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단크 타워 챕터 4 - 1
더 단크 타워
챕터 4: < 황금 원숭이의 손길 >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카이다 쿠로하: 방에서 나가.
카이다 쿠로하는 침대에 앉은 채 당당하게 요구했다. 제츠보는 한숨을 내쉬었다. 옥신각신의 시작이었다.
제츠보: 내 방에서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지? 내가 그렇게 어려운 걸 요구했나. 그냥 닥치고 자라니까?
카이다 쿠로하: 진정이 안 되니까 그렇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데 어떻게 잠을 자?! 내가 가만히 있기를 바란다면 꺼져버려. 그러지 못하겠다면 내가 하루종일 떠벌떠벌거려도 참던가!
제츠보: 노력하지도 않았잖아. 너! 적어도 백 초 정도 셌으면 몰라. 너는 그냥 눈 조금 감다가 몇 초도 안 돼서 일어났잖아!
카이다 쿠로하: 그럼 너희들은 다른 사람이 한 방에 있어도 잘 수 있다는 거냐?
제츠보는 이 대목에서 조금 당황했다. 제츠보는 기계가 된 이후로 잠을 잔 적이 없었고, 노바디였을 때도 노네임과는 각방을 썼다. 노바디가 감기에 걸렸을 때 노네임이 밤을 새워가며 간호해 준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특수한 상황이니 예외로 쳐야 했다.
제츠보: 모르지. 나는 기계니까.
카이다 쿠로하: 봐! 너도 확신이 안 서잖아! 어떻게 나에게 위협이 될 만한 상대 앞에서 빈틈을 내줄 수가 있냐고. 씨발 말이 안 되잖아!
제츠보: 안타깝게 됐네. 하지만 그게 나한테 중요하지는 않아. 그냥 조용히 하라는 게 그렇게 힘들어?
카이다 쿠로하: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제츠보: 봐! 지금 너는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잖아. 지금까지 네가 한 짓을 생각해 봐! 흑막의 내통자가 되어 흑막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고, 나이토와 모리가 중상을 입게 만들고, 사사건건 시련 속으로 들어가 방해를 했고, 나나시까지 납치했어! 그런데 너는 이런 취급을 받는 게 억울하기만 한 거지?
카이다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제츠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츠보는 카이다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인 것을 보고 생각했다.
"설마 지금 이게 나한테 싸움을 걸 만큼 정신이 나가있나?"
다행히 카이다는 그 정도로 미쳐 있지는 않았다. 이성을 잃은 채 제츠보에게 달려드는 대신 카이다는 거의 호두만한 뇌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부당한 취급을 그만 받을 수 있을지 골몰해 본 것이다.
떠오르지 않았기에. 카이다는 그냥 앞에 있는 사람한테 물어봤다.
카이다 쿠로하: 뭐 씨발.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너희들 앞에서 무릎 꿇고 빌까?
제츠보는 카이다의 뻔뻔함에 지루해질 틈이 없었다. 그녀가 말 한마디를 할 때마다 그녀는 더욱 뻔뻔해졌다. 카이다라는 사람에게는 바닥이 없었다. 그저 떨어지고 떨어질 뿐이었다.
제츠보: 카이다. 그런 식으로는 용서가 안 돼. 반성은 더더욱 안 되고.
카이다 쿠로하: 왜?!
제츠보: 그건 네가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게 되니까. 이 바보야! 너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 됐다는 생각을 안 하잖아. 달라지고 싶다는 생각도 안 하고! 너는 그저 남들과 부대껴야 할 상황이 오니까 조금이라도 자신의 위치가 편했으면 싶어서 꼬리를 내린 거잖아.
제츠보: 그딴 게 어떻게 사과겠어? 상황이 달라지면 너는 언제든지 또 다른 사람을 해치고 죽일 텐데. 다른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냐고.
카이다 쿠로하: …그러니까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제츠보: 이게 진짜…!
카이다는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 나름대로의 승복의 뜻이 담긴 몸짓이었다.
카이다 쿠로하: 네 성질 긁으려고 하는 말이 아니야. 진짜 모르겠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비수가 되는 일은 쉬워. 누굴 죽이라 하면, 죽이면 그만이야. 그 사람의 가족이 몇 명인지나 직업 따위는 몰라. 그냥 나는 죽이라는 대로 죽여왔어.
카이다 쿠로하: 하지만 사람이 되는 건 몰라. 되본 적이 없다고. 진짜 어떻게 해야겠지 모르겠단 말이다. 나도… 이제 달라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너 같은 깡통한테 말해주기에는 일이 너무 복잡하지만…
제츠보: 잘 됐네. 그러니까 알아서 해 봐. 혹시 모르지. 캐롤한테 물어보면 답이 나올지.
카이다의 독자적인 생존 전략. 모든 사람들에게서 이득을 취하고 배신하는 반사회적인, 반집단적인 태도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였다. 그녀와 헤어진 가족을 찾는 일, 찾아서… 어떻게든 하는 일. 그것을 위한 생존이었고 그것을 위한 배신이었다.
달리 말해. 자신의 가족과 다시 만난 카이다는 더 이상 무뢰한 폭력배처럼 굴 필요가 없어졌다. 오히려 그녀는 캐롤과 함께 있기 위해 자기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렇기에 본래라면 모든 걸 떨쳐내고 장미밭으로 도망쳤을 카이다가 제츠보의 날 선 말을 견디고 있었다.
모노로그는 카이다를 배신했다. 그녀가 영안로 밖에서 나가지 못할 줄을 알고도 나나시의 납치를 의뢰했다. 그녀에겐 더 이상 의탁할 상전이 없었다. 따라서 온갖 패악질을 부린 카이다는 스스로가 망쳐 놓은 평판을 다시 주워 담아야 했다. 실로 기막힌 업보였다.
굳이 이 머저리들과 내가 어울려야 하나? 다른 놈들이랑은 전부 반목하면서 캐롤이랑만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유혹 또한 카이다의 뇌 안에 불쑥불쑥 떠올랐다. 그녀는 무언가를 오래 붙들고 있는 일에 쥐약이었다. 달갑지 않은 일을 오래 하는 것도 쥐약이었다. 무시와 불신의 시선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카이다는 칼을 꺼내 들고 싶었다.
충동 제어 중추의 퇴화. 과다한 아드레날린 분비. 도파민 회로의 결함. 카이다가 다 집어치우자며 날뛸 이유는 많고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마침내 가족을 만났다. 그녀의 편이 되어 줄 유일한 사람. 절대 만나지 못하고 죽으리라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만 분의 일의 기적이 내려왔다. 카이다는 그 동아줄을 결코 놓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는 캐롤도 카이다를 아꼈다. 아꼈다! 무조건적인 호의! 계약 관계와 상호의 이득 없이도 도와준다. 두둔해 준다. 왜? 가족이니까!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으니까! 이보다 좋은 일이 있나? 카이다는 더 나은 일을 떠올릴 수 없었다.
다른 놈들은 이런 걸 다 가지고 있었단 말이야? 피로 이어진 사람이 사랑을 준다고? 참 좋았겠어. 팔자 좋은 개새끼들. 그러니까 처음에 동기 영상이니 뭐니를 봤을 때 지랄 발광이었군. 하.
느닷없는 열등감과 시기가 카이다의 마음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카이다는 이제 자기도 가족이 있고, 그 가족이 살인 게임에서 그녀와 함께하고 있음을 떠올렸다. 즉 다른 이들과 다르게 카이다는 살인 게임 안에서도 가족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은 카이다에게 일종의 우월감을 불어넣었다.
흥. 놈들이 알면 부러워서 까무라치겠지. 일차원적인 카이다는 속으로 다른 이들을 비웃었다. 살인 게임에 가족이 있다는 것은 좋든 싫든 그녀와 캐롤 둘 중 하나밖에 살지 못한다는 뜻이지만 그것은 카이다가 떠올리기에 너무 먼 비전이었다. 애초에 카이다에게 앞일을 고려하라는 요구는 좀 가혹한 것이다.
카이다 쿠로하: …캐롤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
카이다는 팔짱을 끼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카이다 쿠로하: 걔가 나 데리고 다니다가 나처럼 배척당하는 건 마음에 안 들어. 씨발 뻔하잖아. 니들은 날 감싸는 캐롤을 나랑 같이 내칠 거잖아. 그러니까 청산은 내가 알아서 하는 게 나아.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고.
이게 자기 분수는 아네? 제츠보는 카이다의 팔도 안으로 굽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래도 믿을 만한 자기 편이 생기니 걱정도 해줄 줄 알고. 정말 디딜 만한 바닥이 하나 있는 거만으로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 카이다의 기이한 점이었다.
제츠보: 그래서. 너는 누군가에게서 명령을 받아야지만 할 마음이 든다는 거야?
카이다 쿠로하: 뭘 원하는지 이야기해 주는 게 더 편하다는 거다.
제츠보: 그럼 탑에 있는 사람들한테 돌아다니면서 뭐라도 할 테니 용서해 달라고 빌어보던가.
카이다 쿠로하: 뭐. 씨발? 싫어! 창놈새끼한테 걸리면 내가 어떻게 될 줄 알고!
제츠보: 걔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하겠어? 너도 그게 바보 같은 생각인 건 알잖아. 과업을 받는 거야. 정말 그 일을 이루면 용서해 줄 만큼 힘든 일을 요구받고 그걸 해내 봐.
카이다 또한 진심으로 나나시가 그녀를 희롱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건 아무리 초고교급 중에 비정상인이 많다고 해도 힘든 일이었다.
카이다 쿠로하: 하지만, 나한테 진짜 존나 불가능한 일을 시키면 어떻게 해?
제츠보: 그래도 해야지. 아쉬운 사람은 너잖아.
