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4

더 단크 타워 챕터 4 - 11

도타싫어! 2024. 12. 27. 02:47

 

무로 시라베: 이제 나와도 좋다. 캐롤 브라이트. 상황이 해제되었다.

 

그 목소리는 완벽하게 히무로 본인처럼 들렸다.

 

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괜찮으세요?! 터치를 당하셨을 텐데

 

무로 시라베: 나는 터치에 저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종당하지 않았다.

 

롤 브라이트: 정말 다행이네요…! 히무로 씨가 조종당하게 될까봐 조마조마했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바리케이드를 치워야 해서

 

나시: 캐롤 씨. 잠시만요.

 

나는 내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쉿 하는 시늉을 했다. 캐롤 씨는 의문을 느끼면서도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나시: 다행이다. 히무로. 그렇지만 꼭 지금 나갈 필요는 없는 거지?

 

무로 시라베: 나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문은 열어 주었으면 좋겠군.

 

나시: 문을? 문을 왜?

 

무로 시라베: 왜냐하면 나는 허억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다.

 

히무로는 한 마디 말 사이에 곧 죽을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캐롤 씨 또한 당연히 책상과 의자를 치워 버리려던 손을 멈추고서, 문 밖에 있는 히무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롤 브라이트: 부상이라뇨?!

 

나시: …아까까지는 그런 말 없었잖아.

 

무로 시라베: 너희는 터치에 당했는지의 여부를 물었지 으윽 외상의 여부를 묻지 않았다. 터치는 당하지 않았지만 외상은 입었다 토키와 아유키는 카이다 쿠로하에게서 받은 칼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나를 찔렀고, 따라서 나는 응급처치를 받지 못할 경우. 큭 과다출혈 증세를 보일 수 있다.

 

아무래도 그것은 좀처럼 사실로 들리지 않았다. 정말 그랬다면 히무로는 미사여구를 붙이지 않고 본론만을 말하거나, 스스로 양호실에 가서 응급처치를 했을 터였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필 이미 바리케이드를 완성해 둔, 정신조작을 가진 두 사람에게서? 아까까지 소리치고 있던 하기와라와 이바라는 어디에 간 걸까?

 

나와 캐롤 씨는 분명 히무로의 말을 사실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히무로가 그런 불필요한 거짓말을 하는 건 그가 부상을 당했으리라는 희박한 확률보다도 더 가능성이 낮았다.

 

… 히무로가 우리에게 올 리가 없다.

 

히무로를 남에게 기댈 줄 모르는 냉정한 사람 취급하는 것은 편견이었지만, 그 편견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다친 그가 우리를 찾아올리는 없었다. 우리는 잠재적인 정신조작자들. 조율자 본인인 토키와 다음으로 탑을 지배할 가능성이 높은 자들이었다.

 

히무로가 그런 우리에게 마음을 열 리가 없었다.

 

무로 시라베: 그러니 문을 열어라.

 

히무로라면 우리에게 그의 말이 얼마나 이상하게 들리는지 알았을 것이다. 히무로가 우리를 신뢰하지 않는 만큼 우리도 히무로를 신뢰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그라면

 

히무로의 말을 듣는 와중 나는 방금 히무로가 외쳤던 말을 문득 떠올렸다.

 

무로 시라베: 가라! 나에게서 거리를 벌려라. 내가 너희들을 찾아간다면 결코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지금부터 나를 의심해라. 그것은 나의 모습을 한 다른 사람이다!

 

나시: …아까 네가 우리를 찾아온다면 그건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말한 거. 무슨 뜻이야?

 

무로 시라베: 쓸데없는 소리를 해 놨네.

 

왜인지 히무로는 평소의 그답지 않은, 그저 번거롭다는 듯한 어투로 투정을 했다.

 

그리고 곧 문고리의 열쇠구멍 안을 무언가가 철컥이며 후비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단크 타워

챕터 4: < 황금 원숭이의 손길 >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나는 반사적으로 쌓아둔 의자와 탁자 사이를 비집고 한 손으로 문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것을 잡은 직후에야 떠올라야 할 의문들이 하나 둘 생각났다. 아까까지만 해도 히무로는 문고리를 딸 줄 몰랐는데 어느새에 그럴 줄 알게 된 걸까. 그것보다 왜 문을 열려 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이다. 히무로가 했던 말에는 어떠한 수수께끼도 없었다. 같은 사람처럼 보이는 다른 사람. 우리의 편인 히무로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서 방심한 이들을 노리는 누군가였다. 토키와가 기어이 히무로를 조종하고 있다는 게 가장 유력했다. 설마 목소리를 저렇게 똑같이 따라할리는 없으니까.

 

몇 초도 안되어 문고리가 덜컥이며 열리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문이 열리지 않게끔 손잡이를 잡고 최대한 당겼으나, 나는 가구의 틈을 비집고서 겨우 한 손으로 문고리를 잡은 데에 반해 문 밖의 누군가는 두 손을 전부 써 가며 세게 문을 당기고 있었다. 그 문 밖의 누군가가 히무로 본인이 맞는 듯이 그 가공할 힘에 팔이 빠질 듯 아파왔다.

 

롤 브라이트: 히 히무로 씨?!

 

이렇게 쉽게 열린다니! 서서히 문고리가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팔이 점점 더 피로해졌다. 어깨가 탈구될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나는 문고리를 잡아당긴다기보다는 팔의 관절과 섬유로 문고리에 겨우 매달려 있었다.

 

나시: 으윽…! 머… 멈춰…! 히무로! 왜 이러는 거야!

 

문고리가 멀어짐에 따라 나는 한쪽 볼을 바리케이드에 짓눌려가며 계속 문을 닫아 두려고 애썼으나, 나의 시도가 무색하게 곧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 사이의 틈으로 보아 문을 연 사람은 분명히. 히무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를 비집고서 그의 손이 나를 향해 뻗어졌다.

 

무로 시라베: 잡았다!

 

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캐롤 씨가 내 몸을 등 뒤에서 붙잡고서 세게 당겼다. 그 힘을 받고서 나는 가까스로 바리케이드 틈새에서 나의 팔을 빼냈다. 나에게 접근해 팔을 붙잡으려는 히무로의 손이, 나의 손등을 할퀴고 지나갔다. 간발의 차였다.

 

롤 브라이트: 괜찮으세요? 안 다치셨죠?

 

나시: 네. 고마워요 일단 물러서요. 설마 정말로

 

정말로 히무로였다. 마침내 켜켜이 쌓인 탁자와 의자 너머의 틈새로 보인 그의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히무로였다. 붉은 머리카락과 검은 옷. 봐왔던 만큼의 신장이었고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분명히… 히무로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무로 시라베: 아하하하! 잘도 준비해 놨네. 짜증나게! 이거 당장 무너뜨려! 다쳤다니까! 

 

바리케이드의 틈새에 얼굴을 비집어놓고 나와 캐롤 씨를 노려보는 그 눈동자와 마주하면서. 나는 나의 눈을 의심했다.

 

아주 잠깐의 시간동안 그의 눈은 녹색이었다.

 

나시: 너. 눈이…!

 

질투심의 괴물이 가진 녹색의 눈. 비소와 압생트의 색깔을 가진 광기의 눈… 그것을 가진 히무로는 한쪽 팔을 바리케이드 사이에 비집어넣고서 몸을 몇 번 신경질적으로 부딪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겹겹이 쌓아놓은 바리케이드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책상을 하나하나 해체했다면 이야기가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녹색 눈의 히무로는 왜인지 조바심이 나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무로 시라베: …이거 정말 체면 잔뜩 구겼다. 두 번이나 튀어나왔는데 누구 하나 다치게도 못 하고 돌아가야 한다니… 아. 부끄러워. 너무너무 부끄러워. 아무나 빨리 나 좀 죽여 줘!

 

나시: 어떻게 된 거야? 정말 히무로가 아니잖아… 히무로가 아니라 너는

 

탑에 이런 식으로 말하고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는데… 물론 그 사람일리가 없어 꼭 녹색 눈을 가진 모든 사람이 걔여야만 하지는 않아… 애초에 그건 말이 안 되기도 하잖아

 

진작 죽었다고 들었으니까. 학급재판에서 처형당해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죽었다고 들었으니까

 

무로 시라베: 너희들을 노려야지만 사고가 크게 터지는 거였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기껏 친구가 된 놈들 사이나 망쳐둘 걸… 아! 아쉬워! 아쉬워! 5분만 더 줘!

 

롤 브라이트: 당신… 히무로 씨가 아니군요…?

 

그리고 종이 뒤집듯이 그의 태도가 바뀌었다.

 

무로 시라베: 아니.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나다. 이제 정신을 차렸으니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려라.

 

롤 브라이트: 눈치챘으니까 웃기는 연기 그만두세요. 당신은… 히무로 씨가 아니에요. 그렇게 경박하고 악의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한 명밖에 모르는데… 당신이 왜 그 안에 있는 건데요?

 

무로 시라베: 같이 자살하려고.

 

롤 브라이트:…? 누구와 같이요?

 

무로 시라베: 그거야 당연히

 

그 뒤를 잇는 말은 몇 초간 들려오지 않았다. 나와 캐롤 씨는 바리케이드의 지근거리에 선 채로 그가 그것을 뒤흔들 경우에 저지할 심산을 했다. 이윽고 그가 몸을 돌리고 바리케이드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을 때는. 그가 거리를 벌린 뒤 달려오면서 몸으로 바리케이드를 뚫고 올 것만 같아 잔뜩 긴장하기도 했다. 나는 바리케이드에 찰싹 달라붙어 그런 히무로의 시도를 저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히무로는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대신 문을 닫았다.

 

무로 시라베: 밖으로 나오지 마라. 나에게 접근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나는 지금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내가 토키와 아유키를 포박할 테니 그 뒤 세부 사항은 이후에 전화로 전달하겠다.

 

히무로는 그렇게 말했다. 직전의 그와 같은 어투. 하지만 나와 캐롤 씨는 히무로 본인이 돌아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토키와 아유키의 동맥에 손을 댔다. 숨을 쉬고 있으며 여전히 뛰고 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이 내 몸으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기절한 토키와 아유키는 곧 저항할 수 없는 몸. 교살줄로 마저 목을 조르면 쉽게 죽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학급재판에 의한 처형이라는 형태로 동반자살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외부 침입자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을 노렸다.

 

어쩌면 그것은 후루미나미 나몬이 간과했다기보다 그녀가 의도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토키와 아유키를 죽일 경우 탑은 큰 위험에서풀려나니, 아무리 손쉬운 살해 대상이라고 해도 자신이 탑의 평화에 일조할 수는 없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무로 시라베: 그녀나 할 법한 생각이군.

 

내가 그토록 후루미나미 나몬의 심리에 가깝게 접근했다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정신이 무의식적으로 후루미나미 나몬의 것에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했다. 간접적인 지배를 받는 것이다.

 

앞으로는 터치를 막아야만 한다. 나는 토키와 아유키의 피부에 닿지 않게끔 그의 두 발을 잡고 그를 질질 끌었다. 마음같아서는 그를 내 전용실 안의 유리 격리실 안에 가두고 싶었다. 감시자를 가둘 설비에 조율자를 가두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로의 구성원을 가두고자 했던 설비이며 수면 가스 투여나 전기충격 등 통제에 있어 확실한 용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용실에서는 누구도 잠에 들 수 없었다.

 

무로 시라베: 모노로그. 실신 또한 잠으로 취급하나?

 

모노로그: 이 경우에는 그렇다.

