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단크 타워
챕터 4: < 황금 원숭이의 손길 >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카이다 쿠로하는 제츠보를 부담스럽게 노려보았다. 단지 부담스러울 정도가 아니라 보통의 사람들이었다면 살인 예고로 받아들였을 눈빛이었지만 제츠보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카이다는 제츠보를 죽일 수 없었고, 꼴에 싫은 티 팍팍 내는 것이 구경하기에 재밌기도 했다.
제츠보가 홍차 잔에 입을 대자마자 카이다는 핀잔을 던졌다.
카이다 쿠로하: 야. 그만 마셔! 어차피 맛도 못 느끼는 주제에!
제츠보: 너도 맛은 못 느끼잖아. 카이다.
카이다 쿠로하: 너는 향도 못 느끼잖아! 대체 왜 쳐 마시고 있는데. 아 홍차 아깝다고! 그만 마셔!
캐롤 브라이트: 마음껏 마시세요. 제츠보 씨.
카이다 쿠로하: 뭐?! 야. 언니! 이럴 땐 내 편을 들어줘야지!
제츠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야. 언니라니. 이딴 예의 없는 여동생이 또 있을까.
캐롤 브라이트: 그렇지만 우리만 마실 수는 없잖아. 제츠보 씨도 개인 시간을 할애해서 너를 감시하고 계신 건데 잘 대해 드려야지. 앞으로도 서로 으르렁댈 거야?
제츠보: 캐롤 말이 맞아. 내가 없었다면 분명 히무로가 너를 감시하러 왔을 테니까. 그럼 너는 남자 앞에서 옷을 갈아입고, 남자 앞에서 자고, 남자 앞에서 밥을 먹고 남자 앞에서 화장실에…
카이다는 제츠보의 말에 정말 자신이 그런 상황에 놓인 듯 몸을 홱 가렸다.
카이다 쿠로하: 미. 미. 미. 미쳤냐?! 벼. 벼. 변태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같은 여자가 붙어 다니는 것도 불편해 죽겠는데. 남자한테 그딴 일을 시킨다고? 소름 끼쳐! 사고방식 자체가 헤픈 년이네 이거!
제츠보: 그게 그렇게 호들갑 떨 만한 일인가? 내가 아니었다면 내 말대로 됐을 텐데?
카이다 쿠로하: 병신년아. 입에 담기에도 부끄러운 일이라고! 네년은 사고방식이 완전히 박살 나서 자기가 수치스러운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거야! 어. 생각해 보니 너 기계잖아. 기계니까 남자랑 부대끼는 게 어떤 건지를 이해할 수 없지! 나 같은 여자들은 다르다고!
제츠보: 내가 이런 기계 몸을 얻기 전까지는 꽤 오랫동안 남자와 동거도 했어. 적어도 너보다는 내가 남자에 대해 훨씬 잘 알걸?
카이다는 입을 떡 벌렸다. 어떻게 저런 상스러운 말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지? 미친 건가?
카이다 쿠로하: 저. 정신 나간 년! 그딴 걸 자랑이라고 뱉고 다니는 건 나도 안 한다! 음란한 변태 같은 년!
제츠보: 하기야 살면서 남자 한 번 못 사귀어 본 숫처녀 어린애가 보기에는 그럴지도 모르지.
캐롤은 거만하게 카이다를 놀리는 제츠보를 보며 이 사람이 나나시 씨와 사귀었다고 볼 수가 있는지에 대해 따져볼까 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제츠보도 나름대로의 체면이 있었고 그녀의 여동생이 보낸 폭언에 비하면 그 정도의 놀림은 새 발의 피였기 때문이다.
캐롤은 카이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캐롤 브라이트: 그런데 치나미. 정말 한 번도 남성분을 사귀어본 적이 없어?
카이다 쿠로하: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카이다는 날을 세운 어투로 말했다. 캐롤은 카이다의 방어기제를 보고 그 일을 더 파고 들어가지는 않기로 했다. 카이다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는 그 사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카이다는 자신이 무언가에 뒤처졌다고 여기지 않으려 했다.
사실 카이다를 남자랑 연이 한 번도 닿아본 적이 없는 숫처녀라고 부르는 건 공정하지 않다.
적당한 상대가 있어야 염두에 두든 말든 할 것 아닌가?
카이다의 조직이 활동하는 반경은 꽤 넓었다. 그 말은 무슨 의뢰를 받아서 할 일이 생기면 일본에 왔다가, 비행기를 타고 방콕으로, 필리핀으로, 이탈리아에서 러시아까지. 천지를 다 돌면서 여기 썰고 저기 썰고 하는 인간백정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어찌저찌 돌아다니다 보면 외국 사람들과 자주 마주치기 마련이었다.
카이다가 외국어를 여러 개 했을 것 같은가?
조직이 통역이나 길잡이를 붙여주지 않으면 곧잘 하는 말이 '으어? 에에?'다. 소통이 될 리 없었다. 당연히 모든 만남은 단편적이며 그녀가 살수로 일하는 이상 만나는 사람들도 죄다 인간말종이었다.
그마저도 정기적으로 받는 기억 소거 절차 때문에 잊어버렸다. 카이다는 그래서 자기가 간 나라가 몇 개인지를 모른다. 예전에 같이 일한 통역과 다시 일을 해도 카이다 입장에서는 초면이었다.
사실 카이다 보모 역할을 일찍이 떠맡았던 그자들 입장에서도 카이다는 별반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카이다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카이다를 무례하게 대하다가 그 자리에서 살해당한 통역도 있었기 때문이다. 손속은 잔인하고, 속은 좁고, 악랄한데 비위 맞추기는 힘든 데다가 괴물처럼 강한지라 자칫하면 목숨이 달아난다.
카이다 본인이 남에게 가지는 열등감과 시기. 시술 때문에 너무 강해진 신체. 그 대가로 즐거움을 내놓아서 인격이 파탄난 탓도 있겠다만, 시술을 받지 않았더라도 카이다에게는 연애를 할 만한 여유가 없았다. 그래도 남들 다 하는 일을 그녀 혼자서 못 하고 있으니, 그녀가 못 한 게 아니라 남들이 한 게 병신짓이라고 폄하하는 편이 더 편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쉬웠다.
그러나 그게 제츠보가 알 바는 아니었다.
제츠보: 네 하늘 같은 언니한테 말뽄새가 그게 뭐야? 네가 지금 탑에 발 디디고 사는 게 캐롤 덕분이야. 미안하다고 안 해?
카이다는 제츠보가 종용하지 않았어도 미안하다고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반골에게 무엇을 하라고 시키면, 반골은 그 일을 하지 않는다. 원래 하려던 일이었으면? 빈정이 상해서 더 하지 않는다.
카이다 쿠로하: 미아안!
그런데도 카이다는 캐롤에 대고 고함을 내질렀다. 겸연쩍음을 애써 털어 버리려 큰 소리를 낸 것이었지만 제츠보가 보기에는 뭐 이딴 경우가 다 있나. 이딴 걸 혈육이라고 두고 감싸는 캐롤의 심정은 어떨까. 나나시를 채간 요호 취급을 하다가도 캐롤 또한 캐롤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는 걸 보니 딱하기도 했다.
하지만 캐롤은 이미 사과를 한 게 어딘가 하고 오히려 가슴이 따뜻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캐롤도 이성을 갖춘 사람이다. 카이다의 본성이 선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한 적이 없었다. 선하긴 무슨 둘도 없는 흉성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이상 이해하고, 계도하려 애쓸 뿐이었다. 따라서 카이다가 캐롤 본인에게 보이는 무례는 캐롤의 안에서 한 없이 가벼운 것이 되고야 말았다.
본래 이것은 아이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하지만 카이다는 아이도 아니고, 이미 망가진 뒤였기에 별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캐롤 브라이트: 잘 됐어. 치나미. 친구도 생기고.
제츠보: 캐롤. 그 말은 다시 주워 담아줬으면 좋겠어.
제츠보는 캐롤의 말에 얼굴을 굳혔다. 그러자 카이다는 지지 않겠다는 듯 응수했다.
카이다 쿠로하: 그래. 언니. 나도 기분이 나빠. 걸어 다니는 깡통 년이랑 친구? 사람도 아닌 거랑 친구가 된다니 소름이 끼치네.
제츠보: 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미안하지만 캐롤. 네 여동생은 이족보행 짐승이야. 그러니 자기가 저지른 짓에 반성 하나 없는 거고.
질 수 없지.
카이다 쿠로하: 씨발 사람같이 생겼으면 뭐 해? 결국 안에 들어찬 건 쇳덩이 아니냐? 그런 게 표정을 짓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다닌다니. 불쾌하기 짝이 없다고.
씨발 나도.
제츠보: 나야 쇳덩이니까 힘이 셀 만도 하지. 당연한 일이야. 그런데 카이다는 사람인데도 나랑 비슷한 힘을 내잖아. 그거. 좀 위험하지 않나? 오히려 그게 이상하잖아. 곰 힘줄이라도 뜯어 넣은 것 같아. 그럼 그 성질머리도 이해가 되네.
카이다 쿠로하: 사사건건 남이 하는 일에 훼방이나 참견이나 놓고 말이야. 별 병신 같은 발상을 꺼내서 욕이나 들어먹게 하고. 용서를 빌라니 마니 나한테 창피나 주고.
제츠보: 내 말을 바보처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쪽이 잘못한 거 아닐까? 그리고 정작 내가 참견하고 있지 않으면 힘줄 하나 잘렸을 사람이 왜 고마운 줄도 모르고 뻗대고 있는지 모르겠어.
카이다는 눈을 희번덕하게 떴고, 제츠보는 평소대로의 묵묵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캐롤은 두 사람을 말리려다가. 결국 어련히 서로 싸우지 않은 채 지나가려니, 속에 꽁꽁 담아두다가 폭력 사태로 번지는 것보단 이게 나으려니 하는 마음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안일한 선택이었다.
카이다 쿠로하: 오호. 기계 혓바닥치고는 잘 움직이는데? 네 그 동거인인지 뭔지 하는 놈을 그렇게 빨아줬나 보지?
제츠보: 이. 이게!
제츠보는 순간 동요할 뻔했지만, 카이다는 동거인의 정체가 나나시임을 몰랐음을 깨달았다. 게다가 카이다의 음담패설이란 본래 허세와 멸시가 담겨 있는 것이기에 흘려 듣는 것이 더 낫기도 했다. 따라서 제츠보는 카이다의 모욕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제츠보: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게 그렇게 분하면 그냥 말을 해. 카이다. 괜히 열등감 드러내지 말고.
카이다 쿠로하: 아닌데? 아닌데. 이 병신아? 하나도 안 부러워. 부러울 이유가 어디 있어!
제츠보: 그걸 모르니까 네가 아직 덜 큰 어린애라는 거야.
카이다 쿠로하: 지랄하네! 나보다 한 뼘은 더 작은 게!
마음 같아서는 제츠보도 카이다만큼 저열한 말을 해줄 수 있었다. 심지어 제츠보는 사전지식이라는 것이 있는 만큼 더 악독할 수 있었다. 얘를 들자면 옛 아마조네스들은 활을 쏘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끔 가슴을 잘라냈다고 하는데 너는 왜 그걸 아직도 달고 있느냐. 혹시 미관상의 욕심이 있어서 아직도 안 자른 거냐. 심장에 총이라도 맞으면 지방이 총알을 막아주기라도 하느냐? 하고 온갖 욕을 해줄 수도 있었다. 같이 듣는 캐롤에게 의도치 않은 뜨끔함을 줄수도 있으니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제츠보는 그러지 않았다. 제츠보는 문화인이며. 카이다가 천박하게 나온다고 해서 함께 천박해질 필요가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보통 이런 사람들이 말싸움은 이기지 못한다. 남이 약점을 후벼 파면 자신도 똑같이 후벼 파줘야 하는데 맞서서 뺨을 안 때리니 당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카이다는 제츠보가 가장 화를 내는 주제만을 골라서 이야기할 심산이었다.
카이다 쿠로하: 흐흐흐.
카이다는 입꼬리를 실실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츠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이게. 이게 또 그 얘기를 하려 하나?
제츠보: 말하기만 해 봐. 카이다. 어디 한 번 말하기만 해 봐!
제츠보도 으름장을 놓고 나니 카이다가 실실 웃고 있는 게 영락없이 말해버리겠다고 예고를 해 놓는 꼴이었다. 다만 제츠보가 카이다의 꼬인 심성을 건드리지 않았더라도 카이다는 제츠보에게 '그 모욕'을 던졌을 터였다. 왜냐하면 그게 제츠보를 가장 화나게 만들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이다가 어떻게 하면 제츠보의 마음을 완전히 꺾이게 만들 수 있을까 하니. 카이다가 웃으며 캐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이다는 캐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카이다 쿠로하: 수박.
그리고 그 뒤로는 자신을 가리켰다.
카이다 쿠로하: 오렌지.
캐롤 브라이트: 저기. 잠깐. 치나미?
캐롤은 그 시점에서 이미 그 과일의 이름과 사람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눈치챘다. 아주 질 나쁜 농담이고 희롱이었다. 여자끼리 한다고 그 무게가 덜해지지는 않았다. 캐롤은 카이다가 하려는 말이 분명 큰 싸움의 단초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제츠보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거론되기 전까지는 저지할 명분이 없었다.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 그만! 그만하라니까!
카이다는 캐롤의 말대로 하고 싶었다. 정말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줄 수 있는 모욕의 크기가 너무 컸다. 카이다의 행동을 결정하는 척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얼마나 남을 해칠 수 있는가.
제츠보: 어디 한 번 말하기만 해 봐…
제츠보는 빈 말을 하지 않았다. 제츠보는 카이다가 자신의 충고를 무시하는 순간을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카이다가 멈출 이유는 되지 않았다. 이윽고. 카이다의 손가락은 제츠보를 향했다.
카이다 쿠로하: …키위.