카이다 쿠로하: 제기랄. 또 을 신세야…
제츠보: 잘 생각이나 해 봐. 카이다. 만약 네가 네 발로 기어대며 탑을 한 바퀴 돌면 네 모든 행동을 용서하겠다고 했을 때. 내가 그걸 진심으로 요구하는 거겠어?
카이다 쿠로하: 뭐?! 안 해. 병신아!
제츠보: 만약이라고 했잖아! 만약이라는 뜻도 몰라?!
카이다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제츠보를 노려봤다. 제츠보는 생각했다. 뭐 어쩌라는 거지 이게?
제츠보: 네가 그딴 반응을 보이는 것부터 확실하잖아. 뭔가 자존심 상하는 짓 시키면 안 한다며 내뺄 것 같은 네가. 정말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묵묵히 일을 한다 생각해 봐. 그럼 다른 사람들이 네가 정말 마음을 고쳐 먹었다 여기지 않겠어?
왜냐하면 카이다가 진심으로 그들에게 용서를 받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도 할 수 없으니까. 가장 일어날법한 일은 뻔뻔하게 나타난 카이다가 막상 할 일을 들으니 크악 크아아악 거리며 거부하는 일이었다.
제츠보: 네가 그걸 진지하게 임하는 것만으로 많은 게 달라져. 이해가 가?
카이다 쿠로하: …그거. 사실 굉장히 일리 있는 발상이야. 오. 좋은데?! 왜 난 저런 생각을 못 했을까? 시키는 일 하고 나면 용서받는 거잖아! 하. 쉽구만. 쉬워.
내 말은 그게 아니었는데? 제츠보는 자신의 말이 곡해될대로 곡해된 것은 알았지만 굳이 그걸 정정하는 수고는 해주지 않았다. 결국 그건 카이다 쿠로하가 감당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제츠보: 내 말은 그만큼 사과를 진중하게… 쯧. 됐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카이다 쿠로하: 기다려라. 병신 새끼들아. 내가 간다! 너희들에게 용서를 받을 거라고! 카하하하하하!
카이다는 그렇게 답을 내고는 후련하다는 듯이 휘파람을 불며 침대에 몸을 눕혔다. 제츠보는 그걸 보며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이딴 안하무인의 괴인을 제츠보가 밤새 감시하는 동안. 나나시와 캐롤은 한밤중의 밀회를 즐기고 있을 터였다.
제츠보는 뭐라도 좋으니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 그 안에서 일어날 일은 뻔했다. 나나시와 캐롤이 살인 게임에 오기 전부터 어떤 관계였는지 제츠보는 알았다. 아무리 기억을 지워도 무의식이 그들에게 유리하게 움직일 터였다.
서로 의존하던 두 사람 중 하나가 죽었는데. 살아남은 쪽이 죽음을 무릅쓰고 죽은 쪽을 되살려냈다? 죽은 쪽은 또 극적으로 빈사의 살아남은 쪽을 구했고? 이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얼굴을 되찾았다고 해도 캐롤에게는 제츠보에게 없는 무기가 있었다.
바로 살아 있다는 것이다.
맥동이 힘차게 뛰는 생기 있는 몸. 살덩이 그 자체. 그것은 실리콘 재질의 피부를 가진 차가운 기계에게는 결여된 것이었다. 만약 노네임이 그 스스로의 위안을 위해 노바디를 되살렸다면 분명 체온이 있었겠지만, 노네임은 노바디를 그런 형태로 되살리지 않았다. 그는 워낙 숫기가 없어서 생식기도 만들지 않았다. 하기야 절친의 질을 만드는 것도 이상한 일이겠지…
만약 노바디가 몸을 가진 채 살아났다면 그녀에게는 기회가 있었을까?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간에. 캐롤은 살인 게임에 오기 전에도 온 후에도 나나시를 채가는 요호(妖狐)였다. 그런 그녀가 이제부터 카이다를 두둔하겠다고? 자기 여동생이라서?
제츠보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카이다는 누워본 적도 없는 것 같은 제츠보의 침대를 영역 중시 동물처럼 헤집어 놓았다. 이건 자기 거라며 훼손하고 과시하는 꼴. 화가 치밀어오를 법도 했지만 제츠보는 별반 생각이 없었다.
그래. 카이다 구경이라도 하자. 캐롤의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제츠보는 그렇게 카이다와 반목하며 밤을 지새웠다.
내 몸은 캐롤 씨가 당기는 대로 저항 없이 그녀를 향했다. 내 왼손과 그녀의 오른손이 맞닿았다. 장갑이 없는 손이.
정신의 연결이 익숙해졌다. 나와 그녀는 터치가 주는 정전기의 찌릿함도 느끼지 않았다. 나는 단지 나의 가슴이 한차례 달싹이는 것을 느꼈다.
캐롤 브라이트: 저희 사이에 어딘가 의견 불일치가 있는 모양이네요. 나나시 씨.
캐롤 씨는 웃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깨가 드러난 옷을 입고도 덥다고 느껴질만치 뜨거워진 나의 얼굴을.
캐롤 브라이트: 저는 변명을 한 적이 없어요. 비밀회의를 할 심산도 아니었어요. 제가 뭘 원하고 당신을 불렀을까요?
고혹스러운 음색. 이런 종류의 발성은 미풍양속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속삭임은 음탕하게 들렸다.
캐롤 브라이트: 말해 봐요. 나나시 씨. 무슨 생각을 하고 제 방에 오셨나요?
재미있는 게임이다. 서로 이끌리는 것. 이 긴장의 끈이 재미없게 풀려버리지는 않을까. 내가 숨은 제대로 쉬고 있나. 어디를 봐야 하나. 신경이 곤두서고 발을 내밀까 말까 조마조마 줄다리기를 하는 것.
나나시: …섣불리 대답하기 어렵네요.
캐롤 브라이트: 왜요. 제가 당신 경멸할까 봐요?
나나시: 솔직하게 대답하면 그렇게 될까 봐요.
캐롤 브라이트: 재미있네요. 저도 당신이 솔직한 저를 볼 때를 상상하거든요.
나나시: 그럼 당신 상상 속의 저는 어떻게 돼요? 당신을 경멸하나요?
캐롤 브라이트: 아뇨. 저를 두려워해요.
캐롤 씨는 그 화두를 오래 다루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꽉 잡은 내 왼손을 당겨 나와 그녀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똑같은 장소였다. 나와 그녀가 서로의 영혼을 들여다보았던 날. 그것을 관측했던 날. 그때와 같이 나는 그녀의 침대에 앉았다.
요염한 분위기. 위험의 기분. 어떤 친구도 이만큼의 개인 공간을 침범할 수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안에서 벌어질 일은 알 수 있다.
캐롤 브라이트: 저희 모두 같은 걸 원하는 것 같은데. 굳이 참아야만 할까요?
그녀의 희고 긴 손가락이 내 턱 끝에서부터 미끄러져 내려갔다. 목울대의 불거진 부분을 한 번 훑고, 가슴께를 찍고, 배를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실로 아찔했다. 나는 그녀의 방에 발을 딛기 전 기대와 불신을 절반씩 가지고 들어왔다. 그러나 그 기대가 진실로 드러나자 나는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손을 넣었다. 황금 양털처럼 곱고 풍성하며 매끄럽고도 부드러웠다. 그 묘한 매력과 감촉에 정신이 팔려 있던 나는 서서히 그녀의 뒷목으로 손을 넣었다. 그녀의 목이 그래야 하는 정도보다 얇다고 느꼈다. 이래서야 그녀를 조각상으로 만들면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목이 부러질 것이다.
그녀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는가 싶더니 목이 꺾였고, 몸도 토막나듯이 서로 떨어져 산산히 부서졌다.
다시는 잃고 싶지 않다. 그런 생각만이 들었다. 소유욕은 저열한 욕망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는 내 눈앞에서 그녀가 죽게 두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다.
캐롤 브라이트: …있잖아요. 나나시 씨. 사실 반은 당신 놀리는 건데요. 반은 진심이에요. 죽는 건 무서운 일이었어요.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아요.
내 호흡은 서서히 거칠어졌다. 미칠 것만 같았다. 모닥불 앞의 환상 속에서 나는 그녀를 안지 못해 안달이 난 짐승처럼 굴었다. 나는 영안로에서 탈출하느냐의 고뇌를 거치며 그 야성을 억눌렀지만, 실재하는 그녀를 만나자 그것은 어떻게 억누를 도리 없이 날뛰어댔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사랑을 주고 나눌 수 있는 온전한 부활.
여전히 캐롤 씨와 일선을 넘어서는 안 될 이유는 차고 넘쳤다. 먼저 그녀는 막 중상을 입은 환자였다. 흥분이나 혈류가 빨라지는 일이 이로울 리 없었다. 죽음은 그녀에게 충격을 주었다. 죽어 보는 일이 죽는 일보다 덜 무서울 이유는 없다. 어쩌면 그녀는 살아 있다는 실감을 살결의 접촉을 통해 느끼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그렇다면. 상태가 안정되어 있는 내 쪽에서 올바르게 처신하는 것이 옳았다. 아쉬울지라도 분명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만…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저를 춥지 않게 해 주세요. 외롭지 않게 안아 주시지 않겠어요?
그리고 캐롤 씨는 내 쪽으로 팔을 벌려 보였다.
아! 아브락사스! 나의 아브락사스여! 왜 나를 시험에 들게 만드는가!
캐롤 브라이트: 헉. 나나시 씨. 표정이 왜 그러세요?
나나시: 기분 탓이에요.
캐롤 브라이트: 순간 엄청난 고통 때문에 막 일그러진 것처럼 보였는데.
나나시: 기분 탓이에요. 아. 아무튼. 안아 드릴게요. 이리 와요.
