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다 쿠로하: 그냥… 무서워.
나나시: 무섭다고? 네가?
카이다가 본인 입으로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카이다가 털어놓았던 내용대로 카이다는 자신보다 캐롤 씨에게 어울리는 동생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이다가 그 사안에 대한 감정은 '공포'라 표현한 것은 놀랄 만한 일이었다. 카이다는 자신이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시인하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다.
영안로 안에서 기억이 잘리기 직전인 카이다도 살려달라는 이야기는 할지언정. 무섭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런 카이다가, 캐롤 씨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무서워서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제츠보: 그런 말은 처음 듣네. 뭐가 그렇게 무서운데? 캐롤한테서 멀어지는 거?
카이다 쿠로하: 멀어지는 게 왜 무섭냐. 원래부터 먼데. 이미 더럽게 멀어서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어.
카이다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카이다 쿠로하: 나랑 언니는 달라. 달라도 너무 달라.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내가 언니 동생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잖아. 구라칠 생각 마. 나는 어차피 다 알아.
나나시: 알기는 무슨… 그리고 그렇게 당부할 필요 없어. 나는 당연히 너처럼 생각하거든. 네 어디가 캐롤 씨랑 닮았다고?
카이다 쿠로하: 제기랄!
카이다는 자기 비하를 그토록 열심히 해 놓고 남이 동의하면 내가 그녀를 욕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카이다는 표정을 사납고도 독살스럽게 바꾸었다.
나나시: 하지만 캐롤 씨만큼은 네가 자신과 닮았다고 여길 테지.
카이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네가 아무리 너한테 자신이 없을지라도… 아니. 자신 없을만하기는 한데. 그래도 캐롤 씨는 너에게서 그 자신과 닮은 점을 볼 거야. 아마 세상에서 가장 그녀를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라고. 하나뿐인 동생이잖아.
카이다는 대답 없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입술을 앙다물었다.
제츠보: 그래. 우리 붙잡고 있지 말고 캐롤한테 말을 해. 그래야 서로 오해를 풀지. 캐롤에게만 솔직하지 않으면 다 무슨 소용인데? 너를 아끼는 사람한테 말을 해 봐.
카이다 쿠로하: 아니. 그건 못 하겠어. 못 해. 언니한테 말하기만 해봐. 가만히 안 놔둘 거니까. 괜히 하는 말 아니야. 진짜 죽인다.
카이다는 자신의 기분이 나쁠 때 곧잘 으르렁대며 죽이겠다고 나를 위협하곤 했지만, 카이다가 비밀 엄수를 요구하던 순간의 그 어투는 그 수많은 살해협박과 다르게 들렸다. 그녀에게는 상당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제츠보: 왜? 정확히 뭐가 무섭길래 그렇게 꺼리는 거야? 이해가 안 되네.
카이다 쿠로하: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언니의 종이 될까 봐. 싫어.
나나시: 종? 언니의 종?
세상 어디에 이런 표현이 다 있나?
제츠보: 자세히 말해 봐.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안 돼.
카이다 쿠로하: 모르겠다고? 너희 바보들이냐? 내가 세상에 언니밖에 없다는 걸 언니가 알면. 언니는 내가 언니한테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돼. 그럼 언니가 나한테 막 대해도 나는 언니를 떠나지 못해. 계속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카이다 쿠로하: 나한테는 언니밖에 없으니까… 정말 그것 말고는 없어. 그러니까 나는 그 어떤 경쟁자도 용납할 수가 없어. 너. 불알 달린 걸 다행으로 알아. 네가 여자였으면 나는 너부터 어디 하나 망가뜨리고 봤어.
나는 카이다의 말을 듣고 안도…했다? 내가 남자라는 사실에…?
제츠보: 너 입버릇 좀 고쳐 봐. 카이다. 듣는 사람이 남사스러워서 도무지 이야기를 하기가 힘들단 말이야.
카이다는 인공지능의 말을 듣자 얼굴을 찌푸린 채 입을 우물거렸다. 나와 인공지능은 그 모습을 보며 어쩌면 카이다가 정말 우리의 진심 어린 말을 듣고 생각을 고쳐먹은 건 아닐까? 하는 기대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카이다는 대답했다.
카이다 쿠로하: …젖까.
그냥 뜸을 들인 천박한 말이었다. 인공지능은 실망이 담긴 외마디 한숨을 내뱉었다.
제츠보: 너. 우리 말을 제대로 듣기는 하는 거야? 너를 생각해 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의 말인데 좀 새겨들어 보시지.
나나시: 애들 말버릇 고치는 게 쉬운 건 아니잖아. 조바심 내지 말고 기다려 보자.
카이다는 인공지능의 말보다 오히려 내 말에 더 기분이 나쁜 것 같았다. 어린애 취급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다.
제츠보: 기다려 보자고? 5분 전까지만 해도 카이다를 더는 두고 볼 수 없다고 했으면서?
나나시: 입만 산 사람이 살인마보다야 나으니까… 나한테 욕을 하든 칭찬을 하든. 그런 아무래도 좋은 일이라면 봐줄 수 있어.
다른 말로 하면 지금까지의 그녀는 결코 봐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굳이 카이다에게 더 겁을 먹이는 대신 카이다의 말로 초점을 돌렸다.
나나시: 그래서… 캐롤 씨가 너한테 막 대할 거라니. 진심으로 캐롤 씨가 그럴 사람 같아? 얼마 전까지 캐롤 씨가 천사처럼 착하다고 말하던 사람은 어디 갔지?
카이다 쿠로하: 착한 거나 나쁜 거는 중요하지 않아. 진짜 상관없어. 어차피 양쪽 모두 비겁하기는 마찬가지거든. 사람은 약점을 찾으면 그곳을 후벼 파게 되어 있단 말이야. 나는 알아. 나만큼은 잘 안다고. 내가 언니한테 일방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걸 언니가 알면… 분명 취급이 박해지고 말 거야.
나와 인공지능은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생각을 공유했다. 우리는 카이다의 말을 들으며 그것이 일종의 강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와 인공지능이 달라붙어서 털어놓으라 해봤자 해결될 수 없는, 카이다 본인의 체험에서 비롯된 두려움이었다.
말 한두 마디를 던져본다고 해도 나는 심리학을 배운 사람조차 아니었다. 그녀의 가족조차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녀를 진정코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
…캐롤 씨 뿐일지도 몰랐다.
카이다 쿠로하: 나는 앞으로도 언니의 유일한 여동생으로 남을 거다. 그러니 나보다 여동생 같은 그 순둥이는 마음에 안 들어. 그 순둥이가 언니랑 싸워댔으면 또 몰라. 그렇게 사이가 돈독하다며… 그래서. 이게 이유다. 됐냐? 됐어?
나나시: 글쎄. 꼭 되지는 않았고… 곧 캐롤 씨가 찾아올 테니까 이야기 좀 해 봐. 그럼 되겠다.
카이다는 펄쩍 뛰어오를 기세로 소리를 질렀다.
카이다 쿠로하: 뭐?! 어이이이이! 내가 지금까지 한 얘기를 뭐로 쳐 들은 거야?! 내가 말했잖아! 언니가 아는 건 싫다고! 언니한테만큼은 말 안 하겠다고 했잖아악! 귀머거리냐?!
나나시: 내가 오지 말라고 해도 오실걸? 지금쯤 네 기억이 지워지지는 않았나 엄청 걱정하고 계실 테니까. 캐롤 씨는 반드시 올 거야.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다 하기는 싫어도 너 하나만을 동생으로 여기겠다는 약속 정도야 받아낼 수 있잖아. 열린 마음으로 말해. 내 말이 듣기 싫겠지만, 그게 정말 너와 캐롤 씨를 위한 일이야.
카이다 쿠로하: ………윽.
제츠보: 내가 듣기에는 타당해 보이는데? 캐롤이 너를 생각해서 다시 찾아올 때야말로. 너한테 외출금지를 내리게 만든 행동의 이유를 설명할 좋은 때지 않겠어. 카이다? 그저 모자란 여동생이 일을 망쳤다고 알고 있기보다 어느 정도의 이유가 있었다는 걸 알려 줘야지. 그래야 캐롤도 너를 이해하고 사이를 회복할 수 있을 거야.
카이다 쿠로하: 젠장… 하아… 씨발. 이걸 어쩌지… 어쩔까. 이걸…
카이다는 갑갑하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쓸어 넘겼다.
나나시: 대답은?
카이다 쿠로하: …생각해 볼 테니까. 재촉하지 마. 재촉하면 생각도 잘 안 된단 말이야. 난.
카이다는 그렇게 쏘아붙일 뿐이었다. 그러나 카이다는 평소처럼 자신이 싫어하는,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험악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그녀는 단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어수선해진 자신의 다락방을 정리하려는 사람 같아 보였다.
카이다는 아주 큰 한 걸음을 내디뎠을까. 아니면 이윽고 뒷걸음칠까? 그건 알 수 없었다. 나에게 달린 일도 아니었다. 심지어는 캐롤 씨에게 달린 일마저 아니었다. 결국 그녀를 바꿀 수 있는 건 스스로 뿐이다.
나나시: 그럼 이만 간다. 곧 돌아올 테니까 기다려.
카이다 쿠로하: 뭐? 어디 갔다가 오길래?
나나시: 아까 말했잖아. 캐롤 씨랑 같이 오겠다고.
나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그저 꽉 막힌 듯 막막한 기분을 느낄 뿐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과연 어떻게?
나나시: 반대쪽 얼굴도 맞으러 간다.
더 단크 타워
챕터 4: < 황금 원숭이의 손길 >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후루미나미 나몬: 나도 너에게서 나와 닮은 부분을 들여다보았는데. 왜 나의 이해는 그토록 부정하는 거야?
나는 그녀에게 이런 대답을 하고 싶었다. 그것은 잘못된 이해이며 그녀와 나는 닮은 점이 없다, 그녀는 의학적인 진단 하에 정신이 나간 사람이다. 그러니 그녀의 판단은 고려할 가치가 조금도 없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답이란 곧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 외세계의 형태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기만이었고, 나도 그 사실을 알았다. 내가 진정 그녀를 싫어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히무로 시라베: 나는 네가 싫기 때문이다. 성추행범에 배신자이기 때문이다. 온갖 악과 혼란을 야기한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리고?
후루미나미 나몬은 점점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히무로 시라베: 네가 블레인이기 때문이다. 타인에 의해 규정되어 고칠 수 없게 내던져진 존재. 나는 너희에게서 나와 닮은 꼴을 보는데, 나는 그 닮은 꼴을 이겨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와 나 사이의 공통점을 긍정하고 싶지 않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런데 마유즈미는 너에게서 인간을 보기 때문에 그녀의 이해만 가치 있다고 본단 말이야?
히무로 시라베: 더 어려운 일을 해냈으니 가치 있다고 보는 거다. 내가 비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쉽다. 보이는 사실을 그대로 말하면 되지. 그러나 나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고 근거를 제시하는 긴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벽에 등을 기대고서 내게 손가락질을 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네 그런 점만큼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히무로.
히무로 시라베: 아무래도 좋다.
후루미나미 나몬: 어떤 점인지도 안 물어보네. 서운해라… 그냥 내가 직접 말할게. 네가 나와 닮은 점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 말이야. 자기가 짐승인 줄도 모르고 다니는 개돼지와 다른 점이지. 자신의 부끄러운 결함을 보고 그걸 고치고자 애쓰는 것은 역천 그 자체야. 아아. 멋져.
히무로 시라베: 안 됐군. 나의 마음 안에는 이미 누군가가 들어섰다.
후루미나미 나몬: 마유즈미 말이야? 히무로. 좀. 그런 어린애의 칭얼거림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말아야지. 그렇게 졸라댄다고 해서 받아줄 사람이 나에게만큼은 이렇게 매몰차게 대한다니! 아아! 불공평해!
후루미나미 나몬은 눈을 질끈 감고 곧 쓰러질 듯이 몸을 휘청였다. 간질 발작을 보는 것 같았다.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는 어리지 않다. 그녀는 총잡이의 자질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분야에서는 나 이상의 관찰력을 가진 사람이다. 카텟의 일부였으며, 내가 보답하기 어려운 마음을 보내준 사람이다. 나는 도의적 이상으로 그녀를 구해야 한다. 그녀를 다시 봐야만 한다.
히무로 시라베: 그리고 그녀를 다시 깨우는 일을. 네가 방해했겠다.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증오를 사랑이라 받아들였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 그럼 목을 조르면 되겠네.
후루미나미 나몬은 제 목 뒤로 손을 넣고는 한 번 머리카락을 튕겼다. 어차피 짧은 머리카락이라 목을 가리지도 않는데도. 매를 버는 자에게 매를 줘봤자 그것은 상일뿐이다. 그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무엇이 바뀌지?
경동맥을 조여 하얗게 질리는 얼굴을 본들 달라질 게 무어란 말인가? 그 연약한 목뼈가 꺾였지만 피부는 끊어지지 않아 느슨하게 묶인 채 달랑댄다고 해도… 그리하여 그녀가 죽음에 다다르기 전 찰나의 시간. 그녀 스스로 자신의 등이 어떻게 생겼는지 내려다보며 목을 다시 앞으로 돌려놓고자 팔을 휘적여도…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 맞아. 나의 목이 꺾일 때 앵무새의 목이 그렇듯이 삑삑거리는 소리가 난다고 한들 말이야…
어느샌가 후루미나미 나몬은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나는 그러지 않는다.
나는 속으로 신조를 외웠다. 나는 손으로 겨누지 않는다. 손으로 겨누는 자는 아버지의 낯을 잊은 자니, 나는 눈으로 겨누리라. 나는 손으로 쏘지 않는다. 손으로 쏘는 자는 아버지의 낯을 잊은 자니, 나는 내 마음으로 쏘리라. 나는 총으로 죽이지 않는다. 총으로 죽이는 자는 아버지의 얼굴을 잊은 자니, 나는…
히무로 시라베: 내 심장으로… 죽이리라…
후루미나미 나몬과의 전투에서 나는 그녀를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가 내게 심어 놓은 독이었다. 심판이라는 명목 하에 이루어지는 숙청, 사살, 마름질… 나는 그래야만 하는 당위성을 느꼈다. 어떤 도구라도 좋으니 일단 죽여야 한다고 느꼈다.
