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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4

더 단크 타워 챕터 4 - 9

by 도타싫어! 2024. 8. 27.

 

왜 이 자식까지 건드리냐고? 마음에 안 드니까.

 

자기 분수에 맞게 살아야지. 넌 못 벗어나. 쓰레기 인생에서 못 벗어난다고.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쓰레기들한테 무슨 우정이고 친구야?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역겹다고. 뭐가 그렇게 분한데? 뭐가 그렇게 억울해? 정말 새 출발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쓰레기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처럼 왜 실망하냐고.

 

쓰레기통 안에서도 장미는 피어난다. 뭐 이런 거야? 도무지 못 봐주겠네. 아득바득 밝은 미래를 꿈꾸면서 기어올라오는 게... 

 

 

더 단크 타워

챕터 4: < 황금 원숭이의 손길 >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츠보: 여보세요? 응. 어. 안타깝네… 자고 있어. 응. 말해도 돼.

 

이다 쿠로하: 크어… 커거걱

 

츠보: 뭐라고? 거짓말이라고 하지 그랬어? 아니지. 바로 들키고 말았겠네… 하아… 그래서 너는 어떻게 했는데?

 

이다 쿠로하: 푸히. 드르렁… 퓨우우우

 

츠보: 나랑 마유즈미? 알았어. 나는 상관 없지. 걱정 마. 안 알려 줘. 나도 그게 심각하다는 건 알아. 응. 잘 했어. 끊을게.

 

이다 쿠로하: 드르렁… 커어어어… 크흥. 컥

 

츠보: 아. 시끄럽네 정말.

 

 

 

 

 

캐롤은 미다스 왕이 되는 꿈을 꾸었다.

 

그녀가 만지는 모든 것이 금이 되었다. 빵을 만지면 빵이 금이 되었다. 홍차를 만지면 녹인 금이 되었다. 컵을 만지면 금으로 만들어진 컵이 되었다.

 

무심코 바닥을 만졌을 때. 탑이 금이 되었다. 옷을 만지니까 옷이 금이 되었다. 옷에 손이 닿지 않은 채 옷을 입느라 스웨터를 몇 개씩 버렸다. 만지는 게 금이 되니 다이얼로그에 통화도 걸 수 없었다. 캐롤은 문고리를 손목과 손목으로 움켜쥔 뒤에 가까스로 돌려 그녀의 방을 나섰다.

 

사람들이 금으로 변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금이 되어 버렸다. 나나시와 자신의 동생을 불렀지만 어떤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분명히 금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녀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다른 이들의 문을 도끼로 부숴 열었다. 그 안에는 잠을 자다가 금으로 변한 자들이 몇 명이나 있었다.

 

캐롤은 자신이 모든 사람들을 실수로 죽여버렸다는 것을 깨닫고서 터벅터벅 탑을 나왔다. 빛을 맞아 천 층 이상의 순금 탑이 번쩍였다. 그녀는 멍하니 장미밭 속을 헤치고 들어가 장미를 만졌다. 만지는 모든 장미가 금으로 변했다. 귀금속이 된 장미의 가시가 그녀의 피부를 북북 찢어댔다. 손에 베인 상처가 몇 개나 생기는 것을 보았지만 캐롤은 멍하니 장미를 금으로 바꾸기를 계속했다. 그녀는 더 아프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캐롤은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댔다. 허나 문제가 있었다. 캐롤 본인은 황금으로 변하지 않았다. 캐롤은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오른손의 날을 세워서 왼쪽 손목을 내리쳤다. 왼손이 잘려 땅에 떨어졌다. 땅이 순식간에 금색으로 화했다. 상처 부위에서 녹은 금이 줄줄 흘렀다.

 

캐롤은 생각했다. 이 왼쪽 손목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좋겠다고. 누군가가 이 손을 발견한다면

 

롤 브라이트:… 헉…!

 

캐롤은 숨을 헐떡이며 깨어났다. 더워서 이불을 발로 뻥 차자 차가운 공기가 그녀를 식혔다. 그녀는 자기가 꾼 꿈을 어렴풋이 기억했다. 꿈의 정신분석학을 배운 그녀는 모든 꿈에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무의식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통제할 수 없는 힘이 날뛰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녀는 히무로가 그녀를 시한폭탄 취급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을 그대로 전하면 사람은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롤 브라이트: 아니야. 괜찮아. 다 괜찮아. 그 일은 나나시 씨와 치나미밖에 모르잖아

 

그녀는 영안로에서의 기억이 모호하게 느껴졌다. 가장 최근의 기억은 영안로에서 나온 직후 카이다에게서 칼을 빌려 스스로의 왼쪽 중지를 자른 기억이었다. 왜인지는 그녀도 몰랐다. 그저 그녀가 자른 손가락과 모든 비밀이… 당연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모호한 예감만을 느꼈다… 그녀는 이유는 모르고 사실만 알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 손가락은 감춰 두어야만 했다.

 

롤 브라이트: 아무도 찾지 못할 거야… 아무도

 

 

 

 

 

 

이다 쿠로하: 크어어억… 컥. 어억! 어! 깜빡 졸았다! 씨발! 어!

 

카이다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어났다. 아무 생각 없이 카이다를 지켜보고 있던 제츠보는 벌써 카이다가 깨어났다는 사실에 번거로움을 느꼈다. 수면제를 8알이나 먹었으니 열두 시간 정도 푹 자면 좋을 텐데. 카이다는 10시 정각에 깨어났다.

 

이다 쿠로하: 아침이네? 진짜 깜빡 졸았는데… 존나 잘 잤구만

 

이다 쿠로하: 꿈도 꾸고… 아씨. 뭔 꿈을 꿨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나 꿈을 잘 안 꾸는데 존나 흔하지 않은 꿈이었는데. 거의 끝까지는 엄청 재밌었던 꿈이었는데… 아씨. 뭐더라?

 

츠보: 앞으로도 수면제 먹으면서 자면 되겠네. 잘 됐다. 카이다.

 

이다 쿠로하: 너.

 

카이다는 제츠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츠보: 왜 불러? 불만 있어?

 

만약 불만이 있다면 제츠보야말로 카이다에게 불만을 토할 판국이었다. 제츠보는 카이다가 자신의 거취를 어떻게 할지 물었을 때 적절한 방향을 제시했다. 나나시가 카이다의 몸을 마비시키려 할때 나나시를 만류해 주었다. 하도 잠을 못 자고 투덜거리길래 수면제를 구해다 줘서 숙면을 취할 수 있게끔 돕기까지 했다. 그토록 많은 도움을 줬는데도 화를 낸다면 정말 안하무치한 일이겠지만, 카이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다 쿠로하: …고맙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잘 될 줄은 몰랐어. 쓸모는 있네.

 

제츠보는 그 고깝고 거만한 말이 카이다의 기준에서는 짜내고 짜낸 감사의 표시임을 눈치챘다. 그리하여 제츠보는 별다른 불만 없이 카이다의 말을 흘려 넘기게 되었다.

 

츠보: 응. 그래.

 

이다 쿠로하: 또 나는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거든? 나는 도움받은 건 그대로 갚아주고 누가 나를 해치는 건 백배 천배로 갚아서 돌려주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좀 있다가 너도 나한테 고마울 수 있게 만들어 줄게.

 

츠보: 헛소리 하지 말고.

 

이다 쿠로하: 헛소리 아니거든. 씨발아?! 아. 잠깐. 그래. 말 나온 김에 전화나 걸어 봐야겠다!

 

 

 

 

 

나는 카이다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이다 쿠로하: 야! 빨리 내 숙소로 와봐! 언니한테는 비밀로 해!

 

나시: 뭐야 카이다? 무슨 일이길래 그래?

 

이다 쿠로하: 빨리 오기나 해! 빨리빨리 오라고! 언니한테는 비밀로 해. 반드시 비밀로 해라!

 

카이다는 자신이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캐롤 씨와 나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돌아 보았다.

 

나시: …그렇다는데요? 카이다가 왜 당신한테서 무언가를 숨기려고 할까요?

 

롤 브라이트: 저도 잘 모르겠는데 일단 제츠보 씨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죠. 치나미 뜻이 그렇다고 하니 부담없이 다녀 오세요. 제 걱정 마시고요.

 

나시: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하세요.

 

나는 과연 카이다가 나한테 어떤 용건이 있어서 나를 부르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우리가 사적인 대화 같은 걸 나눌 사이는 아닌데… 혹시 따로 자기 방으로 불러서 괴롭히려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것 말고는 정말 마땅한 용건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와 카이다는 이미 영안로에서 적대의 끝장을 본 사이였다.

 

창녀라고 부르는 건 심했던 것 같기도 하고… 창놈이라고 몇 번씩 불리긴 했지만 내 쪽에서 그런 말을 하니까 똑같은 욕이라고 느껴지지가 않아. 그렇다고 사과하기는 싫은데… 애초에 다시 볼 줄 몰랐으니까. 또 캐롤 씨를 재단에 팔아넘긴 사람이 카이다니까 응징한 거지. 설마 동생일 줄 알았나…?

 

또 납치하려고 부르는 건 아니겠지 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나는 카이다의 숙소 문을 두드렸다.

 

나시: 나 왔어. 무슨 일이야?

 

이다 쿠로하: 왔구나! 일루 와! 이 새끼야!

 

문이 벌컥 열림과 동시에 억센 손이 내 손목을 잡고 끌어댔다. 내 다리가 땅에서 잠시 떨어졌다. 카이다는 내 팔을 잡고서 자신의 몸을 크게 틀어 내 몸을 통째로 들어올리고 자신의 방으로 내던졌다.

 

나시: 아으… 또 납치야? 뭐길래 이래?

 

이다 쿠로하: 뭐긴 뭐야. 너한테 불만 많은 사람들의 복수 시간이다! 보아하니 제츠보 얘도 너를 싫어하고. 나도 너를 싫어하고! 너 나한테 심한 말 했고 기억을 지우려고도 했으니까 너를 괴롭히면 보답과 복수를 동시에 하는 거지!

 

나는 카이다와 거리를 둔 채 자신의 눈가를 한 손으로 감싼 인공지능을 보았다.

 

나시: …인공지능 네가 원한 거라면 받아들일게.

 

츠보: 내가 이딴 바보짓을 원했겠어? 느닷없이 나나시를 왜 부르나 했더니 이런 헛수고나 할 줄이야 네 언니한테 미움받는 게 무섭지도 않아. 카이다? 외출금지는 나가서 다른 사람 괴롭히지 말라고 시키는 건데 사람을 불러서 괴롭히면 어쩌잔 거야?

 

이다 쿠로하: 흥. 이놈이 언니한테 그렇게 대수인가? 어제 보니 수갑에 묶여서 질질 끌려다니던데. 내가 봤을 때는 언니도 얘한테 질려버린 게 분명해. 그러니까 수갑으로 끌고 다니면서 막 대하는 거지. 내 말이 맞지 않냐?

 

나시: 나 이제 간다.

 

카이다는 내가 문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자 골키퍼처럼 팔을 쩍 벌리고서 그 앞을 가로막았다.

 

이다 쿠로하: 가긴 어딜 가! 야! 제츠보! 너도 막아! 우리 둘이서 팔만 벌려도 이 새끼는 여기서 못 나가잖아!

 

츠보: 그냥 보내 줘. 아무리 세게 때려봤자 내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아.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카이다는 자신에게 동조할 줄 알았던 인공지능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예상치 못한 듯이 자신의 턱과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다 쿠로하: 달라지는 게 없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러면 이건 어때. 키야! 나 씨발 똑똑하네! 나 지금 진짜 좋은 생각이 들었어!

 

츠보: 어떤 정신나간 생각인지 한 번 들어나 보자.

 

인공지능은 반쯤 포기한 기색을 내며 말했다. 카이다는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감탄한 듯이 손뼉을 쳤다. 그리고선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다 쿠로하: 이 창놈이 너한테 제츠보라는 이름을 붙였잖아. 좆같은 이름이잖아!

 

츠보: 뭐?

 

인공지능은 조금 날이 선 반응을 했다. 카이다는 자신의 말이 맞지 않냐며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이려다가 진심으로 신경이 거슬린 듯한 인공지능의 얼굴을 보고 눈알을 데구르르 굴렸다.

 

이다 쿠로하: …취소. 나는 아무 생각 없어. 하지만 제츠보 너는 별로라고 생각한 이름이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이 새끼한테 할 수 있는 앙갚음은 이 새끼한테 직접 좆같은 이름을 붙여주는 거야. 앞으로 우리는 얘를 좆같이 부르는 거라고! 어때? 괜찮지?

 

나와 인공지능은 평소에 하듯이 카이다의 말에 반대표를 보낼 생각이었다. 적어도 나는 본래 카이다가 하는 말에 기대를 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그 발언을 곰곰히 생각하고 있자니 그것은 평소의 카이다가 내는 아이디어보다는 훨씬 일리있는 소리였다.

 

나시: 그거 괜찮은데?

 

이다 쿠로하: 그치! 괜찮지! 이 새끼야! 아니 잠깐. 너는 왜 동의하고 앉아 있냐! 입 닥쳐!

 

진명을 잃은 인공지능과 나는 가명을 통해 스스로를 정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카이다는 멸칭에는 멸칭이라는 단순한 복수법을 제안했다. 명예의 훼손. 어쩌면 그 앙갚음을 통해 인공지능이 평안을 되찾을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정작 인공지능 본인은 그 일에 회의적이었다.

 

츠보: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 그냥 나나시 보내 줘. 카이다.

 

이다 쿠로하: 싫어! 나는 이 새끼한테 좆같은 이름 지어줄 거야! 어디보자. 음 핑크…맨? 핑핑 핑크핑

 

나시: 유치하다. 카이다. 독창성도 없어. 내 이름에 핑크를 안 넣으면 짓지를 못해? 