캐롤 씨는 안아 주는 쪽이 자신이라는 양 몇 초를 더 팔을 벌린 채 버텼다. 하지만 나도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포용하는 쪽은 나였다. 위로를 해 주는 쪽은 나였다. 말 그대로 죽고 살아난 사람한테 어리광을 부릴 수야 없다.
이윽고 아쉬운 쪽이 누구인지는 명확해졌다. 캐롤 씨는 몸을 숙인 채 내 가슴께를 이마로 천천히 들이받듯이. 나에게로 몸을 기댔다. 내 등을 껴안는 그녀의 팔을 느꼈다. 묵직하고 부드러운 존재감이 나에게 닿는 것을 느꼈지만, 놀랍게도 나는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죽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모든 후회와 아쉬움을 마음에 담은 채 세상에서 영영 잊히는 기분. 아무리 삶을 되찾았다 한들 그런 것을 뇌리에서 잊을 수는 없겠지. 그것이야말로 불안이었다. 그녀는 한 번 죽었고 다시 눈을 떴다. 어쩌면 죽음이 그녀에게 영구적인 손상을 입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나시: 캐롤 씨. 몸에 힘 풀어요. 당신 지금 석상처럼 딱딱해요.
캐롤 브라이트: 못 풀겠어요.
나나시: 왜요?
캐롤 브라이트: …몸이 흩어질 것만 같아서요.
캐롤 씨의 목소리는 부드럽고도 위태로웠다.
캐롤 브라이트: 제 온몸이 부서지지 않고 서로 붙어 있다는 게 불안해요. 나나시 씨. 제가 몸 어딘가에 주고 있던 힘을 풀면. 제 몸을 잡고 있던 장력이 풀려서 다시금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아요. 무서워서. 무서워서 못 풀겠어요.
죽음의 공포. 나는 완전히 뻣뻣해진 그녀의 몸을 느꼈다. 잔뜩 힘이 들어가서 약간 단단하게 느껴지는 몸. 온 근육과 신경을 수축시킨 그녀의 몸은 대리석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나와 함께 있는 와중에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나시: 풀어도 돼요.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있다는 실감이었다. 조바심. 불안. 긴장. 공황은 죽음의 공포에서부터 왔다. 그렇기에 나는 단단히 굳어 버린 캐롤 씨의 몸에 온기를 흘려보냈다. 상체를 굽혀 그녀를 껴안고서 나는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문득 두꺼운 스웨터 너머로 만져지는 탄력 있고 질긴 띠 같은 것을 느꼈지만, 그 정체에 대한 의문은 제쳐 두었다.
나나시: 힘 풀어요. 무너져 내리지 않을 테니까.
캐롤 브라이트: 그게…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게 어려워요. 머리로는 아무 일도 없을 거란 걸 아는데도. 불안해서…
나나시: 깨지면 제가 다시 모아 줄게요.
무책임하게 들릴지 몰라도 이것이 더 나았다. 당신은 깨지지 않을 거라고 말하기보다, 힘이 풀려서 깨져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이 받아들이기에 더 편하리라.
나나시: 몇백 조각. 몇천 조각이 나도 다시 맞춰 줄게요. 그러니까 안심해요. 그래야만 한다면 몇 번이고 구해줄 테니.
내 딴에는 심사숙고해서 나온 말이지만, 나는 내가 말실수를 한 것은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이게 정말 옳은 조언인가?
옳은 조언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한 조각도… 빼놓지 않으실 거죠?
나나시: 한 조각도 빼놓지 않을게요.
나는 캐롤 씨가 참고 있던 숨을 훅 하고 내뿜는 것을 느꼈다. 폐 안의 한 숨의 공기도 없을 때까지 내뱉은 더운 숨이 섬유를 뚫고 내 살을 간질였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서서히 대리석상에서 인간으로 변해갔다. 건강한 혈맥이 뛰는, 호흡을 하는 인간.
캐롤 브라이트: …내 편이 있다는 건 역시 좋은 일이에요.
그녀가 딱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캐롤 씨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그녀는 항상 차분하며 여유로운 모습만을 보여주려 애썼다. 그렇기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캐롤 씨에게 기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 또한 다른 사람에게 기댈 때가 되었다. 비단 나 뿐만 아니라 탑에 있는 다른 이들에게도.
내가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있기를 바라며 나는 그녀의 등을 계속 쓸어내렸다. 옥시토신이 분명 진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걸리는 이 질긴 띠 같은 건 뭐지?
캐롤 씨는 답했다.
캐롤 브라이트: 저기. 당신이 지금 쓰다듬고 있는 거… 음… 이거 좀 민망하네. 벗겨 달라 하고 싶은데, 막상 부탁하려니 부끄럽고…
나나시: 붕대 같은 건가요? 어디서 다치셨어요? 불편하다면 풀어드릴게요.
캐롤 브라이트: 붕대가 아니라. 저… 그게… 브래지어 후크에요.
나나시: 헉!
화들짝 놀라 손을 떼려는 나를 캐롤 씨가 저지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 얼굴에는 쑥스러운 난처함이 떠올라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 원래라면 내가 직접 할 텐데… 이게… 지금은 왼손이 자유롭지 않네요. 좀 풀어 주실 수 있으세요? 그냥 하고 잘 수도 있지만 그게 숨통을 엄청 조여대서… 진짜 불편해요.
나나시: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능히 해내 보이겠어요.
나는 캐롤 씨의 묘한 시선 앞에서 올곧은 표정을 보여 주려 애썼다.
캐롤 브라이트: 의심스러운데. 사실 지금 기쁜 거 아니에요?
나나시: 아닌데요?
캐롤 브라이트: 뻔뻔하긴. 언제부터 그렇게 나쁜 아이가 됐어요?
캐롤 씨는 투덜거리며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멜빵 치마의 어깨끈이 유독 좁게 느껴지는 그녀의 어깨 옆으로 스르르 미끄러졌다.
그리고 나는 몇 초간 멍하니 터틀넥 스웨터만 남아버린 캐롤 씨의 상체를 바라보았다.
캐롤 브라이트: …지금 일부러 안 풀고 저 놀리시는 건 아니죠?
스웨터를 벗기는 것까지 내 몫이라는 것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심장이 쿵쿵 뛰어대며 내 몸의 혈류가 열차처럼 빠르게 달려대는 통에. 나는 이성과 내 호흡 속도를 유지하려고 무척 애를 써야 했다. 순 변태처럼 보이는 짓거리는 자제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나는 아무 말 없이 허리에서부터 천천히 그녀의 스웨터를 끌어올렸다.
늘씬한 허리가 가장 먼저 드러났다. 호리병의 굽은 목처럼 얇게 느껴지는 치명적인 곡선이…
아브락사스!
(일시정지)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영안로에서 이루어지던 이성과 본능 사이의 줄다리기가 연장전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정말 잘 싸우고 있었다. 닿으면 화상을 입을 만치 뜨거운 물일지언정 끓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시각이 다시금 살로 지배당하기 전에 걷어올린 스웨터 너머로 브래지어의 후크를 찾았다. 흰색의, 레이스가 달린 띠가 보였다. 내가 후크를 중심으로 양쪽 천을 손에 잡았을 때 캐롤 씨가 외마디 신음을 냈다.
나는 숨을 한 번 내쉬고 후크를 풀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고정되어 있던 천이 풀려 양쪽으로 멀어졌다. 그토록 팽팽하게 연결되는 것을 매일 스스로 찰 수 있다는 게 경이롭게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게 있다면 나 스스로의 감정 통제 능력이리라.
캐롤 브라이트: …저. 나나시 씨. 고마워요. 이제 좀 숨이 트이네요.
캐롤 씨는 정말 한결 편해진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스웨터 소매에서 두 팔을 빼내 소매가 덜렁거리게 만든 다음. 스웨터의 몸 부분에 상체를 우겨넣고 꾸물텅꾸물텅 움직였다. 왜 그런 움직임을 하는지 나는 곧 알 수 있게 되었다.
캐롤 씨는 벗겨낸 브래지어를 방의 한 구석으로 휙 던져 버리고서 아무 일 없다는 듯 소매에 팔을 끼워 넣었다. 아. 후크만 풀었지 벗지를 않았으니… 그런 건가…
나나시: …세수 좀 하고 올게요.
물을 세차게 내 얼굴에 끼얹은 뒤에 나는 내가 할 일을 정했다. 터질 것처럼 뛰던 심장도. 물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질만치 달궈진 얼굴도 식었다. 나는 내 뺨을 세차게 여러 번 때렸다. 생각이 명징해졌다.
돌아가야겠다. 더 이상 흥분하는 건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손가락이 잘리는 건 경상이 아니다. 신체의 손실은 그 어떤 것도 경상이 아니었다. 내가 이토록 전전긍긍하는 것도 원래는 못할 짓이다. 세상에 이런 정신 나간 놈이 있나? 연모하던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해서 부상을 입었는데 붙어먹을 생각이나 하는 놈이?
거울 속을 들여다보자 그 안에는 머리카락의 일부분이 금색으로 물든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잘 좀 해라. 나나시. 나가서. 단호하게 말하는 거야. 이제 내 방에 가서 자겠다고. 그렇게 나는 결의를 굳힌 채 욕실 밖으로 나왔다.
캐롤 브라이트: 오셨어요?
나나시: 네. 캐롤 씨. 더 부탁할 일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캐롤 브라이트: 저기… 이건 부탁이 아니라 권유이긴 한데요.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을 듣자 나는 다음에 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캐롤 브라이트: 오늘 여기서 묵고 가시면 안 될까요?
나는 얼굴 근육을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은 채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캐롤 씨가 또다시 나를 시험하려는구나. 그리고 이번 시험은 아주 지독하구나.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나나시: 연하를 너무 놀리는 연상은 멋없어요. 캐롤 씨.
나는 나 나름대로 저항했다. 하지만 캐롤 씨는 정말 나를 놀릴 생각이 없다는 듯이 항변했다.