히무로 시라베: 네 짓이로군.
머리가 아파왔다. 내부에서부터 벌어지는 사보타주란 너무도 미묘하게 작용하기에. 나는 그것을 본래의 내 정신과 분류하고 인식하는 것에서 어려움을 느꼈다. 자신의 어느 부분이 변했는지 보려는 정신은 이미 변한 뒤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나에게서 일관된 것을 이끌어내려 했다. 내가 설계된 의도대로의 저주. 비인간화를.
후루미나미 나몬: 왜애? 왜 내 목을 꺾지 않아? 왜 벌을 내리지 않는 거지? 너야말로 모든 위협을 똑바로 보는 사람이야. 정신조작 보유자들은 다 눈, 혀뿌리, 힘줄을 뽑혀도 할 말이 없는 자들이야. 너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어. 정신조작 때문에 수많은 동료를 잃었던 너만큼은 그렇게 할 수 있어. 다른 사람들은 누구도 금색의 위험함을 모르잖아? 네가 해야만 해.
히무로 시라베: 닥쳐라. 너는 나를 조종할 수 없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자신이 하는 말에 도취된 듯이 서서히 어조를 강하고 빠르게 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아니. 할 수 있어. 내가 앞으로 하려는 일을 말해주지. 나는 앞으로 네 안에서 천천히 너를 좀먹을 거야. 언제까지? 네가 캐롤의 눈을 뽑고 싶어 손이 덜덜 떨릴 때까지. 누군가가 아파하고 죽어가는 꼴에는 웃음이 나오게 될 때까지. 병에 차도는 있나요? 아니요. 앞으로 점점 더 나빠질 거야. 모든 게 나빠질 거야. 그리고 탑은 네가 만들어진 목적을 온전히 수행하는 것을 보게 되겠지. 나는 너와 함께 이 탑이 받아 마땅한 질서를 세울 거야. 그리고 나서…
히무로 시라베: 들을 만큼 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서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장소를 떠올렸다. 이번에는 유소년기가 아니었다. 그 이후의 기억. 금색이 잠식한 그 마을. 혹독한 겨울 속에서 하나가 되어 평화를 맞이한 자들. 내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었던 한 사람. 나는 조율자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내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기억 속에 후루미나미 나몬을 두었다. 그녀가 쌓인 눈에 떨어져 폭 하고 파묻히는 소리마저 떠올릴 수 있었다. 다시 감았던 눈을 떴을 때. 광인처럼 주절대던 후루미나미 나몬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직후. 그녀의 목소리가 순간 내 귓전을 맴돌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봤자 나는 또 네 앞에 나타날 거야.
나는 순간 후루미나미 나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혹독한 겨울 속. 조율된, 배타적인 하나의 의식이 도사리는 마을. 쌓인 눈 위에 발을 디딘 그녀를.
히무로 시라베: 그 순간을 미룰 수 있다면 족하다.
후루미나미 나몬: 아직 제대로 이해를 못 한 것 같은데. 나를 무의식 속에 가두는 게 꼭 능사는 아니야. 내가 네 체험 속에 갇혀있는 동안 나는 너에게 더 깊게 녹아들거든. 동화되고, 몰입하지. 그러면 더 쉽게 빠져나갈 수 있게 돼. 밖으로. 그래. 또 밖으로.
히무로 시라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내 정신 속의 상자를 닫았다. 덜컹. 후루미나미 나몬은 그렇게 갇혔다.
그러나 평화나 만족감은 느낄 수 없었다. 임시방편일 뿐 후루미나미 나몬은 여전히 내 정신 속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후루미나미 나몬의 말마따나 시간문제였다. 그녀는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점점 나빠지리라.
캐롤 브라이트가 억압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확실하지만은 않았다. 자칫하면 캐롤 브라이트 또한 후루미나미 나몬의 영향을 받게 될지 모르는 데다가. 정신조작 보유자에게 나 자신을 넘겨주는 짓은… 위험이 너무나도 컸다.
결국 당장은 혼자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의학적으로 미쳐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며, 그저 정신조작 보유자들을 억압해야 한다는 나의 의견이 신빙성을 잃을 뿐이었다.
나는 나의 불행을 곱씹는 대신에 다이얼로그를 들었다. 안주할 만한 여유가 없었고,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떠올린 뒤 나는 다이얼을 돌려 걸어야만 하는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내 전화를 받았다.
히무로 시라베: 하기와라 우시오. 나다.
하기와라 우시오: 라져. 하기와라 우시오 수신 완료. 오퍼레이션 말해선 안 되는 진실 시작이야?
히무로 시라베: 너와 내가 같은 작전을 말하고 있는지에 의문이 드는군.
하기와라 우시오: 그거 맞아! 그렇지만 아무래도 제츠보는 카이다랑 얽혀서 누구를 찾아가거나 통화할 짬이 안 나오는 것 같은데… 어쩔래? 우선 너랑 내가 맡은 두 명한테 먼저 알려줘?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 쿠로하에게 알려주는 것은 가장 마지막으로 한다. 인격적인 준비 없이 반복에 대해 들어버린다면 카이다 쿠로하는 도무지 통제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만다. 캐롤 브라이트와 이름 없는 남자 또한 우리가 맡도록 하지.
하기와라 우시오: 흠. 알겠어. 그런데 이렇게 시간차 둬도 되는 거야? 한 번에 다 말해주는 게 원래 계획이었잖아. 괜히 귀띔해 줬다가 한 명이 확성기처럼 막 날뛰면 어떻게 해? 내 생각에 이바라는 안 그럴 것 같은데. 카나리는 그럴지 안 그럴지 확신이 없다.
히무로 시라베: 내가 찾아가고 나서 그의 상태를 확인한 뒤 결정하겠다. 그도 알 자격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괴될 필요는 없을 테니.
하기와라 우시오: 좋아. 일단 나는 이바라한테 갈게… 근데 카나리 왜 얘 하루종일 안 보이냐? 욕실에서 미끄러져서 죽기라도 한 건가?
히무로 시라베: 불길한 소리 마라.
하기와라 우시오: 하루종일 불길한 소리나 하는 놈이 어디서 하라마라야? 장난해?
히무로 시라베: 나는 그렇게 행동한 적이 없다.
하기와라 우시오: 염병하지 말고. 끊는다? 이만 출발해야 해서. 그 뭐냐… 존나 긴 낮을 불태워.
히무로 시라베: 무운을 빌지.
하기와라 우시오는 전화를 끊고 나서 잠시 이러한 생각에 잠겼다.
아니 잠깐. 무운이라는 거 무(無)운을 빈다는 거야? 운이 없기를 빈다고? 씨발 말이 안 되는데? 그런 뜻이었으면 히무로가 저딴 인사말로 쓰지도 않았을 거잖아. 만화에서도 꼭 무운을 빈다는 대사를 봤던 기억이 있으니까 실제로 있는 말이긴 해. 그런데 왜 무운이야? 말이 안 되잖아. 어쩌면 행운이나 불운 등 외부 요인과 관계없이 본인의 역량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길 바라며 무운을 빈다고 하는 걸지도 몰라. 근데 무운보다는 행운이 낫잖아. 행운 혐오자가 아니고서야 무운을 빈다고 할 여지가 없지 않나? 내가 이딴 걸 왜 생각하고 있지? 왜 이런 쓰잘데기 없는 거를 이렇게 줄줄 고뇌하고 있는 걸까?
하기와라는 팔짱을 끼고서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가 이바라 쿠리스에게 살인게임의 반복에 대해 털어놓고 싶지 않은 것 같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는 살인게임의 반복을 비교적 짧은 시간 사이에 받아들였다. 여태껏 해변과 영안로의 모험을 거치며 탑은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으며, 반복에 대한 정보를 들은 직후에는 당장 살인이 벌어져 증거를 찾고 살아 있는 이들과 접촉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학급재판이 끝났을 때가 되자 그의 감정은 저절로 살인게임의 반복성을 받아들여 놓았다.
하지만 이바라도 쉽게 받아들일 것인가?
생각해 보면, 아. 살인게임이 반복돼? 거참 거지 같군. 하고 끝낼 사안이 아니었다. 누구도 살인게임에서 빠져나갈 수 없고 영원히 반복된다는 건 그들이 생지옥에 갇혔다는 뜻이었다. 사람 하나가 무너져버릴지도 몰랐다. 왜 죽지 않는가? 어차피 다시 되살아날 텐데. 또 살아나서 또 죽고 죽일 터인데 그냥 진즉 죽어버리면 편하지 않은가?
물론 하기와라 또한 진심으로 이바라가 생을 포기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이바라는 죽음을 꺼리고 목숨을 존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친구가 흔들리거나 좌절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잠수 탈까?
그러기에는 하기와라 또한 반복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인지하고 있었다. 히무로가 대몰락에 대해 꽁꽁 숨겨 오다가 덜미를 맞은 것처럼. 일단 살인게임에서 알아낸 게 있으면 공유하는 게 상책이었다. 애초에 '이걸 니가 알면 멘탈 터질까 봐 말 안 했다' 따위 그저 그 사람을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너무 이상주의자처럼 생각하나? 하기와라의 뇌리에 순간 그런 생각이 툭 하고 떠올랐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상대를 존중한다. 말은 거창하지만 사실 하기와라 본인은 그저 공정한 사람이 되는 일에만 사로잡혀 사리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위선을 떠는 건가?
아 씨발 모르겠다. 이걸 어째? 몇 분을 더 곰곰이 생각한 뒤 하기와라는 이바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냥 속으로 끙끙 앓는 건 그의 성미에 안 맞았다. 일단 얼굴 보고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조심조심 살피면서 정해보기로 그는 마음을 먹었다.
이바라 쿠리스: 여보세요?
하기와라 우시오: 할 이야기가 있어. 이바라. 잠깐 얼굴 좀 보자.
이바라는 소파에 몸을 던졌다. 하기와라의 전용실. 커다란 텔레비전을 앞에 둔 소파 위에서 그녀는 기지개를 켰다.
이바라 쿠리스: 으기기기긱… 소파는 내 거다! 아. 나 여기가 진짜 편하더라. 왜 내 전용실에는 소파가 없지? 만약 있었으면 맨날 거기서 뒹굴거렸을 텐데!
하기와라 우시오: 얼굴에 나초 부어버리기 전에 내가 앉을자리도 만드는 게 좋을 걸. 그리고 뒹굴거리다 졸기라도 하면 너 바로 처형이야. 조심해라?
이바라 쿠리스: 우왁. 불길하게 그런 말 좀 하지 마!
이바라는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다리를 소파 밑으로 내린 덕분에 하기와라 또한 그녀의 곁에 앉을 자리가 생겼다. 하기와라는 나초가 가득 든 그릇을 손에 쥐고서 털썩 소파에 걸터앉았다.
하기와라는 그릇을 소파 가운데에 두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잠시 수다를 떨었다.
이바라 쿠리스: 우리 이상하게 요즘 자주 만나는 것 같아.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평범하게 만나고 있는 것 같은데. 탑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처럼. 내가 해변에 떨어져서 한동안 못 본 거 빼고는. 글쎄?
이바라 쿠리스: 네가 영안로에 갔던 시간도 나한테는 꽤 길었거든? 내 입장에서 네가 탑에서 보낸 시간은 절반 정도밖에 안 돼. 그런데 요즘은 거의 매일 보잖아.
하기와라 우시오: 그러게. 뭐 그럴 수도 있지. 이딴 곳에서 열댓 명이 서로 부대끼는데 얼굴을 못 보면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 카나리 제외.
이바라 쿠리스: …미도리카와도.
하기와라 우시오: 아. 맞네. 생각보다 서로 얼굴 보는 일이 힘든 걸지도 모르겠는데?
잠시 침울한 얼굴로 나초를 먹던 이바라는 고개를 작게 저어 침울한 생각을 떨쳐 버렸다.
이바라 쿠리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영화 봐?
하기와라 우시오: 오늘은 영화 안 봐. 오늘은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
하기와라는 그제서야 나초를 먹던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탁 때렸다. 아씨. 반복 얘기 하려다가 수다나 떨고 있었네. 덕분에 나초 조각과 주황색 시즈닝이 그의 얼굴에 잔뜩 묻어 버렸다.
이바라 쿠리스: 에에에? 뭐야. 뭐야?!
하기와라 우시오: 아. 할 얘기가 생각나서 그래. 진짜 중요한 얘기야. 애초에 이거 얘기하려고 부른 건데… 네가 저번에 우리의 죽음이 다 의미 없으면 어떻게 하냐고 물은 적이 있잖아.
이바라 쿠리스: 말 그대로야. 우리의 죽음이 그냥. 아무 의미도 없으면? 그냥 세상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라면? 우리가 여기에서 서로 죽고 죽여도 그건 아무 의미가 없고 전부… 개죽음이면? 그럼… 우리가 이걸 계속해야 할까? 그렇다면 우리들의 죽음에 정말… 기릴 가치가 있는 걸까?
이바라 쿠리스: 아. 맞아…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좀 기억이 나네…
하기와라 우시오: 그거랑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
이바라 쿠리스: 그. 그게 무슨 뜻이냐고?
이바라는 하기와라의 말에 순간 표정을 굳혔다.
하기와라 우시오: 무슨 뜻인지는 나도 대충 이해를 했지. 우리들의 죽음이 정말 기억될 가치가 있는 거냐. 사실 죽음이라는 건 별반 가치 없는 게 아니냐.
이바라 쿠리스: 아니야. 하기와라.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건 그 뜻이 아니야. 내가 그런 말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어.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나도 알아. 하루아침에 세 명이 죽은 걸 보니. 관을 옮기고 묻는 그 의식에 의문을 느낀 거잖아. 그렇지? 과연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네가 말했잖아.
