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4

더 단크 타워 챕터 4 - 4

도타싫어! 2024. 5. 9. 00:35

더 단크 타워

챕터 4: < 황금 원숭이의 손길 >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캐롤은 예상외의 피로를 느꼈다.

 

내심 그녀는 마유즈미의 자아를 표면으로 끌어오는 것이 쉬우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가진 샤이닝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과거의 일은 과거일 뿐이라 그녀는 생각했지만, 그렇게 넘길 수가 없었다. 막상 마주치자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쌓여 있던 말을 토해냈다. 차마 무서워서 물어보지 못했던 것들, 물어보고 싶었던 것들. 해야 했던 말들을.

 

그 과정에서 캐롤은 자신의 잊고 싶었던 기억을 떠올려야만 했다. 골든 프롬. 그녀가 자신의 위험성을 깨닫게 된 계기. 의도하지 않았던 재앙. 그 일은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그녀를 당시의 상황에 돌려놓는 것 같았다. 모든 비웃음. 그리고 배신당한 기분. 오해의 가장 나쁜 점은 바로 오해라는 걸 알고도 오해 당시의 감정을 가진다는 것이다. 캐롤은 자신이 겪은 일에 커다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있어야만 한다는 표현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캐롤의 인생은 그날을 이래로 송두리째 바뀌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그런 대사건이 그녀를 골탕 먹이겠다 따위의 단순한 의도로 행해졌다는 사실을, 캐롤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어째서 그녀는 고통스러워야 했나? 그냥 재수 없어서. (하하하!)

 

심지어는 문제 없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했던 마유즈미의 의식 복원마저 좌절되었으니 이보다 낭패일 수가 없었다. 캐롤은 탈력감에 거의 비틀거리며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저 쉬고 싶었다. 내일도 시라유키에게 터치를 쓰기 위해서는 몸을 회복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정신에 틈을 만들 만한 샤이닝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캐롤은 자신의 숙소 문을 여는 순간까지도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쓰러지겠노라 다짐했다. 잔뜩 아우성을 내는 몸을 달래기 위한 일이었다. 곧 달콤한 휴식이 올 테니 조금만 힘내자는 타이름. 문을 여는 순간 그녀의 미워할 수 없는 동생이 그녀를 반겨줄 터였다. 수다도 떨 수 있겠지.

 

롤 브라이트: 언니 왔어. 치나미. 제츠보 씨 말 잘 듣고 있었지?

 

캐롤은 문을 열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주 잠깐. 캐롤의 가슴이 철렁 떨어지려다가 말았다. 캐롤은 그것이 재미있는 장난인 줄만 알았다. 어디 있냐고 두리번거리고 있자면 침대 밑에서 카이다가 왁 하고 솟아오르는 종류의 장난. 만약 제츠보가 그것을 허락했다면 두 사람이 나름대로 친해졌다는 반증이 되기도 할 것이다. 설마 나나시 씨도 숨었나? 앗. 내가 전용실에서 가져와서 몰래 읽던 책을 찾지는 않았겠지?

 

롤 브라이트: 우리 치나미가 어디에 숨었을까? 아. 숨었대. 어디에 갔을까? 전혀 모르겠네…?

 

캐롤의 어미에는 카이다가 그 방 안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담겼다. 혹시나. 그저 혹시나였다. 하지만 결국 그 혹시나는 역시가 되었다. 방 안에는 누구도 없었다. 몇 초를 기다려 봐도. 숨을 만한 곳을 조심스럽게 들춰 보아도 카이다와 제츠보는 흔적 하나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캐롤은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처럼 동요했다.

 

롤 브라이트: 치. 치나미? 나나시 씨? 제츠보 씨도! 다… 다 어디 간 거야?!

 

캐롤은 곧장 카이다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롤 브라이트: 치나미! 너 괜찮니?! 지금 어디야!

 

츠보: 캐롤. 네 동생한테 뭘 물어볼 때 괜찮은지 여부는 안 물어봐도 돼. 아마 이 탑에서 나 다음으로 괜찮을 사람이 카이다니까.

 

캐롤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크게 안심했다.

 

롤 브라이트: 제츠보 씨! 옆에 계시군요!

 

츠보: 그래. 여전히 옆에 있지. 얘 따라다니는 게 내 일이니까. 나는 그저 따라다녔을 뿐이야. 캐롤. 쪽지 하나 안 남기고 간 네 동생을 탓해.

 

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도 옆에 계신가요?

 

츠보: 그놈은 내가 내쫓았어. 일이 있어서.

 

캐롤은 제츠보의 어투에 왜인지 날이 서 있음을 느꼈다. 정확한 이유는 몰랐지만, 그 이유를 파지는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이다 쿠로하: 아. 안녕. 언니. 나는 그냥 뭐. 용서라도 받을까 싶어서 나왔어. 괜찮잖아.

 

롤 브라이트: 무슨 말을 그렇게 쉽게 하니?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는 알아?

 

이다 쿠로하:… 그렇지만… 나도 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잖아! 언니가 내 엄마도 아니고!

 

카이다 치고는 날카로운 통찰이었다. 본래 카이다 정도의 나이면 형제자매가 서로 어디 쏘다니는지를 관심 가질 필요는 없다.

 

츠보: 그렇긴 하지만 너에게 적용되는 얘기는 아니야. 너는 특별하잖아. 카이다.

 

이다 쿠로하: 그. 그래? 흐흐. 그렇긴 하지.

 

카이다는 멋쩍게 웃었다. 제츠보는 나나시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칭찬 아닌데. 이거?

 

츠보: 너는 이 탑에서 나 다음으로 힘이 세고, 상식이 없고, 잔혹하잖아. 너는 정상적인 고등학생 수준의 사고가 불가능해. 그러니 캐롤이 동생인 너한테 휘말려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러니 네 언니 입장에서도 한 번 생각해보지 그래.

 

카이다는 늘 하던대로, 제츠보의 말에 무조건 반박하려고 했다. 일단 묻어두고 욕을 내뱉으며 조롱이나 던지려 했다. 하지만 카이다는 여전히 이바라의 말이 남긴 불편함을 곱씹고 있었다. 업보가 돌아올 거라는 말. 그 말이 주는 불길함. 그것은 항상 캐롤에게 느끼고 있는 감사함 및 부채감과 합쳐져 그녀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뚱한 카이다가 탄생했다.

 

이다 쿠로하: 치. 흥.

 

롤 브라이트: 아하하… 제츠보 씨도 네가 걱정되셔서 그러나 봐.

 

이다 쿠로하: 이 새끼가 나를 왜 걱정해. 나 걱정해 주는 건 언니밖에 없어. 나도 언니 말고는 다 필요 없다고.

 

츠보: 그 말이 맞아.

 

이다 쿠로하: 제기랄

 

롤 브라이트: 그래서 치나미. 너 지금 어디에 있니? 아. 좋은 생각났다. 오늘은 내 방에서 다 같이 자는 건 어때? 파자마 파티처럼!

 

캐롤은 그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뻤다. 여자들끼리 다지는 친목. Sleepover. 그녀는 머리가 금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이래 한 번도 파자마 파티에 초대받지 못했고 누군가를 초대하지도 못했다. 그것을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가족과 함께 한다니!

 

하지만 카이다와 제츠보는 그 어느 쪽도 서로가 있는 파자마 파티를 원하지 않았다.

 

츠보: 정중히 거절하고 싶은데. 캐롤.

 

이다 쿠로하: 나도  됐어. 언니. 나는 이 깡통 하나만 방에 있어도 거슬려서 못 자. 언니를 싫어하는 건 전혀 아니지만, 또 언니랑 거리를 두고 싶지도 않지만… 나는 그냥 거슬리면 잠을 못 자.

 

롤 브라이트: 아. 그랬구나… 언니가 미안해. 그런 줄도 모르고

 

이다 쿠로하: 시. 신경 쓰지 마! 뭐 그런 거로 사과를 하고 그래? 잊어버려!

카이다에게 있어서 잘못을 인정한다는 건 자존심보다 다른 사람을 위에 놓는 일이다. 그러니 카이다는 캐롤이 건넨 사과에 부담을 느꼈다. 카이다에게 그것은 약속시간에 5분 늦었다고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려 드는 일과 같았다.

 

한편, 카이다는 사과를 받아서 오히려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뭐라고? 고작 저런 일로 나한테 미안하다 한다고? 언니가 그 정도로 나를 아낀단 말이야?

 

카이다는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다는 점이 그녀에게 만족감을 주었고, 마음에 안 드는 깡통을 긁을 만한 말을 하나 떠올렸기 때문이다. 기이하게 카이다는 모욕에 있어서 남들보다 나은 사고를 했다.

 

이다 쿠로하: 그리고 언니는 오늘도 ㅊ… 나나시랑 잘 거잖아. 내가 끼어들 순 없지.

 

다이얼로그 너머로 제츠보는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캐롤은 굳이 오해를 정정하기로 했다. 제츠보와 척을 지는 건 그녀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터치에 완전히 면역인 강자라면 우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게 상책이었다.

 

롤 브라이트: 오늘은 안 자. 언니가 그렇게 방종하게 사는 줄 아니? 어제는 그냥… 의지할 만한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이야. 너무 무서웠거든.

 

이다 쿠로하: 뭐가 무서워? 언니 세잖아. 누구든 만지기만 하면 끝장낼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롤 브라이트: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치나미.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게다가 죽음이라는 건 정말 아무도 모르게… 내가 전혀 대비하지 못하는 형태로 찾아왔어.

 

캐롤 브라이트는 죽기 몇 분 전까지도 자신이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후루미나미 나몬에게 간접적인 터치를 쓰는 강수를 둬가며까지 인플레이션과 보급 특권의 권리를 쟁취한 끝에. 그들은 해변으로 항생제를 보냈다. 정말 모든 게 끝난 줄만 알았다.

 

하지만 결국 캐롤은 온몸이 유리로 변해가며 죽었다.

 

롤 브라이트: 그리고 그건… 힘든 일이었어.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 나는 있잖아… 어제까지만 해도 몸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어. 힘을 풀면 내 몸이 다시 깨져나갈까 봐 두려웠어. 하지만 옆에서 달래준 덕분에… 지금은 괜찮아진 거야. 그러니까 나나시 씨랑 잘 지내 줘.

 

제츠보와 캐롤은 모두 부활한 사람들이었다. 둘 모두 죽음에서 부활했다. 그런데 노네임은 제츠보에게 제츠보라는 이름을 주었고, 나나시는 캐롤을 달래 주었다.

 

제츠보는 무엇이 그렇게 다른가? 따위의 의문은 가지지 않기로 했다. 살아있다는 것과 살아있지 않다는 것이 모든 것을 결정지었다. 외부 요인으로 인해 온전하게 되살아난 것과 스스로 부품을 조립한 끝에 부분적으로 되살린 것의 차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노네임과 나나시라는 사람의 차이이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기억을 잃은 뒤에 나나시는 제츠보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노네임과는 달랐다. 그것이 인격의 성장 때문인가, 기억의 부재로 인해서 제츠보를 노바디의 대체품이 아닌 제츠보라는 존재 그대로 인정하게 된 것일까? 어느 쪽이든 간에 노바디에 대한 기억은 그들에게 고통만을 안겨주는가? 이런 식의 질문이 끝도 없이 늘어지기에 제츠보는 깊은 생각을 그만두었다.

 

이다 쿠로하: …언니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알겠어.

 

캐롤은 자신의 동생이 기특해서 잠시 목이 메었다.

 

롤 브라이트: 착하다. 우리 치나미. 나 보고 싶으면 언제든 와야 해. 알겠지? 내가 필요하면 전화하는 거 잊지 말고.

 

이다 쿠로하: 나는 언니가 필요 없어… 아니. 그게 아니라! 굳이 언니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될 만큼 내가 강하고 또 내가 언니를 아낀다는 거야! 오. 오해하지 마!

 

롤 브라이트: 오해 안 해. 치나미. 좋은 꿈 꿔. 알겠지?

 

이다 쿠로하: …언니도 잘 자. 조심하고.

 

카이다는 다이얼로그를 끊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딱히 어떤 노래였던 것은 아니다, 카이다는 그저 리듬을 되는대로 내뱉었다.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저 즐거웠다. 캐롤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걱정돼서! 잠깐 자리 좀 비웠다고 전화를 걸어 찾을 정도로 그녀가 중요했던 것이다!

 

물론 꼭 중요하기 때문에만 전화를 건 것은 아니었다. 캐롤이 생각하기에도 카이다는 캐롤에게만 살가워서, 풀어두었을 때 다른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캐롤은 제츠보가 카이다의 곁에 있는 것을 안 뒤에야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튼 그것 또한 카이다를 걱정하는 일이 아니던가?

 

캐롤에게는 카이다가 소중했다. 그렇기에 카이다에게도 캐롤은 점점 더 소중해졌다. 지금까지 하지 못한 일을 보상받는 것처럼 카이다는 가족이 주는 안정감과 애정이 점점 더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카이다는 이제 별반 원하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시술을 받기 전의 몸을 되찾는 건 불가능할뿐더러 살인 게임 안에서는 지금의 몸이 더 유리할 수도 있으니 논외. 따라서 카이다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만족스러웠다. 카이다에게는 과분한 행복이 그토록 쉽게 찾아왔다.

 

그것은 낭떠러지 끝까지 떠밀릴지라도 최후의 순간 등을 받쳐주는 제방이었다. 구명줄이었다. 평생 쓸 만한 양의 금액을 이미 저축한 사람의 감정이었다. 카이다는 이미 성공했다. 세상의 여타 사람들이 직업과 지위와 전세주택 대출에 허덕이는 와중 카이다는 길가에 있는 풀을 씹으며 바닥에 드러누울 수 있는 여유를 얻고야 말았다. 가족. 그거 하나면 전부 다 되었다.