 

이다 쿠로하: 아가리 닥쳐! 야. 제츠보! 좀 도와줘! 이거 원래 네가 해야하는 건데 내가 도맡아서 하고 있는 거라고!

 

츠보: 나는 이 일에 동의한 적 없어. 카이다. 그냥 보내래도?

 

나시: 나는 동의해.

 

츠보: 내가 너한테 안 좋은 이름 하나 붙인다고 해서 우리 사이의 일이 청산되지는 않아. 나나시.

 

나시: 네 말이 맞아. 인공지능. 그 일은 청산될 수 없어. 무엇도 내가 너에게 한 일을 만회할 수 없어. 단지 네가 객체로 선 뒤에야 비로소 네가 평화를 가지게 되리라는 거야.

 

이다 쿠로하: 그건 또 무슨 뜻이냐?

 

나는 카이다의 질문을 인공지능에게 대답했다.

 

나시: 단지 나에게 수치심을 주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정작 너는 여전히 악의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잖아. 나와 네 위치가 서로 바뀌어야만 하는 거야.

 

이다 쿠로하: 일리 있는데. 아니. 일리있는 게 아니라 맞는 말이야! 그렇지! 제츠보라는 이름은 역시 좆같잖아? 나는 네가 왜 굳이 그 이름으로 살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돼.

 

츠보: 검은 칼날이 이름인 주제에 어디서 평가질이야? 너는 가만히 있어. 이건 나와 나나시 둘 사이의 일이니까.

 

이다 쿠로하: 아. 씨발. 아까부터 왜 우리끼리 싸우려 그러고 난리야! 이름 좋게 지어주겠다면 조용히 받아! 저 새끼 열받게 하고 싶으면 그냥 제츠보라는 이름으로 사는 대신 저 새끼를 패란 말이야!

 

츠보: 내가 저번에도 말했잖아. 나나시. 내 이름이 제츠보이기 때문에 네가 괴롭다면 내 이름은 제츠보라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

 

이다 쿠로하: 야. 너 진짜 병신이냐? 저 새끼 괴롭게 하고 싶으면 그냥 패면 되잖아. 왜 네 이름이 제츠보로 남는 식으로 괴롭혀야 해?

 

츠보: 조용히 하라고 했어. 카이다. 참견하지 마.

 

카이다는 인공지능의 냉정한 목소리에 잠깐 주저함을 보였으나, 이내 할 말은 하겠다는 듯이 역정을 냈다.

 

이다 쿠로하: 아니! 못 하겠다! 네가 더럽게 미련한 짓을 하고 있으니까 말하는 거잖아! 이름 좆같을 수 있지. 그럼 그냥 이름을 바꿔 버리고 다른 방식으로 괴롭히란 말이야. 왜 좆같은 취급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는 거냐? 한심하잖아! 왜 네가 계속 손해를 봐야 하냐고!

 

츠보: 그런 방식으로 되갚아야지만 의미가 있는 거니까.

 

이다 쿠로하: 그거야 네가 그딴 식으로 생각하니까 그런 거지! 내가 봤을 때는 좆도 의미 없어! 이름을 간직하면서 지 혼자 투덜거리는 게 병신짓이 아니면 뭐냐? 찢어진 옷 입고 다녀서 부끄러우면 버리고 새 걸 사면 되잖아!

 

인공지능은 카이다의 말에 혹독한 비판을 가하려다가 잠시 멈추었다. 내가 보기에는 카이다가 그저 가명 사용자들에게 있어 이름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인공지능에게는 아주 조금 일리가 있는 지적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나시: …카이다. 인공지능을 그렇게 신경써주고 있는 거야? 조금 다시 봤어.

 

이다 쿠로하: 그야 씨발 수면제 가져다준 게 기특해서 화풀이할 좋은 방법을 가져다 놨더니. 내 말을 못 알아듣고 바보같은 짓만 하고 있으니 그렇지!

 

츠보: 이제 와서 바꿀수는 없어. 이미 너무 많이 지났어.

 

이다 쿠로하: 아니 병신아 쫌! 왜 그딴 식으로 나와? 뭐가 늦었어! 이제부터라도 바꾸면 될 거 아니야!

 

나는 카이다의 말을 듣고서 그런 말을 하는 카이다야말로 바뀔 의향이 있는가 생각했다. 그리고 좀처럼 그 질문에 답을 내릴 수 없었다.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인공지능에게 부디 자신을 아끼라고, 내가 아무리 미울지언정 모욕을 달고 다니지는 말라는 충고를 주는 사람이 카이다일 줄은 몰랐다. 조금도 몰랐다.

 

츠보: …그렇게 쉬운 이야기가 아니야.

 

이다 쿠로하: 그럼 씨발 이 간단한 게 너는 어렵냐? 이름이 싫으면 네 이름을 버리라니까? 어휴 씨발. 진짜 답답하다!

 

분명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 맥락이 얽혀 있는 나와 인공지능 사이에서나 그럴 뿐, 카이다가 보기에는 우리 두 사람 모두 이미 지난 일에 연연해서 굳이 불편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 모양이다. 하지만 카이다가 아무리 재촉한다고 해도 그 일은 인공지능 본인의 의지가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꼭 그녀가 나를 용서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노네임. 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행복과 평안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녀 스스로가 제츠보라는 이름을 버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재촉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오직 인공지능이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갈릴 터였다.

 

이다 쿠로하: 한 번 무슨 이름을 가질지 고민이라도 해 봐. 계속 제츠보라는 이름 가지고서 전전긍긍하지 말고! 우리가 지어주면 될 거 아니야. 안 그래?! 안될 건 또 뭐 있어! 그리고 이 새끼가 지어준 이름이니 굳이 네가 떠안을 필요도 없다고!

 

나시: 나는 카이다의 말에 아주 조금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물론 그 멸칭이 내 과오이기는 하지만… 차라리 나는 다른 벌을 받고 싶어. 나에게 어떤 짓을 해도 좋아. 매도해도 되고 분이 풀리지 않는다면 나를 마구 때려. 네가 아프지 않은 방법이라면 뭐든.

 

나시: 오만하게 들리겠지만 네가 나 때문에 더 불편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인공지능은 내 말을 듣고 한동안 반응을 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인공지능은 말을 꺼냈다.

 

츠보: 어떤 이름을 지어주려고 하는지 들어나 보자. 어차피 형편없겠지만 말이야.

 

카이다는 인공지능의 말을 듣고 스스로 손뼉을 짝 치더니 신이 나 함성을 내질렀다.

 

이다 쿠로하: 야아아! 그렇지! 자. 한 번 제츠보 이름 먼저 짓고. 그 다음에 이 창놈새끼 이름도 지어 주는 거야! 어때? 뭐로 지어줄까? 핑신 어때?!

 

나시: 그래 너한테 동조해준 내가 바보다. 멍청했네

 

츠보: 이제라도 안 게 어디야. 나나시.

 

이다 쿠로하: 하! 오늘따라 죽이 존나 잘 맞네. 이 새끼랑!

 

그리고 우리는 하나씩 이름을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큰 실수였다.

 

우리는 단지 우리 세 명뿐 말고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름을 지어야만 했다.

 

노네임과 노바디를 가명이랍시고 쓰고 다닌 사람들에. 이름에 조예가 조금도 없는 무식쟁이 하나가 모였으니 우리의 작명 실력이 좋을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츠보: 무라사키노나가요리히메(茈の長縁姬)? 진심이야? 이런 이름보다는 차라리 제츠보가 백배 나아.

 

나시: …그래도 예스머신(Yesmachine)보다는 괜찮은 이름인 것 같은데.

 

츠보: 예스머신이 왜? 노바디의 반대말이니까 말이 되잖아. 또 내 몸은 기계가 되었지만 그걸 받아들이고 긍지로 여기는 대담함까지 담은 이름이야. 예스. 아이 엠 머신.

 

나시: 아니. 어감이 조금 그래서

 

츠보: 어감이 왜? 예스머신. 예스머신. 좋기만 한데. 예스머신. 너도 발음해 봐.

 

나시: 으. 예 예스… 머신

 

츠보: 띄어 말하지 말고 제대로 붙여 말해야지.

 

나시: 예스머신

 

나만 이거 어감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다 쿠로하: 좆구리네. 그냥 로보코라고 하면 되잖아. 여자 로봇이니까.

 

나와 인공지능은 카이다를 쏘아보았다.

 

나시: 그거 정말 별로다. 카이다. 내가 들어본 이름 중에서 제일 촌스러워.

 

츠보: 내 말이. 로보코? 이런 쓰레기같은 이름은 처음 들어 봐.

 

나시: 네가 내 이름 핑키로 지으려 할 때부터 알아봤어. 카이다. 너는 이름을 짓는 데에 재능이 도무지 없는 것 같아.

 

츠보: 그래. 우리는 너에 비하면 양반이라니까. 아까 했던 말 취소할게. 나나시. 무라사키노…히메도 좋은 이름 같아.

 

나시: 예스머신보다는 못 하지.

 

이다 쿠로하: 너희 존나 싫다. 꺼져. 나가죽어. 개새끼들.

 

츠보: 제대로 된 이름도 하나 떠올리지 못하는 건 너면서 화풀이하지 마. 그게 최선이야? 로보코? 진심으로?

 

이다 쿠로하: 그럼 로보코보코. 사람을 너덜너덜하게 만들 수 있잖아.

*보코보코(ぼこぼこ): 너덜너덜

 

츠보: 네 머리카락을 너덜너덜하게 만든 것처럼 말이지. 그리고 나는 그래야만 하는 사람들만 너덜너덜하게 만드는 거야. 네가 내 머리카락을 뜯었을 때처럼.

 

이다 쿠로하: 이 씨발. 왜 옛날 얘기를 해?! 기껏 다 지나간 일인데 왜 그걸 파고 있냐고!

 

나시: 얼마 지나지도 않은 일이잖아

 

카이다와 나는 서로 머리를 맞대지는 않고, 각자의 머리를 쥐어짜내서 인공지능에게 지어줄 만한 멋진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다.

 

이다 쿠로하: 메카가키(Mechaガキ)…? 컴부타(Comブタ)…? 고릴라?

*ガキ: 꼬맹이

*ブタ: 돼지

 

츠보: 멸칭을 붙이는 게 아니라 이름을 지어주는 거야. 카이다. 그냥 고릴라는 또 뭔데.

 

하지만 우리 중 어느 쪽도 이름을 잘 지어준다고 볼 수는 없었다.

 

나시: 머리카락 색에서 따서, 바이올렛… 라일락…? 라벤더…?

 

츠보: 내가 무슨 섬유유연제야? 세 명이 모여서 이런 이름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게 놀랍다. 우린 조금 더 스스로가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해.

 

나는 머쓱하게 내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더 나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나는 별 도리 없이 모자란 내 센스를 쥐어짤 수밖에 없었다.

 

나시: 레미니센스… 레이미와 합쳐서 레이미니센스…? 아니야. 취소. 음.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이름이지.

 

나는 인공지능의 질린 표정을 보고서 재빠르게 내 습작을 회수한 뒤 이를 만회할 다른 이름을 생각해 보았다.

 

나시: 기네마(機念)는 어때? 기계에 깃든 의지라는 뜻의 이름이야.

 

인공지능은 내 말을 듣고서 최소한 합격점에는 들어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츠보: 괜찮네. 고마워. 나나시.

 

이다 쿠로하: 뭐! 씨발. 저 새끼만 해냈잖아? 나도 질 수 없지. 흐으으으음… 카라카라보즈(カラカラ坊主). 괜찮지 않냐?! 테루테루보즈랑 같은 느낌이잖아!

*카라카라(カラカラ): 텅텅

 

츠보: …이젠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단 너희들의 시도도 고맙…진 않고. 이걸 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인공지능은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에 일종의 총기가 순간 어렸다. 그녀는 어떠한 것을 알아챈 것처럼 보였다.

 

츠보: …알겠다. 너희가 왜 그러는지 알았어. 내 이름을 짓는 사람은 나 스스로여야 한다는 거지? 본래의 멸칭을 내가 거부해야만 의미가 있단 거잖아.

 

나와 카이다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혹시 서로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무언의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우리 중 어느 쪽도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멋진 이름을 지어주려고 했다가 실패했을 뿐이었다. 카이다는… 애초에 무슨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고.

 

츠보: 그런 생각을 가져 주니까 솔직히 말해서. 조금 고맙네. 그럼 어떻게 할까…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름… 내가 어떤 사람일지에 대한 이름이라

 

하지만 아무래도 나나 카이다가 지은 것보다는 인공지능 본인이 지은 예스머신이 나은 시국이었기에… 우리는 무언의 합의를 이루었다. 아무래도 가장 이름을 잘 짓는 본인이 스스로 짓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츠보: 나 자신 나라는 존재는

 

 

 

 

제츠보는 자신에게 아이(アイ)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그 이름이야말로 제츠보라는 존재를 한 글자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공지능(AI)이었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슬픔(哀)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 자신이 인공지능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녀를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이었다. 분명 제츠보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제츠보는 그 아이라는 이름에 사랑(愛)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분명 그랬다. 인공지능은 그런 수동적인 방식으로 자신이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게 가진 애증을 보이고 싶었다. 사랑(愛)과 슬픔(哀)을 가진 AI라

 

그 이름은 그 인공지능의 존재와 너무도 잘 맞아떨어졌다. 나나시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이면 감정들을 포함한 자신의 무의식까지 드러내는 이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인공지능은 그 이름을 파기했다.

 

츠보: 떠오르는 이름이 없네. 당분간은 제츠보로 살아 볼게. 나중에 더 나은 이름이 생각나면 그걸로 짓지 뭐.