캐롤 브라이트: 노. 놀리는 게 아니에요! 제가 장난으로 이런 거 부탁할 것 같아요? 환자니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간병인이 필요한 거예요! 좀 불안해서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싶은 건 부수적인 문제고요!
이게 과장이 아니라 반쯤은 진심이라는 점이 나를 더욱 난감하게 만들었다. 상처 부위가 악화되면 즉각 조치를 해야 했고, 그녀에게는 심리적 안정도 필요했다. 중환자실이 아니니 너스콜도 없고. 달리 그런 일을 할 사람은 그녀와 한 방에 있는 나뿐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진짜라고요! 아. 정말! 제가 그렇게 헤퍼 보여요?!
나나시: 아. 알겠어요. 믿어요! 믿어! 묵고 가기만 하는 거예요. 알았죠?
그 순간까지도 이게 사심에서 비롯된 건지 아니면 진실일지 긴가민가하던 나였지만, 그것은 진실 쪽에 더 가까웠다. 아무튼 왼손을 최대한 쓰지 않는 편이 나은 사람이었기에 나는 세면대에서 그녀의 머리를 감겨 주고 얼굴을 씻겨 주었다. 묶음머리는 풀지 못했다. 오른손 하나로 묶기 어렵고, 나에게 맡기기에는 미안하다는 이유였다.
캐롤 씨는 몸을 씻고 싶다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상처부위에 물이 들어가 감염이 될 위험이 있었기에 내가 만류했다. 그렇다고 내가 들어가서 씻겨줄 수도 없다고 말하니. 캐롤 씨는 마지못해 내 말에 동의했다.
동침은 빈말이라도 쾌적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쓸 침대를 두 명이서 쓰는 데에 더불어 그녀와 같은 침대에 누워 있다고 생각하면 다시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던 것이다. 하지만 잠자리가 불편할지언정 나와 캐롤 씨는 그날 단잠을 잤다.
나나시: 뭐가 듣고 싶어요?
캐롤 브라이트: Am I blue 불러 주세요. 이번엔 저도 같이 부르게.
그날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노래를 열 개는 부른 것 같다. 목이 조금 쉬었다.
히무로 시라베: 문을 열어라.
메리와 나는 원하지 않는 일이 있다면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나는 메리가 문을 열지 않는다면 내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영영 문을 두드리며 수면을 방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식의 접근은 메리에게 통하지 않는다.
다행히 문은 열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열어주기 싫은데 네가 밤을 새워가며 두드릴 까봐 열어주는 거야.
히무로 시라베: 그렇군.
나와 메리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양쪽의 의자에 서로 걸터앉았다. 한담으로 시간낭비를 할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의자에 앉자마자 그녀에게 말했다.
히무로 시라베: 너를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메리.
마유즈미 나데시코: 응? 마유즈미에게 몸을 돌려달라며 귀찮게 굴 줄 알았는데. 의외네?
히무로 시라베: 이미 그 의사는 전했다. 그리고 네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네가 스스로 줄 방법이 없다면 내가 독자적으로 알아내면 된다.
내 안에서 메리와 마유즈미의 가치를 저울질할 생각은 없었다. 저것은 마유즈미의 몸이었다. 그러니 마유즈미가 가져야 했다. 나는 분명 메리가 죽는 것을 보았다. 마유즈미의 안에 깃든 것이 망령이든 허깨비이든 나는 그것을 몰아내야 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시라베. 우리가 함께한 나날은 잊어버리고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마유즈미가 더 소중해진 거야?
히무로 시라베: 그렇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잘 됐네. 사실 마유즈미는 기관에서도 너를 좋아했어.
히무로 시라베: 안 됐군.
살인 게임에 떨어지기 전에도 보답받지 못할 사랑을 했다니. 마유즈미의 운명은 기구했다. 그녀는 그보다 더 나은 취급을 받아 마땅했다. 다른 사람에게 몸을 빼앗기는 결말은 마유즈미에게 너무 가혹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너에게도 가혹한 일이지. 히무로. 그게 좋은 점이야.
닥쳐라. 망령. 나는 죽은 사람과 이야기를 해야 한다.
히무로 시라베: 너는 어떻게 이 살인 게임에 들어와 있지? 네가 죽는 것을 봤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인공지능과 똑같은 이유로 들어와 있다고 생각해 줘. 꼭 나와 인공지능이 아군이라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나는 객원 참가자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하지만 내가 너희들과 함께 움직일 거라고는 기대하지 마. 시라베. 나는 너를 제외한 이 탑의 누구도 아끼지 않으니까.
히무로 시라베: 왜지?
메리는 마유즈미의 얼굴로 냉소를 지었다.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 정말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하는구나. 시라베. 그날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가 어떻게 패배했는지 너는 모르는 거야.
히무로 시라베: 그렇다. 내가 탈출 장치로 얻은 기억은 대부분 다시 묶어 버렸다. 심지어 그것으로 얻은 기억은 오직 살인 게임 안의 기억이다. 밖의 것은 모른다. 오직 하나만을 남겼다. 캐롤 브라이트는 부활해선 안 된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캐롤은 절대 부활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어. 차라리 지금 죽이는 게 탑 전체의 측면에서 더 나을지도 모르지. 사실 그건 비단 캐롤에게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야. 다 죽어야 해.
나는 그것이 일종의 미성숙한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메리는 본래 잔혹한 성정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종류의 농담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그녀가 진심이었다는 점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 말고는 다 죽어도 돼. 시라베. 어차피 살인 게임은 다시 시작될 거고, 우리가 서로 죽고 죽일수록 이 세상에는 도움이 되니까.
살인 게임이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히무로 시라베: 너는 메리의 잔혹한 면모만을 가진 것 같군. 너는 모르겠지만 메리의 본질은 냉혈성에 있지 않았다. 그녀의 본질은 선행에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선행.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실험체를 기관에 편입시키면서까지 그녀는 화합과 희망의 가치를 믿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네가 아는 그 모습은 허상이야. 시라베. 내가 밖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일 뿐. 그 실체는 전혀 달라.
히무로 시라베: 하지만 내가 아는 모습은 그것뿐이다. 다른 누가 말한들 상관없다. 그녀는 항상 나에게 있어 좋은 사람이었다.
내가 아는 메리가 세간에 알려진 그녀와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메리가 자신의 과거와 스스로의 잔혹성을 숨겼다고 한다면 나는 그녀의 의지를 존중한다.
히무로 시라베: 그러니 나는 내가 아는 메리를 따르겠다. 설령 네가 메리 본인일지라도 나는 그녀가 스스로를 숨겨 가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가치를 숭상한다. 그게 그녀를 향해 보낼 수 있는 나의 감사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떻게 할 셈인데?
마유즈미는 심층 의식에 갇혀 버렸다. 나는 마유즈미를 꺼낼 수도, 그녀에게 몸을 돌려줄 수도 없었다. 나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방법이라도 유일하다면 나는 그것을 따라야만 했다. 메리를 망각의 늪에 빠트리는 건 나에게도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내가 아는 메리라면 마유즈미에게 몸을 돌려주었을 것이다.
히무로 시라베: 캐롤 브라이트에게 너의 억압을 의뢰하겠다.
그리고 나는 마유즈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전혀 마유즈미와 닮지 않은 얼굴이.
그날 나는 꿈을 꾸었다. 가옥. 어두운 배경. 흑백의 세상. 그 꿈은 단조로운 무채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검정과 하양이 오직 농도의 차이만을 두고 수놓였다. 그리고 그 중간에.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한 소녀가 있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남자가 걷는 길을 앞서서 가지 마라.
마유즈미는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걸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떤 식사라도 전부 먹어치우지 마라.
마유즈미는 배가 고파도 음식을 남겼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가문과 부모가 하는 말에 토를 달지 마라.
마유즈미는 반론을 속으로 삭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한 걸음의 보폭이 두 자를 넘지 마라.
마유즈미는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주문한 그림에 너만의 기교나 특색을 담지 마라.
마유즈미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마유즈미는 붓을 손에 쥔 뒤 종이에 대고 팔과 손을 움직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차를 한 손으로 마시지 마라.
마유즈미 나데시코: 옆으로 자거나 엎드려 자지 마라.
마유즈미 나데시코: 연못이나 정원에서 놀지 마라.
마유즈미 나데시코: 무엇도 어기지 마라. 그 무엇도. 나쁜 딸이 되지 마라. 밖으로 나가지 마라. 꿈을 꾸지 마라. 그랬다간 죽는다. 그랬다간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된다. 집에만 있어야 한다. 착한 딸이 아니라면 딸이 아니다.
마유즈미. 일어나. 다시 일어나.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는 마유즈미 나데시코. 마유즈미의 장녀. 나는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니. 마유즈미. 너는 그보다 나은 사람이야. 너는 총잡이고, 나의 카텟이며, 내가 불가능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야. 깨어나. 마유즈미.
마유즈미.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나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것은 그저 꿈이 아니다. 꿈은 모든 것을 의미하거나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마유즈미는 갇혀 있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떠도는 것이다. 그녀는 저 안에 있다. 내가 끌어내야만 한다.
그리고 아침이 밝아왔을 때. 탑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들은 늦잠을 잤다. 늑장을 부렸다. 그들은 몸을 추슬렀다. 전례 없었던 충격이 탑을 휩쓴 다음 날. 몇 시간 동안 그들은 상처를 치유하려는 것처럼 쉬어가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그 휴식이 어떻게 끝날지는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다. 살인 게임의 새로운 동기. 그것이 찾아온다. 새로운 탑의 구역을 탐색한다. 위험 요소가 발견된다. 이해관계가 갈리고 갈등이 시작된다. 하지만 세 번째 학급재판이 끝난 다음날. 그들을 깨운 것은 모노로그의 알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카이다 쿠로하: 야. 야! 일어나 봐! 빨리. 이 병신아! 너 깨어 있는 거 다 안다? 안 일어나?!
