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브라이트: 이야기는 한 고아원에서 시작돼요.
캐롤 브라이트: 케이치라는 꼬마가 기억나네요. 제 머리카락을 자주 잡아당겼어요. 꼬마가 잡아당기니까 별로 안 아플거라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이게 정말 아팠어요. 다시 떠올리기가 싫을 정도로 아파요. 어린이들은 자비가 없거든요. 재밌자고 하는 일을 적당히 하지는 않죠.
캐롤 브라이트: 저는 머리를 잡아당겨지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어요. 그래서 케이치와 늘 싸워댔죠. 그런데 이 꼬마는 제가 화를 내면 낼수록 더 까르르 웃으면서 도망치고는, 제가 책을 읽거나 청소를 하고 있을 때 제 뒤를 잡고 또 머리를 한 움큼 쥐어잡는 거죠. 저는 또 비명을 지르고. 화를 내면 또 선생이라는 사람들한테 혼나고. 종아리를 맞는 거에요. 저는 잘못한 거 하나 없는데.
캐롤 브라이트: 케이치는 그러다 어느 날부터 제 머리를 잡아당기지 않게 됐어요. 애초에 저한테 가까이 오지도 않으려 하더라고요. 왜 그런지는 이후에야 들었어요.
캐롤 브라이트: 케이치가 혼자 모래 놀이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뒤에서 케이치를 덮친 거에요.
캐롤 브라이트: 모래에 얼굴을 파묻고 나서 그 누군가는 케이치의 머리를 세게 잡아당겼어요. 아주 세게. 그러니까. 머리를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머리카락을 도구로 써서 목을 꺾으려는 사람처럼 집어당긴 거죠. 케이치는 엉엉 우느라 누가 그랬는지도 보지 못했어요.
캐롤 브라이트: 저는 누가 그랬는지 알았죠.
"치나미. 혹시 너야?"
화면에는 검은 머리의 소녀가 나타났다. 여덟살 정도로 보였다. 치나미라고 불린 소녀는 화면에 떠오른 누군가의 시점에서 눈을 돌렸다.
"자꾸 그 자식이 언니를 괴롭히잖아."
"하지만 너무 정도가 심했어! 혹여나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또 독방에 갇히게?"
"안 들켰으면 된 거잖아! 맨날 나한테 그래! 똑같이 되갚아주지 않으니까 늘 당하고만 사는 거야!"
"하지만 나도 너를 걱정해. 너는 누구보다 어둠을 무서워하잖아. 나 없이는 잠도 못 자면서 독방을 또 어떻게 견디려고 그래?"
"윽! 마. 맞는 말이야. 그래도 우릴 건드리는 놈들한테는 본때를 보여줘야 해!"
그 화법은 탑에 있는 어떤 사람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치나미. 그리고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시라베: 역시 가족이었나.
"네 말이 맞아. 치나미. 정말 고마워… 하지만. 꼭 들키지는 말아야 해. 알겠지?"
"언니가 저번에 그 원장놈이 사온 화분을 깨 버린 것처럼?"
치나미라고 불린 소녀는 웃었다.
"…너를 독방에 가둔 벌을 줘야 하니까."
"히히히히! 꼴 좋다! 그 풀떼기에 얼마를 태웠을지 생각해 봐. 언니!"
"그래. 고소하기 짝이 없어. 오늘은 나를 위해 힘내준 치나미를 위해 부엌에서 소시지나 훔쳐와야겠다."
"뭐?! 아싸! 신난다! 언니는 대체 어떻게 거기 안으로 숨어들어가는 거야?"
나나시: 저게 카이다라니 믿기지가 않네…
토키와 아유키: 음. 그러게… 잠깐. 잠깐! 뭐?!
하기와라 우시오: 뭣이이이?! 저게 카이다야? 아니. 잠깐. 저 치나미는 캐롤 동생이라며. 그런데 치나미가 카이다면… 어?!
이바라 쿠리스: 에에에에에에?! 에? 뭐야? 정말 뭐야. 에에? 그러니까 두 사람이… 가족?
카나리 케이토: 다들 진정해. 거짓말에 속지 말라고… 거짓말 맞잖아. 그렇지?
히무로 시라베: 거짓말이 아니다. 받아들여라.
토키와 아유키: 이…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어떻게 저 둘이…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나몬이 이것은 알려주지 않던가?
토키와 아유키: 안 알려줬어! 이게 말이나 돼?! 이건…
토키와 아유키는 입을 다물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보다 우리 지금 스포일러 당한 거 아니야? 나나시 네 이놈!
나나시: 미. 미안! 하지만 어차피 곧 알게 될 내용이니까…
이바라 쿠리스: 카이다가… 캐롤과… 자매? 저딴 인간이 캐롤이랑…
카이다 쿠로하: 저딴 인간이라니. 이 년이! 죽고 싶냐?!
캐롤 브라이트: 다들 조용히 좀 해 줄래요? 집중 좀 하게. 네. 그래. 좀 낫네요.
더 단크 타워
챕터 4: < 황금 원숭이의 손길 >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모든 이들이 모였다. 메리 또한 나타났다. 모노로그가 언급한 전원에는 그녀 또한 포함되어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보기에 메리는 그저 마유즈미처럼 보였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녀가 나타나자. 그녀를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찾아왔다.
하기와라 우시오: 요! 마유즈미! 진짜 살아 있었구나! 하. 진짜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네. 히무로 이놈도 얼마나 상심했는지 알아? 무슨 내일이면 자살할 사람같은 표정을 지었다니까!
내 겉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웃고 있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마유즈미의 몸을 움직이는 것은 마유즈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제츠보: 정말 살아있었구나… 사실 얼굴을 못 봐서 조금 걱정됐었는데 다행이다. 마유즈미. 후유증 같은 건 없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 아직 다른 사람한테 내 얘기를 안 했구나? 시라베.
제츠보는 나와 메리를 번갈아서 바라보았다.
제츠보: …너희 이제 서로 이름으로 불러? 눈꼴이 시리네 정말.
하기와라 우시오: 이 새끼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더 끈끈해졌네. 으악! 존나 어색하게!
그리고 마유즈미를 찾아온 사람은 비단 하기와라 우시오 하나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친분을 맺는 것에 선입견이 없었고, 그렇기에 교우관계의 폭이 넓었다.
캐롤 브라이트: 마유즈미 씨. 저 돌아왔어요! 따라란. 달라진 구석 하나 없죠?
나나시: 정말 무사했구나…! 많이 걱정했어. 마유즈미. 사실 나 때문에 떨어진 거기도 하니까…
이바라 쿠리스: 꺄아아아악! 마유즈미. 왜 진작 안 나왔어! 보고 싶었단 말이야! 아니. 아니다! 그만큼 많이 힘들었구나! 잠은 잘 잤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주 눈빛부터가 달라졌네! 히무로 저 피눈물도 없는 녀석이 안 괴롭혔니? 내가 얼마나 걱정했다고! 아이. 섭섭해! 하지만 돌아왔으니 됐어! 이 언니의 품에 안기거라!
이바라 쿠리스는 팔을 양옆으로 벌린 채 마유즈미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안의 사람은 마유즈미가 아니었다. 메리는 얼굴에 미소를 띤 세 사람을 보자 혀를 쯧 차며 고개를 저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당히 이야기해 줘. 나는 친구놀이할 생각 없으니까.
카이다 쿠로하: 어? 저 년 저거… 뭐지. 이 느낌은…?
마유즈미의 생환을 반기던 다섯 명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메리를 보고,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내게 이게 무슨 일인지를 묻고 있었다.
제츠보: 기묘한데…
하기와라 우시오: 마유즈미랑 싸웠냐. 히무로? 엄청나게 싸늘한데…
나나시: 아니지. 그럴거면 우리한테까지 이럴 필요가 없잖아.
캐롤 브라이트: 왜 마유즈미 씨의 눈동자가 검정색으로 변한 건가요?
이바라 쿠리스: 마… 마유즈미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지? 설마아! 에이. 설마…
내가 대답해주기 전. 모노로그는 광자 상영기의 기능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노로그: 광자 상영기의 기능은 간단하다. 헬멧을 쓴 사람은 빔프로젝터를 통해 자신의 기억을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줄 수 있다. 그럼. 자. 장치를 시연해볼 사람은 없나? 음? 몸에 해가 되지는 않는다. 내가 장담하지. 지금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기억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모노로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이 탑에 있는 자들은 동기를 잠깐 탐험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카지노의 문을 연 선발대 여섯 명은 해변에 떨어졌다. 그리고 누군가는 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광자 상영기가 네 번째 동기인 이상 섣불리 그것을 사용할 사람은 없었다. 그 기색을 눈치챈 모노로그는 이내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았다.
모노로그: 다시 말하지만 몸에 해가 되지는 않는다. 함정은 없다. 어떠한 형태의 위협도 없다. 강제로 시키기 전에 아무나 시연을 한 번 보여주었으면 하는데. 정말 지원자는 없는 건가? 어차피 살인은 너희가 원하지 않아도 일어난다.
그 말을 듣고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캐롤 브라이트: 그럼 제가 하죠.
카이다 쿠로하: 야! 하지 마! 위험해! 저 새끼 말 믿지 마!
카이다 쿠로하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모노로그의 내통자였던 사람이 하는 말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아니. 적절한가? 아무튼 간에 카이다 또한 모노로그에게 배신당해 영안로 안에 갇힐 예정이었으니 적절할지도 몰랐다.
카이다 쿠로하: 또 무슨 속셈이 있는 거야! 속지 말라고! 분명 속임수니까!
캐롤 브라이트: 어차피 누군가는 하게 될 거고. 나는 보여줘야 할 기억이 있어. 그러니 내가 하는 편이 나아.
카이다 쿠로하: 싫다니까! 하지 말라고! 큰일이 나면 어쩌려고 그러는데!
나나시: 카이다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요… 살면서 이런 말을 하게될 줄은 몰랐지만, 이렇게 간단할리가 없어요. 네 번째 동기잖아요. 위험이 없다면 모노로그가 왜 가져왔겠어요?
카이다 쿠로하: 그래! 보여준 기억은 앗아간다던가. 보여주고 싶지 않은 기억까지 보여주게 만들던가… 그런 술수가 있을 거야. 분명해!
모노로그: 헬멧을 착용하고, 헬멧과 연결되어 있는 두 개의 전극 패드를 각각 쇄골 위와 갈비뼈 옆에 부착한다. 그 뒤 모든 설비와 연결된 이 레버를 당기기만 하면 된다. 기억의 상영에는 사용자의 집중이 필요하다. 또한 사용자는 헬멧을 벗어서 언제든지 상영을 멈출 수 있다. 샤이닝과 신체 어느 쪽도 해를 입지는 않는다. 고통도 없다. 부작용 또한 없다. 더 듣고 싶은 게 있나?
모노로그: 이 장치는 완벽하게 안전하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사용하지 않을테니. 안전하게 만들어졌다. 그러니 마음껏 사용해도 좋다.
이바라 쿠리스: 우리. 굳이 이 기계 써야 해? 물론 안 쓸 이유가 없다고 하더라도 굳이 쓸 이유가 있는 거야?
카이다 쿠로하: 그러니까! 이건 동기야. 네 번째 살인의 동기! 그러니까 조심해야 할 거 아니야. 캐롤. 집어치우래도!
나나시: 카이다. 잠깐… 쉿.
카이다 쿠로하: 뭐야. 왜 그러는데?! 너도 좀 말려봐. 씨발 손 놓고 구경만 할 거야?!
나나시: 조용히 하래도. 다 너를 위해 하시는 일이니까.
카이다 쿠로하는 이름 없는 남자에게 눈을 부라렸다.
캐롤 브라이트: 하지만 저는 여러분들께 보여드릴 게 있어요.
히무로 시라베: 그게 뭐지?
캐롤 브라이트: 카이다가 이제 안전한 이유요. 잘 됐죠. 이건 백날을 설명해도 와닿을 수 없으니까.
그리고 탑에 있는 이들은 카이다 쿠로하가 과거에는 치나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캐롤 브라이트와 카이다 쿠로하는 자매 관계인 것을 알게 되었다.
캐롤 브라이트: 고아원에서의 일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어요. 저와 치나미가 서로의 등을 봐 줬죠. 저희는 함께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어요. 같이 있기만 하다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바람직한 일이죠. 그곳이 고아원만 아니라면.
히무로 시라베: 입양이 어려워졌군.
캐롤 브라이트: 그렇죠. 형제자매의 우애가 깊을수록 안 좋아요.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 하니까 꼭 두 명이 함께 가야 하죠. 그런데 성격과 성향이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전부 마음에 들며. 입양할 요건 또한 갖춘 사람은 매우 드물어요.
캐롤 브라이트: 그러니 저를 염두에 두신 분은 치나미를 보고 물러나며, 치나미가 마음에 드신 분은 저를 보고 물러나는 식이었어요. 여기서 말씀드리는 건데. 고아원은 그렇게 좋은 곳이 아니었어요. 저희를 팔아치우지 못해 안달을 냈죠.
히무로 시라베: 어느 쪽이 먼저 팔리게 되었나?
캐롤 브라이트: 제 쪽이요.
화면은 특별한 구석이 없는 한 중년 남성의 얼굴을 비추었다.
"왜 저만 입양을 가요? 치나미는 어디에 있는데요?"
"이미 좋은 분들이 거두어 가셨다."
"거짓말! 하룻밤 사이에?! 치나미가 나를 두고 갈 리가 없어! 아무 말도 없이 휙 사라질 리가 없다고요! 치나미 어디 있어요!"
"너는 치나미 없이 입양을 갈 수 없니?"
"당연하죠! 치나미를 어떻게 두고 가요!"
"너희가 그런 식이니 따로따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거야."
캐롤 브라이트: 저는 독방을 포함해 고아원 전체를 헤집고 다녔어요. 붙잡혀도 멈추지 않았지만 어디에도 치나미는 없었어요.
카이다 쿠로하: 아. 아니야! 나는 분명 혼자 남겨졌어! 내가 널 두고간 게 아니라고!
캐롤 브라이트: 아마 그 사람들은 네 입을 막은 채 상자 같은 곳에 가둬 뒀을 거야. 그러고도 남을 사람들이거든.
카이다 쿠로하: 그.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너 어디로 입양됐댔지? 미국이었나? 거기로 간 거구나?
캐롤 브라이트: 그 전에 죽으려고 했어.
나나시: 네…?
화면은 가로등도 몇 개뿐인, 어두침침한 심야의 도로를 보여 주었다.
이바라 쿠리스: 아. 안 돼!
카이다 쿠로하: 뭐?! 뭐야! 왜!
캐롤 브라이트: 살 이유가 없었으니까. 우리한텐 서로밖에 없었어. 그런데 영영 헤어져 버렸지. 서로 전화 번호도 없고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몰라. 그래서 죽으려고 했어. 이젠 희망이 없다고 느꼈거든.
카이다 쿠로하: 그. 그땐 그 정도로 내가 소중했다고…? 정말이야?
캐롤 브라이트: 여전히 소중해. 치나미.
카이다 쿠로하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던 캐롤 브라이트는 다시금 존댓말로 어휘를 바꾸었다.
캐롤 브라이트: 고아원에서 몇 킬로미터를 걸으면 다리가 하나 나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 다리에서 떨어져 죽으려고 했어요. 날붙이로 죽는 것보다는 그게 덜 아플 것 같아서요.
나나시: 다리…? 잠깐. 설마…
캐롤 브라이트: 하지만 그날. 카가 저를 찾아왔죠.
"떠… 떨어지지 마!"
캐롤 브라이트: 웬 남자애가. 머리를 애매하게 분홍빛으로 물들인 소년이 느닷없이 나타나 저를 가로막았어요.
나를 포함한 관객들의 시선이 이름 없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이름 없는 남자 본인마저 잊어버린 듯.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한 눈치였다.
이바라 쿠리스: 나나시 아니야? 나나시처럼 보여!
카이다 쿠로하: 뭐. 뭐야. 저놈? 저놈이 저기에 왜 있어? 야. 말 좀 해봐!
나나시: 나도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인데…?
캐롤 브라이트: 그렇죠. 당신은 전부 잊어버렸어요.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너. 나 알아?"
"뛰어내리면 안 돼. 물이 너무 차가워서 근육이 굳어버릴걸. 네가 수영을 아무리 잘해도 수영이 안 될 거야."
"이 정도 높이에서 뛰면 그냥 죽어. 콘크리트랑 똑같아. 물의 표면에 닿는 순간 몸이 찌그러져. 빠른 죽음이겠지. 익사하지 않는다는 거 하나는 다행이야. 물에 빠지면 소리도 못 지르고, 팔을 뻗어도 수면 위까지는 안 닿아. 그러니 아무리 애를 써봐도 이미 빠져버린 이상엔 아무도 모르지. 그게 나야. 나는 여기에 있다고 소리를 치는데 누구도 몰라."
"왜 죽으려고 하는 건데?"
"나는 이제 살 이유를 잃었거든."
"그렇게 어린데?"
