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루미나미 나몬: 초고교급의 탑: 지난 이야기.
후루미나미 나몬: 시라베. 부디 몸조심해서 다녀오셔야 해요!
후루미나미 나몬: 걱정 마시오. 나의 나몬. 존재하는 모든 신과 존재했던 모든 신들의 이름으로 약속하겠소. 반드시 그대에게 돌아오고 말겠소. 약속하오.
후루미나미 나몬: 아아. 나의 시라베! 사랑해요. 나의 시라베!
후루미나미 나몬: 나도 그러하오. 나의 나몬.
쪽쪽쪽쪽♥♡
후루미나미 나몬: 하하! 너의 히무로는 내가 가져가겠다! 너는 두 번 다시 네 피앙세를 만나지 못하리라!
후루미나미 나몬: 뭐시라! 이 요망한 책 같으니. 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일 것 같아? 내 남자를 돌려내!
후루미나미 나몬은 아무도 없는 카지노에서 그렇게 소리쳤다.
후루미나미 나몬: …내 그이가 문 너머로 떠났고. 탑의 모두는 약간 혼란에 빠져 있고. 탑은 교착 상태.
후루미나미는 카지노에서 뽑은 물건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오늘은 별다른 일이 없을 것 같으니까… 소라 껍데기 한 번 들쑤셔 봐야지.
후루미나미 나몬: 쿵쿵쿵. 쿵쿵쿵! 이보시오. 칸나즈키 양? 용무가 있어 찾아왔소!
칸나즈키 시노부: 무슨 일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아군이 되고 싶다는 제의가 하고 싶소.
칸나즈키 시노부: 관심 없어!
후루미나미 나몬: 그럼 어쩔 수 없지! 다음!
후루미나미 나몬: 똑똑! 카나리 씨? 용무가 있어 찾아왔소!
후루미나미 나몬: 대답을 안 해도 소용없습니다. 문을 여시오! 안에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왔소!
후루미나미 나몬: …….
후루미나미 나몬: 넌 정말 답도 없구나?
후루미나미는 몇 초 동안 카나리의 문 앞을 서성이다 한 번 세게 문을 쾅 두드렸다. 문 안에서 숨을 죽인 비명이 들려왔다.
캐롤 브라이트: 괴롭히지 마요. 누구나 혼자이고 싶은 사연이 있는 법이니까.
후루미나미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팔짱을 낀 캐롤 브라이트를 보았다. 숨겨진 눈동자 속 표정을 읽어내 보려고 했지만 성공하진 못했다.
캐롤 브라이트: 단둘이 얘기할까요. 후루미나미 씨?
후루미나미 나몬: 아름다운 레이디와의 산책은 언제든 환영이죠. 마드모아젤.
캐롤 브라이트: 잠시 따라와요.
후루미나미 나몬: 아뇨!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따라오시죠!
후루미나미가 그녀를 인도한 곳은 탑 밖이었다. 늦은 밤의 탑은 조금 쌀쌀해진다. 온기가 그리워질 만큼은.
두 사람은 피부에 스치는 차가운 공기를 느꼈다. 바람은 단지 그들이 몸서리를 치게 만들지 않았다. 바람은 밤의 여신이 심장에 직접 숨결을 불어넣듯 외로움을 비추었다. 누구나 오늘 밤만큼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간절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후루미나미와 캐롤에겐 장미 꽃밭으로 나선 순간이 바로 그때였다.
후루미나미 나몬: 이 쪽으로 와요. 레이디.
후루미나미는 태연하게 미도리카와의 무덤으로 걸어갔다. 장미를 하나 꺾어 그녀의 관 위에 놓는 후루미나미를 보며 캐롤은 표정의 변화를 내비치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칸나즈키 씨에 카나리 씨까지 찾아가시더군요. 무슨 일을 벌이시려고 그러세요?
후루미나미 나몬: 글쎄. 자아실현…?
후루미나미 나몬: 그렇게 경계하지 마. 별 일 없어. 그렇지만 햇님한테 사람이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걸. 그러니 나는 그늘 속에 남으려는 이들을 최대한 포섭할 수밖에.
캐롤 브라이트: 누구의 햇님이란 건가요. 나나시 씨의 햇님이요?
후루미나미 나몬: 이걸 알아듣네… 흠. 적의가 상당해. 마치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아… 거절 한 마디 못 하던 시절과는 완전히 딴 사람이야. 내가 딴 사람이라고 말했으면 믿어도 돼. 이 분야에 있어선 내가 전문가라서.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말고도 눈독을 들이시는군요.
후루미나미 나몬: 말이 되는 소리를. 걔랑 너는 아직 덜 익었어. 줘도 안 먹는다고. 그렇지만 나나시가 너에게 의존하는 만큼 너도 나나시에게 의존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는 제 내담자예요. 저와 대화를 나눠 주셨고요. 소중하게 생각할 수밖에요.
후루미나미 나몬: 휘유! 제 내담자! 달달하긴 하네. 그런데 입에 단 것은 몸에 쓴 법이지. 난 입에 쓴 걸 더 선호해. 곰방대 연기만큼이나 독한 걸로.
캐롤 브라이트: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당신이 하루아침에 올바르게 행동하진 않겠죠. 그렇지만 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불길한 말은 하지 마세요.
후루미나미 나몬: 무슨 소리야. 난 너희들한테 관심도 없다니까.
캐롤 브라이트: 보통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너 곧 죽을 거라며 저주를 퍼붓나요?
후루미나미 나몬은 우뚝 멈췄다.
후루미나미 나몬: 순간 소름이 끼쳤네. 뭐라는 거야. 예측이 너무 심하잖아. 내가 그 정도로 악녀로 보여?
캐롤 브라이트: 고결한 채로 머물려 다간 죽게 될 거다… 였나요. 분명? 어느 정도 맞는 말 같긴 해요. 진흙을 뒤집어쓰고 덤비는데 도망만 가선 안 된다 이거죠. 기꺼이 손에 진흙을 묻혀야 해요.
후루미나미는 캐롤의 눈동자를 읽을 수 없었다. 그녀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도.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후루미나미 나몬: ……너 그걸 엿듣고 있었어?
캐롤 브라이트: 문 너머에서 듣고 있었죠. 제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전화를 거시니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겠더라고요.
캐롤 브라이트: 그래서… 도청기를 얼마나 더 가지고 계세요?
캐롤의 표정은 차가웠다. 차가워질 수 있는 만큼.
장소는 카텟 기관. 온갖 장비들을 수레에 실어 연구실로 가져온다. 바퀴가 자동으로 움직이는 무인 수레다. 내가 만들었다.
그러는 와중 인공지능이 내게 말한다.
"처음부터 그런 인상을 남기면 어떻게 해."
"어차피 그네들 입장에서 우린 고까운 불청객으로밖에 안 보일 거야. 우리가 깍듯이 90도로 인사를 해도 사흘 후면 우리에게서 등을 돌릴걸. 위선자들."
"꼭 그렇게 행동할 필요는 없었잖아. 네가 기관을 안 좋게 생각한다고 해도 이번에는 달라졌을 수도 있어. 히무로 시라베가 시라유키 히메리의 위치에 근접했잖아. 카텟 기관이 변했다는 뜻이야."
"난 못 믿어. 그건 전부 시라유키 히메리가 히무로 시라베의 위치까지 떨어진 것뿐이야. 지부장 자리를 내려놓고 성격 버리고, 우리한테 저지른 일들도 없었던 셈 치려는 거지. 우리가 돌아왔을 때 아무도 우릴 알아보지 못했잖아."
