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단크 타워
챕터 4: < 황금 원숭이의 손길 >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제츠보: …으아. 저게 뭐야…?
나나시: 안녕. 인공지능…?
카이다 쿠로하: 엣! 큽! 크하하하하하학! 저 새끼 좀 봐! 우리 언니한테 꽉 잡혔잖아!
인공지능은 나에게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고, 카이다는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머리를 젖히고 웃어댔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대로의 반응이었다. 수갑을 채우고서 걸어다니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 아무래도…
캐롤 브라이트: 낯뜨거운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해요. 제츠보 씨. 그렇지만 냉장고에 한 번 묶여 있었던 몸인지라 갚아주고 싶었어요. 치나미 기분도 좀 낫게 해주고요.
제츠보: 바보같네…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며 비장하게 나올 때는 언제고. 수갑에 묶여서 쫄래쫄래 따라오다니… 이거 괜찮기는 한 거야? 한 사람을 장난감 취급하는 건데?
캐롤 브라이트: 장난감이라뇨. 제가 나나시 씨를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닌데요? 저는 받은 대로 되갚아줄 뿐이에요. 오히려 저만 꾹꾹 참아가며 마음에 담아두는 게 더 건강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제츠보: …그럴지도 모르겠네. 왜인지 갑자기 네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보였는데, 내 기분 탓이었나 봐.
나는 캐롤 씨와 인공지능을 번갈아 보면서 둘 사이의 대화에 묘한 날이 서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일단 인공지능도 우리가 시시덕거리는 게 아니라 그저 한쪽이 한 일을 다른 한쪽이 갚아주는 것일 뿐이라는 건 이해한 것 같은데…
카이다 쿠로하: 언니 말이 무조건 다 맞아! 언니! 그놈이 공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게 시켜 봐! 꼴 좋다. 병신! 그러니까 나한테 개기기는 뭘 개겨. 멍청아?!
나나시: …….
캐롤 브라이트: 마음에 안 들겠지만, 언니는 오늘 나나시 씨 가지고 놀려고 온 게 아니야. 너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온 거지.
카이다 쿠로하: 그… 그게 뭔데?
그리고 캐롤 씨는 카이다가 왜 터치를 방해했던 건지 물었다. 카이다는 절대 알리고 싶지 않다며 으름장을 놓았던 모습이 무색하게, 캐롤 씨의 말을 너무도 잘 들었다. 카이다 본인이 마유즈미의 부활에 어떤 불만을 가지고 있는지 털어놓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카이다는 쭈뼛거리며 말했다.
카이다 쿠로하: 언니가 나한테 소홀해질까봐 그랬어… 여동생같은 사람이 하나 더 생기면, 나한테 소홀해질 까봐…
마유즈미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거라는 본래의 공포는 말하지 않았지만 캐롤 씨가 이해하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캐롤 씨는 카이다를 안고서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카이다는 누가 자신을 찌르려 드는 것처럼 "억! 어!" 하는 외마디 소리를 내더니 몸을 굳혔고, 몇 번의 토닥임이 그녀를 울린 뒤에는 축 늘어져 위로를 받아들였다.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 나의 동생이라는 자리에는 너밖에 있을 수가 없어.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러니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을 거야.
카이다 쿠로하: 누. 누구에게도?
캐롤 브라이트: 부처님이 와도 못 주지. 나와 함께한 적이 없는데?
그것 하나만으로 카이다의 공포는 사라졌다. 카이다는 잔뜩 찡그린 표정을 지으며 캐롤 씨에게 물었다.
카이다 쿠로하: 언니만큼은 나를 버리지 않을 거지…?
그리고 캐롤 씨는 당연한 대답을 했다. 절대 버리지 않을 거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대답. 잔뜩 위축되어 있던 카이다의 마음은 그렇게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걸 지켜보는 나는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재빠르게 풀려버릴 불만이었다면 애초에 왜 그 난리를 피운 걸까?
혹시 그토록 다급하게 풀어버리지 못한다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카이다에게 동생의 자리를 빼앗길 지도 모른다는 위험은 치명적인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카이다를 안심시켜 준 뒤에 캐롤 씨는 내 수갑을 서로 묶어 두는 사슬을 짤랑짤랑 당겼다. 그녀는 곧 카이다의 숙소에서 나갈 터였다. 그녀는 카이다의 숙소에서 할 일을 끝냈기에 더 남을 이유가 없기는 했다. 원래도 버릇을 고쳐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거리를 두려 했으나 피치 못하게 찾아왔던 것이니.
캐롤 브라이트: 그래도 잘못은 잘못이니까. 언니가 나와도 된다고 할 때까진 잘 참는 거다?
카이다 쿠로하: 으으… 벌써 답답한데… 그래도 알았어. 알겠다고. 씨.
캐롤 브라이트: 착하다. 우리 치나미. 얌전히 있어야 해. 알겠지? 제츠보 씨한테 폐 끼치지 말고.
카이다는 그 점에만큼은 불만을 가진 듯 했지만. 결국 그 입술 안에서 시끄러운 불평불만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적어도 캐롤 씨가 인공지능 앞에서 두 손을 모아. 고개를 깊이 숙이기 전까지는…
캐롤 브라이트: 동생이 아직 많이 모자라네요. 제츠보 씨. 정말 죄송해요. 많이 힘드시죠?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세요.
카이다 쿠로하: 어. 언니! 왜 그렇게 사과를 해! 악! 기분이 나쁘지도 않아?! 빨랑 고개 들어. 빨랑!
제츠보: 카이다 말대로 해. 캐롤. 고개 들어. 이만하면 됐어. 이제 나나시와 함께 가. 어서.
인공지능은 새를 쫓아 버리듯이 팔을 내저었다. 그녀는 나를 보는 눈길에 짜증이 서려 있었다. 특히 수갑을 보고서 수치스러운 꼴을 보는 듯이 자신의 눈을 가리기도 했다. 캐롤 씨는 몇 초 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천천히 꼿꼿이 섰다.
캐롤 브라이트: 이런 일을 맡아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제츠보 씨. 죄송한 만큼… 감사해요. 이만 더 거슬리게 하지 않고 떠날 테니… 나나시 씨?
캐롤 씨가 나를 불렀다. 나는 그녀에게 대답했다.
나나시: 먼저 가세요. 저는 잠깐 인공지능이랑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요.
캐롤 씨는 내 말을 듣자 수갑을 당기는 손에 힘을 풀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사슬을 그녀의 쪽으로 이끌고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 …제츠보 씨와요? 무슨 이야기를요?
나나시: 해야만 하는 이야기요.
인공지능은 못마땅하게 내 말을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제츠보: 대체 누구 마음대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는 동의한 적 없어. 나나시. 그러니까 캐롤 따라서 어디로든 가 버려.
카이다 쿠로하: 맞아. 꺼져!
나나시: 아니. 안 갈 거야. 내가 너를 대해야 마땅한 존재로 대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캐롤 씨는 한 번 손가락을 튕겨 나를 그녀의 쪽으로 당겼다.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잊으신 것 같은데요. 수갑의 열쇠는 저한테 있거든요? 그러니까 저와 같이 가셔야죠? 대체 얼마나 길게 대화를 나누실지는 몰라도. 그러시는 동안 제가 다 씻고 잠에라도 들면 낭패 아니시겠어요? 수갑을 찬 채로 잠을 잔다니 듣기만 해도 불편하네요.
제츠보: …….
나나시: 아아… 그렇네요. 그렇다면 수갑을 풀고 다시 올게. 기다려.
내가 인공지능에게 말하자 캐롤 씨와 인공지능은 저마다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는 표정이 조금 굳기도 했다.
제츠보: 대체 너와 나 사이에 더 할 이야기가 있기는 해? 다 끝났어. 나나시. 노네임과 노바디, 제츠보라는 사람의 이야기는 끝났다고. 너는 나에게 제츠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기억하지 못하잖아. 네가 한 일이라고 느끼지도 않는, 진심 없는 사과 따위 사양이라고.
나나시: 아니. 그건 내가 한 일이야. 나는 기억을 잃은 아마츠마라 카라쿠리누시 메이니까. 다른 사람이 아니야… 그건 내가 현실에서 직접 한 일이고. 그러니 네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 또한… 나의 책임일 수밖에 없어. 인공지능.
인공지능은 그 명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제츠보: 인공지능이라고 그만 불러. 나나시. 고작 이름을 바꿔 부른다고 한들 너는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어.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네가 싫다고. 얼굴도 보기 싫어. 그러니 나를 그만 들쑤시고 사라져 버려. 어서.
나나시: 정말 그런 거야?
정말 그녀가 그렇게 느낀다면. 그 일을 다시 들추는 일조차 번거롭고 모욕과도 같이 느낀다면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저지른 잘못의 무게가 나를 짓눌러도 그 상처를 직접 가지고 있는 인공지능의 고통에 비하면 그것은 10억분의 1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나는 물어야 했다. 정말 그렇느냐고. 인공지능은 내 말을 모욕처럼 느낀 듯이 이빨을 한 번 악물고서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츠보: 왜. 내가 캐롤처럼 너를 사랑할 줄 알았어. 나나시? 변태처럼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수갑 채운 뒤 산책이라도 하고 싶어할 줄 알았냐고.
캐롤 브라이트: 벼. 변태…?!
캐롤 씨는 작게 놀란 목소리를 냈다.
제츠보: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내 강철로 된 심장은 완벽하게 차갑거든. 너를 생각하는 마음도 차가워진지 오래야.
나나시: …왜 수갑이 변태같아…? 그냥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수갑에는 수갑으로 묶었을 뿐인걸. 겸사겸사 카이다 기도 좀 살려 주고.
인공지능은 자신의 이마를 한 번 쓸어 내렸다.
제츠보: 누가 봐도 그게 아니잖… 어이가 없네… 본인이 모른다면야 굳이 알려줄 필요도 없겠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알아서 해. 그러다 잡아먹히든 말든 상관 안 할 테니까.
캐롤 브라이트: 자… 잡아먹…
제츠보: 하지만 내가 너에게 아직 감정이 있으리라는 생각 따위는 하지 마. 노바디가 좋아했던 건 아마츠마라 카라쿠리누시 메이야. 몇 년간 함께 생활했던, 노바디 아니었으면 착해 빠져서 여기저기 적선하다가 강도를 당해 죽었을… 마음이 약하고 약해서 눈물을 보이는 때도 많던 그 녀석이야. 그 모든 시간을 전부 잊어버린 네가 아니라…
인공지능은 목소리를 떨거나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그러니 겉으로 보자면 어조는 일정했다. 그녀가 담고 있을 감정에 비해서는 과도하게 차분하기도 했다. 인공지능은 아주 조금 고개를 숙일 뿐 무언가를 출력하듯 말했다. 마치 그녀의 몸이 영혼과 호환이 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제츠보: 그러니 나를 제츠보라고 불러. 나나시. 그게 네가 나에게 준 것들 중 유일하게 진실된 것이었으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있어 절망. 그게 다야. 이제 와서 그것마저 앗아가고자 한다면 받아들일 수 없어.
노네임은.
아니. 노네임이 아니라.
과거의 나는.
