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단크 타워
챕터 4: < 황금 원숭이의 손길 >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제츠보: 이제 나는 다시 카이다 감시하러 돌아갈게.
제츠보는 캐롤이 어느 정도 안정된 모습을 보이자마자 바삐 계단을 올랐다.
캐롤은 이 시점에서 수치심과 죄책감 때문에 이를 꽉 깨물었다. 멋쩍게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는 것은 가벼운 수치고,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서 바닥을 내려다보는 것은 가벼운 죄책감이다. 그런데 그 둘이 두 배로 더해진 뒤 서로 곱해지면 그것은 어떻게 받아들일 방도가 없는, 그저 견뎌야만 하는 고난에 더 가까워진다.
이 많은 사람들이! 이 많은 사람들이 그녀 때문에 왔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이라면 그 사실에 약간의 만족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마치 열병에 걸린 그녀에게 다른 이들이 한달음에 달려와 쾌유를 바라고 사과 바구니를 주듯이 자신이 누군가에게 중요하다는 점에 위안과 지지를 얻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캐롤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만큼 스스로에게 엄격했기에. 캐롤의 흔들림을 우려해 찾아온 이들의 수를 보자 캐롤은 괜히 그녀 탓에 그들이 헛걸음과 헛수고를 했다고 여겼다.
그들의 걱정과 사려깊음에 감사하는 것과 미안해하는 것은 크게 다르다. 감사함은 은혜고 미안해함은 부채다. 그리고 단지 그들이 그녀를 위해 찾아왔다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것 말고도 캐롤에게는 또 걱정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바라는 분명 캐롤의 손에 닿았다. 정말 아주 잠깐 닿았지만 분명 닿았다. 접촉! 캐롤은 다시금 장갑을 끼지 않기로 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반성했다. 한편 캐롤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녀의 체질을 익히 알고서도 굳이 손을 잡으려 했던 이바라를 힐난하는 생각이 의식의 수면 위로 점점 떠올랐고, 그것은 여태 우리가 몇 번이고 봐온 금기의 작동 방식.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생각하게 되는 역설에 따라 구체적인 형체를 갖추었다. 이바라가 굳이 자신의 손을 잡은 건 동물원의 우리를 기어오르지 말라는 경고 문구를 보고도 그것을 뛰어넘는 것과 같다며…
이런 종류의 생각은 캐롤 본인이 스스로를 싫어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비관적으로 사는 사람의 인생은 이토록 피곤하고 비참하여 잠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실증이 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 곧장 현실이 들이닥쳤다. 캐롤에게는 오히려 나은 일이었을 수도 있다. 먼저 착수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녀 스스로를 더 싫어하는 대신 먼저 그것을 다뤄야 하게 되기 때문이다.
히무로 시라베: 어떤 경위로 통제력을 잃어버렸는지 말해줄 수 있나?
캐롤 브라이트: 토키와 씨가 저에게… 살인 게임의 반복에 대해 알려 주었어요.
이바라 쿠리스: 그리고 도망갔어! 그 약은 놈이… 캐롤을 몰아붙인 다음에 혼자 내뺐다니까?!
히무로 시라베: 비겁한 짓이군. 하지만 어째서 그래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탑에 남은 이들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기 위해서라기에는 이제 그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이들이 한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다.
캐롤은 무너졌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무너졌다. 홀로 남겨지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낫다.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캐롤이 시간을 들여 살인게임의 반복을 받아들이고 나면, 탑은 큰 고비를 넘기고 토키와를 제외한 이들이 하나로 규합된다.
애초에 토키와에게 캐롤의 심리적 불안이 어떠한 득으로 이어지리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언뜻 보이지 않는 행동의 동기를 알아내기 위해 히무로는 캐롤이 사라져서 어떤 작용이 벌어졌는지 생각했다.
가장 먼저 나나시를 필두로 탑에 있는 이들이 캐롤에게로 모였다.
그리고 제츠보가 캐롤을 진정시키기 위해 카이다의 감시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건들이 겹치는 것은 그저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히무로는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특정한 의도와 음모에 의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히무로는 제츠보에게 전화를 걸었다. 천천히 받는다면 아무 일도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제츠보가 곧바로 전화를 받는다면 그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통화가 즉시 연결되었다.
제츠보: 큰일났어. 카이다가 없어.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 쿠로하가 자신의 숙소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그것은 캐롤에게 있어 당황스럽고 또 받아들이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네에? 치나미가… 치나미가 없다뇨… 말도 안 돼요… 치나미가… 저랑 약속을 했단 말이에요. 외출 금지라고 말했는데. 저한테 한 마디도 없이 도망쳤을리가 없어요!
캐롤은 그럴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몰랐다. 카이다가 느닷없이 캐롤의 터치를 방해한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저 또 속았다는 느낌만을 받았다. 하기야 도망치지 않을리가 없었다. 결국 그녀가 갇혀있는 것은 그저 제츠보의 감시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캐롤과 나나시는 달랐다. 그들은 캐롤을 향한 카이다의 애착만큼은 카이다의 수많은 거짓. 남을 속이기 위한 술수가 아님을 알았다. 이성적으로 그러지 않을 만한 이유도 충분했다.
나나시: 캐롤 씨 말이 맞아. 카이다는 캐롤 씨만큼은 정말 소중히 여기고 있어. 캐롤 씨의 기대를 저버리면 외출 금지보다 더 불쾌한 처사가 있을 텐데. 또 제츠보에게 카이다가 붙잡히는 건 시간 문제인데 그럴리가 없어. 도망쳐봤자 해결되는 게 없다는 건 본인도 알 거야. 어딘가 이상해…
도망간다고 해서 카이다 본인에게 나아지는 일은 조금도 없었다. 카이다가 도망친다면 그녀의 육체적 자유를 빼앗고자 했던 히무로의 말만 옳은 것으로 판명된다. 또한 캐롤과 나나시의 입지는 좁아지다 못해 없어질 터. 과연 카이다가 자신의 언니에게 폐를 끼치면서까지. 정신조작 탄압파인 히무로의 손에 그녀를 넘기면서까지 줄행랑을 칠 것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카이다의 생각은 아무도 모르고, 그녀가 캐롤을 생각하는 마음은 분명 크지만 한 장소에 갇혀 있는 갑갑함이 다른 이들의 상상을 가볍게 뛰어넘을만치 컸을 수도 있었다. 스트레스에 극도로 민감한 동물이 있듯이 카이다도 도무지 한 방에 갇힌 채로는 싫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히무로 시라베: 확실한 것은 하나다. 토키와 아유키가 캐롤 브라이트의 폭주를 유도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제츠보가 카이다 쿠로하를 감시하지 못하는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분명 둘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다.
하기와라 우시오: 설마 카이다가 토키와를 매수한 거야? 자기 감시하는 동안 틈 내려고?
하기와라는 카이다의 극악무도한 짓에 자신의 이마를 때렸다. 아무리 그의 관점에서 가족이란 게 믿기 어렵고 자기 잇속만 챙기는 것들이라고 해도, 카이다를 그토록 위해주는 유일한 사람을 배신하는 것은 참으로 정없고 빌어먹을 짓임이 틀림 없었다.
캐롤 브라이트: 그럴리가 없어요!
하기와라 우시오: 하지만 카이다한테 탈출 의지가 없었다면, 카이다는 어디에 있는데? 토키와가 제츠보를 카이다한테서 걷어 내도 카이다가 나가지 않으면 그만이야. 그런데 없잖아? 골키퍼가 자리 비운 사이에 골 들어갔으니 골을 넣은 사람이 있다는 거지.
카이다의 무력을 막을 수 있는 자가 제츠보 뿐인 이상. 제츠보의 감시 없는 카이다는 자기가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반대로 말해 카이다가 하는 모든 일이 카이다 본인의 의지대로라는 것이다. 캐롤이 다급하게 다이얼로그를 들어 카이다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다이얼로그 반대편의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제발… 치나미. 전화 받아. 전화 받아. 제발…
하기와라 우시오: 토키와도 안 받아. 이거 아무리 봐도 둘 사이에 뭐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진짜 괘씸한 얌체 새끼가 다 있다. 그치?
카이다 쿠로하가 동의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 탈주가 토키와 아유키의 노림수임은 알 수 있다. 토키와 아유키를 찾아내면 카이다 쿠로하의 소재 여부 또한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나시: 아니. 설마. 설마…
나나시는 캐롤만큼이나 당혹스러웠다. 분명 이번만큼은 다르리라고 그토록 믿었는데. 또 실제로 믿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염세적인 이는 그렇게 속아 놓고서 또 속아넘어가냐는 말을 하겠지만, 카이다를 직접 본 사람은 알았다. 그녀가 얼마나 행복한 이들을 시기하고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지를.
"나는 고른 적 없어… 나는 이 꼴로 살고 싶은 줄 알아…? 이 씨발. 내 꼴을 봐. 나를 보라고! 내 혀에선 맛이 안 느껴져… 칼이나 총도 안 통해. 어지강한 밧줄은 몸무게를 못 견디고, 자는 동안 물방울 하나만 떨어져도 잠이 깨. 손톱을 자르려면 합금을 가져와야 하고… 빌어먹을 머리카락은 무슨 손가락처럼 느껴져. 이딴 게 사람 같아? 괴물이지! 별종이라고. 별종! 평생 아기도 못 낳을 거란 말이야…!"
유년기와 자유를 통째로 빼앗긴 그녀는 자신이 행복할 수 없기에 다른 이들을 불행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이런 그녀에게 캐롤은 정말 되찾을 수 있고 못 받은 만큼 보상받을 수도 있는 사랑. 그 자체이다. 그것과 이제 와서 더 멀어진단 말인가?
"흐윽… 흐윽…! 다 어딨어… 어딨냐고… 찾을 방법이 있다는데. 찾을 수 있는데 여기서 죽을 순 없어…! 이럴 순 없어… 흐으. 나한테 이런 일이 있을 순 없어…!"
분명 그토록 간절했던 그녀가. 정작 다시 만난 가족을 등한시한다니? 그저 카이다니까 어련히 그러지 않겠느냐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직도 카이다를 그토록 모르느냐고? 오히려 카이다를 이해할 수록 나나시는 카이다가 아무리 정신이 나갔더라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성립이 되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분명 기억 소거 절차에 의해서 그 모든 걸 잃으려는 순간조차 본인의 언니를…
나나시: 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나나시는 순간 의혹을 가졌고, 그 의혹이 사실일 경우 해결되는 의문에 납득했다. 그 뒤에는 그가 가진 의혹이 사실일 수 없음을 깨닫고서 큰 혼란을 느꼈다.
히무로 시라베: 이름 없는 남자. 짐작이 가는 사실이 있나?
나나시: …사실 신경이 쓰이는 게 하나 있어. 하지만 누군가가 이걸 실현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이건 카이다와 영안로에 들어가 보았던 나만이 알고 있는 일이야.
히무로 시라베: 이해했다. 거리낌없이 말해라.
나나시: 카이다 쿠로하는 특정한 단어를 순서대로 들을 경우 그 암시가 정신에 영향을 미쳐서…
"캐롤 씨가 살아날 경우 필연적으로 탑은 두 개의 파벌로 갈라서게 된다… 캐롤 씨는 되살아날 것이다… 나나시와 카이다는 밖으로 나올 수 있지만 마유즈미는 나올 수 없다. 여기까지는 이해했어. 그런데 캐롤 씨의 힘을 빼앗으라는 게 대체 무슨 뜻이지? 내가 그걸 어떻게 해? 그렇게 강대한 힘을 가진 사람을. 나한테 정신 조작 능력이 어디에 있어? 말이 안 되잖아… 내가 어떻게 히무로와 캐롤 씨를 동시에 견제할 수 있다는 거야?"
기억이 사람을 구성한다.
연속성을 가진 기억이야말로 인격 구성의 핵심이 된다. 토키와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떠올렸으나 그 기억은 점이었다. 그러나 토키와 아유키라는 기억은 십수년간 이어져 있었다. 토키와는 그렇기에 여전히 그 본인의 자아를 어느 정도 유지했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도 본인이 조율자라기보다, 조율자가 '되었다'고 느꼈다.
그리고 토키와는 이런 계획을 세웠다.
탑은 밀폐된 공간이고 히무로를 필두로 한 탑의 인원들은 분명 카이다와 토키와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으리라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그 생각에 이르면 그들은 토키와를 찾아 탑을 수색하리라.
그들은 토키와가 캐롤의 잘린 손가락 속 샤이닝을 흡수한 줄을 모른다. 자신이 탑 밖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토키와는 기억해냈는데, 그들 중 누구도 토키와의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무슨 색을 띄게 되었는지는 몰랐다. 분명 이바라의 소금물 스프레이 하나에 비명을 질러대는 그 나약한 놈.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자로 볼 터. 그러니 경계는 없고 추적은 산개한 채로 이루어지겠지. 그리고 그는 홀로 떨어진 인원들에게 다가가 터치를 사용하면 그만인 것이다.
만약 그들이 카이다의 습격을 두려워해서 뭉쳐 움직인다면? 뭉쳐있는 만큼 수색 범위가 좁을 테니 숨어있거나 도망다니면 그만이다. 그런 식으로 몇 시간을 보내면 분명 캐롤 씨나 누군가가 급한 마음에 인원을 쪼개자는 의견을 내리라. 그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 터치를 쓴다. 이보다 더 쉬울 수도 없었다.
제츠보는 그의 터치가 통하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니 조심해야겠으나, 그 제츠보는 카이다가 막아줄 테니 토키와에게 손가락 하나 댈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히무로? 히무로도 사람인 이상 터치가 통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분명 그랬다.
그러니 토키와는 멍하니 그의 명령만을 따르고 있는 카이다 옆에서. 자신이 얼마나 강대하고 또 그의 승리가 얼마나 명백한지를 곱씹었다.
토키와 아유키: 나는 조율자다.
히무로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바로 그 인물. 그게 나다. 나는 그 연구소 안에 있었다. 내가 누구냐고? 인류를 이끌 주인을 눈앞에 두고서도 알아보지 못하나? 그러나 너희들을 탓할 수는 없지. 나도 나 자신을 잊고 있었는데 너희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어? 그건 어부가 본 적 없는 물고기를 바다에 간 적 없는 이가 알아볼 수 없듯이 당연한 일이야.
미궁을 탐사한다고 생각해 보아라. 빛 한 점 없는 쿰쿰하고 먼지가 가득한 미궁 안을. 자신이 무엇을 찾는지도 모른 채.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이정표도 없이 헤맨다고 생각해 보아라. 그런데 그 안에는 괴물이 들어 있다. 내가 가져서는 안 되는 끔찍한 생각들. 내가 나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싶지 않은 감정들이 그 안에서 나를 노리고 있었다. 그 이름은 허영. 오만. 권위의식과 강박이다. 초고교급 리더가 되는 것은 수단이어야 했다. 탑의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한 수단. 하지만 어느새 그것은 목적이 되어갔다.
