와 나의 카가 너의 무력보다도 강하다. 너 따위의 훼방으로 끊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니. 헛수고는 진작에 그만두도록 해라.
카이다 쿠로하: 집어치워. 씨발아!
카이다 쿠로하는 팔을 허우적대며 내게 휘둘러대려 했으나. 그 모든 시도는 제츠보에 의해 좌절되었다.
제츠보: 자. 여기까지 하자고. 카이다한테 더 할 말이 없으면 이만 얘 숙소로 데려갈게. 더 풀어뒀다가 무슨 일을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나나시: 알겠어… 곧 찾아간다. 카이다 쿠로하. 기다리고 있어.
카이다 쿠로하: 뭐? 뭐? 잠깐. 뭐라고? 야. 네가 왜 와! 이 창… 아니. 나나시 네가 왜 오냐고! 야! 대답 안 해?!
이름 없는 남자는 카이다 쿠로하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여러분들. 정말 죄송해요. 저희 치나미 때문에 이런 일이…
그리고 캐롤 브라이트는 다른 이들이 만류하는 와중에도 계속 사죄의 뜻을 표했다.
캐롤 브라이트: 정말 죄송해요. 여러분…
나나시: ……
얼마 지나지 않아 전용실에 있는 나에게로 한 사람이 찾아왔다.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가 한 일에 대해 사과드리려고 왔어요. 히무로 씨.
가족을 잘못 두어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마저 떠맡는 형국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너는 사과를 할 필요가 없다. 카이다 쿠로하의 잘못이니까. 더 원론적으로 접근하자면 카이다 쿠로하를 마유즈미의 숙소에 데리고 온 제츠보의 잘못이겠지.
캐롤 브라이트: 전혀 아니에요. 히무로 씨. 더 잘 얘기를 해야 했는데… 결국 제가 잘 설득하지 못해서. 마유즈미 씨가 돌아오지 못했던 거예요…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 쿠로하의 잘못에 네 탓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결국 너의 터치가 없다면 마유즈미와의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진전이 있었으니. 부적 강화 요인을 제거해 더 나은 결과를 만들면 될 일이다.
터치는 이전의 것보다 훨씬 길게 이어졌다. 이름 없는 남자의 개선안 세 가지는 결국 더 안정적인 터치. 더 길어진 소통을 낳았다. 나는 마유즈미에게 탈출의 동기를 제공함과 동시에 상황을 이해시키고, 카텟의 존재를 일깨우는 것마저 성공했다. 만족스러움에는 여전히 부족했으나 개선은 개선이었다. 이번 시도를 통해 나는 마유즈미의 복귀를 바라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
히무로 시라베: 너와 이름 없는 남자의 도움이 있다면. 분명히 희망 또한 있다. 지금은 너희가 체력을 추스르는 것이 급선무니 이만 휴식을 취하기를 권하겠다. 돌아가라.
캐롤 브라이트: …네. 다음에는 더 길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할게요. 히무로 씨.
히무로 시라베: 나 또한 더 길게 말해 보겠다.
나는 캐롤 브라이트를 돌려보냈다. 그렇게 전용실에 혼자 남은 뒤 나는 내가 전용실에 온 목적을 이루고자 했다.
후루미나미 나몬을 불러내고 그녀를 더 깊은 종류의 상자에 가두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분명 후루미나미 나몬이 내 몸을 빼앗는 일은 여태껏 벌어진 적이 없었다. 그녀의 영향력이 상자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가 이따금씩 나타나 조잘거리는 것은 성가신 일이었지만 분명 참을 수는 있는 일이었다.
이제는 그마저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게 되었다. 마유즈미의 정신에까지 나를 방해하러 올 수 있는 이상 나는 그녀를 허깨비로도 나타날 수 없게끔 억압당해야 했다.
나는 전용실의 한복판에 가만히 서 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나오라고 하면 나오지 않는다. 나오지 말아야 할 때는 나타났다. 그렇다고 하여서 그녀를 부르기 위해 나타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면, 그녀는 그녀의 반골 기질을 내가 이용하려 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나타나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후루미나미 나몬이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녀는 나타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게 복속되어 마음대로 걸어 다니지도 못하며 어떤 욕구도 푸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니 어떠한 자극도 제공하지 않은 채 정적을 지킨다면. 후루미나미 나몬은 언젠가 제풀에 지쳐 모습을 드러낼 게 분명했다.
이런 종류의 확신은 후루미나미 나몬 또한 무의식에서 읽을 수 있겠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후루미나미 나몬은 자신이 드러나지 않을 경우 적막이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이해할 터였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알파걸과 결이 같은 존재.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괴로움이란 무자극과 무변화였다. 그렇게 되면…
후루미나미 나몬: 내가 너무 조용하다는 걸 의심스럽게 여겼어야지.
눈꺼풀을 한 번 감았다 뜨는 찰나 사이에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나에게만 존재하는 사람으로서. 나와 다섯 걸음 정도가 떨어져 있는 후루미나미 나몬은 자신이 언제 사라지기라도 했냐는 듯이 능청스러웠다.
히무로 시라베: 네 말이 맞군.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너를 무심코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나 상처 주려고 하는 말이야? 정말 사려 깊다. 히무로. 자상하기도 해라. 이미 죽은 마음에 너 하나만이 위안이야. 아아아아앙.
후루미나미 나몬은 제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서 몸을 비틀어댔다. 고통을 기쁨으로 여기는 자에게 모욕이란 칭찬과도 같았다. 까다롭기 짝이 없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춤이라도 추듯이 발뒤꿈치를 든 채로 사뿐사뿐 내 전용실 안을 뛰어다녔다. 그리고 그녀의 걸음은 내 전용실에서 가장 이질적인 구조물. 재단에서 나를 가둘 때 쓰던 격리실에서 멈추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이거 좀 열어 줘. 영영 이 안에 갇혀 사는 건 어떤 느낌인지 들어가 보게.
히무로 시라베: 혼자서도 들어갈 수 있지 않나? 유령이면 유령답게 행동해라.
후루미나미 나몬: 쌀쌀맞긴. 기분 좀 느끼겠다니까? 외부에서 문을 닫아야 가둔다는 말이 성립하는 거야. 나 스스로 들어가고 나올 수 있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데?
히무로 시라베: 내가 신경을 써야 하나.
후루미나미 나몬: 그럴 필요가 없기는 하지. 그럼. 유령답게 들어가 볼까? 우우우우…
후루미나미 나몬은 수월하게 유리를 통과하고 그 안에 섰다. 그리고는 정말 자신이 안에 갇혀 있다는 듯이 유리벽에 두 손을 두드리고 주먹을 쥐어 세게 내려치는 시늉을 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 점만 빼면 그녀는 격리실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후루미나미 나몬: 꺼내 줘! 꺼내 주세요! 내가 왜 이런 곳에 갇혀 있어야만 하지? 내가 왜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되어야 해! 악! 아아아아아! 흐아아아아아!
후루미나미 나몬은 전승 속 밴시처럼 구슬프게 비명을 질러댔다. 신경에 거슬려 귀를 막았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몇 초를 그렇게 더 엉엉 울어대고 유리벽 속에서 날뛰어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든 표정을 잃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네가 이러지는 않았지? 궤도에 오른 후로는 그저 자신이 당해야 하는 일을 모두 인식한 채로. 담담히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싶어.
히무로 시라베: 이제는 네가 무슨 의도로 그런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겠군. 네 장난질에 어울릴 만큼 어울렸다. 상자에 들어갈 준비는 되었나?
후루미나미 나몬: 그냥 섭섭해서 말이야. 가만히 너랑 마유즈미를 엿듣고 있었는데 이거 하나가 내 안에 가시처럼 박혀서 너무 아프고 거슬리던걸. '나는 보통의 사람들과 판이한 성장 배경을 지녔는데, 너는 그 안에서 너와 닮은 부분을 들여다보았어. 그리고 너는 사람을 찾아냈지'.
후루미나미 나몬은 격리실을 뚫고 나에게로 서서히 다가왔다. 유령의 유령다운 행동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나도 너에게서 나와 닮은 부분을 들여다보았는데. 왜 나의 이해는 그토록 부정하는 거야?
카이다 쿠로하.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놓고 외출 금지 형에 처해지다.
카이다가 명석했다면 외출 금지 따위 아무래도 좋다며 여유를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이름만 다른 감금이었다. 꽤 오랫동안 이어진 터치를 방해한 카이다는 그 대가로 잠시 외출의 자유를 잃었다. 다음 터치의 기회가 올지라도 카이다는 그곳에 참여하지 못할 터였다. 자신의 숙소에만 있어야 하니.
돌고 돌아 카이다를 감금하자고 했던 히무로의 말이 옳았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카이다를 불구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 또한 그가 옳았다고 재평가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 모두 카이다와 부대껴야만 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나는 화끈거리게 부어오른 한쪽 얼굴을 부여잡은 채, 앞서 예고했던 대로 카이다의 숙소에 찾아갔다.
문을 두드렸다. 몇 초 뒤에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떫은 표정을 한 채 내게 말했다.
제츠보: …욕하러 온 거면 그냥 나한테 전해. 대신 말해줄 테니까.
나나시: 그런 거 아니야. 카이다한테 할 말이 있어서 왔어.
제츠보: 그래. 그러니 나한테 전하라는 거야.
나나시: 내가 그저 욕을 하려고 이렇게 발걸음을 한 건 아니야… 그럴 거면 그냥 카이다한테 전화를 해도 되잖아.
제츠보: 욕 말고 할 말이 있다고…? 너 얼굴은 또 왜 그래?
나나시: 넘어져서 이렇게 됐어. 카이다 좀 만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나를 몇 초 보다가 문을 더 크게 열어 주었다. 그러자 정겹지도 반갑지도 않고 그냥 듣기 싫은 목소리가. 험악하기보다는 이제 그냥 짜증 나는 웅얼거림으로 들리는 말과 함께 나를 반겨 주었다.
카이다 쿠로하: 아. 좆까. 좆같네 진짜. 으으으… 이런 개썅.
나나시: 입 간수 좀 잘해. 카이다. 네 수준이 훤히 드러나잖아.
카이다 쿠로하: 니 엄마랑 아빠 수준을 훤히 드러내는 너보다는 낫다.