이바라 쿠리스: 사실은… 그게 다가 아니야. 하기와라.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따로 있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바라는 몇 번씩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한 것이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조금 답답하고 또 과연 어떤 내용이 펼쳐질까 신경 쓰여. 흥미진진해질 따름이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과연 그게 뭘까… 오… 기대가 돼서 견딜 수가 없는데…?
이바라 쿠리스: 재밌는 이야기 아니야! 진지하게 들어!
하기와라는 이바라의 말에 웃음을 반쯤 거둬들였다. 이바라는 자신의 코를 손바닥으로 감싼 채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바라 쿠리스: 그래서. 내가 너한테 그랬지? 죽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으면 어떻게 하냐고.
하기와라 우시오: 맞아. 나는 네가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거라고.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이 죽음에 의미를 준다고 말했어. 그게 왜?
이바라 쿠리스: …하기와라. 내가 이 살인게임에 중대한 비밀을 하나 알고 있다면. 너는 그걸 듣고 싶어?
하기와라 우시오: 엥? 너 뭐 아는 거 있어? 흑막 정체 같은 거 알아낸 거야?! 그럼 당연히 듣지!
이바라 쿠리스: 흑막의 정체같은 건… 아니야. 하기와라. 이건 그렇게 간단히 정할 일이 아닐지도 몰라. 히무로가 대몰락에 대한 정보를 전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보는 조심스럽게 다뤄야만 해.
하기와라는 이바라의 말이 무척 옳다고 생각했다. 그도 당장 그녀에게 반복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왔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했기 때문이다.
아씨. 이바라 말을 듣고 보니까 괜히 찾아왔나 싶네. 일단 빠꾸 치고 나중에 얘기해 볼까? 하기와라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는 동안 이바라는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도 일단 들어볼게. 정말 우리한테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보가 있다면. 파급력이 커도 일단은 알려줘야 한다고 봐.
이바라 쿠리스: 누가 봐도 나쁜 영향을 미칠 게 자명한 정보라도 말이야? 진짜 그냥… 잘못 말하면 사람이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것도?
하기와라는 생각했다. 어 씨벌? 이거 뭔가 내가 알고 있는 거랑 비슷한 결의 그건가? 설마 이바라도 반복에 대해 아나?
에이. 아니겠지. 달리 들을만한 곳도 없잖아.
하기와라 우시오: 그러니까 조심스럽게 알려줘야겠지. 때가 올 때까지 숨겨야 할 수도 있을 거야. 아무튼 간에 나는 무작정 숨기는 게 상책은 아니라고 생각할 뿐이야. 모르면 아무런 대비가 안 될뿐더러. 그냥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정보니까 안 알려줬다니… 그건 기만적이지 않나 싶어. 그래서 히무로랑 마유즈미 사이가 잠깐 틀어진 거고.
바로 그것이야말로 하기와라가 이바라에게 반복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려는 이유였으나, 이바라가 받아들이기에 그것은 그녀를 겨냥하는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이바라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바라 쿠리스: 네 말이 맞아. 하아… 이렇게 빨리 알려주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기와라. 너한테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 말해줄게.
하기와라는 북을 치듯 허공에 손을 두드리는 듯한 시늉을 했다. 그 몸짓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바라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이바라 쿠리스: 우리가 있는 이 살인 게임은 사실…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어.
하기와라 우시오: …으에엑?
하기와라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이바라 쿠리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야. 하기와라. 너는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증거가 많아. 야가미의 처형 영상이 있다던가. 너는 모르겠지만 크레딧이 지하에 엄청나게 많이 숨겨져 있다던가… 모노로그가 진행했다던 수많은 살인 게임들… 우리는 이 안에서 끊임없이 기억을 잃었다가 되살아나며 살인 게임을 진행해 온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아… 아니 잠깐… 그거 정말 너 혼자서 추리해 낸 거야? 아니면 누구한테서 들은 이야기야?
이바라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사실 별 상관은 없다는 생각에 하기와라에게 그 출처를 말해 주었다. 애초에 그 편지를 남긴 사람은 이미 죽었다.
이바라 쿠리스: 야가미가 남긴 유서에 적혀 있었어. 내가 아까 든 예시도 전부 야가미가 찾아낸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허… 그놈 참 더럽게 똑똑했잖아? 그걸 악용해서 문제였던 거야. 새끼… 쯧. 내가 딱 그놈만큼 똑똑하고 그놈보다 더 인정머리 없는 놈을 하나 아는데 그놈은 적어도 똑똑한 머리를 악용하지는 않았어.
하기와라가 단지 탄식하자 이바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복잡 미묘한 시선을 보냈다. 그녀는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이든 간에 반응을, 그 사실에 대한 수용의 과정을 보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상당한 심사숙고 끝에 기껏 사실을 털어놓았더니 하기와라는 야가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나 생각하고 있었다.
아하… 이런 내용을 털어놓는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도 어려울 테고,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도 오래 걸리겠지. 분명 나도 쪽지를 처음 봤을 때는 머리가 새하얘졌으니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야.
그렇기에 이바라는 하기와라가 자신의 입 앞에 쥔 주먹을 대고서 몇 초간 생각에 잠겼을 때도 그가 그 앞에 놓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이바라 쿠리스: 천천히 심호흡해. 하기와라… 마음을 가라앉혀. 그럴 만한 일이니까 조바심 내지 마.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나 받아들였어. 이 살인게임 끝나면 다음 살인게임이 시작되고. 이 살인게임 끝나면 다른 살인게임 시작되고. 그런 식이다 이거지? 또 그 돌무더기 속에서 깨어난 다음 탑에서 모이고 또 동기 나눠주고… 그런다는 말이잖아.
하기와라는 이바라를 보며 어깨를 으쓱 움직여 보였다. 이바라는 조금의 고뇌도 없는, 천연덕스러울 뿐인 하기와라를 보며 특정한 반응을 기다리듯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바라 쿠리스: …어. 맞아.
하기와라 우시오: 음. 이해했어.
그리고 하기와라는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허어어엄…
이바라 쿠리스: 하품을 해?!
하기와라 우시오: 뭐. 뭐야. 너 하품 싫어하냐? 하마한테 트라우마 있어?
이바라 쿠리스: 하마가 하품이랑 무슨 상관이야! 하품은… 흐아아암…
하품을 하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사람은 곧잘 하품을 하게 되어 있다. 이는 공감 능력의 일종이다. 꼭 그 사람이 눈앞에 있지 않더라도 화면 속의 사람이 하품을 하거나, 심지어는 읽고 있는 글의 등장인물이 하품을 해도 하품은 전염될 수가 있다.
다만 앞서 말했다시피 하품 전염은 공감 능력으로 인해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이토록 쉽게 하품이 전염되려면 그 사람과 어지간히 친해야만 하겠다.
이바라 쿠리스: 큼. 크흠. 어. 어떻게 하품을 할 수가 있어! 너 제대로 이해를 못 한 거 아니야? 살인게임이 끝도 없이 반복될 거래도!
하기와라 우시오: 이해했다니까. 이바라. 흐어엄…… 그러니까 그렇게 당황할 필요 없어.
이바라 쿠리스: 야! 하품 그만해! 이게 장난처럼 보여?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게 아니라… 엇! 야! 나까지 하품이 나오잖아…! 허윽. 읍…!
이바라는 하품의 파멸적인 연쇄를 끊기 위해 입을 꽉 잠갔다. 잠시 숨이 한 차례 그녀의 입 안에서 달싹거리게 둔 뒤. 이바라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하기와라의 태도에 대해 물었다.
이바라 쿠리스: 어떻게 그토록 쉽게 받아들인 거야?! 네가 어쩌면 내 생각보다 냉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런… 압도적인 사실마저 의연하게 이해할 줄은 몰랐어! 너 부처라도 돼?!
하기와라는 이바라가 천천히 이해할 수 있게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하기와라 우시오: 글쎄… 일단 가상현실이라는 건 진즉 알고 있었고. 이 탑이 얼마나 미친 장소인지를 직접 봤으니까. 문을 열었더니 해변에 떨어지고, 문 안의 문을 열었더니 죽은 사람 과거. 문 안의 문에서 나온 다음 다른 문 안의 문에 들어갔더니? 죽은 사람 자체. 해변에는 가재 괴물들. 그리고서 영안로 안에 들어갔더니 뭔… 죽은 사람들에 미친 살인 열차가 나왔어. 그러니까 충분한 근거가 있다면 믿을 수 있었어.
하기와라 우시오: 애초에 이건 근거도 안 되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영안로 안에서 그 뭐냐. 번개 맞았을 때의 히무로 인격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이야기해 줬어. 이 살인게임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더라.
이바라 쿠리스: 아니. 잠깐. 그때부터 알았어…? 그런데 왜 여태껏…
이바라는 왜 여태껏 숨겨왔느냐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바보라도 그 이유는 알 수 있었다. 그야 사람을 뒤흔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살인게임에 임하고 있는지 이바라는 알 수 없었지만, 제대로 뒤틀린 사람이 아니고서야 사람은 살인 게임에서의 탈출을 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탈출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퍼져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명제. 모든 것이 다시 반복된다는 명제는 모든 가치를 파괴할 수 있었다. 왜 사는가? 어차피 다시 기억을 잃고 살인게임이 시작될 텐데. 그렇기에 이바라는 하기와라에게 그 사실을 전해주는 것을 주저했던 것이다.
이바라 쿠리스: 그보다… 이게 야가미의 가설이 아니라 진짜라는 거구나… 정말 이 살인게임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하기와라와 이바라는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이바라 쿠리스: 위험한데… 죽어도 살아나고, 죽어도 살아나고… 우리가 의미를 부여할지라도. 우리도 죽어서 살아나고… 이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끔찍한 일일지도 몰라.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끔찍한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그렇지… 어차피 죽으면 다시 살아날 텐데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어.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야. 누가 죽든 무슨 상관이냐? 어차피 다시 살아날 텐데.
그들이 여태까지 해온 노력이란 살아남기 위한 노력이다. 그런데 죽은 뒤에 살아남는 게 전제가 된다면 죽는 것 또한 살아나는 것의 과정이 된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살 필요 자체가 없지 않은가?
이론상 영원한 반복 앞에서 그들은 개념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다. 양수에 음수를 곱한 모든 것이 음수가 되듯 살아야 하는 이유에 반복이 붙자 그것들은 죽어도 상관없는 이유로 변했다. 그들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이 음수가 되었다. 그것은 의미의 오염이라기보다 의미의 상실에 가까웠다.
이바라 쿠리스: …어떻게 그토록 쉽게 받아들인 거야. 하기와라?
하기와라 우시오: 쉽게 받아들인 게 아니야. 정신 차리고 보니 받아들였을 뿐이야. 내가 보기에는 너야말로 쉽게 받아들인 것 같은데. 나처럼 미리 들은 것도 아닌데도 내색 없이 지냈잖아.
이바라 쿠리스: 나야말로 받아들이는 게 너무 어려웠어. 하기와라… 결국 살인게임이 다시 시작되면 죽은 사람들도 전부 살아날 테니까. 지금까지 죽었던 미도리카와도, 나이토도, 모리도, 칸나즈키에 야가미에 후루미나미까지 전부 살아난다잖아.
이바라 쿠리스: 만약 살아난다는 보장이 그토록 확실하다면, 나도 일찌감치 죽고 다시 시작할까. 그런 생각도 잠깐 했지만…
하기와라 우시오: 그. 그러지 마! 이 멍청아!
하기와라는 지레 놀라 다급하게 외쳤다.
이바라 쿠리스: 사람 말은 끝까지 듣고 멍청하다고 해! 그런 생각도 잠깐 했지.만! 나마저 그럴 수는 없어. 그래버리면 정말 우리의 죽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 돼. 말 그대로야. 어차피 다시 살아날 테니 살아도 되고 죽어도 되는 목숨… 그렇다면 슬퍼할 필요도 없을지 모르지.
이바라 쿠리스: 하지만 나는 슬펐잖아.
이바라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불끈 쥐고서 덜덜 떨었다.
이바라 쿠리스: 슬펐어… 슬프고 또 슬펐단 말이야… 내가 가슴에 묻은 그 사람들을… 그렇게 잊어버릴 수는 없어. 우리는 분명히 여기에 있었고, 살아 있었어. 그러니 나는 언제까지나 기억할 거야. 하기와라.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남으려고 애쓸 수밖에 없어. 나는 모두를 안고서 살아갈 거야.
하기와라는 이바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와라 우시오: 나도 똑같아. 그냥 삶을 포기해 버리기에는 너무 많은 걸 얻었어. 너랑 친구가 됐고, 마유즈미랑도 친구 먹었고. 절대 친구가 못 될 것 같던 히무로랑도 친해진 데다가… 내가 평생 붙들려 살 거라 생각했던 저주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어. 그런데 죽어서 이걸 버린 채 또 예전의 나로 돌아가라니?
그들은 음수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육체의 체험에서 격리되어 살인게임의 과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면 분명 무의미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객체로써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삶이 아닌 삶의 반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야말로 그들의 삶을 소중하게 만들었다. 역설적인 일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사양이야. 이바라. 이렇게 많은 걸 포기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살아가야만 하겠지.
하기와라의 가슴에는 생(生)이 있었다. 이바라의 가슴에는 사(死)가 있었다. 그토록 다른 그들이 서로 같은 곳에 다다랐다. 이해의 지평이었다.
이바라 쿠리스: …우리 생각이 부족한 걸까? 우리가 이 일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있는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쉽기는 니미. 이게 어떻게 쉬워? 우리는 잘 받아들인 거야. 잘난 거라고. 다른 놈들이 우리만큼 침착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거든. 우리가 똑똑하고 이성적인 거야.
이바라 쿠리스: 그래. 맞아… 우리는 뒷받침하는 증거도 많이 알고 있으니까.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하기와라 우시오: 그리고 은근히 말이 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지금까지 느꼈던 위화감이 어느 정도 해소됐어.
이바라 쿠리스: 위화감? 무슨 위화감 말이야?
하기와라 우시오: 우리가 이상할 정도로 빨리 친해졌다는 거 말이야.