인공지능을 인정했어야 했다.
노바디라는 사람을 자신의 저주로 삼고, 인공지능을 외면할 이유로 삼아서는 안 됐다.
만약 카텟 기관에서의 내가 자신이 되살린 인공지능을 사랑할 수 있었더라면. 노바디라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인공지능의 존재를 긍정해줄 수 있었더라면 인공지능이 이토록 비참해지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은 사람을 떠나 보내지 못했다. 그 나약함 때문에 그토록 많은 아픔이 새로 생겨났고, 나 혼자 들어가야 할 구렁텅이 속에 인공지능마저 끌어들였다. 그런 사람에게 절망이라는 이름까지 붙이는 건 그저 악의적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나나시: 하지만 나에게 너는 절망이 아니야. 내가 본 너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친구였어. 나를 구하기 위해 영안로까지 찾아왔던 네가 제츠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건… 원하지 않아.
나에게 그것은 도무지 옳지 않은 일이었다. 제츠보라는 이름은 그저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와 그녀처럼 서로 이름을, 정체성을 잃고자 한 사람들에게 있어 이름은 곧 관계였다. 다른 사람에게 주는 연결고리였다. 그런데 나 때문에 그녀는 제츠보라는 이름을 가졌다. 다른 모든 이들에게 그녀는 절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단지 내가 그런 이름을 주었기 때문에.
나나시: 내가 너를 모욕하고 불합리하게 대했어.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바로잡고 싶어.
나는 천천히 나의 무릎을 꿇었다. 절그럭거리는 수갑이 연결된 두 손으로 무릎을 붙잡고 그저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나에게는 인공지능을 올려다 볼 자격이 없었다.
카이다 쿠로하: 이야!
카이다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른 직후 다른 이들의 눈동자를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나시: …미안해. 인공지능. 내가 잘못했어. 너에게 그래서는 안 됐어.
제츠보: …일어서. 나나시. 고개 들고.
나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고 인공지능과 눈이 마주쳤다. 인공지능은 고개를 저으며 서글픈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순간의 표정만큼은 지금껏 인공지능이 지어 온 표정 중 가장 강렬하게 느껴졌다.
체념과 책망. 응어리와 해소.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기억과 고통을 담은 시선. 그것을 마주하자 내 가슴께에 묵직하고도 욱신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이것의 10억배를 담은 채 서 있는 인공지능을 보며, 나는 계속 무릎을 꿇을 뿐이었다.
제츠보: 일어서라니까. 나나시. 나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지 마. 대체 왜 계속 찾아오는 건데? 과거를 돌아본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너는 나를 사랑하지도 않잖아.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의 등 뒤에서 네가 고개를 숙이는 꼴을 보고 있어. 이건 일종의 캐롤을 향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몸을 일으키고서 곁눈질로 캐롤 씨를 돌아보았다. 내가 그 점에 있어서는 경솔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의 입장에서야 과거의 친구인 인공지능과 현재의 연인인 캐롤 씨는 서로 분리된 영역에 있었으나, 캐롤 씨가 보기에 내가 과거의 인연에 매달리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확실히 해야만 하는 일이다. 나는 다시금 인공지능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나나시: …분명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미안해.
나는 가슴으로 캐롤 씨를 사랑했다. 그러나 머리는 인공지능을 버려둘 수 없었다.
나는 두 명을 되살렸는데, 내 좁디 좁은 그릇은 한 사람밖에 품을 수 없었다. 한 마음을 쪼개 두 사람에게 나눠 준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누구도 납득할 수 없고, 누구도 만족할 수 없고,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제츠보: 미안해하지 마. 그럴 마음도 없는 주제에 베푸는 의무감의 사랑은 그저 적선일 뿐이야. 그것이야말로 나를 향한 모욕이지.
그랬다. 나는 인공지능이 카텟 기관에서 나(노네임)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빚을 갚을 방법은 도무지 보이지가 않아서 어쩔 때는 구걸을 다닐 때도 있었지. 음식 구걸. 돈 구걸. 약 구걸… 하지만 그 어느 때에도… 사랑을 구걸한 적은 없었어…"
제츠보: 그러니 너는 나에게 아무것도 줄 수 있는 게 없어. 나나시.
나나시: 응. 네 말이 맞아 … 힘은 네가 나보다 세고, 카텟 기관과 이 살인게임에 대해서도 네가 더 잘 알아. 이름을 새로 지어줄 수도 없고… 그저 우정이라는 것밖에는 너에게 바칠 수 있는 게 없지만.
나는 감히 인공지능의 눈을 마주했다.
나나시: 너에게는 내 친구로서의 모든 의리를 다할게.
그것만이라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만약 그녀가 위험에 처하기라도 한다면 나는 그녀가 나를 구하기 위해 영안로에 들어왔던 것처럼. 그녀를 도와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할 것이다.
친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제츠보: …그래? 그렇구나? 새 이름… 의리… 잘 들었어. 그렇게 무릎을 꿇을 정도로. 내가 제츠보라고 불리게 된 일이 가슴이 아프다는 거지?
나나시: 너만큼은 아닐 거야. 하지만 분명… 안타까워. 그러니까 제츠보라고는 부르지 않을 거야. 그건 너무 가혹하잖아…
제츠보: 다행이네.
인공지능은 온화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게 팔을 뻗었다. 가늘고도 억센 다섯 개의 손가락이 내 가슴께의 옷을 휘감아 붙잡았다.
인공지능이 팔을 올리자 내 몸은 통째로 공중에 떴다. 순식간에 나는 디딜 곳 없이 허공에 서서 버둥거리는 꼴이 되었다.
나나시: 우왓!
카이다 쿠로하: 어어억?! 뭐야. 갑자기 왜… 아니지. 작살을 내! 그냥 여기저기 치대가지고 피떡으로 만들어!
캐롤 브라이트: 제츠보 씨?! 자. 잠깐 진정하세요! 왜 나나시 씨를…
제츠보: 네가 나를 생각해 줘서. 그렇기에 아플 수 있어서 다행이야. 나나시.
인공지능은 나보다 키가 작기에 그리 높은 위치에 떠 있게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버둥거리는 동안 내 몸을 지탱하는 것은 내 옷이 전부였다. 사실 그렇게 두껍지도 강하지도 않은, 따지고 보면 오히려 얇고 연약한 옷. 나는 느슨한 줄에 묶여 있는 듯이 공중에서 흔들거렸다.
나나시: 이… 인공지능…?
카이다 쿠로하: 옷을 쥐어 뜯어버려! 저놈이 알몸으로 기어 나가게 만들란 말이야! 꼴 좋다. 벼엉신!
캐롤 브라이트: 그… 그러지 마세요! 그럴 이유가 없으시잖아요!
제츠보: 안 그럴 거야. 조용히 해. 카이다.
제츠보가 나를 툭 놓자 나는 엉거주춤 바닥에 내려섰다. 나는 카이다의 말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옷이 찢어지지는 않았는지 살폈다. 다행히도 남들 앞에서 살결을 보여주는 일은 없게 되었다.
제츠보: 내가 제츠보라 불리는 일이 슬프다면, 내 이름은 제츠보야. 나는 네 마음이 아팠으면 하니까. 나나시. 네가 그토록 노네임을 자청한다니 노네임으로 대해 줄게. 나는 네가 네 잘못을 바로잡을 수 없으면 좋겠어. 네가 행복할 때 나를 떠올리고 괴로워하기를 바라고. 제츠보는 그토록 불행한데 나 혼자 행복한 것은 옳지 않다며 어찌할 줄 모르는 채로 아파했으면 좋겠어.
인공지능은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을 이었다.
제츠보: 책임감을 느껴? 바로잡고 싶다고? 잘 됐어. 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 이런 식으로 되갚아 줄 수 있다니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네. 이것은 잘못을 인정한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복수야. 나나시. 부디 내가 네 가슴에 박혀 빼낼 수 없는 가시가 되기를… 내가 너에게 있어 과오와 죄책감. 네가 바꿀 수 없는 슬픔이 되기를. 그리하여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절망이 되는 거야.
인공지능은 자신의 가슴께를 향해 손을 가져가더니 숨을 가쁘게 쉬듯이 몸을 굽혔다.
제츠보: 절망이… 맞아. 그저 절망이…
제츠보: …허윽.
그렇게 말하고 나서 인공지능은 자신의 가슴께를 움켜쥐고서 신음을 토했다. 그 모습은 마치 칼에 찔린 사람 같았다.
기계 몸은 살과 뼈의 몸과 형태가 같을지언정 작용이 달랐다. 나는 기계의 구조를 이해하는 만큼 인공지능의 동작이 내가 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았다. 하지만 순간 그 외마디의 신음에서 나는 그녀는 사람과 온전히 동일한 동작으로 움직였다.
나나시: 괘. 괜찮은 거야…?
카이다 쿠로하: 뭐냐. 갑자기? 이잉?
제츠보: 나가… 나나시… 이제 됐어. 나가 버려.
나나시: 무슨 일이야?! 많이 아파? 내가 도와줄게!
내가 그녀에게로 다가가자 인공지능은 내 어깨를 툭 밀쳐냈다. 나는 한 발자국 반 정도의 거리를 뒤로 밀려났다. 인공지능은 그저 일그러진 얼굴을 유지한 채로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제츠보: 나가라고 했잖아… 나가! 생각 좀… 생각 좀 하게! 네가 있으면 방해가 될 뿐이야. 점점 알 수 없게 된다고! 네가 죽어서 내 영혼의 전원 스위치가 내려가는 일을 원치 않았는데. 기계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은…
인공지능은 자신의 귀를 막고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카이다 쿠로하: 어어. 어이?
제츠보: 이제는 모르겠어… 그저 괴로워. 괴롭고… 아파. 이렇게까지 아픈 줄을 잊고 있었어. 네가 눈앞에 아른거릴 때마다 메이가 보인단 말이야…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는데 기억은 조금도 흐려지지가 않아서… 이제 차라리 기계이고 싶어. 아무런 고통도 없는 기계 말이야. 아니. 아니. 그건 또 아닌가? 모르겠어.
제츠보: …다 너 때문에 헤집어졌어… 약해진 부분에 네가 가시처럼 파고든단 말이야… 그러니까 사라져.
나나시: 인공지능. 나는…
내가 그녀에게로 발을 한 발자국 내딛은 찰나. 인공지능은 눈을 질끈 감고서 소리를 질렀다.
제츠보: 제발 가! 나나시! 내 눈앞에서 사라져. 제발…!
나는 인공지능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어쩌면 내가 인공지능의 고통 그 자체일지도 몰랐다. 내가 그 방에 더 남아있다고 한들 그 무엇도 나아지는 일이 없었다.
제츠보: 가. 가라고…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가요.
내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던 사이 캐롤 씨가 말했다. 나는 분명 인공지능의 요구대로 그 방에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발은 여전히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있는 인공지능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마지못해 하듯이 그 방을 떠났고… 다시 인공지능을 찾아가겠다는 다짐은 전하지 못했다.
카이다 쿠로하는 바닥에 주저앉은 제츠보에게 물었다.
카이다 쿠로하: 야. 너 괜찮은 거 맞냐?
