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지?
너무도 시끄럽다. 모든 사람들이 너무 시끄러워…
내 이름을 너무 많이 부른다…
아. 어지럽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 일로부터 얼마나 지난 거지…?
그 일이 뭐였더라.
아 맞아. 그 일은…
더 단크 타워
챕터 4: < 황금 원숭이의 손길 >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최종적으로 토키와 아유키에게 심문 기회를 얻은 사람은 나와 히무로였다.
히무로는 이미 그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사실을 숨긴 적이 있으니 공평성을 위해 그와 반대편의 입장인 사람 또한 사랑의 열쇠를 사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제츠보: 그래야 공평하잖아. 아무리 정신조작이 위험하다지만 기회 정도는 있어야지. 두 사람이 하고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나나시: 내가 할게. 네 말대로 그게 가장 안전할 것 같아.
하기와라 우시오: 그런데 저놈이 꿈에서 정신조작을 쓰면 어떻게 해? 그럼 큰일나는 거 아니야?
이바라 쿠리스: 꿈에서는 정신조작을 못 쓰지.
하기와라 우시오: 쓸 수 있으면?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단정을 지을 수는 없잖아. 정신조작이면 정신이랑 관련된 거니까 꿈에서도 통하지 않을까?
캐롤 브라이트: …사실. 충분히 근거 있는 지적이에요. 그러나 제가 꿈에 나온 사람과 몸이 닿는다고 한들 그 사람에게 터치의 영향이 미치지는 않아요. 그건 진짜 사람이 아니라 제 무의식이 만들어낸 이미지니까요.
히무로 시라베: 샤이닝과 정신조작은 아직 과학적으로 규명될 것이 많은 현상이지만, 신체 접촉이나 구언(口言) 따위의 원인 없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캐롤 브라이트: 맞아요. 실은 저도 그걸 기준으로 꿈이랑 현실을 구분하거든요. 어? 손을 잡았는데 왜 터치가 안 통하지? 아. 꿈이구나. 이런 식으로요.
이바라 쿠리스: 지. 진짜야…? 신기하다… 그럼. 꿈 안에 들어가서 정신조작을 당할 염려는 없다는 거지?
히무로 시라베: 가설은 두 개다. 사랑의 열쇠가 말 그대로 꿈과 꿈을 이어줄 경우. 이 경우에는 두 사람 모두 본인이 아닌 서로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이미지이기에 터치를 포함한 어떤 정신조작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히무로 시라베: 다만 꿈과 꿈을 잇는 것이 아닌 무의식과 무의식 자체를 잇는다면, 토키와 아유키를 상대로 사랑의 열쇠는 쓸 수 없다. 그 경우에는 내가 대신 나서겠다.
하기와라 우시오: …뭘 나선다는 거야? 그보다 꿈이나 무의식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캐롤 브라이트: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게 꿈이죠. 히무로 씨는 무의식과 무의식이 마주치는 건 곧… 정신과 정신이 마주치는 것. 그러니 샤이닝을 기반으로 한 정신조작이 통할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 같아요.
히무로 시라베: 그렇다. 만약 사랑의 열쇠가 그렇게 작용한다면 아무리 간단한 심문 수단일지라도 사용할 수 없다. 무의식이 마주한 끝에 정신조작에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토키와 아유키에게 그럴 용의가 없을지라도 그의 모든 행동은 이미 정신조작이다. 꿈에서의 행동 또한 정신조작이지. 심지어는 무의식에 의해 움직이기에 스스로 통제할 생각도 없으며, 깨어난 뒤 그조차 기억하지 않는 정신조작. 그만한 위험도 없다.
하기와라 우시오: 정신조작 개사기네! 사랑의 열쇠는 더 사기고! 모노로그한테 따져야겠다. 나는 탁월한 유머감각 말곤 가진 게 없는데 눈 한 번 잘못 마주치거나 꿈에 나오기만 해도 죽을 준비 해야 한다고? 지이랄났다!
나나시: 그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토키와에게 쓰는 편이 나을까? 그래도 나는 정신조작에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기도 하고. 여의치 않다면 내 쪽에서도 터치나 딕테이트를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바라 쿠리스: 나. 나나시! 그걸 말해주면 어떻게 해! 비밀 작전으로 해야지!
나나시: 어차피 당하는 사람은 저항할 수도 없고, 끝나면 기억도 못 하는 걸… 괜찮아. 그래도 히무로가 하는 것보다는 내가 하는 편이 낫잖아.
제츠보: 잠깐만.
제츠보가 순간 나를 저지했다. 그리고 말이 이어지지 않자 히무로가 대신 내용을 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시험의 용도로 사용한다면 토키와 아유키에게 사용할 것이 아니라 캐롤 브라이트에게 사용해야 한다.
나나시: 캐롤 씨한테? 아… 캐롤 씨라면 토키와에게 조종당할 위험이 조금도 없어지니까? 맞는 말이야…
히무로 시라베: 우호적인 정신조작 보유자는 흔하지 않다. 적대적인 정신조작 보유자에게 사용하기 전에 시험해 보는 편이 낫겠지.
캐롤 브라이트: 마치 저를 기니피그 취급하시는 투네요.
히무로 시라베: 그렇다. 실험체 취급이다. 표현을 다르게 한들 사실은 달리지지 않는다. 결국 토키와 아유키에게 사랑의 열쇠를 쓰기 전, 그게 안전한지의 여부를 검증하는 것이니.
나나시: 그런. 실험체라니!
캐롤 브라이트: 하아… 됐어요. 솔직하셔서 화도 안 나네요. 저밖에 할 사람이 없으니까 받아들일게요. 그래서 그… 사랑의 열쇠에 당하면 제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 건가요?
히무로 시라베: 그 답은 토키와 아유키가 가지고 있다. 사랑의 열쇠의 영향을 받은 자는 사용자를 소중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했던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말해라.
토키와 아유키: 그게 정확한 뜻이야. 소중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그 카이다조차 나를 친근하게 대하게 만들만치 인식 자체가 친구 이상의 호감도를 가지게끔 바뀌어.
캐롤 브라이트: 이상한 걸 한 건 아니겠죠?
토키와 아유키: 오히려 당할까봐 무서웠어요. 카이다는 꿈에서 저를 마음대로 끌고 다녔다고요. 목이 따이지는 않을까 죽도록 눈치만 봤는데… 저니까 말로 구슬려서 같이 다닌 거라고요.
나나시: 같이 다녀? 어디를?
토키와 아유키: 놀이공원. 왜인지는 몰라도 카이다는 거기에 가고 싶어 하던 모양이야. 옷도 걔랑은 워낙 안 어울리는 원피스같은 걸 입고서 유독 들떴던데…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지던걸.
하기와라 우시오: 와. 진짜 상상 안 된다… 아니 잠깐. 카이다가 그렇게 상큼했다면 나 진짜 스윗무로 얘기는 듣고 싶지 않은데. 그 얘기 시작할 거면 그냥 나 나갈래.
히무로 시라베: 나에게도 사랑의 열쇠가 통하던가? 통했다면 어떤 광경이 나왔지? 내가 사랑의 열쇠를 당했다고 추정되는 밤. 나는 불쾌함밖에 느끼지 않았다. 나에게서 무엇을 들은 거냐. 대답해라.
토키와 아유키: 제대로 통하지도 않았는데 과잉해석하긴… 카텟 기관의 술수나 낌새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아내지 못했어. 네가 자기 꿈이 조종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잖아. 편리하게.
알아챘다고? 나는 토키와의 말을 듣고 사랑의 열쇠에도 파훼법이 있다는 소식에 크게 안도했다. 방도가 있기는 하구나! 잠을 잘 때마다 사랑의 열쇠에 당하지는 않을까 가슴을 졸일 필요가 없어!
토키와 아유키: 나도 그딴 걸 어떻게 행복한 상황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내가 본 그대로 말해줄게. 너는 수많은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있었어. 내가 본적이 있거나 없는 것 같은 많은 사람들이 너에게 박수를 보냈지. 네 이름을 부르면서… 그 중에는 마유즈미도 있었어. 이렇게 말하더라고. 지금까지 수고 많았다. 여태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은 그저 연극일 뿐이었다… 수많은 죽음, 수많은 이별. 그 모든 게 진짜가 아닌 허구일 뿐이다. 그리고 이제 연극이 끝났으니 너는 새 삶을 살 수 있다고…
하기와라 우시오: 연극이 끝난다라… 무슨 꿈인지 알겠다. 개꿈이네! 연극은 무슨 연극!
히무로 시라베: ……꿈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그 말에 나는 어떻게 반응했지?
토키와 아유키: 마유즈미가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연극이 끝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고 말했고, 너는 문으로 들어가려 했어… 그러다 멈췄고, 이건 가짜라는 말을 하더군.
히무로 시라베: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인가?
토키와 아유키: 그런 것 같아. 그리고 누가 꿈을 조작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듯이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다른 사람들과 표정이 다른 나를 찾아내고서 추궁했어. 그래서 꿈이 깨져버린 거야. 덕분에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고.
나나시: 다행이네… 그보다. 어떻게 네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아낸 거야. 히무로? 사랑의 열쇠를 당하더라도 파훼할 방법이 있어?
하기와라 우시오: …글쎄. 쟤는 사랑의 열쇠가 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그게 있기는 할까?
이바라 쿠리스: 있으니까 꿈인 걸 알아낸 거지! 우리도 그거 익혀 보자! 그러면 사랑의 열쇠가 아무리 위험해도, 꿈이란 걸 기억하면서 깨어날 수 있어!
히무로 시라베: 내가 예상컨대 그것은 방법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이다. 그 비현실성을 눈치챘을 뿐이지.
히무로는 그렇게 말한 뒤 몇 초간 할 말을 정리하는 듯이 말을 멈추었다.
히무로 시라베: …만들어진 꿈의 내용은 나에게 있어 비현실적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챘기에 나는 꿈이 조작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것은 다만 내 꿈이 유독 기괴했다는 점 또한 큰 영향을 미쳤다.