하기와라는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바라의 표정을 보고 설명을 덧붙였다.
하기와라 우시오: 곰곰이 따져보면 이상하지 않아? 우리는 느닷없이 납치돼서 이렇게 큰 탑 앞에서 만났는데. 그냥 성격이 잘 맞는다는 이유로 순식간에 친해져 버렸어. 너. 지금까지 만난 지 몇 시간도 안 지난 사람과 꽁트 해본 적은 있냐?
이바라 쿠리스: …없긴 한데. 그냥 어쩌다 보니까… 되게 죽이 잘 맞아서 친해졌던 거지, 다른 건 없었어. 네 말을 듣고 보니까 조금 부자연스러운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서 그게 왜?
하기와라 우시오: 조금이 아니라 많이 부자연스러워. 이걸 설명할 방법은 하나뿐이지.내 가설은 이거야. 우리는 지난 살인게임 회차동안 친해진 적이 엄청나게 많아. 그리고 아무리 우리가 기억을 잃고 살인게임을 다시 한다고 한들, 우리의 무의식은 서로가 친구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이바라는 하기와라의 말을 듣고 조금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이바라 쿠리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빨리 친해질 수가 있었다…? 잠깐. 왜 말이 돼지? 어라? 진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말이 되네…
이바라는 생각했다. 하기와라랑 내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 친구인 줄을 알았다라… 이바라는 그 가설이 마음에 들었다. 뭣보다도 이 살인게임이 영영 이어질지언정 그 과정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은, 모든 게 꼭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어쩌면 죽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듬과 동시에 이바라는 자신의 마음에 품었던 그 사람들을 다시금 떠올렸다. 이번 생에서는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람들.
이바라는 그들을 잊지 않은 채 살아가고, 죽어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바라 쿠리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유대로 이어져 있다는 거야…? 흐흐… 지금 나. 용기가 조금 솟아오르는 느낌이야. 무적의 소울메이트라는 느낌?
이바라가 콧대를 세우고서 어깨를 쭉 피는 동안 하기와라는 조용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진즉 유인원 흉내를 내며 방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고도 남을 만한 가설인데. 하기와라는 그저 고뇌에 사로잡혔다. 이바라가 보기에는 조금 어색한 모습이었다.
이바라 쿠리스: 갑자기 뭐야. 축 늘어지고? 조울증?
하기와라 우시오: 걱정 마. 별 건 아니고. 그냥… 생각 중이야.
하기와라는 자신이 이바라를 인질로 잡고 미도리카와의 전용실 열쇠를 내놓으라 소리쳤던 때를 떠올렸다. 그 당시의 기억은 줄곧 그의 뇌리에 박혀 있었고, 그의 의식은 이제 묻어 놓았던 그 사건을 그 스스로가 마주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런 일을 겪은 이후에도 서로 친구로 남을 수 있다는 건 기적보다 허구에 가까운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미친 짓이었고, 그가 당했다면 용서하기 어려울 것 같은 일이었다. 하기와라는 머리가 좀 찬 채로 그의 행적을 되돌아보았다. 우정이 무엇인지. 그게 정확히 얼마나 소중한지 안 채로 인질극을 복기했다. 그러자 세상에 어떤 놈이 이런 짓을 하냐는 생각이 그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이바라는 왜 나를 용서했을까? 내 사과가 진심처럼 들려서? 그런데 친구 인질로 잡는 놈의 사과를 어떻게 진심이라 받아들일 수가 있지? 아무리 이바라의 무의식이 나를 친구인 줄 알아도… 그럴 수가 있나?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그가 친구인 줄 알았다면 배신감 또한 크지 않을까? 그 일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기와라의 결론은 이바라의 마음이 넓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어두운 낯빛만을 보이고 있자니 이바라는 걱정은 더욱 커졌다.
이바라 쿠리스: …진짜 왜 그래. 너? 괜찮아?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네가 진짜 좋은 친구구나 싶어서.
그 말을 듣자 이바라는 음흉하게 웃으며 자신의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하기와라는 그 쑥스러워하는 미소를 보며 그녀가 미녀 앞에 선 짱구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바라 쿠리스: 에에? 그럼 지금까지는 몰랐어? 이 몸이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 말이야?
하기와라 우시오: 아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모르고 있었더라.
이바라 쿠리스: 흐하하!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어! 이 비단결처럼 고운 마음씨와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이제야 깨닫다니. 보는 눈 없는 녀석이라니까? 음화화!
하기와라 우시오: 네 말이 맞아. 너는… 좋은 친구라기보다 먼저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아마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너 같은 사람은 처음일 거야.
이바라의 입에 만연한 웃음이 당황과 경직으로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바라는 순간 실내가 확 더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몸이 더워졌기 때문이다.
이바라 쿠리스: …에엑. 에에에…? 그. 그렇게 아부해 봤자 나한테서는 아무것도 안 떨어져!
하기와라 본인 또한 자신이 하는 말을 스스로 들을 수 있었기에. 그게 하기와라 본인의 기준에서 '오글거림'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팔에 소름이 당장이라도 오소소 솟아오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했다. 아무튼 간에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싶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만약 내 가설이 사실이라서 정말 우리가 예전 살인게임에서도 친구였다면, 그냥 나랑 이렇게 많이 어울려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고마워.
이바라 쿠리스: 그. 나 이제 진짜로 쑥스러워지는데. 하기와라…? 으으으! 갑자기 왜 그래! 어색하게! 내 목! 내 뒷목 좀 봐봐! 솜털 드르르 올라온 거! 와. 소름 돋네 정말!
하기와라 우시오: 뭐? 목?
이바라는 자신의 뒷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하기와라에게로 등을 돌렸다.
이바라 쿠리스: 이거 보여? 으으! 누가 얼음으로 문지른 것처럼 빳빳하게…
이바라는 말을 잃었다. 그리고 몇 초 뒤 반바퀴를 더 돌아 다시 하기와라를 마주했다.
이바라 쿠리스: 취소. 이거 엄청 이상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어. 맞아. 엄청 이상했어.
이바라 쿠리스: 그렇지? 너도 느꼈지? 이게… 무슨 일이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왜 이렇게 더워. 여기?
대체 왜 하필 뒷목이어야 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지만, 하기와라는 그것에 대해 묻지 않기로 했다. 분위기를 더 기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솔직히 지금 당장 너한테 베풀어줄 수 있는 건 간식밖에 없어서, 달리 할 말은 없고… 그냥… 앞으로 더 좋은 친구가 될게. 그게 다야.
이바라 쿠리스: 그. 그만해! 뭔가 진짜 못 견디겠으니까!
이바라는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고서 몸을 덜덜 떨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너는… 그게 뭐냐. 존나 좋은 사람이야. 또 존나 관대해. 크세르크세스 1세처럼.
이바라는 그 이름을 어디선가 들었지만, 정확히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긴가민가함을 느꼈다. 그저 그 이름이 묘하게 클레오파트라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바라 쿠리스: …왜. 그 사람도 마음씨가 예쁘고 얼굴은 그보다 더 귀여운가? 나처럼?
하기와라 우시오: 뭐? 웩. 아니. 영화에 나온 대로 말해 주자면… 일단 대머리 아저씨야. 한쪽 코를 뚫었고, 금속으로 만든 화려한 장신구를 온몸에 두른 건장하고 오만한 폭군… 어억! 야! 왜 때려!
하기와라는 이바라에게 후드려 맞으며 생각했다. 이바라는 반복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데도, 반복을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반복에 대해 조금도 아는 것이 없는 카나리가 말주변 없는 히무로에게서 반복을 받아들이려면 얼마나 오래 걸릴까? 별 미친 사건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하기와라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북처럼 손바닥과 주먹질을 견디고 있는 자신의 등에 대해서도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친 손이 왜 이렇게 매워. 거북이처럼 부어오르는 거 아니야. 이거?
마침내 그의 등에 가해진 무자비한 인디안밥이 끝내고 난 뒤. 이바라는 하기와라에게 말했다.
이바라 쿠리스: 그…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뭐라고 해야 할까… 감성적인 말이었어. 조금 감격스럽기까지 하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
하기와라 우시오: 나를 쥐어패 놓고 뭐라는 거야. 지금?
이바라 쿠리스: 그렇게까지 안 아팠잖아. 받아들여!
하기와라는 자신의 등을 문지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바라 쿠리스: 그래서… 음. 반복에 대해서는 또 누가 알고 있어?
하기와라 우시오: 나랑 히무로. 그리고 제츠보. 후루미나미도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죽었고… 토키와도 알고 있어.
이바라 쿠리스: 토키와도?! 걔는 왜? 아. 후루미나미한테서 들어서…!
하기와라 우시오: 아무래도 그게 토키와로 하여금 살인에 가담하게끔 만든 것 같아. 다시 살아날 거라는 생각을 했던 거지… 어쩌다 그렇게 됐냐. 분명 좋은 놈이었는데. 돌고 돌아서 이 탑에서 진짜 중요한 사람은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더라.
이바라 쿠리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분명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겠지…
하기와라 우시오: 그건 있을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우리가 도와줘야 하는 거야.
이바라 쿠리스: 네 말이 맞아. 하기와라… 도와주자고.
이바라는 두 주먹에 힘을 불끈 쥐었다. 손의 안쪽이 근질거렸다.
히무로 시라베: 카나리 케이토. 전화를 받지 않아 직접 왔다. 문을 열어라.
나는 문을 세 번 두드렸다.
히무로 시라베: 카나리 케이토. 문을 열어라. 혹시 죽었나? 카나리 케이토. 할 이야기가 있다. 중요한 정보다.
이십여 초가 지난 후에 내 다이얼로그로 카나리 케이토의 전화가 걸려왔다.
카나리 케이토: 뭐야… 나는 네 정보 필요 없어. 전화 걸지 마. 문도 두드리지 말고.
히무로 시라베: 왜지?
카나리 케이토: 할 일이 있으니까!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시계는 엄청나게 집중해야만 만들 수 있어. 그러니 방해하지 말란 말이야.
히무로 시라베: 시계를 만들고 있나. 다이얼로그의 울림도 들리지 않을 만큼 집중했나 보군. 그러나 네가 무슨 작업을 하고 있건 간에 나에게는 정보를 공유할 의무가 있다.
카나리 케이토: 쳇. 나는 관심 없어! 그만 가! 짜증 나게 하지 말고!
히무로 시라베: 그러지.
나는 본인이 알고 싶지 않다면야 강요할 마음이 없었다. 반복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개인의 행복에 더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방해되어서는 안 될 작업에 착수해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기에, 나는 그의 시간을 더 빼앗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나는 다른 이를 찾아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2층에는 그가 있다.
히무로 시라베: 이름 없는 남자. 문을 열어라. 숙소 안에 있나?
이름 없는 남자는 문을 열어 나를 맞이했다. 나는 말했다.
히무로 시라베: 휴식 중에 미안하다만 알려줘야 하는 중요한 정보가 있다.
나나시: 나야말로 정말 미안한데 히무로… 나중에 들으면 안 될까? 나도 지금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거든…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 쿠로하와 관련된 일인가?
나나시: 그래. 너까지 손쓸 필요가 없게끔, 내가 알아서 해볼게.
히무로 시라베: 그 방식이 적절하다면 응원하겠다.
나나시: 고마워. 그럼 나중에 보자.
그는 문을 닫았다. 나는 그다음에 찾아갈 사람을 생각해 보았다. 다음은 캐롤 브라이트인가? 아니. 캐롤 브라이트는 휴식을 취해야 한다. 이름 없는 남자는 그의 말마따나 터치의 안정화와 출력 증강을 맡지만, 캐롤 브라이트는 터치 그 자체를 다루는 사람이었다.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는 사람에게 심신을 뒤흔들 만한 정보를 줄 수는 없었다.
달리 정보를 전해줄 사람이 없었다. 다음 수를 생각해 보기 위해 내 숙소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려는 찰나. 같은 층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 안에서 초췌해진 사람 한 명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팔을 방패처럼 세우고 내 목을 향해 뻗었다. 벽과 자신의 팔 사이에 내 목을 끼우고 밀어붙이려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팔을 잡아채 바깥쪽으로 젖혔다. 팔은 곧 천장을 바라본 채 멈추었다. 팔이 더 꺾일 수도 있다는 위험을 느끼자 팔의 주인 또한 다가오기를 멈추었다.
토키와 아유키는 나를 보며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의 팔을 놓아주었다. 기습이 실패한 이상 그가 나를 꺾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 만큼의 분별력을 기대했고, 다행히 그는 그럴 수 있었다.
토키와 아유키: 히무로…!
히무로 시라베: 할 말이 있나?
나는 예의상 물었다. 당연히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그 또한 무슨 당연한 것을 질문하느냐는 듯이 고개를 두 번 젓고서 내게 말했다.
토키와 아유키: 너 지금 뭐 하고 다니는 거야. 히무로?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짓이야…?
히무로 시라베: 그렇다. 잠시 자리를 옮기지. 다른 이들이 듣는다. 반복에 대한 사실이 퍼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래야겠지?
토키와 아유키는 뒤늦게 그 또한 그런 생각을 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서 낮은 목소리로 내게 따라올 것을 종용했다. 그는 자신의 숙소를 향해 발을 옮기려다가 순간 전신을 경직시켰다.
히무로 시라베: 무슨 문제 있나?
토키와 아유키: 네 숙소로 가자. 히무로. 아니면 네 전용실로.
히무로 시라베: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토키와 아유키: 이유는 아무래도 좋잖아. 네 방으로 가자고.
그의 말대로 나야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아닌 모양이었다. 제 숙소에 많은 것을 또 숨겨두었던 모양이다.
히무로 시라베: 나라면 네 숙소에 숨겨둔 정보 대부분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또 살인게임의 동료들을 위해서는 그 정보를 푸는 게 낫지 않겠나?
토키와 아유키: 어서 가기나 하자. 조용히 하고!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토키와 아유키는 목소리를 낮춘 채 새된 소리를 냈다. 그러지 않겠다면야 나도 그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완강한 자를 설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히무로 시라베: 여부가 있을까. 내 전용실로 간다.