 

이다 쿠로하: 아니 씨발! 제츠보 좆같다고! 야! 나나시! 빨리 뭐라도 지어 봐! 빨랑!

 

츠보: 그럼 그냥 예스머신으로 하지 뭐.

 

이다 쿠로하: 너 진짜 좆같아서 죽여버리고 싶다.

 

나나시는 두 사람이 친구가 된 건지 아니면 그냥 서로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 난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키와 아유키: 캐롤 씨. 히무로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고 싶으세요?

 

캐롤은 토키와의 전화를 받고서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롤 브라이트: 그 일을 어떻게 아셨죠?

 

키와 아유키: 그 방에 있던 사람 중 하나가 귀띔해주었기 때문이죠.

 

롤 브라이트: 거짓말 하지 마세요. 히무로 씨가 당신에게 그런 걸 알려주었을리가 없어요. 어떻게 엿들으신 거에요?… 문 앞에 귀라도 대고 계셨나요? 그게 아니라면 도청기가 아직 탑 안에 남아 있어요?

 

토키와는 조금 당황했다. 들켰다. 하지만 그는 곧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그녀의 상황을 알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그가 그녀의 말을 들었다는 사실을 전해야만 했다. 설령 도청기가 발각되어 그가 도청할 수 없는 구역이 생긴다고 해도 귀동냥꾼 처지에 머물 수는 없었다.

 

키와 아유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제가 히무로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게 중요하죠. 저만 아는 줄 아세요? 하기와라도 알고, 이바라도 알고, 지금 이렇게 통화하고 있는 저도 알고 있어요. 사실 카나리와 나나시, 그리고 당신을 빼면 탑에 있는 사람 전부가 알고 있다고요. 그러니 샤이닝 보유자를 향한 차별은 아니에요. 정말 정신적으로 불안해 보이는 사람들만 못 들은 거죠.

 

롤 브라이트: 당신은 어떻게 알았는데요? 히무로 씨가 당신에게 알려주었을리가 없어요.

 

키와 아유키: 캐롤 씨가 보기에는 제가 캐롤 씨보다 더 불안해 보이나 보죠?

 

롤 브라이트: 실제로 불안하니까요. 또 사람을 죽이셨다고 들었어요. 히무로 씨가 그런 당신에게 살인게임의 비밀을 알려주었을리가 없어요. 그리고 굳이 명단을 알려 주시는 건 저로 하여금 그 사람들을 추궁하도록 유도하는 거죠? 애초에 명단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고요.

 

키와 아유키: 마음이 아프네요. 캐롤 씨. 카텟 기관에 함께 맞설 동지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요. 당신도 카텟 기관에게 탄압당하는 처지잖아요.

 

롤 브라이트: …토키와 씨. 여태껏 전화도 하지 않고 계시다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은 당신에게 필요할 때만 남을 찾는 사람이 된 건가요? 제가 죽기 전까지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요. 분명 선의를 가진 채 모든 일에 임하셨잖아요. 정신 차리세요.

 

키와 아유키: 저의 많은 것이 변했어요. 그렇지만 다행으로 여기세요. 적어도 제가 변한 덕분에 당신이 살인게임의 되풀이에 대해 듣게 될 테니까.

 

살인게임의 되풀이? 그 간단한 낱말이 어떤 저의일지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한정된 정보를 통해 그녀의 사고를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귀결시키려는 시도였다. 캐롤은 그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서 고개를 저었다.

 

롤 브라이트: …왜 그걸 저에게 알려주시는 건데요?

 

키와 아유키: 분명 이 일이 캐롤 씨를 뒤흔들어서 히무로가 우려했던 대로 당신이 폭주하게끔 만들 테니까요.

 

캐롤은 본능적으로 토키와의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이얼로그의 음량 조절 버튼을 최하로 낮추었다. 캐롤은 그 다이얼로그를 방구석에 버려 두고서 그 위에 베개를 던졌다.

 

캐롤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그녀는 분명 죽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존중이 거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히무로에게 좋은 의도가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은 채로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분명 그랬지만 그녀는 시라유키와 토키와가 동시에 그녀의 행동을 어떠한 방향으로 몰고 가려는 기색을 느꼈다.

 

그들은 캐롤이 어떠한 사실을 깨닫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다면 틀림없이 캐롤이 정신적으로 파탄에 이르리라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마유즈미의 몸을 빼앗은 시라유키와 사람을 죽인 토키와가 동시에 캐롤이 무너지기를 바랐다. 바보라도 그 사실은 눈치챘을 것이고 캐롤은 바보도 아니었다. 캐롤은 자신이 나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는 법이라는 속담이 있다. 그렇기에 캐롤은 다이얼로그를 버려 두었다. 다이얼로그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캐롤은 계속 그곳으로 자신의 시선이 쏠리는 것을 느꼈다.

 

롤 브라이트: 아니야. 듣기 싫어. 듣기 싫어. 안 궁금해. 정말 안 궁금해. 그러니까 절대로… 절대로 열어서는 안 돼

 

캐롤은 숨을 여러 번 세게 들이쉬었다. 불안해하는 만큼 심장이 빨리 뛰어서 온몸이 숨쉴 틈을 원했다. 캐롤은 질식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온몸을 친친 감은 옷이 그녀를 옥죄는 것 같았다. 그토록 쉽게 헤집어지는 자신의 나약함을 탓하면서도 캐롤은 이미 열이 오를대로 오른 주전자처럼 자신이 언제까지 더 이 열을 감내해야 하냐는 불합리함의 분노를 느꼈다. 그것이 더 큰 화로 다가왔다.

 

그런 때에. 누군가가 캐롤의 숙소 문을 똑똑똑똑 두드렸다. 그 소리를 듣고 캐롤은 순간 머리에 혈관이 불거져 나올 정도의 화를 느꼈다. 기어코 찾아왔나? 찾아와서 알려주려고? 머리가 짓눌릴 만치 자신의 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던 와중. 캐롤은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지는 듣지 못하였지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의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바라 쿠리스: 캐롤. 캐롤? 안에 있는 거 맞아? 똑똑? 안에 없나? 흐음 저. 들어가도 돼? 계세요?

 

롤 브라이트: 이바라 씨…?

 

주전자 안의 열을 잠시 빼 줄 계기가 캐롤을 찾아온 것이다.

 

그렇다. 히무로의 충고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이바라가 캐롤을 찾아갔다.

 

사실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는 말은 히무로 본인이 쓸 만한 표현이고, 캐롤을 찾아가는 일 자체는 이바라 또한 하루동안의 심사숙고를 통해 결정한 사안이었다. 아무리 캐롤이 불안정하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 나나시와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고 한들 캐롤은 일관성 있게 주변 사람들을 돕고자 했다. 그런 사람이 힘들어하고 있다고 하니 찾아가서 도와주는 게 의리 있는 일일 터였다.

 

하기와라는 그 또한 이바라와 같이 가고 싶다고 말했으나 이바라 쪽에서 그의 제안을 만류했다. 하기와라는 사실 캐롤과 별다른 친분이 없었다. 그 반면 캐롤이랑 연애 얘기까지 해 봤던 이바라에게만 캐롤이 털어놓을 수 있는 말이 있을 터였다. 즉 그녀 혼자 가는 편이 캐롤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이바라의 주장이었다.

 

기와라 우시오: 연애애애? 연애 얘기? 캐롤은 그렇다치고 네가? 어어엌… 악!

 

바라 쿠리스:… 그런 게 있어! 조용히 해!

 

기와라 우시오:… 으윽… 그리고 어차피 캐롤 옆에 나나시 있을 거 아니야… 그러면 어차피 캐롤이랑 단둘이 얘기하는 건 글러먹은 거잖아.

 

바라 쿠리스: …나나시를 쫓아내면 되지 않을까?

 

기와라 우시오: 대책 없네!

 

바라 쿠리스: 아. 몰라! 정 안 되면 나나시랑도 터놓고 얘기하면 될 거 아니야! 나나시는 여자애처럼 곱상하게 생겼으니까 너보다는 얘기가 잘 통하겠지!

 

그리고 이바라가 캐롤의 전용실 안에 들어섰을 때. 그 안에 나나시는 없었다. 우연의 일치였지만 이바라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괜히 꽁냥거리는데 들어가면 캐롤이 싫어할 것 같기도 하고, 만약 이바라를 반기더라도 서로 꽁냥거리는 모습을 앞에서 보고만 있으면 또 그림이 이상해지니. 나나시가 자리를 비웠던 것은 이바라에게 있어 행운에 가까웠다.

 

바라 쿠리스: 수다 떨려고 왔어. 캐롤. 락앤락에 크레이프도 만들어 왔다? 이바라표 크레이프! 딸기. 바나나. 그리고 생크림과 누텔라!

 

롤 브라이트: 누텔라는 저도 좋아해요. 걸스카우트 캠프에 갔을 때 많이 먹었죠. 통 하나를 준비해서 갔는데 나눠먹다 보니까 캠프가 끝날 때에는 다 먹은 적도 있어요.

 

바라 쿠리스: 야호! 제대로 맞췄다! 뜨거울 때 먹어! 얼른! 여기 보온병에 이바라식 밀크티 타 왔으니까 먹고 싶으면 먹고.

 

롤 브라이트: 제가 만든 밀크티랑은 어떻게 다른데요?

 

바라 쿠리스: …사실대로 말하자면 홍차를 타 오려 했는데 식당에는 홍차 티백이 없더라고. 그래서 녹차에 우유 타 왔어. 그치만 이것도 밀크티 아니야? 차에 우유 탄 거니까. 일단 내 입에는 나쁘지 않았는데 네 입맛에도 맞을진 모르겠다. 맨날 캐롤식 홍차 얻어 먹기에는 미안해서 가져와 봤어.

 

바라 쿠리스: 원래는 커피를 타 오려 했는데… 좀 그렇잖아.

 

롤 브라이트: 커피가요? 왜요?

 

이바라는 뒤늦게 캐롤이 야가미의 사인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가미는 커피에 들어가 있던 독에 의해 죽었다. 하지만 그 당시 살인과 재판 때문에 탑에 있는 이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동안 캐롤은 죽어있느라 바빴다.

 

바라 쿠리스:… 그런 게 있어. 이거 괴식인가? 일단 진짜 나쁘지는 않거든? 선입견 가지지 말고 한 번 먹어봐! 말차라떼라고 생각하고 먹어 봐!

 

이바라는 조심스럽게 보온병에 담겨 있는 허여멀건한 액체를 자신과 캐롤의 잔 두 개에 각각 부었다. 그리고는 뒤늦게 무언가를 생각해냈다는 듯이 자신의 잔을 홀짝 마셨다.

 

바라 쿠리스: 자. 독 안 들었어. 봤지?

 

캐롤은 이바라가 왜 굳이 증명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느닷없는 익살에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롤 브라이트: 네. 믿음이 가네요.

 

캐롤은 우유를 탄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 독이라도 먹은 듯 세차게 기침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기껏 음료를 준비해준 사람에게 그런 장난을 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런 선택을 내려 다행이었다. 이바라는 경련하며 죽어가는 야가미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을 가지고 있었으니, 또 다른 독살의 징조를 보는 일은 이바라에게 더없이 불편하고 혼란스러울 터였다.

 

롤 브라이트: 나쁘지 않은걸요? 너무 폄하하실 필요는 없었던 것 같아요. 결국 녹차든 홍차든 잎 자체는 똑같으니까…

 

바라 쿠리스: 뭐?! 녹차랑 홍차랑 같은 차야?!

 

이바라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롤 브라이트: 네. 같은 식물의 잎을 어떻게 가공하고 쓰느냐에 따라 다른 이름이 붙는 거에요. 말차도 가루로 빻은 것을 쓸 뿐 잎은 똑같아요.

 

바라 쿠리스: 에에에엑…! 말도 안 돼! 진짜 말 안 된다! 충격적이야!

 

이바라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캐롤과 이바라의 대화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히무로가 괜히 호들갑을 피운 건 아닐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어쩌면 수갑을 채웠으니 정신이 불안정하다 이런 얘기는 전부 다른 이들이 어림짐작한 착각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바라는 그 사실에 안도했다. 역시 남친이 있으니까 같이 이겨내기가 편한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바라 쿠리스: 대답하기 민망하면 굳이 대답 안 해도 되는데 나나시랑 계속 같이 지내는 거야?

 

롤 브라이트: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러기를 선호하는 편이에요. 혼자 지내려니 적적해서… 그리고 나나시 씨는 저의 편이니까요. 제 편이 하나라도 있으니까 훨씬 낫더군요.

 

이바라는 자신의 턱선을 두 손으로 감싸고서는 캐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롤 브라이트: 왜 그러세요?

 

바라 쿠리스: 그렇게 좋나 싶어서. 좋을 때다. 흐흐흐흐

 

롤 브라이트: 좋기야 좋죠. 사실 저에게는 치나미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치나미는 지금까지 저지른 일이 있어서… 제가 기대기보다는 저한테 기대는 치나미를 제가 받쳐 줘야 했거든요. 저도 기댈 사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어요.

 

이바라는 심각하고 불안하게 변해가는 대화의 기색을 눈치채고 화제를 바꾸었다.

 

바라 쿠리스: 나나시가 그렇게 좋은 애인가 봐? 사실 돌이켜보면 나나시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착하거나 상냥했던 것 같아. 그건 확실히 나나시의 장점이지. 암암. 내가 이 탑에서 지내 봤는데 결국 돌고 돌아서 착한 녀석들이 최고더라.

 

이바라는 굳이 캐롤이 죽은 후의 나나시가 복수에 혈안이 된 적이 있다는 것은 귀띔하지 않았다. 사실 이바라와 캐롤은 영안로 속에서 나나시가 카이다에게 보인 태도를 눈앞에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양쪽 모두 나나시를 온전히 알지는 못했다.