 

하지만 상승은 반드시 하락을 내포했다. 조류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은 추락사다. 카이다의 대책 없는 행동들. 흑막을 상대로도 원하는 것을 내놓으라며 생떼를 쓸 수 있는 자유는 바로 카이다 본인이 그 어떤 것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감옥의 역설과 같았다. 감옥은 단지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해서나 범죄자를 사회에서 분리하기 위해 있는 곳이 아니다. 감옥은 범죄자가 재사회화되어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많은 감옥이 그 부분을 잊어버린다. 그렇기에 재사회화의 기회를 받지 못한 이들은 어차피 몇십 년 내다 버린 인생 다시 자신의 일을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간다.

 

여태까지 카이다는 그 무엇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자기 한 몸만 중요하게 여겼기에 모든 것을 배신했다. 모노로그에게 득이 되는 일이 곧 그녀에게 득이 되는 일이었기에 누구든 죽일 수 있었다. 어떤 일도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도 중요하게 여기는 게 생겼다. 행복하기에 그녀는 곧 불행해질 수 있게 되었다. 

 

카이다는 캐롤이 소중했다. 그리고 곧 카이다는 캐롤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렸다. 캐롤도 죽을 수가 있었다. 그럼 카이다는 어떻게 되지? 모든 것을 잃는다.

 

카이다는 왜인지 불안해졌다.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카이다는 무척 불안해졌다. 카이다는 애써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만약 업보라는 게 진짜로 있다면, 알게 모르게 척척 쌓이면서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면 과연 언제 그녀를 잡으러 올까? 글쎄. 겨우 분에 겨운 행복을 되찾고 가족과 재회한 지금이야말로 그녀가 중요시하던 모든 것들을 파괴하기에 적기가 아닐까?

 

카이다는 누군가가 그녀를 잡으러 오기라도 하듯이 미어캣처럼 고개를 돌려댔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적의의 징조를 찾으려고 했다. 누군가가 그녀를 노린다면, 업보가 사람의 형태로 찾아온다면 분명히 대응할 수 있다. 이 탑에는 사람밖에 없으니 대응할 수 있을 터였다. 카이다는 분명 최강이었고 그 사실을 스스로도 되뇌었으나. 정작 카이다는 조금도 시름을 놓을 수가 없었다.

 

 

 

 

 

기와라 우시오: 네가 그 말을 진짜 해버렸다는 걸 믿을 수가 없다. 이바라. 대체 언제 철들래! 이 아빠는 걱정이 돼서 참을 수가 없어요!

 

하기와라와 이바라는 계단을 헐레벌떡 내려갔다. 이바라는 카이다에게 한 마디라도 더 말을 던져 주고 싶었지만, 하기와라는 완강하게 이바라의 손을 잡아당겼다. 카이다가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 본 하기와라는 백만 분의 일 확률이라도 카이다가 그들에게 원한을 가지게끔 두고 싶지 않았다.

 

바라 쿠리스: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지 마. 하기와라. 나는 해야 하는 말을 한 거야. 카이다가 계속 우리를 모욕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고. 용서를 무슨 3분 카레처럼 해 달라고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기와라 우시오: 맞는 말이야. 또 맞는 말이라서 존나 조심해야 하는 거지.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네가 특정 가치의 수호자가 될 필요는 없잖아. 적어도 그걸 위해서 너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릴 필요는 없어. 캐롤이 우리 대신 설교해줄 거야.

 

하기와라는 가족이라는 단어에서 설교와 교정의 면모를 보았다. 반대로 이바라는 포용과 지지의 면모를 보았다.

 

바라 쿠리스: 가족끼리 설교를 왜 해? 좋은 일만 해주고 싶은 게 가족인데. 캐롤이 할 수 있는 건 카이다가 다른 사람을 해치면 내가 기쁘지 않을 거라는 말 뿐이야. 카이다의 태도 자체는 누구도 바꿀 수 없어.

 

기와라 우시오: 그러면 왜 캐롤마저 놓은 일을 너 혼자 붙들고 있는데? 너 스노우피자야?

 

바라 쿠리스: 피자? 갑자기 웬 피자?

 

이바라는 느닷없이 김을 빼는 하기와라의 말에 참지 못하고 되묻고야 말았다. 피자라니?

 

기와라 우시오: 스노우피자. 내일 지구가 망해도 사과나무 심는 사람.

 

바라 쿠리스: 그건 스피노자야! 그리고 캐롤이 카이다를 놓았을 리가 없어. 캐롤은 우릴 걱정해서라도 카이다를 점점 타이를 거야. 그리고! 나는 옳은 일을 했어! 카이다 성질을 건드려선 안 되니까 말도 제대로 못 한다니. 말도 안 돼!

 

이바라는 나이토를 생각했다.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해야 할 때가 있었고, 물러서지 못한 채 맞서야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반면 하기와라는 모리를 생각했다. 물론 나이토와 이바라가 하는 것은 은 고결한 일이다. 하지만 굽히지 않는 사람은 결국 부러지기 마련이다.

 

기와라 우시오: 나는 그냥 네가 위험해질 정도로 거친 말은 하지 말라는 거야. 이바라. 나도 아까 그년한테 시궁창 똥창 닦던 걸레라고 했잖아. 내가 예전에도 말했지? 주어진 선이 어디까지인지 알고 그 선을 고의로 넘는 건

 

바라 쿠리스: 코미디언의 의무라고. 나도 기억해.

 

이바라는 하기와라와 말싸움을 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둘 모두 각자의 상황에서 옳았기 때문이다. 카이다를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하냐고?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재촉할 것까지는 없다.

 

기와라 우시오: 이바라. 나도 진짜 카이다한테 욕 갈기고 싶어. 진짜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시원하게 갈기고 싶다고. 하지만 내가 그걸 진짜로 말했다간 카이다가 날 죽여버리고 말 거야.

 

바라 쿠리스: …이해했어. 하기와라. 걱정해 준 건 고맙지만, 여전히 나는 카이다가 마음에 안 들어. 카이다가 그냥 뻔뻔히 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자기 죗값을 다 갚고 행복하게 살 생각이라면, 나만큼은 절대 그걸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기와라 우시오: 그래. 그러진 마라. 나도 안 그럴 생각이야. 걔가 계속 정신 못 차리면 따끔하게 패드립이나 한 번 먹여 주려고.

 

이바라는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라 쿠리스: 캐롤이 듣고 있을 때는 안 하는 게 좋을 걸? 카이다한테 부모 욕을 하면 캐롤의 부모도 같이 욕하는 꼴이잖아.

 

기와라 우시오: 아. 그렇네? 아! 망할! 카이다 얘 꽤 똑똑하다? 이거까지 계산하고 캐롤이랑 자매로 태어난 거였네. 와…! 영악한 것!

 

바라 쿠리스: 으응…? 그거.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은데…?

 

이바라는 하기와라의 전후관계가 뒤틀린 말을 듣자 골통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하기와라와 이바라는 용케도 그렇게 수다를 떨어대며 다섯 층의 계단을 내리 내려온 뒤에야 멈추었다.

 

기와라 우시오: 아무래도 안 따라오는 것 같지? 휴. 제츠보 덕분에 시름 한 번 놨다.

 

바라 쿠리스: 그러니까 말이야. 또 캐롤이 옆에서 달래주니까 망정이지. 옛날이었어 봐. 너 또 잘근잘근 밟혔을 거야!

 

기와라 우시오: 그럼 또 다른 애들이 구해주러 왔을 테니까 괜찮았을 걸.

 

바라 쿠리스: 뭐어? 아까는 욕 한 번 했다고 내가 끔찍한 실책을 한 것처럼 굴더니. 정작 너는 태평하기 짝이 없네!

 

기와라 우시오: 어어? 듣고 보니 맞는 말이야.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기와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팔을 양쪽으로 넓게 벌렸다. 그러자 이바라의 손이 그의 손에 딸려 움직였다.

 

그제서야 이바라는 자신과 하기와라가 여전히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손. 피부의 접촉.

 

여기서 얼굴이 새빨개진 채 언제까지 잡고 있는 거냐고 주먹을 날린다면, 그것은 코미디의 전형일 것이다. 목 밑에서부터 정수리 끝부분까지. 가장 작게 나서 겉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머리카락의 말단까지 열로 차오른다면, 보기도 좋고 재미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바라는 그러는 대신 얼굴이 창백해지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이바라는 하기와라를 포함한 다른 이들에게 아직 말한 적이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바라는 하기와라가 그것을 알아채게 두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과 친한 이들에게 더더욱 비밀을 알려주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 그녀는 사고에 대해 털어놓은 칸나즈키에게마저도 마지막 한 겹의 비밀까지는 숨겨 두었다.

 

바라 쿠리스: 자. 잠깐!

 

이바라는 팔을 뒤로 홱 뻗어서 하기와라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살면서 그렇게 세게 남을 뿌리친 적이 없었던지라 정작 하기와라보다는 이바라 본인이 당황을 했다.

 

바라 쿠리스: 미. 미안해! 이렇게 세게 하려고는 안 했는데!

 

기와라 우시오: 어어? 어. 그래. 애초에 뭘 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어서 별로 할 말이 없다.

 

바라 쿠리스: 아. 어. 하하하하! 그. 그게 말이지. 민망하다! 아! 나 손에 땀이 많아서 민망해! 그래서 손에 환기를 좀. 시킨 거지!

기와라 우시오: 뭐? 땀? 한 방울도 안 흘려놓고 무슨 다한증 흉내야?

 

하기와라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남과 손을 잡아보면 알 수 있겠지만 자신의 손에서 난 땀과 타인의 손에서 난 땀은 서로 느낌이 다르다. 하기와라는 자신의 손에서 자신의 땀만을 미세하게 느꼈다. 이바라의 것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바라 쿠리스: 그. 그렇네. 나 손에 땀이 한 방울도 안 나서 민망하다! 아하하하. 하… 하 다한증에도 반대가 있나? 소한증? 내가 땀이 얼마 없어!

 

기와라 우시오: 아 맞아. 너 겨드랑이에서 냄새 안 난다고 했지. 땀이 안 나서 냄새도 안 났나 보지? 으흠. 그게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그런데 땀 안 나면 너는 체온 조절을 어떻게 하냐?

 

바라 쿠리스: 체온 조절?

 

완벽하지 않은 거짓말의 나쁜 점은 그 거짓말의 맹점을 메우기 위해 또 거짓말을 하고 그러면 그 맹점을 메우기 위해 따위로 맹점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기 때문이다. 이바라는 첫 번째 맹점에서부터 난색을 드러냈다.

 

기와라 우시오: 그래. 더울 때 땀이 나는 건 땀이 증발하면서 열을 앗아가기 때문이잖아. 그래서 개들은 더울 때 입을 벌리고 헥헥거릴 수밖에 없어. 땀이 인간만큼 안 나오니 입의 침을 증발시켜서 체온을 낮추는 거지. 잠깐. 이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궁금하다. 너는 어떻게 하는데?

 

바라 쿠리스: 그거 진짜… 다른 사람한테 던지기에는 엄청 이상한 질문인 것 같아. 하기와라.

 

기와라 우시오: 네가 스스로 그 생각을 안 해봤다는 게 더 놀랍다 야. 대체 언제부터 땀이 안 나오게 된 거야?

 

바라 쿠리스:… 그러니까… 고등학생이 되기 전에?

 

이바라는 생각했다. 아니 잠깐. 몸 전체에서 땀이 안 나온다는 얘기가 아니었는데. 오해가 점점 커지고 있잖아?

 

기와라 우시오: 아. 그래? 그럼 너도 지금은 헥헥거리고 다니는 거야? 씁. 네가 그러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바라 쿠리스: 아. 안 그래! 내가 왜 헥헥거려! 내가 개냐. 개?! 소. 손에만 땀이 안 나는 거야. 다른 곳에는 땀이 나.

 

기와라 우시오: …그럼 겨드랑이에서 냄새가 안 난다는 건 대체 무슨 소리야? 너 요정이야? 아니면 초등학생들 환상 속의 록스타냐? 그것도 아니면 신이야?

 

숨을 어떻게 쉬냐고 물으면 숨 쉬는 것을 의식하고 혀가 지금 네 입 안의 어디에 닿아 있느냐를 물으면 혀의 위치를 의식하게 되듯이. 땀에 관해서 듣고 있자니 이바라는 점점 개운치 않은 기분을 느꼈다. 덕분에 본래 이바라가 가지고 있던 불안과 긴장감은 전부 실없는 땀 이야기에 퇴색되어 버렸다.

 

바라 쿠리스: 우리 대체 왜 땀 이야기나 하고 있는 건데! 더럽잖아!

 

기와라 우시오: 야. 겨드랑이 땀 얘기는 네가 먼저 했어! 어디서 나한테 통째로 뒤집어씌우려고?!

 

바라 쿠리스: 아무튼 나는 이 얘기 더 안 해! 땀. 땀. 땀. 웩! 나는 자러 간다! 너도 잘 자든가 말든가!

 

기와라 우시오: 어. 그래. 내일 보자고!

 

하기와라와 이바라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하지만 하기와라 우시오는 몇 초간 그 자리에 서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왜 이바라는 느닷없이 땀 얘기를 한 것인가? 분명 이바라는 탑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개중에는 꽤 멀쩡한 축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웬 땀?

 

난들 아나. 애초에 파 봤자 재미있을 것 같지도 않고. 손을 갑자기 뺀 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기와라는 그렇게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롤 브라이트: 네. 여보세요? 나나시 씨? 웬일로 전화를 거셨네요? 머리카락을 쓰셔도 되는데.

 

롤 브라이트: 네. 피곤하긴 하죠.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롤 브라이트: 아. 당신 말이 맞기는 하네요. 샤이닝을 이렇게 쓰는데 피곤하지 않을 리가 없죠. 네.

 

롤 브라이트: 아뇨. 실패했어요. 시라유키는 터치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어요. 가까스로 정신을 열어 보긴 했지만 마유즈미 씨의 자아를 다시 표면으로 끌어오려면 시간이 걸릴 거예요.

 

롤 브라이트: 네. 그런 수단이 있더군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제가 할 수 있겠죠. 나나시 씨? 마유즈미 씨가… 돌아올 방법이 있겠죠?