나나시: 내용 자체가 조금 기이하기는 했어. 사람들이 너를 둘러싸고서 지금까지의 인생이 연극이었다며 박수를 보내다니… 오히려 끔찍하지 않나? 그래서 눈치채기 쉬웠던 걸지도 몰라.
히무로 시라베: …그랬을지도 모르겠군. 결국 주안점은 보편적으로 사용 가능한 꿈의 자각법이 무엇이느냐다. 모든 꿈이 나의 것처럼 특이하리라는 법은 없으니. 너희들이 사용하기에 편리한 방법은 현실성 재확인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할 수 있게끔 연습하는 것이다. 꿈과 현실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일을 수시로 시행하면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바라 쿠리스: 인셉션처럼?!
이바라가 다이얼로그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히무로 시라베: 인셉션이 뭐지?
이바라 쿠리스: 영화인데. 꿈 안에 있으면 팽이가 무한정으로 돌아가서 그걸 보며 등장인물들이 자기가 꿈 안에 있는지 아닌지를 구별해.
하기와라 우시오: 팽이를 지금 어디서 구해?
히무로 시라베: 팽이는 필요 없다. 적절한 방법을 알려줄 테니 그것을 연습해라.
토키와 아유키: …어디 가는 거야?
히무로 시라베: 곧 올테니 기다려라. 너는 어차피 풀 수 없다.
다이얼로그에서 문이 끼익 열리는 소리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직후 히무로는 목소리를 낮춘 채로 이렇게 전했다.
히무로 시라베: 중지가 네 손등에 닿을 수 있도록 꺾어 보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관절과 뼈의 구조 때문에 불가능하지만, 꿈에서는 가능하다. 주기적으로 중지를 뒤로 꺾으며 그것이 손등에 닿는지를 확인해라.
히무로는 토키와에게 그 내용이 들리지 않게끔 방에서 나온 뒤에 그 내용을 전하고 있었다. 짧은 시간 사이에 토키와가 현실성 재확인에 대한 동작을 익힐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만약을 대비하는 히무로의 태도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입장에서는 더할나위 없이 든든했다.
이바라 쿠리스: 확인! 알겠어!
히무로가 문을 다시 열고 그의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는 동안 나는 크레딧 상점에 들어가 사랑의 열쇠를 구매했다. 바닥에서부터 작은 하트 모양 장식이 달린 열쇠가 솟아올랐다.
나나시: 그래서. 사랑의 열쇠로 만들어진 꿈 속에서도 터치가 통하느냐, 그리고 사랑의 열쇠를 당한 와중 현실성 재확인을 통해 지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느냐… 를 시험하면 되는 거지?
캐롤 브라이트: 그런데요. 꼭 제가 터치를 당해야 하나요? 제가 나나시 씨한테 쓰면 안 돼요? 제가 헤롱헤롱 홀린 모습은 보여주기 싫어요.
히무로 시라베: 꼭 네가 호감을 표시하는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토키와 아유키의 증언에 따르면 카이다 쿠로하 또한 환상 속에서 토키와 아유키에게 애정을 표현하지는 않았고, 나 또한 그랬다. 네가 이상적이라 여기는 상황 혹은 욕망하는 바가 꿈에 반영되겠지.
나나시: 뭐라고?
나는 히무로의 말을 듣고서 단 한 가지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큰일났다.
사랑의 열쇠는 절대 당해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 적어도 내가 캐롤 씨에게 당하는 것 만큼은 막아야 했다. 캐롤 씨 또한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만, 나만큼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캐롤 브라이트: 요. 욕망이요…? 저 이거 안 하면 안 돼요?
히무로 시라베: 이 실험은 강대한 샤이닝과 정신조작 능력을 가진 사람. 즉 토키와 아유키에게 대응되는 사람에게 사랑의 열쇠를 사용한 결과를 관찰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이름 없는 남자에게 사용하는 것은 본 목적에서 벗어나는 일이지. 이름 없는 남자가 캐롤 브라이트에게 사용해야 한다.
캐롤 브라이트: 하아… 진짜 하기 싫은데…
캐롤 씨는 자신의 왼손을 그녀의 눈높이까지 들었다. 그러다 비어있는 중지의 자리를 몇 초간 보더니 "아." 하는 외마디 말과 함께 오른손을 들고 똑같은 동작을 했다. 그녀의 오른쪽 손가락들이 몇 번 까딱이며 뒤롤 젖혀지려 했는데, 이는 중지 하나만 뒤로 젖히려 애쓰는 건 손가락의 구조상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나의 가슴을 문득 아프게 만든 것은 그녀의 왼손 또한 무의식적으로 뒤로 까딱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지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듯. 무의식적으로.
나나시: 아…
하기와라 우시오: 하… 씁… 이건…
이바라 쿠리스: 캐롤… 많이 불편하겠다…
캐롤 브라이트: 네? 아뇨. 하나 정도야 괜찮아요. 그렇게까지 불쌍하게 여기실 필요 없어요. 정말요! 그보다 여러분들도 연습해 두셔야죠. 버릇이 들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요!
나나시: 그. 그래요. 연습해 둬야겠네요…
그리고 방에 있는 네 명은 서로 열심히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이게 진짜 통할지 모르겠다. 다른 방법은 없어?
히무로 시라베: 다른 방법을 알려 주었다간 오히려 주의가 분산된다.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데에는 역효과가 나겠지. 연습이나 제대로 해라.
캐롤 브라이트: 이러고 있으니까 뭔가 재밌네요. 율동하는 것 같고… 손가락 딸랑딸랑. 같은 느낌이에요.
나나시: …최대한 빨리 끝낼게요. 캐롤 씨.
캐롤 브라이트: 네? 아뇨.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으니까 시간 들이셔도 돼요.
하기와라 우시오: 정 불편하면 그냥 나나시 너도 한 번 당해 줘. 그럼 공평하잖아?
나나시: 으윽… 그. 그건…
이바라 쿠리스: 듣고 보니 그러네! 그냥 서로 시간 들이면서 서로 어떤 상상 하고 지내는지 한 번 훑어보는 건 어때? 재미있겠다! 서로 막 놀리고!
캐롤 브라이트: 그건 싫어요.
나나시: 응. 진짜 별로다.
이바라 쿠리스: 너. 너무해…! 그런 말까지 하다니!
하기와라 우시오: 별로긴 해.
이바라 쿠리스: 어이! 너까지! 너 가만히 안 둔다. 오늘 밤에 네 머릿속에 들어갈 테니까 기대해! 지금 열심히 연습해두는 게 좋을 걸!
하기와라 우시오: 아! 왜 지랄이야?! 그럼 내가 먼저 써야지? 아니다. 오늘 밤 새야겠다! 밤 새고 있다가 네가 먼저 자면 바로 사랑의 열쇠로 들어갈란다!
이바라 쿠리스: 그러셔? 그럼 난 너보다 무조건 5분 더 깨어 있어서 너한테 써.
하기와라 우시오: 우우우. 진짜 유치하고 철없으시네요… 그런데! 나는 너보다 무조건 2배 더 늦게 자.
이바라 쿠리스: 그렇기 때문에 너는 다다음날에 나보다 2배 빨리 잠에 들고 이건 앞으로 절대 변하지 않아.
하기와라 우시오: 와! 너무 유치해! 그런데 나는 토키와야! 나는 다다음날도 잠을 안 자고 다다다음날도 잠을 안 자서 사랑의 열쇠에 무적이야!
보고 있으니까 재밌네…
하기와라 우시오: 말하고 보니까 말인데… 야. 토키와 저거 잠 안 자는 데에 고수 아니야? 불침번 짬이 엄청나잖아. 쟤. 이거 사랑의 열쇠 쓸 수 있기는 해?
히무로 시라베: 그를 잠재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잠들지 못하게 막는 법만큼이나 사람이 쉽게 잠들게끔 하는 법도 많기 때문이다.
제츠보: 그 방법들 중 하나만 쓰면 돼. 양호실에 수면제가 있잖아. 그거 먹이면 쉽게 재울 수 있을 거야. 나나시랑 캐롤 너희도 밤까지 기다리지 말고 수면제를 먹어. 카이다가 여섯 알 정도 먹고 바로 잠에 빠졌으니까 너희들한테도 통하겠지.
하기와라 우시오: 수면제 먹이는 것도 일일 것 같은데… 그래도 토키와가 잠에 들기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어서 다행이다. 한 사흘 꼬박 샐 뻔했네.
히무로 시라베: 다행 그 이상이다. 먹이고 싶지 않은 것을 먹이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니.
나나시: …이건 못 들은 셈 치자. 무서워지려고 해. 아무튼… 일단 수면제가 있으니까 그걸 먹고 사랑의 열쇠를 써 볼까…?
이바라 쿠리스: 다 같이 갔다 오자! 또 괜히 따로따로 움직이다가 문제 생기긴 싫어!
캐롤 브라이트: 잠은 어디서 잘까요? 침대는 둘이서 쓰기에 약간 좁던데…
제츠보: 각자 숙소로 가서 자던가. 그치만 카나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유념해. 플라잉로봇도 부숴뒀고 너희는 기계도 아니니까, 걔가 너희들에게 뭘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바라 쿠리스: 그보다 걔 지금 어디서 뭐 하는 거야? 이 난리가 났는데 걱정되게…
하기와라 우시오: 저번에 하고 있는 일 있다며 되게 까칠했잖아. 그냥 일이 있구나 하고 내버려두자.
조율자.
무서운 놈.
절대 두 발로 걸어다니게 두어서는 안 되는 놈이다.
"토키와… 아유키…!"
"그래. 카나리. 케이토. 우리를 왜 불렀어? 하고 싶는 말이 뭐지?"
토키와는 카나리를 내려다보며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카나리는 토키와의 눈빛에서 기이한 거부감을 느꼈다. 토키와 아유키가 의자에서 꼼짝 하지 않고 있음도 그에 한몫했다.
닮았다. 닮았어. 그때랑 똑같다.
"쉬는 시간을 늘려 달라고?"