조롱의 미소가 카이다의 얼굴에 떠올랐다. 제츠보는 충분히 주의를 줬다. 그런데도 변하는 것이 없으니 주의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이 자명해졌다.
제츠보: 좋아. 참는 건 여기까지.
캐롤 브라이트: 제. 제츠보 씨. 죄송해요. 치나미는 제가 혼을 낼 테니까…
제츠보: 미안할 거 없어. 캐롤. 사과는 카이다가 해야지. 그런데 나한테 할리가 없으니 이렇게 될 수밖에.
카이다와 제츠보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에서 몇 걸음 멀어지자마자 무자비한 폭력이 두 사람 사이에서 펼쳐졌다. 멈춘 것은 몇 초 뒤. 두 사람이 서로의 머리카락을 손아귀에 가득 쥐었을 때였다.
카이다는 자신의 두상을 뒤덮는 날카로운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카이다 쿠로하: 아아아악! 이거 안 놔?! 이 개간년이! 안 놔? 머리카락을 다 쥐어뜯어버리기 전에 놔. 놓으라고!
제츠보: 안타깝네. 카이다. 나는 기계라 네가 머리카락을 뜯어도 아프지가 않아. 하지만 너는 아니지.
머리카락에는 많은 신경들이 연결되어 있기에 상대에게 고통을 줄 수 있으면서도 외상의 티는 나지 않는다. 화는 풀고 싶지만 죽이고 싶지는 않기에 제츠보는 거리낌 없이 카이다의 머리를 틀어쥐었다.
캐롤 브라이트: 저기. 제츠보 씨. 치나미! 조금만 진정하면…
카이다 쿠로하: 말리지 마. 언니! 이년이랑 나랑 끝장을 봐야겠으니까!
제츠보: 오늘 그 살덩이를 몸에 달고 있는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캐롤은 눈빛이 사나워진 제츠보를 보며 끼어들기에 좋은 상황이 아님을 느꼈다. 카이다는 제츠보의 신경을 너무도 많이 긁었다. 사실 고작 특정 부위가 크냐 작냐의 문제는 너무 하찮은 일이라 원래의 제츠보라면 별반 마음이 상하지도 않을 터였지만, 상황이 나빴다.
하필이면 나나시를 채간 캐롤 브라이트의 여동생. 하필이면 악한 짓을 일삼고 다니는 카이다 쿠로하가 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제츠보도 유난히 큰 모욕감을 느꼈다. 일종의 연좌제였다. 어쩌면 캐롤을 향하는 제츠보의 감정이 캐롤 본인이 아닌 카이다에게 향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카이다가 불공평한 핍박을 당하는 건 아니었다. 결국 모든 건 카이다가 자초한 일이었으니.
캐롤은 생각했다. 이거… 위험하지 않나? 그리고 묘하게 캐롤을 향하는 시선도 약간 차가워진 것 같은 것은. 기분 탓일까?
카이다 쿠로하: 아악! 아! 악! 아아악! 놓으라고! 크아아아악! 놓으라고오!
카이다의 머리카락은 남들보다 민감하다. 아픔에도 훨씬 민감하다. 그렇기에 제츠보 정도의 완력을 가진 자가 뽑아 버리겠다며 당겨대기 시작하면 카이다의 입장에서는 놀랄 만큼 아팠다. 자칫 방심했다간 눈물을 쏙 뺄 정도로 아팠다. 그 고통을 돌려주겠다고 마주 잡아당기면. 제츠보는 코웃음을 쳤다. 제츠보의 키틴질 섬유에는 신경이 없기 때문이다.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 놔 드려! 어서!
아무리 자기 일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지만 머리가 쥐어 뜯기는 장면을 가족이 구경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캐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카이다와 제츠보를 떼어 놓으려고 노력했다. 사람 두 명 크기의 바위를 밀려고 애쓰는 격이었다.
제츠보: 떨어져. 캐롤! 너까지 휘말리니까!
그리고 제츠보는 한 번 몸을 크게 움직였다. 그 힘과 질량이 몸에 살짝 닿는 것만으로 캐롤은 뒤로 휙 밀려나 뒷걸음질을 치게 되었다. 물리적으로 떼어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카이다는 본능적으로 제츠보의 머리카락을 놓고 눈이 있을 법한 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하지만 뭉근하게 허물어지는 안구 대신 카이다는 딱딱한 공 같은 것을 만졌다. 뭐야. 이 돌멩이 비슷한 건? 뭐야. 이게 눈이야?!
한편. 이게 눈을 찌르려 해? 괘씸함을 느낀 제츠보는 더욱 세게 머리카락을 당겼고, 카이다는 이에 다시금 제츠보의 머리 쪽으로 손을 옮겼다.
카이다 쿠로하: 야. 야. 놔! 놔! 놔! 놓으라고! 알겠어! 이렇게 하자. 셋을 세면 놓는 거야!
제츠보: 그럴까? 하나. 둘. 셋.
그들은 놓지 않았다.
카이다 쿠로하: 이 씹년이 약속을 어겨?!
괘씸함을 참지 못한 카이다가 머리카락을 더 세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투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카이다의 팔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러나 카이다는 제츠보의 머리카락을 놓친 게 아니었다.
제츠보: 너…
뜯겨 나갔을 뿐이다. 제츠보와 단단히 이어져 있던 키틴질 섬유는 카이다의 완력 앞에 결국 끊어지고 말았다. 적은 양은 아니었다. 한 움큼의 반 정도는 되었다. 겉으로는 태가 나지 않지만 제츠보의 머리를 뒤적거리다 보면 어딘가 빈 공간이 나올 정도의 머리카락이. 뜯겨 나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몇 주로 회복될 만한 손실이었다.
하지만 제츠보는 살아있지 않았다.
키틴질 섬유는 그저 머리와 이어져 있을 뿐. 그것은 자라지 않았다. 카이다가 뜯어버린 이상 그건 이제 영영 사라졌다. 제츠보는 자신의 머리가 얼마나 비어 있는지 살피기 위해 카이다를 놓아 주었고, 카이다에게 그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제츠보: 하는 일마다 내 성질을 긁는구나. 너는…?
카이다는 숨을 헐떡이며 제츠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카이다와 제츠보는 다시금 서로의 머리를 붙들었다.
진작 말릴 걸 그랬다. 캐롤은 스스로를 질책했다. 동생이 하는 싸움마다 사사건건 끼어들어서 말리거나 동생 편을 드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두 사람의 갈등은 가면 갈수록 깊어졌다. 난처하기 짝이 없는 파국이었다.
무서운 사실이 있다면 이 모든 사단이 서로 친구가 되어 잘 되었다는 캐롤의 말 한 마디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캐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니면 아닌 거고.
캐롤 브라이트: 그만. 치나미! 제츠보 씨!
그리고 두 사람이 다시금 돌격하려던 그 순간. 그 난처한 상황의 해결사들이 나타났다.
똑. 똑. 똑.
나나시: 캐롤 씨. 히무로랑 같이 왔어요. 어. 제츠보랑… 카이다도 안에 있지? 밖까지 소리가 울리더라.
캐롤은 숙소의 문을 향해 달려가 벌컥 문을 열었다.
히무로 시라베: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기에 직접 왔다.
캐롤 브라이트: 자… 잘 오셨어요!
캐롤은 나나시의 손을 잡으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나시와 히무로가 등장하자마자 제츠보와 카이다의 움직임은 뚝 멈춰 버렸다. 더 힘을 주지도 힘을 풀지도 않은 채. 그들은 굳었다. 어쩌면 미성숙한 감정이 서로 분출되는 순간에 제삼자가 끼어들어. 소위 흥이 식어버렸기 때문도 있겠다.
나나시와 히무로는 서로 머리채를 잡은 채 가만히 서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나나시: …너희 지금 뭐 해?
히무로 시라베: 바보짓을 하고 있군.
캐롤 브라이트: 놓아주라니까. 치나미!
카이다 쿠로하: 쳇!
그 말이 끝난 뒤에야 카이다와 제츠보는 서로를 놓아주었다.
캐롤 브라이트: 나 없는 동안에 제츠보 씨 말씀 잘 듣고 있어야 해. 알겠지?
카이다 쿠로하는 캐롤 브라이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알겠어. 모르겠어?
카이다 쿠로하: 아. 알겠다고! 남들 보는 앞에서 쪽팔리게 왜 이래! 알겠으니까 그 꼬맹이나 고치고 돌아와!
카이다 쿠로하가 역정을 내자 캐롤 브라이트는 반신반의하는 기색으로 서서히 자신의 숙소에서 걸어 나왔다. 제츠보는 본인의 두상에 붙어 있던 연보라색 섬유. 이제는 바닥에 떨어져 버린 그 물건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문을 닫고 숙소를 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캐롤 브라이트는 자신의 숙소를 들여다 보았지만. 카이다 쿠로하와 제츠보는 여전히 한 마디도 나누고 있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는 왜 저 둘 사이에 남는다고 하셔서. 화해라도 시키려는 심산일까요?
히무로 시라베: 제츠보는 카이다 쿠로하의 감시역일 뿐이다. 사이가 나아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카이다 쿠로하의 쪽에서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탑에 있는 이들에게는 좋은 일이다.
캐롤 브라이트: 그럴지도 모르지만요…
이름 없는 남자는 제츠보와 카이다 쿠로하 사이에 남았다. 그는 카텟 기관의 일원이며 메리와도 면식이 있는 바. 그 또한 합류하는 것을 권유했으나 이름 없는 남자는 거절했다.
나나시: 나는 선약이 있어서 못 가.
히무로 시라베: 그렇군. 알겠다.
나나시: 행운을 빌게. 히무로. 마유즈미를 되돌릴 수 있길 바라.
이름 없는 남자의 말은 진정성 있게 들렸다.
나는 캐롤 브라이트에게 물을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들을 전부 물을 수는 없었다. 그녀 또한 반감을 살 것이며 반감을 사는 순간 대답의 질은 떨어지기 때문이다. 취조가 효과적인 이유는 취조라는 상황 자체가 심리와 입장에 대한 우위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일대일의 대화, 그것도 마유즈미의 자아를 돌려 놓을 유일한 희망인 사람과의 대화인 이상 나는 정도를 넘어가는 질문을 할 수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어떻게 메리와 친분을 가졌지? 나의 경우에는 메리가 당시 미완성된 실험체에 불과했던 나를 카텟 기관에 편입시켜 주었다.
캐롤 브라이트: …가면서 이야기하죠.
나와 캐롤 브라이트는 마유즈미의 숙소로 향하며 이야기했다. 짧은 거리에 많은 말을 나누다 보니 보폭은 좁디 좁아졌다.
히무로 시라베: 메리를 어디에서 만났지?
캐롤 브라이트: 고등학교에서요.
히무로 시라베: 네가 미국으로 입양됐다고 알고 있다만.
캐롤 브라이트: 네. 시라유키도 부친의 사업 때문에 미국에 있었어요. 저만큼이나 특이한 학생이었죠. 세상에 이런 사람이 둘은 없을 것 같다. 그런 느낌.
히무로 시라베: 나 또한 그런 인상을 느꼈다. 대몰락의 시대에 그만한 인격자는 드물다 못해 내 주위에서는 유일했지.
내 말이 끝나자 캐롤 브라이트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히무로 시라베: 할 말이라도 있나?
캐롤 브라이트: 제가 기억하는 시라유키와 히무로 씨가 기억하는 시라유키는 서로 다른 것 같아서요. 인격자라뇨? 시라유키처럼 극단적인 성질을 가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어요. 그래서 다들 시라유키를 괴짜 취급 하면서 한 번도 괴롭히지는 못한 거고요.
히무로 시라베: 가령 어떤 일이 있었지?
캐롤 브라이트: 얼굴이 예쁘장하지만 사람 됨됨이가 부족했던 여학생이 하나 있었어요. 껌을 자주 씹었는데, 다 씹은 껌은 시라유키의 머리카락에 붙이기를 즐겼죠. 그러다 한 번은 늘 하듯이 자신의 가방에서 껌을 꺼내 씹었어요. 어떤 원료로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껌은 그녀의 턱과 치아 사이에 붙어 단단히 고정되고 말았죠. 결국 그 껌을 제거하기 위해 이를 통째로 뽑을 수밖에 없었대요.
히무로 시라베: 메리가 보복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군.
캐롤 브라이트: 어디까지나 제 추측이지만,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시라유키밖에 없어요. 무시받기를 싫어하고 가짜 껌을 만들어낼 만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니까.
나는 내가 모르는 메리의 일면을 들었다. 하기야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메리와 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언젠가 수다를 떨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당시에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마침내 마유즈미의 숙소 앞에 도달하고 나는 캐롤 브라이트에게 하나 더 질문을 던졌다.
히무로 시라베: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원본의 인격에 접촉하는 것은 정확히 어떤 원리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캐롤 브라이트: 제 터치를 써서 제 샤이닝과 상대 분의 샤이닝이 공명하게끔 하는 거예요. 진흙 속을 뒤져서 보석을 찾아내는 것처럼. 다른 표면 자아가 있다고 해도 제 터치라면 시라유키의 것이 아닌 마유즈미 씨의 샤이닝과 접촉할 수 있어요. 그럼 의식 밖으로 꺼내올 수도 있죠.
히무로 시라베: 터치를 사용하여 자아를 삭제하는 것도 가능한가?
캐롤 브라이트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캐롤 브라이트: 그건 어려울 것 같아요. 봉인하던가 구석으로 밀려나게 할 수는 있어도, 그런 식으로의 운용은 안될 것 같은데… 시라유키를 없애시게요?
히무로 시라베: 궁금했을 뿐이다. 불가능하다면 그만이다.
캐롤 브라이트: …어딘가 할 말이 많아 보이셨는데. 제 기분 탓인가요?
히무로 시라베: 그렇다.
캐롤 브라이트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잠시 단절된 대화의 틈을 무언가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후루미나미 나몬: 나를 없애고 싶었구나. 히무로. 박정한 남자 같으니.
