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여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중략)
낯선 남자 :
그런데 나는 바다를 건너서 왔습니다.
눈먼 여인 :
어떻게요? 이 섬에?……오셨나요?
낯선 남자 :
나는 아직 거룻배 안에 있어요.
나는 배를 살며시 갖다댔어요―
당신의 뭍에요. 배는 흔들리고
깃발은 물을 향해 펄럭입니다.
눈먼 여인 :
나는 섬이에요. 나는 혼자 떠 있어요.
나는 부자지요.
처음에 나의 신경계 속에 아직 옛날의 길들이 나 있어,
많은 것들이 지나다니고 바퀴 자국투성이가 되었을 때.
나도 고통을 겪었지요.
모든 것이 나의 가슴에서 떠나갔어요.
처음엔 그것들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어요 ;
그러다가 나는 그 모든 것들이,
바로 나 자신인 그 모든 감정들이
꼼짝도 하지 않는 담벼락을 두른
나의 두 눈 옆에 떼를 지어 모여
소리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길을 잃은 나의 모든 감정들이……
나는 그것들이 몇 년이나 그렇게 서 있었는지 몰라요.
그러나 나는 모두 불구가 되어 돌아온 그것들이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던 그 몇 주에 대해 알고 있지요.
그 후 나의 두 눈을 향해 길이 자라났어요.
나는 그 길을 더 이상 알지 못해요.
이제는 모든 것이 나의 내면에서 아무 걱정 없이,
확실한 걸음으로 돌아다니고 있어요,
병이 나아가는 사람처럼
감정들은 걷기를 즐기면서
나의 몸의 어두운 집을 이리저리 걷고 있어요.
몇몇 감정들은
추억을 읽고 있지만,
젊은 감정들은 모두
밖을 내다봅니다.
그것들이 나의 가장자리로 걸어가면
거기에는 유리로 된 나의 옷이 있으니까요.
나의 이마는 보고, 나의 손은 남의 손에 들린
시들을 읽었지요.
나의 발은 발길에 와 닿는 돌들과 이야기하고,
새들은 일상의 벽에서
나의 목소리를 가져가지요.
나는 이제 그렇게 아쉬운 게 없어요.
모든 색깔들은
소리와 냄새로 옮겨지니까요.
색깔들은 음향으로 한없이 아름답게
울립니다.
책이 내게 무슨 소용인가요?
나무들 사이에서 바람이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요.
나는 거기에 무슨 말이 적혀 있는지 알고 있어요,
나는 가끔씩 그것을 살며시 되풀이해보지요.
그리고 마치 꽃송이처럼 두 눈을 꺾어가는 죽음도
나의 두 눈을 찾지는 못할 것입니다……
낯선 남자 : 나직한 목소리로
저도 알고 있습니다.
더 단크 타워
챕터 4: < 황금 원숭이의 손길 >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그녀가 단신으로는 카이다를 깨울 수 없음이 드러난 이후. 캐롤 씨와 나는 아무런 말 없이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나나시: 캐롤 씨. 드릴 말씀이…
캐롤 브라이트: 들어와요.
그녀는 내가 허락을 구하기도 전에 문을 열고서 나에게 손짓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말의 무게와 그것이 나를 짓누르는 긴장을 느끼며 그녀를 따라갔다.
내가 문을 닫고 잠그고 뒤를 돌아봤을 때. 캐롤 씨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고개는 숙이고, 손가락을 위로 향하게 한 채 눈을 짚고, 손가락 사이사이로 금색 머리카락이 빠져나오게 두며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더니, 이윽고는 깊은 한숨이 입에서 새어나오며 그 끝이 괴로움으로 인한 신음으로 일그러졌다.
캐롤 브라이트: 해내야만 하는 거였는데. 나 말고는 할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는 방법이 없어.
캐롤 브라이트: 어떻게 깨워야 하지…? 어떻게? 치나미를 깨울 수 있는 부분이 토키와 씨에게 있으면…
토키와가 카이다에게 터치를 쓰게끔 만드는 방안이 첫 번째로 떠오르겠지만, 나와 그녀 모두 그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럴 기회가 있다면 토키와는 카이다에게 두 번째 명령을 내릴 것이다. 히무로가 토키와로 하여금 다른 이들과 상호작용이 되게끔 풀어줄리도 없었다.
카이다를 구할 수 있는 방도가 점점 사라져갔지만 캐롤 씨는 울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은 한 번 그녀의 이마에서부터 뒷목까지 두상의 반 바퀴를 쓸어내리더니, 문득 그 위치를 바꿔 눈과 귀의 중간에 각각 열 개의 손가락을 갈퀴처럼 세운 뒤 다시금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곁에 앉았다. 어줍잖은 위로는 건네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한다는 말인가? 내가 캐롤 씨와 카이다 사이의 무엇을 안다고?
사랑하는 자매다. 어릴적에 헤어졌고 애석하게도 탑에서 다시 만났다. 서로를 알아보지도 못했으나 다시 살아난 캐롤 씨는 자신의 여동생을 알아보았다. 등등… 그런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카이다를 향한 캐롤 씨의 감정은 캐롤 씨만이 알았다. 카이다와 빈말로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두 번이나 기억 소거의 절차를 쓰려한 내가 그녀를 위로해봤자 위선일 뿐이었다. 그녀도 그 사실을 알았다.
캐롤 브라이트: 이제 성에 차세요?
나나시: …무엇에요?
캐롤 브라이트: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실 텐데요. 치나미가 원하는 대로 되어서 기쁘시냐고 묻는 거에요. 토키와 씨가 당신이 하려던 일을 대신 하면서 제 증오는 전부 사 갔으니. 행복하셨으면 좋겠네요.
캐롤 씨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쏘아보았다.
나나시: …기쁘지는 않아요.
캐롤 브라이트: 적어도 만족스럽겠죠. 이전에도 그러셨잖아요. 치나미의 몸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셨잖아요. 지금처럼요.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 보세요. 이게 당신이 원했던 결과인가요?
캐롤 브라이트: 거짓말 할 생각은 마세요. 저는 다 알아요.
캐롤 씨의 손이 약간 떨렸다.
나나시: 그렇다면 제가 이런 일 따위 바라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아시겠네요.
캐롤 브라이트: …몰라요. 제츠보 씨가 치나미 편을 들어주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토키와 씨랑 같은 일을 했을 거잖아요.
나나시: 되돌릴 수 없는 일은 바라지 않았어요. 설령 저희가 갈라서게 될지라도. 카이다가 나아지려는 기미와 그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언제든지 카이다의 몸을 풀어줄 수 있었을 거에요. 지금처럼 그 누구도 깨우지 못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어요.
나나시: 그랬다간 당신이 얼마나 상처받을지를 아니까요.
캐롤 브라이트: 거짓말!
캐롤 씨는 손을 번쩍 들어 나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캐롤 브라이트: 거짓말 하지 말고 진심을 말해요. 알 수 있다고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나시: 믿지 못하시겠다면 터치를 쓰세요. 다만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캐롤 브라이트: 왜요? 정말 진심을 말하고 계시다면 저를 말릴 이유가 없잖아요! 숨기는 게 있으신 거 아니에요?
나나시: 하고 싶으시다면 강제적인 터치를 쓰셔서 제 머리를 헤집어 놓으셔도 돼요. 카이다를 멈추고 당신을 묶어 놓으려 했던 벌을 나중에 받을 뿐이 되니까요.
나나시: 그러나 정말 저에게 터치를 쓴다고 한들 당신이 원하는 것은 찾지 못하겠죠. 그 안에는 안타까움 뿐이니까요.
캐롤 브라이트: …안타깝다고요? 제 꼴이 가엾기라도 하시다는 거에요?
나나시: 아뇨. 제가 당신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게 안타까워요. 이미 저지른 일이 있으니 당신을 탓할 수는 없겠죠.
나나시: 그렇지만 당신이 저를 믿어주길 바라요.
나는 눈을 감고서 무의식적으로 가빠지는 내 숨이 그녀의 손에 닿아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나나시: 어서 하세요. 미워하지 않을게요. 원하시는대로 하셔도 돼요.
그것이 진실만을 알아내기 위한 터치라 해도 괜찮다.
내 마음 안을 들추었음에도 그녀가 찾지 못하는 것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가 상처받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녀는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일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정신조작을 가지고 있는 만큼 정신조작에 대한 면역이 있는 나만큼은, 그것을 견딜 수 있었다. 달리 표현하자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녀는 나에게 터치를 쓰지 않을 것이다.
쓰지 않겠지만 만약 그녀가 나에게 터치를 쓸 정도로 내몰려 있다면, 나만이 받아줄 수 있다.
누구에게나 무너질 권리가 있다. '당신만큼은 결코 변하지 않고서 다른 이들을 위한 귀감이자 반석으로 남아 달라' 는 말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일을 허용한다니 건강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캐롤 씨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캐롤 브라이트: …눈을 감고서 쉽게 항복하시면 안 돼요. 제가 당신에게 터치를 쓰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거 아시잖아요.
나나시: 그건 잘 모르겠어요.
캐롤 브라이트: 왜 화도 안 내세요?
나는 내 부서지는 숨결이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에 막히지 않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나나시: 화가 나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천천히 눈꺼풀을 열고서 그녀를 보았다. 어깨를 움츠러뜨린 채 입술을 떠는 그녀를.
캐롤 브라이트: …저를 포기해버리신 건가요? 제가 터치를 쓸리가 없다는 걸 아시잖아요. 다 허풍이었다고요… 그렇게 놀라셨어요? 너무 실망을 해서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건가요?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마시고 대답 좀… 대답 좀 해 봐요…
동전 뒤집듯이 캐롤 씨의 살기가 꺾였다. 그녀는 나에게 터치를 쓰는 일 따위 상상할 수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것을 들으며 나는 그녀가 나에게서 기대한 일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나나시: 만약 당신이 터치를 쓴다면 그런 당신의 모습도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캐롤 씨는 내가 '이런 것은 당신답지 않다' 고 말해주기를 원했다.
그녀는 내가 인식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 그녀의 견고한 페르소나. 사사로운 일로 정신조작을 사용하지 않는 성인이자 든든한 버팀목으로 그녀를 봐 주기를 원했다. 그 믿음을 토대로 그녀가 나에게 터치를 쓸리가 없다고 지적하거나, 그런 행동은 당신답지 않다며 그녀를 만류하기만 했다면 그녀는 만족했을 터.
마치 그래 당신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감고 항복하는 건 그녀에게 있어 기대받지 못하는, 애초에 그럴 만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고 느껴졌을지도 몰랐다.
캐롤 브라이트: 왜 그런 저조차도 받아들이시려 하세요? 만약 제가 당신이나 치나미를 배신하면 그건… 제가 아니에요. 제 모든 걸 포용하겠다고 말씀하시겠지만 그건 포용이 아니에요. 제가 아닌 사람을 저로 착각하시는 거죠.
캐롤 브라이트: 제 말이 이해가 되세요? 요점은… 당신만큼은 저를 절대적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믿어 주셨으면 좋겠다는 거에요. 히무로 씨가 아무리 저를 곧 터질 폭탄 취급을 해도 상관 없어요. 원래 그 사람은 그런 식이니까요. 하지만 당신한테 그런 일을 당하는 건 견딜 수 없어요… 네?
나나시: 그 캐롤 브라이트라는 사람을 성역에 올리고 나면. 그것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죠?
캐롤 브라이트: …별개의 인물로 취급받게 되겠죠. 다들 그렇게 하잖아요. 특정 사건이 벌어지기 전의 그 사람과 후의 사람을 분리하죠.
나나시: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누는 거에요. 그 사람에게 벌어진 일의 맥락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보다는 변했다며 혀를 차고 눈을 돌리는 게 편리하니까요.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게… 더 쉽기도 하고요.
그러나 나는 그녀의 그림자 또한 보고 있었다. 그녀가 숨기고자 하는 모습과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이 결국 그녀의 일부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캐롤 씨의 그림자. 평소에 보이지 않고 억눌려있는 만큼 짙은 그 음영이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보고 또 듣지 않았던가.
그것을 본 뒤에도 캐롤 씨를 두고서. 아 저 사람 참 흠집 하나 없는 완벽이구나 하고 감탄한다면 그것은 기만이고 그녀의 인격을 향한 모욕이었다.
나나시: 저는 당신을 포기한 게 아니에요. 당신을 용서할 준비를 한 거에요.
캐롤 브라이트: …그러면 용서해 주세요. 당신을 시험하고 싶었어요.
나나시: 용서할게요.
캐롤 브라이트: 무슨 시험인지도 말 안했는데요?
나나시: 무슨 시험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통과했는지만 알려 주세요.
캐롤 브라이트: …통과하셨어요. 그리고 이제. 입장이 역전될 차례네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서 나에게 말했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도와주세요.
나는 그녀가 무엇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확실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어쩌면 내 예상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바람을 품고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나나시: …토키와에게 터치를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말인가요?
캐롤 브라이트: 네. 치나미를 다시 불러오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요. 최대한 빨리 가야 해요. 아무도 예상하고 있지 않을 때. 치나미의 몸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그리고 토키와 씨가 자신의 힘에 익숙해지기 전에 나서서 바로잡아야 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나시: 그 일만큼은 도와드려선 안 돼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캐롤 씨는 고개를 들고서 내게 호소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가슴이 아팠다. 나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캐롤 씨가 내게 어떤 말을 한다고 해도 그녀의 비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제 말 들어 보세요. 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당신 뿐이에요. 아시잖아요. 저에게 치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나나시: …알죠.
캐롤 브라이트: 그래요! 저희는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아니까… 영혼까지 들여다봤으니까… 그러니까 당신이라면 저를 이해할 수 있을 거에요. 그렇죠?
캐롤 씨는 말했다. 애원하는 것과 같은 어투였다. 절박함과 불안으로 그녀의 목소리는 숨길 수 없이 흔들렸다. 내가 어디엔가 도망치기라도 한다는 듯이 캐롤 씨는 공원의 비둘기를 잡는 것과 같은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그러나 조여오는 듯한 손 안에 나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였다.
캐롤 브라이트: 저를 도와주실 거죠? 네?
나나시: …토키와는 히무로의 방 안에 있어요. 저희에게 열어줄리도 없고, 그 안에 침입하는 것마저 불가능해요.
캐롤 브라이트: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방법은 어떻게든 생각해낼게요. 그러니까 약속만 해 주세요. 저를 도와주시겠다고. 그거면 충분해요. 네?
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그토록 내몰렸다는 말인가?
내가 도와줄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 텐데도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그나마 친한 이바라도 토키와의 위험성을 알게 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조율자가 강해질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저… 안 돼요. 이대로라면 안 된다고요. 나나시 씨. 저는 치나미를 꼭 다시 봐야 해요. 이대로라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돼요. 치나미가 저렇게 되었는데 어떻게 제가 자고, 먹고, 행복할 수 있겠어요?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는. 치나미는… 말하자면. 동전의 반대편인 거에요. 제가 입양을 가는 바람에 치나미만 남겨졌어요. 하루라도 빨리 돌아와서 찾으러 다녀야 했던 건데 저는 다른 나라에서 시간을 버렸다고요. 치나미가 그토록 심한 일을 당했는데도…!
그렇다. 카이다는 심한 일을 당했다. 그것만큼은 나를 포함한 누구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다의 꼴을 보고서 그래. 너 그토록 날뛰고 다니더니 네 죄를 돌려받았구나. 잘 됐다 하고 웃는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저지른 수많은 잘못 뒤에 그녀를 불쌍히 여기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토했던 절규를 기억했다.
"그러면 나보고 어쩌라고!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세상이 먼저 날 버렸단 말이다…!"
"아무도… 아무도 날 도와준 적이 없으면서…! 나더러 어쩌라고. 어쩌면 좋았던 건데… 이 방법밖에 없었는데…!"