똑딱맨의 아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누가 그런 자격이라도 주었다는 것처럼. 물론 똑딱맨의 아들은 고용주고 그는 피고용인이었으나, 그게 웬 상위존재인 양 남을 멸시해도 좋다는 뜻이었던가?
손 하나도 까딱 안 하네. 카나리는 토키와의 눈에 담겨 있는 권력자의 눈앞에 얼어붙었다. 어떻게 저렇게 냉담할 수가 있지?
내가 영안로에서 탑으로 돌아왔을 때 그놈의 얼굴을 보고 기절한 이유가 그거다. 다들 내가 긴장이 풀려서, 기운이 없어서 기절한 줄 알았지.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놈에게서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두려움을.
지금 잡혀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놈은 반드시 풀려난다. 나는 안다. 저건 그 무서운 놈의 반의 반도 안 된다는 걸. 아무도 저놈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아직 시체 발견 방송이 나오지 않은 거 보면 분명해.
그러니 내가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
"Jane!"
으… 머리 아파…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Jane!"
내가 기억하기로는 분명…
이바라 쿠리스: 그… 어느 약이 수면제라고 했었더라?
제츠보: 자낙스. 하얀색 통이야.
하기와라 우시오: 모든 통이 하얀 색이잖아! 너 눈에 카메라 제대로 달린 거 맞아?
제츠보: 색을 찾지 말고 이름을 찾아! 뚜껑까지 하얀 통 중에서 자낙스라고 있어. 벤조디아제핀 계열 약이니까 성분표 읽고 고르면 돼!
캐롤 브라이트: 자낙스… 와. 여기서 다시 보네…
"Jane!"
나나시: 잠깐… 벤조디아제핀…? 이거 중독되는 약 아니야? 되게 안 좋은 느낌이 드는데.
제츠보: 맞아. 자낙스에 미쳐서 그걸 달고 다니던 사람도 많았지. 리스테린을 마시고 다닌다거나…
캐롤 브라이트: 유명 연예인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도 유명하죠. 그래도 안정 효과는 확실해서 처방받은 만큼만 먹고 절제만 잘 하면 돼요. 한 번에 너무 많이 먹거나 못 끊고 서서히 양을 늘려가다가 큰일이 나는 거죠…
나나시: 제가 겁이 많아서 그런 건지 몰라도. 도무지 안전한 약처럼 들리지가 않네요.
하기와라 우시오: 그런데 제츠보가 이걸 카이다한테 여섯 알 먹였다고 하지 않았냐?
캐롤 브라이트: 네?! 자낙스를 여섯 알…?!
제츠보: 카이다는 독이 안 통하는 만큼 약효도 안 통해서 그래. 캐롤. 네 동생은 자낙스랑 리스테린 한 통을 들이부어도 안 죽을 걸. 걱정 안 해도 돼.
하기와라 우시오: 애초에 토키와한테 조종당하는 마당에 중독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 웁! 읍읍?!
나나시: 저. 빠. 빨리 자낙스나 먹을까요?!
이바라 쿠리스: 네. 네가 나 대신에 나서는 건 처음이다? 나나시…
그래서 자낙스 한 알을 물 한 컵이랑 같이 먹고… 최소한의 위험 요소도 없애기 위해 한 침대에 누웠지… 하기와라 씨가 지금이라도 나가 주면 좋겠느냐고 놀리고… 웃으니까 긴장이 풀리고 약기운이 돌더니…
"Jane!"
복도에 놓인 캐비닛. 영어. 몸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한 청소년들. 성장호르몬의 저주와 싸우기 위해 데오도란트를 뿌리기 시작하며, 저마다의 민트향을 풍기는 이들.
그곳은 고등학교였다. 그것도 그녀가 잘 아는 곳. 베이츠 하이스쿨. 나는 그것을 깨닫자마자 크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내가 여기에 왜 있는 거야? 나는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어떻게 도망왔는데! 내가 저지른 짓이 있는데 여기에 다시 올 수는…
"Jane!"
그리고 나는 미셸을 보았다.
다시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미셸을.
"(정말 오랜만이다. 제인! 지금껏 어디에 있었어?)"
미셸은 나이가 조금 들어 보였다. 하기야 여태껏 시간이 지났는데 미셸이 아직도 그때 그 시절의 소녀일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고, 그녀를 보자마자 반가움에 이렇게 소리치게 되었다.
캐롤 브라이트: Oh! Michell!
미국을 떠난 뒤로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았던 말들이 자연스럽게 발음되었다.
캐롤 브라이트: (오 미셸. 정말로 너로구나. 네가 나를 영영 잊은 줄 알았어!)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죽을 때까지 영영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미셸은 나를 기억하고 있다니 너무나 반갑고 기뻤다. 저절로 신이 났고, 여태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으나 그 전 나는 미셀에게 항상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캐롤 브라이트: (네가 나를 잊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해. 나는 무서웠어. 미셸. 손가락질을 당할까 봐 겁에 질렸던 거야. 네가 나를 잊게 만들어서 미안해.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제발 용서해 줘.)
"(나는 이미 용서했어. 제인. 다 이해해. 다시 보니까 정말 기쁘다. 너 키도 많이 컸구나?")
캐롤 브라이트: (후! 단지 키만 큰 게 아니지.)
나는 누구도 못 알아볼 만치 예뻐진 나의 자태를 뽐내며 머리카락을 한 번 흔들어 넘겨 그 치렁치렁함을 과시했다. 미셸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맞아. 너 머핀과 팝 타르트를 너무 많이 먹었어.)"
캐롤 브라이트: (하하! 닥쳐!)
내 민감한 부분을 가지고 놀린 게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 가만히 안 두었겠지만, 미셸이 말하니 웃고 넘어갈 만한 일 정도밖에 안 되었다. 나는 모든 게 다행이라고 느꼈다.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었다. 오해도 풀 수 있다니!
기뻐. 다시 만나서 기뻐. 영영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미셸과의 추억은 그저 내 기억 속에만 남아있을 뿐 이제는 과거의 일. 생각할 때마다 계속 상처를 입을 거라 생각했는데…
"(늦겠다. 교실로 가자! 데스자딘 선생님은 지각 절대 안 봐주잖아!)"
나는 달리는 미셸을 따라갔다. 몸이 왜인지 무거웠고 달리는 데에 속도가 나지 않았다. 몸에 힘이 없어서 흐느적흐느적거리는 감각이었다. 그렇게 어떤 교실로 가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뛰던 와중. 양옆으로 갈라진 무리들이 나를 봤다.
나는 그들과 눈이 닿자마자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찰나의 순간 사이에 나는 나의 존재로부터 비롯된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몸을 떨게 되었다. 오. 또 여기야. 어쩌지? 속닥속닥거리는 소리가 벌써 들린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아직 여기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몸이 조금이라도 닿지 않게끔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움츠린 채로 구석에 숨어서 도망다니던 그 복도에 다시…
"(저길 봐! 제인이다!)"
또 나를 캐리라고 부르면서…
"(아아. 제인! 제인이 나를 봤어! 오늘은 정말 최고의 날이야!)"
"(나도 봐줘. 제인!)"
캐롤 브라이트: 제인…?
나는 고개를 슬며시 들고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지 보았다. 그들은 나를 부럽다는 듯이, 멋있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그들은 원래 나를 캐리라고 부르면서 내 사물함을 헤집거나 내가 발표를 하려 자리에서 일어나면 내 말투를 따라하며 나를 비웃는…
"(오늘도 정말 멋있다. 제인. 그 옷이 진짜 잘 어울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나한테 유독 모질게 굴던 한 동양계 소녀였다. 나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캐롤 브라이트: (내 금발을 싫어하지 않았어?)
"(아니. 싫어하긴? 왜?)"
캐롤 브라이트: 아닌데. 분명 싫어했는데. 내가 아무리 자연적으로 금발로 변하는 것이라고 몇 번이나 말해도 너는 백인이 되고 싶은 거라고, 그들한테 편입되고 싶은 거라는 소리만 돌아왔었지…
억울해. 애초에 머리 색이 바뀐다고 해서 그들이 나를 동족으로 여길리가 없는데… 나는 그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불쾌감만을 일으키는 존재가 되었어…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시로미 치나미: 언니!
나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랐다.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 네가 여기에 어떻게 있어?
시로미 치나미: 어떻게 있기는. 같이 비행기 타고 왔잖아!
캐롤 브라이트: 비행기…?
내가 치나미와 같이 입양되어서 미국에 왔던가?
나는 다시금 이렇게 생각했다.
다행이다! 떨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같이 미국에 올 수 있어서. 혼자 내버려두지 않아서 너무 잘 됐다…! 영영 헤어져 버렸다면 정말 큰일 나는 거였는데…!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질 뻔했어! 치나미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내버려둘 뻔했다고!
시로미 치나미: 정말 잘 됐다. 그치이!
캐롤 브라이트: 맞아. 치나미. 네 말이 다 맞아!
자매끼리 좋은 시간을 보내는 와중 별 관심도 생기지 않는 것들은 계속 소리쳐댔다.
"(제인. 부탁이니까 한 번이라도 내게 키스해 줘!)"
"(나를 불쌍하게 여겨 줘. 제인! 나는 너 없이 살 수 없어!)"
"(나중에 껌 씹을 거면 어디에 뱉을 건지 자세히 알려줘!)"
으. 저건 싫은데…
"(오. 제인! 그대는 왜 제인인가요?!)"
"(네 입꼬리에 드리우는 얕은 미소 하나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을 바칠 수 있어! 나를 태워도 좋아!)"
나를 보며 두 손 모아 애원하는 자들을 보며 나는 측은함을 느꼈다. 그들의 사랑이 보답받을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지 않던가.
캐롤 브라이트: (미안하게 됐어요. 그렇지만 이미 저에게는 정해둔 상대가 있거든요.)
그 사람은 어디에 있지? 그 사람도 이 학교에 다녔던가? 나를 구하러 와준 사람은? 나의 아픔을 들여다본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어딘가에는 있어야 하는데. 분명 있을 텐데. 이 사람이 나를 떠날리가 없으니까. 아무튼 간에 그는 나를 구하러 오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나의 파괴되지 않는 것. 나의 영웅. 그 사람은.
