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무로 시라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이. 보고 싶었다던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던가. 그런 말은 한마디도 안 해?
히무로 시라베: 질문에 대답해라. 너는 메리가 아니다. 너는 메리가… 하지 않았을 일만을 하고 있다. 너는 이른바 메리의 정반대 면을 가진 쌍둥이와도 같다.
그것은 시뻘건 육고기를 뜯는 채식주의자를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 같은 사람이라고 느껴졌지만 하는 행동은 정반대인 자. 하지 않을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
마유즈미의 몸에 들어간 메리는. 내 말을 듣고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사실 꽤 정확한 표현이야. 시라베. 역시 네 직관은 무섭다니까. 한 발자국씩 밟아서 가까워지는 논리 전개보다도 그냥 몇 척을 겅중 뛰는 직감이 사냥감에게 있어서는 더 무서운 법이지.
히무로 시라베: 너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여기에 있지? 그리고 왜 하필 마유즈미냐.
마유즈미 나데시코: 왜. 얘의 자아를 꺼내 오고 싶어? 아쉽지만 그건 안 돼. 내가 깊이 가라앉혀 놨거든. 이 몸은 내 거야.
히무로 시라베: 그 몸은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것이다. 네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메리는 천천히 발을 옮겨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두 눈을 마주했다. 나는 마유즈미의 눈동자가 본래의 장밋빛 색이 아니라 검은색으로 변한 것을 보았다. 소위 언니의 인격이 출현할 때의 징조. 아니. 애초에 언니가 아닌 그녀는 메리였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보던 와중. 이윽고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내가 살기를 원하지 않았어. 시라베? 얘랑 얼마나 오래 만났다고 얘 목숨을 나보다 중요하게 여겨?
히무로 시라베: 물론 나는 너의 생존을 원했다. 그러나 그게 다른 이의 몸을 빼앗아서 이루어진 생존이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히무로 시라베: 다시 묻겠다.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마. 시라베. 내가 마유즈미보다 더 잘할 수 있어. 앞으로 다가올 싸움에서는 내가 더 도움이 될 거야.
메리는 그렇게 자신이 할 말이 끝나자 나를 지나쳐 하늘하늘 걸어갔다.
히무로 시라베: 서라.
마유즈미 나데시코: 싫어. 피곤하거든. 그보다 나 말고 다른 골칫거리를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다른 골칫거리? 내가 반문하기 전 메리는 대답했다. 내가 듣고 싶지 않았던 대답을.
마유즈미 나데시코: 정신조작이 오고 있어. 시라베. 우리가 그들에 맞설 유일한 희망이야.
기어이 그녀가 재림한 것이다.
캐롤 씨를 겨우 진정시킨 뒤. 나는 훌쩍이는 소리를 내는 캐롤 씨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캐롤 브라이트: 죽는 거… 두 번은 못할 일이에요. 며칠이 지난 거죠?
나나시: …잘 모르겠어요. 영안로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모호했거든요. 탑에서는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을 거예요.
캐롤 브라이트: 당신. 거의 죽을 뻔했어요. 제가 당신 이름을 몰랐다면 정말 죽었을 거예요.
캐롤 브라이트: 겨우 다시 만났는데… 헤어질 뻔했어요. 당신만 남고 헤어졌는데 이번에는 저만 남을 뻔했어요. 나나시 씨. 당신이 살아서 얼마나 기쁜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캐롤 씨는 서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내게로 가까워졌다. 우리는 말 한마디 없이 무언가를 느꼈다. 나는 숨을 죽였고, 어떠한 열망을 양쪽 모두 가지고 있음을 감지한 뒤에…
카이다 쿠로하: 야! 나 왔어! 왔다고! 아직 안 죽었지?!
전혀 달갑지 않은 재회를 했다.
나나시: …제기랄. 또 너야?
카이다 쿠로하: 차. 창놈!
계단을 오르고 캐롤 씨에게 가까워지려던 카이다는. 그 자리에 끼익 소리를 내며 멈췄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지긋지긋했다. 어떻게 영안로에서 살아온 거지? 하는 물음을 뒤로 하고 나는 입을 열었다. 곧장 기억을 지워 버리려 했으나, 나는 카이다의 손에 구급상자가 들려있는 것을 보았다.
카이다 쿠로하: 외. 외치지 마! 외치지 말라고! 그만! 하지 마!
얼마 전까지 나를 죽이겠다. 영안로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죽여버리겠다. 내장을 파헤치겠다며 으름장을 놓던 사람은 잔뜩 겁을 먹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 모습이 너무 진짜 같아서. 나는 잠시 주저하고 말았다.
물론 주저한 것은 아주 잠시 뿐이었다.
나나시: 처음부터 다시…
그러나 내가 입을 움직이는 속도보다. 카이다의 손이 더 빨랐다.
카이다 쿠로하: 흐아아아아악! 아. 안 들린다. 안 들린다! 랄랄랄랄랄랄라. 응 안 들려. 안 들려! 랄랄랄랄라. 몰라. 몰라. 어쩌구저쩌구. 몰라!
입이 더 빠르기도 했다. 카이다는 제 손을 귀에 대고는 꽉 짓눌렀고 그 와중에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내 정신에 옹알이의 장벽을 세웠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머리카락을 다시 꺼냈다. 곁눈질해 보니 검은색은 온데간데없는. 다시 금색을 되찾은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 물론 캐롤 씨는 힘의 원본을 가지고 있는 이상 나보다 강하고, 사실 지켜줄 필요도 없을지 몰랐지만 나는 그녀가 다시 다치거나 죽는 경우는 볼 생각이 없었다.
카이다가 놓친 구급상자가 바닥에 깡 떨어지는 와중에. 나는 카이다와 그렇게 대치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카이다에게는 싸울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기억 소거의 절차가 큰 트라우마가 된 것처럼. 카이다는 다가오기는커녕 불안을 얼굴에 처바른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치나… 아니. 카이다 씨는 저희 적이 아니에요.
터치의 전음이 아닌 목소리로. 캐롤 씨는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섣불리 믿을 수 없었다.
나나시: 당신이 모르는 게 있어. 저 여자는 당신을 초고교론자들한테 팔아넘겼어요. 제가 똑똑히 봤다고요.
카이다는 나와 캐롤 씨가 나누는 대화를 듣지 못했기에. 귀를 막은 채 우리의 눈치만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카이다는 바닥에 떨어진 구급상자를 발로 툭툭 건드리며 앞으로 밀었다. 그러다 과감하게 뻥 차서 그것을 나에게 가까운 위치로 옮기기도 했다.
카이다 쿠로하: 사. 상처 지혈하려고 가져온 거야! 우린 적이 아니라고. 적어도 이젠 아니야! 이 새끼야… 좀 믿어!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카이다 말고 저를 믿어주세요.
캐롤 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그녀를 보았다. 어쭙잖게 천으로 감싸 놓은 캐롤 씨의 절단상. 여전히 지혈이 되었을 뿐 근본적인 응급저치는 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 또한 고통이 가득했다.
옥신각신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카이다가 아니라 캐롤 씨를 믿었다. 구급상자에서 소독약. 붕대. 거즈를 꺼내고 있자니 카이다 또한 후다닥 달려와 나를 거들었다. 이딴 여자랑 뭔가를 같이 하는 일이 영안로 밖에서도 있을 줄은 몰랐다. 나를 회쳐 놓겠다고 벼르던 그 악의는 어디에 갔을까? 머리가 나빠서 다 까먹었나?
카이다 쿠로하: 처치는 내가 할 테니까 너는 옆에서 거들기만 해. 창놈… 아니. 나나시!
나나시: 너 사람 고칠 줄은 알아?
카이다 쿠로하: 당연히 할 줄 알지. 고문을 하면서 죽지 않게끔 조절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나는 그녀가 전혀 미덥지 않았다. 그녀는 죽이는 일에만 특화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인지 카이다의 손길은 조심스럽고 또 정성이 담겨 있었다. 그걸 보며 나는 캐롤 씨와 카이다가 가까운 사이였을 가능성을 문득 다시 떠올렸다.
대체 그들이 어떤 사이였는지는 모르겠다만, 문득 앞으로 카이다의 얼굴을 자주 보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주 불길한 기분이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설마 마유즈미가 살아 돌아왔나?
하기와라 우시오와 제츠보는 느닷없이 달려 나간 히무로 시라베를 쫓았다. 하기와라가 마유즈미의 부활이라는 추측을 한 이유는 히무로가 다이얼로그로 전화를 받은 직후에 움직였기 때문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어휴. 다행이다 씨발! 나는 하루아침에 다섯 명씩이나 죽은 줄 알았어! 햐아!
제츠보: 발신인이 마유즈미였다는 거야? 그렇다면. 혹시…
제츠보는 금속 다리를 철컥이는 와중 요령 좋게 다이얼로그의 다이얼을 돌렸다. 0. 0. 1. 7.
신호가 갔다.
제츠보: 나나시! 살아있어! 영안로 밖으로 나온 거야!
제츠보는 순간 자신의 입을 움켜쥐었다. 신에게 감사하고 싶은 예상치 못한 행운 앞에서 제츠보는 아주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돌아왔다. 돌아왔다. 세상과 연결시켜 주는 단 하나의 끈이.
하기와라 우시오: 뭐야. 나나시도 살았어?! 잘 됐다. 야! 이제 걔랑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어! 살아있는 놈이 승자인 거지 뭐!
제츠보: 엿이나 먹어. 하기와라! 나나시 앞에서 그런 이야기 꺼내면 죽여버릴 거야!
제츠보의 말은 살벌하였으나 어조 자체는 한껏 친근하며 기쁨에 차 있었다. 결국 좋은 소식뿐이었으니까. 게다가 제츠보가 건 전화는 연결되기까지 했던 것이다.
나나시: 23T. 나 걱정하지 마. 나 살아있어.
23T. 나나시는 제츠보를 23T라 불렀다. 제츠보는 순간 몸을 움찔 떨었지만, 그가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미치자 그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떠올릴 가치가 없는 사건 하나하나는 그렇게 휘발된다. 제츠보는 그러고자 한다면 아무것도 담아두지 않을 수 있다.
제츠보: 어디야. 나나시? 나는… 우리는. 네가 영락없이 죽은 줄 알았어. 영안로 안에서 나오지 못하게 된 줄 알았어…! 카이다에게 납치당한 뒤로 영영 못 봤잖아…
나나시: 죽기 직전에 겨우 살았지… 휴우.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23T. 지금 어디야? 우리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어. 그런데 너 목소리가 묘하게 달라졌다?