후루미나미 나몬이 속삭였다. 그녀는 오직 나에게만 존재했다. 죽은 사람이라고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후루미나미 나몬이 살아 있는가?'라는 명제는 거짓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만큼은 참이었다.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이 내 몸 안에서 사라지는 것을 원했다. 종양이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몸에서 떼어 내야 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사실 캐롤 브라이트가 그럴 수 있다고 한들 내가 터치를 허용할 수는 없었다.
내가 정신조작에 강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 아마 조율자 다음으로 강할 정신조작 보유자에게 내 몸을 맡기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감시해야 할 대상에게 의존하는 것은 머저리 짓이었다. 여전히 캐롤 브라이트는 믿을 수 없는 대상이었으니, 별 수 없이 나는 불청객과 함께 걸어야 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사이좋게 지내자. 히무로… 응? 내가 진짜 잘할게…
히무로 시라베: 너는 현재 이 탑에서 가장 강한 샤이닝을 가진 사람이다. 하지만 네가 메리의 자아를 몰아내지 못할 확률 또한 존재한다. 한계를 느낀다면, 마유즈미의 정신을 열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뒤에는 내가 개입하겠다.
캐롤 브라이트: 정신을 연다뇨? 비유하신 건가요?
히무로 시라베: 비유가 아니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마유즈미의 숙소를 두드렸다.
그리고 문을 연 것은 메리였다. 마유즈미의 얼굴을 가진 다른 사람. 마유즈미의 옷을 입고 있지만 또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나와 캐롤 브라이트을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격한 반응은 없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제인과 손을 잡으면서까지 마유즈미를 되찾으려 하다니. 너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나 보네. 시라베.
히무로 시라베: 그렇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들어와. 너희가 뭘 하려던 간에 문지방에 서서 할 순 없잖아.
나와 캐롤 브라이트는 순순히 그렇게 했다. 마유즈미의 숙소 안에 있는 세 명의 사람은 각자 의자를 하나씩 차지해 앉았다. 한편 캐롤 브라이트는 왜 메리가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지에 의문을 느꼈다.
캐롤 브라이트: 왜 순순히 문을 열어준 거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는지 너도 알잖아.
마유즈미 나데시코: 조율자 파편에 감시자 후보 앞에서 어떻게 도망을 쳐? 일찌감치 마주하는 편이 낫지.
캐롤 브라이트: 그리고… 네가 어떻게 마유즈미 씨의 몸에 들어 있는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제츠보와 유사한 방식이야. 하지만 나에게는 움직일 수 있는 몸이 없었어. 어쩔 수 없이 너희 중 하나에 기생하고 있다가 내가 몸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 그것뿐이야.
히무로 시라베: 네가 기관에서 온 도움이라면, 어째서 생존자들과 협력하지 않는 거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건 지금부터 너희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되겠지.
히무로 시라베: 수수께끼에는 질렸다. 우리는 해야 하는 일을 할 것이다. 마유즈미에게 본인의 몸을 돌려주는 것.
그 인격이 메리의 것이라고 해도 산 사람의 몸을 빼앗게 둘 수는 없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메리는 비웃음을 지으며 키득거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내가 없었다면 마유즈미는 몸을 빼앗기는 대신 그냥 죽었을 거야. 그러니 나에게 고마워하는 건 어떨까? 덕분에 몸만큼은 영안로 밖으로 나올 수 있고, 너도 마유즈미의 얼굴만큼은 볼 수 있잖아.
히무로 시라베: 그것은 관점의 차이다. 마유즈미를 구해준 것은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일이 네가 저지른 모든 일에 합당성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그녀에게 몸을 돌려주지 않으면 나는 어떤 수단도 불사할 것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말이 안 통하네… 하기야 너는 그런 사람이지. 시라베. 예상한 대로야. 하지만 네 옆에 있는 사람까지 너처럼 자비 없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그 웃음은 캐롤 브라이트를 향하고 있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섭섭하다. 제인.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할 말이라는 그것뿐이라니.
캐롤 브라이트: 친구? 내가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이제 우리는 친구가 아니라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다면 잘 됐네. 제멋대로 오해해서 일방적으로 연을 끊는 사람은 나도 사양이야.
캐롤 브라이트: 오해는 무슨 오해? 크리스 하겐슨에게 돼지 피를 제공한 거. 너잖아.
크리스 하겐슨. 모르는 이름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빌리 놀란이 연구실을 뒤져서 찾아낸 거야. 진짜 돼지 농장에 숨어드는 것보다 인공 돼지 혈액을 찾는 게 더 쉬웠다고 생각했나 보지. 그거 엄청 힘들게 만들었거든? 내가 그걸 왜 빌리 놀란 같은 놈에게 줘?
캐롤 브라이트: 그러면 나를 프롬 퀸으로 만든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토미를 협박해서 내 파트너로 서게 만든 것도. 전부 네 계획이 아니란 말이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내가 토미를 협박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토미도 흔쾌히 허락했어. 내심 네가 당해온 괴롭힘이 부당하다고 여겼던 것 같아. 토미가 그렇게 된 건… 아쉬운 일이지만.
캐롤 브라이트: 영영 깨어나지 못하게 됐는데 당연히 아쉬워야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걔 두 달 뒤에 깨어났거든?
캐롤 브라이트는 잠시 침묵했다.
캐롤 브라이트: 토미가… 정말?… 다행이다.
어딘가 안도한 듯한 캐롤 브라이트의 기색을 보자 메리는 캐롤 브라이트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위선 떨지 마. 네 잘못이 무서워서 도망친 주제에. 네가 정말 토미를 불쌍히 여겼다면 남아서 병문안이라도 갔겠지.
캐롤 브라이트: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나에게 피를 뒤집어씌운 사람의 짓이고, 나를 무대 위로 올린 사람 탓이야!
캐롤 브라이트는 역정을 냈다. 본 적 없는 면모였다. 내가 그녀를 조율자 취급하며 구속하려 시도할 때도 화를 내지 않았던 캐롤 브라이트가. 메리를 상대로는 화를 내고 있었다.
단편적인 내용들만 대화의 주제로 떠올랐기에 둘 사이에 정확히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는 몰랐다. 사건의 경위는 복잡해 보였다. 확실해 보이는 건 두 사람이 친밀했으며, 캐롤 브라이트가 피를 뒤집어쓰는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오해가 생겨 절교했다는 것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투표용지에 손을 댄 건 크리스 하겐슨이야. 나는 사람들을 매수하기만 했어. 크리스 하겐슨이 그런 짓을 꾸미는 줄도 몰랐고.
캐롤 브라이트: 왜 사람들을 매수하고 다녔는데? 왜 나를 가짜 퀸으로 만들려 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 좋은 일 시켜주고 싶었으니까. 너는 프롬이 무슨 오스카 상인 것처럼 굴었잖아. 나는 그런 너에게 하찮은 최고의 영예를 안겨주고 싶었을 뿐이야. 크리스 하겐슨이 너에게 피를 붓지만 않았더라면 너도 치어리딩 팀에 들어갈 수 있었을 거야. 모든 차별. 모든 멸시. 전부 벗어버리고 싶어 안달을 내길래 이루어 주려 했는데… 이런 식으로 보답하다니.
캐롤 브라이트: 네 말이 진실이라면. 너는 왜 퀸이 된 나를 보러 오지 않았어?
메리는 고개를 저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프롬은 바보들만 가는 곳이니까. 그냥 집에서 쉬었어. 애초에 내가 네 프롬을 망쳐서 좋을 일이 어디에 있다고?
캐롤 브라이트: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터치가 어떻게 발현될지를 실험할 수 있잖아.
메리는 캐롤 브라이트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모든 일이 전부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지는 않아. 제인. 내가 네 터치에 관심을 가진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실험을 그렇게 극단적으로 시작하지는 않는다고.
히무로 시라베: 그게 무슨 뜻이지?
메리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해 줄게. 시라베. 너도 이야기의 맥락을 온전히 이해해 봐. 그날 조작된 투표로 인해 프롬 퀸으로 선정된 제인은 무대 위에서 돼지 피를 뒤집어썼어. 사회적 계급 상승 직전에 곤두박질쳐버린 제인은 그만 체육관 전체에 터치를 사용하고야 말았지. 수많은 사람들이 기절했어.
히무로 시라베: 메리라면 그런 실험을 만들지 않는다.
나는 메리의 윤리관을 염두에 두고 말했다. 하지만 메리는 내 말을 다르게 해석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네 말이 맞아. 시라베. 처음부터 그런 실험을 할 수는 없지. 당장 제인도 그 일에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미국을 떴잖아. 내가 실험을 한다면 소동물에서부터 인간에까지 터치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았을 거야. 모집단을 신중하게 정하고, 제인의 뇌파가 어떤 시점일 때 그 모집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정밀하게 측정했을 거라고. 그러니 제인에게 벌어진 게 사고라는 거야.
캐롤 브라이트는 메리의 말을 들으며 점차 얼굴을 하얗게 변색시켰다.
캐롤 브라이트: 너… 나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 답답하네. 지금의 내 시점에서 만약 실험을 한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야. 가정이라고. 뭐가 그렇게 예민해?
캐롤 브라이트: 예민해서 미안해. 재단에서 실험을 당하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어서.
나 또한 그렇다며 공감대를 형성하기에는 좋지 않은 때였다. 메리와 캐롤 브라이트는 서로 썩혀둔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예상치 못한 재회를 거치며 터져 나왔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네 재능이 초고교급 피해자인 줄은 몰랐네? 그래. 네 인생 참 고달팠다. 제인. 너무 안타까워. 쿠키라도 줄까? 너는 그저 당시의 일을 내 탓으로 하고 싶은 거야. 탓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나와 진짜 죄가 있는 머저리 둘 사이에 연결점을 찾는 거지. 내가 그 두 사람 좋은 일을 할 리가 없다는 건 잊어버린 채로.
캐롤 브라이트는 혼란을 느꼈다.
캐롤 브라이트: …정말 아니라는 거야?
히무로 시라베: 점차 본래 목적을 잊어가는 것 같군. 우리가 이곳에 모인 이유는 메리의 정신을 억압하고 마유즈미의 정신을 다시 표면으로 세우기 위함이다.
둘 사이의 회포를 푸는 일을 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자유이다. 하지만 내가 캐롤 브라이트를 메리 앞에 데려온 목적은 마유즈미의 복원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랬지. 안타까워. 우리가 이런 식으로 으르렁거리게 되다니. 아무튼 간에 그렇게 친했던 우리가.
캐롤 브라이트: …그 시간은 이미 지났어. 시라유키. 어떻게 되돌릴 방법도 없잖아. 이렇게 된 건 나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왜 내가 마유즈미 씨를 되살리기 위해 너에게 이런 짓을 해야 할지도 점점 모르게 되지만…
마유즈미 나데시코: 네가 할 일이나 해. 제인.
캐롤 브라이트: …그럼. 시작할게.
캐롤 브라이트는 메리에게로 손을 뻗었다. 정전기가 파직 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기억하는 바. 캐롤 브라이트가 터치를 사용하면 몇 초 안에 피터치자의 정신은 캐롤 브라이트의 것과 연결되었다.
하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메리는 여유로운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었고, 캐롤 브라이트는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집중을 함에도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일이 틀어졌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사실에 나는 초조함을 느꼈다.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잘 안 통하네요… 이런. 생각보다… 훨씬 안 통해요… 어떻게…?
마유즈미 나데시코: 마유즈미의 몸에서는 다크닝이 석유처럼 뿜어져 나와. 네 터치가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그게 샤이닝으로 인해 벌어진다면 마유즈미의 몸 안에 있는 다크닝으로 막을 수 있어. 네가 이해하기는 어려울 테니 요약하자면…
메리는 캐롤 브라이트의 손을 뿌리쳤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안타깝게 됐어. 마유즈미는 돌아오지 않아.
히무로 시라베: 사실인가. 캐롤 브라이트?
캐롤 브라이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그것을 천천히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캐롤 브라이트: …제 역량 부족이에요. 손을 더 오래 맞잡고 있어도 제 샤이닝이 통할지는 장담할 수 없어요. 시라유키에게 터치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있을 줄은 몰랐으니. 제가 무언가를 더 하기에는 어려워요…
방심. 지금이다.
캐롤 브라이트: …라고 할 줄 알았어?
캐롤 브라이트는 다시금 메리의 손을 붙잡았다. 손뼉이 맞닿는 소리가 울릴 정도로 강하고 세게 잡았다. 메리는 뒤늦게 손을 빼려 했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안 된다니까. 허튼 시도야! 힘을 억제하고 있는 너는 결코 마유즈미의 다크닝을…
캐롤 브라이트: 내 친구 돌려 내. 시라유키. 너에게 이토록 가혹할 수밖에 없어서 미안하지만, 나는 마유즈미 씨를 돌려받아야겠어.
캐롤 브라이트의 잠재력에 대해 메리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캐롤 브라이트가 그저 상냥해 빠진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상냥하려는 사람일수록 그 반동이 크다. 절박한 그녀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을 수 있다. 그것은 강한 힘 그 자체이다.
이윽고 두 사람은 줄 없는 줄다리기. 주도권 싸움을 시작했다. 괴로워하는 듯한 목소리가 두 사람 모두에게서 새어 나왔다. 그리고 나는 힘을 느꼈다. 충돌하는 두 가지의 힘을. 총기를 든 미도리카와 아쿠토가 캐롤 브라이트에게 제압당한 것처럼, 형태 없는 힘이었으나 그것은 일종의 파동과 같이 마유즈미의 숙소 안을 법종 소리처럼 울려댔다.
그와 동시에 나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가 열리고 있었다. 갇혀 있던 곳에 틈이 생겼다. 캐롤 브라이트는 이해할 것이다. 터치를 하는 장본인이라면 정신을 어떻게 열어야 할지 알 것이다. 그저 알게 된다. 때가 되면 알게 된다.
그리고 캐롤 브라이트는 소리쳤다. 나는 느꼈다.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열었어요!
히무로 시라베: 나도 안다.
나는 메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은 곧 마음의 통로이다.