나나시: 캐롤 씨!
아. 저기에 있다!
캐롤 브라이트: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오셨군요! 어디에 있나 싶었어요!
나나시 씨가 주변을 이상하다는 듯이 둘러보며 다가와. 내 손을 덥썩 붙잡았다. 그 모습을 본 남자애들이 그 자리에서 무너지며 가슴이 찢어질 듯이 울어댔다.
나나시: 뭐. 뭐야…? 왜 이래?
캐롤 브라이트: 저렇게들 저를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그렇지만 이제는 많이 늦은 것 같네요. 몇 년 정도 늦었죠. 그래도 보답할 필요 없는 사랑을 받는 게 나쁜 기분은 아니네요.
"(으헝헝헝헝!)"
"(오. 제인. 내 마음이 아파! 너무 아파!)"
나나시: 세상에…
나나시 씨는 왜인지 내 손을 여전히 꽉 잡은 채로 주변을 경계하듯 훑어보며 인파가 없는 곳을 향해 나를 이끌기 시작했다.
캐롤 브라이트: 혹시 지금 질투하세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거의 다 싫어하거든요. 치나미 빼고. 미셀 빼고…
그러고보니 두 사람은 지금 어디갔지…? 뭔가 일어나는 일들이 맥락이 없는 것 같은데…
나나시: 이어지지 않네…
나나시 씨는 문득 서로 붙잡고 있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캐롤 브라이트: 뭐가요?
나나시: 혹시 모르니까 나머지 것도… 그. 캐롤 씨. 당신 눈을 잠깐 보여 주세요. 그게… 얼마나 예뻤는지 보고 싶어서요.
캐롤 브라이트: 어머! 오늘따라 직설적이시네요! 음. 어떻게 할까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시면 생각해 볼게요.
그의 표정이 알쏭달쏭해지고 난처하게 될 때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캐롤 브라이트: 보여드릴게요! 후후… 그렇게까지 난색을 표하실 것까진 없잖아요?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캐롤 브라이트: 어때요? 예뻐요?
나나시: 네. 예쁘네요. 목소리도 예쁘고요… 그렇지만 오버룩, 딕테이트, 터치 모두 이어지지 않는 걸 확인했어요.
그게 뭐더라?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아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로 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면 눈 뜨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후불로 받는 일이었다.
나는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 그가 나에게서 시선을 뗀 틈을 타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캐롤 브라이트: 뫄!
나나시: 으왁! 캐. 캐롤 씨!
캐롤 브라이트: 아하하하하! 너무 놀라시는 거 아니에요? 아. 재밌다. 한 번 더 할까요?
나나시: ……정신 차려. 집중해. 후우… 홀리지 말고. 집중…
나나시 씨는 달아오른 자기 뺨을 약하게 찰싹찰싹 때렸다. 그게 뭐 하는 건지 물어보려는 찰나 나나시 씨가 내게 물었다.
나나시: ……제가 알기로 여기는 행복한 곳이여야 하는데. 캐롤 씨.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어요?
캐롤 브라이트: 아. 여기요!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요. 한때는 여기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저를 따돌린 적도 있었죠. 이제는 아니지만요!
나나시 씨가 마음이 어수선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나시: …괜히 물어봤네요.
캐롤 브라이트: 네? 괜찮아요! 이제 다 옛날 얘기고. 이제 다들 저 좋아해 주고요. 아. 그리고 저 미셸이랑 오해도 풀었어요. 미셸이 저를 용서한대요! 치나미도 여기 있고요! 이보다 좋을 수가 없어요!
나나시: 솔직히 말하자면 상황을 조금 봐서 여기에 더 오래 머물까 싶기도 했어요. 당신이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잠깐의 좋은 시간은 좋은 시간 그대로일 테니까요. 즐거운 꿈을 꾸었다는 기색이라도 남겨 드리고자 했지만 그건 결국 공허한 일이고… 약속을 깰 수는 없죠.
캐롤 브라이트: 저기. 아까부터 말씀이 어려워서 알아듣기가 어려워요.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나나시: 캐롤 씨. 현실성 재확인이라고 들어보셨어요?
들어봤어. 맞아.
해야 하는 게 있었는데. 연습해야 하는 거. 그게 현실성 재확인이었지. 손을… 내 눈 높이까지 올리고서… 이렇게 양손을 눈 높이로. 그리고. 율동.
양손 중지를 까딱이면서…
양손?
캐롤 브라이트: …분명 잘랐는데?
왜 손가락이 열 개지?
내가 멍하니 열 개의 손가락을 보고 있는 동안 연습해 두었던(언제? 어디서부터? 왜?) 동작대로 내 손가락들이 움직였다. 양손의 중지가 뒤로 젖혀져 내 손등까지 닿았다. 내가 알기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캐롤 브라이트: 아… 꿈이구나…
나나시: 유감이에요. 캐롤 씨.
나나시 씨가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들떠 있던 기분은 그대로 사그라들었다.
나는 허무했고, 슬펐고, 속은 느낌이라 기분이 상했다.
캐롤 브라이트: 흐흐흐…
그런데 한편으로는 코웃음을 치면서 낄낄거리는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어쩐지 일이 너무 잘 풀리더라니. 하면서.
지금껏 정말 지난 일이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이딴 꿈을 꿀 정도로 내가 사람에 굶주렸고 되갚아주지 못해서 안달이 났다는 걸 곱씹으며…
캐롤 브라이트: 윽…
눈을 뜨자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내 바로 옆에서 걱정하는 목소리도 들려 왔다. 내가 잘 아는 나나시 씨의 목소리다.
나나시: 괜찮으세요. 캐롤 씨?
나는 홀린 듯이 나의 왼손을 보았다.
그곳에 중지는 없었다.
이바라 쿠리스: 무슨 꿈 꿨는지 기억 나? 캐롤? 터치 이어졌어?
나나시: 터치는 안 이어졌어. 그리고 아마 기억은 없으실 거야. 히무로나 카이다에게 기억이 없는 것처럼…
나나시 씨의 말마따나 나는 내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러나 대략 어떤 꿈이었는지의 느낌이 있기는 했다.
캐롤 브라이트: …기억은 없어요. 그런데 왜인지… 웃긴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이바라 쿠리스: 그래? 역시 사랑의 열쇠를 당하면 행복한 꿈을 꾸나 보네…?
캐롤 브라이트: 아뇨. 행복한 꿈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나의 입에서는 왜인지 다시 웃음이 나왔다.
캐롤 브라이트: 그냥… 웃긴 꿈이었어요.
히무로 시라베: 꿈 속에서 정신조작은 통하지 않는다는군.
토키와 아유키의 표정이 굳었다. 사랑의 열쇠로 인한 꿈 안에서 정신조작이 통하지 않으니 다른 이들이 그에게 사랑의 열쇠를 쓰지 않을 이유 또한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이란 빠르나 늦으나 꿈 속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털어놓는 일밖에 없게 되었다.
히무로 시라베: 지금 먹지 않으면 네 코를 막은 뒤 자낙스를 밀어넣고 네 입에 물을 흘려 넣을 것이다. 고통스러운 과정이 되겠지. 어차피 먹을 수밖에 없는 약이니 차라리 지금 먹는 것을 추천하겠다.
토키와 아유키: …내 꿈에 들어올지라도 네가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는 없을 거야. 지금 네가 물어볼 만한 내용은 어떻게 카이다를 풀어주거나 나의 정신조작을 양도할 수 있냐는 것일 텐데. 나도 모르거든. 이 능력은 이미 나의 것이야. 그리고 너는 나를 가둬두는 것 말고는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히무로 시라베: 그것은 심문이 끝난 뒤에야 밝혀질 일이다. 네가 현명하다면 지금 당장 자낙스를 먹는 것이 가장 나은 선택이라는 것을 알 테지. 너는 갇혔고, 너를 구하러 올 사람도 없다. 그리고 네가 열 번 저항할지라도 나는 열 번의 자낙스 알약과 물을 너에게 먹일 수 있다.
명확한 끝을 주어야 한다. 심문 대상자를 무너뜨리는 것은 심문 대상자 본인이다. 나는 그것에 도움을 주고 그가 스스로를 배신할 만한 환경을 조성할 뿐.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 진작 이렇게 했어야지. 히무로. 왜 나를 풀어둬서 사람들을 죽게 만든거야?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서 토키와 아유키가 나의 말을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시간을 주었다.
히무로 시라베: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말해라.
토키와 아유키: 준비됐어. 지금 해.
결국 토키와 아유키는 자낙스를 삼켰다.
히무로 시라베: 혀 밑에 숨길 생각 마라.
토키와 아유키: 안 숨겨! 협조해줘도 그런 식으로 나오긴…!
토키와 아유키는 성을 냈다. 혀의 밑 등 알약을 숨길 만한 공간을 한 번 살핀 이후에야 나는 그가 자낙스를 삼켰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다이얼로그를 들어 그 소식을 전했다.
히무로 시라베: 토키와 아유키가 수면제를 먹었다. 잠에 빠지면 신호를 주겠다.
그리고 나는 눈을 부릅뜬 토키와 아유키를 지켜보았다. 그가 언젠가 잠에 빠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순수한 의지력만으로 화학작용을 이겨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상 그도 초인이 아닌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또한 잠에 들면, 도구형 정신조작에 당할 수밖에 없는 미약한 인간이었다.
제츠보: 카이다. 제정신을 차릴 생각이 있기는 해?
카이다는 내 방에 수갑 여러 개와 케이블 타이로 꽁꽁 묶여 있었다. 그러나 카이다는 정신을 차린 이래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반복하며 몸을 생선처럼 펄떡였다. 살아있는 생선을 본 지가 오래되었지만, 적어도 움직임만큼은 생선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다 쿠로하: 으윽. 그그극…
제츠보: 네가 이렇게 날뛰어대면 너한테도 좋을 게 없어. 네 언니가 보면 가슴아파할 걸. 정말. 이래도 말을 안 들어? 정말 은혜도 모르는 여동생이구나?