 

바라 쿠리스: 이거 언급해도 되나 싶기는 한데. 사실 나 조금은 당황했던 거 있지? 5년동안 연애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다길래 나나시도 고생이겠구나 했는데. 규칙에 구애되지 않고 서로를 GET! 했잖아!

 

롤 브라이트: 당황스러우실만 하겠네요. 조항이 존재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한 번 죽었다 살아나 보니까 또 죽기 전에 후회하기는 싫었어요. 이런 상황에 윤리 강령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고… 또 지금 제가 힘들어 죽겠다는데 누구한테 기대지도 못하고 외톨이로 남기는

 

캐롤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바라의 표정이 조금씩 캐롤을 걱정하는 듯한 동정심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캐롤은 슬그머니 말의 주제를 돌렸다.

 

롤 브라이트: 이바라 씨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여전히 관심이 가는 분이 없나요?

 

바라 쿠리스: 관심…? 으응… 없어.

 

롤 브라이트: 있는 것 같은 말투네요. 말씀해 주세요. 지금까지 저만 말한 거 아시죠? 설마 제 흥미진진한 사랑 이야기만 듣고 본인 이야기는 꾹꾹 숨기시려고요? 하기와라 씨랑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바라 쿠리스: 하. 하기와라…? 걔가 왜…?

 

롤 브라이트: 이바라 씨가 그나마 가장 가깝게 지내는 분이 하기와라 씨 같아서요. 혹시 아직 하기와라 씨가 제대로 사과 안 했어요? 그렇다면 따끔하게 말하셔야 해요.

 

나나시에 의해 냉장고에 수갑으로 묶인 사람이 하기에 적절한 말은 아니었지만, 캐롤은 본인은 나나시에게 제대로 사과를 받아냈고 뺨 도 때리고 수갑도 역으로 채우곤 했으니 나나시에게 얽매여있지 않다고 믿었다. 관계의 주도권이 확실하게 자신이 있다고 믿었다. 정확히는 믿고 싶었다. 사람은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속일 수 있다. 캐롤 정도의 심리적, 정신적인 작용에 대해 박식한 사람도 뻔히 드러난 사실에서 눈을 돌리고 그녀 스스로 사실이라 믿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나나시가 뻔뻔하게 나왔더라도 그를 끊어낼 수 있었을지 그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그녀는 반편생 이상을 자신을 숨기며 보낸 전문가였기 때문에 이바라는 캐롤이 본래 느끼고 있는 혼돈을 백 분의 일도 채 느끼지 못했다.

 

바라 쿠리스: 아니. 사과는 했어. 다 풀었는데… 또 영안로에 한 번 갔다 왔더니 애가 예전보다 조금 더 진지하고 조금 더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하지만… 상상이 안 가! 우리는 서로 친구라니까! 저번에 같이 로맨스 영화 봤는데 진짜 30분만에 꺼 버린 거 있지? 그 정도야!

 

롤 브라이트: 어떤 영화를 보셨길래 그래요?

 

바라 쿠리스: 피부가 엄청 새하얀 같은 반 뱀파이어 남주랑 평범한 여주 얘기였는데… 조명이 되게 파랗고… 남주가 되게 하옜어. 그리고 조금 싼티난다고 해야 하나? 호들갑을 떠는데. 으웩

 

롤 브라이트: …설마 트와일라잇이요?

 

중학생 시기를 트와일라잇 시리즈와 함께 보내고 고등학생 시기를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청소년 이용 불가 팬픽션과 함께 보낸 캐롤에게는 조금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

 

바라 쿠리스: 어. 맞아! 트와일라잇! 그런데 우리는 둘 다 그런 거 안 좋아해. 서로 연애에 관심이 없으니까!

 

롤 브라이트: 하기와라 씨도 없으신 게 확실한가요?

 

바라 쿠리스: 이 정도면 확실하지.

 

롤 브라이트: 어쩌면 그저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이 싫으신 것일지도 모르잖아요. 그거 하나로 하기와라 씨가 연애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고는 볼 수 없어요. 만약 하기와라 씨가 또래 남성분들 처럼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다면

 

캐롤은 의도적으로 말에 뜸을 들였다.

 

바라 쿠리스: 이. 있다면?

 

롤 브라이트: 그렇다면 분명 이바라 씨에게 관심이 있을 걸요? 쉽게 넘어오실 거예요. 이바라 씨 표현으로는 GET! 하는 거죠. 또래의 남성 분들은 보통 이바라 씨랑 이야기라도 나눠 보고 싶어서 안달을 낼 걸요.

 

바라 쿠리스: 그. 그럴리가 없어! 하기와라 같은 놈은 그냥 친구야! 친구! 이 이상 친구일 수 없을 정도로 친구라서 더 나아갈 수가 없대도!

 

심지어는 이 살인게임을 통틀어서 친구일지도 모른단 말이야. 이바라는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롤 브라이트: 그렇다면야… 제가 더 참견할 수는 없겠죠. 날개를 달아 드리려다가 오히려 다리를 꺾게 될지도 모르니. 오지랖은 여기까지 부리는 것으로 할게요. 그렇지만 이바라 씨가 하기와라 씨와 친한 만큼. 마음이 잘 맞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덧붙이고 싶네요.

 

바라 쿠리스: 으으… 짖궂다. 캐롤… 내 머리를 그런 식으로 어지럽히다니

 

아니… 이미 어지러웠던 건가? 모르겠다… 이바라는 그저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롤 브라이트: 이바라 씨는 후회하지 않으신다면 좋겠어요.

 

캐롤은 그렇게 지나가듯이 말했지만 이바라는 그 한 마디에 담긴 캐롤 본인의 어둠을 읽었다. 절제되고 격정적이지 않은 어투 속에 심연이 담겨 있었다.

 

바라 쿠리스:… 후회라면…?

 

캐롤은 자신의 말실수를 뒤늦게 깨닫고 그것을 얼버부리기 위해 적당한 변명을 떠올리려 했다. 그러나 이내 캐롤은 마음을 고쳐먹고 자신이 본래 하려던 말을 이바라에게 전했다.

 

롤 브라이트: 사실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요. 살인이 벌어지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고 해서 꼭 살인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어요. 그러니 부디. 후회를 남기지 마세요. 이바라 씨.

 

이바라는 캐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바라 쿠리스: 캐롤. 아무도 죽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마음을 편히 가져도 돼. 이제 탑은 조금씩 안정화되고 있잖아.

 

롤 브라이트: 정말 그렇게 믿으세요? 지금 당장 한 번 죽어본 사람이 앞에 있는데도요?

 

느닷없이 내던져진 화 앞에서 이바라는 그저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캐롤은 자신도 모르게 예민한 반응을 이바라에게 보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왜 이바라의 말에 화가 났을까? 캐롤 본인도 그 요인을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한 번 죽었다고 해서 거들먹거리거나 젠체할 자격은 어디에도 없었음을 그녀 스스로도 알았지만, 그럼에도 캐롤은 순간 이바라에게 짜증이 났다.

 

캐롤은 겁에 질려 있기 때문이다. 피해망상은 아니었다. 편집증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결국 죽음의 위기가 찾아오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녀를 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그 공포는 캐롤만이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깊은 어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의 어떤 사람이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말을 해준다고 한들 캐롤에게는 그 모든 말이 가볍고 또 무지한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롤 브라이트: 죄송해요. 이바라 씨 저는 그러려던 게 아니라… 아니. 죄송해요.

 

캐롤은 변명을 하고 싶어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윽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한층 더 싫어졌다.

 

바라 쿠리스: 괜찮아! 우리 사이에 꼴랑 이런 걸로 사과할 필요는 없잖아? 그치만… 너는 지금 그만큼 힘든 거구나. 캐롤…?

 

롤 브라이트: …눈치 채셨겠지만 지금 저한테 여유가 없어요. 많이 없어요. 죽고 싶지 않거든요. 지금까지 옳지 않다며 주저했던 일도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마저 들어요. 과장 조금 보태서 후루미나미 씨가 저희를 몰아붙이려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저는 후루미나미 씨에게 터치를 써서 자유를 빼앗고 말 거에요. 그러니 히무로 씨가 저를 경계하는 건… 사실 적절한 일일지도 모르죠.

 

바라 쿠리스: 그렇게 생각하지 마! 에이. 너무 비관적이네! 너는 안 그래. 내가 알아!

 

롤 브라이트: 아뇨. 저는 그럴 거에요. 그 당시에 안 그랬던 건 절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니까요. 지금은 절박해요. 정말 다 해결된 줄 알았던 일도 한 순간에 무너져버릴 수 있어요. 그때도 똑같았어요.

 

바라 쿠리스: 그치만 이번에는 정말 다르잖아. 누굴 죽이려는 사람도 없고, 모노로그 때문에 갈등이 생긴 것도 아니야. 이제 마유즈미만 돌아온다면 모든 게 잘 될 거야! 분명 그래!

 

캐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앍고 있었다. 이바라의 말을 믿고 싶지만 토키와가 알려준 사실이 모든 것을 어지럽혀 버렸다. 그 저주의 이름은 불신이었다.

 

키와 아유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제가 히무로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게 중요하죠. 저만 아는 줄 아세요? 하기와라도 알고, 이바라도 알고, 지금 이렇게 통화하고 있는 저도 알고 있어요. 사실 카나리와 나나시, 그리고 당신을 빼면 탑에 있는 사람 전부가 알고 있다고요. 그러니 샤이닝 보유자를 향한 차별은 아니에요. 정말 정신적으로 불안해 보이는 사람들만 못 들은 거죠.

 

롤 브라이트: …방금 토키와 씨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저와 나나시 씨, 카나리를 빼고 탑의 모든 사람들이 살인게임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요. 그리고 저와 나나시 씨만 그 비밀을 전해듣지 못한 것은 정말 히무로가 보기에 제가 불안정해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이바라가 눈을 크게 뜨고서 무슨 말을 하려던 와중 캐롤 본인이 이바라를 만류했다.

 

롤 브라이트: 믿지 않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믿지 않아요. 믿지 않지만… 두려워요. 이바라 씨. 제가 정말 그걸 들으면 무너져버릴까봐요. 대체 무엇이길래 다른 분들이 제가 무너지는 수단으로 그 정보를 쓰려 하는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니 아주 만의 하나. 이바라 씨가 알고 있다고 해도… 알려주지 마세요. 듣고 싶지 않아요

 

이바라는 어찌할 줄을 모르게 되었다. 히무로의 말이 옳았다. 캐롤은 흔들리고 있었고, 살인게임의 반복이라는 정보를 잘못 받아들였다간 큰일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바라 본인은 캐롤을 도와 주려고 왔지만 막상 와 보니 어떻게 도와야 할지가 오리무중했다.

 

그러는 찰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캐롤의 전용실 안에 퍼졌다.

 

키와 아유키: 이 살인게임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정적. 그리고 이어지는 말.

 

키와 아유키: 하나의 살인게임이 끝나면 우리는 다시 살아나 모든 기억을 잊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한다. 살인게임은 반복된다! 끊임없이 반복된다!

 

바라 쿠리스:! 너! 야! 이 나쁜 자식!

 

이바라가 토키와의 행동에 벙쪄 있다가 뒤늦게 차오른 분노를 토해내며 그를 쫓았을 때. 문 너머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뒤쫓아봤자 이미 늦었음을 그녀는 이미 알았다. 하기야 뒷일을 생각하면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낫겠지. 비겁하기는 하지만 통하면 그만 아니던가. 이바라는 그런 토키와의 생각을 조금 읽을 수 있어 더욱 화가 났다.

 

바라 쿠리스: 자기 할 말만 하고 내빼다니… 이 비겁한…! 이 개같은 미친 놈아! 그딴 소리를 어떻게 캐롤한테…!

 

이쯤에서 이바라는 자신이 한 실수를 깨달았다. 캐롤이 그녀의 반응을 빤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바라는 화를 냈다. 의문을 느끼거나 불신의 기색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화를 냈다. 캐롤에게 화가 될 말을 수단으로 삼아 툭 던지고 내뺐기 때문이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화를 낼 필요도 없다. 이바라는 순간적인 반응 하나로 토키와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해낸 것이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혼란과 좌절은 느리되 분명하게 그녀의 목을 조여왔다.

 

롤 브라이트:… 거짓말이죠. 네…?

 

그 비밀은 머리 안에서 굴리면 굴릴수록 더 끔찍해졌다.

 

롤 브라이트: 탈출이 불가능하다고요…? 여기서 영영 갇혀 있어야 한다뇨? 그게 지옥과 뭐가 다르죠?

 

캐롤은 숨 한번을 쉴 때마다 한 꺼풀씩 초조함을 뒤집어썼다. 숨이 가빠지는 만큼 캐롤은 더욱 더 초조해졌다. 캐롤은 왼손으로 자신의 허리를 둘러싸 잡고서 오른손을 자신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멍하니 손가락 마디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강박이 그녀를 찾아왔다.

 

롤 브라이트: 말도 안 돼… 안 믿어요. 말도 안 되니까. 터무니없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캐롤의 두뇌는 그 일을 믿지 않으려 할 수록, 그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할 수록 과거의 경험과 정보를 토대로 그것을 해석하려 애썼다. 서서히 모든 것이 명확한 윤곽을 드러냈다. 뒷받침하는 증거들. 야가미의 처형 영상. 크레딧의 저장 공간… 이미 지난 야가미의 처형이고, 그들이 이전 살인게임에서 사용했던 크레딧이었다.