나는 그를 전용실로 안내했다. 첫 번째 재판이 끝난 이래로 내 전용실은 손님을 받지 않은지가 오래되어. 여기저기에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찾아온 이들은 한 명의 유령과 한 명의 사람. 그리고 둘 모두 살인자라.
그도 편하게 있으라는 등의 빈말은 원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애초에 내 전용실은 편하게 있을 곳이 못 되었다. 따라서 나는 본론부터 이야기했다.
히무로 시라베: 나는 제정신이다.
토키와 아유키: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히무로 시라베: 제정신이냐고 물었지 않은가. 대답이다. 정신질환의 여부가 아니라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느냐의 여부를 물은 것이라면, 내 판단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토키와 아유키는 빠르게 내 말의 요지를 받아들였고, 곧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토키와 아유키: 아니. 제정신일리가 없어! 어떻게 이런 사실을 다른 사람한테 알려주려 시도할 수가 있어? 이건 대몰락과 비교도 안 되잖아! 이건 당장이라도 단체 자살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정보란 말이야!
히무로 시라베: 다른 이들이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이 정보의 공유를 통해 탑에 있는 이들은 살인게임의 끝을 향해 갈 수 있다.
토키와 아유키: 살인게임의 끝? 그게 무슨 헛소리야… 끝없이 반복되기 때문에 상황이 이토록 절망적인 걸 모르겠어? 살인게임의 끝을 낸다고? 어떻게 낼 건데?
히무로 시라베: 탈출을 동기로 하는 살인을 차단할 수 있게 된다.
토키와 아유키는 내 말에 떫은 표정을 지었다.
히무로 시라베: 사람을 죽여봤자 살인게임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탑에 있는 이들은 서로를 적이 아닌 아군으로 보게 된다. 갇혀 있는 살인게임에서 협력해야 할 동료로. 이제 왜 사람을 죽여야 하나? 죽여봤자 탈출할 수가 없는 것을.
토키와 아유키: 아니. 살인은 멈추지 않을 거야. 오히려 반복에 대한 정보는 다른 모든 동기의 살인을 만들어낼 거야. 새로운 종류의 살인이 나타날 거라고.
히무로 시라베: 가령 어떤 종류의 살인 말인가?
토키와 아유키: 허무로 인한 살인. 권태로 인한 살인 말이야! 이 살인게임에서 죽더라도, 또 이 살인게임에서 살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게 밝혀지는 순간 탑에 있는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을 이유를 잃어버리게 돼!
그의 주장이 꼭 틀리지만은 않았다. 체벌과 살인자로서 감당해야 할 사회적 시선. 잃어버릴 자신의 미래야말로 사회 속 사람들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인게임이 반복된다면, 살인을 저지르고 처형장에서 고통스럽게 죽을지언정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다면… 탑에 있는 이들은 서로를 도살하게 될까?
히무로 시라베: 탑에 있는 이들이 그렇게 무지하지는 않다.
토키와 아유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지금 탑에 있는 사람들이 성자라도 되는 것 같아?
히무로 시라베: 나는 그들이 무지하지 않다고 했지, 유달리 이지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뜸 찾아가 이 살인게임이 반복된다고 말해봤자 그 사실을 해면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무지하지 않다는 것은, 그것을 덥석 집어삼키다 스스로의 목을 막는 게 아니라 시간을 들이고 그것이 거짓말은 아닌지 개인이 충분히 숙고할 정도의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이쯤 되었다면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렇다면 무지한 사람이란 누구인가?
이토록 믿을 수 없는 정보를 믿고 다른 사람을 도살한 이야말로 무지하다.
토키와 아유키: …히무로. 나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후루미나미 나몬의 정보를 받아들였어. 너의 입장에서는 하루도 채 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며칠이었거든.
히무로 시라베: 충분했을지도 모르겠군. 후루미나미 나몬은 상당한 달변이다. 그리고 너는 일정한 시간 동안 후루미나미 나몬과 부대껴야만 했지. 수면을 충분히 취하지 못해 정신이 명징하지 않은 채로. 심연을 들여다본 자는 심연에 가까워진다.
토키와 아유키: 나를 후루미나미 나몬의 피해자로 취급하지 마. 말했을 텐데. 나는 내 의지대로 움직였어. 어떻게 해야지만 탑에 있는 이들이 더 안전할까를 생각했다고. 설령 내가 배척당하게 될지언정. 칸나즈키와 야가미가 있었다면 탑은 더 위험한 장소가 되었을 거야. 나는 그렇게 되는 것을 막았을 뿐이야.
히무로 시라베: 반복을 들었을 경우 다른 이들이 분명 살인을 저지를 거라 생각했던 것은, 네가 그로 인해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닌가? 스스로에게 말했을 테지. 죽여도 다시 되살아나니, 또 죽어도 다시 되살아나니 그걸 알고 있는 이상 살인이 아니라고 말이다.
토키와 아유키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람을 죽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살인을 하는 마음으로 죽였을지. 어차피 살아날 테니 일시적으로 살인게임에서 해방시켜 주었을 뿐인지.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히무로 시라베: 너에게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토키와 아유키. 너 자신이 살인에 가담하기 전에 그것을 재고하게 만들 누군가가 있어야만 했다. 네가 그런 상황에 놓인 것이 유감일 뿐이지만, 너에게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
나는 토키와 아유키가 본인의 잘못을 부정하며 입에 거품을 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진 그의 태도를 보면 그런 행동양식을 예측할 수 있었다. 몇몇 잡범들은 자기 자신에게 조금의 의심이라도 품는 순간 자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키와 아유키는 그러는 대신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토키와 아유키: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히무로. 정말. 맞을지도 몰라.
그리고 그는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는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모든 이들이 스스로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사람의 목숨이 연관되어 있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니 그도 자신의 행동을 전부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토키와 아유키: 하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왔어. 그러니 일관성 있게 행동해야만 해. 나는 너를 막을 거야. 히무로. 카텟 기관의 모든 사람들을 막을거야. 더 이상 카텟 기관의 사람들이 우리들을 우롱하게 두지 않겠어.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나몬이 카텟 기관에 대해서도 귀띔해주었나 보지? 무어라고 말했나?
토키와 아유키: 그건 네가 알 필요 없어. 중요한 건 하나야. 이 무간지옥에서 탈출할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는 거. 그 흑막을 찾아야만 해.
나는 그를 보고서 이 수많은 반복 도중 많은 반복 속에서 그는 탑의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인물이었으리라고 추측했다. 극단적인 신체적, 정신적 환경에 놓인 뒤 광기를 접하지만 않았더라도. 그가 이렇게까지 변해야 했던 선행 사건들만 없었다면 그는 분명 믿을 수 있는 우군이 될 수 있었다. 윤리의 기준선이자 만연한 혼란 속에서 다른 이들에게 질서를 줄 수 있는 사람도 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이번 반복에서만큼은 아니다.
캐롤 씨의 전용실로 가기 위해 2층으로의 계단을 내려가는 와중. 나는 상당한 불안을 느꼈다. 파리가 꾀인 쓰레기통에 뚜껑을 닫고 내버려 두고 싶은 충동을 느끼듯. 나는 내가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한 번 정리해 보자. 캐롤 씨는 어릴적 카이다와 생이별한 뒤로 그녀와 다시 만날 만을 그려왔다. 최근 죽었다 다시 살아난 끝에 캐롤 씨는 카이다가 자신의 여동생임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캐롤 씨는 자매와 지금껏 못했던 것을 전부 다시 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여동생을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게 마비시켜 버리려다가 그만두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생각하면 빈말로도 좋은 전망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전용실을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무언가가 내 맨살을 쿡쿡 찌를 것 같다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용접의 불티나 식물의 날카로운 가시의 형상이 뇌리에 떠올랐다.
나나시: 절연하게 되는 걸까.
절연. 두 글자. 하지만 단어를 쓰는 건 쉽고 직접 겪는 건 어려운 법. 나는 의지가 그리 강한 사람이 아니니 당장 내일부터 왜 캐롤 씨와 등을 돌리기로 했냐고 땅을 구르며 후회하게 될지도 몰랐다. 다시 그녀를 보지 못하리라 생각하면 앞일이 깜깜하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생각하기에 그게 옳은 일이었으니, 우선은 불평 말고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이 느려지려 할 때마다 나 자신을 다그친 끝에. 나는 두 계단씩을 급하게 내려가 이윽고 캐롤 씨의 전용실 앞에 섰다.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나쁜 경우의 수가 생각났다. 수갑에 묶여 있었기에 생리 현상을 해소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누군가가 문을 따고 침입했을 경우 저항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잠에 들었다면 처형당했을 것이다. 모노로그가 조용한 것을 보면 그런 일이 없었던 것 같지만…
결국 나는 캐롤 씨의 무사한 모습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다. 나는 캐롤 씨의 열쇠를 열쇠구멍 안에 넣고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나는 몸을 옹송그리게 만드는 애환의 외침을 들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는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나나시: 캐롤 씨! 괜찮으세요?!
캐롤 브라이트: …어떻게 됐어요?
캐롤 씨는 천천히 내게 고개를 돌린 뒤 물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다행히도 내가 상정했던 나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 사람이 하루에 겪을 수모의 양은 배신을 당하고 수갑에 묶이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심지어 묶인 손은 중지가 잘린 왼손이다.
기이하다고 느낄만치 그녀는 침착하고 단정해 보였다. 다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좀처럼 내 뇌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캐롤 브라이트: 어떻게 됐냐고요. 네?
나나시: 일단 풀어드린 다음 말씀드릴게요.
나는 수갑을 열쇠로 철컥 열고 나서 캐롤 씨의 손목을 보았다. 그 잠깐 사이에 그녀의 손목은 몸부림과 탈출 시도로 인해. 차갑고 또 뭉툭하며 투박한 쇠고리에 짓눌려 붉은 자국이 남았다. 환자에게 좋지 않을 텐데… 그저 상처가 덧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나는 몇 초동안 멍하니 그녀의 손목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나나시: 캐롤 씨. 배심원이 집행유예를 내렸어요. 더 지켜보기를 원하네요.
캐롤 브라이트: …정말 다행이군요.
캐롤 씨는 몸을 냉장고에 기댄 채 그녀의 몸을 주르르 미끄러뜨렸다.
캐롤 브라이트: 정말… 정말 다행이다… 아아…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팔을 그녀의 무릎 위에 포개고서 그 위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몇십 초 정도를 아무 소리 없이 몸을 웅크리고 있던 캐롤 씨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캐롤 브라이트: 설마 거짓말은 아니겠지요?
나나시: 거짓말 아니에요.
캐롤 씨는 잔잔한 의심을 얼굴에 남긴 채 내게 팔을 뻗었다.
캐롤 브라이트: 일으켜 주세요. 손 말고 팔을 잡아요. 정전기 때문에 놓쳤다간 저만 엉덩방아 찧으니까.
나는 그러기로 했다. 그녀는 더 이상 장갑을 착용하지 않으니 이런 종류의 상호작용에는 불편함이 따랐다. 그게 캐롤 씨가 흰 장갑을 착용했던 이유 아니었던가? 일상생활 도중 터치가 발생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그러나 그건 과거의 일이었다. 캐롤 씨는 더 이상 장갑을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아마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을 억압해 가며 살지 않겠다는, 말 없는 선언이리라.
나는 천천히 그녀의 손이 아닌 두 팔로 손을 뻗었다. 경계심 많은 야생동물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안심을 시키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듯. 동작에 충분히 뜸을 들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발로 바닥을 디뎠다.
나는 그녀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녀는 내 눈높이 위로 다시금 솟아올랐다. 나보다 두 치는 더 큰 그녀의 장신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곧 나는 두 손을 모은 뒤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나나시: 미안해요. 캐롤 씨.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네요. 이런 식으로 당신을 배신하는 건 공정하지 않은 일이었어요. 당신을 실망시켰죠.
나는 내 생각을 말했다. 캐롤 씨는 잠자코 내 생각을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캐롤 브라이트: 고개를 드세요.
나는 그렇게 했다. 그 앞에는 두 발자국을 더 다가온 캐롤 씨가 있었다. 순간 숨이 막힐만치 예뻤다. 나의 내면에 있는 맹인 바보가 고작 대의라는 것을 위해 이 사람을 배신했느냐며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소리마저 들을 수가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 그럼 이제 제가 당신이 한 일에 대답을 줄 차례군요. 나나시 씨.
아. 반대쪽 뺨을 맞을 때가 온 건가… 나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목을 빼고 그녀에게로 왼쪽 뺨을 대어 주었다. 나는 다시금 내 맨살을 쿡쿡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캐롤 씨의 시선이었다. 과연 어디가 올바른 타격점일지 고민하는 시선일까?
조용히 몸을 굳힌 채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마음의 준비라는 것은 어떤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상정하는 것이다. 미루어하는 짐작. 그것은 추측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떤 충격도 내 얼굴을 향하지 않았을 때. 나는 약간의 의아함마저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캐롤 브라이트: 고개 돌려요.
내 턱에 잠깐 따가운 느낌이 스쳤다. 그녀의 오른손이 나의 턱을 붙잡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한 줄기의 생각이 내게로 흘러들어왔다.
'서운해'.
캐롤 씨는 왼쪽으로 기울어진 내 얼굴이 정면을 바라보게끔 돌려놓았다. 나는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서 그녀는 다시금 뚫어져라 나를 보았다.
나나시: 저… 저기요…?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그녀의 손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대다가 그녀를 피할 방도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체념을 한채 그녀를 마주 보기로 했다.
캐롤 브라이트: 저는 치나미를 포기할 수 없어요. 나나시 씨. 치나미는 저 없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당신이 너무도 소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을 위해 치나미를 버리지는 않을 거예요. 누가 더 소중하냐 소중하지 않느냐의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게 아니에요. 치나미는 단지… 다른 몸으로 다른 삶을 살았던 저예요.