나는 그 미궁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내가 어떤 길을 걸은 끝에 미궁의 어느 곳에 도달했는지. 나는 서서히 잊어버렸다.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하룻밤 사이의 수면. 그 안에서 한 없이 불쾌하고 더운,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게 만드는 꿈을 꾼 뒤 나라는 사람은 변해버렸다.
그 꿈은 내가 미궁에서 살기로 하는 것으로 끝났다.
토키와 아유키: 아! 내가 특별한 줄을 모르고 살던 나날이여! 나에게 이토록 운명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것이 당연히 나에게 돌아오듯 광휘가 주어져 있는데 그 잠깐 사이를 기다리지 못해 참을성 없이 성을 냈군! 정말이지 경솔했어. 그러니 저주받을 모노로그. 저주받을 살인게임! 그들은 내 기억을 지우고 내가 누구인지를 잊게 만든 게 아니야. 나를 살해한 거야! 나 자신마저도 거울 속에서 나를 찾지 못하게 만든 거야! 나와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인 것이라고는 재능이 별볼일 없는 형해일 따름이었어. 나는 그들 중 누구보다 고귀하고 우월한데 그런 줄도 모른 채 죽어 있었어! 파묻히고 해체되고 가라앉았던 거야!
하지만 이제 그런 굴욕도 끝이 났다. 나에게 이제 무엇이 있지? 터치가 있다. 눈을 감고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이 신체 안에 얼마나 큰 힘이 갇혀 있는지 두렵기까지 해. 또 무엇이 있지? 너희 모두가 넘볼 수 없을 정도의 재능이 있다. 나는 조율자다. 로의 일원! 나는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그리고 나는 내가 하지 못해 안달이 났던 일을 오롯이 나의 힘만으로 행할 수 있게 되었어. 탑에 질서를 가져오고, 카텟 기관을 막을 수 있어! 통제. 그것은 나의 다른 이름이다. 조율. 그것이 나다. 나는 여덟 명의 반신 중 하나이고 그 반신 중의 주신이야! 나는 태양계의 중심이다. 그 명칭 자체에 나의 이름이 새겨져있지 않은가? 완연하게 타오르는, 열기를 주는 태양! 이런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보아라!
나는 충분하지 않아.
그 생각은 나를 괴롭혀 왔다. 정확히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 모르는 그릇이 텅 비어 있었다. 내가 그것을 든 채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다른 이들은 어디에선가 색색별로 다채롭고 향기로운 음료를 가져와 마시고 있었다.
나는 항상 궁금했다.
대체 그게 어떤 맛일까?
그것들이 어떻게 혀 위에서 노래하고, 목 안으로 미끄러지며, 배 안을 끓여댈까?
토키와 아유키: 이것이 이런 맛이었구나! 재능을 가진다는 것이 이토록 기쁜 일이었어! 이제 비로소 나는 말할 수 있다. 나는 충분해. 나는 완벽해! 순수하고 지독할 정도로 짙은 이 맛. 취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마침내 되살아났다. 그리고 내가 기꺼이 떠받쳐야 할 의무를 불평하지 않고 들어올려야지. 평화. 화합.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리고 분명 이 살인게임의 배후에 있을 카텟 기관에게서 이 탑을 지켜내리라!
그런 식으로 토키와의 가치관이 치환되었다. 이해와 선의를 통한 협력에서 힘의 차이로 인한 압제로. 평화적 해결에서 해결을 통한 평화로. 선량한 인격과 겸손이 그저 방향 없는 강대함과 오만으로 바뀌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학생회장 선거에 당선되었을 때. 미약한 몸이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던 그가?
토키와는 자신이 분명하고 타당한 과정을 통해 서서히 변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의 시점에서는 그렇다. 계기가 되는 사건도 분명하다. 그는 지하에 쌓인 크레딧을 발견한 뒤 후루미나미와 카나리를 대면하며. 우리 모두에게 서로가 필요하다며 카나리를 회유했다. 그러나 곧 그는 온몸에 휘발유를 뒤집어쓴 뒤 한 번 불이 붙고서 소화기 용액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토키와는 탑에서 선량함이란 곧 배신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학습했다.
캐롤 브라이트의 죽음이 그 가설에 큰 신빙성을 부여했다.
그런 일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토키와는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지 않을 뿐 다른 이들도 토키와를 비난하며 또 한심하게 여기리라고 확신했다. 그의 실책이었으니까. 그가 모든 일이 일어나게 두었으니까.
그 누구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지만, 분명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리라고 토키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함께 후루미나미를 감시하고 있는 야가미도. 마주칠 때마다 잠 좀 충분히 자라고 걱정해주는 이바라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칸나즈키도 전부. 영안로에 들어간 이들은 토키와가 없으니 일이 잘 풀린다며 휘파람을 불고… 역시 전부 토키와 때문이었고 토키와가 없으니 일이 잘 풀린다며, 진작 그렇게 해야 했다며 다른 황금 송아지한테 절을 올릴 게 분명했다.
토키와 아유키: 내가 모를 줄 알아…?
하지만 아무리 그가 소외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만 했다. 위험인물들을 통제하고, 생존에 위험이 되는 요소는 무엇이든 배제하며 동시에 살인게임의 흑막에 대항하는 일. 이루어야만 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설령 그것이 캐롤을 의도적으로 무너뜨리고 그녀의 여동생을 조종하는 일이라 해도. 이미 그를 배신해 일을 망쳐 놓은 칸나즈키와 살인자 야가미를 비열하게 살해하는 일이라고 해도.
토키와는 그날 캐리어의 지퍼 사이로 질질 흐르는 피에 캐리어의 바퀴가 미끄러지는 것을 느끼며. 칸나즈키의 잘린 머리를 든 뒤 계단을 몇 개나 올라 영안로 안에 던져넣으면서도.
그것이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리더니까.
다 책임져야 하니까.
그리고 이제 그는 여기까지 왔다. 다시 깨어남. 일깨워짐. 잠의 끝. 그리고 그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주어졌다. 분명 그랬다. 토키와는 그 사실이 더할 나위없이 만족스러웠다.
토키와 아유키: 이미 나는 승리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모든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 탑의 모든 것은 나의 손에 들어올 것이다. 이제 캐롤 씨에게서 조율자와 하나가 되어야 할 모든 빛을 회수한다면, 나는 비로소 완전한 힘을 낼 수 있을 거야. 영원한 평화가 곧 찾아온다. 그리고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어!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몇 분 전까지 자신이 잡고 있는 손가락을 놓아 버리고 싶어 안달을 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친 바 있었다.
토키와 아유키: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라고! 이건 내가 아니야! 내가 내 손으로 한 게 아니야! 나는 아니야!
아무래도 자신의 원래 모습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는 소위 평화적인 방식이 곧 옳은 방식이라는 관념을 오랜 시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습관이 된 것이다. 이미 생겨버린 습관을 없애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관건임을 알지라도 그는 가장 빠르고도 확실한, 피가 조금 묻어있는 길에 발을 딛는 데에 거부감을 먼저 느꼈다. 따라서 토키와는 터치를 쓰는 게 가장 확실하고 별탈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터치를 쓰지 않더라도 그의 몸에 새겨진 우월함과 리더의 자격만을 써 보기로 했다.
우선은 그의 궁극적인 목표. 이 탑에 평화를 가져오고 흑막에 맞서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굳이 터치를 쓸 필요는 없다. 터치를 쓰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닭 잡는 데에 소 잡는 칼까지 써야 할까? 도무지 구제불능일 정도로 사람의 말을 들어먹지 않는 자들에게만 터치를 쓰면 그만이 아닐까?
정말이지 터치까지 쓸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다. 머리카락 색에서부터 찬란히 그 태가 나는데 터치까지 쓴다니. 왜 그래야 하는데? 이제 나에게는 재능이 있다. 그러니 나의 말에는 이전과 다른 무게가 실려 있다. 드디어 그녀석들과 동등한 선에 섰어. 아니. 뛰어넘기까지 했다고!
열린 마음으로 다가간다면 분명 모두들 마음을 열게 분명해.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그러니 겸손하게… 겸손하게 행해 보자… 어쩌면 겸손이라는 건 위에 있는 자가 아래로 베풀 수 밖에 없는 것이니 그야말로 가장 오만한 행위일지도 몰라. 그도 알고 있지 않던가? 재능을 가진 자들이 동정하는 게 얼마나 기분 더러운 일인지를?
그렇게 생각하면 그의 상황에 조금 우스운 점도 있었다. 재능이 없을 때에는 재능을 그토록 원했는데, 정작 재능을 손에 넣으니 재능을 쓸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토키와 아유키: 이건 어딘가 시사하는 바가 있는데?
토키와는 팔짱을 끼며 씨익 웃었다.
토키와 아유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히무로는 조율자를 싫어하지 않던가? 숨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내가 조율자라는 걸 영원히 숨길 수도 없고, 언젠가는 말해야만 해… 그렇지만 히무로도 이성적 판단을 할 수는 있을 거 아니야? 설마 내가 조율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나를 박하게 대하지는 않겠지.
토키와 아유키: 죽기야 하겠어?
토키와의 생각대로 그들은 하나로 뭉쳐 움직였다. 하지만 그가 예상치 못한 바가 있었다. 그는 아무리 다른 이들이 애를 써봤자 몸을 숨긴 자신과 카이다를 찾아내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수색은 토키와의 생각보다 더 빠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가 간과한 사실 하나. 2층의 거주자 중 절반이 바로 그들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내 숙소에는 사람이 없다.
나나시: 내 숙소에도 없어.
제츠보: 내 숙소에도.
캐롤 브라이트: 제 쪽도 그래요.
히무로 시라베: 이제 전용실 차례다.
히무로, 제츠보, 나나시, 캐롤. 이 네 명은 각자의 숙소와 전용실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문을 열고서 그 안에 혹여 누가 숨어있는지를 확인했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그들이 함께 움직이고 있으며 아직 살아있는 이상. 2층의 수색의 절반은 별 고생을 들이지 않고도 끝나 버렸다.
흥. 상관 없어. 결국 저것들은 잠긴 문을 못 열잖아? 여덟 개를 수색해야 하든 네 개를 수색해야 하든 그 문을 열 수 없다면 모든 일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문을 따는 재주도 없는 너희가?
토키와는 야가미의 숙소에 카이다와 함께 숨은 채로. 문에 귀를 댄 채 모든 정황을 살피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토키와의 숙소 쪽에 웅성거리며 모이는 소리가 들렸다. 하기야 토키와가 카이다의 탈주와 연관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그를 먼저 찾을 수도 있다. 상정한 바였다.
히무로 시라베: 토키와 아유키. 안에 있나? 문을 열어라.
너희가 그럴 줄 알고 나는 야가미의 숙소에 숨었다. 그렇게 행동이 뻔해서 쓰나? 너희는 그 문을 못 열잖아. 아무것도 못 하지. 토키와는 속으로 그들을 깔보며 조소를 지었다. 제츠보가 몇 번 크게 문을 두드리기도 했지만 그 문을 부술 수는 없었다.
그러는 와중 카이다의 다이얼로그의 진동은 웅웅 울렸다. 약간 거슬리기도 했고 초인적인 직감을 가진 히무로에게 들킬 기미가 될 수 있기에. 토키와는 카이다의 다이얼로그를 무음으로 바꿔 두었다. 발신인이 누구인가 싶어 확인해 보니 캐롤 브라이트였다.
캐롤 브라이트: 전화 좀 받아. 제발…
이쯤 되면 카이다가 전화를 받을 리 없음을 알 텐데? 토키와는 캐롤이 그 정도의 분별력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그저 그녀를 딱하게 여겼다. 그녀는 그보다야 훨씬 나은 사람이었는데, 탑의 등불이자 그를 영적으로 인도해준 사람이기도 했는데 반복 하나에 무너졌다는 것. 그리고 공교롭게도 카이다에게 틈을 만들기 위해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유감이었다.
캐롤은 눈이 멀었다기보다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캐롤은 자신의 동생이 정말 기억 소거 절차에 당해 버린 게 아니라 그저 변덕 때문에. 충동 때문에 자기 방에서 뛰쳐 나왔기를 바랐다. 이기적이고 경솔한 짓이겠지만 혼 안 낼 테니 아무 일 없이 돌아와 준다면 당장 외출 금지 따위 취소할 텐데. 카이다가 뻔뻔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주기만 한다면…
하지만 이제 카이다는 멍하니 토키와의 명령만을 따르고 있었으며 다이얼로그의 응답은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히무로 시라베: 결국 이것 밖에는 방도가 없다.
이바라 쿠리스: 그럼. 각자 한 10분씩 하고 교대할까?
하기와라 우시오: 고작 10분? 그거로 연습이 돼?
히무로 시라베: 된다. 너희가 원치 않는다고 한들 이 과정을 오래 연습할 수밖에 없다. 도중 토키와 아유키에게 살의라도 느끼게 된다면 언제든지 말해라. 살해를 존중한다는 규칙을 이용하게 될 수도 있다.
하기와라 우시오: 썅. 모노로그가 판정을 제대로 안 해 주면 그대로 끝장인데 그게 어떻게 돼!
히무로 시라베: 확고한 살의라면 모노로그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토키와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서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추측할 수가 없었다. 10분씩 하고 교대를 해? 뭘 하다가? 하다가 문을 부순다니?
그리고 야가미의 숙소 바로 옆. 토키와의 숙소를 여는 열쇠 구멍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토키와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잠긴 문을 따려 하는 거야!
그들 중 누구도 어떻게 하는지는 몰랐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시도해보려는 것이다. 어차피 카이다를 찾지 못하고 토키와가 잠긴 문을 딸 수 있는 이상. 탑에 안전지대는 없었다. 그러니 그들은 카이다와 토키와를 찾아낼 때까지 쉬지 않기로 한 것이다. 빈틈은 없다. 그것은 차라리 강박적일 정도로 안전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에도 맹점이 있었다. 그들은 피킹이 쉬운 줄 알았다. 시간을 들여 연습한다면 언젠가는 열리리라는 생각. 안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정말 피킹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것은 기계적인 일이 아니라 감각과 숙달이 필요한 일이었다. 게다가 한 사람이 오래 맡는 것도 아니라고? 연습을 하더라도 자신의 차례에 오면 까먹어 버리겠지.
그런 간단한 이치도 모른다니! 바보들 아니야? 토키와는 그들의 재능과 지적 능력에 실망했다. 저런 판단을 내리는 히무로가 토키와보다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니.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재능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유능하다며 고평가를 받은 인물이 그렇게 많다! 다시 울분을 느끼던 와중 토키와는 마음을 다시금 다잡았다. 화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다 지난 일이니 너그럽게 용서해줄 수 있고 이제 그에게 재능이 있는 이상 별 상관이 없는 일이기도 했다. 오히려 그는 누구보다 찬란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 쉽게 그들의 환심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런데 너는 왜 문을 딸 줄도 모르냐? 신통방통 만물박사셔서 당연히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특수부대라며?
히무로 시라베: 기물파손 없이 잠긴 문만 여는 법은 배우지 않았다. 문고리나 문을 부수는 법을 배웠지.