"그건 카텟 기관이 이렇게 커지기 전의 일이야. 어쩔 수 없어. 이 지부 내에 그 일을 아는 사람은 다섯 명도 채 안 될 거야."
"시라유키 히메리와 나. 너 포함해서도 말이지. 맞아. 그러고보니 할멈이 지부장이 됐댔지. 할멈한테 얼굴이나 한 번 비쳐야겠다."
"아무튼 기억해. 네가 정말 기관을 증오한다면 그들에게 그 증오가 보이지 않게 해야 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제발 좀…"
"넌 몸을 빼앗겼잖아. 그런데도 우리가 저 여자한테 욕 한마디도 못 해? 왜. 시라유키 히메리가 그렇게 대단한가? 이젠 성녀가 다 됐어? 개조인간 히무로 시라베도 받아들일 정도로 도량 넓은 여걸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는. 우리는 그냥 씻어버릴 수 있는 존재냔 말이야!"
"그런 뜻이 아니야. 모르겠어? 아무리 이 기관을 증오해도 우리는 거래를 했어. 이 기관과 함께해야 해. 그런데도 그렇게 행동하면 할수록 넌 이 기관에서 우리가 있을 장소를 더 좁히고 있는 거야. 화를 참았어야 했어. 화를 낼 일이 아니었다고."
차가운 금속으로 만들어진 인공지능의 미간은 움직이지 않았다.
"네 말이 맞긴 하네. 이건 내가 화를 낼 일이 아니야. 네가 화를 내야 할 일이었어. 네가! 당사자인 네가! 왜 너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소리쳐서 미안하다. 지부장 할멈한테 인사하러 갈 건데 너도 같이 가자."
"아니. 내가 가면 언니가 불편해하실 것 같아."
"아직도 그 할멈을 언니라 불러? 차라리 아주머니라 부르자. 언니는 너무 심하잖아. 나이 차이가 얼만데!"
나는 멋쩍게 웃고 도망치듯 지부장실로 향했다.
그래. 지부장실.
카텟 기관에서의 마지막 기억 또한 지부장실이었다. 그때와 달라진 것은 지부장실에 앉아있는 사람. 그리고 지부장실에 찾아온 사람뿐이다. 모든 것이 너무 달라졌다. 원래 모습과는 너무도 동떨어져버렸다.
나는 현재의 지부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요. 할멈."
"나 아직 오십대다 이 자식아."
"대몰락 시대에 나이 오십이면 할멈이지. 암흑시대에는 평균수명이 삼십에서 사십이었잖아. 비슷한 거야. 제2의 암흑시대에서 오십이면 천수를 누리고 계신 거야. 얼굴 보아하니 앞으로도 누릴 예정이시고. 예순까진 무리가 없으시겠어."
나는 자리에 앉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왜 이제야 돌아온 거냐. 재수 없는 놈. 연락 하나는 할 수 있었잖아."
"그래. 미안. 할멈한텐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드네. 그런데 난 내가 기관에 느닷없이 얼굴을 보였을 때 시라유키 히메리의 얼굴을 보고 싶었거든. 정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 같은 얼굴을 하더라. 사실 한 명 돌아오긴 했지?"
"나도 봤다. 보고를 들었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죽은 사람을 욕보이는 짓은 해선 안 돼. 그것도 그 사람이 노바디라면."
나는 테이블을 손으로 내려치려다 말고 대신 턱을 괴었다.
"할멈은 아무것도 몰라. 노바디는 죽은 적이 없어."
"너 지금 네 꼴을 꼭 봐야 한다. 뭔가에 홀린듯한 사람의 몰골이야. 너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
"시라유키 히메리보단 아니지."
지부장은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 듣고 놀랐어. 지부장 자진 사퇴. 그다음에는 화가 나더라. 뭐야. 나 이제 지부장 아니니 죗값 치른 거라고 할 속셈이야? 그 여자 대신 할멈이 지부장에 앉은 것만큼은 마음에 들지만."
"그 일은 사고였어…"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꼬맹아. 나는 너를 이해한다. 네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어. 그렇지만… 증오와 너무 친해지진 마라. 네 몸이 상할 거야."
"너무 늦게 말하셨어."
"복수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마. 난 널 아끼지만 히메리도 아껴. 그녀를 해치려다가 나한테 걸리면 절대 안 봐줄 거다."
"할멈이 생각하는 방식은 아닐 테니까 걱정 마. 난 갑니다. 내가 왔으니 이제 많은 게 바뀔 거야. 프로젝트도 그렇고…"
"히메리도?"
나는 문을 나서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진심이었다.
나나시: ……쿨…
나나시: ……음. …으……
나나시: …시라유키… 히메리…… 너만큼은…
나나시: …절대로…… 용서 못 해……
후루미나미 나몬: 흥미롭지 않아? 대체 어떤 꿈을 꾸길래 이런 잠꼬대를 하는지 말이야. 음질이 꽤 괜찮지? 작은 소리도 잡아내더라니까.
캐롤 브라이트: …당장 도청기 회수하세요. 혹시 다른 분들의 방에도 설치하셨나요?
후루미나미 나몬: 노코멘트하겠어. 네가 기분이 나쁘다면야 나나시 건 회수하겠지만. 난 의문이 생긴단 말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메리. 시라유키 히메리. 히무로의 그녀. 그런데 나나시는 시라유키 히메리를 죽도록 미워해. 같은 기관 소속인데도 나나시는 카텟 기관을 좋아하지 않는 눈치야. 식당에서도 곧잘 믿어선 안될 것 같다고 그랬잖아.
캐롤 브라이트: 그것도 들으신 거군요.
후루미나미 나몬: 맞아. 점점 내 안에서 떠오르는 이 가설이란…
후루미나미 나몬: 나나시가 카텟 기관을 적대하는 입장에서 게임에 참가했다는 거야.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태양이 바다 너머에서 떠오르자 시야가 점점 밝아졌다. 그러는 도중 나는 잠에 들고 있지 않은 한 사람의 모습을 봤다.
멀리서 보기에도 컸다.
히무로 시라베: 야가미다. 뛰어!
나이토 유즈루: 뭐? 느닷없이 무슨… 아니 저 새끼가!
모리는 욕설을 내뱉을 새도 없이 달렸다. 나이토가 가장 빨랐지만 셋 모두 다리를 조금도 쉬지 않았다. 안일하게 내통자에게 두 명의 인질을 넘겨주다니.
그러나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야가미가 깨어 있지만 다른 두 명에게 가까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았다. 야가미는 모닥불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수갑이 채워져 있었지만, 손 끝에는 가재 괴물을 꿰뚫은 막대기가 있었다.
야가미는 막대기에 꿰어 놓은 가재 괴물을 모닥불에 굽고 있었다.
야가미 토가: 카이다 씨가 찾아오신 모양이죠?
나이토 유즈루: 너 지금 뭐해.
야가미 토가: 눈이 떠지더군요. 세 분이 그렇게 다급하게 움직일 이유는 카이다 씨밖에 없지 않습니까. 교전한 것으로 보이진 않아 다행입니다. 그녀라면 여러분 셋을 상대로도 이길 수 있으니까요.
모리 레이코: 무기가 필요하겠어. 냉병기는 존재하지 않으니 횃불 같은 것이 적절하겠지.
야가미 토가: 어쩌면 머릿수를 한 명 늘릴 수도 있고요.
야가미는 모닥불 위에 얹은 가재 괴물을 한 바퀴 돌렸다. 껍질이 군데군데 타며 붉게 익어 있었고 기름과 익어가는 고기의 향이 퍼져 나왔다.
