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그게 좋은 생각인 줄 알았거든요.
- 모든 좋지 않은 생각의 시초
더 단크 타워
챕터 4: < 황금 원숭이의 손길 >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나는 내 다이얼로그를 방 구석에 두고 그 위에 수건을 덮었다. 다른 사람과 나누는 말이 일일이 새어들어가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캐롤과 나눈 대화가 수치스럽지는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었다. 다만 누가 엿듣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통화를 끊어버리면 간단하겠지만 그러면 비상연락망이 사라져 버리기에. 소리를 치면 들을 수 있되 평범한 대화는 엿들을 수 없는 게 최선이었다. 하기와라의 원성이 꽤 오랫동안 들려오다가 결국 반대편에서도 내의 방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끄게 될 때쯤. 나는 잠에 든 나나시 쪽을 살폈다.
제츠보: …너무 빨리 자는데? 이 불편한 상황을 피하려고 자는 척 하는 거 아니야?
캐롤 브라이트: 그럴거면 애초에 오시지를 않았을 것 같아요. 나나시 씨. 주무시나요?
캐롤이 나나시의 곁으로 다가가자 나는 미리 그녀에게 말했다.
제츠보: 네 동생도 있으니까 이상한 짓은 하지 마.
캐롤 브라이트: 안 하거든요? 너무 저를 질 낮은 사람으로 보시는 거 아니에요?
제츠보: 그래. 너도 자제력이 있겠지… 야! 하지 말라니까!
나는 캐롤이 나나시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대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소리를 쳤다. 나를 방심시킨 다음에 원하는 것을 취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캐롤 브라이트: 그런 거 아니에요. 제츠보 씨가 저속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제가 저속한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듣고 보니 할 말이 없었다. 캐롤은 나나시의 얼굴에 손을 대기만 했을 뿐 그 이상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조용히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게 전부였다.
캐롤 브라이트: 샤이닝, 정신조작 전부 응답 없음… 무의식이 꿈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즉 출력을 높이지 않는 이상. 잠을 자는 동안에는 무방비…
제츠보: 무방비?
캐롤 브라이트: 그런 거 아니래도요… 제 동생이 이렇게 되어 있는 곳이잖아요. 저도 때와 장소는 가린다고요.
제츠보: …미안. 내가 무신경했어.
나는 여전히 나를 온몸으로 붙잡고 있는 카이다를 내려다 보았다.
제츠보: 네 터치로 카이다를 깨울 수는 없어?
캐롤 브라이트: 시도는 언제든지 할 수 있어요. 다만 제가 모르는 어떤 일 때문에 치나미가 조금이라도 잘못되는 것 보다는, 나나시 씨가 토키와 씨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을 알아낸 이후에 시도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제츠보: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나나시가 좋은 소식을 가져올 테니까 믿고 기다리자.
캐롤 브라이트: 그걸 기다릴 수밖에 없네요.
캐롤은 침대에 걸터앉고서 나나시와 카이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츠보: 뭐가 그렇게 신경쓰여?
캐롤 브라이트: …저 때문일까 싶어서요.
제츠보: 뭐가?
캐롤 브라이트: 제가 정신조작을 가진 채로 탑 밖으로 나와서 토키와 씨가 조율자의 기억을 되찾고… 치나미도 이렇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츠보: 너 되게 귀찮은 성격이다.
캐롤 브라이트: 네…?
나는 사실을 말했다.
제츠보: 너도 그게 네 잘못 아닌 거 알잖아. 상식적으로 이게 네 잘못이 될 수가 없어. 이미 네가 잘못한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건 제발 내 탓이 아니라고 위로 좀 해달라는 거 아니야?
제츠보: 너 스스로도 조금 긴가민가한 부분이 있다면 내가 정해줄게. 너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니야. 자. 그래서. 내 말이 맞지? 위로받고 싶었던 거지?
캐롤은 내 말을 듣다 고개를 숙였다.
캐롤 브라이트: …조금은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제 탓이라고 하기엔 너무하지만, 그렇다고 저 말고 누가 잘못인지도 모르겠어서… 다른 분한테서 확신을 얻고 싶었어요.
제츠보: 나나시 일어나면 나나시한테 말해달라고 하지 그랬어? 아… 그녀석은 워낙 온화하고 네 편을 드니까 오히려 신빙성이 떨어져서 그래?
캐롤 브라이트: 그런 건 아니에요. 저는… 객관적인 의견도 들어보고 싶었어요. 제츠보 씨는 저를 가장 중립적으로 보시는 분이잖아요.
제츠보: 매몰차고 삐딱하게 보는 걸 중립적이라고 보지는 않아. 캐롤. 나같으면 나 말고 더 나은 친구를 찾아볼 텐데.
제츠보: 계속 말하자면. 애초에 너는 살아나려는 의사 결정권 자체가 없었어. 그건 나나시에게 있었지. 그러니 책임이 있다고 해도 나나시 책임이지 괜히 내 잘못인가 하면서 마음 졸일 필요가 없다는 거야.
제츠보: …왜 내가 너한테 이런 말을 하고있는 걸까? 이런 건 나나시가 너한테 해줘야 하는 말이잖아. 빨리 좀 깨라…
캐롤 브라이트: …제가 조율자의 파편인 채로 나와서 이렇게 된 것인데도요?
끈질기네. 참나…
제츠보: 네가 어떤 상태로 살아나는지를 네가 어떻게 정해? 그리고 그 조율자의 파편을 억누르려고 네 손가락까지 잘랐잖아.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기억까지 담아서 말이야… 그걸로도 부족해?
캐롤 브라이트: 조율자의 파편이 된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닐까. 싶어요. 저도 이런 식으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결국 조율자를 완성시키는 데에 일조했으니까…
제츠보: 거기까지 가는 거야? 제정신이 아니구나. 너?
나는 문득 나에게 매달려있는 카이다를 보고서 생각했다. 그럴만 할지도 모른다고. 아무튼 간에 그토록 아낀다는 여동생이 이렇게 되었으니. 내몰릴대로 내몰렸을지도 모른다고…
잠깐. 아까 반성 좀 하라니 무책임하다느니 종속되었다느니 위험을 초래할 거라느니. 제멋대로 몰아붙인 나에게도 지분이 있는 거 아닌가…? 아. 신경쓰기 싫은데. 내가 왜 이 여자를 도와주고 달래줘야 하는 거지? 새엄마와 딸 같은 사이인… 아니. 새엄마와 딸은 아니지. 절대 아니야… 아니고말고…
제츠보: 하아… 너는 운이 안 좋은 거야. 죽어라 안 좋지. 네 타고난 체질이 그런 걸 어쩌겠어. 나나시는 너한테 이런 말 안 해줘?
캐롤 브라이트: 음… 이미 무의식적으로 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거에요.
제츠보: 그게 무슨 말이야.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 저를 인정해 주시는 느낌이라… 터치를 받아보신 분만이 제대로 이해하시겠지만, 터치를 하면 기억과 감정을 일부 공유하며 동시에 이해하게 되는 작용이 벌어지니까… 말로 설명드리기가 조금 어렵네요. 무아지경. 황홀경… 총체적 각성…? 같은 느낌이에요.
이거 불편한데.
존재 자체로 인정받느니, 터치를 받은 사람만이 이해하느니… 전부 나와 동떨어진 말이잖아.
아까 좀 몰아붙인 걸 담아뒀다가 되돌려주는 거라면, 이녀석 혹시 성질 자체가 엄청 음침한 건가…? 아니면 그냥 내가 과민반응하나?
제츠보: 나는 터치를 쓸줄 모르는 몸이라 말로 해줄게. 모든 게 네 잘못이라 생각하는 것도 오만함이야. 캐롤. 네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다 네 탓으로 돌리는 건 무슨 초인이나 권력자 같은 태도라고. 지구 반대편에서 교통사고가 났는데 내 잘못인가, 내가 막을 수 있지 않았나 괴로워하는 건 바보같은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캐롤은 내 말을 듣고서 작게 고개를 숙였다.
캐롤 브라이트: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제츠보 씨.
제츠보: 아. 답답하게 만드네! 너를 위로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 이렇다고! 아까처럼 매섭게 받아쳐 보던가. 느닷없이 가라앉아서는…! 애초에. 왜 아직도 여기에 남아있어? 삼자대면하기로 약속하고 해산하는 줄 알았는데. 마침 나나시도 잠들었잖아.
캐롤 브라이트: 사실은… 치나미가 걱정돼서 그래요. 제 동생이 이렇게 되었는데 옆에 있어줘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옆에서 말을 많이 걸어주면 일어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코마 상태의 환자분들이 의사표현은 하지 못해도 주변의 소리는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요.
이러면 할 말이 없는데.
나는 다시금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녀에게 무른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츠보: …마음껏 해. 카이다가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네. 또 나는 성희롱이나 잔뜩 듣겠지만 그래도 말 그대로 내 발목이나 잡고 있는 것보단 낫겠지.
캐롤 브라이트: 고마워요. 그럼… 시작할게요.
그리고 캐롤은 카이다를 향해 다가갔다.
토키와 아유키: 너희들의 도움 없이는 해낼 수 없었을 거야. 나를 믿고 따라 준 너희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 살인 게임에서 모두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어…
나는 토키와의 머리카락과 눈이 푸른색인 것을 보고 그의 꿈에 들어온 의미가 퇴색되었음을 알았다.
내가 심문해야 하는 대상은 반쯤 조율자가 된 토키와였다. 완전해지기 위해 캐롤 씨의 샤이닝까지 흡수하고자 하는 토키와. 나는 그에게서 어떻게 하면 그가 가진 딕테이트와 터치를 없애거나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는지. 또 카이다의 기억을 되돌릴 방법은 없는 것인지에 대해 알아내야 했다.
그런데 정작 그의 꿈 안에서 토키와는 여전히 푸른색의 머리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조율자라는 자각이 없다면 곧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그에게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하면 되돌릴 수 있는지도 물을 수 없다.
토키와 아유키: …약간. 믿기지가 않네. 내가 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큰 일이라서 실감이 안 들어.
그렇지만 사랑의 열쇠를 사용한 이상 그저 포기하고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의 꿈 안에서 적당히 말을 맞추며 그가 했던 일을 스스로 기억할 수 있게끔 만들어야지만 사랑의 열쇠를 쓴 의미가 있을 터였다.
나나시: 그러게. 탑에 그토록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우리는 해냈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
토키와 아유키: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놀라울 정도라니까. 그렇지만 결국 다들 화해했고… 살인 게임의 비밀을 밝혀내서 밖으로 나갈 수 있었어. 카텟 기관에 있던 이들마저 아마 이 살인 게임의 배후인 카텟 기관 대신. 우리들의 목숨을 중요시했고…
아마 살인 게임의 배후라니. 토키와도 카텟 기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토키와 아유키: 후루미나미까지 우리와 뜻을 함께하게 될 줄은 몰랐어.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후루미나미는 나를 정말 가혹하게 대해 왔거든. 내가 겁에 질린 모습이 한심하게 보였겠지만, 나는 정말 무서웠어.
토키와 아유키: 하지만 그것도 지난 일이야. 우리는 해냈어… 돌아갈 수 있어. 나나시.
토키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눈가에 흘러넘친 눈물을 조용히 닦았다.
토키와 아유키: 흑. 살아남았어… 집으로 갈 수 있어… 이 거지같은 곳에서 나가는 거야…
…이게 내가 마주했던 그와 같은 사람인가?
토키와 아유키: …단순한 시각으로 보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나는 그저 이 탑이 마주할 멋진 신세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기쁠 뿐이야. 우리 모두가 적이 아닌 세상이라고. 왜 그걸 거부하는 거야? 너희들이 나처럼 할 수 있기라도 해? 아니잖아.
토키와 아유키: 나는 지금 너희가 왜 나를 거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왜 열린 마음과 눈으로 나를 보지 못하는 거니? 이 탑에 실천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야. 내가 손을 쓰자마자 너희들이 전전긍긍하던 카이다는 순종적으로 내 말만 따르게 되었는데도. 왜 나를 인정하지 않는 건데?
자신이 조율자라는 자각조차 없는 이 사람이. 몇 시간까지만 해도 나와 캐롤 씨의 샤이닝을 빼앗고서 탑에 있는 모든 이들을 지배하려고 했다니.
자신이 조율자임을 깨달은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인가? 나는 이상하리만치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깨닫지 못하는 그를 보며 그 또한 초고교론자들의 피해자이고, 그 또한 아직 조율자보다는 토키와 아유키라는 정체성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율자는 토키와 아유키다' 와 '토키와 아유키는 조율자다' 는 다르다. 그리고 토키와는 토키와 아유키가 조율자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샤이닝을 제거하는 것만으로 토키와를 원래대로 돌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애초에 어떻게 할지를 먼저 알아내야겠지만.
나나시: 그러고 보니 후루미나미는 어떻게 설득한 거야? 후루미나미는 설득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잖아. 이 살인 게임 밖으로 나가서 더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식으로 설득했더라도 후루미나미가 그리 쉽게 그 일을 받아들였을 것 같지는 않아.
토키와 아유키: 아. 그 일 말이구나. 맞아. 설득하는 게 어려웠어. 히무로를 담보로 팔아 넘겨줬는데도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지.
히무로. 너 여기서는 후루미나미한테 팔려갔구나… 못 막아줘서 미안…
나나시: 어떻게 후루미나미를 설득한 거야? 혹시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일까? 내가 기억하기로는… 딕테이트 아니면 터치였는데…
토키와 아유키: 딕테이트와 터치…? 딕테이트… 그리고 터치…
토키와 아유키: 그건 캐롤 씨가 가지고 있는 것이었는데…?
나나시: 아니야. 내가 기억하기로 너는 캐롤 씨의 손가락과 맞닿으면서 딕테이트와 터치 능력을 받게 됐잖아. 분명… 너는 네 품 안에 캐롤 씨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어. 네 상의 주머니에 있을지도 몰라.
너무 성급하게 말했나? 내 말주변이 토키와의 무의식을 바꿀 만큼은 되려나?
내가 우려를 느끼는 와중 토키와가 자신의 자켓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 안에서 분홍색 고무장갑 안에 담긴 캐롤 씨의 손가락이 떨어졌다.