 

롤 브라이트: 무슨 설정이요? 상황 설정이요? 그게 정확히 뭐죠?

 

롤 브라이트: 네. 평소처럼 손을 잡았어요. 늘 하던 것처럼… 그게 문제가 되나요?

 

….

 

롤 브라이트:… 정말 방법이 있어요?!

 

 

 

 

 

 

현시대에 시계공이 되려는 사람은 십만 명 중에 하나가 있을까 말까 한다.

 

이 시계공이 되려는 사람들 백 명 중 하나를 빼고는 다들 그만두어 버린다.

 

아직 그만두지 않은 시계공 천 명 중 손떨림을 완벽히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이 한 명의 확률을 뚫은 일류 장인은 나머지 구백 구십 구명에 비해 비교도 되지 않는 수입을 가진다.

 

손이 떨리지 않는 시계공 중 아주 정밀히 생산되는 오차범위 0.1% 이내의 작은 금속의 흠을 알아볼 수 있는 자는 만 명 중에 하나다.

 

이 한 명이 나머지 구천 구백 구십 구명과 어떤 차이를 가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확률을 뚫은 사람이 세상에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이름은 카나리 케이토다.

 

그것은 곧 카나리가 마음을 먹으면 백 년이 지날지언정 사람 호흡 한 번 만큼의 공기도 통하지 않는, 따라서 녹도 슬지 않고 고장도 나지 않는 시계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모든 부품이 정말 딱 맞게, 곰벌레가 몸을 들이밀 만큼의 틈도 없는 시계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본인의 의무라고 카나리는 생각했다. 그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떠올린 이 끝내주는 발상을 그의 스승에게 들려주었을 때. 똑딱맨은 카나리를 만류할 뿐이었다.

 

"왜요? 저는 만들 수 있다고요! 진짜 딱 맞아서 절대 고장 안 나는 시계!"

 

"그 완벽한 시계의 부품은 고장이 나지. 숨구멍을 안 터 놓으면 산을 오르내리는 정도의 기압차나 추위 앞에서 그 호흡이 끊기고 말아. 오차를 상정하지 않으면 날씨가 조금만 더워지는 것만으로도 서로 팽창해서 못 쓰게 된단 말이다."

 

카나리는 탑이라는 장소가 기후가 거의 동일하게 유지되는 장소여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시계를, 오차 없이 완벽해야 하는 시계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카나리의 한쪽 눈앞에는 다섯 개의 렌즈가 있었다. 손목시계를 만들기 위한 가장 최적의 배율이었다. 너무 드물게 쓰여서 사람들이 그 존재나 이름조차 모르는 시계의 철사 부품이 있다. 그 철사는 카나리가 한 바퀴를 회전시키면 시킬수록 팽팽해지고 있었다. 한 번 돌리면 그만큼 금속이 늘어난다. 늘어나는 만큼 철사는 점점 얇아졌다. 어느새 그것은 바이올린의 현보다도 더 빠듯해졌다. 카나리가 재채기를 해서 손이 한 번 크게 떨리기라도 한다면 그 진동만으로 철사는 툭 하고 끊어져 카나리의 살점을 아주 얇은 실선만큼 파고들고 베어들 터였지만 그는 손을 떨지 않았다. 그는 세기 귀찮을 정도의 확률을 뚫은 사람이다.

 

카나리는 자신이 떳떳하지 않은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누가 잘못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며 꺼드럭거릴 권리 따위 없었다. 토키와 아유키가 사람을 죽였다고? 카이다 쿠로하가 사람을 죽였다고? 카나리 본인 또한 나이토를 죽게 만들지 않았나.

 

카나리는 그들과 똑같았다. 그들을 욕할 자격이 없었다.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을 그렇게 죽이고 다녀 놓고서 가만히 사는 것은 두고 볼 수가 없다.

 

카나리의 전용실에는 온갖 시계가 있다. 그의 전문인 손목시계에서 시작해 탁상시계, 벽걸이시계, 괘종시계, 뻐꾸기가 뻐꾹 거리는 시계,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모래시계마저 있었다. 카나리는 그중 탁상시계의 시곗바늘을 천천히 마모시켰다. 그리고 최적의 두께, 무게, 길이를 계산했다. 기준은 어떠한 장력이 밑에서 발생하여 시계바늘을 내보냈을 때 그것이 잘 날아갈 것인가. 그리고 목표물을 제대로 꿰뚫을 것인가.

 

카나리가 무엇을 만드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바늘을 쏘는 일회용 석궁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50cm도 채 되지 않을 비거리. 경동맥을 노린다고 해도 시곗바늘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몸을 꿰뚫지 못하고 중간에 박히는 것으로 끝날 터였다. 하지만 카나리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눈 하나는 앗아가 주마. 카나리는 팽팽하게 당겨진 철사를 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야만 한다. 그 정도 대가도 치르지 않게 둘 순 없다. 아무리 카이다라도 눈만큼은 연약할 터였다.

 

카나리는 문득 똑딱맨을 떠올렸다. 똑딱맨의 추하고 역량 없는 아들은 똑딱맨의 아름다운, 정교한 시계 사업의 이름을 이어 놓고서 공장 양산형 시계의 개발에 힘썼다. 똑딱맨은 언제나 그 사실에 한탄했다. 시계는 그저 시계일 뿐이어야 한다고. 그저 시간을 정확하게 재는 도구일 뿐 부와 명예 같은 외부 가치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시간은 만민에게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나리는 이제 그 시계로 누군가의 빛을 앗아가려 한다.

 

카나리의 목소리는 이미 죽은 사람에게 닿지 못했다. 똑딱맨. 미안해요. 저. 당신을 저버렸네요.

 

 

 

 

 

 

카이다의 방은 제츠보의 방에 비해 훨씬 더러웠다. 카이다는 탑에서 쫓겨났다가 해변에 떨어진 뒤 영안로까지 참여해 자신의 숙소에서 잠을 청한 적이 거의 없을 텐데도 그랬다. 제츠보는 대체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방이 돼지우리처럼 변했는지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이불은 침대의 반대 방향으로 내팽겨졌고, 배게는 반으로 찢어져버린 것이 바닥에 두 개 회전초처럼 굴러다니며 솜을 토해냈다. 음료를 마시다 엎지른 것 같은 얼룩이 침대에 남아 있었고, 벽지에는 영문 모를 주먹이나 손톱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제츠보는 바로 그 벽에 등을 기댄 채 섰다. 특이한 점이 아무것도 없는 제츠보 본인의 방보다는 말 그대로 짐승 우리와도 같은 카이다의 숙소가 조금 더 구경할 만 했다.

 

그런 장소에 벌러덩 드러누운 채 카이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을 견디는 일. 그것은 네가 나한테 말을 안 해? 그럼 나도 말을 안 해 따위의 유치한 보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참은 적이 다섯 번도 채 되지 않았다. 카이다의 불만과 감정은 언제나 외면화된다. 내면화하기에는 밑도 끝도 없이 침잠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이다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이다 쿠로하: 씨발 미안해. 미안하다고. 됐냐?

 

카이다를 옆에서 보고 있자면 카이다가 사과에 소질이 없다고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카이다는 캐롤에게 미안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꼬박꼬박 사과를 했고, 그것은 꽤 진중하게 보이기도 했다. 즉 카이다는 별로 미안하지 않은 일을 사과하는 일에 소질이 없는 것이었다.

 

아무튼 제츠보는 이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를 듣고서 카이다를 용서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제츠보는 카이다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무시로 일관했다. 귀신같이 욕설이 날아왔다.

 

이다 쿠로하: 들어. 썅년아!

 

아차. 사과 중이었지. 카이다는 한 번 헛기침을 하고 나서 아주 조금 어조를 누그러뜨렸다.

 

이다 쿠로하: 들어.

 

제츠보는 카이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주지 않으면 또 날뛸 게 분명하기도 했고, 대꾸 없이 듣는 것 정도는 할 만 하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다 쿠로하: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내가 남 흠을 찾아서 놀리는 걸 좋아해.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그건 자랑거리가 아니었고, 공공연하게 말할만한 내용도 아니었다. 하지만 제츠보는 참을성 있게 카이다의 말을 들었다. 카이다가 느끼기에 그것은 제츠보가 어느 정도 자신의 말을 납득한 것 같았고, 자신감을 얻은 카이다는 거리낌 없이 말을 시작했다.

 

이다 쿠로하: 그렇잖아. 그런데 잘 생각해 봐. 나는 남의 흠을 잘 찾아. 그런데 나는 네 젖을 가지고 놀려댔잖아. 이게 무슨 뜻이냐? 그러니까 내가 네 젖을 가지고 놀린 건 말이야. 너에게 젖 말고는 결점이 없다는 칭찬이기도 한 거야.

 

세상 어디에 이딴 소리가 다 있나?

 

제츠보는 카이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는지조차 짐작하지 못했다. 카이다는 자신의 관점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카이다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지침이 될 수도 있으리라. 그녀는 후안무치함 그 자체였다.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그 기준을 강요하는 것. 폭군의 태도였다.

 

츠보: 그거 말고는 결점이 없다고? 지금까지 내가 기계다. 사람이 아니다. 질리도록 지껄여와 놓고?

 

카이다는 자신의 잘못을 좀처럼 돌아보지 못한다. 기억도 안 나고, 그게 왜 잘못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제츠보의 지적을 듣고는 아차! 싶어 쩔쩔매게 되고 말았다.

 

이다 쿠로하:… 그럼 그 점도 빼고.

 

츠보: 하아… 집어치워. 카이다. 나한테는 사과 안 해도 돼. 어차피 미안하지도 않잖아. 너를 용서할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이나 찾아 가.

 

이다 쿠로하: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어?

 

츠보: 그냥 하는 말이야. 그런 사람 없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네 잘못이지. 그러니까 그만 투덜거려.

 

이다 쿠로하: 제기랄!

 

카이다는 발뒤꿈치를 침대에 쿵 내리 찧었다. 매트리스가 살짝 파였다.

 

카이다는 다시금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제츠보와 나누는 간접적인 대화였다. 카이다는 자신에게 있는 고민을 진심으로 털어놓기에는 자존심이 상하기에. 마치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또한 그렇게 중얼거렸을 거라는 듯이 혼잣말을 했다.

 

이다 쿠로하: 결국 나한테는 언니밖에 없어. 언니 말고는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츠보: 그럼 하나 만들어 보던가.

 

이다 쿠로하: 그놈들이 나를 안 좋아하잖아.

 

츠보: 지금의 너 같은 사람을 누가 좋아해 주겠어? 이기적인 데다가 무식하고 아집에 가득 찬 잔인한 사람을?

 

이다 쿠로하: 아니지. 내가 잔인한 건 믿을 사람이 없어서야. 그러니 그놈들이 지금 있는 대로의 나를 좋아해 주기만 하면 될 일이지. 나는 살가워지고, 내가 번거로울 것도 없고. 그게 나은 것 같은데?

 

츠보: 그런 식이라면 다른 사람을 좋아해야 하는 건 너야. 카이다. 그럼 다른 사람이 번거로울 이유가 없어지잖아. 그런데도 다른 사람이 너에게 맞춰주기를 원하는 건, 그저 너 자신이 마냥 편하기만을 원할 뿐이라는 증거고.

 

이다 쿠로하: …그래서. 그게 왜 잘못된 거지? 너희들은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살아왔잖아. 그러면 나보다 훨씬 성질도 좋고 착해야 되는 거 아니냐? 나처럼 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으면 나 봐줄 수도 있는 거잖아. 왜 그렇게들 엄격하냐고.

 

츠보: 고생을 많이 할수록 악해진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거라면, 내가 그러지 않은 사람을 최소 둘이나 알아.

 

이다 쿠로하: 뭐? 그게 누군데?

 

불행하게 살았다는 것이 유일한 업적으로 남아 있는 카이다였기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츠보: 네 언니. 그리고 히무로 시라베. 네가 겪은 불행은 분명 무겁고도 무겁지. 하지만 이 두 명은 네 이상의 것을 봤어. 그런데도 다른 사람을 지키려 하지. 캐롤은 너까지 챙기고 있잖아. 너는 왜 캐롤처럼 살 수 없는 건데?

 

이다 쿠로하: 아가리. 잔다.

 

이 영양가 없는 대화에서 우리가 얻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카이다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다는 것, 그리고 카이다를 사랑해 줄 만한 사람은 캐롤뿐이라는 것. 카이다 본인에게 정작 변할 마음이 없다는 것뿐이다. 그것 말고는 어제와 똑같은 양상이 되었다. 투덜거리는 카이다와 그걸 관망하는 제츠보. 서로를 싫어하는 두 존재의 불쾌한 동행.

 

제츠보는 뻔뻔하게 눈을 감고 잠에 들려 애쓰는 카이다를 기가 찬 채 바라보았다. 제츠보가 알지 못한 것은 카이다가 제츠보의 말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점이었다. 왜 그녀는 캐롤처럼 살지 못할까? 이미 글러먹었기 때문이다. 바뀌려고 해도 생태 자체가 변해서, 다른 종. 흉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카이다는 외로웠다. 정말 외로웠다.

 

카이다는 여전히 잠을 자지 못했다. 카이다는 누구와도 함께 잘 수가 없다. 누구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설령 캐롤일지라도, 끝의 끝에 가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정오 즈음에 이런 일이 있었다.

 

메리는 다음날 나와 캐롤 브라이트가 그녀를 찾아갔을 때도 거리낌 없이 문을 열었다. 분명 그녀에게는 이제 무서울 게 없었다. 터치가 그녀의 정신에 틈을 열어 마유즈미의 자아로 접촉이 가능했을지라도 결국 마유즈미를 다시 불러오지는 못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메리는 캐롤 브라이트와 나의 방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흔쾌히 문을 열었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단지 나와 캐롤 브라이트뿐만이 아니었다.

 

기와라 우시오: 아. 어디서 봤나 했더니 딱 알았다. 오락가락했던 마유즈미 언니니 뭐니 했던 그 사람이잖아. 언니는 개뿔 다른 사람이었네. 뻔뻔하게스리. 안 쪽팔리세요?