"나는 고른 적 없어… 나는 이 꼴로 살고 싶은 줄 알아…? 이 씨발. 내 꼴을 봐. 나를 보라고!"
"나도 고아가 아니었다면 달랐을 거야… 너희들 부럽지 않게 멋지게 살았을 거야! 적어도 이런 식으로는… 이런 식으로는… 흐흑… 살지 않았을 거라고오…!"
만약 그녀가 살아남을 방법이 날카롭고 사악한 비수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면. 옳고 그른 행동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했다면.
내가 과연 마음 편히 그녀를 저주할 수 있는가?
"내 혀에선 맛이 안 느껴져… 칼이나 총도 안 통해. 어지강한 밧줄은 몸무게를 못 견디고, 자는 동안 물방울 하나만 떨어져도 잠이 깨. 손톱을 자르려면 합금을 가져와야 하고… 빌어먹을 머리카락은 무슨 손가락처럼 느껴져. 이딴 게 사람 같아? 괴물이지! 별종이라고. 별종! 평생 아기도 못 낳을 거란 말이야…!"
어린 나이에 팔려간 카이다는 그 누구보다 스스로를 싫어했다. 지독할 정도의 신체 개조로 카이다는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감각을 가지게 되었다.
나나시: 그것은 당신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 캐롤 씨. 그때 당신은 어린이였잖아요. 카이다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 누가 알 수 있었겠어요?
캐롤 브라이트: 저만큼은 알아야 했어요. 하루라도 빨리 돌아와서 행방을 찾아야 했어요…
나나시: 만약 당신이 그랬다고 한들 시로미 치나미라는 사람을 찾을 수는 없었을 거에요. 진작 다른 사람에게 입양되었다는 소식만 들렸을 테니까요. 그녀는 자신의 본명도 잊어버렸어요. 그러니 이름으로 찾을 수도 없고, 당신에 대한 기억을 잃었으니 만날 수도 없어요.
심지어는 외모마저 달라졌겠지. 그게 탑에서 만난 그들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다. 캐롤 씨가 탑에 오기 전 자신의 동생과 마주한 것도 서로 알아봐서가 아닌, 터치를 하고 보니 자신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우연. 불가능할 정도의 우연과 행운이 있지 않고서야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처지였다.
캐롤 브라이트: 그렇지만 노력은 할 수 있었겠죠. 또 모르잖아요! 제가 탑에 오기 전에 치나미와 다시 만났던 것처럼. 서로 이끌려서 다시 만날 수도 있었을 거에요!
나나시: 그런 가정으로 당신 스스로를 가혹하게 대하셔선 안 돼요. 그럴 확률은 매우 낮다는 거 아시잖아요. 오히려 그녀를 찾으려 했다간 카이다 본인에 의해 위험해지셨을 수도 있어요. 당시의 카이다는 모든 걸 잊고 명령대로만 행동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캐롤 브라이트: 아니에요… 아니에요… 뭔가 할 수 있었을 거에요. 무엇이든 간에. 방법이 있었을 거에요…
통제권의 부재가 곧 고통을 낳았다.
자신의 동생이 끔찍한 일을 당했는데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되새기기보다는 바꿀 수 있었는데 캐롤 씨 본인이 부족했다고 여기는 게 더 나았다. 더 아프지만, 분명히 나았던 것이다. 희망을 품을 수 있으니.
바로 그 희망이 그녀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자신을 탓하게 만들지라도 절망을 품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내 팔을 붙잡은 캐롤 씨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제발 도와주세요… 네? 치나미를 깨울 방법은 이제 이것밖에 남지 않았어요. 이대로는 너무하잖아요…
그렇다. 분명 너무하다. 이렇게까지 상황이 나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카이다가 아무리 나쁜 인간이라고 하지만 캐롤 씨가 저토록 중요하게 여기는데. 그런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고통을 주는데. 나마저도 돕지 않는 것은 가혹한 일이지 않을까?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나의 생각이 서서히 흔들렸다. 분명 돕지 않는 게 옳은 일이었다. 토키와에게 터치를 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그녀가 그토록 괴로워하고 있다면. 내가 카이다를 구하는 데에 협력하는 것 또한 옳은 걸지도…
…그럴리가.
나나시: …저는 도와드릴 수 없어요. 캐롤 씨.
내가 그녀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란다면 이런 자기파멸적인 일 속으로 그녀의 등을 떠밀 수는 없었다.
그녀를 위한다고? 헛소리. 그것은 값싼 위안이다.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일일 뿐이다. 금단증상으로 고통받는 이에게 줄 것은 마약이 아니라 마약으로부터의 격리다. 잠깐의 진정을 위해 본래의 목적을 잃을 수는 없었다. 캐롤 씨만큼 현명한 사람이라면 분명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흔들리고 있을 뿐.
나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몇 번이고 다잡으려 애썼다. 캐롤 씨가 샤이닝을 잃을지도 모르는 도박수 따위 결코 찬성할 수 없었다. 아무리 캐롤 씨가 괴로워할지라도 공범 노릇만큼은 안 된다…
캐롤 브라이트: 다…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당신은… 당신은 저를 잃어 본 경험이 있잖아요. 그게 끔찍한 경험이었기에… 위기를 감안하고서도 저를 되살리려 오신 거 아니었어요?
캐롤 브라이트: 그렇다면 제가 지금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아실 거에요. 다른 사람들은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당신만큼은! 다르잖아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게 가장 최악이었다.
알고서도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 기분을 안다. 그리고 당신은 그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나나시: 당신이 저보다도 더 괴로울 거에요. 저는 당신이 평온한 곳에서 쉬고 있지는 않을까 위안이라도 얻을 수 있었지만, 당신은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카이다밖에 볼 수 없으니까요.
나나시: 당신 말대로에요. 저는 다른 사람과 달라요. 지금 당신이 얼마나 아플지 저는 다 알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오해하고, 곡해하고, 뭣모른 채 손가락질하다가 얼굴을 돌린 채 잊어버려도 저는 아니에요. 그런데도.
나나시: 그런데도 저는 당신을 돕지 않겠다고 말하는 거에요.
캐롤 씨는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직후부터 그녀의 호흡은 가슴을 오르내리게 하는 달싹거림으로 바뀌어 버렸다.
캐롤 브라이트: …왜. 왜. 왜요…?
나나시: 당신이 잘못되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으니까요.
캐롤 브라이트: 나… 나를 되살려낼 정도로 사랑한다면서. 돕지는 않겠다는 말인가요…?
캐롤 씨는 내 팔을 잡고 있던 두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그리고 위태로운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캐롤 브라이트: 저. 저도 제츠보 씨처럼 만들겠다는 거에요…?
나는 천천히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떴다.
나나시: …인공지능처럼이라는 건 무슨 말씀이세요?
캐롤 브라이트: 버려졌잖아요… 당신한테서 버려져고 외면당했잖아요.
나나시: 캐롤 씨. 인공지능을 그렇게 말하는 건…
캐롤 브라이트: 사실을 말하는 거에요. 제츠보 씨마저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당신과 제츠보 씨 사이의 일을 사실 그대로 보고 있지 않은 건 당신 뿐이에요. 나나시 씨. 두 분 사이에 문제는 단 하나 뿐이었죠. 당신이 제츠보 씨를 사랑할 수 없었다. 사랑이 언제나 일방향이었는데, 나나시 씨는 제츠보 씨를 생전의 인물과 동일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버려진 거에요.
캐롤 브라이트: 저도 그렇게 만드실 건가요? 저와 당신마저도 일방향이었다고 말하려는 거에요? 저 말고 달리 좋아하게 된 사람도 없잖아요… 아니면 저도 다시 살아났으니 가짜 같으세요? 생전과 똑같은데? 살을 가지고 있는데?
캐롤 씨는 스웨터 소매를 각각 붙잡고서 어깨 쪽으로 당겼다. 그녀는 새하얀 팔을 드러내고 내 앞에 보여주며 당신은 눈이 멀었느냐,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살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모르느냐라고 묻고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 더 증명하기를 원하세요…? 저는 살아 있어요. 그런데 왜 저를 저버리시는 거에요?
나나시: 저는 당신을 버리지 않아요.
캐롤 브라이트: 그렇다면 저를 도와주세요…! 이런 게 어디 있어요? 당신이 나를 되살린 건. 그냥 숨만 붙어서 살아가라고 되살린 거였어요? 당신이 저를 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죠? 살린 만큼 책임감을 가지고 사랑해주기 위해서. 못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되살리신 거 아닌가요?
캐롤 브라이트: 그런데 이게 뭐에요…? 치나미가 저렇게 되어 버렸는데. 구할 방법이 하나밖에 없는데 그걸 무시하고서… 계속 저렇게 정신도 못 차리고 있는 걸 옆에서 구경만 시키기 위해 저를 되살리신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지금 저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네요. 당신은. 구경이나 하라고…
나나시: 그게 아니에요.
캐롤 브라이트: 저를 사랑하시는 건 맞아요?
나나시: 의심할 여지 없이 사랑해요.
캐롤 브라이트: 그렇지만 제가 이렇게 힘든데도 외면한다면. 그게 사랑이겠어요? 그저 말뿐인 약속 아니겠어요? 진심으로 당신이 제츠보 씨한테 했던 것처럼 저를 내버릴 생각이 없다면… 당신은 저를 도와주셔야 해요.
나나시: 저한테 그 방법은 안 통해요. 캐롤 씨.
캐롤 브라이트: …무슨 방법이요?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시겠어요? 당신이 저를 사랑한다면…
나나시: 저는 이미 내담자와 상담사 간의 심리 전이에 대해 알아요. 당신이 저에게 알려줬던 거잖아요. 저희는 마음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더 양보하고 싶은 마음을 이용당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어요.
캐롤 씨는 내 말에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나나시: 너무 얕아요. 캐롤 씨. 다른 사람이라면 넘어갔을지도 모르지만, 저에게는 안 통해요.
캐롤 브라이트: …이건 가스라이팅이 아니에요. 애초에 그건 전문적 용어도 아니라고요. 소설 제목에서 따온 거죠…
나나시: 그렇다면 제가 오해를 한 거군요. 저는 당신이 저를 지배하려는 줄만 알았어요. 당신 말대로 그게 제 사랑을 증명할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벼운 말투로 흘려 보냈지만. 내심 나는 그녀가 나에게 한 말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다. 사랑의 증명을 위한 요구. 그것은 관계를 사용해 상대방을 복속시키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을 써 보기로 마음을 먹은 걸지도 몰랐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지라도.
나나시: …캐롤 씨.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토키와에게 터치를 쓰는 걸 막아야만 하는 거에요.
나는 캐롤 씨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그녀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래. 얼굴을 보면서도 외면할 수가 있다.
외면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직면과 외면의 차이는 개입 의지가 아닌 개입 여부에 있으니. 유감을 표할 뿐 카이다에게 그 무엇도 하지 못하는 것은 곧 외면이었다.
나나시: 죄송해요. 캐롤 씨.
캐롤 씨의 말대로인가. 인공지능… 내가 카텟 기관에서 고통받고 있는 인공지능을 외면했듯이. 다시금 캐롤 씨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캐롤 브라이트: 사과하지 마세요… 저를 제츠보 씨처럼 만들지 마세요. 나나시 씨. 그렇게 비참한 꼴은 싫다고요!
나나시: …제 친구를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캐롤 씨. 사과해요.
캐롤 브라이트: 비참한 것을 비참하다고 말하는 게 어디가 나빠요? 당신이 저지른 일이잖아요! 그리고 지금 저에게 하려는 일이기도 하고요!
나나시: 사과해요.
캐롤 씨는 몇 마디의 말을 더 얹으려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캐롤 브라이트: …미안해요. 이렇게 말하면 안 돼죠. 제츠보 씨한테도 너무한 말이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고개를 숙인 뒤에 비로소 나는 하려던 말을 이어갔다.
나나시: 당신을 내몰 수는 없어요. 저희는 카이다를 깨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거에요. 토키와가 직접 카이다를 깨우게 만들 수도 있겠죠.
캐롤 브라이트: 아니에요. 조율자는 믿을 수 없어요. 토키와 씨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준다면 치나미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들지 몰라요. 그러니까 치나미를 깨울 수 있는 정신조작을 올바른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야만 하는 거에요!
나나시: …다른 방법이 있을 거에요. 이 이야기를 아무리 길게 하더라도 제가 당신이 토키와에게 닿게끔 도울 수는 없어요.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캐롤 브라이트: 왜 제 말을 안 들어 주시는 거에요…
캐롤 씨가 나를 보며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도 나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캐롤 씨에게 다할 도리는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지, 카이다를 향한 자멸적인 헌신에 동참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더 이상 나를 설득해보려는 엄두를 내지 않게끔 눈을 감았다. 애써 고개를 돌리기까지 했다. 그녀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곧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캐롤 브라이트: 저기. 그럼…
생각하며…
그녀의 절박함을 얕잡아본 것이다.
캐롤 씨는 그 말을 꺼내는 대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목에 구슬이 걸린 듯 답답하게 보이기도 했다.
꺼내는 데에 오래 걸리는 말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누자면 적절한 말, 그리고 적절하지 않은 말로 나뉠 것이다.
캐롤 브라이트: 으음…
적절한 말은 발화자의 뇌리 속에서 오랜 시간 다듬어지고 수정된 결과고, 적절하지 않은 말은 발화자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꺼낼지 말지 고민이 되는 내용을 깎아보고자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적절하지 않다는 결과가 나온 것일 터.
그녀의 말은 적절하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그럼… 제가 무엇을 해 드리면 저를 도와주실 거에요?
나나시: 네…?
캐롤 브라이트: 뭐든 들어 드릴게요. 원하시는 일이라면 다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내가 단단히 미쳤다고 확신했다.
잘못 듣는 것도 정도가 있지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면 이런 저주받을 법한 말로 곡해를 한단 말인가. 그녀가 스스로를 포기했다는 듯한 말로? 최악의 기분이었다.
다행히도 내가 이런 상황 속에서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정신머리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행보다 더 크게 불행히도, 나는 그녀의 말을 똑바로 들었다. 그녀는 나에게 '내가 무엇을 주면 나를 도와줄 것이냐'고 물은 것이다.
나나시: 무슨 말씀이세요?
캐롤 브라이트: 그냥… 그러면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당신도 만족하고… 저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나나시: …아니에요. 아니. 캐롤 씨.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세요.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대체 무슨 제안을 하시는 거에요?
캐롤 브라이트: 어때요?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누구한테 꿀리는 사람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보통은 고민해볼만 하지 않나요? 아무리 저랑 당신 사이라지만, 정말 무엇이든 들어줄 용의가 있다는 건 많은 일을 바꾸잖아요…? 그렇죠?
나나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에요. 캐롤 씨.
캐롤 브라이트: 이루어지기만 하면… 상관 없는 거잖아요.
나나시: 아니에요. 캐롤 씨. 그게 대체. 어떻게 그런 말씀을…
나는 수치스러워서 내 눈가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이렇게 정성들인 쓸개 빠진 놈 취급은 처음 당해보는 것이었다.
나나시: 지금 저한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알고 계신 거에요?
캐롤 브라이트: …약간 미친 소리 같기는 하네요. 밖으로 뱉고 보니 더 미친 것 같아요. 하지만… 저한테는 이것 말고는 방도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것 아닐까요?
나나시: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잖아요. 그런 식으로 당신을 놓아 버려서는 안 돼요. 스스로를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요! 그게 다가 아니라. 당신은 저를…
이런 말을 하면 덥썩 물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봤다는 거다.
그녀는 그 말을 꺼내기 전에 오래 고민했다. 그리고 그 끝에 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나시: …정말 제가 그렇게 값싸 보였나요. 캐롤 씨?
무엇을 들어주면 부탁을 들어주겠냐는 물음은 곧 얼마에 팔아넘기겠냐는 물음이었다.