토키와 아유키: 아. 맞아. 나한테 이 손가락이 있었지… 딕테이트와 터치. 네 말대로야. 나는 그것들을 가졌어.
토키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키와 아유키: 네 말대로야. 나나시. 나는 딕테이트와 터치를 써서 후루미나미를 설득했던 거야. 그래. 내가 옳았어. 그 힘을 써서 너희 모두가 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됐었지.
나나시: 응. 그런데 토키와… 그 힘을 잃는 게 두렵지는 않아?
토키와 아유키: 힘을 잃는다고?
나나시: 생각해 봐. 이 모든 평화는 네 힘을 기반에 두고 있잖아. 만약 어떤 사고가 일어나서 네가 터치를 잃거나 다른 사람이 그걸 빼앗아 버린다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야. 모든 게 무로 돌아갈 거라고.
나나시: 그걸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내가 너의 약점을 들을 필요가 있다고 봐. 그래야 내가 혹시 모를 상황에도 너를 돕고 네 힘을 돌려줄 수 있을 테니까.
너무 노골적이었나. 스스로도 토키와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는 않을까 잔뜩 주눅들어 있던 와중. 토키와는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토키와 아유키: 너라면 믿을 수 있지. 나나시. 내 약점을 듣고 싶다고?
…이게 통하네. 사랑의 열쇠는 정말이지 무서운 물건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최대한 태연한 기색으로 그에게 말을 이었다.
나나시: 맞아. 정확히는 누가 너의 힘을 빼앗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듣고 싶어.
그리고 토키와가 나에게 그의 정신조작을 빼낼 수 있는 방법을 전해주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토키와 아유키: 그건 나도 몰라.
토키와가 하는 솔직한 답변이 꼭 내가 듣고 싶은 답변이라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나시: …모른다고?
토키와 아유키: 모른다기보다 그런 방법은 없을 거야. 아마.
나나시: 하지만 샤이닝이 너에게로 옮겨갈 수 있다는 건, 네 샤이닝도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뜻이잖아? 네가 정신조작을 얻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거야?
토키와 아유키: 네가 하는 말은 마치 물을 쏟는 일의 반대를 해보라는 것과 똑같아. 물을 엎질러서 그릇도 떨어지고 물이 흥건히 고이는 게. 물을 쏟는 일이지. 그 반대는 없어. 물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건 물을 쏟는 일의 반대가 아니야. 그저 반대 성향을 띠는 일일 뿐 정확히 물을 '안 쏟는' 작용은 없는 거야. 그렇기에 내가 받은 힘을 돌려놓는 일도 없어.
토키와 아유키: 나는 힘을 얻었어. 그건 너도 이해하기 어려운 작용이 아니지. 하지만 힘을 안 얻는 건 모호한 일이라는 거야.
나나시: 힘을 잃을 수 있잖아.
토키와 아유키: 잃는다…? 탑에는 내 힘을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나나시. 누구도 정신조작에 있어서는 조율자의 권위를 이기지 못해. 내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정신조작은 줄곧 나의 것일 거야.
나나시: 설령 그 힘의 파편을 본래 캐롤 씨가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너는 캐롤 씨의 손가락으로 샤이닝을 흡수했어. 그러니 캐롤 씨가 다시 가져올 수도 있지 않나?
토키와 아유키: 그건 아마 중요하지 않아. 강물이 상류에서 하류로 흐른다고 한들 상류에게 하류의 물을 끌어올 권한은 없잖아? 손가락에 담겨 있던 힘은 자신을 담을 수 있는 몸을 만나자 나에게 흘러들어왔어. 그게 다야. 힘을 어딘가에 담을 방법도 모르고…
나나시: 그럼 누구도 너에게서 정신조작을 가져갈 수 없고. 너는 나나 캐롤 씨의 정신조작을 마음대로 흡수할 수 있다는 거야?
토키와 아유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나나시. 샤이닝이라는 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잖아. 내 기억이 전부 돌아오면 또 모르겠지만, 그전까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야.
나는 막막함을 느끼며 내 머리를 쓸어내렸다.
나나시: 모른다고…? 그럼 너도 누군가가 너에게서 정신조작을 빼앗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모른다는 거지?
토키와 아유키: 응. 몰라. 그런데 아마 불가능할거야.
토키와는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많았다. 아마 그 때문에 토키와 본인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함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그 막막함은 토키와에게 도움이 되었다. 본인도 모르기 때문에 심문을 하더라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토키와도 자신이 정신조작을 빼앗길 수 있는지의 여부는 몰랐다. 물론 토키와는 나와 캐롤 씨의 정신조작을 곧바로 흡수하고자 했으니. 그럴 수 있기에 한 거겠지만…
잠깐. 어차피 물어볼 수 있잖아?
그게 사랑의 열쇠의 기믹이었잖아. 상대가 나를 소중하게 인식하기에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는 거.
나나시: 토키와. 너 나와 캐롤 씨의 정신조작을 빼앗으려고 한 거. 기억나?
토키와 아유키: 어…? 음. 그래.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해. 언제적 일이더라.
나는 토키와가 자신이 꿈 안에 있음을 눈치채기 전. 다급하게 물었다.
나나시: 너에게 그럴 만한 확신이 있었던 거야? 조율자는 모든 정신조작을 자유롭게 흡수할 수 있어?
토키와 아유키: 내 파편이라면 흡수할 수 있을 거야.
나나시: 또 확신하지 못한 듯한 말투야. 토키와. 캐롤 씨가 조율자의 파편이라는 건 알겠지만, 너에게 있는 건 자신이 조율자라는 자각 뿐이잖아. 정신조작과 샤이닝은 사람의 영혼과 맞닿은 힘인데 무슨 상위 권환이나 프로세스처럼 네가 그토록 일방적일 수가 없어.
토키와 아유키: 아니. 일방적이야. 손가락에 담겨 있던 것은 분명히 조율자의 파편이었어. 그걸 가지고 있는 이상 나는 나머지 파편도 가질 수 있는 거야.
나나시: 조율자 후보면 네 권한에 휘둘린다…고?
토키와 아유키: 바로 그 말이야. 나나시.
나나시: 그럼 내 힘은 어떻게 빼앗으려고 했어?
토키와는 내 말을 듣고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나는 조율자 후보가 아니다. 정말 캐롤 씨의 힘이 조율자라는 존재를 이루는 부분 중 하나기 때문에 그에게 흡수될 수 있는 거라면 반대로 나의 정신조작과 샤이닝은 빼앗을 수 없다. 영향을 받지 않을 테니까.
나나시: 애초에 캐롤 씨의 힘을 아직 빼앗지 못했는데 파편을 가질 수 있다는 걸 너무 확신하고 있는 거 아니야. 토키와? 너도 모르는 일이잖아. 확률이 높은 희망사항인 거지.
확신을 가지고 단정적으로 말한다고 한들 그에게 분명한 근거가 없는 이상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히무로라면 가짜와 진짜 정보를 탁월하게 구별해냈겠지만 나는 그만한 역량이 없었기에. 하나둘씩 단계를 밟아 물을 수밖에 없었다.
토키와 아유키: 너의 힘은… 터치를 써서 정신을 연 다음. 나에게 넘기게끔 유도하려고 했지.
터치를 써서? 일단은 캐롤 씨의 정신조작을 가지고 있으니 그 힘의 차이로 빼앗는단 말인가?
나나시: 정신조작을 사용해서 그렇게 한다면 샤이닝 강탈의 기준은 힘의 차이여야만 해.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애초에 네가 캐롤 씨의 정신조작을 뺴앗을 수 없어.
토키와의 샤이닝 능력은 아무리 봐도 캐롤 씨보다 약했으니까. 힘의 크기 자체만 놓고 보면 그 압도적인 광채가 정신조작을 얻게 된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토키와보다 훨씬 강해. 그걸 가지고 평생 살아온 캐롤 씨의 숙련도도 토키와보다 높아.
토키와는 터치를 당장 이 소동이 벌어진 날 얻었으며, 직접적인 터치를 가해본 것은 히무로가 전부였다. 조율자의 권한이라는 문제가 처음부터 없었던 거라면 모든 것이 캐롤 씨에게 유리했다.
만약 힘의 차이가 기준이라면 토키와는 캐롤 씨의 정신조작을 빼앗기는 커녕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캐롤 씨에게 빼앗기게 된다.
지금껏 토키와가 캐롤 씨에게 접근하지 못하게끔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나시: 샤이닝을 빼앗는 기준은 권한이야. 힘의 차이야? 토키와. 혹시 알고 있어? 알려주었으면 해.
나는 양심이 조금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말했다.
나나시: 우리는 친구잖아.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아. 너도 나를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해준다면 정말 기쁠 텐데.
토키와 아유키: …나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 내가 알 수 있는 건 캐롤 씨든 너든 내 손에 닿는 순간. 나에게 정신조작을 빼앗기리라는 일 뿐이야. 그거 하나는 확실해.
나는 이공계 종사자다.
직접 관측하지 못했고 근거도 빈약한 주장은 나에게 있어 허구와 같았다.
나나시: 혹시 너의 그 확신이 힘을 얻고 탑의 평화라는 너의 목적을 수월하게 이룰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에 영향을 받은 건 아닐까 싶어. 토키와. 긍정적인 상황을 믿고 싶어지는 심리 말이야.
토키와 아유키: 그렇지는 않아. 나를 믿어. 나나시. 내 말을 믿을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 생각할지라도… 사실은 사실이야. 너는 내 친구니까. 이해해 주리라고 믿어.
나는 그렇게 말하는 토키와를 보며 그의 행동에서 어딘가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맞지 않다.
토키와가… 너무 착하지 않나?
이 지경까지몰린 와중에도 토키와에게서 가망을 찾는다거나 하는 약해빠진 생각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꿈속에서 자각하지 못하던 조율자의 정체성을 깨우고 그는 나에게서 정신조작을 빼앗을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겼는데. 그저 나와 대화를 나눌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샤이닝 좀 줄래?' 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그를 향해 경계를 세웠으나. 토키와는 의아함과 우려까지 담은 채로 나를 마주 바라보았다.
토키와 아유키: 왜 그래. 나나시…? 혹시 내가 이상한 말을 했어?
나나시: …내 샤이닝을 빼앗지 않는 거야? 그게 네 목적인 줄 알았는데.
토키와 아유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나시? 하하…
토키와는 약간 당황하며 동시에 나를 보고 웃었다.
토키와 아유키: 내가 왜 네 샤이닝을 빼앗아야 해? 우리는 살인 게임에서 전부 무사히 탈출하잖아.
그는 자신이 그 정도의 융통성도 없는 것처럼 보이냐는 듯이 말했다.
토키와 아유키: 그 목적이 이루어진 이상 더 큰 정신조작을 가질 필요도 없는 거야. 가장 큰 힘은 오히려 쓸 필요가 없기에 좀처럼 사용되지 않잖아. 그 힘의 존재 여부야말로 모든 것을 결정해. 그렇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는 토키와를 보고서 생각했다. 만약. 아주 만약에라도 탑에 있는 이들과 토키와 사이의 의견에 합의점이 있다면 토키와는 정신조작을 사용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카이다의 처우나 정신조작 자진 포기 등 결코 서로가 동의할 수 없는 사안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최종 목표가 살인의 억제와 탑에서의 탈출임을 아는 것은 그를 위협으로 보고 있던 나에게 그를 다시 보게 만드는 계기를 주었다. 방향이 다를 뿐 그 또한 선한 면모를 간직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하지만 그저 감동한 채 그의 순수한 마음을 보고 심문을 끝내기에는 상황이 너무 위태롭고 급박했다.
나나시: …맞아. 그랬지. 한 명도 빠짐 없이 탈출할 수 있게 됐어. 카이다를 얌전하게 만들기 위해서 몸을 마비시킬 수밖에 없었지만.
다음 안건이다. 카이다 쿠로하를 어떻게 풀어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제츠보는 생각했다.
'괜히 허락했나?'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 언니 말 들려?
캐롤은 나나시가 잠들어 있는 동안 카이다의 옆에 앉아서 계속 말을 걸었다. 단지 말을 거는 게 전부가 아니라 중간에 몸을 흔들거나 머리카락을 빗어 주거나 손수건으로 입가의 거품을 닦아 주는 등의 수발을 들기도 했다.
캐롤 브라이트: 들리면 대답해 줘… 알겠지? 재촉 안 할게. 언니가 옆에 있다는 거 알잖아… 그렇지?
캐롤이 카이다의 옆에서 보낸 말은 제츠보에게 방관자로 머무는 일 자체에 대한 모종의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 말이 들리는지의 여부를 묻는 것, 토키와가 벌인 소동과 그 사이에 벌어진 일들, 자신이 현재 상황에 느끼고 있는 감정, 카이다가 깨어났을 때 캐롤이 함께 하고 싶은 것, 앞일에 대한 약속. 그 모든 것이 한 공간 안에 머물고 있는 제츠보에게는 짙고 또 무겁게 느껴졌다.
캐롤과 카이다의 모습은 또한 제츠보 자신의 태도를 자각할 수 있는 비교 대상이 되기도 했다. 분명 카이다와 적지 않은 시간을 부대꼈는데도 제츠보 자신이 카이다의 자아상실에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캐롤의 불행한 모습을 거울로 삼고 보니 자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제츠보는 그런 자신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배려, 공감, 죄책감이 결여된 자를 현실에서 마주친들 사람들은 자신 앞에 있는 게 그런 사람인 줄을 모른다. 그런 자들은 으레 가짜 얼굴을 만들어낸다.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꾸며 보여주는 편이 평판이나 사회적 관계에 있어 꾸미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히무로 시라베마저 가짜 태도를 꾸몄다. 이미 배척되고 있기에 꾸며내더라도 의미가 없으며, 일일이 언사를 고치는 것 또한 필경 무의미해졌음을 알기 전까지의 이야기지만.