 

롤 브라이트: 아니야…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희망이 없을 수는 없어… 못 나간다니… 흑막을 이기더라도 나갈 수는 없다니

 

캐롤의 심장이 더욱 빨리 뛰었다. 어느새 상체는 땀에 젖어 버렸다. 왜인지 가슴께가 아팠다. 호르몬 때문에 생기는 찌릿찌릿하고 어디에 조금 스치기만 해도 아픈 그 통증이 아니라 그 내부가. 흉판 내부가 아픈 듯한 감각이 그녀의 속을 긁었다. 그와 동시에 메스꺼움이 찾아왔다. 조금만 토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캐롤은 토를 할 것 같았다. 속이 답답했고, 어지러웠고, 짜증이 났고, 너무도 겁이 났다. 손과 발이 제멋대로 떨렸다. 이바라는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괴로워하는 캐롤을 보고 다급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바라 쿠리스: 캐롤. 시. 심호흡해. 심호흡. 괜찮아. 다 괜찮아.

 

하지만 괜찮지가 않았다. 캐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좋지 않았다. 정말 좋지가 않았다. 정신조작 보유자의 정신은 그 자체로 무기이고, 그것이 그 당사자의 통제를 벗어난다는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캐롤의 전용실에 있는 조명이 깜빡거렸다. 그러다 몇 초간 꺼져 있던 전등이 문득 정오의 햇빛처럼 밝아지며 커지기도 했다. 그리고 깜빡임의 과정 속에서 잠시 조명이 꺼지고 눈을 감고 뜨는 시간보다도 짧은 시간 사이의 어둠 속에서. 캐롤은 자신에게서 미세한 빛이 나고 있음을 알았다. 햇빛 아래에서 켠 손전등이기에 겉으로 태가 나지 않을 뿐이었다.

 

발광(發光).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캐롤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그녀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이전에 한 번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캐롤이 화를 내자. 체육관은 어둠에 잠겼다.

 

롤 브라이트: …나가세요. 이바라 씨. 제 방에서 나가세요.

 

바라 쿠리스:… 캐롤. 우선 진정해. 아무 일 없을 거야. 우선 다 설명해 줄게.

 

롤 브라이트: 필요 없어요… 나가세요. 이바라 씨. 나가셔야 해요. 안 그러실 거면 제가 나갈 테니까 어서

 

캐롤은 그 말만을 남기고 오른손으로 자신의 두 눈과 입을 간신히 감쌌다. 나머지 한 손을 벽에 짚은 채 문고리를 향해 나아가던 와중. 이바라는 캐롤을 뒤쫓아 그녀의 왼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바라 쿠리스: 캐롤. 기다려! 대체 왜

 

캐롤은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았다.

 

캐롤은 이바라의 맨손과 닿았다.

 

롤 브라이트: 흐아아아악!

 

바라 쿠리스: 으. 으앗!

 

캐롤은 비명을 지르며 이바라의 손을 쳐냈다. 이바라는 뒤로 몸이 쏠려 휘청거렸다. 이바라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이 캐롤은 비틀거리며 자신의 전용실을 떠났다. 닿았어. 닿았어! 오직 그 생각만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내가 대체 어쩌자고 장갑을 벗고 다녔을까? 이제 자유롭고 싶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나를 풀어 주었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런 불상사가 생겼잖아. 터치가 이어졌나? 이렇게 잠깐 닿았을 뿐이니까 별 상관이 없을 거야. 분명 그럴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캐롤은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터치와 그런 능력을 타고난 자신의 몸이 미웠다. 불안한 걸음거리. 캐롤은 3층을 가로질러 비틀비틀 자신의 숙소를 향해 걷다가 멈추었다.

 

그녀는 자신이 간밤에 꾼 꿈을 떠올렸다. 그녀는 다른 모든 이들을 황금으로 만든다. 그러니 더 멀리 가야만 했다. 다른 이들로부터 더 멀어져야 했다. 누구도 다치지 않게끔 그저 사람이 없는 장소로 떠나야 하는 당위성을 그녀는 강하게 느꼈다. 기생충이 사마귀의 몸을 조종해 물 속에 빠지게 하듯이.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자신을 지탱하는 끈을 놓아 버릴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캐롤은 이미 한 번 자신을 놓았을 때 어떻게 되는지 겪어 보았다.

 

모든 강당에 있던 사람이 손상을 입었다. 정신조작 보유자의 정신은 그렇기에 위험했다. 다른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무언가가 통제되지 못한다면 누구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잠당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캐롤은 계단을 내려갔다. 탑 밖의 장미꽃밭으로 향했다. 그러는 와중 캐롤은 중얼거렸다.

 

롤 브라이트: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해… 죽어도 여기서 살아야 해… 어떻게 해…? 하… 하아… 싫어. 싫어. 죽어도 또 여기라는 건 싫어.

 

캐롤은 탑이 사방에서 자신을 조여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도망갈 방도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팔을 끌어안고 덜덜 떨리는 몸을 꽉 붙들었다.

 

죽었다 살아난 뒤에 캐롤은 절망했다.

 

죽었다 살아났는데 살인게임 안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죽는다. 그러나 열여섯명만큼은 아니다. 그들은 죽음의 포로가 아니라 살인게임의 포로고 모노로그의 노예였다. 모노로그와 암흑의 탑이 그들의 신이었다. 캐롤은 자신의 사방을 감싸고 있는 탑을 보았다. 그 안에서 그들은 몇 번이나 살았다. 몇 번이고 죽였다.

 

캐롤은 그녀가 더없이 불안하고 심신이 건강치 않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들이 살인게임의 반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그보다 더 두려운 일은 없었다. 이것은 영원한 고문이었다. 세상에 어떤 잔혹한 행위라도 죽으면 끝이 난다. 그들은 죽을 수가 없었다. 캐롤은 알 수가 없었다. 왜 진작 아무도 미치지 않은 거지?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알고도 웃을 수가 있지?

 

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인해 큰 상처를 입은 뒤 그 상처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어도 살인게임이 반복된다는 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느끼지는 않았다. 사람의 정신은 본래 죽은 뒤를 온전히 상상할 수 없다. 죽음이 과연 어떤 느낌일지를 상상하려 애써도 그 상상은 결국 죽음과 일치하지 않는다.

 

죽고 살아난 사람은 깨닫게 된다. 죽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어떤 식으로 마지막 숨이 그들을 떠나가는지 알게 된다.

 

그들에게 구원은 없었다. 영원한 고문만이 남아 있었다. 열 명이 남았다. 두 달 정도 지나면 그중 여덟 명 이상은 분명 죽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그녀는 살아나서 또 죽고 살아나서 죽고 그저 죽기 위해 살아나기만을 반복하게 되리라

 

거부권 없는 영원한 가축의 신세… 캐롤은 자신의 기억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 편리하게 잊고 싶은 기억만을 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랐다. 안타깝게도 캐롤은 그녀 스스로 기억을 자르는 법을 지워 버렸다. 그러니 그녀는 절망에 이르는 병증을 머리에 심은 채로 그것을 곱씹음으로써 영양을 주었다. 종양이 살을 찌웠다.

 

롤 브라이트: 내보내 줘. 나가야 해. 나가야 해. 그런데… 그런데 못 나가잖아… 내가 몇 년동안 여기에 있었던 거지? 몇십년? 몇백년…? 아아. 아아아아

 

그 사실에 그저 끔찍한 두려움만을 느끼던 와중 캐롤은 당연한 질문을 던졌다.

 

롤 브라이트: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꼴을 겪어야 하지?

 

캐롤의 머리는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죽고 살아난 이래. 영안로 밖으로 나온 이래 줄곧 자신의 몸이 죽기 전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더 강대해졌다. 그런데 그녀를 억누를 만한 힘은 그녀에게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위태롭게 걸으며 탑 밖으로 나온 캐롤은 멍하니 장미꽃밭에 점점 가까워졌다. 더 가야 한다. 더 가야 한다… 캐롤은 그저 그 생각을 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게끔… 다른 사람을

 

나는 이 살인게임에서 몇 번 죽은 거지? 이 살인게임에서 몇 번 죽였지? 내가 지금까지 만난 그 사람들을 몇 번이나

 

내가 매번 무고했을리가 없어.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잖아. 사람을 몇 번이나 죽였을지도 몰라. 몇 번이나 강제적인 터치를 썼을지 모른단 말이야. 강제적인 터치… 분명 쓰고 말았을 거야…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미다스 왕이 되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몇 번이나 그녀의 빛으로 다른 이들을 조종하게 되었을지. 캐롤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앞으로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지도 알지 못해 그저 몸을 떨었다. 몇 번이나 그녀는 자제력을 완전히 놓아버렸단 말인가? 몇 번이나?

 

롤 브라이트: 싫어. 싫어. 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 싫어. 싫어. 싫어.

 

샤이닝 프롬. 그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던가. 그런 생각이 뇌리에 미치자 캐롤은 그 당시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너무도 생생해서 캐롤은 도무지 그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당시의 일은 캐롤의 뇌리에 너무 짙게 남았다.

 

그날. 캐롤은 스프링클러에 젖은 모든 이들의 의식에 접촉했다.

 

그리고 왜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하냐고 소리쳤다.

 

그녀는 순간 모든 것을 느꼈다. 그녀가 다른 이들을 향해 품은 분노와 다른 이들이 그녀에게 품은 꺼림칙함, 공포를 전부 느꼈다. 그녀를 향한 분노와 그녀를 향한 공포를. 그것은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체험이었다.

 

피다 피다 온몸에 피가.

 

캐롤은 손과 옷에 묻은 피를 닦아내려 손톱을 세워 그것을 긁어내려 봤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축축하고 돼지 오줌 냄새가 쿰쿰하게 나는 찐득한 피에 머리가 엉겨붙는 느낌을 받았다. 치덕치덕 기름지고 찝찌름한 그것에 몸이 푹 젖어 전신에 달라붙는다… 마치 두 번째 피부 같다… 당장 스스로에게서 벗겨 버리고 싶은 두 번째 피부

 

숨이 막혔다. 캐롤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느샌가 그녀는 스스로 숨을 쉬는 법을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입을 잡고 목을 긁어가며 숨을 쉬려고 애썼지만 귀가 윙윙 울리고 세상이 그녀 주변에서 서서히 좁아지고서 모든 것이 확대되듯이 조여들어버린 뒤에는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서서히 떨려갔다. 캐롤의 목이 뒤로 홱 꺾였다.

 

캐롤은 눈이 부셔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 눈부신 빛은 캐롤의 눈 내부에서 나는 듯 했다.

 

캐롤의 머리카락이 빛을 발했다. 그러나 머리카락이 다가 아니었다. 캐롤의 온몸이 빛투성이가 되었다.

 

 

 

 

 

 

 

나시: …지금 그거 아무도 못 들었어?

 

나나시는 흠칫 놀라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러나 카이다와 제츠보는 그가 들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듯 했다.

 

츠보: 지금 당장은 이 바보가 지은 멍청한 이름밖에 못 들었어.

 

이다 쿠로하: 좆까! 기껏 지어줘도 지랄이야아!

 

나나시는 순식간에 초조한 기색을 내며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나시: 미안해. 인공지능. 잠깐 잠깐 어디 좀 나갔다 올게. 느낌이 느낌이 너무 안 좋아

 

츠보: 어? 그래. 그렇다면야.

 

이다 쿠로하: 그헥! 야! 어디 가! 이리 안 와?! 그렇게 제멋대로 튀어 버리면 네 이름 마음대로 지어 버린다! 나카다시라고 이름 지을 거야!

 

나나시는 카이다의 말을 뒤로 하고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키와 아유키: 허억… 헉

 

토키와는 자신의 방에 몸을 숨긴 채 벽에 등을 기댔다. 그는 자신의 코와 입을 틀어막고 조금의 숨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했다. 기척을 들켰다간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기이한, 위협적인 진동과 함꼐 찾아온 섬짓할 정도의 위기감이 그의 목털을 바짝 세웠다.

 

준비는 이미 모두 끝났다. 이제 곧 무언가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서서히 모든 이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시라유키는 캐롤이 이윽고 무너져버렸음을 느꼈다.

 

과민성 광 발작. 이름을 붙인다면 그런 이름이 붙을 것이다. 광과민성 발작의 반대이기 때문이다. 광과민성 발작은 강한 광원과 섬광으로 인해 목격자에게 일어나는 발작이고, 과민성 광 발작은 발작이 일어난 사람이 강환 광원과 섬광을 뿜어내는 현상이다.

 

이렇게 된 이상 한 번 파도가 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본 이후에야 캐롤의 발작이 잦아들 테니. 이는 그녀가 무언가를 부순 뒤에야 자신을 두려워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살인게임 속 시라유키 히메리가 본 캐롤 브라이트라는 인물은 아직도 그 무도회장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했다. 여전히 그 안에 갇혀 있고, 자신이 빠져나왔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그리하여 나비가 되는 꿈에서 깨어나고 난 뒤에는 그저 날개와 하늘하늘한 몸이 아닌 원숭이의 팔다리를 움직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비참하다고 느낄 만도 하다.

 

 

 

 

 

나나시는 캐롤의 전용실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이바라를 보았다. 분명 캐롤이 마지막에 있던 장소는 그녀의 전용실이었다. 캐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바라였다. 나나시는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나시: 이바라! 어떻게 된 거야? 캐롤 씨는 어디에 있어?

 

바라 쿠리스: 타… 탑 밖으로 나간 것 같아. 토키와가 캐롤 멘탈을 흔들고 가서

 

나시: 대체 토키와가 무슨 짓을 했길래… 윽

 

나나시는 이바라의 말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마치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기도 했다. 그런 나나시를 이바라는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나시는 그 기색을 느끼고서 이바라에게 물었다.

 

나시: 이바라. 너에게는 이 소리가 안 들리는 거야?

 

바라 쿠리스: 무슨 소리?

 

나시: 웅웅거리며 울리는 소리. 고막을 채우면서 짓누르는 것 같은 소리… 아니야. 나한테만 들리는 것 같으니까 잊어버려.