제츠보가 대답하지 않자 카이다는 제물을 중심에 두고 원을 그리는 원시인처럼 제츠보의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시끄럽게 말을 걸었다.
카이다 쿠로하: 야. 야! 너. 괜찮냐고!
제츠보는 고개를 들었다.
제츠보: 응.
제츠보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서 저벅저벅 문을 향해 걸었다.
제츠보: 응. 좀 낫다. 역시 보이지 않으면 순식간에 감정이 식어버려. 편리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럴수록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실감이 드네.
제츠보는 자신이 언제 그토록 울분을 토했냐는 듯이 문에 등을 기대고서 카이다를 다시 감시하기 시작했다. 카이다는 할 말을 잃었다.
토키와 아유키는 잠을 자지 않는 것에 익숙해졌다.
토키와가 깨어 있는 일은 생산적이라기보다 일률적이었다. 그 자신이 표현하기에는 보여주기식 노력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손가락질하지 않기를 바랐다. 저놈이 리더가 되어서 한 일이 뭐냐며 질타하지는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한 노력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밤을 지새웠다.
새벽은 토키와의 시간이었다. 아침은 토키와의 시간이었고, 낮은 토키와의 시간이었고, 저녁과 밤마저 토키와의 시간이었다. 그저 어느 시간을 내어 주느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토키와는 그가 스스로의 생체 시계를 지배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여겼다. 카페인의 힘을 빌리자 어렵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토키와는 가방 하나에 들어갈 수 있는 정도 크기의 전자기기를 눈앞에 두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안테나, 주파수와 음량을 바꿀 수 있는 여러가지의 버튼을 보고서 그것이 휴대용 라디오일지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서 헤드폰을 쓰고 있는 토키와는 라디오에 푹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토키와 아유키: 잠깐. 25번이 어디였더라… 일단 아무것도 안 들리니 괜찮기는 한데… 일단 눈여겨봐야 할 사람들은 전부 자고 있으니… 카이다와 제츠보는 깨 있지만, 한 층 차이니까 괜찮을 거야.
토키와는 헤드폰을 벗고서 중얼거렸다. 도청기는 후루미나미가 남긴 유산이었다. 후루미나미는 그것을 탑에 있는 이들의 동향을 살피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에 썼다. 그리고 토키와 또한 비슷한 용도로 도청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후루미나미에게 너무 의존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만, 그러지 않고서야 카텟 기관의 동향을 파악할 방도가 없었다. 그가 자신의 목표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으며 잠에 들었음을 알 수 있었던 것도. 도청기의 덕분이었다.
토키와 아유키: 좋아… 간다.
토키와는 망치와 작은 칼, 손전등을 각각 하나씩 자신의 마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겉으로 보기에 불룩해서 티가 많이 나겠지만 어차피 새벽에 움직이는 이상 누군가에게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혹여나 누군가가 그를 지켜보고 있을지 몰라, 토키와는 문을 반쯤 열어둔 채로 몇 분을 기다리며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제츠보는 여전히 카이다를 감시하고 있었으며, 보통 사람은 이 시간까지 깨어 있지 않다. 종종 영화를 함께 보던 하기와라와 이바라의 모임도 새벽 1시를 넘기지 않았다.
토키와는 그대로 자신의 목표를 향해 곧장 걸어가려 했다. 그러던 토키와는 순간. 자신이 목표로 하고 있는 방 바로 옆에 히무로 시라베의 숙소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발이 우뚝 멈추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토키와는 그 방이 무척 불길하다고 느꼈다. 각 숙소와 전용실의 문은 그곳을 사용하는 인원의 머리카락 색을 따라간다. 히무로의 진홍색 머리카락은 머리카락일 때도 충분히 남의 눈길을 끎과 동시에 그들을 자신에게서 멀리 밀어내기도 했다. 일정 범주를 넘어선 예사로움은 낙인에 지나지 않았다.
토키와에게 있어 히무로는 다른 세계의 주민과 같았다. 히무로는 토키와처럼 생기지 않았고, 토키와처럼 말하지 않았고, 토키와처럼 생각하지 않았고, 토키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그가 탑에 떨어진 인간들 중. 아니 여태 만났던 사람 중에서 자신과 가장 많이 반대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히무로였다. 그와 척을 진다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가장 동떨어진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게다가 카텟 기관의 대표격인 인물이었으니, 카텟 기관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토키와에게 히무로는 더더욱 꺼려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진홍색으로 가득 찬 그 문. 전기 조명 아래에서 흉흉한 색채를 드러내는 문은 누군가의 피로 뒤덮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토키와는 자신의 숙소에서 곧장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히무로의 숙소 앞을 지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토키와는 그 문 앞을 지나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랬다간 공포 영화처럼 안에서 히무로가 문을 벌컥 열고 그에게 나타날 것만 같았다. 비이성적인 생각이었지만 토키와는 정말 그렇게 느꼈다.
시간은 많고,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토키와는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며 기둥을 따라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그렇다면 히무로의 숙소 앞에 발을 들이지 않고도 목표를 향해 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서고자 하는 문 앞에 선 뒤 토키와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작은 철사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능숙한 솜씨로 열쇠 구멍에 그것을 끼워넣었다. 숙소와 전용실에 쓰이는 문들은 거의 비슷했다. 이미 토키와는 몇 번씩 잠긴 숙소와 전용실을 열어본 적이 있었다. 그는 가슴이 콩닥콩닥거리는 정도의 긴장감만을 가진 채 문고리의 잠금을 딸깍 풀었다.
토키와는 문을 조심스럽게 반쯤 열고 자신의 몸을 그 안에 욱여넣었다. 그 나름대로 빠르게 하려 애썼지만,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하기에는 뜸을 오래 들여야 하니 느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는 부디 숙소 안에서 단잠에 빠져 있는 인물이 열린 문 사이로 새어들어온 작은 빛에 놀라 깨어나지만은 않기를 바랐다.
숙소 안에 들어선 토키와는 다시금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철컥 문을 잠구었다. 방 안은 온통 깜깜했다. 밝던 곳에서 한순간에 어두운 곳으로 왔기에 그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토키와는 잠시 그가 가지고 온 손전등을 킬지, 아니면 그의 눈이 암순응하기를 기다릴지 고민에 빠졌다. 그는 자신의 숙소에서 침대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떠올리며 바닥을 더듬어가며 나아갔다. 몇 발자국쯤을 내딛은 뒤 침대에 누워 있는 듯한 형제가 어렴풋이 보이기는 했다. 설마 깨어 있는 건 아니겠지?
본래의 계획은 만약 숙소의 주인이 그의 침입을 알아채 저항할 경우. 시야를 확보함과 동시에 상대방의 시야를 방해하기 위해 손전등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허나 가만히 자고 있다면야 굳이 빛을 내서 상대를 깨울 필요가 없었다. 오랜 시간동안 고민을 한 끝에 토키와는 마이에서 망치를 꺼내든 뒤. 점점 확실하게 보이는 자신의 목표를 향해 발소리를 죽이고 나아갔다.
그녀는 침대에서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마유즈미.
'아니. 마유즈미가 아니다.
마유즈미의 몸을 빼앗은 카텟 기관의 수뇌부다. 아마도 히무로보다 더한 카텟 기관의 핵심인물이다. 카텟 기관이 마유즈미의 몸을 빼앗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라유키 히메리라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
캐롤 씨의 터치를 통해 마유즈미의 자아를 다시 꺼내는 일은 아주 훌륭하고, 또한 응원해 마땅한 일이다. 도울 수 있다면 돕고 싶다. 하지만 이렇게 하루하루 지지부진해서야 도망치거나 통하지 않게 되고 말 것이다. 당장 이 여자가 어디론가 잠적하지 않는 이유는, 오만하기 때문이다. 단지 자신이 캐롤 씨를 이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후루미나미 나몬처럼 숨으려면 진작 숨을 수 있었다.
내가 도청기로 줄곧 감시하고 있지 않았다면 정말 언젠가는 탑에서 빠져나가 마유즈미의 몸을 가진 채 떠나버렸을 것이다. 그러니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겠다면, 나 혼자 카텟 기관에 맞서야겠다.'
토키와 아유키는 자신의 마이에서 망치를 꺼내고 자신의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숨소리를 죽이기가 어려웠다.
그의 목표 자체는 시라유키 히메리를 식물인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저 거동할 수 없게끔 발목이나 허벅지의 힘줄을 자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칼을 다루는 솜씨가 없었다. 말이 쉽지 그는 사실 그 힘줄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니 일단 머리를 때려서 뇌가 기능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1차 목표였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녀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 두고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그가 감시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일 또한 우선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끔 기절시키는 게 급선무였으니. 머리를 때리는 일은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너무 세게 때리면 죽는다. 그러면 그 또한 죽는다. 그 생각에 토키와는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시간이 갈수록 더 빠르게 뛰었다. 그는 살인자였다. 하지만 스트리크닌과 망치는 달랐다. 독을 커피에 타는 것은 함정을 놓는 것과 비슷하다. 그 피해자가 아무리 고통스럽게 죽더라도 살인자의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그 죄악의 크기가 아니라 독의 효과다. 독살범의 자신이 살인자라는 자각은 무디고 무디다. 그는 독이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하지 그가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복합적인 요인 때문에 토키와 아유키는 스스로의 죄에 유독 관대했다. 그는 공무를 집행하듯이 살인을 도왔고, 그게 살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허나 이제 온갖 피비린내나는 일을 도맡던 후루미나미 나몬은 죽어버렸다. 그가 직접 망치로 사람의 골을 부숴야 하는 상황에 놓였는데, 망치는 스트리크닌과 달랐다. 그는 두개골의 특정 부분을 부숴 내출혈이나 뇌수의 유출을 일으킨다면 그녀가 식물인간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론상 그렇다. 하지만 그걸 직접 내려치는 것은 사람이 내린 결심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간에 그는 몇 주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농구를 하고, 얌전히 책상에 앉아 방정식을 풀고, 학생회 예산과 축제 행사 도중 받아야 할 지자체의 허락 등에 대한 서류를 검토하고, 남동생이 주워온 강아지를 산책시키며 지냈기 때문이다.
얼마나 세게 때려야지 죽지 않을까? 입술이 또 말라왔다. 한 방울의 식은땀이 그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 이런 일은 그만하고 싶다는 충동이 그의 안에서 달음박질했다. 그는 문득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탈출하고 싶다고. 더 이상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는 일을 두려워하거나 스스로의 기준을 달성하고자 애쓰고 싶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런 도피 욕망이 망치를 든 그의 손을 벌벌 떨리게 했다.
그러나 이 살인게임에서 탈출할 방도는 없었다.
그래서 토키와 아유키는 여기까지 내려온 것이다. 어차피 나갈 수 없고, 죽은 사람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만약 시라유키 히메리가 망치에 맞고 죽는다고 해도 그것은 다음 살인게임에서 마유즈미가 자신의 몸을 되찾은 채 깨어날 수 있게끔 돕는 일이었다. 그도 처형되겠지만, 카텟 기관의 수뇌와 목숨을 교환한다면 값진 희생일지도 몰랐다.
모든 게 부질없었다.