하기와라 우시오: 계속 내려와! 우린 계속 올라갈라니까!
제츠보는 하기와라의 말에 묻고 싶은 내용을 묻지 못했다. 제츠보는 나나시의 표현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우리? 우리야 나와 하기와라가 함께 움직이고 있는 거지만. 너는 누구와 움직이고 있는 거야?
그리고 머지않아 제츠보와 하기와라는 나나시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마주쳤다. 하기와라는 비명을 지르며 제츠보의 뒤에 몸을 숨겼고, 제츠보는 목표물을 향해 가속했다.
제츠보: 카이다…!
카이다 쿠로하: 뭐야. 너는 누구셔… 어어어? 야. 이런 씹!
카이다는 계단 중간에서 마주친 새로운 얼굴에게 의아해하던 와중. 그녀를 잡으려고 드는 손아귀를 이리저리 피해야 했다. 이전까지의 카이다였다면 사실 별반 위협은 되지 않을 맞닥뜨림이었다. 그냥 냅다 창문으로 뛰어내리던가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었으니.
하지만 카이다의 등 뒤에는 일단 협력할 사람이 있었다. 그렇기에 카이다는 그녀를 향해 빠른 속도로 쇄도하는 팔을 쳐내고 피해 가며 계단을 뒷걸음질 쳐 점점 오르기 시작했다.
카이다 쿠로하: 씨발. 갑자기 왜 지랄이야!
제츠보: 너 뭐야? 나나시는 어디에 있어! 네가 훔쳐 갔잖아. 나나시 어디 있냐고!
하기와라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뱉었다. 왜 하필 쟤까지 되살아났지? 솔직히 이렇게 싸울 바에 그냥 죽어주는 게 나은 유일한 사람인데. 애초에 같이 내려온다던 나나시는 어디에 가고 카이다가 있어?
그리고 하기와라의 의문은 곧 예상치 못했던 누군가의 목소리로 인해 해소되었다.
"싸우지 마. 치나미! 그냥 잡혀 줘!"
카이다 쿠로하: 뭐어?! 정신 나갔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이런 세상에. 하기와라와 제츠보는 눈을 크게 뜨고 나선 계단 위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를 바라보았다.
캐롤 브라이트: 괜찮아! 아무도 너를 다치게 두지 않을게. 정말이야!
캐롤 브라이트. 분명 죽었던 사람이 살아서 돌아왔다. 영안로는 실제로 사람을 부활시켰다. 그 충격은 나나시와 카이다의 귀환에 비견될 바가 아니었다. 둘은 영안로에 잠깐 들어갔을 뿐 본래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캐롤은. 죽었다. 나나시가 직접 죽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살아 있었다. 그 옆에는 나나시도 함께였다.
나나시: 나 여기 있어. 23T! 어? 얼굴을 되찾았어?!
잠깐 둔하게 움직이던 제츠보는 자신만큼이나 넓게 벌어진 카이다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제츠보는 자신의 손을 뻗어. 손가락을 카이다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우고 주먹을 꽉 쥐었다. 당하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 그 악력에 카이다는 악 비명을 내질렀다.
카이다 쿠로하: 크아아아악! 왜 이래! 이 새끼야! 나나시 돌아왔잖아!
이전보다 확연히 약해졌을지언정 그 힘은 카이다와 엇비슷했다. 적어도 저항하는 카이다와 씨름할 정도는 되었다. 계단 사이에서 날뛰던 둘은 서로를 잡은 채 교착 상태에 놓였다.
하기와라 우시오: 살려 왔구나. 캐롤이 살았어! 이런 씨발 믿고 있었다고! 미친. 그런데 이게 진짜 돼?! 캐롤. 뭐 이상한 점 없어?
캐롤 브라이트: 이거 말곤 없네요.
캐롤은 계단을 천천히 내려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사라진 가운뎃 손가락을 보여 주었다. 붕대로 감싼. 그리고 붕대의 흰색에 붉은색이 배어있는.
제츠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캐롤 브라이트: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봉합할 수는 없는지라 그냥 응급처치를 했죠… 여러분. 이번에는 어떤 분이 희생되신 건가요?
캐롤은 의도적으로 말을 돌렸다. 누구도 그건 눈치채지 못했다. 손가락의 절단은 분명 큰일이었지만 그건 살아있는 사람의 부상이어야 큰일이었다. 죽은 사람이 돌아왔으니 손가락의 절단은 비교적 사소한 일이 되는 것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칸나즈키와 야가미가 죽었어. 후루미나미가 검정이라 처형당했고.
나나시: …세 명이나 죽은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야가미가 후루미나미를 검정으로 만드려고 칸나즈키를 죽였고, 야가미는 후루미나미한테 독살을 당했어.
캐롤 브라이트: …그랬군요.
잠시 엄숙해진 시간 속에서 카이다 쿠로하는 고함을 내질렀다.
카이다 쿠로하: 이거 놓지 못해! 누구인지는 몰라도 너 죽여버릴 거야! 왜 지랄인데 진짜! 처음 보는 새끼들이 왜 매번…
제츠보: 너 바보냐? 얘는 어떻게 나를 못 알아보지? 방금 캐롤이랑 나나시가 나를 부르기까지 했잖아!
카이다 쿠로하: 뭬?!
카이다는 본래 전투를 할 때면 과다분비된 아드레날린 때문에 사소한 주변 환경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이 23T를 부르는 것을 듣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카이다가 아무리 천치일지언정 사람 모습을 한 기계가 자신에게 싸움을 걸고 그 기계가 자신과 구면인 것처럼 군다면, 그 정체를 깨달을 정도의 지능은 가지고 있었다.
나나시: …23T. 얼굴을 되찾은 거 말이야. 잘 됐어. 너라면 좋아할 것 같은데. 기분이 어때?
제츠보: 그래. 이제 좀 마음에 들어. 호칭 문제는… 나중에 정리하자.
카이다 쿠로하: 뭐야. 진짜 너냐?! 못 알아보겠네 진짜. 이 씨발 그건 됐고 빨리 놓으라고! 아악! 놓으라고!
캐롤 브라이트: 23T 씨. 카이다를 놓아주시면 안 될까요? 이런 계단 위에서 계속 이야기하기는 불편하잖아요.
하기와라는 그쯤 왜 캐롤이 은근히 카이다를 싸고도는지, 그리고 왜 카이다에게만 존대를 안 하고 한 번 부른 호칭인 치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뭔가 뒤가 구렸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제츠보는 하필 캐롤이 부활했다는 점에 낭패를 금치 못했다. 탑에서 제일가는 위험인물이 있다면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캐롤이었다. 캐롤의 성품이나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라, 선함에 치우친 성향을 고려하더라도 그녀가 가장 위험하다는 뜻이다.
게다가…
하기와라 우시오: 캐롤. 지금까지 카이다가 한 짓을 놓고 보면 도무지 놓아줄 수가 없어. 얘가 나이토 발 자르고 모리를 아작내 놓은 거. 기억 안 나? 그거 때문에 둘이 감염에 걸려서 시한부 인생 살다가 모리가 나이토를 죽였어. 얘가. 너를 죽인 거야.
카이다는 하기와라의 말에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렇지만 변명은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제츠보: 카이다가 무슨 일을 겪었든 간에 우린 카이다가 했던 일을 그냥 넘겨버릴 수 없어. 캐롤. 지금껏 카이다가 없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고난이 얼마나 많았는데!
나나시: 하기와라. 23T. 맞는 말이야. 카이다를 놓아줄 수는 없어. 짐승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니 일단 잡아둔 채로 이야기를 하는 게 낫겠지.
하기와라 우시오: 나나시. 새삼스럽지만 반갑다! 우린 진짜 네가 죽은 줄 알았어… 근데 카이다 쟤는 좀. 어딘가 상해서 돌아왔으면 좋았을 걸.
제츠보: 카이다. 내려와. 여기서 네 손을 안 부수는 거로 다행인 줄 알아.
카이다 쿠로하: 씹년…
카이다는 제츠보의 눈에 침을 퉤 뱉었다. 제츠보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지만, 사실 그 안구에는 이물질이 들어가도 상관이 없었다. 기계인지라 제츠보의 내장 카메라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카이다는 곧 자신의 타액이 제츠보의 눈을 타고 흐르는 걸 볼 수 있었다.
제츠보: 부숴 달라는 거지. 이거?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 그러면 못 쓰지. 어서 사과하지 못해!
쏘아붙이는 듯한 캐롤의 어조는 다른 이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그것은 카이다에게 더더욱 낯설었다. 카이다는 이제껏 자신을 친근하게 대해주는 이에게 꾸중을 들은 적이 없었다. 애초에 친근한 자도 없었다.
카이다 쿠로하: 그… 그치만 저 새끼들이 먼저 나한테 지랄했다고!
캐롤 브라이트: 사과해. 어서!
캐롤은 어조를 높이는 일이 드물었다. 보통 그녀가 말을 하면 그것은 남을 신경 쓰이게 하지 않을 정도의 데시벨로 조곤조곤 말하는 것이었고, 놀라거나 소리를 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다른 사람의 귓전을 울릴 정도의 세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캐롤이 카이다에게 혼을 낼 때의 말은 그 소리가 크지 않더라도 듣는 이를 찌르는 뾰족함을 가지고 있었다.
놀라운 일은 카이다가 정말 그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카이다 쿠로하: 아… 알았다고… 미… 미안하니까 이거 놔. 미… 친년아…
제츠보: 안 놓을 거라니까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카이다 쿠로하: 야아아아악!
다시금 노발대발 소리를 지르는 카이다를 계단 밑으로 서서히 이끈 후에. 그들은 5층에 모였다. 하기와라와 제츠보는 누구 할 것 없이 되살아난 캐롤을. 정말 온전하게 되살아나서 죽은 적이 있었나 착각이 들 정도의 캐롤을 지켜보았다.
나나시: 자. 캐롤 씨가 되살아났어! 환각이나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캐롤 브라이트: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예요. 제인 캐롤 브라이트.
캐롤은 자신의 치마를 우아하게 살짝 들어 올려 인사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어. 나나시는 왜 머리가 금발이 됐냐? 이거 원래부터 이랬어?
나나시: …설명하자면 길어. 내가 얼버부리는 게 아니라 정말 길어. 그래도 별 이상이 있는 건 아니야.
제츠보는 나나시의 모습을 아주 조금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변화 정도는 미미했다.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제츠보는 일단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주목하기로 했다.