 

나나시는 천천히 자신의 귀에서 손을 뗐다. 어차피 귀를 막아봤자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소음은 정신을 통해 들렸다. 그러니 귀를 막아도 여전히 시끄러울수밖에. 나나시는 밑으로 내려갈수록 자신의 정신을 쨍하게 채우는 삐이이익 거리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나시: 캐롤 씨! 어디 계세요? 캐롤 씨!

 

나나시는 대답을 기다리며 왜인지 평소보다 밝게 느껴지는 탑 밖으로 발을 디뎠다. 그러자 밝은 빛이 보였다. 소음은 머리를 후벼팔 정도로 커졌다. 나나시는 눈부신 빛 때문에 질끈 눈을 감았다. 태양을 마주본 것 같은 광손상이 망막에 얼룩으로 남았다.

 

나시: 캐… 캐롤 씨!

 

나나시는 소리쳤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 광원의 정체가 캐롤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 마디의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눈을 감고서 두 손으로 눈 앞을 가리기까지 했는데도 눈이 부셨다.

 

그러는 찰나 누군가가 나나시의 뒤에서 그의 팔을 당겼다. 자신의 몸이 뒤로 끌려가는 것을 눈치채고 다리에 힘을 주었는데도 속수무책이었다. 나나시의 팔을 붙잡은 자는 그가 눈을 감고 자신의 눈에서 손을 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그의 몸을 질질 끌었다. 그리고 그를 탑의 두껍고 검은 벽 뒤로 내던졌다.

 

무로 시라베: 다급한 상황이었다.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나시: 히무로…? 언제 왔어? 어떻게 알고… 아니야.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왜 그랬어. 히무로! 지금 캐롤 씨를 도울 사람은 나밖에 없어! 어째서 저렇게 되셨는지는 몰라도

 

무로 시라베: 토키와 아유키가 살인게임의 비밀을 발설했다더군. 캐롤 브라이트는 그것에 충격을 받고 스스로의 샤이닝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캐롤 브라이트와 깊게 연결된 너도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나시: 아니야… 내가 가야 해! 나는 저항할 수 있어. 버틸 수 있다니까!

 

나나시가 다시 탑의 입구를 향해 다가간 찰나 히무로는 그를 만류했다.

 

무로 시라베: 너에게 저항할 용의가 있다면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전이는 네가 왜 그녀의 생각에 저항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니 내 충고를 들어라. 캐롤 브라이트를 안정화시켜야 한다.

 

기와라 우시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하기와라가 뒤늦게 계단을 내려왔다. 그는 이바라와 히무로의 동향을 살피고 어딘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총원이 열 명 밖에 남지 않게 된 탑 안은 몇몇의 인물을 집중적으로 살피면 그들의 동향을 어느 정도 살필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바라 쿠리스: 저 밖에서 캐롤이 빛나고 있어!

 

하기와라는 이바라의 말을 듣고서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기와라 우시오: 그게 무슨 스쿨 아이돌물에서 나올 법한 설명이야? 콘서트 열렸어?

 

바라 쿠리스: 아! 진짜 빛나고 있다고! 봐봐!

 

기와라 우시오: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래. 보면 될 거 아니야?

 

하기와라가 탑의 입구를 향해 걷는 찰나 히무로가 호통을 쳤다.

 

무로 시라베: 아서라! 정신을 잃는다! 떨어져!

 

바라 쿠리스: 으힉!

 

이바라는 히무로에게서 그토록 큰 소리를 들은 게 처음인지라 몸을 움츠려뜨리며 문에서 몇 발자국을 멀어졌다. 히무로의 정신은 편집증적인 강박으로 가득 찼다. 가장 강력한 정신조작 보유자의 자제력 상실이 벽 하나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폭주가 다른 사람 주변에서 벌어졌다면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샤이닝의 물리적 발현과 전방위 방출 모두 비효율적이고 사용자의 몸에 부담을 크게 지우는 일일 터. 그녀를 방치해 두었다가는 캐롤의 터치나 샤이닝이 크게 손상을 입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히무로는 마유즈미의 복귀를 위해서, 나나시는 캐롤 본인의 안위를 위해서 그녀를 멈추어야만 했다.

 

나시: 결국 도리가 없어. 히무로! 이 네 명 중에서는 내가 들어가야지만

 

무로 시라베: 이 네 명 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나 또한 터치에 저항할 수는 있어도 저런 샤이닝에 곧바로 노출되는 모험을 할 수 없다. 이것은 생명체에게 불가능한 과업이다.

 

히무로는 자신의 다이얼로그를 들고서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나나시는 그의 행동을 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달리 전화를 걸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캐롤의 샤이닝에 저항하던 시라유키? 그녀라면 캐롤의 샤이닝에도 어느 정도 내성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나시가 불가능한 일을 시라유키가 할 수 있을리 만무했다.

 

나나시가 이 상황을 해결할 유일한 존재를 떠올리지 못한 이유는 그 자가 너무 중요한 일을 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코 한 눈을 팔아서는 안 되는 일을.

 

무로 시라베: 제츠보. 네 도움이 필요하다. 캐롤 브라이트가 폭주했다.

 

 

 

 

 

이다 쿠로하: 사이아쿠 어때? 말 그대로 최악. 귀축 잡종… 음… 떠오르지가 않네

 

츠보: 그런 식으로 천한 이름을 지으면 오히려 인위적인 느낌이 들어서 제대로 된 모욕이 되지 않아. 카이다.

 

이다 쿠로하: 씨발. 제츠보도 인위적인 이름이잖아.

 

츠보: 그거야 앞선 맥락이 있으니까. 그리고 노네임이 나에게 직접 지은 이름이니까 모욕이 되는 거야. 나를 노바디라고 부르는 것이 무서워서 인공지능이니 뭐니 가명으로 불러 놓고서 드디어 나를 객체로 인정하는 이름이 제츠보야. 그러니 그만한 멸시가 없는 거야.

 

이다 쿠로하: 이해가 안 되는데.

 

츠보: 그럼 이해하지 마.

 

이다 쿠로하: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서 발 빼지 마! 더 자세히 말하지 못해!

 

제츠보는 적절한 시간대에 전화가 걸려오자 즉시 전화를 받았다. 덕분에 카이다와의 숨막히는 이야기 속에서 잠시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 수다보다 더 골치아픈 일이 제츠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츠보: 어. 여보세요. 히무로?

 

츠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이다 쿠로하: 뭐야. 왜 그래?

 

제츠보는 카이다가 통화 내용을 듣지 못하게끔 극도로 작게 통화 음성을 줄였다. 청력 가동 범위를 만감하게 조절해 미세한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제츠보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카이다가 듣지 못한 통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무로 시라베: 캐롤 브라이트가 폭주했다. 자신의 샤이닝을 억누르지 못하고 정신조작의 빛을 발산하고 있다. 그것이 통하지 않는 건 너 뿐이다. 네가 직접 와야 한다.

 

츠보: 그럼 여기에 혼자 두란 말이야?

 

카이다를? 제츠보는 그 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어차피 알아서 유추해낼 터였다.

 

나시: 히무로! 그렇게는 안 돼! 분명 도망치고 말 거야!

 

무로 시라베: 카이다 쿠로하를 풀어줄 생각은 없다. 카이다 쿠로하와 함께 오면 된다. 만약 그녀가 도망친다면 내가 뒤쫓겠다.

 

츠보: 거기서 칼춤이라도 추면 나나시를 지킬 자신은 있고?

 

바라 쿠리스: 나나시만 있는 건 아니야! 우리도 있어!

 

츠보: 너희는 너희 몸이나 조심해! 정신조작 잘못 당하면 큰일나니까! 방해되니까 떨어져 있기나 해! 히무로 너랑 나나시도 다!

 

무로 시라베: 나와 이름 없는 남자는 만일의 상황을 위해 대기해야만 한다.

 

나시: 내가 몸을 멈춰 두면 돼. 인공지능! 그냥 데리고 와! 이 자리에 가만히 두게!

 

츠보: 아니야. 이 녀석이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야. 분명 너를 보자마자 귀를 가릴 거야.

 

나나시는 이미 카이다의 몸을 멈춰 보았다. 또 카이다는 결국 다른 사람을 향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니. 제츠보가 카이다를 먼저 묶어 두고서 나나시가 손쉽게 카이다를 멈추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분명 도망가려고 애쓰느라 추격전이 벌어지는 등 지지부진해지고 어지러운 상황이 될 터.

 

나시: 그럼 내가 직접 갈게. 멈추고 같이 다시 내려오면 돼!

 

츠보: 그래봤자 같은 수법에 당하지 않을 거래도! 상황이 얼마나 급한데?

 

무로 시라베: 상당히 급박하다. 샤이닝을 너무 강하게 방출하고 있다. 영구적인 손상을 입기까지 얼마 남지도 않은 것 같군.

 

이다 쿠로하: 뭐야. 뭔 통화를 그렇게 작게 해? 무슨 일 있냐?

 

제츠보는 카이다를 어떻게 할지 생각하다가 먼저 카이다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를 떠올렸다.

 

자기 언니가 나아지기를 바라면서 얌전하고 가만히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지금이야말로 풀려날 기회라면서 영영 광활한 장미꽃밭으로 떠나서 다른 이들의 목숨을 노릴까? 분명 카이다는 캐롤의 말을 잘 들었다. 제츠보가 예상한 것보다는 훨씬 고분고분하게 외출금지 처분을 수행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카이다에게 빈틈을 내어주기에 충분할까?

 

두 가지 선택이 주어졌다. 카이다에게 사실을 알리기, 사실을 알리지 않기.

 

카이다가 다른 이들을 해치지는 않으리라고 믿기, 혹은 믿지 않기.

 

제츠보는 바보가 아니었다. 며칠동안 부대끼면서 수다 좀 떨고 재워줬다고 해서 카이다라는 사람의 본성이 바뀔 것이었다면 진작 바뀌고도 남았다. 분명 제츠보는 카이다가 잠을 잘 수 있게끔 도왔고 몸이 굳은 채로 지내지 않게끔 두둔해 주었다. 하지만 고작 그런 일이 카이다의 마음에 조금의 울림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면 그자는 바보 천치였다.

 

제츠보는 여전히 카이다가 예전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나시의 말마따나 카이다는 변하지 않는다. 그저 변한 것처럼 보일 뿐 다시 본다면 카이다는 또 속았냐며 웃고 말 것이다. 따라서 제츠보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믿어 보자며 카이다에게 모든 진상을 이야기하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카이다가 또 자유를 얻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캐롤이 내린 외출금지의 명령을 따라 자기 방에 얌전하게 있으리라는 믿음 또한 가질 수 있었다. 결국 정해야 하는 것은 카이다에게 당장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리는가, 혹은 알리지 않는가였다.

 

제츠보는 주저없이 카이다에게 알리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츠보: 카이다! 너 잠깐 여기에 있어. 나 빠르게 갔다와야 하는 곳이 있거든? 절대 나가지 말고 여기에 있어! 네 언니가 외출금지 내렸으니까. 알겠지?! 믿는다!

 

제츠보는 카이다가 의문을 제기하거나 상황 설명을 요구하기 전 재빨리 문을 닫고 식당을 향해 뛰었다. 혹시 그녀가 기분 가는 대로 행동할까봐 그녀의 언니를 들먹이는 일 또한 잊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츠보는 카이다를 믿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카이다는 가만히 있었다.

 

 

 

 

 

제츠보는 탑 밖의 빛을 보자마자 자신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츠보: 내 생각보다 더 큰일이야. 지금 출발할게.

 

바라 쿠리스: 제츠보는 정말 괜찮은 거 맞는 거지? 제츠보도 다치는 거 아니야?

 

기와라 우시오: 정신조작이니까 제츠보는 괜찮지 않냐? 혹시 태양열 발전이라서 빛을 잘못 받으면 안된다던가 그래?

 

츠보: 괜찮아. 걱정 마. 하기와라 너는 헛소리 말고. 이제 다들 귀 막아. 빠르게 다녀올 테니까.

 

나시: 조심해야 해!

 

그리고 제츠보는 탑 밖에 발을 디디고 얼마 지나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는 캐롤을 보았다. 제츠보는 몸을 둥글게 만 채로 온몸을 떨고 있는 캐롤을 내려다보았다.

 

츠보: 하아… 살아있는 사람도 꼭 다 좋은 건 아닌가 봐.

 

정확히 어떻게 캐롤의 공황을 억눌러야 할지는 몰랐지만, 제츠보는 우선 캐롤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 보았다. 더 나은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츠보: 캐롤. 정신 차려. 어서 일어나. 그러다가 큰일난다고. 계속 그러다간

 

롤 브라이트: 나도 이런 몸을 가지고 싶지 않았어

 

제츠보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자신의 몸을 떠올렸다. 옷이 없는 그녀의 몸. 금속의 나신을. 제츠보 또한 그런 몸을 가지고 싶지는 않았지만 기계로 몸이 변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이었다.

 

제츠보는 캐롤을 어느 정도 부러워했다. 질투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분명 기계 몸을 가진 채 되살아났으면 캐롤 또한 자신처럼 내쳐졌을 거라는 추한 생각마저 가졌다. 그러나 캐롤이 그녀가 타고난 능력 때문에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아는 제츠보는, 신음하며 빛을 내뿜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캐롤에게 연민을 느꼈다.

 

츠보: 캐롤. 도와줄게.

 

제츠보는 그렇게 말하며 캐롤의 손을 붙잡았다. 캐롤은 누군가와 손이 맞닿자 화들짝 놀라 팔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롤 브라이트: 아! 안 돼요! 손 놓으세요. 절대 닿지 마세요! 저한테 닿으면 위험해요!

 

츠보: 걱정 마. 캐롤. 나니까.