반면 제츠보는 애초에 관계를 맺으려는 생각도, 관심마저도 없었다. 제츠보가 연관을 가진 인물은 나나시 뿐이었다. 카텟 기관에서 보낸 도움이니 살인이 일어날 법한 일에는 개입하지만 그뿐. 개개인의 관계나 교류 따위 불필요하고 그런 열망도 느끼지 않았다. 인간의 모습을 되찾기 전에는 더욱 그랬다. 그러니 캐롤이 아무리 구슬픈 목소리로 자신의 잃어버린 여동생에게 일어나 달라고 애원할지언정 제츠보는 측은지심은 커녕, 아주 작은 불편함이나 도움을 줘야 한다는 당위성마저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제츠보는 지켜보았다. 지켜보며 동시에 모호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던 자매애가 무엇인지 살폈다. 아마 카이다 본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못했을 애착을 보며 제츠보는 왜 캐롤이 그렇게까지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자매. 그렇지만 얼마 전까지 자매인 줄도 모르는 사이였다. 카이다가 미도리카와에게 쫓겨 탑에 돌아오지 못하고 장미꽃밭을 배회하던 때. 카이다는 캐롤의 손을 분질러 버리려 하다가 제츠보에게 저지당하지 않았던가.
뒤늦게 자매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갑자기 카이다가 소중해진다고? 정말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물론 가족은 보통 사람들에게 소중한 존재다. 노바디도 가족이 있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 카이다는 감당할 수 없는 짓을 너무 저질렀다. 연을 끊기에 충분한 정도였다.
그런데 왜 아직도 캐롤은 카이다를 놓지 못하는 걸까?
그렇게 소중한가?
카이다라는 사람을 이렇게 사랑할 수가 있는 일인가?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제츠보는 어느 순간. 캐롤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제츠보: 도와줄게.
캐롤은 카이다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다가 고개를 홱 들어 제츠보를 보았다. 약간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떠올랐다.
캐롤 브라이트: …저를요?
제츠보: 하나보다는 두 명이 나을 테니까. 카이다 쿠로하가 빨리 깨어나야지 너나 나나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어질 거 아니야.
그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캐롤이 카이다의 깨어남을 독려하며 속삭이는 소리가 제츠보에게 영문을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다른 사람이 느낀다면 슬픔이자 연민이라고 느꼈을 어떠한 감정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며 캐롤에게 있어 카이다는 제츠보에게 있어 나나시와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만약 나나시가 카이다처럼 혼수 상태에 빠졌을 때. 제츠보가 옆에 앉아서 말이라도 걸어주지는 않을 테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을 거고… 아. 재수없게. 왜 괜히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이게 다 카이다 쿠로하 때문이야…
제츠보: 이봐. 일어나. 카이다. 정신 차리라고.
제츠보는 약간 세게 힘을 줘서 카이다의 얼굴을 흔들어댔다.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 일어나 봐. 언니 말 들려?
그렇게 두 사람이 한 마디씩을 카이다에게 전하고 카이다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는 동안. 누군가가 제츠보의 방문을 두드렸다.
제츠보: …누구지?
제츠보의 사고 회로가 바쁘게 돌아갔다. 히무로는 토키와를 지켜보고 있다. 제츠보와 캐롤, 카이다는 한 방에 같이 있다. 그러니 찾아올 사람은 고작 하기와라, 이바라, 그게 아니면…
카나리 케이토: 나다. 용건이 있어 왔어. 문 열어 봐.
제츠보: 카나리…?
제츠보는 카이다를 바닥에 질질 끌며 문을 향해 다가가려다가 멈추었다. 그 저의를 눈치챈 캐롤은 제츠보 대신 문 앞에 서서 카나리에게 말을 걸었다.
캐롤 브라이트: 무슨 용건으로 오셨어요. 카나리 씨?
카나리 케이토: 카이다 쿠로하에게 볼 일이 있다.
제츠보는 생각했다. 플라잉 로봇이 그립다고 말했지만, 플라잉 로봇을 가지고 있던 녀석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한테 무슨 일을 하시러 온 거죠?
카나리 케이토: 아무것도 못 해. 너와 제츠보 두 명이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뭔가를 할 수는 없어. 하지만 그 여자는 나이토의 죽음에 일조했으니까… 그 죗값을 받았는지 내 눈으로 직접 볼 거야.
캐롤은 주저했다. 문고리로 향하려던 손이 몇 번씩 멈추었다. 그러나 그 손은 결국 서서히 나아갔고… 이윽고는 문고리를 붙잡았다.
제츠보: 캐롤. 열어줄 필요 없어. 날붙이라도 들고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캐롤 브라이트: 들고 계실 이유가 없을 거에요. 그리고… 저는 열어드려야만 해요. 치나미가 한 일을 지워버릴 수는 없으니까요…
제츠보: …그렇다면 마음대로 해.
그리고 문이 열렸다. 카나리는 추레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눌러쓴 모자 때문에 카나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캐롤와 제츠보의 눈에 전부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따금씩 보이는 눈빛은 겁많고 어설프던 평소의 그와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만한 섬뜩함을 담고 있었다. 그는 어떠한 준비가 된 사람처럼 보였다. 회중시계는 이상할 정도로 천천히 움직였다.
카나리는 제츠보의 발에 붙어 있는 카이다를 보고서 숨을 작게 후 하고 내뱉었다. 그것이 조소인지, 한심하게 여기는 것인지, 멸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불편한 표정을 지은 채로 카나리는 카이다를 향해 다가갔고 흐리멍텅한 눈빛을 한 채인 카이다를 보고서 손목시계를 조금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카나리 케이토: …그래서. 얘는 앞으로도 이렇게 백치라는 거냐?
제츠보: 나나시가 방법을 알아오기 전까지는 그래.
캐롤 브라이트: 그러나 나나시 씨는 토키와 씨에게 직접 물어보고 있으니까. 꼭 알아내실 거에요.
카나리 케이토: 나나시는 저기서 자고 있는데…?
카나리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사랑의 열쇠를 모르는 입장에서는 제츠보와 캐롤이 헛소리를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꿈 속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발상은 수비사리 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제츠보: 설명하기에는 길어. 아니… 너도 알아야 하나? 잘 모르겠으니까 일단 보류하는 걸로 하자.
카나리 케이토: 영문 모를 소리나 하고. 흥…
카나리는 자신의 손목시계와 카이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츠보는 카나리를 보며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다는 불안함을 느꼈지만, 그가 정확히 무엇을 하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제츠보: 네가 보기에는 어때. 죗값을 받은 것 같아?
카나리 케이토: …어느 정도는. 그리고 이렇게 되어버린 녀석한테 죗값을 더 치르게 해봤자야. 자기가 왜 벌을 받는지도 모르잖아.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갚아줘봤자야.
캐롤 브라이트: 나이토 씨와… 친하셨던 건가요. 카나리 씨?
카나리의 몸이 한 번 떨렸다. 제츠보는 캐롤의 얼굴을 보고서 지금 이게 무슨 헛소리냐 물으려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캐롤은 카나리가 나이토와 모리에게 한 일을 조금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캐롤과 나나시가 후루미나미를 붙잡으며 항생제를 해변에 보낸 뒤. 캐롤은 영문도 모른 채로 유리가 되어 죽었다. 탑에서 도망친 카나리가 배송된 항생제를 빼앗아 도망쳤기 때문이다. 카이다는 살인을 명령했으나 겁이 많았던 카나리는 항생제 도둑밖에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소극적인 일 또한 분명히 모리와 나이토의 죽음에 일조했다. 두 사람이 항생제를 받았다면 모리는 스스로 죽음을 택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캐롤은 그 일에 대해 전혀 몰랐다. 두 번째 재판 전에 죽었고, 세 번째 재판을 하는 동안 죽어 있었던 캐롤은 카나리가 말하는 '나이토의 죽음에 일조' 가 카이다가 일으킨 가재 괴물 사고. 나이토의 발 반쪽을 앗아간 그 일을 가리키는 줄만 알았다.
반면 카나리에게 순간 캐롤의 말은 "너 또한 나이토가 죽게 만든 사람인데 무슨 자격으로 죗값을 운운하느냐? 죗값을 물을 정도로 나이토와 친했는가? 그렇다면 왜 그를 죽게 만드는 일에 크게 일조했는가?" 라는 물음으로 들렸다.
제츠보: 캐롤. 아마 두 사람은 전혀 친하지 않았을 거야. 그럴 틈이 없었어.
캐롤 브라이트: 그런가요…?
카나리 케이토: …현실에서는 친했어.
캐롤 브라이트: 네? 현실에서요?
카나리 케이토: 그래. 여기 오기 전 말이야. 나이토. 모리. 하기와라. 칸나즈키. 그리고 나. 나머지 한 명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같이 조율자한테 맞서기까지 했대. 그런 엄청난 일까지 같이 했는데…
캐롤 브라이트: …조율자요?
제츠보: 믿기지 않겠지만 캐롤. 이녀석이 조율자를 몰아붙인 사람 중 한 명이야. 조율자가 다른 샤이닝을 흡수하며 힘을 키우느라 무력화된 찰나에 습격한 사람들.
"너희들의 반항적인 짓거리들 중 의미가 있었던 것은 조율자 습격 사건뿐이다. 하미디언. 벤담과 너는 재간과 선동을 통해 공권력과 시민들로 하여금 스스로 일어나게 만들었지. 물량 공세와 체계적인 포위망 덕에 재단마저 물러났다. 결국 너희들은 패배해 뿔뿔이 흩어졌지만 말이다."
제츠보: 덕분에 조율자는 급하게 도망치느라 자신의 후보들에게 정신조작 능력들을 일부 넘겨주게 됐어. 각자의 방향으로 함께 달아난 조율자 후보들을 모으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고, 조율자 완성이 그런 식으로 지체된 거지…
캐롤 브라이트: 어… 엄청난 일을 하셨네요. 카나리 씨. 무섭지는 않으셨나요?
제츠보는 캐롤을 잠시 응시했다.
카나리 케이토: 내가 무슨 일을 해냈을 것 같지는 않아. 기껏 해봐야 금전 지원이었겠지. 영안로 속에서 본 과거지만. 나랑은 반대로 녀석들은 대단했어. 그렇게 강대한 놈을 상대로 맞서고 있었어. 누구한테도 기대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어. 그런데…
카나리 케이토: 그런데 내가 죽였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죽게 만들었어… 캐롤 브라이트. 너도 나 때문에 죽은 건 마찬가지야. 너랑 나나시가 보낸 항생제를 내가 중간에 빼앗아서 나이토가 죽고, 너도 죽은 거니까…
카나리 케이토: 미안하다. 네가 죽은 건 나 때문이야.
카나리는 캐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캐롤 브라이트: …왜 항생제를 빼앗으신 거죠?
카나리 케이토: …살인을 하기에는 겁이 많았고. 사람 죽이라는 말을 거절하기에는 죽기 싫었어.
캐롤 브라이트: 누가 카나리 씨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한 적이 있나요?
카나리 케이토: 후루미나미가 붙잡힌 뒤에… 나도 붙잡히는 건 아닐까 무서워서 해변에 떨어졌어. 그러다 카이다 쿠로하를 만났고…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하길래 아무나 죽이려 했어. 그렇지만 죽기는 싫어서… 항생제만 가지고 도망간 거야. 그러면 알아서 죽을 테니까…
캐롤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캐롤 브라이트: …제가 터치를 쓰고 후루미나미 씨를 끌어냈기 때문에. 그리고 치나미가 협박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군요.
캐롤 브라이트: 그렇다면 카나리 씨는 저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어요. 결국 제 잘못으로 귀결되니까요…
카나리 케이토: 그… 네 잘못 아니야. 내가 조금이라도 용기가 있었으면 해변까지 가지도 않았어. 미안한 건 나야…
캐롤 브라이트: 두 번 죽이지만 마세요. 그거면 됐어요.
캐롤은 쓰게 웃었다.
캐롤 브라이트: 그리고 정말 조율자를 습격하셔서 그 파편들을 흩어 놓으셨다면 카나리 씨는 제 은인이기도 해요. 저는… 조율자 실험에 쓰인 사람 중 하나였거든요.
카나리 케이토: 뭐?! 네가…?! 어쩐지 죄다 금색이더라니!
캐롤 브라이트: 아마 서로 마주친 적이 있을지도 몰라요. 저희. 저도 그날 풀려나서 도망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제츠보: 그래서 카나리. 카이다에게 복수하지 않으려고?
제츠보가 화두를 돌렸다. 카나리는 고개를 저었다.
카나리 케이토: 그건 아까 말했잖아. 무의미해. 게다가… 얘. 네 동생이라며?
캐롤 브라이트: 네.
카나리 케이토: 너는 얘랑 친했어?
캐롤은 카나리의 물음에 대답을 주저했다.
캐롤 브라이트: 친하고 싶었죠. 성공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부족했던 것 같아요. 결국에는 치나미에게 큰 도움도 주지 못했고 지켜주지도 못했잖아요.
캐롤 브라이트: 또 가장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지도 못했고… 제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치나미가 토키와 씨에게 당한 거니까. 미안한 마음밖에 들지 않아요. 못 해준 게 얼마나 많은지…
카나리 케이토: 그래도 네 쪽에서 좋아하기는 했나 보네.
캐롤 브라이트: 좋아했죠. 어린 시절 저한테는 치나미밖에 없었으니까요. 저는… 재회를 제 어두운 나날 속의 희망으로 삼고 살았어요. 제 동생과의 재회도요. 겨우 다시 만나서 드디어 제 쪽에서 지켜주고 도와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런 일이…
카나리 케이토: 짧은 시간이지만 카이다 쿠로하는 너한테 고마워했을 걸.
카나리 케이토: …아마도. 나야 그 여자 생각을 모르니까 사실 확실하지는 않은데… 아마 그랬을 거야.
제츠보는 카나리가 기껏 좋은 이야기를 해놓고 괜한 소리를 덧붙인다고 생각했다.
캐롤 브라이트: 그걸 어떻게 아세요?
카나리 케이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야 해. 이제 돌아갈 수 없잖아. 그러니까… 그 잠깐동안 기쁘게 해줄 수 있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해.
갈 곳을 잃던 카나리의 말은 의외로 괜찮은 결론으로 착륙했다.
카나리 케이토: 그러지 않으면 너무 허무하잖아… 처음부터 알아보고서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았겠지.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어. 그러니까 걔가 나 때문에 아주 잠깐이라도 기뻤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거야.
캐롤 브라이트: 맞는 말씀이에요.
카나리 케이토: …있잖아. 너. 토키와에게 복수하고 싶지는 않냐?
카나리의 물음에 캐롤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카나리 케이토: 원래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토키와 그놈이 네 동생을 이렇게 만들었다면 너한테도 복수할 자격이 있는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복수하고 싶어? 어때?