"가진 게 없어. 나는 거지야. 그래서 하나만 잃는 게 다 잃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다 잃었어. 이제 영영 가망이 없다고."
"그러지 마."
"네가 뭘 아는데? 죽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어? 누군가랑 헤어졌는데 다시 만날 가망이 없다는 게 뭔지. 어떤 기분인지 너는 몰라."
"모르지만, 죽지는 마."
캐롤 브라이트: 이때 좀 성질이 나더라고요. 처음 보는 남자애가 내 뭘 안다고 훈수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죽는 대신 어떤 시궁창 속을 구르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 이거야? 너 참 무책임하다. 내 앞에 놓인 건 이제 외로움이야. 누군가가 내 곁에 있더라도. 나는 결국 물 위에 뜬 기름이야. 어디서든 그래. 나는 언제나 외로워… 그런데 네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래도 죽지 마. 삶은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어. 정말이야. 아무리 네가 암울하고 지독한 불운 안에 있더라도 그 여정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외로워도 살아남아. 악착같이 살아남아…"
"나는 못 믿겠어. 그러기 싫어."
카이다 쿠로하: 그. 그러지 마아아아!
서서히 기울어 다리 아래로 떨어지려던 그 시점은 한 순간 뒤로 젖혀졌다. 무언가가 땅에 세게 부딪치는 소리가 난 뒤 화면은 암전되었다. 카이다 쿠로하는 자신의 몰입이 부끄럽다는 듯이 딴청을 피웠다.
캐롤 브라이트: 그 남자애가 왜 그날 저를 살렸는지는 몰랐어요. 기절해 있다가 눈을 뜨니 저만 남아 있더군요. 다시 죽으려다가 문득. 남자애의 정체도 모른 채 죽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치나미와 재회도 못 한채 죽기는 싫다고. 살아가고 싶다고요.
이바라 쿠리스: 나나시가 너를 구한 거구나… 그래서 너희 둘이 묘하게 찐했던 거야?
캐롤 브라이트: 글쎄요. 탑에서 그를 알아보지는 못했어요. 그러면서도 서로 마주치게 된 건… 카라고밖에 할 말이 없어요.
나나시: …그리고 우리는 다시 만나서 서로를 구했군요.
캐롤 브라이트: 운명의 마법이죠. 그날 이래 저는 재회의 꿈을 꾸었죠. 동생과의, 그리고 멋대로 저를 살려 놓은 남자애와의 재회를요. 그렇게 저는 제 양부모님에게 입양되어. 미국으로 떠났어요.
미국에서의 생활은 굉장히 노이즈가 심했고, 영상 또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재생되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탑에 모인 이들은 그 생략된 시간에서 긍정적인 느낌을 받지 못했다. 비웃음 소리. 고함 소리. 비명 소리.
캐롤 브라이트: 그 이후 재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미국에서 생활하던 저는 일본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일본에서 대몰락을 겪었죠.
히무로 시라베: 어떻게 살아남았지?
캐롤 브라이트: 잘 숨었어요. 잘 도망다녔고, 잘 버텼죠. 할 일이 많기도 했어요. 희망을 잃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상담사에게는 호황이었죠. 그렇게 어찌어찌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골목길 구석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봤어요.
캐롤 브라이트는 분리수거를 하러 했던 것처럼. 비닐봉지에 플라스틱을 가득 담고 있었다. 대몰락 시대에 분리수거를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차피 틀려버린 세상이었으니 어찌하든 상관이 없다는 사람이 많았다. 캐롤 브라이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쓰레기더미 위에 자신의 플라스틱을 올리려던 캐롤 브라이트의 시선은, 그 사이에 몸을 숨긴 한 사람에게로 쏠렸다.
"뭐. 뭐지?"
캐롤 브라이트는 급히 발걸음을 옮기고 한 사람을 둘러싼 쓰레기 더미를 옆으로 치웠다. 한 쓰레기의 비닐이 터지고 안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는 음식물의 구정물이 줄줄 흘러갔다. 그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까마귀 가면을 쓴, 온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재단의 흉조다. 초고교급의 사냥꾼.
캐롤 브라이트: 저는 그때 이 사람이 사경을 헤매는 줄만 알고, 의식을 잃지 않게끔 장갑을 벗고 손을 잡았어요. 일단 깨우고 도움을 줘야 하니까요.
캐롤 브라이트: 그런데. 저는 그때 알게 된 거예요.
"아아…! 치나미… 아아! 치나미! 너구나! 너였어! 너야!"
캐롤 브라이트: 까마귀 가면의 소유자가 제 동생이라는 걸요. 그렇게 저희는 다시 만났어요.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는 이만 갈게. 시라베. 별반 재미가 없네.
메리는 그 말을 남기고 벌떡 일어섰다. 광자 상영기를 보고 있던 이들은 마유즈미의 몸을 보았지만, 적절한 반응은 보이지 못했다. 그 몸을 쓰는 것이 마유즈미 본인이라는 발상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했으니. 그들은 캐롤 브라이트에게 있어 중요한 내용이 흥미롭지 않다고 말하는 마유즈미를 본 것이다. 마유즈미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카이다 쿠로하: 뭐. 뭐야. 저거? 야! 언니랑 내 얘기를 재미로 보냐? 야! 대답해!
마유즈미 나데시코: 자매가 쌍으로 유난이야… 쯧.
카이다 쿠로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나는 메리에게 물었다. 아마 카이다 쿠로하도 하고 싶었을 질문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어디에 가는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내 방으로 가지. 말했잖아. 나는 너희들과 협력할 생각이 없어. 시간이나 죽여야겠다. 나를 찾을 일이 생기면 찾아와. 시라베.
히무로 시라베: 기다려. 메리!
화면의 음성이 툭 하고 끊기는 소리가 났다. 바닥에 금속의 무언가가 떨어졌다. 뒤돌아보니 상영기와 연결되어 있던 헬멧이었다.
캐롤 브라이트는 메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번 불린 그 호칭에 반응한 것은 오직 캐롤 브라이트 뿐이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입을 가린 채 중얼거렸다.
캐롤 브라이트: 메리요…? 시라유키 히메리? 시라유키라고요?
메리는 내게서 등을 돌린 채 걷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안녕. 제인. 이런 곳에서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렇지?
메리는 싸늘하게 말했다. 그녀는 조금도 그 만남을 반기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캐롤 브라이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서로 싸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때쯤 탑에 있는 다른 이들 또한 내가 그녀를 부른 호칭을 인식했다.
나나시: 시라유키 히메리라고? 마유즈미가? 그게 무슨 소리야?
하기와라 우시오: 잠깐. 그거 히무로 짝녀잖아. 걔가 왜 여기에 있어. 아니. 왜 마유즈미를 보고 메리라 하는 건데?
제츠보: …시라유키 히메리라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래. 노바디. 나야. 너 죽인 사람.
메리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이런 일면이야말로 내가 그녀를 메리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였다. 내가 아는 한 메리는 절대 인명사고를 경시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살인을 자랑거리처럼 말하지도 않았다.
메리의 반대편에 있는 메리…
이바라 쿠리스: 사. 상황 파악이 안 돼!
토키와 아유키: 카텟 기관의 수뇌인가… 역시 내가 옳았어. 이 살인게임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존재들은 전부 카텟 기관이야…
카나리 케이토: 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는?
토키와 아유키: 우리 모두를 속이고 있는 거짓말이 있다는 뜻이야. 카나리. 소속이 없는 너나 나는 어느 쪽이든 조심해야 하겠지.
캐롤 브라이트: 이건… 말이 안 돼.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희들이 알아서 생각해 봐. 나는 내 방으로 간다. 안녕.
그리고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계단을 내려가 사라져 버렸다.
탑에 있는 이들은 의논을 하지도 않은 채 암묵적으로 식당에 모였다. 음식을 섭취할 수 있으며, 넓고,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는 시설이기 때문이었다.
이바라 쿠리스: 역시 회의는 식당이지. 그런데 사람이… 엄청 줄어버렸어. 처음에 왔을 때는 복작복작했는데.
캐롤 브라이트: …제가 느끼기에는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어 버린 것 같아요. 마음이 안 좋네요.
히무로 시라베: 캐롤 브라이트. 메리를 알고 있었나?
카이다 쿠로하: 야이 씨발. 밥 좀 먹고 이야기하자!
나는 카이다 쿠로하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는 내 첫 번째 물음에 침묵으로 답했다.
히무로 시라베: 그녀를 알고 있었군. 왜 말하지 않았지?
캐롤 브라이트: 말하기 싫었으니까요. 좋지 않은 인연이거든요. 그런데 왜 시라유키가 마유즈미 씨 안에 들어가 있죠?
히무로 시라베: 모른다. 그녀 본인은 제츠보와 같게 여기라고 말했지만 믿을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마유즈미 본인의 자아가 메리의 것에 짓눌렸다는 것이다. 마유즈미의 심층의식 속에 숨어 있던 메리는 마유즈미를 억압한 채 자신을 표면의식으로 만들었다.
캐롤 브라이트: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되냐고요! 마유즈미 씨가 왜 시라유키한테…!
캐롤 브라이트는 언성을 높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캐롤 브라이트: 소리 질러서 죄송해요. 일단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지금은 치나미에 대해 이야기해요. 이걸 논하려고 제 기억을 보여드린 거니까요.
하기와라 우시오: 어. 그래. 카이다 이야기 좋다. 그냥 대놓고 말해도 되지?
하기와라 우시오의 말은 당사자가 아닌 이가 듣기에도 불안하게 들렸다. 캐롤 브라이트는 표정을 죽여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캐롤 브라이트: 네. 말씀하세요.
하기와라 우시오: 우리가 미쳤다고 아까 그거만 보고 카이다를 믿을 순 없어. 사실 그걸 보고 왜 믿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카이다가 네 가족이든 의형제든 망할 클론이든 뭐가 중요해? 결국 카이다는 카이다잖아. 쟤가 어렸을 때 착했든 암 치료제를 발명했든 무슨 상관이야? 지금 악귀나찰인데.
캐롤 브라이트: 중요해요. 치나미는 소속된 곳이 없었기 때문에 방황한 거니까요. 이제는 제가 있는 데다가 모노로그에게 배신도 당했으니, 흑막에게 대항할 동료가 하나 늘어난 셈이죠.
하기와라 우시오: 미안하지만 캐롤. 네 여동생이 저지른 짓을 네가 보면 지금까지의 일을 방황이라는 두 글자로 끝낼 수는 없을 거야. 나중에 그 스크린으로 보여줄까? 두 번째 시련의 미도리카와가 어떤 꼴로 죽었는지?
하기와라 우시오는 본인의 가슴께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여기에 말이야. 구멍이 뻥 뚫렸더라. 카이다가 쿠나이로 찔러댔어. 찌른 게 아니라 안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어서 파낸 것처럼 보일 정도야. 속이 뻥.
카이다 쿠로하: 그… 그때는 나도 죽을 뻔했어! 그년이 나한테 총을 마구 쏴댔다고!
히무로 시라베: 네가 모노로그 지령을 받고 미도리카와 아쿠토를 죽이려고 한 게 먼저다. 카이다 쿠로하가 누구를 위해 움직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카이다 쿠로하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이들을 해치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점이다. 설마 카이다 쿠로하가 완전한 모범시민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무리 뻔뻔한 이라도 그런 장담은 할 수 없다. 그 부분만큼은 캐롤 브라이트 또한 카이다 쿠로하를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두둔하고 싶을지언정 그것은 거짓일 테니.
카이다 쿠로하를 풀어줄 수 없다고 여기는 건 비단 나 뿐만이 아니었다.
카나리 케이토: 쟤는 위험한 인간이야. 절대 놓아주면 안 돼. 철저하게 감시해야 해!
이바라 쿠리스: 가족을 위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어. 캐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으니 반갑고 또 각별하겠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카이다를 받아들일 수는 없어.
캐롤 브라이트: 받아들이실 필요는 없어요. 욕하셔도 돼요. 치나미를 아끼는 게 감형 사유가 될 수는 없죠. 저는 단지 치나미가 위험하니 죽여야 한다거나, 묶어 둬야 한다거나, 몸의 어딘가를 불구로 만들어야겠다는 의견은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카나리 케이토: 뭐?! 아무도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어!
캐롤 브라이트: 아직 안 하신 거죠. 다들 생각하셨잖아요? 일단 치나미도 후루미나미 씨와 비견될 정도의 악덕을 쌓았으니까요. 그러니 제 쪽에서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하기와라 우시오: 캐롤. 지금 우리 위협하는 거야? 깜냥이 있으면 건드려 보라고?
캐롤 브라이트: 아뇨. 위협 까지는 아니고… 부탁이라고 하기에는 막무가내니까. 통보라고 하죠. 저는 동생이라고 해서 무조건 허물을 덮어줄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치나미가 죽는 걸 구경하고 있지는 않을 거예요. 제 말을 아시겠죠?
히무로 시라베: 사지 힘줄 중 하나도 양보할 생각이 없나?
카이다 쿠로하라면 이 대목에서 이게 무슨 개소리냐며 노발대발 화를 낼 터였다. 하지만 나의 가벼운 요구 앞에서 카이다 쿠로하는 벙쪄. 입을 헤벌린 채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그 말은 좀 과도하다고 느껴지네요.
히무로 시라베: 하지만 카이다 쿠로하에게 별도의 인적자원을 투자하지 않고 위험성을 잠재울 방법은 이것 뿐이다. 제츠보를 카이다 쿠로하의 보모로 삼을 셈인가? 거동의 자유를 빼앗기만 하면 해결될 일이다.
카이다 쿠로하: 시… 싫어! 힘줄이라도 끊으려고?! 싫어! 싫다고! 깡통년이 나를 감시하면 되잖아!
히무로 시라베: 제츠보가 너를 감시하는 것은 임시변통이었다. 변수가 많고 불안정한 방법이다. 반면 뒷꿈치의 힘줄을 하나 끊는 것은 영구적이며, 변수가 없다. 목발을 짚고서 인간 사냥을 나설 수는 없겠지. 네가 모리 레이코와 나이토 유즈루에게 사용한 수법과 동일하다.
캐롤 브라이트: 죄송하지만 그건 안 돼요.
가족의 유대감은 얼마나 강한가? 나는 캐롤 브라이트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캐롤 브라이트는 카이다 쿠로하를 용서했는가? 아니다. 카이다 쿠로하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은 캐롤 브라이트 또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두둔하는 것이다. 혈연은 그렇게도 강력한 연결임을 나는 다시금 되새겼다.
히무로 시라베: 네가 후루미나미 나몬을 막기 위해 간접적인 터치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이지? 달리 방도가 없기 때문 아니었나? 카이다 쿠로하의 신체능력이 근본적인 문제이니. 해결하기 위해서는 거동의 자유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
이바라 쿠리스: 말려야 하는데 말리고 싶지가 않아. 캐롤. 이건 정말 힘들어. 너는 카이다를 믿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어.
토키와 아유키: 당연한 일이에요. 캐롤 씨. 어쩔 수 없게 된 일을 우기시면 안 돼요.
줄곧 발언을 아끼고 있던 토키와 아유키 또한 의견을 내었다. 토키와 아유키는 캐롤 브라이트를 바라보다 말고 카이다 쿠로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약간의 비웃음을 머금은 채로.
토키와 아유키: 나라면 그냥 스스로 물러나겠어. 카이다. 너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정말.
카이다 쿠로하: 왜. 왜 그러는데. 또?
토키와 아유키: 너야말로 대체 뭘 원하는 거야? 저런 취급을 당하면서까지 용서를 받고 싶지는 않잖아. 너는 캐롤 씨의 평판까지 끌어내리고 있어. 정말 자매를 아낀다면 너에게 캐롤 씨가 끌려들어가기 전에, 너 스스로…
캐롤 브라이트: 토키와 씨. 이간질 하지 마세요. 정도가 있어요.
토키와 아유키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튕겼다.
토키와 아유키: 캐롤 씨를 위한 조언이었어요. 받아들이지 않으시는 건 안타깝네요. 카이다. 내가 전에 했던 말 잘 기억해. 너는 이미 돌이킬 수 없어. 용서받을 수 없을 테니. 포기하고 마음이라도 편히 먹어. 업보가 너를 찾아오기까지 기다리라고.
이바라 쿠리스: 네가 업보를 논하는 거야. 토키와?
카이다 쿠로하: 그래! 이 개새끼야. 네가 나보다 상황이 어디 낫다고 큰소리인데?
토키와 아유키: 나야 너와 상황이 비슷하지… 다른 게 있다면. 나는 정말 이 탑에 있는 사람들을 강력한 세력에게서 보호할 방도를 모색하고 있다는 거야. 너랑은 달라. 나는 모두를 속이고 있는 카텟 기관과 초고교론자들의 마수를 끊어내고 말 테니.
나나시: 토키와. 갑자기 왜 그래…?
카이다 쿠로하: 그게 무슨 좆같이 뜬구름 잡는 소리야. 야! 거기 안 서?!