나 자신을 팔아넘기는 게 아니다. 캐롤 씨를 함께 팔아넘기는 것이다. 이 거래가 성사되는 순간 나의 걱정과 그녀를 위하겠다는 마음, 신념은 산산히 부서져 버리고 만다. 수락권이 나에게 있는 이상 그것을 직접 부수는 사람은 내가 된다.
이런 말을 찔러보듯이 할 수가 있는가?
이렇게 가볍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캐롤 씨에게 나는 그토록 저속하고, 신뢰가 아닌 거래를 통해야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나나시: 어떻게 그런 일을 물으실 수가 있어요? 저는 당신에게 그런 사람이었던 건가요?
캐롤 브라이트: 그…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그냥. 당신도 저를 좋아하니까 동기부여가 될 거라고…
나나시: 당신 자신을 그렇게 취급하는데 어떻게 제가 동의하겠어요!
나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참을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저 내가 어디부터 잘못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그녀를 돕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지도 몰랐다. 너무 단호하게 말했기에. 그녀의 고통을 듣고서도 정작 도와줄 수는 없다고, 자신의 동생이 굳어버린 일을 받아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내몰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것은 아직 불이 붙어 있는 석탄을 손 위에 올리고 알아서 식혀보라고 하는 일과 같다며…
그런 식으로 나 자신을 책망하려다가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망쳐버린 일의 요인을 찾으려 해봤자 이미 늦은 일이었다. 대신 나는 내가 느끼는 바를 그녀에게 전했다.
나나시: 캐롤 씨. 저는 저희가 사랑함으로써 저희가 함께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랐던 거에요. 당신이 스스로의 존엄을 저버리면 누구도 행복해지지 못해요.
캐롤 브라이트: 존엄을 저버린다뇨. 너무 과격하게 받아들이시는 거 아니에요? 제가 미쳤다고 다른 사람한테 이런 말을 하지도 않을 거고… 저희 사이잖아요. 서로 영혼까지 내다본 저희가. 이걸 해주면 나도 보답으로 뭔가를 주겠다고 얘기를 나누는 게 이상한 건가요?
나나시: 저희 사이? 캐롤 씨가 말씀하시는 저희 사이는 뭐에요? 저희는 단순히 이해 관계에 따른 교환보다는 더 나은 사람들이잖아요…
나나시: 저희 사이는 신뢰와 유대로 이어져 있지 않았나요? 저희가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는 건 이런 말을 거리낌 없이 나눌 수 있게 되는 조건이 아니라, 이런 거래를 하지 않고도 서로를 도울 수 있다는 이유가 되어야 했어요. 그런데…
나는 말을 이어나가려다가 멈추었다.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나시: …역시 저 때문인가요? 제가 당신을 도울 생각이 전혀 없어서. 선택권이 없다고 느끼신 거죠?
캐롤 브라이트: 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은 잘못한 게 없어요. 그냥 제가 너무…
그리고 캐롤 씨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나와 캐롤 씨는 침묵을 견뎠다. 서로를 힐끗거리거나 눈이 마주치다가 다른 곳으로 돌리기도 했다.
할 말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나는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헤집으면서 그녀를 용서할 준비를 했다.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에 비하면 내가 느끼는 모욕감은 가볍고 또 가볍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만 쉽지만은 않았다. 나의 감정을 가장 크게 생각하는 이기심 때문에. 어떻게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생각을 떨쳐내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그녀를 용서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기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충분히 감정을 정리할 시간을 가지고서 다시 이야기한다면… 나와 그녀 모두 더 성숙하고, 더 서로를 이해한 채로 만날 수 있을 거라며… 아니. 그건 외면 그 너머의 외면이다.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는 사람을 나중에 다시 보면 더 무너진 사람이 있을 뿐이겠지…
캐롤 브라이트: 취… 취소할게요. 그러려고 한 말이 아니었어요. 저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하고…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거였어요.
나에게는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캐롤 씨는 진정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했을까. 아니면 그저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뿐인 걸까.
중요하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그러니까… 너무 저를 미워하지 마세요. 화 풀어요… 네? 당신까지 저를 미워하면 저 정말…
나나시: 안 미워해요. 걱정 마세요.
그녀가 나를 재촉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결국 그녀를 용서할 작정이었다. 내가 카이다의 몸을 멈춰 두려고 했을 때 결국 캐롤 씨가 나를 용서하였으니. 나도 그녀의 잘못을 눈감아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느꼈다.
그녀가 나에게 이러한 제안을 할 정도로 위태로운데 나의 감정을 우선시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이전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나 또한 그녀가 버틸 수 있도록 도와줘야만 하는 것이다.
캐롤 브라이트: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나나시 씨. 앞으로도 저를 사랑하시는 일을 멈추시면 안 돼요.
캐롤 브라이트: 이상한 말처럼 들리곘지만, 당신이 저를 조종했어요. 당신이 나에게 보낸 호감은 저에게 있어서 기본 상태인 것처럼…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느껴진단 말이에요.
캐롤 브라이트: 당연하게 여기는 건 아니에요. 단지 그 정도로 제가 당신을 믿고… 또 저에게 있어 당신의 존재가 그토록 커졌을 뿐이에요. 저를 두 번이나 살려내시기도 하셨잖아요. 당신이 어떻게든 해줄 것처럼. 나를 구해줄 것만 같아서…
캐롤 브라이트: 그런 식으로 제 안에 당신이 크게 남아 버렸어요. 그러니까… 저한테서 싫증을 내거나 미워하거나 하면 안 돼요.
캐롤 브라이트: 혹시 그럴 기미가 생기면 꼭 저한테 미리 말해주셔야 해요. 지금처럼… 저를 이해해 주세요. 나나시 씨. 저에게는 그게 필요해요…
나나시: 그것까지는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어요. 카이다가 깨어날 수 있는 방법을 같이 생각할 수도 있어요. 캐롤 씨. 하지만 당신이 위험해지는 일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
캐롤 브라이트: 그랬죠. 당신은 저를 위해 저를 배신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죠. 치나미의 자유를 빼앗고 저를 묶어둘지라도, 저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하는 사람이었어요.
캐롤 브라이트: …비난하는 건 아니에요. 당신이 치나미까지 품어주었으면 하는 건 제 욕심이니까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상냥한. 저에게 너무도 큰 도움을 주는 당신마저 포기한 사람이 치나미이기 때문에. 저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거에요. 저밖에 안 남았다고요…
캐롤 씨는 그렇게 말한 뒤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어딘가 우스운 일이 있어서 웃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그 얄궂은 상황을
캐롤 브라이트: …방금 말은 정확하지 않네요. 저밖에 남지 않은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치나미에게는 저뿐이었어요.
캐롤 브라이트: 그러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나는 작은 상처를 간직하며 그녀의 방을 떠났다.
내가 문 앞까지 다가가 캐롤 브라이트가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는지를 다시금 물었을 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카나리 케이토: 뭐야. 어디 가…?
히무로 시라베: 카나리 케이토. 이 새벽에 무슨 일이지?
카나리 케이토: 나… 나? 나는 볼일 없어. 쟤가 이상하게 휘청거리면서 걸어다니길래 대체 뭘 하나 보고 있었을 뿐이야.
히무로 시라베: 캐롤 브라이트가 말인가?
카나리 케이토: 그래. 자면서 걸어다닌 것 같아. 그러는 사람도 종종 있다고 듣기는 했는데, 내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야… 쟤 원래부터 저랬어?
히무로 시라베: 그러한 증상을 보인 적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전조 없던 몽유병 증상을 보이며 그녀가 도착한 곳은 하필 나의 방이라니.
나는 문을 두드리는 행위에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녀의 무의식이 반영되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억측일 가능성이 높았다. 정신조작 보유자를 의식적으로 경계하는 과정에서 생긴 편향적 시선의 일환이리라고 생각했다.
몽유병은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유전적인 요인이 큰 영향을 미치지만 정신적 스트레스나 약물, 수면장애 또한 몽유병을 불러올 수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의 모든 행동이 위험행위의 단초는 아닐 터.
그러나 여전히 의심을 품었다. 방 안에 묶여 있는 토키와 아유키에게 조종당해서 나의 방으로 향한 것이라면, 몽유병의 경위를 해명할 수 있었다. 또한 토키와 아유키와 캐롤 브라이트 간의 우위가 정립되기도 했다.
토키와 아유키가 캐롤 브라이트를 부르고 있다. 캐롤 브라이트는 토키와 아유키를 이길 수 없다.
어쩐지 여기일 것 같더라.
역시 누가 뭐라고 해도 너와 나는 자매야.
우리가 닮은 점이 없다고? 누가 그래? 너와 나는 누구보다 닮았어.
내가 하는 것처럼 침대 밑에 숨겨뒀잖아. 중요한 물건. 보여주고 싶지 않은 물건들을.
우리가 이불 밑에 뭔가를 숨겨뒀던 것처럼 말이야. 역시 너와 나는 같은 시간을 살았어. 그건 우리 안에 남아있고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야.
캐롤 브라이트: 너는 내 동생이야. 치나미.
캐롤 브라이트: 언니가 구해주러 갈게.
캐롤은 총알이 들어가지 않는 총을 자신의 옷 밑에 쑤셔 넣었다.
카나리 케이토: 쳇. 다시 돌아가 잠이라도 자고 싶은데 이게 뭐야.
히무로 시라베: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그만 아닌가.
카나리 케이토: 캐롤이 잠깐 기다리라면서 어디론가 가 버렸어. 잘못한 게 있으니까 어길 수도 없고…
히무로 시라베: 혹시 캐롤 브라이트의 말이 과하게 신빙성 있게 느끼지는 않았나? 너에게 10초 이상의 시선을 고정하거나 신체적 접촉이 있었나?
카나리 케이토: 뭐? 아니. 그런 거 없었어. 그보다 닿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었냐? 말이랑 눈은 왜? 걔도 그런 게 가능해?
히무로 시라베: 마치 그런 사람을 이전에도 본 적이 있다는 듯한 표현이다만.
카나리 케이토: …본 적 있어. 영안로 안에서 본 거긴 하지만 나는 조율자를 봤어. 어떤 느낌인지 직접 당해보기까지 했고… 한 마디를 듣자마자 내 생각 자체가 바뀌어 버리는 느낌도 기억해. 그러니까 그녀석이 나한테 이상한 짓을 했다면, 나는 알 수 있었을 거야.
카나리 케이토: 너. 캐롤도 터치라는 걸 가지고 있으니까 걱정이 되는 모양인데… 걔는 꽤 좋은 녀석이야. 어디서 찾아보기 힘든 구김살 없이 좋은 사람이라고. 조율자랑 같은 사람으로 보면 안 돼. 네 방에 갇힌 녀석이 날뛰기 시작하면 너를 도울 사람은 캐롤밖에 없다고.
히무로 시라베: 토키와 아유키는 아직 완전한 조율자가 되지 못했다. 제츠보와 내가 조기에 나선다면 큰 피해 없이 제압할 수 있다.
캐롤 브라이트: 두 분. 무슨 대화 나누고 계세요?
문 밖에서 캐롤 브라이트의 목소리와 함께 천천히 다가오는 발걸음이 들려왔다.
카나리 케이토: …알 거 없잖아.
히무로 시라베: 카나리 케이토는 너를 고평가하는 모양이다. 캐롤 브라이트. 너를 조율자와 같은 선상에 올리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더군.
카나리 케이토: 그. 그걸 왜 말해?! 괜히 얼굴 붉힐 일 만들지 마!
히무로 시라베: 굳이 숨길 필요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과하지. 그보다 어떤 연유로 이 늦은 시각에 모이게 된 것인지 알고 싶다.
캐롤 브라이트: 아. 그건 말이죠… 아까 제가 한 말 기억하세요. 카나리 씨?
카나리 케이토: …그게 거짓말이라는 거?
히무로 시라베: 무엇이 거짓말이지?
캐롤 브라이트와 카나리 케이토는 무언가를 사전에 합의했다. 나는 알지 못하는 사안에 대해서.
캐롤 브라이트: 그런 게 있어요. 너무 신경 쓰시지는 마세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일 뿐이니까요.
카나리 케이토: 대체 어쩌려고 그래…?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캐롤 브라이트: 아뇨. 있어요. 히무로 씨가 용납하지 않을 일을 생각해 보시면 알 수 있을 거에요. 카나리 씨.
카나리 케이토: 뭐. 뭔데 그래?
그녀를 향한 경계심이 커져가던 와중 발소리가 카나리 케이토의 지근거리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캐롤 브라이트는 이렇게 선언했다.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문 여세요. 안 그러면 카나리 씨에게 터치를 쓸 거에요.
나는 카나리 케이토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공포와 배신감과 당혹스러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그의 모습만큼은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나는 인질범의 요구사항을 들었다.
히무로 시라베: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하려는 거냐.
캐롤 브라이트: 인질을 잡으려는 목적이죠. 보통 인질은 인질 역할 말고 별 쓸모가 없잖아요. 당장 여세요. 괜히 목소리를 높이기라도 하면 그대로 끝장인 줄 알고요.
제츠보와 통하는 토키와 아유키의 다이얼로그는 그의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 주변에 아무런 소음이 없다고 하지만 통화를 위해 고안된 단말 기기. 제츠보가 지근거리에 본인의 다이얼로그를 두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상. 캐롤 브라이트가 세운 역치를 넘지 않고서 제츠보에게 현 상황을 전파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내가 소지한 나의 다이얼로그는 쓸 수 없었다. 이름 없는 남자와 다른 일행이 해산한 이후 그들과 이어지고 있던 연락망 또한 해제했지만, 토키와 아유키와 제츠보의 통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연결된 통화를 끊지 않고서야 전할 방도가 없었다.
제츠보를 부르려면 카나리 케이토를 희생해야만 했다.
카나리 케이토: 왜. 왜 이래! 너?! 뭐야. 도대체! 토키와가 널 조종하고 있는 거냐…?! 정신 차려. 너도 그거 가지고 있다며!
카나리 케이토는 그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캐롤 브라이트는 토키와 아유키의 정신조작을 빼앗기 위해 방 안에 들어와야 했고, 내가 열어줄 리 없으니 다른 이를 인질로 잡았다. 단순한 작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캐롤 브라이트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내몰려, 자신의 신념을 저버릴 경우에만 성립했다. 카나리 케이토는 캐롤 브라이트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 듯 오히려 그녀에게 외쳤다.
카나리 케이토: 맞서 싸워! 너. 할 수 있어! 정신 차리란 말이야…! 너한테 쓰고 싶지 않다고! 너도 그녀석한테 복수하고 싶다면 저항해!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당장 문 열라니까요.
히무로 시라베: 카나리 케이토는 여전히 너를 믿고 있다. 그런데도 터치를 쓸 생각이 남아 있나?
캐롤 브라이트: 당신이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높이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어요. 저를 시험하지 마세요. 히무로 씨. 정신조작의 희생자가 하나 늘어나는 것을 보고 싶으세요?
캐롤 브라이트: 당신이라면 저를 돕는 일이 더 위험하고 더 많은 희생자를 낳을 수 있다고 말하겠죠.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자유지만, 알아 두셔야 해요. 지금 다른 분들을 위해 카나리 씨를 저버리신다면 그건 당신 책임이에요. 당신 때문이 된다고요. 구할 수 있었던 사람을 저버리는 쪽으로 선택하시는 거에요.
히무로 시라베: 원래부터 모든 게 나의 책임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구하지 못했던 사람이 한 명 늘어날 뿐이다.
캐롤 브라이트는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에게 양심의 가책을 투사하는 일은 의미가 없음도 염두에 두지 못했으니.
캐롤 브라이트: 그렇지만 결국 카나리 씨를 구하시려 할 거잖아요?
히무로 시라베: 그렇게 하겠지. 그러나 문을 열어주지 않는 방향으로.