그리고 나는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무채색. 무음. 꿈에서 본 곳이었다. 음영의 저택. 붓으로 그린 듯한 먹물의 색채. 그것은 마유즈미의 정신이었다. 마유즈미 본인이 생각한 그녀 자신이었다. 색이 없는 이유는 색이 없기를 강요당했기 때문이다. 마유즈미라는 사람의 색은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그림자에 덮여 버렸다. 그렇기에 무채색이었다.
나는 보폭을 가장 넓게 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마유즈미. 찾아야 한다. 전해야 한다. 스스로가 표면으로 나올 수 있게끔 도와야 한다. 그녀를 찾는 동안 내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너무도 조용했다.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나야! 대답해! 어디야? 마유즈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유즈미는 내 말을 듣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듣고서도 대답하지 못하는 건가. 대답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나? 그 모든 가능성을 따지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나는 곧바로 그녀의 자아가 이 공간에 있기만 하다면 그녀가 대답할 수 있는 방법을 사용했다. 운명이 하나가 된 소수의 이들만이 가능한 것. 정신으로 외치는 것이다.
"마유즈미!"
"네?"
근처에 있다! 나는 저택의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종이를 덧댄 미닫이문, 후스마를 열면 세 개의 후스마 갈래가 나왔다. 하나를 더 열면 세 개의 후스마 갈래가 또 나왔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정면으로 네 번. 오른쪽으로 두 번.
일일이 열어댈 시간마저 없었다. 나는 팔을 내 몸의 앞에 올리고 후스마를 뚫어가며 달렸다. 캐롤의 터치는 정신에 틈을 열어 주었을 뿐이다. 언제 내쫓길지 알 수 없었다. 마유즈미의 얼굴마저 보지 못한 채 끝날 수도 있다. 그럴 수는 없다!
나는 그녀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유즈미가 세 번의 후스마 뒤에 있다. 나는 불구덩이에 떨어진 사람처럼 달렸다. 마유즈미를 돌려내야만 한다. 나는 그것에 맹목적으로 변했다.
"네가 나를 잊어도… 내가 알아볼게. 히무로 시라베. 아웃."
그녀는 나를 구했다. 그러니 나도 그녀를 구해야만 했다. 그리고 마지막 후스마를 뚫었을 때. 나는 보았다.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나는 그녀를 보았다. 다소곳이 종이 앞에 앉은 채 붓을 든 마유즈미였다. 그녀를 못 본지 몇 달은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마유즈미가 영영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이 나의 가슴을 달음박질하게 만들었다. 나는 머리를 멍하게 만들 정도의 안도감과 싸워야만 했다. 얼빠져 있다간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
그녀는 나에게 한 켠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순간 마유즈미가 아니라 그녀를 닮은 인형을 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마유즈미였다. 마유즈미는 몸이 굳은 채로 멍하니 종이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은 누군가가 실을 걸고 움직이는 것처럼 제멋대로 휘적였다. 그 끝에 종이에 나타난 것은 유려하고 연약한 패랭이꽃이었다.
시체같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시체는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녀는 혼이 빠진 사람이었다. 자유의지가 없는 사람. 그리고 그것은 메리가 마유즈미를 억압한 결과가 아니다. 마유즈미는 그녀의 가택에서의 삶을 이와 같이 느꼈다. 흑백의 가택은 곧 마유즈미가 영영 갇혀 살아 다른 모습의 가택은 상상할 수 없는, 구속의 정원이었다.
나는 마유즈미의 어깨를 잡았다. 내 손길이 닿자 흠칫 하고 어깨가 하카마 안에서 움찔거렸다. 반응이 있다. 그렇다면 소통의 여지가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네 이름을 기억해내야 해!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그늘에서 벗어나야만 이 환각 속에서 깨어날 수 있어! 마유즈미!
마유즈미 나데시코: 사내가 먼저 말을 걸기 전에 말하지 마라.
마유즈미는 멍하니 말했다. 그 목소리는 마유즈미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마유즈미의 음색이 낼 수 있는 역도를 알았다. 그것은 자연스래 나오는 발성이 아니었다. 일부러 자신의 목을 짓누르는 목소리. 연장자의 목소리를 따라하기 위한 자해적 발성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저를 아세요. 선생님?
마유즈미는 당시의 기억에 갇혔다. 마유즈미의 물음은 순간 나에게 크나큰 좌절을 안겼다. 너를 아느냐고?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아는 것보다 너에 대해 아는 것이 많다. 나는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안다. 현명하고 상냥했다. 긍지 높고 자비로웠다. 우리는 카텟이었다. 그런데도 나를 모르는가?
히무로 시라베: 네 이름을 기억해… 그래야 깨어날 수 있어. 마유즈미. 기억해내야만 해. 네 이름은 나데시코가 아니야…
나는 해야 할 말을 출력했다. 그녀에게 귀띔해줄 시간이 없었다. 내가 그녀를 얼마나 아는지에 대해 말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부족했기에 나는 나를 처음 보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그녀를 보고도, 사적인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제 이름은 나데시코 맞아요.
히무로 시라베: 아니야. 틀렸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눈이 슬퍼 보여요.
히무로 시라베: 내 눈은 원래 이래.
"히무로. 처음 깨어났을 때는 평범하게 말했으면서 지금은 왜 말투가 딱딱해진 거야?"
"내 말투는 원래 이렇다."
"아니었잖아! 저번에는 누나 누나 하면서 살갑게 굴어 줬으면서 이제 와서 불편하게!"
주눅이 들 시간이 없다. 수다를 떨 시간도 없다. 나는 다시금 말을 출력했다.
히무로 시라베: 기억해 내. 마유즈미. 다시 깨어나.돌아와…
마유즈미 나데시코: 왜 울려고 그래요? 어우. 얼굴 상해요. 그러지 마세요.
나는 가능한 한 그녀의 눈을 바라보려 했다. 그녀가 본래 가지고 있던 장밋빛 눈동자. 무채색의 공간에 색이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 뿐이었다. 그녀의 영혼은 죽지 않았다. 갇혀 있을 뿐 그것은 주머니 속 송곳이 드러나듯이 언젠가 두각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다. 아무리 마유즈미 가문이 그녀를 억눌러 나데시코로 키우고자 했지만 결국 마유즈미는 총잡이가 되었듯이.
하지만 눈을 바라보는 것은 힘이 부쳤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저 그것이 나를 무너뜨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를 보면 볼수록 그녀를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험이 무거워졌다. 하염없이 무거워지기만 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당황과 걱정이 담겨 있었다. 나를 떠올리지도 못하는데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믿지 못하는 동안 그녀의 손은 어느새 내 볼 위에 올라와 있었다. 빠른 손재간. 총잡이의 재목이다.
마유즈미의 손은 내 입꼬리를 위로 잡아당겼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기운 내요. 알았죠? 이히. 웃는 게 훨씬 낫다.
히무로 시라베: 기억해 내야만 해… 약속해 줘. 부탁이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제 이름이요? 나데시코 맞다니까 그러네… 그렇게 찡그릴 정도로 절실하세요?
히무로 시라베: 그래. 맞아.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게 우기시니까… 약속할게요. 이름. 기억해 보죠 뭐. 그런데 당신은 왜 당신 이름 안 알려줘요?
천치같이 모자란 놈. 그것도 안 알려주고 무엇을 알려고 그랬단 말인가. 나는 천천히 내 이름을 읊었다.
히무로 시라베: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나데시코: 기억할게요. 히무로… 씨?
그 순간 나는 느꼈다. 틈이 좁아진다. 닫힌다. 끝이다. 이제 깨어나야만 한다. 너무 짧다. 한 마디라도 좋다. 조금이라도 더. 부디 한 마디만 더!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그러나 마유즈미를 향해 뻗은 내 손은 그저 몇십 개의 후스마를 뚫으며 저택의 밖으로 끌려올 뿐이었다.
다시금 내 몸을 느꼈을 때. 나는 앞으로 크게 내딛은 발을 헛디뎌 마유즈미의 숙소 앞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는 메리에게서 손을 떼고 나에게 다가왔다.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어떻게 된 거죠?
히무로 시라베: 실패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휴! 잘 됐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안타깝지만 처음부터 모든 걸 얻을 수는 없어. 시라베. 모든 실험에는 시행착오가 따르는 법이야. 그러니 너무 좌절하지는 마. 그 실험이 언젠가 너의 디딤돌이 될 테니까.
나는 메리의 말에 멍하니 대답했다.
히무로 시라베: 실험이 아니다. 시도였다… 그리고 실패일 뿐이다…
실험은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실패해도 좋은 이들이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 눈꺼풀의 안에는 여전히 마유즈미가 있었다. 어디에나 마유즈미가 있다. 나는 모든 검은 것들에서 마유즈미를 보았다.
나와 카이다는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그래야 할 때 자신의 충동을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이었고, 카이다는 그저 분해서 이를 악물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카이다의 참을성은 나의 것보다 훨씬 짧았기에, 카이다가 나나시에게 애먼 화살을 돌리는 것은 정해진 일이었다.
카이다 쿠로하: 너는 씨발 왜 왔어?
나나시: 그냥 참아. 나도 너 좋아서 보러 온 거 아니니까.
나나시의 대답에 카이다는 이를 득득 갈아댔다. 그때. 나는 어렴풋이 문 밖에서 캐롤의 목소리를 들었다. 정확한 맥락은 들을 수 없었지만, 화해라는 단어만큼은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청력이 민감한 카이다가 못마땅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면, 나나시가 나와 카이다를 화해시키려 남았다고 여긴 모양이다.
카이다 쿠로하: 나는 얘랑 화해 안 해. 시켜보던가. 하지만 나는 할 생각 없어.
나나시: 하기야 너는 자기 잘못도 제대로 사과 못 하는 사람이니까 화해처럼 어려운 일은 할 수 없겠지.
카이다는 눈을 희번덕 뜨고는 작위적인 웃음을 지었다. 이빨을 보여주겠다는 의도에 더 부합하는 웃음이었다.
카이다 쿠로하: 하하하! 날 우습게 보네? 내가 화해를 못 한다고? 씨발 당연히 할 수 있지. 하기 싫을 뿐이야!
카이다는 팔짱을 낀 채 다리를 덜덜덜덜 떨어대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화해의 거부를 나타내는 듯했는데. 부산스럽고 경망한 꼴이었다. 의자 옆으로 다리를 쩍 벌려 두기까지 해서 흉하기도 했다. 이딴 치녀 같은 게 나를 변태라며 놀려대다니 이보다 억울한 일이 없었다. 카이다는 뻔뻔하게 물었다.
카이다 쿠로하: 뭐. 화해를 왜 해야 하는데? 내 잘못이냐? 내 잘못이야? 그년이 내 머리카락 틀어잡고 당겨댄 건! 그전에 내가 놀려대기는 했지만 그게 나쁜 일은 아니라고. 자기가 찔리니까 과민반응을 하는 거야! 나처럼 떳떳한 사람은 누가 그렇게 놀려대도 끄떡 안 한다는 말씀!
나나시: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제츠보를 그렇게까지 화나게 만든 거야. 너…
카이다 쿠로하: 하하! 그건 말이지!
더 말하게 두었다간 정말 신을 낼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러기 전 카이다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나 또한 화살을 나나시에게로 돌렸다.
제츠보: 그래서. 정말 왜 왔어. 나나시? 아니다. 왜 남았어?
왜 왔는지는 사실 쉽게 알 수 있었다. 캐롤 방 안에서 지옥도가 열린 마냥 비명과 고함이 난무했으니 쫄래쫄래 왔겠지. 하지만 왜 캐롤 없는 방에 남았는지는 미지수였다. 일단 캐롤이 마유즈미를 되돌려 놓으려고 히무로를 따라간 이상 나나시가 이곳에 남을 이유는 없었다. 나나시 또한 시라유키와 면식이 있는 사람이니, 시라유키의 제령을 도우러 가는 것이 조금 더 합리적이지 않은가.
나는 카이다처럼 말했다. 쏘아붙이는 억양이 말에 묻어났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나시는 그것을 모른 체하려는 모양이었다.
나나시: 카이다를 하루종일 감시하는 건 하기 싫은 일이잖아. 내가 카이다랑 그리 오래 붙어있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엄청 짜증 났거든… 그러니 혼자 하기보단 누가 도와주기라도 하는 게 어떨까. 싶었어.
제츠보: 안 그래도 돼. 나는 너희랑은 달라. 아무것도 안 먹어 봤자 배고프지도 목이 마르지도 않아.
카이다 쿠로하: 그럼 홍차 왜 마셨어. 씨발. 뱉어!
나는 카이다를 무시하고 말을 끝냈다.
제츠보: 또 졸리지도 않으며 피곤하지도 않아. 너희가 당연하게 하는 현상들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당연히 심심하지도 않지.
내 무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카이다는 내 성질머리를 돋우려 애썼다. 마치 내가 화를 내는 것이 일종의 인정이나 포상이라는 것 같았다. 가치체계가 고장 난 사람이 이렇다.
카이다 쿠로하: 아까 내가 네 키위 가지고 놀렸을 때는 아주 끝장을 볼 작정이었으면서. 말은 잘하네.
나나시: 키위? 무슨 키위?
나나시는 의아함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웬 과일? 제츠보랑 과일이 무슨 연관이 있길래?' 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나시가 온 것은 이미 훌륭한 8기통 차량에 추진 장치를 추가로 다는 꼴과 같았다. 관객이 생기면 모욕에는 날개가 달리기 마련이다. 나와 나나시가 친분이 있다는 걸 안 이상 카이다는 나를 어떻게든 엮으려 몸부림을 칠 것이기에. 나는 카이다가 입을 열기 전에 말했다.
제츠보: …아무튼 나는 불편하지 않아. 아주 괜찮다고.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 너는 나한테 도움을 줄 게 없어.