히무로 시라베: 너와 함께 싸우라고?
야가미 토가: 안 될 것 없죠. 저는 수갑을 차고도 마유즈미 씨와 하기와라 씨의 목을 조를 수 있었습니다. 두 손을 함께 휘두르는 것도 가능했고, 여러분들에게서 도망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다리는 묶여있지 않으니까요.
야가미는 가재가 익었는지 확인한 뒤 그것을 모닥불에서 꺼냈다.
야가미 토가: 그러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게 선택한 겁니다. 여러분 곁에 남기로.
야가미는 가재 괴물의 집게를 뜯어 껍질을 열었다. 불에서 갓 나온 것인데도 그는 뜨거운 기색을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이토 유즈루: 그걸 먹게?
야가미 토가: 내통자에게 먹여서 독의 유무를 확인하시겠다면서요?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이걸 먹고 죽는다면 여러분은 인명의 손실 없이 내통자를 하나 제거할 수 있겠죠.
야가미 토가: 그보다 두 분. 재미있는 장신구를 달고 계시군요. 팔을 묶는 이인삼각이 있던가요?
나이토 유즈루: 사정이 있어서 그랬다. 이 자식아.
모리 레이코: 외관은 중요치 않다. 유용한 지가 중요하지.
야가미 토가: 그렇군요. 궁금하진 않지만요. 두 분이 그렇다면 저도 캐묻지 않겠습니다.
나이토 유즈루: 어우 씨 기분 나빠. 이거 풀어버리자!
모리 레이코: 이젠 물이 무섭지 않나?
나이토 유즈루: 나중에 다시 묶으면 되잖아. 일단 풀자고!
야가미는 피식 코웃음을 내며 달착지근한 살코기를 떼어내 입 안에 넣고 씹었다.
히무로 시라베: 뱉어.
야가미 토가: 왜입니까? 맛은 상당히 훌륭해요. 당신 말대로 야참으로 이걸 먹을 걸 그랬습니다. 히무로 씨 당신은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시겠지만 제 몸은 끊임없는 영양의 공급이 필요해서 말이죠.
야가미는 기어코 가재 괴물의 고기를 삼켰다.
야가미 토가: 이제 제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군요.
히무로 시라베: 그래. 지켜봐야겠지. 자살이 벌어지더라도 해변에서 나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잠에 든 하기와라와 마유즈미를 깨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런 경을 칠 일이 다 있나!
하기와라 우시오: 내 이럴 줄 알았어. 그 괴물이 우릴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지. 이러다 진짜 누구 하나 뒤지게 생겼네.
하기와라 우시오: 별 수 없다. 나중에 정보 비싸게 팔려고 했는데 오늘 중대발표 하나 할게. 카이다는 물에 빠지면 죽어!
히무로 시라베: …그건 당연한 말이잖아.
하기와라 우시오: 그런 게 아니야. 카이다는 수영을 못 해. 근섬유가 다른 사람의 몇 배라서 물보다 비중이 높대. 그래서 바다에 빠뜨려 놓으면 어쩔 수도 없이 가라앉는댔어.
야가미 토가: 누군가에게서 들었다는 말투군요. 누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하기와라 우시오: 미도리카와 본인! 그러니까 믿어도 돼.
야가미 토가: …언제요?
하기와라 우시오: 그건 네 알바 아니고요. 애초에 이미 죽었잖아. 내 말이 거짓말인지 궁금하다면 나중에 한 번 빠뜨려 봐. 나도 카이다 존나 싫어. 존나 무섭고. 그러니까 내가 거짓말한다는 의심은 거둬. 날 믿어!
참고할 가치는 충분할 것 같았다. 하기와라는 유쾌한 인물일 뿐 멍청이는 아니었다.
모리 레이코: 나중에 시도했을 때 그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네가 내통자와 같은 편이라고 받아들이겠다.
하기와라 우시오: 씨발 세상에. 미도리카와가 그렇게 말했다니까. 안 통하면 걔한테 직접 가서 따지셔! 나가 뒤지라는 뜻이야.
히무로 시라베: 지금 여기서 허비할 시간이 없어. 카이다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안 이상 지체할 수 없을 것 같아.
야가미 토가: 지금 당장 문으로 향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리 레이코: 동의하지만 내통자의 말을 들으니 이 판단을 지지해도 좋을지 의문이 생기는군.
야가미 토가: 지금 당장에 있어 저는 여러분 편입니다. 카이다 씨는 가능한 한 저를 제거하려 드실 겁니다. 내통자가 하나 사라지면 모노로그 씨는 그녀를 버릴 수 없게 되니까요. 팽당하지 않는 안전권을 부여받을 수 있게 되는 거죠. 저는 그런 이유로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을 겁니다.
모리 레이코: 네가 밀수업자에게 가진 원한은 그녀가 죽음을 맞이할 만한 이유라는 건가?
야가미는 말이 없었다.
모리 레이코: 듣자 듣자 하니 빌어먹을 가정사라도 읊을 기세군. 너와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고 해서 너무 기고만장한 게 아닌가? 너는 흑막에게 모든 존엄성을 팔아넘긴 살인자다. 인간도 아니야.
나이토마저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나 또한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야가미 토가: 저도 압니다. 제가 인면수심의 멍청이로 보일 테죠.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맞아. 근데 관심 없어. 다음 밤이 오기 전에 일단 시련 하나를 끝내 두자고. 빨리 가즈아아아!
마유즈미 나데시코: 좋아! 가즈아아아!
갈색 문은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경첩이 허공에 박힐 수 있다면 그런 문 또한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럴 수 없기에 나는 이런 형태의 문을 처음 보았다. 문이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마저 신비했다.
문손잡이에는 금으로 만들어진 듯한. 얼룩덜룩한 줄무늬를 가지고 있는 뱀 한 마리가 웅크린 조각이 붙어 있었다. 당장 움직일 것 같을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또한 문에는 다음과 같은 단어가 적혀 있었다.
'바다뱀'
하기와라 우시오: 바다뱀?
히무로 시라베: 심상치 않은데…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디서 파도소리 안 들려? 옆에서 들리는 것 말고. 문에서.
마유즈미의 말이 맞았다. 문 너머에서도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 말고도 이상한 고동 소리 같은 것도 들려왔는데. 기차나 배의 고동처럼 들렸다. 바다인가? 배가 있나? 이 너머에 무엇이 있지?
모리 레이코: 더 관찰한 뒤. 아침식사를 하고 출발할 텐가?
히무로 시라베: 그럴 시간이 없어.
체험이 무엇보다 확실한 지식임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단숨에 문을 열어젖혔다. 그 문을 여는 순간. 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고…
…내 몸이 바닥에 쓰러지는 과정이 길게 느껴진다는 생각이 든 순간…
…그 감각이 무색하게도 나는 탁 트인 환경에 발을 디디고 서 있었다. 너무 갑작스러워 환각이라 느껴질 정도였으나 내 의식은 또렷했다. 파도소리는 여전히 들려왔지만 모래도, 가재 괴물들의 질문 소리도 없었다. 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폐공장.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커다란 배. 고동 소리와 옮겨지는 컨테이너 박스들. 무역 환경. 수상한 행동거지의 사람들. 그리고 또 폐공장.
항구다. 나는 그곳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때는 밤이었고 지금은 낮의 환경이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몰라볼 만큼 풍경이 다르지는 않았다.
히무로 시라베: 야가미와 결투를 치른 그곳이다.
그렇게 첫 번째 시련이 시작되었다.