 

캐롤은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서는 한 줄기 빛이 나왔다. 그 자체가 광원인지라 망막에 상을 투영시킬 수 없게 된 캐롤은 제츠보가 어디에 있는 줄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단지 목소리만을 식별할 수 있을 뿐이었다.

 

롤 브라이트:… 제츠보 씨…?

 

츠보: 그래. 나야. 빨리 정신 차려. 그래야 네 동생 마저 보러 가지. 저기 나나시도 너 걱정하고 있어.

 

캐롤의 전신에서 빛의 세기가 조금씩 약해졌다. 체력이 떨어진 탓도 있었고 캐롤 본인이 의식적으로 억누르기 시작했기 때문도 있었다. 그녀는 외줄 위에서 서서히 균형을 잡았다.

 

롤 브라이트: 저… 죄송해요… 제츠보 씨. 형편없는 사람이라서. 또 저를 통제하지 못했어요. 다른 분들이 전부 위험에 처할 뻔했어요

 

츠보: 나조차도 나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데 너에게 그런 일을 바라는 건 조금 무리지. 미안해하지 마. 정 미안하다면 그 빛 좀 어떻게 해 주고.

 

캐롤 브라이트는 천천히 자신을 억눌렀다. 이윽고 패닉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녀의 눈에서도 빛이 뿜어져 나오기를 멈추었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롤 브라이트:… 네. 곧 전부 끌 수 있을 것 같아요. 혹시 이바라 씨는 괜찮으신 건가요? 저와 손이 맞닿았어요. 아주 잠깐이지만

 

제츠보는 캐롤의 말을 듣자 탑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이바라가 있는 곳을.

 

터치… 또인가? 이어져 있던가?

 

점점 낭패가 따로 없었다.

 

 

 

 

 

 

 

이다 쿠로하: 뭐야. 뭔데. 시발.

 

방 안에 떡하니 남겨진 카이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앉기를 몇 번 반복했다. 제츠보는 본래 카이다를 내버려둔 적이 없었다. 카이다가 남을 해치지 못하게끔 그토록 악착같이 막아 왔으면서 나를 풀어 준다고? 풀어준 게 아닌 것 같은데? 급한 일이 터진 거 아니야?

 

씨. 언니가 여기에 있으라고 했는데. 또 제츠보도 여기에 있으라고 했는데. 이거 무슨 시험같은 거 아니야? 지가 진짜 떠났을 때 내가 내 방에만 가만히 있는지 아니면 기회다 하고 밖으로 달려 나가는지 시험하는 거 아니냐? 문 열고 나가니까 제츠보가 내가 이럴 줄 알았다며 일주일 더 붙어있겠다 하고, 언니는 나한테 실망하는 거 아니야?

 

이다 쿠로하: 언니 실망시키기 싫은데.

 

시발. 근데 제츠보 저 새끼 진짜 왜 나갔어. 궁금해 죽겠네. 전화나 걸어 볼까.

 

제츠보는 받지 않았다. 카이다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채 침대에 눕고 몸을 이리저리 굴렸다. 별 이유 없이 벽을 주먹으로 쾅쾅 내려치기도 했다. 카이다는 그러다가 잠기지 않은 자신의 문을 보고서 밖으로 나가볼까 하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지만, 이내 그녀는 계속 자신의 방에 머무르기를 택했다.

 

그러는 와중 문이 벌컥 열렸다.

 

이다 쿠로하: 왔냐?! 대체 뭐 하길래 그렇게 급하게

 

침대에 누워 있다가 상체를 벌떡 일으킨 카이다는 문을 연 것이 제츠보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제츠보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그녀의 방에 들어오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키와 아유키: 안녕. 카이다. 문이 열려 있길래 그냥 들어왔어.

 

토키와는 그렇게 말하고서 문을 닫은 뒤에 철사를 열쇠구멍 사이로 집어넣었다. 그는 열쇠 없이 방의 안에서 문을 잠그기까지 15초도 채 쓰지 않았다. 너무 당당하고 자연스러웠던 나머지 카이다는 뒤늦게 욕을 내뱉었다.

 

이다 쿠로하: 야. 야야야. 뭐냐? 안 나가. 씨발아?! 어디서 남의 방에 멋대로 들어오고 있어! 이 변태새끼야! 이거 완전 순 강도새끼네! 좆같은 놈이! 꺼져! 꺼져! 나가라고!

 

카이다는 품에서 칼을 빼들고서 토키와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그러면 당연히 토키와 쪽에서 꼬리를 내리고 낑낑 도망갈 거라 생각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멋대로 잠근 문을 다시 열려고 애쓰는 꼴은 꽤 재밌을 것만 같았다.

 

키와 아유키: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카이다. 진심이야. 네가 다른 사람을 해쳤다고 해서 내가 너를 사적으로 제재할 권리는 없어. 하지만 아무런 사심이 없기에. 이것은 사적 제재가 아니지. 위험 인물을 억누를 뿐이니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

 

그러나 토키와는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카이다에게 천천히 다가갈 뿐이었다. 카이다는 그걸 보며 토키와가 머리를 다쳤다는 생각을 했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게 분명하다고, 그게 아니고서야 힘이 세지도 않고 믿을 구석은 쥐뿔만치도 없는 놈이 자신한테 다가올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다 쿠로하: 야! 대답 안 해?! 죽여버릴라! 어디서 이 새끼가 겁도 없이 나한테!

 

토키와는 거들먹거리지 않고 자신이 할 일을 했다.

 

키와 아유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그 순간. 카이다의 몸이 멈추었다.

 

기억 소거의 절차란 카이다에게 강화 시술을 제공한 의문의 학자들에게서 비롯된 기술이다. 조직으로부터 거액을 받는 대신 완성되지 않은 신체 강화를 시행한 그들은, 실험체를 통제할 수 없게 되는 일을 막기 위하여 암시의 순서를 조직에게 전해 주었다. 가장 우선되는 것은 카이다가 낱말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을 수 있게끔 몸의 자유를 빼앗는 일이었다.

 

카이다는 순간 너무 놀라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카이다는 그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비현실적이었다. 나나시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누구도 기억 소거 절차에 대해 몰랐다. 몰라야만 했다. 알아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도 말이 되지 않는다. 토키와가 절차에 대해 알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아무튼 말이 안 돼. 카이다는 멍하니 그런 생각에 빠져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이다 쿠로하: 이. 이 씨발아! 풀어! 안 풀어?! 당장 풀어어어어! 이걸 네가 어떻게 알아! 씨발아! 풀어!

 

카이다는 본능적인 패닉에 빠져들었다.

 

이다 쿠로하: 푸. 풀라고! 이 개새끼야! 으아아아악! 풀어! 이거 안 풀어?! 안 풀면 죽여버릴 거야! 야! 내 말 들어! 안 풀면 죽일 거라니까! 이 씨발! 네가 이걸 왜 아는데! 너는 왜 아는데?!

 

또 이 지랄이었다. 잊을 만 하니 카이다의 앞에 또다시 절차를 들이미는 놈이 나타났다. 마침 제츠보는 잠시 자리를 비웠기에 카이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소리를 치는 것 뿐이었다. 기억이 지워질지도 모르게 되자 카이다의 마음 속에서 절박함이 커져갔다.

 

언니를 잊을 순 없어. 이제 다 되찾았는데 이제 와서 잃어버릴 순 없어.

 

그런 생각에 거의 울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끼던 카이다는 문득 중요한 것을 떠올렸다. 방울 소리. 절차를 이루는 말에 끼워 넣는 방울 소리가 없다면 다 쓸모가 없었다. 방울이 없는 이상 토키와는 결코 절차를 온전히 완수할 수가 없었다. 카이다는 조금 안도했다. 기억이 잘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와놓고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역시 그렇게 될 리가 없지 않은가.

 

방울만 없으면… 방울만 없으면

 

키와 아유키: 분명 방울이 있어야 제대로 통한다고 했었지

 

딸랑 딸랑 딸랑 딸랑

 

 

 

 

이다 쿠로하:… 안 돼… 안 돼

 

원래 필요한 물건은 필요해서 찾으려고 하면 없고 필요하기 전까지는 팔에 걸리고 발에 채이는 법이다. 그러나 토키와는 후루미나미가 언질을 준 책에 나온 정보. 카이다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절차를 안 이래 방울을 찾아왔다.

 

나는 책의 내용을 한 번 더 읽었다.

 

"우물에 빠지지 말 것, 쌍둥이자리, 독립 시행은 독립적인 움직임, 고문은 자비이다, 고통은 안정이다, 구속은 자유이다, 새벽에서 끄집어져 깨어남, 실내에서 추운 바깥으로 나가다, 상처, 소금, 염소의 혀, 동전의 양면, 30코페이카, 얼린 바다를 부순 도끼, 그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뒤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카이다 쿠로하를 억제할 수단은 이것으로 손에 넣었다.

 

그 결과 언제 카이다가 돌아올지 몰라 본래 가지고 있던 호루라기에 쇠구슬을 넣은 급조를 하나. 그리고 제대로 된 방울을 하나 더 손에 넣었다. 카이다의 입장에서는 영안로에서 돌아온지 나흘도 되지 않았지만, 토키와에게는 일주일 전이다.

 

키와 아유키: 쌍둥이자리.

 

딸랑 딸랑 딸랑 딸랑

 

고통은 즉각적이다. 뇌를 조여오고 칼이 그 안을 후비는 느낌. 몇 번을 당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잊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고통이 매번 상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기억이 잘린다. 그녀가 사라진다.

 

카이다는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은 토키와밖에 들을 수 없었다. 토키와는 몇 번이나 외워뒀던 말을 상투적으로 읊었다.

 

키와 아유키: 독립 시행은 독립적인 움직임.

 

딸랑 딸랑 딸랑 딸랑

 

토키와는 그 절차를 연속된 말로 이해하지 않았다. 나나시는 영안로 속에서 카이다의 기억 속 환영이 읊는 단어를 들었다. 그리하여 그것이 사람이 말하는 낱말의 이음이라 인식했다. 토키와는 기억 소거 절차를 활자로 읽었다. 그리하여 그는 절차를 하나의 긴 문장이라고 받아들였다.

 

카이다의 애처로운 비명이 한 번 더.

 

키와 아유키: 고문은 자비이다, 고통은 안정이다, 구속은 자유이다.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둘 사이의 차이는 나나시가 절차를 진행하는 와중 말을 걸거나 다른 단어를 섞는 등 변형을 주어 절차의 위력이 떨어졌던 반면, 토키와는 절차가 본래 작용해야 했던 위력을 온전히 발휘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설령 눈앞의 사람이 어떻게 울부짖는다고 해도.

 

이다 쿠로하: 끄아아아아아악! 언니! 언니이이이이이! 도와줘! 아아아아아악!

 

키와 아유키: 새벽에서 끄집어져 깨어남.

 

딸랑 딸랑 딸랑 딸랑

 

카이다의 성량은 토키와의 예상을 웃돌았다. 그는 카이다가 화를 냈으면 화를 냈지. 고문을 당하는 사람처럼 도움을 요청하며 울부짖을 줄은 몰랐다. 그토록 아파할 줄도 몰랐다.

 

이다 쿠로하: 아… 아아아…! 끄으으윽…! 언니… 언니이… 나 구해줘… 언니이이이…!

 

키와 아유키: 실내에서 추운 바깥으로 나가다.

 

딸랑 딸랑 딸랑 딸랑

 

이다 쿠로하: 끄윽… 그. 그마아안…! 멈춰! 멈춰어어어아아아아악!

 

키와 아유키: 상처 소금 염소의 혀

 

딸랑 딸랑 딸랑

 

이다 쿠로하: 으흑! 으흐. 아으아아아아아악! 언니! 제츠보! 나나시! 아무나! 아무나아아아아!

 

키와 아유키: 동전의 양면

 

딸랑 딸랑

 

이다 쿠로하: 아무나아아아아아아아! 아무나 제발. 제바아아아아아알!

 

딸랑

 

키와 아유키: …30코페이카.

 

제기랄. 실수했다. 말하고 나서 방울을 흔들어야 했는데.

 

이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거야. 이 정도는 인간적 오류인데 이토록 강력한 절차를 조금의 틀어짐만으로 성립이 불가능해질리가 없어. 토키와는 우려했고 다행히도 절차는 조금도 잘못되지 않았다. 

 

이다 쿠로하: 으악. 으. 끄윽…! 윽. 으윽…! 언니… 언니이

 

카이다는 여전히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얼굴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신음하고… 그는 다음 단어를 말하며 방울을 흔들고… 모든 일이 여전히 계획대로였다. 모든 일이

 

이다 쿠로하: 그만… 그만해… 제발

 

토키와는 카이다를 보았다. 단지 눈이 열린 채 고개를 돌린 게 아니다. 시각 정보를 받아들인 게 아니다. 토키와는 '보았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이다 쿠로하: 죽고 싶지 않아. 토키와.

 

카이다의 얼굴에는 평소의 비틀림이나 거만함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대신 두려움과 비굴함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녀는 잃을 것이 너무 많아졌다. 낱말 몇 개로 잊어버릴 순 없는 소중한 것들이 있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전부 잊고서 다시 명령이나 듣는 꼭두각시가 되고 싶지 않았다.

 

카이다는 다시 살고 싶었다.

 

이다 쿠로하: 부탁이야… 제발…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다시는 안 그럴게… 다 잘못했어… 다신 안 할게

 

그렇기 때문에 자존심도 뭣도 없었다. 고작 그런 알량한 것을 세울 수 없었다. 살기 위해 누군가의 발이라도 핥아야만 한다면 그녀는 몇 번이고 핥았을 것이다. 이제야 그녀는 비로소 삶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다 쿠로하: 미안해 다 미안해 내가 지금까지 다 망쳤어 내가 잘못한 줄도 모르고서!