토키와 아유키: 너희들도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거야. 내가 옳았다는 걸…
토키와 아유키는 식당을 나섰다. 본래 환영받지 못하는 자였으니 언제 떠나더라도 놀라울 일은 없었다만 그 사정을 모르는 카이다 쿠로하에게는 토키와 아유키의 변화가 낯설게 느껴지는 듯했다.
카이다 쿠로하: 쟤는 도대체 왜 저렇게 변한 건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사람을 죽였다며?
나나시: 이렇게 보니 정말 다른 사람 같기는 해. 토키와가 저렇게 변하다니…
캐롤 브라이트: 제가 기억하기로도 토키와 씨는 저런 분이 아니었는데요…
하기와라 우시오: 사실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제대로 말도 못 해줘. 헤까닥 돌아버린 거야. 본래 주제로 넘어가자고.
히무로 시라베: 너에게 묻겠다. 카이다 쿠로하. 애초에 너는 용서받기를 원하는가?
카이다 쿠로하: 당연히 원하지! 용서해 줘! 빨리 좀!
히무로 시라베: 네가 용서를 받고 싶은 이유는 무엇이지? 불편함 때문인가, 죽은 이들의 목숨이 소중하기 때문인가?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 히무로 씨는 지금…
히무로 시라베: 너 스스로 대답해라. 카이다 쿠로하.
캐롤 브라이트는 카이다 쿠로하의 대변인이었다.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카이다 쿠로하 대신 앞으로의 입지와 정치적인 태세를 고려해 입장을 정제하고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 말하게 해야만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카이다 쿠로하는 그녀가 생각하는 진실을 말했다.
카이다 쿠로하: 불편하니까지! 너희들이 지랄하잖아. 이 개새끼들아! 내가 무슨 죄를 씻지도 못할 거라고 악담이나 하고. 욕하고. 나랑 언니를 묶어서 내버리려고 하고 있잖아!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카이다 쿠로하의 반골 기질은 제 머리를 드러냈다. 그녀에게 무언가가 소중하냐고 묻는다면 그녀는 무조건 소중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상대의 예상대로 어울려주기 싫을 뿐더러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 자체가 남에게 자신의 약점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캐롤 브라이트마저 달리 할 말은 없었다. 카이다 쿠로하에게 변호할 가치가 없었을 뿐이다. 그것은 결국 타인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똑똑히 들으셨죠. 여러분? 죽은 사람들한테 미안한 생각은 없다네. 음. 그래그래.
카이다 쿠로하: …뭐라고?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미안하지!
이바라 쿠리스: 이제 그만 해. 카이다… 너는 재미있겠지만, 당하는 사람에게는 별로 재미 없는 일도 있는 거야. 우리 좀 그만 가지고 놀아.
이바라 쿠리스가 말하자 카이다 쿠로하는 변명이 급급해졌다.
카이다 쿠로하: 그. 그게 아니라니까! 내 말 좀 들어!
히무로 시라베: 듣는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카이다 쿠로하가 자신의 과오를 깨닫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카이다 쿠로하 본인이 용서받기를 원하기는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카이다 쿠로하는 내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카나리 케이토: 너한테는 안 됐지만… 그리고 내가 이런 말을 할 만큼 떳떳하지도 않지만, 카이다는 용서가 뭔지도 이해를 못 했어. 캐롤. 때가 너무 이르다고. 그냥 보내줄 순 없어.
캐롤 브라이트: …여러분들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여전히 캐롤 브라이트는 우리가 옳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주 작은 일말의 가능성에라도 그녀는 기대고 싶었을 것이다.
제츠보: 다 같이 이 논쟁만 하고 있다간 끝이 없겠어. 모두들. 나한테 카이다를 어떻게 할 지에 대해 좋은 생각이 있으니 들어 봐.
제츠보는 본인 앞에 있는 접시에 아무것도 올리지 않은 채였다.
이바라 쿠리스: 그게 뭔데?
제츠보: 그냥 내 쪽에서 며칠간 카이다를 지켜보는 거야. 간단하고. 나만큼 확실하게 카이다를 막을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 이것 말고는 별 방도도 없다고 봐야지.
히무로 시라베: 그건 근본적인 해결이라고 할 수 없다.
제츠보: 어차피 카이다 양쪽 다리를 앗아가도 내가 감시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야. 마음만 먹으면 무릎을 땅에 대고 기어서라도 다른 사람을 덮칠 수 있잖아. 안 그래? 다리를 잘라 놓으면 팔로 걸어다닐 사람이야. 저거.
카이다 쿠로하는 제츠보가 그녀를 두둔해주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행동거지가 야만적이고 천하다고 하는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듯 했다.
제츠보: 그러니 내 쪽에서 감시하다가 더 좋은 방안이 나오면 그렇게 하면 돼. 그게 싫으면 그냥 오늘 편을 가르고 전쟁을 치르던가.
나와 캐롤 브라이트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캐롤 브라이트: 저는 찬성할게요.
히무로 시라베: 나 또한 찬성하겠다.
제츠보: 좋아. 고비 하나 넘겼네. 휴. 다들 싸우지 말고 좋게 좋게 가자고. 표정 풀어. 카이다 쿠로하. 나 덕분에 걸어다니는 거라 생각하라고.
카이다 쿠로하는 아무 말 없이 콧방귀를 뀌었다.
캐롤 브라이트: 죄송해요. 제츠보 씨. 괜히 제 동생 때문에 번거로운 일을 떠맡으셨네요.
제츠보: 됐어. 캐롤. 이게 내 일이야. 그럼 다음에 논의할 거 있는 사람?
히무로 시라베: 정신조작 보유자들의 처우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제츠보는 자신의 이마를 부여잡았다.
제츠보: 아. 싸울 수밖에 없겠네. 이건.
캐롤 브라이트는 순간 자신의 얼굴에 떠오른 불쾌한 기색을 지우고, 무표정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캐롤 브라이트: 제가 세 가지 정신조작을 전부 가지고 있기 때문인가요?
히무로 시라베: 또한 현재 이 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바라 쿠리스: 정신조작? 그게 뭔데. 세 가지 정신 조작이라니?
나는 이바라 쿠리스에게 답했다.
히무로 시라베: 정신조작이란 타인의 정신에 침투하고 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움직임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이다.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캐롤 브라이트는 시선, 육성, 그리고 신체의 접촉을 통한 정신조작의 세 가지 형태를 전부 가진 사람이다.
이바라 쿠리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히무로 시라베: 극도로 위험하다는 뜻이다.
나는 그 세 개를 전부 갖춘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봤다. 그 재림이 탑에서 일어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었다. 세 가지 정신조작의 기본적 사용만으로 그녀는 탑을 지배할 수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 저는 터치를 남용한 적이 없어요. 히무로 씨. 후루미나미 씨에게 사용한 것은 저희들의 생존을 위해서였어요. 항생제를 해변에 보내지 않으면 누군가가 죽을 처지였으니. 그 일로 저를 비난할 수는 없어요.
히무로 시라베: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경계할 뿐이다. 이 탑에도 강한 완력을 가진 이나 위험한 행동을 일삼는 이들이 있었지. 그들도 물론 잠재적으로 위험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캐롤 브라이트보다 위험하지는 않다. 정신조작은 너무도 쉽고, 전조가 없으며, 숨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캐롤 브라이트: 그래서. 저는 또 고립되어야 하는 거죠? 제가 다른 사람과 말 한마디 나누는 것조차 위험하니까 또 방에 갇히고. 무슨 라푼젤처럼 갇혀 살아야 한다 이건가요?
히무로 시라베: 본질적으로는 그렇다.
정신조작은 상호작용의 대상이 있기에 위협적이었다. 즉 조종할 사람이 없게끔 고립시킬 수만 있다면 파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요구를 캐롤 브라이트가 받아들일 확률은 아주 적었다.
나나시: 히무로. 그건 너무 강압적인 방법이야. 우리가 흉악범인 것처럼 방에 가둬만 두겠다니.
캐롤 브라이트: 저는 저번 생에도 그렇게 살다가 죽었어요. 히무로 씨. 제가 위험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려고 참고 참아 왔다고요. 이번 생에도 그렇게 살아 볼까요? 또 후회만 남게요?
캐롤 브라이트: 저는 이제 그 무엇도 양보할 생각이 없어요. 또 다른 분들 위한다고 저만 손해 보기는 싫다고요. 저도 여러분들이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살 거에요. 제가 나쁜 건가요? 제가 무슨 시한폭탄 취급 받으면서도 모리 씨에게 화낸 적 있어요?
히무로 시라베: 너는 악인이 아니다. 악인이 될 경우 겉잡을 수 없을 뿐이다. 제츠보 다음으로 강한 힘을 가진 카이다 쿠로하, 정신조작의 견습 단계에 이른 이름 없는 남자가 전부 너와 함께하고 있다. 네가 원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제츠보를 제외한 전원을 네 마음대로 부릴 수도 있다.
캐롤 브라이트: …안 그런다고요. 히무로 씨. 제가 죽기 전에는 저를 내버려 두셨잖아요.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건데요?
히무로 시라베: 탈출 장치에 노출되며, 세 가지 정신조작을 전부 가지고 있던 한 인물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자가 저지른 짓도 기억해냈다. 그리고 나는 또 조율자와 같은 위험인물의 등장을 좌시할 수 없다.
긴장이 감돌았다. 적의를 느꼈다. 하지만 피차 언젠가는 느끼게 될 적의였다. 빠르냐 느리냐의 차이일 뿐.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조율자가 저지른 일은 시간을 들일 경우 캐롤 브라이트 또한 충분히 할 수 있을 테니.
이바라 쿠리스: 조율자? 그게 뭔데?
히무로 시라베: 만들어진 초인이다. 남성에 세 가지 정신조작을 전부 가지고 있었으며, 사람의 정신에 손쉽게 간섭해 조종할 수 있는 자였다.
캐롤 브라이트: 그 자를 만들기 위해 제가 납치당하기도 했죠. 저처럼 금발에 흰옷을 입어요.
카나리 케이토: 그놈은 위험해!
카나리 케이토는 어디에선가 조율자를 본 적이 있는 것처럼 소리쳤다. 얼굴에는 공포가 서렸고 그의 회중시계는 빠르게 째깍였다.
카나리 케이토: 저. 정말 위험한 놈이야. 괴물이랑 똑같아! 놈을 막아야만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해!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에겐 미래가 없어!
이바라 쿠리스: 가… 갑자기 왜 그래. 카나리. 나 완전 식겁했잖아.
제츠보: 엄청나게 과민만응을 하네.
카나리 케이토: 막아야 해! 누구든 좋으니 막아야 한다고!
하기와라 우시오: 진정해 임마. 그놈이 누구든 이 탑에는 없어! 괜찮다니까?
카나리 케이토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회중시계를 돌릴 정도의 여유도 없어 보였다. 어쩌면 내가 영안로 속에서 블레인과 마주쳤듯이 카나리 케이토는 영안로 속에서 조율자와 마주쳤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두려워하는 것은 옳은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조율자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과 한 식탁을 쓰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을 뿐이지만 캐롤 브라이트도 바보는 아니었다. 내가 어떤 말을 꺼낼지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나시: 히무로.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캐롤 씨는 말 그대로 어제 죽었다가 되살아났어. 나와 너. 탑에 있는 사람들은 체감 시간이 다르겠지만 캐롤 씨가 느끼기에는 다르잖아. 왜 캐롤 씨를 몰아붙이는 거야?
히무로 시라베: 온전히 힘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어우. 씨. 이건 내가 듣기에도 좀 무례한데.
캐롤 브라이트가 듣기에 그 말은 더 무례할 터였다. 나는 캐롤 브라이트의 눈가에 혈관이 불거지는 것을 보았다.
캐롤 브라이트: 제가 사람을 부리고 다닐 거라는 투네요. 제가 가장 하고 싶지 않은 게 사람을 조종하는 일인데… 위험하니까 억누르고 다 당해 준 건데… 그러니 계속 이런 취급을 받고도 가만히 있을 줄 알았나 보죠?
히무로 시라베: 네가 타고난 힘 때문에 겪어야 하는 일은 유감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내 사명을 다해야 한다.
나는 내 몫으로 놓인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다보았다.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정신조작을 시도하려는 정황을 보인다면 그 자리에서 안구를 향해 던질 생각이었다. 이름 없는 남자는 내 의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잔뜩 난처한 얼굴로 중재를 시도했다.
나나시: 히무로… 진정해!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 우리끼리 싸울 필요가 없다니까? 캐롤 씨도요. 납득할 수 있을 사안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결국 누군가가 다치게 돼!
히무로 시라베: 안타깝지만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캐롤 브라이트: 진정은 저 쪽만 하면 돼요. 나나시 씨를 총으로 쏴서 죽이려고 해 놓고 자기는 무해한 것처럼 말하잖아요. 이렇게 서로 싸우는 일이 없게끔 나나시 씨가 그 일을 넘기려 했던 건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정한 지적이었다. 이름 없는 남자는 나에게 응보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일은 온전한 내 잘못이었으니. 하지만 이름 없는 남자는 분쟁을 막기 위해 화친을 택했다. 그리고 나는 그 관대한 제안을 듣고 그들에게 채울 목줄을 가져왔다. 못쓸 인간이다.
히무로 시라베: 그 일은 내 잘못이다.
나는 가능한 한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차분함은 캐롤 브라이트에게 있어 일종의 기만이자 조롱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캐롤 브라이트는 유래없이 분노했다.
캐롤 브라이트: 누가 아니래요? 애초에 히무로 씨는 얼마나 안전한 사람이라고 저희한테 위험하니 마니 하는 거죠? 안전한지 아닌지로 따지면 저나 당신이나 똑같이 처음부터 태어나선 안 될 사람이에요. 잘못 태어나서 세상의 전복에 한 걸음을 보탠 실험체들!
몇몇 이들이 제 입을 감싼 채 나의 반응을 기다렸다.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녀와 내가 죽는다면 초고교론자들의 득세는 최소 10년 이상 늦춰질 테니.
히무로 시라베: 알고 있다.
캐롤 브라이트: …당신은 이제 총을 가지고 있지 않으시잖아요. 저를 속박할 수 있다고 생각은 마세요.
히무로 시라베: 수단은 어디에나 있다.
나이프와 포크처럼. 혹은 접시가 될 수도 있겠지.
나나시: 지. 진정해. 히무로. 그러지 마!
하기와라 우시오: 준비됐어. 제?
제츠보: 뭐? 나 부른 거야. 지금?
하기와라 우시오가 기이한 명칭으로 제츠보를 불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기와라 우시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가 앉은 좌석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뒤늦게 제츠보 또한 나에게로 향했다.
히무로 시라베: 무슨 일이지?
하기와라 우시오는 앉아 있는 나의 어깨를 손으로 세게 쥐었다.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여기서 잠깐! 히무로랑 단둘이 이야기 좀 하고 올게!
제츠보: 하아… 그래. 알겠어. 나도 같이 가자. 조언을 해줄 사람이 우리밖에 없네.
그리고 제츠보의 억센 완력은 나의 팔을 붙잡았다. 떨쳐낼 도리가 없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좋았어. 이게 친구 좋은 거지. 자. 가자!
내가 그들의 뜻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기도 전에. 제츠보는 내 팔을 잡아당겨 나를 식당 밖으로 내몰았다.
식당의 문 바로 옆에서 나는 말했다.
히무로 시라베: 용건이 뭐냐.
하기와라 우시오: 용건이 뭐냐 이 지랄. 야. 너 왜 그래? 그 정신조작을 네가 엄청 경계한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캐롤을 그렇게 긁어댈 필요는 없잖아! 존나 기분 나빠 하더라!
제츠보: 내가 보기에도 너무 노골적이었어. 히무로. 조용히 감시하던가 해야지 그렇게 몰아붙이면 누가 순순히 받아들이겠어?
히무로 시라베: 어차피 그녀와 나는 반목할 수밖에 없다. 나는 정신조작의 가능성을 좌시할 수 없으며 캐롤 브라이트는 그것을 알고 있다. 곧 이것은 누가 선공권을 잡는지에 대한 싸움으로 변할 것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캐롤은 그럴 생각 없다니까! 지금 막 죽다 살아났는데 히틀러처럼 굴다가 또 죽겠냐!
히무로 시라베: 그들은 무조건 움직인다. 내가 그들을 제압하고 싶음을 알기 때문이다. 죄수의 딜레마다. 믿을 수 없는 두 집단은 결국 서로 이기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결과가 공멸임을 알고 있음에도.
제츠보: 아무리 네가 캐롤에게 무언가를 요구해 봤자 캐롤은 네 요구를 받아줄 필요가 없어. 카이다도 캐롤 편이고 나나시도 캐롤 편이잖아. 삼인성호야. 탑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 없는 이상 우리는 그 세 명을 묵살할 수 없다고. 결국 불편하더라도 같이 지내야 해. 척을 지면 결국 너만 피해를 입을걸?
히무로 시라베: 탑 전체가 피해를 입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기와라 우시오: …그렇게 불안하냐? 우리가 세뇌 당하는 게. 그렇게 불안해?