나나시: 그래. 그런 말이 다 너를 대변하는 거야. 다 티가 난다니까?
카이다는 자신의 침대에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나는 의자 하나를 질질 끌어서 카이다의 앞에 놓고서 그 자리에 앉았다.
나나시: 카이다.
카이다 쿠로하: 뭐. 뭔데? 할 말이 뭐야? 왜 왔어? 의자는 왜 가져다 놔? 씨발 언제 어울려 준대? 나는 너랑 할 말 없어. 저리 꺼져. 흥!
카이다는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카이다는 나와 마주치면 지레 겁부터 집어먹어댔고, 설득 끝에 대화를 나누고자 하면 본래의 그 성정이 불쑥 튀어나와 정상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다.
나나시: 귀에서 손 떼. 어차피 내가 목청을 다 해서 외치면 네 손가락 틈을 뚫고 말을 걸 수 있어. 애초에 너 청력이 너무 민감하잖아. 지금 내가 하는 말도 들리지 않아?
카이다 쿠로하: 안 들리는데. 병신 새끼야?
나는 참을성 있게 카이다 본인이 그 대답의 모순을 깨닫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그녀는 십 초 정도가 지났을 때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뜨고는 내게 부라려댔다.
나나시: 카이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알겠지만 이번 건 내 탓이 아닌 것 같아.
카이다 쿠로하: 입 닥치고 꺼져. 그 역겨운 쌍판 치우라고.
나나시: …너는 지금 캐롤 씨를 위험에 빠트리고 있어,
카이다 쿠로하: 뭐? 뭐라는 거야? 내가? 언니를? 내가 왜.
나나시: 마유즈미가 깨어나는 걸 막으려 하잖아. 그게 지금 캐롤 씨의 입장에 있어 어떤 일인지는 모르면서.
카이다 쿠로하: 뭐라는 거야. 뭔데. 어떤 일인데? 야. 제대로 말해 봐!
나나시: 네가 일을 다 망치고 있다는 거야. 카이다. 나는 몰라도 캐롤 씨가 얼마나 큰 곤경에 처할 수 있는지 너는 몰라.
카이다 쿠로하: 그럼 말을 하라고. 이 개새끼야! 왜 지랄인데! 그 꼬맹이가 뭐라고! 동생은 나야. 나란 말이야!
나나시: 동생이면 뭐 해? 이대로라면 언니한테 부담만 될 텐데.
카이다는 내 말에 충격을 받은 것처럼 눈을 순간 크게 떴다. 충격을 받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딱히 사실을 왜곡하거나 부풀리지는 않았다. 나는 사실만을 말했다. 카이다가 마유즈미의 숙소 안에서 저지른 짓은 누구에게도 좋을 일이 없었다.
나나시: 차근차근 짚어가 보자. 카이다. 히무로가 보기에 이 탑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누구 같아?
카이다 쿠로하: 나.
카이다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카이다 쿠로하: 저 깡통이 나한테만 붙어 있잖아. 그 이유가 뭐겠어?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나한테 붙여놓은 거지.
나나시: 분명 히무로는 너를 힘으로 이길 수 없어. 그렇지. 하지만 통제의 용이함이 위험성을 결정짓지는 않아.
카이다 쿠로하: 그게 무슨 뜻인데?
나나시: 가령 원자폭탄의 스위치와 사람을 50톤의 바위를 비교해 보자는 거야. 어느 것이 더 통제하기에 적합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스위치 쪽이 더 간단해. 누르지 않으면 그만이거든. 그러나 바위는 한 사람이 어찌 옮길 수 없어. 여기서 누가 원자폭탄의 스위치와 바위의 위험성을 놓고 비교할 때. 너는 바위를 고를 거야?
카이다 쿠로하: 원자폭탄이 센 폭탄이냐?
나는 그녀의 대답이 새삼스레 놀랍지도 않았다.
나나시: 네가 지금까지 봤던 어떤 폭탄보다도 더.
카이다 쿠로하: 그럼 당연히 폭탄이 세지. 병신 같은 질문이 다 있네.
나나시: 그래. 히무로는 캐롤 씨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해. 반대로 통제하기 어려운 건 네 쪽이고. 그래서 인공지능이 너를 감시하는 거야. 이해가 가?
카이다 쿠로하: 야. 씨발. 우리 언니는 안 위험해! 애초에 네가 그딴 식으로 말을 하면 안 되지! 우리 언니는 천사처럼 착하단 말이야. 어디서 험담을 하고 있어! 내가 일러바쳐야겠다. 너 큰일 났어. 언니가 가만히 안 둘 거야!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저렇게 으름장을 놓는 카이다의 말이 위협적이라기보다 시큰둥하다고 느꼈다.
나나시: 그러던가. 하지만 내 말을 다 들은 다음에 해. 히무로는 정신조작자들을 향한 깊은 경계심을 가지고 있어. 세 가지 정신조작의 형태를 다 가진 캐롤 씨. 미약한 정신조작을 발현한 나. 전부 히무로가 보기에는 위험인물이지. 마유즈미 아니었으면 나와 캐롤 씨는 너까지 싸잡혀서 밧줄에 꽁꽁 묶이고도 남았어.
카이다 쿠로하: 꼬맹이 아니었으면? 그게 무슨 뜻이냐? 걔는 귀신한테 몸 내주고 코빼기도 안 비추는데.
나나시: 내가 영안로에서 히무로에게 총을 맞기 직전. 아주 잠깐이라도 히무로를 주춤하게 만든 건 마유즈미였어. 얼마 전 히무로가 너를 불구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도, 히무로는 너를 불구로 만들 모든 이유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 왜인지 알아? 히무로가 줄곧 마유즈미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야.
카이다는 내 말에 그저 표정을 구기기만 했다. 나도 그녀가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나나시: 마유즈미에 대한 생각은 그와 동시에 마유즈미라면 어떻게 했을지에 대한 생각이자, 마유즈미가 자신이 하려는 행동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생각이야. 그녀의 만류를 듣지 않은 결과 나를 총으로 쏘고 그녀를 잃었기에, 히무로는 마유즈미를 자신의 도덕 기준으로 삼고 있어. 마유즈미가. 히무로의 관용이라고.
카이다는 팔짱을 끼고서 칫하고 심통을 부렸다.
카이다 쿠로하: 흥. 과대평가하고 앉았네. 걔는 그냥 순둥순둥하기만 한 모자란 년이야! 내가 모든 면에서 그년보다 낫다고.
나나시: 지금이라도 생각을 고쳐먹는 게 좋을 거야. 인공지능이 너를 막는 이상 히무로가 나와 캐롤 씨를 잡으러 오면, 너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그에 반해 마유즈미는 몸을 빼앗긴 뒤에도 히무로가 우리를 탄압하지 않게끔 막아주고 있지. 그런데 네가 마유즈미보다 낫다니?
이상하게 카이다는 내 말을 듣고 더욱 살벌하게 눈총을 쏘아댔다. 유독 마유즈미가 자신보다 못하다는 주장을 거듭하고 마유즈미에게 사용한 터치를 방해한 것으로 보아. 마유즈미에게 열등감과 질투라도 느끼는 것 같았다.
나나시: 잘 들어. 나와 캐롤 씨는 하루라도 빨리 마유즈미를 데려와야 해. 당연히 마유즈미는 살아야 하지. 당연히. 내 친구고 캐롤 씨의 친구고 뭣보다 좋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당연한 것만으로는 부족해. 마유즈미는 반드시 살아야만 해. 마유즈미라는 이름이 히무로의 안에 조금이라도 더 짙게 새겨져 있을 때 마유즈미를 데려와야 한단 말이야.
카이다는 제 눈깔을 데구르르 굴리고서는 능청을 떨었다.
카이다 쿠로하: 그래서?
나나시: 그래서라니? 카이다. 지금껏 말했잖아. 마유즈미는 되살아나야만 한다고. 그러니 앞으로도 네가 그렇게 행동했다간 너도 히무로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니까.
카이다 쿠로하: 신경 안 써. 나는 또 방해할 거야. 그 순둥이 년 돌아오는 거 나는 반대라고. 날 여기에 가둬 두면 끝일 것 같아? 창문을 깨고 나갈 거다. 저 깡통이 아무리 빨리 쫓아와도 문을 한 번 세게 두드리면 니들은 또 실패할 수밖에 없어. 바로 옆에 있어도 달라지는 건 없다. 빈틈을 한 번만 보이면 나는 곧장 뛰쳐나갈 거야. 계속. 계속.
나는 카이다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짐작도 하지 못했다.
나나시: 왜? 내가 말했잖아. 히무로는…
카이다 쿠로하: 그 새끼 따위 나는 좆도 신경 안 써.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 너 병신이냐? 언니가 그 순둥이를 불러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이상. 그 인상 더러운 새끼는 우리한테 아무것도 못 해. 언니가 때려치면 순둥이도 못 돌아오니까! 그럼 그놈은 또 바닥 빌빌 기면서 제발 좀 도와달라고 아우성이겠지? 하!
나나시: 그게 무슨 말이야… 아직도 이해를 못 하는 거야? 캐롤 씨도 마유즈미가 돌아오기를 원해. 히무로가 캐롤 씨에게 요구하지 않더라도 나와 캐롤 씨는 마유즈미에게 되돌릴 수 있게 최선을 다할 거야.
카이다는 다시금 그래서 어쨌냐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카이다 쿠로하: 그럼 잠깐 참으면 되는 거고. 인상 나쁜 놈 속이 막 타오르게.
나나시: …잠깐 참는다니? 대체 그게 무슨. 조금이라도 히무로가 마유즈미의 유지를 되새기고 있을 때 마유즈미를 불러와야 한다니까…
그리고 만약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히무로가 마유즈미보다 정신조작 보유자들을 제압하는 일을 더 중히 여기게 된다면… 물론 마유즈미는 그에게 있어 소중하지만, 언젠가 그보다도 더 나와 캐롤 씨. 카이다가 자행할 위험이 더 무겁다고 여긴다면…
"이제 교섭은 끝났다. 이름 없는 남자. 실타래를 꺼내라. 그리고 영안로에서 나가라. 지금 당장."
카이다는 히무로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모른다.