 

무로 시라베: 규칙 위반을 통한 죽음을 유도했을 경우. 유도한 자는 살인자가 되나?

 

모노로그: 아직 그런 행위를 시도한 자가 없기에 답을 내릴 수 없다. 상황에 맞게 판결할 것이다.

 

무로 시라베: 내가 당장 실신한 채의 토키와 아유키를 전용실로 끌어들인다면 네 판단이 나의 생사를 결정하겠군.

 

그렇다면 그런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살인 게임의 흑막. 모노로그에 대해 내가 아는 바는 그가 이 탑의 모든 이들을 증오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고착화되는 탑의 상황. 정신조작자와 카텟이라는 힘의 균형이 크게 기울 수 있는 계기를 모노로그가 놓칠리 없었다.

 

본래도 죽일 생각은 없었으나, 어쩔 수 없이 조율자를 살리게 되었다.

 

나는 나의 전용실에서 케이블타이를 꺼냈고, 그것을 써서 토키와 아유키의 손목과 발목을 서로 묶어두었다. 혹여 그가 깨어났을 때 도주를 시도하거나 터치를 나에게 사용하는 등의 변수가 없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터치라는 이름의 금색 이빨을 드러낸 이상 혀를 자르고 눈을 뽑아야 하겠으나, 그 일은 미루어야만 했다. 달리 처리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츠보: 히무로! 괜찮아?! 어떻게 됐어!

 

8층에서 제츠보가 소리를 치는 것이 들렸다. 나는 제츠보가 들을 수 있게끔 윗층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무로 시라베: 토키와 아유키는 포박했다! 무사한가!

 

츠보: 나는 괜찮아! 서로 붙잡아두고 있어서 그렇지!

 

무로 시라베: 알겠다. 곧 지원을 보내겠다!

 

그리고 나는 하기와라 우시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즉시 통화가 연결되었다.

 

기와라 우시오: 야. 너냐?

 

무로 시라베: 만약 인격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은 거라면 나는 현재 나다. 다른 인격은 세 번째 학급재판 이후에 생겨났기 때문에 세 번째 학급재판 이전의 일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러니 이후에도 그와 같은 질문으로 나와 다른 인격을 구분해라.

 

기와라 우시오: …잠깐. 이것도 구라일 수 있잖아. 그 이전의 일도 알고 있으면서 밑밥 까는 거 아니야?

 

무로 시라베: 지금은 장난할 시간이 아니다. 네 백치스러움을 거듭 증명하지 말고 할 일을 해라.

 

바라 쿠리스: 배. 백치?! 말이 좀 심하네! 하기와라. 이거 히무로가 아닌가봐!

 

기와라 우시오: 오히려 그래서 내 귀에는 진짜처럼 들리는데…? 야. 그럼 너 내가 블레인이랑 맞짱깔 때 했던 농담들 읊어 봐. 들어나 보자.

 

나는 번거롭다는 생각과 함께 그의 농담들을 떠올렸다.

 

무로 시라베: 문이 문이 아닐 때는 문이 무늴 때다. 애인이 가야 하는데 보내기 싫을 때는 바위가 가위를 내면 된다. 권투선수가 많은 나라는 칠레다. 아이작 뉴턴이 사과나무 밑에서 만유인력을 발견한 것은 그가 사과나무 아래에서 자신의 딸을 쳤기 때문이다.

 

이바라 쿠리스가 하기와라 우시오의 옆에서 커다란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다.

 

바라 쿠리스: 에에엑?! 너희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히무로마저 저런 말을 한단 말이야?! 진짜 말도 안 돼! 무슨 말을 하고다닌 거야. 너!

 

기와라 우시오: 아니. 그! 그게 아니라… 블레인 잡느라 그랬어!

 

무로 시라베: 마유즈미의 앞에서도 한 이야기다. 무엇이 잘못되었지?

 

바라 쿠리스: 뭐어어어어?! 마유즈미 앞에서 이런 소리를 해? 그럼 더 잘못됐지! 뭐하는 짓이야아!

 

기와라 우시오: 블레인 잡느라고 그랬다니까! 저놈 봐봐! 기계처럼 이해를 못 하잖아! 이 회심의 농담 덕분에 다 산 거야!

 

무로 시라베: 그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8층에 있는 카이다 쿠로하의 제압이 바로 그것이다. 제츠보가 묶어두고 있지만 완전하게 무력화하지는 못했으니. 너희는 교살줄을 가지고 8층에 있는 카이다 쿠로하를 질식시켜라. 교살줄은 3층의 계단에 두겠다. 네 금속 배트로 신체 일부분을 골절시키는 것 또한 유효하겠지.

 

기와라 우시오: 뭐?! 야 씨. 진짜야?! 걔 멀쩡해서 다행이네! 그보다 존나 쫄려서 못 할 것 같은데!

 

무로 시라베: 마음같아서는 내가 하고 싶지만 나는 토키와 아유키를 감시해야 한다. 포박해 두었지만 기어서라도 어딘가 도망칠 확률이 있고, 너희들은 정신조작을 당할 위험이 있으니 토키와 아유키를 제대로 감시할 수 없다. 재갈을 채워도 한 번 틀어지면 너희가 그의 꼭두각시 꼴이 될 테니까.

 

바라 쿠리스: 제츠보도 괜찮은 거 맞지? 그치?

 

무로 시라베: 서로의 몸을 구속해서 서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 모양이다. 그러나 부상은 입지 않았고 기능에도 문제가 없다.

 

바라 쿠리스: 그럼 빨리 가서 구해줘야 해! 가자. 하기와라! 우리도 할 때는 해야 하잖아!

 

기와라 우시오: 서로의 몸을 구속했다는 게 정확히 뭐야? 서로 주짓수라도 하고 있는 건가?

 

무로 시라베: 모른다. 교살줄은 3층에 두었다. 무운을 빌지.

 

기와라 우시오: 어. 그래! 너도 조심해라!

 

 

 

 

 

기와라 우시오: 끼야하하하하학! 이게 뭐야?!

 

츠보: 웃지 마!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고!

 

바라 쿠리스: 괘. 괜찮아. 제츠보?! 많이 곤란한 것 같은데?!

 

찰칵!

 

츠보: 야! 뭘 찍고 있어?! 당장 도우러 오지 못해!

 

기와라 우시오: 어. 미안.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하하하하하! 레슬링하고 난리 났다! 어어어? 야! 일어날 수 있었으면서 왜 누워 있었어! 어어! 으와아아아악! 존나 무섭다!

 

바라 쿠리스: 가. 가만히 있어. 제츠보! 카이다 목 졸라야 돼! 이거! 이거 받고 가!

 

츠보: 고마워. 그렇지만 이걸로 저놈 목 먼저 비틀어버려야겠어!

 

기와라 우시오: 웃긴 걸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이게 무슨 이동 방식이야. 으와아아하하하학! 존나 기괴해! 너무 기괴해! 다리를 몇 개 안 쓰는 팔족보행이야!

 

바라 쿠리스: 둘다 가만히 있으라니까! 어디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카나리 케이토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나의 숙소에 모였다. 먼저 화두를 연 것은 하기와라 우시오였다.

 

기와라 우시오: 다 모였으니까 이제 얘기할 때가 된 것 같다. 아까 대체 뭐였어?

 

하기와라 우시오의 물음에 나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무로 시라베: 내가 걸린 정신분열증이다.

 

나시: 아니. 정신분열증에 걸린 사람을 내가 본 적은 없지만 아까 건 아무리 봐도 단순한 정신분열증이 아니었어. 히무로. 너는 아까 무슨 후루미나미로… 변한 것처럼 보였어.

 

롤 브라이트: 말도 후루미나미 씨와 비슷하게 했어요. 누군가와 같이 자살하겠다는 말도 하시고요

 

그 사실까지 알게 되는 것은 나에게 있어 악재였다. 단순한 정신 이상에 걸린 나보다는 명백한 악의와 목적을 지닌 후루미나미 나몬이 더욱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실재하는 위험요소 중 하나가 된 이상. 그들이 이 위험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하고 이치에 맞는 일일지도 몰랐다.

 

무로 시라베: 정신분열의 원인이 후루미나미 나몬이기 때문이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세 번째 학급재판의 결투에서 자신의 언총에 사건과 관련된 기억이 아닌, 자신의 생애가 담긴 몇 년 분의 기억을 나에게 주사했다. 그 끝에 후루미나미 나몬의 샤이닝 일부가 나의 몸에 자리를 내렸고, 그 뒤로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환각을 보면서 생활했다.

 

츠보: …잠깐. 세 번째 재판 끝난 뒤부터?

 

바라 쿠리스:… 며칠이 다 지났잖아. 여태껏 계속 그랬단 말이야? 계속… 죽은 사람을 보고 있었다고?

 

무로 시라베: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내가 의식 저편에 여러 번 가두어 두기도 했고, 내 신경에 거슬릴 때만 나타났지 언제나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기와라 우시오: 그래도 보이기는 했단 거잖아! 어떻게 지금까지 티 하나도 안 내고 살았어?!

 

무로 시라베: 이 주제가 중요한가? 지금은 토키와 아유키의 처우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정해야 한다.

 

기와라 우시오: 중요하지! 이새끼 진짜 사리분별이 안 되나? 아니 씨발 네 안에 후루미나미가 있다니까! 암덩이를 몸에 달고서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게다가 후루미나미와 인격이 바뀌기도 했잖아. 히무로. 네 힘은 네가 가지고 있으니까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후루미나미같은 사람이 악의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간 카이다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이 벌어져.

 

바라 쿠리스: 그보다… 대체 무슨 일을 기준으로 후루미나미가 네 몸을… 차지하는 거야?

 

처음에는 그에게 그 기준이 터치라는 사실을 이야기해주지 않으려 했다. 터치를 가진 자들이 나의 약점에 대해 듣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이어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이 결코 캐롤 브라이트와 이름 없는 남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음을 되새겼다. 그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나에게 터치를 사용해 후루미나미 나몬을 깨울 리 없었다.

 

아마 후루미나미 나몬이 그들의 터치로 인해 깨어난다면 그녀는 분명 두 사람에게 그녀가 가능한 만큼의 상해를 입힐 것이다. 두 사람은 살인게임 속에서 작은 행복을 일구었기 때문이다. 소위 불행해져야 마땅한 이들.

 

무로 시라베: 터치가 그 기준이다. 본래 나는 직접적인 터치를 당하더라도 큰 영향을 입지 않게끔 설계되어있고, 여태껏 그래왔다. 그러나 현재 내 몸에는 나 말고 또 하나의 정신이 더 있기 때문에. 터치가 나의 정신에 영향을 끼친 틈을 타 나머지 하나의 정신이 나의 몸을 일시적으로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롤 브라이트: 그 분이… 후루미나미 씨라는 거군요. 터치에 닿기만 하면 그렇게 변하신다니.

 

캐롤 브라이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뒤 나에게서 두 발자국만큼 뒷걸음질했다.

 

기와라 우시오: 왜 진작 말 안 했어?

 

하기와라 우시오는 날카롭고 모든 이들에게 필요했던 질문을 던졌다.

 

기와라 우시오: 괜히 숨기고 있다가 이렇게 나쁜 타이밍에 터졌잖아. 그냥 진작 귀띔이라도 주지! 그러면 이런 개판은 안 벌어졌을 거 아니야!

 

무로 시라베: 약점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나의 정신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려봤자 이득은 없다. 또 캐롤 브라이트와 이름 없는 남자가 돌아왔을 때. 정신조작 보유자들을 압박하기 위해서는 나의 판단과 정신이 명징하다는 인식이 필요했다. 후루미나미 나몬이 섞인 인간의 말은 분명 미친 소리처럼 들릴 테니.