다이얼로그를 그래서 카이다와 멀리 두기도 했지만 버젓이 들리는 소음은 소문보다 발이 빨랐다. 곧 캐롤이 내 숙소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캐롤 브라이트: 제츠보 씨. 저기… 혼자서만 치나미를 보고 계시다니 번거로우실 것 같아서 도우러 왔어요.
제츠보: 동생 걱정돼서 왔어? 말은 고마워. 그렇지만 네 동생 꼴을 안 보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할걸.
번거롭기야 했다. 살면서 들어본 병수발이라곤 감기 걸린 노네임 이마에 수건 올려주는 게 다였던지라 카이다의 입에 맺힌 거품을 닦는 건 좀처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캐롤 브라이트: 그래도 봐야겠어요. 부탁드릴게요…
제츠보: 혹시나 싶어서 하는 말인데. 물리지 않게 조심해.
카이다는 나를 묶어두려는 것을 명령으로 받았다. 그렇기에 묶여있는 채로도 근육을 이리저리 움직여대며 몸을 굴렸다. 그리고 나를 붙잡으면 자기 목과 어깨 사이에 나의 다리를 끼우고서 나를 붙들어두려고 했다.
나는 문을 열어 주었지만, 캐롤도 자기 여동생이 내 다리에 매달려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것도 목과 어깨로.
캐롤 브라이트: 제. 제츠보 씨! 괜찮으세요? 치나미. 어서 놓아줘!
제츠보: 지금 얘는 누구 말도 안 들어. 정말로. 토키와가 직접 풀어주지 않으면 아무 말도 못 들을 거야. 그냥 그대로 둬… 나야 사실 힘으로라도 끌고 다닐 수 있고, 괜히 나 잡겠다고 이리저리 기어다니면 얘 몸만 상하거든.
아차. 몸이 상했냐며 또 호들갑 피우겠네.
제츠보: 몸이 상했다는 건 조금 센 표현이고. 정확히는 여기저기 긁히는 거지. 케이블 타이나 수갑이 피부랑 닿은 부분 말이야. 그래도 카이다 가죽이… 피부가 워낙 튼튼해서 크게 다치지는 않을 거야. 약간 짓무르거나 자국이 남는 정도려나…?
카이다 쿠로하: 그르륵.
나는 또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꼬여 버린 카이다의 관절을 원래대로 풀어 놓았다. 그걸 보고 캐롤은 말했다.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를 신경 써 주시는 거군요.
제츠보: 신경? 내가? 그것도 센 표현이야. 괜히 귀찮은 일 없게끔 처리해 두는 거지… 네가 듣기에는 조금 거북한 말이겠지만 나는 얘랑 있는 동안 나쁜 기억만 잔뜩 있었거든. 매일매일 나한테 욕을 하고 기계라며 모욕감을 주더라니까.
캐롤 브라이트: 그건… 정말 죄송해요.
제츠보: 그래. 좀 죄송했으면 좋겠어. 이런 상황에 남들 뒤치닥꺼리나 하는 게 내 소임이긴 하지만, 결국 얘 때문에 벌어진 일이 많거든. 당장 일이 조금만 틀어졌어도 오늘 탑에 피가 흥건하게 고일 수도 있었어.
제츠보: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너. 약간 무책임한 거 아니야? 여동생 지키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네 여동생은 전문 살인자야. 맞설 수 있는 게 나 하나였다고. 그런데 네 여동생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다 거부하고. 그런 와중에 나나시와 희희낙락 지내다니?
캐롤 브라이트: 그… 그건…
사실 캐롤에게는 아마도 그럴 의도가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나도 캐롤의 생각을 100%는 모르니까. 아마도.
세 사람이 영안로에서 돌아온 시점부터 정신조작 보유자들과 그 측근을 적대하는 히무로가 있으니, 카이다의 억지력이 나인 만큼 그들에게 있어 나의 억지력은 카이다였을 것이다. 카이다가 불구가 되거나 조금이라도 거동의 제약이 생기는 순간. 히무로가 단독으로 정신조작 탄압 시도를 나선다고 한들 내가 그것에 조금이라도 호응하면 자기네들은 끝장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결국 가족이니 캐롤한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거야. 어르고 달래도 애가 단단히 꼬여서 말을 못 알아먹는 걸 어떻게 해? 아마 카이다 행보로 가장 곤란해졌던 건 캐롤이겠지.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었다. 그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제츠보: 너. 정말 반성해야 해. 오죽하면 나나시가 너를 등지려 했겠어? 나는 걔가 미친 줄 알았다니까. 얘가 캐롤을 배신하고 카이다 거동을 빼앗는다니. 그럼 영안로에서 죽을 뻔한 건 헛수고가 되는 거잖아. 지금이야 서로 어떻게든 화해한 것 같지만 그땐 정말이지 너희 사이가 끝장난 줄 알았어.
제츠보: 생각해보니까 어이없네. 이 자식… 너까지 제멋대로 살려 놓고서 대의를 위해서라며 너를 배신했잖아. 일방적으로 연을 끊으려고 했어. 또 내다 버리겠다는 거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남 생각을 많이 하며 동시에 자기중심적일 수가 있을까? 웃기지도 않고… 웃음도 안 나와…
그야 기계니까.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는 감정의 작용이 되살아나는 게 아니면. 의식적인 비웃음은 조금 힘들었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는 제츠보 씨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제츠보: 그래. 나한테도 그랬던 것 같아. 자기가 캐롤 씨 위하는 것 때문에 네가 카이다를 떠맡을 수는 없다고 그러던데, 바보같은 짓이야. 카이다를 멈추고 내가 일에서 해방된들 탑에 평화는 찾아오지 않아. 오히려 절박해진 네가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어.
캐롤은 좀처럼 할 말을 꺼내지 못한 채 팔짱을 꼈다.
캐롤 브라이트: ……제가 당연히 폭주라도 할 것 같다는 말씀으로 들리네요. 제츠보 씨.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아무리 저라도 기분이 상해요.
제츠보: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래서 나나시가 바보짓을 했다는 거고. 걔는 너만큼은 홀로 두려 해서는 안 됐어. 다른 모든 사람을 저버리더라도 너를 저버려선 안 됐어.
캐롤 브라이트: 왜죠? 제 가장 큰 심리적 지지기반이 나나시 씨이기 때문인가요? 한 번 죽어본 제가 정신조작을 남용하지 않게 억제하는 사람이 나나시 씨이기 때문인가요?
제츠보: 그것도 이유 중 하나지. 나나시는 충분히 네가 엇나가지 않게 막아주고 있어. 하지만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야. 이 탑 전체보다는 나나시라는 개인과 관련이 있고.
캐롤 브라이트: 엇나가지 않게끔 막으면서 저만을 위해야 한다니. 한 몸으로 두 개의 일을 하라는 건가요?
제츠보: 나는 요구한 적 없어. 나나시 본인이 원해서 그렇게 하는 거야. 너 하나만을 위할지, 너를 제외한 다른 이들을 위할지의 선택에서 나나시는 그 어느것도 선택하지 않았어.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는 저를 선택했어요.
제츠보: 네가 나나시를 선택한 거지. 한 번 너보다 무언가를 우선시하는 것을 보았는데도 나나시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었어. 또 배신하는 게 두려울지라도 어쩔 수 없었던 거야. 사람들의 생각 이상으로 피투된 자는 기투한 자에게 종속되니까. 너는 나나시에게 수갑을 채우고서 종처럼 부렸지만 언제나 우위에 있었던 건 나나시 아니었던가? 너처럼 강한 힘을 가진 존재가 다시는 나를 떠나지 말라고 애원한 거나 다름이 없어. 우스운 일이야.
캐롤 브라이트: 왜 그렇게까지 말씀하세요? 나나시 씨가 당신을 선택하지 않은 게 제 잘못인가요? 제가 알기로 두 분은 저 이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 전부터 당신을 선택하지 않은 게 제 탓일 수는 없잖아요. 그저 불꽃이 튀지 않았던 걸 가지고 저를 비난하지는 마세요.
내가 할 말을 고르고 있던 와중 캐롤이 한 박자 더 빠르게 말했다.
캐롤 브라이트: 죄송해요. 예의가 아니었네요. 그렇지만 정말 왜 이러시는지는 모르겠어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데요?
제츠보: 너를 되살린 사람이 나나시니까… 그러니 아무리 옳은 일이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그게 그놈의 잘못이야… 또 누군가를 버리려고 하는 게!
나는 소리쳤다. 그리고 잠시동안 나와 캐롤은 서로를 바라보고 아무 말이 없었다. 이어지던 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
제츠보: …방금 건 그냥 크래쉬 났다고 생각해 줘. 캐롤. 사실 너한테 이렇게 모질게 말할 필요는 없어. 너는 살아나고 싶어서 살아난 게 아니니까. 나나시가 살렸으니 이러고 있는 거야…
캐롤 브라이트: …저희 모두 그런 걸지도 몰라요.
제츠보: 그래. 우리는 모두 나나시로 인해 되살아났어. 다만 너는 처음부터 인정을 받은 쪽이지… 나나시 본인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 누군가를 존재로 끄집어냄에 있어 끄집어내는 자는…
나나시: …누군가를 존재로 끄집어냄에 있어 끄집어내는 자는 자신이 기투한 존재에 대하여 누구보다 강한 책임을 가진다.
캐롤 브라이트: …자신이 기투한 존재에 대하여 누구보다 강한 책임을 가진다.
제츠보: 뭐야. 나한테만 한 말인 줄 알았는데.
나는 화가 나기보다 먼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거 완전 두집 살림하며 그 여자보다 네가 더 좋다고 말하는 난봉꾼 아니야?
캐롤 브라이트: 아마 저보다는 제츠보 씨를 염두에 둔 말일 거에요. 저를 냉장고에 묶어두고 떠나기 전에 한 말인데. 누구보다 강한 책임을 진다면서 저와 다시는 안 볼 각오를 한다는 건 이상하니까요. 제 안전을 염두에 두었다고 말했지만…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는 그 상황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 생각하셨던 거에요.