하기와라 우시오: 니가 지금 그딴 말 한 거 보니까 기물파손 금지 규칙이 왜 생겼는지 알 것 같다. 그거 없었으며 너 문 뿌수고 다녔을 거지?
히무로 시라베: 필요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제츠보: 조용히 좀 해. 하기와라. 방해되잖아!
아무래도 첫 타자는 히무로인 모양이군. 하지만 히무로의 말마따나 그는 문을 딸 수 없었다. 적어도 그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히무로가 그보다 못하다는 말이 되었다. 네가 문을 잘 부수면 뭐해? 문을 조심스럽게 열 수는 없잖아.
토키와는 그 사실에 쾌재를 불렀다. 그가 숙달되는 데에는 최소 두 차례 정도가 돌아야 할 터였다. 토키와는 문에서 귀를 떼고 느긋하게 그들이 제 풀에 지쳐버리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꼭 타인의 노력을 폄하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했으면 더 잘 했으려니 뒤에서 수군거리는 법이다. 그들이 탑을 지키고자 하는 토키와의 노력을 등한시한 것처럼 피킹의 어려움 또한 과소평가하는 게 분명했다.
토키와는 불안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을 편히 먹을 모든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느긋했다.
그러다가 문득 히무로가 정말 성공해 버리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뇌리에 스쳤다.
…성공해봤자야. 그의 차례가 오기 전에 카이다를 요시처럼 타고 2층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고, 꼭 다음 문이 야가미의 숙소리라는 보장도 없고. 카이다만 따로 내보내서 제츠보와 히무로의 이목을 끌 수도 있고…
그러니까 정말 히무로가 10분만에 피킹의 이치를 깨달아버리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있다.
토키와는 눈을 번뜩 뜬 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에 조심스럽게 귀를 가져다 대었다. 철사가 문고리 안을 후비는, 금속질의 철컥거리는 소리가 끝없이 울렸다. 하지만 그 음색은 왜인지 히무로가 문을 어떻게 따야할지 점점 익혀가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야. 분명 익혀가고 있는 거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며 들으니 그렇게 들리게 되었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토키와는 큰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소리치고 싶었다. 그만하고 다음 사람한테 넘기라고 말하고 싶어서 눈이 부릅떠졌다. 집어치우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가 엄청나게 연습한 끝에 겨우 문을 따는 법을 익혔는데 10분만에 성공할 생각 말라고. 어디서 날로 먹으려 하냐고 외치고 싶었다.
피킹은.
피킹은 내 거야. 내가 직접 익혔어. 그나마 할 줄 알던 후루미나미도 죽었으니 이제 아무도 그걸 나만큼 잘하지는 못해. 나만 할 줄 아는 거야. 그런데 10분? 10분이라고? 10분마다 돌아가면서 문을 열어보겠다고? 장난해?
너희가 그렇게 잘났어?
토키와는 철사가 철커덕, 철컥, 끼릭거리는 소리를 낼 때마다 점점 더 초조해졌다. 진짜 10분만에 성공한다고? 거짓말하지 마. 이것까지 나한테서 가져가려고?! 양심도 없어?
하기와라 우시오: 이런 걸 어떻게 철사 하나로 딸깍딸깍 열 수가 있지? 요령이라도 있나…
이바라 쿠리스: 으음. 연습을 엄청 해야 겨우 느낌이 올 것 같은 느낌…?
제츠보: 그래도 이 편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야.
나나시: 히무로. 혹시 손전등 필요해? 가져올까?
히무로 시라베: 필요 없다. 비추어도 열쇠구멍 안쪽의 자세한 구조는 보이지 않으니까.
그들은 심지어 혼자서만 임하지도 않았다. 협력해가며 피킹을 가져가려 하고 있었다. 기어이. 기어이 어떻게든 해 보려고! 적당히 안 해?! 부끄러움이 있다면 거기서 집어치워. 관둬. 관두라니까!
토키와는 그들이 문을 딸 수 있게 되는 것이 문이 열리는 것보다도 더 두렵고 싫었다. 그들이 피킹을 배울 바에야 피킹을 연습할 문이 사라지는 편이 나았다.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토키와가 그들의 시도에 얼마나 큰 괘씸함과 분노를 느끼는지는 누구도 감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일 그들이 토키와가 얼마나 자신이 침해받고 있다고 여기는지 알게 되었다면 고작 그런 일 때문에 그렇게까지 반응하냐며 아연실색하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토키와에게 있어서 피킹이란 그가 개화해낸 그만의 특기였다. 가공할 초능력이나 완력이나 지능은 없으나 연습과 끈기만으로 숨어있는 위험요소를 색출해낼 수 있게 된. 고유한 능력! 후루미나미도 없으니 그를 넘볼 자도 없었다! 시라유키 히메리를 습격하기 위해 마유즈미의 숙소를 열며 그는 느꼈지 않은가? 아무리 그들이 자랑질을 해 봤자 새벽에 숨어들어 망치로 머리를 때리면 누구든 죽는단 말이다! 그 점에서 그는 우위에 있었는데! 그건 그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그런데! 어디서 10분만에 그걸 넘보려고 해!
열쇠방을 운영하는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그 특기는 토키와에게 있어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자존심의 영역이었다. 토키와는 누군가가 그 안에 발을 디디고 자신의 고유성을 또 앗아가려 들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가진걸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이것까지 넘봐. 욕심도 많긴!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도 넘어서려고? 아. 안 돼지. 안 돼지. 그렇게는 못 해.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도 정도가 있단 말이야. 내가 잘못 생각했어. 이렇게 예의없고 나를 존중하지도 않는 사람들한테는 터치가 필요해. 나를 싫어하고 무시하는 데에도 정도가 있지. 뭐? 다른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는 너희가 이제는 문까지 따겠단 말이야? 남의 것 좀 그만 넘보라고! 아직도 만족을 못 해?! 다 가졌으면서! 나한테 없던 걸 다 가졌으면서! 아직도!
특히 히무로가 너무해.
재능을 몇 개씩 가졌으면서… 중간에 총 빼들고서 미친 짓까지 했으면서 지금 남들 중심에 서 있는 네가. 네가 제일 너무해. 재능 탓이 아니라고 말해 보시지. 내가 탑에 해로운 사람 두 명 죽였다고 후루미나미랑 동급이 되었는데 너는 자기 힘을 제멋대로 휘둘러놓고서 아무런 결과도 마주하지 않았어!
이런데도 재능 때문이 아니야? 이래도 재능이 모든 걸 결정하지 않는다고? 위선자들! 이 위선자들아! 그런 너희가 나한테서 피킹까지 빼앗아가게 두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는 못 해!
토키와는 문에서 자신의 귀를 뗴어냈다. 어찌나 가까이 귀를 대고 있었는지 문과 귀 사이에 만들어져 있던 진공이 해소되어 뽁 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카이다의 손을 잡고서 그녀를 야가미의 숙소 화장실로 이끌었다. 칸나즈키의 몸이 있던 바로 그곳. 그녀에게 내릴 지시가 문 너머의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토키와는 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닫아서 조금의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게끔 했다.
토키와 아유키: 지금부터 너는 야가미의 숙소 문을 열고 윗층으로 도망쳐. 막히면 다시 아래로 내려가. 휴게실의 카지노를 통해서 지상으로 나가든 뭐든 해서 계속 도망치란 말이야. 그리고 제츠보가 너를 붙잡으면, 너도 제츠보한테 몸을 던져서 더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 붙들어두라고. 알겠어? 이해했지? 말해 봐. 이해했다고.
카이다 쿠로하: 이해했다고.
토키와 아유키: 믿음직스럽지가 않네. 정말… 가능한 한 빨리 달려!
토키와가 카이다의 등을 밀어서 야가미의 숙소 문 앞까지 데려다 주자, 카이다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무서운 속도로 뛰어 올라갔다. 제츠보는 자신의 바로 옆을 지나가는 카이다를 보며 소리쳤다.
제츠보: 저기! 저기 있다! 카이다를 찾았어!
히무로 시라베: 거기 서라. 이 흉물아!
제츠보는 히무로와 함께 카이다의 뒤를 쫓았다.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이들이 뒤늦게 반응했지만, 이미 세 사람은 계단을 올려다보아도 볼 수 없을만치 멀어져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 치나미! 이리로 와! 이리로! 나한테…! 어디로 가는 거야! 그러면 안 돼…!
하기와라 우시오: 썅. 왜 야가미 방에 숨어있었던 거야. 저거는? 도와주러 가자!
이바라 쿠리스: 아니야. 가면 안 돼! 우리가 갔다간 오히려 인질로 붙잡힐 수도 있어! 우리는 일단 튀는 게 도와주는 거야. 진짜로!
나나시: 이바라 말이 맞아. 이러고 있다가 우리가 인질로 붙잡힐 수도 있어. 일단 지금은 누구라도 좋으니까 숙소에 숨자! 카이다가 오면…
캐롤 브라이트: …여러분들은 숨으세요. 저는 치나미를 봐야겠어요… 치나미한테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걸. 직접 확인해야만 해요…
5층에 다다른 듯한 소리가 들렸을 때. 토키와는 이미 열려있는 문에서 조심스럽게 나오려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위풍당당하게 걸었다. 이제 거리낄 것이 하나 없었다. 누구도 토키와를 막을 수 없었다.
토키와 아유키: 안 그래도 돼요. 카이다한테는 이제 문제가 없으니까.
토키와는 캐롤이 카이다를 잘못 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카이다는. 문제였다. 그러니 카이다에게 문제가 없는지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카이다가 어떻게 사라질지를 걱정하는 것이 옳았다. 암세포가 암에 걸려서 사람을 죽일 수 없게 된다면, 좋은 소식이 아닌가? 어떤 사람이 암세포가 암에 걸리는 일을 걱정하지? 캐롤 브라이트가 그런 사람이었다.
카이다가 튀어나온 문 안에서 묘한 미성이 들려오자 네 명의 시선은 서서히 나선 계단에서부터 금발의 남성에게로 쏠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간 토키와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저 탑에서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토키와와 똑같은 차림을 하고 있기에 설마 그가 토키와인가? 하는 반쪽의 믿음과 의심을 동시에 느낀 것이다.
음. 좋은 등장이다. 그가 카이다에게 어떠한 일을 행했음을 암시함과 동시에 카이다 뒤에 암약하는 사람이 자신임을 알 수 있게 되는 등장. 토키와는 다른 모든 이들의 주목이 그 한 몸에게 쏠리는 것을 느끼며 마치 잘생긴 싱어송라이터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저스틴 비버나 요네즈 켄시처럼.
토키와 아유키: 안녕 모두들. 나야. 토키와 아유키.
토키와는 손을 흔들어 다른 이들에게 인사했다.
토키와 아유키: 그… 내가 좀 달라졌지? 이건 캐롤 씨의 샤이닝을 내가 흡수해서 벌어진 일이야. 알고 보니까 내가 조율자라는 사람이더라고. 그 히무로가 종종 말하던 사람 있잖아. 그게 나였어. 기억이 아직 완전하지는 않은데 그것 하나만큼은 기억이 나더라.
하기와라 우시오: 토키와…? 아니 씹. 간드러진 목소리 뭐야.
캐롤 브라이트: 뭐라고요…?
캐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그녀도 모르게 몇 걸음을 물러나 나나시 뒤에 숨기도 했다(그녀의 키가 더 커서 숨는다는 표현이 정확하지는 않다). 토키와는 그것이 무리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조율자는 정신조작 보유자들의 샤이닝을 한 몸에 모은 사람. 그러니 그가 의도하는 만큼 탑을 평화로 이끌기 위해서는 캐롤의 샤이닝 또한 토키와에게로 흡수되어야만 했다. 보다 많은 사람의 평안을 위해서. 또 흑막에게 대적하기 위한 당위성이었으나 당사자는 샤이닝을 빼앗기고 싶지 않을 터다. 그런 숭고한 결정은 선뜻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지.
나나시: 조율자라고…? 네가?
네가라니? 토키와는 나나시의 말이 유독 거슬렸다. 네가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마치 그가 조율자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듯한 그 말뽄새는 어떻게 된 거지? 토키와는 분명 나나시가 그런 의도로 말했으리라 짐작했다. 그렇게 들렸다. 언제나 공격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인다. '이건 나를 향한 사적인 감정이 담긴 공격이군!'
하지만 토키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되새기며 자비를 가지기로 했다. 그는 결국 조율자였다. 나나시가 아무리 과거의 토키와를 떠올리며 그를 무시할지라도(사실 그런 의도도 아니었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시기할지라도 그건 나나시의 보는 눈이 모자라다는 반증밖에 되지 않는다. 토키와는 나나시의 공격을 여유롭게 받아넘기고 말을 이었다.
토키와 아유키: 아무튼 간에 중요한 건. 사실 나한테도 이제 재능이 있어. 정확히 내 재능인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 몸에 있지. 이제 나는 대단해졌어.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아마 너희들 모두 알고 있을 거야. 이제 너희들 모두 내 말을 들어줄 만하게 되었다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너희들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냐면…
하기와라 우시오: 뭐?! 네가 사실 조율자라고?! 정신조작을 여러 개 가지고 있는 조율자?! 머리도 금색이네?!
토키와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화들짝 놀란 하기와라를 보고서 또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사람이 말을 하는데 굳이 지금 그 당연한 사실을 큰 소리로 외쳐야만 했을까? 토키와는 굳이 하기와라의 헛소리에 대응해주지 않기로 하고 자신의 말을 이었다.
토키와 아유키: 이제 탑에는 평화가 오리라는 거야. 카이다는 내가 무력화시켜서 명령에 따르게끔 하고 있고, 카텟 기관의 사람들은 내가 직접 심문할 수도 있어. 바로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거야. 보다시피 카이다가 지금 나의 명령에 따르고 있기까지 해. 대단하지 않아? 내가 또 탑의 골칫거리를…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 치나미에게 무슨 짓을 했어요?! 조종한다니. 어떻게!
토키와는 캐롤의 떨어진 분별력에 다시금 안타까워졌다. 그녀만큼 강력한 정신조작을 가진 사람은 탑에 없었는데. 왜 이제 와서 그런 방식은 떠올릴 수가 없다는 듯이 모르는 체일까?
토키와 아유키: 당연히 터치를 썼죠. 카이다도 무적은 아니니까…
나나시: 터치를…?
토키와 아유키: 그래. 말했잖아? 내가 조율자라고. 왜인지는 몰라도 카이다가 숨기고 있던 캐롤 씨의 잘린 중지 속에는… 조율자의 기억이 들어있더군. 나의 기억이. 쪼개져있던 나의 모습이 말이야.
"제 이름은 제인 캐롤 브라이트. 조율자의 파편이에요."
나나시는 자신이 떠올렸던 그 기억에 대해 생각했다. 설마 캐롤 씨는 조율자의 파편인 채로 돌아왔다는 건가…?
캐롤 브라이트: 저. 저는 그런 사람 몰라요! 그런 사람 저랑은 관련 없어요!
토키와 아유키: 아뇨. 제가 조율자고 당신은 제 남은 조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당신의 손가락에 닿았을 때 제가 이렇게 된 것이야말로 증거죠.