나는 어느 정도 탐색을 마치고 다시 문으로 향했다. 내가 건너온 문은 아무리 멀어져도 그 자리에 계속 존재했다. 경첩이 달려 있었지만 정작 경첩을 고정할 만한 물체는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문이 우뚝 운하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해변의 문과 똑같았다.
또한 나 말고 다른 이들은 문을 인식하지 못했다. 오직 나만이 문을 인식할 수 있었다. 다른 이들과의 상호작용은 가능했지만 내가 느닷없이 허공에서 나타난 것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 XXXX년 8월 12일인데."
행인에게 연도와 날짜에 대해 물었을 때는 검열된 듯이 정보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웅얼거림이 정보를 대신했다. 나 말고 다른 이들은 어떨지 시험해봐야만 했다. 그리고 하나 더. 나는 항구에 굴러다니는 담배꽁초를 하나 주워 손에 쥐었다.
문고리에 손을 대는 찰나의 순간 사이.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순간 모든 풍경이 바뀌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깨어났구나?! 다행이다!
내 눈 앞에 마유즈미의 얼굴이 보였다. 뺨이 얼얼하게 아팠다. 누가 내 의식을 되돌리기 위해 물리적 충격을 가했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누가 그랬는지마저도.
마유즈미 나데시코: 얼마나 놀랐다구. 몸은 괜찮아? 어디 아픈 데는 없어? 감기 안 걸렸어? 모리가 너한테 바닷물을 한 바가지 부었어!
히무로 시라베: …난 괜찮아.
나는 땅에 쓰러져 있었고, 등에서는 모래가 느껴졌다. 옷과 몸에서는 기분 나쁜 축축함이 느껴졌다. 몸을 일으키고 얼굴에 묻은 바닷물의 소금기를 손으로 쓸어내리자 눈이 따가웠다. 무엇보다도. 나는 문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난 문을 열고 왔는데 왜 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거지?
나이토 유즈루: 왜긴 왜야. 이 새끼야. 너 기절했잖아! 문에 손을 대자마자 그냥 픽 쓰러져 버렸다고.
히무로 시라베: 너희의 입장에선 그렇게 보였단 말이지?
하기와라 우시오: 네 입장에서는 다른 걸 봤다는 말투네. 암튼 살았으니 됐어. 들어가도 괜찮은가 봐!
손을 펴자 그 안에 꾸깃꾸깃 접혀 있는 담배꽁초가 보였다.
히무로 시라베: 문 안에서 손에 넣은 물건을 문 밖으로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건가…
모리 레이코: 꿈이라도 꿨나. 프로파일러? 그 담배꽁초는 어디서 가져왔지?
야가미 토가: 히무로 씨. 문 안에서 무언가를 보신 것 같군요.
히무로 시라베: 본 게 아니라 체험했지. 너희의 입장에선 내가 기절한 것처럼 보였겠지만
모노로그: 실제로는 다르다.
모노로그가 내 말을 가로챘다.
야가미 토가:이제야 모습을 드러내시나요?
하기와라 우시오: 어서 오고!
나이토 유즈루: 다르다는 게 무슨 뜻이야. 그럼 기절한 게 아니라고?
모노로그: 유사하지만 다르다. 그러나 기절은 시간이 지날 경우 깨어날 수 있는 데에 반해. 문은 조건을 만족하지 못할 경우 깨어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뭐?!
모노로그: 저 문은 시련으로 통한다. 문 안은 시련이 이루어지는 또 다른 세계지. 이번 시련은 미도리카와 아쿠토의 과거. 바다뱀이다.
모노로그: 문고리에 손을 대는 순간. 경주마의 의식은 문 안의 세계 속으로 진입한다. 그와 동시에 경주마의 육체는 의식을 잃는다. 기절한 것과 유사하지. 그러나 모종의 사유로 경주마의 의식이 다시 문고리를 만지고 돌아오지 못한다면, 경주마는 의식을 되찾을 수 없게 된다.
히무로 시라베: 식물인간이 되는 건가?
모노로그: 더 나쁘지. 뇌사한다.
모리 레이코: 뇌사라… 흠.
하기와라 우시오: 뭘 흥미롭다는 듯이 듣고 있어. 드디어 미쳐버린 걸까요?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무 위험해…
히무로 시라베: 의식이 날아간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지만 내가 경험한 바로는. 맞아. 나는 문고리에 손을 대자마자 어떤 항구로 이동했어. 야가미와 결투를 했을 때 본 곳과 같은 풍경이었어.
야가미 토가: 잠깐만요. 정말 그 장소가 맞았습니까?
히무로 시라베: 낮이긴 했지만 똑같은 장소였어.
모노로그: 시련의 종료 조건은 문 안 세상에 있는 미도리카와 아쿠토를. 문으로 데려와 끄집어내는 것이다.
나이토 유즈루: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야가미 토가: …설마.
모노로그: 시련의 주인을 문 밖으로 끄집어낸다면, 그 자는 살인 게임에 참가할 권리가 주어진다. 시련 안에는 여러 변수가 들어있고. 그 변수는 너희가 미도리카와 아쿠토를 데려오지 못하도록 막을 수도 있지.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시련 속 세계는 서서히 붕괴하다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문 또한 사라지게 되지. 그때 시련 안에 남아있는 이들은 전부 뇌사하게 될 것이다.
살인 게임의 새 참가자라고?
히무로 시라베: 잠깐. 문을 통해 해변으로 데려온 미도리카와에게도 탑에서의 권리가 주어져? 전용실이나 다이얼로그 같은 것들이?
모노로그: 물론이다. 그녀는 생전 미도리카와 아쿠토가 가지고 있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몇 명이 되든 간에 말이야.
하기와라 우시오: 그게 가능해?
모노로그: 탑 안에서 불가능이란 없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말장난 말고. 이게 어떻게 가능해?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하잖아. 진짜 무슨 백 투 더 퓨쳐냐고.
모리 레이코: 온갖 현상에도 최대한 납득하려 했지만. 역시 이것은 받아들이기 너무 심하군. 우리가 어떻게 밀수업자의 과거를 직접 데려올 수 있는지 말하는 게 좋을 거다.
모노로그: 내가 말해줄 것 같다면야 그렇게 고집을 부려도 돼.
야가미는 말이 없었다.
야가미도 모르는 건가? 그를 물끄러미 보자 야가미는 단안경을 닦았다. 수갑이 묶여 있었기에 심히 불편해 보였는데도 그렇게 했다.
눈길을 피하는 동작이었다. 나는 그가 대답을 피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야가미 토가: 하지만 탑에서는 다릅니다. 그 이유를 나가야 한다는 절박감이 대신합니다. 수사 방법을 다르게 적용하시지 않으면 오답을 고르시게 될 겁니다. 히무로 씨.
히무로 시라베: 현실?
야가미 토가: 예. 현실 말입니다.
히무로 시라베: 왜 현실과 탑을 구분하지? 이 곳도 우리 입장에서는 현실일 텐데.
눈을 약간 크게 뜸.
히무로 시라베: …….
모리 레이코: 내통자. 대답할 준비를 해라.
모리는 모노로그에게서 고개를 홱 돌려 야가미를 보았다. 성큼성큼 그를 향해 다가가자 야가미가 작게 신음했다. 모리는 냉랭한 눈빛으로 야가미의 가슴팍을 보았다. 그녀에 비해 몸집이 큰 야가미를 보고 있음에도 그녀는 조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야가미의 얼굴이 자신의 눈높이에 있는 듯 그녀는 죽일 듯이 그의 가슴팍을 노려봤다.
모리 레이코: 장담컨데. 성불구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네가 알고 있는 것을 털어놓아야 할 것이다.