제츠보: 나나시의 본명을 아는 사람이 되살아났으니… 나나시도 나올 수 있었던 거구나.
하기와라 우시오: 나는 영안로에서 사람 살리는 게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날 줄은 몰랐어. 모노로그라면 좆돼봐라 하고 불완전하게 부활시켜 주거나, 살아났지만 하자를 잔뜩 심어 놓거나, 아니면 애초에 구라였다고 농락을 할 줄 알았거든.
제츠보: …정말 너 맞는 거야? 몸만 캐롤이고 정신은 다른 사람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캐롤 브라이트: 네. 살아 돌아왔어요. 여러분들과 지냈던 기억도 다 있고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정말 저예요. 여러분.
캐롤은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하자가 있는지 한 번 보라는 듯. 자신의 몸을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렸다. 멜빵 치마가 팔락팔락 흩날렸다.
이건 너무 형편 좋은 얘기인데? 하기와라는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좋은 일인데. 이렇게 좋을 리가 없어. 카이다랑 관련된 의혹도 석연치 않고. 그런데 왜 자꾸 뭔가를 까먹은 것 같은 기분이지…?
하기와라는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리자 박수를 짝 하고 쳤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 맞다. 썅. 우리 원래 히무로 뒤쫓아온 거였잖아! 마유즈미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마유즈미는 살아있다."
하기와라 우시오: 흐어어어억! 아. 놀랐잖아. 임마!
나는 되살아난 캐롤 브라이트를 바라보았다. 그 곁에는 이름 없는 남자와 카이다 쿠로하까지 있었다. 이름 없는 남자는 나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마유즈미 씨도 살았어요? 다행이네요! 제가 미처 살리지 못해서 영영 헤어진 줄만 알았는데…
그 안도의 기색에 거짓의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정신조작 보유자가 위험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캐롤 브라이트의 옆에 선 이름 없는 남자를 보았다.
히무로 시라베: …이름 없는 남자. 살아남아서 다행이군.
나나시: 어. 그래. 히무로. 안녕.
이름 없는 남자는 여전히 내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그는 나 때문에 죽을 뻔했다. 그가 나갈 수 있으리라는 판단 하에, 영안로에서 나갈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나아갔던 이를 총으로 쐈다. 이름 없는 남자의 본명을 알 만한 사람은 캐롤 브라이트 뿐이니
히무로 시라베: 너를 죽일 뻔한 일을 사과하고자 한다.
한쪽 무릎을 꿇으려던 찰나 나는 캐롤 브라이트가 순식간에 내뿜는 적의에 온몸이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내 몸은 그에 반응해 동일한 만큼의 경계를 쏘아 보냈다. 정신조작 보유자의 감정은 그 자체만으로 강대한 무기의 발동장치다.
나나시: 그러지 마. 히무로! 어쩔… 수 없었던 거잖아. 우리는 어느 쪽 모두 양보할 생각이 없었으니. 상황이 얄궂었던 거야…
히무로 시라베: 하지만 나는 너를 다른 사람과 겹쳐 보았다. 내가 이성적이었다면 어떤 사고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히무로 씨가 당신을 죽이려고 했어요?
하기와라 우시오: 뭐야. 이건 우리도 처음 듣는데.
나는 조금의 변명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일어난 일을 말했다.
히무로 시라베: 나는 이름 없는 남자를 총으로 쏘았다.
제츠보: 뭐?!
나나시: 괜찮아! 나도 히무로의 정신을 지배하려고 했어! 영안로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그러니 서로 악감정은 없어. 서로 원했던 게 달랐을 뿐이야.
하기와라 우시오: …제기랄. 그런 일이 다 있었어? 야. 히무로. 표정 좀 풀어. 어어? 다들 지금 왜 이래?
캐롤 브라이트는 나를 향한 적개심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손을 쓰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나 또한 총이 있었다면 당장 빼들고도 남았을 터였다. 따라서 곧 탑 안은 일촉즉발의 고양으로 가득 찼다. 나는 맨손이었지만 쉽게 당해주지는 않을 심산이었다.
나나시: 괜찮아! 다 괜찮아. 중요한 건 결국 모두가 살아 돌아왔다는 거야. 영안로의 세 번째 구역은 그… 사람 정신을 빼놓는 연기로 가득 차 있었어. 그러니 그건 모노로그 탓이야. 평소의 히무로라면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테니까.
하기와라 우시오: 저놈 편 들어주는 건 아닌데. 행동이 조금 이상하긴 했어. 마유즈미랑 둘이 껴안고 얼레리 꼴레리.
제츠보: 아무리 그래도 총을 쏘아야만 했던 거야? 잠깐. 그럼
캐롤 브라이트: 왜 쏘신 건데요?
히무로 시라베: 너의 부활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캐롤 브라이트: …뭐라고요?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이미 그녀가 되살아난 이상 그녀를 반기고 살인 게임에 함께 맞설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적대할 것인가. 부활해서는 안 되는 자가 부활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군인가. 적인가?
서로를 노려보는 나와 캐롤 브라이트 사이에. 이름 없는 남자가 끼어들었다.
나나시: 있잖아. 이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아. 여기에서 잘잘못을 따져도 돼. 하지만 캐롤 씨는 지금 부상자야.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여기에서 서로 핏대를 올리지는 않을 거야.
이름 없는 남자는 허공에 팔을 휘저어 경직과 긴장을 흩어 놓으려 했다. 여전히 제츠보에게 붙잡혀 있는 카이다는 자신을 옆에서 흘겨보는 이름 없는 남자를 마주 흘겨보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외쳤다.
카이다 쿠로하: 마. 맞아! 손가락이 잘린 사람을. 못 쉬게 괴롭힐. 셈이냐!
그것 하나만은 사실이었다. 정작 캐롤 브라이트는 싸우지 못해 안달이 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이름 없는 남자는 어떻게든 분쟁이 없는 쪽을 지향하는 모양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그렇지만…
나나시: 캐롤 씨. 쉬어요.
캐롤 브라이트는 이름 없는 남자를 흘끗 보더니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 없는 남자는 완강했다. 캐롤 브라이트 또한 피곤함이 큰 듯이. 그의 의견에 반기를 들지는 않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서. 카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해? 저렇게 손 붙잡고 있는 채로 24시간 감시를 할 순 없잖아. 뭐. 그것도 내일 정할까? 그러다 또 도망치면 어떻게 하게.
캐롤 브라이트: 카이다 씨는 이제 여러분들의 적이 아니에요.
카이다 쿠로하: 제기랄. 혼자서 멋대로 정하지 마. 캐롤!
캐롤 브라이트: 그래서. 앞으로도 예전처럼 살 거니? 응? 따뜻한 밥도 못 먹고, 침대에서 자지도 못한 채로. 흑막의 명령이나 받으며 남을 해칠 거야?
카이다 쿠로하는 캐롤 브라이트의 쏘아붙이는 어조 앞에서 고개를 서서히 숙였다.
카이다 쿠로하: 그건… 아. 아니지만…
그 기이한 광경을 보고 다른 이들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다 쿠로하가. 캐롤 브라이트의 말을 듣는단 말인가? 그 짐승 같던 카이다 쿠로하가?
제츠보: 오늘만큼은 내가 감시할 수 있어. 한눈 안 팔게. 이 괴물을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다 같이 의논해서 정하는 거야.
카이다 쿠로하: 그럼 이제 놔줘!
제츠보: 아직은 안 돼. 확신이 아직 안 섰어. 네가 정말 갱생할 생각이 있다고 내가 느낄 때. 그때 놓아줄 거야.
다음 날. 탑에 있는 이들은 정하게 될 것이다. 카이다 쿠로하의 처후. 그리고 기약 없는 반복 속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하기와라 우시오: 그. 있잖아. 카이다를 풀어주는 걸 좀 일찍 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제츠보는 하기와라 우시오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츠보: 뭐라고? 왜?
하기와라 우시오: 내가 너희들한테 부탁할 일이 하나 있거든. 캐롤은 구경만 해도 돼. 부상자한테 일 시킬 순 없지. 하지만 멀쩡한 다른 사람들은 잠깐 내 부탁 좀 들어주라.
히무로 시라베: 무슨 부탁 말인가?
하기와라 우시오는 혀를 차 쯧 하는 소리를 냈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학급 재판이 끝날 때마다 하는 게 있었거든. 그게 뭐냐면…
이바라 쿠리스: 옳다고 생각하는 걸 행하라니. 이걸 가지고 어쩌라는 거야… 살인자 주제에… 옳은 일?
이바라 쿠리스: 이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살인 게임이 영원히 반복된다니. 왜…?
이바라 쿠리스: 아으. 정신 차려. 이바라 쿠리스…! 이런 세상에…! 내가 뭘 어떻게…
이바라 쿠리스는 순간. 밖에서 들려오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제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이바라 쿠리스: 으갹! 깜짝이야! 누. 누구야 갑자기!
하기와라 우시오: 이바라. 문 열어! 힘쓸 애들 다 모아서 끌고 왔으니까!
이바라 쿠리스: 뭐. 뭐야. 하기와라…? 느닷없이 들이닥쳐서 무슨 소리야…?
이바라는 반가움 반 당혹감 반 정도의 감정을 느끼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하기와라는 과장한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는 힘을 쓸 사람들을 많이도 데리고 왔다. 그중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 또한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이바라는 눈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뜨고.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얼굴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바라 쿠리스: 캐로오오오오오올!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나 무슨 환상 보는 거 아니지?!
이바라는 자신이 본 걸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캐롤 씨의 볼과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었다. 캐롤 씨는 얼굴이 짓눌리는 와중에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캐롤 브라이트: 네. 영안로에서 부활했어요. 놀랍죠? 정말 멀쩡하다니까요.
이바라 쿠리스: 우와아아아! 한 번 안아보자!
캐롤 브라이트: 네. 마음껏 안으세요. 저도 반갑네요.
이바라는 사심과 반가움. 그리고 그리움을 한데 담아서 캐롤 씨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좀 부러운데. 이바라는 캐롤 씨의 등을 팡팡 두드리면서 녹아내릴 것만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바라 쿠리스: 아. 이거야. 이거. 이 무지막지한 거유에 한 번 짓눌려보고 싶었어. 아아. 극락이어라.
캐롤 브라이트: 뭣. 뭐라고요?
캐롤 씨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 또한 이바라와의 재회가 각별했던 모양이다. 웃고 있었으니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씨벌. 이건 좀 보고 있기 민망한데.
나나시: 맞아. 그리고 좀 부러워.
하기와라 우시오: 뭐라고?