하기와라 우시오: …그거 정신 나갔네. 그래서. 너는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데?
토키와 아유키: 파편의 몸에 담겨 있던 것이 주인에게 돌아왔으니. 이렇게 정착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원래 내 거였던 게 나에게 왔을 뿐이야. 그리고 이제 모든 오버룩. 딕테이트. 터치는 응당 한 몸에 모여야만 해. 그래야만 나는 조율자로서 완전해질 테니까.
하기와라는 탑의 윗층으로 향하는 나선 계단을 한 번 힐끔거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럼 지금 네가 캐롤한테 닿으면. 캐롤의 터치도 빼앗을 수 있다 그거야?
토키와 아유키: 당연하지. 이제 나에게는 샤이닝을 빼앗을 수 있는 기초가 있어. 그러지 않는다면 나는 접촉 없이는 너희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도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야 해. 너희들도 그런 건 원하지 않잖아? 모든 것을 통제하며 너희들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그러지 못하는 사람보다 낫지?
나나시: 캐롤 씨. 도망쳐요.
캐롤은 나나시의 말을 듣는 대신 몸을 벌벌 떨며 아주 조금씩 앞으로 발을 디뎠다.
캐롤 브라이트: …그럴 수는 없어요. 나나시 씨. 지금 토키와 씨한테 조금이나마 맞설 수 있는 건 저 뿐이니까…
이바라 쿠리스: 쟤 말 못 들었어? 네가 붙잡히면 다 끝장이야. 캐롤! 어서 네 방 열고 들어가! 빨리!
나나시: 그게 다가 아니야. 토키와는 잠긴 문을 열 수 있으니까 문을 막기도 해야 해…
기억해 주네. 토키와는 조금 뿌듯함을 느끼며 나나시를 다시 보았다. 역시 진심은 전해지는 법. 그가 했던 노력이 잊히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그는 나나시에게 어느 정도 감사해야 할지도 몰랐다. 캐롤을 되살려준 데다가 그녀가 적절한 순간 무너질 수 있게끔 옆에서 관리하기까지 했으니 사실상 그의 부관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음음. 게다가 나를 적대하는 히무로와 반목한 적도 있잖아? 나랑 나나시는 처음부터 같은 편이었을지도 몰라.
나나시를 필두로 한 네 명은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며 토키와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하지만 토키와는 그 걸음만큼을 착실하게 따라왔다. 거리를 벌리자니 이미 그들은 너무 가까워졌다. 나나시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숙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숙소보다 먼 방은 순서대로 제츠보의 숙소, 히무로의 전용실, 마유즈미의 전용실, 미도리카와의 전용실, 야가미의 전용실… 로. 이미 궁지에 몰린 그들은 유사시 시간이라도 벌 수 있는 방공호를 포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토키와 아유키: 경고하건데 나에게서 더 멀어지려 했다가는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너희가 전부 무사할 수 있을거라 생각해? 그러니 도망칠 생각 하지 마세요. 캐롤 씨. 당신이 도망치면 저는 남은 사람들한테 전부 터치를 쓸 테니까요. 또 카이다의 터치도 풀어주지 않을 거에요.
이바라는 토키와의 말을 듣고서 한층 더 그에게서 정나미가 떨어져 버렸다. 캐롤에게 헛수작을 부리는 것보다 더 몹쓸 짓이 있을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바라 쿠리스: 야…! 이 나쁜 놈아! 사람 가족 가지고 장난을 해? 너 진짜…!
캐롤 브라이트: 푸… 풀어 줘요. 토키와 씨… 내 동생… 내 동생 돌려달라고요…
토키와는 그러고 싶지 않았기에 캐롤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토키와 아유키: 제가 왜요. 캐롤 씨? 카이다를 왜 풀어줘야 하죠? 카이다같은 인간을 신경쓰느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손해를 봐야 하는데요? 정말 카이다가 갱생될거라고 믿는 거라면 캐롤 씨는 카이다에 대해 잘 모르는 거에요.
캐롤 브라이트: 당신이야말로 몰라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면 치나미는. 누구보다 착한 아이였을 텐데!
토키와 아유키: 그럴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사람 깨무는 짐승이잖아요. 캐롤 씨는 진작 저처럼 해야만 했어요. 카이다의 진면모를 꿰뚫어 보고서 더는 사람을 지키지 못하게끔 막아야 했다고요. 그런데 그 일을 제가 대신 해 드렸으니… 당신이 진작 해야 했던 다른 일 또한 제가 하죠. 탑에 평화를 가져오는 일을.
캐롤 브라이트: 그런 건 있을 수 없어요. 그런 건…!
나나시는 토키와가 자신의 말에 도취된 사이 등 뒤로 손을 돌려 하기와라에게 한 열쇠를 건넸다. 하기와라는 그것이 그들 등 뒤에 있는 나나시의 숙소 문 열쇠임을 알았다. 하지만 대체 왜 그걸 하기와라 본인한테…
토키와 아유키: 순순히 힘을 넘겨요. 그럼 당신 한 명으로 끝날 테니까요.
나나시: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는 거야. 토키와.
토키와 아유키: 아니. 할 수 있어. 나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어.
이바라 쿠리스: 나… 이해가 안 돼. 토키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토키와 아유키: 왜냐니. 그래야만 너희들을 전부 통제할 수 있게 될 테니까. 내가 완전해진 순간 나는 너희들에게서 살의라는 생각 자체를 지워버릴 수도 있어. 그것 하나만으로 사람은 죽지 않게 돼. 서로 안심하고 싶지 않아?
이바라 쿠리스: 안심은 하고 싶지. 그런데 너한테 그런 힘을 맡긴 채로는 안심이 안 돼. 네가 나쁜 마음을 먹지 않을 줄 어떻게 알아.
토키와 아유키: 나는 그런 세속적인 감정을 초월한 사람이야. 이바라.
하기와라 우시오: 개지랄마. 토키와. 너 지금 존나 신난 게 눈에 다 보이거든?
토키와 아유키: …단순한 시각으로 보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나는 그저 이 탑이 마주할 멋진 신세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기쁠 뿐이야. 우리 모두가 적이 아닌 세상이라고. 왜 그걸 거부하는 거야? 너희들이 나처럼 할 수 있기라도 해? 아니잖아.
토키와 아유키: 나는 지금 너희가 왜 나를 거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왜 열린 마음과 눈으로 나를 보지 못하는 거니? 이 탑에 실천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야. 내가 손을 쓰자마자 너희들이 전전긍긍하던 카이다는 순종적으로 내 말만 따르게 되었는데도. 왜 나를 인정하지 않는 건데?
이바라는 그의 뻔뻔한 말투를 듣고서 그녀의 내부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미움을 느꼈다. 이토록 염치없이 태연하다는 것은 카이다에게 비견되는 정도의 후안무치함이었다. 정말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 믿고 있을리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조차 믿고 있지 않은 말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하려 드는 토키와의 모습은 그녀에게 있어서 그저 이해할 수 없는 불쾌함. 그 자체였다.
그러다 이바라는 토키와에 대한 이해의 큰 발자국을 내딛었고, 그렇게 이해한 바를 믿을 수 없어 고개를 내저었다.
이바라 쿠리스: …정말 몰라서 묻는 거구나. 너. 지금…?
토키와는 모른다. 잊어버렸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정말 모르게 되어버렸다. 그것이 조율자라는 사람이 되며 치른 대가라면 토키와는 자신의 아주 큰 부분을 도려내진 것이다. 그는 순수했던 그의 제1목표를 영영 잃었다.
토키와 아유키: 이미 흐려진 판단이 어디서부터 흐려졌는지를 안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지만, 그래도 너희들을 이해해보려고.
토키와는 자신의 말을 듣고 서서히 이바라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여태껏 그에게 소리치고 미워하고 힐난하던 이바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표정. 그러나 여태껏 그녀가 보내왔던 표정 중에서는 가장 종잡을 수 없고 또 불쾌하게 느껴지는 그것은, 남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다.
가엾음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는 생각을 가진 이에게 있어 동정은 모욕과 같았다.
이바라 쿠리스: 재능의 여부가 문제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토키와. 어떻게 아직도 몰라? 네가 사람을 그렇게 쉽게 여기는 게 나쁜 거야. 다른 사람의 소중한 걸 부수고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것이야말로… 네가 나쁜 이유란 말이야. 그러니까 네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너를 따를 일은 없어.
예전의 토키와라면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벼랑 끝에 떨어지기 이전의 토키와라면 당연히 알았을 것을 그 막대한 재능을 얻은 그는 잊어버렸다. 토키와는 이바라의 어투가 정말로 거슬려서 당장 그 얼굴을 바꿔 놓고 싶었다. 그가 얼마나 찬란한 광휘를 원해왔는지는 모르면서, 그리고 그녀 또한 재능 없는 토키와를 업신여겼을 거면서 마치 이전의 그가 더 가치있었던 듯이. 지금의 그가 혐오스러운 흉물이라는 것처럼 딱하게 여기다니.
하지만 토키와는 이바라의 말에 크게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 주변을 엥엥거리며 날아드는 흡혈 곤충에게 대고 네가 나를 상처입히고 있다며 호소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아. 이런 생각이 팽배할 정도로 탑에 있는 이들이 의심암귀에 빠져있구나 싶을 뿐이었다. 어두운 숲의 동물들이 서로가 포식자일지 피식자일지 알지 못해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는 형국이 아닌가. 토키와는 자신이 그 어두운 숲에 비쳐올 여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토키와는 모든 긍정적인 변화의 중심이 자신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어두운 숲 속에 비추는 빛에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일이 두려워 도망치는 것이다.
토키와 아유키: …그런 사고방식은 원시적이며 또 병적이야. 이바라. 너희들이 빠져 있는 강박증을 내가 고쳐 줄게. 이제는 너희들 모두 괜찮아.
나나시: 하기와라. 어서 열어. 여기는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나나시는 토키와를 향해 조금씩 발걸음을 내딛었다. 하기와라는 나나시가 자신에게 그의 숙소 열쇠를 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놈은 나에게 맡기고 어서 가! 따위의 삼류 클리셰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나나시에게 욕지기를 내며 소리쳤다.
하기와라 우시오: 야. 지랄 마. 어디서 멋진 척이야? 쟤한테 닿으면 끝장이라며!
나나시: 그러니까 가라는 거잖아. 누군가는 해야 해. 잠깐이라도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나밖에 없어… 터치를 악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강력한 터치가 넘어가서는 안 돼. 그러니까 빨리 가!
캐롤 브라이트: 아. 안 돼요! 나나시 씨! 당신까지 가면 나는…
토키와 아유키: 어어? 어딜 가려고? 도망갈 생각이야?
하기와라가 보기에 나나시는 바보짓을 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시간을 벌고 그냥 토키와의 하수인이 되는 일 아닌가? 얘는 자기가 토키와 손에 넘어갔을 때 캐롤은 어쩌라고 이런 짓을 감행하지? 자기 동생도 토키와한테 조종당하고 자기 남친도 조종당하고. 두 명을 인질로 저당잡힌다면 속이 그냥 뻥 터져서 죽을만한 상황이 될 텐데 뭐? 누군가는 해야 해?
하기와라 우시오: 진짜 지랄하지 말고 대갈통 좀 굴려보자. 제츠에봉! 도와줘! 히무로! 여기 조율자 있다! 아 씨발! 얘네 카이다 잡으려고 어디까지 간 거야?!
토키와 아유키: 끝없이 도망치라고 일러 뒀으니까 지금쯤 장미꽃밭에서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지. 두 사람의 도움은 바라지 마. 오지 않을 테니까.
나나시의 머리카락이 금색으로 물들었다. 토키와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금색이 저렇게 쉽게 발현되는 것이었다니. 토키와 본인은 아파서 바닥에 데굴데굴 굴러가며 받아들인 걸 자기 것처럼 싹틔우다니. 조금 불공평할 정도였다.
나나시: 너는 캐롤 씨에게서 빛을 훔쳤어. 토키와. 그리고 이제는 훔친 빛으로 그녀의 빛까지 앗아가려 하고 있어. 그렇게는 안 놔둬.
토키와 아유키: 훔치다니. 하아… 나나시… 아직도 이해를 못 한 모양인데. 이건 처음부터 조율자의 빛. 내 빛이었어. 캐롤 씨가 스스로의 중지를 왜 잘랐는지. 왜 중지에 하필 조율자의 기억을 담아 두었는지 잘 생각해 봐. 캐롤 씨는 내가 빛의 주인임을 알고 있었어. 그렇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감당할 수 없는 짐을 겸허하게 내려놓았고. 이제 비로소 그녀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야! 나라는 자가 이 탑에 내려옴에 의해서!
나나시: 아니. 캐롤 씨는 그 손가락이 결코 너에게 닿아서는 안 된다고 했어. 그래서 카이다에게 맡겨두기까지 한 거야. 너에게 닿았을 때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캐롤 씨는 너를 막으려 했어. 왜곡하지 마.
어? 정말 그런가? 토키와는 순간 나나시의 말에 자신의 믿음 체계가 뒤흔들리는 것을 느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의 말은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토키와 아유키: …과연 그럴까. 손가락을 남겨두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깨우침을 방조한 셈인데? 캐롤 씨가 정말 나를 막고자 했다면 진작 손가락을 태워버렸겠지. 그렇지 않아요. 캐롤 씨? 자세히 말해 보세요.
캐롤 브라이트: 모… 몰라요. 기억 안 나요. 조율자라니. 저는 그런 사람 파편이 아니에요…
나나시는 캐롤이 히무로의 폭주를 대비하여 손가락을 남겨 두었다고 추측했다. 히무로와 정신조작 보유자들 간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마침내 캐롤과 나나시가 모두 제압당했을 경우. 카이다로 하여금 토키와에게 손가락을 건네게 만들어 그를 견제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들의 눈앞에 조율자가 있다는 사실보다 급하지는 않았다.
토키와 아유키: 내가 보기에는 머리카락을 받아서 너만의 샤이닝을 개화한 너야말로. 그녀의 빛을 도둑질한 사람이야. 나나시. 그리고 너의 빛 또한 내 것이 되겠지.
그렇게 강대한 샤이닝 능력자의 일부를 흡수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만으로. 토키와에게는 나나시가 매우 과시욕적이며 굉장한 상승 욕구를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 생각해보면 그는 언제나 오만했다. 캐롤 같은 사람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품는다는 것은 그녀를 자신의 동격에 놓는 일이다. 감히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캐롤은 사람이기보다 범접할 수 없는 힘의 그릇이었다. 분명 그녀에게는 존중받아 마땅한 인격이 있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접어둬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런 존재를 사적 소유하려 들다니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캐롤 브라이트: 안 돼… 그렇게는 못 둬요. 또 내 사람들한테 손이라도 대면 절대 가만히 안 둘 거에요.
캐롤은 나나시의 양팔을 등 뒤에서 끌어안고서 토키와를 향해 적의를 내보였다. 그녀는 나나시의 만류에도 들은 체조차 하지 않았다. 보석이 금고를 감싸는 형국이다.