 

그제서야 카이다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녀는 피해를 끼치는 것을 업으로 살았다. 카이다는 자신의 모든 것을 후회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모노로그의 내통자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모리를 바다에 내던져 나이토에게까지 상해를 입혔을 때? 마유즈미를 때렸을 때인가? 그게 아니라면 나나시를 납치했을 때? 돌이키고 싶지 않은 일이 하나도 없었다.

 

왜 나는 그렇게 살았을까?

 

왜 나는 살았을까.

 

왜. 왜. 왜!

 

왜 나는 언니와 함께 태어났을까! 언니한테 폐만 끼치게 될 것을!

 

카이다는 자신이 천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까지 저질렀던 모든 잘못의 무게가 그녀를 짓누르는 것이다. 그녀는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이제 다시 살 수 있을 터인 구명줄이 끊어지고 다시 망각의 심연 속으로 영원히 떨어지게 되는데. 카이다는 신도 부처도 저주하지 않았다.

 

그저 빌었다.

 

이다 쿠로하: 잘못했습니다 너무 미안합니다! 전 개새끼에요! 그냥 여기에서 숨어 지낼게요… 쪼그만한 벌레처럼 박혀 있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내 기억 지우지 마

 

그 절규와 비굴한 애원은 사람의 것이었다. 토키와의 눈앞에 있는 것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 본인이 유린하고 있는 인간성이었다.

 

그는 분명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카이다가 이 상황에서 빠져나오기만 하면 그에게 피의 응징을 저지를 터였고, 탑은 여전히 카이다의 위협 아래에 놓일 것임을 알았다. 그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기억을 지워야만 했다.

 

동시에. 그는 여전히 일말의 주저함을 가지고 있었다. 카이다 쿠로하가 꾼 꿈을 보지 않았더라면 망설임 없이 기억을 지워 버릴 수 있었겠지만 그는 변해버리기 전의 그처럼 평범한 행복을 바라던 카이다의 일면을 보았다. 그녀는 모든 일을 돌이키고 싶었다. 어떤 특별함을 내버릴지라도 평범한 삶을 가질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키와 아유키: …얼린 바다를 부순 도끼.

 

그러나 그런 카이다는 꿈 속에나 있다. 카이다의 깊은 마음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들 그녀의 겉에는 여전히 잔인함과 통제 불가능성이 서려 있었다. 그러니 언제나 우유부단한 혁명가는 이런 식이었다. 분명히 -> 하지만.

 

이다 쿠로하: 제. 제발! 제발! 아아아! 그만! 뭐든지 할게. 흐윽. 아아아아. 안 돼! 끄으윽! 그러지 마! 그러지 마! 그만해애애애!

 

그러나 토키와가 기억 소거 절차를 확실히 할 필요가 없었다면, 그는 말하고 싶었다. 네 마음 어딘가에 평화를 원하는 인간의 원형이 남아 있음은 알겠다고, 내가 그것을 직접 보았다고. 그러니 네 안에 아주 깊숙히 박혀 있는 그 사람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 말하고 싶었다.

 

카이다는 그저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랐다. 그것 말고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눈을 뜨면 그곳은 여전히 그녀의 상냥한 언니와 함께인 그곳인 것이다. 그녀와 함께 자라났다던 바로 그 고아원.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던 그 장소이기를 바랐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그보다 멋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언니에게 칭얼거릴 것이다. 너무 무서운 꿈을 꾸었다고. 그런다면 분명 언니는 그녀를 달래주겠지… 다음날 아침이 되면 자신이 꾸었던 꿈조차 기억하지 못할만치. 그녀는 아픈 것을 싹 잊게 해줄 것이다

 

그러나 카이다는 눈을 감아도 그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었다.

 

까맣게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카이다는 그럼에도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그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려 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이제 사라져버린 희망의 보루를 한 번이라도 그리려 했다.

 

토키와는 카이다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기억의 소거 절차를 완수하기까지는 낱말 하나가 남았을 뿐이다. 낱말 하나. 그것만으로 사람의 모든 것이 지워지기 직전이었다.

 

이다 쿠로하: 그만. 그만. 언니이이… 언니 흑. 흐흑

 

이제 그는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죽일 수가 있다.

 

그 일은 이미 토키와에게 있어 효율의 문제로 다가왔다. 그녀를 어찌하면 좋을까? 곧장 지울까. 아니면 조금 기다려 볼까?

 

토키와는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가 느닷없이 감상적이게 된 건 아니었다. 카이다의 내면에서 변하기 이전의 토키와 본인과도 같은 평범한 삶을 향한 사랑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분명 그것만큼은 아니었다. 그저 그가 확보한 정보원은 카이다 뿐이었고, 섣불리 기억을 지워 버리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기억을 지워도 좋다는 판단이 선 뒤에 그렇게 하기로 정한 것이다. 손가락의 사용방법 같은 것을 물어봐야 할 수도 있으니.

 

토키와는 조심스럽게 카이다의 자켓을 젖히고서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꿈에서 카이다가 손을 넣었던 바로 그 안에서 질기고 부드러운 고무의 질감이 느껴졌다. 분홍색 고무장갑이었다.

 

이다 쿠로하:… 그건 안 돼… 언니 거야! 언니가 절대로 너한테는 닿게 하지 말라고 했어…!

 

카이다의 말을 무시한 채 토키와는 자신의 손바닥을 펼치고 그 위로 고무장갑을 뒤집었다. 미지근한 액체가 그의 손 안으로 몇 방울 떨어지자 그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피였다.

 

이다 쿠로하: 아. 안 돼…! 그만둬! 끄윽… 그만…!

 

카이다는 이런 걸 자켓 안에 넣고 잤던 건가? 토키와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의 잘린 손가락을 들여다보자니 정말 기분이 나쁘고 또 어쩌라는 건지 막막할 뿐이었지만… 이윽고 캐롤의 중지는 그의 손에 들어왔다. 곧 그 물건이 정확히 어떤 작용을 하는지도 토키와 스스로 알 수 있게 될 터였다. 정말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그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며 고무장갑을 마저 털었다.

 

키와 아유키: 자. 확인해 볼까?

 

손가락이 그의 손 안에 떨어졌다. 캐롤의 중지. 피가 빠져 새하얗다 못해 파랗게 변해버린 손가락이 그와 맞닿았다.

 

그는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수많은 눈이 달린 무언가.

 

그 순간 토키와는 온몸을 뻣뻣하게 굳힌 채 뒤로 쓰러졌다. 목이 꺾였다. 등은 굽었다. 그의 온몸을 찌릿찌릿한 통증이 휘감았다. 그는 뒤늦게라도 손가락을 손에서 놓아 버리려고 했으나 몸의 모든 근육이 긴장되어 오그라들자 그의 손아귀는 무언가를 놓아버릴 수 없을 만치 강하게 쥐여졌다. 경련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른 무언가 또한 제멋대로 시작되었다.

 

그는 환각을 보았다. 환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의 기억이자 그의 기억 중 일부이기도 했다. 수많은 자들의 기억이 집대성된 무언가였다.

 

그것은 비범인들의 위에 군림했다.

 

키와 아유키: 나는 그 자리에

 

숨 한 모금도 쉬지 못한 채. 눈이 빠져버릴 만치 크게 뜬 채로 토키와는 무언가의 풍경이 자신의 뇌리 속으로 빠려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이느 장소를 둘러싼 기억이었다. 손가락은 기억과 영혼을 담고 있었다. 그 기억 속 전경은 그에게 처음 보는 무언가이자 동시에 다시 보니 식별할 수 있는 잃어버린 조각이었다.

 

그들은 특정한 조건의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초고교급이라 불린 자들 중에서 몇몇의 특별한 자질을 가진 이들을 모아 그 모든 힘을 한 이에게 집중시켜. 전례 없는 수준의 샤이닝 능력자를 만들고자 했다.

 

키와 아유키: 그 자리에… 그곳에… 연구소… 금색… 파편화

 

살인게임의 참가하는 시점의 토키와 아유키는 그 정보를 알 수 없었다. 대몰락이 벌어진 이후의 자신이 어떻게 지냈는지 그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재단은 그 특정한 개인을 만들기 위해서 특정한 부류의 초고교급을 사냥했다. 특정한 행동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 자들.

 

그는 사소한 비리를 계기로 하여 학생 시위대를 만든 적이 있었다.

 

그는 시험관 안에 들어 있었다.

 

그 말고도 시험관의 액체 속에서 마스크를 통해 공기를 제공받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토키와는 그중 한 명의 얼굴을 보았다.

 

그것은 캐롤 브라이트의 얼굴이었다.

 

키와 아유키: 나도…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는 그 기억을 잘랐다. 그리고 자신의 신체에 가두었다. 그러나 기이한 숙명의 작용으로 인해 토키와는 그 손가락을 손에 넣었다. 그 손가락이 그에게 어떤 짓을 할지 그가 알았다면, 과연 그가 결정을 재고했을까?

 

통증은 조직의 변화에 따른 성장통의 일종이었다. 재능이 주입됨에 따라 재능은 자신을 발휘시킬 수 있는 신체 조건을 갖추고자 자신이 들어있는 그릇을 변화시켰다. 이 과정을 버티지 못한 실험체들은 진작 죽어 버렸다. 그리고 주입된 샤이닝은. 그것도 특수한 종류의 샤이닝은 낙인이나 표지 같은 외면적 변화를 동반했다.

 

그 색은 섞이지 않는다. 압도한다. 파편이 하나로 합쳐졌다. 그러나 본래 있던 개인의 자아는 금색에 압도되었다.

 

카이다는 토키와가 쓰러졌을 때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언니가 그녀를 도와줬다고 생각했다. 꼴 좋다! 분명 언니가 수를 쓴 것이다! 캐롤은 카이다의 곁에 없지만 분명 그녀의 도움 덕분에 기억이 지워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안도감과 언니를 향한 고마움을 느끼며 울음과 흐트러진 숨을 갈무리했다. 캐롤은 분명 최고의 언니였다.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대단한

 

그러나 그녀는 눈앞에 쓰러져 있던 토키와의 몸이 서서히 변하는 것을 보았다.

 

손톱과 속눈썹이 길어졌다. 체격이 조금 줄어들었다. 목울대가 작아졌다. 눈 코 입에 귀의 형태까지 변해 버려서 몇 초 사이에 그는 본래의 얼굴조차 잃어 버렸다.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여성의 샤이닝에 의해 남성의 신체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머리를 통째로 채써는 듯한 비명을 지르는 그의 머리카락 색이… 서서히

 

금색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키와 아유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키와 아유키: 기억!

 

키와 아유키: 이 기억은!

 

토키와는 누군가의 행적을 돌아보았다.

 

키와 아유키: 말도 안 돼!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건!

 

키와 아유키: 이건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야! 이건 내 의지가 아니었어!

 

토키와는 눈의 내부가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고 바닥을 뒹굴었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끝없이 끝없이 절규했다. 온몸이 전부 아팠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마치 온몸이 미세한 바늘로 푹푹 뚫리는 고문을 받는 듯한 고통이었다. 토키와는 몇 번이고 후회했다. 이제 그만해 달라며 애원하기도 했다. 그는 캐롤의 중지에 붙어 있는 자신의 손을 잘라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모든 것이 바뀐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는 자아의 죽음이자 새로운 삶을 부여받는 일이었다.

 

키와 아유키: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라고! 이건 내가 아니야! 내가 내 손으로 한 게 아니야! 나는 아니야!

 

그것은 분명 다른 사람이었다.

 

키와 아유키: 내가 아니야아아!

 

토키와라는 한 잔의 물에 몇십잔의 피가 쏟아졌다.

 

그리하여 분명 그것은 토키와의 잔이었지만 그 안에서 토키와라는 사람은 1/N일 뿐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토키와 아유키와 동일인물이라 보기에 무리가 있었다.

 

그 정체성은 엷디 엷어졌으나… 그 잔에 담긴 피는 짙고도 짙으리.

 

그는 자신과 눈이 마주쳤던 그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그 존재는 그가 곧 찬탈하게 될 무언가에 대해 말했다. 파편을 모아 새로 설 거인에 대해 말했다.

 

키와 아유키: 그 거인은 누구지?

 

그는 다시금 완전함을 체험할 수 있었다.

 

키와 아유키: 모든 것을 포용함에 발을 담글 수 있는 건가?

 

흩어졌던 파편은 곧 제 주인을 찾아 모여들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이 그렇게 정해졌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사실로 그에게 다가왔다.

 

토키와는 비범해지고 싶었다.

 

그 소원은 이루어졌다.

 

키와 아유키: 바라는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리라. 보기 좋다 하시더라

 

토키와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고통과 공포로 일그러져있던 얼굴에 놀라운 깨달음이 새로 떠올랐다.

 

키와 아유키: 모든 일이.

 

키와 아유키: 모든 일이 다 그렇게 된 거였어.

 

그가 다시 뜬 것은 불길한 금색의 눈이었다.

 

키와 아유키: …가자. 악마 아니. 카이다. 맞서야 하는 자들에게 맞서야겠어.

 

그리고 토키와는 카이다의 손을 만졌다.

 

이다 쿠로하: 어. 언니!

 

카이다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이는 카이다 쿠로하라는 인간이 자신의 행보에 따라 그에 걸맞는 업보를 당하는 이야기다.

 

카이다는 분명 캐롤의 존재로 인해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불만이 넘쳤지만,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면 그녀는 분명 더 나아질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과오를 잊지 않은 채로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카이다라는 사람에게 정의가 내려지지 않고 그저 또 다른 악에 의해 희생당하는 이야기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되찾지 못한 채 도축당하는 사냥개이자 잔악한 도구에 대한 이야기다. 시로미 치나미라는 이름의 책은 분명 짐승이라는 글자를 써넣기 위해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책에는 그녀가 서서히 갱생되어가는 이야기가 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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