그러니 해야 해.
토키와 아유키의 팔이 서서히 떨리기를 멈추었다. 여전히 마유즈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튼 간에 누군가는 카텟 기관에게 맞서야만 했다. 토키와는 마유즈미의 머리가 어디에 있는지 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셋을 거꾸로 셌다.
셋.
둘…!
그 순간. 누군가가 문 밖에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히무로 시라베: 누구냐.
토키와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압정이라도 밟은 듯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다시 땅을 디뎠을 때, 그의 다리에는 힘이 풀려서 그를 대책 없이 휘청이게 만들었다. 토키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설마. 잘못 들은 거겠지. 다른 문에다가 대고 한 말이겠지. 느닷없이 이렇게 나타날리가 없었다. 그야 그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으니까. 흔적도 내지 않았으니까.
히무로 시라베: 그 안에 누가 있지? 너 말이다.
토키와는 순간 억울하다는 감정마저 느꼈다. 그는 정말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다. 그조차도 너무 일이 잘 풀린다는 생각을 무심코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히무로는 깨어나서 무슨, 그같은 사람은 아무리 애를 써봤자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날 뿐이라는 듯이 문 앞에 나타났다. 대체 어떻게? 아니. 왜?
귀가 밝은 건 알겠다. 직감이 뛰어난 것도 알겠다.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내가 이렇게 애쓴 일을 한 번에 알아채버리는 건 너무하잖아.
벙찐 채 멍하게 있던 토키와를 깨운 것은 무언가가 문을 쾅 하고 때리는 소리였다. 자신의 옷깃 하나하나가 스치는 소리와 숨소리마저 내지 않도록 애쓰던 토키와에게 있어 그 소리는 너무도 크고 또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토키와는 다시 자신의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심장이 아까 그건 도대체 뭐냐며 칭얼거렸다.
히무로 시라베: 네가 무슨 일을 꾸미고 마유즈미의 숙소에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마유즈미에게 손가락 하나도 댈 생각 마라. 권고가 아니다. 강요다. 마유즈미가 상처를 입었다면 나는 반드시 그 열배로 되갚아 주겠다. 당장 문을 열어라.
그리고 히무로는 문고리를 흔들어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범죄자는 겁이 많고, 겁 먹은 범죄자는 협상을 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유즈미의 숙소 안에 자가 누구이든 간에 빠져나갈 구멍을 하나만 뚫어두고 그곳으로 몰면 마유즈미가 다치지 않고도 침입자를 바깥으로 유도해낼 수 있었다.
토키와는 히무로의 말을 듣고 어쩔 줄을 몰랐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어쩌지어쩌지어쩌지? 이미 들통났다. 히무로는 이미 확신에 차 버렸다. 잠자코 기다린다고 한들 히무로는 정말 문고리를 부수고 들어올 것이다.
애초에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히무로는 당장 숙소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무리 깊게 잠을 자는 사람이라도 이 정도 소음이라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일어나면 분명 저항할 거 아니야.
히무로 시라베: 어서 열어라. 네 아버지의 낯을 잊었나? 내가 이 문을 부숴야지만 나올 텐가? 규칙은 살해를 존중한다.
토키와는 숨을 가쁘게 쉬었다. 긴장이 그를 얽매어 그가 아니게 만들었다. 지금 당장 때려야 하나? 때려야 하나? 지금? 지금? 지금? 지금이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지금. 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안 내려칠 거면 뭐라도 하지 그래?
토키와는 기절할 뻔했다.
사실 아주 잠깐 기절했다. 고꾸라지기 직전 정신을 차렸을 뿐이다. 어느샌가 암순응이 된 눈은 보다 선명한 윤곽으로 마유즈미의 얼굴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 표정. 그것은 역시 마유즈미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모르는 사람… 카텟 기관의 인물이 보낸 말이었다. 망치는 그의 손에서 스르르 떨어져 매트리스에 폭 하고 떨어졌다.
시라유키 히메리는 굳어버린 토키와를 손으로 밀어내고서 천천히 문을 향해 걸었다. 토키와는 뒤늦게 숨을 구석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디. 어디에 숨지? 잠깐. 숨는 게 아니야. 숨는 게 아니야. 다 끝장났어. 도망쳐야 해. 하지만 어디로?
문이 열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안녕. 시라베. 새벽에 무슨 일이야?
히무로 시라베: 네 숙소 안에 누군가가 침입했다.
시라유키는 자신의 어깨 뒤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글쎄. 내가 보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히무로 시라베: 숨어 있거나, 이미 빠져나갔을 것이다. 방 안을 수색해도 되겠나?
마유즈미 나데시코: 마음대로 해.
시라유키는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히무로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열려 있는 창문이었다. 그리고 한 발자국씩 발을 디디며. 히무로는 그와 시라유키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사람도 찾아내지 못했다. 침대 밑이나 화장실에도 사람은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창문을 통해 빠져나갔군. 2층이라면 뛰어내릴 만한 높이지. 탑의 2층은 보통의 2층보다 높기야 하겠지만. 심각한 부상은 입지 않았을 것이다.
히무로는 그렇게 말하고서 창문을 향해 다가가 밑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 사이에 창문으로 내려다보는 가용 시야 밖으로 도망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귀에 신경을 집중하면 발자국 소리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게 정말 존재하는 건가?
마유즈미 나데시코: 표정이 왜 그래? 새벽에 느닷없이 찾아와선. 내가 걱정되기라도 한 거야?
히무로 시라베: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환상과 현실의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 마유즈미가 위험에 처했다는 생각이 들어 찾아왔는데, 누군가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너와 교차검증을 해봤자 너를 믿을 수 없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네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알려줄까?
히무로 시라베: 듣겠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를 의심하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제거하는 거야. 그렇다면 언제나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돼.
히무로 시라베: 자제력을 잃는 법에 대해 가르치려 하는군.
마유즈미 나데시코: 자제력이란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일 뿐이고, 자제력을 잃은 사람은 세상을 향한 통제력을 가질 수 있게 되니까.
히무로 시라베: 내가 기억하는 메리는 내가 본 이들 중에서 가장 자제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너는 정확히 그 반대를 요구하는 건가? 나는 이제 네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겠다. 메리는 네가 주창하는 일의 정확히 반대의 일을 스스로에게 행했다. 메리는 스스로를 의심하는 목소리만을 남겨둔 것이다.
시라유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히무로는 그것 또한 하나의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히무로 시라베: 너는 너 자신을 자제력을 잃은 메리라고 주장하지만, 실제 일어난 일은 그 반대다. 그렇지 않나? 제거당한 것은 너였다. 그렇기에 너는 지금의 너야말로 진정한 너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내가 지금껏 너무 말이 많았나 봐. 그토록 정확하게 읽다니.
시라유키는 쓰게 웃었다.
히무로 시라베: 어차피 언젠가는 알아냈을 일이다. 자제력을 잃으라는 네 제안에 대해 대답하자면, 나는 그럴 수 없다.
히무로는 그 이유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는 그가 괴물이 되라고 요구하던 후루미나미 나몬에게 수없이 많이 대답을 주었다. 이미 그의 안에서는 답이 확고하게 나 있었으니 논쟁의 여지도, 이미 히무로가 왜 그럴 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도 알고 있을 시라유키에게 다시 풀어 말해줄 필요도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말해주지 않겠나? 왜 이 살인게임이 지속되어야만 하는지. 그리고 어떤 경위로 인해 네가 마유즈미의 안에 들어가 있는지를.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니. 못 해.
히무로 시라베: 알겠다. 마유즈미의 몸이 무사하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내가 정말 오해로 인해 너에게 찾아왔다면, 단잠을 깨워 미안하다.
그리고 히무로는 마유즈미의 방을 떠났다.
토키와는 소파에 앉은 채 자신의 부어올라버린 발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휴게실. 그는 2층에서 뛰어내리자마자 탑의 정문에서 카지노로 향하는 긴 계단을 따라 휴게실로 도망쳤다. 그곳은 탑의 1층으로 올라갈 수도 2층, 3층으로 내려갈 수도 있는 요충지였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충격을 겪은 직후에 혹사를 시켰기 때문에. 긴장이 풀린 토키와는 다리에 큰 고통을 호소했다. 아무래도 당분간 뛰어다닐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제 큰일이 났다. 시라유키가 왜 그가 도망치게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텟 기관의 중요인물을 무력화시킬 절호의 기회가 지나가 버렸다. 같은 수법이 두 번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통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시라유키는 그의 방문을 눈치채고 있었다. 망치를 피할 자신이 있었던 건가? 언제부터 깨 있었던 거지? 설마 미리 알아채고서 히무로를 불러 뒀나? 그게 가능한 일인가?
토키와 아유키: 때렸어야 했는데. 때렸어야 했는데…!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였는데. 또 망쳤어. 또…!
토키와는 느닷없이 스스로를 향한 화가 치밀어 올라서 소파에 마구 주먹질을 했다. 소파가 푹신하게 자신의 주먹을 퉁퉁 튕겨내기만 하자 그는 벽으로 절뚝절뚝 걸어가 벽을 때렸다. 오른쪽 주먹에 드러난 손가락의 뼈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토키와는 충분히 아프지가 않았다. 그에게 벌을 주려면 이보다 더하게 아파야만 했다. 쓰읍 하는 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오는 동안 토키와는 왼쪽 주먹으로 다시금 벽을 때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주먹이 얼얼하게 아팠지만, 처음보다는 덜 아팠다. 그는 찰나의 시간동안 깨달았다. 그 스스로가 아픈 건 무서워서 처음보다 힘을 뺀 채로 벽을 때렸다는 사실을.
그런 자신에게 화가 나서 토키와는 여전히 얼얼했던 오른손으로 벽을 때렸다. 첫 번째보다 강했다. 악에 받힌 나머지 그 본인도 원하지 않을 만큼 강하게 때렸다. 뻐억! 사람이 벽을 쳤을 때 나서는 안 되는 소리가 났다.
토키와 아유키: 아아악!
토키와는 그 자리에 펄쩍 뛰어올랐다가 아픈 발목으로 땅에 발을 디뎠다. 그것은 서 있을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토키와의 몸은 저항 없이 그 자리에 고꾸러졌다.
토키와 아유키: 으아아아아악!
토키와는 휴게실의 바닥에 널부러지고서 자신의 발목을 감쌌다. 아픔 때문인지. 혹은 스스로를 향한 한심함 때문인지 그의 얼굴에 눈물이 핑 돌았다. 토키와는 옆으로 누워있던 도중 천천히 스스로의 몸을 웅크려 말았다.
그는 스스로가 벌레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정말 벌레라면. 그는 자신이 성충이 아니라 번데기이기를 희망했다. 제발 번데기이기를 바랐다. 그가 학교 과학시간에 배운 내용인데, 번데기 내부에서 유충의 피부와 근육 조직은 흐물흐물 녹아버려서 거의 액체가 되어버린다고 했다. 비슷한 일이 그에게도 일어났다. 그라는 사람을 구성하던 요소들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토키와는 그렇게 사라져 버렸던 자신이 새로운 조직을 구성하여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그가 이런 식으로 남지 않고 다음 단계의 변모를 겪을 수 있기를 바랐다. 할 수만 있다면 그는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멋지게 변하고 싶었다.