나나시: 캐… 캐롤 씨. 놔요! 토키와한테 닿으면 끝장이래도…!
캐롤 브라이트: 제가 놓으면. 또 누가 저 대신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라고요? 안 돼요. 그렇게는 못 해요.
그들의 입장에서야 진지하고 다급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토키와가 보자니 그만한 촌극이 없었다. 캐롤처럼 강력한 정신조작 능력을 가진 사람이 사사로운 관계 한둘에 휘둘리는 꼴이야말로. 그녀가 자신의 힘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뒷받침했다. 악감정이라고는 없다. 그저 그녀는 적임자가 아니었을 뿐이다. 역시 오직 그만이 적합했다. 그 무거운 짐을 기꺼이 들어올릴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당하고만 있는 건 이제 질렸어요. 당신. 내 동생 내놔요… 당신이 뭐길래 치나미를 그런 식으로 대하는데요? 내 동생 돌려내라고요!
토키와는 귀하고도 또 귀한 캐롤의 원혐을 사는 데에 성공했다. 나나시가 그녀에게 수갑을 채운 뒤에 카이다를 마비시키려 갔을 때에도 그만큼 독살스럽지는 않았다. 일이 그렇게 되어 토키와는 그저 안타까움을 느꼈다.
나나시: 토키와. 더 다가오지 마. 이러고 싶지 않아.
하기와라 우시오: 엇.
하기와라는 외마디 소리를 내고 아주 잠깐 몸을 경직시켰다. 토키와를 포함해서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하기와라의 그 중얼거림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기와라의 그 행동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었고, 곧이은 얼빠진 발언에도 또한 그러한 경위가 있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자아. 지금부터 개인기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바라 쿠리스: ……에에?
토키와는 나나시에게 손을 뻗으려다가 움직임을 잠시 멈추었다. 도무지 그의 뇌리에 있는 비장한, 또 성스럽기까지 해야 하는 샤이닝의 흡수 과정에 무게가 퇴색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가 장난은 집어치우라고 말하기도 전에 하기와라는 한쪽 손을 자신의 머리 높이까지 들어올리고서 검지부터 소지까지의 손가락을 모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한 손으로 박수를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토키와 아유키: 그만하지 그래. 하기와라? 지금 얼빠진 짓을 해봤자 변하는 게 없다는 건 너도 알잖아. 왜 스스로의 위엄을 떨어트리는 거지? 궁중광대는 단순히 웃음거리일 뿐인 것을.
하기와라 우시오: 일단 한 번 보고나 말해. 진짜 개쩔거든?
하기와라는 들어올린 손가락을 접으면서 손목을 앞뒤로 홱홱 흔들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손가락이 손바닥에 맞닿는 순간과 손목의 탄성으로 인해 손바닥이 손가락에 가까워지는 순간이 절묘하게 겹치면서. 정말 미세하지만 분명히 손뼉 소리 비슷한 것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바라 쿠리스: …대체 이게 뭐야?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이들 중 감탄한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심지어는 이바라마저 그게 뭐 하는 짓인지 아연실색했다. 수많은 장난과 얼빠진 일을 옆에서 구경했지만 이토록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하기와라는 처음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그… 이게 다인가요?
나나시: 괘. 괜찮아. 하기와라! 재미있어! 그런데… 왜…?
토키와는 정말이지 그래서 그 개인기를 가지고 어쩌란 말인지 모르게 되었다. 김이 새는 정도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 조금도 맞지 않는 짓이 아닌가. 이딴 게 초고교급이라고? 이렇게 실망스러울 수가 있나?
하기와라는 어느새 다른 이들 또한 성공적으로 토키와가 아니라 자신에게로 한눈이 팔렸음을 알았다. 그는 손목을 덜렁덜렁 움직이며 조금씩 관절이 아파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한 손으로 박수 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중에는 나머지 손으로도 한 손 박수를 치기까지 했다. 그냥 무시하고 있기에는 너무 거슬리는 모습이었다.
토키와 아유키: 집어치우지 못해?! 이런 경박한 자식! 내가 정말 이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너에게는 훈육을 좀 해야겠어!
그리고 토키와는 하기와라에게 다가가며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나나시: 어. 어어?
캐롤 브라이트: 꺄악!
토키와는 왜인지 그들이 토키와를 바라보는 시선이 묘하게 어긋나 있다고 느꼈다. 마치 그가 아니라 그의 등 뒤를 보는 것처럼…?
나는 두 개의 원기둥을 각각 나의 양손에 들고 있었다.
원기둥은 곧 손잡이이고 그것은 각각 네 개의 손가락으로 감싸 쥘 수 있는 크기이다.
손잡이 사이에는 얇고 질긴 와이어가 이어져 있다. 와이어는 약 50cm의 길이다. 내가 지닌 와이어에는 그것이 피부에서 미끄러지지 않게끔 철조망과 같은 작은 가시가 돋아 있다.
나는 누군가가 나의 등 뒤에서 다가왔을 때의 일을 똑같이 했다. 호흡을 맞추어 등 바로 뒤까지 다가가는 것이다. 표범이 하는 것과 똑같다.
금색의 남자가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조율자를 멈추어야 한다.
나는 와이어를 토키와 아유키의 목 앞으로 감고서 왼팔과 오른팔을 교차했다.
토키와 아유키: 커헉…! 억! 끄으윽!
교살줄을 써서 상대가 저항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교살줄을 잘못 쓴 것이다.
나는 교살줄을 모범적으로 사용했다.
토키와 아유키: 컥. 컥! 끄윽. 우욱! 옥!
나나시: 히. 히무로?!
하기와라 우시오: 왔다! 야! 왔어! 왔어!
히무로 시라베: 당장 방 안에 숨어라. 어서! 정신조작을 내어 주어서는 안 된다!
내가 우려한 것이 있다면 와이어가 그의 목을 과도하게 파고들어 경동맥이 끊어지고 사망하는 일이었다. 마유즈미를 다시 깨우기 전까지는 처형당할 수 없는 몸이었기에 힘조절을 했다. 살인 도구는 적절하게 사용했을 때 사람을 죽일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기에.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어려웠다.
캐롤 브라이트: 히. 히무로 씨… 오신 줄도 몰랐어요. 대체 언제부터 계셨던 거죠…?
토키와 아유키: 으그극. 으극… 컥. 꺽! 깍…! 으아아컥 꺼억 크억…!
히무로 시라베: 무엇을 하길래 가만히 있는 거냐. 느림보 돌연변이 같은 것들아. 조율자가 온다!
하기와라 우시오: 바로 지금이야! 빨리 튀어! 빨리!
토키와 아유키: 커꺽… 끄억…! 커꺼으옥…!
이바라 쿠리스: 죽이면 안 돼. 히무로! 너도 알지? 아는 거 맞지?!
캐롤 브라이트: 어. 어서 들어오세요. 이바라 씨!
그는 4초간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다리를 바닥에서 떼고 허우적거리는 것은 내가 교살줄을 놓치게 유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나는 손잡이를 똑바로 잡은 채 그의 무게를 지탱했다. 그는 교수형을 당하는 꼴이 되었다.
그 다음 3초간 그는 그의 목에서 와이어를 풀어내고자 스스로의 목을 긁었다. 하지만 칼을 가져와도 자르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와이어다. 이미 팽팽하게 목에 붙어 있으므로 떼어낼 수도 없다.
토키와 아유키: 꺽…! 끄으억…! 끄아아악!
곧이어 산소 부족이 찾아왔다. 토키와 아유키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팔을 자신의 등 뒤로 뻗었다. 급하게 오느라 장갑은 끼지 못했다. 나는 그의 손을 피하려고 무던히 애썼으나, 그의 맨손이 나에게 닿는 것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으아아아악! 주… 죽는다…! 살려줘! 사람 살려어어어!'
정전기. 그와 함께 공포로 가득찬 그의 정신적 비명이 들렸다. 이게 터치인가. 이번 회차의 살인게임 속에서 당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주 찰나의 시간동안 그와 나는 서로의 정신을 들여다보았다. 총체적인 정신과 감정. 가치관에 대한 이해. 아주 짧은 시간동안 모든 것을 느꼈다. 그 또한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나의 정신을 한 번 어지럽혔다.
히무로. 마음의 준비해. 우리 곧 헤어져. 틀렸어! 쏜다! 그럼요오오…! 심장으로 죽이리라. 야아아… 호오. 무섭… 흥분되네. 카친이다! 히무로… 슬슬… 나 숨 막히는데… 그 와중에 볼은 말랑거리고… 같이 있으면 편해지고, 가끔 간질간질하고… 까꿍! 나한테도 잘해주고… 다 줘.외로워! 나에게는 어머니 언니가 있다. 나는 미친 게 아니야. 내가 너한테 알려줘야 모든 게 의미 있는 거였다고! 아직 제대로 이해를 못 한 것 같은데. 나를 무의식 속에 가두는 게 꼭 능사는 아니야. 내가 네 체험 속에 갇혀있는 동안 나는 너에게 더 깊게 녹아들거든. 동화되고, 몰입하지. 그러면 더 쉽게 빠져나갈 수 있게 돼. 밖으로. 그래. 또 밖으로. 내가 분명 그렇게 말했잖아. 히무로. 여기 더럽게 춥더라. 응? 되갚아 줄게.
'그만둬! 그만둬! 싫어! 싫어!'
당했다. 그가 위험한 것을 건드리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가 몸을 한 번 크게 움직이자 그의 손은 나에게서 미끄러졌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토키와 아유키의 다리가 서서히 무너져갔다. 아무런 위험도 없었다. 아직 개화하지 못한 터치. 그마저도 나는 정신조작에 저항력을 가지고 있는 몸이다.
누구도 조율자에게 당하지 않는다. 누구도. 완전함을 갖추기 전에 처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율자가 완전해지는 일은…
………내 눈에. 설원 속에 떨어진 사람이 하나 보였다.
나는 위에서부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떠한 전경을 촬영한 듯한 프레임 안에 그녀가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녀는 프레임의 밖으로 기어나왔다.
후루미나미 나몬: 솔직히 말해 봐. 히무로.
후루미나미 나몬: 너 나 잊고 있었지?
나는 심장부 부근에 큰 격통을 느꼈다. 심장이 한 번 멈추고 다른 심박수로 다시 뛰기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모든 감각을 일순간에 잃어버렸다. 그리고. 작은 죽음을 느꼈다.
하기와라, 이바라, 캐롤, 나나시는 전부 나나시의 숙소에 발을 디뎠다. 곧이어 문이 닫혔다. 하기와라는 손뼉을 치면서 쾌재를 불렀다.
하기와라 우시오: 씨발 이거지! 이 새끼는 그냥 금발 혐오자야! 금발 남자만 보면 눈이 뒤집힌다니까! 쟤 눈 돌아간 걸 본 적 없는 사람들은 저 새끼가 얼마나 막나가는 놈인지 모를 걸!
나나시: 하기와라. 히무로가 도착한 줄 이미 알고서 시선을 끈 거였구나… 잠깐 한눈만 팔았는데 히무로가 토키와 바로 뒤에 있었어. 엄청나…!
터치에 저항력을 가진 사람. 특히 조율자라는 존재를 경계하는 사람이 나타나자 그대로 상황이 종료되었다. 히무로는 토키와의 등 뒤에서 다가왔다. 그러니 토키와와 대치하고 있던 이들의 눈앞에서 나타난 셈인데. 하기와라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들은 히무로가 토키와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주 잠깐 눈길을 돌렸더니 토키와의 뒤에는 히무로가 있었다.
의기양양하던 토키와의 목이 졸리는 모습을 본 그들은 히무로가 누구에게나 그럴 수 있었다는 것에 꺼리는 마음을. 그리고 히무로의 그러한 행동이 오직 정신조작의 악용자들에게만 향한다는 것에 다행스럽게 여기는 마음을 가졌다.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괜찮으세요? 도와드릴까요? 괜찮으신 거 맞죠?
이바라 쿠리스: 토키와는 진작에 뻗은 것 같은데… 히무로! 죽인 거 아니지? 그치!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나나시: 히무로? 히무로. 대답해줘!
하기와라 우시오: 그럴 때가 아니야. 일단 바리케이드부터 세워야지! 빨리 탁자 가져와!
나나시는 하기와라의 말을 듣고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한 방에 같이 들어온 네 명은 나나시의 숙소 안에 있던 탁자와 의자들을 전부 질질 끌고서 문 앞에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바리케이드를 세우기만 하면 그만인데. 하기와라는 잠자코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잠깐만 확인해 볼까?
이바라 쿠리스: 에에에! 결국 너도 히무로가 걱정되면서!
하기와라 우시오: 아직도 대답이 없으니까 그렇지! 야! 히무로! 괜찮냐? 대답 안 하면 바보! 대답 안 하면 존나 등신!
대답이 없었다.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괘. 괜찮으신 거 맞죠?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곧 하기와라는 그 자신도 왜인지 알 수 없지만, 히무로가 큰 위험에 처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럴리가 없으니 분명 그의 착각 때문일 뿐이겠지만. 왜인지는 몰라도 그는 확신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무런 근거 없이 알람에 깨어나지 못한 채로 늦잠을 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듯…
하기와라 우시오: …문 잠깐만 연다. 너희들은 바리케이드 쌓아도 돼. 별 일 없을 테니까.
나나시: 그래… 확인만 해보자. 그리고 다시 닫으면 돼.
문을 열었을 때 히무로가 그들에게 기발한 욕설을 내뱉으며 문을 닫으라고 윽박을 질렀을 때. 다시 닫으면 된다. 네 명은 문 바로 앞에서 아주 작은 문틈에 시야를 끼워넣으려 위에서부터 서로의 머리를 네 개 쌓았다.
하기와라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바닥에 쓰러진 토키와가 보였다. 여전히 그는 목에 교살줄을 차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히무로가 손잡이를 놓쳐 버려서 질식사하지는 않았고, 그저 정신을 잃은 것으로 보였다. 반면 히무로는…
히무로는 고개를 떨군 채 제자리에 서서 오직 바닥만을 내려다보았다.
이바라 쿠리스: 뭐. 뭐야. 왜 저래? 히무로. 괜찮아? 혹시 죽인 거야?! 아니지?!
히무로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말을 걸었는데도 어떠한 대답이 없었다. 그냥 굳어 있을 뿐이었다. 같이 쓰러져 있었다면 차라리 터치에 당해서 쓰러졌구나 하고 납득이라도 되겠지만, 가만히 서 있는 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불길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나나시: 히… 히무로… 대답을 안 하니까 슬슬 걱정되는데…?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저. 히무로 씨? 괜찮으신 것 맞죠? 장난이시라면 충분히 재밌었으니까 이제 그만 하셔도 돼요…
하기와라 우시오: 히무로는 장난 같은 거 안 쳐. 저놈 분명 진짜로 굳은 거야. 골치 아프게 됐는데… 일단 토키와가 멈춘 건 호재이긴 해. 히무로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가 문제지.
캐롤 브라이트: 굳었다고요? 터치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제가 풀어드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기와라 우시오: 금발 혐오자한테 터치 쓰려다가 너도 목 졸린다. 캐롤. 내가 잠깐 보고 올게.