제츠보: 잠깐. 너한테도라니…? 너. 복수하려는 거야? 토키와에게?
카나리 케이토: 당연한 말을 되묻지 마. 너도 놈이 당해 마땅하다는 건 알잖아. 녀석은 칸나즈키를 죽였어… 후루미나미가 죽였다고 할 수 있지만 녀석도 동조했단 말이야. 칸나즈키 뿐만이 아니라 야가미의 목숨까지. 녀석들은 죽여도 된다고 판단한 거야. 제멋대로…
카나리 케이토: 한때는 존중할 만한 녀석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니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보내줄 순 없다고… 칸나즈키 대신에 되갚아줘야 해. 그래야만 해. 그럴 사람은 이제 나밖에 남지 않았어.
제츠보: …토키와에게 복수한다는 건. 죽이기라도 하려고?
카나리 케이토: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해 봐야 알게 되겠지만 중요한 건… 조금이라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다.
제츠보: 참견 하나 할게. 카나리. 누구도 너한테 그런 일을 요구하지 않았으니까 무모한 짓은 관둬.
카나리 케이토: 내가 나 자신한테 요구하는 거야. 내가 망친 일이 너무 많아. 그 좋은 녀석들이 다 죽었는데… 나는… 이미 너무 늦은 거야. 그러니 뒤늦게라도 옳은 일을 해야 해.
제츠보: 아니. 대체 왜 그런 생각을…
제츠보는 이쯤에서 캐롤이 자신보다 말주변 좋게 이성적이며 동시에 감성을 달래주는 말을 해 주리라 생각했지만, 캐롤을 돌아보았을 때 제츠보가 본 것은 조용히 카나리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캐롤이었다.
양손을 쥔 채로. 자신의 입술을 씹으며 그녀는 카나리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이해한 것이다. 귀기울여 들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물론 카나리의 말에서 일부분 타당함을 느끼고 공감마저 했다. 아주 나쁜 신호였다.
책임. 조금이라도 책임. 그것은 캐롤이 제츠보에게 했던 말과 일맥상통했다. 그녀의 잘못이 분명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사람이 죽거나 비참해지기도 했다.
제츠보는 헛소리라고 일축했고 제츠보의 논리는 타당한 편이었다. 캐롤도 납득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캐롤이 캐롤인 채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그녀의 과오이자 귀책 요소가 될 수 없음은 캐롤도 알았지만 한편 그녀는 이 모든 것에 이유가 있다면 그건 캐롤 본인의 정신조작이라 여겼다.
믿음은 어찌할 수 없다. 믿음을 부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캐롤이 카나리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공감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동의하지 않는 것은 이성의 영역이, 공감은 감성의 영역이 담당했기 때문이다. 캐롤은 카나리가 스스로의 책임을 느끼며 자책에 빠질 필요가 없음을 알았지만, 반면 그녀의 책임은 분명히 있다고 느꼈다.
'너는 이렇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따라서 캐롤은 카나리의 말을 들으며 그녀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 얼마나 얼토당토않는지를 확인하기는 커녕. 그의 말에 그녀 또한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는 감화를 느꼈다. 부추김을 받았다.
그 사실을 모른 채 카나리는 이런 식으로 선을 그었다.
카나리 케이토: 강요하는 거 아니니까 끼어들기 싫다면 안 그래도 돼. 나 혼자 해낼 수 있어. 하지만 너도 개인적으로 받아낼 값이 있다면 언제든 나한테 말하란 말이야. 도와줄 테니까.
캐롤은 대답했다.
캐롤 브라이트: …복수는 공허하다는 말이 있잖아요.
캐롤을 미심쩍게 보던 제츠보는 캐롤의 입에서 통상적인 도덕주의의 정론이 나오자 내심 안도했다. 캐롤이 꾸미는 극단적인 행동은 다른 사람의 기준에서는 더욱 극단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카나리 케이토: …알았어.
한 차례 침묵이 방에 감돌게 되었을 때 제츠보는 드디어 한 시름을 놓았다는 생각을 했다. 괜히 카나리가 캐롤을 뒤흔들어서. 부추겨서 무슨 일이 벌어질 뻔했다. 옆에 나나시가 있었다면 적당히 수습해 줬을 텐데. 하필 자는 동안에 찾아왔으니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다행히 캐롤이 카나리의 제안을 곱씹어볼 시간이 주어지기 전. 나나시가 깨어났다.
나나시: 으…
제츠보는 나나시가 영안로에서 살아왔을 당시 다음으로 나나시의 목소리와 얼굴이 반갑다고 느꼈다. 가장 말주변 좋게 캐롤을 대할 수 있는 자는 나나시였으니.
제츠보: 나나시…! 드디어 일어났구나! 기다리고 있었어!
나나시는 카이다를 바닥에 질질 끌며 자신에게 다가온 제츠보를 보며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나나시: 인…공지능…? 그. 그렇게 반가워…?
제츠보: 착각하지 마. 네가 해야 하는 일이 많으니까 기다린 거야. 아. 종이랑 펜…! 여기 있으니까 빨리 적어야 하는 내용 적어! 잊어버리기 전에!
나나시: 어…! 아. 알았어!
그리고 나나시는 여전히 몸에 도는 약기운에 눈을 게슴츠레 뜬 채로. 바닥이 푹신한지라 삐뚤빼뚤해지는 글씨를 길게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카나리 케이토: 뭘 적는 거야. 대체? 무슨 꿈을 꿨는지 적는 거냐?
카나리는 우연히 정답을 맞췄다.
꿈 속의 환경: 전원 무사 탈출 직전. 토키와 본인은 조율자라는 자각이 없다. 유도심문으로 기억하게 만들지 않는 이상 조율자의 자아가 아닌 토키와 자아 그 자체와 대화할 수 있다.
꿈 속에서의 터치: 여전히 이어지지 않았다.
토키와 본인이 캐롤 씨와 내 샤이닝(정신조작)을 빼앗을 수 있는 이유: 본인도 모른다. 조율자의 권한이라고 하기에는 내 정신조작을 흡수할 수 없고, 힘의 차이라고 하기에는 캐롤 씨의 정신조작을 흡수할 수 없는데 본인은 둘 다 빼앗을 수 있다고 확신 중.
카이다의 기억을 되찾게 만드는 법: 잘 모르겠다. 기억 소거 절차의 마지막 말을 끝내지 않은 채로 터치를 써서 조종하고 있기 때문. 토키와가 아닌 이상 위험부담 없이 풀어주기는 어렵다.
이름 없는 남자는 내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했다.
토키와 아유키: 내 비밀에 대해 적혀 있는 거야…?
대답해줄 의무는 없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토키와 아유키는 고개를 양옆으로 마구 흔들다 천천히 움직임이 느려졌고. 이내 목을 완전히 옆으로 눕힌 채 잠에 빠졌다. 수면제의 작용이 몸에 남은 와중 꿈이 제멋대로 끝났으니 잠을 이겨내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사랑의 열쇠를 사용하기만 하면 심문을 시작할 수 있다.
내가 볼 꿈 속의 상황은 이름 없는 남자와 크게 다를지도 몰랐다. 사용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토키와 아유키는 이름 없는 남자와 친분이 있었던 쪽에 속하기에 무의식속에서도 거부감이 없다. 하지만 당장 그의 앞에서 그를 겁박하고 자낙스를 강제로 먹게 만든 나는. 그에게 있어 적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당연히 무의식에서부터 적대감이 있을 터.
이름 없는 남자가 토키와 아유키에게 약한 정도의 심문을 사용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만, 내가 직접 듣기 전에는 알 수 없기에 여러 가지 내용을 다시 물어보며 교차검증을 거칠 생각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지금부터 토키와 아유키의 꿈 안으로 진입하겠다. 문은 잠가 두었다만 섣불리 접근하지 마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나는 다이얼로그에 그렇게 말한 뒤 자낙스를 삼켰다.
제츠보: 뭐야. 다시 돌아왔어?
제츠보의 숙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캐롤이 문을 열자. 그곳에는 눈이 반쯤 감긴 나나시가 있었다. 자낙스 두 개의 약효가 몸에 남아있는지라 캐롤과 카나리는 그에게 편지를 대신 배송해주겠다고 권유했지만 나나시는 그 제안을 한사코 거절했다. 히무로라면 자신이 직접 전달한 내용만을 신뢰할 것이라며. 그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직접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실이었다.
제츠보의 방에 비척거리며 돌아온 나나시는 사실 별다른 일을 더 하지 못했다. 나나시는 그렇게 이겨내기 어려운 잠은 처음 겪어 보았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가다가 다음 순간 홱 올라오는 일이 몇 번 반복되었고,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수마에 시달리면서도 굴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 있기에는 너무 졸린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나시: 자고있을 수는… 없어…
제츠보: 자낙스 두 알을 먹어놓고 잠에서 깨겠다고? 그냥 한숨 자지 그래? 여기 말고 네 방에 가서.
나나시: 아니야…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 자고 있을 수는… 윽! 으으…
나나시는 완전히 감긴 눈을 한 번 번뜩이며 뜨고서 다시금 게슴츠레 반쯤 눈을 감았다.
제츠보: 이럴거면 왜 왔어? 아. 설마… 캐롤이 말했던 삼자대면이라도 하려고 온 거야?
캐롤 브라이트: 삼자대면이라기보다는 세 명이서 한 번 만나는 거죠.
제츠보: 그게 삼자대면이지.
캐롤 브라이트: 제가 의도한 건 그런 게 아니었어요. 삼자대면은 뭐랄까… 조금 더 공적이고 진지한 느낌의 단어잖아요. 저는 그냥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고. 그런 식으로…
제츠보: 그렇게 가벼울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튼 간에 오늘 하지는 말자고. 가뜩이나 처리할 일이 많잖아. 저 녀석 또 존다.
나나시: 악! 안… 졸았…어.
미련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제츠보는 카나리 쪽에 시선을 주었다.
제츠보: 카나리. 너도 이렇게 된 김에 다른 사람들이랑 합류하지 그래?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하느라 바빴는지는 몰라도 방 밖으로 나온 걸 보면 그 일도 끝난 거잖아? 그렇게 혼자 다니다간 정말 쥐도새도 모르게 죽어. 복수도 못 이룬 채로.
카나리 케이토: 너희들이 다 뭉쳐 다니면 나를 노릴 사람도 없지… 그러니까 나를 막을 생각 마. 나는 어떻게 해서든 이루고 말 거야.
제츠보는 카나리를 다른 사람 옆에 붙여서 허튼 짓은 하지 않을까 감시하게 만들고자 했으나. 카나리는 이를 어느 정도 눈치챘다. 그는 평소보다 눈치가 빠르고 사리분별에 능해졌고. 무엇보다 현 상황을 다각면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변화의 목적은 얼마나 극단적일지 모르는 복수에 있다는 것이 제츠보에게 께름칙함을 주었다.
카나리가 빠른 걸음으로 제츠보의 방을 나선 뒤. 제츠보는 자신의 방에 남아있는 두 명의 불청객을 다시 보았다. 정확히는 불청객이 세 명 있었지만 한 명은 도무지 나갈 생각이 없었으니.
생각이. 없게 되었으니. 나갈지 말지를 스스로 정할 수 있는 나머지 두 명에게 다시금 말을 건 것이다.
제츠보: 가는 김에 너희도 다 같이 나가. 내 방이 점점 어수선해지고 있다고.
캐롤 브라이트: 그렇지만. 저는 치나미에게…
제츠보: 방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나나시가 알아냈잖아. 히무로의 심문에서 방법이 나오기 전까지는 쉬어 둬. 내가 카이다 옆에서 말이라도 몇 번 걸어 줄게.
캐롤은 제츠보와 카이다, 그리고 카나리가 떠난 문을 한 번씩 돌아보았다. 나나시와도 한 번 눈이 마주쳤다. 나나시는 눈을 그저 뜨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였다.
나나시도 단순한 객기로. 혹은 삼자대면을 하자는 이유로 깨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든 깨어날 수 있는 얕은 잠이 있고 몸을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는 깊은 잠이 있다고 한다면. 나나시를 덮치는 것은 후자였다. 깊고도 깊은 잠. 퍼질러 놓고 자게 만드는 자낙스 두 개의 효력에 몸을 맡길 수는 없었다. 꿈에서 알아낸 것들을 적은 종이를 히무로에게 건네 주었기에, 하기와라와 이바라에게도 알아낸 내용을 공유하려면 나나시 본인이 가야 했기 때문이다.
나나시: 아으… 알겠어… 재워줘서 고마워…
제츠보: 고마워하지 마. 그래야 하니까 재워준 것 뿐이야.
나나시: 나주웅에 봐. 인공지능…
나나시는 자기 볼을 한 번 세게 꼬집으며 몸을 일으켰다. 매섭게 꼬집힌 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신과 한 방에 있는 것이 제츠보에게 달갑지 않으리라는 걸 안 나나시는 비틀거리며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뒤를 따라가려던 캐롤은 잠시 카이다를 내려다보더니. 제츠보에게 이런 말을 했다.
캐롤 브라이트: …제츠보 씨. 혹시 나중에 저 한 번만 도와주실 수 있어요?
제츠보: 도와줘? 뭐를? 말도 안 되는 일만 아니면 생각해 볼게. 말해 봐.
캐롤은 제츠보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대답했다.
캐롤 브라이트: 아니에요. 잊어버리세요. 다시 생각해 보니 말이 안 되는 일 같아요.
캐롤 브라이트: 그럼 다시 올게요. 제츠보 씨. 꼭 다시 봐요.
캐롤은 방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카이다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캐롤 브라이트: 조금만 기다려. 언니가 다시 올 테니까…
나나시와 캐롤이 전부 제츠보의 숙소에서 나가자 방 안에는 돌처럼 굳은 카이다와 제츠보만이 남았다. 다이얼로그를 구석에 두었기에 하기와라와 이바라의 왁자지껄한 수다도 들려오지 않았다.
방을 휘감은 정적 속에서 제츠보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대신 생각을 했다.