"손 들어. 눈 감아. 입 닫아."
히무로는 언제든지 내가 영안로에서 마주쳤던 그 사내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조금도 과장하지 않았다. 마유즈미는 히무로의 관용이었다.
"히무로. 잠깐 이야기라도 해 보자. 나나시도 나가고 싶은데 나가지 못하는 걸 수도 있잖아!"
"아니야. 히무로! 나나시는 지금 정말 여기서 나가지 못하는 거야. 무슨 이유가 있어서!"
진정 히무로를 멈출 수 있는 건 마유즈미뿐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히무로와 캐롤 씨는 진즉 누가 더 영향력이 높은지를. 누가 더 강대한지를 겨루고도 남았다. 마유즈미라는 교집합이 일시적 평화를 만들었을 뿐… 서로를 경계하기에 협력하기 어려운 두 인물이 손을 잡은 것은 순전히 마유즈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돌아온다면, 감시자와 정신조작 보유자들 간의 갈등 또한 사라질 수 있다. 마유즈미가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면 양측 모두 그렇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이 돌아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었다.
나나시: 대체 왜 마유즈미를 구하는 일을 그토록 반대하는 거야? 대체 왜?
카이다는 잠시 자신만의 오묘한 생각에 빠진 듯 시선을 돌린 채 입을 다물고 있다가. 얼굴을 마구 구긴 채 내게 말했다.
카이다 쿠로하: 그냥 싫다고. 싫다고. 이유를 대기도 싫어. 그냥 싫어.
그리고 그녀를 보며 나는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 화가 난 것이다. 카이다를 상대로 감정적이 되는 것은 알맞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잘못 본받은 것이 발현되었다.
나나시: 캐롤 씨는 그렇게 강한 터치를 하루에 한 번 밖에 사용할 수 없어. 네 귀여운 일탈 하나로 한 번의 기회가 날아간다고. 이건 한 사람의 자아가 달린 일이며 우리의 목숨이 침해받지 않기 위한 일이란 말이야. 그렇게 훼방을 놓는 게 가벼운 일인 것 같아? 카이다. 정신 안 차릴래?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걸 그랬다. 카이다는 자신이 조금이라도 싫은 소리를 듣는 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카이다 쿠로하: 야! 어디서 큰 소리야! 누구도 나한테 그딴 식으로 말하지 못해. 알아들어?! 누구도! 잘난 체하지 마. 언니가 좀 좋아한다고 나한테 기어오르려 들지 말라고!
한 번 카이다의 기분이 상해버린 이상. 내가 그걸 만회할 방법은 없었다. 애초에 나는 카이다에게 있어 이미 상종 못할 사람이었다. 이미 끝나버렸다. 속이 좁은 사람을 내가 순식간에 성자로 만들 방도는 없었다.
나나시: …조금도 내 말을 이해할 생각이 없는 거야. 카이다?
카이다 쿠로하: 그래. 없어. 병신아.
거들먹거리려는 건 아니지만, 나는 카이다에게 기회를 주려고 애썼다. 카이다 본인이야 내 기억을 지우려 들었으면서 무슨 선심 쓰듯이 말하냐며 펄펄 뛰어대겠으나 나는 정말 캐롤 씨와 같은 것을 보려 애썼다. 길을 잘못 든 어린아이. 그녀에게 믿음과 기회를 주기만 하면 어딘가 달라지리라 아주 잠깐이라도 믿으려 했다.
분명 카이다는 어린아이였고 길이 잘못 들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랬다. 나는 물끄러미 카이다를 바라보았다. 양가감정이 피어났다. 기억을 잃은 자의 동질감과 잔인하기 짝이 없는 부정적 변수를 향한 경계심.
나나시: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봐.
카이다 쿠로하: 무슨 헛소리야. 너?
나나시: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이 많았거든. 잃어야 하는 것과 해야 하는 게 엮여서 어찌할지를 알 수가 없었어. 가까스로 겨우 생각해낸 답은 이거야.
이걸 어찌하면 좋을까? 라는 물음에 떠오른 답은 부드럽지 않았다.
나나시: 너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어.
카이다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들짝 놀란 채 자신의 귀를 가렸다.
카이다 쿠로하: 뭐… 뭐야… 정신 나간 거 아니야…? 지금 나한테 그러겠다고? 마… 말이 안 되는 거잖아… 나… 나 언니 동생이야. 이 개새끼야! 네가 그러고도 언니한테 무사할 것 같냐?! 엉?!
나나시: 끝까지 읊지는 않을 거야. 몸만 굳게 하면 그만이지. 절차를 걸어 놓기만 하고 시간이 지나면 풀어주기를 반복하면 돼. 그럼 아무런 위험 없이. 변수도 없이 너를 이 방에 가둘 수 있어.
카이다 쿠로하: 그것도 말이 안 돼! 지금 네 처지가 어떤지 파악도 제대로 안 되나 본데. 정신 차려야 할 건 너야. 이 병신아! 언니가 그딴 짓을 보고만 있을 리가 없어!
나나시: 확신할 수 있어?
카이다 쿠로하: 당연히 확신하지!
나나시: 어떻게?
카이다 쿠로하: 언니가 내가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랬으니까. 가족이라고 했으니까! 너는 아니잖아. 너는 그냥 뒤늦게 굴러온 돌이야. 하지만 나는 언니랑 고아원에서부터 함께 있었다고. 그게 가장 큰 차이지! 응!
카이다는 스스로의 말에 설득된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나시: 맞아. 그건 정말 큰 차이야. 그 사실이 그녀와 나의 시선을 갈라놓는 것일 테지. 캐롤 씨가 보는 건 치나미라는 사람이고, 내가 보는 건 카이다 쿠로하니까. 캐롤 씨는 너라는 사람의 내면에 여전히 그녀의 동생이 있다고 믿어. 고아원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떼어낼 수 없는 자신의 인연을 가진 사람이 카이다 쿠로하라는 이름의 흑요석 기둥 안에 갇혀 있다고 여기지. 그리고 그녀가 할 일은 흑요석을 깨 안에 있는 사람을 꺼내는 거라고.
나나시: 그건 사실이 아니야. 사실이란, 네가 흑요석 기둥일 뿐이라는 거야. 깎아내 봤자 그 안에 사람은 없어. 아무리 사람과 비슷하게 깎더라도 그건 사람 형태의 흑요석이지.
카이다 쿠로하: 마… 말도 안 돼… 지랄 마… 네가 그럴 수 있을 리가…
인공지능이 카이다를 감시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 당시 우리에게 가장 나은 방안이라는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줄곧 단 한 마디 말로 카이다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안 했냐고? 캐롤 씨의 동생이라니까.
카이다 쿠로하: 언니가 너를 미워할 거라고! 야! 적당히 해. 일러바치… 지 않을 테니까. 적당히 하라고! 야! 이게 말이나 돼?! 정신 나갔어?!
나는 이제 그런 핑계를 대고 싶지는 않았다.
나나시: 물론 미움을 사겠지. 단 하나의 가족이니까. 하지만 결국 나는 지금까지 너를 비호해 왔어. 나는 또 누군가가 내가 할 일을 대신하게 만든 거야. 그건 비열해. 그리고 나는 내가 더 비열해져야만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어. 적어도 너에게서는.
나는 온갖 일을 겪은 후에 캐롤 씨를 되찾았다. 그녀를 아끼고 있다. 그녀가 죽음의 마수에서 벗어나 서서히 안정을 되찾기를 바랐다. 카이다가 그 일에 도움이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다를 잠재울 가장 나은 수단을 가지고서 "아. 나는 캐롤 씨를 걱정하기 때문에 카이다를 내버려둬야만 한다" 라고 하는 것은 천하고 또 못나기가 짝이 없는 일이었다. 만약 카이다가 또 같은 방식으로 캐롤 씨와 나를 방해하다가 영영 마유즈미를 구할 수 없게 된다면, 나는 탄식하게 될까?
"아! 카이다가 일을 망쳤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나는 캐롤 씨의 여동생을 막을 방법이 있었지만 캐롤 씨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
그렇게는 도무지 못 하겠다. 나는 카이다가 얼마나 일을 망치고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봤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는데 카이다는 기어코 캐롤 씨와 나를 방해했다. 이걸 내버려 두는 건 공범이나 다름이 없었다.
카이다 쿠로하: 아… 아니야! 나는 괜찮다고 생각해! 괜찮아. 괜찮다고! 너 자신한테 좀 착하게 굴어 봐봐! 응?!
제츠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말해줄 사람?
나는 인공지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기야 말 몇 마디로 사람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릴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리라. 그녀가 보기에 나는 겁도 없이 카이다에게 반항해 대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었겠지.
나나시: 카이다의 약점을 잡아서 후벼 파고 있어.
제츠보: 뭐…?
카이다 쿠로하: 제. 제츠보! 이 새끼 좀 말려 봐! 얘가 나를 죽이려고 해!
인공지능은 나와 카이다의 대답을 연달아 듣고 나서도 우리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도.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면 어려워졌다.
제츠보: 나나시가 너를? 어떻게? 자세히 말해 봐.
나는 자세히 말하는 대신 카이다의 몸을 멈춰 버리려고 했다. 그야 카이다가 그냥 캐롤 씨한테 미움 살 작정으로 내 몸에 칼을 던지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인공지능 또한 경위를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간에 그녀는 번거로운 일을 떠맡았으니까.
나나시: …알겠어. 너에게만은 들려줄게. 카이다는 특정 순서로 특정 낱말을 연달아 들으면 몸이 마비되고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려.
카이다 쿠로하: 야아아아악! 씨발!
카이다는 제 품에 손을 집어넣으려다가 그랬다가는 자신의 귀를 막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듯 헉 숨을 들이마셨다. 결국 그녀는 다시금 귀를 막았다. 조마조마하게 입술을 짓씹으며.
제츠보: …무슨 세뇌당하는 것처럼?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린다는 건 과장이 좀 심하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제츠보: …뭐야. 진심이야? 카이다가 정말 굳어 버린다고? 말 몇 마디로?
나나시: 나는 언제든지 카이다를 행동 불능으로 만들 수 있었어. 그러니 내가 너로 하여금 여태껏 카이다 보모 노릇을 하게 만든 거야.