 

기와라 우시오: 어. 왜 그럴듯하게 들리지? 나 가스라이팅 당한 건가?

 

하기와라 우시오의 말을 듣고 제츠보가 그를 다그쳤다.

 

츠보: 속아넘어가지 마. 하기와라. 누군가에게만큼은 이야기하는 게 옳았어. 터치를 당하지 않더라도 언제 어떤 방식으로 문제가 터져나올지 모르는데, 그냥 덮어 두어서는 안 돼지.

 

기와라 우시오: …듣고 보니까 또 네 말이 맞아. 씨발 존나게 섭섭하네! 영안로 모험 해줬잖아. 블레인 레이드 뛰어줬잖아. 살인사건 조사도 해줬잖아. 근데 아직도 우리한테 이런 중대한 일을 한 마디도 안 해?!

 

무로 시라베: 미안하게 생각한다.

 

기와라 우시오: 아오! 진짜 이렇게 영혼이 안 들어간 사과가 또 있냐!

 

롤 브라이트: …불리한 비밀을 숨기시려고 하는 마음은 이해가 가요. 다른 분들의 우려를 살 수 있는 비밀은… 말하기가 어려우니까요. 그렇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후루미나미 씨를 억누르기 위해서는

 

무로 시라베: 터치를 피하는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는 터치만이 인격 전환의 수단이 되니, 터치를 당하지 않는다면 인격 전환도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바라 쿠리스: 후루미나미를… 어떻게 성불시킬 방법은 없어?

 

무로 시라베: 그녀의 목표는 나와의 동반자살이니 그것을 이룬다면 미련 없이 사라질지도 모르지.

 

기와라 우시오: 몸이 죽으면 당연히 사라지잖아! 뭔 개소리야 이거!

 

무로 시라베: 그렇기에 당장은 방법이 없다는 거다. 터치를 피해서 나 자신의 의식을 계속 유지하는 것만이 능사다.

 

나시: 그러면 불편하잖아. 죽은 사람이 계속 보이면… 게다가 너한테만 보이는 사람이라며? 무섭지 않아?

 

무로 시라베: 익숙해지면 불편하지 않다. 또 느닷없이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지금도 보이고 있으니.

 

하기와라 우시오는 내 말을 듣고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기와라 우시오:… 지금도 보인다고?

 

무로 시라베: 그래. 내 바로 앞에 서 있다.

 

루미나미 나몬: 무시하지 마! 무시하지 말라니까! 나 여기 있잖아. 나한테 말이라도 좀 걸어 줘! 히무로! 으응?!

 

후루미나미 나몬은 경박하게 팔을 흔들어대며 호소했다. 그녀를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날뛰는 꼴을 일관적으로 외면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내가 지목한 부분에서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겼다.

 

기와라 우시오: 아저씨. 저는 죽은 사람들이 보여요… 자기가 죽은 줄도 몰라요… 얘는 나랑 똑같은 거 당하고 있는데도 죽도록 침착하네.

 

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나몬은 지금 시점에서 나에게만 존재하는 인간이니 너희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이미 죽은 사람인 것을 아는 이상 필요 이상으로 경계할 이유도 없지.

 

바라 쿠리스: 그래도 뭔가 찜찜해서

 

루미나미 나몬: 찜찜하다니! 죽은 사람한테 실례되는 소리를! 장의사가 할 말이야 이게?!

 

키와 아유키: 우웁!

 

적절한 시간대에 누군가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재갈에 발성이 막혀 아무런 의사도 전달하지 못하게 된 사람. 온몸이 포박당한 토키와 아유키였다.

 

무로 시라베: 깨어났군. 이제 우리는 토키와 아유키를 어떻게 할지를 정해야 한다.

 

 

 

 

기와라 우시오: 어떻게 하기는… 지금까지 했던대로 하는 것 말고 방법이 없지 않냐? 그냥 묶어 두기.

 

바라 쿠리스: 너무 부정적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지금껏 그냥 묶어둬서 일이 잘 풀린 적이 없잖아. 토키와랑 야가미가 그렇게 열심히 감시했는데도 결국 후루미나미가 내통이나 어떤 수단을 써서 탈출한 것처럼.

 

무로 시라베: 장기적으로 탈출의 가능성이 있는 대응 방법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니 내가 조율자 포획 작전을 수행하고 있을 당시의 매뉴얼을 적용해보는 것을 권유하고 싶군.

 

기와라 우시오: 매뉴얼이 어떻게 되는데?

 

무로 시라베: 눈을 뽑고 혀를 자르는 것이다.

 

바라 쿠리스: 뭐?!

 

키와 아유키: 흡…!

 

츠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나시: 눈을 뽑고… 혀까지 잘라야 한다는 거야? 그건

 

이름 없는 남자는 어떤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나는 그가 나를 바라보는 경계심의 시선을 보고서 그가 어떤 염려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루미나미 나몬: 좋은데! 당장 하자!

 

롤 브라이트: 설마

 

무로 시라베: 나는 너희들에게 해당 매뉴얼을 적용하려 한 적이 없다. 매뉴얼은 단지 오버룩, 딕테이트, 터치를 모두 가지고서 다른 이를 조종하려는 의도를 가진 이에게만 시행되는 것이다.

 

롤 브라이트: …그렇군요.

 

캐롤 브라이트는 단지 그렇게 말했다. 덧붙일 말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도 더 할 말을 찾지 못해 토키와 아유키로 주제를 돌렸다.

 

무로 시라베: 너희들은 대부분이 토키와 아유키의 시선에 노출되었겠지. 혹시 토키와 아유키의 눈동자가 두려워 몸이 얼어붙거나, 눈동자를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그에게로 발걸음을 옮긴 적이 있나?

 

기와라 우시오: …아니? 그러지는 않았어. 혹시 그랬던 사람?

 

바라 쿠리스: 더 멀어지려 했으면 멀어졌지, 가까이 가거나 몸이 굳지는 않았는데.

 

무로 시라베: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오버룩을 발현하지 못한 것이다. 눈은 뽑을 필요가 없겠군.

 

토키와 아유키의 눈은 조금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행해져야 할 다른 대응 사항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무로 시라베: 그러나 혀는 잘라야 한다.

 

기와라 우시오: 아니. 그렇게 막무가내로 자르겠다고? 구급상자 가져와서 소독약, 붕대… 아무거나 써서 막아야 하지 않아? 아니 잠깐. 혀 깨물면 죽는 거 아니야? 그. 혀가 뒤로 휙 넘어가서 기도를 막고 죽는다던데.

 

무로 시라베: 잘린 혓조각이나 혈액이 기도를 막을 수는 있지만, 혀뿌리 자체는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네 말대로 감염을 막는 절차는 필수적이겠지.

 

기와라 우시오: 대체 그런 걸 어찌 아는 거냐? 아. 아니야. 대답하지 마.

 

바라 쿠리스: 그. 저. 정말… 잘라야 하는 거야? 앞으로 다시는 말을 못 할 텐데…?

 

무로 시라베: 그러나 그가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을 조종할 수 있게 된다. 너와 하기와라 우시오 모두 당해보았을 텐데?

 

딕테이트. 육성을 통한 정신조작. 그것을 당해본 자는 단지 정신조작을 관념적으로 이해한 자와 크게 달라진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얼마나 저항이 불가능한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바라 쿠리스: 안전을 위해서라면 그게 가장 나은 방법인 건 알지만

 

무로 시라베: 인도주의적인 대응은 불가능하다. 육성은 그가 정신조작을 전할 수 있는 수단이다. 결국 그가 한 번이라도 풀려난다면 탑에 있는 모든 이들은 위험에 빠지게 되겠지. 목소리를 내더라도 제대로 된 의사를 전할 수 없다면, 정신조작의 염려도 사라진다.

 

토키와 아유키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거부 의사 표시였다.

 

키와 아유키: 흐븝! 으브븝!

 

루미나미 나몬: 나는 히무로 네 말이 옳다고 생각해. 잘 하고 있어! 너를 의심하지 말고 그대로만 해!

 

무로 시라베: 이 조치에 거부감이 드는 것은 이해한다. 너무 급진적이며 다른 방법을 모색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문제라면 혀를 자르는 것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롤 브라이트: 정말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일까요?

 

캐롤 브라이트의 어투는 그 방법에 반대하는 것이 아닌 그저 적절치 않음을 지적했다.

 

무로 시라베: 더 나은 방법을 떠올렸나?

 

롤 브라이트: 딕테이트가 없더라도 토키와 씨의 터치는 남아 있잖아요. 말을 할 수 없더라도 토키와 씨는 계속 묶여 있어야만 해요. 그러면 토키와 씨가 풀려날 경우 다른 사람을 조종하리라는 사실은 그대로잖아요. 혀를 자르는 의미가 없을 지경이에요.

 

무로 시라베: 그러나 다른 이와의 신체적 접촉은 육성을 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롤 브라이트: 어렵기야 하겠죠.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근본적인 해결책은 혀를 자르는 게 아닌, 그에게서 딕테이트와 터치를 앗아가는 일이고요.

 

루미나미 나몬: 오호라… 재능을 얻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놈이니 재능을 앗아가자? 좋은 생각이야! 오히려 더 가혹하잖아!

 

무로 시라베: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재단의 설비가 필요하다. 사람의 샤이닝을 포착하고 추출해낼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토키와 아유키에게서 정신조작 능력을 제거할 수 있겠지. 그러나 탑에는 그런 것이 없다.

 

롤 브라이트: 차가 없으면 직접 뛰어야죠.

 

캐롤 브라이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무로 시라베: 네가 말인가?

 

롤 브라이트: 토키와 씨가 가지고 있는 샤이닝은 제 몸에 들어있던 것이었잖아요. 제가 주인이에요. 그러니 제가 다시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몰라요.

 

무로 시라베: 너 자신도 확신하지 못한 어투로군.

 

롤 브라이트: 네. 사실 확신은 없어요. 다만 가능성은 있죠. 그리고 저희는 당면한 위험을 대처하기 위해서 그 가능성에 기대야 해요. 물론 마음 같아서는 혀고 눈이고 다

 

캐롤 브라이트가 말을 이으려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서 그만두었다.

 

롤 브라이트: 제 말의 요지는 토키와 씨를 감싸려는 건 아니다만 지금 혀를 자르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거에요. 혀를 자르기 전에 꼭 해야 하는 일이 있기도 하고요.

 

기와라 우시오: 꼭 해야 하는 일?

 

롤 브라이트: 아시잖아요. 심문이요.

 

루미나미 나몬: 심문!

 

무로 시라베: 좋은 생각이다.

 

나는 그녀의 제안이 반갑게 느껴졌다. 캐롤 브라이트가 그런 제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가장 큰 반대표를 던질 사람이 찬성표를 던질 때 저울이 크게 움직인다.

 

나시: …방금 심문이라고 하셨어요?

 

롤 브라이트: 네. 혀를 잘라 버리면 들을 수 없는 내용도 있으니까요.

 

캐롤 브라이트는 어쩌면 나만큼이나 토키와 아유키를 적대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가족과 관련된 원한은 오래 가기 마련이다.

 

바라 쿠리스: 어. 캐롤? 분위기가 약간 달라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이지?

 

롤 브라이트: 제 기분 탓인 거죠.