하기와라는 문을 더 크게 열더니 잽싸게 문틈 사이에 몸을 집어넣었다. 그의 등 뒤에서 세 명의 아옹다옹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바라 쿠리스: 자. 잠깐. 하기와라! 어디 가?! 돌아와!
캐롤 브라이트: 돌아오세요! 너무 무모해요!
나나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조금만 더 보고 가도 되잖아!
하기와라 우시오: 걱정 마. 나 혼자라면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으니까. 목 졸리다가 뻗은 놈보다 달리기가 느릴까봐?
돌고 돌아 그 말고는 나설 사람이 없었다. 캐롤은 몸 사려야 하니까 못 나가고, 나나시는 캐롤이 싸고 도니까 못 나가고… 그리하여 하기와라는 여전히 굳어 있는. 표정조차 보이지 않는 히무로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이바라 쿠리스: 정말 터치에 당해서 몸이 굳은 거면. 우리가 어떻게 해줘야 할까…?
하기와라 우시오: 이놈이 나한테 갈겼던 죽빵을 되돌려주는 수밖에 없겠지. 마유즈미라도 눈앞에 대령하든가…
하기와라는 늘 그렇게 하듯이 이바라와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선 이바라를 홱 돌아보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뭐?! 야. 돌아가! 너는 왜 나왔어?! 빨리 가!
이바라 쿠리스: 너도 나왔잖아! 이거 웃기는 놈이네? 다시 밀어넣어 보던가! 이미 나나시랑 캐롤한테 바리케이드 쌓으라고 말해놨어! 아마 둘이서 열심히 의자를 쌓고 있을 걸?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야! 이거 농담 아니야! 진짜 존나 위험하다니까! 가서 문 열어달라고 해. 빨리!
이바라 쿠리스: 위험해? 상의도 없이 혼자 뛰쳐나간 장본인이 뭐라고?! 그렇게 위험하면 너도 튀어나가지 말 것이지!
하기와라는 사실 이바라의 말에 별반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옥신각신 서로 싸울 만한 때도 아니었다. 대체 뭐가 틀어진 것인지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촉박하지 않던가.
하기와라 우시오: 아오… 그래. 이렇게 된 거 잘 부탁해. 등 뒤는 맡겼다.
이바라 쿠리스: 맡기긴 뭘 맡겨. 얼빠진 소리나 하고 있어! 네 등짝 마구마구 때려버릴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좀 봐주라… 야! 히무로! 정신 나갔냐? 뭘 가만히 굳어있어?
하기와라와 이바라는 바닥에 쓰러진 토키와를 피해 히무로에게로 서서히 다가갔다. 그들은 사람이 순식간에 정신을 잃고 멍하니 서있게 되는 요인이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했다. 비하의 의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정신이 나가버린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 히무로의 고개가 서서히 토키와에게로 돌아갔다.
히무로 시라베: 딱한 놈 같으니. 하지만 기특해. 내가 죽은 뒤에도 시키는대로 하고 있잖아.
하기와라와 이바라는 무언의 시선을 서로 교환했다. 히무로의 말투가 조금도 히무로 본인처럼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걸 보며 어쩌면 히무로가 터치를 당해서 토키와랑 정신이 조금 섞인 덕분에. 지금 혼란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을 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고서도 히무로의 행동은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히무로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행동했던 것이다.
히무로 시라베: 흐흐흐흐히히히히히.
하기와라 우시오: …뭐냐? 야. 야야야야. 잠깐. 뭐야?
하기와라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히무로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바라 쿠리스: 하기와라…? 왜 그래?
하기와라 우시오: 히무로는 저딴 식으로 웃는 법이 없어. 저게 누구든 간에 히무로는 아니야. 토키와한테 당해서 정신이 나간 수준이 아니라고. 너 정체가 뭐냐? 이리 안 와?
히무로는 하기와라와 이바라 쪽으로 한 번 시선을 보냈다.
히무로 시라베: 마음만 같아서는 너희도 망쳐 놓고 싶지만… 아무래도 나한테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는 안 되겠다.
히무로는 그렇게 말하며 하기와라에게서 등을 돌린 채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이바라 쿠리스: 히무로! 어디 가는 거야?! 대답해!
하기와라 우시오: 이리 오라고. 이 새끼야! 너 뭔데!
히무로 시라베: 결국 그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지는 못했어.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동반자살이면 된 거 아니야?
히무로 시라베: 응. 그래. 분명 이것으로 충분할 거야. 너도 이제 알겠지? 내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를.
후루미나미 나몬: 궁극의 동반자살은 이미 시작되었다.
히무로 시라베: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궁극의 동반자살이다.
히무로는 느닷없이 탑의 로비에 나 있는 창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창문을 벌컥 열더니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머리를 아래로 하고서 떨어지면 죽을 수 있을 것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미친! 씨발!
하기와라는 아연실색이 되어 창문을 향해 달려가려다가 멈추었다. 히무로가 무사한지를 눈으로 확인하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반대로 내려다보고 싶지 않은 마음 또한 있었다. 죽어있는 히무로의 모습을 볼 만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바라 쿠리스: 으아아아아아악! 세. 세상에. 말도 안 돼!
반면 이바라는 굳어버린 하기와라를 제치고서 창문을 향해 달려갔다. 하기와라는 몇 초 동안 이바라를 따라가는 대신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거 꿈인가? 꿈이겠지? 느닷없이 토키와가 금발이 돼서 나타나고 히무로가 자살을 해? 이게 대체 무슨 미친 상황이야?
기어코 친구 먹었잖아. 내가 세상에서 가장 똘추같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몇 분도 안 돼서 이렇게 된 거냐. 대답 좀 해봐.
하기와라는 그러한 물음을 히무로에게 던졌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영영 히무로의 대답을 기다릴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다. 하기와라는 곧 자신의 생각 속에서 빠져나와 등 뒤로 홱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토키와 아유키: 콜록! 콜록 콜록! 크으윽… 켁!
하기와라 우시오: …망할. 이걸 일어나?!
토키와가 몸을 비틀면서 제정신을 차린 것이다.
토키와 아유키: 우우욱! 큭! 커헉! 콜록! 콜록!
하기와라 우시오: 에라이. 뭐 이런 거지같은 일이 다 있어!
하기와라는 욕지기를 내며 토키와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처리해야 할 일에 가까워졌다. 거의 달려가기까지 했다. 한 번 더 기절시켜야 한다. 히무로가 토키와의 목에 매어 놓은 교살줄을 이어받으면 된다! 그걸 잡기만 하면…
토키와 아유키: 으아아아아!
토키와는 손톱으로 하기와라를 할퀴려는 것처럼 팔을 내휘둘렀다. 영안로 속에서 그는 귀에 못 박히도록 터치에 대한 위험성에 대해 들었다. 하기와라는 히무로의 그 지긋지긋한 말을 잊지 않았고, 따라서 토키와의 손이 닿으려는 찰나 몸을 옆으로 날려 간신히 그와의 접촉을 피했다.
토키와는 여전히 주저앉아 있었다. 목에 졸려 죽기까지 갔던지라 토키와의 얼굴에는 여전히 질식 직전의 자줏빛 안색이 남았다. 하기와라는 내뺄 만한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뿐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이바라! 이제 틀렸어! 도망쳐야 해!
알아서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놨겠지? 그래야만 해! 만약 캐롤이 토키와에게서 안전해지기만 한다면, 하기와라와 이바라 또한 거점을 세우고 토키와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오직 토키와에게서 몸을 피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거리만 벌린다면 조율자가 완전해지는 일을 피할 수 있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 가자고! 빨리!
하기와라는 창문틀에서 겨우 머리를 빼낸 이바라에게 계속 소리쳤다. 그리고 이바라의 어딘가 화가 난 듯한, 용서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보았다. 오직 불길함만이 그의 뇌리에 차올랐다. 그것때문에 일이 틀어졌으면 틀어졌지 나아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설마. 에이. 설마… 너 지금 무슨 생각이야?! 빨리 도망가자니까!
이바라 쿠리스: 말리지 마. 하기와라! 나는 오늘 얘랑 결판을 지어야겠어. 캐롤이랑 히무로한테 이런 짓까지 저질러 놓고서 또 꽁무니만 뺄 수는 없어!
히무로가 창문에서 떨어진 것은 토키와의 명령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이바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이바라는 손가락 관절을 우두둑 꺾으며 토키와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따가운 교살줄을 풀고서 화풀이로 그것을 멀리 휙 던져버렸다.
토키와 아유키: 콜록! 꺼흑… 으으으…! 역시 봐줘서 좋을 일 하나 없어! 가만히 안 둔다…! 켁!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너희들이야! 너희는 낙원을 가질 수 있었는데. 그걸 원하아아어윽…지 않는다면서 나한테 기어오르니까 이렇게헥! 되는 거라고!
하기와라는 토키와에게 오히려 가까이 다가가는 이바라를 보며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진작 도망가지 않는 게 바보짓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이바라에게 다가가 한쪽 팔을 붙잡아 끌어댔다. 3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발을 디뎠으나. 이바라는 발이 뿌리를 내린 듯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이바라 쿠리스: 이. 이거 놔줘! 내가 해야만 해!
하기와라 우시오: 뭘 하려고! 너도 창문으로 떨어지게?! 헛소리 말고 도망쳐야 한다니까!
이바라 쿠리스: 내가 할 수 있어. 정말이야! 객기 부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할 수 있어!
하기와라는 속으로 욕을 했다. 아니 이런 고집불통을 다 봤나?!
토키와 아유키: 히무로… 히무로는 어디에 있지…? 나에게 가까이 오게 해서는 안 돼…
하기와라 우시오: 히무로도 저렇게 됐는데 네가 한 번이라도 토키와의 손에 안 닿을 수가 있다고? 네가 무슨 위빙의 신이야?! 왜 자꾸 고집을 부려!
이바라 쿠리스: 히무로는 안 죽었어. 하기와라. 얼마나 다쳤는지는 몰라도 즉사는 아니었어. 그보다 자세히는 못 봤지만 괜찮아.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도망치면, 토키와는 히무로를 끝장내러 갈 거야. 그건 안 돼!
이바라 쿠리스: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건 도망치는 게 아니라. 토키와가 더 강해지거나 더 무서운 방법으로 캐롤을 몰아붙이기 전에 우리 손으로 토키와를 막는 거야!
하기와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토키와에게서 떨어져야 할 이성적인 이유를 몇 개라도 들 수 있었다. 말이야 쉽지만 한 번의 신체접촉을 당하는 것만으로 그들은 토키와에게 지배당할 수 있었다. 차라리 제츠보가 카이다를 제압하고 토키와도 잡으러 오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그들에게는 마땅한 무기도 없었고 그토록 큰 위험을 그들이 온전히 감당할 필요도 없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그냥 탑은 좆망하게 둬. 꼭 네가 할 필요는 없잖아…
그러나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말하기가 왜인지 싫을 뿐이다. 하기와라는 주저하다가 결국 그의 진심이 조금이라도 이바라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바랐다.
하기와라 우시오: 히무로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는데, 너까지 걔랑 싸우라고 보내란 말이야? 이게 무슨 미친 개소리야. 이바라? 내가 너를 어떻게 보낼 수가 있냐…?
이바라 쿠리스: 아. 진짜 말하기 싫었는데…… 너한테는 말해줄게. 내가 왜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지를.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지만, 너니까 들려주는 거야.
그리고 이바라는 하기와라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해 주었다. 그것을 듣는 동안 하기와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바라의 모습을 몇 번이고 살폈다. 겉으로는 조금도 그런 기색이 없어서 거짓말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 거짓말인 편이 차라리 낫기도 했다. 이바라의 말이 사실일 경우 그녀가 겪어왔을 일이 너무 가혹해서. 하기와라는 그녀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에 그녀의 말을 불신했다.
그러나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바라가 그런 거짓말을 할리가 없다는 것은 하기와라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정해진 선을 고의로 넘는 게 코미디언의 의무라고 그는 주창한 바 있었던 만큼 그는 사람마다 각자 다른 금기의 선을 잘 알았다. 이바라는 그녀 자신의 선을 한참 뛰어넘었다. 그러니 믿어야만 했다.
하기와라는 자신의 이마를 붙잡았다. 그녀에게 할 말을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많이 힘들었겠다.
이바라 쿠리스: …고마워. 아무튼 요점은. 내가 할 수 있다는 거야! 오히려 나밖에 할 수 없어. 그러니까… 나 보내 줘.
하기와라는 주저했다. '그런가?'는 서서히 '아무리 그래도'로 변했다. 무모한 일은 무모한 일일 뿐이다. 총 한자루를 가지고서 곰을 잡으러 가는 게 안전한 활동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진작 다 잡아먹혔다. 그리고 하기와라는 이바라가 무슨 군용물자를 한트럭 가지고 곰을 잡으러 간다고 해도 반대할 생각 뿐이었다.
그렇게 그녀를 설득할 말을 떠올리며 하기와라는 이바라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끝에 그는 그가 그녀의 고집을 말릴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확고한 의지. 그리고 줄어드는 시간.
이바라 쿠리스: 믿어 줘. 하기와라. 나만 할 수 있어.
하기와라 우시오: …그럼 조금만 버텨. 너무 몰아붙이지 말고. 궁지에 몰리면 누구나 이빨을 드러내는 법이야.
이바라 쿠리스: 글쎄? 이빨이 가죽을 못 뚫으면 그만이지.
토키와는 마침내 히무로가 주변에 없음을 확신했다. 충분한 시간이 지났으니 다른 이들은 이미 문을 걸어잠그고 앞에 장애물까지 세워 두었을 터였다. 이는 캐롤의 힘을 흡수하려던 토키와가 턱도 없이 실패했음을 의미했다.
하필이면 히무로가 나타나서는! 다 잡았는데. 네 명을 한순간에 화합시킬 수 있었는데 다 틀어져 버렸다. 카이다가 제츠보에게 붙잡히기라도 했다면 이제 캐롤을 붙잡는 데에 심한 애로사항이 꽃필 게 분명했다. 그 사실에 애써 태연한 척을 하지만 속으로는 약간의 불안함을 느끼던 와중. 이바라는 탁 트인 장소에서 토키와를 쏘아보고 있었다.
토키와는 자신이 헛것을 보는 줄만 알았다. 그를 피해 방에 숨어야 하는 그녀가 밖으로 나온 것은 헛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논리적 추론이란 게 있는 법이다. 차라리 항복을 하면 할 것이지, 어차피 질 싸움을 굳이 건다니 이보다 어리석은 일이 없었다.
입 안에 굴러 떨어지는 공적이라니 뭐. 없는 것보다야 낫다만…
토키와 아유키: 설마 자기 발로 걸어들어올지는 몰랐어. 저항하지 않는다면 뒤늦게라도 현명한 길을 걷고자 결심한 거겠지만… 너를 보니까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렇다면 분명 단순한 오만이자 만용일 뿐이지.
이바라는 팔짱을 낀 채로 토키와를 매섭게 바라보았다.