순순히 나가네. 카이다 옆에 붙어있겠다고 우길 줄 알았는데. 하기야 캐롤도 자낙스를 먹고 깨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까 아직 졸음과 싸우고 있지 않으려나. 나나시는 더 심할 테고…
히무로가 잘 하고 있어야 할 텐데… 어련히 잘 하겠지 뭐. 조율자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결국 조율자가 탑에 나타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고 말고…
토키와 아유키: 드디어 이루었다. 세계 평화.
그것은 원대한 꿈이었다.
모든 로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과정에 세계 지배와 자유권 박탈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훌륭한 목표이기도 했다. 나 또한 그것을 바라고 있지 않았던가. 세계를 구하는 일. 절망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재단에게도 맞선 끝의 평화란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을 만큼 아득했지만. 그것은 나의 사명이기도 했다.
토키와 아유키: 계속 말했잖아. 감시자. 우리는 서로 반목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나는 마천루 아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300m를 가볍게 넘길 고층이었다. 그런 건물의 존재는 곧 대몰락의 종식을 의미했다. 어디에나 폭도가 넘치는 세상이었다면 100m를 채 넘기기 전 무너져 내렸을 터.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누구도 피를 흘리거나 비명을 지르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질서 있게 일렬로 서서 자신의 앞을 달리는 차량을 보았다. 그들은 신호등이라는 교통 신호 안내 장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호를 기다렸다. 마침내 차량이 멈추고 사람들이 도로를 걷게 되었을 때. 어떤 차량도 충동적으로 사람을 들이받지 않았다.
그 광경은 두렵다기보다 오히려 질서정연하고 평화롭게 보였다. 그러나 그 꿈은 토키와 아유키의 정신 속을 침식하는 조율자라는 사고방식이 꾸고 있는 것이었다. 꿈속의 마천루는 탑과 너무 동떨어진 장소인지라 카이다 쿠로하의 기억을 되살리는 방법을 물어보려면 그의 인식에 먼저 탑의 존재를 일깨워 주어야만 했다. 평화로운 세상에 몸이 멈춘 카이다 따위는 없을 테니.
그가 스스로를 완성된 조율자라 여기고 있다면 그의 힘을 회수할 방법을 물을 수도 없었다.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조율자는 모든 정신조작을 가장 강력하게 가지고 있기에 모든 정신조작자를 압도할 수 있다.
토키와 아유키: 이것이 진정한 화합이다. 감시자. 아무리 너라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재단과 로의 방향은 옳았다.
나는 그에게 동의하기로 했다.
히무로 시라베: 모든 사람에게 터치를 사용하는 일이 고되지는 않았나? 모든 인구에게 지배에 대한 동의권을 얻어내다니. 시간이 많이도 걸렸겠군.
토키와 아유키: 무슨 말이야. 감시자? 그건 아무래도 너무 번거롭지. 더 공정하고 간편한 방법이 있으니 그럴 필요도 없어.
토키와 아유키: 모든 이들에게 터치가 퍼지면 되는 일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그게 최종 계획이었나?
토키와 아유키: 그래. 모든 이들이 정신조작을 가진 세상은 어떠한 비밀이 없고 적의 또한 없다.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툼과 절망이 끝난 거야.
히무로 시라베: 절대적인 정신조작을 얻은 이후 정신조작을 확산시킨 것인가. 그렇게 오버룩, 딕테이트, 터치가 전염되었겠군.
토키와 아유키: 그렇다.
히무로 시라베: 이 계획은 누가 세운 거지?
조율자는 고개를 저었다.
토키와 아유키: 적어도 나는 아니야. 너도 아니고. 그러나 분명 대단한 발상을 가진 누군가다. 그건 의심할 수 없어. 너는 조율자가 감시자에 대항할 수 있는 로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반대다. 네가 조율자에 대항할 수 있는 로다. 조율자라는 개념이 재단의 계획의 근간으로 먼저 있었고 그 근간이 무너지는 상황을 대비해 감시자가 설계되었으니.
히무로 시라베: 네 말대로 재단의 계획은 터치라는 능력을 전제에 두고 세워져 있다. 조율자의 역할은 로의 결속과 화합 뿐만 아니라 로가 지배자의 자리에 올랐을 때 신민들을 통치하기 쉽게끔 조종하는 일이기도 하다. 로를 필두로 한 계획의 최초 발안자는 터치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자여야 한다. 터치의 최초 발견자는 누구냐. 네가 아는 사람인가?
조율자는 잠시 침묵했다.
토키와 아유키: 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 모든 기억이 모호한 기분이야. 분명 아는 사람인데…
자신의 기억을 되새기고 있다. 그 기억은 조율자의 기억이지만 동시에 토키와 아유키의 기억이기도 했다. 심문을 이어나가기 위한 기회가 열렸다.
히무로 시라베: 잘 떠올려 봐라. 네가 캐롤 브라이트의 손가락에 닿은 뒤 카이다 쿠로하가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을 때부터다. 너는 기억상실의 절차와 터치를 동시에 사용했지 않았나?
토키와 아유키: 음…? 아.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히무로 시라베: 질문이 있다. 너는 지금 완성된 로다. 누구도 너의 힘을 가져갈 수 없지. 그러나 그 전이라면 다르지 않은가? 당시 캐롤 브라이트가 너에게서 정신조작을 회수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토키와 아유키: …잘 모르겠군. 그런 일은 생각해본 적도 없어. 허나 내가 조율자인 이상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지는 않았을 테지. 당시의 나는 조율자로서 완전하지 않았으나 여전히. 조율자이기는 했으니까.
토키와 아유키: 완전히 기습을 당한 게 아니고서야. 그러니까 내가 저항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누가 나의 정신조작을 빼앗아갈 수는 없어.
히무로 시라베: 저항할 수 없는 상태는 무엇을 일컫는 거지?
토키와 아유키: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적절한 사례를 들기는 어려운데… 다만 정신조작은 말 그대로 정신을 움직이는 것이니. 내가 묶여 있는 상황 따위보다는 잠을 자고 있는 틈을 노리는 편이 나을 거야.
히무로 시라베: 잠을 자는 동안이라.
토키와 아유키: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여길 것까지야 없어. 이제 전부 과거 일일 뿐이잖나?
사랑의 열쇠로 만들어진 꿈 속에서 조율자의 무의식은 꿈 안에 있었다. 그러니 외부의 정신조작에 취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본격적인 정신조작이 시작된다면 잠에 빠진 이에게 신체적 자극을 줄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깨어나게 되겠지만, 그 전까지는 침입자 또한 조율자에게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조율자 본인조차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진실이기에는 너무 낙관적인 이야기이기도 했다.
결국 조율자. 토키와 아유키 본인부터가 정신조작에 대해 모르는 이상 심문을 통해 얻은 정보 중 무엇도 확실하지 않았다. 설령 심문을 통해 얻은 정보가 진실일지라도 그것이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의 무의식과 대화할 수 있을지라도 그의 증언을 신뢰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안건이었다. 애초에 심문 대상을 잘못 골랐다. 조율자가 완성되지 않고서야 명확한 정보를 줄 수 없는데, 그가 완성되는 일을 막기 위해 심문하는 것이니 역설적인 일이 되었다.
히무로 시라베: 재단의 매발톱은 지금 어떻게 되었지?
토키와 아유키: 아. 그들은 의로운 일을 수행하고 있어. 치안 유지, 응급구조… 궤를 달리하는 신체적 능력이 빛을 발하고 있는 거지. 움켜쥘 것이 없게 된 세상 속에서 그들은 발톱을 다듬고서 손을 건네기 시작했다.
히무로 시라베: 멋진 일이군.
토키와 아유키: 정말 멋지지. 그야말로 멋진 신세계야.
히무로 시라베: 그런데 그 매발톱 중 한 명. 기억소거 절차를 받던 도중 터치를 당해 거동의 자유를 잃어버린 인원이 있다고 들었다.
토키와 아유키: 뭐? 그런 이가 있어? 나는 처음 듣는 일인데. 일단 안내해. 내가 가서 풀어줘야겠어.
히무로 시라베: 어떻게 풀어줄 생각이지? 다른 이가 풀어줄 수는 없는 건가? 만인에게 터치가 퍼졌다면 조율자가 아닌 다른 이에게도 가능한 일이지 않나?
토키와 아유키: 절차가 끝나지만 않았다면 어떻게든 방법이 있어. 하지만 터치의 사용에 능숙하지 않은 이가 나섰다간 그 자가 큰 손상을 입고 자유는 되찾지 못하게 되는 수가 있지. 그러니. 정신조작에 통달한 내가 나서야만 해.
히무로 시라베: 십년 이상 정신조작을 가지고 생활한 사람이라면 충분할 것 같나?
토키와 아유키: 그 정도 기간이라면 적합하고도 남을 것 같군. 십년은 나에게도 까마득한 세월이야.
캐롤 브라이트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오직 가능성만이 있었을 뿐. 캐롤 브라이트가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가능성처럼, 조율자의 증언을 신뢰할 수 없는 이상 카이다 쿠로하의 깨어남 또한 불확실한 일이었다.
다만 카이다 쿠로하는 불확실할지라도 상관이 없다는 점이 달랐다. 어차피 조율자에게 지배당하는 처지. 실패할지라도 카이다 쿠로하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을 손상을 입는들 본래 탑의 가장 큰 위험요소이자 조율자의 수족이 된 자가 활동할 수 없게 될 뿐이었다.
캐롤 브라이트마저도 카이다 쿠로하의 자아를 돌려줄 수 없다면, 마지막 보루가 실패했음을 근거로 카이다 쿠로하의 거동을 빼앗는 것마저 가능했다. 성공하여 카이다 쿠로하가 자아를 되찾는다면 조율자를 경계하는 파수꾼을 하나 얻을 수 있다.
그 정보를 캐롤 브라이트에게 전해줘야 할지는 더 고려해 보아야 하겠지만 그것마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 조율자를 확보해둔 이상 사랑의 열쇠를 몇 번이나 사용하며 점차 신뢰성 높은 증언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니 모든 일이 극단적으로 나빠질리는 없었다.
분명 그랬을 터였다.
나나시: …다들 이해한 거지?
하기와라 우시오: 반쯤 좆됐다 이거 아니야?
하기와라는 나의 말을 한 마디로 요약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토키와 꿈에 들어가면 일이 술술 풀릴 줄 알았는데 들어가 보니 토키와 본인도 모르는 게 많아서 골치가 아파졌다는 거잖아. 큰 거 온다 싶었더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고.
나나시: …그래도 히무로는 나보다 전문가니까 어떻게든 진전이 있을 거야.
이바라 쿠리스: 맞아. 어떤 느낌일지 느낌 오잖아. 나나시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이렇게 대단한 정보를 다 알아왔다. 이렇게!
이바라가 목소리를 깔고서 어설픈 히무로의 흉내를 냈다. 캐롤 씨의 방향을 몇 번 흘끗거린 것을 보면 그녀의 기분을 낫게 해주려는 의도도 있을 터였다. 카이다가 깨어나거나 토키와에게서 정신조작을 회수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말에 캐롤 씨의 낯빛은 서서히 어두워졌으니.
캐롤 브라이트: …또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나나시: 소식이 들려온 뒤에야 할 수 있는 거에요. 캐롤 씨. 조율자를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안전한 방법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을 들이는 게 나아요.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그놈이 이제 도망갈 여지도 없잖아… 잠깐. 이거 플래그인가? 취소. 취소! 퉤퉤퉤!
캐롤 브라이트: 시간을 들이는 편이 안전하겠죠. 분명… 그렇지만 한 편으론 이 모든 상황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제가 그걸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겠지만요.
나나시: …무모한 일을 꾸미고 계신 건 아니죠?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의 눈썹이 한 번 움찔거렸다.
캐롤 브라이트: 왜 그런 생각을 하세요?
나나시: 아까 인공지능에게 어떤 일을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으셨잖아요. 인공지능의 도움이 필요하면서 말이 안 되는 일이라면, 무모한 일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나나시: 그러지 마세요. 캐롤 씨. 당신이 위험해지는 일은 싫어요.
나는 조금의 과장도 없이 말했다. 내가 느끼는 바가 그녀에게 전해지지 않을까 우려되어 과장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꼭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손을 잡는다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나나시: 당신을 겨우 다시 만났는데 또 잃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견딜 수 없을 거에요. 그러니까… 너무 무리하시면 안 돼요. 제가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도 있어요. 혼자서 감당하려 하지 마시고… 말씀해 주세요.
캐롤 씨는 나의 손을 잠깐 피하려다가 생각을 바꾼 듯. 결국 나의 손을 붙잡았다.
캐롤 브라이트: ……저도 죽고 싶지 않아요. 나나시 씨. 정말 죽고 싶지 않아요.
캐롤 브라이트: 또 당신이 죽는 것도 원하지 않아요. 치나미가 계속 저렇게 남는 것도… 정말 싫어요.
나는 그녀의 생각을 어렴풋이 읽었다.
그리고 하들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보다 있잖아. 아까 제츠보한테서 전화 와서 들었는데. 카나리가 문 밖으로 나왔다며? 그리고 토키와가 어디에 있는지나 사랑의 열쇠에 대해 알려주면 안 된다고.
하기와라 우시오: 그건 왜 그런 거야? 우리 걔 왕따시켜? 제츠보 이거이거 카나리한테 여러 번 방해전류 쳐맞은 감정이 남았네.
제츠보: 그런 게 아니야. 카나리가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니까 조심하는 거라고.
하기와라 우시오: 어? 야. 너 지금 듣고 있었냐? 아까까지만 해도 엿듣지 말라며 조용한 곳에 다이얼로그 박아 뒀으면서! 그러면서 내 말은 엿들어? 이거 완전 경우 없는 경우네!
제츠보: 아. 시끄러워! 이러니까 내가 전화 안 걸려고 했는데 말 안 해두면 너희가 애먼 짓 할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이바라 쿠리스: 어이! 나까지 끼우지 마! 나는 솔직히 분위기 잘 읽어!
나나시: …한결같아서 보기 좋네요.
캐롤 브라이트: 그러게요.
나와 캐롤 씨의 손이 동시에 떨어졌다.
나나시: 제가 먼저 말하지는 않을게요. 그렇지만 한 번 더 생각해주세요. 캐롤 씨… 부탁이에요.
캐롤 브라이트: …가끔 제가 정신조작을 남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요.
하기와라는 이바라와 떠들다가 화들짝 놀라 캐롤 씨에게서 몇 발자국을 멀어졌다.