이바라 쿠리스: 나는 진짜… 반가워. 캐롤. 너무 반가워. 무슨 친해지고 얼마 있지도 않고 가 버리면 어떡해 이 여자야? 나 정 주면 오래가는데…
이바라 쿠리스: 그래도 돌아와서 다행이다. 너무 다행이야. 레알 진심으로… 네 빈자리가 너무 크다는 느낌이었어…
캐롤 브라이트: … 다음번엔 안 죽도록 노력해 볼게요.
이바라는 약간 슬픈 얼굴로 캐롤 씨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내 쪽으로 돌리기도 했다.
이바라 쿠리스: 나나시! 살아 있었구나! 아아아! 진짜 다행이다. 너 어떻게 나왔어?! 후루미나미 말로는 네가 절대 못 나올 거라고 했는데! 아. 이런. 카이다 너도 나왔네.
나를 보고 또 한껏 들떠있던 이바라의 어조는 카이다를 바라보자마자 훅 낮아져 버렸다.
나나시: 캐롤 씨를 살린 덕분에 가까스로 나왔지. 나도 죽을 뻔했어.
카이다 쿠로하: 뭐. 나는 되살아나면 안 돼?
이바라 쿠리스: 그럼 영안로로 들어간 사람 중… 마유즈미만 빼면 다 살아난 거네.
그리고 이바라의 음성은 마유즈미에 대해 이야기하자마자 그보다 더 낮아졌다. 그쯤 캐롤 씨는 이바라를 놓아주었다. 이바라는 눈을 질끈 감고 히무로에게 물었다.
이바라 쿠리스: 네가 지금 제일 힘들지? 안 힘들다 같은 소리 마. 네가 그나마 걔랑 제일 친했던 거 알아.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는 살아있다.
이바라는 먼저 흠칫 놀랐고, 그 뒤에는 의심하듯이 눈을 반쯤 뜨고 히무로의 표정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히무로의 표정은 언제나 같았다. 농담을 하는 것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애초에 히무로는 농담을 거의 안 했다.
이바라 쿠리스: 저. 정말이야…? 그럼 지금 어디에 있어. 왜 안 보여?
히무로 시라베: 개인의 사정 때문에 숙소에서 휴식하고 있을 뿐. 그녀는 살아있다.
이바라 쿠리스: 사. 살아있는 거 맞지?! 거짓말이면 가만히 안 둬!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는 살아있다.
이바라는 히무로의 셔츠 깃을 잡고 윽박지르더니. 히무로의 담담한 대답을 듣고는 스르르 무너져 털썩 주저앉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어우 야. 왜 이래 이거. 일어나. 이바라.
이바라 쿠리스: 정말 다행이야. 얘들아…
이바라를 서슴없이 끌어올리려던 하기와라는, 이바라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자 건네려던 손길을 우뚝 멈추었다.
이바라 쿠리스: 흐흑. 다. 다행이야… 진짜 기적이다… 나는… 너희들이 다 죽은 줄 알았어… 으흑… 잘 됐다…!
나나시: …이바라. 그 말이 맞아. 정말 다행이야.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살짝 눈시울이 붉어지고야 말았다. 카이다가 개소리를 하기 직전까지.
카이다 쿠로하: 뭐가 그리 큰일이라고 꼴값이야. 병신.
캐롤 브라이트: 말 조심하랬지. 어서 사과해!
카이다는 캐롤 씨의 말에 또 난처한 듯 입을 삐죽였다.
카이다 쿠로하: 아. 나는 무슨 말을 못 하게 해? 진짜. 아! 씨발 깡통 손 좀 조이지 말아 봐! 짜증 나 죽겠네 진짜아아!
제츠보: 짜증 나면 참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해. 짐승한테는 좀 힘든 일일지 모르겠지만.
카이다 쿠로하: 이 기계년이 무슨 우리 같은 사람 타령이야? 고장 났냐?
히무로 시라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지. 하기와라 우시오?
순식간에 정신 없어지려는 분위기를 히무로가 정리했다. 하기와라는 분명 다른 이들에게 이바라와 함께 할 일이 무엇인지를 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정도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을 예측할 수 있었다.
이바라는 눈물을 자신의 팔에 문질러서 닦고. 콧물을 살짝 훌쩍이면서 물었다.
이바라 쿠리스: 크흠. 궁금하긴 하네. 다들 여기에 왜 온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몰라서 묻냐?
하기와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사람 다 모았어. 이제 관 묻으러 가자.
이바라 쿠리스: …아하. 아아아아! 그거구나! 너 지금 그거 하려고 다들 모아 온 거야? 나는 한다고 한 적도 없는데…
하기와라 우시오: 그럼 안 할 거야? 묻어야 할 게 세 개인데 너랑 나 둘이서 어떻게 그걸 다 해. 사람이 있어야지.
이바라 쿠리스: 저. 그거 있잖아. 하기와라… 내가 사실 지금. 그 추모 의식에 대해 굉장히 비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아니 잠깐.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려니까 무슨 연설 같고 좀 부끄러운데…
이바라는 평소의 밝은 모습이 아니라. 어딘가 축 처진 모습을 보였다. 그걸 보고 히무로는 단칼에 결론을 내렸다.
히무로 시라베: 그럼 단둘이서 대화해라. 준비가 되었을 때 밖으로 나오면 될 일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엑! 왜 나랑 이바라를 세트메뉴로 묶어 이거?
히무로 시라베: 서로에게 용건이 있는 게 아닌가? 어서 이야기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와라.
히무로는 그렇게 말하며 이바라와 하기와라를 이바라의 숙소에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캐롤 브라이트: 아. 그 빈 관을 묻는 일 말이군요… 저는 관을 들기 어려울 것 같아요. 죄송해요. 여러분.
나나시: 어차피 카이다가 몸 쓰는 일은 다 할 테니 괜찮아요.
카이다 쿠로하: 뭐?! 씨발. 나는 한다고 한 적도 없어!
제츠보: 그런데 하기와라를 혼자 보낸 게 잘한 걸지 모르겠어. 쟤가 워낙 솔직하지 않잖아.
히무로 시라베: 하지만 이제 그도 바라봐야만 하는 것을 볼 때다.
제츠보: …나도 그래야 하는데 말이야.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23T와 마주 봐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카이다를 묶어 놓고 내게 영안로에서 나갈지 나가지 않을지의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부터. 나는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나나시: 있잖아. 23T. 나는…
내가 말을 더 꺼내기 전에. 나와 다른 이들이 모여있는 이바라의 숙소 옆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순간 그 소음은 남은 탑의 생존자들을 잔뜩 긴장시켰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싶은 긴장이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열린 문에서 나오는 한 소년에게로.
"너희 지금 그거 하려고 모인 거지?"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인물이 우리에게 합류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는 거지? 잠깐. 말 안 해도 돼.
하기와라는 조금 당황하고, 멋쩍스러워하고, 어색해하나 싶더니 곧바로 주절주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굳이 털어놓을 필요는 없어. 이바라. 뭔 이유가 있든 네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하지 마. 그런데 사실 나는 네 도움 없이도 그냥 우리끼리 해버릴 작정이야. 그게 마음에 안 들면 지금 얘기하고.
얘는 왜 이렇게 막무가내가 됐지? 그런데 좋은 방향으로 막무가내가 된 느낌이네. 뭐라고 해야 하지. 이렇게 보니까 조금 성숙해진 것 같기도 하고.
이바라 쿠리스: 하아… 마음에 안 드는 건 없어. 하기와라. 그냥…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래.
이바라 쿠리스: 우리들의 죽음이 의미 없으면 어떻게 해?
하기와라는 묵묵히 있다가 되물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야?
이바라 쿠리스: 말 그대로야. 우리의 죽음이 그냥. 아무 의미도 없으면? 그냥 세상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라면? 우리가 여기에서 서로 죽고 죽여도 그건 아무 의미가 없고 전부… 개죽음이면? 그럼… 우리가 이걸 계속해야 할까?
야가미는 편지에서 말했다. 우리는 살인 게임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다고. 그럼 이번에 죽은 칸나즈키, 야가미, 후루미나미의 죽음도 그 수많은 살인 게임 속 죽음 중 세 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점묘화의 점 하나다. 세포 하나다. 프레파라트에 놓아야 관찰할 수 있는 식물의 줄기세포 하나…
이바라 쿠리스: 그렇다면 우리들의 죽음에 정말… 기릴 가치가 있는 걸까?
하기와라는 그 말을 듣고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숙고에 잠긴 하기와라를 그날 처음 봤다.
보통 하기와라라면 모?르겠다며 웃어넘기던가, 냉정하지만 옳은 판단을 내려 주던가. 아무튼 그런 식으로 적당한 답을 정해 줄 터였다. 하지만 하기와라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나에게 답을 주려 하고 있었다.
얘가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너무 답 안 나오는 주제를 던져 준 건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잊어버리라며 너스레를 떨려 할 때. 하기와라가 벌컥 말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내 애ㅁ… 엄마란 놈은 이상한 주술에 빠져서 나를 죽이고 산제물로 바치려다 자살했고, 아빠란 놈은 알콜중독에 걸려서 나 패다가 병으로 죽었어.
나는 순간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나는 하기와라가 자신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걸 처음 들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 말은. 하기와라가? 이 세상 근심 없어 보이는 놈한테 어떻게 그런… 아니지. 오히려 상처가 있는 만큼 그걸 내보이지 않았던 거야. 세상에…
하기와라 우시오: 농담 아니야. 진짜 그렇게 죽었어.
이바라 쿠리스: 세상에. 세. 세상에… 하기와라. 정말 안 됐다. 그건 정말…
하기와라 우시오: 괜찮아. 왜냐하면 나는 그 작자들 죽은 게 별로 안 슬펐거든. 지금도 안 슬퍼. 누가 호로자식이라 욕해도 상관없어. 나는 그 죽음이 개죽음이었다고 생각해. 아무 가치도 없는 죽음. 왜 그런지 알아?
나는 하기와라에게 꺼내야 할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자칫 지뢰를 밟지 않게끔.
이바라 쿠리스: 어… 그건… 너를 학대하셨으니까…?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내가 기리지 않기 때문이야.
하기와라는 잠깐 쓴웃음을 짓다가도, 다음 순간 그 웃음을 누그러뜨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학대했든 학대하지 않았든 상관 없어. 내가 해마다 그 사람들을 떠올리고 조촐하게나마 불단이라도 세웠다면 또 모르겠지만, 나는 그 사람들이 정확히 언제 죽었는지도 기억 못 해. 반면교사도 비극도 아니야. 그 사람들은 그냥 내 인생에서 훅 하고 사라져 버렸어.