이 정도라면 '아. 제츠보를 도와주려고 했는데 당사자가 저렇게 말하니 그만 가야겠네'. 하고 떠날 만한 명분은 주었다. 이것으로 나나시는 스스로가 나를 자진해서 도울만큼 착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나나시는 곧 못 이기는 척 캐롤의 숙소에서 떠날 터였고, 그럼 나는 다시금 나를 별다른 이유도 없이 혐오하는 여자와 한 방에 앉아서… 캐롤이랑 저게 아주 애틋하게 가족의 정을 쌓는 걸 구경하게 되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나시는 상당히 집요했다. 나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위선을 떨 거면 그냥 매몰차게 가버리는 편이 받아들이기도 편할 테니까.
나나시: 사실대로 말하자면 카이다의 감시를 너한테 다 맡기고 싶지 않아서 온 거야.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마음이 불편하기만 하는 것보다 직접 와서 거들기라도 하는 게 낫잖아.
제츠보: 마음 쓰지 말래도. 이게 내가 하는 일이야. 싸구려 동정을 베풀고 싶어? 그럴 거면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가.
자. 네 마음씨를 싸구려라 폄하하고 일부러 기분 나쁘게 굴었다. 아직 모자라나? 빨리 가라.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네 얼굴을 본다고 해서 내가 느끼는 것은 아련함과 슬픔뿐이다. 그 감정은 네 앞에서만 살아난다. 네가 보이지 않으면 나는 사람 모양의 기계지만 네 앞에서 나는 기계에 갇힌 사람이다.
그러니 좀 가… 우리는 같이 있으면 힘들기만 하잖아…
나나시: 싸구려 동정이 아니야. 23T.
23T. 나는 굉장히 옛 것처럼 들리는 그 호칭에 문득 화가 났다.
제츠보: 뭐야? 내가 말했잖아. 내 이름은 제츠보야. 23T5U130은 그 이름을 그대로 말하지 않기 위한 변형일 뿐이고. 또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내 이름은 네가 직접 지었다고 했잖아.
나는 노네임에게 있어서 무엇인가?
노네임은 그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절망이야…"
절대 돌아갈 수 없는 시대를 향한 메타포. 걸어 다니는 사람 모양의 추모비. 미련이 낳은 무책임한 창조. 그게 아니라면 부활인가? 노네임은 노바디의 영혼을 기계에 넣었다. 이것이 칭찬받아 마땅한지 규탄받아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행위가 천명을 거스르는 끔찍한 의식이었다고 하더라도 노네임이 나의 존재를 인정했다면, 나를 인격체로 대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노네임은 마지막까지도 내가 노바디의 자리를 꿰찬 인공지능인지 아닌지를 정하지 못했다. 마지막까지도.
나나시: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그런 멸칭으로 붙는 건 옳지 않아. 너는 나를 여러 번 구하고 또 도와줬어. 지금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카이다를 억누르고 있잖아. 너를 절망이라고 부르진 않을 거야.
이게 나나시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말이었다면 무척 감격스러웠을 테지.
아니다. 사실 이미 감격스럽다. 어쩌면 다른 사람이 하는 것보다 훨씬 감격스러울지도 몰랐다. 그야 다른 누구도 아닌 나나시의 말이니까. 인정받기 위해 한 일이 아닐지라도 그것을 인정받으면 기쁜 법이다. 나는 기뻤다. 분명 그랬다.
제츠보: 집어치워…
그렇기에 그 이상으로 나는 거부감을 느꼈다.
제츠보: 그건 노네임이 내게 준 이름이야. 이제 와서 철회할 수는 없어. 나나시. 그 일은 이미 벌어져 버렸고, 나의 정체성은 그날 이래로 절망이 되어 버렸어.
잘못을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너무 늦었다. 나에게 그렇게 상처를 남긴 채로 노네임은 사라졌고, 닮은 사람이 대신 사과를 하러 왔다.
제츠보: 네가 그랬지? 멸칭이라고. 끔찍한 이름이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그 끔찍한 이름만이 나에게 있는 전부야. 그런데 이제 너는 나에게서 그 이름마저 빼앗겠다는 거야?
밉다.
미워 죽겠다.
내가 왜 이럴까? 머리가 아플 리 없는데도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나나시가 나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했을 때도, 캐롤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죽을 뻔했을 때도 이렇게 밉지는 않았다. 나는 이 감정을 묘사할 만한 짧은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니 불편하게 풀어서 말하자면 '뒤늦은 고해를 반기며 기꺼워하는 와중 자신에게 남은 갈 곳 잃은 고통의 투사'였다. 이런 단어가 있기는 하던가?
그가 뻔뻔한 사람이 아니기에 화가 났다. 사과를 했기에 괘씸했다. 자신의 잘못을 알기에 가증스럽다. 이게 대체 무슨 느낌이란 말인가? 나는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조차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고뇌가 내 영혼과 회로를 동시에 헤집어 놓아 인풋과 아웃풋이 제대로 꼬여 버린 듯했다.
나나시: 미안해. 하지만 너는 더 나은 취급을 받아야 해.
제츠보: 이제 와서? 그러면 뭐가 달라지는데? 나를 실컷 괴롭게 만들어 놓고 그걸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꿈도 꾸지 말라고…
그건 내 진심이 아니었다. 내 진심 너머의 진심이었다. 그것은 내 정신 속에 함께 존재했다. 기쁨과 허무함과 분노가 마구 뒤엉켰다… 내가 그 기쁨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켜켜이 쌓인 응어리를 전부 토해낸 뒤가 될 터였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제츠보: 나에게 한 짓이 무도하다는 걸 알았어? 그럼 그대로 살아. 그러다 어느 날 거울 앞에서 물에 젖은 네 얼굴을 마주하며, 나에게 어떤 끔찍한 짓을 해 버렸는지 떠올리며 스스로의 잔인함에 몸을 떨어.
이것은 나나시에게 밖에 할 수 없는 복수였다. 자신의 과오를 아는 자를 용서하지 않는 것. 노네임에게는 그런 식의 앙갚음이 통하지 않았다. 나는 죗값을 받아 마땅한 사람에게는 하지 않을 일을 그 당사자가 아닌 이에게 하고 있었다. 모순적인 일이다.
제츠보: 우리는 서로에게 고통만을 주는 존재니까. 가슴속에 박힌 쇳조각이 녹물을 토하고 네 육신을 더럽히게 둬… 그게 내가 원하는 일이야.
나나시는 고개를 숙인 채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내가 하는 말을 나나시는 이해했다. 세상 그 누구보다 그는 나를 잘 이해했다.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그는 알 것이다. 나나시는 어떤 일면에서 파렴치했지만 비겁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떠날 것이다. 자기 죄책감을 덜고 싶다며 앵앵거리지 않고 짐을 진 채 떠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내 앞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순간 나나시에게 실망했다. 뒤늦은 사과. 혹시 캐롤과 만들어갈 행복한 나날에 나라는 존재가 거슬려서 원한을 청산하고자 온 것인가? 그래서 용서해 달라 요구하고, 내가 용서해주지 않으면 나를 속 좁은 사람으로 격하시켜 아무런 심리적 거리낌 없이 만남을 이어가려는 속셈이라면 그보다 실망스러운 일은 없었다. 내 눈은 사나워진 채 나나시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나나시에게서 오직 수용의 태도와 겸허함만을 읽었다.
나나시: 그럴 수는 없어.
뻔뻔함이었다면 눈을 똑바로 뜬 채 나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위선을 떠는 것이라면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나서도 나는 착한 사람이라며 눈동자에 반감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나나시가 품은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내 앞에 있는 남자가 문득 낯설어졌다. 나나시는 분명 영안로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영안로 밖에서의 일주일이 영안로 안에서는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사이에 나나시는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사람이 크게 변했다는, 그런 건가? 하지만 캐롤 앞에서는 여전히 숫기가 없는 나나시였다. 나는 어떻게 그 여자에 한눈 팔리던 놈이 한 편으로는 경지에 이른 주지처럼 굴게 된 건지가 궁금했다.
제츠보: 도대체 왜야. 왜…?
나나시: 누군가를 존재로 끄집어냄에 있어 끄집어내는 자는 자신이 기투한 존재에 대하여 누구보다 강한 책임을 가진다.
나나시는 중얼거렸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제츠보: 뭐라고…? 그게 무슨 뜻이야?
카이다 쿠로하: 그러게. 무슨 뜻이냐?
가만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카이다 또한 물었다. 아마 카이다는 단어조차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맥락에서 나와 나나시가 이야기를 나누는지도 몰랐다. 그러니 나나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게 무척 어려울 수밖에.
나나시: 내가 네 탄생을 선택했기 때문에 너를 혼자 둘 수 없다는 뜻이야. 너를 원한 건 나야. 내가 너를 현실로 내던졌어. 그래놓고 너를 외면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돼.
제츠보: 외면해야 해. 나나시. 그게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더 나아. 너는 나에게서 노바디를 보고, 나는 너에게서 노네임을 보고. 이 꼬인 매듭은 우리 손으로 풀 수 없어. 그러니까… 그만하자…
옳은 게 그른 것보다 나쁠 수 있고, 상냥함도 가혹함보다 나쁠 수 있다.
제츠보: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어. 두 사람은 견고하고 높은 쌍둥이 탑을 쌓았지만, 이제 그건 무너져 버렸어. 그 위에 벽돌을 올리려 해 봤자 무너질 뿐이야…
나나시: 나는 너에게서 노바디를 보지 않아. 내가 너를 보면, 그건 너를 보는 거야. 모르겠어? 나는 노바디와 보낸 시간보다 너와 보낸 시간이 더 길어. 나는 여전히 우리를 돕기 위해 카이다 쿠로하를 감시해주는 사람을 보고, 내가 기투한 존재를 보고, 내 친구를 봐. 지금도 말이야.
그 말은 불편함과 동시에 애틋했다. 내가 나나시에게 노네임을 투영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당연히 나에게서 노바디를 본다고 여겼다. 조금만 깊게 생각했다면 나나시 본인에게 있어 노바디라는 사람은 기억 속에만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와 노네임은 서로 다른 사람에 가깝다는 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나는 나나시를 내가 있던 방의 밖으로 쫓아내고 싶어졌다. 이유는 몰랐다. 그저 견딜 수가 없다고 느꼈다. 그것은 내가 감정 없는 기계로 사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내 몸에 인간적, 즉 내 생전의 모습이 나타나기 전에는 나는 별반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카이다와 하기와라 같은 인간들이 나를 화나게 만드는 일도 내 외견을 되찾은 직후에 벌어졌다. 하지만 화는 대체로 분출적인 감정이었다.
나를 사람이 아닌 기계로 폄하하는 말을 들으면 나는 화가 났다. 화가 나는 사람들은 대개 화를 낸다. 욕설, 주변 환경의 파괴, 신체적 폭력의 시도 따위의 일은 전부 화를 연료로 사용하는 것이다. 연료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화는 자원이 아니라 곧바로 연소하지 않으면 불편하기만 한 짐덩어리니, 화는 일종의 부담이다. 화를 내는 일은 부담을 덜어내는 것이다. 부하를 전이하는 것이다. 화를 내서 불편해지는 것은 내가 아닌 외적 세계다.
그와 반대로 나나시를 마주하면서 나는 부하가 내적 세계에 적재되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것이 화라고 생각했다. 견딜수가 없을만치 불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화는 아니었다. 가슴이 매었다.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왜? 나나시가 나를 그저 나로 보는 일이 왜 그토록 마음에 사무칠까? 플러스적이 아닌 마이너스적 감정. 이것은 슬픔이다. 이루지 못할 환상을 바라보는 비애.
절망이다.
나나시: 너는 내 고통이 아니야. 23T. 너는 내 친구야. 내가 반드시 책임져야 할 사람이기도 하고. 그러니 나는… 탑을 다시 쌓고 싶어.
하지만 그 새로운 탑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는다. 나나시는 나에게 충실하지만 그것은 오직 친구로서의 의미에 국한된다. 그가 나쁜 걸까? 일단 나에게는 그렇다.
제츠보: …어떻게 할 생각인데?
나나시: 너를 위한 일이라면 뭐든 할게.
나나시가 잃은 것은 기억이지, 지능이 아니다. 그는 기억을 잃기 전과 동일한 지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블레인의 감시 카메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는 왜곡 망토를 만들어낸 사람이. 중학생의 나이에 오염된 지하수를 정화하는 기적의 샘을 만든 사람이. 그런 얼빠진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나나시는 나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보다 힘이 약하며 아는 정보 또한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나시가 약속할 수 있는 거라고는 무조건적인 긍정 뿐이었다. 과도한 호의. 부담스럽고 앞뒤를 가리지 않는 보장. 그것도 임자도 있는 놈이…
제츠보: 진심이야? 그건 미련함과 무식에 지나지 않아.
나나시: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거야. 힘이 부칠 때는 내가 그곳으로 갈게. 네가 언제나 나를 도와주러 온 것처럼. 나만큼은 너를 그렇게 대해야만 해.
나나시의 말을 뒷받침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분명 그렇다. 하지만 나나시의 약속이 무엇을 보장할 수 있느냐 따위의 문제는 내 뇌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그게 진실인지만이 중요했다.
나나시: 너를 되살린 건 나야. 그런데 나는 너에게 절망이라는 이름을 줬어. 그 상처를 낫게 만들 수는 없지만… 내가 너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게 해줘. 부탁할게.
나나시는 비굴하지 않은 움직임으로 내게 손을 건넸다. 책임을 다하겠다는 그 말은 내가 듣기에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나나시는 이전에 "내가 다시 살 수 있을까?" 라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살 수 있을까?
원본이 사라져 버린 복제 두 명이… 살 수 있을까? 그 가정은 내 바람보다 더 컸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기쁠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 기쁨이라. 좋지. 좋을 수밖에. 그 꿈은 꾸기만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노바디와 노네임은 서로가 있어서 좋았다. 희망을 담은 우정.
그리고 둘 중 하나가 죽었다.
그 사실을 다시 떠올리자 내가 느낀 것은 그저 두려움 뿐이었다.
나는 나나시에게 대답했다.