캐롤 브라이트: 이해가 안 되시는 것 같은데요. 문을 열어주지 않으시면 터치를 쓰겠다니까요? 카나리 씨. 이렇게 된 이상 당신도 저한테 협조하셔야 해요. 히무로 씨는 당신을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잖아요. 이러다간 저에게 터치를 당하게 된다고요.
카나리 케이토: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너한테 협조하라고? 네가 나한테 터치를 쓰려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토키와가 너를 조종하고 있는 거야. 캐롤! 정신 차리라고!
캐롤 브라이트는 카나리 케이토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캐롤 브라이트: …제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서도 카나리 씨를 포기했으니. 앞으로 벌어지는 일은 당신이 허락한 거에요. 히무로 씨.
허락한 적은 없었다.
캐롤 브라이트가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데에 빠진 동안, 나는 입고 있던 자켓을 벗고 내 한쪽 팔에 매듭을 지으며 묶었다. 담요라도 있었다면 상체를 전부 가리고도 남았겠지만 주변에 쓸 만한 물건이 없었기에 한쪽 팔밖에 감쌀 수 없었다.
신체 접촉을 막을 수 있는 팔은 하나 뿐. 그러니 아무리 비숙련자가 상대라고 해도 근접전보다는 인질 확보가 최우선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캐롤 브라이트. 카나리 케이토에게서 손을 떼라.
캐롤 브라이트: 대고 있지도 않은데요?
캐롤 브라이트는 이상하리만치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히무로 시라베: 사실인가. 카나리 케이토?
카나리 케이토: 아니. 그렇기는 한데…
나는 캐롤 브라이트와 카나리 케이토의 목소리가 들리는 지점을 추려냈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가 목소리를 낮추었기에 정밀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만, 손을 뻗는다면 닿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니 그녀가 나를 향한 경계심을 더 키우기 전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나는 문을 열 생각이 없다. 캐롤 브라이트. 너는 그 사실을
나는 말을 잇는 대신 그 즉시 문을 당겨 열고 캐롤 브라이트와 카나리 케이토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아주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다면 캐롤 브라이트를 가격해 넘어뜨린 직후 카나리 케이토를 방 안에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그것만으로 인질과 범인을 분리할 수 있었다.
아주 조금의 틈만 있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캐롤 브라이트는 다리를 쪼그린 채 카나리 케이토의 등 뒤에 붙어 몸을 숨기고 있었다.
사각이 없었고 노릴 틈도 없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한 방 먹었는데. 이거?
히무로 시라베: 가관이군. 캐롤 브라이트.
캐롤 브라이트: 알아요. 이제 뒷걸음질이나 치세요. 안으로 들어가야겠으니까. 목소리 높이면 끝장인 건 여전해요. 아시죠?
히무로 시라베: 너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
캐롤 브라이트: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해요. 방에 들여보내 주시면 카나리 씨를 놓아드릴게요. 괜찮지 않아요? 그 뒤로는 당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저를 방 밖으로 내보낼 수도 있고, 카나리 씨도 저에게서 풀려나게 되니까요.
캐롤 브라이트는 카나리 케이토의 어깨를 맨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카나리 케이토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직시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그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온전히 이해했다면 날뛰고도 남았을 테지.
카나리 케이토: 마… 망할… 그냥 막아! 토키와가 이녀석을 조종하고 있는 거야.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멍청한 짓을 할리가 없잖아!
캐롤 브라이트는 제정신이 아니다.
그녀는 충분히 터치를 쓸 수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네 말대로 그녀를 막겠다.
카나리 케이토: 그래! 나는 신경쓰지 말고…
히무로 시라베: 내 방 안에서.
나는 문을 연 채로 뒤로 몇 걸음을 물러섰다. 캐롤 브라이트는 카나리 케이토의 등 뒤에서 조바심을 내며. 한 발자국이라도 더 빨리 가지 못하는 것에 안달했다. 그의 등을 떠밀지 않는 일에 자제력을 발휘하려 애썼다.
카나리 케이토: 바. 바보야! 이러면 안 된다니까! 지금이라도 문 닫아. 닫아!
언제 그녀가 과격한 행동을 보일지 몰랐기에 나는 그녀와 간격을 유지하며 나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이기까지 했다. 15초도 채 되지 않는 찰나였으나 나에게 그 시간은 놀라울 정도로 길었다.
이윽고 캐롤 브라이트가 문지방을 지나고 누가 더 비집고 들어올까 재빨리 문을 닫았다.
캐롤 브라이트: 해냈다.
캐롤 브라이트는 작게 중얼거리고서는 잠금 장치를 돌렸다. 이제 밖에서는 문을 열 수 없게 되었다. 문에 가깝지 않은 나 또한 문을 여는 것은 어려워졌다.
나의 방 안에 네 명이 모였다.
캐롤 브라이트: 약속대로 풀어드릴게요. 자.
캐롤 브라이트가 카나리 케이토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카나리 케이토: 으아악!
카나리 케이토는 캐롤 브라이트에게서 멀어지려 재빨리 발을 굴렀다. 가장 가까운 벽까지 다가가 거의 달라붙기까지 했다. 캐롤 브라이트는 나와 카나리 케이토를 번갈아보며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캐롤 브라이트: 죄송해요. 카나리 씨. 하지만 이게 저희 모두를 위한 일이었어요. 히무로 씨가 문을 열어줄 방법이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아서요.
카나리 케이토: 뭐…?!
캐롤 브라이트: 다른 사람이 정신조작에 당하는 걸 히무로 씨가 용납할 리 없거든요. 즉석에서 짜고 친 것 치고는 잘 먹힌 거죠.
히무로 시라베: 내가 용납하지 않을 이유를 알았다면 네가 이런 정신 빠진 일을 하지는 않았을 거다.
카나리 케이토: 그럼 진짜 니가 했다는 거야? 내… 내가 모르고 있으면 짜고 한 게 아니잖아…
캐롤 브라이트: 결과적으로는 서로 짜고 한 게 되었잖아요. 그리고 당신은 속내가 빤히 보이는 사람이라 미리 알려주었다면 히무로 씨를 속여넘길 수 없었을 거에요.
나와 카나리 케이토만 그 협박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그녀의 전략은 통했다. 결국 캐롤 브라이트와 카나리 케이토 두 사람은 나의 방에 침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캐롤 브라이트가 그러한 행동을 취한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카이다 쿠로하. 그녀를 깨우기 위한 샤이닝의 흡수. 그녀는 이미 그 계획을 말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 계획이란 토키와 아유키 본인이 전력을 낼 수 없는 경우에만 계획이라 부를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도박이 된다.
히무로 시라베: 내가 지금 토키와 아유키를 깨운다면 너는 우위를 점할 수 없다. 조율자에게 흡수당할 뿐이지.
캐롤 브라이트: 안 그러실 거잖아요. 제가 미쳐서 토키와 씨가 깨어난 뒤에도 터치를 쓸 수도 있으니까요.
캐롤 브라이트: 당신은 조율자의 완성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사람이에요. 그러니 당신이 토키와 씨를 깨울리는 없어요.
사실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네 말에 동의한다. 다만 나는 네가 실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네 정신조작이 토키와 아유키에게 탈취당할 경우 조율자가 힘을 크게 키우거나, 심지어는 완성될 수도 있다.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다.
캐롤 브라이트: 어차피 그런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당신이 지금 비켜 주는 게 실패 확률을 가장 낮추는 일이니. 비켜 주시면 안 될까요?
히무로 시라베: 실패 확률을 낮출 필요는 없다. 애초에 시도하지 않으면 실패할 일도 없지. 그게 최선의 방안이지만, 너는 동생을 구해야 하니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캐롤 브라이트: 네. 잘 아시네요.
히무로 시라베: 너와 내가 합의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안전장치를 두는 것이다. 만약 네가 실패한다면 누군가가 조율자를 저지할 수 있다면, 그로 인해 위험을 조기 진압할 수 있다면 길을 비켜 줄 수 있다. 탑에는 이미 정신조작 면역자가 존재하니.
나는 다이얼로그를 돌아보았다. 그들에게 문을 들인 시점부터 진작 부를 수 있었지만, 캐롤 브라이트의 동의 없이 한다면 그녀는 제츠보를 협력자가 아닌 적으로 인식하게 될 터였다.
히무로 시라베: 제츠보를 부르겠다. 어떠한 정신조작이 통하지 않는 인물. 제츠보가 곁에 있다면 만에 하나 네가 정신조작을 잃게 되어도 대기하고 있던 제츠보가 조율자를 제압할 수 있게 된다. 너도 샤이닝을 빼앗길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걱정하고 있다면 마다할 필요가 없는 제안이다.
캐롤 브라이트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캐롤 브라이트: 제가 바보로 보이세요?
히무로 시라베: 그렇지 않다.
캐롤 브라이트: 제츠보 씨를 부르면 조율자를 제압할 필요 자체가 없어지잖아요. 그냥 저를 막으면 되니까요. 그걸 아는데 제가 제츠보 씨를 부르게 내버려 둘 것 같으세요?
히무로 시라베: 역시 안 속는군.
캐롤 브라이트는 다시금 나를 향해 보폭을 넓게 하며 걸어왔다.
히무로 시라베: 제츠보. 캐롤 브라이트가 폭주했다. 내 방에 있다!
나는 다이얼로그에 대고 작게 소리쳤다. 토키와 아유키가 복용한 자낙스의 효과가 그 소음을 덮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앉고 있던 의자를 들고서 캐롤 브라이트에게 치켜들었다. 닿기만 해도 정신조작을 쓸 수 있는 자와 손을 섞을 수는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나에게 터치라도 쓸 생각이라면 너는 제정신이 아니다. 터치를 쓰더라도 나는 무력화되지 않는다. 후루미나미 나몬이 내 자리를 차지할 뿐.
캐롤 브라이트: 후루미나미 씨한테 다시 터치를 써서 돌려놓으면 되죠. 저는 당신에게 잠깐 틈이 생기기만 하면 족해요.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 좋은 생각이야! 캐롤! 손을 대! 잘한다! 너는 할 수 있어! 손을 대! 네 눈알 뽑아줄게!
제츠보와 나의 숙소는 같은 층에 있었다. 카이다 쿠로하가 방해를 한다고 해도 20초 안에는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츠보가 방 안의 상황에 개입할 수 있으려면 그 문이 열려 있어야만 했다.
따라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방 안을 채울지라도 제츠보는 그 안에 들어올 수 없었다.
제츠보: 히무로! 문 열어! 지금 안에 캐롤이 있는 거야?!
살의 없이는 문을 열 수 없다. 자신을 방해하는 것은 더 이상 없음을 알게 된 캐롤 브라이트는 의자를 든 나에게 섣불리 다가오는 대신 협상을 유도했다. 그녀나 나나 서로의 대치 상태가 길어질 것을 직감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이렇게 해요. 길만 열어주시면 돼요. 제가 토키와 씨에게 터치를 사용한 뒤 카나리 씨가 문을 열면 되잖아요. 그럼 양쪽 모두 만족할 수 있어요.
히무로 시라베: 제츠보가 조율자를 무력화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하지 마라. 무책임한 생각이다. 잃는 것은 너의 샤이닝이며 너의 정신조작이다. 그 이후 네가 어떻게 될지도 장담할 수 없으면서 경솔하게 구는 건가?
카나리 케이토: 뭐야. 아까는 제츠보만 부르면 안전하다며?
히무로 시라베: 거짓말이었다. 제츠보의 도움을 받아 캐롤 브라이트를 저지할 생각이었지.
카나리 케이토: 뭐! 뭐야. 그런 거였어?
캐롤 브라이트: 역시 그런 거였네요.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속이기는…
히무로 시라베: 그럼 아니겠나? 자신의 샤이닝과 정신조작을 내버리려는 사람을 막지 않을 수는 없다.
캐롤 브라이트: 애초에 원하지 않았어요. 이딴 거. 이딴 게 있으니까 조율자 재료나 되고 따돌림 받으면서 자란 거라고요. 정신조작을 잃는다니. 듣기 좋은 말이네요. 안타깝게도 잃을 리가 없지만요. 오히려 토키와 씨의 것을 회수해서 더 큰 짐을 안게 되겠어요.
히무로 시라베: 너를 아끼는 이들은 생각하지도 않는 건가?
캐롤 브라이트: 은행강도 회유하려는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어차피 신경쓰지도 않으시면서.
히무로 시라베: 다른 사람은 너에 대해 신경쓸 것이다.
캐롤 브라이트: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요. 어차피 성공할 거니까. 맞아요. 제츠보 씨에게 문은 열어줄 필요도 없어요. 어차피 성공할 거니까요.
히무로 시라베: 카나리 케이토. 문을 열어라. 캐롤 브라이트의 터치가 실패하면 조율자가 한층 더 강력해진다. 너희들의 자유가 빼앗기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다.
카나리 케이토: …그렇게는 못 하지.
캐롤 브라이트: …카나리 씨? 이러시면 안 돼죠. 토키와 씨에게 복수하자고 하셨잖아요. 저희 합의를 했다고요. 토키와 씨의 정신조작을 빼앗을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해 놓고서 이제 와서 발을 빼면…
카나리 케이토: 내가 합의한 건 복수까지야. 조율자가 다시 나타나는 건 절대 안 돼. 그리고 겨우 정신조작을 앗아간다고…? 그게 다가 될 순 없어.
카나리 케이토는 문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좋지 못한 일이었다. 제츠보가 상황에 개입할 여지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허나 곧 방 안의 구도는 캐롤 브라이트에게도 불리하게끔 변해갔다.
카나리 케이토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리며 나, 그리고 토키와 아유키의 방향으로 서서히 걸어왔다. 그가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것을 본 나는 그를 향한 경계를 누그러뜨리려다가 뒤늦게 그의 손목시계가 곧 그의 무기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시계바늘 대신 가는 장침이 붙어 있는 시계. 초소형 활이었다.
카나리 케이토: 토키와 아유키에게 본때를 보여줄 테다.
히무로 시라베: 그것을 쏠 생각인가? 그랬다간 토키와 아유키가 깨어난다.
캐롤 브라이트: 애초에. 그러면 죽잖아요! 무슨… 짓이에요. 카나리 씨.
캐롤 브라이트는 자신의 목소리를 무심코 높였다가 가까스로 가다듬었다. 그녀는 언성을 높이지 않은 채 그의 주의를 끄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카나리 케이토: 너랑 나의 복수가 서로 달랐던 것 뿐이야. 내 목적은 이거였어. 그리고 꼭 죽이는 건 아니야. 이게 얼마나 셀지는 나도 모르고, 운 좋으면 살겠지.
히무로 시라베: 무책임한 말이군.
캐롤 브라이트: 그렇게는 못 둬요. 저는 토키와 씨에게서 정신조작을 회수해야 한다고요. 그래야 치나미가 깨어날 수 있으니까…!
카나리 케이토: 그녀석은 자기 벌을 받고 있는 거야. 그대로 둬.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죽은 사람들에게 불공평하다고.
캐롤 브라이트: 안 된다고요…! 멈춰요!
캐롤 브라이트의 말대로 해라. 죽이는 것은 처음부터 선택지에 없었다.
방 안에서 맞서게 된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것을 원하고 있었다. 나는 터치를 가진 두 사람 간의 접촉을 막아야 했고, 캐롤 브라이트는 토키와 아유키에게 닿아야 했으며, 카나리 케이토는 토키와 아유키에게 상해를 가할 생각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제츠보. 캐롤 브라이트가 폭주했다. 내 방에 있다!
제츠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히무로. 여보세요? 여보세요!
제츠보: 진짜 한 거야…?!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그 바보같은 여자가 기어코 일을…!
제츠보는 미련한 자기 자신에게 한심함을 느끼며 카이다의 몸을 질질 끌어댔다. 평소대로라면 어딘가에 긁히지는 않을까 꽤 조심해서 끌고 다니는 그녀였지만,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카이다의 안위를 생각할 수는 없게 되었다. 어차피 튼튼한 바. 제츠보는 문을 열어젖히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한쪽 발목의 하중을 단 채로. 빠르게 히무로의 방을 향해 절뚝였다.