하기와라 우시오: 뭐? 지이랄. 니들 대체 터치로 뭔 얘기를 했길래 그런 결론이 나와?!
이바라 쿠리스: 오. 옳소! 그러면 안 돼. 캐롤! 둘 중에 누가 부추겼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캐롤 브라이트: 진정하세요. 생각만 한다고요. 여러분들도 그런 생각 해보신 적 없으세요? 교통사고 당하고 싶다던가, 연쇄살인마는 저 사람 안 잡아가고 뭐 하나. 이런 생각들이요.
이바라 쿠리스: 캐캐캐. 캐롤? 그. 조금 극단적인 예시가 아닐까 싶은데…
하기와라 우시오: 그런 생각은 나도 해본 적 있지. 그래서? 생각만 한다. 그리고 또 뭐야? '그렇지만'으로 시작하는 그럴듯한 말이 와야 할 텐데.
캐롤 브라이트: 그렇지만. 제가 그럴 일은 없어요. 단 한 사람에게만 빼고요.
하기와라 우시오: 제발 나만 아니어라.
제츠보: …캐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캐롤 브라이트: 토키와 씨에게죠. 토키와 씨에게 터치를 사용하면 어떨까요? 그가 자고 있는 동안. 샤이닝에 방비를 두지 못하는 동안을 노리는 거죠. 그렇게 토키와 씨가 제멋대로 가져간 샤이닝을 회수하고… 모든 걸 되돌리는 거에요.
다이얼로그 너머에서 인공지능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제츠보: 나나시. 캐롤한테 말 좀 해봐.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계획인지 모두가 알고 있는데 캐롤만 그걸 모르잖아.
캐롤 브라이트: 저만 말이 된다는 걸 아는 거에요. 그래서. 대안이 있나요? 사랑의 열쇠를 열 번 더 쓰면 더 유용한 정보가 나오겠어요?
캐롤 브라이트: 신중하자. 말도 안 된다. 무모하다… 지금 상황이 입맛에 맞으니까 그런 말을 하시는 거겠죠. 토키와 씨는 잡혔고 치나미는 저렇게 되었으니 바꿀 필요가 없는 거잖아요. 아무도 저처럼 절박하지 않다고요.
하기와라는 천천히 팔짱을 꼈다. 이바라는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녀를 설득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나나시: 캐롤 씨. 카이다가 걱정되시겠지만 그런 만큼 더 신중하셔야 해요. 아주 조금이라도 일이 어그러지면 카이다가 깨어나지 못하거나, 더 나쁜 일을 당할 수도 있잖아요. 캐롤 씨가 카이다에게 섣불리 터치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고요.
캐롤 브라이트: 하지만 토키와 씨에게는 섣불리 쓸 수 있어요. 몸에 달린 폭탄을 해체하는 것과 버튼을 누르는 건 서로 다른 일이죠. 단 하나의 암시만 요구하면 되니까요. 나에게 복종해. 내 말을 들어.
하기와라 우시오: 버튼은 너 아니었어? 토키와가 너를 누르기만 하면 샤이닝을 확 흡수하고 완전해지는 거라면서? 그런데 네 쪽에서 누른다니?
캐롤 브라이트: 그렇게 쉽게 조율자가 될 수는 없어요. 토키와 씨는 겨우 오늘 자신이 조율자임을 깨달았어요. 아직 딕테이트의 사용에도 능숙하지 않고요. 오히려 자기 힘에 더 익숙해지기 전에 제가 나서야 해요.
하기와라 우시오: 너는 익숙하게 쓸 줄 알고?
캐롤 브라이트: 써 봐요?
이바라 쿠리스: 읏.
하기와라와 이바라가 동시에 몸을 움찔거렸다.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나나시: 캐롤! 하기와라와 이바라는 방금 딕테이트를 당해 봤어요. 실수로라도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죠!
캐롤은 내 쪽을 보며 흠칫 놀라더니 자기 자신도 당황한 듯. 난색을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캐롤 브라이트: 아. 죄… 죄송해요. 여러분들한테 써 보겠다는 건 전혀 아니었어요. 토키와 씨에게죠. 그건.
이바라는 캐롤 씨를 보며 손을 내저었다.
이바라 쿠리스: 아니아니. 아니야! 하기와라가 너무 밀어붙여서 그랬던 거야! 다들 예민할만 하지… 하하! 되게 어색하네.
인공지능은 불길할 만큼 조용했다. 아니. 오히려 인공지능이 캐롤 씨에게서 불길함을 느꼈겠지. 욱해서 나온 말일지라도 캐롤 씨가 하는 말의 무게는. 다른 사람들과는 하늘과 땅 수준의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조용히 캐롤을 보고 있던 하기와라 또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서. 자신은 있다는 거야?
캐롤 브라이트: 저는 평생 저를 억누르면서 살았어요. 밖으로 보이는 면적을 줄이고, 말조심하려 노력하고, 눈도 게슴츠레 떠왔죠. 그만큼 제 정신조작은 강렬하고 힘조절에 있어서도 능통해요. 그러니 토키와 씨 본인도 무언가를 확신하지 못할 만큼 조율자의 정체성이 옅다면, 저를 결코 이길 수 없어요.
캐롤 브라이트: 애초에 나나시 씨한테서 힘을 빼앗겠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야 했어요. 나나시 씨는 조율자의 파편이 아닌데 어떻게 나나시 씨의 정신조작을 빼앗아요? 저와 만나기 전에는 그런 힘이 없으셨던 나나시 씨에게서?
제츠보: 캐롤. 나나시가 사랑의 열쇠를 써서 기껏 정보를 얻어 왔잖아. 바로 네가 토키와에게 닿는 순간 정신조작을 빼앗기리라는 것. 토키와 본인이 한 말이니까 거짓이 아닐 텐데 그 말도 믿지 않겠다는 거야? 그게 아니면 나나시를 믿지 않는 건가?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말은 당연히 믿어요. 방금 터치도 나눴는 걸요. 나나시 씨가 전해주신 토키와 씨의 말을 믿지 않는 거에요.
이바라 쿠리스: 그게… 다른 거야?
캐롤 브라이트: 거짓이 아니라고 해서 꼭 사실이라는 법은 없어요. 사랑의 열쇠는 그 사람의 솔직한 대답을 듣게 만들 뿐이에요. 토키와 씨가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어요. 그가 토키와 씨 본인이 아닌 조율자의 인격을 가졌으며, 그 샤이닝의 세기가 저를 압도할 정도라면 분명 저에게서 정신조작을 뺴앗을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오히려 제가 토키와 씨를 압도할 수 있어요.
캐롤 브라이트: 사실은 히무로 씨와 토키와 씨가 동시에 잠들어있는 때. 바로 지금을 노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방 안으로 진입할 방법이 없을 뿐더러, 히무로 씨의 증언을 기다리지 않는 건 바보같은 일이기에 그렇게 하지 않았죠.
캐롤 브라이트: 그러나 히무로 씨가 깨어난 뒤에도 치나미를 깨울 방법이 없다면… 여러분들도 이해하게 될 거에요. 제가 나서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걸요. 그 때가 되면 다들 후회할 걸요. 토키와 씨가 자신의 힘에 익숙해지기 전을 노려야 했다면서.
하기와라 우시오: 캐롤.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우리가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캐롤 브라이트: 왜죠?
하기와라 우시오: 우리는. 아니. 우리라고 하지 말자.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는 카이다를 깨우거나 토키와에게서 샤이닝을 회수할 방법이 없더라도. 네가 토키와에게 터치를 쓰는 일은 벌어져선 안 돼.
캐롤 브라이트: 그러니까. 왜인데요?
캐롤 씨의 어조가 조금 예민해졌다.
하기와라 우시오: 너나 카이다 걱정돼서도 맞고. 당장 히무로가 기똥찬 방법 알아낼 수도 있으니까 그거 기다리는 것도 맞아. 그런데 근본적인 이유는 네가 말했던 대로거든.
하기와라의 말을 들으며 나는 캐롤 씨가 무슨 말을 했는지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방금 그녀가 한 말이 내 뇌리를 스쳤다.
그것을 떠올린 뒤에도 나는 불신했다. 에이. 설마. 하기와라가 그 말을 지금 하겠어? 설마. 에이. 설마… 설마아…
하기와라 우시오: 우리는 카이다가 지금 상태 그대로더라도 상관 없어.
나나시: 헉!
이바라 쿠리스: 야앗. 야! 아으!
나는 하기와라의 말을 듣고 놀라 내 입을 틀어막았다. 하기와라는 사실을 말했다. 결코 듣고 싶지 않은 사실을. 이바라도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캐롤 씨의 다음 말을 기다리면서… 동시에 어떤 말을 얹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캐롤 씨는 불같이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하기와라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정적 뒤에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낮아진 목소리와 차분한 언행을 보였지만 어조는 조금의 상냥함도 담지 않고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 …누구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거에요? 지금 저대로 내버려둬도 된다고 말씀하신 건 제 동생이에요.
너에게는 귀여운 여동생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위험한 인물이야. 막말로 우리는 그동안 카이다가 우리를 죽이지 않았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해.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세 명의 시체 발견이 있기 전까지 닥치는 대로 암살할 수 있었다고.
캐롤 브라이트: 그래서 제약을 그렇게 많이 붙였잖아요!
하기와라 우시오: 제츠보가 제약이냐? 돌보미지. 제약은 히무로가 얘기했던 힘줄 끊기 같은 게 제약이야. 심지어 네가 카이다 다치게 만드는 건 절대 안 된다고 해서 결국 못 했잖아. 고작 제츠보 옆에 딱 붙어 있어야 하는 걸 제약이라고 말하는 거면 캐롤. 너 카이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거다.
하기와라 우시오: 당장 토키와가 카이다에게 내린 명령이 제츠보 막아라가 아니라 사람 죽여라였다면 우리 중 몇 명은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았어. 제츠보는 번거로울 테니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이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카이다가 누구한테 피해 안 입히고 무력화된 지금에서야 우리는 안심할 수 있게 됐어.
캐롤 브라이트: 그렇지만 저에게는 다행이 아니라고요! 누구도 치나미에게 저런 일이 벌어진 걸 잘 되었다고 말할 수 없어요!
하기와라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맞아. 너에게는 힘든 일일 테니까 이렇게 가볍게 말해선 안 되지. 그렇지만 카이다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너한테 마냥 찬성할 수도 없어. 너도 알잖아. 네가 카이다를 바라보는 관점과 내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
하기와라 우시오: 그런데 이제 와서 카이다가 저렇게 된 일에 너처럼 슬퍼하라고…? 평소의 너라면 하지 않을 말인데.
캐롤 브라이트: 저는 평소에도 이랬어요. 치나미에게 해가 될 법한 일은 막으려고 애써왔죠. 저는 그대로에요. 당신도 도를 넘은 일에는 화를 내거나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었잖아요. 평소같지 않은 사람은 하기와라 씨 당신이에요.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너는 네 동생을 아끼면서도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았어. 똑똑하니까. 네 여동생이 이런 취급을 받을 줄 알았고. 그래서 내가 카이다한테 불신과 박한 취급을 보내더라도 그 과정조차 카이다의 속죄로 받아들이고자 한 거 아니야?
하기와라 우시오: 왜 그래…? 토키와한테 터치까지 쓰겠다니. 그건 너무 극단적이잖아… 너. 카이다를 위해 모든 걸 버릴 셈이야?
제츠보: 하기와라. 그쯤 해둬.
인공지능의 단호한 목소리에 하기와라는 다이얼로그를 놀랍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진심이냐? 너도 나랑 같은 생각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제츠보: 나를 끌어들이지 마. 캐롤도 이해했을 테니까 그쯤 해 두라고. 더 자극한들 나아지는 일은 없어.
하기와라 우시오: …알았어. 캐롤. 내가 말이 너무 심했다. 음… 헛소리구나 하고 흘려들어. 나는 늘 헛소리만 하잖아. 하하. 억누를 수가 없다니까.
하기와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레 웃는 것으로 방 안에 내려앉은 정적을 덮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제대로 되지는 않았다. 조용해진 공기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바라마저도 늘 하듯이 하기와라의 머리를 때리며 구박하는 대신. 그저 허리춤에 맨 자켓을 초조하게 손으로 구기며 어떠한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나 또한 알고 있었다. 하기와라의 말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나도 카이다가 움직이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던 적이 있는 만큼. 카이다가 얼마나 큰 위험요소가 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단지 입 밖으로 내지 않을 뿐.
그러나 나와 다르게 캐롤 씨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캐롤 브라이트: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제 생각은 똑같아요… 토키와 씨에게서 샤이닝을 다시 가져오는 수밖에 없어요. 히무로 씨가 자고 있는 틈을 노려서라도…
히무로 시라베: 그렇다면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군.
이바라 쿠리스: 악! 깜짝이야!
나 또한 이바라만큼이나 놀랐다. 다이얼로그에서 들려온 목소리. 그것은 히무로의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캐롤 씨의 말을 듣기까지 했다.
그보다 더 나쁜 일이 있다면 그가 어느 시점부터 이 방 안에서의 대화를 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심문은 끝났다. 지금부터 알아낸 정보를 공유하겠다.
캐롤 브라이트: 왜. 왜. 왜. 왜. 왜!
캐롤 브라이트: 왜 안 되는 건데?!
캐롤 브라이트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다이얼로그 너머에서 들리는 바에 따르면 카이다 쿠로하가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무로 시라베: 터치가 이어지지 않나?
캐롤 브라이트: 아니에요! 아니에요. 후… 다시 해 볼게요. 제대로 안 해서 그래요. 집중 안 해서… 그래서 그래요. 제대로 할 거에요. 이제.
다이얼로그 너머에서는 캐롤 브라이트의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낼 생각도 없을 것이다. 괜히 소리를 내어 캐롤 브라이트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 악수임을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 으으으…! 안 돼. 안 돼! 이러면 안 돼…!
캐롤 브라이트마저도 불가능했나? 나는 다이얼로그 너머의 상황을 몰랐기에 정확히 어떤 작용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캐롤 브라이트가 기억이 온전하며 거동의 자유를 가진 카이다 쿠로하를 원했다면, 적어도 카이다 쿠로하가 그러지 못하고 있음은 유추할 수 있었다.