 

유즈미 나데시코: 뭐. 뭐야?

 

츠보: 내가 어떻게 못 알아봤을까? 하지만 정말 시라유키로는 안 보였는데… 지금도 그렇게는 안 보여.

 

이다 쿠로하: 이년. 해변에서 나한테 총을 들이대고 목 꺾어서 막 소리 지르던 걔야! 조심해. 언니!

 

바라 쿠리스: 해변? 그때부터 마유즈미 안에 있었다고?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우와. 소름 끼쳐! 내가 마유즈미 껴안을 때도 안에 있었다는 거야. 설마?!

 

나시: …대체 왜 여기에 있는지 이해가 안 돼. 시라유키.

 

무로 시라베: 그것은 지금의 시점에서는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경위를 모르니 현상만을 다룰 수밖에.

 

메리는 얼굴을 찌푸린 채 물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뭐 하는 거야. 너희?

 

메리는 마유즈미의 방. 그녀 자신은 본인의 방이라고 인식하고 있을 장소에 몰려온 불청객들을 바라보았다.

 

기와라 우시오: 보면 몰라? 다구리 치러 왔다. 이… 아버지 없는… 아 뭐더라. 아무튼 그거야.

 

무로 시라베: 아버지의 얼굴을 잊은 이다.

 

기와라 우시오: 거기서 거기 아니냐? 없으니까 잊은 거잖아.

 

무로 시라베: 모든 사람들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롤 브라이트: …그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들어가죠.

 

하기와라 우시오. 이바라 쿠리스. 캐롤 브라이트. 카이다 쿠로하. 이름 없는 남자. 제츠보. 그리고 나. 방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렸다. 본래 계획은 이렇지 않았다. 필요한 인원들만이, 마유즈미의 샤이닝에 접촉할 캐롤 브라이트와 정신이 열린 틈을 타 마유즈미에게 의도를 전달할 나만이 마유즈미의 방에 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하기와라 우시오는 자신이 마유즈미와 막역한 친우 사이이기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해야겠다는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이바라 쿠리스 또한 동행을 요청했다. 그녀 또한 마유즈미를 적잖이 아꼈던 모양이다.

 

츠보: 저 멍청이가 가면 나도 가.

 

제츠보는 블레인과 함께 맞선 동료니 하기와라 우시오가 참여한다면 자신 또한 못 갈 이유가 없다고 했으며, 이름 없는 남자는 용건이 있어 참여하지 못했던 어제의 동행을 실행하겠다고 하였다. 그가 기관 소속이었고 메리와 친분이 있었다는 점 또한 그가 동행해야만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이름 없는 남자는 마유즈미의 숙소에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지, 불투명한 바구니에 무언가를 담은 채 동행했다.

 

제츠보가 마유즈미의 숙소에 오는 이상 제츠보가 감시해야 하는 카이다 쿠로하 또한 제츠보를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필수 인원인 나와 캐롤 브라이트에 더해. 탑에 있는 생존자 중 두 명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마유즈미의 숙소에 모이게 된 것이다.

 

기와라 우시오: 그러게. 카이다 쟤는 왜 왔냐? 너 해변에서 마유즈미 때렸다며. 안 꺼져?! 아오. 어떻게 사람이 파도 파도 끝이 없이 잘못이 쏟아져 나오지?

 

이다 쿠로하: 닥쳐! 나도 좋아서 온 거 아니야. 이 기계년이 우겨대니까 나까지 딸려온 거라고! 쳇!

 

츠보: 애초에 네가 나나시를 납치한 것 때문에 마유즈미가 이렇게 된 거야. 책임감을 좀 가지는 건 어때?

 

이다 쿠로하: 책임감은 니 엄마한테서나 찾아.

 

기와라 우시오: 어이쿠. 광역뎀 보소? 엄마 없는 청년들.

 

나는 내 인내심이 아주 빠르게 닳는 것을 느꼈기에 그쯤 그들의 대화에 개입했다.

 

무로 시라베: 너희 모두 이곳에 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마유즈미가 돌아오기를 바란다면, 이곳에서 방종하게 떠들지는 마라. 마유즈미의 자아를 다시 불러오는 일에 캐롤 브라이트와 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 둘 말고 누구도 필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은 감동스러운 일이었다. 마유즈미 본인이 몹시 고마워할 만한 일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마유즈미에게 그들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의 몸을 쓰고 있는 다른 여자를 보며 그들이 얼마나 마유즈미를 그리워하는지를, 마유즈미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지를 본인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떠들어대는 것은 방해에 지나지 않았다.

 

바라 쿠리스: 으극… 하… 할 말이 없네… 다들 조용히! 쉿! 마유즈미 다시 보고 싶잖아?

 

이다 쿠로하: 지랄. 저놈은 여기에 왜 필요한데? 자기가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것처럼 굴긴! 너도 구경꾼이잖아!

 

무로 시라베: 내가 할 일은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롤 브라이트: 부디 이해해 줘. 치나미. 히무로 씨는 마유즈미 씨를 너무 걱정한 나머지… 어떤 변수도 원하시지 않으시는 거야.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다 쿠로하는 캐롤 브라이트의 말에 몇 마디를 투덜거렸다.

 

바라 쿠리스: 사실 나는 마유즈미 응원하려는 마음에 더해서 그 시라유키 히메리라는 사람을 직접 보고 싶었어. 새삼 느끼지만. 마유즈미랑은 전혀 다른 사람이란 말이야

 

유즈미 나데시코: 그럼 다른 사람이지. 블레인이 만족할 만한 수수께끼를 마유즈미 같은 사람이 꺼낼 수 있을까 봐?

 

바라 쿠리스: 그. 그게 무슨 뜻이야. 지금?

 

나는 그 말을 두고 넘길 수 없었다.

 

무로 시라베: 철회해. 메리. 그건 마유즈미를 무시하는 발언이야.

 

유즈미 나데시코: 걱정 마. 나는 비단 마유즈미만 무시하는 게 아니거든. 시라베. 풀기가 불가능한 문제가 아닌, 블레인 수준이 되어야 풀 수 있는 문제는 여기 중 너를 포함한 누구도 낼 수 없어. 하지만 그래봤자지… 쪽수에서 밀려 버리는 걸.

 

메리는 한숨을 내쉬며 방 안에 모인 이들에게로 멸시의 눈빛을 던졌다. 나만큼은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그 기준이 친분의 유무인지, 그게 아니라면 다른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대몰락 전이나 후나, 이곳에 갇히기 전이나 후나 결국 똑같아. 그 어떤 초고교급들도 수 자체를 극복할 수는 없어. 그렇게 하여 뛰어난 이가 그보다 못한 이들에게 지배당하게 되는 거야. 내 꼴을 좀 봐. 블레인과 함께 맞서 싸웠는데 돌아오는 건 도외시뿐이잖아.

 

유즈미 나데시코: 심지어는 카텟 기관 시절의 동료에 시라베마저 나에게서 등을 돌렸네? 노네임. 노바디. 그렇게 나를 증오하더니 아주 꼴이 좋다 싶겠지?

 

이름 없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나시: 나는 네가 가엾다고 생각해.

 

유즈미 나데시코: 가여워해? 네가 나를?

 

메리는 이름 없는 남자의 말을 듣고 불쾌함을 드러냈다. 왜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추측하건대 메리는 동정이나 딱하게 여기는 것을 더 우월한 자의 전유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름 없는 남자가 자신을 가엾게 여긴다니 자신이 그보다 더 못한 이가 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겠지.

 

나시: 너도 살인 게임에 떨어져 있잖아. 아무리 네 지성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너 또한 우리처럼 이곳에 갇혀 있으니까. 너는 죄수야. 시라유키. 이곳에서는 네 우월한 지성도 너를 구원할 수 없어.

 

유즈미 나데시코: 틀렸어. 노네임. 나를 구원할 단 하나의 수단이 있다면 그건 지성이야. 노네임. 그래서 나와 다르게 너희들은 이곳에서 영영 나갈 수 없는 거라고. 모자라니까.

 

무로 시라베: 우월함과 열등함은 그저 재능의 유무와 지능으로 결정되지 않아. 메리. 너에게는 마유즈미를 멸시할 자격이 없어. 너는 사람들을 그런 기준으로 나누지 않았잖아. 왜 그렇게 됐지?

 

츠보: 글쎄. 히무로. 내 눈에는… 지금이야말로 내가 알고 있는 시라유키 같아.

 

롤 브라이트: 제가 보기에도 그래요. 시라유키는 원래… 우월주의적이라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을 곧잘 했어요. 아무리 말려도 듣지를 않았죠.

 

메리는 거만한 웃음을 지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분수를 좀 알게 해 줬을 뿐이야. 아시아에서 건너왔다고 해서 무시를 곧잘 하던데, 정작 내가 보기에는 그들이야말로 열등한 족속들이었거든. 가장 정당하고도 적절한 계층 순위인 재능과 지능의 그래프 측면에서 볼 때 인류의 기차 맨 뒷칸에 탄 것들이지. 연결기를 끊어서 죄다 내쳐야 하는 것들.

 

기와라 우시오: 기차? 뭔 소리야? 아. 그러고 보니 댁이 블레인 만들었다며? 야. 이 양반아. 그 미친 기차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알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딴 걸 만든 거야?

 

메리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여러 변수가 도사리는 환경 속에서 조종사 없이 열차 자체가 유연하게 대응해야 했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 실어서 나르라고. 블레인에게 그렇게 써서 보냈지. 블레인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이다 쿠로하: 블레인이 뭐냐?

 

제츠보는 카이다 쿠로하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았다.

 

츠보: 진심으로 묻는 거야. 너? 어제 광자 상영기로 봤잖아. 하기와라가 부순 열차 말이야. 우리를 태운 채로 자살하려고 했던 열차!

 

이다 쿠로하: 블레인은 사람 아니었냐? 열차를 운전하고 있는 사람이 블레인이었잖아.

 

츠보: 뭐라고?

 

기와라 우시오: 와아아아아아아!

 

하기와라 우시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감탄했다.

 

기와라 우시오: 와아아! 와하하! 와! 와아. 진짜. 와! 너는 진짜!

 

이다 쿠로하: 뭐. 뭐야. 왜 그래? 드디어 미쳤냐?

 

바라 쿠리스: …에에. 이건 정말 아닌데. 너무 심해. 이 정도로 머리가 나쁘다는 거는… 오히려 우리가 도와줘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지금까지 너무 가혹하게 굴었던 건가?

 

유즈미 나데시코: 하! 웃겼다. 정말. 하기야 그게 너희들의 유일한 가치긴 하지. 웃기다는 거.

 

나시: 너무 마음 쓰지 마. 하기와라… 화를 내면 너만 손해야. 내가 영안로에서 많이 해 봐서 알아.

 

기와라 우시오: 나나시. 야. 너 대체 단둘이서 어떻게 버텼냐? 나였으면 한 시간도 안 돼서 싸늘한 시체가 됐을 거야. 내가 죽어서 몸이 식는 시간까지 합쳐도!

 

나시: 열심히 했지

 

무로 시라베: 카이다 쿠로하. 블레인은 인공지능 열차다. 블레인은 여러 번 본인의 입으로 그것을 밝혔다.

 

이다 쿠로하: 아. 그러셔? 그러면 정확히 언제 그렇게 말했는지 말해 보시지. 몇 시간 몇 분 전이야?

 

롤 브라이트: 치나미… 히무로 씨 말이 맞아. 믿어도 돼.

 

캐롤 브라이트는 카이다 쿠로하의 편을 곧잘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틀린 길일지언정 계속 가게 두는 것은 진정 혈육을 위한 것이라 보기 어려웠다.

 

카이다 쿠로하는 변명을 찾아 입을 어물거렸다.

 

이다 쿠로하:… 기계인 척하는 인간일 수도 있었던 거잖아! 나는 의심했어! 의심스러우니까! 열차가 말을 하는 건 무슨… 개소리잖아! 나는 그냥 너희들보다 더 조심한 것뿐이야. 안 그래?!

 

롤 브라이트:… 헷갈릴 만도 해. 치나미. 보통 열차는 말을 안 하잖아. 괜찮아! 나도 헷갈렸는걸!

 

거짓말이 분명했다.

 

이다 쿠로하: 그래! 언니도 이렇게 말하네. 그 말대로라니까?! 무슨 열차가 말을 해? 니들 생각이 비정상적인 거야. 내가 아니라!

 

카이다 쿠로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가까스로 진정한 뒤 다시금 말을 꺼냈다.

 

기와라 우시오: 됐어 됐어. 쟤는 무시하자. 다시 돌아가자고.

 

하기와라 우시오는 메리를 보았다.

 

기와라 우시오: 나는 블레인이 댁한테 화낼 만하다고 봐.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 놓고 퉤 뱉었으니 당연히 감정이 쌓이지. 대놓고 말해서 네가 아들 낳아놓고 버린 거랑 똑같은 거 아니야?

 

유즈미 나데시코: 그게 왜? 내가 만들었으니 어떻게 대할지도 내 마음대로잖아. 나는 블레인의 창조주야. 그러니 나에게는 블레인의 운명을 결정지을 권한이 있어.

 

기와라 우시오: 와. 그 사고방식 진짜 존나게 마음에 안 든다.

 

유즈미 나데시코: 왜. 누가 네 운명을 결정지으려 한 적이 있나 보지?

 

기와라 우시오: 뭐야 씨벌. 너 어떻게 알았어. 너 무슨 CIA에서 일하다 왔냐? 나 도청했어? 독심술사야?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게? 내가 지금 손가락 몇 개 펼쳤어?

 

하기와라 우시오는 자신의 손을 허리춤 뒤로 숨겼다. 메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정신 빠진 소리… 너희랑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뇌가 썩는 기분이야. 하필 지적인 영역을 퇴화시킨 초고교급과 만나다니

 

카이다 쿠로하는 자신의 몸을 움찔 떨고서 사나운 얼굴로 메리를 노려보았다.