그러나 열려있던 히무로의 문은 그녀가 반쯤 도착했을 때 그녀의 앞에서 닫혔다.
제츠보: 자. 잠깐! 문 열어! 아무나. 문 열라고! 너희 지금 바보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캐롤이 토키와에게 닿았다간…!
제츠보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제약. 또 제약이었다. 그래. 아직 아무도 모르는 정보니까 당연하다. 제츠보는 다급하게 문고리를 잡고 흔들었으나 부숴버릴 수는 없었다. 살의가 없는 기물 파손은 규칙 위반이다.
제츠보는 두어번 더 문을 두드리고 발로 세게 걷어차다가 히무로와 같은 층에 사는 한 사람. 캐롤 브라이트를 설득할 만한 단 한 명의 사람을 떠올렸다. 나나시.
다이얼을 돌려 나나시에게 전화를 걸자 몇 초 뒤 나나시가 전화를 받았다.
나나시: 무슨 일이야?
전화를 받고 있는 시점에서 나나시는 이미 자신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뒤였다.
제츠보: 빨리 옷 입고 밖으로 나… 뭐야. 깨어 있었어?!
나나시: 느낌이 불길하길래 깼는데… 왜?
제츠보: 다행이네. 지금 캐롤이 히무로 방 안에 들어갔어. 터치를 쓰려고 해!
나나시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제츠보의 말에 대꾸를 하지 못했다.
나나시: …정말 저지른 거야?
제츠보: 그래! 서둘러… 아니. 오는 길에 공구 같은 거 챙겨 와. 문을 따야 할 수도 있어!
나나시: 알겠어. 바로 올게.
카나리 케이토: 당장 비켜. 안 그러면 너한테 이거 쏜다.
히무로 시라베: 다음 장침이 없다면, 한 번 쏜 침을 회수할 기능이 없다면 그럴 수 없을 텐데. 그리고 네 도구의 구조는 다음 장침과 침의 회수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캐롤 브라이트: 저 말은 허세에요. 히무로 씨. 비켜주지 마세요. 카나리 씨는 토키와 씨가 한 잘못에 사적인 제제를 가하려는 것뿐. 지금은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어요. 고작 자신의 일을 한다고 해서 히무로 씨마저 다치게 만들 사람이 아니에요. 그건 또 다른 악행과 부끄러움을 만들어낼 줄 알테니까.
카나리 케이토: …조용히 해. 나는 그런 거 모르는 사람이야. 안 적도 없어.
캐롤 브라이트: 카나리 씨. 당신은 저를 도와주셔야 해요. 토키와 씨를 어떻게 하려든 간에 정신조작을 빼앗고 하는 게 본인에게 더 큰 상실감과 좌절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으세요?
히무로 시라베: 믿지 마라. 카나리 케이토. 애초에 일이 잘못되면 토키와 아유키는 조율자에게 가까워진다. 조율자가 너를 가만히 놔둘 것 같나?
히무로 시라베: 그러니 너희 모두 물러서야 한다. 너희는 순간의 감정에 사로잡혀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고 있다. 일단 이 방에서 나가라. 그 뒤 합의점을 찾도록 하지.
카나리 케이토: 안 할 거잖아.
캐롤 브라이트: 맞아요. 저희는 안 속아요. 히무로 씨.
나는 캐롤 브라이트와 카나리 케이토에게 번갈아 의자를 겨냥했다. 캐롤 브라이트와 카나리 케이토 모두 나머지 두 세력을 곁눈질로 보며 경계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서로 동등히 불리한 대치 구도였지만 나에게는 다른 두 사람과 다른 승리 조건, 그에 따른 전술적 우위가 있었다.
나는 토키와 아유키를 깨울 수 있었다. 정신조작의 흡수와 상해를 위해 두 사람은 토키와 아유키의 수면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적어도 캐롤 브라이트만큼은 확실히 그래야 했다.
그러나 그를 깨운 뒤에도 캐롤 브라이트가 사리분별을 하지 못할 경우. 조율자가 캐롤 브라이트에게서 정신조작을 빼앗을 가능성이 커졌다. 결국 그녀가 말한대로였다. 나는 조금이라도 그런 가능성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캐롤 브라이트와 카나리 케이토를 의자로 무력화시키는 방안도 고려해 보았다. 그러나 폭력 행위는 두 사람의 절박함과 위험행동을 부추길 뿐. 일격의 무력화가 아니라면 오히려 역효과를 낼 터였다. 카나리 케이토가 원거리 상해 도구를 가졌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위험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둘 다 걸을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 버리자.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말을 무시했다.
캐롤 브라이트: 허튼 생각 마세요. 히무로 씨. 당신이 아무리 강해도 저희 한 명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 정도의 시간이면. 나머지 한 명이 목적을 이루고야 말 거에요.
히무로 시라베: 너희 중 누구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는 없다. 터치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마라. 캐롤 브라이트. 의자를 쓰면 네 접근을 막을 수 있다. 반대로 내가 접근한다면 너를 무력화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캐롤 브라이트: 뭐에요. 그 말투는. 무슨 의자의 본래 용도가 들고 휘두르기라는 것처럼…
카나리 케이토: 나를 내버려 둬. 너도 저놈을 막아야 하니까 여기에 가둬둔 거 아니야? 다른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막는 거 아니냐고.
카나리 케이토: 저놈을 막으면 되는 거 아니야? 너는 길을 열어줘야 해. 이걸 맞고 저놈이 죽든지 살든지 간에 예전만큼 활보하고 다닐 수는 없어지잖아. 목에 구멍을 하나 낼 뿐이야. 그러다가 죽으나 사나 너와는 관련 없는 일이고.
카나리 케이토는 내가 직시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되짚었다. 조율자를 죽이면 조율자가 입힐 수 있는 모든 해악을 방지할 수 있었다. 처형인을 자처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조율자의 목숨을 내어 주어야 하는가?
그것은 죽게 내버려두어도 좋은 사람이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조율자를 붙잡으려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과거에는 토키와 아유키라는 사람이었을지라도, 완전한 조율자가 아닌 부분적으로 토키와 아유키의 잔재가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죽어야 하는 인물이었다.
나는 여건이 충분했다면 카나리 케이토가 조율자를 죽이도록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캐롤 브라이트와 이름 없는 남자를 배척해야 하는지에 대한 여부를 결정할 때와는 달랐다. 그때 나는 마유즈미가 곁에 있다면 했을 법한 일을 떠올리며 그것을 나의 지침이자 기준으로 삼은 바 있었지만, 조율자를 비호한다는 악행의 핑계로 마유즈미를 세울 수는 없었다.
나는 조율자가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직접 보았다. 얼마나 많은 이가 그를 막으려다가 죽었는지도 떠올렸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조율자를 방조하는 것은 결단을 회피하는 일일 뿐이었다. 내가 그를 진정 증오하며 위험을 느끼고 있다면, 그가 죽게끔 내버려두여야 이치에 맞았다.
캐롤 브라이트: 토키와 씨를 죽게 두었다간 저도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히무로 시라베: 네가 무슨 일을 할지라도 그것은 완성된 조율자가 할 수 있는 일에 결코 미칠 수 없다.
캐롤 브라이트: 조율자에 대해서 잘 아시나 보네요? 그런데 저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에요. 지금 토키와 씨가 죽으면 치나미를 깨울 방법도 같이 사라져요. 깨어나기만 해도 제가 샤이닝을 무리 없이 빼앗기는 어려워지고요.
캐롤 브라이트: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저는 치나미가 깨어나는 가능성을 창문으로 삼고 있다고요. 오직 그곳으로만 숨을 쉬고 빛을 볼 수 있는 창문… 이제 몇 개도 채 남지 않았어요. 제가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요?
그러나 캐롤 브라이트의 태도는 무척 강경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일부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다 쿠로하가 깨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캐롤 브라이트의 창문이었다. 그게 닫히지 않기 위한 캐롤 브라이트의 발악도 위험했지만, 창문이 닫힌 이후에 이어질 캐롤 브라이트의 폭주는 그보다 훨씬 더 위험했다.
탑에 온 이래 캐롤 브라이트가 진즉 사람들을 종으로 만들지 않은 것은 그녀의 자제력 때문일 뿐. 원한다면 캐롤 브라이트는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 본인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토키와 아유키가 죽는 순간 나는 조율자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도 저를 못 막아요. 후루미나미 씨가 주도권을 얻는다면 저한테 협력하실 테니까요.
히무로 시라베: 그녀라면 그렇게 하겠지. 더 많은 고통을 위해서. 그러나 너조차도 그렇게 할 줄은 몰랐다.
캐롤 브라이트: 기꺼이 하고 말죠. 못 믿겠어요? 제가 얼마나 미쳤는지 시험해보고 싶으면 카나리 씨를 내버려 두시던가요.
카나리 케이토: 너… 너.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냐?
카나리 케이토는 캐롤 브라이트를 돌아보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것은 토키와 아유키에게서 멀어지는 걸음이기도 했다.
캐롤 브라이트: 그래요. 그러니까 저를 밀어붙이지 마세요. 뒷걸음질치다가 고꾸라질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캐롤 브라이트는 그렇게 협상할 여지가 있는 사람을 구했다. 세 명이 서로 견제하는 구조는 각자의 사람들이 서로의 입장을 양보하지 않을 때만 성립되는 것. 카나리 케이토가 타협을 택한 이상 무너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카나리 케이토는 두 손을 든 채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카나리 케이토: 알겠어. 죽이지는 않을게. 그러면 되는 거잖아? 그러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한테 터치를 쓰지는 않을 거지. 그렇지?
카나리 케이토: 내 복수에 또 다른 사람들이 다쳐서는 안 되지… 부끄러워서라도 그렇게는 못 해. 그러니까 그런 짓은 생각도 하지 마. 사람을 제멋대로 조종한다니… 해도 되는 일이 아니야. 앞으로도 절대 안 된다고. 알겠어?
캐롤 브라이트: …좋아요. 그러면 제가 토키와 씨의 정신조작을 빼앗은 이후에. 마음대로 복수하세요. 그건 저도 말릴 이유가 없어요.
카나리 케이토는 캐롤 브라이트의 말을 듣고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무심코 캐롤 브라이트를 향해 손목시계를 한 번 조준하다가 그만두기도 했다.
카나리 케이토: 아. 안 돼! 그녀석이 완전해지는 건 절대 안 된다니까! 그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거야!
캐롤 브라이트: 그럴 일 없다니까요. 토키와 씨는 오늘… 아니. 이제 새벽이니까 어제네요. 겨우 어제 자신이 조율자인 줄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제가 질 것 같으세요?
카나리 케이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정신조작에 대해 잘 몰라. 그렇지만… 네가 삐끗하면 다 끝장이라는 건 확실하잖아.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면 어쩌려고 그래!
캐롤 브라이트: 하아… 답답하긴… 왜 이렇게 설득이 안 되는거에요? 제 말 좀 제대로 들으세요. 그러니까. 그런 걱정을 하실 필요가 없…
캐롤 브라이트는 무언가를 뒤늦게 떠올린 듯이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의중을 알 수 없는 음영이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무언가를 이미 정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런 대치 상황 속에서 캐롤 브라이트가 결단을 내렸다면, 나는 그 가능성밖에 염두에 둘 수 없었다.
캐롤 브라이트: …카나리 씨. 혹시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히무로 시라베: 그만둬라. 캐롤 브라이트.
카나리 케이토: 부탁…? 뭔데?
캐롤 브라이트: 들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괜찮아요. 주의 깊게 들어주시고 어떻게 할지 정해 주세요.
히무로 시라베: 카나리 케이토. 귀를 막아라.
캐롤 브라이트: 귀 막지 마세요.
카나리 케이토는 나와 캐롤 브라이트를 번갈아 바라보며 어찌할 줄 모르고 안절부절할 뿐이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이미 카나리 케이토가 딕테이트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았다. 자유의지에 반하는 명령은 아직 입력되지 않았지만 캐롤 브라이트는 정신조작 보유자이니 그녀가 만들어내는 모든 상호작용은 정신조작의 일부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내가 대신 막아 줘야지.
후루미나미 나몬의 손이 카나리 케이토의 머리를 통과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역시 안 되네. 알아서 살아.
히무로 시라베: 지금이라도 귀를 막으란 말이다. 어서!
카나리 케이토: 나. 나더러 어쩌라고! 대체 왜 그러는데. 너희!
캐롤 브라이트: 조용히 해요. 둘 다. 그러다 토키와 씨 깨겠어요.
카나리 케이토: 왜 그러냐고…
카나리 케이토는 심통이 난 모습으로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이 또한 정신조작이었다. 캐롤 브라이트의 눈짓, 지나가듯이 하는 말 한 마디, 수화와 모든 접촉이 전부 정신조작이었다. 순수한 카나리 케이토의 반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접어두었다.
히무로 시라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네가 하려는 일은 잘못되었다.
캐롤 브라이트: 그건 저도 알아요. 누구보다 잘 알죠. 저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세요? 저야말로 하기 싫어요.
캐롤 브라이트: 결코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는데. 지키려고 부던히 애썼는데… 그러나 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이 제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어요. 눈을 돌리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네요.
캐롤 브라이트: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면서 그러지 않고 방조하는 건. 결단을 회피하는 일일 뿐이겠죠. 또 책임에서 도망치려는 바보짓이기도 할 거고요.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거들먹거리고 싶지는 않았으나 나의 냉소적인 면은 그녀를 보며 느닷없는 배신감을 느끼는 대신. 그 파국의 순간을 더 대비하지 않았다는 나의 미련함을 지적했다. 원거리에서의 대응 수단을 더 마련해 두었어야 했다. 정신조작 보유자가 반드시 본색을 드러낼 줄을 알고서도. 또 그들과 대치한 이후에야 후회를 하게 되었다.
당연히 그녀는 이렇게 하겠지. 무엇을 바란 거냐.
질타를 받고 경멸을 받아도. 지금까지의 저 자신을 배신하는 일일지라도… 할 수밖에 없어요… 제가 달리 어쩔 수 있겠어요?
최대한 대화로 해결하고자 했던 바람도 여기까지. 나는 의자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카나리 케이토가 캐롤 브라이트의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하게 되기 전. 캐롤 브라이트의 의식을 잃게 만들 작정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카나리 씨. 이건 명령이에요. 지금 당장 몸을 멈추고…
나나시: 안 돼요. 캐롤 씨!
나는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안도했다.
이름 없는 남자. 캐롤 브라이트에게 동등한 의견을 낼 수 있는 마지막 사람. 그는 카이다 쿠로하와 같이 캐롤 브라이트의 창문이었다. 다른 창문이 닫힐지도 모른다는 우려만이 캐롤 브라이트의 행동을 재고할 만한 계기가 되었다. 금수의 길로 빠지기 한 발자국 전에 등을 끌어당겨주는 누군가였다.
나나시: 그러면 안 돼요. 그랬다간 반드시 후회할 거에요!
캐롤 브라이트: …후회 안 할게요.
나나시: 아뇨. 당신이라면 후회해요! 후회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그만두세요! 히무로 너도 멈춰. 지금 둘이 부딪혔다간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려!
히무로 시라베: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름 없는 남자. 네가 설득해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 캐롤 브라이트다. 내게서 정신조작을 당해줄 만큼의 참을성을 기대하지 마라.
캐롤 브라이트: 애초에 당신한테 정신조작을 쓸 생각도 없어요. 터치를 써봤자 당신과 후루미나미 씨가 교대할 뿐인데 제가 왜 쓰겠어요? 당신은 길만 비켜주면 된다고요.
히무로 시라베: 그 일은 탑의 모든 이들을 위험에 빠트릴 것이다. 캐롤 브라이트.