제츠보: 누가 사과를 그딴 식으로 하랬어!
탑의 벽에 등을 기댄 채 카이다 쿠로하를 지켜보던 제츠보는 카이다에게 참견하지 않겠노라 스스로 다짐했지만, 앞뒤의 맥락을 전부 잘라버린 강요를 두고 보기는 어려웠다.
카이다 쿠로하: 입 닥쳐! 내 인생에 훈수 두지 마. 야. 나와 보라니까? 나쁜 짓 안 할 거니까 나와 봐!
히무로 시라베: 무슨 일이지.
히무로 시라베는 문을 쾅쾅 두드려대는 카이다 쿠로하에게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그야 문을 두드리며 나오라 종용하는 것은 좋은 화술이라 할 수 없었다. 히무로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이다는 대뜸 그에게 말했다.
카이다 쿠로하: 내가 뭘 하면 나를 용서해 줄래?
히무로 시라베: 무슨 뜻이냐?
한순간에 그 질문의 진의를 파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히무로에게는 그것이 더 어려웠다. 그 카이다가 하루아침에 자기 과오를 다 털어내고 싶어 한다는 것은 누구도 쉬이 떠올리지 못할 것이고, 그런 뻔뻔한 짓을 남의 휴식을 방해해 가며 요구하는 비정상적 행동은 더더욱 읽기 어려웠다.
카이다 쿠로하: 내가 지금까지 했던 잘못. 뭘 하면 용서해 줄 거냐고.
히무로 시라베: 할 생각 없다.
카이다 쿠로하: 흔해빠진 말 하지 말고 뭘 하면 용서해줄 건지 말해. 너도 있을 거 아니야? 이걸 들어주면 내가 용서해 주겠다! 싶은 그런 거. 그만큼 힘든 일을 요구받고 그걸 과업으로…
히무로 시라베: 내가 죽으라면 죽을 텐가?
카이다는 히무로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히무로는 여전히 카이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지금껏 부려온 살인 방조와 간접 상해와 패악질을 명령 한 번으로 퉁칠 수 있을 리 없었다. 자신이 그렇게 용서받을 수 있을 거란 발상은 오직 카이다만이 가능할 터였다.
히무로 시라베: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는다.
카이다 쿠로하: 그래도… 너도 원하는 게 있을 거잖아. 내가 들어줄게! 대신에 너는…
히무로 시라베: 제츠보. 좋은 아침이다.
히무로는 벽에 몸을 기댄 제츠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카이다는 무시당했다. 제츠보는 히무로 쪽으로 손을 살짝 흔들었다.
제츠보: 좋은 아침. 히무로.
히무로 시라베: 이 제안은 네 발상이었나? 카이다 쿠로하에게는 이런 종류의 사고가 불가능하다. 너를 곡해한 모양이군.
제츠보는 뜨끔 가슴이 찔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걸 어떻게 물었냐고 반문하자니 답은 꽤 명확했다. 카이다는 자기 잘못을 사과한다는 발상 자체가 없는 사람이고 그녀의 곁에는 제츠보가 있었다. 그런 종류의 생각을 불어넣을 사람은 제츠보였다.
카이다 쿠로하: 야! 나 무시하지 마! 지금 나는 너한테 말하고 있잖아! 그보다 깡통. 너 이름이 제츠보였냐? 좆구린 이름이네.
히무로 시라베: 나는 엄격한 것이 아니다. 카이다 쿠로하.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장담컨대. 네 말에 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꺼져라.
히무로는 그대로 카이다의 면전에 대고 문을 닫았다.
카이다 쿠로하: …좆같은 새끼. 뭐. 저놈 손해지! 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다 해줬을 텐데. 다른 놈들은 나로 인해 이득을 보는 동안 저놈은 아무런 이득을 못 보게 되는 거잖아. 그때 가서 나한테 매달려 봤자 쓸모없어.
카이다 쿠로하: 흥! 오히려 부탁을 들어줄 사람이 하나 줄은 셈이잖아? 나한테는 이득이야. 자. 그럼 다음은 누구한테 가볼까!
제츠보는 카이다를 만류하거나 더 좋은 방법을 제시해 주지는 않았다. 그들이 친하지는 않으니까. 제츠보는 그저 카이다의 감시역이었다. 그래서 혼자 떠벌떠벌거린 그 말이 히무로의 귓가에는 생생하게 들렸으리라는 것도 귀띔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카이다가 히무로 직후에 찾아간 사람은 하필 이바라였다.
카이다 쿠로하: 얘는 그나마 모난 점이 없으니 잘 풀리겠지. 다른 새끼들은 죄다 하나씩 병신 같은 부분이 있는데 얘는 순 물러 터졌어. 용서의 발판으로 삼기에는 적격이지.
이딴 게 용서를 받는다는 사람의 태도인가. 하지만 그 문제에 이전해서 제츠보의 뇌리에 떠오른 의문이 있었다.
제츠보: 그럼 왜 마유즈미에게는 사과하러 가지 않은 거야? 네가 인질로 잡고 목에 상처까지 낸 걸로 알고 있는데. 심지어 히무로의 옆방이었잖아.
카이다 쿠로하: 그년은 나한테 총을 겨눈 적이 있어서 논외야. 걔한테는 미안한 거 없어. 오히려 걔가 나한테 미안해해야지.
이번 게 마지막이었다. 제츠보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제 어떤 바보같은 말이나 상황이 나와도 내가 바로잡아주거나 도와주는 일은 없다. 하지만 스스로 그 다짐을 지킬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카이다의 경이로운 무지는 마치 서커스처럼 보는 사람을 사로잡곤 했기 때문이다.
카이다 쿠로하: 빨갱이 그 새끼가 보인 건 최악의 반응이었어. 걔는 원래부터 꽉 막히고 딱딱한 부분이 있잖아? 앞으로는 더 나아질 일만 남았다는 거지. 하. 기대가 되네.
그리고 카이다는 이바라의 방문을 두드렸다.
카이다 쿠로하: 야. 나 왔어! 할 얘기 있으니까 문 열어 봐!
카이다는 5초를 기다린 뒤에 다시금 문을 두드렸다.
카이다 쿠로하: 열어 봐. 열어 보라니까! 야!
이바라 쿠리스: 뭐길래 그래?
제츠보는 살짝 열린 문의 틈 사이로 이바라의 얼굴을 보았다. 이미 불신과 의욕 없음이 잔뜩 드러났지만, 카이다는 그걸 몰랐다.
카이다 쿠로하: 할 이야기 있어서 왔어. 야. 내 말 들어봐.
이바라 쿠리스: 친근하게 부르지 마. 카이다. 나는 너랑 친한 적이 없어. 앞으로도 안 친할 거야.
카이다는 숨길 수 없는 짜증의 기색을 죽이고 죽여가며 어떻게든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것은 웃음보다 이 이빨로 네 숨통을 끊어버리겠다는 표현에 가깝게 보였다.
카이다 쿠로하: 흐흐흐흐. 그러지 말고. 어제 캐롤이 했던 말 있잖아. 내가 이제 안전하다고. 그 말은 진짜야. 너. 캐롤이랑 친하지 않았냐? 젖에 얼굴도 문댔잖아.
이바라 쿠리스: 내가 캐롤이랑 친하다고 해서 너랑도 친할 이유는 없어. 애초에 캐롤이 너 같은 애랑 친하다는 게 말이 안 돼. 네가 약점이라도 잡은 거겠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카이다는 그 순간 꽤 마음이 상했다.
카이다 쿠로하: 아니거든. 네가 뭘 알아? 아무튼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러 왔냐면. 부탁을 하나 들어줄 테니 날 용서해 줘. 뭐든 들어줄게.
이바라 쿠리스: …웃기지 마. 카이다.
카이다는 조금의 호의도 담기지 않은 이바라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것은 카이다의 뇌리에 남아 있는 이바라의 모습과 크게 동떨어진 것이었다.
카이다는 생각했다. 씨발. 이년 뭐지? 얘가 이렇게 정색을 빠는 건 처음인데. 왜 나한테만 지랄이지? 이것이 카이다의 논리 회로였다. 어째서 그나마 상냥하고 성질이 순한 사람마저 카이다를 마주할 때는 보인 적 없는 이빨을 드러내는가? 아하. 저것들이 나를 차별하는구나!
이바라 쿠리스: 지금 장난하는 거야? 대뜸 와서 용서해 달라고? 뭐든 들어줄 테니까 그걸로 퉁치자. 그런 뜻이야?
카이다 쿠로하: 내가 언제 그랬어! 그냥 너는… 불가능해 보이는 과업을 나한테 주면 돼! 그럼 되잖아!
카이다는 무언가를 설명하는 데에 전혀 재능이 없었다. 그녀의 뇌 기능 중에서 설득에 쓰여야 할 부분은 남들보다 저조하게 기동했다. 대신 그녀는 협박을 하고 남이 무언가를 실토하게 하는 일을 잘했다. 카이다가 놓인 상황에선 전혀 도움 되지 않는 특기였다.
강단에 올라선 학생이 말을 떠는 것처럼 카이다는 어느새 자신이 하려고 했던 말을 까먹었고. 본래의 목적 또한 퇴색되었다. 그래서 카이다는 조금씩 제츠보가 꺼냈던 말을 앵무새처럼 전했다. 심지어는 그 말조차 띄엄띄엄 기억했기에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이바라의 성격이 좋아 보여서 용서가 시원시원하리라 생각했던 건 카이다의 오판이었다. 이바라는 탑에 있는 이들 중 누구보다 더 사자를 존중하며, 그들이 존중받아 마땅하다 여겼다. 당연히 사람의 죽음에 일조한 카이다를 좋게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쉽게 용서해 줄 수는 없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카이다. 너 그냥 꺼져야겠다.