제츠보: 이런 게 가장 나빠. 나나시. 이 쓰레기 난봉꾼아… 나에게 여지를 주는 게 가장 나쁜 거라고.
나는 나나시가 건넨 손을 짝 소리 나게 때렸다. 나나시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손을 감쌌다. 한 번의 타격만으로 그의 손은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나는 그에게 알려 주어야만 했다. 사람은 자신의 모든 과오를 거둬들일 수는 없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때가 있다. 그 깨달음은 아플 것이다. 수치스럽기도 하겠지.
나나시: 악…!
제츠보: 놀라? 어디서 놀라고 있어. 탑 따위는 안 쌓아. 나는 네가 싫어. 나나시. 너무 싫어. 보기만 해도 노네임 생각이 나서 가증스러워 견딜 수가 없어.
대부분의 시간에 억양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억양을 꾸며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다른 이들이 듣기에는 평소처럼 들린다. 그러니 거짓말은 나에게 있어 쉬운 일이었다. 나는 나나시의 이마에 손가락 하나를 대고 그를 쭉 밀어냈다.
제츠보: 나가. 네 얼굴도 보기 싫어. 당장 꺼져. 사라져. 너 따위는 필요 없어. 나는 네가 미워. 너도 내가 어땠는지를 한 번 느껴봐야 해.
나는 곧바로 나나시의 어깨를 툭툭 튕겼다. 내 힘이다. 의도를 담은 나의 힘. 나나시는 내가 한 번 그를 밀어낼 때마다 속수무책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는 동안 그는 멈추라는 등의 항변의 말 한마디조차 꺼내지 않았다. 네가 그걸 원한다면 당해 주겠다는 듯한 그 태도에. 나는 묘한 초조감을 느끼며 그를 더 거칠게 밀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숙소의 문에 뒤통수를 찧기까지 했다.
텅!
나나시: 으… 아야야…
제츠보: 나가… 나가라고. 나가…! 나가! 나가!
나는 그의 팔을 잡고 홱 당겨 몸을 일으키게 만든 뒤에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다시금 그의 등을 마구 떠밀었다. 나나시는 조금도 저항하지 못한 채 떠났지만, 마지막으로 나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나나시: 다… 다시 올게.
나는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나는 헐떡이는 숨소리를 내었지만 정작 조금도 힘들지는 않았다. 문득 나는 내 흉부를 만졌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을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그랬다. 하지만 촉감은 없었고, 내 심장은 조금도 뛰지 않았다.
등 뒤에서는 카이다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나나시를 향하고 있던 적개심과 짜증은 그 순간 카이다에게로 치환되었다.
카이다 쿠로하: 말 잘했다. 머리도 깡통처럼 텅텅 비어있는 줄 알았는데 화도 낼 줄 아네? 그래! 저 씹새 갈궈! 저 새끼는 우리 언니한테 걸맞지 않은 놈이야. 그러니까 계속 괴롭히자! 내가 도와줄게. 나도 쟤 싫거든! 한 편 먹자고.
제츠보: 조용히 해. 카이다.
카이다는 나를 보며 시시덕거렸다.
카이다 쿠로하: 왜 그래? 아니. 나쁠 거 없잖아. 우리 둘이서 괴롭히면 쟤는 아무것도 못해. 이건 비밀이지만 저놈이 내 천적이 될 수도 있거든. 하지만 그 방법은 너한테 안 통하니…
제츠보: 네가 바라는 대로는 되지 않을 거야. 이제 나나시는 캐럴한테 갈 거거든. 둘 사이는 더 돈독해지겠지.
카이다는 화들짝 놀랐다.
카이다 쿠로하: 뭐. 씨발? 왜! 잠깐. 욕을 하면 할수록 언니랑 저놈이 가까워진다면, 잘 대해 줘야 한다는 거야…? 언니한테서 멀어지게?
나는 일부러 나나시를 가혹하게 대했다. 내 수심이 원하는 것보다 더 거칠게 대했다. 그가 부당하다고 느끼기에 충분할 정도로. 내 몸이 받는 제한 때문에 더 큰 폭력은 쓸 수 없었지만, 위험을 자각하게 만들만한 정도는 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나시는 또 나를 찾아올 것이다. 양육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다가 몇 배를 몰아 내려는 사람처럼 굴 테지. 하지만 필요 없다. 내가 원하는 건 그저 아무런 좌절이 없게끔 아무런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나나시를 보지 않기로 했다.
그는 나를 찾아오기 전에 심사숙고를 하게 될 것이다. 또 찾아오면? 또 가혹하게 대하면 될 일이었다. 그가 나에게 질릴 때까지. 새로운 탑을 쌓을 수 없다는 걸 느끼게 될 때까지. 내가 마음을 달리 먹지만 않는다면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될 터였다.
그 무엇도 되돌릴 수 없다. 언젠가는 나나시도 그것을 깨달으리라. 결국 그에게 있어 그게 가장 낫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나에게도 그게 더 나았다. 나와 나나시의 의지에 달린 일이 아니다. 어차피 기계 몸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아무것도…
제츠보: 이거면 된 거야… 나는 이걸로 됐어…
내가 한 거짓말 중에 진실이 하나 있다. 나는 그 무엇도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살인 게임이란 둘 중 하나가 죽는다는 뜻이다. 제츠보와 나나시. 노바디와 노네임. 똑같은 선이 수평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서로 간섭하지 않지만 나는 이미 첫 번째 선이 어떻게 되었는지 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나는 스스로 되뇌었다. 캐롤의 숙소 안에서. 카이다와 부대낀 채로.
캐롤 브라이트와 나는 마유즈미의 복원 계획을 하루에 한 번 정기적으로 시행하기로 했다. 캐롤 브라이트는 하루에 두 번까지는 어떻게든 될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것이 진실보다는 과다 의욕이 만들어낸 그녀의 바람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결국 캐롤 브라이트는 능력을 온전히 쓸 수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하루에 한 번이다. 네게 쌓이는 피로를 고려했을 때 그게 최선이다.
캐롤 브라이트: …죄송해요. 히무로 씨. 저도 마유즈미 씨를 되찾고 싶어요. 많이요.
히무로 시라베: 나 또한 그렇다. 기나긴 밤을 누려라.
캐롤 브라이트를 그녀의 숙소로 돌려보낸 뒤에 나는 메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그것을 의도했다기보다는 나와 메리가 단둘이 마유즈미의 숙소에 남은 순간. 메리가 본래의 목적을 꺼낸 것에 가까웠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 살인 게임은 유지되어야 해. 시라베.
마유즈미의 숙소를 떠나려던 찰나 나는 메리의 말을 들었다. 내 몸이 잠시 멈추었다. 곧이어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히무로 시라베: 너는 내가 아는 메리가 아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왜 그렇게 생각해?
히무로 시라베: 메리라면 사람이 죽고 죽이는 일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는다.
메리는 세상에 둘도 없을 성인이 아니다. 비폭력주의자도 낙관주의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메리가 사람 죽는 것을 좌시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그녀가 아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글쎄. 네가 아는 시라유키 히메리라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나는 아니니까. 다시금 말할게. 이 살인 게임은 계속 이어져야만 해. 다음 반복으로, 또 다음 반복으로.
히무로 시라베: 왜 이 살인 게임은 반복되는 것이지?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유는 있지. 미안하지만 말은 할 수 없어.
히무로 시라베: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있고, 너는 그 이유를 말해줄 생각이 없겠지.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중요하지는 않다. 이 살인게임은 끝나야 한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설령 지금의 내가 카텟 기관의 의지를 대변한다고 해도 말이야?
메리가 던진 그 말은 나에게 불길함을 선물했다. 저의가 무엇일까? 카텟 기관의 의지를 대변? 진심인가? 카텟 기관은 분명 살인 게임을 끝내기 위해 제츠보를 보냈다. 그런데 그 뒤로 보낸 메리는 살인 게임을 유지하고자 한단 말인가? 그 사이에 카텟 기관의 입장이 바뀌었나?
카텟 기관이 이 살인 게임을 방조하고 있는 것이냐 따위의 물음은 던지지 않았다. 그것이 진실이건 메리의 지어낸 말이건 간에 그것은 결국 나에게 있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카텟 기관의 의지 따위가 그렇다 할지라도…
히무로 시라베: 변하는 것은 없다. 카텟 기관이라는 이름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의미는 행동에 부여되는 것이다.
살인 게임은 끝나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메리는 동의하지 않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글쎄. 과연 그 생각이 얼마나 갈지 지켜볼게. 시라베.
메리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마유즈미의 숙소를 떠났다.
카이다는 제츠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보채도 제츠보는 대답하지 않았고, 곧 침묵이 굳건해졌다. 카이다가 원한다면 그걸 깰 수도 있겠지만 먼저 말을 거는 건 카이다의 자존심이 상하기에. 카이다는 아주 열심히 침묵을 견디고 있었다. 꽤 불편했다. 나나시가 캐롤의 숙소를 떠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지만, 그 짧은 틈 사이에 카이다는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서로 싫어하는 사람과 한 방에서 견디라고? 아니. 카이다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카이다 쿠로하: 아 좆까. 용서나 받고 다녀야지.
카이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의자가 그 충격에 덜컹거리는 것을 뒤로하고 카이다는 성큼성큼 캐롤의 숙소를 나섰다. 제츠보는 아무 말 없이 카이다를 뒤따랐다. 따라오지 말라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제츠보는 따라올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기에 별 도리도 없었다.
그렇게 카이다는 이미 아침에 한 번 무수한 질타와 비난을 받은, 효용성 없기가 이미 검증된 짓을 하러 당당히 길을 나섰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광자 상영기였다. 히무로와 나나시마저 상영기를 떠난 것을 보면 남아있던 사람들이 거의 해산했으리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겠지만, 카이다는 그런 발상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냥 그곳에 아까까지는 사람이 있었으니 향했다.
운이 좋게도 광자 상영기 앞에는 아직 두 명의 사람이 남아 있었다. 하기와라 우시오와 이바라 쿠리스. 둘 밖에 없는 상영회였다. 카이다는 발소리를 죽인 채 화면에 떠오른 추레한 얼굴의 남성을 보았다. 술병을 든 채 비틀거리는 그 모습은 무척이나 약해 보였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불길해 보이기도 했다.
이바라 쿠리스: 뭐. 뭐야… 너. 저런 걸 보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막 소리 지르면서 도망 다녔었구나… 우와. 소름 끼쳐.
하기와라 우시오: 저게 내 부친 되는 사람이야.
이바라 쿠리스: 에에?! 미. 미안해!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하기와라 우시오: 뭐 어때? 마음대로 욕해. 나도 문지방에 새끼발가락 찧으면 저 사람들부터 찾고 보거든. 어 저기 내 모친 분도 나오시네. 돌칼 든 거 보이지?
이바라 쿠리스: 에에… 무슨 좀비 같은 느낌인데…… 잠깐. 설마 너 그래서 좀비를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였어?
하기와라 우시오: 뭐야. 그걸 기억하네. 신기해라.
이바라 쿠리스: 좀비 영화에만 그렇게 여자애 같은 비명을 지르는데 당연히 기억하지.
카이다 쿠로하: 복에 겨운 새끼. 씨발 가족이 있으면 그걸로 됐지. 뭘 더 바래?
카이다는 맥락 따위는 듣지도 않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기와라와 이바라는 카이다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더니 우당탕 앉은자리를 박차고 뒷걸음질을 쳤다.
제츠보: 진정해. 나 있어.
그렇게 말하는 제츠보를 본 뒤에야 두 사람은 경계를 늦추었다. 안도의 한숨이 입 안에서 새어 나왔다.
이바라 쿠리스: 우와.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너무 반가워. 제츠보! 너 없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했을지 모르겠어!
하기와라 우시오: 크흑. 진짜 존나게 든든합니다. ROBOAT…!
제츠보: 로봇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사람.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너까지 그러기야? 맞을래?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뭐?! 너 카이다랑 하루 같이 있었다고 그냥 버릇까지 다 물들어 버렸네!
카이다 쿠로하: 나는 저렇게 안 해. 씨발아!
카이다는 덮어놓고 화를 낸 뒤에야 아차! 하고 자신의 본래 목적을 다시금 떠올렸다. 맞다. 분명 가족이 있으면서 징징거리는, 감사할 줄도 모르는 새끼한테 한 마디 따끔하게 해주려고 했지!
카이다 쿠로하: 아무튼 너. 더럽게 한심해서 못 봐주겠다. 가족이 있으면 있다는 거에 감사하면서 살아야지. 불평이나 늘어놓고 말이야!
카이다의 따끔한 일침을 듣고서 하기와라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하기와라 우시오: 네 말을 듣고 보니까 논쟁의 거리가 있긴 하네. 좆같은 가족이 있는 것이 더 힘든가, 가족이 아예 없는 것이 더 힘든가?
카이다 쿠로하: 가족이 없는 것보다 거지 같은 건 없어. 뭐? 가족이 좆같아? 어디서 소중한 가족한테 그딴 소리를 지껄여. 이 패륜아야.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잠깐. 저런 소리를 너한테서 듣고 있으니까 지금 인지부조화가 오려 그런다.
하기와라는 자신의 미간을 부여잡았다. 카이다는 팔짱을 낀 채. 의기양양해진 채로 고나리질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카이다 쿠로하: 애초에 뭘 당했다고 그렇게 유난이냐고. 네가 말 잘 들었으면 될 일 아니야? 복에 겨운 새끼! 나였으면 하는 말 죄다 들어주고 화목하게 살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네 심장을 산채로 꺼내서 제물로 바친 다음 영원한 천국에서 살자 그래도? 하기야 천국도 화목한 곳이겠지. 존재만 한다면.
카이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 저건 좀 아닌데?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이다는 그저 하기와라가 머저리이기에 대처를 잘하지 못했다 여기기로 했다. 그게 더 편했다.
카이다 쿠로하: 아무튼. 너는 나보다 사정이 나았던 놈이야. 나는 그런 좆같은 가족도 없었어. 날 지켜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고.