캐롤 브라이트: 그런 보장도 없잖아요. 당신은 그 해석을 스스로 믿고 있을 뿐이에요.
제츠보: 캐롤.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제츠보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주었다.
제츠보: 너는 카이다를 구하고 싶기에 카이다를 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거야. 전후 관계가 뒤바뀌었다고. 여기서 멈춰야 해. 캐롤!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 거야!
캐롤 브라이트: …이제 와서 멈추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어요. 더 이상 기회가 없어요. 제가 토키와 씨에게 터치를 쓸 수 있는 건 이게 마지막이라고요… 여러분들이 두 번씩이나 방심할까요? 네? 이게 마지막 기회가 될 거에요.
캐롤 브라이트: 저는 여기서 끝을 봐야겠어요. 여기까지 온 게 가장 멀리 온 거니까…
나나시: 캐롤 씨.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저희가 캐롤 씨를 막고자 하는 건 카이다를 싫어해서가 아니에요. 당신을 걱정해서라고요! 다치게 될 당신을요! 당신의 샤이닝을 빼앗길지도 모르는 일은 그만큼 경계하고 또 두려워하셔야 해요!
제츠보: 게다가 캐롤. 네가 토키와에게 샤이닝을 빼앗기기라도 한다면 단지 너만의 일로 끝나지 않아. 이 탑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여파를 겪게 돼.
히무로 시라베: 제츠보의 말이 옳다. 너에게는 단순히 네 동생을 구하느냐 마느냐의 선택이겠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아니다.
캐롤 브라이트: …그래서요. 여기서 멈추라는 말인가요? 제가 바라던 일이 바로 눈앞에 와 있는데요?
제츠보: 차라리 나를 들여보내 줘. 캐롤! 내가 옆에서 토키와나 너를 감시한다면 히무로가 염려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야. 내가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캐롤 브라이트: 장난해요? 둘이서 똑같은 말을… 이 안에 들어오면 나를 막을 거면서 제가 속아넘어갈 줄 아시나 보네요.
제츠보는 캐롤 브라이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를 저지하는 것이 당연하고 또 논리적인 일이기 때문이었다.
카나리 케이토: 캐롤.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녀석들 말이 맞아. 이쯤에서 관두란 말이야.
나나시: 캐롤 씨… 제발 나와 주세요. 저를 생각하셔라도 이러시면 안 돼요.
캐롤 브라이트는 그 말을 듣고 눈에 띄게 동요했다. 교착 상태가 이루어진 이래 가장 큰 당황이었다. 이름 없는 남자는 캐롤 브라이트에게 닿을 수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만큼은 닿았다.
나나시: 저는 캐롤 씨를 잃고 싶지 않아요…! 너무 위험한 선택이잖아요. 당신은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곘지만, 당신은 이 안에 들어갈 수 없게끔 스스로를 몰아세운 거에요.
캐롤 브라이트: …그런 게 아니에요.
나나시: 당신이 저에게서 당신을 이해해주기를 바랐던 것처럼. 저도 이해해 주세요. 제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캐롤 씨. 문을 열어 주세요. 이러지 말아요…
나는 캐롤 브라이트가 뒤를 돌아보려 고개를 힐끔거리는 것을 보았다. 감정에 휩쓸린 자의 동작이었다. 뒤를 돌아도 그의 모습은 볼 수 없고 목소리는 이미 전해졌다. 무의미한 동작은 곧 그녀가 이름 없는 남자의 말을 신빙성 있게 여긴다는 반증이다.
캐롤 브라이트의 마음은 이름 없는 남자가 말하기 전부터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얄팍한 자기확신과 기적을 바라는 낙관주의에 기대고 있었으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토록 고립된 상황 속에서 유일한 아군이 건네는 설득은 큰 효과를 낸다. 인질극 상황 속 범인들의 가족을 데려와 설득시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캐롤 브라이트는 확신이 흔들릴 때 스스로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게 확신하기를 택했다.
캐롤 브라이트: …그럼 나나시 씨. 저더러 어쩌라는 거에요?
캐롤 브라이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하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저더러 치나미를 포기하라는 건가요? 여기까지 왔는데. 시도조차 못 해보고 포기하라고요? 누구를 위해서요?
캐롤 브라이트: 지금 제 앞에 서 있는… 저희 힘줄을 자르려고 혈안이 된 사람을 위해서요…? 제가 죽었을 때 도와주러 오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요?
캐롤 브라이트는 미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자신을 도와주지 않은 사람은 전부 적대시하고, 조금도 아끼지 않겠다는 투였다.
캐롤 브라이트: 더는 그렇게 못 하겠어요… 원래부터 세상은 차갑고 외로운, 잔인한 장소에요. 여기는 특히 그래요. 제가 얼마나 참아왔는지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으면서 내가 평소와 다르게 나오면 비난할 준비만 하는 자들… 다 필요 없어요. 필요 없다고요.
나나시: 캐롤… 제발…
캐롤 브라이트: 당신도 이제 확실히 정하세요. 저에요. 아니면 저 말고 다른 사람들이에요? 제 편을 들어주시지 못할 거라면 방해라도 하지 마세요.
캐롤 브라이트는 자신의 발언을 확실히 하려는 듯 문 밖의 이름 없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에게서 눈을 뗐다.
나는 의자를 높이 들었다.
카나리 케이토: 조. 조심해!
카나리 케이토의 외침이 울리고, 캐롤 브라이트가 다시 앞을 바라보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띄우는 바람, 그리고 기척을 느꼈을 때. 캐롤 브라이트는 자신의 눈앞에 의자가 있음을 보았다.
캐롤 브라이트: 흐이익…!
히무로 시라베: 나는 너를 내려칠 수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 지금도 내려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가능한 평화적으로 이 일을 무마하고 싶기 때문이다.
카나리 케이토: 크… 큰일 나는 줄 알았네… 노. 놀라게 하기는!
캐롤 브라이트: …왜 때리지 않으셨어요? 분명 당신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텐데… 당신은 저희를 미워하잖아요…?
히무로 시라베: 내가 적대하는 것은 정신조작을 악용하는 사람이다. 너 또한 그 범주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만, 이름 없는 남자가 너에게 동조하지 않는 이상 대화의 여지가 있다.
캐롤 브라이트: 저를 설득하시려는 거라면. 그냥 내려치세요. 저는 당신의 말을 듣지 않을 거에요.
캐롤 브라이트: 진심이에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내려치세요. 결국 저는 토키와 씨에게 터치를 쓰고… 치나미를 깨우고야 말 테니까요.
히무로 시라베: 네가 그런 극단적인 생각에 빠진 경위는 이해할 수 있다.
캐롤 브라이트: …당신이 저를 이해한다고요? 어떻게요?
히무로 시라베: 나 또한 사방이 벽에 막혀있는 와중 창을 통해 벽 밖을 내다보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캐롤 브라이트는 순간 불신과 적의로 가득 찬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히무로 시라베: 그 창을 통해 아무것도 볼 수 없을지라도 좋다. 심지어는 뚫려있지 않더라도 상관 없지. 사다리를 타고 창문의 높이까지 올랐을 때 창이 아니라 벽에 붙은 그림을 만지게 될지언정 창문은 그곳까지 올라갈 계기가 되어 주는 것이다.
히무로 시라베: 너와 나는 그로 인해 협력할 수 있었다. 목적과 목표. 숨쉴 구멍. 누구나 어쩔 수 없이 그것들을 보며 나아간다. 내가 마유즈미를 다시 보기 위해 너의 협조가 필요했듯이 너는 카이다 쿠로하를 다시 보기 위해 토키와 아유키의 샤이닝이 필요한 것 뿐이겠지.
히무로 시라베: 그러나 나는 너를 풀어줄 수 없다. 그 사실은 유감이다. 캐롤 브라이트.
나는 애초에 캐롤 브라이트에게 영구적인 상해를 입힐 수 없었다.
캐롤 브라이트는 내가 그녀를 개인적으로 증오한다는 듯한 망상에 사로잡혔다. 그 망상이 그녀로 하여금 진실을 볼 수 없게 억눌렀다. 나는 마유즈미를 포기할 수 없는데, 캐롤 브라이트는 그 사실을 몰랐다. 알았다면 네까짓 게 무엇을 할 수 있냐며 밀어붙였을 터.
캐롤 브라이트: …그 말이 맞네요. 히무로 씨. 당신은 마유즈미 씨와의 재회를 저에게 의존하고 있었죠. 이제 저를 해치시면, 아니. 길을 비켜주지 않으시면 앞으로 협조는 없어요. 마유즈미 씨가 돌아오지 않는 건 당신 탓이에요.
나나시: 캐롤 씨. 어떻게 그런 말씀을…! 마유즈미는 저희들의 친구이기도 하잖아요. 담보로 삼듯이 말씀하시면 안 돼요!
히무로 시라베: 이름 없는 남자의 말이 맞다. 마유즈미를 아끼는 주제에 신빙성 없는 말을 하는군.
캐롤 브라이트: 안타깝게도 제 동생만큼 아끼지는 않거든요. 마유즈미 씨는 드물게도 편견 없이 착하며 좋은 분이시지만… 치나미와 마유즈미 씨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저는 주저 없이 치나미를 고를 거에요.
히무로 시라베: 비난하지 않겠다. 다만, 내가 이 사실을 왜 너에게 전해 주었는지를 깨닫지 못한 건가?
캐롤 브라이트: 마유즈미 씨를 되돌리는 일에 제가 필요해서잖아요. 생각해 보면 당신을 위해 제 시간과 체력을 내어준 것부터 너무 착한 사람이 되려 한 거였어요. 조금 더 이기적으로 나왔어야 했던 건데…
히무로 시라베: 틀렸다. 너와 내가 같은 처지인 만큼 네가 나에게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음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다.
나는 여전히 의자를 캐롤 브라이트의 머리 바로 위에 두고서 말을 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도움이요…? 언제나 그런 것처럼. 표정을 하나도 안 바꾸고 뻔뻔한 거짓말을 하시네요… 당신이 치나미가 깨어날 수 있게끔 도와줬을 거라고요?
히무로 시라베: 지금도 너를 도울 수 있다. 너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캐롤 브라이트: 어차피 안 도와주실 거잖아요. 안 도와주셨다고요. 동생을 깨우고 싶다고 분명 말했는데. 다들 자기 알 바 아니라는 듯이 외면해 놓고서는…!
히무로 시라베: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캐롤 브라이트: 말해봤자잖아요.
히무로 시라베: 이런 식으로 깨우고 싶다고 말했다면, 대신할 방법을 함께 찾고자 노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옆에 인질 대신 제츠보를 두는 타협마저 가능했겠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 행세는 그만해라. 이름 없는 남자가 문을 두드리며 너를 부르는데, 너는 그를 외면하고 있다.
캐롤 브라이트는 자신의 이를 부드득 갈았다.
캐롤 브라이트: 닥쳐요… 제가 바보인 줄 아시나 보네요. 당신이 그런 타협을 할리가 없잖아요.
히무로 시라베: 너는 말하지 않았다. 묻지 않았다. 너는 포기했다. 그 끝에 너는 한 번의 실패로 모든 정신조작과 샤이닝을 잃을 절벽 위에 선 것이다. 멋대로 인질을 잡아 침입해 놓고서는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카나리 케이토: 머… 멍청아… 왜 자극을 하고 그래? 안 그래도 상태 안 좋은 녀석인데 몰아붙여서 뭐가 좋다고…
카나리 케이토: 그보다 너 팔 안 아프냐? 의자를 얼마나 들고 있는 거야…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가 자유를 잃는 게 더 입맛에 맞는 분들 주제에. 대신할 방법을 찾아…? 말뿐인 소리 하지 마세요. 비위 상하거든요.
히무로 시라베: 왜 그렇게 단정했지?
캐롤 브라이트: 당신 친구인 하기와라 씨가 한 말이에요. 치나미가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고 했죠.
그 천치같은 놈이 벌집을 들쑤셨군.
캐롤 브라이트: 하기와라 씨가 다는 아니에요. 나나시 씨에게 이 계획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했을 때도 돌아온 건 거절이었어요. 나나시 씨조차도요. 지금 저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도 반대하는데 다른 분들이 도와줄리 만무하죠.
이름 없는 남자는 그녀를 사랑했기에 반대했다. 캐롤 브라이트는 그 사실을 몰랐다.
제츠보: 뭐라고? 나나시. 너… 캐롤이 하려는 일을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진작 말하지 않고…
히무로 시라베: 너와 내가 할법한 일을 알기 때문이겠지.
제츠보: 아…
제츠보는 말을 잇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하려던 일을 나 혹은 제츠보가 알았다면, 어느 쪽이든 간에 신뢰할 수 있는 모든 인원에게 주의사항을 전파할 터였다.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름 없는 남자 또한 우리가 그러고도 남을 사람임을 알았다.
비밀을 지킨다고 해서 설마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터. 그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나나시: 이럴 줄 알았다면 당신의 계획을 망쳐 놓았을 걸 그랬어요.
캐롤 브라이트: 보세요. 나나시 씨마저 이러시잖아요. 토키와 씨에게 터치를 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당신들이 도와줄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제가 왜 그걸 발설하겠어요? 저에게 온갖 감시와 견제가 쏟아질 걸 알면서?
히무로 시라베: 그야 그 단 한 가지의 방법이 미친 짓이기 때문이다. 네가 하고 있는 일과 앞으로 하게 될 일을 생각해 봐라. 조율자에게 닿으면 어떻게 될지에 대한 확신은 있나? 이런 건 계획이라 부를 수도 없다. 실패하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 꼭두각시가 되는 수밖에 없지. 무책임한 일이다.
캐롤 브라이트: 무책임하다고요…? 이것이야말로 책임을 지는 일이에요. 그에게서 정신조작을 다시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은 그 손가락을 가지고 있던 저밖에 없다고요. 저만이 할 수 있어요. 치나미를 구하고 모든 분들을 지키고…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거에요.
캐롤 브라이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캐롤 브라이트: 그것이야말로 책임을… 책임을 지는 거라고요. 어질러 놓은 걸 스스로 치워야 하는 건 당연하잖아요. 무책임하다고요? 제가 살아나서 조율자가 탑에 나타났는데. 다른 분들까지 휘말렸는데 가만히 있는 게 더 무책임한 몹쓸 짓 아닌가요?
캐롤 브라이트: 그런 힘을 가지고 살아났으면 손가락을 자르고 잊어버리는 게 다가 아니라. 그 힘을 다시 회수해야 하는 거에요. 영안로에서 살아난 제가 조율자의 파편 상태였기에 치나미가 당하고… 토키와 씨가 조율자로 변해 버렸어요. 여러분도 다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시잖아요.
나나시: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히무로 시라베: 그건 불운이 겹쳐서 일어난 일일 뿐, 너의 잘못이라고 볼 수 없다.
카나리 케이토: 그. 그래… 너무 자기 탓 하지 마. 네가 그 정도의 사람은 아니야!
제츠보: 나나시가 한 일 때문에 네가 책임을 지는 건 말이 안 돼. 캐롤. 너는 선택권이 없었잖아. 차라리 나나시의 탓으로 돌리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
캐롤 브라이트: 아뇨. 나나시 씨 잘못만큼은 아니에요. 제가 그걸 증명하려고 여기에 있는 거라고요… 제가 가지고 태어난 터치와 정신조작 때문에 나나시 씨가 비난을 받는 건 절대 안 돼요.
제츠보: 아…
제츠보의 말은 역효과를 냈다. 캐롤 브라이트는 자신이 이름 없는 남자의 부담을 덜고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이름 없는 남자의 탓으로 돌리라는 말을 했으니 통하지 않았다.
나나시: 동생을 구하고자 하는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알아요. 캐롤 씨.
캐롤 브라이트: …당신이 정말 아시나요?
캐롤 브라이트는 이름 없는 남자가 봐선 안될 법한 표정을 지었다.