하기와라 우시오: 나는 그 죽음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던 거야. 나한테 무슨 종류의 상처가 있는지도 모른 채 피 줄줄 흘리며 다닌 꼴이지.
나는 하기와라의 말을 듣고 어떤 말을 다음으로 꺼낼지 고역을 느꼈다. 그리고 그건 하기와라 또한 마찬가지 같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러니까…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거야. 그리고 너는 사람들이 사람의 죽음과 맞닥뜨리게끔 돕고 있어. 존나 중요하다고.
이바라 쿠리스: …언젠가 다 잊어버린다고 해도 말이야?
하기와라 우시오: 안 잊어버려. 나는 아직 너랑 한 장례식들을 다 기억해. 누가 왔는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도 기억해. 너도 그렇잖아.
사실이었다. 나는 그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생경하게.
하기와라 우시오: 내 무덤도 없는 그 부모랑은 달라. 그 사람을 돌아보고 우리 마음속에서 작별하는 시간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
이바라 쿠리스: 의미가 없어도? 결국 탑에서는 사람이 죽을지도 몰라. 다음에는 나나 너일 수도 있어. 그런데도?
하기와라 우시오: 장례식에 의미가 없긴 왜 없어? 장례식은 그 자체가 의미잖아. 제대로 된 작별을 시켜 주는 거야. 어떤 종류의 죽음도 의미 없는 죽음이 아니게 하는 거라고.
하기와라는 내 숙소 한편에 시선을 고정하더니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하기와라는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 그건 내 정체성이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러니 네가 안 해도 결국 나는 장례를 치를 작정이야. 네가 지금까지 앞장서서 사람을 기려 줬으니 후임자가 물려받아도 되겠지. 하지만 너처럼은 못할 거야.
하기와라는 베일 모자를 내게 건넸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러니 해 줬으면 좋겠다. 이바라. 우리가 그 문제 많고 세상에 똑같은 놈은 없을 괴짜들을 기억하게 해 줘. 그 앞에 꽃을 바치던, 먹을 것을 놓던, 침을 뱉던. 그건 그 사람 자유야. 하지만 그 장을 열 사람은 너밖에 없어.
나는 하기와라가 건넨 베일 모자를 받았다. 나는 멍하니 그걸 잡고 있었다.
그래. 고인과 온전히 이별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딛고 일어날 수 있다. 장례식은 죽은 자를 위해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산 자를 위한 일이다.
나와 하기와라는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나이토와 모리의 무덤을 앞에 두고 나는 하기와라와 내가 어떤 면에서 매우 다르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나와 하기와라는 같은 관점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바라 쿠리스: …하기와라. 나도 너처럼 힘든 일을 겪었어. 내가 감당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던 끔찍한 일을 말이야. 하지만 그 일에 잡아먹히지는 않았어. 나는 절대 징징 안 거렸어. 삼일 밤을 꼬박 새우면서 자리를 지켰지만 굽히지는 않았어.
이바라 쿠리스: 내가 삼일 밤을 새면서 받아들였기 때문이야. 그걸 어떻게든 삼켜서 나는 여기에 있는 거겠지.
나는 베일 모자를 머리에 썼다.
이바라 쿠리스: 묻어주러 가자. 하기와라.
하기와라 우시오: 좋지. 가자고.
그리고 내 숙소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이바라 쿠리스: 늦어서 미안! 이제 됐어. 초절미소녀 장의사 이바라님 완전부활이시다! 자, 내 전용실로…
그 직후. 나는 일행에 한 명이 더 추가된 것을 보았다.
카나리 케이토: …안녕.
이바라 쿠리스: …안녕. 카나리. 소리 듣고 나온 거야?
카나리는 꼬랑지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불안해하며 대답했다. 왜 저러지?
카나리 케이토: 관. 묻으려 하는 거잖아… 나도 같이 할게. 아니… 하게 해 줘.
이바라 쿠리스: …칸나즈키를 위해서야?
카나리 케이토: 약간 정들었어. 어쩔 수 없잖아.
이바라 쿠리스: 맞아. 정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런데 왜 그렇게 떨고 있는 거야?
카나리는 거의 사색이 된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추워 죽기 일보 직전의 사람처럼 보였다.
카나리 케이토: 카. 카이다 쟤가 여기에 왜 있는 거야? 다들 제정신이야? 어떻게 저 괴물이 잡혀 있다고 해도 태연히 옆을 걸어 다닐 수가…
카이다 쿠로하: 하. 이 새끼 봐라. 워어어! 무섭지. 죽여버려야겠다!
카나리 케이토: 으으으…!
관을 이바라 쿠리스의 전용실에서 탑의 밖으로 운반하는 것은 제츠보와 카이다 쿠로하가 맡았다. 나와 이름 없는 남자, 하기와라 우시오, 카나리 케이토, 그리고 이바라 쿠리스는 삽으로 장미밭에 관이 들어갈 만한 구멍을 파고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이 정도 높이면 충분하다.
나나시: 너희가 하는 일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는데… 정작 도와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 미안해. 하기와라.
캐롤 브라이트: 저도 구경만 하는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캐롤 브라이트는 한 손으로 어설프게 동참하는 것보다 안정을 취하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할 일이 없기에 불편함을 느끼는 듯했다.
카나리 케이토: …나도 미안.
하기와라 우시오: 그럴 필요 없어! 애초에 이건 몇 명이 간소하게 하던 일이야. 사람이 다 죽어서 너희들 손까지 빌리게 된 거지…
이바라 쿠리스: 이거 맨 처음에 했을 때 기억난다. 나 혼자 장례 치르겠다고 낑낑대고 있는데 너랑 나이토랑 모리가 나타나서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걔들은 좋은 새끼들이었어. 그다음에는 칸나즈키와 야가미가 도와줬고. 하.
히무로 시라베: 그리고 이제는 탑의 거의 모든 이들이 이 일을 돕고 있다.
이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탑이 결속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죽은 세 명의 장례를 함께 치른 날처럼. 앞으로 탑에 있는 이들은 서로 협력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몰랐다.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땅을 파는 일에 집중했다. 곧 관이 도착했다.
카이다 쿠로하: 니들은 이걸 네 명이서 했다고? 병신들.
제츠보: 다른 사람들은 너처럼 하마 같은 힘을 가지고 있지 않거든. 카이다.
카이다 쿠로하: 야! 너……
카이다 쿠로하는 캐롤 브라이트가 주는 무언의 압박을 느끼고선 입을 우그러뜨렸다. 나는 그것을 보고 카이다 쿠로하 또한 학습능력이 있는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카이다 쿠로하: 좆까. 젖도 없는 게.
아직까진 없었다.
제츠보: 너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걸 건드렸어. 오늘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울까? 응?
캐롤 브라이트: 너어! 내가 몇 번이나 말해. 말 조심하라고 했을 텐데! 여러분들. 죄송해요. 제가 따끔하게 얘기해 놓을게요. 이리 와! 오지 못해!
카이다 쿠로하는 인내심이 닳아버린 듯한 캐롤 브라이트의 추궁 앞에서 꼬랑지에 불이 붙은 개너구리처럼 볼썽사납게 줄행랑을 쳤다.
카이다 쿠로하: 빠. 빨리 관 옮기러 가자. 관! 빨리 와 이 쓸모없는 년아!
제츠보: 어. 그래. 네 더럽게 무거운 몸뚱아리 담을 관이면 내가 백 개 천 개도 날라줄게.
카이다 쿠로하: 네 어머니 담을 관도 하나 준비해라. 아. 없지?
그리고 두 명은 서로 옥신각신하며 다시금 탑으로 향했다.
캐롤 브라이트: 하아… 대체 언제 철이 드는지…
나나시: 저 정도면 꽤 성숙한데요. 뭔가 요구를 했을 때 들어주는 일은 카이다에게 엄청 드문 거예요.
나는 흑막의 내통자라는 카이다의 입장과 영안로의 특성을 기점으로 카이다와 협력할 수 있었지만, 카이다가 명령을 받지 않고 자의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건 내게 비현실적인 광경으로 보였다. 카이다는 오만하고 잔인하며 바보 같고 질투심 많고 참을성 없고 악의로 가득 찬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캐롤 씨가 한 말에 카이다는 투덜거리면서 그걸 받아들였다. 그건 정말 별일이었다.
나나시: 카이다가 캐롤 씨 말을 경청할 줄은 몰랐어요. 따르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경청할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저희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이바라 쿠리스: 맞아. 어떻게 한 거야. 캐롤? 약점 잡았어?
히무로 시라베: 정신조작인가?
나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경우의 수를 제시했다. 캐롤 브라이트는 불쾌감을 느꼈지만 그걸 누그러뜨리려 애썼다.
캐롤 브라이트: 정신조작 아니에요. 내일 말씀드릴게요. 여기서 하기에는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요.
이바라 쿠리스: 정신조작이라니 그건 또 뭐야? 최면어플 그런 건가? 으흐흐. 캐롤 엉큼하네.
캐롤 브라이트는 이바라 쿠리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덕분에 이바라 쿠리스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나는 카이다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드디어 나와줘서 존나 행복해. 저거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지금… 카이다랑 말싸움하고 있는 쟤밖에 없잖아.
나나시: 카이다랑 하는 말싸움은 진짜 피곤한데… 온갖 인신공격이랑 부모님 욕이 갑자기 튀어나와.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카이다는 패드립 마스터 같더라. 아무래도 엄마가 없나 봐.
캐롤 브라이트는 하기와라 우시오의 말을 듣고 순간 몸을 움찔 떨었다.
이바라 쿠리스: 하기와라!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히무로 시라베: 하기와라 우시오는 욕설의 의도로 말한 게 아닐 것이다. 욕설과 비하에는 남을 욕하는 자 본인의 트라우마와 결핍이 반영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에게는 모친이 없다. 카이다 쿠로하는 일전 고아원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지.
나나시: 그 말이 맞아. 카이다는 영안로 안에서 내가 창놈이다, 변태다, 음란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비방을 늘어놨어. 그것도 카이다 본인의 심층심리가 적용된 결과겠지.
하기와라 우시오는 이름 없는 남자의 말을 듣고 오묘한 미각을 느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나시: 하기와라. 왜 그래? 하고 싶은 말 있어?
하기와라 우시오: 있잖아. 그건… 카이다 심층심리 때문이 아니라. 그냥 네 옷차림 때문에 그런 거 같아.