나는 캐롤 브라이트의 무수한 시도 이후 제풀에 지친 뒤, 다이얼로그 너머의 이들에게도 상황을 전파해주기까지 기다렸다.
내 예상보다 조금 더 오래 걸렸다.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는 더 이상 토키와 씨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지 않아요. 제츠보 씨를 놓아 주었어요. 그런데… 깨어나고 있지도 않아요.
히무로 시라베: 죽었나?
캐롤 브라이트: 입조심해요. 안 죽었어요! 절차가 아직 안 끝난채로 정신을 잃어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정말 전부 알려주신 거 맞아요? 이런 얘기는 없었잖아요!
나는 토키와 아유키의 낯빛을 살폈다. 그에게 귀마개를 끼우기는 했지만 혹여 사랑의 열쇠를 통해 얻은 정보를 그가 간파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토키와 아유키: 쿠울……
내 눈에 그는 자는 것처럼 보였지만 조율자가 앞에 있는 이상 방심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결국 나는 그가 캐롤 브라이트와 나의 말을 듣지 못한다는 판단을 내렸고. 캐롤 브라이트의 말에 대답했다.
히무로 시라베: 토키와 아유키는 분명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토키와 아유키가 건 터치는 풀리지 않았나? 축하한다. 캐롤 브라이트. 네가 해냈군. 카이다 쿠로하에게서 풀려난 제츠보 또한 축하한다.
캐롤 브라이트: 축하요?! 하…! 깨어나지를 못하고 있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더 없어요? 숨기는 게 없는 게 맞아요?
히무로 시라베: 희망을 나에게 걸어봤자 소용없다. 캐롤 브라이트. 내가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 텐데.
나나시: 맞아요. 캐롤 씨. 히무로 덕분에 토키와의 터치가 풀린 건 사실이잖아요. 그래도 진전이 있었어요.
캐롤 브라이트: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해가 안 돼요. 왜 안 되는 건데요…? 저는 분명 영안로 안에서 치나미에게 걸린 기억상실의 절차를 풀어 줬어요. 터치를 써서 해제했는데. 왜 이제 안 되는 거냐고요…
제츠보: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 안 나?
캐롤 브라이트: …안 나요. 제가 분명 한 기억은 있지만. 정확히 어떻게 한 건지의 감각을 도무지 모르겠어요. 왜…?
히무로 시라베: 그 능력과 기억이 지금 토키와 아유키에게 있기 때문 아닌가?
캐롤 브라이트가 놀라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캐롤 브라이트: 그… 그러니까 히무로 씨 말은…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 쿠로하를 깨울 수 있을 만한 역량이. 네가 잘라낸 손가락에 있지 않았느냐는 질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카이다 쿠로하를 깨울 수 있는 자는 토키와 아유키뿐이다.
그 뒤로 유의미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름 없는 남자와 이바라 쿠리스가 캐롤 브라이트를 격려했고, 캐롤 브라이트는 카이다 쿠로하에게 계속 터치를 시도했으나 카이다 쿠로하는 깨어나지 않았다. 이윽고 시간이 늦어지자 캐롤 브라이트는 카이다 쿠로하에게 반드시 깨워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해산했다.
히무로 시라베: 너에게 감사한다. 캐롤 브라이트.
마유즈미에게서 떨어진 채 나는 캐롤 브라이트에게 손을 건넸다.
히무로 시라베: 네 터치가 없었다면 마유즈미를 다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하기와라! 제츠보! 캐롤 씨! 나나시! 다들 너무너무 반갑다아…! 뭣보다 히무로! 고마워! 구하러 와 줘서…!
캐롤 브라이트: …마유즈미 씨.
캐롤 브라이트는 느닷없이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왜인지는 모호했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은 동작이었으나 그런 감정을 느낄 만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히무로 시라베: 나에게 감사할 필요 없어. 마유즈미. 해야 하는 일이었을 뿐이야.
캐롤 브라이트: 저에게도 감사하실 필요 없어요. 히무로 씨. 이건 제가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히무로 시라베: 그러나 나는 너에게 감사한다. 마유즈미가 돌아올 계기는 나에게 있어 꼭 필요한 것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요.
히무로 시라베: 네가 본 적이 없을 뿐이지.
캐롤 브라이트: 네. 저한테 있어서는 그런 매몰찬 말이 더 익숙하네요. 그런데. 히무로 씨… 저에게 얼마나 고마우신 거죠?
캐롤 브라이트의 본론이 그것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네가 나에게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 있을만큼.
캐롤 브라이트: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을게요. 저에게 질문의 권리를 주세요.
히무로 시라베: 해라.
캐롤 브라이트는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정신조작 보유자가 거리를 좁히자 그녀가 나를 적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적인 적대감이 치솟았다. 한 걸음만 더 다가온다면 그녀를 제압하게 될 거리에서 캐롤 브라이트는 말했다.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그녀는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 토키와 씨에게 들은 심문 내용들. 저희에게 그대로 말씀해주신 것 맞나요?
히무로 시라베: 그대로 말했다.
캐롤 브라이트: 전혀 거짓말을 하지 않으셨다는 건가요? 정말 치나미가 돌아올 수 없어요?
히무로 시라베: 토키와 아유키 본인이 풀어주지 않는 이상 돌아올 수 없다. 그가 풀어줄 이유가 없기에 돌아올 수도 없지.
캐롤 브라이트: 믿지 않아요. 다른 방법이 있을 거에요. 그렇잖아요? 치나미를 깨울 수 있는 게 토키와 씨 뿐이라니. 말도 안 돼요.
히무로 시라베: 진작 눈치챘어야 했는데.
캐롤 브라이트: 네? 무엇을요?
나는 나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중지가 손등에 닿고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이 모든 것은 꿈이로군.
현실성 재확인. 사랑의 열쇠에 당하지 않기 위한 암시. 무의식적인 실행에는 익숙하지 않았기에 알아채는 것이 늦었다.
나는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웃음을 짓는 마유즈미를 보았다. 그녀는 바로 옆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다. 내가 캐롤 브라이트를 호의적으로 여기게 되는 조건. 마유즈미의 귀환에 큰 도움을 주는 것.
내 심층심리는 이런 꿈을 꿀 정도로 절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절실한 만큼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아차렸어야 했다. 이런 형편 좋은 일은 없다는…
히무로 시라베: 아니다.
히무로 시라베: 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야만 한다.
내가 이 일을 목표로 하고 있는 한 그것은 이질적일 만큼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아니라 가능한 일이어야 했다. 만약 내가 다시금 누군가의 사랑의 열쇠에 당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간파하는 것은 현실성 재확인 때문이어야 했다. 마유즈미가 돌아오는 일을 비현실적으로 여기는 것은 나 자신조차 그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 않다는 뜻. 그것만큼은 안 된다.
캐롤 브라이트: 히… 히무로 씨. 저는…
캐롤 브라이트는 내가 보일 태도에 지레 움츠러들었다. 내가 화를 내리라고 짐작한 모양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네가 원해서 이런 꿈을 보여준 것은 아니겠지. 이 꿈은 내가 만들었다. 마유즈미가 돌아오는 일에 도움을 주는 것이 너를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는 조건이니. 네 탓이 아니다.
캐롤 브라이트: 그래도… 죄송해요. 제가 히무로 씨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니까요…
히무로 시라베: 너는 지극히 이성적인 일을 했다. 나와 너는 같은 목적이 있어 협력할 뿐 결국 적대할 수밖에 없지. 그러니 나는 믿을 수 없을지라도 사랑의 열쇠에 당한 내가 한 말은 믿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마유즈미의 귀환에 도움을 준 은인에게 한 말이니.
히무로 시라베: 네 동생은 돌아올 수 없다. 이것은 사실이다. 받아들여라.
캐롤 브라이트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카이다 쿠로하를 깨울 수 있는 방법을 계속 모색하는 것이 그 근거였다.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가 마유즈미 씨의 정신과 대화를 나누는 건 어떻게 하는 거죠? 그건 저에게도 불가능한 일인데. 어떻게 하시는 건가요? 저도 치나미에게 말을 걸 수 있어요?
히무로 시라베: 나와 마유즈미는 카텟의 형성으로 인해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케프라 불리는 작용. 강력한 카텟의 구성원 사이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그중 나와 마유즈미의 정도가 특출날 뿐이다.
캐롤 브라이트: 그럼 왜 저와 치나미는 그 카텟을 이루지 못하는 건데요?
히무로 시라베: 부족하기 때문이겠지.
캐롤 브라이트: 부족하다고요? 뭐가요?
히무로 시라베: 나에게 화를 내서 달라질 일이 아니다. 너는 장담할 수 있나? 너와 카이다 쿠로하가 같은 카 위에서 걷고 있었다고?
캐롤 브라이트는 자신의 흉곽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캐롤 브라이트: 저희는 자매에요! 이보다 더 운명적인 게 있나요? 진짜 혈연보다도요? 원래부터 저희는 한 길을 걸었어요. 항상 같이 있었고요!
히무로 시라베: 그렇지만 갈라졌다.
캐롤 브라이트: 갈라진 적 없어요. 혈연이라고요. 저희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태생부터 이어진 인연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건 절대 끊어지지 않아요. 아무리 이제 와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고 해도 치나미는 제 가족이에요!
히무로 시라베: 혈연은 유전적 연관성일 뿐이다. 네가 부여하는 만큼의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캐롤 브라이트: 당신이 혈연에 대해 뭘 아는데요? 히무로 씨 당신은…!
캐롤 브라이트가 말을 멈추었다. 머뭇거리거나 다른 표현으로 어떻게 말을 이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것을 보며 나는 그녀가 하려는 말을 유추할 수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네 생각이 맞다. 나는 너보다 혈육이라는 개념에 생소하다. 그러나 이것은 공감 여부가 아닌 사실의 문제다. 나도 감시자가 되기 전에는 지금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을 테고, 가족과 친우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없다.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는 혈연이 끊겼다고 말할 수 있지 않나?
히무로 시라베: 끊기는 것은 혈연만이 아니다. 카도 끊길 수 있다. 나는 조율자를 잡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함께 움직이던 자들을 기억하지만, 그들 모두 이제는 없다. 그들과 나의 카는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혈연과 카가 죽음에 의해 끊어진다면, 서로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도 모른 채로 몰라볼 수 없을 만큼 변화한 자들의 끈도 끊어지지 않겠나?
캐롤 브라이트: 그렇지만 다시 이어질 수 있잖아요! 전혀 모르고 있던 사람들과 카가 이어지는 것처럼! 당신과 마유즈미 씨처럼. 저와 나나시 씨처럼! 이어질 수도 있잖아요? 왜 저와 치나미 사이의 카는 이어지지 않는 건데요!
히무로 시라베: 너 스스로에게 물어라. 이름 없는 남자와 카이다 쿠로하의 차이는 무엇이지?
캐롤 브라이트는 내 질문의 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캐롤 브라이트: 남자와 여자다. 키가 저보다 작고 저보다 크다. 이런 거 말씀하시는 거에요?
히무로 시라베: 카가 이어지는 것과 이어지지 않는 것의 차이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캐롤 브라이트: 네. 바로 제가 그걸 듣고 싶은 거에요. 뭐가 부족하길래 저와 치나미 사이에는 그 케프라는 게 일어나지 않는 거죠?
캐롤 브라이트의 질문은 점점 어리석어졌다. 그녀의 심리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면 나 또한 그녀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게 되었으리라. 그것은 무언가를 숨기기 때문에 만들어진 질문이었다. 그 답을 본인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그 답을 거부하고 있기에 만들어내는 질문. 그것은 곧 다른 요인을 만들어내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아니다. 그러니 다른 무언가 것이다. 혹시 이것일지도'.
그녀가 마주하고 있지 않은 답은 다음과 같았다.
히무로 시라베: 네가 카이다 쿠로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얼어붙은 캐롤 브라이트의 반응을 보며 표현을 바꾸었다.
히무로 시라베: 사랑은 하지만, 마음이 통할 정도로 사랑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캐롤 브라이트: 아니에요!
캐롤 브라이트가 소리쳤다.
캐롤 브라이트: 아니. 아니에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건데요?!
히무로 시라베: 실제로 발생한 일을 근거로 두고 있다. 정말 너와 카이다 쿠로하 사이에 깊은 정신적 유대가 있었다면 너는 여동생을 깨울 수 있었을 테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거짓말. 거짓말! 애초에 카 같은 말을 믿는 게 아니었어요! 다 꾸며낸 거죠? 마유즈미 씨와 소통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있는 거죠! 애초에 처음부터 이상했어요.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랑 마유즈미 씨가 그렇게 깊은 사랑을 한다는 거에요!
캐롤 브라이트는 내가 마유즈미의 정신과 맞닿기 위해 틈을 열어 준 장본인이었다. 이제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졌던 일들도 불신하는가.
히무로 시라베: 의심하고 싶다면 의심해도 좋지만, 거짓 질문은 그만 만들어라. 시간이 아깝다.
캐롤 브라이트: 마…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제가 치나미를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자매라고요! 어렸을 때 그렇게 친했는데! 다시 만나는 것만 기대하면서 살아 왔는데! 당신이 저희에 대해 뭘 알아요! 뭘 아는데요. 대체?!
캐롤 브라이트는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의 말에 설득되었다. 비난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자각이 그녀를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스스로 무너지게 될 처지.
그 기우뚱거림을 일부러 밀어 넘어뜨리는 것이 취조자의 소명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너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캐롤 브라이트: 무슨 사실이요? 마치 제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듯이…!
히무로 시라베: 너는 카이다 쿠로하를 네가 그래야 한다고 느끼는 만큼은 사랑하지 않는다.
캐롤 브라이트: 아! 듣기 싫어요! 헛소리야! 헛소리…! 아무것도 모르면서 제멋대로 말하기는…!
캐롤 브라이트는 자신의 귀를 손으로 가렸다. 그러나 아무리 세게 귀를 틀어막을지라도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오히려 너는 카이다 쿠로하보다도 이름 없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
캐롤 브라이트: 아니라고요!
히무로 시라베: 뭐가 아니라는 거지? 서로 알고 지낸 시간보다 헤어진 시간이 더 길어진 뒤. 뒤늦게 만난 사람은 전혀 예전과 닮지 않게 변했다. 잔혹하고 뻔뻔스러운 모습으로.