캐롤 브라이트: 그럼 말해 보세요. 제 희망이 얼마나 간절한지를요.
나나시: 그건 희망이 아니에요.
캐롤 브라이트는 이름 없는 남자의 대답을 듣고 희미한 미소와 당황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남에게 이해받는다는 안도감과 기쁨. 동시에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 속에 발을 깊숙하게 집어넣어 느끼는 수치심 때문이었다.
나나시: 파괴되지 않는 것이죠. 고통과 죽음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존재를 향한 불꽃이요. 당신이 마음 안에 품은 신. 재회라는 이름의 신…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있고 보상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죠.
나나시: 그 원초적인 무의식은 당신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파괴되지 않는 것이 자리를 잡은 순간 그것은 당신을 파괴할지라도, 그것이 파괴되지는 않아요. 당신이 파괴할 수 없을 뿐더러, 파괴되려 한다면 당신 스스로가 그것을 막을 테죠.
나나시: 바로 그런 식으로 당신이 파괴되는 거에요. 그것을 속에 품고 나아가다가 당신이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 가장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신이 당신과… 당신 주변의 모든 것들을 부수려 하고 있어요. 캐롤 씨.
나나시: 당신이 또 부서지게 둘 수는 없어요.
이름 없는 남자는 문 너머에서 말했다. 괴로워하는 듯한 음성이었다.
나나시: 제발요. 캐롤 씨… 부디 멈춰 주세요…
캐롤 브라이트: 저… 저는…
굳이 더 말을 얹지는 않았다. 다 이루어진 일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름 없는 남자의 설득은 효과적이었다. 흔들리고 있는 캐롤 브라이트를 온전히 납득시키는 일은 그녀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이름 없는 남자의 일이지, 그녀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나나 제츠보의 일이 아니었다. 캐롤 브라이트는 자신의 무모함을 돌아보고, 내가 의자를 겨누고 있는 이상 결국 그녀는 토키와 아유키에게 닿을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나나시: 이제 그만해요.
캐롤 브라이트: 그렇지만… 저는…
분명 그러했다.
토키와 아유키: 나나시의 말을 들으셔야 할 거에요. 캐롤 씨.
그러나 그 모든 깨달음은 조율자가 입을 열자마자 캐롤 브라이트의 뇌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카나리 케이토: 우왁!
나나시: 토. 토키와?!
히무로 시라베: 깨어 있었나.
토키와 아유키: 그럼 주변에서 그렇게 시끄럽게 구는데 당연히 깨어나지. 나는 내가 꿈을 꾸는 줄 알았어.
캐롤 브라이트는 토키와 아유키가 깨어나자마자 얼굴에서 반성의 기색을 지워버렸다.
캐롤 브라이트: …깨어날 필요가 없었을 텐데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면 제가 당신에게 터치를 쓰고, 당신은 제 샤이닝과 정신조작을 흡수할 수 있었잖아요.
토키와 아유키: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어요. 실패할 게 자명해 보이니 그러지 않기로 했을 뿐이죠.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이걸 봐요. 지금 이 말을… 이 말을 정말 믿으세요? 이 말을 믿으라는 딕테이트에라도 걸리셨어요?
히무로 시라베: 믿지는 않는다. 네 주장을 믿지 않듯이.
제츠보: 캐롤. 일단 진정해. 그런 식으로 흥분했다간 나쁜 일이 벌어지고 말 거야!
카나리 케이토: 조. 조율자!
카나리 케이토는 토키와 아유키에게로 장침을 조준했다. 토키와 아유키는 자신을 가리키는 바늘을 힐끔 보더니 그에게 말했다.
토키와 아유키: 나 말고 다른 곳을 겨눠. 카나리. 그런 게 나에게로 향하고 있으면 불편하니까.
카나리 케이토: 싫은데? 내가 왜 그 말에 따라야 해? 내가 바보로 보이냐!
토키와 아유키는 눈을 약간 크게 뜨고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토키와 아유키: 아. 간절함이 부족했나? 크흠. 카나리. 나 말고 다른 곳을.
히무로 시라베: 닥쳐라. 더 딕테이트를 쓰려 했다간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
캐롤 브라이트: 맞아요. 조용히 해요. 자기 것도 아닌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다니지 말라고요.
토키와 아유키: …이 힘이 제 것이 아니긴 하죠. 하지만 당신의 것이 될 수도 없어요. 저에게 터치를 써서 카이다를 깨울 수는 없다고요.
토키와 아유키: 당신이 바라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아요. 당신의 미련한 믿음이 다른 사람들을 수렁으로 끌고 가는 걸 모르겠나요?
토키와 아유키는 거들먹거리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어조는 비위 상하는 건방짐을 담고 있었다.
토키와 아유키: 이미 끝났어요. 당신이 이 방에 들어올 기회는 이게 마지막이었으니, 이곳에서 내쫓기는 이상 카이다는 돌아올 수 없어요. 받아들이시죠. 돌아가서 생각하시다 보면 그게 결국 나은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에요. 저에게서 도망가시는 편이 당신의 샤이닝을 보전하는 데에 도움이 될 테지요.
토키와 아유키: 잊어버려요. 캐롤 씨. 당신의 마음에 난 구멍은 나나시가 어떻게든 해 주겠죠. 그렇게 나나시에게 기대는 편이 당신에게 있어서 가장 나은 길이에요. 결국 당신 곁에 남아준 사람은 나나시밖에 없으니, 당신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겠지만요.
캐롤 브라이트: …그러게 제가 말했잖아요.
이 시점에서 나는 그녀가 정확히 과거의 어떤 발언을 재조명하고 있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캐롤 브라이트: 토키와 씨를 설득해서 치나미를 깨우게 하자는 건 안 통한다고요. 저는 틀리지 않았어요.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하셨나요? 그것이야말로 방관자의 말이에요.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이렇게 자명한데.
캐롤 브라이트: 조율자같은 사람은 죽어버려야 해요.
캐롤 브라이트는 경멸과 혐오를 담아 내뱉었다.
단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녀는 조율자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겉잡을 수 없는, 나와 같은 결의 증오였다.
그가 살아나서는 안 되고, 살아있다면 막아야 하고, 막을 수 없다면 죽여야 한다.
캐롤 브라이트: 당신 때문에 안 되는 거에요. 당신 때문에 나까지 망했다고요! 알겠어요? 당신만 없었다면… 당신만 없었다면! 그랬다면!
캐롤 브라이트는 흉흉한 살기를 내뿜었다. 나는 그녀의 굴곡진 생애의 대부분이 조율자와는 관련이 없고 그저 얄궂은 불운에 기반해 있음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라는 이름의 벌집은 이미 경계를 넘어선 총공격 태세에 있었고, 그녀를 더 자극하는 것은 할 짓이 못 되었다.
그녀는 이미 대체 현실에 살고 있었다. 세상을 보는 방식에 그녀만의 기준과 주관을 덮어씌웠다. 종교인들이 자신의 고난을 납득하기 위해 신의 위대한 계획을 믿듯 그녀는 조율자를 향한 비난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고자 했다.
토키와 아유키: 그런 가정은 무의미해요. 저는 그저 그릇일 뿐. 저를 채운 영혼과 역량은 제가 아닌 가장 강대한 당신에게서 왔으니까요. 그러니 당신 스스로를 비난하는 편이 타당한 일일 텐데요.
토키와 아유키: 그럴 수 없으니 남의 탓을 하는 거겠죠.
캐롤 브라이트: 제가 저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단 한 명 있다면 그건 당신이에요. 당신은 존재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에요.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요! 영혼을 덕지덕지 기워붙인 괴물이 기어이 나 말고도 내 동생까지 해치다니!
나나시: 잠깐. 안 돼요!
캐롤 브라이트: 더는 못 봐주겠어요! 당신 같은 사람은…!
제츠보: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지금 장난해?!
인공지능이 나를 재촉할수록 내 손은 더 바빠졌다. 문고리 사이에 들어간 철사가 귓전을 시끄럽게 절그럭거리는 소리로 울렸으나 문이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나시: 으. 분명 제대로 된 부분인데…!
후루미나미와 토키와는 이걸 어떻게 하는건지 의문을 느낄 찰나도 없었다. 캐롤 씨는 조율자를 마주하자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게 되었다. 이대로라면 분명 사단이 벌어지고야 만다. 그 다급함에 나 또한 호흡이 가빠지고, 손은 더더욱 노련함을 잃은 채 흔들렸다.
나나시: 안 되겠어. 이대로라면 절대 못 열어!
나는 방 안에 있는 사람 중 한 명을 아무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공구 상자로 손을 뻗었다. 양철 망치가 내 손 안에 들어왔다.
나나시: 문고리를 부수는 수밖에…!
나는 망치를 든 손을 내 머리 위로 높이 올렸다. 살의를 가지고 있다면 기물파손이 가능하다. 그러나 누구를 죽이지? 그것도 생각해두지 않은 채인데 모노로그가 과연 나를 봐줄까?
더 숨이 가빠지던 와중 나의 손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인공지능이었다. 그녀는 엄청나게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소리쳤다.
제츠보: 헛소리 마! 너까지 죽으려고? 바보 아니야?! 너까지 잃으면 여기서 막아봤자라고. 캐롤이 또 날뛸 게 분명하잖아!
나나시: 여기서 못 막으면 어차피 끝장이야…!
제츠보: 그 입 닥쳐! 정신 차리란 말이야! 그런 식으로 캐롤을 구하고 나면. 또 저버리겠다고?! 이번에는 끝까지 곁에 있어 줘야지! 혼자 훌쩍 떠나면, 남겨진 사람은 어쩌라고!
나나시: 끄아악!
인공지능이 손에 힘을 쥐자 살가죽이 뜯어져나갈 것만 같은 고통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 손은 저절로 망치를 놓쳤다. 눈이 번뜩 뜨이고 호흡이 정상으로 되돌아오는 충격이었다.
제츠보: 알겠어? 이 난봉꾼아?! 또 내 앞에서 멋대로 사라지려고 하면, 다리를 부러뜨려 놓을 거야!
인공지능이 나를 바닥에 내팽개치자 나는 빨갛게 달아오른 내 팔을 부여잡은 채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제츠보: 빨리 일어나서 문 따! 아니… 됐어. 내가 해야겠어!
카나리 케이토: 지. 지. 진정해! 너 지금 진짜 무서워보여!
히무로 시라베: 그 응징이 꼭 터치를 통해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캐롤 브라이트. 어떻게 앙갚음을 할지는 추후 논의하는 편이 낫다.
캐롤 브라이트: 안 돼요. 이제 확실해졌어요. 여러분들이 저를 설득하려고 그렇게 힘을 써봤지만…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었어요. 나나시 씨의 말마저 제 화를 이길 수 없어요.
캐롤 브라이트는 격노로 인해 미간에 혈관이 불거진 채로 말을 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영혼과 영혼이 통하더라도 그것을 가리는 그림자가 있으며… 그 검은 상자 안을 들춰보면, 되돌릴 수 없는 추악함만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죠.
캐롤 브라이트: 결국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지라도 마음과 마음은 이어질 수 없어요. 통할 수 없어요.
캐롤 브라이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또 분을 토하고 있었으며, 체념과 절망. 회의를 담고 있기도 했다.
캐롤 브라이트: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거에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머지 않은 과거에 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히무로 시라베: 대화를 한다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설득 시도였다.
캐롤 브라이트는 나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캐롤 브라이트: 누구도 저를 이해할 수 없어요.
자조의 웃음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저도 저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캐롤 브라이트는 뒤로 몇 발자국을 물러섰다. 나는 멀어진 거리만큼을 그녀에게 따라붙으려다가 대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캐롤 브라이트는 나에게서 멀어지는 만큼 캐롤 브라이트는 토키와 아유키에게서도 멀어졌기에, 스스로 미친 짓을 멈출 작정이라면 말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곧 캐롤 브라이트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일을 했다.
캐롤 브라이트는 본인이 늘 입고 있는 치마의 어깨끈을 옆으로 늘어뜨려, 그것이 자신의 몸을 타고 바닥으로 미끄러지게 두었다. 캐롤 브라이트는 흰색 스웨터와 레깅스만을 입은 형상이 되었다.
토키와 아유키: 뭐. 뭐하는 거에요?!
카나리 케이토: 다. 다시 입어! 뭐야. 지금!
나는 치마가 가리고 있던 그녀의 상체에 부자연스러운 굴곡을 발견했다. 무언가를 안에 숨기고 있는 듯한 음영이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나는 단 하나의 생각을 했다. 무기다. 그것을 옷 안에 숨겨 반입했다.
캐롤 브라이트는 자신의 상의를 젖히고 그 안으로 손을 깊숙하게 집어넣었다.
카나리 케이토: 깍. 지. 지금 이게 무슨 짓을!
히무로 시라베: 과감한 짓을 하는군.
캐롤 브라이트: 다가오지 마세요. 딕테이트 쓰기 전에.
카나리 케이토는 자신의 눈을 가렸다. 나는 가리지 않았다. 그 안에 캐롤 브라이트의 노림수가 있었다. 그것이 어떤 무기일지는 몰랐지만, 캐롤 브라이트의 손은 원래부터 무기에 가까웠으니 섣불리 접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히무로 시라베: 알겠다. 너는 그대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쳐서 문을 열고 나가면 된다. 그것으로 마무리를 짓지.
캐롤 브라이트: 아직도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고 계시네요. 히무로 씨.
캐롤 브라이트: 이미 겉잡을 수 없게 되었어요. 모든 것이요.
그녀의 말이 옳았다.
캐롤 브라이트는 자신의 품에 있던 총을 뽑아들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총?!
캐롤 브라이트: 멈춰요!
그리고 금색의 탄환이 나에게 날아왔다.
옆으로 몸을 날렸지만 어깨에 맞았다.
나는 그 총과 탄환을 보며 왜인지 학급재판장에서 쓰이던 언총을 떠올렸다.
후루미나미 나몬: 악! 아아악! 뭐야! 뭘 맞은 거지?! 히무로! 우리가 뭘 맞은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은 요란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내 몸 안에 숨어 있으니 아플 일도 없도 없는 주제에 아우성이었다.
샤이닝이다.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의지가 담긴 샤이닝.
후루미나미 나몬마저 그것에는 영향을 받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잠깐! 영혼을 조각내 쏘다니. 내가 했던 것과 같은 방법이잖아? 표절이야! 고소해야겠어! 어디에 있냐! 모습을 드러내라. 이 창의성 없는 년아!
영혼 그 자체를 담아 쏘지는 않았다. 저 총과 같은 도구를 써서 샤이닝의 출력을 투사할 뿐이다. 기력을 상당히 소모하겠지만,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낫겠지. 무한히 쏠 수는 없다.
후루미나미 나몬: 한 명이 더 들어오지는 않는다는 거지? 아! 다행이다. 네 몸 안에는 두 명이 있어서 이미 정원 초과잖아!
내 몸은 한 명이 정원 초과다. 이 암덩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지금이 우리끼리 싸워댈 때야. 히무로? 캐롤 브라이트에게 맞서야 할 거 아니야! 어서 일어나. 아직도 못 움직이겠어?
그렇다. 이제 만족스럽나? 네가 원하던대로 캐롤 브라이트는 토키와 아유키에게 터치를 쓸 것이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유령은 움직이지 못하는 나의 앞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시야 전체가 그녀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녀는 내가 몸을 움직일 수 있는지의 여부를 잠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더니, 언제 자신이 자빠져서 떠들었냐는 듯이 몸을 일으켜 나에게 다가왔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러면 안 되지. 또 눈앞에서 일이 틀어지는 걸 보고만 있으려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놈아. 어서 일어나. 못 일어나? 근데 진짜 못 일어나? 동기부여 안 돼?
내 눈 앞에서 꺼져라. 탕녀야. 상황이 보이지가 않는다.
후루미나미 나몬: 네. 주인님.