히무로 시라베: 불안은 적절하지 않은 단어다. 불안은 확신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정신조작 보유자들은 반드시 정신조작을 한다. 그리고 또 사람들을 조종한다.
하기와라 우시오: 야. 제츠보. 내가 정신조작인지 뭔지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거 그냥 망상 걸린 헛소리야, 아니면 일리 있는 이야기야?
제츠보: 일리 있는 망상이야. 캐롤이 위험한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잖아. 캐롤이 작정하고 정신조작을 시작하면 우린 막을 도리가 없어. 방에 가둬 둬도 한순간이라도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치거나 명령을 내릴 수 있으면. 끝장이거든.
하기와라 우시오: 뭐야. 씨발. 과장이 아니야?
제츠보: 진짜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걸 막으려면 눈이랑 혀를 뽑고 가둬 둬야만 해. 사람한테 그럴 수는 없잖아. 우리에겐 정말 뾰족한 도리가 없어. 히무로 너도 제정신으로 캐롤을 불구로 만들겠다 한 건 아니잖아?
히무로 시라베: 불구로는 만들지 않는다. 가둬 두고 제대로 감시만 한다면 충분하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 옘병 감시는 절대 포기 안 하네… 야. 히무로. 나 눈치 깠다. 너 이거 마유즈미 없어서 이러는 거지?
나는 하기와라 우시오가 왜 그런 추측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가 나와 친하지 않을 때도 내 정신은 온전히 기능하고 있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탑에 떨어졌을 때의 시점으로 나와 마유즈미는 만난지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렇게 짧은 시간 사이에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토록 의존하게 되지는 않는다.
하기와라 우시오: 온전히 기능은 니 꼬추가 하는 거고. 너는 애초부터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잖아. 그 면을 마유즈미가 지탱하고 있었는데 사라져 버려서 이렇게 된 거야. 이런 PTSD 환자 새끼. 상담이 필요하면서 초고교급 상담사를 못살게 구는 미친놈이 있다?
제츠보: 하기와라 말에 동의는 안 하지만, 확실히 너는 지금 어떤 강박을 느끼는 것 같아. 마유즈미를 데려온다고 그게 나아질까?
하기와라 우시오: 히무로가 나아지는 게 아니야. 이 상황 자체가 나아져. 마유즈미는 히무로랑 친하고 캐롤이랑도 친한 유일한 사람이야. 그리고 은근히 똑똑해. 이 좆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할지 답을 내리고 둘 다 납득시킬 사람이 있으면. 그건 마유즈미 뿐이야.
제츠보: 글쎄… 마유즈미의 정신이 돌아오는 것만으로 그렇게 큰 변화가 일어나겠어? 물론 나도 시라유키 히메리를 마유즈미의 몸에서 꺼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정말 모든 게 변할까?
하기와라 우시오: 변한다니까. 진짜로! 야. 히무로. 마유즈미가 돌아올 방법은 없는 거냐? 시라유키라는 그 사람한테 악감정은 없지만 걔는 내 친구이기도 하단 말이야. 네 친구이기도 하고. 이바라 친구이기도 하고. 캐롤 친구이기도 하고. 진짜 마유즈미 가죽을 다른 사람이 쓰고 돌아다니는 걸 우리가 보고 있어야만 해?
방법은 있었다. 하나밖에 없을 뿐.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가 되살아날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캐롤 브라이트가 터치를 사용해 메리의 자아를 점점 억압하는 것이다. 나는 마유즈미를 구할 수 없다.
그 말을 듣자 하기와라 우시오는 나에게 눈을 부라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씨발 지금 장난해? 마유즈미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랑 싸우려 들었다고?
히무로 시라베: 그것은 나의 개인적인 사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마유즈미를 다시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의무를 등한시할 수는 없다. 설령 내가 마유즈미를 그리워할지라도, 그것이 캐롤 브라이트를 자유롭게 둘 요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제츠보: 그럼 원래 어쩔 작정이었어?
히무로 시라베: 캐롤 브라이트를 그녀의 방에 구류한 뒤 개인적으로 찾아가 메리의 억압을 의뢰할 생각이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퍽이나 들어주겠다! 너 진짜 존나 뻔뻔한 새끼구나? 네 원래 계획이면 카이다도 한쪽 다리 못 쓰게 만들고, 캐롤은 방에 가둬 두고서. 마유즈미를 고쳐 달라 의뢰하겠다고? 양심이 쳐뒤졌네… 뭣?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제츠보: 아무튼 간에. 마유즈미를 다시 보고 싶다면 캐롤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어. 더 몰아붙였다간 네가 무릎을 꿇고 빌어도 안 들어줄 테니까. 마유즈미를 다시 보고 싶긴 하지?
히무로 시라베: 그렇다.
나는 마유즈미에게 어떤 보답도 주지 못했다. 그렇게 끝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를 다시 보아야만 했다. 그것은 당위성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나에게는 그녀가 필요하다.
그 말을 들은 하기와라 우시오와 제츠보는 의표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망할. 히무로. 다 잘 될거야. 기운 내 이 새끼야.
제츠보: 그래. 희망을 가지자.
히무로 시라베: 나는 평소와 같다.
하기와라 우시오: 개같이 우울하다는 거잖아. 그거.
제츠보: 식당으로 돌아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캐롤이 요청에 응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겠어. 지금 당장은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게 해야 해. 히무로. 할 말을 잘 생각해 둬. 설득은 굉장히 힘들 테니까.
캐롤 브라이트: 당연히 해 드려야죠. 말 나온 김에 지금 당장 출발할까요?
마유즈미를 구할 방법은 그녀 뿐이라는 말을 꺼낸 직후. 캐롤 브라이트는 대답했다. 고민이나 협상의 여지조차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바보같은 질문도 다 있다는 투였다.
제츠보: 아니네?
캐롤 브라이트: 그게 샤이닝과 유사한 형태라면 결국 제가 간섭할 수 있어요. 그 간섭을 마유즈미 씨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할 수 있느냐의 문제지만… 요점은 제가 시도할 수 있다는 거죠.
히무로 시라베: 그렇다면 충분하다. 이후에 자세히 현 상태에 대해 귀띔해 주겠다. 그 뒤에 메리에게로 간다.
캐롤 브라이트: 마유즈미 씨한테 가는 거죠. 시라유키에게가 아니라.
하기와라 우시오: 히무로. 그 뭐냐. 왜 이렇게 쉽게 들어주는지 물어봐야 하지 않아?
캐롤 브라이트: 안 그러셔도 돼요. 마유즈미 씨는 저와 나나시 씨의 친구이기도 하다고요. 마유즈미 씨가 해변으로 떠난 뒤로는 제가 죽어버려서 못 만났지만… 그런데 왜 진작 저에게 말씀을 안 하셨어요? 대신에 제 성질만 돋구시고.
히무로 시라베: 메리의 자아를 억압할 수 있는 사람이 너 뿐임을 먼저 말했다면, 정신조작 보유자의 처우를 논할 때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너희들을 방임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하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그거랑 이건 다르죠! 아니다… 됐어요. 히무로 씨는 그런 사람이죠. 사적인 영역도 공적으로 대하는 사람이요. 이해했어요. 나중에 전화 걸게요. 같이 마유즈미 씨를 찾아가게.
히무로 시라베: 알겠다.
캐롤 브라이트: 그게 다에요?
히무로 시라베: 고맙다.
캐롤 브라이트: 아뇨. 감사를 들으려는 게 아니라… 앞으로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저를 어떻게 대하실 생각이세요?
히무로 시라베: 생각 중이었다.
하기와라 우시오가 나를 보고 낄낄거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익숙해져 봐. 캐롤. 익숙해지면 어려울 거 없어. 얘한테 A는 A고 B는 B야.
카이다 쿠로하: 언니. 이거 꼭 해 줘야 해? 안 해도 되잖아. 그냥 해주지 말자! 쓸모도 없는 걔를 살려서 뭐 해?
캐롤 브라이트: 마유즈미 씨는 내 친구이기도 해. 치나미. 그런 이야기 하지 마.
카이다 쿠로하: …쯧.
캐롤 브라이트가 마유즈미의 수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상 나는 그녀의 행동에 제약을 둘 수 없었다. 물론 나와 제츠보는 장님이 아니다. 어떤 조짐이 보인다면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안전하지는 않으며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자유를 빼앗기게 된다. 그 가능성을 좌시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나나시: 히무로. 우리를 믿어 줘야 해.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아.
히무로 시라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나쁜가,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 것이 나쁜가?
나나시: 너도 이 상황이 죄수의 딜레마라고 말했잖아. 우리가 서로를 배신하지 않는다면 어느 쪽도 피를 보지 않아. 안 그래?
히무로 시라베: 지나치게 낙관적인 믿음이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그 표현에서 나는 마유즈미를 떠올렸다. 나 대신에 마유즈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녀는 곧장 캐롤 브라이트와 나나시를 믿었을 것이다. 그녀가 터치를 받아본 적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마유즈미에게는 사람을 믿는 과감함이 있을 뿐이다. 내가 변할 수 있으리라 믿을 정도의 과감함이.
그것은 무모함인가? 그 선택은 잘못 되었는가?
희망은 과도하게 이상적인 개념인가?
"그들을 어떻게 구원할 텐가?"
마유즈미.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알려줘.
"그럼. 죽이지 않을 상대를 죽이지 않는 것도 바람직하겠네?"
죽이지 않을 상대.
아직 죄를 저지르지 않은 자들. 벌써부터 죄인 취급을 받기에는 너무 이른 자들. 전부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이다.
네 말이 옳아.
너는 언제나 옳았어. 마유즈미.
히무로 시라베: 정신조작 보유자가 면전에 나서 탑을 점거하려 하지 않는 이상. 나는 너희들을 내버려 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캐롤 브라이트는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금 물었다.
캐롤 브라이트: 그럼… 감금도 없다는 건가요?
히무로 시라베: 없다.
캐롤 브라이트: 하아. 드디어…
캐롤 브라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나는 하기와라 우시오의 손뼉 치는 소리를 들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잘 했다. 미스터비스트(금수 씨라는 뜻).
제츠보: 한 시름 놓겠어. 카이다는 내가 잘 감시할 테니까 걱정 마.
카이다 쿠로하: 좆이나 까먹어라. 깡통.
제츠보: 분위기 훈훈한데 꼭 그래야겠어. 카이다?
이름 없는 남자는 헛기침을 몇 번 해서 주위를 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하려는 행동을 어림짐작한 나 또한 일어나 그를 향해 다가갔다. 나와 이름 없는 남자는 테이블을 지나 중간 지점에서 마주쳤다.
나나시: 히무로 네가 그런다면. 정신조작 보유자들은 결코 정신조작을 남용하지 않겠어. 그거면 되는 거지?
히무로 시라베: 그럴 수만 있다면 이 탑에는 더 이상 마찰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이들이 한 편이 되어 흑막과 맞서게 되리라.
나나시: 마유즈미가 돌아온 후에도 이 협정은 유효한 거야. 그렇지?
히무로 시라베: 유효하다뿐이 아니다. 더 강성해질 테지. 마유즈미가 보기에 서로를 믿지 못해 생기는 갈등이란, 하등 의미없고 천치같은 일로 보일 테니.
그렇다면 나는 그녀에게 아주 혼쭐이 나게 되리라.
나와 이름 없는 남자는 서로 손을 건네었다. 그와 나는 마주친 손을 붙잡았고, 우리는 악수를 나누었다.
나는 언젠가 그 손이 무기를 든 채 서로 마주하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카나리 케이토: 저게 잘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정신조작 진짜 위험한데.
이바라 쿠리스: 에이. 걱정도 많아. 카나리. 탑에서 캐롤이랑 나나시만큼 순한 사람이 어디에 있어? 와. 진짜 다 풀었다! 진짜 이제 마유즈미만 돌아오면 탑에도 쭉 평화가 올 거야!
이바라 쿠리스는 몸을 쭉 펴며 크게 소리를 쳤다. 캐롤 브라이트는 다른 이들을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캐롤 브라이트: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에게 제안이 하나 있어요.
제츠보: 뭔데?
캐롤 브라이트: 광자 상영기 말인데요. 다 같이 사용할 순 없을까요? 제가 놓친 게 너무 많을 것 같아서요.
이바라 쿠리스: 아!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너희들이 뭘 하고 왔는지는 아는데 그게 실감이 되지는 않아. 기억을 보면 좀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하기와라 우시오: 그럼 보러 가면 되지! 간식 가지고 따라와! 가자고. 어서!
광자 상영기는 모노로그가 준비한 동기 치고는 우리에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현재 탑에 놓인 가장 큰 문제란. 해변에 떨어지고 난 다음 날에 영안로가 열려 버리며 그 사이에 벌어진 일을 서로 공유하지 못하는 점에 있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들었더라도 그걸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던가.
광자 상영기를 통해 탑에 있는 이들은 서로가 어떤 체험을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곧 이해로 나아가는 포석이었다. 그것보다 더 나은 표현을 떠올릴 수가 없다.
하기와라 우시오: 나랑 얘들이 어떤 미친 모험을 했는지 보면 너희들은 놀라 까무라치고 말 거야. 존나 쩔었다니까? 자. 상영 시작!
그리고 그날 우리는 서로의 기억을 보았다. 해변. 영안로.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았다. 하기와라 우시오가 가장 먼저 헬멧을 뒤집어썼다.
"블레인. 패배를 인정해. 그리고 운행을 멈춰! 이 자식아. 너는 졌어. 시라유키 히메리가 누군진 몰라도 열차 병신같이 만들었다고! 지나가던 코미디언 하나에 다 털렸죠?"
"나는… 걸작품이다… 사유할 수 있는 열차. 판단할 수 있는 열차. 나는… 시라유키 히메리의 최대 성공작이다… 할 수 있어. 코사인… 감자. 감자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헤이 주드… 돈 메이크 잇 새드… 네메시스. 나의 네메시스… 아아아. 라. 라! 나 다시 돌아갈래… 너무해… 너무해…!"
"대답해! 대답 못 하겠으면 때려치우던가. 하지만 네 회로를 아무리 굴려봤자 답은 안 나올 거다. 이 문제는 나한테서 나온 거니까. 답이 없는 삶에서부터 내가 건져 올렸어. 그러니 너는 절대 못 풀어!"
이바라 쿠리스: …대단하다. 하기와라. 저 황천행 토마스를 저렇게 부숴버린 거야? 진짜로?
제츠보: 하기와라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블레인에게 죽었을 거야. 아무리 어려운 수수께끼를 내도 그게 말이 되는 답이라면, 블레인은 풀 수 있거든. 하지만 슈퍼컴퓨터는 농담을 이해할 수 없지.
이바라 쿠리스: 농담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을 이해해야 하니까…
인생에서 건져 올린 수수께끼에는 답이 없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어찌할 수 없는 고난에 해학을 붙여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블레인의 천적이었다.
카이다 쿠로하: 그런데 저거 진짜인 것도 아니잖냐?
카이다 쿠로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츠보: 블레인을 만나본 내가 보기에는 똑같았어. 영안로 안의 것들은 현실의 것과 동일해. 저게 사람들을 전류로 지져대던 걸 보면 너희도 이게 얼마나 미친 짓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걸… 정해진 답이 없는 농담을 이용해 블레인을 과부하시키다니. 왜 아무도 이런 걸 떠올리지 못했을까?
캐롤 브라이트: 하기와라 씨 말고는 블레인에게 농담을 해볼 생각을 못 했기 때문 아닐까요?
카이다 쿠로하: 개병신새끼들이네. 왜 저런 간단한 짓을 시도도 안 해 봤을까? 그럼 간단하게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이바라 쿠리스: 그야 저런 괴물 앞에서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는 건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니까. 하기와라니까 가능한 거지!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나는 한 거 없어. 나랑 같이 있던 놈들 덕을 봤을 뿐. 나 혼자서는 못 했을 걸.
제츠보: 겸손 떨지 마. 하기와라. 재수 없어. 그냥 잘했다 칭찬해 주면 어깨나 쭉 피라고.
하기와라 우시오: 겸손 떠는 게 아니라 진짜 나 혼자서는 못했다니까? 만약 내가 혼자 할 수 있었다면 현실 세계에 있는 블레인도 내가 직접 죽였겠지. 그런데 그놈이 나한테 죽었냐? 아니잖아. 제츠보 너는 내가 블레인이랑 맞짱까는 거 보고 엄청 놀랐으면서.
제츠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츠보: 그래. 맞긴 하지. 현실의 블레인은 자살했어. 너는 블레인의 죽음과 연관이 없어.
하기와라 우시오: 그렇다니까. 누가 디셉티콘한테 승부를 걸어? 제발 나는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피하는 게 상책이지. 그런데 여기 이 새끼가 제 목숨을 던져 버리니까 나까지 휘말려버린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는 머리에 헬멧을 쓴 채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기와라 우시오: 얘만 아니었으면 나는 영안로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거고, 내 존나 무서운 악몽들과의 재회도 없었을 거고, 새 친구도 못 사귀었을 거야. 나 혼자만 있었다면 또 도망쳤겠지. 죽은 작자들 환영에서 도망친 것처럼 아무것도 마주보지 못했을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그런데 이 히무로 이 새끼 덕분에… 나는 나한테 있는 줄도 몰랐던 고결함을 되찾을 수 있었어. 뭐. 그러니까… 히무로가 내 등을 떠밀어 줬다고 봐야지.