그렇게 자신을 싫어하는 토키와는 부디 자신이 번데기였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그야… 이게 성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잖아…
그는 문득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았다. 휴게실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살면서 두 번은 없을 굴욕을 당했다. 그는 소화기의 내부에 정확히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안에 든 것의 냄새가 좋지 않고 묻으면 치덕치덕 달라붙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직접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이 용액을 온통 뒤집어쓰는 장면이 문득 누군가가 그에게 살충제를 뿌린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자. 토키와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살충제를 뒤집어썼으면 유충은 진작 죽어버렸을 테니까. 그리고 번데기 안에도 살충제 성분이 가득 있을 테니까.
토키와 아유키: …이제 어쩌지. 내 편도 없고, 카텟 기관에 맞설 만한 힘도 없고… 오히려 다들 카텟 기관에게 포섭되어 버렸어… 이제 어떻게 하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때에. 토키와의 다이얼로그가 울렸다. 그는 화면에 떠오른 사람의 이름에 순간 크게 놀랐고, 다음 순간 그도 모르게 전화를 받았다.
토키와 아유키: 뭐야. 너… 무슨 속셈으로 이러는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왜 나를 망치로 때리려고 했는지 궁금해서. 분명 비이성적인, 바보같은 이유겠지만 그래도 궁금해.
토키와는 의연하려고 애쓰면서 대답했다.
토키와 아유키: 바보같은 이유가 아니야. 네가 우리를 살인게임에 가둔 카텟 기관의 수뇌부니까다. 어떤 계략을 꾸미느라 가만히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믿지 않아. 마유즈미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시간마저 아까워. 그러니 너를 노린 거다.
다이얼로그 너머에서는 못마땅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정말 대책이 없네… 내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노렸다는 거잖아? 그러다 내가 죽으면. 순교라도 하겠다 이거야? 전형적인, 인정을 받고 싶어서 안달이 난 자격미달 인간이군. 너는 다른 사람이 너를 알아줬으면 할 뿐이야. 세속적인 돼지 같으니.
토키와 아유키: …맞아. 나에게 그런 욕심이 있기는 해. 하지만 누군가는 너희들을 막아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 그리고 내가 막겠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모양인데, 미안하지만 중요한 사람과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이미 나뉘어져 있어. 이대로라면 너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일 뿐이지…
토키와 아유키: 입 닥쳐. 히무로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너는 머리가 깨지고도 남았어. 시라유키 히메리.
토키와는 사납게 대꾸했다. 시라유키는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나는 네가 어떻게 하면 네 염원을 이룰 수 있을지를 알고 있어. 그러니 나를 노린다거나 하는 바보짓 말고 다른 사람이나 귀찮게 하라고. 잘 들어. 가장 먼저…
토키와는 시라유키의 어투에서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보다 많은 걸 알았고 그를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었던 사람을. 그렇기에 토키와는 시라유키의 말을 툭 끊어버렸다
토키와 아유키: 안 들어. 나는 이미 나보다 똑똑한 사람의 말을 철썩같이 믿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았어. 그것도 나의 적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있을리 없지. 집어치워. 시라유키 히메리. 너는 나를 속일 수 없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래?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나는 처음부터 말해줄 생각이었으니까. 이봐. 금색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생각나는 단어를 열 개 말해 봐. 당장.
토키오는 단어의 맥락을 따라갈 수 없었다.
토키와 아유키: 금색? 그건 갑자기 왜 물어. 그리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함정 아니야. 내가 아무리 잘났어도 이런 간단한 말로 함정을 팔 수는 없다고. 시작 안 해?
토키와 아유키: 네가 무슨 속셈을 부리는지는 몰라도 나는 네 말에 조종되지 않아. 내가 또 소시오패스들의 꼬임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시라유키.
마유즈미 나데시코: 네가 누구의 꼬임에 넘어갔던 간에 관심 없어. 그런데 어지간히 된통 당했나 봐? 이런 간단한 테스트도 무서워하다니.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서야 사내 답다고 할 수나 있나?
토키와 아유키: 마음대로 떠들어. 그래도 나는 네 말을 듣지 않을 거야.
시라유키는 쯧 하는 소리를 크게 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기차에 실린 짐짝 같으니…기껏 딱해서 도와주겠다는데 적선을 거부하겠다고? 고집 그만 부리고 하라면 해. 이런 간단한 일로 네가 나에 의해 조종당한다고 믿는다면 너는 나를 경계하는 게 아니라, 그저 스스로를 못 믿는 거니까.
토키와는 전화를 확 끊어 버리려다가 문득 짜증을 느꼈다. 시라유키의 말의 일부분 맞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부터 그 자신을 멸시하게 되었던가? 금색을 열 가지 대라고? 그런 간단한 일이 무서워서 이런 도발을 피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따라서 토키와는 짜증을 담은 채 시라유키의 말대로, 금색에서 떠오르는 단어를 열 가지 댔다. 대체 무슨 속셈인지 들어나 보고 싶다는 생각 또한 있었다. 아무튼 간에 카텟 기관에게 맞서 싸우는 일에는 정신적인 투쟁 또한 포함될 테니까.
토키와 아유키: 금괴. 금수저. 미다스 왕. 금맥. 캐롤 씨. 사금 채취. 금 시세. 페레로로쉐. 그리고… 금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홉 개야. 마지막 하나 남았어. 그리고 하나같이 예시가 모자라기 짝이 없군.
토키와는 시라유키의 말을 듣고 신경질이 팍 치솟았다. 해 달라고 해서 해도 흡족하지 않다 이거냐? 그래서 토키와는 마지막 단어를 아무거나 내뱉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금색에서 더 떠올릴 만한 단어도 없었다. 금색. 금색. 금…
토키와 아유키: 아. 그러셔? 카이다. 자. 열 개다. 이게 어쨌는데?
시라유키는 다이얼로그 너머에서 흥미롭다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왜 그 암컷 짐승을 고른 거지? 금색이란 연관도 없는데?
토키와 아유키: 몰라. 네가 열 개를 대라길래 아무거나 댄 거야. 이유는 없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틀렸어. 너는 이유가 있어서 카이다의 이름을 댄 거야. 왜인지 네가 알아서 생각해 봐.
시라유키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토키와 아유키: 어…? 으. 야. 야!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게 어디 있어! 이 싸가지 없는!
토키와는 다이얼로그를 붙잡고서 손을 부들부들 떨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고 소파를 향해 비척비척 걸어가는 동안 그가 가지고 있던 무력감은 분노와 의욕으로 치환되었다. 그는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토키와는 푹신한 소파에 앉은 채. 차분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카텟 기관에게 물리적으로 맞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제츠보는 물론이고 그는 히무로도 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토키와보다 명석하기까지 했다. 사회적으로도 살인자가 되어 평판을 망쳐 버리는 토키와보다는 카텟 기관의 이들의 영향력이 더 강했다. 그는 모든 게임에서 패배하고 있었다.
그나마 물리적 힘의 격차는 맞추기가 쉬울지도 몰랐다. 카이다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제츠보 뿐이고, 반대로 말하자면 카이다가 제츠보를 자신에게 붙들어 둘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 남은 히무로도 다른 사람들끼리 급습한다면 꺾을 수 있다.
즉. 토키와가 카텟 기관에 맞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카이다를 포섭해야 했다. 히무로는 카이다를 불구로 만들어야 한다며 대립각을 세운 적이 있기에 반감을 이끌어낼 수도 있었다. 문제는 카이다가 캐롤 씨에게 매우 큰 유대감을 가지고 있는 와중, 캐롤과 히무로가 마유즈미에게 몸을 돌려준다는 공동의 목적을 가져 버렸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 의식에는 캐롤, 나나시, 히무로 세 명이 전부 필요해 보였다. 그런 이해 관계가 있는 이상 두 집단을 이간질할 수는 없었다. 마유즈미만 없었다면…
아. 망치로 때릴걸. 그렇게 갈팡질팡 고민하지 말고 그냥 때릴걸! 그런 공동의 목적이 사라지면 다시금 서로 경계하게 될 확률이 높았는데! 토키와는 후회막심함을 느끼며 계속 생각했다. 어어… 그리고… 카이다는 캐롤 씨 말을 잘 듣고… 다른 사람들 말은 하나도 안 듣는데… 이제 어쩌지? 내가 뭘 할 수 있지?
카이다… 금색… 토키와는 자신이 카이다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댄 것은 정말 아무 단어나 뱉어버린 것이라 생각했지만, 곰곰이 따져 보니 그게 아닐지도 몰랐다. 카이다와 금색이 연관될 만한 여지가 하나 생각났기 때문이다.
토키와 아유키: …이봐. 카이다. 내가 간밤에 기이한 꿈을 하나 꿨는데. 네가 그 안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물체를 품에 가지고 있었어. 그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해?
그 꿈은 대체 무슨 뜻일까? 토키와는 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작 개꿈이라고 넘겨 버리자니 몇 번씩 그 꿈의 내용이 이어지는 것이 무척이나 묘했다.
꿈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카이다가 그 자켓 내부에 무언가를 숨겨 두었는데, 그 숨겨둔 물체가 이상한 포장지 같은 것을 뚫고서 금색의 빛을 발하는… 그런 꿈이었다. 그리고 토키와는 꿈속에서 그 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서히 불나방처럼 그 안에 걸어들어가다가… 꿈이 끝나는 것이다.
사실 카이다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녀가 카텟 기관을 향한 저항에 동참해 준다면 어딘가 숨기고 있는 물건은 없는지를 물어볼 생각이었다. 허나 안타깝게도 카이다에게는 그와 함께할 만한 분별력이 부족했다. 따라서 그녀의 소지품을 추궁할 방법은 없었다. 분명 카이다라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왜 궁금하냐며 날카롭게 나올 테니.
토키와 아유키: 협조하지 않는 사람을 협조하게 만들 수 있는 좋은 방도가 없을까?
토키와는 어떻게 해야할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도중 토키와는 문득. 그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미 성공한 사람의 수법을 똑같이 사용하는 편이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경우가 어디에 있었더라? 토키와는 누구도 협조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들을 협조하게 만든 사람이 누구 있는지 생각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떠올렸다. 분명 모든 이들에게 평판이 최악이었던 사람, 그러고도 수많은 동맹을 만들었던… 그가 어떻게든 잊고 싶었던. 마수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그녀…
후루미나미 나몬. 그는 그녀에 대해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런 사람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덮어 두고 싶었다. 그가 그녀와 협력함과 동시에 자신에게 가지고 있던 떳떳함을 팔아 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자주권을 되찾았다는 형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토키와는 좋든 싫든 간에 이미 그의 영혼을 팔았고, 그 대가로 죽은 후루미나미의 영향력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더는 조종당하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으나 그는 본능적으로 후루미나미를 본받아 앞으로의 방도를 떠올렸다.