캐롤 씨의 말은 단지 비유가 아닐지도 몰랐다. 캐롤 씨와 카이다는 쌍둥이니, 두 사람은 말 그대로 한 존재에서 서로 갈라졌을 수가 있다. 갈라진 데다가 서로 아주 오랜 시간동안 떨어져 있었으니 재회가 각별할 수밖에.
캐롤 브라이트: 그러니… 저만큼은 치나미를 믿어야 해요. 치나미를 저버리는 건 곧 저 자신을 놓쳐버리는 일과 같으니까요. 당신이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알아요. 제가 당신이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하지만…
나나시: 하지만 당신은 제가 아니죠.
캐롤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캐롤 브라이트: 그래요. 일단 당신이 치나미를 해하려 한 이상. 저희는 이대로일 수 없어요. 당신도 남자답게 각오를 했으니 존중해 주어야겠죠. 제가 당신한테 미쳐서 동생까지 내버리지는 않을 줄은 알고 있었잖아요? 저와 영영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될지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여기셨던 거죠?
그녀의 말을 듣자 가슴이 아팠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나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분명 생각하지 않았던가? 무언가를 파괴해야만 했다고. 나만 사랑하면 족하다고 말이다.
나나시: 네… 미안해요.
캐롤 브라이트: 미안하다는 말은 그만해요. 달리 할 말은 없나요?
그녀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채 내 턱에서 오른손을 뗐다. 달리 할 말. 달리 할 말… 그녀는 나에게서 해야 하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미안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그 숨은 말뜻을 생각해 보았다. 달리 할 말이 있냐는 물음이란 달리 할 일이 있느냐는 물음과도 같았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사과밖에 없는데 내가 그걸 보고 싶지 않으니까, 이제 그만 사라지라는 뜻인가?
나는 그녀가 하려는 말이 분명 그것이리라 짐작했다. 그렇기에 안타깝지만, 몸을 천천히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나시: …자리를 피해 드릴게요. 먼저 카이다의 숙소로 갈 테니까. 편하실 때 오시면…
캐롤 브라이트: 그게 다예요?
귀가 따가워졌다. 그냥 따가운 게 다가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가 세게 꼬집기도 했다. 캐롤 씨의 손이었다. 캐롤 씨는 내 귀를 손가락으로 붙잡고서 나를 조용히 노려보았다.
이게 아니었나? 그렇지만 사과를 하는 게 아니라면, 그저 사라지는 게 맞는 일이 아닌가? 나는 막막함을 느끼면서도 그녀에게 물었다.
나나시: 저… 캐롤 씨…? 갑자기 왜 그러세요…?
캐롤 브라이트: 그렇게 쉽게 떠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왜 나를 떠나지 말라고 졸라대지 않는 거죠? 왜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내가 미쳤던 것 같다면서 무릎을 꿇고 저한테 매달리지 않는 건데요? 당신이 그토록 기만적인 사람이어도 그만큼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으로 되었을 텐데. 어떻게 저를 그토록 쉽게 잘라낼 수가 있어요?
나나시: 윽! 아팟…!
그녀가 손톱으로 내 귓불을 꼬집자 내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그녀가 귓불에서 손가락을 떼고서도 얼얼하고 뜨거운 느낌은 한동안 나를 떠나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이제 저를 사랑하지 않는 거군요. 이제 당신까지 나를 버리겠다는 거잖아요. 네?
나는 그녀의 이마에 불거진 혈관 한 줄기에 눈길을 보냈다. 정말 나를 미워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차마 입을 열기도 전에 캐롤 씨는 말을 쏟아냈다.
캐롤 브라이트: 왜인지는 알겠네요. 당신도 내가 무서운 거겠죠. 그렇잖아요? 결국 당신도 이런 능력을 가진 여자는 꺼려진다는 거군요? 아아. 네네. 그거야 어쩔 수 없겠네요. 네에. 어쩔 수 없고 말고요. 낳아준 부모도 나를 버렸으니 그럴만하죠.
캐롤 씨는 냉소적인, 조금도 납득하지 못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내 어떤 말이 그녀에게 그런 인상을 주었는지도 좀처럼 떠올리지 못했다. 확실한 건 그녀의 의혹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나는 은인을 냉장고에 묶어두는 사람일지언정 그녀를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당황한 채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려는 게 내 노력의 전부였다. 나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진정하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면 더 화를 내지 않을까?
나나시: 아니에요. 캐롤 씨… 저는 그런 의도로 드린 말씀이 아니었어요. 그저… 당신도 나를 곁에 두고 싶지 않을 테니…
캐롤 브라이트: 거짓말…! 당신이 나를 곁에 두고 싶지 않은 거잖아요! 우리 자매를 괴물로 보니까 내버리려는 것뿐이면서!
캐롤 씨는 내 귀를 당기고서 소리쳤다. 그녀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단지 손뿐만 아니라 그녀의 목소리 또한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리고 짧게 이어진 그 터치 속에서 나는…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다. 배신감. 의심. 불신. 원망. 그것은 너무나도 어두워서. 나는 그 짙은 먹구름 앞에서 그저 굳어버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또다시 전해진 생각. 서운해.
캐롤 브라이트: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야…! 당신도 그자들과 똑같아! 다 똑같아! 이럴 줄 알았어. 진작 알았어야 했어! 당신도 내게서 등을 돌릴 줄 알고 있어야 했는데…! 아무도 우리를 받아들여주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내 귓바퀴에서 손을 떼고서 불같이 화를 냈다. 나는 그 정도로 캐롤 씨가 화난 것을 처음 보았다. 캐롤 씨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린다기보다는 몸이 그녀가 담은 화에 반응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모은 두 손에 자신의 얼굴을 묻고서 열병에 걸린 듯이 신음했다.
캐롤 브라이트: 흐으… 흐으… 흐… 어디 말이라도 해 봐요! 당신도 무슨, 내가 미친 황소라도 되는 것처럼 진정해야 한다는 듯이 보지 말고요! 변명이든 뭐든 좋으니까 말하라고요!
그녀가 얼굴에서 손을 뗐을 때. 나는 그녀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보았다. 그녀는 내가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을 때도 눈물을 흘렸지만, 원망을 동반한 그녀의 울음은 날카롭고 또 왈칵 터져 나왔다. 그녀 스스로 잠재우기가 어려울 정도로.
나나시: …괜찮으세요. 캐롤 씨?
이런 말은 캐롤 씨의 화를 다시 불러 일으킬 수도 있었다. 내가 지금 괜찮지 않아 보인다는 거냐며 캐묻는 그녀가 생생히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돕고 싶으니까.
그녀의 화는 내가 어떻게든 식혀 보려고 애를 쓰기도 전에 그 스스로 무너져 버렸다. 캐롤 씨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자신의 손목으로 닦았다. 훌쩍임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잦아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로 건넸다. 몇 초가 지난 뒤 캐롤 씨는 손수건을 내 손에서 낚아채고 자신의 얼굴에 꾹꾹 눌러댔다.
캐롤 씨는 떨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다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 미히… 미안해요. 오늘 좀 이상하네요… 호르몬 때문에 그래요.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여러 개 떠올랐다. 진정해라. 자신을 상처 입히지 마라. 내 잘못이다. 용서를 받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 말은 전부 변명이자, 화에 기름을 부을 듯한 말일뿐이었다. 캐롤 씨는 내게 손수건을 돌려주고 나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캐롤 브라이트: 제가 한 말은 잊어 주세요. 저는 우울할 때면… 제가 아니게 되거든요. 가끔씩 그래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한테 내 불안정함을 내던지기나 하고… 못 써먹을 인간이네요.
나는 한 번 내려앉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침잠해 버리는 그녀를 보았다. 한쪽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서 자신의 팔만 끌어안은 채. 그녀의 낯빛은 눈에 보이게 어두워졌다. 위태로움. 혼란. 그녀는 그 소용돌이와 같은 흐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나시: 캐롤 씨.
캐롤 브라이트: 그건 사실이 아니라는 말 같은 걸 할 생각이라면, 하지 마세요. 사실인 걸 제가 알아요. 저는 엉망진창이에요. 제 모든 건 다 엉망진창이에요. 심지어는 제가 가는 곳마저도 다 엉망진창이라고요. 일본. 미국. 다시 일본. 이제는 탑이에요. 원래 사람 사는 곳이 다 이런가요? 아니면 제가 가서 다 망쳐놓는 거예요?
나나시: 당신은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어요. 당신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도우려고 했어요. 아시잖아요.
캐롤 브라이트: 제가 아는 거라곤 도무지 살면서 좋은 일이 좀처럼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뿐이에요. 그것 말고는 다 모르겠어요. 겨우 당신이랑 치나미를 다시 만났는데, 이제는 그저 행복하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를 않잖아요.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운명이란 게 정말 있다면 그냥 적당히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캐롤 씨는 지금껏 쌓여 온 가슴 속의 암적 물질을 토해내듯이 말했다. 모든 울분과 비참함이 그녀가 사용하는 단어에 응축되어 있었다. 문득 이런 이야기가 내 흐릿한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한 남자가 의사를 찾아가 우울하다고 말한다. 삶이 고되며 잔인하다고, 위협적인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다고 말한다.
의사의 처방은 간단하다. "위대한 광대 팔리아치의 공연을 보세요. 그러면 기분이 나아질 겁니다."
그러자 남자는 눈물을 터뜨린다. "하지만 선생님, 제가 팔리아치입니다."
팔리아치를 위한 팔리아치는 없었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교훈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상담사를 위한 상담사는 어디에 있는가? 상담사는 누구에게 상담을 받는가?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에 손을 얹었다. 순간 배신한 장본인인 내가 그녀에게 그래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곧 그 의문을 접어두었다. 주변에 나 밖에 없으니 내가 해야 한다고. 적어도 카이다와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나나시: 왜 그런 말을 하세요. 캐롤 씨? 당신만한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멋진 사람이 당신인데요.
캐롤 브라이트: 당신이 나에 대해 모르니까 그렇죠.
캐롤 씨는 그 한마디로 자신이 멋지다는 논란을 일축했다.
캐롤 브라이트: 지금도 제가 멋지다고 생각하잖아요. 저는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니에요. 웃긴 점 하나 알려 줄까요? 저는 당신이 배신했다는 사실보다 배신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더 화가 났어요. 당신이 나한테 눈이 멀지 않아서 실망했고, 당신이 다른 모든 것을 버릴 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기분이 나빴던 거예요. 참…
캐롤 씨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 번 웃고서 고개를 내저었다.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가 나아지기를 기대하는 건 저뿐이니 또 어떤 피해를 입힐지 모른다는 건 알겠어요. 아는데… 서운하단 말이에요. 나는 정말 당신과 치나미가 전부인데…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나를 포기할 수 있다는 게. 그게…… 히히… 저 지금 정신 나간 거 같지 않아요? 당신이 나를 두고서 이성적인 판단을 했기 때문에 서운하다는 게요?
캐롤 씨는 발작적으로 웃고서는 턱을 덜덜 떨었다. 나는 그토록 흔들리는 캐롤 씨의 모습을 이전에 한 번 보았다. 두 번째 살인이 일어나기 전. 캐롤 씨는 내 앞에서 강한 감정의 동요를 보였고 큰 고뇌에 휩쌓여 있었다. 그녀의 그림자였다. 칼 융의 그림자. 페르소나가 담당하지 않는 모든 내면적 암흑을 포함하는 것.
나는 그리고 그녀의 그림자와 다시 마주했다. 억누르고 있던 모든 감정들은 한 번의 죽음과 나의 배신을 통해 제어할 수 없이 밖으로 터져 나왔다. 분명 다른 이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일을 하는, 흔들려서는 안 되는 직종에 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통제해야 하고 능숙히 통제하는 사람일지라도 그림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꽁꽁 숨겨놓은 만큼 짙고 또 어두울지 모른다…
그것은 가장 순수한 극독이었다. 대면하는 순간 그 사람의 근간을 무너지게 만들 정도의 끔찍함.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낸 캐롤 씨는 그렇기에 더없는 자기혐오와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캐롤 씨마저도 그녀의 감정이 그녀의 것임을 긍정할 수 없었다. 받아들였지만, 이것은 끔찍하다고 했다.
그녀 스스로는 할 수 없다. 나는 팔을 벌리고 캐롤 씨의 몸을 감싸 안았다. 두꺼운 옷을 넘어 전해지는 온기에 나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있는대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보호본능이었고, 걱정어있고, 그녀가 내 곁에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었고 그녀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었다. 사랑이었고, 이 순간이 언젠가 우리를 떠나리라는 미래에 대한 슬픔이었다. 그렇기에 그 순간이 멈추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느꼈다.
나나시: 괜찮아요. 그래도 돼요.
나는 팔로 그녀를 끌어안으며, 그녀가 몸에 힘을 얼마나 가늘게 넣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붙잡는 손을 느끼자 캐롤 씨는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그녀의 몸에서 힘을 뺐다. 캐롤 씨는 차라리 곧장 쓰러져버릴 만치 낭창거렸다. 그녀는 저항하 않았고, 그 가증스러운 손 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캐롤 씨는 나를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리고서 그녀는 그저 얇고 얇아 이내 멈추어 버릴 정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나시: 제 앞에서만큼은 그래도 돼요. 캐롤 씨. 초고교급 상담사가 아니어도 돼요. 그저… 당신이 되세요. 솔직한 당신이요.
캐롤 브라이트: 왜 그런 불쾌한 일을 원하세요…? 저 자신도 싫어하는 모습을 당신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토록 당신의 사랑을 잘 믿어요…? 어떻게요?
나나시: 당신이 스스로의 일면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제가 사랑해 줘야겠죠.
나는 내가 그녀를 지탱해 줄 수 있는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랐다. 아무튼 간에 캐롤 씨가 사랑하지 않는 그녀 자신 또한 사랑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나뿐이라면 내가 해야 했다.
나나시: 착하다. 우리 캐롤 씨. 정말 훌륭한 사람이에요. 세상에서 제일 착해.
캐롤 브라이트: 꼬마 대하듯이 굴지 마세요. 나보다 어리면서. 마음에 없는 말을 해봐야 기쁘지 않아요.