 

 

 

 

 

심문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정석적으로 수갑과 밧줄을 모두 사용하여 그를 의자에 묶는다. 토키와 아유키가 탈출하지 않는가를 내가 감시하는 동안 다른 이들은 토키와 아유키의 육성이 들리지 않는 곳에서, 다이얼로그를 통해 토키와 아유키의 진술을 듣는다. 나와 제츠보만이 딕테이트의 영향을 받지 않는데, 나는 카이다 쿠로하를 유사시에 제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게 전부였다. 토키와 아유키의 앞에는 총 두 개의 다이얼로그가 놓였다. 한 개는 나의 것으로 나나시의 숙소에 모인 다른 이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한 개는 토키와 아유키의 다이얼로그로, 묶인 카이다를 감시하고 있는 제츠보의 다이얼로그와 연결되어 있었다.

 

무로 시라베: 나에게는 딕테이트가 통하지 않는다. 토키와 아유키. 그러니 서투른 저항은 하지 마라.

 

키와 아유키:…!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에서 나는 감정의 동요와 적대심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나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밧줄이 단단하게 묶여 있는지를 한 번 더 확인한 뒤. 나는 다이얼로그에 대고 말했다.

 

무로 시라베: 조율자에게 물을 것이 있는 자들은 차례대로 질문해라.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롤 브라이트: 처음은 제가 먼저 할게요.

 

캐롤 브라이트는 다이얼로그 너머에서 물었다.

 

롤 브라이트: 어떻게 하면 치나미를 풀어주실 거예요?

 

나는 토키와 아유키의 입 앞으로 다이얼로그를 가져다 대었다. 토키와 아유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키와 아유키: …풀어줄 수 없어요.

 

롤 브라이트: 토키와 씨. 제가 풀지 못해서 여쭤보는 게 아니에요. 저는 저 스스로도 당신의 터치를 해제할 수 있어요. 저 또한 터치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저 억지로 해제할 때 아주 조금이라도 치나미가 다칠 지 모르니 그렇게 하지 않는 거에요.

 

키와 아유키: 아뇨! 카이다를 풀어주어서는 안 돼요!

 

토키와 아유키가 다급한 기색을 보이며 다이얼로그에 소리쳤다.

 

키와 아유키: 또 그래봤자에요. 카이다는 이미… 기억을 다 잃었으니까요.

 

츠보: …그게 무슨 뜻이야? 기억을 잃었다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카이다가 말이야?

 

키와 아유키: 지금 카이다가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상적인 상태는 아닌 모양이야.

 

롤 브라이트: 잠깐. 모른다뇨? 모른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당신이 저질러 놓고 모른다뇨.

 

키와 아유키: 저는 카이다한테 제츠보를 붙잡으라고만 명령했지, 그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한 적 없으니까요 아마 지금 묶여 있는 와중에도 제츠보를 붙잡으려고 힘을 쓰고 있거나 그 끝에 지쳐버리지 않았을까 싶네요.

 

무로 시라베: 어떻게 되었지?

 

츠보: …지금은 지쳐 있어.

 

나시: 기억을 다 잃었다니. 너 설마 그 절차를 전부

 

키와 아유키: 맞아. 전부 다 마쳤어. 그러니 카이다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아. 아예 사라져 버렸으니까.

 

기와라 우시오: 설마 그거 말이야? 아까 나나시가 말했던 그 기억 지우는 그거?

 

롤 브라이트: 그럴 수는 없어요!

 

캐롤 브라이트가 소리쳤다.

 

롤 브라이트: 왜! 치나미는 이제 걷기 시작한 거라고요. 이제서야 믿어주는 사람이 생기고, 반성하고 또 나아질 수 있게 됐는데 왜…!

 

키와 아유키: …정말 카이다가 나아질 수 있다고 믿으신 건가요?

 

토키와 아유키가 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아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키와 아유키: 다들 카이다가 나아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잖아요.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

 

롤 브라이트: 나아질 수 있었어요. 몇 번이라도 말해도 모자라겠네요. 치나미는 나아질 수 있었어요. 오히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생각하면, 이토록 짧은 시간 사이에 얼마나 달라질 수 있었는지 놀라울 정도라고요. 그런데 당신이 무슨 권리로…!

 

키와 아유키: 그렇게 정말 카이다가 나은 사람이 되면… 지금까지 한 일도 전부 없었던 셈 쳐야 하는 건가요? 저희에게 부려 온 패악질 전부를요? 누가 용서하는데요 캐롤 씨가 용서하는 건가요? 그렇지만 캐롤 씨는 이미 카이다를 용서했잖아요. 다른 이들이 만류하지 않았다면 카이다가 떳떳하게 제 발로 걸어다닐 수 있게 풀어주었겠죠.

 

롤 브라이트: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없애서는 안 돼요. 자신이 한 일의 무게에 짓눌리며 살아가는 것이 속죄일 테니까요. 모노로그 씨에게 맞서 살인 게임을 헤쳐 나가는 것이

 

키와 아유키: 캐롤 씨는 꿈 속에서 살고 있군요. 그런 구원은 듣기만 좋을 뿐, 아무것도 바꾸지 않아요. 오히려 그런 허황된 가능성으로 카이다가 입혔던 모든 악행을 방조하는 일이고요. 이게 무슨 레미제라블인 줄 아세요? 카이다가 모노로그와 손을 잡은 채 해변에서 모든 시련에 훼방을 놓고, 모리와 나이토가 죽기 직전까지 갔는데… 앞으로 나아질 수 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자니

 

롤 브라이트: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게 아니에요. 저는… 치나미가 나아질 수만 있다면

 

토키와 아유키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키와 아유키: 나아졌어요. 카이다는 정말 나아졌어요. 지금까지 받았던 모든 상처와 자격지심. 흉터만이 남았던 일생의 모든 것을 잊었으니까요.

 

그러나 카이다 쿠로하는 조율자의 의지에 따르게 되었다.

 

키와 아유키: 카이다가 나아지길 원하신다뇨. 카이다 자체가 유독한 인물인데요? 그러니 나아지기 위해서 카이다는 카이다가 아니게 되어야만 했던 거죠. 나쁜 방식으로 변이된 모든 것을 지운 뒤에야 카이다가 가진 일말의 인간을 살릴 수 있을 테니까요

 

기와라 우시오: 너 지금 네가 하는 말이 얼마나 미친 소리처럼 들리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키와 아유키: 지금 내 말에 복종하는 카이다가 가장 인간답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어렵겠지. 나는 이해해. 보통의 사람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동정심이 있으니까 그러나 너희도 카이다라는 위험이 사라졌을 때 탑이 얼마나 평화로운지를 곧 체험하게 될 거야. 나는… 그것으로 만족해.

 

무로 시라베: 순교자라도 된 듯한 어투로군.

 

키와 아유키: 적어도 나는 대의를 관철하다 이렇게 되었으니 순교자라 불릴 수도 있겠지. 내가 미쳤다고. 하기와라? 너희야말로 전부 이상해… 이 일을 지금까지 방조해 오다니… 내 말의 어디가 틀렸다는 거야?

 

키와 아유키: 카이다에게 불신과 난폭함이 있는 이상 그녀는 해를 끼치지 않고서야 살아갈 수 없어. 그녀를 그렇게 만드는 원인을 내 손으로 억눌렀을 뿐이야. 아무도 감히 나서기 어려운 일을. 불가능한 일을 나는 할 수 있었어. 그래서 했어. 그게 잘못되었다고?

 

무로 시라베: 카이다 쿠로하를 사병처럼 부리는 주제에 대의를 논할 수는 없다.

 

키와 아유키: …그거랑 그건 별개의 일이야. 그리고 너희가 그 일을 빌미로 나에게 날을 세우더라도, 카이다 같은 사람이 자기 업보를 받게 만들게 한 일은 누구도 비난할 수 없어. 거듭 말하건대. 카이다는 결코 나아지지 않아.

 

나시: ….

 

키와 아유키: 카이다가 그런 인간이라는 건 너희도 알잖아. 아무리 기대해봤자 변하지 않을

 

츠보: 하아 내가 이러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너한테는 한 마디 해야겠다. 너는 틀렸어. 토키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제츠보가 입을 열자 토키와 아유키의 말문이 막혔다.

 

츠보: 네 말대로 카이다가 나아질 수 없는 사람이었으면 네 계획도 끝장나는 거였잖아. 이런 계획을 꾸몄다는 건 네가 운 좋게 얻어걸린 멍청이거나, 너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키와 아유키: 거짓말…? 내가 나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츠보: 내가 카이다 앞에서 자리를 비워서 네가 카이다를 멈출 수 있게 하는 게 계획의 성공 조건이었어. 그게 캐롤을 감정적으로 동요시킨 이유였지. 다만 이 계획의 성공 조건은 하나가 더 있어.

 

츠보: 카이다가 얌전히 자신의 숙소에 그대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카이다의 숙소에 들어가봤자 정작 마비시켜야 할 카이다가 없을 테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토키와 아유키는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츠보: 내가 자리를 비운 와중에도 카이다가 자신의 방에서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내 말을 듣고 정말 기다렸기 때문에 네가 카이다를 노릴 수 있었던 거란 말이야. 나는 걔가 도망을 가도 멀리 도망가지 않기를 바랐어. 그래야 곧바로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가만히 있는 거? 기대도 안 했어. 정말 기다릴 거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카이다는 기다렸더라고.

 

츠보: 나는 카이다의 편을 들어줄 생각이 조금도 없지만, 네가 그렇게 떳떳한 모습을 보니까 할 말은 해야겠어. 너야말로 정말 카이다가 나아질 가능성이 아주 조금도 없었다 믿은 거야?

 

츠보: 만약 그랬다면. 왜 카이다가 캐롤과의 약속을 지키기를. 조금 나은 사람이 되었기를 성공 조건에 끼워넣은 건데?

 

토키와 아유키는 얼굴을 굳힌 채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토키와 아유키가 카이다 쿠로하에게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저 카이다 쿠로하가 본인의 언니와 한 약속을 한 번쯤은 지키리라고 예상했으리라.

 

토키와 아유키는 카이다 쿠로하에게 기대를 줄 만한 그 어떤 계기도 가지지 못했으니까.

 

다만 그 한 번의 약속 이행 또한. 본래 카이다 쿠로하가 가지고 있던 성정에 비하면 나아진 것이니 카이다 쿠로하가 나아지지 않을 것이기에 그 스스로 칼을 빼들었노라는 말은 그가 고안해낸 거짓임이 드러났다. 스스로가 가진 이중사고를 토키와 아유키 본인이 부끄럽게 여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일은 중요하지도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 뿐이었다.

 

롤 브라이트: 치나미는 정말 돌아올 수 없는 건가요?

 

키와 아유키: 네.

 

롤 브라이트: 그건 거짓말이군요.

 

캐롤 브라이트는 그렇게 단정지었다.

 

키와 아유키: 현실을 외면하지 마세요. 카이다는 이제 돌아올 수 없어요.

 

롤 브라이트: 아니에요. 거짓말이에요. 놀랄 일은 아니죠. 당신이 지금 진실을 말할 이유도 없고. 당신은 치나미를 본인에게 유리하게 부리려 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당신이 하는 말은 믿지 않을 거예요.

 

그것은 논리적인 추론이었다. 나 또한 토키와 아유키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향상된 심문 방식을 사용하지 않은 채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았으니. 그가 말하는 것은 거짓이었다. 설령 일부분이 진실이더라도 그것을 확인할 수 없는 이상. 그가 진실을 말할 이유가 없는 시점에 있어서는 거짓이었다. 심문을 당하는 자가 진실을 말하고 싶어질 때. 자신이 거짓말을 섞은 것을 후회하고 진실을 심문자들이 믿어주기를 바랄 때야말로 심문은 성공한다.