모노로그: 하. 재미있는 협박도 다 있군. 야가미 토가. 저런 말에 굴복할 셈인가? 어떤 꼴을 겪더라도 얻고 싶은 게 있었기에 나와 거래한 것 아니었나?
야가미 토가: 거래에 대해서 괜히 말 얹지 마시죠. 모노로그 씨.
모리 레이코: 박쥐 짓은 거기까지다. 너는 선택해야 한다. 선택을 해야 하는 점에 있어 네겐 선택권이 없다. 인권도 없지. 생존자인가. 흑막인가? 날짐승인가. 들짐승인가? 말하는 게 좋을걸.
모노로그: 그래. 야가미 토가. 어떻게 할 텐가?
하기와라 우시오: 모리 편에 붙고 나중에 숙청당하기 vs 모노로그 편에 붙고 당장 고자되기. 밸런스 게임!
야가미는 모리와 모노로그를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그라도 두 독장군 앞에서 완벽한 선택을 내리기는 어려워 보였다.
모리를 억제하던 나이토 또한 그녀를 말리지 않고 야가미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하기와라는 여전히 이 상황 자체가 즐거운 듯이 웃었고, 마유즈미도 강단이 있는 눈빛으로 야가미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실. 이 사안에 대해서는 모노로그에게서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모노로그. 이 곳은 가상현실이야?
모노로그는 내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모노로그: …히무로 시라베. 어디까지 알아냈지?
히무로 시라베: 많이는 아니야.
모리 레이코: 그건 또 무슨 뜻이지.
하기와라 우시오: 뭐야. 진짜 매트릭스라는 거야? 그럼 매트릭스 안의 쏘우 안의 헝거게임 안의 쏘우 너머에 매트릭스가 저 문 안에…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러니까 대강… 저 문은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굴 같은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그거 느낌 있네! 토끼굴! 그러니까 저기 너머에 이상한 나라가 있다 이거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일단 나 찜!
모리 레이코: 농담을 할 때가 아니다. 가상현실?
모리는 그녀가 좀처럼 보이지 않던 낭패감을 드러냈다.
모리 레이코: 내가 보고 느끼고 있는 것이 이데아는커녕. 물질세계조차도 아니라는 건가?
나이토 유즈루: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막 나가잖아!
나이토는 야가미에게 묻듯이 그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야가미는 대답했다.
야가미 토가: 묵비권을 행사하죠.
모리 레이코: 예 또는 아니오로 말해. 언제부터 가상현실이었던 거지? 문을 열었을 때부터?
히무로 시라베: 그것 또한 좋은 가설이지만 내 생각은 달라. 우리가 이 탑에 온 순간부터 이 곳은 가상현실이었을 거야.
모리 레이코: 줄곧?
히무로 시라베: 그러면 거리 왜곡이나 창문 등의 온갖 이상현상을 납득할 수 있어. 시련의 구조도 마찬가지야.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뇌에 접촉해 기억을 읽을 수 있다면 그걸 기반으로 가상의 공간을 구축하는 것도 가능할지도 몰라.
히무로 시라베: 사실을 말하자면. 진실은 아무래도 좋아.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살아있고. 우리는 모종의 기술 덕분에 정말 과거로 향하는 것이든, 전부 돈을 받고 과거의 사람을 연기하고 있으며 이 곳도 세트장의 일부이든, 이곳이 현실이든 가상현실이든 아무래도 좋아.
야가미 토가: 중요한 것은 시련을 세 개 끝내야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죠. 그 전까진 몇 명이 죽어나갈지도 모르는 위기 또한 중요합니다.
야가미 토가: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저희에겐 이 두 가지 선택지뿐입니다. 탑에 가면 가상현실에 대해 더 자세한 논의를 나눌 수 있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탑으로 돌아가야 하고요.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지만 그건… 미도리카와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아?
마유즈미의 표정에 망설임과 죄책감이 깃들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어디가?
마유즈미 나데시코: 정말 우리가 과거의 미도리카와를 데려올 수 있다면… 과거의 미도리카와의 입장에선 느닷없이 살인 게임 속으로 납치당하는 거잖아. 우리가 모노로그에게 당한 짓들을 미도리카와에게 하는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미도리카의 삶을 빼앗고 죽이는 거랑 마찬가지란 말이야. 난 좋지 않은 것 같아. 할 만한 일이 아니야…
히무로 시라베: 가혹하지만 그녀를 통해 우리는 카이다를 억제할 수 있어. 야가미가 미도리카와를 죽였음을 감안하면 야가미마저 억제할 수 있지.
히무로 시라베: 그리고 엄밀히 말해 해변으로 데려오는 미도리카와는 미도리카와가 아니야. 그녀는 죽었어. 오는 것은 미도리카와의 과거 모습이야. 마음 약해질 필요 없어. 살아있는 사람도 아니니까. 정보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해.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지만 미도리카와가 스스로를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사람처럼 괴로워하고 생각할 수 있으면 어떻게 해…
히무로 시라베: 알아낼 방법이 없을뿐더러 그렇더라도 우리에겐 여유가 없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데려와야 해.
모리 레이코: …밀수업자의 원수. 밀수업자의 살인범. 밀수업자가 원한을 가진 사람은 전부 내통자다. 자초지종을 설명해 그녀를 포섭할 수 있다면 그녀는 우리가 내통자에게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창이 될 것이다.
모리 레이코: 난 찬성한다. 가서 밀수업자를 끌어낸다. 지금 생각할 것은 밀수업자의 재참가가 어떤 이점을 불러일으킬지 뿐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캬. 역시 싸이코들이 일처리 하나는 야무지네. 나도 찬성! 우리가 잘만 하면 미도리카와 세 명을 탑으로 다시 데려올 수 있는 거 아니야? 미도리카와가 복사가 된다고.
모노로그: 그리고 미도리카와 아쿠토가 되살아나질 않길 바라는 사람이. 그것을 막아서게 되겠지?
야가미 토가: …….
모노로그는 그것을 위해 카이다와 야가미를 보낸 것이군. 내통자에게 적대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사람을 억제하기 위해서.
미도리카와의 시련을 만들어 놓고 굳이 억제책을 보내는 것은, 시련의 주인이 미도리카와가 된 것이 모노로그의 의지가 아니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특정 조건으로 인해 미도리카와가 시련의 주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어쩌면 첫 번째 피해자가 시련의 주인이 된다는 규칙이 있었을지도.
결국 모든 살인 게임의 흑막은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는 카의 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참가자를 통제하고 죽이기 위한 규칙이 스스로를 옥죈다. 알파걸마저 자신의 살인에서 도망치지 못했다.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돼…
모노로그: 모두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길 바라지. 내 내통자들에게는 실력과 유능함을 증명할 기회. 다른 이들에게는 흑막과 내통자를 견제할 수 있는 기회. 그녀 자신에게는 복수의 기회가 될지도 몰라.
모노로그: 그렇게 꿈을 꾸는 너희들을 갈아 마시며. 살인 게임을 배를 불릴 것이다.
모노로그는 모래사장 밑으로 사라졌다.
나이토 유즈루: 일단 나는 반대야.
나이토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 기억상으로 그만큼 단호하게 말하는 그를 몇 번 본 적이 없었다.
모리 레이코: 칸트주의자는 저 두 명이 끝인가?
나이토 유즈루: 죽은 사람한테 손을 대는 건 둘째 치고. 다른 사람을 납치해서 우리랑 죽고 죽이게 만들겠다고? 난 그런 짓 못 하겠다. 기사가 할 짓이 아니야.