이바라 쿠리스: 아. 나도 그 가설에 한 표. 걔한테 무슨, 야한 거에 대한 호기심이라던가 그런 건 없을 것 같아.
카나리 케이토: 나한테는 겁쟁이니 꼬맹이니 하면서 놀려 댔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해?
이바라 쿠리스: 그것도 그냥 네가 키 작고 겁 많다고 놀린 거지.
카나리 케이토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회중시계와 손목시계를 번갈아 보며 시간을 맞추었다. 그 반면 이름 없는 남자는 그들의 주장에 한껏 반기를 들었다.
나나시: 왜 다들 이 옷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깨를 드러냈을 뿐이잖아. 이게 왜?!
하기와라 우시오: 이상하니까 이상하다 생각하지. 미안하지만 과장 좀 보태서 나는 이 탑에서 너 처음 봤을 때 먼저 남성스러운 외모의 여자인 줄 알았고, 그다음에는 무슨 호스트인 줄 알았어.
나나시: 아니. 뭐라고오?!
하기와라 우시오: 무슨 네 전용실에 기계가 있다 그런 얘기했을 때도 나는 속으로. 음. 아닌 것 같은데. 호스트 에이스 같은데. 대놓고 꽃미남은 아니지만 약간 유약한 미소년이라는 니즈를 충족하는…
이름 없는 남자는 여전히 하기와라 우시오의 말에 동의하지 못했다.
나나시: 말도 안 돼. 오프숄더가 왜? 말 그대로 어깨를 드러낸 거 빼고는 너희가 입는 옷이랑 똑같잖아.
이바라 쿠리스: 어깨를 드러냈으니까 다르지. 이 바보야! 남자가 입기엔 좀 이상해. 다 그렇게 생각할걸!
카나리 케이토: 처음 봤을 땐 엄청 당황했지…
하기와라 우시오: 인정해. 나나시! 너는 이상한 옷을 입고 다니는 놈이란 걸 인정해랏!
나나시: 윽…
이름 없는 남자는 그런 의견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듯. 당혹스러움을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어떤 의견도 내고 있지 않았던 한 사람이. 유일하게 이름 없는 남자에게 호의적인 의견을 냈다.
캐롤 브라이트: 저는 좋던데요?
나나시: 봐! 다른 의견도 있잖아!
이름 없는 남자는 누군가 자신을 두둔해 주니 곧바로 당당한 태도를 취했다. 허나 다른 이들이 보기에 그것은 기이한 취향을 가진 이가 두 명이 되었을 뿐이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진심이야. 캐롤? 그냥 나나시 안 무안하게끔 마음에 없는 말 한 거지? 응?
캐롤 브라이트: 아닌데요. 저는 남자 몸 보고 싶어 하면 안 돼요? 눈요깃거리인데.
이바라 쿠리스: 세상에. 캐롤! 아가씨가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눈요깃거리라니 그게 무슨 아저씨같은 소리야!
캐롤 브라이트: 편견이에요. 여자도 남자 쇄골이 보고 싶을 수 있죠.
나나시: 엇.
이바라 쿠리스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바라 쿠리스: 이거. 믿기지가 않아… 내 안의 멋있는 커리어 우먼 어른스러운 언니 캐롤의 이미지가 완전 깨져버렸어…
캐롤 브라이트: 아쉽네요. 그렇지만 전 이제 좀 솔직해져 보려고요. 아무튼 저는 오프숄더가 마음에 들어요. 왼손잡이 세상에서는 오른손잡이가 비정상인 거겠죠.
카나리 케이토: 오프숄더 세상 같은 건 없어. 이것들 완전 기인들 아니야? 저딴 옷이 좋다고?
그들을 둘러싼 경박한 분위기는 이름 없는 남자가 자신의 어깨를 손으로 가리자 정점을 찍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이야아! 이 남자가 놀랍다! 섹시하다고 하니까 또 부끄럽나 봐!
캐롤 브라이트: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나나시 씨. 저는 좋아한대도요?
나나시: 직설적으로 들으니 조금… 부끄럽네요. 아하하…
카나리 케이토: 이봐. 네가 좀 말려야 되는 거 아니야? 우리 지금 장례 치르는 거잖아. 이렇게 장난식으로 해도 되는 거야?
이바라 쿠리스: 맞아.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했는데…
이바라 쿠리스는 관을 하나 더 들고 달려오는 카이다 쿠로하와 제츠보를 바라보았다.
제츠보: 뛰지 말라고 했잖아! 너 지금 우리가 뭘 하는지는 아는 거야? 관을 옮기는 거라고!
카이다 쿠로하: 망할. 더럽게 시끄럽네. 어차피 안에 시체도 없잖아.
이바라 쿠리스: 아무리 진중하게 한들 추모하기 싫은 사람은 추모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죽은 사람들은 우리가 침울해있는 걸 원하지 않을 걸. 아니… 후루미나미는 원하려나?
카나리 케이토: …칸나즈키는 내가 침울해하기를 원할 것 같아.
캐롤 브라이트: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카나리 케이토: 내가 겁쟁이에 이기적이어서.
히무로 시라베: 편향된 해석을 하고 있군.
나는 카나리 케이토가 순식간에 얼굴에 노기를 띠는 것을 보았다. 꼴에 그것은 카나리 케이토의 약점이었다.
카나리 케이토: 뭐?
히무로 시라베: 칸나즈키 시노부가 너를 미워했다면 애초에 신체의 재구축을 허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족을 향한 모욕이라 느낄 테니. 그리고 신체가 제대로 작동하는 척도 하지 않았겠지. 너를 책망하는 주체는 칸나즈키 시노부가 아니라 너다.
나는 그가 불필요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게끔 유도하고자 했다.
히무로 시라베: 칸나즈키 시노부는 너를 미워하지 않았다.
살인 게임의 참가자 전원에게 퍼질 침체를 막기 위해서였다. 침체와 좌절은 주변으로 쉽게 전이되기 때문이다. 카나리 케이토는 내 말을 듣다가 자신의 눈가를 한 번 손으로 훑었다.
카나리 케이토: 고마워.
히무로 시라베: 고마울 것까지는 없다. 곧 마지막 관이 도착할 테니 계속 작업을 하지.
그리고 나는 계속 땅을 팠다.
이바라 쿠리스: ……
이바라 쿠리스: ………
카이다 쿠로하: 야. 뭐 말한다며. 왜 아무 말도…
캐롤 브라이트: 쉿! 조용히! 추도사를 생각하시는 중이잖아!
카이다 쿠로하: 그럼 뭐. 하루종일 여기에 이러고 있을 거야? 무슨 말을 해야 빨리빨리 끝내고 탑으로…
나나시: 조용히 하라니까!
카나리 케이토: 죽은 사람들 앞에서도 그럴 셈이야? 생각이 없어도 정도가 있지…!
하기와라 우시오: ……
히무로 시라베: ……
이바라 쿠리스: …우리는 죽음과 마주하고 있어. 우리 중 몇 명은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고,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도 있어. 그리고 그 얼굴에게서 제때 눈을 돌리지 못한 사람이. 세 명 더 생겼지.
이바라 쿠리스: 나는 매번 이 자리에 올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 생각했어. 관을 묻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더는 희생자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막을 거라 다짐하기까지 했지.
이바라 쿠리스: 하지만 이렇게 설 때마다 나는 내가 얼마나 미약한 사람인지, 아무것도 막을 수 없는 사람인지 다시 알게 돼. 누구보다 애같으면서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미지를 품은 사람.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뜻이 누구를 해치더라도 개의치 않은 사람. 그리고 그저 우리를 미워했던… 가장 종잡을 수 없는 악의를 가진 사람은 전부 떠났어. 그래. 이곳은 나이토와 모리마저 쉽게 스러지는 장소니까.
이바라 쿠리스: 그러니. 다음은 우리 중 누군가인 걸까? 아무리 결의해도 바뀌지 않을 거라고. 이제 언제 살인이 벌어질지는 부처님도 모른단 말이야? 우리는 또다시 서로를 죽이게 될까? 죽은 사람들에 대한 애도는 잊어버린 채 한 명만 남을 때까지 서로를 도살할까?
이바라 쿠리스: 여기서 정하고 가면 돼. 우리는 인간인가.
이바라 쿠리스: 아니면 괴물인가?
카이다 쿠로하: ……
이바라 쿠리스: 우리는 서로를 증오로 대할 것인가. 사랑으로 대할 것인가. 여기서 정하자. 마음속으로 정한 뒤에… 앞으로 그대로 행하는 거야. 나는… 그런 희망을 품겠어. 그런다면 많은 것이 바뀔 거야. 아주 많은 게.
이바라 쿠리스: 그러니 나는 다시금 말할 거야. 이제 살인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이게 마지막이라고… 그게 정말이라고는 솔직히 믿기 어려워. 너희 중 누구도 확신할 수 없잖아. 나도 그래.
이바라 쿠리스: …하지만 믿어 보려고. 우리는 이제 죽은 사람들의 몫까지 살아갈 거야.
그리고 살아있는 자들은 묘비 없는 세 무덤 앞에 장미꽃을 놓았다. 카이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의 자켓에 손을 꽂아 넣고서 다른 이들을 구경할 뿐이었지만, 나는 그것만으로 카이다라는 사람을 다시 봤다. 내가 영안로에서 본 그녀라면 뭔 무덤이고 장미냐며 그걸 발로 뻥뻥 차고 무덤 위에서 뛰어놀 만한 위인일 텐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바라의 말에 무언가를 느끼기라도 한 건지. 드물게 카이다는 얌전했다. 어쩌면 23T가 눈에 불을 켜고 카이다를 감시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왜인지 그게 다인 것 같지 않은 카이다의 변화를 느꼈다.
하기와라 우시오: 고생했어. 이바라. 다 고생했다. 느닷없이 이런 일에 어울려 주고. 존나 고마워.
이바라 쿠리스: 정말이야. 사실 지금 너희 피곤해 죽을 것 같지 않아…? 학급재판을 끝내고 이런 중노동이라니. 다들 돌아가서 쉬어. 아주 그냥 푹 쉬고. 형편 좋을 때 뭐든 이야기하자. 앞으로 어떻게 할지. 카이다에 대해서. 부활이라던가 그런 것들 전부.
캐롤 브라이트: 이바라 씨. 변하지 않으셨군요…
카나리 케이토: 있잖아. 그…
카나리는 우물쭈물거리다가 이바라에게 말했다.
카나리 케이토: 여기 오길 잘한 것 같아. 이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지가 조금 더… 명확해졌어. 고마워. 이바라.