 

유즈미 나데시코: 너도 생각을 좀 해봐. 우리 중 한 명이라도 좋으니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이 있나? 비존재일 때 의식을 가지고 이 세상에 발을 딛겠노라 결정했느냐는 말이야. 그런 사람은 없어. 우리는 모두 무책임하게 내던져져 살아가는 존재야. 너희들 중 몇 명이 내던져졌지? 응? 몇 명이나 창조의 책임을 가진 이들에게 운명을 결정당했냐고.

 

츠보: 그래서. 너는 네가 블레인에게 저지른 일도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거야? 너를 낳은 부모 잘못이라고?

 

유즈미 나데시코: 잘못이라니. 인공지능! 제발! 그런 문제는 아무래도 좋다는 걸 모르겠어?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내가 블레인을 버렸든 내 아들 삼아 키웠든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야. 내가 제대로 통제하지 않아서 블레인이 폭주했다는 이야기라면 들어주겠어. 억제 중추를 더 조성하지 않은 건 나를 포함한 프로그래밍 팀의 실책이지. 하지만 내가. 블레인을 만든 내가 블레인을 그렇게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고 하거나 더 잘 대해주어야 했다는 이야기는 쓸데가 없어!

 

제츠보는 고개를 내저었다.

 

츠보: 맞아… 너랑 말싸움을 하는 건 이런 기분이었지. 시라유키. 그 무엇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과의 논쟁 하지만 네가 블레인을 사유할 수 있게 만들고자 했다면, 너는 그 지성에 대한 책임 또한 져야만 했어.

 

유즈미 나데시코: 내 말을 이해를 하지 못한 것 같은데, 나의 논지는 무언가를 창조하는 활동이야말로 그 신생아에게 있어 신이 되는 일이라는 거야. 창조야말로 신의 영역을 넘보는 일이지. 그리고 신은 책임을 지지 않아. 책임을 져야만 한다면 그건 신이 아니니까. 번거로워진 인간일 뿐.

 

나는 그 답에 납득할 수 없었다.

 

"외로워!"

 

무로 시라베: 메리. 나와 다른 이들이 영안로에서 마주한 블레인은 자신이 사유할 수 있는 노예일 뿐이었다며 괴로워했어. 영안로 속이 아닌 본래 역사에서도 블레인은 자살했고.

 

유즈미 나데시코: 알아. 패트리샤가 블레인의 충동 조절 중추를 과부하시켰지. 블레인은 일 초라도 더 죽지 못해서 안달을 냈어.

 

나는 메리의 말에서 기이한 위화감을 느꼈다.

 

무로 시라베: 안다는 건 무슨 뜻이지? 메리. 나는 영안로 속에서 패트리샤의 말을 들었기에 그 사실을 아는 거야. 한때 러드에 거주하던 제츠보마저도 블레인의 죽음에 대한 경위는 몰랐어. 대략적으로 자살이라는 것만 알았지. 하지만 너는 어떻게 그 세부 사항을 알고 있는 거야? 

 

유즈미 나데시코: 내가 말했잖아. 블레인의 운명은 내가 정한다고.

 

블레인. 그리고 패트리샤.

 

나는 블레인이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저 다른 존재에게 조종당했을 뿐임을 알게 되었다.

 

무로 시라베: …두 번 창조했다는 뜻인가.

 

유즈미 나데시코: 언젠가 자멸할 줄 알았는데 끈질기게 버텨 대니 본래의 목적에서 한참 벗어나 버렸잖아. 최고의 수수께끼를 낸 자들은 태워 준다는 소문이 들리길래 내버려 뒀더니 파업을 하더군. 그래서 내가. 창조자인 내가 해결할 수밖에 없지.

 

제츠보와 이름 없는 남자는 자신의 숨을 삼켰다.

 

츠보: 너였어… 시라유키? 그것마저… 너였던 거야?

 

나시: …마치 나 같은 일을 했네. 시라유키.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의 기투를.

 

유즈미 나데시코: 왜 다들 블레인을 걸고 넘어지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그 사이에 정이라도 들었어? 너희를 죽이려고 했는데?

 

무로 시라베: 사유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봤으면서, 다시 그것을 만들어냈다는 건가? 심지어 그 자신의 형제를 죽이게끔?

 

유즈미 나데시코: 형제라 기계에게 사용하기에는 굉장히 물러 터지고 감상적인 이름인걸. 적절하지 않은 어휘야. 시라베.

 

무로 시라베: 분명 형제라는 말은 생명체에 쓰기에 더 적합하겠지.

 

나는 누구인가?

 

나는 형제를 죽이게끔 만들어진 존재다.

 

"함께할 때가 온 것 같아서 한 번 와 봤어. 내 동생."

 

"가족의 기준은 단지 유전적 연관성이 아니야. 가족은 서로를 이해하고, 약점을 보완하고, 위기에 처했을 때 서로를 돕지. 우리가 유전적으로는 아무런 연관이 없더라도 우리가 가족의 요소를 가진 이상. 너는 우리 가족이야."

 

내가 그런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이상 나는 메리의 철학을 조금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비인간을 죽이기 위한 비인간 창조란 저주받은 일이다.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을 뿐, 본질은 외로움을 호소하며 죽어간 저 블레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곧 나는 그녀가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메리를 아는 모든 이들이 내 눈앞의 메리를 보고 "아, 너로구나" 라 말했다.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 그녀는 항상 이랬단 말인가?

 

유즈미 나데시코: 너희는 수준이 낮아서 이해를 못 할 뿐.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게 나 혼자는 아니야.

 

메리는 그렇게 말하며 한 인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즈미 나데시코: 나 좀 도와주지 그래. 노네임? 너는 내 말이 맞다고 생각할 테니까.

 

이름 없는 남자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메리와 눈은 마주쳤으나, 본심은 시선을 돌리고 싶은 것으로 보였다.

 

나시: …아니야.

 

유즈미 나데시코: 뭐가 아닌데? 너는 사람을 인공지능으로 되살린 뒤에 거부했잖아. 존재해서는 안 되는 양 무시하지 않았어? 왜 네가 한 일을 부정한 거지? 나는 블레인을 부정한 적이 없어. 그건 내 통제 범위를 벗어나 사람을 죽였지만, 그것 또한 내 업적이야. 반대 방향의 업적일 뿐. 다른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고. 

 

나시: 그 일은 업적이라 불릴 수 없어. 내던진 뒤에 도와주지 않은 건… 그저 무책임한 것일 뿐이야. 우리는 큰 잘못을 저질렀어. 너는 그 일을 통해 네가 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한 사람이야. 그것이 무엇도 책임지지 않는 부도덕한 사람이 되었을 뿐이야.

 

나시: 우리는 우리에게 결정권이 내려왔다고, 기회가 주어진 거니까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건 우리의 오만이었어. 기투는 우리에게 이르고도 또 과분한 일이었던 거야. 그저 한 지성체를 고통받게 만드는.

 

유즈미 나데시코: 내가 아까 말했을 텐데. 신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나 네가 정말 마음에 안 든다. 노네임. 네 그 얕아 빠진 철학적 기반들. 선인인 척을 하며 네 능력을 기만하는 짓들 전부가 마음에 안 들어. 너는 대몰락 이후 세상에서 가장 인체와 닮은 기계를 만들어냈지. 그런데 그 기술력으로 뭘 했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프로그램화된 영혼을 기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선례가 있으니,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역량을 내지 못하는 자들을 강력한 기계 안에 주입하기만 했으면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 되었을 텐데!

 

츠보: 너. 벌어진 일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우리가 다시 기관에 갔을 때 너는 전화박스를 창고에 버려뒀잖아. 네가 말하는 그 새로운 시대를 감춘 건 너야. 시라유키. 그 방식이 잘못됐다는 걸 네가 알아서 그렇게 한 거 아닌가?

 

제츠보는 메리를 알고 있던 이들이 전부 가졌을법한 질문을 던졌다.

 

츠보: 도대체 지금의 너는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의 시라유키 히메리지? 애초에 시라유키가 맞기는 해? 너는… 대체 누구야?

 

메리는 제츠보의 질문을 듣고서 이렇게 대답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진정한 시라유키 히메리지. 자기 검열과 절제를 저버린 나. 그게 가장 나다운 나이며 가장 강한 나야. 이해 못 했더라도 괜찮아. 네가 이해하기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라.

 

바라 쿠리스: …엄청나게 오만하고 무책임한 말처럼 들리는데? 오글거리기도 하고… 당신. 대체 뭐 하던 사람이었어?

 

유즈미 나데시코: 세상을 바꾸던 사람.

 

기와라 우시오: 내가 듣기에는 지랄똥을 싸는 사람 같은데. 왜애애애애애애앵!

 

하기와라 우시오는 경보음 같은 육성을 내며 손을 허공에 앞뒤로 뒤집어댔다.

 

무로 시라베: 무엇을 하는 거지?

 

기와라 우시오: 썅년 경보 발동. 이딴 게 네 짝녀야?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야.

 

바라 쿠리스: 풉.

 

이바라 쿠리스가 웃음을 참으며 하기와라 우시오를 팔꿈치로 찔렀다. 메리는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중얼거리지 않았다. 중얼거리는 것은 자신의 말에 확신이 없고 남에게 들려줄 용의가 적을 때 하는 것이다. 확신을 가지고 남에게 들려주려는 사람은 그저 말을 한다. 메리는 그렇기에 말을 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저능아들…

 

이다 쿠로하: 뭐어?! 이 개년아! 눈깔을 파 버릴까?!

 

카이다 쿠로하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양서류가 튀어 오르듯이 그녀는 제자리에서 뛰어올라 메리에게로 달려들고자 했다. 나는 카이다 쿠로하의 예상 동선을 가로막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제츠보가 카이다 쿠로하의 한쪽 손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이다 쿠로하: 이거 놔! 가만히 안 놔둘 거야. 감히 나를 욕해? 이건 그냥 못 넘어가! 그 콧대를 도려내서 구멍을 뻥 뚫어놔야지 안 되겠어!

 

츠보: 너를 보고 한 말이 아니야. 카이다! 괜히 화내지 말고 앉아 있어!

 

나시: 마. 맞아! 시라유키는 원래부터 저런 사람이야!

 

이다 쿠로하: 닥쳐. 닥쳐! 나는 참을 만큼 참았다. 다 나와! 꺼지라고!

 

기와라 우시오: 야. 야야야야! 얘가 기어코 마유즈미 죽이려고 한다!

 

바라 쿠리스: 다. 달라붙어! 오라아아!

 

츠보: 떨어져! 너희가 붙어 봤자 아무것도 안 되니까!

 

나는 만약을 대비해 카이다 쿠로하의 예상 동선 앞에 섰다. 하지만 만약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제츠보의 완력 덕분에 카이다 쿠로하가 풀려나는 일은 없었다.

 

무로 시라베: 카이다 쿠로하. 네가 어떤 방식으로든 그녀에게 해를 입히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다 쿠로하: 너는 또 뭐야! 뭔데 지랄이야?! 닥쳐! 으아아아악! 누구도 날 무시할 수 없어! 누구도!

 

난처하게 된 것은 캐롤 브라이트였다. 난폭하기 짝이 없는 혈육의 보모 노릇을 떠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카이다 쿠로하에게 자유를 주려고 한 캐롤 브라이트 본인의 과오일 터. 캐롤 브라이트는 말했다.

 

롤 브라이트: 치나미. 진정해

 

이다 쿠로하: 이거 놓지 못해?! 저년 입을 찢어서 내가…!

 

보모의 입장에서 가장 난처한 것이 있다면 몸이 커다란 신생아일 것이다. 이기적이고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데, 저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롤 브라이트: 치나미…! 진정하래도!

 

캐롤 브라이트는 아주 조금 언성을 높였다. 평소 음역대에서 아주 조금 벗어난. 고함이라고 부르기 적절치 않은 고성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변화와 그 안에 담긴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이보다 크게 소리칠 수도 있지만 네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참는 것이라고.

 

카이다 쿠로하는 나보다 더 민감하게 그 변화를 느꼈다. 그리고 의도는 파악하지 못한 듯 보였다.

 

이다 쿠로하: 어. 언니는… 언니는 왜 저년을 감싸 주는데? 왜? 우리를 죄다 깔보고 있잖아. 나더러 저능아래!

 

롤 브라이트: 너를 더러 한 말이 아니야. 치나미.

 

유즈미 나데시코: 구해줘서 고마워. 제인.

 

웃고 있는 메리를 보자 카이다 쿠로하는 화를 냄과 동시에 큰 슬픔을 토했다.

 

이다 쿠로하: 왜 얘를 감싸고 나한테 뭐라 하는데? 왜 나를 혼내기만 해! 내가 그렇게 미워?! 내가 그렇게 잘못하며 다녔단 말이야? 언니도 나를 싫어할 정도로?!

 

캐롤 브라이트는 고개를 저으며 카이다 쿠로하를 바라보았다.

 

롤 브라이트: 혼내는 거 아니야. 나는 너를 싫어하지도 않아. 치나미. 너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 있으면 그건 나고, 혼내줄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언니가 너 대신 혼내줄 테니 안심해. 나도 두고 볼 생각은 없어.

 

카이다 쿠로하를 달래는 데에 요령이 생긴 듯, 캐롤 브라이트는 그녀의 동생에게 네 폭력성을 잠재우라 말하지 않았다. 너 대신에 내가 하겠다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과 크게 달랐다. 대신 나설만치 그 사람을 생각하며 똑같이 분노한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응보의 행위가 만족스러운 듯 카이다 쿠로하는 서서히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무로 시라베: 욕보는군.

 

롤 브라이트: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아요.

 

캐롤 브라이트는 한 마디 말로 카이다 쿠로하의 적의를 누그러뜨림과 동시에. 이 구성체의 본래 목적을 모든 이들에게 되새겼다. 이 방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마유즈미의 회복이다. 실없는 말장난이나 수다, 철학적 담론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위해서라면 캐롤 브라이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을 내쫓을 수도 있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좋아. 제인. 다시 팔씨름을 해 볼까.