모리 레이코: 기사들에게는 필요악이라는 개념도 없나? 더 많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감수할 수 없는 건가? 위선적이군. 네가 참여하면 밀수업자를 데려오는 일이 얼마나 쉬워질지 감히 짐작은 되는가?
모리는 나이토에게 말했지만. 그녀의 말은 나의 폐부를 찔렀다. 이 곳이 가상현실이 아니더라도 나는 미도리카와와 시련에 대해 이렇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까? 의문이 꼬리를 물려 하자 나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마음을 어지럽혀선 안 됐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이토 유즈루: 그래. 그렇게 하면 가장 나은 세상이 되겠네. 영문도 모른 채 미도리카와 세 명이 살인 게임에 참여하고. 내통자들은 다 초주검이 되고. 아주 행복하겠어!
나이토 유즈루: 그런데 나는 가장 나은 방법을 택하는 게 아니라. 가장 옳은 방법을 택하려는 거야. 아무리 돌아가야 하더라도 난 절대 안 굽혀.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모리 레이코: 칸트주의자와는 이성적인 담론이 형성되지 않는군. 하…
모리 레이코: 그렇다면 너는 나와 문 앞에서 첩자를 견제하기로 한다. 첩자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있다. 의식을 잃은 자들을 첩자의 마수에게서 지켜내도록 하겠다.
나이토 유즈루: 그래! 그렇게 하자고. 나도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똑바로 감시할 거야.
나이토가 으르렁거렸다. 모리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모리 레이코: 서예가 너 또한 스스로의 손을 더럽힐 수 없다면야 이 곳에 남아라.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말이야.
나이토 유즈루: 그래. 마유즈미. 마음에 걸리면 안 가도 돼. 억지로 갈 필요 없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일단 생각 좀 해 볼게.
그녀에게 참여를 종용한다고 한들 좋아질 일은 없었기에 나는 납득했다.
야가미 토가: 전 시련에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히무로 시라베: 아니. 미도리카와의 과거라면 너도 저 안에 있을 거야. 넌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니 아무리 체격이 다르더라도 누가 널 알아볼지도 몰라. 그럼 차질이 생겨. 우선 넌 이곳에 남는 게 좋겠어.
하기와라 우시오: 뭐 그럼 선발대로 내가 갈 수밖에 없겠네!
하기와라와 나는 시련에 먼저 참여해 어떻게 미도리카와를 꾀어낼지 탐색하고, 나머지 네 명은 문 밖에서 대기하게 되었다.
야가미 토가: 혹시 문 안의 시간은 언제인지 아십니까?
히무로 시라베: 문 안의 연도는 모르지만. 8월 12일이라고 들었어.
야가미 토가: …당일이군요. 이날 밤 미도리카와 씨와 저는 카이다 씨에게 습격당합니다.
히무로 시라베: 그럼 시간이 부족하겠어. 두 시간 동안 미도리카와를 꺼낼 수 있을만한 도구나 방편을 찾아보고. 문 밖으로 나온 뒤 야가미와 본격적으로 착수하자.
모리 레이코: 좋다. 불가능하다고 느끼면 도망쳐라.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이 중요하다.
야가미 토가: 살릴 수만 있다면 얘기가 다르겠죠.
나이토 유즈루: 진짜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응?
하기와라 우시오: 이 새끼들 사망 플래그 세우는 거 보게. 적당히 해! 간다!
하기와라가 쑥스러운 티를 감추려 하며 문고리에 손을 댔다. 곧 그의 몸이 모래사장에 털썩 쓰러졌다.
마유즈미가 놀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락없는 기절처럼 보였으니. 그래도 세 번째 보는 장면이라면 괜찮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 조심해서 갔다 오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히무로 시라베: 다녀올게. 모두들.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조심해야 해. 알겠지? 하기와라에게도 전해 줘.
히무로 시라베: 그러도록 할게.
하기와라의 몸을 문 앞에서 치우고 나는 문고리를 잡았다.
하기와라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반응이 없자 그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 문 안에 하나의 세계가 들어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조오오온나 신기하네. 여기도 바다다아아아! 바다가 복사가 된다고! 미도리카와도 복사할 수 있을까?
히무로 시라베: 목소리 좀 낮춰. 이목을 사 봤자 좋을 일은 없어.
항구를 지나는 이들은 하기와라에게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는 것 같았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나쁠 일도 없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자. 로봇맨. 이제 우리 어딜 찾아가 볼까?
히무로 시라베: 네 직관을 따라 행동해. 그럼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될 거야.
그에게서 등을 돌려 인적이 드물어 보이는 거리로 향하는 사이에 하기와라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무슨 소리야. 그게 끝이야?
히무로 시라베: 아. 맞아. 마유즈미가 네게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전해 주랬어.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같이 다니는 거 아니었어?
히무로 시라베: 함께 찾아보자고는 말하지 않았지. 지금 말할게. 흩어져서 찾자.
하기와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간에 잡힌 주름에는 종이도 고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야. 지금 장난해? 여기에 무슨 야쿠자랑 갱단 존나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우리 같은 청소년들은 해코지를 당하지 않겠어?
히무로 시라베: 맞는 말이야. 아까는 나 혼자이기에 시험할 수 없었지만…
나는 다이얼을 돌려 하기와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왜 옆에 있는데 전화를 걸… 전화가 되네?! 다이얼로그가 여기선 통해!
히무로 시라베: 다이얼로그가 통해서 다행이네. 비상상황이 생기면 그걸로 전화해. 어떻게 해서든 도와주러 갈게.
하기와라 우시오: 야. 아무리 그래도 여기에 날 던져두고 그냥 가는 건…
히무로 시라베: 오늘은 기나긴 낮이 될 거야.
나는 곧장 조달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몇십 걸음을 걸었을 때 하기와라가 내게 외쳤다.
하기와라 우시오: 히무로! 엿 먹어!
몸조심하라는 듯한 목소리가 멀리서 울려왔다.
후루미나미 나몬: 가상현실?
카나리 케이토: 가상현실?!
후루미나미 나몬: 정말 가상현실이라 이거지…
똑같은 말을 들은 두 사람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다. 한쪽은 흥미. 다른 한 쪽은 공포.
히무로 시라베의 말은 하기와라 우시오에게 있어 뼈저리게 느껴지는 사실이 되었다.
40분이 겨우 지난 시점에서 하기와라는 경찰들을 피해 도망치고 있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야아아! 너희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바다뱀을 찾은 건 너잖아!"
하기와라 우시오: 누가 총기나 멸종위기종을 찾는댔어. 바다뱀을 찾는다니까!
"그게 거래하자는 거랑 뭐가 달라!"
하기와라 우시오: 염병 니미. 후. 후. 후우. 후우우! 여보세요. 여보세요?! 히무로 들리나?! 좆됐다! 좆됐어! 짭새한테 쫓기는 중이야! 아니 그 새가 아니라 경찰 말이야 경찰! 어아아아악! 문으론 못 도망가. 문이랑은 정반대 방향으로 튀어버렸어!
30분을 도망친 뒤 하기와라는 체포당해 구치소에 갇혔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저 진짜 가야 된다고요. 진짜 약속에 늦게 생겼다니까!
하기와라 우시오: 나 이 새끼들이랑 연관도 없다니까! 그냥 찾는 사람이 있어서 말을 걸었더니 나까지 단속에 걸린 거라고요! 난 술냄새도 싫어하는 모범생이라고. 중학교는 다닌 적 없지만!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내가 무슨 운반책이야. 비밀 암호는 뭐고! 내가 뭘 운반해! 나는 술 심부름도 제대로 못 했다고. 아니 그 심부름이 아니라 집에서 하는 심부름. 비약 한 번 좆되네!