히무로 시라베: 그런 사람을 네가 알고 있던 사람과 온전히 동일시할 수 없었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뿐. 그 무엇도 기이하지 않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지.
캐롤 브라이트: 아니에요. 그래선 안 돼요!
캐롤 브라이트는 무심코 한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말에 모든 골자가 담겨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그 말대로다. 너는 그렇게 느끼고 있다. 네가 카이다 쿠로하를 더 아끼려 하는 것은, 그래야만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결코 괴리감이나 거리감. 그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감각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은 곧 의무감이다. 너는 그것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왜냐하면 너에게도 카이다 쿠로하의 품행은 도무지 눈 뜨고 봐 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캐롤 브라이트: 닥쳐요! 그 괘씸한 입을 꼬매버리기 전에…! 참아줬더니 어디서 밑도 끝도 없이 기어올라!
히무로 시라베: 너는 그녀와 다시 만나기를 여태껏 기다려왔다고 했나?
캐롤 브라이트: 그만 하라고 했잖아요!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요!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감히 당신이…!
히무로 시라베: 기대한 만큼 네 실망도 컸을 것이다.
캐롤 브라이트는 소리를 내지르려다가 입을 멍하니 벌린 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붙잡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캐롤 브라이트: 집어치워! 이딴 꿈은 싫어요. 깨어날 거야! 다 잊어버려요… 잊어버리라고요!
히무로 시라베: 나는 잊겠지.
그것은 불편한 일이다.
히무로 시라베: 하지만 너는 기억할 것이다.
이 또한. 불편한 일이다.
히무로 시라베: 기억하고 싶지 않기에. 그것이 바로 금기의 작동 방식이다.
캐롤 브라이트: 아니야… 아니야… 내가 그럴 리 없어… 나는 치나미를… 치나미를 사랑해야 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야 한다고요!
주변을 보았을 때. 마유즈미와 꿈의 주변인물은 그 어디에도 없게 되었다.
꿈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히무로 시라베: 너는 이 사안을 확대해석하고 있다. 네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정신이 이어지지 않을 뿐이지. 그런 경지는 쉽게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캐롤 브라이트: 충분하지 않아요! 내가 치나미를 구해줘야 했는데… 깨워줄 수 있어야 했다고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었는데. 내가! 내가… 내가 못 해서. 못나서… 나 때문에…
캐롤 브라이트는 손을 떨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감정선은 내가 겉잡을 수 없게 되었다.
캐롤 브라이트: 아아. 미안해… 언니가 미안해… 미안해. 미안… 치나미. 용서해 줘… 용서해 줘… 제발… 다 언니 잘못이야. 언니가 다 나빴어… 다 나 때문이야. 다…
캐롤 브라이트: 흐윽… 흐윽…! 으아아아… 흐으으윽…!
나는 캐롤 브라이트가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감추고 있던 사실을 직시한 이상 더 거들 일이 없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여동생과 가진 유대가 크지 않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이 울음이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스스로가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을지도 몰랐다.
비단 캐롤 브라이트만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카이다 쿠로하 또한 캐롤 브라이트를 온전히 자신의 자매로 받아들이지 못했으니 그녀는 꼭 스스로만을 탓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카이다 쿠로하도 너를 자매로 여기지 않았다는 말은 캐롤 브라이트의 정서를 악화시킬 수 있기에. 나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캐롤 브라이트: 흐어어엉… 으으…! 흑… 흐흑…
캐롤 브라이트는 모든 것이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믿은 것이다. 많은 것이 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밖에 없던 그때와 같으리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서로를 의지하며 버텼다고 하는 그 어린아이들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남은 것은 그 아이들과 같은 세포라고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두 여인. 그때로는 돌아갈 수 없다. 캐롤 브라이트는 카이다 쿠로하를 동생으로 대하며 그때의 비참함을 보상해주겠다고, 동시에 자신도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고 여겼지만 그럴 수 없었다.
캐롤 브라이트는 자신의 근간에 있다고 여겼던 것을 처음부터 잃어버린 채였음을 알게 되었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눈물을 흘렸다.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 눈가가 붉게 변한 캐롤 브라이트는 울음을 그치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그 조율자 때문에… 조율자 때문이에요. 죄다… 맞아요. 제 탓일 수가 없어요. 이건 제 탓일 수가 없는 거잖아요. 다 조율자가 잘못한 거라고요… 나는 잘못 없어…
히무로 시라베: 사실이다.
캐롤 브라이트: 결국 조율자라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해서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이 시점 이후부터 나는 그녀의 어투가 극단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 어떠한 말도 거들지 않기로 했다. 캐롤 브라이트는 스스로 문답을 하며 음산하고 어두운 독백을 늘어놓았다.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말이 맞나 봐요. 저는 치나미를 부족하게 사랑해요.
캐롤 브라이트: 저는 여동생을 기껏 만났으면서 마음이 통하지는 않는 사람인 거에요. 나나시 씨가 나한테 수갑을 채웠을 때는 결국 용서해줬으면서. 정신 나간 일이죠.
캐롤 브라이트: 제가 정말 좋은 언니였다면 달랐겠죠? 치나미를 깨울 수 있었을 거에요. 그런데 결국 아닌가 봐요. 좋은 사람부터가 아니었으니 좋은 언니가 될 수 있을리 없죠. 네.
캐롤 브라이트: 아아. 면목이 없네요. 부족하게 사랑한 주제에 동생이라며 감싸들고… 아니야. 부족하게 사랑했기 때문에 오히려 감쌌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그런 식으로 저 자신까지 속여온 거에요. 나는 치나미를 정말 가족으로 여기고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면서…
캐롤 브라이트: 위선자!
캐롤 브라이트는 스스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캐롤 브라이트: 지금까지 화가 나서 화를 낸 게 아니었어요. 화를 내려고 화를 낸 거였어요. 치나미가 안 좋은 일을 당하면 화를 내야 한다고 생각해서. 화를 낸 거였어요. 마음이 통하지도 않으면서 괜히 나서고… 그런 식으로 여러분 모두를 속인 거에요. 그렇죠? 다 그렇게 생각하죠?
캐롤 브라이트: 왜… 왜 제가 치나미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요? 대체 뭐가 문제길래. 기껏 만났는데 구해주지는 못할 망정 손가락을 잘라서 조율자를 불러오고. 저런 수모를 겪게 만들고. 이제는 깨우지도 못해… 무슨 사람이 이런지 모르겠어요. 아. 싫다. 쓸모 없기는. 쓸모 없기는…
캐롤 브라이트: …다 제 잘못인 게 맞는 것 같죠. 그렇죠? 여기저기 탓하고 싶어서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다녔는데. 이제 겨우 알 것 같아요. 다 제 잘못이네요.
Mea Culpa.
캐롤 브라이트: 손가락만 안 잘랐어도… 아니. 그게 아니죠. 치나미에게 온전히 마음을 열어 주었다면 치나미를 깨울 수 있었을 텐데. 결국 여기까지 와서 제 인격 때문에 다 망했어요. 이제 틀렸어요. 자랑스러운 언니가 되고 싶었는데 이제 치나미를 무슨 수로 보면 될지… 아. 못 보겠네요. 이대로라면 치나미는 깨어나지 못할 테니까요. 제가 원한다고 해서 카가 그렇게 쉽게 이어지는 것도 아닐 테고…
캐롤 브라이트: 아아. 그래도 나를 언니라고 불러주는 그 모습. 귀여웠는데. 괜히 털을 부풀리는 고양이 같아서 오히려 더 상냥하게 대해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점점 억센 털을 눕히고 나를 좋아해 준다면 정말 기뻤을 텐데…
캐롤 브라이트: 이런 말. 나나시 씨 앞에서는 못 하겠거든요… 그 사람이라면 이런 어둠을 나눠 가지려고 할 테니까. 그런 짐을 넘겨주고 싶지는 않아요. 만에 하나 성가시다고 여겨지는 것도 무섭고요. 어리광을 부리는 게 아니라 내가 다 받아줘야 하는 건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외출금지 따위 내리는 게 아니였어. 맞아. 애초에 외출금지를 내려서 토키와 씨에게 노려진 거야…
캐롤 브라이트: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겠죠. 이미 치나미는 돌아올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러나 어떻게든 책임은 져야 하는 거죠? 저만이 할 수 있는 거니까. 치나미를 구하고 다른 모든 분들을 지키는 방법은 그것 뿐인 거에요.
캐롤 브라이트: 그러니… 치나미를 깨울 방도는 이제 하나밖에 없어요.
캐롤 브라이트는 하나의 결론에 다다르며 고개를 들었고, 눈을 부릅뜬 채 두 손을 쥐고서 읊조렸다.
캐롤 브라이트: 토키와 씨에게서 샤이닝을 빼앗는 것.
나는 캐롤 브라이트의 눈빛에서 불길한 갈망과 절실함을 보았다.
캐롤 브라이트: 제가 해내야만 해요.
이대로라면 좋지 않다. 캐롤 브라이트는 위험한 결론을 내렸다. 분명히 경솔한 판단으로 이어지게 될 결론. 허용해서는 안 되는 참사로 이어질 목표였다. 뒤늦게 그녀의 독백에 개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히무로 시라베: 그것은 네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캐롤 브라이트. 조율자는…
나는 눈을 뜨고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동시에 불쾌감을 느꼈다. 전에 느껴본 적이 있는 감각이었다.
당했다. 어떠한 꿈을 꾸었으나 기억이 나지 않는 그때의 그 감각과 똑같았다. 꿈의 내용은 조금도 생각해낼 수 없으나 분명히 어떠한 일을 겪었다는 직감. 그것은 사랑의 열쇠에 당했다는 표시였다.
나는 혀를 찼다. 그 짧은 틈 사이에 당하다니.
총합 네 알의 자낙스를 투여한 끝은 억누를 수 없는 찰나의 잠으로 이어졌던 모양이었다.
나나시: 우리를 믿어 줘서 고마워. 히무로. 너 덕분에 토키와에게서 캐롤 씨의 샤이닝을 회수할 수 있었어. 휴… 겨우 탑이 안전해지겠네.
히무로 시라베: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나에게 전해준 메모 중 거짓말이 있었나?
사랑의 열쇠의 사용방법이 알려졌으니 누군가가 나에게 사랑의 열쇠를 쓸 것임이 뻔한 상황이었다. 잠에 자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지만, 이름 없는 남자의 증언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방도가 없었다. 자낙스를 삼킬 수밖에.
나는 이름 없는 남자에게 사랑의 열쇠를 쓴 이후에 자낙스의 잔류 작용 때문에 얕은 잠에 들었고. 누군가는 그 틈을 노려 나에게 사랑의 열쇠를 사용했다.
그자는 운이 좋았던 것인가? 분명 그렇다. 하지만 근본적인 요인은 거듭된 사랑의 열쇠 사용 시도에 있었으리라. 자명종을 여러 개 맞춰 두고서 사랑의 열쇠가 쓰이지 않으면 잠에서 깨어나고 다시 잠에 들기를 반복했겠지.
나는 첫 번째 시도로 이름 없는 남자에게 열쇠를 쓸 수 있었지만 이후 거듭된 사용이 필요하다면 그 방법 또한 도입할 여지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찰나. 누군가가 내 문을 세게 두드렸다.
캐롤은 꿈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익숙한 천장이 아닌 다른 곳에 캐롤은 있었다.
누워있지 않았다.
서 있었다.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에는 반쯤 풀려있던 다리에 통제권이 돌아오며 그녀의 몸이 앞으로 홱 쏠리기도 했다. 덕분에 단단하고 차가운 철문에 머리를 박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얼얼한 통증이 캐롤의 머리에 남았다.
캐롤 브라이트: 아얏!
히무로 시라베: 누구냐.
캐롤 브라이트: 히. 히무로 씨…?
캐롤은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안에서 히무로의 목소리가 들렸고, 방문 또한 적색. R이라는 글자로 보아 숙소였다. 어느 면모로 보아도 히무로의 숙소가 맞았다.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한 채로 캐롤은 생각했다.
내가 왜 잠에 든 채로 히무로 씨의 문 앞에 선 거지?
마치 누군가가 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카나리 케이토: …너 지금 뭐하냐?
근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캐롤은 깜짝 놀라 제자리에서 뛰어오를 뻔했다. 고개를 홱 돌렸을 때 그 자리에는 곤혹스러움을 느끼고 있는 카나리가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 카. 카나리 씨?
히무로 시라베: 캐롤 브라이트인가. 용무를 말해라.
캐롤 브라이트: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카나리 씨는… 왜 오신 건가요?
카나리 케이토: 나야 우연히 봤다.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왜 새벽에 그런 식으로 걸어다녀? 나는 네가 어딘가 잘못된 줄만 알았어. 어쩐지 불러도 대답을 안 하더라니…
카나리 케이토: …설마. 너 잠이라도 잔 거냐? 자면서 걸어다녔다고? 어떻게? 애초에. 왜?
캐롤 브라이트: 저도… 모르겠어요. 자면서 걸어다닌 적은 처음인데… 몽유병 환자도 아니고. 저한테는 이런 잠버릇도 없어요.
캐롤은 무언가에 홀린 듯 오싹함과 함께 팔에 돋는 소름을 느꼈다.
캐롤 브라이트: 제가 대체 왜 이랬을까요…? 마치 이 안에 있는 토키와 씨를 향해 움직이는 것처럼…
카나리 케이토: …누구?
캐롤 브라이트: 토키와 씨요. 히무로 씨가 심문하고 계시니까 이 안에 있죠.
캐롤은 점점 커지는 카나리의 눈을 본 뒤 자신이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카나리는 사랑의 열쇠에 대해 몰랐다. 토키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제츠보는 카나리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기에 토키와의 현주소나 그가 이미 구류되었다는 사실을 전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캐롤이 그것을 말해버렸다. 잠결에.
캐롤 브라이트: …카나리 씨. 낮에 제가 한 말 기억나세요? 제가 의미 없다고 했던 것 있잖아요.
카나리 케이토: 응? 어. 그랬지.
캐롤 브라이트: 그거 거짓말이었어요.
캐롤은 생각했다. 이것은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맞아. 그렇게 캐롤 씨와 대화를 나눈 뒤에 다음날부터…
일이 본격적으로 틀어져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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