제츠보: …그럴지도. 카이다를 감시하기 위해서는 내가 필요하니까 네 여동생 감시자나 시녀 꼴이 된 나를 보고서 죄책감이라도 느낀 거겠지.
캐롤 브라이트: 시. 시녀…
카이다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을 뒤늦게 사용한 건 그것 말고는 답이 되지 않았다. 그 방법을 알고서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나를 비겁하게 대하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일지라도 할 수밖에 없었겠지. 비겁해지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
제츠보: 앞으로도 나나시는 그런 식일 거야.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잊지 못한 채. 행복한 와중 나라는 존재를 떠올리며 죄책감을 느끼고. 어정쩡하게 두 존재를 모두 책임지려 하다가 모든 것을 잃게 되겠지.
제츠보: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나를 완전히 잊고 외면해야 하지만… 녀석은 바보라서 그럴 수 없을 거야. 그러니 영영 괴로울 수밖에.
캐롤 브라이트: …그가 꼭 한 존재만을 책임지려 할 필요가 있는 걸까요?
나는 얼굴 부위를 찌푸렸다. 뭐야. 이 현실감 없는 발언은?
제츠보: 한 존재만큼은 제대로 책임져야 하는 거야. 이미 네가 피해를 보는 선례가 생겼잖아. 너와 나 사이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경우 너를 등질 수도 있다는 선례. 카이다가 이렇게 된 지금 그런 일이 또 벌어지기를 원해?
캐롤은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제츠보: 기어코 너를 되살렸다면 나나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이 되어야 해. 탑이나 세간의 상식, 정의에 반하더라도 너에 대한 책임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그게 옳아. 그런데 나나시는 다른 사람들을, 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너를 냉장고에 묶고 네 동생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려 했잖아. 몇십년 전 자신도 모르게 생긴 사생아의 존재를 뒤늦게 알고서 이미 지나버린 유년 시절의 보상을 해 주려는 아빠처럼.
캐롤 브라이트: …굉장히 자세한 비유네요.
제츠보: 사실이니까. 책임이라는 단어를 고려하면 더더욱 적절한 비유야.
나는 그렇게 말하다 말고 한 가지 사고 프로세스의 절차를 거쳤다. 잠깐.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나나시 딸이 되나?
…캐롤은 새엄마가 되고?
그 일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가 캐롤에게 가진 묘한 반감이 설명되는 느낌이 들어 나는 그 사고의 방향을 중단하기로 했다.
캐롤 브라이트: 저도 그때는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저와 제대로 상의하지도 않고 그런 짓을 감행하다뇨. 물론 상의했어도 제가 그 일을 조금이라도 허용했을리는 없지만… 아무리 저라도 배신감이 컸죠.
제츠보: 제멋대로 되살려 놓고서 대의를 위해라며 너에게서 등을 돌리다니. 그만한 바보짓이 없을 거야.
캐롤 브라이트: 조금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른 사람은 다 내다 버려도 되니까 나 하나만 소중하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고요. 히무로 씨와 제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는 건 탑에 계신 다른 분들과 장기적으로는 저에게 있어서도 바람직한 방향이에요. 하지만, 생각은 하죠. 죽도록 이기적으로 타협 없이 내 편만 들어주면 어떨까…
캐롤 브라이트: …하지만 나나시 씨는 당신을 외면할 수 없을 거에요.
제츠보: 맞아. 앞으로도 그렇겠지. 내가 저주를 내린 대로.
제츠보: 내가 제츠보라 불리는 일이 슬프다면, 내 이름은 제츠보야. 나는 네 마음이 아팠으면 하니까. 나나시. 네가 그토록 노네임을 자청한다니 노네임으로 대해 줄게. 나는 네가 네 잘못을 바로잡을 수 없으면 좋겠어. 네가 행복할 때 나를 떠올리고 괴로워하기를 바라고. 제츠보는 그토록 불행한데 나 혼자 행복한 것은 옳지 않다며 어찌할 줄 모르는 채로 아파했으면 좋겠어.
제츠보: 책임감을 느껴? 바로잡고 싶다고? 잘 됐어. 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 이런 식으로 되갚아 줄 수 있다니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네. 이것은 잘못을 인정한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복수야. 나나시. 부디 내가 네 가슴에 박혀 빼낼 수 없는 가시가 되기를… 내가 너에게 있어 과오와 죄책감. 네가 바꿀 수 없는 슬픔이 되기를. 그리하여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절망이 되는 거야.
제츠보: 너한테는 조금 미안하다고 생각해. 너는 그저 죽었다 살아난 만큼 후회 없이 살고 싶겠지만, 나는 그의 절망이거든. 잘못 없는 지금의 너일지라도 불행을 같이 뒤집어쓰게 되겠지. 네가 사랑의 영역을 가져갔다면 나는 미움당함의 영역을 가져갔으니까…
제츠보: 빛이 커질수록 그림자가 커지듯 너를 향한 사랑이 나를 향한 죄책감을 부를 거야. 너희의 모든 순간 사이에 나나시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나라는 어둠이 그의 수심에 깃든 것을 보게 될걸. 그게 나의 복수야… 사랑하지 않음도 사랑만큼 강력하기에 가능한 앙갚음이지.
캐롤 브라이트: 그래도 괜찮아요.
캐롤의 끄덕임은 내가 그녀에게서 기대했던 반응 중 어떤 것과도 닮아 있지 않았다.
제츠보: …그 반응은 뭐야? 너는 내가 밉지도 않아?
나는 그 시점에서 내가 캐롤에게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어떤 목적이 달성되는지 의문을 느꼈다.
나나시는 캐롤이 폭주하지 않게끔 막으며 심리적인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하고 동시에 캐롤의 기투자로써 다른 무엇보다 캐롤을 우선시해야만 한다. 나나시는 내 처지가 부당하다고 여겨 카이다를 멈추려 했지만, 정작 나는 또 다른 기투된 자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그 행위를 평가절하한다.
내가 느끼는 바는 뭐지?
나는 다시 연산해 보았으나 답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너무 복잡한 문제였다. 보통의 두뇌였다면 생각하던 도중 한 가지 방향으로 결론짓게되는 의문이 나에게는 끝나지 않는 프로세스로 돌고 또 돌았다.
제츠보: 나나시가 기투된 존재들에 대한 공평성을 염두에 두는 이상 그녀석은 매번 한 발자국을 물러서게 돼. 이미 너에게 미쳐 있는 나나시가 왜인지 너를 대함에 있어 소극적이라면 그건 나를 향한 죄책감이 나나시를 붙들고 있는 거야.
제츠보: 감히 혼자 행복해질 수 없고 기투된 나에게 도무지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앞으로도 나나시를 가로막는다면… 너는 그걸 납득할 수 있겠어?
캐롤 브라이트: …사실. 조금 납득이 되지 않는 점도 있어요. 저도 그저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일 뿐인데 왜 욕심을 부려서도 안 되는지… 그리고 제츠보 씨는 과거의 인연 같은데 왜… 그 과거의 인연 때문에 지금의 제가 덜 행복해야 하는지요.
캐롤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말을 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그렇지만 무시할 수도 없어요. 결국 나나시 씨라는 사람의 과거에서 제츠보 씨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당신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나나시 씨의 모든 걸 이해할 수도 없어요. 그러니 기투된 사람 대 기투된 사람으로 말하자면… 납득이 돼요. 제츠보 씨를 싫어하지도 않고요.
제츠보: …나도 너를 싫어하지는 않아.
캐롤 브라이트: 아니에요. 사실대로 말하셔도 괜찮아요. 제가 당신이었어도 저를 싫어했겠죠. 자기 욕심에만 사로잡혀서
제츠보: 정말 싫어하지 않아. 너는 나와 노네임을 도와준 적이 있어. 그 일을 생각하면… 단순하게 미워하기 어려워.
캐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캐롤 브라이트: …제가요?
제츠보: 그래. 다만 설명할 수 없는 여러 일 때문에 나는 너를 언제나 잠재적 위험으로 보고 있어.
이토록 상황이 복잡해진 건 캐롤의 잘못이 아니다. 살아나고 싶어서 살아난 게 아니니까. 나나시의 잘못인지는 잘 모르겠다. 기투의 책임이나 부활하는 사람의 비동의 따위 살아난 뒤의 이야기다. 살인 게임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손가락질을 하는건 섣부른 짓이다. 나의 잘못은 당연히. 당연히 아니다.
그럼 대체 누구 잘못이지?
따지고 보면 노네임이 노바디를 사랑하지 않은 게 잘못이다.
노바디가 노네임을 사랑해버린 게 잘못이다. 둘 중 하나만 아니었더라도 통신 배선처럼 얼키고설킨 이런 상황은 나오지 않았을 텐데.
노바디가 테세우스의 배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면.
시라유키 히메리가 그런 연구를 진행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거슬러 올라갔다간 끝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연산해낼 수 없었다.
어쩌면 그들이 빌어먹을 개자식들이 아닌 게 가장 큰 문제일지도 몰랐다. 지난 일은 신경 쓸 필요 없다며 나몰라라하는 무뢰배들이었다면 그 눈먼 무지함을 비웃으면서 잊어버릴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으로 나나시는 나를 다시금 그 사이클과 프레임에 가두었다.
이것은 잘못을 인정한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복수야.
그렇다면 잘못을 인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괴롭힘도 있었다. 대상을 괴롭게 만들 가시를 박아넣고서 그것을 가진 자가 어떻게 피를 흘리고 절뚝이는지를 봐야 하는 복수자의 입장에서. 나는 그에게 사로잡힌 것이다. 그가 자신이라는 범주 안에 나를 가두고서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분명 그의 괴로움이 나를 해방시켜야 하는데 그는 충분히 괴롭지 않다. 오히려 그와 캐롤이 그 괴로움을 받아들이고 내가 정당하다고 인정했을 때. 나의 복수는 나의 존엄성을 회복시킬 수단이 아니라 그들이 기꺼이 안고 갈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그 순간 그들은 휘둘리지 않는 중심을 되찾는다. 오직 나만이 그 일에 휘둘린다. 내가 입힌 상처에서 언제 피가 흘러나오는지 지켜보게 되는 일. 어떤 피드백이 돌아오는지 기다리며 나는 나의 행동에 종속된다.