후루미나미는 토키와가 알지 못하는 정보를 제공했다. 카나리와 칸나즈키에게는 자신의 후보를 지키고 살아남을 수 있게끔 도움을 주었다. 정보. 그리고 도움. 야가미에게는 어떻게 했더라? 그녀는 명목상 야가미를 검정으로 만들어 살인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게 도왔다. 그러나 야가미는 후루미나미의 제안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처형시킬 방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후루미나미는 야가미의 독자적인 매듭을 어떻게 풀지 알아냈다. 그녀만의 방식으로.
토키와 아유키: 어떻게 했더라…? 아. 그래. 분명…
후루미나미 나몬: 너희들 중 몇몇은 크레딧 상점에 이 품목이 추가되어 있는 것을 봤을 거야. 이건 사랑의 열쇠라고 하는 물건인데. 이 가상현실을 만든 사람이 심어놓은 부활절 달걀 같은 거지. 원래는 진정한 사랑을 가진 누군가가 사용하도록 만든 건데… 뭐 그런 거 없어도 기능의 일부분만큼은 작용해.
후루미나미 나몬: 이 열쇠는 내가 지목한 상대와 내가 동시에 잠에 들 때 둘의 꿈을 연결해 줘. 꿈에서 상대는 나를 소중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지. 정신력에 따라 그건 차이가 있고 쓰는 것도 까다롭지만 나는 이것으로 야가미 본인에게서 매듭 묶는 법을 배웠어.
토키와는 소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사랑의 열쇠. 사랑의 열쇠! 그는 다이얼로그를 켜고 크레딧 상점으로 들어갔다. 사랑의 열쇠는 여전히 상점의 목록에 들어가 있었다.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쓸 수 있는 열쇠'라는 문구가 설명란에 적혀 있었다. 애초에 사랑의 열쇠는 플라잉 로봇이나 보급 특권, 인플레이션 권리처럼 수량이 한정된 물건도 아니었다. 원한다면 몇 번이든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대가 나를 소중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면 분명 소중한 비밀 또한 털어놓겠지! 그러니 사랑의 열쇠를 잘 쓰기만 한다면 히무로가 알고 있는 카텟 기관의 비밀마저 알아낼 수 있다! 또 카이다에게 몇 번이든 사용해서 그녀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하면 나와 협력해줄 것인지도 알 수 있었다!
토키와는 주먹을 불끈 쥐고서 스스로를 격려했다.
토키와 아유키: 좋았어… 하긴 이제 일이 잘 될 때도 됐지! 좋아! 한 번 해보자!
토키와는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조짐을 느끼면서 자신의 숙소를 향해 위풍당당하게 걸었다. 그러나 그의 발목은 다시 비명을 질렀고. 별 수 없이 토키와는 이내 절뚝거리게 되었다.
토키와 아유키: 이제 시작이야… 지금부터 모든 게 시작되는 거야. 이제 카이다가 잠을 잘 때를 노려서 나도 잠에 들기만 하면… 카텟 기관을 향한 대항이 시작되는 거다!
카이다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아무리 새벽이 깊어도 눈을 감은 순간 그녀의 모든 신경은 제츠보가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자리에 집중되었다. 그건 촘촘하게 자라난 신경질의 실 같은 것들이 방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흐느적거리고, 그 사이에 닿은 모든 것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일과 같았다.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동물적인 감각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방 안에서 벌레 한 마리가 앵앵대도 깨 버리는 그녀인데, 같은 방에 제츠보가 있었다.
카이다가 제츠보의 존재에 새롭게 짜증을 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나시를 만류해 주었다는 고마움은 서서히 사라졌고, 제츠보 때문에 마음 편히 자지도 못하는 번거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카이다 쿠로하: 어이. 슬슬 나를 좀 내버려두지 그래?
제츠보: 내버려 두라고? 너를? 아직은 어림도 없어. 카이다. 너를 풀어둘 수는 없어.
카이다 쿠로하: 씨발 잠을 못 자겠다고. 기분이 좆같잖아. 너는 깡통이라 모르겠지만 사람은 원래 잠을 자야 돼. 그래야 살 수 있다고.
제츠보: 그래? 화 내는 꼴을 보니까 내가 보기에는 아직 멀쩡해 보이는데? 정말 지쳤으면 그렇게 불평할 새도 없이 곯아 떨어질 거야. 그러니까 자려는 노력이라도 좀 해 봐.
카이다 쿠로하: 침대에 누워 있잖아!
제츠보: 누워서 눈 감고 다른 생각이라도 하란 말이야. 그렇게 날뛰어대면 오던 잠도 달아나겠다. 그리고 이미 아침이 밝았어. 지금 잠에 드는 건 올빼미밖에 없다고.
카이다 쿠로하: …제기랄. 이해가 안 되네. 너는 왜 짜증도 안 내면서 사냐?
카이다가 문득 그렇게 묻자 제츠보는 카이다의 의문에 대답을 주었다.
제츠보: 이제 짜증을 내기도 번거로우니까 그렇지. 장난해? 다시 너처럼 짜증 한 번 내 볼까?
카이다 쿠로하: 우씨. 왜 나한테 화풀이야. 개년아!
하등 쓰잘데기 없는 말싸움이 다시 시작되려는 찰나. 제츠보는 그들이 이 수순을 너무도 많이 밟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이다가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하고, 제츠보가 날카롭게 받아치면, 카이다가 죽여버리겠다며 성희롱과 차별주의적인 말을 한다. 그리고 둘은 서로 기분이 상해서 다른 쪽의 말은 듣지도 않는 채 자기 할 말만 해버리는 것이다. 카이다라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 바보니까 몇 번을 똑같은 말만 해도 수치스러울 게 없었지만, 제츠보는 자신의 실수에서 무언가를 배울 만한 지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제츠보는 카이다에게 욕을 하기보다 질문을 던졌다.
제츠보: …뭐가 궁금해서 묻는 건데?
카이다 쿠로하: 내가 지금 말했잖아. 왜 짜증도 안 내면서 사냐고.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 하고 여기에 갇혀 있잖아. 존나 답답하단 말이야! 너는 안 그렇냐? 불공평하다는 생각 안 들어?
제츠보: 내가 여기에 처박혀 있는 이유께서 내 지루함도 신경써 주고.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네.
카이다 쿠로하: 야. 빈정거리지 마! 내가 묻잖아. 그럼 대답을 해!
카이다가 손가락질을 하자 제츠보는 그녀가 대체 어떤 의도로 궁금증을 가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신경이 쓰인다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저 자기같으면 절대 안 한다며 소리를 질러댈 만한 일을 묵묵하게 하고 있다는 점이. 카이다에게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제츠보: 즐겁지는 않지. 하지만 나는 애초에 즐기는 일이 없어. 심장이 텅 비어 버리면 정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아. 내가 인간이었다면 지루함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얼굴을 되찾은 후에도 불합리함 같은 건 떠오르지 않네.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하는 거야.
카이다 쿠로하: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다고?
제츠보: 굳이 생각하자면, 더 이상 탑에 희생자가 남지 않는 것. 그리고 살인게임의 진상에 서서히 가까워지는 것 정도.
카이다는 제츠보를 보고서 손가락을 겨누었다.
카이다 쿠로하: 그게 어떻게 네가 원하는 거야? 야망 없는 년. 무슨 재미로 사냐? 존나 한심하네… 그딴 거 말고 네가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니야. 다른 놈들 다 죽여서라도 이루고 싶은 일. 그런 거 없어?
카이다는 이상하리만치 제츠보에게 참견을 했다.
카이다 쿠로하: 씨발 지금 너 좀 봐. 너 그냥 도구잖아. 남이 휘두르는 대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도구. 고작 그렇게 이용당하고 싶냐? 나를 이길 정도로 세면서 왜 다른 놈들 뒤치닥꺼리나 하고 있냔 말이야.
제츠보는 몰랐고 카이다 본인도 몰랐지만, 그것은 살면서 줄곧 다른 이들에게 조종당해왔던 카이다 본인의 불만이 투영된 말이었다. 카이다는 여태껏 착취만을 당하며 살았다. 여태껏 잃어버린 기억이 너무도 많아 최근까지는 자신이 조종당했다는 인식마저 모호한 그녀였지만, 캐롤과 재회하고 나서 시간이 지나자 그녀가 잃어버렸던 삶에 대한 박탈감이 치솟아올랐다. 이런 인생 낭비가 어디 있단 말인가.
힘은 그 가진 힘만큼의 자유를 보장한다. 안타깝게도 카이다는 그녀의 힘을 경계하는 자들 때문에 온갖 제약을 주렁주렁 달고 있지만, 제츠보는 카이다보다 강한 힘을 내면서 별반 약점이 없는 존재였다.
(카이다는 플라잉 로봇의 방해 전파에 몇 번씩이나 당하던 제츠보의 모습을 보지 못하기에 그렇게 생각했다. 제츠보는 심지어 며칠을 꼬박 카나리의 플라잉 로봇에 의해 멈춰 있기도 했고 세 번째 재판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그 사실을 알았지만, 세 번째 재판을 하는 동안 카이다는 영안로 속에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요인으로 인해. 카이다가 보기에 제츠보는 가장 큰 자유를 가진 존재였. 막말로 누가 제츠보를 막을 것인가? 그냥 마음에 안 드는 놈은 손을 뿌셔 놓는다거나. 발을 뿌셔 놓는다거나. 그냥 전신을 다 뿌셔 놓을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제츠보는 도무지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 오히려 가장 번거로운 일을 떠맡고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제츠보: …네가 나를 걱정해 주다니. 정말 무슨 마음이 내켜서 그러는지 모르겠어.
카이다 쿠로하: 걱정한 적 없어. 지랄하고 있네. 한심하니까 하는 말이잖아. 대체 뭐 하는 거냐고! 진짜 네가 원해서 하고 싶은 건 없는 거냐? 너 그 정도로 든 게 없는 깡통이야?
카이다는 무심코 상당히 심오한 질문을 던졌다. 카이다 본인도 자신이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 시점의 제츠보는 카이다가 어떤 말을 하면 감정 소모 없이 흘려들리는 법을 익혔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는 이 물음만큼은 문득 제츠보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하고 싶은 것?
제츠보: 질문의 요지가 조금 잘못된 것 같은데. 카이다. 원해서 하고 싶은 게 있는지가 아니라, 무언가를 원하기는 하는지가 문제야. 나는 말이지… 이른바 달관한 사람이거든.
카이다 쿠로하: 달관이 뭔데?
카이다가 달관이 무엇인지 알리가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제츠보의 실책이었다.
제츠보: 괴로운 일이 없다는 거야. 먹을 필요가 없으니 배고프지 않고, 잘 필요가 없으니 졸리지 않아. 사람 형태를 되찾으면서 조금 더 사람처럼 생각하게 되기는 했지만… 내 시스템이 금속으로 이루어진 이상 나는 결국 사람보다 기계에 가까워. 착(着)이 너희들에 비해 작고 또 미미해. 네가 아무리 짜증나는 사람이라도 내 짜증은 결국 너를 감시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당위성을 능가하지 못하듯이.
카이다 쿠로하: 뭐어? 그런 것 치고는 저번에 내 머리채 쥐어뜯고 지랄하던데?
제츠보: 그거야 네가 내 인내심을 넘어설 정도로 끝 없이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쏟아 냈기 때문이고.