하기와라 우시오: 아저씨들. 사실 약 해봤죠? 야쿠자랑 커넥션도 있지? 여기 돌아가는 꼴 보니까 느낌이 오더만. 이 단속도 사실 보여주기 식이잖아. 여기 조직 애들이 보석금 내면 풀어주고. 뒤에서 돈 받고. 상부상조. 나쁜 놈 안 잡는 경찰.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내가 독립하기 전까지 없는 사람 취급당하면서 산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날 계속 여기에 가둬놓으신 다음에 내 변호사랑 얘기 한 번 해 봅시다. 누구냐고? 사실 지금은 변호사가 없어. 변호사가 필요한 줄 알아야 변호사를 고용하지. 근데 내가 고용하면 그때부터 재밌어질 겁니다. 왜냐면 댁들이 나한테서 아무것도 못 찾았잖아! 날 내보내 달라고!
"미친놈이 한 시간 내내 저렇게 소리를 지른다니까요?"
"그럼 두 시간 더 가둬놔."
하기와라 우시오: 이거 열어어어어! 열라고!
"야! 너 때문에 우리까지 오래 갇히게 생겼잖아!"
하기와라 우시오: 남 탓 작작 하자. 애초에 니들만 아니었어도 나는 지금쯤 산책이나 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괘씸하네. 야. 개새꺄!
"저 자식 독방에 가둬 놔! 어떻게든 조용히 시키던가!"
하기와라 우시오: 알겠어요. 알겠어. 그럼 최소한 내 전화기라도 다시 줘요. 진짜 전화해야 해. 약속에 늦는다고 해야 한단 말이야.
"어떤 전화를 할지 어떻게 알고 보내? 가만히 있어. 조사가 끝내면 보내줄 테니까."
하기와라 우시오: 조사 끝냈으면서 무슨 개소리세요. 당장 날 내보내지 못해?!
그때 경찰서의 문이 열리며 유치장 쪽으로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하기와라는 그를 알아보았다. 체격이 작고 여러 면에서 그가 알던 사람과 다른 모습이었지만. 같은 사람이라고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었다.
머리카락 색. 그리고 태도가.
토가: 이 곳 벽이 상당히 얇군요. 밖에서도 소리가 들려요.
"하. 무슨 일이니? 협상가 꼬마야."
토가: 누가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말도 안 되는 소동에 저희 사업의 사람이 휘말렸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키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눈대중으로 160cm 중반 정도 될 것 같았다. 몸집도 마찬가지였다. 하기와라가 평소에 알고 있던 192cm의 똑똑한 떡대는 온데간데없이. 하기와라가 보고 있는 것은 올백머리를 단정하게 넘기고 정장을 입고 있는 좁은 어깨의 샌님뿐이었다.
입을 쩍 벌리고 있다간 턱이 떨어질 것 같은 기분에 하기와라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하기와라 곁의 소년이 야가미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야가미는 아무 말 없이 품 속에서 봉투를 하나 경찰관에게 건넸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 역시 부패경찰이네. 내 말이 맞네!
"넌 닥쳐! 그보다 넌 간도 크구나. 그 나이에 이런 돈을 주려 자진해서 다니고."
토가: 걱정 마세요. 곧 저희는 이 일에서 빠질 거니까.
"말은 잘해요. 너는 앞길도 창창한 놈이 이런 곳에서 썩으면 안 돼."
토가: 저도 알아요. 앞길이 밝지는 않지만 새로운 길을 밝게 걸어갈 수 있는 사람도 하나 알고요. 그 사람에게서 약속을 받았어요. 이제 발을 뺄 때가 왔다고. 불법적인 일을 하는 건 이제 끝이라고요.
"나는 못 믿겠다. 네가 바다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그 녀석도 남들과 똑같은 쓰레기 자식이야."
토가: 제가 믿는다는 게 중요한 거죠.
경찰이 봉투를 자신의 주머니에 찔러 넣자 다른 경찰들이 유치장의 문을 열었다. 하기와라는 욕지기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막았다.
토가: 그래서. 바다뱀을 찾으신다고 들었어요. 당신은 일단 사무실로 돌아가세요. 바다뱀이 정산을 드릴 겁니다.
"아. 넵!"
하기와라와 도피하다가 함께 붙잡힌 남자는 경찰서 밖으로 후다닥 달려 나갔다. 야가미는 하기와라보다 키가 조금 작았지만 그럼에도 당당한 태도나 위압감은 192cm의 그가 보였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냥 바다뱀을 찾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저 자식이 무슨 약을 원하니 어쩌니 하더라니까. 덕분에 나까지 잡혀 들어왔어!
토가: 그건 죄송하게 되었어요. 저흰 이미 팔 만한 건 전부 처분했는데도 아직도 상황을 모르는 모양이군요.
토가: 당신은 바다뱀을 어떤 이유로 찾은 거죠? 그걸 들어야겠어요.
야가미는 경찰이 가지고 있던 하기와라의 다이얼로그를 건네받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내 다이얼로그 주면 알려줄게.
토가: 다이얼로그요? 이걸 그렇게 부르시나요? 휴대용 단말 같군요. 바다뱀을 찾은 이유를 말하시면 다이얼로그를 돌려드리죠.
하기와라 우시오: 미치겠네. 대체 왜 안 돌려주겠다는 거야?
토가: 일단 따라오세요.
야가미가 다이얼로그를 가지고 경찰서 밖을 나서자 하기와라가 다급하게 그를 쫓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대체 왜 그러냐고! 부패 경찰이랑 놀아나는 것부터 알아봤어. 너 마피아 시티 주민이지? 근육이 없어도 레벨 50 보스셔 아주.
토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안전의식 때문이라고 말해 드리죠. 아무런 문제 없이 발을 빼려고 해도 미역과 문어 다리들이 그녀를 붙잡고 놔주려 들지 않아요. 기껏 설득에 성공했는데도.
토가: 아무튼 저희도 저희 나름대로 안전을 추구해야 할 상황이 온 거죠. 적어도 느닷없이 바다뱀을 찾는 사람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 싶군요.
'아. 썅. 아무 생각 없이 바다뱀 찾지 말고 시간이나 때울걸 괜히 나섰다가 팔자 조졌네. 이걸 어쩌지?
좋아. 하기와라 우시오. 숨 쉬고. 제정신 차리고. 급발진 말고.
네 눈 앞에 있는 건 과거의 야가미야. 지금 잘못 행동했다간 야가미가 너를 의심할 수도 있어. 뭔가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지금은 그냥 넘어가자. 적당히 둘러대서 다이얼로그를 돌려받은 다음 문으로 돌아가는 거야.
좋았어. 가자.'
하기와라 우시오: 일단 그쪽 사업 얘기니까 댁들 사무실에서 얘기하자고.
'아… 일났다.'
사무실. 하기와라는 존 윅같은 범죄 영화에 나오는 것보다는 규모가 작다고 느꼈다. 누가 보면 작은 회사로 보일만큼 검소했고 깔끔했다. 횃불도 곰 가죽도 고급 카펫도 시가도 없었다. 마치 곧 홀로 남겨질 건물을 보는 느낌이라고 하기와라는 느꼈다.
하기와라가 앉은 방 또한 초고교급 밀수업자의 사무실이라기보다는 부동산의 미팅룸 같았다. 하기와라는 '바다뱀' 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그녀의 모습을 흘끔거렸다.