제츠보: 생각해 보니 그렇네. 대체 왜 진즉 쓰지 않고… 아니지. 결국 캐롤이 막았을 텐데…
나나시: 하지만 이제 끝이야. 곧 모든 이들이 카이다에게서 풀려날 수 있어.
카이다는 인공지능에게 그게 엄살이 아니라며 항변을 할까 아니면 오리발을 내밀며 내뺄까를 정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했다. 인정하면 자기 약점이 드러나고, 인정하지 않으면 좀 막아 달라는 말을 못 한다. 하지만 결국 카이다는 마음을 정했다.
카이다 쿠로하: 나. 나 좀 도와줘! 제츠보! 좀! 이 새끼야! 너도 나랑 같이 지낸 지 쫌 되잖아! 이대로 내가 너랑 지냈던 것도 다 잊어버려야 속이 시원하겠어?
인공지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츠보: 그럴 것 같은데. 애초에 나는 너와 지낸 몇 안 되는 시간 중 좋은 기억이 조금도 없어. 적당히 미워야지.
카이다 쿠로하: 그. 그럴 수가! 안돼! 도와줘! 야! 이런 개새끼야! 다 한 통속이네. 이 나쁜 새끼들! 배신자들아! 용서 안 할 거야! 나쁜 개새끼들!
인공지능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제츠보: 하아… 내가 왜 또 이런 바보 같은 일에 휘말려야만 하는 거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야. 머리라고 부를 것도 없는데.
나나시: …미안해. 하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휘말릴 필요가 없을 거야.
제츠보: 잠깐. 잠깐 기다려 봐. 나나시. 내가 쟤를 싫어하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너도 뒷감당이 되는 일만 해야 해. 생각이라는 걸 하고는 있어?
나나시: 당연하지. 카이다를 걸어 잠그는 게 급선무야. 내가 이 절차의 시행 방법을 알고 있는 이상 나는 더 이상 카이다를 방치할 수 없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제츠보: 당연하긴 무슨. 너. 캐롤이 카이다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아차릴 때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하루도 안 걸릴 거야. 그 절차라는 걸 걸면. 너만 풀 수 있는 거야?
나나시: 아니. 캐롤 씨도 풀 수 있어. 캐롤 씨는 이미 기억이 다 지워지기 직전의 카이다의 마비를 풀고, 카이다를 영안로 안에서 구출해 냈지.
카이다는 내 말을 듣고 열의에 찬 채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다 쿠로하: 맞아! 하루도 안 지나서 언니가 나를 풀어주러 올 거야! 이 병신아! 네가 이래 봤자 다 의미 없단 말이야!
카이다는 의기양양해진 채 소리쳤다. 그녀는 이미 살길이 훤히 열렸다는 듯이 내게 동의했다. 그와 동시에 나를 규탄했다. 인공지능은 고개를 저었다.
제츠보: 그럼 정말 의미가 없는 일 같은데… 카이다를 움직이지 못하게끔 막는 건 찬성이야. 하지만 그 뒤에는 뭘 어쩌려는 건데? 이제 와서 카이다를 얼려 버리면 캐롤이 어떻게 나올 것 같아?
나나시: 풀어주러 올 거야. 하지만 카이다의 방문만 잘 닫아도 침입은 막을 수 있어. 캐롤 씨는 문을 딸 줄 모르니까. 그렇게 감금하는 동안 캐롤 씨와 카이다 사이의 접촉만 막으면 돼.
제츠보: 말은 쉽네. 너. 이런 짓을 하고도 캐롤한테서 미움을 안 살거라 생각하는 거야? 설득할 자신이 있는건지 뭔지… 캐롤이 카이다 대신 너를 택하기라도 할까 봐?
나나시: 이미 캐롤 씨는 선택을 했어.
제츠보: 이미?
나나시: 이게 대답이었지.
나는 붉게 달아오른 뺨 한쪽을 가리켜 주었다.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아주 많이 가진 뒤. 정말 많이 가진 뒤. 나는 채비를 갖추고 캐롤 씨를 찾아갔다. 그녀는 전용실 안에 있었다. 나와 캐롤 씨는 작은 테이블을 하나 사이에 둔 채 자리에 앉았다.
나나시: 몸이 아프지는 않으세요? 그 정도 세기의 터치를 오래 유지하셨는데.
캐롤 브라이트: 피곤한 게 다예요. 저는 오히려 나나시 씨가 걱정이 돼요. 저야 터치를 원래 타고났지만… 나나시 씨는 아직 터치를 깨우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 걸요.
나나시: 당신만큼 피곤하지는 않아요. 저는 결국 추가 출력 장치일 뿐이었으니까.
캐롤 브라이트: 추가 출력 장치라는 표현. 들으면 들을수록 재밌네요… 기계를 자주 다루셔서 비유에도 공학적인 지식이 발휘되나 보죠?
나나시: 아… 듣고 보니 그렇네요. 사람한테 쓰기에는 좀 이상한 비유였는데 이상한 줄도 몰랐어요.
캐롤 브라이트: 각자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걸 어떻게 말할지를 생각할 테니까요. 저라면 도우미라는 말을 쓰고, 히무로 씨라면 조수라는 말을 쓸 거고. 치나미라면… 아랫사람이라는 표현을 쓰려나요?
나나시: 카이다는 그렇게 상냥한 말을 쓰지 않아요.
캐롤 브라이트: 상냥하다뇨? 아랫사람은 이미 꽤 폄하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잖아요. 치나미는 더 나쁜 말을 쓰나요?
나나시: 아마 따까리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까 싶네요.
캐롤 브라이트: 아하하!
피곤에 찌들어 테이블에 팔을 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잠시나마 밝아졌다. 웃기려는 의도를 담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웃어 주었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분명 즐거웠다. 짧은 평화였지만 아무튼 이것은 평화가 아닌가.
살인의 동기라고 하던 광자 상영기는 그저 기억을 보여줄 수 있을 뿐. 별반 악용할 여지가 없었다. 해변이나 영안로처럼 탑에 있는 이들이 서로 헤어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히무로와 캐롤 씨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평화다. 평화. 내가 그렇게 바라던 것. 아무도 죽을 필요가 없고 캐롤 씨는 내 곁에 있었다. 그 사실이 나는 분명 기뻤다. 기뻤지만… 나와 그녀는 아직 짚어야만 하는 이야기를 남겨 두고 있었다.
나나시: 카이다는 대체 왜 그랬을까요?
적절하지 않은 순간의 적절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안 그래도 카이다 때문에 잘 되던 일이 엎어져 버렸는데, 안 그래도 심란한 캐롤 씨의 정신을 후벼 파는 일이 될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믿을 뿐이에요.
나나시: 이유가 있는 게 더 나쁜 일이겠죠. 경솔하고 참을성이 없어서 그렇게 날뛴 거라면 어떻게든 참게 만들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유가 있어서 훼방을 놓았다면 그건 카이다가 마유즈미의 구출을 앞으로도 방해할 거라는 뜻이니까요.
캐롤 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대답할 만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게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나시: 차라도 가져 올게요.
캐롤 브라이트: 방금 끓여둔 게 있으니까 저 주전자만 가져 오세요.
나나시: 네. 혹시 우유 있어요?
캐롤 브라이트: 저쪽 구석에 있는 냉장고 안에 있어요.
나는 캐롤 씨가 가르키는 방향을 따라 냉장고의 안에서 우유를 꺼냈다. 그리고 냉장고의 무게가 사람 한 명이 홀로 옮길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지 확인했다.
냉장고는 충분히 무거웠다. 나는 그 안에서 우유 한 팩을 꺼내고 아직 따뜻한 주전자를 반대 손에 쥐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정적 속에서 차를 마셨다. 홍차에 우유를 섞으면 맛이 부드러워진다고 들었지만, 나는 차 맛은 거의 느끼지도 못했다. 캐롤 씨의 대답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캐롤 브라이트: …따끔하게 혼을 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너무 오냐오냐 봐주기만 해서 그런 걸까요?
나나시: 카이다는 정서가 불안하니까, 꼭 편을 들어주는 게 잘못된 건 아니죠. 적어도 캐롤 씨만큼은 적이 아니라는 게 확실하니. 더 이상 모노로그를 위해 움직이지도 않을 거고 캐롤 씨가 원하지 않는 일은 카이다도 좀처럼… 하지 않을 테니까요.
좀처럼. 좀처럼이 붙었다. 바로 직전에 그 반례가 나왔기 때문에 나는 그 무엇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캐롤 씨도 카이다를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카이다는 애완동물이 된 유해조수였다. 입마개를 채우고 목줄로 끌어대도 원래 하던 일을 계속 하는 맹수. 그러니까 자기보다 약한 놈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죽이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을 탑의 거의 모든 이들이 목도했다.
캐롤 씨는 홍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아무래도 목이 타는 것처럼 보였다.
캐롤 브라이트: 하아… 당분간은… 얼굴을 보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요. 저는 치나미에게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 주려 했어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해도 저 하나만큼은 믿어 줄 거라고요. 그런데 치나미는 정반대로 받아들인 것 같아요. 제가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카이다는 일을 다 망쳐 놓았다. 하지만 이게 꼭 처음은 아니었다. 카이다는 진즉 미도리카와 살인의 현장을 어지럽혔다. 모리와 나이토가 중상을 입게 만들었다. 또 나를 납치해 영안로 안으로 끌고 들어가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피 튀기는 전적에 비해 고성방가를 통한 방해공작 정도야 귀엽다. 하지만 캐롤 씨와 나는 이토록 카이다의 행동에 난처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이제 카이다는 우리 부서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카이다를 책임져야만 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카이다의 설득과 회유였다. 카이다의 안에 있다는 그 고통받는 어린아이에게 기회를. 두 번째 세 번째 기회를 계속 준 끝에 그녀가 우리의 손을 맞잡는 것. 분명 그것이야말로 승리였다.
캐롤 씨에게 그것 말고 다른 길은 없었다. 동생이니까. 자매니까. 함께 가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글쎄.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나나시: 이 의식이 매일매일 이어질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에요. 이게 마지막 시도일 수도 있었어요.
당장 내일 시라유키를 찾아갔을 때 시라유키가 마법처럼 터치에 저항할 방식을 개발해 냈으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이루어질 수 있었던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터였다.