여러 개의 고리가 이어진 것이 사슬이다. 그러나 이 미움의 연쇄는 상대의 대응 포기로 인해 단 한 칸의 고리에서 끝나버린다. 내 쪽에서 아무리 그의 몸뚱이에 고리를 달아대도 그는 그것을 절그럭거리며 자신은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는 듯한 처연한 표정을 지어보일 테지. 그건 공허한 일이다. 내 합리적 사고 프로세스는 그를 괴롭히는 일에서 어떤 가치도 창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복수의 쾌감도 자존심의 회복도 없다.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
나나시가 행복해지지 않는다고 한들 내가 행복해지는 일은 없다.
애초에 그 어떤 일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심지어는 나나시가 나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행복하지 않다.
그게 거짓이라는 걸 아니까.
만약 나나시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그건 모두에게 최악인 일이다. 내가 그에게 사랑을 요구한다면. 그는 어쩌면 내 요청을 들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랑의 적선은 동정심과 책임감에서 기인한다. 또 캐롤 대신 나를 선택한 이유도 나의 처지가 더 기구하기 때문이겠지. 나는 사람이 아닌 기계의 형태로 되살아났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토록 비굴한 일은 도무지 요구할 수 없다. 애초에 이 시점에서 사랑 따위를 원하는 것도 바보같은 일이다. 사랑을 느낄 수 없는 몸을 가지고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건 그저 노네임과의 시간을 그리워하기 때문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나시가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 훌쩍 떠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게 불합리한 일이다. 내 저주에 캐롤마저 불행해지더라도 둘을 방종하게 풀어둘 생각은 없지만. 한 편으로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인지, 나나시에게 선택을 받지 못해서 훼방을 놓는 저열한 짓거리와 내가 하는 일의 어디가 다른지에 대해 생각하면…
그저 연산 과부하에 의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기계가 된 뒤에도 막막함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지금의 이 상황이 가장 나은 경우의 수는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나나시는 적당히 아프고, 캐롤은 적당히 행복하고, 나는 적당히 미워하고 조롱하는 이 모호함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게? 이런 게 어떤 파국보다는 낫다는 말인가? 이것으로 만족하라고?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을 확실히 알게 되는 건가?
나는 문득 없어야 할 통증이 가슴께를 쑤시는 것 같아 내 심장이 있어야 할 부근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은 심장의 고동이 아니라 금속이 맞부딪히는 팅 소리와 지독할 정도의 무음 뿐이었다. 아무런 고동도 느낄 수 없었다. 환상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제츠보: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나나시가 자신이 수습할 수 없는 일을 벌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바보 멍청이라는 거야.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해놓고 감당을 하려 애쓰니 삐걱일 수밖에.
제츠보: 나나시는 한 존재에게 한 개 분량의 마음을 온전히 바치지 못하고 두 존재 모두에게 불만족을 안겨주겠지. 너와 나 전부에게. 그리고 본인에게마저도.
캐롤 브라이트: 그래도 그게 제츠보 씨에게 한 일에서 자신의 눈을 돌리는 것보다는 바람직한 방향이고. 나나시 씨의 사려깊은 점이에요.
제츠보: 그건 용기 없고 나약한 것 뿐이야. 죄책감. 용서받고 싶은 마음. 전부 그놈의 욕심일 뿐이라고.
캐롤 브라이트: 저는 나나시 씨가 그런 사람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저를 위해 다른 모든 걸 버릴 수 있다면 그것도 기쁜 일이겠지만… 결국 자신이 잘못한 바와 그 책임을 전부 내버려 두고서 저만 소중히 여긴다고 했을 때… 그 사랑이 과연 기쁠까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캐롤 브라이트: 아마 그건 제가 다 집어치우고자 했을 때. 그러니까 저야말로 모든 것을 다 버릴 때가 되었을 때에야 알게 되겠죠…
캐롤의 말은 나에게 조금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제츠보: 그럴 일은 없어. 있잖아. 앞으로 예전과 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할 거야?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가 저의 편을 들어줄 수 없는 순간이 온다면요?
제츠보: 응.
캐롤 브라이트: 기다려야죠. 결국 나나시 씨는 저한테 돌아올 테니까요.
여유와 상황파악 결여가 동시에 나타나는 발언이었다. 마치 바람핀 남편을 기다리는 본처처럼 들렸다.
제츠보: 너처럼 현명한 사람에게 있어 고작 남자 하나한테 휘둘리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데.
캐롤 브라이트: 저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또 없을 걸요. 저는 다른 분들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저는… 그런 사람이에요. 지금에 와서는 상담사 자격도 없는… 미약한 사람일 뿐이죠. 정신조작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뭐 해요? 쓸 생각이 없는데…
캐롤 브라이트: 그런데 정확히 제가 제츠보 씨와 나나시 씨의 뭘 도와드린 거죠? 제가 기억하기로 저는 현실에서는 초고교론자들한테 납치되어 있어서… 도움을 드리기 어려웠을 텐데요.
나는 전혀 모른다는 듯이 묻는 캐롤의 표정을 천천히 살폈다.
제츠보: …너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캐롤 브라이트: 네.
내가 그녀를 뚫어져라 보자 캐롤은 부담스럽다는 듯이 시선을 조금 피했다. 그러나 그 반응이 거짓말을 들킬까봐 염려하는 표정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초고교론자들에게 납치되어있던 때만 기억하고 있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캐롤의 위험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낮을지도 몰랐다.
캐롤 브라이트: …정말이에요. 믿어 주세요.
단지 캐롤의 얼굴을 살펴서 답이 나오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우선 그 검증에는 신경쓰지 않고 말을 맞춰 보기로 했다.
제츠보: 알겠어. 믿어. 네 질문에 대답하자면… 너는 나와 노네임이 화해하는 걸 도와줬어. 노네임이 네 덕분에 자기 잘못을 되돌아보고 나한테 사과하게 됐거든.
캐롤 브라이트: 제 덕분에요?
제츠보: 대부분 네 덕분이지. 조금 복잡한 이야기지만…
하기와라 우시오: 에헴!
제츠보: 응…?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잘못 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음성이 세 번에 걸쳐 다시 들렸기 때문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에흠. 에흠. 에헴!
…이자식 목소리가 왜 들리지?
……아.
하기와라 우시오: 저기요. 여러분들. 죄송한데 여기 아직 채널이 열려 있거든요?
제츠보: 읏…! 미… 미안. 망할… 완전히 까먹고 있었어.
잠깐. 여태껏 괜히 히스테릭하게 말하는 게 다 들렸다고? 화풀이처럼 들렸을 텐데. 아니. 화풀이가 맞기는 해. 사실이라도 이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캐롤 브라이트: 지. 진짜 다 들렸어요…?
이바라 쿠리스: 그… 미안해. 우리도 듣고 있다고 신호를 계속 주려고 했는데. 너무 심각한 내용이라서…
……플라잉 로봇이 그리워지는 건 처음이야.
제츠보: 괜한 거 듣느라 기분 별로였겠네… 이제 그만둘게. 너한테도 미안해. 캐롤. 이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없었는데. 나 때문에 개인사가 다 전해져 버렸네…
캐롤 브라이트: 아. 아뇨!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딱히 숨길만한 내용도 아니고… 어쩌면 맞을까요?
하기와라 우시오: 뭐? 아니. 반대야. 어디서 훈훈하게 끝내려고 해? 계속하라고. 더 크게 해달라는 말이었어. 캐롤. 혹시 다이얼로그 좀 제츠보 쪽으로 가까이 가져다 줄래?
캐롤은 다이얼로그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가고 그 쪽으로 손을 뻗다가 말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제츠보: 무슨 내 허락을 구하고 있어? 하지 마! 웃음거리 되려고 그래?!
캐롤 브라이트: 그. 죄. 죄송해요…
하기와라 우시오: 웃음거리 되는 게 아니라 니들은 이미 웃음거리야. 씨부럴깡통 감정 없는 척 쿨한 척은 다 하다가 방언 터지니까 질투의 화신이네. 우하하하 웃기다!
이바라 쿠리스: 갈(喝)! 하기와라! 뭘 웃음거리 삼는 거야. 이건 두 사람이 해묵은 감정을 서로 툭 털어서 이야기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거야. 지금 꼭 필요한 일이라고!
제츠보: 아니.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야. 너희가 아무리 졸라대도 안 해줘. 으. 이거 되게 민망하네.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캐롤 브라이트: 그러게요. 하하… 저 이상한 얘기 안 했죠?
하기와라 우시오: 마치 일부다처제 사이비 종교에 다니는 사람처럼 말하긴 했어.
제츠보: 입 다물어! 우리는 그런 거 아니야!
이바라 쿠리스: 어음…
이바라가 말에 뜸을 들이는 것을 듣고 나는 그녀도 하기와라를 닮아져서 농담을 하나 하려는 건 아닌가 의심했다. 꼭 그렇지는 않았다. 이바라는 단지 전해야 하는 소식을 전했다.
이바라 쿠리스: 사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제츠보. 있잖아. 우리도 말려 봤어. 잘 생각해 보라며 일단은 막아 봤거든?
?
이바라 쿠리스: 그런데 이건 자기가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그러더라고… 걔 원래 조금 섬세하고… 유들유들한 느낌인 거 알지? 그런데 왜인지 지금 막 남자다! 같은 눈빛! 이라는 느낌! 이라서… 말리기가 조금… 사실 지금쯤이면 도착할 것 같아서 알려주려 한 건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캐롤 브라이트: 어…?
아니. 설마.
설마가 아니잖아. 아직 토키와가 잠에 들었다는 소식이 없어. 히무로라면 잠이 들자마자 즉시 그 일부터 말했을 텐데 아직 멀었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 전까지는…
하기와라 우시오: 느낌 왔지?