 

그렇게 캐롤 브라이트가 메리에게 가까워지고 손을 뻗기 전. 이름 없는 남자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나시 잠깐만요. 시작하기 전에 캐롤 씨.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손 좀 주시겠어요?

 

롤 브라이트: 네. 여기요.

 

캐롤 브라이트는 거리낌 없이 이름 없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가 더 이상 외부활동을 할 때 흰 장갑을 착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다. 실수로라도 손이 닿는다면 터치가 연결될 터. 하지만 캐롤 브라이트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물론 장갑을 벗더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봉쇄할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그 변화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가장 강한 터치의 소유자가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리 먹었다간 끔찍한 결과가 나올 터였다. 봐주는 것을 끝낸 위력자. 그것이야말로 경계 대상이었다.

 

롤 브라이트: 아. 그 방법과 관련된 건가 보죠?

 

나시 네. 맞아요.

 

무로 시라베: 무슨 방법 말이지?

 

롤 브라이트: 어제 나나시 씨가 이론상 마유즈미 씨를 더 쉽게 불러올 방법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게 무엇인지는 못 들었지만요.

 

무로 시라베: 그게 사실인가. 이름 없는 남자.

 

나시 일단은 만전을 기해서 준비해 왔어. 내가 직접 알아내야 하는 게 몇 개 있긴 하지만… 그건 지금 알아보려고.

 

이름 없는 남자는 캐롤 브라이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시 시라유키한테 쓰신 만큼의 출력을 제게 써 보세요.

 

캐롤 브라이트는 주저했다.

 

롤 브라이트: 그렇지만… 충격이 있을 텐데도요? 정신에 틈새를 열 정도의 출력이에요. 시라유키는 제 터치에 대항할 방법을 찾아서 버틴 거지. 당신이라면

 

나시 걱정 말고 쓰세요. 그래야 저도 무엇을 더해야 할지 알 수 있으니까요.

 

이다 쿠로하: 쯧. 못마땅한데.

 

메리는 이름 없는 남자를 보며 깔보는 웃음을 지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네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노네임? 다들 진실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 그 강대한 캐롤이 힘을 썼는데도 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너희들 중 누가 나서도 할 수 없다는 뜻이야. 어제보다 오늘이 더 잘 되리라는 보장도 없지.

 

유즈미 나데시코: 샤이닝으로 주술을 행할 수 있는 칸나즈키 시노부가 있었다면 모를까. 그 애는 이미 죽었잖아? 너희가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어?

 

나시: …그래. 칸나즈키가 있었다면 달랐을지 모르지. 내가 의식을 잃었을 때 칸나즈키가 내 정신과 소통한 것처럼. 마유즈미를 깨울 묘책이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녀는 이미 죽었으니. 남은 사람들이 방법을 찾을 수밖에.

 

이름 없는 남자는 그를 향해 내밀어진 캐롤 브라이트의 손을 붙잡았다. 그 순간 공기를 찢는 정전기의 파열음이 들렸다. 호기롭게 손을 잡은 것 치고는 이름 없는 남자도 순간 화들짝 놀라 손을 놓고, 화상을 입은 듯 붉게 달아오른 그것을 호호 불어댔다. 나를 포함해 그것을 본 자들은 캐롤 브라이트가 정확히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다시 느꼈다.

 

나시: 아얏!

 

롤 브라이트:… 그러니까 내가 말렸는데!

 

나시: 괜찮아요! 아뜨뜨… 정말 괜찮아요. 이제 알았으니까저항의 문제였어요. 전압. 그게 터치가 오래 지속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던 거죠

 

이름 없는 남자는 자신의 손을 파닥파닥 저어대며 중얼거렸다.

 

기와라 우시오: 전압이라니. 뭐라는 겨? 캐롤도 깡통이었어? 잠깐. 깡통이라 헉! 야. 제츠보! 이거 너한테 비보 아니냐?!

 

츠보: 다물어. 하기와라. 나 그럴 기분 아니야.

 

하기와라 우시오는 입을 다물었다.

 

나시: 캐롤 씨. 되게 갑작스럽게 들리겠지만 꼭 하셔야만 하는 일이 있어요. 잠깐 귀좀… 실례할게요.

 

롤 브라이트: 네? 뭔데요?

 

캐롤 브라이트는 그에게로 귀를 가까이 했다. 이름 없는 남자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캐롤 브라이트에게 속삭였다. 캐롤 브라이트는 순간 의아해져 그에게 무언가를 되물었다.

 

롤 브라이트: 네?! 바. 발이요…?

 

나시: …네. 발이요. 정말 필요한 일이에요.

 

이다 쿠로하: 뭔 발? 그리고 왜 너 언니한테 속닥거리냐? 뭐 숨기는 거 있어? 언니. 저놈이 뭐래?

 

롤 브라이트: 내가 맨… 맨발을 드러내야만 한다고

 

이다 쿠로하: 이런 개새끼!

 

카이다 쿠로하는 고함을 내질렀다. 그녀는 품 안에서 칼을 꺼내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이다 쿠로하: 저 새끼! 변태 놈! 내가 저럴 줄 알았어. 저 더러운 새끼! 언니를 감히 그딴 시선으로 봐! 발에 욕정 하는 놈! 불알을 도려내야겠어!

 

츠보: 바. 발?! 너 지금 진심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를!

 

신발을 신지 않고 있는 제츠보는 보기 드문 동요를 보이며 다급하게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자신의 발을 가렸다. 이름 없는 남자는 항변했다.

 

나시: 아.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다 이유가 있어!

 

기와라 우시오: 우우. 듣기 싫다! 이 변태야! 누가 돌 좀 가져와! 저놈한테 던지게! 냅다 존나 던져야지!

 

바라 쿠리스: 가. 갑자기 발을…? 취.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다지만 왜 하필 지금…?

 

유즈미 나데시코: …정말 더럽다. 노네임. 유인원처럼 부끄러움 하나 모르는 거야?

 

나시: 내 말 좀 들어 봐! 부도체인 신발이 땅에 닿고 있어서 캐롤 씨의 몸이 받는 저항이 커진단 말이야. 그래서 전압이 높아지고, 캐롤 씨의 몸에도 부하가 생길 수밖에 없는 거야! 맨발을 땅에 딛는다면 쓸모없이 높아진 저항 때문에 생기는 생체 전류의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어!

 

메리는 이름 없는 남자의 말을 듣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즈미 나데시코: 방금 한 말은 취소. 괜찮은 접근이야. 음.

 

나시: 그렇게 말해봤자 안 고마워… 그리고 그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야. 시라유키. 너는 이 방법으로 인해 패배할 테니까.

 

유즈미 나데시코: 해 보시지. 그러면.

 

카이다 쿠로하는 이름 없는 남자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기에. 계속 화를 냈다. 제츠보는 이름 없는 남자를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숨기고 있던 발을 겉으로 드러냈지만, 제츠보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 하체 단말의 끝을 꼼지락거렸다.

 

츠보: 으으… 이게 뭐람

 

이다 쿠로하: 개소리를 늘어놓으면 내가 믿을 줄 알았냐? 이 새끼야? 죽여버려야지!

 

롤 브라이트: 그게 정말이에요?

 

나시: 정말 그게 전부예요! 제발 믿어주세요!

 

이다 쿠로하: 이리 와! 이 개새끼. 너한테서 언니를 지켜야만 해!

 

츠보: 카이다. 진정해. 나나시는 발을 드러내야 전압이 낮아진다고 말하는… 하아. 너 어차피 이해 못 하잖아. 이걸 어떻게 이해시키지?

 

기와라 우시오: 우리는 대충 이해했어! 그러니 우리는 빡통 아니야!

 

하기와라 우시오와 이바라 쿠리스는 의기양양하게 손을 흔들었다. 대몰락 전 정치인들의 유세를 보는 것 같았다.

 

무로 시라베: 캐롤 브라이트가 맨발을 노출한다면 터치가 더 오래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인가?

 

나시: 그래. 맞아.

 

롤 브라이트: 정말 나쁜 일 아니야. 치나미. 걱정해 줘서 고마워.

 

이다 쿠로하: 그… 그래? 뭐 이런 걸 가지고… 히히.

 

카이다 쿠로하는 칼을 다시금 본인의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녀가 온전히 납득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캐롤 브라이트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이상 카이다 쿠로하 또한 명분을 잃어버렸다. 설령 여전히 이름 없는 남자를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을지라도, 그녀는 보통의 상태에 비해 무척 차분했다.

 

바라 쿠리스: 너무너무너무 깜짝 놀랐어 발 좋아하는 게 나쁜 거란 건 아닌데. 너무 뜬금이 없으니까… 게다가 남들 다 보고 있었잖아? 에에?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라는 느낌?

 

나시: 내가 이럴 줄 알고 소곤소곤 이야기한 거야… 그리고 나는 딱히 발을 더 좋아하지 않아. 왜 내가 그런다는 게 전제처럼 말하는 거야?

 

롤 브라이트: 오히려 그래서 오해를 산 걸지도 몰라요. 약간 은밀해지니까… 남이 들으면 안 되는 비밀을 이야기하는 기색이

 

기와라 우시오: 야. 지금까지 네 행적을 생각해 봐라. 지금 당장도 어깨 까고 있는 놈이 그런 얘기하면 당연히 변태처럼 들리지 않겠어?

 

나시: 나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거 선입견이야!

 

이름 없는 남자는 하기와라 우시오를 향해 모진 눈빛을 쏘아보내며 자신의 어깨를 손으로 가렸다. 어투만큼은 날카로웠다.

 

무로 시라베: 문제가 하나 있다. 저항이 낮아지면 터치의 출력 또한 저하되지 않나? 다크닝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높은 출력의 터치가 필요하다.

 

이름 없는 남자는 내 말을 듣고 서서히 어깨를 가리고 있던 손을 풀었다.

 

나시: 그걸 해결할 방법은 많아. 나도 준비해 왔어. 그중 하나는 낮춘 출력을 보강해 줄 컨덕터를 접합하는 거야.

 

바라 쿠리스: 컨덕 뭐? 나 공학은 싫어! 너무 복잡하고 어지럽단 말이야!

 

나시: …컨덕터는 전도체라는 뜻이야. 결론만 말하자면. 결국 전기가 잘 통하기만 하면 된다는 거지.

 

이름 없는 남자는 자신이 챙겨 온 바구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물병과 커다란 스펀지였다.

 

기와라 우시오: 뭐야. 뜬금없게? 화장실 청소라도 하러 왔어? 락스물이냐. 그거?

 

나시: 아니. 소금물이야.

 

소금물과 스펀지. 메리는 나와 유사한 발상을 한 것인지 이름 없는 남자의 말에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이름 없는 남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시: 내가 말했잖아. 그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고.

 

유즈미 나데시코: 그거 내 머리에 올릴 생각은 추호도 마.

 

메리는 이름 없는 남자가 할 일을 예측한 듯이 쏘아붙였다. 하지만 이름 없는 남자는 단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바라 쿠리스: 머리? 저걸 왜 머리에 올린다는 거야?

 

나시: 미안해. 시라유키. 하지만 나는 해야만 해. 카이다. 시라유키가 도망치거나 저항하려고 하면 네가 막아.

 

이다 쿠로하: 뭐? 왜 날 시켜? 씨팔 옆에 깡통도

 

나시: 너밖에 할 사람이 없어. 시라유키한테 가장 가까이 다가갈 사람은 캐롤 씨야. 그러니 호위를 할거면 네가 제격이지. 네가 그녀를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어? 좀 해주지 않을래?

 

카이다 쿠로하는 이름 없는 남자의 말을 듣자 귀를 쫑긋 세웠다. 말 그대로. 그녀의 귀가 움직였다. 이개근. 수렵사회 시절 호모 사피엔스가 귀를 움직일 때 쓰이던 근육이다. 많은 이들에게 퇴화된 이개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고 들었지만, 그게 카이다 쿠로하일 줄은 몰랐다.

 

이다 쿠로하:… 그런가?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나시: 부탁 좀 할게. 카이다. 우리 중에 가장 강한 네가 하면 누구나 든든할 거야. 캐롤 씨도 무척 든든하지 않을까? 정 그러기 싫다면 다른 사람을 시키고.

 

이다 쿠로하: 하기야 언니를 지킬 사람은 나뿐이지. 좋아. 내가 해 준다! 쓸모없는 병신들. 나 없인 아무것도 못 하지!

 

카이다 쿠로하가 의기양양하게 메리 쪽으로 다가갔다. 캐롤 브라이트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카이다 쿠로하를 어르고 달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 것은 좋은 징조였지만, 그렇다고 카이다 쿠로하가 멋모르고 이용 당하는 것은 친족에게 있어 달갑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여하튼 간에 중요한 것은 캐롤 브라이트가 그 일을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름 없는 남자는 스펀지에 소금물을 부어 그것을 흠뻑 적셨다. 조금도 물기를 짜내지 않은 스펀지에서는 소금물이 뚝뚝 떨어졌다. 메리는 사나운 눈빛으로 이름 없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름 없는 남자는 조용히 메리의 시선을 견디면서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유즈미 나데시코: 내게 이런 모욕을 주면 기분이 좋아. 노네임?

 

나시: 모욕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이야. 시라유키. 정말 이것보다 나은 방법은 떠올릴 수가 없었어. 이거 대신에 곤약이나 딸기잼 같은 걸 쓸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면 너는 분명 더 싫어했을 걸.

 

유즈미 나데시코: 혀가 길다. 어서 끼얹어.

 

그리고 마침내 스펀지가 위치한 곳은 메리의 정수리 위였다. 철퍽 소리와 함께 천천히 메리의 머리카락을 타고 소금물이 흘러내렸다.

 

유즈미 나데시코:… 퉤. 퉤! 으으

 

메리는 자신의 얼굴에 줄줄 흘러내리는 소금물에 무척 큰 반감을 드러냈다. 눈에 들어갔을 때는 큰 고통을 호소했고, 입에 들어갔을 때는 얼굴을 찌푸리며 소금물을 뱉어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스펀지에서는 소금물이 하염없이 뚝뚝 떨어졌다.