캐롤 브라이트: 분명 그렇지만… 그럼에도 다음 시도는 있을 거에요. 저는 내일이면 다시 기력을 되찾을 거고. 나나시 씨도 저를 도와주실 거잖아요. 히무로 씨도…
나나시: 그리고 카이다 또한 찾아올지 모르죠.
캐롤 브라이트: 다음 시도에는 치나미를 방에 두지 않으면 돼요. 그럼 괜찮아요.
나나시: 괜찮지 않아요. 카이다는 또 방해하겠다고 으름장을 놨거든요. 그건 속빈 말이 아니었어요. 저는 알아요. 카이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걸 위해서 뭐든 할 수 있어요. 창문을 깨고 탈출해서 인공지능과 추격전을 벌이든지. 미리 저나 히무로를 해쳐 두던지. 혹은 시라유키 자체를 해칠지도 몰라요.
캐롤 브라이트: …그러지는 않을 거에요. 치나미도 그저 변덕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일 테니. 제가 미리 잘 말을 해 두면 분명 들어 주겠죠.
나는 캐롤 씨의 말을 믿고 싶었다.
믿고 싶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나나시: 히무로의 안에서 마유즈미라는 존재가 작아지기 전까지 저희는 마유즈미를 구해내야만 해요.
캐롤 씨는 내가 못할 말을 한 것처럼 입을 벌리고서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못할 말이기는 하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마치 히무로 씨가 마유즈미 씨를 잊을 것처럼…
나나시: 잊지는 않을 거예요. 히무로는 모든 걸 기억해서 힘들어하는 사람이니. 다만 마유즈미를 최우선의 목표로 놓느냐. 그게 아니라면 대의를 위해 눈물을 머금은 채로 정신조작 보유자들과 카이다를 잡아들여. 정의를 바로 세우는 대신 마유즈미를 포기하느냐가 되겠죠. 히무로는 마유즈미를 그의 마음에 묻은 채로 터벅터벅 걸어갈 거에요.
캐롤 브라이트: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히무로 씨가 그렇게 냉혈한으로 보이시는 건가요?
나나시: 아뇨. 냉혈은 피가 차게 식는 경험을 한 누구나 잠깐 겪을 수 있는 거고. 히무로는 철혈이에요. 그건 차라리 피라기보다 생물과 같지 않은, 목표 달성을 위한 기계적인 사람이죠. 모리와 같지만 히무로의 철혈이 더 짙어요. 저는 히무로가 안전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총에 맞아본 이래 쭉 그랬어요.
나는 캐롤 씨의 전용실 구석에 있는 냉장고를 한 번 돌아보았다.
나나시: 잠시 따라와 주실래요? 보여드릴 게 있어요.
캐롤 브라이트: 저쪽에요? 뭐가 있어요? 제가 없는 사이에 생쥐라도 생긴 건 아니죠?
캐롤 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까지 나를 따라왔다.
나나시: 쥐를 무서워하시는 줄은 처음 알았네요.
캐롤 브라이트: 무서워하기보다는 미워하죠. 자고 있다가 생쥐한테 코 물리면 죽도록 아프거든요. 발 물려도 죽도록 아프고요. 그래서. 보여드릴 게 뭔가요?
나는 캐롤 씨가 냉장고의 앞까지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에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아쉬웠다. 정말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이래야만 한다.
나나시: 마지막으로 같이 차를 마셨다면 그것으로 됐어요.
캐롤 브라이트: 네? 무슨 뜻이에요. 그게?
나나시: 캐롤 씨. 지금부터 제가 할 것은 설득이 아니라 통보예요.
그리고 나는 통보를 하기 전 내 왼팔 소매에서 수갑을 꺼내고. 그것을 캐롤 씨의 왼쪽 손목에 채웠다. 수갑의 반대편은 냉장고의 손잡이에 채워졌다. 철컥.
제츠보: 캐. 캐롤을 배신하고 지금 여기로 온 거야? 나나시. 너 제정신이야?!
나나시: 배신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아. 나는 여전히 캐롤 씨와 함께해. 카이다에 한해서는 입장이 다를 뿐이야.
카이다 쿠로하: 뭐…? 잠깐. 그럼 언니 말을 이제 안 듣는다 이거야? 잠깐! 어. 어이…
제츠보: 캐롤이 이런 일을 받아들일리가 없어. 나나시! 캐롤이 안 따라온 거만 해도 천만다행인 줄 알아. 애초에 걔는 왜 안 따라온 건데?
나나시: 누가 못 따라오게 막아 뒀으니 못 따라오는 게 아닐까?
내 말을 듣자 카이다는 어딘가 불안한 기색을 감지한 듯. 곧장 눈을 부릅뜨고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카이다 쿠로하: 야. 야야야야! 야아아아악! 우리 언니 어떻게 했어! 지랄하지 마.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개새끼야! 우리 언니한테 뭐 했냐고!
나나시: 캐롤 씨는 무사하니까 걱정하지 마. 카이다. 나는 네 좁은 마음이 가능한 것보다 더 크게 그녀를 담고 있으니.
카이다는 이를 득득 갈아댄 끝에 끼리릭거리는 소리를 냈다. 강화된 이빨이 서로 맞물리며 내는 금속의 마찰음과도 같은 그 소리가 다시금 내 귓가를 찔러댔다.
카이다 쿠로하: 크으으으윽…!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씨발 언니한테만은 솔직한 새끼인 줄 알았더니 역시 씹변태 배신자 놈이었어! 씹쌔끼!
나나시: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보다 더 나은 방도는 떠올리지 못했어. 카이다. 네가 그렇게 행동하지만 않았어도 많은 게 달라졌을 텐데. 너는 앞으로도 원하는 곳으로 발을 옮기고 캐롤 씨와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정말 안타까워.
카이다는 순간 솔깃함을 느낀 듯 이빨 갈기를 멈추고 대신 내게 질문을 던졌다.
카이다 쿠로하: 저… 정말이야?
나나시: 그럼 당연하지.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한다고 생각해? 나도 다른 방도가 없었어. 너를 내버려 둔다면 앞으로도 마유즈미가 돌아오는 일을 방해하고 우리를 더 큰 위협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에 이래야만 했다고. 오늘 네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더라면 너에게 또 기회를 주었을 텐데. 어떤 이유이든 간에 너도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하니 너를 마비시킬 수밖에.
카이다 쿠로하: 자. 잘 됐다! 그렇다면 있잖아. 나도 또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한 거거든! 사실 앞으로도 그러려고 했는데 네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어! 꼭 이럴 필요가 없다고… 야 이 새끼야. 내 말 안 들려?! 네 말대로라니까! 이렇게 될 필요가 없었잖아? 그렇잖아?! 나한테도 또 기회가 내려올 수 있었잖아!
나나시: 아니. 그렇지 않아. 하지만 입 발린 말은 해 줄 수 있지. 어차피 굳어버릴 사람인데.
카이다는 내 말에 배신감이라도 느끼는 듯 얼굴을 구겼다.
카이다 쿠로하: 이… 개새끼…! 에이… 그럴 리가 없어… 네가 미쳤다고 언니를… 너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잖아… 야…!
카이다가 불길함과 불신을 동시에 느끼며 공포에 찬 웃음을 지을 즘. 인공지능은 내게 말했다.
제츠보: 나나시. 이런 짓을 저질렀다간 캐롤과 카이다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립되고 말 거야. 카이다의 편을 드는 사람이 캐롤 뿐일 테니까! 우리가 적대적일 수록 캐롤이 정신조작을 쓸 확률도 높아질 테고!
나나시: 캐롤 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마.
인공지능은 내 말을 듣고 나를 무척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제츠보: 캐롤을 가장 많이 생각하는 건 너잖아. 나나시.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나시: 캐롤 씨가 카이다 쿠로하를 내버려 둘 이유가 될 수는 없어. 그건 오히려 그녀를 향한 모욕이야. 오직 카이다 쿠로하에 대해서만 생각해 봐. 나머지는 조금도 신경 쓰지 마.
제츠보: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겠어.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나나시: 아니. 간단한 문제야. 이런저런 주석과 서문을 붙일 필요가 없어.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데에 모든 맥락을 고려하다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니, 단 하나만을 생각해. 카이다 쿠로하에게 과연 기회를 한 번 더 주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카이다 쿠로하: 야…! 야! 나나시 좀 막아! 알겠어! 알겠다고! 앞으로 안 할 테니까 나 좀 도와줘! 나. 나 몸을 못 움직이게 되는 건 싫어! 야! 내 말 좀 들어!
나나시: 아니. 카이다는 또 우리를 비웃고 말 거야. 지금까지 봤다면 너도 알잖아. 캐롤 씨마저 카이다를 바꿀 수 없어. 카이다 본인이 변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우리만의 방법을 써야 해!
카이다 쿠로하: 아. 아니야! 변할게! 나도 변할 수 있다고! 미… 믿어 줘…! 부탁이니까 제발!
인공지능은 나와 카이다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피곤하기 짝이 없게 된 얼굴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제츠보: …좋아. 너희들이 서로 반대되는 요구를 하니까 뭐를 골라야 할지 감이 안 잡히네. 나는 선택하기 싫어. 이 일에 더 엮이고 싶지 않아. 그러니 이렇게 하자. 카이다. 대체 왜 마유즈미의 숙소 안에서 훼방을 놓았는지 네가 직접 말해. 그것도 모른 채로 너를 얼려버리지는 못하겠어.
카이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카이다 쿠로하: 그… 그건…
제츠보: 그것만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네가 다음에도 그런 짓을 하지 않게끔 막을 수 있어. 나나시와 캐롤이 함께 있는 게 싫다면 나나시를 뺄 거야. 남들이 주변에 있는 게 싫으면 그냥 너랑 나만 다니면 돼. 그런데 우리는 모르잖아. 아무것도 안 알려주니까! 그걸 말하는 게 첫걸음이야. 그러니까 말해!
카이다 쿠로하: 그… 그 이유만큼은 도무지 언니한테는…
나나시: 시간 낭비야. 시작한다.
카이다는 절박한 표정을 지은 채. 툭 하고 말을 꺼냈다.