히무로 시라베: 그렇게 생각한다면 고맙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욕지기를 내뱉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우웩. 우에에엑! 오글거려! 아. 미친. 너무 오글거려어어! 이 훈훈한 분위기 못 버티겠다. 크아아악! 마유즈미이이!
이바라 쿠리스: 아하하하하! 하기와라 표정 좀 봐. 진짜 싫어하는 것 같아!
캐롤 브라이트: 풋… 푸훗…
나는 그의 욕지기를 보며 그것이 그 나름대로의 우정의 표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진짜 못 견디겠다. 소름 돋은 것좀 봐. 이 새끼는 진심으로 고맙게 여겼을 것 같아서 더 소름돋아. 제발 그만 정직해! 우웁…!
…아닌가?
이바라 쿠리스: 아히히히히…! 아. 불쌍하니까 바꿔 줘야겠다. 다음에는 누가 헬멧 쓸래? 기억 보여줄 사람?
히무로 시라베: 내가 하겠다. 그 직후에 벌어진 일의 기억이다.
"그럴 수 없어. 하기와라…! 버텨야 해. 어쩔 수 없어. 버텨야 해! 내 이름은 말할 수 없어!"
"아니. 돼! 23T5U130이 네 변명이라는 것까지 말해 줬잖아. 네 깡통 본명이 무슨 기밀도 아니고 말할 순 있어! 이 년아. 남자한테 정신 팔려서 뭐 하냐?! 너 이거 나나시 찾아가려고 이러는 거지! 정신 차려. 이름 대! 빨리!"
"으윽…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티면 돼! 어차피 곧 시련은 끝나! 나는 버틸 수 있어…!"
"인공지능. 네가 이런 곳에서 죽어서는 안 된다! 그는 우리가 책임질 테니 이름을 말해라. 어서!"
하기와라 우시오: 저때 레전드였는데. 그냥 이름이나 말하라니까 말을 안 들어.
히무로 시라베: 영안로에서 본명을 써야만 나갈 수 있다는 걸 제츠보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 없는 남자가 본인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는 이상 그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따라서 그의 본명을 알고 있는, 그와 친분이 있던 제츠보가 그 사실을 전해야 했던 것이지.
나나시: 사실. 정말로 죽을 뻔 했어. 캐롤 씨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야. 그보다… 저렇게 간절했구나.
제츠보: 간절할 수밖에. 네 본명은 나밖에 몰라. 내가 알려주지 않으면 네가 어떻게 되겠어? 영안로에서 나갔다가 다시 들어가서 너를 따라잡을 방도도 없고…
제츠보: 너. 카이다에게 저항을 하긴 한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안 했지?
나나시: …미안. 제대로 안 했어. 결국 캐롤 씨를 살리고 싶었거든.
제츠보: 그래서 죽을 뻔한 거야. 경솔한 짓이었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나나시: 정말 미안…
제츠보: 됐어. 안 그래도 돼. 카이다 쿠로하가 미안해해야지. 결국 쟤가 납치범이니까.
캐롤 브라이트: …….
카이다 쿠로하: 뭐?! 저놈이 나로 이득을 얼마나 많이 봤는데! 내가 해준 건 까먹고 이제 와서 욕지거리야?
나나시: 납치를 하지 말던가. 그러면! 진짜 이상한 사고방식이다! 너야말로 사람 납치해놓고 무슨 선심 쓴 마냥 이야기하지 마!
이바라 쿠리스: 저기. 말싸움하는 와중에 궁금한 거 하나 있어. 되게 하찮은 거지만 정말 궁금하긴 해서 물어보는 거야.
이바라 쿠리스는 손을 들고 말했다. 자신에게로 다른 이들의 이목이 쏠리자 이바라 쿠리스는 목을 한 번 고르고는 물었다.
이바라 쿠리스: 캐롤이랑 제츠보만 알고 있는 건데. 나나시의 본명은 뭐야? 여기까지 왔는데 모르고 있으니까 많이 궁금해졌어.
하기와라 우시오: 어. 그러게. 궁금하다. 야. 진짜 궁금하다! 이름 없는 남자의 본명은 무엇인가?!
나나시: …히무로. 헬멧 좀 줘.
나나시의 기억이 상영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화면은 검은색이었다. 이름 없는 남자가 총을 맞은 직후, 죽기 직전에 계속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나의… 파괴되지 않는 것이에요. 내게 저주를 내린 장본인이기도 하고. 당신이 나를 구했어. 내게서 편안한 죽음을 빼앗고 그 자리에 생을 준 거야. 그렇지만 결코 원망하는 건 아니에요. 저는 당신을 미워한 적이 없어요. 그때 저를 끄집어내 준 사람이 당신인 걸요. 기억나지 않으시겠죠? 우리가 다리 위에 서 있었다는 걸."
"운명이 그때부터 우리 둘을 묶어두었다는 것을. 지금의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겠죠. 지금 당신은 우리가 탑에 오기 전의 일을 떠올릴 수 없을 테니까요. 그날 이래 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 한 켠에 재회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었고. 내 생에 마지막 미련 중 하나가 당신이었음을. 모르겠죠."
"저는 그날 죽어야 했어요. 그게 모든 사람들에게 더 나은 일이었을 거예요. 그날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고 세상에 더 기대할 것도 없었어요. 죽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는데. 그걸 당신이 망쳐버린 거예요. 아. 나의 영웅. 내가 위험에 처하면 언제나 구하러 와주는군요.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나은 걸 주고 싶어요. 우리가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 두렵고도 고된 멸시의 길에서 내려오는 것이 당신에게는 나을지 모르죠. 쉬는 거예요. 차갑고 무서운 일이라고 해도 그것은 휴식이니까. 하지만 나는 욕심쟁이라서… 그렇게 둘 수가 없네요."
이바라 쿠리스: …찐한데?
제츠보: 저것들 좀 봐라.
제츠보는 못마땅한 얼굴로 이름 없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름 없는 남자는 억울하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나나시: 왜 그래. 잘못한 건 아니잖아…
캐롤 브라이트: 아… 제가 한 말을 제가 들으니까 조금 쑥스럽네요. 너무 흥분했나… 저것도 좀 자제한 건데…
카이다 쿠로하: 아. 안 이상해. 언니! 듣기 좋기만 한데 뭐!
카이다 쿠로하는 어색한 웃음을 꾸몄다.
"당신을 놓아주고 싶지 않아요. 저 참 못됐죠? 하지만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이걸로 저희 비긴 걸로 해요. 이 말을 되돌려 드릴게요. 죽지 마."
이바라 쿠리스: 우와아… 녹진하다… 마치 교토에서만 먹을 수 있는 말차 디저트처럼 녹진하고 끈적하다…
캐롤 브라이트: 이바라 씨. 왜 그렇게 아저씨같은 표현을 쓰시는 거죠…?
이바라 쿠리스: 말차 디저트 먹는 아저씨가 어디에 있어?… 말하고 보니까 교토에 사는 아저씨라면 한 명쯤 있을 것 같기도 하네.
카나리 케이토: 다 조용히 좀 해봐! 지금 말하려는 것 같으니까!
카나리 케이토가 그렇게 말한 직후. 화면 속의 캐롤 브라이트가 속삭였다.
"사랑해요. 아마츠마라 카라쿠리누시 메이(天津麻羅 絡繰主 命). 아웃."
화면이 꺼졌다. 이름 없는 남자가 헬멧을 벗은 것이다.
캐롤 브라이트: 어휴. 더워… 쑥스러워라…
나나시: 이 뒤로는 그냥 기절해 버려서 다음 기억이 없어… 그런데 왜 그래. 다들?
다른 이들은 대부분이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혼란에 빠져 있는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고서 퍼즐을 짜 맞추기 시작했다.
이바라 쿠리스: 마라로제까지는 들었는데 그 다음은 못 들었어. 마라로제 다음 들은 사람?
하기와라 우시오: 나는 가리가리군이라고 들었는데.
카이다 쿠로하: 츠마라나이가 네 이름이야? '시시하군'이 사람 이름이라고? 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보단 핑키가 낫지 않…
제츠보: 그건 아니야. 카이다. 선은 넘지 마.
제츠보가 단호하게 말을 끊자 카이다 쿠로하는 으르렁거렸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이해했다. 상당히 긴 이름에 다들 곤혹감을 느낀 것이다.
카나리 케이토: 이… 이렇게 긴 이름은 처음 들어봐… 나는 분명 제대로 들었을 텐데…
나나시: 모두들 그… 그만 놀려… 나도 내 이름 특이한 거 아니까…
이름 없는 남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를 보고 다른 이들은 손을 내저으며 그를 만류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놀리는 게 아니라 진짜 이해를 못 한 거야. 나나시. 외국인을 위해 준비된 일본어 듣기 평가 하는 기분이었어.
나나시: 일본인이면 맞춰야 하는 거 아니야?!
하기와라 우시오: 그러는 너는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쥬게무 쥬게무 고코노 스리키레 읊으면 한 번에 따라할 수 있고?
나나시: 할 수 있지! 쥬게무 쥬게무 고코노 스리키레 카이쟈리스이교노 스이교마츠 운라이마츠 후라이마츠 쿠우 네루 토코로니 스무 토코로 야부라코지노…
하기와라 우시오: 씨발 이걸 어떻게 알아. 너 그 긴거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지?
나나시: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이바라 쿠리스: 아무튼 다 합치면 마라로제 가리가리군 츠마라나이… 어. 대충 비슷하게 들리기는 하는데.
나나시: 달라. 전혀 다르다고!
이름 없는 남자는 보기 드물게 격한 억울함을 토했다. 보다 못한 캐롤 브라이트가 그를 두둔하기도 했다.
캐롤 브라이트: 좋은 뜻으로 지어주셨을 이름으로 장난 치지 마세요. 여러분.
하기와라 우시오: 한 번에 이해를 못 했는데 어떡해 그럼! 아. 끝이 없다. 여기서 가장 귀 좋은 사람이 누구지?
카나리 케이토: …나야. 이래봬도 시계침이 지나가는 아주 작은 소리의 결함까지 들을 수 있는 사람이거든.
이바라 쿠리스: 오! 숨은 능력자? 그래서 나나시 본명을 너는 뭐라고 들었는데?
카나리 케이토: 그. 아마츠마라 카라쿠리누시 메이라는데…?
이바라 쿠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바라 쿠리스: 시계공도 실패했으니 이제 나나시의 이름 미스터리는 누가 풀어야 하는가…
카나리 케이토: 나. 나는 제대로 들었어! 무시하지 마! 진짜 제대로 들었다니까!
하기와라 우시오: 카이다 너는 뭐 염탐하고 미행하고 하려면 귀 좋아야 하지 않냐? 뭐라고 들었어?
카이다 쿠로하: 귀 먹었어? 츠마라나이라고 들었대도.
하기와라 우시오: 맞다. 너 상식 내다버린 년이었지. 그럼… 히무로밖에 없다! 히무로시라에몽! 나나시 본명 좀 얘기해 줘어어!
히무로 시라베: 나 또한 아마츠마라 카라쿠리누시 메이라고 들었다. 신의 이름을 세 번이나 담다니. 신관의 일족이었던 것인가?
카이다 쿠로하는 내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카이다 쿠로하: 신관? 그게 뭔데?
단어 차원에서 이해하지 못하니 나는 그녀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캐롤 브라이트: 신을 모시거나 신탁을 내리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야. 치나미.
카이다 쿠로하: …그럼 뭐가 좋은데?
하기와라 우시오: 무시하고 계속 얘기해 줘. 히무로. 신관 일족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캐롤 브라이트: 아마츠마라는 대장장이 신의 이름이거든요. 카라쿠리누시는 꼭두각시(カラクリ)에 신을 높여 부르는 존칭 누시(主)를 붙인 것이죠. 또 메이는 밝을 명(明)자가 아닌 목숨 명(命)자를 써요.
이바라 쿠리스: 목숨 명 자가 왜?
히무로 시라베: 음양사였다면 아베노 세이메이(安倍 晴明)와 같이 밝을 명자를 썼을 것이다. 목숨 명 자는 미코토(命)라고도 읽을 수 있는데. 이 또한 신의 이름에 곧잘 쓰이는 한자이다.
제츠보: 즉 나나시의 이름에는 신이라는 암시가 세 번 들어가 있다는 거야. 당돌하고 거창하지?
나나시: …듣고 보니까 조금 쑥스럽네.
이름 없는 남자가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는 와중. 이바라 쿠리스는 듣기가 그럴듯하다는 듯이 작은 감탄을 내뱉었다.
이바라 쿠리스: 오오오… 저렇게 이름 해설을 들으니 좀 멋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기와라 우시오: 그럼 앞으로 너도 저런 이름으로 불러줄게. 이바바리안 쿠리스마스.
이바라 쿠리스: 이야아. 듣기 좋은데? 하기아소피아박물관 우시와카마루?
카이다 쿠로하: 유치하다. 유치해. 어휴. 저 병신들. 언제까지 저러고 놀 생각이야. 저런 이름을 주고받으면 재미있나? 또라이들. 나한테 저런 이름 주면 아주 죽여버려야지.
하기와라 우시오: 응 그렇게 말해도 네 이름은 이미 병신같아서 손델 곳이 없죠?
하기와라 우시오가 카이다 쿠로하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카이다 쿠로하는 격하게 화를 내는 대신 아무 표정 없이. 천천히 하기와라 우시오에게 입을 열었다.
카이다 쿠로하: …네가 나중에 자손을 낳으면 그놈을 채썰어 죽여주마.
하기와라 우시오: 뭣.
카나리 케이토: 그런데 본명 아는 너희들은 왜 아직 저 녀석을 나나시라고 불러? 본명으로 불러도 되는 거 아니야?
캐롤 브라이트와 제츠보는 카나리 케이토의 물음에 제각각 다른 대답을 했다.
캐롤 브라이트: 이 탑에서는 나나시 씨라는 명칭이 조금 더 친숙하고… 어감도 나쁘지 않아서요. 어딘가 소외받아본 자들만의 동질감… 그런 것도 느끼고요.
제츠보: 과거의 아마츠마라 카라쿠리누시 메이와 지금의 나나시는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걸 확고히 하기 위해서.
카나리 케이토: 확고히 해? 왜 확고히 해?
제츠보: 과거의 아마츠마라 카라쿠리누시 메이는 나를 데이터 쪼가리라 불렀지만, 지금의 나나시는 나를 친구로써 존중해주거든.
카나리 케이토: 어… 그래. 많이 힘들었겠네.
그 이후로도 기억의 상영은 계속되었다. 서로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체험을 공유하는 것보다 의미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탑에 있는 자들이 죽은 이들을 이해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은 자들을 돌아보았다.
"그 괴물에게서 도망친 건 순전히 행운이었어. 너와 함께 계속할 순…"
"계속 도망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당신의 신변은 누구도 모르니까요. 내가 깨어난 뒤 부모님에게 연락했다면, 우린 어느 나라로도 도망칠 수 있었을 겁니다. 바다뱀의 조직이 와해된 이상 당신을 더 쫓을 사람도 없었을 테고요."
"난 어디까지고 당신이 도망칠 수 있게 도와줄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내가 아닌 복수를 선택했죠. 당신은 복수가 더 소중했던 겁니다. 당신 입으로 말하세요. 나는 복수가 더 소중했다고."
"네가 더 이상 나에게 엮이는 것을 바라지 않을 줄 알았어. 그런 일을 당했다면…"
"내가 당신을 싫어한다고 한들, 아무 말 없이 사라져 버리면 제가 후련하다고 느끼기라도 할 줄 알았습니까? 멍청했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그런 식으로 간단히 매듭짓고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요?"
카이다 쿠로하: 뭐야 씨발. 저것들이 왜 저렇게 서로 죽어 못 사는 거지?
캐롤 브라이트: 두 분은 각별한 사이였으니까. 친구 그 이상이었어…
히무로 시라베: 야가미 토가에게 있어 미도리카와 아쿠토는 목적이었다. 그것을 위해 살았고 그것을 위해 사람을 죽였다.
히무로 시라베: 야가미 토가는 선인이 아니었다. 지능적일 뿐이다. 사람을 죽이고도 죽지 않을 기회는 한 번밖에 오지 않을 테니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듣기 싫습니다. 아십니까? 당신은 나를 버린 게 아닙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저버린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따라갈 유일한 사람을. 당신 스스로 저버린 겁니다."
캐롤 브라이트: 하지만 대신 야가미 씨는 스스로를 죽였죠. 자신이 찾아 헤매던 무언가를…
카이다 쿠로하: 씨발 이해가 안 돼. 대체 뭐가 예쁘다고 저렇게 집착을 하지? 저년. 얼굴을 가리고 다녔잖아. 여자로서의 매력도 없고.