이바라 쿠리스: 하지만 너에게는 캐롤이 있었잖아.
카이다 쿠로하: …없는 줄 알았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이제 카이다 쪽에서 흠을 보여주었기에, 공격권은 하기와라에게로 넘어갔다.
하기와라 우시오: 야. 장난하냐? 저런 언니를 까먹어? 배은망덕하긴!
하기와라와 이바라는 카이다를 싫어하는 편이었지만, 가족의 결여라는 공통점을 다룰 때에는 최대한 정중하고 진지하게 대꾸하려 했다. 하지만 언니의 존재도 잊어버렸다는 카이다의 말을 듣자 하기와라는 본래의 태도를 벗어던졌다. 가족 최고를 외치던 사람이 정작 자기 가족을 잊어버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나.
카이다 쿠로하: 내. 내 잘못 아니야! 이 병신아! 조직 쪽에서 내 기억을 지워댔다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해! 어릴 적은 좆도 생각나는 게 없단 말이야!
하기와라 우시오: 핑계 한 번 거창하네. 우우. 쓰레기. 네 언니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 아냐? 손을 잘라 주겠다고 했던 년이 자기 동생이란 걸 알게 됐는데도 용서해 주는데!
카이다 쿠로하: 지랄! 하! 내가 언니한테 언제 그랬는데?! 이 새끼들이 나한테 없는 죄를 뒤집어 씌우고 있어! 너희 두고 봐! 언니한테 니들이 얼마나 더럽게 나오는지 다 말해줄 거야!
이바라 쿠리스: 초… 초등학생인가?
제츠보: 카이다. 네가 잊어버린 거야. 꽤 예전 일이긴 하지만 네가 하기와라를 짓밟았던 일 기억해?
카이다 쿠로하: 지어내지 말라고! 이 새끼들이 단체로 나 따돌려! 와! 이 개새끼들! 진짜 언니한테 이른다. 다 죽었어 너흰!
카이다는 제자리에서 펄펄 뛰어댔다. 그녀를 제외한 세 명은 전부 카이다가 캐롤의 손을 자르겠다 으름장을 놓았던 일을 기억했다. 일전에 카이다가 미도리카와 아쿠토의 사격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탑을 우회해 돌아올 때. 하기와라가 인근을 배회하고 있었다. 카이다는 그에게 육체적 위협을 가하며 협박했고, 통화를 통해 일련의 상황을 듣고 있던 이바라, 나나시, 캐롤이 합류했다. 힘에서 완전히 밀려 버리자 제츠보가 가세하며 결국 카이다는 달아나고 말았다.
하지만 당사자가 저렇게 우겨 대니 하기와라와 이바라는 자기들의 기억이 틀렸나? 어? 그런 일이 진짜 없었던가? 하는 의심마저 품게 되었다. 제츠보만큼은 아니었다. 제츠보는 무언가를 잊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제츠보: 네가 그랬잖아. 자기가 탑을 돌아올 줄을 어떻게 알았냐고. 그러면서 하기와라 다리를 밟고 괴롭혀 대더니, 하기와라를 구하러 온 세 명도 전부 해치려 했잖아. 그중에 캐롤이 있었어. 너를 견제하려다가 손을 붙잡혔지. 그때 네가 한 말이 그거야. 손을 잘라 주겠다고.
카이다 쿠로하: 터치인지 뭔지. 신체의 접촉으로 발동한다고 했지? 잘린 손으로도 발동하나 볼까.
카이다 쿠로하: 아.
카이다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입술은 뚱하니 한쪽 방향으로 쏠렸고 미간에는 주름이 졌다. 안면 근육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하기와라 우시오: 너. 기억났지?
카이다 쿠로하: …아닌데? 그런 일 없었어. 너희들이 잘못 들은 거겠지.
이바라 쿠리스: 기억났잖아. 너?! 진짜 양심 없지 않아? 그냥 아. 그때는 몰라서 그랬다. 언니한테는 나중에 사과하겠다. 그러면 되는 걸 왜 변명만 하는 거야!
카이다 쿠로하: 아! 알겠어! 그때는 몰라서 그랬어! 언니한테는 나중에 사과할게!
하기와라 우시오: 이 영혼 없는 껍데기 같은 년. 혼자서 생각하는 게 아무것도 없네?
카이다 쿠로하: 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내가 진짜 나한테 언니가 있는 줄도 까먹었다는 거지! 이건 진짜야. 우기는 거 아니야! 되찾은 뒤에야 소중하다는 걸 알았다고!
이바라는 카이다를 미덥지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말투만큼은 살짝 누그러뜨렸다. 이바라는 카이다에게 물었다.
이바라 쿠리스: ……정말? 카이다. 너 가장 오래된 기억이 뭐야? 추억이라던가…?
카이다 쿠로하: 몰라. 그런 거 없어.
이바라 쿠리스: 중학생일 때는 뭐 했는데?
카이다 쿠로하: 몰라.
이바라 쿠리스: …초등학생 때는?
카이다 쿠로하: 몰라.
이바라 쿠리스: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야…?
이바라는 카이다가 진심인지 아니면 그녀를 가지고 노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카이다는 조금 억울해 보였다. 카이다 입장에서는 진짜 기억이 안 나는데 이바라 쪽에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하지만 일반 상식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이바라는 정말 카이다의 진위를 알 수 없고. 이렇게 사람이 잘 엇갈린다.
카이다 쿠로하: 아니라고! 진짜 기억 안 난다고!
하기와라 우시오: 진짜긴 해. 이바라. 쟤. 우리가 대몰락이니 뭐니 다 잊어버린 것 말고도 원체 기억이 없었대. 나나시 말로는 주기적으로 기억이 지워진 것 같다나?
이바라 쿠리스: …진짜 맞지. 카이다?
카이다는 곧바로 입을 열라다가 잠시 주저했다. 또 똑같은 대답이 나왔기 때문 같았다.
카이다 쿠로하: 몰라.
이바라 쿠리스: 너…! 후우. 알았어. 정말 모른다면 그렇게 대답할 수도 있지… 우리를 놀리려 하는 게 아닐 거야. 하지만 왜? 아니아니. 이게 아니지.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최면이라도 당했어? 최면은 에로한 창작물에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카이다 쿠로하: 최면이 뭐냐?
하기와라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네가 어떻게든 해 봐. 제츠보… 지금 답대가리가 안 나오잖아…
제츠보: 나도 별 수 없어. 돌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하나하나 짚을 수밖에.
카이다 쿠로하: 그래서 최면이 뭐냐고. 뭐. 일반 상식이야? 내가 모르는 것 보니까 일반 상식은 아닌 것 같은데.
하기와라 우시오: 일반 상식은 동어 반복이야. 상식에 이미 일반이라는 뜻이 있으니까.
카이다의 표정이 묘하게 더 사나워졌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 그러시겠지. 동어 반복의 뜻을 쳐 모르시겠지.
이바라 쿠리스: 최면은… 외부의 암시에 극도로 몰입한 상태를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팔을 움직여라 하면 팔을 움직이고. 입을 벌리라 하면 입을 벌리는 상태? 음… 막상 예시를 들어주려니까 왜 에로한 것만 생각이 날까…
카이다 쿠로하: 뭐야. 그거 언니가 하는 거 아니야? 언니도 비슷한 거 할 수 있잖아… 그보다 잠깐. 너. 너! 지금 내가 최면으로 천박한 일을 당했다고 망상한 거야?! 이! 지. 징그러운 년! 음란한 년아!
카이다는 누가 자신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은 듯이 날뛰었다. 그리고 곧 카이다가 느끼는 만큼의 수치심이 고스란히 이바라에게도 전이되었다.
이바라 쿠리스: 에! 음란?! 못하는 말이 없어?! 이. 이. 최면이나 많이 당한 게!
카이다 쿠로하: 안 당했다고! 개년아! 죽여버린다!
또다. 카이다는 꼭 자신에게 민감한 주제를 남을 향한 모욕으로 던지곤 했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 나름대로 콤플렉스를 다루는 방법일지도 몰랐다. 외면화하여 남을 해치는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자기 자신과는 선을 긋는 것이다. 아니면 그냥 빌어먹을 사람인 거고.
한편. 카이다는 누군가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를 들었다. 어딘가 불길한 소리였다. 그게 누구인가 하니 그녀의 천적이 다시 나타났다.
나나시: 소리를 너무 지르길래 왔어.
카이다 쿠로하: 창… 나… 나나시!
나나시: 카이다. 왜 다른 사람을 위협하고 그래? 네가 이러면 내가 다시 올 수밖에 없잖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지.
카이다는 용케도 내 말을 이해했다. 사실 한 번 더 풀어서 얘기해주려고 했는데 한 번에 이해해서 약간 기특했다. 나중에 칭찬 도장이라도 하나 만들어서 칭찬을 오십 개 모으면 선물이라도 줄까… 아무튼, 나는 카이다가 남을 해치려 하면 절차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 친구와 잠깐 눈이 마주쳤다. 노려보는 그 눈빛이 나를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이바라 쿠리스: 역시 나나시야! 도와주러 왔구나!
하기와라 우시오: 카이다 좀 다시 데려가 봐. 어쩌다가 기억이 지워졌는지는 대답을 안 하고 개소리만 하잖아.
하기와라가 묻기에 나는 내가 아는 바를 대답했다.
나나시: 카이다의 기억을 지워온 건 카이다가 속해 있던 조직이야. 카이다는 특정 단어를 순서대로 말하면 가지고 있던 기억을 잃어버리거든.
이바라 쿠리스: 에에에… 농담이지? 그건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라서 믿을 수가…
카이다 쿠로하: 아악! 너! 그만두지 못해!
카이다는 또 호들갑을 피우며 나에게 마수를 미치려 들었다. 귀를 틀어막지 않는 이상 카이다는 기억 소거 절차에 저항할 방법이 없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겠다. 당장 기억 소거를 당한다면 겨우 재회한 캐롤 씨와의 인연마저 기억하지 못하게 될 테니.
나나시: 어차피 더 말할 생각 없어. 그냥 사실을 말할 뿐이야. 착하지?
카이다 쿠로하: 어. 어린애 취급 마! 나한테 그럴 수 있는 건 언니뿐이야!
여기서 카이다의 불만을 없애는 좋은 방법은 애초에 카이다가 자신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훈제 생선을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사냥개처럼.
이바라 쿠리스: 반응을 보니까 진짜네?! 지… 진짜 최면을 당해 왔다니… 카이다. 미안… 나는 그런 줄은…
카이다 쿠로하: 아. 아니라고! 나는 그런 천박한 일 당한 적 없어! 으아악! 아니야!
제츠보: 풋. 나를 변태니 어쩌니 하더만 자기 꼴 좀 보라지.
내 친구는 그 광경을 보며 피식 웃었다. 카이다는 더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카이다 쿠로하: 아아아악! 아니라고! 이 돼지새끼들아!
하기와라 우시오: 어차피 얘는 매력 없으니까 본론으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왜 기억을 싸그리 지울 필요가 있는데?
카이다는 순간 하기와라의 말에 얻어맞은 것처럼 몸을 멈추었다.
나나시: 나도 그것까지는 몰라. 카이다. 대답해 줘. 우리가 알아봤자 상관없는 이야기잖아.
카이다 쿠로하: 싫. 어!
나나시: 우리에게 더 숨기는 것이 있나 보지? 우리를 상대로 무기로 쓰기 위해서. 이거 안타깝네. 너를 믿을 수가 없게 되는 거야. 그러면 정말 난처해지는데…
카이다 쿠로하: 아. 알았어. 개걸레 좆같은 창놈아… 알겠다고…
어휴. 이게 진짜…
카이다는 머뭇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카이다 쿠로하: 싸그리 지운 건 아니야… 기억을 다 잃은 건 시술의 부작용이라고 했다. 그게 기억이 나. 이런 몸을 얻는 대신에… 다른 걸 죄다 포기해야만 했지. 나도 좋아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 기억을 대가로 그렇게 세진 거였어?
카이다 쿠로하: 기억만 내줬으면 억울하지도 않지. 개새끼야. 뭐였더라… 뭐라고 했지… 미각. 쾌락. 애정. 수면의 질. 모성. 그리고… 정상적 감정 구사. 수영 실력. 방뭐시기의 기능에 지능까지 내줬다.
이바라 쿠리스: 미각? 쾌락? 애정에… 수면의 질까지? 그럼 단 걸 먹은 다음에 낮잠을 자도 아무런 느낌이 없어?
카이다 쿠로하: 너는 있나 보네.
카이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바라를 보았다. 옆에서 보기에 그것은 다분히 질투의 감정처럼 보였다.
카이다 쿠로하: 아무튼 예전 것들은 그렇게 대부분 잊어버렸어. 또 새로 생긴 기억들은 조직에서 그때그때 지워왔지. 나는 그런 수단이 있는 줄도 최근에 다시 생각해 냈어. 기억이 지워지는 걸 기억하는 것도 지워 버리니까.
나나시: 그게 조직 입장에서는 더 편했을 거야. 기억을 주기적으로 지우면 카이다는 인간관계를 쌓지도 못한 채 조직에만 몸을 담가야 해.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사람인데 순종적으로 말을 듣고, 심지어 강하기까지 해. 이보다 나은 암살자는 없어.
카이다는 내 말을 듣고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 아니었는데… 진짜 바보같다.
카이다 쿠로하: 아무튼. 그렇게 됐다. 뭔 거지 같은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더라…?
카이다는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30초가 지난 뒤에도 카이다는 머리를 긁고 있었다. 표정은 잔뜩 못마땅해졌고, 입에서는 아. 뭐였지. 뭐였더라? 하는 중얼거림만이 흘러나왔다. 끙. 끄응하고 애를 쓰는 소리. 한숨을 푹 내쉬는 소리가 뒤를 따랐다.
카이다 쿠로하: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더라.
그런 카이다를 보며 주변의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도 천천히 나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카이다는 그새 본래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렸다.