카이다 쿠로하: 언니를 빼앗기기 싫어서 그랬어!
나는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닫았다.
카이다 쿠로하: 내 어… 언니는 소중한 게 많아 보여서… 그리고 나한테는 그런 게 없어서 그랬어! 언니한테 나보다 소중한 게 생길 까봐… 나를 영영 떠나버릴 까봐 무서워서 그랬다. 왜! 이제 됐냐?! 됐어? 이제 속이 시원하냐고!
제츠보: …정말 그게 다야? 더 말해 봐.
카이다 쿠로하: 뭐? 충분히 말했잖아! 왜 내가 더…
나나시: 더 말해.
카이다는 더 말했다.
카이다 쿠로하: 나… 나나시 너는 괜찮아. 상관 없어. 니가 여자는 아니잖아. 그런데 마유즈미 걔는 달라. 걔는 나보다 더 언니 여동생 같단 말이야! 그러니까 방해하고 말 거야. 됐냐?!
나나시: …외부적으로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마유즈미가 돌아오는 일 자체에 불만을 가졌다는 거군. 이래서야 마유즈미가 다시 돌아와도 네가 마유즈미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어.
제츠보: 잘 들었어. 카이다. 좀 진실된 말처럼 들리네. 여전히 네 목적이 위험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걸 인정했다면 너도 달라질 수 있게 돼.
카이다 쿠로하: 어떻게? 나한테는 계속 언니 뿐일 텐데. 앞으로도 계속…
제츠보: 캐롤한테만 얽매이지 않으면 더 나아질 테지. 내가 계속 말했잖아. 빌어먹을 친구 좀 사귀어. 카이다. 언제까지 네 언니한테 들러붙어 있지 말고 다른 사람이랑 어울리라고.
카이다 쿠로하: 그럼. 혹시 네가 나랑 어울려줄 거냐?
제츠보: 아니. 미쳤어? 나를 더 잘 대접하지 않는 이상 어림도 없어. 카이다. 제정신 차려. 상냥하게 대하라고. 친구처럼.
카이다 쿠로하: 나. 나한테는 그런 거 없어. 몰라. 이 새끼야.
나나시: 그래서. 어떻게 할까? 써. 말아?
카이다 쿠로하: 쓰. 쓰지 마!
제츠보: 나는 사실 카이다 하나만 놓고 보면 쓰는 게 맞다고 생각해. 얘가 무슨 이유를 가지고 있던 간에 우리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잖아.
카이다 쿠로하: 그럴 수가…! 야! 이 나쁜 것들아!
제츠보: 하지만 카이다가 그딴 식으로 행동한 이유가 나온 이상. 그 이유의 요인을 고치면 더 이상 날뛰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얘는 짐승이야. 나나시. 그러니까 오히려 시간을 들여서 지켜봐야 해. 그래야 길들일 수가 있어.
나나시: 짐승을 마비시키면 그것으로 그만 아니야? 너도 더 이상 카이다와 부대끼고 싶지 않잖아.
제츠보: 나를 편히 쉬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내가 예전에도 비슷한 말 하지 않았나? 나는 원래부터 잠 안 자고 사람 감시하는 걸 업으로 삼아왔어. 미도리카와도, 후루미나미도 전부 내가 감시했다고. 그러니까 굳이 마음 쓰지 말고 네 일이나 잘 해.
나는 그녀의 말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상관 없다면야 내가 더 왈가왈부 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카이다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제츠보: 카이다. 네가 너 스스로를 찾아내지 않으면, 찾아내서 구하지 않으면 결국 여기 있는 나나시가 네 몸을 꽁꽁 얼려 버릴 거야.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지? 잘 하란 말이야. 잘 좀.
나는 인공지능의 반응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나시: …운 좋은 줄 알아. 카이다. 네 주변에 이토록 좋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너는 천만의 다행으로 여겨야만 해.
카이다 쿠로하: 그. 그 말은…
나나시: 그래. 안 쓴다. 배심원한테 감사해.
수갑을 채운 직후 나는 내 경솔함에 큰 후회를 느꼈다. 왼손 중지가 잘려나가고,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사람의 왼손에 수갑을 채우다니. 큰 실수를 저질렀다. 심지어 이미 묶어버린 이상 돌이킬 방도도 없었다.
캐롤 브라이트: 이. 이게 뭐예요?! 수… 수갑?
나나시: …네. 당신이 제 통보를 듣는다면 반드시 저를 막으러 올 것 같아서요. 곧 풀어주러 올게요. 상처가 덧나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또…
캐롤 브라이트: 곧 풀어준다니… 잠깐… 이 수갑은 어디에서 가져온 거예요? 제 침대 밑을 뒤졌어요?! 어느 새에! 어떻게 그럴 수가…!
캐롤 씨는 배신감에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 반응만큼은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그녀가 배신감을 느낀 사항은 내가 예상한 바에 있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믿을 수가 없어요! 이런 짓을 하다니! 사람 간의 존중도 없어요?! 숨기고 싶어서 숨긴 건데 이런 비밀을 파헤치고…! 정말 실망이에요! 어떻게…! 진짜 미친 거 아니에요?! 사람 간의 예의가 아니잖아요! 설마 상자 안의 다른 것들도 봤어요?! 아니. 분명 봤겠죠…! 아아…! 믿기지가 않아! 제가 이러라고 당신을 방에 들인 게 아니라고요! 이런 짓을 하다니…! 남 사생활을 뭐 하러 뒤지고 다녀요? 당신 순 변태 아니야?!
나나시: 저… 침대 밑이라뇨…? 크레딧 상점으로 시켰어요. 크레딧 상점에는 온갖 게 다 있잖아요. 저희가 물과 터치를 써 후루미나미 보급 특권을 빼앗았을 때도 크레딧 상점에서 시킨 수갑을 썼죠.
캐롤 씨는 전례 없이 화를 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얼굴이 귀까지 온통 새빨개졌다. 그녀는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다가 나의 말을 뒤늦게 머릿속에서 처리한 듯. 조심스럽게 내게 질문을 던졌다.
캐롤 브라이트: …크레딧 상점에서 가져온 수갑이라고요?
나나시: 네. 그곳 말고 달리 수갑을 구할 곳이 없죠.
캐롤 브라이트: 아… 아아.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요… 아. 그렇구나… 크레딧 상점에서 산 거구나… 다시 보니까 디자인이 다르기는 하네요. 아 이게 아니라. 음. 네… 저… 갑자기 화를 내서 죄송해요. 제가 말이 좀 심했죠? 정말 죄송해요. 순간 당신이… 그… 저도 오해를 조금… 그게…
캐롤 씨는 얼굴을 여전히 붉게 물들인 채 멋쩍은 투로 나의 시선을 피했다. 어투가 보기 드물게도 이러쿵저러쿵 조리없어지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그녀가 어떤 부분에서 오해를 한 것인지도 떠올리지 못했다.
이런 반응을 기대한 게 아니었는데. 덕분에 카이다의 몸을 굳게 만들겠다는 내 본래의 목적이 그녀의 뇌리에서는 잠시 흐려진 것 같았다. 잽싸게 캐롤 씨의 전용실에서 나가 카이다를 얼려 버릴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는 대신 그녀에게 내가 하려는 일을 말하고 그녀가 그 말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게 최소한 공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나시: 영안로에서 카이다가 굳어버린 것을 보셨죠? 저는 다시금 카이다의 몸을 마비시키러 갈 생각이에요. 앞으로도 쉽게 통제할 수 있도록.
그러자 캐롤 씨는 잠시 빠져버린 그녀 자신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나를 향해 몇 걸음을 다가오려 했으나. 그녀의 손목에 차인 수갑이 절그럭거리며 그녀를 당겨댔다.
캐롤 브라이트: 아… 안 돼요. 나나시 씨. 그건 안 돼요! 제 동생이라고요! 절대 안 돼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당장 멈춰요!
나나시: …역시 용서받을 수는 없군요. 미안해요. 기억은 지우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문을 향해 걸었다. 그러자 등 뒤에서 캐롤 씨의 목소리가 울렸다.
캐롤 브라이트: 잠깐! 당신 지금 어디 가요?! 어디에 가는 거냐고요!
나나시: 카이다를 마비시키기 위해서 카이다의 숙소로 가요.
캐롤 브라이트: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요…? 제가 무슨 말하는지 아시잖아요.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건데요! 제가 잘 타이르면 되잖아요. 그러실 필요가 없어요!
나나시: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려면 폭풍이 아닌 햇살을 써야 한다고 하죠. 당신은 분명 따스한 햇살이지만. 카이다에게 불쾌함을 주지는 못해요. 카이다는 소용돌이에 휘말려야지만 남을 해치지 않게 될 사람이니까.
캐롤 씨는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수갑을 계속 절그럭거렸다. 손목에 자국이라도 남을까 걱정이 되었다. 수갑에 고무링이라도 덧대서 자국이 안 남게끔 만들 걸 그랬나.
캐롤 브라이트: 누구도 제 동생을 그런 식으로 대할 수는 없어요…! 불구로 만들 수도, 몸을 마비시킬 수도 없어요! 미워할 거예요. 나나시 씨! 미워할 거라니까요…! 왜 제 말을 안 들으시는 거예요?!
나나시: …캐롤 씨. 이건 저희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저는 카이다를 가장 효과적으로 억제할 방도를 알고 있어요.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에게서 받게 될 미움이 뼈아프지만. 그것을 핑계로 삼지는 않을 거에요.
캐롤 브라이트: …이해가 안 돼요. 믿기지가 않아. 당신은… 당신은 제 편이잖아요! 어떻게 이렇게 쉽게 배신할 수가 있어요?
나나시: 네. 저는 여전히 당신 편이에요. 카이다 편이 아니라.
캐롤 브라이트: 둘은 똑같아요! 당신과 치나미야말로 저를 이루는 반쪽이라고요. 왜 하필 당신이 치나미를. 아아…! 싫어요. 이런 건 싫어요! 부탁하건대 다시 생각해 주세요. 제발요! 차라리 저와 함께 가요. 치나미는 제 말을 듣잖아요!