캐롤 씨의 팔이 천천히 젖혀졌다. 무언가가 내 얼굴에 닿았다. 캐롤 씨의 손이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내 뒷머리를, 오른손으로 내 오른쪽 뺨을 만졌다. 고개는 나를 향했다. 곧 나는 나를 뒤돌아보는 그녀와 마주했다. 길고 섬세한 속눈썹. 혹여나 서로가 데일까 조심스럽게 내쉬는 숨결. 살과 머리칼의 향내음. 닿지 않아도 전이되는 온기. 내 감각이 이렇게 토로했다. 숨 막혀 죽을 것만 같아…
정전기는 없었다. 저항 작용은 없었다. 이미 몸을 맞대고 있었기에 전하량의 균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서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이유가 더 컸다. 캐롤 씨에게서 더운 숨이 한번 흘러나왔다.
캐롤 브라이트: …당신은 저를 사랑하지도 않잖아요.
나나시: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캐롤 씨가 고개를 내젓자 그녀의 머리카락이 나를 간지럽혔다.
캐롤 브라이트: 잘 모르겠어요. 나나시 씨…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다고요.
나나시: 확실하게 알아볼 방법은 하나뿐이죠.
나와 캐롤 씨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리의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카이다 쿠로하: 아까 거는 잘했다. 칭찬해 줄게.
제츠보: 칭찬해 주겠다는 건 더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자기가 부리는 사람한테 하는 말이고, 이럴 때는 고맙다고 하는 거야. 카이다.
카이다 쿠로하: 고…맙다. 그래. 고마……워.
카이다 쿠로하는 특정 어휘의 구사에 거부 반응을 보였다. 안면이 뒤틀렸고, 어절을 나누어 각자 다른 말인 듯이 발음해야만 했다. 제츠보가 보기에는 그것도 놀랄 만한 변화였다. 원래대로의 그녀였다면 자신이 받은 도움 따위는 깔끔하게 잊어버린 다음 다른 불만을 주절주절 늘어놓고도 남았으니까.
제츠보: 사실 너 좋으라고 그런 게 아니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어. 결국 너한테 득이 되기는 했지만, 그건 한 번 고쳐 써 보자는 생각 때문이지 너를 완전히 믿는 게 아니야. 나나시도 분명 그럴 거고.
카이다 쿠로하: 나도 알아. 니들이 나 싫어하는 거. 내가 병신인 줄 아냐? 그래도 씨발. 그 개 같은 짓을 안 당했으니 마음이 놓이는 거다…
제츠보: 기억 지우기가 어지간히 무서운가 보지?
카이다 쿠로하: 그냥 기억 지우는 게 다가 아니야. 그 뭐냐… 내가 어렴풋이 알기로는 명령을 내릴 수도 있을 거야. 몸이 굳는 것만으로도 존나 짜증 나는데. 기억 지워지기까지의 과정이 또 더럽게 아파. 머리가 터질 것 같고… 그리고. 그래. 무서워. 이제 언니랑 만나서 더 무서워. 또 잃기는 싫어… 그 변태 놈이 영안로 안에서 나한테 썼을 때도.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언니가 아니었으면 여기에 있지도 못했겠지…
제츠보는 카이다가 눈에 띄게 주눅드는 것을 보았다. 심지어는 초조하게 다리를 덜덜덜 떨어대기까지 했다. 제츠보는 나나시가 카이다에게 이렇게까지 겁에 질리게 만들 만한 체험을 주었다는 것을 좀처럼 상상할 수 없었다. 제츠보가 떠올리는 나나시란 상당히 숫기가 없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제츠보: …나나시가 캐롤을 배신할 정도라면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정말이지 가차 없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만약 네가 재범을 저지르면 나도 꼭 무죄를 주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
카이다 쿠로하: 알겠어. 알겠다고. 안 그러면 될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 나서도 카이다는 초조함에 양쪽 다리를 쩍 벌리고선 부산스럽게 덜덜덜 떨어댔다. 제츠보는 다시금 카이다의 행동거지를 지적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말을 듣지도 않을 테고, 하나하나 신경을 쓰다가는 답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저런 걸 지적할 사람은 따로 있다. 캐롤 브라이트라고, 그녀와 조금도 닮지 않은 카이다의 언니였다.
하지만 의문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나나시 앞에서는 저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여자끼리만 남으니 저러는 건, 적어도 그녀 또한 남자한테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수치스러운 일이라고는 알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저러는 거야? 자기는 부끄러움 같은 나약한 것 따위 모른다는 걸 강조하고 싶은 건가? 하지만 부끄러워하잖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제츠보는 더욱 카이다가 얼마나 모순적인 인간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개미집 세트를 들여다보듯이 제츠보가 자신도 모르게 카이다를 관찰하게 된 와중. 카이다의 다이얼로그가 울렸다.
카이다 쿠로하: 어. 뭐야. 언니인가?! 아. 아니잖아!
놀람과 의문 -> 기대 -> 실망과 분노의 감정 단계를 거친 카이다는 확 짜증을 내며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사납게 소리쳤다.
카이다 쿠로하: 누구야. 씨발!
통화의 음성은 카이다에게만 들렸다. 전화를 건 상대는 그 느닷없는 괴성에 놀라 순간 흐억! 하는 소리를 냈다. 카이다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잠깐. 이 그냥저냥 한 목소리. 이거. 걔 거 아니야? 근데 얘가 왜 나한테 전화를 걸지? 어디서 봤다고? 씹새끼가?
토키와 아유키: 안녕. 카이다.
카이다 쿠로하: 뭐야. 푸른곰팡이…? 왜 나한테 전화를 했냐? 너 뭔데? 너 뭐 돼? 푸른곰팡이 주제에.
토키와 아유키: 왜 내가 푸른곰팡이야.
카이다 쿠로하: 머리가 파라니까.
토키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토키와 아유키: 그게 다야? 그러면 블루베리라고 불러줄 수도 있잖아. 청바지라고 불러줄 수도 있고. 푸른 해안이나 파란 장미라 부를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카이다 쿠로하: 무슨 그딴 거로 불러달라는 말을 하냐. 너는? 쪽팔리지도 않아?
다이얼로그 너머의 토키와는 제츠보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순간 답이 안 나오는 막막함과 짜증을. 하지만 이내 토키와는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있으니. 사소한 일은 덮어두는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토키와 아유키: 네 도움이 필요해. 카이다. 이 살인게임의 흑막이 우리를 조종하게 둘 수는 없어. 너도 더 이상 모노로그의 명령을 받지 않으니, 흑막에게 대항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카텟 기관의 가장 큰 물리력에게도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카이다 쿠로하: 카펫 뭐시기? 지금 깡…ㅌ…가 아니라 제츠보 얘기냐? 그래. 내가 세긴 하다. 그런데 내가 왜 너를 도와줘야 하는데? 병신아.
제츠보는 이 즈음에서 왜 자신의 이름이 카이다의 입에서 나오는지 궁금해졌다. 제츠보는 카이다가 누구와 통화를 하는지도 몰랐다. 단 하나의 단서가 있다면 병신이라 부르는 걸 보니 분명 카이다가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데, 카이다는 캐롤을 제외한 모든 이를 싫어했다.
토키와 아유키: 이건 비단 나의 문제가 아니니까. 우리는이 탑을 설계하고서 우리를 끊임없이 죽고 죽이게 만드는, 카텟 기관에게 저항해야만 해. 히무로, 나나시, 마유즈미, 제츠보. 전부 카텟 기관과 연결되어 있어.
카이다 쿠로하: 뭐?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걔네가 나쁜 놈들이라고? 그럼 왜 걔들도 여기에 갇혀 있는데? 같은 편이 배신을 때렸어?
토키와 아유키: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러나 이 살인게임에 참가하고 있는 모든 이들. 너와 캐롤 씨까지 이 살인게임에서 빠져나갈 아주 작은 실마리가 있다면 바로 카텟 기관에 있어. 생각해 봐. 흰 물건, 제츠보, 최근 떨어진 시라유키 히메리라는 사람까지 전부 카텟 기관 사람이야. 우리가 이 탑에 처음 왔을 때 탑에 광선을 쏜 자들도 카텟 기관이지.
토키와 아유키: 이게 우연이라고 생각해? 카텟 기관이 정말 우리를 도울 용의가 있다면 진즉 살인게임은 끝이 났을 거야. 그리고 또 말 못할 이유가 있지만, 중요한 건 카텟 기관 사람들 중에 이 살인게임의 설계자나. 직접적인 흑막마저 있을지 모른다는 거야. 우리가 어떻게든 해야 해. 카이다. 그래야 이 탑에 있는 모든 이들이 자유를 되찾을 수 있어.
카이다 쿠로하: 탑에 있는 모든 이들?
카이다는 이 대목에서 집중력을 잃었다. 그 범주는 카이다의 마음을 동하게 하지 못했다. 그녀는 탑에 있는 이들 따위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오직 그녀와 그녀의 언니만 행복하다면 사실 다른 이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토키와도 카이다가 이런 사람일 줄은 몰랐다. 그것이 그의 실책이었다.
토키와 아유키: 맞아. 내 말을 믿기 어렵겠지만, 그리고 또 협력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카이다 쿠로하: 크하! 그래. 믿기 어렵다. 내가 그딴 소리를 믿을 정도로 병신으로 보이냐? 꺼져!
토키와 아유키: 아니. 자. 잠깐. 카이다!
카이다는 웃으며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서는 자신의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침대가 삐걱이며 비명을 질렀다. 침대의 매트리스는 조금 더 본래의 형상을 잃으며 찌그러졌다. 카이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웃었다.
제츠보: 대체 누구길래 그렇게 웃어대? 누구를 못살게 군 거야?
카이다 쿠로하: 야. 제츠보. 너 마침 말 잘했다. 푸른곰팡이가 너 흉보는데? 어떻게 할래?
제츠보: 뭐? 토키와가? 설마 그 녀석까지 내가 기계라고 욕하는 건 아니겠지? 뭐라고 했는데?
카이다 쿠로하: 카텟 기관에 같이 대항하재. 카텟 기관이 탑을 설계하고 우리끼리 죽이게 만든다는데? 그러니 저항하재.
제츠보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카이다에게 즉각 물었다.
제츠보: 그리고?
카이다 쿠로하: 어. 뭐?
제츠보: 그리고 또 뭐라 했냐고.
카이다 쿠로하: 그리고? 어. 카텟 기관 사람들 중에 설계자나 흑막이 있을 수도 있대. 뭐… 개소리지. 씨발. 카텟 기관이 배후면 왜 모노로그가 흰 물건을 없애겠다고 나한테 의뢰를 맡겼겠냐? 푸른곰팡이 그놈도 진짜 멍청하다. 안 그래? 우리 도와주는 쓸모 있는 새끼들한테 말이야. 하. 병신.
제츠보: …그렇네.
캐롤 씨와 내가 서로 떨어진 뒤 우리는 아무런 합의 없이도 테이블에 앉았다. 그곳은 캐롤 씨의 상담사 부분이 지배하는 장소였다. 그녀가 안정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캐롤 씨는 주전자에 물을 데워 홀짝홀짝 마셨다. 몸이 녹으면서 나오는 기분 좋은 한숨을 뱉으며, 캐롤 씨는 이렇게 말했다.
캐롤 브라이트: 현실적으로 당신이랑 제가 영영 얼굴을 보지 않고 살 수는 없어요. 당장 내일 마유즈미 씨에게 터치를 보려면 다시 만나야 하니까요. 그리고 사실 저는 별반 그러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번 목숨만큼은 후회 없이 살 거라서. 당신을 용서할 수도 있겠지만…
캐롤 씨는 나를 보고서 눈가를 찌푸렸다.
캐롤 브라이트: 제 화가 아직 덜 풀렸네요. 당신이 저와 다른 분들의 안위를 생각해서 그랬다는 건 알지만, 저희 사이의 신뢰가 깨져버린 이상 없었던 일처럼 넘어갈 수는 없어요. 아무리 제가 당신을 좋아해도 못 봐줘요. 그런 건 건강하지 않은 일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캐롤 브라이트: 그러니 여태까지 지냈던 것처럼 줄곧 같이 붙어 다니기는 어려워요. 제가 속이 꽤 좁거든요. 별거한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별거도 아니네. 애초에 내일 마유즈미 씨한테 터치를 쓰려면 만나야 하니까… 그래도 당신 마음을 알았으니 여유가 생기긴 하네요. 잠깐.
캐롤 씨는 내게 손가락을 가리켰다.
캐롤 브라이트: 지금 대처가 애매하다고 생각했죠? 왜요. 불만 있어요? 불만 있으면 말로 해요. 나중에 궁시렁거리지 말고요.
나나시: 제가 어찌 불만이 있겠나요. 마님.
캐롤 씨는 내 말에 작게 웃고선 뜨거운 물을 홀짝였다. 말 그대로. 여부가 없었다. 일단 저지른 이상 캐롤 씨의 처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도리였다. 나에게는 기쁜 일이었지만, 과연 이것이 올바른 끝맺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쓴 맛을 내는 사탕인데, 캐롤 씨는 입 안이 아려오는 것을 느끼고도 나를 뱉지 못했다. 왜냐고? 그녀는 사탕을 필요로 했으니까. 나 말고는 그 무엇도 입안에 넣을 수 없다고 느꼈으니까.
나는 인공지능이 내린 말을 다시금 곱씹었다. 캐롤 씨는 한 번 죽은 여자다. 그건 죽은 적이 없는 여자와 크게 다르다. 나는 하나의 커다란 현상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다…
나는 그제야 인공지능의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한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저지른 행동의 여파를 과소평가했다. 인공지능이 그토록 놀란 이유도 그제서야 알았다. 나는 나 스스로를 그다지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기에 그녀에게도 내가 그다지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캐롤 씨를 사랑하는 마음이 캐롤 씨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크리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꼭 그게 아닐지도 몰랐다. 나는 당연히 내 사랑이 더 크리라 오만했고… 내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에 감사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나를 툭. 끊어내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나의 경솔한 발상보다 더 그녀의 가슴속에 크게 들어서고야 만 것이다.