 

나시: …애초에. 그건 어떻게 알아낸 거야? 기억을 지우는 절차도 그렇고, 카이다에게 캐롤 씨의 손가락이 있는 것도… 너 혼자서는 알아낼 수 없는 일이었어. 어떻게 한 거야? 어디에서 정보가 샌 거지?

 

키와 아유키: …말해줘도 너는 못 믿을 거야. 나나시.

 

롤 브라이트: 믿는지 못 믿는지는 저희가 정해요. 어서 말하세요. 여기서 더 당신한테 모욕을 주고 싶지 않지만, 지금부터의 일은 순전히 당신의 선택으로 벌어진다는 것 명심하고요.

 

토키와 아유키는 입을 조금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는 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을 뿐.

 

나시: 토키와 말 좀 해줘.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너에게 가혹해질 수밖에 없어.

 

무로 시라베: 어차피 너는 말하게 되어 있다. 너를 이미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 심문의 끝은 네가 입을 연 뒤에야 온다. 그러니 말해라.

 

토키와 아유키는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키와 아유키: 카이다에게서 직접 들었어요.

 

이 답은 거짓말이었다. 듣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알았다.

 

롤 브라이트: 거짓말 하지 마세요. 토키와 씨는 치나미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틈이 없었잖아요. 항상 제츠보 씨가 치나미를 보고 있었는데.

 

키와 아유키: …그러니. 제츠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카이다에게서 들었다는 거예요.

 

기와라 우시오: 그 짧은 틈 사이에? 그리고 네 어디가 예뻐서? 아니. 이 경우에는 네 어디가 잘생겨서라고 물어야겠다.

 

루미나미 나몬: 사실 지금 상태로 봐선 예뻐서와 잘생겨서가 절반씩 섞였다고 봐야 하지 않나.

 

롤 브라이트: 치나미가 그랬을 리 없어요. 유일한 가능성은 딕테이트나 터치인데, 당신이 제 손가락을 만지고 정신조작을 얻지 못했다면 제 손가락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을 거에요.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신 거죠?

 

키와 아유키: 정신조작을 얻은 게 아니에요. 원래 잃어버렸던 저의 것을 다시 되찾은 거죠.

 

캐롤 브라이트의 목소리가 한층 커졌다.

 

롤 브라이트: 당신 거라고요? 당신 거? 이런. 제가 실수를 했네요. 다른 분들에게서 재능을 빼앗아 한 사람의 몸에 합쳤는데. 당신 거라고요? 세상에 그럴 줄은 전혀 몰랐어요.

 

기와라 우시오: 나였으면 지금이라도 바지에 똥 지렸어.

 

바라 쿠리스: 쉿! 조용히 해!

 

다이얼로그 너머에서 자잘한 잡담이 들려왔다. 유머가 심문에 도움될리 만무했기에 나 또한 그의 말이 달갑지 않았다.

 

다만 그의 농담이 다른 사람이 듣기에 아무리 우스울지라도, 토키와 아유키는 여전히 캐롤 브라이트에게서 압박감을 느꼈다. 그녀는 일전에 나에게 보낸 것보다도 더 깊은 원한을 토키와 아유키에게 보내고 있었다. 거동의 자유를 빼앗고자 하는 제안보다 혈육의 자아 자체를 앗아간 것이 더 무거울 수도 있으니. 충분히 이해 되는 일이었다.

 

키와 아유키: …저는 그런 의미로 한 게 아니라… 그래도 제가 이 밖에서는 딕테이트와 터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게 사실이잖아요?

 

무로 시라베: 너는 가진 게 아니다. 주입당한 거지. 너와 재단이 한 편이라는 착각 마라. 재단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많은 초고교급을 납치하고 자신의 사상을 주입했다. 네가 당한 것이 인격의 말살임을 모르는 건가?

 

키와 아유키: 주입당한 거나, 가진 거나… 결국 몸에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같아. 그러니까 내가 딕테이트와 터치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는 거야. 아. 오버룩도 있었지.

 

무로 시라베: 몸에 소유하고 있는 정신이 네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힘을 가지는 것은 네가 아니다. 너와 닮지도 않은, 네가 그리 되기 전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르는 다른 사람이지. 나를 봐라. 네가 완성되면. 나를 닮게 되는 거다.

 

토키와 아유키가 그 말을 이해했다면 길어진 자신의 손톱, 없어진 목울대, 금색으로 빛나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면서 불길함과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잃었다는 사실에. 그저 아무렇지 않은 듯이 자연스럽지만 분명히 이전과 다른 자신의 행동을 인식하지 못하리라는, 다른 사람이 되는 줄도 모르리라는 사실에 그가 가진 정신조작을 기꺼이 포기하겠노라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불안정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비틀린 사고방식을 내비쳤다.

 

키와 아유키: …내가 너처럼 될 수 있다는 건가?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그런 진단을 내렸다.

 

롤 브라이트: 아니요. 조율자는 그런 존재는… 있어서는 안 돼요. 완성되어서는 안 돼요. 하려던… 하려던 말이나 계속 하세요. 어떻게 치나미에게서 제 손가락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데요?

 

무로 시라베: 말해라. 분명히 수단이 있었을 것이다. 카이다 쿠로하가 너에게 해줄리 만무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방도가. 그러니 당장 말해라.

 

루미나미 나몬: 이러지 말고 고문을 하자. 히무로.

 

후루미나미 나몬이 내게 말했다.

 

루미나미 나몬: 고문을 해야 해. 비협조적인 심문 대상자를 상대로는 언제나 고문을 해야 해. 너는 내게 할 기회가 없었기에 하지 못했을 뿐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 줄 알았다면 진작에 그랬을 거잖아.

 

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나몬이 들려주었다고 말하고 싶나? 그녀는 너에게 반복에 대해 알려 주었으니 캐롤 브라이트에 대한 정보 또한 그녀의 소행이었노라 돌리고 싶겠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토키와 아유키는 입을 열지 않았다.

 

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나몬은 너에게 손가락에 대한 정보를 알려줄 수 없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카이다 쿠로하와 캐롤 브라이트의 귀환을 모르고 죽었으며, 설령 그 일을 예상했을지라도 그것을 어디에 숨길지까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너는 손가락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한 일이지?

 

고문. 후루미나미 나몬이 제시한 선택지. 그것이 염두에 떠오르는 것 자체가 그녀가 내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니 고문이라는 선택지 그 자체는 의식적으로 거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억눌러야 하는 것은 회색지대다.

 

손톱과 손발을 뽑는다거나 손톱 밑의 살을 바늘로 찌르는 것만이 고문은 아니다. 고통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손톱과 발톱은 도합 열 개. 열 개만 뽑히면 그만이라 여길 수 있는 자들에게 고문은 오히려 반항심과 인내력을 올리는 요소일 뿐이다.

 

루미나미 나몬: 고 문 해! 고 문 해! 고 문 해!

 

후루미나미 나몬이 장단에 맞추어 손뼉을 두드렸다. 그 소리가 오직 내 머릿속에만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거슬리고, 육성보다 필연적으로 작게 전달되는 다이얼로그의 음성 신호보다 확실하게 들리는데도 그것은 내가 듣고 있는 환청일 뿐이다.

 

단지 상해를 입히는 고문만이 고문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저 공포와 괴로움. 피로를 써서 사람을 몰아붙이는 방법은 간단하게 쓸 수 있는 것만 해도 몇 가지가 넘었다. 그것은 분명 고문이 아니며 향상된 심문일 뿐이라는 회색지대… 그 안에 후루미나미 나몬이 있다. 그리고 그녀는 한 번 그 지역에 발을 디딘 나를 흑색의 영역까지 인도할 것이다.

 

루미나미 나몬: 고문 안 할 거야? 고문 하자. 응?

 

죽은 뒤에도 죽기 전과 똑같은 짓을 하는군. 너의 행동이 나에게 정반대의 기준이 되어 준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겠나? 너는 남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그리고 너의 정반대 방향이 북쪽인 것을 이미 아는 사람에게 남쪽을 가리키는 일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죽기 전과 죽은 후에도 똑같은 춤을 추는 것은 공허한 일이지 않나?

 

후루미나미 나몬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가지고 있지도 않은 입을.

 

키와 아유키: 네 말대로 그 사실을 알려준 게 후루미나미는 아니야. 그리고 너희는 그 사실을 알아낼 수 없어… 그러니까 괜히 나를 쪼아대기보다 너희들 쪽에서 배신자를 찾는 게 빠를 걸.

 

그리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또 쫑알거리기 시작했다.

 

루미나미 나몬: 그 말대로야. 그러나 캐롤이나 나나시가 토키와에게 저런 사실을 알려줬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워. 카이다도 마찬가지지… 그러나 분명 세 명 중 한 명이. 저녀석에게 그 사실을 전해준 게 분명해.

 

나는 생각했다. 전해주었는데 본인이 전해준 줄을 모르거나, 전해주었으나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다.

 

루미나미 나몬: 우리?

 

탑의 인원들을 가리킨 말이다. 헛된 기대 마라.

 

루미나미 나몬: 네가 정 그렇게 말한다면 믿어줄게. 하지만 너도 내 말이 맞는 것 같지? 토키와 혼자서는 알아낼 수 없는 내용이었다는 거.

 

대답하지 않았다.

 

루미나미 나몬: 벽에 부딪친 것 같으니까 이번 건은 도와줄까? 저놈. 사랑의 열쇠를 쓴 거야. 내가 야가미에게서 매듭을 풀 방법을 알아낸 것처럼 토키와도 세 사람 중 하나의 꿈에 들어간 거야. 누구든 간에 토키와가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라는 환상에 빠져서 손가락에 대한 내용을 털어놓은 거지.

 

내가 너를 믿어야 하나?

 

루미나미 나몬: 어리석은 질문이야. 너는 나를 믿을 필요가 없어. 너도 알잖아?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의 말을 토키와 아유키가 믿는지의 여부만이 중요하다. 

 

무로 시라베: 사랑의 열쇠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말해라. 토키와 아유키.

 

키와 아유키: 뭐?!

 

토키와 아유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의 반응을 보고서 나는 그가 사랑의 열쇠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키와 아유키: 나는 그런 물건 몰라.

 

바라 쿠리스: 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어디였더라…?

 

무로 시라베: 토키와 아유키가 그것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루미나미 나몬: 이봐. 잠깐! 너무하네! 알려준 건 나인데 네가 알아낸 것처럼 생색을 내는 거야?!

 

내가 토키와 아유키 앞에서 네 존재를 드러내라는 거냐? 미친 소리를 하는군. 조율자 앞에서 내 약점을 보일 생각은 없다.

 

루미나미 나몬: 듣고 보니 맞는 말이야. 그러니까 용서해 줄게.

 

나시: 사랑의 열쇠…? 그게 뭔데?

 

키와 아유키: 어. 어떻게… 그걸 어떻게 알았지? 오호라. 역시… 이 살인 게임의 배후와 가장 맞닿아있는 카텟 기관… 진즉 눈치챘어야 했는데…!

 

츠보: 이상한 소리 그만 하고 대답을 해. 사랑의 열쇠가 뭐야?

 

키와 아유키: …정말 희망은 없는 건가.

 

롤 브라이트: 사랑의… 열쇠요…? 그걸 제 동생에게…? 듣기만 해도 불안하네요. 남자라고는 모르는 제 동생한테 무슨 짓을… 무슨 짓을 하신 거죠? 그 애 마음을 가지고 놀기라도 했다면은 제가 장담컨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예요.