카이다의 바로 옆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기와라 우시오의 숙소가 열린 것이다.
카이다 쿠로하: 뭐야. 넌 또 뭔데?
하기와라 우시오: 널 용서할 생각이 없는 사람 하나 추가요지. 좆이나 까잡숴. 카이다. 진짜로. 나이토랑 모리를 사실상 죽여놓고 무슨 개잡소리야. 너?
카이다는 몇 시진동안 쉬지 않고 남을 욕할 수 있었지만 남이 자신을 한 마디라도 나쁘게 입에 담는 건 참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카이다 쿠로하: 정신이 나갔나? 어이. 죽고 싶어? 죽여줘?
하기와라 우시오: 이거 봐봐. 또 사람 죽이려고 하잖아. 너는 틀렸어. 카이다. 용서를 받고 싶어? 사람 죽일 거 다 죽이고 패악질을 쳐 놓고서 이제 신분 세탁하고 새 인생 살려고? 되겠냐. 너도 진짜 머리 꽃밭이다.
이바라 쿠리스: 하기와라. 자극하지 마! 그러다가 큰일 나.
이바라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게 카이다를 더욱 불쾌하게 했다. 그녀가 그저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되고 조심히 다뤄야 하는 야생동물인 것처럼 대했기에. 그녀는 간접적으로 모욕을 당한 기분을 느꼈다.
카이다 쿠로하: …나한테 왜 그러는데? 미안하다고. 미안하다니까! 그러니까 나한테 뭐든 요구해! 대신에 나 좀 용서해 달라고. 그게 그렇게 어려워?
하기와라 우시오: 구정물 잔뜩 머금은 대걸레가 하나 있다고 치자.
하기와라는 카이다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장광설을 내뱉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냄새나고, 세균이 번식해 있고. 하지만 대충 물에 빤 다음 바닥을 닦는 용도로 쓰는 대걸레를 떠올려 봐. 이거에 비누칠을 하고 때를 빼고 유리 세정제에 푹 적신다고 해서. 너는 그걸로 얼굴을 씻고 싶냐?
카이다 쿠로하: 무슨 좆같은 소리를 하는 거지? 얼굴은 수건으로 닦으면 되잖아.
카이다는 하기와라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장광설의 핵심을 꿰뚫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너야말로 시궁창똥창 닦던 그거라니까? 캐롤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가 와서 너를 두둔한들 신경 안 써. 나는 두 번째 시련에서 네가 우리 죽이러 쫓아오는 걸 봤어. 존나 무서웠다고. 네가 그 안에서 미도리카와를 난자해 놓은 건 도무지 볼 수가 없었어. 너무 잔인해서.
카이다 쿠로하: 아 씨발. 이제 안 그런다니까! 반성한다고!
하기와라 우시오: 미쳤다고 우리가 너를 믿냐. 네가 정말 부탁 하나 들어주는 걸로 네 모든 과오를 청산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나는 이 악물고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을 작정이야. 나만 그런 줄 아냐? 다 똑같을 걸?
하기와라 우시오: 뭐. 내가 죽으고 하면 죽을 거냐? 아니잖아.
히무로도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용서받는 일은 없을 거라고. 카이다는 하기와라에게서 히무로의 모습을 봤다. 단순히 히무로 개인의 의견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생각보다 널리 퍼져 있음을 그녀는 알게 되었다.
하기와라의 말까지 들은 카이다는 정말 저놈들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꼈다. 그리고 카이다는 그녀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방법으로 불안을 몰아냈다.
카이다 쿠로하: 닥쳐! 꺼져! 너 미워!
그것은 덮어 놓고 무시하기였다. 카이다는 씩씩거리며 몸을 돌렸다. 발을 쿵쿵 굴러대며 옮기자 시끄러운 소리가 울렸다. 카이다는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두 개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더 큰 짜증에 휩쓸렸다.
카이다 쿠로하: 못돼 먹은 새끼들. 그래. 알아서 하라지! 다음 사람한테 간다!
카이다는 그 뒤로 카나리 케이토에게 향했다. 하지만 카나리는 문을 열어 주지도 않았다. 아무리 끈질기게 카이다가 두드리고 구슬려 봤자였다.
카이다 쿠로하: 열라고! 열라고! 아아아악! 나 무시하냐. 이 땅꼬마 새끼가! 가만히 안 놔둬! 하지만 지금 열면 가만히 둔다. 열어!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카이다는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잡아당기며 짜증을 냈다. 애꿎은 벽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리기도 했다. 제츠보는 그걸 보며 카이다가 얼마나 미성숙한 사람인지를 다시 깨달았다. 단지 사람 됨됨이 차원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카이다는 모든 면에서 미성숙했다. 발달이 십 년은 늦었다.
카이다 쿠로하: 개새끼들! 느으윽!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고. 뭐든 들어준다니까! 심부름을 해줘라. 호위를 해줘라. 뭐. 장미를 한 아름 따 달라던가 칼을 나눠 달라던가 다 할 수 있는데 왜 안 하는데! 나는 용서를 받고. 쟤들은 좋은 거 받고. 동명이인이잖아!
이럴 때 딴죽을 걸지 않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츠보는 그녀 나름대로 훌륭한 절제력을 발휘했다.
카이다 쿠로하: 네 명 다 허탕이야. 씨발. 캐롤은 나 용서해 줄 테니까 안 찾아가도 되고. 검은 머리 계집한테는 가기 싫은데… 창놈한테나 갈까? 아니야. 그 새끼도 내 기억을 지우려 들었으니까 사과 안 해.
카이다 쿠로하: 그럼 한 놈 남았네 뭐!
카이다는 가벼운 척하는 발걸음으로 추적추적 걸어갔다. 한 층을 내려가 그녀는 토키와 아유키의 숙소 앞에 섰다.
지금 토키와를 들쑤시는 게 맞는 건가? 제츠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토키와는 두 명의 살해에 기여하는 돌발 행동을 보이며 탑내의 위험인물로 급부상했다. 카이다 또한 그 사실을 전해듣긴 했지만 토키와의 위험성을 이해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제츠보는 카이다를 말릴 새가 없었다. 말릴 생각도 없었지만. 아무튼 카이다는 토키와의 문을 두드리며 그를 불러냈다.
카이다 쿠로하: 어이. 푸른곰팡이! 나 왔다! 문 좀 열어 봐! 열어 보라니까. 너한테 손해 될 일은 없어!
숙소 문은 벌컥 열렸다. 의외였지만, 카이다는 쾌재를 불렀다. 이제 드디어 말이 잘 통하는 놈을 만났구만! 안에서 튀어나온 사람이 퀭한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을 돌보지 않아 머릿결은 푸석푸석하고 짜증과 피로에 잔뜩 절여진 피클 같은 꼴이 되었지만. 아무튼 그것은 토키와 아유키였다.
토키와 아유키: 부탁을 해 달라고?
카이다 쿠로하: 뭐야? 어떻게 알았냐?
토키와 아유키: 나도 귀가 있으니까 좀 들었어. 용서받으려 하고 있다며? 네 과오를 털어내고 싶다고 했지? 그 기분은 나도 알아.
카이다 쿠로하: 네가? 하.
카이다는 네가 뭘 아냐는 양 피식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심 그것이 빈 말일지라도 어느 정도 위로를 받은 듯 날 선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토키와 아유키: 잘 알지. 네 딴에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일을 한 거잖아. 물론 나는 집단 차원에서의 최선, 너는 개인 차원에서의 최선이었다는 게 다르지. 게다가 네 것과는 다르게 내 최선은 정말 옳았어.
제츠보는 그 궤변에 끼어들려다가 말았다. 결국 카이다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토키와 아유키: 하지만 스스로 그게 옳은지 아닌지는 확신하기 어려워. 내가 한 선택에는 대가가 따랐거든. 내가 치른 건 아니지만 큰 대가였지. 그 무게가 나를 짓누르는 기분이야.
카이다는 묵묵히 토키와의 말을 들었다.
토키와 아유키: 마치 나를 태운 조각배가 집채만 한 크기의 파도와 범선도 조각낼 폭풍 속에서 표류하는 것만 같지…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도 모르겠고. 옳은 방향도 알지 못해.
카이다 쿠로하: 맞아. 나도 비슷해! 그래!
카이다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카이다 쿠로하: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다. 뭐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고치려 해도… 씨발 그냥 모르겠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개새끼들 말마따나 그냥 뒤졌다 다시 살아나는 게 더 빠를 것 같아. 이미 망했다고.
카이다 쿠로하: 그래. 되돌릴 수 없는 짓을 하기는… 한 것 같아. 이기적으로 굴었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 내 편이 있으면 나도 살아갈 수 있어. 가족이랑 다시 만났으니 막 나갈 필요도 없어.
그건 순전히 그녀만의 사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과거와 행동 원리를 전부 이해해 줄 필요는 없었다. 이해한다고 한들 분명 카이다는 사람을 해치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그런 카이다에게도 구원의 여지는 있는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구원해 주는 것이 굳이 탑에 있는 이들일 필요는 없었다.
카이다 쿠로하: 아무튼 그게 내 상황이다. 업보를 어떻게든 해야 하는 거. 너는 어떻게 하고 있는데? 그 짐을 어떻게 내려놨어? 용서를 받아 보는 편이 정답이지? 역시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거지?
토키와 아유키: 내 말을 잘못 이해한 것 같은데. 카이다. 네가 하고 있는 건 순전 의미 없는 짓이야. 그 지독한 바다 위에서 항로를 잃지 않는 방법은 하나뿐이거든.
토키와 아유키: 내가 옳다는 거야.
카이다는 토키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인가. 이상한 짓을 한 건 본인도 아는데 그게 옳았다고?