야가미는 그녀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고. 하기와라는 생각했다. 탑에서 듣던 목소리와도 달랐고, 머리는 가발이었고, 얼굴에는 가면을 썼는데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하기와라는 바다뱀의 정체가 미도리카와임을 알고 있음에도 긴가민가한 심정을 느꼈다.
토가: 당신에게 할 말이 있대서 데려왔어요. 누구인지 알아요?
바다뱀: …전혀.
와 진짜 큰일 났다. 진짜 미치겠네. 이 새끼들 뭐야. 아니 진짜 뭐라고 대답해야 해. 죄송합니다 저 그냥 나갈게요라고 솔직하게 말할까?
하기와라는 눈동자를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속으로 마구 날뛰고 혼란을 느꼈다.
바다뱀: 왜 그래. 사무실이 허전해서 실망한 건 아니겠지?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전혀. 오히려 미니멀리스틱해서 좋은데?
이상한 말 얹지 마. 미친놈아!
바다뱀: 거래를 뚫으려 온 것 같은데 아쉽지만 그럴 순 없어.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왜? 내가 가져온 딜을 들어보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데. 내가 말이야 기막힌 건수를 가져왔거든.
바다뱀: 듣기 좋은 소리지만 이제 손을 뗄 거야. 그래서 안 돼.
토가: 너무 깊게 파고들려 하진 마세요. 당신이 누군지는 몰라도 제 안의 인상은 이미 좋지 않습니다. 느낌이 좋지 않아요.
하기와라 우시오: 내 다이얼로그나 내놔.
토가: 거래보다 다이얼로그가 중요하신 것 같군요. 거래를 하러 왔다면 거절을 하더라도 한 번 더 권유해보는 것이 이 바닥인데. 당신은 제안은커녕 어떤 거래를 하는지도 말하지 않았어요. 말을 풍선처럼 부풀리고 계시니 들통이 날 수밖에 없죠.
토가: 당신은 바다뱀에게 목적을 가진 채 그녀를 찾았고 당신 말관 달리 거래에 대한 내용은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은 전혀 뒷세계의 냄새가 배어있지 않군요. 당신은 뭐죠?
하기와라 우시오: 마피아 시티 주민들 텃세 좀 보게. 나도 여기로 이사오긴 했는데 햇빛 못 받고 산 건 너희랑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니들만 어두운 척하지 마라?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거래 얘기를 듣고 싶다 이거지. 어디 보자… 아까까지는 말을 안 하고 못 배길 것 같았는데 이런 취급을 당하니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이게 무슨 일이야! 기싸움하려는 건 아니니까 기다려 봐 봐.
하기와라가 다이얼로그를 돌려받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는 동안. 정장을 입은 두 사람이 바다뱀의 건물을 보고 있었다. 한쪽은 키가 평균 이상이었고 다른 한 쪽은 그것보다 작았다. 키가 큰 쪽은 커다란 회사원 가방을 쥐고 있었다.
"이 건물이 맞는 것 같지?"
"응. 여기가 분명해. 그리고 지금부터는 쉿. 조용! 우린 은밀하게 행동해야 해. 그 뭐냐. 스파이처럼!"
"은밀할 필요는 없어. 저자세로 나가지만 않으면 돼."
정장을 입고 모자를 눌러쓴 그들은 어깨를 펴고 바다뱀의 건물 앞으로 걸어갔다. 경비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용건이지?"
"저희 사람을 한 명 데리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연두색 머리 놈 말이야?"
"맞아요. 어쩌다가 헤어졌는데 이 건물로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모자를 쓴 이 중 키가 작은 쪽이 소리쳤다.
"저희는 그가 필요합니다. 들여보내 주시죠."
"지금 바다뱀과 거래 얘기 중이야. 그럴 순 없어. 끝나면 돌려보내 드리지."
"저는 거래를 중단시키고 저희 사람을 빼내려는 게 아닙니다. 거래에 보탬이 되려는 겁니다."
키가 큰 쪽이 가방을 열어 안에 가득 차 있는 현찰을 보여주었다.
"……."
바다뱀은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경비의 말을 경청했다.
바다뱀: 오호. 그래? 가방 가득 가져왔다고? 들여보내 봐. 그 정도로 큰 건수면 제대로 들은 뒤에 거절하는 게 예의일 테니까.
토가: 바다뱀. 당신…
바다뱀: 알아. 알아! 나도 안다고. 토가. 매사에 왜 그리 우려가 많아? 이리 와.
바다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야가미의 머리에 손을 대고 마구 헝클어뜨렸다. 야가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정돈했다.
토가: 장난은 집어치우세요.
바다뱀: 너도 재미있으면서 왜 그래. 어이구. 이러다 화를 내시겠어요. 우리 토가?
야가미 토가: 제안을 듣기만 하세요. 결국 마지막은 거절로 끝내야 해요. 마지막으로 크게 한 번 하려는 생각이시라면 접어 두시고요.
바다뱀: 내가 왜 그렇게 하겠어. 네가 그토록 뜯어말렸는데. 그리고 내가 한다고 한들 뭐가 문제가 돼? 아무도 우릴 노리진 못할 거야. 아무도!
토가: 당신이 항상 그런 식이기에 제가 갈수록 편집증적이 되어 가는 거예요.
이 새끼들 더럽게 꽁냥 거리네. 하기와라는 경멸의 표정을 가까스로 잠재웠다.
바다뱀: 당신 동료들이 이 쪽으로 온대. 처음에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약을 파나 했는데 정말 거래 제안을 하러 온 거긴 했구나?
하기와라 우시오: 당연하지.
아니 씨발 뭐야. 누가 온다는 거야? 여기 이세계인가? 전생하고 보니 나도 마피아 시티 주민? LV 100 보스?
토가: 어차피 거절하겠지만. 제안 자체는 사실 같으니 다이얼로그를 돌려드릴게요.
하기와라 우시오: 고맙게 됐수다. 똑대가 아닌 똑멸 씨.
토가: 뭐라는 거죠?
바다뱀: 자자. 손님들 들여보내!
바다뱀이 박수를 두 번 쳤다.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복도 쪽을 바라보며 이리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동료들' 이라는 작자들이 그에게 찾아오고 있었다.
제발 더 큰 소동은 벌어지지 않기를 하기와라 우시오는 새삼스럽게 하느님에게 기도했다. 제발 그냥 문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이러다 판 더 커지면 저 미쳐요! 하기와라는 진심 어린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하기와라의 동료를 자처한. 정장을 입은 두 사람이 바다뱀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히무로 시라베: 실례합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거래를 죽여 버리겠어! 죽여 버리겠어!
하기와라 우시오: …….
아. 씨발 하느니미…
역시 스토리 쌍두마차 하기와라입니다 성능이 확실하구만
하기와라가 이렇게 분량이 많은 이유는 다크 타워에 나오는 롤랜드의 동료 '에디 딘' 에서 비롯된 캐릭터인 덕도 있는 것 같네요 다크 타워에서도 분위기를 제대로 띄워주는 유쾌한 캐릭터입니다
이번 연재 텀이 너무 길었는데 죄송하지만 더 길어질 것 같습니다 중간고사 있음 사실 지금도 이거 쓰고 있으면 안 됨 공부해야됨
더 재밌는 단크 타워가 되기 위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 > 챕터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단크 타워 챕터 2 - 9 (5) | 2021.05.15 |
---|---|
더 단크 타워 챕터 2 - 8 (2) | 2021.05.05 |
더 단크 타워 챕터 2 - 6 (2) | 2021.04.04 |
더 단크 타워 챕터 2 - 5 (2) | 2021.03.16 |
더 단크 타워 챕터 2 - 4 (2) | 2021.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