 

심리적 장벽을 여는 사랑 따위의 말장난이나 비유적인 표현 같지는 않았다. 카이다 쿠로하가 토키와 아유키와 내밀한 관계였다고 생각할 근거도 없었다. 둘은 거의 접촉조차 하지 못했지 않은가? 그러니 토키와 아유키는 카이다 쿠로하의 환심을 사지 못했다.

 

정말 사랑의 열쇠라는 물건이 존재할 뿐이다.

 

키와 아유키: 너희들의 생각이 맞아. 나는 사랑의 열쇠를 카이다에게 사용했어. 카이다는 내가 그녀의 소중한 사람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손가락의 위치에 대해서 알게 된 거야.

 

토키와 아유키 또한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은 어떻게 해석해도 사랑의 열쇠라는 사물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는 부연설명이나 귀띔을 줄 후루미나미 나몬이 없었기에, 다소의 오해가 발생했다.

 

츠보: 으.

 

기와라 우시오: …뭐? 아니. 진짜야? 카이다를 홀려서 그런 정보를 캐냈다고?

 

바라 쿠리스: 우와. 저질! 진짜 쓰레기! 어떻게 자기 좋다고 하는 사람한테 이런 짓을

 

롤 브라이트: 자. 잘도 잘도 내 동생 마음을 가지고 놀다니!

 

다이얼로그 너머에서 온갖 음성이 섞여 들렸다. 그중 캐롤 브라이트의 음성은 다이얼로그로 들어도 복수심에 사로잡힌 것처럼 들렸다. 토키와 아유키는 억울한 어투로 해명에 나섰다.

 

키와 아유키: 아니. 그게 아니야. 상점에서 살 수 있는 사랑의 열쇠 말하는 거라고!

 

무로 시라베: 더 자세히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토키와 아유키가 나를 거슬린다는 기색을 가진 채 노려보았다. 그는 여전히 내가 살인 게임의 배후에 있기에 사랑의 열쇠에 대해 안다고 여겼다. 그 인식이 그에게 오만함을 부여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다른 모든 이들이 나에게 속아넘어간 반면 그는 정신조작을 통해 살인 게임을 끝내려 한다는 인식.

 

키와 아유키: 사랑의 열쇠는 소모성 도구야. 모노로그가 제대로 설명해준 적은 없지만… 그걸 누군가에게 쓰겠다고 마음을 먹은 뒤 잠에 들면, 꿈 안에서 그 대상자는 사랑의 열쇠를 쓴 사람이 무척 소중하다고 인식하게 돼.

 

바라 쿠리스: 아. 그거?! 아. 맞다. 그거! 상점에 있는 사랑의 열쇠! 진정한 사랑이 있어야 쓸 수 있다고 하던… 근데 그게 최면 도구였어?! 아니 진정한 사랑은 뭐야 그럼?!

 

롤 브라이트: 최면…? 최면이라니  치나미 마음을 가지고 논 건 마찬가지잖아요! 용서 못 해! 어떻게 그런 비열한 짓을!

 

키와 아유키: 저도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니에요.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을 뿐이에요.

 

츠보: 무슨 방법?

 

키와 아유키: 카이다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낼 방법 말이야.

 

츠보: 카이다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지만,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고?

 

키와 아유키: 그래. 그 무엇인가를 확인해봐야 했어.

 

이어지는 제츠보의 말에는 의문의 어투가 담겼다.

 

츠보: …다들 지금 토키와 말이 이해가 가? 전후 관계가 이상하잖아.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사랑의 열쇠를 사용했다는 건 말이 안 돼. 인풋이 들어가야 아웃풋이 나오는 건데. 아웃풋이 있는 줄도 모르는 채로 인풋을 넣는다니?

 

바라 쿠리스: 이. 인풋? 아웃풋?

 

나시: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면서 사랑의 열쇠를 사용하는 건 이상하다는 거지? 하기야… 카이다가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안 게 아니고서야. 굳이 그 열쇠를 사용할 이유도 없을 텐데…?

 

츠보: 이유가 없지. 여태껏 말했던 것처럼 후루미나미 나몬이 그 사실을 알려줄 수는 없어. 캐롤이 손가락을 자르기 전에 처형당해서 죽었으니까. 토키와가 그 사실을 알 방법은 전혀 없다는 거야.

 

키와 아유키: 아니. 나는 알고 있었어. 꿈에서 봤거든.

 

츠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꿈에서 봤다고? 너는 카이다한테 그 사랑의 열쇠라는 걸 쓰기 전에는 카이다가 뭘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거잖아. 네가 사랑의 열쇠를 쓴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어… 네가 어떻게 카이다가 자신의 자켓 안에 손가락을 숨기고 있는지 알아냈는지도. 얼추 알겠네

 

롤 브라이트: 무슨 말씀이세요. 제츠보 씨?

 

츠보: 네가 듣기에는 조금 잔인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말해주는 게 이치에 맞는 일이니까 그냥 말할게.

 

그리고 제츠보는 이러한 가능성을 제시했다.

 

츠보: 너. 카이다를 희롱하던 와중에 우연히 그 손가락에 대해서 알게 된 거지?

 

키와 아유키:?

 

롤 브라이트: 설마!

 

캐롤 브라이트가 버럭 소리쳤다.

 

롤 브라이트: 이런… 발정난 개자식이…!

 

나시: 토키와…! 너 설마 카이다를…? 대체 그게 무슨 짓이야! 

 

키와 아유키: 말도 안 되는 낭설을 나는 그런 적 없어. 애초에 왜 내가 카이다처럼 저급하고 덜떨어진 사람을 탐한다는 거야? 

 

롤 브라이트: 하아아?! 당신이 뭐라고 치나미를 무시하는 거에요! 당신보다 몇 배는 멋진 소녀인데! 입이 뚫려 있다고 시건방진 말을 다 하시네요!

 

기와라 우시오: 나 여기 슬슬 무서웡

 

츠보: 캐롤.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은 대체 어떤 경위로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보는 게 먼저일 것 같아. 그리고 토키와. 네가 정말 카이다의 소지물을 우연히 본 게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카이다에게 사랑의 열쇠를 쓸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말하는 게 좋을 거야.

 

키와 아유키: 말했잖아. 꿈에서 봤다고! 내가 말을 하면 좀 믿지 그래? 정말 다른 이유가 없단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하지만 대의와 헌신. 그리고 화합이라는 사명을 강조하던 그에게 있어 성도착자 취급은 분명 달갑지 않은 일일 텐데도 그는 진술을 번복하지 않았다. 토키와 아유키가 진실을 말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그러나 자세하지는 않다.

 

무로 시라베: 사실처럼 들리지 않는다. 제츠보의 추론이 타당하다. 이미 수많은 위증을 했는데 그의 발언을 곧이곧대로 믿어줄 수 없으며, 아무도 믿지 않는 말을 반복하니 더욱 귀 기울일 가치가 없다.

 

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말이 맞아요! 당신…! 안 되겠어. 지금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가서 직접 갚아줘야겠으니까!

 

나시:… 캐롤 씨. 진정하세요. 가시면 위험해요! 토키와한테는 딕테이트가 있는 거 아시잖아요. 잠깐이라도 닿으면 큰일나요!

 

이름 없는 남자의 말이 사실이다. 응징은 나중에 해라. 죄목을 상세히 밝힌 뒤에 해도 늦지 않는다.

 

캐롤 브라이트가 씩씩거리며 제 분을 달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충분히 잦아들고 난 뒤 나는 다시 그에게 물었다.

 

무로 시라베: 꿈이라는 허황된 이유로 그런 일을 행했다면 너의 판단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일그러진 정신상태를 가진 자가 행하는 정신조작을 믿을 수 있을리 만무하지. 네가 주창하는 화합 또한 결함투성이다.

 

키와 아유키: 어디서 나를 끌어내리려는 거야? 의심할 필요 없어. 확신해도 돼. 내가 정신이 나갔다고? 고작 꿈 때문에 도박을 했다고…? 하지만 결국 내가 옳았잖아. 카이다에겐 분명히 캐롤 씨의 손가락이 있었어. 나는 미래를 보았다는 말이야.

 

무로 시라베: 정확히 어떤 꿈이었지?

 

키와 아유키: 카이다가 엄청나게 반짝거리는 뭔가를 품에 넣고 다니는 꿈… 카이다는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만, 나는 탑의 벽과 바닥을 통과해서 카이다가 가지고 있는 그 금색의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어.

 

기와라 우시오: 엑스레이처럼?

 

키와 아유키: 그래. 엑스레이 리소스 팩처럼. 그리고 그 꿈에서 나는 왜인지 그 광휘가 너무 소중하고 또 내가 손에 넣어야만 하는 물건으로 느껴져서

 

츠보: 그래서 카이다한테 사랑의 열쇠를 썼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큰 일을 벌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라고밖에 할 수 없어.

 

분명 그것은 미친 짓이었다. 자신의 정신의 거울을 통해 본 예지를 믿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꿈은 모든 것을 의미하거나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조율자라는 그의 과거가 꿈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조율자의 파편인 채로 영안로에서 나온 캐롤 브라이트는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그 기억과 정신조작 능력의 일부를 신체와 함께 잘라냈고… 그 기억이 토키와 아유키를 이끈 것이다. 파편이 전체를 불렀다. 재능이 사람을 가졌다. 자신을 담을 사람을 홀려 그를 지배했다. 조율자라는 존재 그 자체가 신체 없이도 그에게 영향을 미쳤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본다면 변이한 토키와 아유키의 상태 자체가 곧 정신조작의 과정과도 같았다. 자기 자신에게 받는 정신조작.

 

나는 토키와 아유키를 샤이닝의 주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심했다. 토키와 아유키가 카이다 쿠로하의 기억을 제거하게 된 논리는 그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그를 악하게 만드는 것을 제거한 뒤에야 비로소. 그가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되리라.

 

그리고 한 번 카이다 본인한테 떠 봤을 때도 분명 자기가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굴었어. 그런데 그게 캐롤 씨 손가락인 줄은 몰랐다고. 어쩌다가 다치신 건지 궁금하긴 했어도

 

츠보: 맞아… 너 카이다가 반짝이는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고 그랬지.

 

키와 아유키: 그러니 용서는 안 해. 카이다. 너에게는 용서가 필요하지 않아. 애초에 내가 지금 당장 원하는 건 하나뿐인데. 그게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겠거든.

 

키와 아유키: …이봐. 카이다. 내가 간밤에 기이한 꿈을 하나 꿨는데. 네가 그 안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물체를 품에 가지고 있었어. 그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해?

 

츠보: 캐롤이 돌아온 바로 그날부터 말이야 정신조작의 무서움을 다시 느끼게 되네. 잘린 순간부터 네가 영향을 받는다니

 

무로 시라베: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경위는 알았다. 유용한 정보 또한 얻었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유용한 심문 도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들의 논쟁을 듣는 동안 나는 나의 다이얼로그 화면을 조작했고, 곧이어 바닥에서부터 하트 모양의 장식이 달린 열쇠가 솟아올랐다. 나는 그것을 토키와 아유키에게 보여주었다.

 

무로 시라베: 그렇다면 이 열쇠를 써서 너에게서 정보를 캐낼 수도 있겠군. 그렇지 않나?

 

토키와 아유키는 고개를 홱 내저었다.

 

키와 아유키:! 그건 안 통해! 남자랑 남자 사이에서는 사랑의 열쇠가 안 통하거든!

 

무로 시라베: 거짓말이다.

 

키와 아유키: 거짓말 아니야! 진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거짓말 취급하는 거야? 나는!