이바라 쿠리스: 네가 네 언니 까먹었다는 이야기.
카이다 쿠로하: 아! 맞아! 안 까먹었어!
카이다는 그렇게 한 번 자신의 실책을 온몸으로 푹 덮었다. 일단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라면 부정하고 보는 것이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리고 가족이 없는 게 별로냐, 나쁜 가족이 있는 게 별로냐의 이야기.
카이다 쿠로하: 아아아! 맞다. 맞아! 그래! 그 얘기하고 있었지!
카이다는 약간의 상쾌함마저 담은 웃음을 지으며, 후련한 표정으로 하기와라에게 삿대질을 했다.
카이다 쿠로하: 너는 병신이야! 나한테 없는 걸 가지고 있었으면서 징징거리기나 하는 새끼!
처음으로 되돌아오다.
하기와라 우시오: 나 얘가 너무 싫어.
그 모든 대화를 한 뒤에 또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 사실에 하기와라와 이바라는 그저 무력감만을 느낄 뿐이었다. 아직 카이다에게 충분히 데어 보지 않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 증거로 이미 카이다가 어떤 사람인지를 옆에서 많이 느끼게 된 나와 내 친구는 그저 그러려니 할 뿐 서로의 감정을 더 소비하지는 않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가족 없어서 좋겠다. 카이다. 아주 뭐 없는 티를 잘도 내는구나.
카이다에게 있어 위협적인 적이 있다면 그것은 비꼬는 말이었다. 카이다는 그것을 이해할 만한 재치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카이다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전부 악의가 들어 있다 생각하기 때문에. 비꼬는 말은 결코 카이다의 천적까지는 될 수 없었다.
이바라 쿠리스: 그래서. 고작 그 말하려고 온 거야?
카이다 쿠로하: 어. 맞아. 더 할 말 없어. 이 새끼는 복에 겨웠으면서 징징거리기만 하는 새끼야.
이바라는 자신의 눈을 질끈 감았다. 이바라는 하고 싶은 말을 카이다가 이해할 수 있게끔 꺼내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바라 쿠리스: 말이 돼? 너는 여기에 온 뒤에야 하기와라한테 그런 사정이 있다는 걸 알았잖아! 너 목적이 따로 있었고, 그걸 위해 우리를 찾아왔다가 겸사겸사 책 잡을 거리를 찾은 거잖아!
카이다는 눈을 끔뻑였다. 생각하는 바를 거의 읽을 수도 있었다. '어? 그렇네. 아. 맞다. 원래는 용서받으려고 왔었지.'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런 대목에서 이걸 내가 왜 까먹었을까? 같은 반성을 통해 스스로의 결점을 인식하고 나아지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카이다다.
카이다 쿠로하: 그러니까 괜히 네가 이상한 걸 보여줘서 한눈이 팔렸잖아. 쯧. 도움 안 되는 새끼.
하기와라는 자신의 이마를 탁 때리며 비명을 질렀다.
하기와라 우시오: 어억! 억! 나 죽어! 이 미친년. 사람 미치게 하는 게 네 암살법이었구나!
카이다 쿠로하: 뭐. 이 새끼야.
하기와라 우시오: 네가 제 발로 와 놓고 남 탓이야. 너 진짜 정신 나갔어. 카이다! 네가 최고야. 최고! 졌어요! 내가 졌어!
나나시: 하아… 봐. 잘 생각해 보자. 카이다. 너는 심심해서 할 일이 있다면서 캐롤 씨의 숙소를 박차고 여기로 왔잖아. 하지만 네가 광자 상영기에 볼 일이 있었을까?
카이다는 떠먹여 줘야 아는 사람이었다. 음식물을 푼 숟가락 비행기가 카이다의 입을 향해 부르르릉 날아갔다. 그리고 다행히도 몸만 잔뜩 커 버린 아기는 숟가락을 입 안에 넣었다.
카이다 쿠로하: 아. 맞다. 까먹고 있었네! 용서 좀 받으러 왔다.
그날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내가 카이다의 꼬여 있는 윤리관과 행동거지에 조금 익숙해진 나머지, 원래 그 행동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 깊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카이다가 꺼낸 그 말이 어떤 파급력을 가져올지 생각해 두었다면, 나는 손가락이 잘리는 걸 각오하고서라도 카이다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을 텐데…
이바라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게 수줍음 때문은 아니었다.
이바라 쿠리스: 너… 너… 이 부끄러움도 모르는―
곧이어 이바라는 카이다의 전두엽에 손상이 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지 않게 제시했다. 사탄은 억울하게도 카이다의 몸 안에 깃들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바라는 카이다의 세계관에 감탄했다. 이바라는 육지에 오르기 전의 고대 수생생물들과 카이다가 여전히 교류를 주고받는다고 확신했다. 이바라는 카이다의 취미가 혹시 석유를 사다가 바닷가의 새들에게 붓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렇지만 언젠가 개자식들 콘테스트가 열린다면 주저 없이 참여해서 네 독보적인 재능을 뽐내라고 격려해주기도 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네… 네가 참아. 와. 내 귀가 다 얼얼하네.
보통은 하기와라가 이런 말을 카이다에게 하고 이바라가 말리겠지만, 저녁에 그들의 상황은 정반대로 바뀌어 버렸다. 이바라는 차마 카이다를 가만히 둘 수 없었고, 하기와라는 보복을 경계해서라도 이바라를 만류했다.
이바라 쿠리스: 우리가 바보처럼 보이지. 카이다? 너한테는 별 것 아닌 일을 붙잡고 있는 우리가. 그러니까 아까 우리를 모욕하지 말라고 말을 했는데도 와서 긁어대는 거잖아?
카이다 쿠로하: 아. 아니… 병신아. 그건 아닌데…
카이다는 그저 생각이 없었고 할 일도 없어서 별생각 없이 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경솔한 짓이었다. 모든 사람이 카이다의 무지함과 난폭함을 이해해 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카이다는 어지간히 오래 참아 주었던 내 친구와 나에게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카이다는 이바라의 질타를 온몸으로 받게 되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가. 가자! 여기까지! 더 했다간 진짜 너 칼 맞는다!
이바라 쿠리스: 아직 안 끝났어. 이거 놔. 하기와라! 이거 안 놔! 내가 오늘 한 번은 쟤한테 따끔하게 말을 해 줘야겠어. 카이다! 남을 저주하면 무덤이 두 개라지만 할 말은 해야겠어. 네가 평생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너도 언젠가 똑같은 일을 겪게 될 거야! 네가 저지른 짓이 너에게 돌아올 거라고. 네가 저지른 일의 업보가!
업보.
산스크리트어 카르마에서 유래된 단어다. 상식이 얄팍하기 짝이 없는 카이다가 알기 어려운 단어이기도 했다. 카이다는 별이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지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지도 몰랐다. 애초에 카이다는 별이 지구를 도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런 카이다조차 업보라는 단어의 뜻을 알았다. 사람의 행위에 결과가 따라오듯이. 그 사람이 쌓은 업이 돌아오는 것. 그것이 업보다.
하기와라 우시오: 어어어? 저거 표정 봐. 진짜 도망가야 해! 욕본다. 제츠보! 카이다랑 같이 있기 좆같으면 우리한테 전화 걸어!
하기와라는 이바라의 팔을 뒤에서 잡아 밀어대며 제츠보에게 인사를 건넸다.
제츠보: 왜. 너희가 카이다랑 같이 수다라도 떨어 주게?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미쳤냐? 네 짝남 나나시한테 짬 때리려고!
제츠보: 도망칠 시간 준다. 5. 4. 3. 2…
하기와라 우시오: 어어어? 이 미친년이!
그리고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갔다.
내 친구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 채 고개를 저었다.
제츠보: …가. 나나시. 지금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가버려.
그녀가 그걸 원한다면 나는 따라야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남은 것은 여전히 용서받기를 글러먹은 사람 하나랑. 그 사람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기계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또 용서 시도가 불발되었다고 해서 카이다가 순간 깨달음을 얻지는 않았다. 아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해 보려 애써보는 건 어떨까? 따위의 성찰은 그녀에게 없다.
다만 카이다는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며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왜 용서를 안 해 주고 지랄이냐며 침을 뱉을 법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카이다는 여전히 불편하게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제츠보에게는 마치 카이다가 주눅이 든 것처럼 보였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제츠보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의외라는 감정도, 한심함도 아닌 불신감과 짜증이었다.
'이게 지금 장난하나? 내가 옳은 말만 꼬박꼬박 해줬을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이바라가 말을 하니까 채찍 맞은 짐승처럼 얌전해진다고?'
어르고 달래고 회초리까지 들어도 허구한 날 나빠지기만 하던 아이가 다른 어른의 말 한마디에 의젓해진 격이었다. 어떻게든 사람을 고쳐 써 보려 했던 제츠보의 입장에서야 이보다 열이 뻗치고 섭섭한 일이 없었다.
물론 이것은 카이다의 가치 체계 안에서 이바라와 제츠보의 취급이 다르기에 발생한 일이다. 카이다에게 있어 제츠보는 '매사에 훼방만 놓고 잠도 제대로 못 자게 하는 깡통' 이었지만 이바라는 '그나마 순하고 모난 점 없는 사람'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바라가 마구 화를 내었기에. 카이다의 환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그녀의 맥을 잠깐 빼놓았다.
카이다 쿠로하: 용서… 글러먹었으려나… 씨발. 괜히 시비 걸었네… 처음부터 본론이나 말할 걸… 하지만 그 새끼가 내 앞에서 무슨 자기가 힘들었니 뭐니… 생각해 보니까 괘씸해.
카이다는 너무 큰 잘못을 저질렀고 그것을 되돌리거나 만회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녀가 오명을 씻는 일은 영영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곱씹는 건 오직 씁쓸한 우울함만을 주기 때문에 카이다는 늘 자신이 하는 일을 했다. 거만하게 웃고 무시해 버리는 것.
카이다 쿠로하: 흥… 업보가 있으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지를 않겠지. 만약 있었으면 창놈이 내게 복수를 하려 했을 때 끝장났을 텐데. 결국 무사하잖아? 다 틀렸다고. 운은 내 편이야. 업보는 나를 안 찾아와.
카이다는 대답이 없는 제츠보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그녀에게는 누구라도 좋으니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카이다 쿠로하: 내 말 들려? 씨발 난 강하다고. 어떤 개새끼가 나를 노려도 다 죽여버릴 수 있어. 창놈 하나가 문제였지만 이젠 그놈도 내 편이잖아. 정확히는 언니 편이지만 언니가 내 편이니까 그놈도 내 편이야. 불만 있어?
하지만 여전히 제츠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비단 카이다와 제츠보 사이의 원한 때문이 아니었다. 제츠보는 가만히 카이다를 관찰하고 있었다. 카이다 본인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게 아니라면 카이다도 이바라의 말이 옳다는 걸 알고 있지만 애써 강한 척을 하는 것인지를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카이다 쿠로하: 애초에 다 네 잘못이야. 할 게 없으니까 이딴 병신 짓이나 다시 하고 있잖아. 아. 다시 생각해 보니까 이 용서 대란도 네가 하자고 해서 한 거잖아. 하등 도움이 안 되는…
말을 계속하자니 정말 그녀의 탓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카이다는 점점 신이 났다. 계속 몰아세우면 그녀의 탓이 아니게 될지도 몰랐다. 남 탓과 책임 회피는 입에 달콤한 독과 같아 끊임없이 삼키다 죽게 되는 것이다.
카이다가 다시금 제츠보의 무능함을 매도하려는 찰나. 그녀는 마주하고야 말았다.
잔뜩 실망한 제츠보의 눈을.
찌푸린 미간. 흘긴 눈. 살짝 벌어진 입. 그것은 대리 낙담이었다. 제츠보의 눈에 담긴 것은 단순한 책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스스로의 안목에 대한 실망도 겸하고 있었다. 내가 고작 이런 인간을 위해 아주 조금이라도 진심을 짜내 조언을 해줬다니. 이딴 게 조금이나마 잘 되기를 바랐다니. 미련한 짓이었다. 그제야 제츠보는 이해할 수 있었다. 카이다는 인성이 나쁘다거나 양심이 없다거나 따위의 수식어가 붙을 인물이 아니었다. 이것은 질병이었다.
어떻게 폐렴이 안 나을 수 있지? 네가 사람이라면 결핵이 나아야 하잖아. 아직까지 무좀이 안 나으면 어떻게 해!
그건 병자의 의지에 달린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제츠보는 카이다가 하루아침에 병마를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게 잘못되었음을 제츠보는 뒤늦게 알았다. 카이다는 변하지 않을 터였다. 변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언니에게 국한된 태도의 변화일 뿐. 남을 이해하기에는 몇 년의 과정이 필요하리라.
그리고 제츠보는 비로소 그녀에게 매달려 있던 감정의 짐덩이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카이다 또한 그것을 알았다. 제츠보가 자신을 영영 포기했고, 그들은 전혀 친해지지 못할 것이며, 아마도… 남들 또한 제츠보와 같으리라는 것을.
카이다는 그 시선에 상처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러니 시종일관 제츠보의 콤플렉스를 자극하고, 성희롱을 하고, 욕설과 모욕까지 서슴지 않았던 카이다가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은 카이다 쿠로하라는 인간이 얼마나 자기밖에 모르는 후안무치인지에 대한 증명이 되었다.
나는 왜 이렇지? 카이다는 다시금 자신에게 물었다. 하지만 왜인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뒤늦게 변명이라도 하고 싶어 입을 열어 보았지만 달리 할 말도 없었다. 끝. 그저 끝이었다.
카이다는 느닷없이 엄습하는 갑갑함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그에 더하여 느끼는 것은 초조함과 위기감이었다. 이바라가 카이다의 가슴속에 심어둔 업보의 관념이 서서히 싹을 틔우고 있었다.
카이다는 업보 따위는 없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업보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 아니라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만약 업보라는 것이 진짜로 있다면, 그녀는 반드시 그것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카이다의 가장 깊은 내면은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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