토키와 아유키: 어떤 어리석은 생각을 했길래 단신으로 나에게 맞서려는 걸까… 이제는 정말 모르겠다. 이해가 안 돼. 절름발이 세상에 나 혼자 똑바로 걷고 있는 기분이야.
이바라 쿠리스: …그래? 그렇구나. 아직도 모르는구나… 이거 하나만 알려줘. 토키와. 꼭 이렇게 되어야만 했을까…? 어떻게든 다른 방도는 없었던 걸까?
토키와 아유키: 내가 조율자였던 이상 그런 건 없어. 이바라.
이바라 쿠리스: 네가 그렇게 되기 전부터 말이야. 정말 방법이 없었어? 정말 꼭 야가미와 칸나즈키를 죽여야만 했어?
토키와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토키와 아유키: 그래. 꼭 그래야만 했지. 죽고자 하는 사람이 모든 위험인물의 살인을 도맡고 사라져버릴 수 있었으니 그만한 기회도 없었어. 누구나 그렇게 했을 거야. 단지 선택권을 가졌던 사람이 나였던 것뿐. 탑에서 날뛰는 사람이 카이다 한 명 밖에 없어진 것은 결국 나 같은 사람이 손을 더럽힌 덕분에 이루어진 거란 말이야.
이바라 쿠리스: …네가 혼자 모든 걸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 줬어야 했나 봐. 그렇다면 네가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까… 이제는 너무 늦었지만.
또 동정이다. 또 측은하게 여기는 얼굴이다. 토키와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를 일찌감치 사도로 만들어 그 오만함을 지워버리고자 했다. 그는 성큼성큼 이바라에게로 다가갔다.
토키와 아유키: 하… 처음이 하필 너라니… 운이 안 좋네.
이바라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당랑거철. 사마귀가 수레 앞에서 버티는 모양새였다. 만용하는 자는 찌부러질 뿐이다.
토키와 아유키: 너무 무서워하지는 마. 평화가 시작될 뿐이야.
토키와는 이바라의 팔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할 수 있는 작용을 모르는 이상 사람의 뇌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이바라의 팔은 거의 반팔 전부가 드러나 있기에 표면적이 넓기까지 하다. 토키와는 이바라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러나 터치는 이어지지 않았다.
토키와 아유키: 으응…?
토키와는 아주아주 조금 당황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이바라의 손을 계속 붙잡고 있었다. 진작 이어지고도 남았어야 했다. 히무로에게 한 터치도 닿자마자 이루어졌는데?
마침내 이바라의 참을성이 바닥났을 때. 그녀는 토키와의 손을 툭 하고 뿌리쳤다.
이바라 쿠리스: 다 했어?
토키와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서 다시금 이바라에게 손을 뻗었다. 이바라는 한 번 더 매몰차게 토키와의 손을 짝 쳐냈다. 접촉. 그런데도 터치는 이어지지 않았다.
토키와 아유키: ………어? 왜 안 통하지?
이바라 쿠리스: 어쩐지 아까도 안 통하더라니… 이럴 것 같더라. 그러니까 네 것도 나한테 안 통하는 거야.
토키와는 이바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그 모든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 그에게는 터치가 있었다. 히무로한테도 결국 통할 정도의 터치가. 분명 있었는데. 그게 이바라한테만 안 통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체질의 문제라도 있는 걸까? 그런 체질이 있다고? 그리고 그게 하필 이바라야?
토키와는 그 억울함을 곱씹는 대신 팔이 아니라 다른 부위에 터치를 시도했다. 그녀의 얼굴로 팔을 뻗은 찰나. 이바라는 자신이 벼르고 또 벼르고 있던 일을 저질렀다.
이바라 쿠리스: …이거나 쳐먹어. 이 나쁜놈아!
이바라는 자신의 허리춤 뒤에 숨겨놓고 있던 것을 꺼내 토키와의 얼굴 앞에 가져다 댔다. 그것이 자신의 눈앞에 온 순간 토키와는 생각했다. 오 이런. 안 돼. 또 저걸 뒤집어쓸 순 없어. 저 따갑고 기분 더럽고 짜증나는 걸 또 감히. 감히 나한테!
포화용액 소금물. 그것은 입에 대면 짜기보다 차라리 쓴맛이 난다. 눈에 넣으면 어떤 맛이 나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마 토키와는 알 것이다. 토키와는 자신의 눈을 감싸면서 몸을 굽혔다. 눈이 얼얼해지고 뻐근해지면서 도무지 뜬 채로는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토키와 아유키: 아아아아아악!
두 번째 분사는 막아야 한다는 마음에 그는 눈을 뜨지 못한 채로 이바라에게서 등을 돌리려 했다. 이바라는 후다닥 달려 그의 얼굴 앞에 서 다시금 소금물을 뿌리려 했으나 토키와는 자기보신적인.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이바라를 등졌다.
그렇다고 해서 이바라가 토키와한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이바라 쿠리스: 이! 익! 나! 쁜! 개나쁜 놈아!
이바라는 토키와의 등 뒤에서 그의 머리와 등에 양손을 마구 내던졌다. 스프레이를 든 손으로는 통을 세로로 들고서 토키와를 찍어내렸고, 반대편 손으로는 중지 마디를 조금 뾰족하게 세워 힘을 집중시켰다. 손가락 뼈가 토키와의 두개골과 척추뼈에 닿아 얼얼하게 아파왔지만, 맞고 있는 당사자가 이바라보다 더 아팠다. 토키와는 계속 흘러나오는 눈물을 훔치며. 어째서 이바라에게는 터치가 통하지 않는 것인지 생각했다.
이바라 쿠리스: 나쁜 놈! 캐롤한테 사과해! 히무로한테 사과해! 칸나즈키랑 야가미한테도 사과하란 말이야!
토키와는 일방적인 구타를 당하는 와중에도 이해되지 않는 일에는 반박을 했다.
토키와 아유키: 내. 내가 히무로한테 뭘 했는데?!
이바라 쿠리스: 네가 터치를 써서 히무로가 창문에서 떨어지게 만들었잖아!
토키와 아유키: 헛소리! 나는 그런 적 없어! 이제는 하지도 않은 일을 뒤집어씌워?! 악! 아야! 아팟!
이바라 쿠리스: 발뺌하지 마! 괘씸한 자식! 오늘 혼꾸멍을 내 주겠어!
토키와는 이바라가 화를 내는 틈을 타 한 번 등을 돌려 이바라의 손을 붙잡았다. 정말 분명히. 제대로 붙잡았다. 속으로 주문 같은 것을 간절히 외치기까지 했다. 이어져라. 터치…!
그런데도 터치는 이어지지 않았다. 토키와는 이제 정말 막막함을 느꼈다. 진짜 손이 문제인 건가? 얼굴로 손을 뻗었을 때에는 분명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대체 왜 손이…
후루미나미 나몬: 초고교급 투수의 수준을 똑똑히 보여주지.
후루미나미 나몬: 로켓 펀치!
후루미나미는 그렇게 외치며 가짜 손을 던졌다. 가짜 손은 공중에서 맹렬히 회전하며 카나리를 향해 날아갔다.
토키와는 문득 아주 예전처럼 느껴지는 식당 내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후루미나미와 이바라가 서로 던지고 놀던 것. 가짜 손! 정확히 어떻게 하는 건지는 몰라도. 이바라가 가짜 손을 만들고 가지고 놀 수 있다면 지금도 가짜 손을 착용하고 있을지 모른다! 오호라. 내 터치에 대항하려고 아까 착용하고 온 게 분명해!
아주 기발하군! 토키와는 스스로의 터치가 여전히 강력하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 자신의 능력이 여전하다는 것을 재확인하자 토키와는 그 자신에게 맞서고 있는 이바라에게 약간의 존중마저 가지게 되었다. 사실 그를 압도하고 있는 사람을 폄하해 봤자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토키와 아유키: 하지만 편법일 뿐이다. 이바라!
토키와는 이전에 잠을 자지 못해 충혈되었을 때의 눈을 그대로 떴다. 하지만 이번에는 눈의 신경이 외부 자극을 받아 충혈된 것에 불과했다. 그는 소매로 소금물을 전부 닦아내고서 자신의 팔오금에 얼굴을 파묻었다. 안면과 호흡기를 가릴 수 있다면 족했다. 대신 이바라의 정확한 위치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주변시야를 힐끗거리는 것으로 그는 이바라를 문제 없이 뒤쫓을 수 있었다.
뒷걸음질은 보통의 뜀걸음보다 느릴 수밖에 없다. 토키와는 이바라의 팔에 한 번 거세게 팔을 휘둘렀다. 그의 손톱은 샤이닝의 영향으로 인해 길게 자라나 있었다. 그 날카로운 손톱이 한 번 이바라의 드러난 팔을 할퀴었다.
그러자 팔의 피부가 찢어졌다.
생기가 돋는 그 피부의 안쪽 사이로는 검으며, 보라색이며, 새하얗게 바랜 흉터가 보였다.
고열에 의한 피부 손상이었다.
토키와 아유키: …너. 그건…
가짜 손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가짜 손일수가 없다. 진짜 손을 감출만한 소매도 없었으니까.
그것은 가짜 피부였다.
재료는 고무, 플라스틱, 그리고 젤라틴.
이바라 쿠리스: …치. 들키기 싫었는데.
이바라는 자기방어기제로 인해 천연덕스러운 말을 했다. 사실은 다른 사람에게. 그것도 그녀가 싫어해 마다하지 않는 사람에게 들켜서 너무 기분이 나빴지만, 그런 기색은 내보이지 않으려 그녀는 무던히 애를 썼다.
그것에 대해서는 칸나즈키와 캐롤마저 몰랐다. 사고가 벌어진 날. 이바라는 정신을 반쯤 놓았다. 그리고 승용차의 가솔린에 불이 붙어 꺼지기도 전인데도 가족에게 달려갔다.
심한 화상을 입었다.
아프고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었을지라도. 그녀는 자신의 디폴트를 즐겁게 살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들도 분명 그것을 바랐으리라고 믿으면서…
하기와라 우시오: 이바라! 괜찮아?! 어떻게 됐어!
하기와라는 자신의 전용실에서 야구 배트를 들고 나타났다. 토키와의 손에 닿는 순간 정신조작을 당한다면, 손에 닿지 않게끔 거리를 벌리는 편이 더 유리했다.
이바라 쿠리스: 안 통했어! 자! 내 말이 맞았지? 내가 할 수 있다니까 내 말을 못 믿어서는!
하기와라 우시오: 네가 나였더라도 못 믿었을 걸? 어어? 거기거기 잠깐. 더 다가오지 마. 이거 맞으면 꽤 아프다?
칼을 든 사람과 배트를 든 사람이 서로 싸우면 누가 이기느냐는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토론 주제라지만, 하기와라는 별반 궁금하지도 않았다. 아무튼 간에 상대가 배트를 들고 있다면 칼을 든 사람도 섣불리 다가올 수는 없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여기까지 토키와는 목이 졸리고 눈에 소금물을 맞고 등을 두들겨 맞았다. 그리고 곧이어 배트에 두들겨 맞고서 여기저기가 부러져, 제압을 당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것까지는 아무렴 좋았다. 육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일 뿐이니 어떤 육체적 고난도 그의 고결한 마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가 온갖 수모를 겪었는데도 캐롤을 놓쳐 버렸다는 사실이야말로 쓰라리고 또 뼈아팠다.
히무로에게 목이 졸리는 것도 괜찮았다. 그것은 너무 빠르고 악의보다는 오직 해내야만 한다는 당위성만이 느껴졌기에 자연재해에 한 번 휘말렸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애초에 히무로는 그들 중에서도 이질적이라 사람이 아니라 괴물에 가깝지 않던가. 당할 만한 일을 당했다 그뿐.
하기와라 우시오: 아. 씨. 아닌가? 더 다가오라고 해야 하나? 우리끼리 처리해야 하니까?
이바라 쿠리스: 도발하지 마! 천천히 몰아가자! 너는 나랑 다르게 정말 닿기만 해도 큰일이잖아…
그러나 이바라와 하기와라같은, 초고교급이라는 티가 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쩔쩔매는 것은 굴욕적이다 못해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는 자신의 운세를 욕하게 되었다. 하필이면 이바라가 가짜 피부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정말 하필이면!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운이 없을 수가 있는가! 전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는 억울해졌다. 이미 지나간 일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예전에는 아무리 감정적 동요가 생기더라도 그러지 않았지만 샤이닝이 그의 몸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스스로의 감정 호르몬에 휘둘리는 경험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불어난 물처럼 그를 압도하는 감정에 그저 휘둘리게 되었다.
토키와 아유키: …대체 나한테 왜 그래?
하기와라 우시오: 뭐라고?
토키와 아유키: 너희는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는 건데? 내가 그렇게까지 심한 걸 요구했어…? 아니잖아… 서로 잘 이야기로 풀 수 있는 거였잖아!
하기와라 우시오: 야하하하하하학! 야! 너 우냐?… 어. 진짜 울어? 어어? 이렇게 나올 줄 몰랐는데.
토키와 아유키: 아… 아프단 말이야! 목까지 조르고! 정말 터치만 있다면 우리 모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니까. 살인이 일어나지 않게 막을 수 있다니까 전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잖아! 내가 아무리 잘못했다고 해도 아무런 말도 들어주지 않다니. 너무해…!
하기와라 우시오: 어… 야. 아니. 나는 그게 아니라… 울 것 까진 없잖아. 그… 그렇게 마음이 아팠나?
이바라 쿠리스: 속아 넘어가지 마. 하기와라! 저게 진심처럼 들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어내는 거잖아!
그렇지만 진심인데! 토키와의 아니마(anima)에게는 아까 자신을 호되게 박해한 이바라의 매몰찬 말이,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 쓰라렸다. 그는 스스로 정말 잘 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도대체 그의 목적 중에서 무엇이 악하단 말인가. 탑에 있는 모든 이들이 정신조작을 통해 화합에 이르는 일의 무엇이!
그들은 정말 감사할 줄을 모르는 나쁜 사람들이 분명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러했다.
토키와 아유키: 내가 이렇게 되어서도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아! 왜 알아주지 않는 건데! 서로 이해할 생각도 전혀 없어… 일관성도 없어! 나쁜 사람들… 너희는 정말 나빠!
토키와는 책망을 담아 그들을 검지로 가리켰다.
토키와 아유키: 너는 스스로가 옳은 일을 하는 줄 알지…? 아니. 틀렸어! 나야말로 너희들에게 내려온 가장 확실한 평화야. 그런데 너희에겐… 전부 사탄이 들렸어! 사탄 때문에 너희에게 내 말이 닿지 못하는 거야… 교만하니까.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게 내려왔는데도 필요없는 줄 아니까 그러는 게 분명해…!
토키와의 어조에는 서서히 격양과 도취가 담겼다.
토키와 아유키: 적그리스도! 이 악마! 악한 우상의 숭배자들! 감히 나를 십자가에 매달려고…! 너희들은 곧 그러고도 남을 거야. 카텟 기관의 거짓말에 속아서는 나를 그 나쁜 히무로한테 넘겨버릴 게 분명해!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는데 또 나한테 그걸!