이바라 쿠리스: …별 말씀을 다 하네. 너도 정말 달라졌다.
카나리 케이토: 그만큼 실수를 많이 한 것뿐이야.
나는 문득 카이다의 반응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카이다는 입을 닫고 눈을 지그시 뜨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놀라움을 삼켰다. 카이다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양이었으니.
내가 아는 그녀라면 이제 정말 묘에 침을 뱉었을 텐데. 모욕을 하지 않는다니. 그건 정말 이바라의 추도사를 듣고 자기 나름대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도무지 어떻게 될지를 모른다는 감상이 들 때쯤. 히무로의 말이 내 귀를 비집고 들어왔다.
히무로 시라베: 토키와 아유키는 어디에 있지?
이바라 쿠리스: …아. 맞다. 걔를 까먹고 있었네…? 얘는 왜 안 나오지? 우리가 이거 하고 있는 걸 분명 눈치챘을 텐데…
나나시: 정말 그래. 토키와가 왜 안 왔지? 개인 사정이 있는 거 아닐까? 내가 아는 토키와라면 오히려 이런 일을 주도했을 텐데.
토키와라면.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일단 다른 이들의 생존을 위해 앞장섰던 토키와라면 그럴 법하지 않나? 많이 피곤한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으나, 다른 이들의 반응으로 보아 내 추측은 제대로 빗나간 모양이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
제츠보: 나나시. 네가 아는 토키와라는 사람은 이미 토키와의 안에 없을지도 몰라.
나는 23T의 말을 듣고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나나시: 응? 그게 무슨 뜻이야?
히무로 시라베: 토키와 아유키는 후루미나미 나몬과 손을 잡고 칸나즈키 시노부와 야가미 토가의 살해에 가담했다. 적극적으로 시체 유기를 돕기까지 했다.
나와 캐롤 씨는 서로를 바라보며 불신의 표정을 교환했다. 나와 그녀가 아는 한. 토키와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자기 능력 밖의 일이라도 끝까지 도전하는 올곧은 사람이. 토키와 아니었나?
캐롤 씨도 나와 생각을 같이 했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토키와는 결코 사람을 죽일 위인이 못 되었다.
캐롤 브라이트: 그럴 리가 없어요. 토키와 씨는 살해에 가담할 만한 사람이 아닌 걸요.
카나리 케이토: 이제 그런 사람이 됐어. 그놈을 믿을까 말까 하는 생각이 들면. 절대 믿지 마. 후루미나미 나몬이 알고 있던 비밀스러운 정보에 눈이 돌아가 버렸어. 존경할 만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히무로 시라베: 하지만 이제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귀띔이 무엇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그 정보에 접촉한 뒤 사람을 죽였다.
토키와가 사람을 죽였다고? 만약 그렇다면, 후루미나미가 토키와를 꾀어낸 미끼는 토키와가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였을 것이다. 후루미나미는 토키와를 파괴한 뒤에 그를 조종했을 것이다.
나나시: 그런 일이…
카이다 쿠로하: 좆구라 아니야? 그 샌님이 어떻게 사람을 죽여? 그놈처럼 말랑한 녀석들은 살인을 감당하지 못해. 사람이 처음으로 사람 죽이고도 멀쩡하게 살아가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줄 알아?
히무로 시라베: 이틀.
카이다 쿠로하: 뭐? 웬 엉뚱한 대답이야 이건? 그러고 보니까 캐롤. 너 이걸 퍼랭이한테 보여주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 이…
캐롤 브라이트: 안 돼. 치나미!
카이다는 자신의 재킷 안주머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다가 캐롤 씨에게 저지당했다. 치나미. 그건 다른 누구의 본명도 아닌 카이다의 본명일 터였다. 생각해 보면 간단한 것이 나를 밖으로 꺼낸 이상 영안로에서 카이다를 탈출시킬 수 있는 사람은 캐롤 씨 뿐이었다. 캐롤 씨는 카이다의 본명을 알고 있었다.
물론 나는 영안로의 두 번째 구역에서 캐롤 씨와 카이다가 친밀한 사이였던 것을 보았다. 하지만 나는 카이다의 배신으로 그 관계는 끝났으리라 생각했다. 아닌 모양이었다.
캐롤 씨는 몸을 움츠러뜨린 카이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캐롤 브라이트: 그거. 절대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지 마. 그리고 너만 가지고 있어야 해. 알겠지?
카이다 쿠로하: 아. 알았어.
캐롤 브라이트: 알겠지? 꼭이야. 약속하는 거야. 꼭 지켜줘야 해.
카이다 쿠로하: 알았다니까! 내가 그거 하나 못 지킬 것 같냐? 걱정 집어치워!
가깝다. 이건 단순히 친구 정도의 관계가 아니었다. 카이다가 이렇게 좌지우지되고, 캐롤 씨가 반말을 할 만한 관계라면…
히무로 시라베: 중지가 잘렸군. 어디에서 잘린 거지?
히무로는 캐롤 씨에게 물었다.
캐롤 브라이트: 어쩌다 보니 잘렸어요.
캐롤 씨는 두 번째로 그런 대답을 했다. 캐롤 씨는 정황상. 스스로 자신의 중지를 자른 것으로 보였다. 나도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남들이 보는 앞에서 물어볼 게 아니라고 추측만 했을 뿐, 캐롤 씨가 왜 그것을 숨기는지는 몰랐다.
히무로 시라베: 알았다.
히무로는 그렇게 납득해 버렸다. 뭐야. 되게 시원하게 넘어가네…? 이것저것 캐물어 대면 개입할 생각이었지만, 히무로도 나와 캐롤 씨에게서 신경을 끈다면 그건 반겨 마땅한 소식이었다.
이바라 쿠리스: 토키와가 오지 않은 이유라도 있으려나? 아니다… 애초에 이런 건 강제로 시키면 안 되지.
하기와라 우시오: 애초에 자기가 죽인 놈 묘비에 찾아온다는 게 말이 안 될지도 모르지. 우리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야.
제츠보: 해산하기 전에. 카이다는 오늘 내 숙소에 둘 거야. 어차피 나는 잠을 잘 필요도 없으니 오늘은 내가 전담할 테니. 다 걱정하지 말고 자도록 해.
나나시: 23T. 정말 괜찮겠어? 카이다는 결코 안전한 사람이 아닌데.
카이다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인물이었고, 또 플라잉 로봇 같은 변수가 있다면 23T도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방법을 모색해보고 싶었으나 23T는 굽히지 않았다.
제츠보: 괜찮아. 나는 너희들을 지키는 입장이야. 알잖아. 그러니 지키게 해 줘.
카이다 쿠로하: 아. 씨발 싫어! 내가 왜 깡통을 습격해? 무슨 득이 된다고! 야. 뭐라고 말 좀 해줘!
카이다는 캐롤 씨를 보며 소리쳤다. 바보같으니. 나는 혀를 찼다. 캐롤 씨와 자신에게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기색은 숨겼어야지. 그래야설령 그녀가 네 편을 들더라도 그게 설득력 있게 보이고 캐롤 씨가 피해를 뒤집어쓰는 일도 없을 테니까.
다행히 캐롤 씨는 고개를 저었다.
캐롤 브라이트: 오늘만 참아. 너도 반성을 해야지.
그녀는 어리광을 받아주지 말아야 할 때는 받아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결국 카이다는 입술을 쭉 내민 채 중얼중얼거렸다. 23T에게 꽉 잡힌 손목은 결코 놓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바라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뒤 모임을 마무리했다.
이바라 쿠리스: 고마워. 23T. 그럼… 해산! 잘 자고. 내일 보자!
이바라는 머리 위로 두 팔을 올려서 큰 손뼉 소리를 냈다.
히무로 시라베: 모두 기나긴 밤을 누려라.
하기와라 우시오: 오오. 히무로. 그건 또 무슨 종류의 표현이야? 뭐 셰익스피어에서 따왔어?! 깡통걸! 너도 내일 보자!
제츠보: 응. 그래. 하기와라. 계단 오르다가 꼭 넘어지길 바랄게.
카나리 케이토: 농담으로도 그런 말 마! 다 조심해!
캐롤 브라이트: 저희도 가요. 나나시 씨.
나나시: 그래야죠.
나는 길고 길었던 여정을 끝마치고 잠에 들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나는 충분히 피로했다. 마음만 먹으면 선 채로 꾸벅꾸벅 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캐롤 씨가 내 몸에 자신의 몸을 기대고, 무게중심의 축을 내 쪽으로 쏠리게 만들며 속삭였을 때. 그 잠의 부스러기들은 훅 불어드는 바람에 날려 사라져 버렸다.
캐롤 브라이트: 곧장 제 숙소로 오세요. 나나시 씨.
나는 그녀의 달큼한 체향을 맡았다. 드러난 내 어깨의 맨살에 닿는 터틀넥 스웨터의 부드러운 촉감을 느꼈다. 캐롤 씨가 달콤하게 속삭인 말은 남자 청소년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가능성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것은 거부하기 어려운. 사실 거부할 이유가 없는 유혹이었다.
제츠보: ……가자. 카이다.
카이다 쿠로하: 어? 아아아악! 씨발. 내 손목! 크아아아아악!
나는 내 몸에 혈류가 도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순식간에 온몸이 긴장되었다. 그리고 나는 침을 꿀꺽 삼킨 뒤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나시: 일단 할 일 먼저 하고요.
캐롤 브라이트: 네? 지금 진심은 아니시죠? 당신한테 지금 저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에…
나나시: 23T. 할 이야기가 있어.
나는 자신의 숙소로 들어가려던 23T를 불러 세웠다. 23T는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눈을 크게 뜨고, 다음 순간에는 이게 제정신인가 묻는 듯한 반눈을 뜨고서 내게 물은 것이다.
제츠보: …왜 여기에 있어?
나나시: 할 이야기가 있다니까. 친구끼리.
나는 충분히 상식적인 행동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23T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츠보: 지금쯤 캐롤 씨한테 달려가서 놀아야 할 거 아니야. 너를 직접 불렀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나시: 그. 그걸 들었어?
이거 그림이 별로인데. 사적인 만남을 친구에게 들키며 내가 조금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던 와중. 23T에게 붙들려 있는 불청객은 꽥꽥 소리를 질렀다.
카이다 쿠로하: 으웩! 이 변태 새끼 이거! 내가 알아봤어. 이 미친 변태 새끼 아주 굶고 굶은 데다가 밝히는 놈인 걸 내가 알아봤다고! 파렴치한 놈! 야시시한 놈아!