제츠보의 표정이 조금 달갑지 않아지는 것을 본 카이다는 슬그머니 주제를 바꾸었다.
카이다 쿠로하: 아. 알았다고. 그래서 아무런 욕심이 없다 그거냐…? 진짜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어? 물론 그 깡통 몸뚱이로 누릴 수 있는 게 없더라도. 다른 놈들을 찌바르고 싶다거나 막 네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다는 생각은 들잖아?
제츠보: 안 들어. 그런다고 해도 의미가 없으니까. 그래. 결국 그런 차이야. 나는 너희들에 비해 좀처럼 기분에 따라 행동하지 않아. 너희가 사람을 죽이고도 남을 때 나는 가볍게 주먹질을 할 뿐. 그 이상의 충동도 욕망도 없어.
제츠보의 일은 탑에 있는 이들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제츠보를 탑에 보낸 이들이 당부한. 제 1순위 행동원칙이었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게 되었다. 마유즈미의 방에 누군가가 침입한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잠에 빠져 있던 도중 기이한 직감을 느꼈고, 누군가가 마유즈미의 숙소에 침입했음을 확신했다.
나는 건강하지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여전히 상자 안에 갇혀 있었지만, 그녀는 분명 내 안에 편집증과 망상을 남겼다. 나는 정말 그녀의 숙소 안에 누군가가 침입했는지, 아니면 그저 내 생각일 뿐인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더 나쁜 점은 내가 옳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나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잃고 있었다. 내 직감을 신뢰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달갑지 않을지언정 내 근간을 뒤흔드는 일은 아니었다. 본래 직감이라는 것은 반신반의하는 최후의 보루일 뿐이니. 허나 직감이 아닌 이성 그 자체를 의심하게 되는 것은, 내 현실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온전히 무너지기 전에 탑의 상황을 안정화시키고 마유즈미를 깨울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마유즈미의 정신과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내가 겪는 혼란이 더 커진다면 마유즈미는 기약 없이 갇혀 버리고야 말 것이다.
나는 반복에 대한 정보를 또 누구에게 전할지 의논하기 위해 하기와라 우시오 및 이바라 쿠리스와 면담을 가졌다. 면담 장소는 하기와라의 전용실. 그 안에서 두 사람은 거리낌 없이 소파에 앉았다.
이바라 쿠리스: 헤에… 이렇게 세 명이서 모이다니. 어딘가 어색한데…? 쫀아. 히무로. 이렇게 보니까 우리 마주친 적 되게 없다. 딸기우유 뇌물로 받은 게 마지막이었나?
히무로 시라베: 그렇다. 그 이후로는 해변과 영안로 때문에 마주치지 못했지.
이바라 쿠리스는 자신의 전용실에서 공수한 딸기우유를 홀짝였다. 돌이켜 보면 그녀는 원하는 만큼 딸기우유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인데, 굳이 나의 선물을 받았다. 다른 이가 준 선물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바라 쿠리스: 뭐랄까… 그때 너는 좀 친근한 면이 있었는데. 선을 긋는 느낌이 아니라 조금 부드럽게 말했는데… 다른 사람들한테도 지금보다 부드러웠어.
히무로 시라베: 당시에는 그랬다. 이만한 위기에 봉착하지 않았을 때이니.
이바라 쿠리스: 그럼. 앞으로는 쭉 그렇게 딱딱할 거란 의미…? 에에… 조금 예전의 히무로가 그리워지는걸. 약간 벽이 느껴지지 않았던 그때의 히무로. 어투가 조금만 바뀌면 이렇게 낯설 수가 있다는 게 신기해. 고작 모든 문장을 다로 끝내냐와 끝내지 않느냐의 차이. 그리고 성씨랑 이름을 붙여 부르냐와 성씨만 부르냐의 차이잖아.
이바라 쿠리스: 엣…? 이렇게 보니까 많이 다르네. 낯설 만 한 걸지도…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부를 거야? 하기와라랑 꽤 친해 보이던데도 하기와라 우시오라 부르지 않아?
히무로 시라베: 그렇다.
이바라 쿠리스: 봐! 지금도 이렇게 말하네!
하기와라 우시오: 예전에 비하면 히무로 어투가 조금 변하기는 했지… 그런데 적응이 되고 나니까 오히려 지금 게 더 자연스럽던데? 오히려 나는 지금 나를 하기와라라고 부르면 존나 어색할 것 같아. 역으로 체감이 엄청 된다니까. 뭐랄까… 억.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치네! 마유즈미를 부르듯이 나를 하기와라라고 부른다니! 스윗무로만큼은 안 된다!
히무로 시라베: 네게는 그럴 일 없을 테니 걱정 마라. 마유즈미는 내게 특별하다.
이바라 쿠리스: 푸후우우웁!
이바라는 마시고 있던 딸기우유를 공중에 내뿜었다. 분홍색 분수가 피어올랐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궤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던졌다.
하기와라 우시오: 에이! 더럽게! 너 뭐야. 딸기우유 발사대야?!
이바라 쿠리스: 하… 하기와라.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돼. 우와. 체감이 너무 심하네! 무슨 꿀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어! 이 다정함. 나만 느끼는 거 아니지?! 게다가 트. 특별하다니… 어떻게 특별해? 마유즈미의 어디가 좋아?
히무로 시라베: 내가 대답할 의무는 없는 것 같군.
이바라 쿠리스: 오이. 제발 알려 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어지잖아! 너의 친한 친구한테 알려줄 수도 있지 않아?
히무로 시라베: 친하지는 않다. 말하지 않았나? 해변과 영안로 때문에 마주치지 못했다고. 상황 자체가 서로 친할 수 없었다.
이바라 쿠리스는 내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벌렸다.
이바라 쿠리스: 나는… 친구의 친구는 나의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차갑게 선을 긋다니! 쌀쌀맞아. 심지어 너 우리 마유즈미랑도 친하잖아! 그러니 우리는 사실상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히무로 시라베: 왜 그렇게 되는 거지? 나는 너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 씨발. 집어치워. 둘이서 알아서 친해지시고 할 얘기나 계속 하자고. 자. 살인게임의 루프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까?
하기와라 우시오는 주제를 바꾸었다. 나와 이바라 쿠리스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어제 자기 전에 이미 한 내용이지만, 이바라한테는 잘 얘기했어. 알고 보니까 야가미가 남긴 편지에 살인게임이 반복된다는 말도 적혀 있었다더라. 야가미도 자기 혼자서 알아낸 모양이야.
히무로 시라베: 그렇군. 내가 전할 말은 기억하고 있겠지? 카나리 케이토, 이름 없는 남자 모두 정보를 듣기를 거부했다. 캐롤 브라이트에게 전해주는 일을 고려했으나 그녀가 더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전하지 않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분명 카나리는 시계를 만드느라 안 듣는다고 했고, 나나시는 생각할 게 있다고 했지…? 야. 히무로 너 외판원으로써는 존나 꽝이네? 들어가는 집마다 허탕이냐. 역시 이런 무거운 정보를 전하는 데에 있어서는 무슨 지구멸망 소식 전하는 것 같은 네가 아니라, 잡담이나 떨러 온 것처럼 보이는 내가 적합한가 봐! 키야. 1승 챙기고 갑니다!
히무로 시라베: 이미 상품을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 상품을 팔러 갔던 주제에 말이 많군.
하기와라 우시오: 아. 아무튼 간에… 이제 반복에 대해 전달받지 못한 사람은 캐롤, 나나시, 카나리, 카이다가 다인 거네? 씁… 캐롤이랑 나나시는 알아서 서로 부둥부둥 해줄 테고. 카이다도 캐롤이 알아서 잘 해줄 것 같고… 문제는 카나리인가?
히무로 시라베: 그렇게까지 일이 수월할지는 알 수 없다. 임사체험은 사람을 크게 바꾸어 놓으니까. 자칫 잘못했다간 캐롤 브라이트와 카이다 쿠로하가 모두 통제불능이 될 수도 있다. 이름 없는 남자가 캐롤 브라이트를 어르어 달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지. 결국 그 또한 반복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있으니.
이바라 쿠리스: …응? 캐롤이 나나시를 달래는 게 아니라 나나시가 캐롤을 달랜다고? 그거 뭔가 반대 같은데…?
히무로 시라베: 이름 없는 남자가 캐롤 브라이트를 달래게 될 것이다. 새끼를 밴 짐승이 유독 주변 환경을 향한 경계심을 강하게 하듯 캐롤 브라이트는 자신의 가족이 어떤 처우를 받을지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카이다 쿠로하보다도 더 난폭해질지도 몰랐다. 카이다 쿠로하는 캐롤 브라이트에 대한 기억이 모호한 반면 캐롤 브라이트는 카이다 쿠로하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고 느끼는 것과 가족인 것의 차이. 사명감과 보호의식을 느끼는 와중 캐롤 브라이트는 카이다 쿠로하의 모든 과오를 감싸 주어야 했다.
히무로 시라베: 이름 없는 남자가 반복에 대한 혼란을 느낄지언정 감당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있는 캐롤 브라이트보다야 상황이 낫고, 그런 일률적인 계산에 의하면 이름 없는 남자가 캐롤 브라이트보다 이성적일 확률이 높다.
이바라 쿠리스: 그런가…? 으음… 내가 아는 캐롤은 뭔가 다른 사람들이 힘들 때 도와주는 이미지가 컸는데… 나나시랑도 상담해 주고, 마유즈미랑도 상담해 주고… 토키와랑도 상담해 줬어. 캐롤이랑은 연애 얘기도 했다? 글쎄 있잖아. 내담자와 상담사는 5년이 지날 때까지 연애를 못 한다는 거 있지? 엄청나지 않아?
하기와라 우시오: 5년? 뭐야. 긴데? 왜 못 하는 거래?
이바라 쿠리스: 캐롤 말로는 상담사가 마음만 먹으면 내담자 심리를 조종할 수 있어서 그렇대. 그런데 5년은 좀 긴 것 같아. 으으. 너희들이 캐롤한테서 제대로 된 상담을 받았다면 빠져 버렸을지도 모를 정도잖아. 안 그래? 그 터무니없이 크고 아름다운… 으히히…
이바라 쿠리스가 웃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어어어? 이것 좀 봐라? 야. 침 흘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
히무로 시라베: 5년은 길지 않다. 윤리 강령은 이유가 있고, 선례와 피해자가 있기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상담을 받기 위해 상담사를 찾는 사람은 이미 심신이 건강하지 않을 확률이 높으며. 그런 와중 내담자가 겪고 있는 문제 상황에 대한 이해를 위해 상담사는 내담자의 가장 연약한 일면을 알게 되지. 그것을 마음 먹고 이용하기 시작한다면 조종은 오히려 쉽게 이루어진다.
재단은 외세의 정보국에서 포로를 어떻게 심문하고 세뇌하는지를 참고하여 거창한 과학기술 없이도 실험체의 정신을 원하는 대로 조종하는 법을 정립했다. 나는 사람의 의지가 어떻게 꺾이는지를 보았다. 그들은 어느 사람에게도 약점과 공포가 있음을 이해했고, 그 부분을 후벼파 무너뜨릴 경우 자아가 함께 무너지게 됨을 알아냈다.