토키와 아유키: 자기반성은 약한 사람들이 하는 거야. 스스로의 명징한 판단을 믿을 수 없어서 모든 맥락을 모르는 다른 사람의 질타를 견디지 못하는 거지. 너는 이미 외도의 길에 올랐어. 카이다. 그렇다면 그 위에서 죽을 수밖에 없어. 정말 네가 새 길 위에 설지라도 너는 네 손에 묻은 피의 독성에 스스로 무너져 내릴걸.
카이다는 토키와의 말을 그냥 코웃음 치며 흘리고 싶었다.
하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토키와 아유키: 너는 인간 백정이야. 카이다. 그리고 새로운 출발은 절대로 불가능할 거야.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상 너는 고통받을 수밖에 없어. 하지만 네가 그 낙인을 몸에 지닌 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받아들이면 새로운 가치가 창출될 테지. 네가 관철하고자 했던 뜻을 관철하는 것. 그럴 수만 있다면 너는 고귀해질 수 있어.
토키와가 하는 말이 사실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러게. 내가 왜 이딴 병신 같은 계획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을까? 용서를 받아? 어떻게? 누가 나를 용서해 줄 건데. 이렇게 애써봤자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잖아. 내 기분만 나빠지지.
그리고 정말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이 나쁜 일이라는 걸 내가 인정하면… 나는 뭐가 돼?
내가 지금까지 해온 건 다 병신 짓이었나? 정말로? 단 하나도 제대로 한 일이 없다니.
토키와 아유키: 그러니 용서는 안 해. 카이다. 너에게는 용서가 필요하지 않아. 애초에 내가 지금 당장 원하는 건 하나뿐인데. 그게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겠거든.
카이다 쿠로하: …나가 뒈져. 병신 같은 놈아.
카이다는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더 할 말이 없어. 라고 말하듯이 욕을 했다. 카이다는 자기 딴에 토키와의 말을 곱씹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들려온 토키와의 물음에. 카이다는 흠칫 놀라고야 말았다.
토키와 아유키: …이봐. 카이다. 내가 간밤에 기이한 꿈을 하나 꿨는데. 네가 그 안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물체를 품에 가지고 있었어. 그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해?
카이다는 토키와에게서 묘한 꺼림칙함을 느꼈다. 뭐지? 이게 뭐지? 이… 위기감은?
카이다에게는 짐승 특유의 감각이 있다. 쥐가 결함이 있는 배에서 도망치거나 두꺼비가 지진 직전에 떼거지로 이동하는 것. 새가 태풍을 피해 날아가는 것과 같은 직감이 있다. 하지만 그게 토키와를 상대로 나타나는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그건 미도리카와에게서 느낀 적대심이 아니었다. 히무로에게서 느낀 고요함도 아니었다. 그건 그저… 불길함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함.
카이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랬다간 토키와를 무서워한다는 인상을 그에게 심어줄 것 같았기에. 카이다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신경이 찌릿찌릿 곤두서는 것을 느끼고도 앞을 향해 걸었다.
카이다 쿠로하: 야. 깡통.
제츠보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이다 쿠로하: 야! 로봇!
제츠보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츠보: 옛날에 나랑 친한 사람이 한 말이 있었는데. 그게 뭐더라? 아. 이름의 교환은 곧 서로의 일부를 교환하는 거라고 했지. 그 말은 사실이야.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사람은 나를 동등한 존재로도 보지 않는다는 거겠지.
카이다 쿠로하: 뭔 개소리야 갑자기? 야! 씹년아!
제츠보: 아. 나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최소한의 존중도 해 주지 않으면 나도 어쩔 수 없는 거야.
제츠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카이다는 좀처럼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어쩌면 그 행동은 다른 이와 가까워질 수 없는 카이다의 무의식적인 버릇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간에 제츠보는 카이다가 이름을 부를 때까지 대답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게 제츠보를 상대하는 최소한의 예의기 때문이다. 멸칭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도 있지만.
카이다는 이윽고 내가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들었다.
카이다 쿠로하: 알았다고. 알았어! 제츠보! 이게 네 이름이랬지? 제츠보라면서!
제츠보: 그래. 사람 이름을 불러 주다니 너 치고는 애썼다. 왜 불러. 카이다?
카이다 쿠로하: 부탁 하나만 해 봐! 대신 나를 용서…
제츠보: 싫어.
카이다 쿠로하: 이 씨발. 그럴거면 왜 지랄을 했어! 빈유깡통년아!
제츠보: 안 작다고! 나보다 별반 크지도 않은 주제에! 죽여버릴 거야. 카이다 쿠로하!
제츠보와 카이다는 서로를 으르렁거리며 노려보았다. 몇 초의 대치 이후. 제츠보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이런 일에 짜증을 내지? 분명 나나시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내 감정은 얕고 얕았는데. 고작 저딴 음담패설에 화가 난다고?
구조가 바뀌면서 내 감정도 취약해진 건가? 제츠보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으며 다시금 탑의 벽에 몸을 기댔다. 등과 돌벽이 부딪히며 깡 하는 소리를 냈다. 카이다는 콧방귀를 뀌며 제츠보에게서 고개를 돌리더니, 나나시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제츠보: 이봐. 나나시는 내버려 두겠다며?
카이다 쿠로하: 알 바냐. 병신아! 다 같이 나를 따돌릴 거면 상관하지 말라고!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할 테니까. 야! 창놈! 문 열어!
카이다는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설마 이놈도 열어주지 않는 건가. 카이다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씨발. 캐롤 말고 나를 용서해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이런 개같은 일이!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다른 사람들도 계신 곳에 소란을 피우면 안 되지!
카이다 쿠로하: 켁. 캐롤!
카이다는 바로 옆방에서 나타난 캐롤을 보고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손을 자신의 등 뒤로 감췄다. 벽에 몸을 기대고 있던 제츠보는 열린 문의 사각에 의해 가려졌다. 캐롤은 제츠보를 볼 수 없었다.
캐롤 브라이트: 아직도 캐롤이라 부르는 거니? 언니라고 불러야지! 언제까지 이름으로 부를 거야?
카이다 쿠로하: 쉿! 쉿! 조용히!
카이다는 다급하게 호들갑을 피웠다. 이어진 카이다의 목소리는 작디작았다. 그녀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보통 카이다는 남이 작게 말하게끔 하는 게 아니라 영원히 입을 열 수 없게 만들고,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를 내니까.
카이다 쿠로하: 그런 이야기는 작게 해! 다른 놈들이 알았다간 너만 따돌림당해!
캐롤 브라이트: 어차피 오늘 알릴 생각이야. 그리고. 네가 무슨 내 걱정을 해? 너는 앞으로 다른 분들께 어떻게 사과할지나 생각해 봐.
카이다 쿠로하: 집어치워. 그럴 필요 없어. 부탁을 들어줄 테니까 용서해 달라고 했더니 다들 나를 무시했단 말이야.
카이다는 고개를 숙인 채 침울하게 어깨까지 늘어뜨렸다. 이게 아까까지 나한테 성희롱과 종족 차별적인 발언을 한 그 카이다가 맞는지. 제츠보는 확신도 가지기 어려웠다. 가족 앞에서 카이다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캐롤 브라이트: 그럼 다시 사과하러 가야지. 자. 어서 가 봐.
카이다 쿠로하: 싫어! 어차피 그놈들은 나한테 마음을 열지 않을 거야! 헛수고는 안 해. 너도 괜히 나 챙겨주려다가 따돌림당하지 마. 지금까지와 똑같이 사는 거야. 우리 둘한테도 그게 더 편하잖아.
카이다는 말을 마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현상유지. 카이다는 여전히 단독 행동을 하며 배척당하고 캐롤은 집단에 편입되면 끝날 일이었다. 그러면 더 이상의 해명도 무엇도 필요가 없다. 그들이 욕을 하면 그래 나 나쁜 년이다 하고 욕을 갈겨 주면 끝.
하지만 캐롤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치나미.
캐롤은 천천히 카이다를 향해 걸어가. 카이다의 어깨에 두 손을 턱 올렸다.
카이다 쿠로하: 왜. 왜 그래. 갑자기?
캐롤 브라이트: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너는 분명 지금까지 끔찍한 일을 많이 저질렀어. 쉽게 용서받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너는 고개를 숙여야 하고, 늘 반성해야 하며, 죗값을 치러야 해. 네 딴에는 모욕도 감내해야 할 거야. 하지만 옛날로 돌아가선 안 돼.
캐롤 브라이트: 어리광 부리지 말고 할 일을 해. 다른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려도 포기하지 않을 테니.
캐롤은 카이다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 힘이 곧 기력이 되어 카이다에게 가기를 바라며.
카이다 쿠로하: 하지만 나는 씨발롬들이 나를 괴물 취급 하는 걸 견딜 수 없단 말이야!
캐롤 브라이트: 그래? 그런 일에 고통을 느끼니?
카이다 쿠로하: 느끼지! 그저 고아원에 없었을 뿐인, 팔려가지 않았을 뿐인, 훈련받지 않았을 뿐인, 몸을 개조받고 모든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았을 뿐인 운 좋은 새끼들이 내 어딜 알고 나를 멸시하는데?!
캐롤 브라이트: 정말 속상하겠다. 치나미. 네 말마따나 그건 고된 일이야. 남들에게 검은 양 취급받는 건 짜증 나게 너를 파고들 거야. 화와 부담이 네 가슴속에 가득 차서 어떻게 빼낼 방법이 없다 느낄 정도로.
캐롤 브라이트: 하지만 속죄를 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나와 이야기 좀 하자. 오늘 꼭 나를 찾아와. 알았지?
카이다는 캐롤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선천적인 의심이 다시금 카이다의 안에서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다른 방법도 없었다. 아무튼 간에 캐롤은 카이다의 자아를 잡는 말뚝이 되었다. 잃어버린 가족. 믿을 수 있는 그녀의 편. 그 위치에 캐롤이 오른 이상 카이다는 캐롤을 믿어야만 했다.