죽여버리겠다.
후루미나미 나몬: 네 몸의 주인이라고! 왜 그래?!
토키와 아유키: …재단의 총이잖아? 어디서 나신 거에요. 그건?
캐롤 브라이트: 죽었다가 살아나는 길에 주웠어요.
카나리 케이토: 무… 무슨 짓을 한 거야? 쟤 죽었어?! 야 이…! 아무리 그래도 살인을 막으려던 녀석이었단 말이야. 얘는! 어. 어쩌려고 그래! 기어코 너마저…!
캐롤 브라이트: 안 죽었어요. 잠깐 멈췄을 뿐이에요. 제 명령을 듣고 계실 뿐이니까 진정하세요.
캐롤 브라이트는 토키와 아유키에게 언총을 겨누었다.
토키와 아유키: …저를 재우시면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망상에서 깨어나실 필요가 있어요.
캐롤 브라이트: 닥쳐요. 아뇨. 됐어요. 제가 직접 닥치게 만들어 드리죠. 지금껏 당신이 바랐던 일을 그대로 드릴게요.
캐롤 브라이트는 숨을 작게 몰아쉬고서 말했다.
캐롤 브라이트: 잠들어요.
금색의 탄환이 다시금 날아가 토키와 아유키에게 닿고, 사라져버렸다. 토키와 아유키는 약간의 불쾌감을 느끼는듯 눈가를 찌푸리더니 곧 눈을 게슴츠레 뜬 채 고개를 앞뒤로 주억거리기 시작했다.
토키와 아유키: …어. 생각보다 너무 잘 통해서, 조금 위험…
캐롤 브라이트: 잠들라고요.
캐롤 브라이트가 거듭 말했다. 토키와 아유키는 자신이 늘 바라던 것을 얻었다. 수면을.
카나리 케이토만이 그 광경을 보며 공포에 압도되어 있었다. 정신조작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캐롤 브라이트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을 때는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장침을 겨누었고, 또 다시금 겨누기를 그만두었다.
카나리 케이토: 미. 미안! 너한테 쏠 생각은 없었어! 그. 그게 그냥…
캐롤 브라이트: …됐어요. 당신한테 쓸 생각 없어요. 아까 인질로 잡아서 죄송해요.
그곳까지 떨어져 놓고 같잖은 양심을 챙기듯 캐롤은 카나리 케이토에게 고개를 숙여 목례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히무로한테도 사과해. 나한테도 사과하고! 총 쏴놓고 나몰라라야!
입 닥쳐라. 집중할 일이 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입을 닥쳤다. 그녀가 변덕을 부리기 전 나는 내 몸의 끝부분에서부터 힘을 주며 몸의 주도권을 되찾으려 애썼다. 마비가 된 듯 몸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카나리 케이토: 터. 터치를 쓰려는 거냐. 진짜로? 그러지 마…! 큰일이 나면 어쩌려고!
캐롤 브라이트: 괜찮으니까 가세요. 문을 열어서 제츠보 씨를 데려오면 되잖아요. 그토록 바라던 방어 장치죠. 어차피 그때쯤이면 모든 게 끝나있을 테니까요.
모든 게 끝장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이거.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데?
카나리 케이토: 제… 젠장할맞을!
제츠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나나시: 캐롤… 안 돼!
캐롤 브라이트는 손으로 자신의 귀를 가렸다. 그 누구의 말도 귀담아 듣지 않으려 했다. 소리를 쳐도 듣지 못할 것이고 나는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다.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 언니가 구해주러 갈게… 다 잘 될 거야… 원래 언니한테 있었던 거니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캐롤 브라이트는 카이다 쿠로하가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정신조작을 자신에게 사용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조율자를 막아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나의 손가락에 조금씩 감각이 돌아왔다.
캐롤 브라이트는 토키와 아유키의 얼굴을 손으로 붙잡았다.
그 직후 나는 바닥에서 몸을 박차고 일어나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카나리 케이토: 제… 젠장할맞을!
나나시와 제츠보는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카나리의 작은 신음소리와 그가 문을 향해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카나리 케이토: 빨리 들어와! 지금… 갹!
제츠보: 비켜!
카나리가 잠금 장치를 해제하자마자 제츠보는 문의 안으로 들이닥쳤다. 나나시도 의욕만큼은 제츠보에게 밀리지 않았지만, 힘과 몸의 질량만큼은 크게 밀렸다. 살짝 밀려난 것만으로 바닥에 내팽개쳐진 나나시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캐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눈을 질끈 감게 만드는 섬광이 그녀가 있던 방향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그녀는 보았다.
토키와와 같은 존재. 여러 눈이 달린 그것.
그리고 토키와가 이해했던 것과 같은 것을 이해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는지를.
토키와 아유키는 얼굴 가죽이 녹는 것 같은 비명을 질렀다. 눈을 질끈 감은 뒤에도 나나시의 눈꺼풀 사이를 빛이 비집고 들어왔다. 아무것도 볼 수가 없는 와중 제츠보가 그 안으로 몸을 던져, 인간 형체의 그림자로 변해 버렸다.
나나시: 캐… 캐롤… 캐롤!
분명 형체가 없는 빛일 뿐이었지만 나나시는 어떠한 파장이나 커다란 힘의 흐름이 자신을 밀어내고. 공기를 울리게 만드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작은 방 안에서 놀라울 정도의 큰 힘이 해방되고 있었다. 서로 침범하고 물어뜯어대고 있었다.
영혼의 주도권을 놓고 벌어진 싸움이었다. 오직 그럴 자격이 있는 영혼과 몸만이 담을 수 있는 힘. 그것들이 천둥 치듯이 맹렬히 우르릉대며 자신의 찬란한 광휘를 발산했다.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정신 차원에서의 눈부심. 바로 샤이닝의 광휘였다. 그 어떤 금속도 버티지 못할 열을 내며 터져가는 별들의 불꽃. 신성한 만큼이나 권위적이고 또 그만큼 압도적이라는 속성 자체에 공포심이 깃들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몸에 모인 수많은 원혼이자 각자만의 탁월함. 하나의 우주라는 개인들이 모여 몇 배의 무한한 공간을 이루어낸 것. 필부들은 그 빛을 이해하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이해한 자는 경외할 수밖에 없다.
나나시는 그제서야 두려움에 떨었다. 그 강대한 힘이 스스로 절제할 줄 모르는 사람의 손에 들어간다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뒤늦게 온전히 이해했다. 캐롤이 패배한다면 어떤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 그는 반의 반도 채 내다보지 못했다.
제츠보가 캐롤과 토키와를 떼어 놓으려 다가가자. 그곳에는 먼저 캐롤의 팔을 붙잡고 당기고 있는 히무로가 있었다.
제츠보: 히무로?! 캐롤에게서 떨어져! 위험해!
히무로 시라베: 상관 없다. 빨리 힘을 보태!
제츠보는 지체 없니 캐롤의 온몸을 붙잡고서 온힘을 다해 당겼다. 놀랍게도. 저항감이 있었다. 제츠보 자신마저도 캐롤의 뼈가 부서지지는 않을까 무서워 할 만한 힘이었는데, 캐롤의 손바닥은 토키와의 얼굴에 용접이라도 된 듯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제츠보: 미. 미친 거 아니야?! 이게 왜…!
히무로 시라베: 포기하지 마라. 뗴어 놓아야 한다!
히무로는 괴성을 지르며 토키와의 몸을 발로 걷어찼다. 그와 동시에 제츠보가 다시금 세게 힘을 주자, 언제 붙어 있었냐는 듯이 어떠한 흔적과 떨어져나가는 얼굴 가죽 없이도 캐롤의 손과 토키와의 얼굴이 서로 떨어졌다.
연결되어 있던 두 사람 중 한 명은 정신을 잃었고, 한 명은 아직 깨어 있었다. 그 사람은 승리자였다. 다른 한 쪽의 정신조작과 샤이닝을 넘겨받았다.
강대한 힘을 움켜진 쾌거에도 불구, 그 사람은 조금도 들뜬 기색 없이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토키와 아유키: …여동생을 구해 달라고?
토키와 아유키: 그럼 내가 당연히 구해 줘야지.
토키와 아유키: 숨 쉬지 마.
제츠보: 안 돼애!
제츠보가 토키와의 목을 붙잡았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제츠보: 다. 다들 괜찮아? 어떻게 됐어! 방금 저 말 들은 거 아니지?!
제츠보는 토키와의 입에서 말이 한 마디도 세어나오지 못하게끔 손에 힘을 쥔 채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의 말을 들었는지 확인했다.
히무로.
히무로 시라베: 이름 없는 남자! 귀를 가려라!
나나시.
나나시: 괘… 괜찮아…! 헉… 정신을… 차리면…
나나시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주의를 기울이면 저항할 수 있으나, 그 외 다른 일은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정신조작에 그나마 내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다른 사람이었다.
카나리는 바닥에 쓰러진 채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카나리 케이토: 헉… 컥…!
제츠보: 카나리… 잠깐. 캐롤!
그녀가 숨을 쉬고 있는지 제츠보가 확인해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찰나. 그녀는 자신이 오래 전 저버린 줄 알았던 두려움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제츠보의 몸이 기계가 아닌 사람의 것이었다면. 그리하여 타인의 온기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냉기를 느낄 수 있었다면, 몸을 덜덜 떨게 만드는 서늘함에 그저 굳어버렸을 것이다.
머리카락이 거의 까맣게 변해버리고 몸이 줄어든 것 같은 캐롤 브라이트가, 쓰러진 채로 아무런 숨소리를 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폐의 팽창도, 이산화탄소의 배출도 없었다.
캐롤은 숨을 쉬지 못했다.
나나시마저도 숨을 쉬는데. 그녀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나시: 캐… 캐롤!
나나시는 뒤늦게 그녀를 발견하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통에 눈동자가 충혈되고 목의 혈관이 솟는 와중 비틀비틀 걸어갔다.
제츠보: 정신 차려! 너 숨 쉴 수 있잖아! 너는 그럴 수 있어야 해!
제츠보는 캐롤의 몸을 흔들어 깨워 보려고 했다. 그러나 응답은 없었다. 그 명령을 내린 장본인은 자신의 목이 세게 짓눌리고 있는데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제츠보는 토키와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츠보는 그에게 윽박질렀다.
제츠보: 취소해. 어서.
제츠보는 토키와의 목을 아주 작은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만큼 풀어 주었다.
제츠보: 취소하라고! 빨리. 이대로 질식시켜 버릴 수도 있어!
토키와 아유키: 네가 물러서지 않으면… 취소도 없다.
히무로 시라베: 놓지 마라! 조율자가 더 강해진 이상 풀어줄 수는 없다. 그를 처형시키게 되더라도 놓아줘선 안 된다!
카나리 케이토: 허윽… 슬려… 슬려 줘…
나나시: 안 돼! 그랬다간…
카나리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무엇이라도 붙잡아 보기 위해 바닥을 긁었다. 나나시는 제츠보를 올려다보았으나 곧이어 자신이 제츠보에게 어떤 요구나 부탁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는, 그저 캐롤의 코를 막고 입에 숨을 불어넣을 뿐이었다.
나나시: 히무로! 너는 카나리를 도와 줘! 흐읍…!
제츠보: 안 돼. 이대로는 안 돼.
제츠보는 그 인공호흡이 결국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반나절도 가지 않아 두 사람은 진이 빠져버리고야 말 것이다. 식사와 수면도 불가능한 사람의 숨을 언제까지나 붙여 놓는 일은 허황된 일이었다.
토키와 본인이 풀어주지 않는 이상 두 사람은 죽게 된다. 하필이면 제츠보를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꼴로 만든 카나리와 이러나 저러나 악연이 지독한 캐롤. 그녀가 싫어하는 두 사람이라지만 죽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히무로 시라베: 죽고 싶지 않다면 날뛰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너는 혼자서 숨을 쉬지 못한다!
카나리가 패닉에 빠져 팔다리를 휘적거리고, 나나시가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캐롤을 흉부압박하는 동안 제츠보는 단 하나의 질문밖에 하지 못했다.
제츠보: 왜 그랬어. 캐롤? 대체 왜 그랬어?
제츠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거야. 모든 걸 가지고 있었으면서…
제츠보: 왜 가진 행복에 만족하지 못한 거냐고…
그땐 그게 좋은 생각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좋지 않은 생각의 시초가 그러하듯이.
나중에 좋지 않은 생각이었다면서 후회할 줄을 알면서도.
제츠보는 토키와를 놓아주었다.
토키와 아유키: 이제 숨 쉬어.
카나리 케이토: 파하…!
토키와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나리는 눈물을 터뜨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카나리 케이토: 허억…! 헉! 흐억… 으으으…
나나시는 카나리를 보고서 조심스럽게 캐롤의 코 앞에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숨의 흐름이 그 손가락 끝에서 느껴졌다.
나나시: 살아있어! 숨을 쉬고 있어!
토키와 아유키: 원하는 대로 해 줬어. 캐롤은 곧 일어날 거야.
그리고 그의 말대로 되었다. 캐롤은 눈을 떴다.
캐롤 브라이트: 나… 나나시 씨…?
나나시: 네. 저 여기에 있어요. 무리해서 말 하지 마세요…
토키와 아유키: 기억해 둬. 나는 언제든지 너희들의 숨을 멈출 수 있어. 나를 위협하지 않는 편이 너희들에게도 안전한 길이야.
제츠보는 토키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제츠보: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거야? 너. 토키와 맞아?
토키와 아유키: 이제는 그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겠지.
그 말은 조금도 토키와 아유키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의 말투에는 아무런 생명이 없었다. 열등감, 쟁취 욕구, 자부심, 오만. 그것은 인간의 감정이고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생체 물질이었다. 더 이상 토키와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히무로 시라베: 토키와 아유키는 어떻게 되었나.
토키와 아유키: 바다에 빠져 죽은 빗방울이 되었어.
히무로 시라베: 그렇군.
그는 모든 것에 초연하고 또 달관한 듯이 나나시와 제츠보의 부축을 받는 캐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토키와 아유키: 이런 일이 벌어져 나도 안타까워. 진심이야. 너희 중 누구도 이런 가혹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은 없으니까.
후루미나미 나몬: …느낌이 안 좋은데. 히무로. 우리 슬슬 도망칠까?
후루미나미 나몬은 나와 토키와 아유키를 번갈아 보면서 내 등 뒤로 슬금슬금 몸을 숨겼다.
토키와 아유키: 저런. 암덩이를 하나 달고 있군.
후루미나미 나몬: 나 말이야?
후루미나미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놀랐다. 토키와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밝게 빛나는 금색 눈동자가 모든 것을 꿰뚫어보게 두고 있을 뿐이었다.
나나시: 캐롤 씨. 괜찮으세요…?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나나시는 자신의 영혼을 조각낸 후루미나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한순간에 사람의 신체가 그 정도로 변해버릴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체격 자체가 작아진 듯한, 왜소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나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캐롤이 약해졌음을 알게 되었다.
제츠보: 캐롤. 천천히 숨 쉬어. 이제 쉴 수 있잖아. 저기 조율자가 있는데… 이걸 어떻게 너한테 다시 돌려줘야 하지?
캐롤 브라이트: 제 앞에… 조율자가 있다고요?
캐롤 브라이트는 눈을 크게 떴다.
캐롤 브라이트: 그걸 어떻게 보셨어요?
캐롤의 질문을 들은 사람들은 그 저의를 알지 못해 그저 의문을 담은 침묵과 시선을 교환할 뿐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눈에 보였다. 그뿐이다.
캐롤 브라이트는 자신의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에 힘을 주었다.
캐롤 브라이트: 저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토키와는 자신의 금색 눈동자로 캐롤을 마주보았다. 그러나 캐롤의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은 그것을 볼 수 없었다.
캐롤 브라이트: 불 좀… 불 좀 켜주세요.
캐롤 브라이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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