그리고 내담자는 상담사에게 자신의 상처를 직접 내보여준다. 그 신뢰를 배신하는 것이야말로 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배신일지 몰랐다.
이바라 쿠리스: 아아… 듣고 보니까 그렇네… 조금 생각 없는 말이었어. 참 멋쩍다. 이거…
히무로 시라베: 그러니 5년은 짧다. 이건 나 뿐만 아니라 캐롤 브라이트 또한 이해하고 있을 사실이며, 캐롤 브라이트의 행보로 보아 그녀가 불안정하다고 볼 수 있는 가장 큰 근거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간단하게 말해서 직업 윤리 개판이다 이거구만? 누가 봐도 상담사와 내담자가 서로 존나 좋아하니까.
이바라 쿠리스: 자. 잠깐! 보이는 거만 그런 거지. 그냥 좋은 친구 사이일 수도 있어! 또. 아무리 봐도 나나시 쪽에서 캐롤을 좋아하는 거잖아. 캐롤이 내 앞에서 얼마나 칼같이 선을 그었는데? 내가 막 떠 봤을 때도 프로페셔널하게 그 5년 얘기 딱 하고!
이바라 쿠리스는 완강하게 캐롤 브라이트를 변호했다.
이바라 쿠리스: 그러니까.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우리 다 캐롤이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
히무로 시라베: 그러나 죽음이 그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이바라 쿠리스는 내가 그 단어를 입에 담자 얼굴에서 핏기를 잃어 버렸다. 상기되어 있던 얼굴은 곧 오히려 파란 색에 가까운 창백함으로 변했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내 쪽을 보며 자신의 목을 손날로 가르는 시늉을 했다. 그 화제를 그만 하는 편이 낫다는 충고 같았다.
히무로 시라베: 캐롤 브라이트는 자신의 내담자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녀와 가장 심리적 접점이 많은 사람에게. 심지어 캐롤 브라이트는 세 가지 정신 조작을 전부 가지고 있다. 그녀가 받는 사랑 중에서 이름 없는 남자의 사랑이야말로 그녀 본인이 만들었을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랑이지. 그럼에도 캐롤 브라이트는 그에게 몸을 기대고 있다.
이바라 쿠리스의 얼굴에 다시 핏기가 돌았다.
이바라 쿠리스: 몸을 치댄다고? 일부러 그런 표현을 쓰는 거야? 으흠흠. 다분히 노린 것 같은 느낌이.
하기와라 우시오: 억! 이게 지금 뭐라는 거야! 몸을 기댄다잖아! 좀 진정해라!
이바라 쿠리스: 치대거나 기대거나 그게 그거잖아! 뭐가 달라!
하기와라 우시오: 답답하다 답답해. 자. 이게 치대는 거고.
하기와라 우시오는 이바라 쿠리스의 뺨에 자신의 손등을 얹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이게 기대는 거야! 알았냐?
하기와라 우시오는 목을 거의 90도로 꺾어가며 이바라 쿠리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기댄다기보다는 거의 박치기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이바라 쿠리스는 하기와라 우시오의 동작에 허를 찔린 듯 둔한 반응을 보였다. 수치심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작 장난인데 왜 그토록 안색이 붉게 변하는가?
이바라 쿠리스: …………아아. 그. 그런 느낌…? 그렇구나아아… 우와. 잠깐. 나 콜라 좀…
땀을 흘리기 시작한 이바라 쿠리스는 잠시 음료를 마셔 체온을 낮추었다. 그리고는 약간 주저하는 듯한 기색을 한 채 다시금 소파에 앉았다.
히무로 시라베: 이야기가 왜 이렇게까지 샌지 모르겠군. 지금까지 나는 이름 없는 남자와 캐롤 브라이트의 심리 상태에 대해 설명했다. 충분한 이해를 가졌겠지?
그에 따라 나는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
히무로 시라베: 오늘 캐롤 브라이트와 이름 없는 남자의 상태를 살폈을 때. 두 사람의 정신 상태와 유대가 안정적이라면 반복에 대해 전하는 것을 고려해 보겠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럼 우리는 카나리한테 찾아가서 얘기해 볼게.
히무로 시라베: 아마 카나리 케이토는 너희들에게도 응하지 않을 것이다. 시계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바라 쿠리스: 저기. 아까 물어보려다가 흐름을 놓쳐서 못 물어본 건데… 카나리는 왜 갑자기 시계를 만드는 거래?
하기와라 우시오: 초고교급 시계공이니까.
하기와라 우시오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논리상 문제는 없었지만 문맥에는 맞지 않는 말이었다. 이바라 쿠리스가 질문을 한 요지는 그게 아닐 터이니.
이바라 쿠리스: 내 말은! 왜 느닷없이 지금 시계를 만드느냐는 거야! 내가 시계공 일을 잘 몰라서 이해를 못 하는 걸 수도 있지만… 나는 왜 지금 시계를 만드는지 모르겠어. 으음…… 아… 아! 알았다! 알았다! 나 진짜 깨달았어!
히무로 시라베: 무엇을 말이지?
이바라 쿠리스는 어깨를 피고서 고개를 치켜 세웠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바라 쿠리스: 카나리가 사실은 시계를 만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 시계를 만들고 있다는 건 히무로를 돌려보내기 위한 핑계라는 거야. 그리고 히무로를 돌려보내고 싶었던 이유는… 몰라. 응대하기 귀찮아서?
히무로 시라베: 시계를 만들고 있는 것 자체는 사실일 것이다. 숙소가 아니라 전용실에 머무르고 있으니 전용실에서밖에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을 터. 그리고 그가 대외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타당하겠지.
하기와라 우시오: …다른 놈한테 들키고 싶지 않은 시계를 만들고 있다. 이거야? 대체 뭘 만들고 있는 걸까…?
히무로 시라베: 정확히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의 전용실 안에서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 이바라 쿠리스 네가 화학약품을 제조할 설비를 갖추고 이름 없는 남자가 철을 용접해 기계를 만들 설비를 갖추었듯이. 카나리 케이토 또한 그 설비를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바라 쿠리스: 하긴. 공방이기는 하니까… 그렇지만 시계 공방에서 엄청 다이나믹한 게 나오지는 않을 것 같은데…? 카나리가 더 자세히 말한 건 없어?
히무로 시라베: 그는 그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정교한 시계를 만든다고 하였다. 적어도 자신의 전용실에 틀어박혀 평범한 시계나 만들고 있을 것 같지는 않군. 결국 시계를 만든다는 것이 진짜이든 핑계이든, 그는 너희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 큰 기대는 마라.
하기와라 우시오와 이바라 쿠리스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얼로그를 사용해 시간을 보자 캐롤 브라이트 및 이름 없는 남자와의 만남이 머지 않은 시점이었다. 마유즈미를 되찾아오기 위한 정기 모임. 이번에는 어떤 변수도 허용하지 않는 최소 인원만을 모았다.
히무로 시라베: 먼저 가겠다. 기나긴 낮을 누려라.
하기와라 우시오: 잘 해내고 와. 히무로! 마유즈미랑 같이 오면 더 좋고!
이바라 쿠리스: 잠깐. 히무로. 이거 가져가!
이바라 쿠리스는 소파 옆에 숨겨두고 있었던 무언가를 내게 건냈다. 보온병이었다.
이바라 쿠리스: 소금물이야. 나나시가 아마 챙겼을 것 같지만… 혹시 모자랄까봐 챙겼어. 그. 별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르지만 조금이나마 돕고 싶어서.
나는 보온병을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히무로 시라베: 도움이 되었다. 이바라 쿠리스. 마유즈미도 네게 고마워할 것이다.
이바라 쿠리스는 내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처럼 놀랐다.
나는 마유즈미의 숙소 앞에 서서 캐롤 브라이트와 이름 없는 남자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을 보았을 때는 직감보다 분명한 근거와 논리의 과정을 통해. 그리고 시각 말고도 다른 감각을 최대한 동원한 교차 검증을 통해 환상을 구별해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캐롤 브라이트: 안녕하세요. 히무로 씨.
캐롤 브라이트가 인사말을 건넸다. 그 곁에는 이름 없는 남자가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원형 계단을 타고 내려왔을 때. 나는 이름 없는 남자가 착용하고 있는 물건에 시선을 주었다.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상식상으로는 그토록 의존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채울 수가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또 시작이군.'
나는 순간 그것이 내가 보는 환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름 없는 남자의 손목에 손을 댔다.
나나시: ……음? 안녕. 히무로…?
히무로 시라베: …만져진다.
환각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름 없는 남자의 손목에 채워진 것이 실재한다는 뜻이 된다. 나는 그들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들 딴에는 오니의 가면을 뒤집어쓰는 정도의, 별다른 의도가 없는 행위였을지도 몰랐다. 또 그 물건이 내가 알고 있던 바와는 다른 쓰임새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 물건은 보통 좋은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히무로 시라베: 이건 웬 수갑이지?
징벌? 집착? 어쩌면 성도착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왜 이름 없는 남자에게 수갑을 채웠는지에 대한 이유를 추측할수록 결론은 결코 긍정적으로 도출되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어제 싸웠거든요. 나나시 씨가 카이다의 몸을 지워 버리겠다면서 저를 냉장고에 묶고 가 버렸어요.
나나시: …그렇게 됐어. 히무로. 너무 이상하게 받아들이지는 마. 그냥 똑같이 되갚음을 당한 거니까.
히무로 시라베: 그런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여태껏 계속 착용한 건가?
캐롤 브라이트: 원래는 어제 풀어주는 거로 끝내려 했는데. 왜인지 제 화가 아직 안 풀려서 어제 풀어드리고 오늘 또 채웠어요.
다른 사람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만한 내용이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불만에 차 있고, 그 불만을 이름없는 남자에게 수치와 불편함을 주는 식으로 해갈함과 동시에 자신의 불만을 호소하는 일 따위는 결코 본받을 만한 것이 될될 수 없었다.
캐롤 브라이트는 이름 없는 남자를 말 그대로 속박하고 있었다. 수갑은 또한 한 사람의 저항력을 박탈하고 법 집행 기관들이 범죄자들에게 하듯이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지배 관계임과 동시에 우월감을 느끼는 일. 한도를 넘지 않는 구속과 굴레 씌움의 투사를 통한 응보. 누군가에게 강대한 존재가 되는, 무력감의 해소를 통한 환희.
히무로 시라베: 이건 안 되겠군.
이런 사람에게 반복을 알려줘 봤자 무너질 것이 당연했다. 이름 없는 남자만 죽어나갈 뿐이다.
나는 어떻게 사람이 하루 사이에 이렇게 변할 수가 있는지 의문을 느꼈다.
'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 > 챕터 4'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단크 타워 챕터 4 - 9 (8) | 2024.08.27 |
---|---|
더 단크 타워 챕터 4 - 8 (8) | 2024.08.12 |
더 단크 타워 챕터 4 - 6 (12) | 2024.07.16 |
더 단크 타워 챕터 4 - 5 (10) | 2024.06.24 |
더 단크 타워 챕터 4 - 4 (12) | 2024.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