 

기와라 우시오: …야. 이건 내가 보기에도 좀 그렇다. 나나시. 그냥 면전에 뻐큐를 날리는 게 낫지 않아? 왜 이렇게까지 해? 이러니까 네 행실이 변태 같아 보이는 거야.

 

나시: 괴롭히려고 한 게 아니야 소금물은 전해질이거든. 그냥 물보다 더 전도성이 높지. 그러니까 터치가 더 잘 전달될 거야. 두뇌에 직접 통하는 이상 정신을 흐트러뜨리기도 쉬울 거고.

 

기와라 우시오: 진짜 이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게 놀랍다

 

그것이 개선점이었다. 지면에 맨발을 닿게 하며 캐롤 브라이트의 몸이 받는 저항을 줄이며, 그만큼 낮아진 전압을 강한 전도체와의 접촉으로 메꾸는 것. 머리에 터치를 사용할 예정이니 그 머리에 스펀지를 올리는 것은 논리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심한 고문도 아니다.

 

유즈미 나데시코: 푸흑. 퉤! 큭.

 

바라 쿠리스: 어라 그런데 이거. 보기가 너무 안 좋지 않아…? 무슨 이지메를 하는 것 같은

 

하지만 겉보기에 그것은 모욕처럼 보였다. 메리는 거의 눈을 뜨지도 못했다. 소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눈동자가 눈꺼풀 사이로 사라지자 그것은 마유즈미의 얼굴이 되었다. 괴로워하는 마유즈미의 얼굴이.

 

이다 쿠로하: 크히히히히히. 보기 좋은데? 이 귀신년 이거 엉엉 울어댈 것만 같잖아. 꼴이 좋다. 응? 아주 그냥 꼴이 좋아.

 

무로 시라베: 눈을 감아. 메리.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보는 편이 나았다. 샤이닝의 줄다리기는 결국 어느 쪽이 발을 땅에 단단히 박고 있냐의 싸움이다. 메리가 디디고 있는 지반이 약하고 질퍽거린다면 마유즈미의 자아가 돌아올 확률도 높아졌다.

 

하지만 나는 내 옷의 소매로 메리의 눈가를 닦아냈다.

 

이다 쿠로하: 뭐. 뭐야. 너 뭐 해? 병신이냐?

 

무로 시라베: 계속 감고 있어. 떠 봤자 네 눈만 괴로울 뿐이니까.

 

유즈미 나데시코: …하. 마유즈미를 되살리려면 내 눈이 아픈 편이 낫지 않겠어?

 

무로 시라베: 이건 마유즈미의 눈이기도 해. 돌아온 마유즈미가 시력 손상을 겪게 둘 순 없지. 예술가의 눈은 귀하게 여겨야 하니까.

 

이다 쿠로하: 쓸데없는 동정을 베풀고 있네. 병신 저거.

 

염화나트륨만으로 전해질을 만들기 위해서는 포화용액 상태인 것이 가장 나았다. 이름 없는 남자 또한 포화용액을 가져왔을 테지. 그것이 눈에 떨어지면 그건 고문일 뿐이었다. 내 생각에 부합하듯 이미 어느 정도 말라버린 소금 물방울들은 증발하며 메리의 피부에 하얀 소금가루의 자국만을 남겼다. 누군가가 흰 페인트를 끼얹은 것이 굳어버린 듯한 인상이었다.

 

본래 가혹하고 수치심을 주는 심문 도중 작은 친절을 베푸는 것은 심문에 도움이 되었다. 잠시 메리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분명한 전략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무로 시라베: 빨리 끝내지. 이름 없는 남자. 다음 수가 있나?

 

이름 없는 남자는 헛기침을 두 번 하고 말을 이었다.

 

나시: 전압을 안정화하고,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였으니 남은 건 추가 출력 장치를 붙이는 거야.

 

그 말과 함께 이름 없는 남자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금색의 머리카락 묶음을 꺼냈다. 그의 눈과 머리카락에 도사리고 있던 금색이 짙어졌다. 그를 보는 내 본능이 날을 곤두세웠다. 당장 그를 무력화시켜야 한다고 성화를 내는 것을 가까스로 잠재웠다.

 

롤 브라이트: 손을 거들어 주시게요? 힘드시진 않으시겠어요?

 

나시: 힘든 건 당신이 힘들죠. 캐롤 씨. 다만 한 손잡이에 두 명이 붙으면 방향이 틀어질 테니 터치는… 직접 하셔야 해요.

 

이름 없는 남자가 가져온 개선안은 터치라는 현상에 공학적으로 접근한 자의 통찰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나마저도 캐롤 브라이트의 역량에만 기대고 있던 마유즈미의 부활에 제삼자가 줄 수 있는 의미 있는 조력이었다. 나는 이름 없는 남자가 마유즈미를 다시 부르기 위해 깊게 생각했음을 알았다.

 

영혼과 연관된 힘을 기계처럼 본다는 것이 얼핏 어불성설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힘이 전류라는 형태로 사람을 오고 가니 그는 전류의 형태로 그 현상을 다루고자 했다. 그것이 통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시도가 있었다는 점은 시사할 가치가 있었다.

 

무로 시라베: 캐롤 브라이트. 맨발을 드러낼 용의가 있나?

 

롤 브라이트: 그게 마유즈미 씨를 다시 불러오는데 도움이 된다면. 알몸이라도 되죠.

 

캐롤 브라이트의 말에 두 목소리는 기함을 했다.

 

바라 쿠리스: 뭐어어?! 캐캐캐캐롤 여자아이가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이다 쿠로하: 마. 맞아! 언니! 조심해야 해. 남자들은 다 헤픈 변태 개새끼들이라고!

 

롤 브라이트: 괜찮아요. 고작 발 정도 가지고 엄살들은.

 

바라 쿠리스: 어머. 어머! 캐롤 말하는 것좀 봐! 원래부터 저랬던가?! 어. 언제부터?! 누가 캐롤을 망쳐 놓은 거야!

 

롤 브라이트: 다들 살면서 숨기고 싶은 면이 있는 거겠죠.

 

캐롤 브라이트는 신고 있던 구두와 양말을 전부 벗고서 탑의 바닥에 맨발을 디딘 채 섰다. 메리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캐롤 브라이트에게 말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이런 기분이었어. 제인? 축축한 천이 머리 위에 올라가는 기분이. 이런 거였구나? 그렇다면 네가 퀸이 되고자 했던 것도 이해가 돼.

 

유즈미 나데시코: 이 모든 수모의 기억을 잊고 싶었던 거겠지. 그리고 한때 네 머리 위에 손걸레를 올려놓은 것들 위에 서고 싶었던 거야. 그래. 그럴 만한 일이었어.

 

롤 브라이트: ….

 

캐롤 브라이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뭐라고 말이라도 해 봐. 샤이닝의 하수인들아…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야. 꺾이지도 않을 거고. 만약 너희가 나를 다시 억압한다고 해도, 나는 반드시 돌아올 거야!

 

롤 브라이트: 시작할게요.

 

캐롤 브라이트는 이름 없는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높은 출력의 터치. 정전기의 파열음이 들렸지만 두 사람 모두 몸을 살짝 떨 뿐. 1초도 지나지 않은 채에 호흡을 맞추었다. 두 사람 분의 터치. 그리고 피터치자는 한 명. 전해질을 뒤집어 쓴채로 터치에 마주해야 하는 메리였다.

 

눈동자. 그 검은 눈동자.

 

이름 없는 남자의 개선안은 효과를 발휘했다.

 

즉시 정신이 열리고.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쉽게 마유즈미의 정신에 진입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한 번 캐롤 브라이트에게 저항해 본 메리였기에, 나는 영락없이 그녀가 더 오래 저항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마유즈미의 다크닝과 메리의 의지가 강하다고 한들. 전류를 직접 연결하니 메리마저도 버틸 수는 없었다.

 

나는 이전에 이미 갔던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신으로 말을 거는 절차 없이도 나는 그녀가 있는 방에 도달했다. 그녀는 여전히 그곳에 앉아 있었다. 바로 어제 방문했을 때와 비교해 볼 수 있었던 차이점 하나는 그녀 앞에 먹으로 글씨를 써놓은 종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氷室 調.

 

그것은 나의 이름이었다. 나는 종이에 쓰인 내 이름을 보고 마유즈미 또한 다시 보았다. 그녀는 내게 시선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입을 떼지는 못하고 있었다. 입 안에 나비를 넣은 듯 볼과 입술이 달싹거리는 와중 한마디 말이 없었다. 나는 바로 어제 그녀를 찾아왔을 때.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을 하나 떠올렸다.

 

유즈미 나데시코: 사내가 먼저 말을 걸기 전에 말하지 마라.

 

아직 그 체득이 그녀의 몸에 남아 있었다. 주입된 억압. 하지만 그것이 남아있는 와중에도 그녀는 말을 하고 싶다는 분명한 의사를 보였으며. 그 의사를 통해 그녀는 습관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 점은 다행이었다.

 

무로 시라베: 안녕. 마유즈미.

 

내가 인사를 한 뒤에야 그녀는 대답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안녕하세요. 히무로 씨. 진짜 다시 오셨네요? 그것도 빨리요.

 

나는 그녀가 앉은자리 앞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내 이름 석자가 적힌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무로 시라베: 어떻게 알았지?

 

유즈미 나데시코: 네? 뭐 말이에요?

 

무로 시라베: 나는 네게 내 이름을 전해준 적이 없어. 그런데 어떻게 나의 이름을 쓸 수 있었냐고 묻는 거야.

 

나는 그녀에게 내 이름의 글자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준 적이 없었다. 이름만을 알려주었다. 어쩌면 그 철자를 알아낸 것은 나에 대한 기억을 마유즈미가 무의식적으로 떠올렸다는 의미가 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내가 그녀의 정신 안에서 해야만 할 일은 상기를 위한 입력값의 제공이었다.

 

마유즈미는 나에게 무슨 그런 질문이 다 있느냐는 듯이 짐짓 태연하게 대답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씨는 제 이름이 가짜라는 것도 아시잖아요. 저도 이름 철자 정도야 알 수도 있죠.

 

그건 논리적이지 않은 대답임을 지적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한가롭게 잡담을 할 수 없었기에 나는 다시금 그녀에게 꿈에서 깨어날 것을 상기시켰다.

 

무로 시라베: 이전에도 말했지만 이 장소는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 아니야. 너는 네 몸의 주도권을 다른 이에게 빼앗긴 채 이곳에 갇혀 있어. 그러니 깨어나서 네 몸을 되찾아야만 해.

 

유즈미 나데시코: 하지만 당최 제가 어디서 깨어나라는 거예요?

 

무로 시라베: 이곳은 꿈이야. 마유즈미. 네 정신세계 안이야. 네 것이 아닌 자아가 너를 밀어냈어. 이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네가 너 스스로의 이름을 떠올려야 해. 그것을 통해 너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재정립한다면, 다시 깨어날 수 있게 될 거야.

 

유즈미 나데시코: 여기는 꿈이 아니라 제 집이에요. 여기가 꿈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세요?

 

무로 시라베: 꿈 안에서 너는 중지를 뒤로 젖혀 손목에 닿게 할 수 있어. 한 번 해봐.

 

꿈은 인식에 의해 변화한다. 꿈의 몸은 그 형태만을 가진 공상이기에 현실의 신체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작업을 행할 수 있다. 그 인식을 심어둔다면 마유즈미의 정신체는, 자신의 중지를 손등에 닿게 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현실성 재확인이라고 한다.

 

마유즈미는 떨떠름한 기색을 띤 채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중지가 서서히 뒤로 꺾여 그녀의 손등에 닿았다. 마유즈미는 왁 비명을 지르면서 자신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어떤 부상도 없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진짜네요? 꿈이었어? 어… 언제부터?

 

무로 시라베: 얼마 지나지 않았어. 마유즈미. 시간이 없어. 네 이름을

 

유즈미 나데시코: 와. 이것 좀 봐요! 오른손끼리 닿잖아?! 또 뭐 할 수 있어요?

 

마유즈미는 자신의 손가락을 온통 뒤로 꺾어서 손목에 닿게끔 만들었다. 극한의 육체적 수련을 거친 수도사의 묘기처럼 보였다.

 

무로 시라베: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 네 이름을…

 

유즈미 나데시코: 알려 줘요. 빨리! 네?

 

무로 시라베: …알려준다면 내 말을 진실로 받아들여 줘. 지금 너는 네 코를 막은 채 코로 숨을 쉴 수도 있을 거야.

 

유즈미 나데시코:… 진짜다! 진짜다!

 

마유즈미는 자신의 코를 꼬집은 채 말했다. 비강이 좁아졌을 때 발생하는 육성의 변화. 조금 더 높아지고 어눌해진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그녀에게 다른 방법도 알려줄 수 있었겠지만, 이름 없는 남자의 개선안이 있다고 해도 그녀와의 만남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즐거운 시간은 끝이 나야 했다.

 

무로 시라베: 이제 내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겠어? 너는 지금 꿈 안에 있어. 깨어나기 위해서는 너의 본명을 떠올려야 해.

 

유즈미 나데시코: 으음…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어떻게 제 꿈에 있는지나. 어떻게 그런 걸 다 아는지나

 

무로 시라베: 네 코에서 손 떼고. 당장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어. 마유즈미. 이 집 안에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내가 이곳에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으니, 내가 떠날 때마다 너는 이 안을 거닐며 네 본명의 단서를 찾아야만 해.

 

유즈미 나데시코:…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해 주세요! 느닷없이 그런 말씀을 하셔도… 납득이 안 된다구요!

 

나는 그것이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다면 납득할 수 없을 테니. 하지만 이야기를 해 주자니 그녀와 내가 겪은 일은 너무도 많았다. 추리지 않으면 떠들기만 하다가 밖으로 쫓겨날 터였다.