카나리 케이토: 세상에는 예쁘다 안 예쁘다의 이분법으로 정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 거야.
카이다 쿠로하: 뭐? 이 땅꼬마놈이 지금 나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나나시: 그냥 조용히 보면 안 될까. 얘들아.
카이다 쿠로하: 대체 뭐가 그렇게 소중하냐니까. 야! 이건 내 말이 맞지 않냐?! 얼굴도 몰라. 진짜 이름도 몰라. 어디에서 살았는지도 몰라. 사귄 것도 아니야. 몸을 섞은 것도 아니야. 심지어 영영 헤어져서 다시는 못 만나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냥 제 갈길 간다고!
카이다 쿠로하는 열변을 토했다. 야가미 토가의 행동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 그녀는 무던히 애쓰고 있었다.
카이다 쿠로하: 왜 몇 년 동안 저년 하나를 찾아다니냐고. 그것도 그나마 쓸만한 머리를 가진 저놈이! 저 정도 몸에 씨발 무슨. 뭐. 그 뭐냐. 말 잘하는 그 특기 있으면 혼자서도 존나 잘 살겠구만. 왜 헛수고를 했냐 이거야!
히무로 시라베: 왜 미도리카와 아쿠토를 그렇게 뒤쫓아야만 했는지는 야가미 토가만이 알 것이다. 누구도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그가 옳다고 생각한 일은 그 스스로에게만 옳은 일이었다. 그것뿐이다.
이바라 쿠리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
이바라 쿠리스는 중얼거렸다.
다음 인물들에 대한 기억은 내가 헬멧을 썼다.
"뭐냐."
"이거 하자고."
화면 속의 나이토 유즈루는 모리 레이코에게 밧줄을 들이밀었다.
"물에 대한 공포는 극복한 것 아니었나."
"밤이 되니까 다시 도졌어."
"뻔한 거짓말 마라. 이런 것으로 날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묶는 게 아니라 연결하는 거야."
나이토 유즈루는 모리 레이코의 팔에 밧줄을 묶었다. 모리 레이코는 그렇게 거부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럴 기력 자체가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게 이어진 이상. 우리는 동료야. 그리고 난 내 동료가 곤경에 처하면 절대 내버려 두지 않아."
카이다 쿠로하: 헉…
"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
"…네가 일찍 죽을 거라는 생각 따위는 접어두고 이겨내자고. 왜. 나빠?"
모리 레이코는 나이토 유즈루와 밧줄. 자신의 잘린 손가락을 번갈아서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다시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짓을 할 시간에 체력이나 보존해라. 공리를 증진시키는 꿈을 꾸도록."
"그게 마음대로 되겠냐?"
이바라 쿠리스: …어라라.
하기와라 우시오: 허. 저것들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친했잖아?
캐롤 브라이트: 이건 진짜 사귀는 것 같은데요?
이바라 쿠리스: 에이. 말도 안 돼! 모리와 나이토가? 아니아니아니. 말도 안 돼! 진짜로! 잠깐 해변에서 같이 지냈다고 해서 순식간에 그렇게 될리가…
카나리 케이토: 둘이 꽤 친한 친구가 됐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도 그랬을지는 잘 모르겠는데.
하기와라 우시오: 어? 잠깐. 나 생각나는 거 하나 있다! 히무로! 헬멧 줘 봐!
"그때 당시에는 그래야만 했다. 프로파일러는 당시에 신뢰할 수 없었다. 지금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지만, 당시에는 더했다. 몸수색을 해야만 했다. 탐사를 나간 이들이 습격당해선 안 되니까."
"중간부턴 내가 대신하긴 했지만 솔직히 보는 입장에선 깜짝 놀랐다니까. 생각해보니 얘 아주 상습범이야. 아침에 일어났는데 갑자기 내 방에도 쳐들어오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네가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인지 조사해야만 했으니. 그리고 전에도 말했다시피, 네 몸은 자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다."
카이다 쿠로하: 뭐. 뭐야. 저것들. 미친 거 아니야?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건데?
"아니 시발 둘이 진도를 어디까지…?"
"넌 지랄 마! 그리고 옷을 다 벗었는데 어떻게 자부심을 느껴!"
"왜 그렇게들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군. 거세라도 당했나? 몸을 내보이는 것이 부끄럽다는 발상은, 그 수치심은 학습의 결과일 뿐이다. 통제하기 좋도록 구성원들을 규범 안에 가둬놓고 태초의 두 벌거벗은 원시인과 뱀의 설화로 억압한 결과지."
"아니 그럼 매일 알몸으로 다니기라도 하라고?"
"그게 아니다. 만약 네 행동을 막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네가 할 일은 그 무언가를 부수는 일뿐이라는 것이지. 설령 그게 남근을 내보이는 일일지라도, 그래야만 한다면 저지를 강단이 네겐 필요하다."
"이 얘기 굳이 계속하셔야만 하나요?"
하기와라 우시오: 별다른 건 없고 의문이 하나 들어서 말인데. 연애가 공리 증진에 도움이 되면 모리는 연애를 했을까?
카이다 쿠로하: 지랄. 저 약해빠진 년이 연애는 무슨 연애. 턱도 없지. 그랬을리가 없어!
제츠보: 질투하지 마. 카이다. 네가 순수하게 비호감인 게 모리 탓은 아니잖아.
카이다 쿠로하: 이 씹새끼야. 개소리하지 마! 나도 마음만 먹으면 너희 자지 달린 새끼들 하나둘 정도야 우습게 해치워줄 수 있어!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 착한 말 써야지.
제츠보: 물리적으로 해치우려고 하니까 인기가 없는 거야.
카이다 쿠로하: 크악! 진짜 개소리 마! 나도 너희들 마음에 안 들어! 안 그래도 일곱명 밖에 없는데 다들 하나같이 하자가 있어서 마음에 안 든다고! 내 쪽에서도 너희같은 자지 새끼들은 사양이다. 하! 어디서 지들끼리 인기가 있네 없네. 질투를 하네 마네. 어이가 없다니까. 참나! 하! 하! 하!
카이다 쿠로하는 과장된 웃음을 지었다.
카이다 쿠로하: 애초에 씨발 왜 나한테 지랄들이야. 손병신은 사랑이 뭔지도 모를 애송이라는 얘기 하고 있었는데 왜 나한테로 튀냐고.
하기와라 우시오: 무슨 미친… 하아… 됐다.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자. 나는 모리가 연애를 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는 파. 간단하게 일 더하기 일은 이잖아. 이는 일보다 크다. 공리가 증진되는 것이다 어쩌고 저쩌고 했겠지.
나나시: 아닐 것 같은데… 모리는 남에게 엄격한 만큼 본인에게도 엄격한 사람이야. 자기 자신이 공리에 해가 된다고 판단하고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그러니 모리는 그 기준이 조금이라도 흐뜨러지거나 누군가에게 유리하게끔 기울어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이바라 쿠리스: 으에. 엄청 피곤하게 살았겠네… 걔는 자기가 어른인 줄 알았나 봐. 누가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왜 자기한테 그렇게 엄격해야만 했을까?
히무로 시라베: 자기 자신이 원해서 한 것이기에 엄격했을 테지.
캐롤 브라이트: …모리 씨는 행복했을까요?
나나시: 그래서 의문이 남는 거야… 왜 그 철혈의 모리가. 그 심지 굳고도 단호한 모리가. 죽기 직전에 나이토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던 걸까. 자살을 할 거라면 조용히 혼자 죽을 수도 있었는데. 나이토를 깨웠던 건…
히무로 시라베: 그에게 우정을 느꼈기에 증오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바라 쿠리스: 본능적으로 들 수밖에 없는 호의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려고 했단 말이야? 내가 얘랑 친해지면 공정한 판단이 안 되니까. 오히려 미워하려 애쓴다고? 진짜… 바보같네…
하기와라 우시오: …말 나온 김에 나이토 매드무비 한 번 볼 사람?
하기와라 우시오는 늘상 하던 일을 시도했다. 분위기의 전환.
"그렇지만…! 나이토를 이렇게 버리고 갈 순 없잖아!"
"버리고 가는 게 아니야. 온전히 싸울 수 있게 돕는 거지. 우리의 도움 없이도 나이토는 야가미를 이길 수 있어."
"정말?"
"정정할게. 나이토는 야가미를 이겨."
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화면 속의 나이토 유즈루와 야가미 토가는 서로 대치했다.
"썅… 결국 이 날이 오긴 오는구나."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당신과 싸우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것도 내가 할 말이야. 왜 갑자기 이러는지는 알고 싸울 수 없을까?"
"저를 쓰러트리고 나서 들으시죠. 진정한 기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넌 우리를 잡으려 들고. 난 너에게 맞서야 해. 그래야 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
"그럼 들어 와. 이 새끼야."
나이토 유즈루와 야가미 토가 사이의 격투는 교보재로 써도 손색이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기술과 강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다. 나이토 유즈루의 쪽이 조금 더 숙련되어 있었을 뿐 승부 자체는 호각을 그렸다.
나나시: …나 이 장면을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왜 그럴까?
캐롤 브라이트: 모니터실로 이동하고 나니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으니까요. 저희는 야가미 씨를 묶을 밧줄만 보냈죠.
카나리 케이토: …멋있네.
하기와라 우시오: 그치. 멋있지? 다시 봐도 멋있어. 듣기로는 나이토가 카이다랑도 얼추 싸움이 됐다던데. 이봐 거기. 나이토랑 맞붙어본 사람으로서 소감이 어땠어?
카이다 쿠로하: 뭐? 소. 소감? 그냥. 뭐야 이 새끼 진짜배기였잖아 정도였는데. 그리고 애초에 내가 이겼어. 발에 칼을 박아준 다음 약골년을 바다에 던졌지.
하기와라 우시오: 아오. 자랑이다 개년아. 또 너야? 생각해보니 네가 나이토 발 잘랐잖아. 눈 안 감아? 너는 나이토를 영상으로 볼 자격도 없다.
카이다 쿠로하: 으극…! 또 가만히 있던 나한테 지랄이야…!
카나리 케이토: 저것 봐. 승부가 났어!
카나리 케이토의 외침과 함께 탑에 있는 이들은 다시금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억… 허억… 하아…"
"미친 놈아… 지치지도 않냐? "
"제가 할 말입니다… 식사 대신 기름이라도 마십니까? 괴물이 따로 없군요…"
"그러니까 왜 모노로그의 거래를 받아들였냐. 이건 다 네 업보야."
"압니다… 그렇지만 해야만 했어요. 이길 수 없으리란 걸 알고 있음에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해야 하는 겁니다."
나는 야가미 토가의 말에서 그의 행적을 떠올렸다.
"…한숨 자 둬. 이 새끼야!"
"후욱… 후… 후우…"
"우아아아아아아악!!"
카나리 케이토: 우. 우와…
하기와라 우시오: 아! 이것보다 더 쩌는 순간이 있는데. 잠깐만 기다려. 나이토 쟤가 안 그래 보이는데 바다 공포증이 있었거든? 이거 봐봐.
"잘 봐 둬."
"스스로의 공포를 극복했나. 승부사?"
"바다가 무섭지 가재가 무섭냐. 그리고 발 정도 담그는 건 문제없어."
나이토 유즈루는 신발이 겨우 젖을 정도의 수위에 멈춰선 채 팔을 양옆으로 벌렸다.
"봐. 멀쩡하지!"
"퍽이나."
하기와라 우시오: 그런데 아까 카이다가 모리를 바다에 내던졌다고 했잖아. 나이토가 그걸 구하려고 수영을 했어.
제츠보: 하지만 물을 무서워한다며?
하기와라 우시오: 그러니까 대단한 거지. 그게 얼마나 멋있었을까… 우리가 두 번째 시련의 문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어. 그래서 못 보여주는 게 아쉽네.
카이다 쿠로하: 안 됐다. 안 됐어. 카하하하하!
이바라 쿠리스: 에휴… 쯧. 나이토 되게 멋있었을 텐데.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 쿠로하의 기억을 읽으면 되지 않나? 지켜보고 있었을 테니.
이바라 쿠리스는 내 말을 듣자 구기고 있던 표정을 순식간에 기대로 바꾸었다.
이바라 쿠리스: 오! 맞아! 히무로 너 머리 진짜 좋다! 카이다. 헬멧 착용해! 어서!
카이다 쿠로하: 뭐? 싫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니들이 원한다고 해서 내가 써줘야 하냐? 어이가 없는 새끼들이네.
캐롤 브라이트: 저도 보고 싶네요. 치나미. 한 번만 써 주면 안 될까?
카이다 쿠로하: …….
카이다 쿠로하는 숲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엄폐물로 가득찬 공간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크하하하하! 내가 이겼다! 내가 이겼어! 병신. 꼴 좀 봐라! 뛰어들어 봐. 응. 너 못 하잖아. 너 물이 무섭잖아!"
하기와라 우시오: 시작 대목부터 레전드다. 미친 또라이같은 년.
카이다 쿠로하: 안 닥치면 그냥 이 헬멧 벗어던지고 네 눈깔도 뽑아 버린다!
캐롤 브라이트: 그러지 마. 치나미.
카이다 쿠로하: …치.
"내가 이겼다. 내가 이겼다! 내가 이겼… 뭐. 뭐야. 뭐야. 저놈?"
카이다 쿠로하는 나이토 유즈루가 바다에 뛰어들어 모리 레이코를 향해 헤엄치는 것을 보았다.
"수영을 해…?"
카이다 쿠로하는 수영을 하지 못한다. 근섬유의 밀도가 물보다 높기 때문에 말 그대로 헤엄을 칠 수 없다. 그것은 카이다 본인의 의지와는 관련 없이. 그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이토 유즈루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의 공포를 극복했다. 아무튼 간에 그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녀만큼 강하지는 않을지라도 아무튼 나이토 유즈루는 사람이었던 덕분에 모리 레이코를 구출했다.
화면의 시점이 검게 변했다.
카이다 쿠로하는 눈을 질끈 감고 달린 것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뭐야. 왜 제대로 안 봤어? 분명 가재괴물이 나이토 덮치는 거 보고 깔깔거렸을 줄 알았는데.
히무로 시라베: 제대로 볼 수가 없었겠지. 스스로의 결점을 되새기는 일이 될 테니. 카이다 쿠로하는 본인이 나이토 유즈루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당연한 일이다.
카이다 쿠로하: 뭐? 내가 저놈보다 못해? 지랄하네. 지랄하네! 지랄하지 마! 이 개새끼야. 다들 까먹은 모양인데. 저놈은 나한테 졌어! 졌다고. 내가 너희들보다 못해 보여? 천만에. 저 맥주병이랑 일대일 결투는 내 승리야!
카이다 쿠로하는 헬멧을 벗어던졌다. 그녀는 그대로 화면 앞으로 달려가더니 스스로를 손가락질로 가리켰다.
카이다 쿠로하: 저놈은 너희들중에서 가장 센 놈이었지. 하지만 나한테 졌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해?! 내가 너희들보다 낫단 말이야! 내가… 내가 이겼다고! 날 무시하지 마. 죽여버리기 전에!
이바라 쿠리스: 아니. 나이토가 이긴 거야.
이바라 쿠리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따금씩만 나오는 진중한 모습이었다. 이바라 쿠리스가 가지고 있는 죽음을 향한 존중과 가치관은 그 자체만으로 무게가 되어 부처의 시선처럼 카이다 쿠로하를 짓눌렀다. 내면의 강함 앞에서 카이다 쿠로하는 물지 못할 울음소리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이바라 쿠리스: 네가 잊은 것 같은데. 나이토는 모리를 못본 척 할 수 있었어. 네가 바다에 모리를 던졌으니 모리가 익사하면 네가 검정이 돼. 그러면 모리의 희생으로 너를 피할 수 없는 처형대에 세워 놓을 수 있지. 그럼 네 죽음과 함께 해변에 있는 사람들은 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거야.
이바라 쿠리스: 하지만 나이토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 그걸 이해하고도 나이토는 모리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어. 바보들이나 이걸 패배라고 부르지. 모리를 살린 순간부터 나이토는 너 따위가 흠집도 낼 수 없는 위대한 승리를 이룬 거라고.
카이다 쿠로하: 지랄 마! 자위하고 있네. 너희들. 너희들은 다 병신이야! 못생긴… 바보들아! 병신들이랑 말 섞는 시간이 아깝네. 간다!
카이다 쿠로하는 바락바락 소리를 치며 씩씩거리더니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떠나 버렸다.
카이다 쿠로하: 나는 갈 거야. 이런 바보짓에 어울릴 시간이 없어! 아. 재미 없어. 시간 아깝다! 가야지!
캐롤 브라이트: 치. 치나미!
누가 말리지도 않았는데도 그녀는 크게 혼잣말을 했다. 어쩌면 그 선언은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위해 쓰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기와라 우시오: 쟤 왜 저래?… 라 하고 싶지만 우리 모두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가 아직 어린애 티를 못 벗긴 했죠… 죄송하지만 저 먼저 가 볼게요. 치나미랑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거든요.