 

무로 시라베: 네 얼굴 근육을 보고 하는 말이다. 압박을 받는 와중에도 본색을 숨길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게 너는 아니다. 거짓말을 거꾸로 뒤집는다면 남자와 남자 사이에서도 사랑의 열쇠가 통한다는 이야기가 되겠지. 잘도 알아냈군. 후루미나미 나몬이 알려 주던가?

 

눈에 띄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해당 없음.

 

무로 시라베: 그렇다면 시행착오를 통해 스스로 알아냈군.

 

긴장. 그리고 긴장한 모습을 내가 보고 있음에서 비롯되는 긴장. 그것은 일종의 연쇄반응이었다. 나는 그가 얼어붙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도 반신반의하는 가설을 그에게 물었다. 내가 믿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믿고 있다면 진위를 가려낼 수 있다.

 

무로 시라베: 나에게 사랑의 열쇠를 사용했나?

 

동공의 확장과 긴장. 감정을 갈무리하려는 기색. 나는 알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도구 형태의 정신조작을 사용했다.

 

무로 시라베: 나에게서 무엇을 알아낸 거냐. 대답해라.

 

하기와라 우시오가 곧이어 소리를 질렀다.

 

기와라 우시오: 뭐?! 히무로한테도 썼다고? 이거 진짜에요? 무슨 사람 취향이 어떻게 카이다랑 히무로야!

 

루미나미 나몬: 맞아! 어디서 히무로한테 눈독을 들여. 내가 썼어야 했는데! 내가 썼으면 더 크게 모욕할 수 있었을 텐데!

 

롤 브라이트: 이렇게 악취미인 사람일 줄은 몰랐네요.

 

바라 쿠리스: 으으… 대체 뭘 하려고 했던 거야. 너어어!

 

츠보: 설마 히무로한테도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닐 거고. 정보를 캐내려 쓴 거겠지만… 히무로. 어떻게 알았어? 스스로가 사랑의 열쇠에 당했는지, 당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거야?

 

무로 시라베: 없다. 나 또한 확신하지 않았다.

 

츠보: 그런 것 치고는 꽤 확신한 어투던데?

 

무로 시라베: 내가 확신했다고 그가 믿게끔 만들어야 했으니까. 나는 얼마 전 기분 나쁜 꿈을 꾸었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난 직후에는 어떤 꿈을 꾸었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지 모욕을 당했다는 기분만을 느꼈지. 사랑의 열쇠가 사람의 무의식을 조종한다면 나의 그 체험도 꿈의 조작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기에 토키와 아유키가 나의 추궁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해 보았다.

 

무로 시라베: 그러니 이제 나에게서 무엇을 알아냈는지 들려주었으면 좋겠군. 카텟 기관에 대한 정보인가? 그게 아니라면 나의 약점에 대해 알아냈나?

 

토키와 아유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 더욱 유리했다. 기껏 사랑의 열쇠로 알아낸 정보를 헌납하여 다른 이들 또한 그것을 공유하게 되거나, 그의 노림수에 대비책을 세우는 것은 그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내가 그였다면 침묵을 지키는 대신 무엇을 발설해도 좋은지를 숙고한 뒤 몇 개를 귀띔해 주었을 것이다. 결국 심문 끝에 전부 밝혀지게 될 사실이 많을 테니 상대가 심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끔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기와라 우시오: 아니 잠깐. 그러면 저놈은 스윗무로를 자기 눈으로 봤다는 거 아니야?! 진심 극혐이다!

 

자. 잠깐! 히무로도 당한다니 그 사랑의 열쇠. 거부권 같은 건 전혀 없는 거야?! 하는 대로 당해줘야 해?! 그건 너무

 

무로 시라베: 강력하지. 그러나 우리 또한 그 강력함을 이용할 수 있다. 이제 심문의 형식을 바꿔도 좋을 것 같군.

 

기와라 우시오: 형식? 어어? 야야야야야. 이게 드디어 사람을 패려고 하네!

 

무로 시라베: 그런 수법은 아직 쓸 필요가 없다. 정신을 조작할 수 있는 도구가 수중에 들어왔으니 그것을 사용하면 그만인 일이다.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쓸 수 있는 열쇠'. 크레딧 상점의 설명으로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 요구사항대로라면 나는 결코 사랑의 열쇠를 쓸 수 없는 몸이었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들은 캐롤 브라이트 혹은 이름 없는 남자 뿐이리라.

 

하지만 토키와 아유키가 카이다 쿠로하나 나를 진정하게 사랑할 수 있는가? 전혀. 요구사항은 허구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해도 나 또한 토키와 아유키에게 열쇠를 사용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았으나,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무로 시라베: 토키와 아유키에게 심문을 하고픈 사람이 있나? 없다면 내가 직접 하겠다.

 

이토록 손쉬운 심문 기회는 흔하지 않았다. 진정한 사랑 없이도 사랑의 열쇠는 작동한다. 사랑의 열쇠가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나는 그의 정신에 침입하여 알아낼 수 있는 것을 전부 알아내고자 했다.

 

 

 

 

 

 

그 사람은 말했다.

 

네 이름을 떠올려야 해. 마유즈미.

 

무로 시라베: 이전에도 말했지만 이 장소는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 아니야. 너는 네 몸의 주도권을 다른 이에게 빼앗긴 채 이곳에 갇혀 있어. 그러니 깨어나서 네 몸을 되찾아야만 해.

 

무로 시라베: 이곳은 꿈이야. 마유즈미. 네 정신세계 안이야. 네 것이 아닌 자아가 너를 밀어냈어. 이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네가 너 스스로의 이름을 떠올려야 해. 그것을 통해 너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재정립한다면, 다시 깨어날 수 있게 될 거야.

 

유즈미 나데시코: 나가야 해

 

유즈미 나데시코: 여긴 꿈이야. 나가야 해

 

이제 기억이 났어. 내 언니라는 사람은… 이미 죽었어… 그 사람이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는 그저 언니의 대신일 뿐

 

일기

 

그 사람은 예술가였다. 진짜 예술가라는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었다.

나는 가족인 그 사람의 그림자를 따른다. 그 사람의 행위는 내 귀감이었고,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그 사람의 예술은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정말로 정말로 드물고 대단한 사람이었다. 주머니 속에서 드러나는 송곳 같은 사람이었다.

 

그 자리를 차지한 바보같은 어린애

 

그러나 내가 그녀의 이름을 썼으니. 그 사람은 언젠가 잊힐 것이다. 그녀는 내게 흡수될 것이다. 동화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언젠가 영영 잊힐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으로 나를 기억하리라. 너무 잔혹한 일이다.

 

이제 언니의 작품은 나의 작품이다. 과거 작품도 전부 이제는 나라는 사람의 것이 되었다. 아무도 기리지 않는다. 심지어는 나마저도.

 

그녀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나를 원망하리라.

바로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

 

나의 탓이에요. 나의 탓이에요.

 

Mea Culpa Mea Culpa

 

유즈미 나데시코: 나의 크나큰 탓입니다.

 

Mea Maxima Culpa

 

슬픔과 통곡. 혼란만이 가득 찬 방을 바라보지 않으려 두 눈을 감고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러나 아무리 세게 짓눌러도. 듣고 싶지 않아 틈 없이 틀어막으려 할지라도 그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내 딸!"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멍청한 딸년이 결국 내 명예까지 더럽히는군. 남자와 놀아나다가 그렇게 끔찍하게 죽다니…!"

 

그리고 두 분이 싸운다. 그게 할 말이냐고… 당신이 그런 태도니까 나데시코가 못 견딘 거 아니냐고… 우리가 죽인 거라고 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비명을 지르니.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다… 울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방에 가둬만 놓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키워야 하는 걸 여기저기 쏘다니게 풀어주니 자기 분수도 모르고 날뛰었던 거야!"

 

"당주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유즈미 나데시코: 무슨 말을 하는 거에요… 다들 무슨 말이야… 사람이 죽었어요. 언니가… 그 언니가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이 내 가족이라는 건 무척 끔찍한 일이다.

왜냐하면 가족이라는 끈은 누가 어떻게 해도 끊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가족이 생기더라도 그 뿌리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섬겨야 하는 부모님이라던가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다. 말 그대로 나는 가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내 일부는 저 사람들일까. 나도 언젠가 저 사람들처럼 변모할까를 떠올리면 두려움에 벌벌 떨게 된다.

 

"이제는 실수를 고쳐야 한다. 원래 이렇게 해야만 했어. 밖에 내보내선 안 돼."

 

"맞아요! □□마저 잃을 수는 없어요… 내 딸을 또 잃을 수는 없어!"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요. 당주님?"

 

"문을 닫고 TV를 치워. 가둔 채로 기르는 거야. 사용인들에게는 시킨 말만 하라고 지시해. 그럼 이번에는 죽지 않겠지… 그렇게 비참하게 죽지는 않을 거야…"

 

유즈미 나데시코: 기른다뇨… 저를요?

 

그 말에 상처를 받고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아빠의 그 말에서 너무 큰 아픔이 느껴진다… 엄청난 아픔이… 분명 누구도 언니가 죽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비참하다는 건 정확히 어떤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저. 알아선 안 된다… 저렇게 매몰찬 말을 하는 아빠마저 통곡하게 만드는 끝은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지도 않아서 무서울 뿐이었다

 

생각했다. 다음 방으로 가야 해.

 

후스마를 열고 다음 방으로 가야 그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어.

 

유즈미 나데시코: 그런데 무서워.

 

그치만 가야 해.

 

유즈미 나데시코: 기억해내야 해

 

무로 시라베: …이곳에 멈춰 있을수는 없어. 마유즈미. 다른 기억을 향해 가야만 해.

 

그 사람한테 기댈 수만은 없어.

 

유즈미 나데시코: 으. 우와아아아아앗!

 

집안 사람들이 빽빽하게 찬 방을 두 손 불끈 쥔 채로 가로질렀다. 분명 내 기억일 뿐이지 진짜 사람이 아니란 건 알았지만, 다들 얼굴이 너무 초췌하고 신경질이 가득해서 곁눈질하는것도 무서웠다. 특히 엄마랑 아빠가 제일 무서웠다.

 

아무튼 반대편으로 건너가서 후스마를 열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이얍! 하!

 

기합을 넣고서 후스마 반대편에 어떤 무서운 게 있더라도 겁먹지 않을 각오를 했다. 요괴가 눈 앞에 나타나도 소리만 지르고 도망은 안 갈 만한 용기를 가지고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 안에는 사람 하나를 바보 취급하는 나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왜 언니의 이름을 쓰라고 하는 거야? 왜? 나는 언니가 아니잖아!"

어린 내가 그랬다. 화가 잔뜩 났다. 어린 내 앞에 세 명의 사람이 서 있는데. 어린 내가 불러세우기라도 한 듯이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없고 오히려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이 당당하다.

 

"뭐라는 거니. 나데시코? 너는 원래부터 나데시코였잖니."

아빠가 그랬다.

 

"너는 나데시코야. 나데시코."

엄마가 그랬다.

 

"아가씨는 나데시코였어요."

새로 친해진 시녀도 그랬다.

 

"나데시코가 아닌 적이 있던가?"

다시 아빠가 그랬다. 하루아침에 나데시코가 되었다. 하나의 집. 한 명이 가진 진솔함. 그리고 다른 모두는 거짓말쟁이. 진솔함 따위는 아무것도 이겨내지 못한다.

 

초고교급이 되는 기분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하루아침에 사람들이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과 역량과 태도와 삶을 강요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후스마를 연다. 다음 방.