토키와는 하기와라가 들고 있는 배트를 보았다. 그게 그의 머리를 부수게 될지, 움직이지 못하게끔 다리를 향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카이다마저도 오지 않으니 철저히 혼자 신세. 그리고 그가 싸워야 할 적은 너무도 많았다. 감당이 되지 않았다.
하기와라의 말마따나. 궁지에 몰린 자는 이빨을 드러내는 법이다.
토키와 아유키: 나는 좋은 리더야! 그러니까 나한테. 저항하지 말란 말이야!
토키와는 그 나름대로 불안하고 위엄 있게 소리쳤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바라와 하기와라는 들고 있던 물건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팔에 축 쳐져서는 몸통 옆에서 달랑거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어?!
다시 들어보려고 했으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한 그들은 토키와에게서 거리를 벌리려고 했으나. 그들의 다리마저도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어어. 야. 야. 야야야야야야야! 야! 씨벌! 이게 뭐야!
이바라 쿠리스: 조. 조용히 해! 하기와라! 당황하지 말고! 아직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잖아!
이바라 말마따나 토키와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다. 오직 그들이 자신을 속이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토키와에게 저항할 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고. 토키와의 외침만이 그 경위인 것 같았다.
토키와는 그 뒤로도 대체 무슨 일인지 상황을 찬찬히 뜯어보고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다시 생각해보다가, 뒤늦은 깨달음에 닿았다.
토키와 아유키: 딕테이트… 딕테이트다! 말을 써서 하는 정신조작! 내가 저항하지 말라고 해서 정말 저항하지 못하게 된 거야!
그렇게 행복해본 적이 또 언제였던가. 또 그토록 성취감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던가! 토키와는 그의 온몸이 포근한 구름에 뒤덮이는 듯한 기분에 서서히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끊임없이 추락하던 정서 또한 서서히 나아지다 못해 너무나도 좋아졌다. 그가 해낸 것이다! 정말로 해냈다!
이바라 쿠리스: 이게… 네가 한 거란 말이야?
토키와 아유키: 그럼 내가 한 거지. 아직도 모르나! 우후하하하! 해냈다! 내가 해냈어! 나 혼자서! 캐롤 씨의 힘을 빼앗지 않고서도 딕테이트를 쓸 수 있게 됐어! 봤나! 이게 바로 나란 말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미친. 지랄.
그 단 한 번의 증명이 모든 것을 보상해주었다. 그리하여 아까까지만 해도 세상 모든 것을 저주할 기세던 토키와는 허공에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로 들뜨게 된 것이다.
토키와 아유키: 역시 타고났어! 이게 바로 나야! 적법한 자! 선택받은 사람이야! 나는 귀족이야! 나는 왕족이야!
아니. 단지 그게 아니다. 그는 그보다도 더 높았다.
토키와 아유키: 나는 황제다! 하늘이 낳은 사람. 그게 나다! 해일을 일으키는 사람. 그게 나야! 벼락을 내려치는 사람! 나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분명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벼락이라는 것은 오래 머무르는 법이 없고 한 번 떨어지자마자 자취를 감추는 법이다.
하기와라가 서서히 자신의 몸을 떨더니 그에게서 아주 조금씩 뒷걸음을 쳐서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키와 아유키: 어어? 지금 뭐하는 거야. 어디서! 멈춰라. 멈춰! 멈춰! 그대로 멈춰라! 멈. 춰. 라!
그러나 하기와라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온몸에 힘을 줘서 얼굴이 새빨개지는 와중에도 서서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윽… 아오…! 더럽게 안 움직여지네!
토키와 아유키: 왜 갑자기 안 돼?! 젠장할 맞을.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하지만 상관 없어. 어차피 너희들은 끝장이니까! 저항 그만 하래도. 이미 움직일 수 없게 된 이상 너희는…!
시간을 벌어야 했다.
선행입력된 딕테이트의 효과가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을.
나는 교살줄을 그의 목에 걸고서 그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일어서지 못하게끔 그의 목을 내 가슴께에 붙이고 교살줄을 당겼다. 그는 산소를 갈구하지만 숨을 쉬지 못하는 자의 소리를 냈다.
토키와 아유키: 끄으윽?! 끄윽! 컥! 카학…! 옥…!
장갑은 없다. 그런 겉치레를 챙겼다간 두 사람을 터치로 잃었을 것이다.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이 잠시 내 몸의 주도권을 가져갈지언정. 죽기 직전에 정신을 차릴 수만 있다면 2층에서의 추락은 손목을 조금 삐는 것만으로 대처할 수 있다.
나의 몸을 써서 다른 이들을 해치는 경우야말로 무엇보다 해로웠다. 후루미나미 나몬 또한 이를 알 것이다. 높이가 두 층 정도 높아져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부상은 조금 심해질지언정 내가 반응할 시간은 오히려 길어질 테니까. 길어지는 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겠지만 그 찰나가 생사를 가를 수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다시 내 몸을 빼앗는다면 분명 다른 이들을 해치려 들 터였다.
토키와 아유키의 팔이 내 손에 닿았다. 정전기가 일었다. 터치는 나의 샤이닝 파장을 흐트러뜨렸다. 본래라면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나의 안에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언제 인격의 전환이 이루어질지 알 수 없었다. 억누를 수도 없었다. 그것은 심장에 힘을 주어 스스로의 심장을 멈추겠다는 일과 같았다.
토키와 아유키: 커컥…! 켁! 켁켁 꺼으윽…! 느악 컥크윽!
'또! 또야! 또야! 아아아! 아파! 아파! 싫어! 목이 졸리는 건 싫어!'
그러니 적어도 내가 다시 정신을 잃기 전 조율자만큼은 기절시켜야 했다. 토키와 아유키는 자신의 허리를 들어 몸을 돌림으로써 교살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나는 그의 발버둥에 맞추는 대신 그저 몸과 손에 쥐고 있는 힘을 유지했다. 그렇다면 아무리 몸을 비틀어봤자 탄성 작용처럼 자신이 갇혀있던 곳에 돌아올 뿐이다.
이바라 쿠리스: 히무로?!
하기와라 우시오: 왔냐?! 야! 괜찮아?! 아무리 2층이라고 해도 그딴 식으로 떨어져서 걱정했잖아!
히무로 시라베: 가라! 나에게서 거리를 벌려라. 내가 너희들을 찾아간다면 결코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지금부터 나를 의심해라. 그것은 나의 모습을 한 다른 사람이다!
나는 하기와라 우시오에게 호통을 쳤다. 서서히 딕테이트의 영향이 사라지고 있는 듯이. 이바라 쿠리스마저 서서히 발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는 나의 말을 일률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야! 그게 무슨 뜻이야? 제대로 말해 봐! 아까 너 혼자서 히히 웃더니 뛰어내렸잖아. 그거랑 뭔가 있는 거지?!
히무로 시라베: 나는 정신분열증에 걸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뭐?! 언제부터!
히무로 시라베: 말해줄 시간 없다. 어서 거리를 벌려라!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병신아. 그럼 또 떨어지게 냅두라는 거야? 이리 와! 내가 그렇게 되기 전에 빠따로 기절시켜 줄게!
히무로 시라베: 헛소리 마라! 네놈은 나를 기절시키지 못한다. 얄팍하게 타격할 테니!
하기와라 우시오: 니기미. 그걸 어떻게 알아?!
히무로 시라베: 네놈은 정에 휘둘리는 인간이니까! 그러니 진심으로 둔기를 휘두를 수 없다!
나는 알았다. 하기와라 우시오라면 아무리 기세가 등등하더라도 내 두개골이 부서질까 아주 조금 힘을 풀 수밖에 없다. 그는 아직 충분히 벼려지지 않아 망설임을 가지고 있었다. 망설이는 이상 기절은 없다. 그저 내 육체를 뒤집어쓴 가학증 환자에게 노출될 뿐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또한 내 말을 듣고 납득했다. 납득하고 싶지 않은 듯 입을 뻐끔거려도 한 번 받아들여버린 순간 끝이다.
토키와 아유키: 커억…! 컥! 컥! 카칵…! 끄헉 커윽 끅…!
토키와 아유키의 몸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가 기절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또. 이전에 벌어졌던 일을 생각하면 인격의 전환이 벌어지는 일 또한 멀지 않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진심이냐…? 진짜 그래야 해? 니들을 말릴 수도, 도와줄 수도 없어…?
히무로 시라베: 감시자를 감시하는 것은 조율자 뿐이다. 너희는 할 수 없다! 가라! 어서!
이바라 쿠리스: 아… 아무리 그래도… 히무로! 이번에 또 다치면…!
히무로 시라베: 분명 가라고 말했다! 가란 말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제기랄… 미안해. 미안해. 히무로! 꼭 이겨! 이겨야 해!
이바라 쿠리스: 무사해야 해. 히무로! 알았지?! 마유즈미를 생각해!
나는 항상 그러고 있었다. 하기와라 우시오와 이바라 쿠리스는 계단을 올랐다.
토키와 아유키: 끄흐으윽… 흑… 헤엑…
숨이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비인간 두 명이 남았다. 서로의 몸을 물어대는 짐승 두 마리의 꼴. 와이어 안에서 토키와 아유키의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것이 감시자의 임무였다. 나는 누군가의 목을 조르기 위해 태어났다.
다 터치 때문이다. 모든 게 터치 때문이다. 그녀가 그런 몸을 타고나서 태어난 덕분에 다 틀어졌다.
머리카락이 금색이 아니었다면 동양인이 백인 흉내를 낸다며 모든 곳에서 이방인 취급을 당할 일도 없었다. 그렇다면 따돌림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프롬 퀸이 된 직후에 돼지 피를 뒤집어써서 수많은 사람에게 정신조작을 사용하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치나미를 다시금 잃은 것. 터치 때문이다. 그녀만 안전한 방 안에 있고 다른 모든 이들이 위험해진 것. 터치 때문이다. 그러니 전부 그녀 때문이었다.
나나시: 히무로의 모습을 한 다른 사람? 정신분열증…? 이게 다 무슨 뜻이지?
나나시는 의자와 테이블로 막아 놓은 문에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가.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캐롤도 스스로의 꼬리를 잡아먹는 나쁜 생각들을 그만 둔다면 들을 수 있을 테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연쇄반응으로 불어나는 편집증에 가득 차 버렸다. 격렬한 태풍의 중심이 고요하다면 그녀는 태풍의 반대였다.
나나시: 캐롤 씨. 진정해요. 아무래도 히무로가 토키와를 다시 제압한 것 같으니… 괜찮아요. 바리케이드를 치우는 것도 일이겠네요. 그러니까… 상황을 조금 더 살펴보고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 때 나가요.
캐롤 브라이트: …다 저 때문인데. 저만 제일 안전하네요.
나나시: 그런 말씀 마세요. 히무로만 아니었어도 당신이 무슨 일을 당했을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렇게 안 봤는데 토키와한테 실망했어요.
캐롤 브라이트: 어쩌면 토키와 씨의 탓이 아닐지도 몰라요. 저에게 조율자를 완성할 만큼의 샤이닝이 없었다면. 터치가 없었다면…
터치가 없었다면.
지금이라도.
터치가 없어진다면.
캐롤은 속으로 생각했다.
터치만 내어주면 모든 게 편해지지 않을까…?
감정적으로 불안정해진 그녀에게 있어 감정의 편차에 따라 제멋대로 날뛰어대는 힘이란 무거운 짐과 같았다. 사실 언제나 축복보다는 낙인에 가까운 것이 터치였다. 캐롤은 독을 선용(善用)하는 방식을 발견해냈을 뿐이다.
어느 곳에서도 그 독을. 폐기물을 처리할 수는 없었다. 취급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것을 대신 떠맡을 사람은 어쩌면 조율자 뿐일지도 몰랐다. 모든 정신조작을 가진 사람. 그래서 한순간. 캐롤은 이런 생각을 했다.
차라리. 내버리는 게 나을까?
이것만 고치면. 나는 완벽해질 것이다… 성형중독자의 밑도 끝도 없는 물리적 수정의 욕구처럼 들릴지 몰라도. 캐롤에게 있어서는 정말 단 한 번의 시술만으로 자신의 모든 문제점을 없앨 수 있는 마법과 같은 해결책이었다. 터치를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축복으로 여기겠다는 각오는 이미 산산이 부서졌다. 그녀가 통제할 수 없고 다른 이들의 우려를 사고 심지어는 터치를 노리는 사람마저 있었다.
그러니까 오히려 나는 토키와 씨에게 터치를 건네줘야 하는 건가? 만약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나는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마저 미쳤을 때. 캐롤은 왜 그녀가 자신의 동생과 함께. 자신의 발로 조율자의 연구소를 찾았을지를 다시금 생각했다.
그녀도 터치를 잃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동생은 캐롤의 터치로 인해 재단의 세뇌에서 잠시 벗어났고, 그 뒤 함께 생활하던 도중 언니의 염원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동생은 기억 소거의 절차나 자신의 언니가 겪게 될 일을 모른 채 재단과 언니 모두에게 득이 될 방도를 생각해냈다. 재단은 막대한 샤이닝을 얻고 언니는 터치에서 해방되면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는가?
그게 아니었다. 동생은 기껏 벗어난 재단의 손아귀 속에 떨어졌다. 그리고 캐롤 본인은 온갖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
그 일련의 일이 모두. 캐롤 본인의 해방되고자 하는 욕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토키와가 그녀의 손가락에 닿고서 조율자의 정체성을 깨우친 것도. 영안로에서 나온 직후의 그녀가 스스로의 그러한 기억과 샤이닝을 중지에 담은 채로 잘랐기에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캐롤은 문득 생각했다. 또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캐롤 브라이트: …토키와 씨는 조율자의 파편인 저의 손가락을 만지신 뒤에. 조율자라는 정체성을 찾게 되었다고 했죠?
나나시: 네. 정확히 어떤 원리로 그런 기억이 토키와한테 갔는지는 몰라도… 그토록 샤이닝이 잘 정착되었다는 건. 무서운 일이에요.
캐롤 브라이트: 그렇다면 그 안에는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샤이닝이 들어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저에게서 그것을 분리해냈을지도요…
캐롤 브라이트: 하지만… 그 손가락은 저의 손가락이었었잖아요? 토키와 씨는 그저 숙주일 뿐이에요. 몸에 샤이닝과 터치가 정착했을지언정, 아무리 조율자라도 토키와 씨는 아직 온전한 조율자가 되지 못했어요…
캐롤은 자신의 체질이 싫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몸에 남은 터치도 줘 버리고 싶었다. 그 생각이 실수를 낳았고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면… 정말 안고 가야만 한다면… 전부 안고 가야 한다.
캐롤은 나나시의 걱정이 담긴 얼굴을 보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었다.
함께한다면 괜찮을지도 몰랐다.
캐롤 브라이트: 그렇다면, 제가 다시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캐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히무로 시라베: 이제 나와도 좋다. 캐롤 브라이트. 상황이 해제되었다.
그 목소리는 완벽하게 히무로 본인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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