제츠보: 카이다랑 붙어다녀야 하는 서글픈 나도 갈게.
나나시: 조심해야 해. 제츠보!
제츠보는 손을 작게 흔들고는 재빠르게 카이다 쿠로하의 뒤를 따라 달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의외로 캐롤을 안 따라갔다. 나나시? 저도 같이 갈게요 하고 따라나설 줄 알았는데.
나나시: 내가 캐롤 씨한테 코가 꿰인 줄 알아? 가족이랑 가족 사이의 일이니까 끼어들지 않는 게 나을 뿐이야. 또 카이다한테 조언을 해 주자니 나랑 걔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 발목을 잡아서… 안 가는 편이 나아.
이바라 쿠리스: 아. 맞아. 카이다가 너 납치했었지? 우와. 되게 미묘한 상황이네. 이거… 너를 납치한 사람이 캐롤 여동생이라니.
하기와라 우시오: 험한 일 안 당했냐? 제츠보는 네가 무슨 짓이라도 당했을 까봐 눈에 불을 켜던데. 야한 일 안 당했어?
나나시: 으. 제발! 더러운 소리 좀 하지 마!
이름 없는 남자는 메스꺼움을 느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바라 쿠리스: …나 나나시가 진심으로 역겨워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 정말 뭔 일을 당했으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했어. 하기와라!
하기와라 우시오: 미. 미안하다. 나나시. 세상에… 미안해. 정말 끔찍한 일이야.
나나시: 그만 둬! 진짜 내가 무슨 일 당한 것 같잖아?! 아무 일 없었어!… 욕이랑 살해 위협 몇 번 들은 게 전부야. 모노로그는 내가 영안로 안을 나아가길 바랐으니, 카이다는 나를 해칠 수 없었어. 내 나름대로 복수도 했고.
하기와라 우시오: 오. 네가?! 미쳤네. 하하하하! 어디 들어나 보자. 어떻게 복수했는데? 죽빵이라도 날렸어?
이름 없는 남자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나시: 그게 사실… 카이다 쪽에서 나를 죽이겠다 자꾸 협박을 하길래 참으며 같이 다녔거든. 그러다 우연치 않게 카이다의 기억을 전부 지워버릴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됐지. 그래서 지웠어. 몸이 마비되더니 어린아이처럼 울어대던걸?
하기와라 우시오는 면전에 미소를 띠다 말고 웃음기를 누그러뜨렸다. 이름 없는 남자는 뒤늦게 오해 말라는 양 손을 내저었다.
나나시: 머. 멀쩡히 나온 걸 보면 잘 안 통했던 거야! 그래도 나한테 성희롱도 하고 막 못살게 굴어 댔으니 이 정도면 비긴 거 아닐까?
이바라 쿠리스: 어… 그런 것 같아. 안 찾아가는 게 낫긴 하네. 무슨 좋은 소리 들으려고.
나나시: 제츠보가 카이다를 쫓아간 이상 카이다가 위험행동을 할 일도 없으니… 이젠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아. 이 광자 상영기도 그래. 모노로그가 준 것들 중에서 유일하게 부작용 없이 좋은 물건이잖아. 카텟 기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다 같이 공유할 수 있을 거야.
히무로 시라베: 네가 지금 안전하다고 생각하나?
이름 없는 남자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나시: 위험하지는 않잖아. 왜 그래. 히무로?
히무로 시라베: 나는 너를 총으로 쏘았다. 이름 없는 남자. 너를 죽일 뻔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너에게 그런 짓을 한 사람이 앞에 있는데도 마음을 놓을 수 있는가?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
참을 수 없는 만 분의 일의 순간이 내게 찾아왔다.
나나시: …그때 너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었으니까. 지금은 아니잖아.
히무로 시라베: 당시의 나의 정신은 온전치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지금은 온전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거지? 영안로에서 나왔으니 더 이상 너를 적대하지 않는다고 단정지었나?
나는 이름 없는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히무로 시라베: 너는 캐롤 브라이트만큼 강력하지는 않을지라도 정신조작을 보유하고 있다. 내가 이 자리에서 너를 제압하고자 한다면, 할 수 있다.
나를 보고 이바라 쿠리스는 고함을 내질렀다!
이바라 쿠리스: 어이! 히무로! 이게 무슨 짓이야! 협정도 맺어 놓고! 말해 두겠는데 겨우 카이다도 온순해지려는 때에 느닷없이 네가 그렇게 나오면…
하기와라 우시오: 이바라. 괜찮으니까 잠깐 두고 봐. 진짜 그래도 돼. 내가 장담할게.
이바라 쿠리스: 하지만…!
하기와라 우시오: 괜찮다니까? 자. 봐.
나나시: 하지만 안 할 거잖아.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나나시: 그건 너에게 있어 공정하지 않은 일일 테니까. 아까 협정을 맺었잖아. 그래놓고 몇 시간도 채 돼지 않아서 깨 버릴 수는 없지. 내가 너한테 잡혀가면 캐롤 씨는 너에게 협력하지 않을 거야.
히무로 시라베: 하지만 나는 그만큼 너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 나는 정신조작 보유자들을 향한 강박을 가지고 있다. 영안로의 세 번째 구역에 있던 물질의 영향은 없더라도 그 강박은 너희들을 향하고 있다.
나나시: …그러면 나는 네가 우리의 절제력에 기대듯이, 너의 절제력에 기댈 수밖에 없어. 살얼음 같은 평화지만 분명 평화잖아. 이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이야. 히무로. 그럼 이걸 지키려고 애쓸 수밖에 없잖아.
나 또한 그 불완전하고 연약한 대치 상태는 원하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탑이 딛고 있는 얼음판을 두껍게 만들고 싶었다. 허나 그러려면 남의 얼음집을 녹여야만 한다.
히무로 시라베: 내가 아는 것은 하나 뿐이다. 네가 나를 용서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 자리에 같이 앉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한 쪽이 피를 원하게 되면 반대편 또한 날붙이를 들 수밖에 없으니.
나나시: 그러면 너와 나 어느 쪽이라도 다치게 됐을 거야. 마유즈미안에 시라유키 히메리가 깃든 건… 미안해. 히무로.
히무로 시라베: 아니. 내가 그 순간 총을 쏘지만 않았더라도 그녀가 심연 속으로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의… 잘못이다.
나는 상심했다.
이름 없는 남자는 내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그 동작은 마유즈미가 나에게 했던 것만큼은 내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나에게는 구멍이 생겼고, 그 사이로 바람과 함께 내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나시: 마유즈미는 돌아올 거야. 반드시. 캐롤 씨가 그렇게 만들 수 있어.
히무로 시라베: 그래. 마유즈미는 반드시 돌아온다.
카나리 케이토: 잠깐. 너희들!
서로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던 나와 이름 없는 남자는 큰 소리를 내는 카나리 케이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카나리 케이토: 잠깐 기다려. 마지막으로 보여줄 게 있어.
하기와라 우시오: 뭔데? 설마. 네가 영안로에서 겪은 일?
카나리 케이토: 아니. 그것보다 중요할지도 모르는 거.
그리고 카나리 케이토가 헬멧을 착용하자, 화면에는 칸나즈키 시노부가 떠올랐다.
카나리 케이토: 이건 내가 칸나즈키 신체를 고쳐줬을 때… 사실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때 나눈 대화야.
"예지가 이제 돌아온 거야? 이제 우리는 어떻게 돼? 예지가 돌아왔으니 이제는 위협이 없겠지?"
화면 속의 칸나즈키 시노부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앞일은 안 읽으려고."
"왜?! 야. 미래를 읽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줄 알아?!"
"모리와 나이토 둘 중 한 명이 죽을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아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니야. 즐겁지도 않아."
"…뭐야. 생각해 보니 너는 왜 가끔씩 손해를 보는 거지? 미래를 알면 다 아는 거잖아. 둘 중에 하나가 죽을 줄 알았으면 그 있잖아. 나랑 후루미나미 나몬한테 맞설 필요도 없었던 거 아니야? 어차피 일이 틀릴 걸 알고 있었으면."
"내가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거든. 나는 지금도 감당할 수 없는… 뭔가를 알고 있어. 카나리. 내가 이해할 수도 없는 판을… 내가 바꿀 수 없는 어떤 움직임 속에 나는 하나의 역할 속 윤회에 갇혀 있는 거야."
"뭐라는 거야. 너? 허. 오락가락하는 거 보니까 수호령이 돌아왔다는 건 확실하네."
"내가 만약 죽는다면 그 죽음은 끔찍할 거야. 카나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
카나리 케이토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주. 죽긴 왜 죽어! 멍청아! 수호령 돌아왔으니 이제 끝났잖아! 누가 미쳤다고 너를 노리겠어?!"
"하지만 나는 언젠가 죽어. 그리고 나는 대대로 무당일을 하는 대신. 대대로 끔찍하게 죽는 운명을 타고났어. 멈출 수 없는 운명이지. 카나리. 우리 엄마가 어떻게 됐는지 들으면 너 오늘 잠 못 잔다?"
"재수 없는 소리 마! 그렇게 비관적으로 굴지 말란 말이야. 왜. 왜 그러는데!"
"놀라지 말라고 말해주는 거야. 네 고운 마음씨가 고마워서."
"고… 고맙다고?"
"응. 정말 고마워. 솔직히 네가 이만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일 줄은 몰랐어. 진짜 똑같이 만들어 줬잖아…"
그리고 칸나즈키 시노부는 카나리 케이토가 만든 인형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고마워. 카나리."
"흐… 흥! 그래! 고마워해야지! 내가 이래봬도 옛날에 인형도 많이 만들어 봤단 말이야. 돈 받고 파는 건데 너한테만 공짜로 주는 거야!"
카나리 케이토: 나는 아직도 걔가 했던 말의 절반 정도는 이해를 못 하겠어. 뭐라는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걔는 늘 시야가 미래랑 현재가 뒤죽박죽에. 뭔가를 바꾸고 싶었지만 바꿀 수 없어서 포기하고. 포기했음에도 또 도전하는…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더라.
카나리 케이토: 이제 막 친구가 된 것 같은데… 하. 바보같다. 수호령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으면 되는 일 아니었나? 그럼 내가 또 만들어줬을 텐데 말이야. 나 말고 친구가 또 누구 있다고… 미련하게… 아무튼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 보여준 거야… 잊지 말자고… 알겠지?
카나리 케이토는 무언가를 꿀꺽 삼켰다.
카나리 케이토: 이제 할 말이 떨어졌어. 나는 그만 돌아간다. 하아아아암. 하품 나와.
카나리 케이토는 하품을 가장한 숨소리를 인위적으로 내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바라 쿠리스: 카나리… 칸나즈키…… 하아…
이바라 쿠리스는 크고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어색한데 이거. 이렇게 우르르 다 떠나버리면 상영회가 무슨 의미냐.
그 시점에 남은 사람은 네 명 뿐이었다. 나, 하기와라 우시오, 이바라 쿠리스, 그리고 이름 없는 남자. 서로가 모르는 정보를 공유하는 절차 또한 서서히 막을 내렸다. 물론 아직 탑에 있는 이들은 알아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사람이 한번에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량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내일을 기약하는 편이 나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럼… 뭐… 이제 뭐 함? 뭔가 보여주고 싶은 거 있는 사람?
나나시: 점점 죽은 사람들의 기억을 되새기는 상영회가 되고 있는데… 히무로. 후루미나미의 마지막은 어땠어?
누군가 그녀를 부르기 무섭게 그녀는 나타났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 말해 줘. 히무로. 결투장 안에서 내가 너에게 보여준 장면을 저들에게도 보여 줘. 너 말고는 감당할 수 없는 지옥의 현현을!
히무로 시라베: 언급할 가치도 없다. 그녀는 이미 죽었다. 잊히도록 두는 편이 낫다.
나나시: 하기야 그것도 말이 되네… 지금까지 많이 고생했어. 히무로. 이제 후루미나미의 위협은 없을 테니까 마음 놓을 수 있겠다. 그렇지?
히무로 시라베: 그래… 분명 그렇다.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후루미나미 나몬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나를 보며 팔짱을 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저 형체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목을 붙잡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큭…! 우후… 히무로… 너… 내 목 잡는 게 좋지? 그런 거잖아…?
만질 수 있다. 잡을 수 있었다. 그녀는 실제로 존재했다. 다만 나에게만 존재할 뿐이었다. 정신병 중에서는 나쁜 부류에 걸렸다. 나에게 후루미나미 나몬의 존재는 현실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뒤 나는 나의 정신병을 놓아 주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큭! 콜록. 콜록. 케헥!
하기와라 우시오: 저거 왜 저래? 야. 마임 하냐?
히무로 시라베: …아무 일도 아니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게 아니야. 히무로. 너는 내가 보인다는 걸 실토해야 했어. 결투에서 내가 네 몸 안으로 들어갔다고, 내 일부가 암세포처럼 네 안에 들러붙어 있다는 걸 이야기해야 했어. 왜. 나를 품고 숨긴 채로 살아갈 수 있을까봐? 그게 너 혼자만의 비밀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았구나?
후루미나미 나몬은 혀를 날름거렸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렇게는 안 돼. 오. 안 되지. 히무로. 영원한 비밀은 없어. 결국 나는 최악의 순간에 네 곁에 있을 거야. 최악의 순간에 나타날 거라고! 내가 그럴 수 있을지 없을지. 내기할래? 내기하자. 하자고. 하자고!
카이다 쿠로하: 나 안 해. 용서 안 받아. 다 나를 못 죽여서 안달이잖아. 이 지랄은 다 의미 없어. 없다고!
카이다는 캐롤에게 모든 울분을 털어놓았다. 제츠보는 그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먼저 캐롤에게 양해는 구했다. 카이다가 카이다인 이상 자매 둘만의 시간은 줄 수 없다고. 캐롤은 납득했다. 따라서 이야기는 캐롤의 숙소에서 하되, 제츠보는 숙소의 문을 몸으로 막은 채 묵묵히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카이다 쿠로하: 분명 이런 식일 거라고 내가 말했잖아. 저 새끼들은 나와 언니를 엮으려고 해! 그래서 언니까지 치워 버리려고 한단 말이야!
캐롤 브라이트: 언니라고 불러주네. 기쁘다.
카이다 쿠로하: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아악! 이제 그만할래! 언니가 생각해도 내가 한 일들이 용서를 받을 만한 건 아니잖아? 그러니 이렇게 하자고. 언니는 그 창… 나나시랑 행복하게 살고. 나는 원래 살던대로 살고! 그게 언니한테나 나한테나 편하단 말이야!
캐롤 브라이트: 그러면 섭섭해할 거잖니? 정말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우리 잠깐 숨이나 돌릴까? 홍차 좋아해?
카이다 쿠로하: 내 말 좀 들어어어어어!
캐롤 브라이트: 과자도 있는데.
카이다 쿠로하: 과자 안 먹어!
캐롤 브라이트: 혹시 먹을지도 모르니까 전용실에서 가져올게. 기다려.
카이다 쿠로하: 안 먹는다고! 야!
제츠보는 캐롤이 밖으로 나갈 수 있게끔 몸을 살짝 움직였다. 그러자 캐롤은 카이다를 뒤로 하고 자신의 전용실로 떠났다. 다시 문 앞을 가로막은 제츠보는 아무 말 없이 카이다를 바라보았다.
카이다 쿠로하: 뭘 봐. 구경났어? 할 말이 있으면 해. 사람 답답하게 만들지 말고!
제츠보는 캐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캐롤이 카이다에게 부당한 취급을 당하는 걸 보면 제츠보마저도 그녀를 불쌍히 여기게 되었다. 왜 네 편을 들어주는 하나뿐인 사람에게 그렇게 모질게 대하느냐를 지적하고 싶었다만, 그건 카이다를 도와주는 일이니 관두기로 했다. 애초에 카이다 또한 제츠보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카이다 쿠로하: 내가 언니한테 잘못한 게 뭐 있는데! 아무것도 없어. 이딴 취급은 나 말고 다른 누가 받았어도 아주 화를 냈을 거야. 짜증이 날 수밖에 없지. 애초에 차가 아니라 그냥 물을 가져와도 나는 둘의 차이도 모르는데… 하지만 그냥 덥석 받아먹어야지… 생각해보니 그렇네. 나를 위해 가져오는 거잖아. 나 좋으라고. 그런데 거기다 대고 욕을 했어… 나 과자 좋아하잖아. 많이 가져다달라고 할 걸. 씨발. 괜히 짜증냈네. 왜 그랬지? 대체 나는 왜 이럴까? 왜 기껏 홍차랑 과자 가져다 주겠다는데 지랄을 하는 거야? 기분 안 상했겠지?
카이다는 제츠보의 대답을 기다렸다. 일부러 크게 중얼중얼대는 것은 카이다 본인의 버릇을 조금 과장한 것이었다. 카이다는 제츠보가 답답함을 못 견디고 어떤 조언이라도 좋으니 던져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제츠보는 카이다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따라서 카이다는 별 수 없이 혼자서 초조하게 다리를 덜덜 떨어댔다.