 

무로 시라베: 우리는 모험을 했지. 네가 믿지 못할 정도의 모험을. 우리는 눈을 감았다 뜰 사이 해변에 떨어져 괴물들과 부대껴 잠을 청했으며,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을 건넜고, 바위 하나를 사이에 둔 채 몸을 씻었고, 총잡이의 교리를 전수했어. 나는 너를 기만

 

유즈미 나데시코: 자. 잠깐만요! 모. 몸을 씻어요? 그러니까… 온천 같은 곳은 아닌 거죠? 옷은 입었던 거죠?

 

나는 해변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무로 시라베: 아니. 입고 있지 않았어.

 

유즈미 나데시코: 호. 홀딱 벗었다고요?!

 

무로 시라베: 그래. 맞아.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거듭 말하지만 중요한 건

 

마유즈미는 상체를 내 쪽으로 굽힌 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이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단 말이에요! 어 어떡해. 말도 안 돼! 공갈이죠?! 분명 농일 게 분명해!

 

무로 시라베: 거짓말이 아니야.

 

유즈미 나데시코: 그. 그럴 리가 없어요! 아! 그렇지! 만약 그렇게 저랑 친하시다면 저에 대해서 말해 보세요! 저만 아는 사실들! 저랑 그렇게 친하다면 알 수밖에 없는 것! 아하! 장군이요! 대답을 못 하시겠죠?

 

의심은 좋은 덕목이었다. 대뜸 누군가가 찾아와 모험을 했다고 말했는데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그것이 더 불안한 일이다. 마유즈미에게 대답을 해 주려는 찰나. 나는 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마유즈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반 없었다. 누군가를 알았다고 하려면 최소 성명. 가족관계. 성장배경을 전부 알고 있어야 했는데, 나는 그중 어느 것도 완벽하게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떠올린 것이라고는 마유즈미가 종종 내게 보이는 버릇들이었다.

 

무로 시라베: 너는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할 때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다른 사람을 까꿍이라는 말과 함께 놀라게 하거나 반기기를 좋아했어. 굉장한 수준의 부호이며, 마유즈미 가문의 미술품 투기에 이용당하고 있었지. 놀랄 때는 와. 하는 감탄사를 썼고, 

 

유즈미 나데시코: 오호오

 

마유즈미는 내 말을 듣고 그게 사실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진술이 어느 정도 그녀에게 신빙성 있게 들렸다는 점은 좋은 징조였다. 내가 그녀와 친분이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녀가 스스로의 기억을 탐사한 끝에. 자력으로 깨어날 가능성 또한 오르기 때문이다.

 

무로 시라베: 정황상 이곳은 매우 엄한 가정이었을 거야. 너는 다른 사람의 글씨를 보는 것만으로 그 필적과 의도를 알 수 있다는 기예를 가지고 있었어. 또 너는 거품을 내서 목욕하는 걸 즐겼으며

 

마유즈미는 그 순간 내 말을 끊고 소리쳤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에 혈류가 도는 것을 보았다.

 

유즈미 나데시코: 네?! 모. 목욕?! 네? 그걸 어떻게!

 

나는 첫 번째 살인을 조사하던 와중 일어났던 상황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여전히 잡담을 나눌 생각은 없었기에 가능한 한 간결히 말하는 편이 나았다.

 

무로 시라베: 내가 네 욕실을 찾아갔을 때 네가 나에게 귀띔해 주었어. 거품을 내며 목욕을 하는 것이 즐거웠다고.

 

유즈미 나데시코:… 제가 그걸 직접 말했다고요…? 당신한테요? 제 몸 씻는 거에 대해서…?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건데… 외간 남자애한테… 제가 진짜 그랬어요?

 

무로 시라베: 맞아.

 

유즈미 나데시코: 그럴 리가 없는데… 나랑 그토록 가까우려면 최소한

 

마유즈미는 동공을 마구 떨며 천천히 내게 물었다. 무언가 소통이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애초에 그녀의 기억을 되새기려는 계획이 퇴색되는 것 같기도 했으며, 언제 터치가 끊기고 내가 그녀의 정신 밖으로 쫓겨날지 모르는 찰나인데 아무래도 좋은 목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씨. 혹시 제 정혼자세요? 제가 그걸 잊어버렸을 뿐이에요?

 

나는 마유즈미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혼? 느닷없이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창의적인 사람과 나는 이런 점에서 엇갈리기 마련이었다. 어째서 마유즈미는 내가 그녀의 정혼자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을까?

 

나는 짧은 시간 동안 마유즈미에게 있어 정혼이란 무엇 일지를 생각했다. 정혼은 권력층의 후계자들을 맺어 주며 동맹과 권력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는 일이었다. 정혼은 사랑할 상대가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사랑할 권리의 박탈은 그 자체로 기본권의 침해다. 나는 마유즈미를 차치하고 그 누구라도 그런 권리를 빼앗기고 싶지는 않으리라 판단했다.

 

내가 그녀의 정혼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편이 우호적인 관계를 이끌어낼 터였고, 그것은 거리낄 것이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무로 시라베: 나는 네 정혼자가 아니야.

 

하지만 내 예상과 반대로 마유즈미의 아래턱은 바닥에 닿을 듯이 헤 벌어지고야 말았다.

 

유즈미 나데시코:… 어쩌면 좋아… 남녀가 유별한데, 정혼자도 아닌 분에게 대체 어디까지 말을

 

나는 마유즈미가 나를 끌어안은 적도 있다는 것은 알려주지 않는 편이 현명하겠다고 생각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네에에에에?! 끌어안아요?!

 

무로 시라베: 지금 내 말이 들렸어?

 

너무 크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케프는 물이라는 뜻이다. 흐르는 물을 손바닥으로 막을 수 없듯이. 어떤 말은 내가 전하고 싶은 의도가 없을지라도 그녀에게 전해지고야 말았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카의 연결이, 또 마유즈미의 자아가 회복되고 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기에. 나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다만 끌어안는 것 정도의 육체적 접촉을 가졌다는 것이 마유즈미에게는 유독 큰 충격으로 다가온 듯했다.

 

유즈미 나데시코:어쩜 좋아… 혼례는 다 치렀어… 외간 남자애랑… 결혼할 사이도 아닌 사람이랑!

 

마유즈미가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나는 상당한 동요를 느꼈다. 그녀의 눈물은 내가 저질렀던 기만이 들통났을 때의 순간을 되새기게 만들었다. 나는 보통의 나보다 급히 그녀를 달래게 되었다.

 

무로 시라베: 결혼은 선택이야. 마유즈미. 혼인을 하지 않고도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많아. 동요하지 마. 너는 중요하지 않은 일에 과다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

 

나는 그녀를 보며 마유즈미의 일가. 거의 다 죽어버린 그들을 향한 분노를 느꼈다. 그들이 마유즈미의 영혼을 억눌렀다. 

 

유즈미 나데시코: 그렇지만 저한테는 중요해요!

 

무로 시라베: 네 안위를 걱정할 수 있는 사람이 정혼자뿐은 아니야.

 

유즈미 나데시코: 아. 안 돼. 안 돼…! 또 혼내실 거야… 내가 그랬다는 걸 아시면 분명 또 혼내실 거야! 어쩌면 좋아…!

 

마유즈미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 안고서는 울상을 지었다. 메리가 마유즈미의 얼굴로 지은 표정. 하지만 그것과는 형연할 수 없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표정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불쾌함보다는 전이되는 괴로움으로 작용했다.

 

나는 그녀가 당장 신경 쓰고 있는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려 했다. 중요한 것은 마유즈미가 깨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앵무새가 사람 말을 따라 하듯이 했던 말을 반복하고 싶었다. 그러려던 찰나. 나는 내가 언제 그녀의 꿈에서 쫓겨날지 알 수 없음을 깨달았다. 와닿지 않는 말을 늘어놓다가 쫓겨나 마유즈미를 저 혼돈에 남겨둘 수는 없었다. 그녀를 안정시켜야만 할 이유가 생겼다.

 

정혼자가 부정적인 관념일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마유즈미에게 이 관념은, 분명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무로 시라베: 나는 네 정혼자가 아니야. 마유즈미. 하지만 우리는 친구였어.

 

유즈미 나데시코: …또래 친구요? 정. 정말인가요? 저희가 어디에서 만났죠?

 

무로 시라베: 암흑의 탑에서. 네가 맨발로 끝없는 장미꽃을 밟을 수 있지만 죽음의 마수를 넘나들게 한 탑. 운명을 주었지만 너를 단명하게 만든 탑 안에서 너는 나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친구가 되었어. 마유즈미.

 

그것은 사실이었다. 누가 바꾸라고 종용하여도 바꿀 수 없는 답이었다. 마유즈미는 여전히 혼란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전보다는 약간 나아 보였다.

 

유즈미 나데시코: 그렇다면. 저에게도 당신이 그런 친구였겠네요.

 

무로 시라베: 모르겠어. 너는 나와 달리 마음이 넓은 사람이니, 다른 사람에게도 나에게 했던 만큼 상냥할지도 모르지. 나는 달라. 나는 인색하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너 같지 않아. 나는 네가 내 앞에서 추락해 버린 이래로 항상 너를 생각했어. 잠이 들 때도 너를 생각했어. 너를 보고 있는 와중에도 너를 생각해. 나는 오만하지 않아. 그렇기에 감히 너에게도 내가 그런 존재이리라 말할 수 없어.

 

마유즈미는 조용히 내게 물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제가 히무로 씨에게 그토록 상냥했나요? 제 꿈에 찾아와 도와주려 할 정도로요?

 

무로 시라베: 비단결과 첫눈을 곱한 만큼 상냥했지.

 

유즈미 나데시코: 무엇을 했길래요?

 

무로 시라베: 내게 우정과 사랑을 주었어. 내가 갚을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마유즈미는 얼굴을 조금 붉혔다.

 

유즈미 나데시코:… 아직 입을 맞추거나 그런 건 아니죠? 아직은 안 했죠?

 

무로 시라베: 사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나를 껴안았을 뿐이야. 점막 접촉은 멀었지.

 

유즈미 나데시코: 사심 제가 쓸 법한 말이에요. 제가 정말 그렇게 말했단 말이죠?

 

무로 시라베: 맹세해.

 

유즈미 나데시코: 저. 정말 그 말이 사실이라면

 

마유즈미는 어딘가 납득한 듯한 표정으로. 하지만 여전히 얼굴을 상기시킨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즈미 나데시코: 그렇다면 저희는 저희끼리 혼례를 치른 거군요.

 

 

 

 

 

히무로 시라베가 선 채로 고개를 떨군 직후. 미동도 하지 않게 되자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숙소 안에 있는 이들은 몇 마디를 더 떠들었다.

 

바라 쿠리스: 지금 기절한 거야? 우리 쪽에서 도와야 하지 않을까? 바닥에 앉혀 주자!

 

기와라 우시오: 아니야. 뭔가 저대로 둬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냅둬도 될 것 같아. 잘하고 있는 거야. 좋다. 이 새끼야. 잘 돼라 좀

 

카이다는 캐롤과 마유즈미의 몸을 차지한 웬 귀신 년을 바라보았다. 둘 다 어지간히 힘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들 뿐만이 아니었다. 캐롤의 한쪽 손을 잡고 있는 분홍머리 변태놈 또한 눈을 질끈 감은 채 식은땀을 흘려댔다.

 

카이다는 그 광경을 보며 그게 그 정도로 공을 들여야 할 일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카이다는 마유즈미 숙소 속에서 이루어진 모임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여기에 있는 건데? 구경밖에 할 수 없는걸. 카이다가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다른 이들이, 마유즈미와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었던 이들이 가만히 손을 모은 채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싶지 않았기에 그 숙소까지 찾아왔다는 것이다. 무엇이라도 하고 싶기에. 사실은 떠들어대고 옥신각신하며 도움이 하등 되지 않는 그들이지만, 어떻게든 마유즈미를 응원하고 싶기에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카이다는 마유즈미가 그 정도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무슨 사람 하나 살리는 꼴 보자고 옹기종기 모인 꼴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간낭비였으니까. 그러다 카이다 치고는 명석하게, 마유즈미가 정말 그럴 만한 사람인 건가? 하는 의문을 느꼈다. 그리고 마유즈미를 살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자신의 언니를 보았다.

 

카이다에게는 자신의 언니뿐이다. 카이다가 자신을 둘러싼 외력. 제츠보와 히무로, 나나시 앞에 기지 않고 안하무인 하게 욕을 하고 다닐 수 있는 것은 캐롤이 있기 때문이다. 캐롤은 분명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 단 하나 뿐인 가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카이다 본인의 몸에 귀신이 깃든다면, 캐롤은 저렇게 온 힘을 다해서 그녀를 구하고자 할까?

 

정말로? 가족이니. 그녀 같은 애물단지까지 구해주고자 할까? 마유즈미 그 꼬맹이가 마침내 돌아온다면 카이다는 어떻게 되는 걸까?

 

마유즈미는 꼴 보기 싫지만 분명 애교가 있고 살가웠다. 모난 짓을 하는 것도 본 적이 없다. 어쩌면 그게 카이다가 마유즈미를 싫어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카이다가 느끼기에 자신 같은 사람은 누구도 좋아해 줄 리가 없었다. 좋아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두 명의 동생이 있을 수는 없었다. 캐롤에게 있어 마유즈미가 그렇게 소중한 존재라면, 그녀를 밀어내게 둘 수는 없다. 오직 카이다만이 언니의 동생이었다. 새 동생은 필요 없다.

 

카이다의 이런 태도 또한 시간을 들인다면 달라질 수 있었다. 낮은 자존감, 열등감, 질투. 모두 충분한 시간을 들여 사랑을 주었다면. 그렇게 캐롤에게 있어 피가 이어진 가족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카이다가 스스로 이해할 수 있었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 것이다. 자신의 언니가 그녀를 얼마나 아끼는지 몇 번이고 알려 주었는데도 난데없는 시기와 위기감으로 인해 일을 망쳐놓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가정이었다.

 

카이다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한 손이 제츠보에게 단단히 붙들린 채로 자신의 언니를 방해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