나는 문득 카이다가 두려워한 상황이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발생하는 일. 카이다는 캐롤 씨가 그녀를 어떻게 대해도 자신이 캐롤 씨를 떠날 수 없으리라고 말했다. 내가 캐롤 씨에게 수갑을 채워 냉장고에 묶어 두고도 단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결국 죽음이야말로 모든 것의 악이었다. 한 번 죽었기에 그녀는 절박해졌고,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서 나를 놓을 수 없었고 그녀를 되살린 나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나나시: 혹시 제가 필요해지면 부르세요. 찾아갈게요.
캐롤 브라이트: 왜요. 또 브래지어 벗기고 싶어서요?
나나시: …그런 농담은 좋지 않다고 봐요. 캐롤 씨.
캐롤 브라이트: 고까우세요? 그럼 당신도 해요. 하다 보면 재미있어요. 당신 얼굴 새빨갛게 익는 거 구경하는 것도 웃기고요. 이거 봐. 또 그렇게 쑥스러워하잖아요?
쑥스러운 것은 쑥스러운 것이지만, 나는 그녀의 변화가 싫지 않았다. 본래 그녀는 틈 하나 없이 이지적인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욕 한 마디 제대로 하지 않았던 사람. 탑의 모든 이들을 돕는 성인… 하지만 그런 모습만을 보여주려 스스로를 억눌렀기에. 캐롤 씨는 누구보다 큰 균열을 속에 삼키고 또 묻어왔던 것이다.
그러니 유독 명랑하고 또 짓궂어진 그녀는 마치 여름처럼 생동감 넘치는 사람이 되었다. 응원해 마땅한 일이었다. 부끄럽긴 하고. 또 아무리 캐롤 씨가 받아쳐 보라고 말해봤자 내 음담패설은 그녀에게 들려줄 게 못 되니 꼭 나만 놀림을 받겠지만, 그녀가 즐겁다니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나나시: 캐롤 씨. 카이다가 왜 마유즈미의 구출을 방해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들었어요. 하지만 카이다 본인이 캐롤 씨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고 하네요. 들으시겠어요?
캐롤 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캐롤 브라이트: 아뇨. 뜻은 존중해 줘야 하니까요. 혹시 제가 찾아가면 치나미가 저에게 직접 말해줄 만한 내용인가요?
나나시: 오해만 풀면 말해주리라고 생각해요.
캐롤 브라이트: 그럼 제가 직접 갈게요. 가는 김에… 겸사겸사 당신이 나를 냉장고에 묶어 놓은 빚도 갚고요.
캐롤 씨의 말을 듣고 나는 조금의 불길함을 느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근처에 떨어진 수갑을 주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로 다가왔다.
캐롤 브라이트: 수갑을 차고 있으면 아무래도 자국이 남거든요. 거슬리기도 하고요. 당신은 수갑을 나에게 채웠으니. 아무래도 저 또한 이렇게 할 수밖에 없겠어요.
나나시: 저… 캐롤 씨? 분위기가 무서운데요…?
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뒷걸음질을 쳤다. 캐롤 씨는 서서히 내게 더 가까워졌고, 이내 내 등에는 딱딱한 벽이 닿았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리고 캐롤 씨는 나와 한 발자국 정도의 차이를 두고서 내 앞에 섰다. 그녀는 묘한 위압감과 압박감을 풍기고 있었다. 앞으로 내게 무언가를 하겠다는 듯이…
캐롤 브라이트: 잘 들으세요. 나나시 씨. 저는 치나미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이렇게 하는 거예요. 나나시 씨가 독단적으로 치나미를 마비시킬 일은 없다는 걸요. 일단은 제가 당신보다 우위에 있다는 걸 치나미가 안다면, 조금은 마음을 놓은 채 지낼 수 있겠죠. 그러니 너무 기분 나쁘게 여기지는 마세요.
나나시: 그… 정확히 무엇을 하시려고…
캐롤 브라이트: 몰라서 물어요?
수갑이 내 양쪽 손에 덜컥 채워졌다. 수갑의 고정 돌기가 원형의 쇠 안에 들어가며 드르륵 소리를 냈다.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내놓을 만한 항변이나 변명도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수갑의 사슬 부분을 손가락으로 당겨대는 캐롤 씨를. 천천히 뒤따를 수밖에…
캐롤 브라이트: 자. 이제 가요. 분명 잠시 거리를 둬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정말 자기 뜻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지 확인하고, 또 오해도 푸는 시간을 가져야겠어요. 같이 가요.
나는 그녀의 팔이 나를 당기는 대로 끌려가는 와중. 인공지능에게 이런 모습을 들키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죄인이 된 것처럼 끌려다닌다니… 수치스럽기도 했지만, 그건 별반 중요한 이유가 아니었다. 진짜 요인은 따로 있었다.
인공지능 또한 죽었다 살아난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캐롤 씨처럼. 그녀를 되살린 사람은 나였다. 노네임이라는 정체성의 나. 그녀를 생각하면 내가 그녀와 시시덕거리고 있는 모든 일들이 그저 떳떳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그녀는 왜 존재하는가? 내가 되살렸기 때문이다. 왜 고통받는가? 내가 되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 앞에 나타나서는 캐롤 씨와 수갑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튼 간에 그녀는 내가 캐롤 씨에게 느끼는 책임감을 똑같이 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이전에 내가 싫고,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다며 나를 밀어냈었다. 분명 그녀는 그런 모든 감정을 느낄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말을 믿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다시 아플 필요가 없게끔 나와 거리를 두려 하는 모양이었다.
만약 인공지능이 여전히 내게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캐롤 씨에게 내가 그렇듯이 인공지능에게도 나라는 존재가 어떤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캐롤 씨만을 사랑하는 것은 인공지능에게 도무지 공평하지가 않았다. 나는 가슴으로 캐롤 씨를 사랑하고, 머리로 인공지능의 마음에 대답을 주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렇기에 이토록 난봉꾼 같은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그러니 나는…
다시 인공지능을 찾아가야 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서로가 모두 이 사안을 다루고 싶지 않을지라도. 나에게 그녀는 그저 친구라는 식으로 기투의 책임을 덮어둘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게 공평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나는 차라리 내 꼴이 인공지능에게 있어 죽도록 꼴이 좋아 웃음을 이끌어내는 것이길 바랐다. 내 기쁨이 그녀에게 기쁨이 될 수 없다면 내 굴욕과 슬픔이라도 인공지능에게 기쁨이 되기를. 나는 그녀가 내 한심한 모습을 진심으로 즐겨주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캐롤 브라이트: 왜요. 많이 괴로우세요?
캐롤 씨는 내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서 물었다.
나나시: 아니에요. 괴롭긴요… 저는 사실 풀어드리면 영락없이 반대쪽 얼굴도 맞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죠.
캐롤 브라이트: 풋. 뭐람. 혹시 맞는 거에 관심이라도 있으세요?
나나시: 네…? 아뇨. 관심까지는 없어요. 보통 다 그러지 않을까요?
내가 당연한 대답을 하자 캐롤 씨는 멋쩍게 자신의 볼을 검지로 긁적였다.
캐롤 브라이트: 아… 네. 그렇군요.
묘하게 나를 당기는 힘이 조금 세졌다는 느낌을 받는 가운데. 나는 차갑고 딱딱한 수갑이 내 손목을 조여대는 것을 느꼈다. 조금도 유쾌하지 않은 감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걸 채운 뒤 냉장고에 묶어놓은 다음 자매를 마비시키려고 간 내가 이 정도로 끝나는 것도 천만의 다행이었다.
나나시: 아무튼 간에 사람 간에 채우면 안 될 물건이에요. 캐롤 씨한테도 그렇게 붉은 자국이 남았잖아요… 당신에게 쓰기 전 수갑이 피부에 닿는 면적에 부드러운 가죽이나 털 같은 걸 덧대서 자국이 남지 않게끔 할걸 그랬어요.
캐롤 씨는 내 말을 듣고 한 번 몸을 움찔거렸다.
나나시: 말하고 든 생각인데. 쓸만하겠네요. 괜히 범죄자의 공격성을 자극하는 일이 적어질 테니까요. 이 탑에서 나가면 만들어서 특허라도 내볼까 봐요.
캐롤 브라이트: …그 물건은 이미 발명돼서. 큰돈은 못 버실 거예요.
나나시: 아. 이미 누군가가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범죄자 인권 문제 때문이겠군요.
캐롤 브라이트: 아뇨. 그건 아니고… 아. 아무튼 간에. 가… 가요.
어딘가 석연치 않게 반응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그래서 내가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을 때. 자신의 침대 밑을 뒤졌냐고 그녀가 유독 민감하게 반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음. 모르겠다… 짐작도 안 가네.
여기는 꿈이다. 나의 꿈. 히무로 씨가 분명 그렇게 말했다.
나는 여기가 꿈인지 아닌지 다시 한번 구별해 보았다.
와. 여전히 가운뎃손가락이 손등까지 닿잖아? 원래는 절대 안 되는 일인데!
그러니까 꿈이라는 거 하나는 확실한데. 당장 이 안에서 무엇을 찾을까 하면 도무지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기억을 떠올리라고 히무로 씨는 말했지만, 그게 꼭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단 말이야.
기억을 떠올려라… 기억을 떠올려라… 나는 다시 보니 붓으로 그린 것 같은 가옥과 정원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모든 풍경이 이렇게 되었을까? 언제 나는 꿈에 빠져든 걸까?
마유즈미 나데시코: 기억…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했지?
붓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후스마를 열자. 그 안에는 붓으로 그린 것 같은 내가. 하얀 건 종이고 까만 건 먹인 내가 무언가를 종이에 쓰고 있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왓!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후스마를 닫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후회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 아니지. 나 바보! 바로 저게 그거잖아! 떠올려야 하는 거! 내 이름을 기억해 내기. 내가 누구인지 찾는 거 말이야. 히무로 씨가 그러셨잖아!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내 말을 되새겨. 네 이름을 기억해 내. 이 안에서 네가 누구인지 찾아. 너를 위해서 그렇게 해. 다시 꺠어날 너를 위해서…
그러니까. 지… 진짜 무섭지만은! 낯설지만은! 문을 열어야 햇! 음! 간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더… 더…!
마유즈미 나데시코: 덤벼 보거라!
나는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잠재우면서 당차게 후스마를 열었다. 붓으로 그린 나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붓으로 그린 나는 나보다 키가 작았고, 종이에는 와신상담이라는 글씨를 쓰고 있었다.
아. 맞아. 저런 글씨를 쓴 적이 있지. 다음에는 뭘 썼더라?
종종걸음으로 다다미가 깔린 방을 가로질러 다음 후스마를 열자, 그 안에는 또 붓으로 그린 내가 허무도표라는 글씨를 쓰고 있었다. 또 나보다 키가 작은 붓으로 그린 나였다. 하지만 와신상담을 쓰던 나와 허무도표를 쓰는 나 중에 누가 큰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몇 개의 후스마를 더 넘나들며 비슷비슷한 체구를 가진 나는 줄곧 무언가를 그리거나 쓰고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예전의 내가 그랬던 것 같다. 가만히 떠올리고 있자니 나는 거의 항상 이런 생활을 했다. 선생님들한테 가르침을 받거나, 종이를 친구로 삼거나…
마유즈미 나데시코: 대체 뭘 떠올려야 할까? 글씨를 열심히 써온 거?
나는 후스마를 열 때마다 조금 어린 내가 있는 것을 보고서 막다른 길에 몰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검은 머리 여자애 한 명이 방에 있는 것을 보고서 다음 후스마로. 또 검은 머리 여자애(나) 하나. 다음 후스마. 검은 머리 여자애 하나. 다음 후스마. 검은 머리 여자애 하나. 다음 후스마. 또 검은 머리 여자애 하나. 다음 후스마. 검은 머리 여자애 하나. 또 다음 후스마. 검은 머리 여자애 하나. 다음 후스마. 또 검은 머리 여자애 하나. 또 다음 후스마. 그렇게 몇 개를 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꿈속에서는 모든 게 조금씩 흐렸기 때문이다. 검은 머리 여자애 하나. 다음 후스마. 검은 머리 여자애 하나. 또 다음 후스마. 검은 머리 여자애 둘.
둘?!
마유즈미 나데시코: 와앗! 둘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 다다미에 발을 굴렀다가 그 자리에 왁 얼어붙었다. 곧장 어른들의 호통이 내려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옥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 기억이라고 하니까.
마유즈미 나데시코: 과연. 과연. 이것 하나는 편한걸.
나는 쩨쩨한 일탈을 하나 발견했다. 그리고 유망한 행사에서 스모 선수들이 으레 하듯 다다미를 쿵쿵 내려 밟으며 검은 머리 여자애 둘을 향해 갔다. 너무 재미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잠깐! 드디어 제대로 된 단서가 나왔잖아. 제대로 보자. 장난은 그만!
나는 찬찬히 한 종이를 함께 쓰고 있는 검은 머리 여자애 둘을 살펴보았다. 나랑 키가 비슷한 사람이 하나. 그리고 나보다 키가 작은 꼬마 아가씨가 하나 있었다. 나는 분명 그 여자애가 나고, 꼬마 아가씨는 내 동생이라는 생각을 했다.
언제 또 우리가 같이 놀았더라…?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져서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와중. 나는 여자애의 얼굴을 보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라라. 내가 아니네?
하지만 어딘가 그리운 얼굴이었다.
토키와 아유키: 극단적인 시대에는 극단적인 방법이 필요한 법일지도 모르지.
토키와 아유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일개 사람일 뿐이었다. 아주 대단한 초고교급들보다 못한, 평범한 사람. 하지만 그가 나서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방도가 없었다. 그 누구도 카텟 기관에 대항할 수 없을 테니까.
토키와 아유키: 그러니 내가 나선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살인게임. 히무로와 같은 선천적 결핍자들만이 이런 일을 받아들이고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금이나마 감정적인 자들은 휩쓸려 혼돈에 빠지고야 말 것이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었다. 그는 홀로 카텟 기관에 대항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극단적인 방법이 필요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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