제츠보: …플라잉 로봇 보고 싶네.
누군가가 내 숙소 문을 두드렸다.
나나시: …인공지능. 문 열어 줄래?
그리고 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몇 초간 굳어있는 찰나. 캐롤이 나 대신 말했다.
나 대신 말했다고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말을 꺼내기 난감한 상황에서 캐롤이 대신 입을 열어준 건 사실이니까. 다만 캐롤이 내가 할 말을 대신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런 내용을 생각한 적이 없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분위기 좀 읽어요. 대체 이걸 왜 와요?!
문을 열고 나간 캐롤은 문 밖에서 큰 소리를 몇 번 내더니, 다시금 내 숙소로 돌아와 문고리를 철컥 잠구었다.
캐롤 브라이트: 혼내고 왔어요.
제츠보: …고맙다고 해야 하나?
캐롤 브라이트: 그렇게 말해주시면 저야 고맙죠.
제츠보: 그럼 고마워. 되게 곤란했거든.
사실 나나시가 찾아온 이유 자체는 알만했다. 자기 딴에는 자기가 얽혀 있는 일인데 관망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겠지. 당사자가 그걸 가만히 듣고 있기에도 조금 그림이 그렇고… 그렇게 생각하면 오지 않는 것보단 찾아오는 게 더 낫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어느 쪽이라도 불편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정말 나나시라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 욕을 먹게 되는 상황에 놓였다.
캐롤 브라이트: 저도 곤란해요. 얼마나 쑥스러운데요 지금! 저희가 어떤 얘기 했는지 취합도 안 돼서 더 무서워요. 얼마나 더 쑥스러워야하는지도 모르겠네요…
하기와라 우시오: 내가 대강 필사해놨으니까 걱정 마.
제츠보: 그거 당장 태워!
하기와라 우시오: 필사하면서 외웠는데. 그건 어쩌게?
제츠보: 네 머리를 세게 내려쳐서라도 잊게 만들어야지.
하기와라 우시오: 이. 이바라. 빨리 이거 읽어! 누군가는 진실을 알려야 해! 얘들이 아까 뭔 소리를 했냐면 제츠보는 나나시가 덜 행복했으면 좋겠고 캐롤은 오케이 너도 우리 파티에 들어와라 하면서 일부다처제를 실시했어!
이바라 쿠리스: 갸아아아악! 나를 끌어들이지 마! 나는 아무것도 못 들었어!
히무로 시라베: 이름 없는 남자에게 전해라.
떠들석한 소리만이 울리는 다이얼로그의 대화들 사이로 한 마디의 낮고 조용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히무로 시라베: 토키와 아유키가 잠들었다. 지금이 사랑의 열쇠를 사용할 때다. 안전하게 수면을 취할 수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사랑의 열쇠를 사용해라.
제츠보: 나나시!
나나시: 으. 응?!
문 너머에서 화들짝 놀란 나나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츠보: 토키와가 잠들었어. 네가 사랑의 열쇠를 쓸 때야! 크레딧은 충분히 있어?
나나시: 응. 있어!
히무로 시라베: 이름 없는 남자가 무어라 대답했지?
제츠보: 있다고 말했어.
히무로 시라베: 좋군. 네 심문이 끝나면 내가 다음 자낙스를 먹이겠다. 어떤 정보를 알아냈는지는 이후에 통화가 아닌 방식으로 전달해주었으면 한다. 토키와 아유키마저 자신이 밝힌 내용을 스스로 모르는 것이 이상적일 테니.
제츠보: 네 심문이 끝나면 히무로 본인이 심문하겠대. 뭘 알아냈는지는 나중에 통화 쓰지 말고 알려달라고 했어. 토키와 본인이 꿈 속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자기도 모르게끔!
하기와라 우시오: 야. 그렇게 소리치다가 토키와 깨겠어!
히무로 시라베: 타당한 지적이다.
나는 약간의 막막함을 느꼈다. 하기야 문 하나를 두고서 소리를 지르는 방식은 앞뒤가 막혀 있어 답답할 뿐이다.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로 그러고만 있는 것 자체가 촌극이었다.
제츠보: 쯧… 들어와. 나나시. 어차피 문 앞에 서 있지? 여기까지 온 거 그냥 들어오기나 해. 호위해줄 테니까!
이바라 쿠리스: 오오오옷! 호쾌하다. 제츠보! 기백이 넘쳐!
하기와라 우시오: 그냥 아까 자기가 했던 말들이 너무 부끄러워서 괜히 큰소리 내는 것 같은데.
제츠보: 닥쳐! 하기와라! 나. 나나시. 어서 들어오기나 해!
나나시: …문을 열어줘야 가지.
제츠보: 아.
미치겠네. 경황이 없는 티가 너무 나잖아. 캐롤과 다르게 기계의 두뇌를 가지고 있는 나는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 대부분 기억해낼 수 있다는 게 가장 최악이었다. 나나시 미워하고, 캐롤 매도하고. 내가 미쳤지… 미쳤어…
내가 잠금을 풀고 문을 열어주자.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삼자대면이 이루어졌다.
나나시는 나를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결심한 것처럼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걸 보며 나는 생각했다. 제발 아니어라. 제발 여기서 더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뭔가는 아니어라…
나나시: …자낙스 먹고 잘게.
캐롤 브라이트: 휴!
나 또한 숨을 쉴 필요는 없는 몸이지만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츠보: 내 침대 써. 불편하지는 않을 거야.
나나시: 알겠어. 잠깐 실례할게…
나나시는 화장실에 들어가 수돗물로 자낙스를 넘기고서는 침대에 누웠다. 한손에는 어느새 사랑의 열쇠가 들려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서 이불을 가슴께까지 올리고서 나나시는 약기운이 자신에게 감돌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캐롤 브라이트: 저기. 잠깐만요. 효과 돌 때까지 시간 좀 걸리니까 이 말만 할게요.
제츠보: 해봐. 나나시 너는 굳이 대답하지 말고 잠이나 자고.
나나시: 알았어.
제츠보: 대답하지 말라니까! 캐롤 너는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래?
캐롤 브라이트: 아. 그게 있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냥 없던 일로 하기는 좀 그래서 그런데… 이 일이 대강 마무리되면 저희들끼리 만남이라도 한 번 가질까요?
나는 캐롤이 지금껏 얌전한 모습만을 보여주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강한 내면의 광기를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느꼈다.
제츠보: …지금 진심이야? 이렇게 세 명이서 다시 만나자고?
캐롤 브라이트: 네. 오늘 대화를 그냥 묻어버리고 지낼 수도 없잖아요. 테이블 위에 오른 이상 다뤄야 하지 않겠어요?
나나시: …맞는 말이에요.
제츠보: 캐롤 의견이라고 곧이곧대로 찬성하지 마. 나나시!
나나시: 그런 게 아니야. 내가 다른 사람 의견을 들을 거였다면 네 의견까지 들은 다음 중간 부분을 내 의견으로 삼았겠지. 그게 소위 공평한 일일 거라고 하면서.
듣고 보니 그건 정말 나나시가 할 법한 말이었다.
제츠보: …너 되게 자기객관화가 잘 되어 있네.
히무로 시라베: 재촉하고 싶지는 않지만 토키와 아유키가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
캐롤 브라이트: 죄송해요. 짧게 할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서로 할 말이 어느정도 정리되고 나면 해묵은 이야기라도 하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 저는 제가 두 분한테 어떤 도움을 드렸는지도 모르거든요. 그리고…
캐롤 브라이트: 저희는 서로 복잡한 관계에 놓여 있지만… 동시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제츠보: 대체 왜?
캐롤 브라이트: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처지잖아요. 그래서 여러 불일치가 있더라도 그 공통점을 통해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어요.
제츠보: …그래. 여기까지 이야기했는데 없었던 일 취급하는 것도 촌극이겠지. 이야기 하는 것 정도는 좋다고 봐. 하지만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 세 명의 사이가 극단적으로 개선될 일은 없어.
제츠보: 우리가 친구라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애먼 기대를 접는 게 나을 거야. 나나시 너도 마찬가지고.
나나시: 알겠어. 그렇지만 서로 대화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분명히 의미가 있을 거야.
나나시가 조금 몽롱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약기운이 도는 모양이었다. 더 어색해질 염려는 없어질 것 같아 나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캐롤 브라이트: 기대를 그만두지는 않을 거에요. 사실. 저는 이미 저희가 거의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하거든요.
나는 캐롤의 말을 듣고 순간 표정을 굳혔다.
제츠보: …친구는 많이 센 표현인데.
캐롤 브라이트: 에?! 그. 그럴 수가…
제츠보: …쯧. 알았어. 우리 친구야. 그렇게 하자. 좋아.
나나시: 전혀 친구로 여기는 반응이 아닌데…?
하기와라 우시오: 저게 아니라고? 완전 찐친 반응이잖아! 이게 돼?!
이바라 쿠리스: 에?! 너 나랑 안 그러잖아. 나 말고 찐친이 누구야?! 너 나 말고 또 누구 있어! 이 나나시같은 놈이…!
하기와라 우시오: 무슨 소리야! 이건 히무로 얘기라고! 걔랑 나도 딱 저 느낌이잖아!
나나시: ……나 같은 놈…?
제츠보: 그래. 한번 보자. 솔직히 부담스러워 죽겠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지내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나나시가 그 시점에 깨어 있었다면 잘 된 일이다 따위의 말을 한 마디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시점에서 그는 몰려오는 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서서히 곯아떨어져 버렸다. 그렇게 세 명은 조악한 만남이 아니라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회담을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그 회담은 이윽고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 맞아. 나는 토키와에게 사랑의 열쇠를 썼다…
그리고 토키와 아유키가 어떤 정신을 가지고 있는지 지켜보았다. 그것은…
토키와 아유키: 해냈어. 나나시. 우리가 해냈어.
토키와 아유키: 우리 모두가 살인 게임에서 살아남은 거야.
그것은 기이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평화로운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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