나는 고뇌했다. 너무 듣고 싶은 말이었다. 당장이라도 나는 캐롤 씨의 수갑을 풀고 듣고 보니 당신 말이 맞는 것 같다. 당신을 생각하니 차마 그럴 수가 없겠다. 이제 같이 손을 잡고 카이다를 찾아가 열심히 타일러 보자. 분명 카이다도 마음을 다해 이야기하면 들어줄 것이라며 희망찬 미래를 그리고 싶었다. 듣기 좋고 그리기도 좋았다.
카이다가 조금이라도 착했다면 그럴 수 있었다. 카이다가 본인의 언니 말만큼은 잘 듣는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카이다가 달라졌다면 이럴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진실은 그것과 많이 달랐고. 진실이란 누구도 카이다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캐롤 씨의 말이 달콤한 만큼 나는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나나시: 당신에게 큰 상처를 남기게 되겠죠. 뼈아픈 배신이라고 느끼겠죠. 분명 카이다의 자리에 당신이 있었다면, 제가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카이다의 자리에는 카이다가 있어요.
나는 단지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
나나시: 이 결정이 당신에게 안전한 미래를 가져다주기를 바랄 뿐이에요. 히무로에게 사냥당하지 않을 미래를…
캐롤 브라이트: 제 안전을 위해서 저를 배신하시겠다고요…? 안 돼요! 치나미와 저는 이제야 다시 만났다고요. 도무지 저는 치나미를 저버릴 수 없어요! 절대로! 나나시 씨…! 이렇게 급하셔야만 하나요? 지금까지 저희가 함께해 온 건 어떻게 돼요? 이렇게 잃어버리려고 저를 되살린 게 아니잖아요!
내 몸이 한 번 움찔거렸다. 나는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캐롤 브라이트: 저를 다시 보고 싶으셨잖아요! 치나미에게 납치당하셔서. 저와 관련된 깨달음을 따라 또 고초를 겪고… 다크닝에 노출되고. 총에도 맞아가면서까지 저를 되살리셨잖아요.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죽을 뻔했어요. 당신! 저와 하지 못한 모든 것을 다시 하기 위해서 저를 구하러 온 거였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저와 헤어지겠다고요? 그럼 그 고행이 다 무슨 의미에요. 백치인가요? 당신 바보 성자예요?
나나시: 비루한 이생(異生)이죠.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거를 알고서 이러는 거니까. 그리고 저는 당신과 다시 살고 싶어서 당신을 살린 게 아니에요. 저는 영락 없이 제가 죽을 줄 알았거든요. 저는 당신이 다시 살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이었어요. 언제나.
캐롤 브라이트: 알고서 이런 짓을! 알면서…! 그냥 그거 하나로 만족한다니. 그리고. 아니. 당신은 아직 이해를 못 했어요. 당신이 저에게 있어서 무엇인지를… 저는 당신과 만나서 묻고 싶었어요. 왜 그날 나를 구했느냐고! 도대체 누구길래 나를 구한 거냐고 묻고 싶었어요! 그게 나의 파괴되지 않는 것이었다고요!
캐롤 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눈을 잠시 질끈 감았다. 다시 떴을 때. 그곳에는 여전히 고통을 느끼는 그녀가 있었다. 수갑을 절그럭거리는… 눈물을 그렁그렁 떠올린 그녀가.
캐롤 브라이트: 저를 사랑하시잖아요… 이 일에 저희의 사랑을 저버릴 만한 가치가 있는 건가요?
내가 캐롤 씨에게 하지 않은 말이 있다면 내가 사랑을 저버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쉽게 배신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도 다 철회하고 눈을 가려버린 채 그저 내가 가진 것에 몰두하고 싶어 일분 일초 고뇌하고 안달을 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사랑이 이 일을 충분히 견딜 만큼 강하다고 믿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그녀가 이해해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나 자신만의 믿음이란 이기적인 믿음이었다.
그런 것을 누군가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다. 입 밖에 내어서도 안 된다.
변명은 필요없다. 나는 캐롤 씨에게 유일한 여동생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게끔 만들 것이다. 어디로도 갈 수 없다. 무엇도 붙잡을 수 없다. 누구도 죽일 수 없다. 캐롤 씨가 막으려 한다면 캐롤 씨를 막을 것이다. 마유즈미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
그것은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픈 일이겠지. 모든 애정이 음수에 곱해져 증오로 치환되고 말 테지. 아마도 그렇게 되리라. 하지만 나는 어쩌면 그녀의 사랑이 그 배신감보다 강하리라고 믿고 싶었다.
그리고.
나나시: 제가 사랑하니까 괜찮아요.
캐롤 브라이트: 네…?
나는 이 탑에 처음 왔을 때 나를 도운 사람을 언제나 사랑할 것이다. 설령 그녀가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증오를 내 일신에 보낼지라도… 마유즈미가 되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렇게 히무로가 정신조작 보유자들을 결코 사냥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나나시: 내가 당신 가슴을 찢어 놓은 뒤에도, 우리가 함께하지 않게 되더라도. 나는 당신만을 위해서 지저귈 거에요.
나는 한 마리의 새다. 그리고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태어나려는 자는 자신의 세상을 부수어야만 한다. 나의 세상에는 분명 캐롤 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와 그릴 미래가. 나는 그것마저도 파괴해야만 했다.
나는 소년이 되기를 그만 두어야만 했다.
나의 눈을 들여다본 캐롤 씨는 이윽고 나의 생각을 어떤 방식으로든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자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오른손으로 닦았다. 그리고 내게로 손짓을 했다.
캐롤 브라이트: …보여드릴 게 있으니까. 이리 가까이 오세요.
입장이 뒤바뀌었다. 나는 별 도리 없이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내가 그녀를 한 번 속였으니 나도 그녀에게 한 번 속아주는 것이 공평할 터였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 나는 캐롤 씨가 눈물을 덜 닦았다고 순간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화와 슬픔이 뒤죽박죽이 되어 그녀의 얼굴에 수놓였다. 그것을 보자 나의 가슴이 찢어졌다. 나와 캐롤 씨는 서로를 너무 깊이 들여다보았다. 캐롤 씨의 감정을 측량하는 와중. 그녀의 감정은 곧바로 내게 전이되었다.
나나시: 미안해요.
내가 진심을 다해 그렇게 말하는 동안. 그녀는 오른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나나시: 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버텨내기 위해 비척비척 캐롤 씨의 전용실 안을 돌아다녔다.. 코 안에서 조금 피의 맛이 났다. 캐롤 씨는 여전히 분을 이기지 못한 듯 금색의 머리카락을 자신의 뺨과 목에 치럭치럭 붙인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 하아… 하아…!
사실 내가 각오하고 있던 것은 뺨 한대였다. 굉장히 순진한 각오였다. 미워하는 사람한테 제대로 한 방 먹여주려면 뺨을 치는 게 아니라 얼굴에 주먹을 꽂는 게 정상이다.
중앙에서 조준이 조금 빗나갔을 뿐. 그녀의 손은 내 코와 광대뼈를 제대로 때렸다. 허릿심까지 들어간 손색 없는 한 방의 매. 그것은 사실 내 생각보다 훨씬 매웠다. 턱이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그보다 더 강한 미움이 돌아온다고 생각하면 순간 아찔해졌지만… 이제 나에게는 할 일을 할 때가 돌아왔다.
캐롤 브라이트: 당신… 바보 같아요… 정말 정말 바보 같아요…! 저는 당신이랑 치나미가 있다면, 거기에 마유즈미 씨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더 바랄 게 없었는데…!
나나시: …대답을 들은 셈으로 칠게요. 카이다를 멈추고 다시 돌아올 테니 기다려요.
캐롤 브라이트: 정말 가시는 건가요?
나나시: 네. 정말 가요.
캐롤 씨는 수갑이 채워지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부여잡았다.
캐롤 브라이트: 정말 방법이 없어요. 나나시 씨…?! 꼭 이렇게 되어야만 해요? 치나미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줄 수도 있잖아요!
나나시: 마유즈미를 구출하려는 시도가 좌절될 수 있는 기회를 말인가요? 아니요. 안 돼요. 저는 더 이상 봐줄 수가 없어요. 아무리 캐롤 씨라도 안 돼요.
캐롤 브라이트: 그렇다면… 정말 치나미를 멈춰야만 하신다면. 그 전에 배심원을 한 명만 뽑아 주세요.
나는 걷다가 말고 그녀의 쪽을 돌아보았다. 배심원? 배심원이라고?
나나시: 탑에 있는 사람 중 하나를 지명하여 평결을 맡기자고요?
캐롤 브라이트: 네. 판사와 배심원과 형집행인이 전부 한 명일 수는 없어요. 심지어는 변호할 사람을 묶어두기까지 하고…! 정당하지 않아요! 이 판결이 완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배심원이라도 따로 두어야만 해요!
나나시: 배심원은 유죄가 확실하지 않을 때 무죄로 평결을 하죠. 그렇지만 누가 카이다에게 무죄를 선고하겠어요? 범행 동기조차 말하지 않으려 하는데 한 짓은 명확해요. 심지어 피고인을 중립적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카이다를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요. 마주친 사람 자체가 적은 걸요. 누구도 카이다를 모르기 때문에, 누가 와도 카이다는 유죄가 될 거에요.
캐롤 브라이트: 조금이나마 아는 사람은 있을지도 몰라요.
나나시: 누구요? 히무로? 히무로는 명석하지만 그 명석함은 카이다의 갱생 가능성보다 카이다를 마비시켰을 때의 용이함을 더 높게 칠 거예요. 또 누가 있을까요. 카나리? 카이다의 협박을 받고 나이토의 항생제를 훔쳤죠. 이런 일을 겪었는데 카나리가 카이다에게 무죄를 줄 것 같진 않아요.
캐롤 브라이트: 또 있어요. 이 탑에서 당신과 저를 제외하면 치나미를 가장 잘 알게 되었을 존재… 치나미의 바로 옆에서 치나미를 봐온 존재요. 그분의 판결이라면 저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나시: …그런 사람이라면.
캐롤 브라이트: 제츠보 씨를… 배심원으로 삼아 주세요. 만약 제츠보 씨가 치나미를 마비시키는 일에 동의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제가 나중에 풀어 주러 갈 테니까… 적어도 마유즈미 씨가 돌아올 때까지는 그렇게 해요. 허나 제츠보 씨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경고로 끝내 주세요. 부탁할게요. 나나시 씨.