 

"나는 나데시코였나?"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린애를 바보로 만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 분명 알고 있는 것이었는데. 헷갈려서는 안 되는 문제인데 헷갈리고 있다.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처음부터 나데시코였던 걸까? 그렇다면 언니는?"

그러나 두 나데시코가 있을 수는 없다. 분명 나데시코와 나머지 하나가 있었다. 언니의 존재를 잊지는 않았다.

 

그리고 곧 다음 바보가 만들어진다.

 

"언니라뇨? 아가씨. 아가씨가 첫째 딸이었잖아요."

 

"여보. 나데시코가 또 자기 이름을 헷갈리나 봐요."

 

"요즘 유독 그러는구나. 치료사를 불러야겠지?"

 

아무리 바보가 안 되려 해도 시간 문제다.

 

"이걸 들여다보고 말하렴.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

 

이 사람은 일컨대 바보 대왕이다. 지금껏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사람 중 가장 뛰어나다. 생각을 쪽 빼내고 다른 무언가를 채운다.

 

바보 대왕은 거울을 들고 왔다. 그리고 어린 내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항상 그렇게 말하도록 시켰다.

 

"싫어요!"

 

"열 번만 하면 된단다.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잖니? 나쁜 아이가 되려는 건 아니지?"

 

바보 대왕은 누구보다 끈질기다. 거울을 들고 따라붙는다. 방에서 나가려고 하면 주변을 둘러싼 시종들과 시녀들이 막는다. 그래서 결국 어린 나는 말하게 되었다.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 내 이름은"

 

후스마를 연다. 다음 방.

 

"열 다섯 번."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나데시코다.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후스마를 연다. 다음 방.

 

"스무 번."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

 

후스마를 연다. 다음 방.

 

"쉰 번."

 

매일매일. 어린 나는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를 받았다.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어린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를 거부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는 손거울을 보거나 욕실의 거울을 볼 때도. 연못을 들여다보고 내 모습을 볼 때도 항상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에 대해 생각했다. 누가 집에서 나데시코라는 이름을 부르면 어린 나는 자기를 부르는 줄 알게 되었다.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는 어린 나의 일부가 되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좁은 집에 갇혀서 받는 것은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 아니면 서예 연습이었다. 방문의 빈도도 늘었다. 분명 격일이었는데. 한 번은 어린 내가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를 받던 도중 물었다.

 

"치료사님… 나데시코는 순종적인 여자애라는 뜻이라던데. 진짜예요?"

 

"그럼. 잘 아는구나. 누가 알려줬니?"

 

어린 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이었다. 답은 안다. 그러나 그게 왜 답인지는 몰랐다.

 

"언니요."

 

"당주님. 아무래도 치료 시기를 매일로 바꿔야겠어요."

 

죽음은 언제나 끔찍하다. 이 세상의 물것들 중에 죽음이 가장 끔찍하다. 누구도 어찌할 수 없고, 피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조차도 없다. 단 하나 가능한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어린 나는 매일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를 받게 되었다. 바보가 되어갔다. 바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람이 내가 나데시코라 하잖아! 왜 다 언니를 없는 척하는 거야. 왜 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래! 언니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그걸 모른척하며 살아!"

 

화를 내봤자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네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못 하는 거냐?"

 

그야 바보 말을 듣는 건 바보짓이니까. 그리고 어린 나는 항상 바보여야만 했으니까.

 

"못 하겠어! 다 이상해! 날 여기에 가둬두는 것도 이상해. 너무 이상해! 내보내줘.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너 때문에 우리 모두 힘들다. □… 아니. 나데시코! 네가 정 그렇게 힘들다면. 마음대로 해라. 어디서 자빠져 죽든 간섭하지 않으마! 하지만… 네 의무는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갈 거다."

 

테레비의 존재도 모르는 채로 큰 동생들. 얼마 만나지도 못했다. 어린 나는 그 아이들이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를 받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는 고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계를 천천히 밟으며 죽어가는 일이었다.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를 받는 동안 어린 나의 모든 것이 무너졌다. 어린 나는 하루가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해가 뜨고 지기보다는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를 몇 번 받는지가 하루의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낮에 자거나 밤에 못 자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백 번."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 곱하기 백 번.

 

백 번이 끝나고 어린 내가 묻는다.

 

"치료사님. 그런데 우리 왜 이거를 하루 세 번씩 하는 거예요? 당연한 얘기를."

 

그러나 나는 잊고 싶지 않다. 오직 나만이 잊으려 하지 않는다. 제발 잊지 않게 해 주세요. 제발요. 부탁해요. 부탁할게요…

 

잠시 쉬자.

 

유즈미 나데시코: 으으… 머리 아파… 너무 안 됐어… 어떻게 이런 작은 애한테 이런 짓을

 

언니를 빼앗겼다. 자신도 빼앗겼다… 머릿속에 있는 기억 전부가 모호해지고 언제나 마유즈미 나데시코라는 말을 듣자. 어린 나의 삶이란 구멍이 숭숭 뚫린 부분들의 모음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많은 것이 가려지고 덧칠된 그림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태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

 

어린 나는 멍하니 말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그렇지 않아. 너는 나데시코가 아니야.

 

유즈미 나데시코: 그건 내 이름이 아니야. 다른 누군가의 이름이야.

 

내가 그렇게 말하자 집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어린 나가 나타났다. 촛불에 기대어 숨겨둔 종이에. 사유물로 숨기는 데에 성공한 단 한 장의 종이에 붓질을 하고 있는 어린 나. 지면이 아까워 붓의 아주 얇디 얇은 첨단만을 세우고 아주 작은 글씨를 쓰는 묘기를 보이며. 이렇게 썼다.

 

일기

그 사람은 예술가였다. 진짜 예술가라는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었다.

나는 가족인 그 사람의 그림자를 따른다. 그 사람의 행위는 내 귀감이었고,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그 사람의 예술은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정말로 정말로 드물고 대단한 사람이었다. 주머니 속에서 드러나는 송곳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녀의 이름을 썼으니. 그 사람은 언젠가 잊힐 것이다. 그녀는 내게 흡수될 것이다. 동화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언젠가 영영 잊힐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으로 나를 기억하리라. 너무 잔혹한 일이다.

그녀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나를 원망하리라.

바로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

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

 

유즈미 나데시코: 아니야.

 

"Mea Culpa 나 때문에 언니가…"

 

유즈미 나데시코: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남겨야 해. 잊지 않도록… 누군가는 알아야 해…"

 

그것은 아마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를 서른 번 받던 시기였을 것이다.

 

후스마를 열지 않았지만 집이 움직인다.

 

"태워."

 

아빠의 명령에 따라 글씨로 빽빽한 종이가 타올랐다.

 

어린 내가 발버둥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날밤. 어린 내가 울었다.

 

어린 나는 언니에게 미안하다는 말만을 한다.

 

네 잘못이 아니야.

 

미안해하지 마.

 

나데시코.

 

나의 이름이 아니다.

 

빼앗은 이름이다.

 

넌 내가 누구인지 이미 알아. 나데시코… 아니. 이 이름으로 부르면 안 되나? 응?

"그건 네 삶이 아니야."

"네 자리에는 내가 있어야만 했어. 그건 원래 내 자리야. 내 삶이야…"

"내놓으라고!"

넌 날 잊을 자격이 없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 또한 정당하지 않아. 알아들어? 내가 네 삶을 살았다면 너보다 훨씬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을 거야… 내가 네 자리에 있어야 했다고. 넌 쓰레기야. 쓰레기. 쓰레기! 네 삶을 나에게 내놔… 날 자세히 보고. 기억해내 봐!

 

이것은 언니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다. 내 언니인 척을 하고 있던 사람의 말.

 

언니라면 분명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 언니 눈에 진짜 귀여운 동생이었으니까. 약간 부끄러운 소리지만 내가 어린 나를 봐도 귀엽기는 하니까.

 

껴안아주고 싶으니까 껴안아야지.

 

어린 나는 반응이 없다. 그야 나는 진짜 집에 있는 게 아니니까. 내 쪽에서 안는 거지 어린 내가 안기는 건 아니다. 어린 나는 이때 울면서 혼자서 잠에 들었다. 그 사실은 바뀌지 않아.

 

나데시코. 분명 나의 이름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불리는 건 이제 나밖에 없게 되었으니까 그 빈자리를 감히 채워 보자면, 분명 언니라면 어린 나에게

 

마유즈미 나데시코라는 멋진 사람은 이 꼬마한테… 이렇게 말했을 거야… 이렇게 꽉 안은 채로

 

유즈미 나데시코: 사랑해.

 

유즈미 나데시코: 기억할게.

 

유즈미 나데시코: 네가 나를 잊을지라도 내가 기억할게.

 

이제는 혼자가 아니다.

 

내 곁에 항상 그녀가 있기 때문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라는 사람은 사라져 버렸다.

 

떨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이 꿈에서 깨어나면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다.

 

하지만 기억할 것이다.

 

앞으로도 그녀가 나와 함께 했던 추억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런다면, 나는 그녀와 함께 살아가게 되리라.

 

그렇게 나는 나를 용서하고, 나와 화해했다.

 

울고 있는 나를 오래 안아준 뒤에 나는 후스마를 열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언니.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그곳에 있었다. 어린 나의 볼을 잡아당기면서.

 

유즈미 나데시코: 나 가볼게.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한 다음. 나는 터지려는 눈물을 참았다. 영영 이별이 아니다. 그녀는 나와 함께한다. 어디에 가도 언니가 있을 테니. 안녕히가 아니다.

 

인사를 마친 뒤 나는 후스마를 몇 개 더 열었다.

 

그러나 집 안으로 가기 위해 연 것은 아니었다. 집 안에서 벌어진 일들은 이미 충분히 보았다.

 

마지막 후스마. 검은색 정원과 연못이 보이는, 마유즈미 저택의 끝단이다.

 

나는 내 발을 간지럽히는 검은색 풀들을 조심스럽게 밟았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밖에서 일어난 일을 봐야 해.

 

나는 맨발로 까마득하게 먼 현관을 향해 총총 걸어갔다. 분명 나는 집을 나서는 게 처음 같다. 나의 모든 기억들은 한 집 안에서만 이루어졌다. 나의 모든 것, 소중한 것과 싫은 것을 아우르는 모든 것이 등 뒤에 있는데도 현관을 향하는 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약간의 두려움과 이상할 정도로 솟아오르는 용기를 느꼈다. 왜지? 왜일까? 몰랐다. 다 알아낸 뒤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유괴

 

라이너 마리아 릴케

 

어릴 적 그녀는 시녀들에게서

달아나곤 했다, 바깥 세상의 밤과 바람이

(궁정 안의 밤과 바람은 사뭇 달랐기에)

시작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

 

하지만 어떤 폭풍의 밤도 확실하게

그 커다란 정원을 조각조각 찢어내지 못했다,

이제 그녀의 양심이 그것을 갈기갈기 잡아뜯자,

정원은 비단 사다리에서 그녀를 끌어내

멀리 데려갔다, 멀리, 멀리… :

 

마차만이 전부가 될 때까지.

 

그리고 그녀는 그 검은 마차의 냄새를 맡았다,

억눌린 질주와 위험만이 따르는

그 마차의 냄새를.

그리고 마차가 차가운 것으로 덮여 있음을 알았다 ;

검고 차가운 것은 그녀 가슴속에도 있었다.

그녀는 두건이 달린 망토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작별 인사라도 하려는 듯 머리칼을 더듬어보았다,

그때 낯선 사나이의 낯선 말소리가 들려왔다 :

나는 네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