제츠보: 입 닥쳐. 카이다! 친구랑 이야기 좀 하게!
카이다 쿠로하: 오. 닥치게 만들어 보시지. 잡혀 있는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이제 입도 닫게 만드시겠다?
이거 진짜 방해되네. 기껏 살아 돌아왔는데 아직까지 영안로 안에서처럼 내 속을 긁어대고. 나는 못마땅함을 담아서 그녀에게 눈빛을 쏘았다. 23T와 기싸움을 하던 카이다는 문득 내 쪽을 돌아보더니.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23T의 정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카이다 쿠로하: 개새끼들. 좆까.
어쩌면 카이다의 머릿속에서 저 두 마디는 '알았다'와 같은 뜻은 아닐까. 나는 그런 의심마저 들었다. 또 내 눈동자가 금색이 된 모양이다.
제츠보: 아무튼. 왜 캐롤 씨에게 안 갔느냐는 말은 진심이야. 숙소 안에서의 독대. 남자애가 거절하기 힘든 유혹 아닌가?
나나시: 설마 그걸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니지? 다 장난치시는 거야. 원래도 저런 장난은 한두 번 치셨어. 볼에 짧게 입맞춤을 남기신다던가.
제츠보: 이것들이 내 생각보다 농밀하게 놀고 있었군.
나는 23T의 목소리에서 묘한 노기를 느꼈다. 그렇기에 나는 다급하게 그녀를 말렸다.
나나시: 너무 그렇게 받아들이지 말고. 캐롤 씨는 그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날 부른 거야. 내가 지금 너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너를 부른 것처럼. 똑같아. 친구와의 대화. 너도 영안로 속에서 엄청난 일들을 겪었을 텐데 그 뒤에 할 이야기가 오죽 많겠어?
제츠보: 나도 정말 하고 싶은데. 문제가 하나 있어. 내 옆에 카이다가 붙어 있네.
나나시: 앗.
나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도움이 안 되는 여자였다. 본인의 의도는 아니라지만은 어떻게 친구와의 대화에까지 훼방을 놓을까?
제츠보: 내일 이야기하자. 너도 총에 맞은 다음 죽다 겨우 살아났잖아. 캐롤한테 가봐.
아. 그걸 들었나 보네. 나는 민망해지려는 분위기를 어떻게든 비집고 다시금 물었다.
나나시: 그렇지만…
제츠보: 가. 나나시. 괜찮아. 캐롤은 부상자잖아. 가서 간호해줘. 네가 필요할 테니까.
나나시: 아니야. 23T. 그렇게 미뤄선 안 된다는 걸 알았어. 카이다는 없는 셈 쳐. 노네임은…
제츠보: 듣고 싶지 않아. 나나시.
나는 고개를 젓는 23T에게 더 이상은 말을 꺼내지 못했다. 본인에게 생각이 없다면 내가 더 강요할 방도도 없었다. 결국. 내일을 기약하게 되리라.
이건 정말 아닌데… 이런 식으로 너보다 캐롤 씨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건. 옳지 않았다. 결국 나에게 기억이 없다 해도 23T는 내가 부활시킨 사람이니까.
나나시: …편히 쉬라고 하고 싶지만, 너는 쉴 수 없으니까 이렇게 말할게. 고마워. 23T.
제츠보: 산 채로 돌아와 줘서 내가 고맙지. 나는 네가 스스로의 본명을 모른단 걸 아니까 본명을 전해주려고 했어. 그런데 도중에 탈락해 버려서. 네가 정말 영락없이 그 안에 갇혀 죽었을 거라 생각했어.
제츠보: 다행이야. 나나시. 내가 얼마나 안도했는지 너는 모를걸.
카이다 쿠로하: 이봐. 나 바로 너희 옆에 있거든.
여전히 23T에게 손목을 꽉 잡혀있는 카이다 쿠로하가 눈치를 줬다. 그리고 곧 카이다는 손목이 졸려오는 듯 팔을 붕붕 휘두르며 비명을 질렀다. 나는 사실 카이다와 서먹한 사이였기에, 등을 돌렸다. 캐롤 씨 본인이 카이다에게 앙금이 없는 데다가 왜인지 친근해 보인단 말이지…
그리고 나는 캐롤 씨의 방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카이다는 나를 보며 손가락질을 했다.
카이다 쿠로하: 야아. 저 새끼 봐라?! 너 어디 가? 왜 캐롤 방으로 들어가는데?
캐롤 브라이트: 한밤중의 밀회를 하려고요.
캐롤 씨는 내가 숙소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벌컥 열어 나를 반겼다. 아무래도 나를 엿들은 모양이었다. 엿들은 건 차치하고 캐롤 씨가 입에 담은 단어의 어감과 그것이 암시하는 미래에. 나는 팔 할의 당황과 일 할의 바보같은 기대. 그리고 일 할의 부끄러움을 담고 헛기침을 했다.
나나시: 캑. 캐롤 씨. 굉장히 당혹스러운 농담이네요.
캐롤 브라이트: 누가 농담을 했는데요?
카이다는 경악을 담아서 나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카이다 쿠로하: 미. 미. 미친 거 아니야. 쟤들! 변태 새끼들! 야. 이 변태들아! 이런 상황에서도 그 짓이 하고 싶냐! 음란하긴!
나나시: 과. 과민반응 하지 마! 네가 그러니까 더 이상해지잖아!
캐롤 브라이트: 내 사업 방해하지 마. 카이다! 되살아났으니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카이다 쿠로하: 지. 진짜냐… 아니. 그러면… 이런 제기랄. 이거 너무 민망하고 이상한 기분이잖아. 상상이 되는 게 더 기분 나빠! 너희 둘이… 악!
23T는 나지막이 있다가 한 마디를 말했다.
제츠보: …진심이야. 너희?
캐롤 브라이트: 왜요? 구경하고 싶으세요?
캐롤 씨의 23T를 향한 옅은 조소를 보자. 나는 거의 생각을 거치지도 않고 내가 할 일을 했다.
나나시: 캐롤!
캐롤 브라이트: 엇. 네?
나나시: 그건 무례한 짓이었어. 사과해.
캐롤 씨는 제대로 된 사람이었기에 내가 무슨 무례한 짓을 했느냐 따위의 말장난은 하지 않았다. 캐롤 씨도 내가 무엇을 요구했는지는 이해했고, 그렇기에 그녀의 행동은 즉각적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죄송해요. 23T 씨. 그냥… 농담한 거였어요. 일부러 마음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정말요.
23T는 조금 커진 눈으로 나와 캐롤 씨를 번갈아 보더니. 이윽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제츠보: …됐어. 캐롤. 이만 쉬자… 너희 다 지쳤잖아. 그런데 그전에. 하나만 묻고 싶은 게 있어.
캐롤 브라이트: 네. 말씀하세요.
제츠보: 온전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 기분이 어때?
캐롤 씨는 자신의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천천히 굽혔다 펴며. 주먹을 쥐었다 펴 보는 등 자신의 몸을 세밀하게 움직여 보았다.
캐롤 브라이트: 좋아요.
제츠보: …다행이네.
그리고 23T는 카이다를 질질 끌며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나는 23T의 숙소 문이 닫히는 걸 보고 나서도 어딘가 복잡한 기분에 23T의 숙소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오세요.
나는 캐롤 씨의 재촉을 들은 후에야 그녀의 숙소를 향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쾅. 숙소의 문을 닫고 나서 나는 캐롤 씨가 건넨 열쇠로 문을 잠갔다.
나나시: 비밀회의를 들키지 않은 건 잘 된 일이지만, 굳이 그런 핑계를 대야 했어요? 내일 23T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네…
내일 마주치자마자 몸은 괜찮냐. 어디 아프지는 않냐며 나를 놀려댈 23T를 생각하면 벌써 부끄러워지며 밝아오는 내일이 꺼려질 뿐이었다. 아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나는 알고 있지 않았나? 노바디가 노네임에게 가졌던 감정을?
그래서 나는 23T가 느꼈을 모멸감을 알았던 것이다. 그런 종류의 과시가 장난이었다고 해도 23T는 그것을 무척 불쾌해했을 테니.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피식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았다. 부드럽고도 긴 손가락이 내 손가락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건 마법이었다. 내 마음을 빼앗아버리는 아름다운 마법.
캐롤 브라이트: 핑계라뇨?
그리고 캐롤 씨는 내 손을 그녀의 쪽으로 잡아당겼다.
나는 일찍 잠에 들었다. 물론 살인에 가담한 것은 결코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몸에 쌓인 피로는 나를 깊은 수면으로 이끌었다. 나는 그저 돌을 단 사람이 물에 가라앉듯이 잠에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이상한 악몽을 꿨다.
악몽의 내용은 나를 비난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내가 아는 목소리들.
내 가족들과 친구들은 내가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을 비난했다. 내가 죽어야만 했다고 소리를 쳤다.
탑에 있는 자들은 내가 비겁한 살인자라고, 긍지 없는 머저리라고 욕을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나한테 왜 이러냐고 항변을 하지 못했다. 꿈속에서 나는 내가 저지른 모든 죄를 반성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늘 생각한다.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하지만 이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도서관에 있는 장서의 내용이 전부 사실이라면, 그리고 후루미나미 나몬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이 기약 없는 반복의 살인 게임 속에서 남은 이들을 이끌어야만 했다. 예언자가 하는 말이 가짜더라도 나는 그에 따라야만 했던 것이다. 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잘못이니까.
나는 이 살인 게임 속에서 다른 이들을 지도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카텟 기관도, 모노로그도 믿을 수 없었다. 살인 게임이 끝없이 반복된다는 것은 누구도 알아선 안 된다. 그랬다간 다들 좌절을 이기지 못하고 탑의 질서가 무너져 버릴 터였다. 결국. 나는 질서를 숭상하는 사람이다.
나는 살인 게임이 끝없이 반복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다른 이들 또한 느낄 두려움이다. 나는 그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체제를 주어야 했다. 그럼 다른 누가 한단 말인가? 캐롤 씨는 죽었다. 모리도 죽었다. 그러니 오직 나만이 리더였다. 아무리 오명을 뒤집어 쓰더라도 나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하리라.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다.
나는 양들을 이끄는 목자이다.
내가 이 탑의 유일한 희망이다.
나는 악몽 속에서 바랐다. 부디 내가 탑에서 길을 잃은 모든 이들을 이끌 수 있는 역량을 가지게 되기를. 옳은 방향으로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게 되기를.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할 일은…
더 단크 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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