카이다 쿠로하: 나를 아껴주는 유일한 사람인데… 대체 어쩌려고 그렇게 한 거냐? 나한테 빈정이 상했으면 어떡해? 아아아. 제기랄.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또 나를 버릴리가 없어. 좆까. 좆까! 끄윽! 느으으으윽!
카이다는 온몸에 거미줄이 도포된 것처럼 외부 세계를 할퀴어서 자유를 얻고자 싸웠다. 맨몸으로도 그녀는 답답함을 느꼈다. 제츠보가 아닌 그 다른 누구가 보기에도 그 꼴은 발광으로 보였다.
카이다 쿠로하: 나를 남겨 뒀잖아. 이 깡통이랑! 핑계일지도 몰라. 이제 집어치우고 나가려는 거야. 하지만 숙소에 나를 남겨뒀어! 그러니 돌아오겠지? 달리 잘 곳이 없잖아. 있나? 아니야. 없어. 잠을 자려면 돌아올 수밖에 없으니 그건 아니야.
제츠보: 나나시 숙소가 있잖아. 앞으로는 거기서 지낼 수도 있지.
제츠보가 그런 말을 꺼낸 데에는 딱히 악의가 없었다. 그저 카이다가 너무 쉽게 합리화를 하고 있으니 그 위태위태한 젠가의 탑을 툭 손가락으로 쳐 본 것에 가까웠다. 그것은 지금껏 제츠보가 감내한 차별적 표현과 성희롱에 비하면 깜찍한 되갚음이었지만, 그 미약한 충격에 짤다막한 나무토막들은 와르르 무너져 바닥을 뒹굴었다.
카이다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카이다 쿠로하: 어어? 잠깐. 아니야! 아니라고! 이 좆같은 년아. 어디서 이간질이야! 너. 너 때문에! 진짜 그런 것 같잖아! 진짜 나한테서 질려버린 거면… 전부 내 잘못이야. 내가 왜 그랬지? 내가 왜 그랬을까? 나는 대체 뭐가 문제야? 왜… 씨발 먹여주는 걸 토하는 거야?
제츠보는 카이다가 그 정도로 내몰릴 줄은 몰랐다. 카이다가 가지고 있지 않아 남을 시샘하게 되는 요소는 가족, 과거, 사랑 등이 있었다. 그런데 캐롤은 그 셋 전부였다. 카이다에게 캐롤이라는 사람은 하룻밤 사이에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도가 되었다. 지옥 속에서 거미가 내려준 한 줄기 거미줄이었다.
캐롤은 카이다의 희망과도 같았다. 카이다는 자신이 캐롤을 그렇게 여기는 줄도 몰랐고 알더라도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사람이 못 되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카이다 쿠로하: 나는 왜 이렇지…? 왜 그냥… 사랑을 삼키지를 못하는 거지…?
왜냐하면 그녀가 그녀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들이 그녀를 싫어하는 것보다 그녀를 싫어했다. 그렇기에 남의 사랑이 가식적이고 거짓말이라 느꼈다. 아무리 기쁘더라도 그것이 거짓이고 상대가 그만큼 음험한 속내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두렵기에. 카이다는 캐롤을 시험했다. 일부러 집요하게 짜증을 돋구웠다. 만약 가짜라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속내를 보일 것이고 그럼 카이다의 승리가 되니까. 만약 진짜 사랑이라면 참아줄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이런 한심한 짓은 또 따로 없었다. 사랑을 주는 사람에게 유독 모질게 굴고 장난질을 치는 것은 몹쓸 짓이었다. 그런 자기방어기제는 카이다 특유의 반골 기질과 합쳐져 캐롤을 쿡쿡 찔러댔다. 이래도 버티냐며 인내심을 시험하는 꼴이었다. 카이다는 일련의 일을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행했는데, 이 행위의 유일한 맹점은 캐롤이 실제로 그녀를 아꼈지만 표독스러운 짓거리에 질려 버린 나머지 그녀를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간신히 그 발상에 다다른 카이다는 눈에 띄게 불안해졌다. 만약 그녀였다면 그녀를 떠났을 테니.
카이다 쿠로하: 왜… 왜 안 와?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이상한데…? 왜 일찌감치 안 오고… 무슨 일이라도 있나?
캐롤이 그녀의 숙소를 나간지는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물을 끓이는 데에만 해도 그 정도의 시간은 걸렸다. 게다가 다과까지 준비하자니 캐롤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만, 카이다는 그걸 몰랐다. 초조한 사람에게는 시간이 느리게 가는 법이다.
카이다는 그저 그녀 자신이 한 말을 문득 떠올렸다.
카이다 쿠로하: 그러니 이렇게 하자고. 언니는 그 창… 나나시랑 행복하게 살고. 나는 원래 살던대로 살고! 그게 언니한테나 나한테나 편하단 말이야!
카이다 쿠로하: 아니야…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닌데… 물론 좆같긴 해도 언니가 나를 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아. 아니야…
제츠보는 자신의 카메라 렌즈를 의심했다. 카이다는 어린아이처럼 불안해하고 있었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상대가 보이지 않아 진작 그녀를 버리고 집에 돌아간 건 아닐까 엉엉 울어대는 어린애의 꼴이었다.
설마 그딴 말을 진심으로 믿을리가 없잖아… 아닌가…? 언니랑 나나시는 같이 잤잖아. 그럼 어쩌면 결혼도 할 사이라는 거고… 내… 내가 둘 사이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한 거야? 내가 편하다고도 했으니까 그럼 그렇게 하자면서 나나시한테…
카이다는 문득 나나시가 괘씸해졌다. 그녀에게는 캐롤 말고 친한 사람이 없었다. 정말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진 나나시가, 그녀에게서 캐롤을 앗아가겠다는 말인가?
이런 개새끼!
가진 거 많으면서 내 거나 노리고 있는 음흉한 새끼!
카이다는 이를 득득 갈며 화를 토했다. 카이다는 원래부터 나나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껏 핑키라는 이름을 지어 줬는데 그걸 무시한 것부터 그 원한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언니를 앗아가려까지 해?
카이다 쿠로하: 이… 이놈을 죽여야겠어. 창놈 씹새끼! 가만히 안 놔둔다. 내 언니 돌려내!
제츠보: 무슨 소리야. 느닷없이… 나나시를 찾아간다고? 야. 설마 진심은 아니지?
제츠보가 한 발자국을 앞으로 디뎠다. 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겠다는 뜻이었다. 카이다 쿠로하는 성큼성큼 제츠보를 향해 다가갔다.
카이다 쿠로하: 비켜! 언니가 나를 떠나는 건 싫어. 나나시 그 새끼가 잘못한 거야! 그러니까 비키라고!
제츠보: 캐롤이 나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웬 호들갑이야? 캐롤은 너를 안 떠나! 떠날 거였으면 왜 공공연히 너를 감쌌겠어?
카이다 쿠로하: 안 믿어! 안 믿어! 비키라고! 언니이! 으아아아아악!
카이다는 고함을 지르며 제츠보를 향해 달려들었다. 제츠보는 당황한 채 카이다의 팔을 붙잡고 그녀를 훅 밀어냈다. 카이다는 성이 난 투우처럼 씩씩거리며 흉흉한 눈빛을 쏘아댔다.
제츠보: 나도 꾹꾹 담아두며 참고 있는데 감히 네가 언니를 빼앗기지 않겠다 운운이야? 그래. 어쩌면 캐롤이 정말 너를 버리고 떠났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화만 내고, 성질머리 더럽고, 충동적이라서 언제 날뛸지 모르는 인간이니까 떠날만도 해!
카이다는 제츠보의 말을 듣고서 씩씩거리기를 멈춘 뒤.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카이다 쿠로하: …하기야. 그런가…?
우울증이라도 걸린 것인지. 카이다의 정서는 아주 기이하게 불안정해졌다. 제츠보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다. 닥치라며 귀를 막고 달려올 줄만 알았던 카이다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카이다 쿠로하: ……나 같아도 그렇게 하겠지… 당연해. 당연해 …
캐롤 브라이트: 제츠보 씨. 들어갈게요.
제츠보: 하. 드디어 왔네. 한 숨 돌렸다.
카이다는 머리를 점점 숙이다 말고 들려오는 캐롤의 목소리에 고개를 홱 들어 문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지 확인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제츠보가 문 옆으로 자리를 옮기자 캐롤은 홍차를 끓인 포트와 함께 접시에 과자를 잔뜩 담아 돌아왔다. 허나 카이다는 그 과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지 않은 채. 캐롤에게로 다가갔다.
카이다 쿠로하: 어. 언니!
캐롤 브라이트: 무슨 일이야? 너 소리치는 걸 들은 것 같은데 또 제츠보 씨랑 말싸움 했니? 잠시 지나갈게. 짐이 좀 있어서.
카이다는 캐롤에게 할 말을 하지 못해 안달을 냈다. 캐롤은 기이하다는 인상을 받으며 테이블에 홍차 포트와 접시를 내려 놓았다.
캐롤 브라이트: 컵은 여기에 있어. 예전에 전용실에서 가져다 뒀거든. 그래서. 무슨 일이야?
카이다는 자신의 두 손을 모은 채 쌓여 있던 말을 토해냈다.
카이다 쿠로하: 내가 잘못했어. 나 반성 많이 했어. 나는 병신이야! 알잖아. 내가 귀찮게 구는 거. 내가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거야!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어! 언니. 그러니까 나 두고 가지 마. 응? 제발. 제발…
캐롤 브라이트: 뭐. 뭐? 치나미. 그게 무슨 말이야…? 이리 와.
캐롤은 당황의 기색을 애써 숨기고 카이다의 볼에 손을 대었다.
캐롤 브라이트: 왜 그래. 치나미? 그새 나쁜 꿈이라도 꿨니?
카이다 쿠로하: 나는… 언니가 내 말 듣고 그냥 나나시랑 같이 살려고 간 줄 알았어… 나만 혼자 두고…
캐롤 브라이트: 제츠보 씨 있었잖아.
제츠보: 이봐. 내가 쟤 보모야?
제츠보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캐롤은 고개를 저었다.
캐롤 브라이트: 그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치나미를 혼자 뒀다길래… 아무튼. 치나미. 언니는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 포기도 안 해. 아까 내가 보여 줬잖아? 우리한테는 서로밖에 없어.
카이다 쿠로하: 아니잖아… 언니한테는 나나시가 있잖아…
캐롤은 카이다의 말을 듣고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캐롤 브라이트: 푸흐흐… 아. 미안. 치나미. 그렇지만 언니가 오늘 말했잖아. 언니도 연애는 하고 살아야지. 너도 좋은 분 하나 만나 봐.
카이다 쿠로하: 미. 미쳤어?! 내가 왜?!
카이다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다가 다음 순간 헉 숨을 들이쉬었다.
카이다 쿠로하: 미. 미안. 소리를 지르려는 건 아니었어. 그냥 내가 버릇이 이렇게 들어서…
캐롤 브라이트: 그래도!
캐롤은 웃으며 카이다의 말을 끊고 소리쳤다.
캐롤 브라이트: 너도! 연애는 한 번! 해봐야! 하지! 않겠니?!
캐롤은 자신의 입 앞에 두 손을 모아 고깔을 만들고서 소리가 크게 울리게끔 했다. 말이 끝난 뒤에는 고깔을 풀며 키득거리기도 했다.
캐롤 브라이트: 아. 따라해봤는데 되게 재밌다. 치나미. 걱정 마. 타박 안 해. 자매가 싸울 수도 있는 거지. 화해만 제 때 제 때 하면 서로 사이 나빠질 일도 없잖아. 그러니까 화 내도 돼. 네 성질머리 내가 안 받아주면 다른 사람이 뒤집어써야 하니까.
카이다 쿠로하: …그치만 언니한테만큼은 지랄하기 싫단 말이야.
캐롤 브라이트: 왜?
카이다 쿠로하: 혹시 상처라도 받으면 어떻게 해. 그건 싫어. 그러니 안 그럴 거야.
캐롤 브라이트: 나는 치나미가 다른 사람에게도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카이다는 눈을 잠깐 표독스럽게 뜨려다가 아주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카이다 쿠로하: …그럼 뭐 참아 볼게.
캐롤 브라이트: 어휴. 예뻐라.
캐롤이 카이다의 머리로 손을 뻗자 카이다는 웃어른에게 인사를 하는 것처럼 머리를 숙여. 더욱 효과적으로 쓰다듬을 받았다. 카이다는 천천히 인정하고 있었다. 가족은 좋은 것이라고.
캐롤 브라이트: 이제 홍차 마시자. 사실 상영회 하던 중간에 내 전용실에 들러서 차를 우리고 있었거든? 자. 다 우려진 홍차야. 마시기만 하면 돼.
카이다와 캐롤은 그리고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멋들어진 잔에 깊은 색의 홍차가 서서히 차올랐다. 카이다는 자신의 몫으로 올라온 잔을 요리 들여다보고 저리 들어다보며 냄새를 맡거나 째려봤다.
카이다 쿠로하: 이걸 그냥 마시면 된다고?
캐롤 브라이트: 그래. 마시면 돼.
카이다는 손잡이가 아니라 잔의 몸을 붙잡았다. 하지만 뜨거움은 별반 느끼지도 못했다. 카이다는 잔 안에 든 것이 독약이라도 되는 듯이 야금야금. 방울 단위로 자신의 입에 홍차를 머금었다. 그러자 카이다는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자극을 느꼈다. 인식할 수만 있는 정도의 씁쓸함. 깊은 향. 마치. 은은하고 찐한 뭔가가 막 안에서 오르는 듯한…
캐롤 브라이트: 어때?
카이다 쿠로하: 뭐야… 괜찮잖아…?
카이다는 다른 이들이 삶의 낙이라 부르는 것들을 대부분 느끼지 못했다. 즐거움을 제거해야만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리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다만 후각만은 온전하다 못해 더욱 민감할 정도로 남아 있었다.
간단했다. 후각은 있는 편이, 오히려 강력하거나 다양한 편이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를 추적해 살해하는 일에 있어 후각의 민감성은 이점이 되었다. 그래서 카이다는 홍차의 향긋한 내음을 다른 이들보다, 심지어 홍차에 조예가 깊은 캐롤보다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카이다는 그 음료가 즐겁다는 판단이 서자마자 홍차 잔을 망설임 없이 후루룩 꺾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인내심을 가지고 후후 불어야 겨우 입술에 댈 수 있을 고온이었지만, 카이다에게는 문제 없는 수준의 온도였다.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 조심조심 마셔야지! 입천장 안 데었어?
카이다 쿠로하: 괜찮아. 한 잔 더 마시기나 할래.
카이다는 포트를 잡고 잔이 넘칠락 말락할 정도의 높이까지 홍차를 따랐다. 캐롤은 다시금 홍차를 들이킬 준비를 하는 카이다를 보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캐롤 브라이트: 천천히 마셔… 언니 걱정돼.
카이다 쿠로하: 알겠어. 알겠다고. 치.
카이다는 속도는 천천히, 하지만 여전히 인내심 없이 홍차를 쭉 들이키려고 했다. 야만인이 적장의 해골에 담은 술을 마시듯이 홍차잔을 들어올린 카이다는, 탁자의 반대편에서 우아하게 컵에 손을 받쳐 마시는 캐롤의 움직임을 어설프게 따라해 보기도 했다. 순수하게 언니를 향한 동경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제츠보 씨도 함께 하시겠어요?
캐롤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려 여전히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제츠보를 보았다. 카이다는 샐쭉 입술을 내밀었다. 이 오붓한 자매 사이에 저게 끼어든다는 것 자체가 카이다에게는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언니는 예의상 권하는 거겠지만.
제츠보: 나는 음식물을 먹을 필요가 없어.
캐롤 브라이트: 드실 수는 있는 거죠?
제츠보: 바이오매스 형태로 소화시킬 수 있기는 하지. 단지 필요가 없다는 거야.
캐롤 브라이트: 그럼 같이 앉아요. 제츠보 씨 혼자 일하는 건 좀 그렇잖아요? 치나미를 바로 옆에서 감시할 수 있기도 하고요.
제츠보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어떻게든 그 권유를 피하려고 했다. 캐롤은 아무래도 제츠보에게 있어 껄끄러운 존재였다. 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절친의 연인이다. 제츠보와는 달리 살을 가진 채 부활해버려서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도 겪지 않는. 걸어다니는 불합리였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그러나 제츠보는 캐롤이 되살아난 것이 탑이나 나나시에게 있어 더 나은 일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것 뿐이니 거기를 둬야 한다… 라고 생각하던 찰나. 제츠보는 카이다의 화가 잔뜩 난 표정을 보았다.
캐롤도 마음에 안 들고, 카이다는 싫다. 캐롤은 내 동석을 원하고, 카이다는 원하지 않는다. 이걸 어쩔까? 누굴 열받게 하는 게 더 고소할까?
제츠보는 두 사람을 한 번 번갈아서 보고는, 씨익 웃으며 테이블을 향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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