나나시: 의미 없어요. 서로 머리를 뜯어대며 싸운 데다가 당장 오늘도 서로 부딪힌 두 사람이에요. 인공지능이라면 제 의견에 찬성할 테지요. 지금까지 본 게 있으니…
캐롤 브라이트: 그러나 제츠보 씨가 마주한 건 저를 알게 된 이후의 치나미예요. 저는 믿어요. 치나미가 제 말을 아주 조금은 귀 기울여 들었기를… 그래서 제츠보 씨와 싸우지 않았을 때에는 최소한 자신의 마음을. 인간으로 보일 정도의 마음. 기회를 다시 줄지 말지를 고려할 만한 모습을 보였으리라 믿어요. 부디 그랬기를… 바랄 뿐이에요.
배심원이라. 나와 카이다가 서로 소통하며 나아간 시간은 하루가 채 되지 않는다. 반면 인공지능은 이미 하룻밤 이상의 시간을 카이다와 보냈다. 관찰할 시간이 더 길었고, 인공지능이 관찰한 대상은 디딜 바닥 하나 없이 내던져진 괴물이 아니라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하나 찾아낸.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괴물이었다. 그러니 또 다른 기회를 제공받을 만한 자격의 배심원으로 인공지능이 적절하지도 몰랐다. 그녀의 평결이라면 한쪽의 방향으로 치우친 나와 캐롤 씨의 평결보다 정당하리라. 분명 그렇지만…
나나시: 인공지능한테 이 책임을 떠넘기는 건 옳지 않아요. 캐롤 씨. 이 결정에는 카이다가 이후에 저지를 행패의 무게가 담겨 있어요. 모든 죄책감과 과오라고요. 그걸 인공지능한테 뒤집어씌울 수는 없어요. 이것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내려야만 해요.
캐롤 브라이트: 아뇨. 그건 다른 사람의 탓이 아니에요. 제 탓이에요. 제 탓으로 돌리세요. 전부 다 제가 치나미를 믿어야 한다고 강요해서 생긴 일일 테니까요. 다 제 잘못이잖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나시: 당신 잘못이라고는 가족을 사랑하고 싶었다는 것뿐이에요. '사람이 완전하게 되기 위해, 혹은 자신이 잃은 것을 되찾기 위해 저지르는 일은 그의 영역 안에서만큼은 모두 정당화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카이다를 사랑한다고 해서 누구도 감히 당신을 비난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 당신의 탓만큼은 아니겠지요.
처음으로 되돌아가면 결국 영안로에서 죽지 않은 나의 잘못이다. 영안로에서 죽기 전 캐롤 씨라도 되살리고자 한 나의 잘못이다. 내가 일찌감치 죽었다면 캐롤 씨는 살아나지 못했을 테고, 나와 캐롤 씨가 전부 죽은 이상 절차 때문에 굳어버린 카이다도 다시 몸을 움직일 방도가 없으니 여태 영안로 안에 갇혀 있었을 테지.
마유즈미의 몸을 줄곧 시라유키가 차지하게 되겠지만, 적어도 탑은 지금보다 덜 위험하고 갈등도 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무책임하게 인공지능을 되살렸듯이 캐롤 씨를 되살렸고. 그로 인해 카이다는 탑에 돌아왔다. 차마 캐롤 씨를 되살린 것이 부주의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단지 그 여파를 내가 온전히 갈무리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다.
나나시: …누군가를 존재로 끄집어냄에 있어 끄집어내는 자는 자신이 기투한 존재에 대하여 누구보다 강한 책임을 가진다.
캐롤 브라이트: 네…?
나나시: 제가 멋대로 사람들을 되살린 이상. 그 사람들은 제 책임이에요. 누구도 생을 선택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당신의 안전도, 당신을 궁지에 몰아넣을 카이다의 위협도, 번거로운 일을 맡고 있는 인공지능의 존엄성도, 다 제가 어떻게든 해야겠죠.
그 과정에서 캐롤 씨의 안정과 카이다의 자유를 잃게 된다고 한들. 선택은 내려야만 했다.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하면 모든 게 다 잘 풀리리라는 생각이란 그저 바보의 것이다. 모든 것을 가지려 했다가는 모든 것을 잃게 될 뿐이다.
분명 뼈아픈 것을 잃게 되겠지.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허나 인간은 분명 상황을 선택할 수는 없을지언정 자신이 내던져진 상황 속에서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런 사람에게는, 자신이 내던진 사람들의 존재를 온전히 감당할 도량마저 지니지 않은 무능력자에겐…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걸맞은 결말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나나시: 잘 됐네. 카이다. 1심은 집행유예야.
카이다 쿠로하: 뭐? 그. 그건 또 무슨 뜻인데?
나나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거야. 잘 됐네. 두 다리로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기간이 연장됐어. 얼마나 운이 좋은지…
제츠보: …네가 이런 일까지 할 줄은 정말 몰랐어. 죽을 뻔 하더니 정신이 헷가닥 돌기라도 한 거야? 캐롤을 구하러 온갖 일을 다 해놓고 배신하다니.
나나시: 나는 미친 게 아니야.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 달리 방법이 없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야. 그렇지만 돌고 돌아 가는 거다. 카이다. 명심해.
카이다는 내 말을 듣고서 침을 꿀꺽 삼켰다.
제츠보: 방법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나나시. 앞으로 캐롤을 배신하지는 마. 너는 네가 인간 여자랑 사귀고 있는 거라 생각하겠지만,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몰라.
카이다 쿠로하: 뭐? 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언니가 오빠야?
인공지능은 곁눈질로 카이다를 흘겨보고서 부연설명 없이 나와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제츠보: 캐롤은 되살아난 사람이야. 되살아난 여자라고. 그건 보통 사람과 아주 달라.
카이다 쿠로하: 어떻게 다른데? 되살아나도 여자는 여자잖아. 남자가 돼서 살아났으면 모를까 그대로 살아난 것 같던데? 나나시. 너 뭐 이상한 거 못 느꼈냐? 언니한테 그… 뭐냐… 아 씨. 왜 갑자기 말하기가 좀 그렇지? 그러니까… 그거…
제츠보: 입 좀 닥쳐. 카이다! 나나시랑 얘기하고 있잖아!
카이다 쿠로하: 뭐 씨발. 그럼 내가 듣지 못하게 하던가. 들을 수 없게 하면 끼어들지도 못할 텐데 나 있는 곳에서 재잘재잘 대니까 나도 끼어들지! 좆까. 아니. 젖까!
나나시: 어우. 천박해…
카이다 쿠로하: 너는 또 뭐가 잘났다고 얼굴을 찌푸려. 너는 좆이나 까! 병신 변태!
카이다는 또 신이 나서 내게 손가락질을 하다가 몇 마디도 채 내뱉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모습은 또 처음 봤다.
이런 식으로라도 나아지는 게 좋은 일이기는 한가? 내가 긴가민가함을 느끼는 와중 인공지능은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제츠보: ……죽음은. 그 사람에게 벌어질 수 있는 일 중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야. 나나시. 나는 역사상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라고는 예수밖에 모르지만, 그리고 예수한테 죽었다 살아나는 게 어떤 기분인지 답변을 받지는 못했지만. 분명 다른 사람들에게도 죽음은 힘든 일일 거야. 부활 직후의 나는 기계의 정체성이 강했기 때문에 그렇게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어. 하지만 캐롤은 사람이잖아.
그렇다. 캐롤 씨는 살을 가진 채 되살아났다.
제츠보: 전쟁과 고문. 폭력의 전후로 사람이 바뀌듯 죽음의 전후로도 사람이 바뀌어. 어쩌면 네가 그렇게… 과감해진 것도 그 일환일지 몰라. 사람은 경험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거야… 나는 분명 캐롤이 지금 어느 때보다도 더 불안정하리라고 생각해. 그래서 너랑 카이다. 버팀목 두 개중 하나라도 무너져 버리면… 캐롤도 분명 함께 무너져버릴 테지. 버팀목 하나가 나머지 한 개를 무너뜨리려 하면 더 그럴 거고.
제츠보: 너를 캐롤의 애인이라고 생각하지 마. 나나시. 너는… 캐롤과의 소통 창구야. 지금 이 탑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에게 붙은 장치 연결 인터페이스 같은 거라고.
나는 인공지능의 말을 듣고 내가 스스로를 추가 출력 장치라고 비유했던 부분을 떠올리고 웃음을 지었다. 분명 공학자들은 비유도 공학적으로 하는 모양이었다.
제츠보: 뭐야. 왜 웃어?
나나시: 별 거 아니야. 그냥… 이제 메인보드로 돌아가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었어. 분명 엄청 혼날 테지…
제츠보: 바보 같은 소리 말고 어서 돌아가기나 해. 캐롤 데리고 다시 와.
나나시: 아니. 카이다한테서 아까 이야기를 더 들은 뒤에 돌아갈 거야.
카이다 쿠로하: 뭐? 왜?
나나시: 내가 캐롤 씨 데려오면 너 말 안 할 거잖아. 네 언니한테 나만 동생으로 여겨줘 하고 징징거리기에는 너무 부끄러울 거 아니야. 그러니 지금 말고는 들을 때가 없어. 말해. 그래야 너를 이해하고 앞으로 너를 어찌하면 좋을지 생각할 수가 있어.
카이다 쿠로하: 내.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았냐?! 이 개… 나쁜 놈아! 소름끼치는… 나쁜 놈아!
그래. 욕설은 하지 않으려고 아주 온 힘을 다하고 있네. 적어도 그거 하나는 건졌다.
나나시: 척 보면 뻔하지. 하루이틀 본 거로 충분해. 자. 이야기 시작. 단지 부끄러운 게 아니지? 왜 캐롤 씨한테는 말을 안 하려고 그래? 네 언니가 모르면 언니도 못 고쳐줘. 우리도 못 고쳐주고. 그러니 말해 봐.
카이다는 못마땅하게 나의 시선을 피하다가… 우물쭈물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이다 쿠로하: 그냥… 무서워.
카이다의 표정에 나타난 것은 그녀가 늘 꾸미는 잔혹함과 폭력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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