카이다 쿠로하: 아. 알았어…
카이다는 머뭇머뭇. 눈을 캐롤과 마주치지 못하며. 이런 단어가 내 입에 오른다는 게 말이 되기는 하나? 라는 의문과 함께. 수줍어하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카이다 쿠로하: …언니.
캐롤 브라이트: 응. 잘했어. 치나미.
카이다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캐롤의 손길을 어딘가 멋쩍은 표정을 한 채 받아들였다. 내심 마음에 들었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나나시: 크흠! 으흠. 음. 타이밍이 조금 안 좋기는 한데.
카이다와 제츠보는 나나시의 목소리를 듣고 흠칫 놀랐다. 그것이 나나시의 방 안에서 들려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목소리는 캐롤의 방 안에서 들렸다.
그리고 나나시는 천천히 문 밖으로 걸어 나와. 멋쩍게 캐롤과 카이다를 번갈아서 보았다.
나나시: 그래서. 가족이었군요. 자매. 나 부르길래 나왔어. 카이다.
캐롤 브라이트: 역시. 눈치채고 계셨네요.
나나시: 네. 뭐… 그게 아니고서야 당신이 반말을 할 만한 이유는 생각하기 어려우니까요.
카이다 쿠로하: …뭐. 뭐야. 이런 씹. 설마 너희 둘이서.
카이다는 입을 쩍 벌렸다. 이런 개같이 어색하고 기분 나쁜 일이 다 있다니. 이 음란한 놈이 내 가족을!
카이다와 나나시는 서로를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영안로 관계에서 청산된 원수 관계였다. 그런데 카이다가 캐롤의 동생임이 밝혀진 이상 두 사람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영안로 속의 일을 뒷전으로 다시 모이게 되었다. 심지어 같은 방에서 잔 것을 카이다에게 들키기까지.
캐롤 브라이트: 너무 놀라지 마. 치나미. 언니도 남자는 사귀어야지.
두 사람은 무언의 합의를 맺었다. 영안로 속에서 벌어졌던 그. 욕설과. 혐오 발언과. 살해 협박과… 아무튼 모든 원한은 잠시 묻고 가자고. 둘 모두 잃을 게 있었다. 나나시는 정인에게 그가 동생을 박하게 대한 걸 들키고 싶지 않았고, 카이다 또한 언니의 연애 사업을 제대로 망쳐 놓을 뻔했던 건 들키기 싫었다. 그 일은 다 해결된 셈 치는 게 상책이었다.
그리고 나나시와 캐롤은 열린 문의 반대편에서부터 울리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유난히 딱딱한 족적. 신발이 없는 자의 걸음. 그것은 제츠보의 것이었다. 제츠보는 문 너머로 조심스럽게 몸을 꺼냈다.
나나시와 캐롤은 깜짝 놀랐다. 제츠보가 곁에 있다는 건 자신이 캐롤의 숙소에서 나왔다는 것 또한, 제츠보가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제츠보: 나나시… 캐롤? 너희 둘이서…
캐롤 브라이트: 23T 씨? 아. 이런…
캐롤의 감상은 그게 전부였다. 아. 이런.
나나시: 어. 23T?! 아. 맞아. 카이다가 있는 곳에는 당연히 네가… 같이 있겠지. 그걸 염두에 둬야 했는데.
나나시의 당황에는 미안함이 섞여 있었다. 그게 가장 나쁜 점이었다. 나나시는 노바디의 마음을 알았다. 노네임을 사랑한 노바디. 노네임이 아니게 된 나나시와 노바디가 아니게 된 제츠보. 이 관계의 감정선이란 얽히고설킨 실타래와도 같았다.
나나시는 그렇기에 제츠보의 앞에서 캐롤와 애정행각을 벌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음을 알았다. 나나시는 정말로. 제츠보의 마음을 후벼 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째서? 친구니까. 그 배려심. 그 상냥함이 가장 나빴다. 그냥 눈길 하나 주지 말고 정신이 팔려 있을 것이지. 무책임한 부활 따위 잊어버리고 후안무치하게 살지. 그러면 제츠보의 영혼과 마음 또한 기계의 것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렸을 터인데.
왜. 왜 너는 아직도 나를 신경 쓰는 거야. 나나시?
그런 게 제일 나쁜 거야. 그게 가장 쓰레기 같은 짓인 거야. 친구로서의 존경이 가장 아프다고.
제츠보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제츠보: ……절망이야. 나나시.
나나시: 저. 절망? 23T. 그럴 것까지는 없잖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야!
제츠보: 제츠보라고. 내 이름. 기억나지 않겠지만, 네가 지어준 거잖아.
제츠보는 그제서야. 노네임을 이해했다. 영원히 온전해질 수 없는 관계. 인공지능이 노바디 본인인가 본인이 아닌가에 대한 논증. 정신의 복사인가. 환생인가? 이미 사라진 육체가 다시 만들어진들 노바디는 노바디인가? 그들은 서로에게 상처일 뿐이었다. 그들은 말 한마디 없이 서로를 후벼 팠다.
나나시: 내가… 내가 그랬단 말이야. 23T… 아니. 제츠보…? 이걸 너의 이름으로 지어 줬다고?
나나시는 얼굴을 굳혔다. 걱정하는 듯한, 위로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좁힌 미간은 곧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친구에게 어떻게 그런 이름을 붙였냐는 듯한 책망. 저걸 봐. 나나시는 노네임 시절의 자신이 나에게 붙인 이름이 너무했다고 생각해. 그 정도로 나나시는 노네임이라는 존재와 동떨어져 버렸어.
나나시: 어떻게 그럴 수가… 제. 제츠보. 정말 미안해. 내가 너에게 정말 지독한 짓을 했어.
그리고 제츠보는 그런 멸칭마저 자신의 이름으로 여긴 채. 23T5U130이라는 별명을 만들었다. 아무 의미 없는 인공지능보다는 차라리 상처를 낼지언정 그에게 존재를 입증받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그런 멸칭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나나시에게 실망하는 것이다. 그 멸칭은 노네임과 제츠보를 연결하는 마지막 끈이기 때문이다. 그래. 지독하다. 지독하다. 지독하지만 그것은 진실이다.
제츠보: 그랬던 거야. 나나시. 오랜 시간 노바디에게 노네임은 희망이었지.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아니야. 너도 그 사람이 아니고. 너는… 나의…
제츠보는 생각했다. 나는 약해졌다. 영안로에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약해졌다. 완력과 방해 전파에 대한 내성이 아니다.
마음이. 마음이 약해졌다.
제츠보: 절망이야…
그렇기에 그녀가 기계임을 꼬집는 말들은 미치도록 모욕적이었다. 더 이상 그녀가 산 자들의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음을. 제츠보는 어떤 존재의 형해임을 되새기게 되기 때문이다.
모노로그: 그래. 너희들은 서로의 절망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금. 희망이 꺾일 때가 왔다.
전조 없이 나타난 모노로그에. 세 명의 사람과 제츠보는 낭패감을 느꼈다. 모노로그가 등장한 이상 그 의미는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다. 시작이다. 이제 가다듬는 시간은 지났다. 새롭게 열린 무대 위에서 춤출 때가 왔다.
카이다 쿠로하: 모노로그…!
모노로그: 반쯤 삶아진 사냥개라. 잘도 살아 있군. 너도 알겠지만 나는 더 이상 네가 필요하지 않다. 너는 나에게서 우위를 점하려 했을 때부터. 비참한 운명이 결정되어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 당신 말대로는 이루어지지 않을 거예요.
캐롤은 카이다를 향해 점점 가까워지는 모노로그의 앞길을 막아섰다.
캐롤 브라이트: 이제 내가 있으니 치나미는 당신 명령대로 할 필요가 없어요.
카이다 쿠로하: 그. 그래! 꺼져!
카이다는 캐롤의 등 뒤에 숨어서 큰소리를 쳤다. 그 광경을 보자 모노로그는 자신의 종이 입술을 비틀어대며 껄껄 웃었다.
모노로그: 네 덜떨어진 자매에게 쏟을 신경이 있나. 제인 캐롤 브라이트? 웃기는군. 자신이 어떤 위험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 채 이리도 당당하다니.
모노로그: 잘 들어라. 카이다 쿠로하가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명확하다. 추가적인 살인의 동기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이미 모든 무대가 완성되어 있기 때문이지. 아. 물론 동기는 준비했다. 단지 그것 없이도 곧 탑은 아비규환이 될 거라는 뜻이지.
나나시: 새로운 동기…
나나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과연 이번에는 어떤 극단적인 상황이 그들 앞에 놓일 것인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모노로그: 8층이 개방되었다. 15분 안에 8층으로 와라. 한 명도 빠짐없이. 기다리고 있겠다.
늘 하던 것처럼 모노로그는 자신이 할 말만 남긴 채 바닥을 스르르 뚫고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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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층. 휴게실과 모니터실. 7층. 영안로. 그리고 8층이 새로 열렸다.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 다니기는 어려운 높이가 되었다. 그리고 탑에 있는 이들은 도축장으로 향하는 가축의 기분을 느끼며 8층으로 걸어갔다.
8층에는 방 다운 방마저 없었다. 8층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공간이었다. 계단을 다 오른 이들은 방 대신 탑의 벽 한쪽을 크게 차지한 롤스크린을 보았다. 그리고 롤스크린의 앞에는 그들 전원이 충분히 앉고 남을 정도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기이한 것이 하나 있다면, 롤스크린에 영상을 쏘아 주어야 할 빔프로젝터가 롤스크린과 수직으로 놓인 수술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수술대 끝부분에 머리를 넣기 위해 있는 듯한 헬멧과 연결되어 있었다.
모노로그: 광자 상영기를 소개하겠다. 너희들의 기억을 다른 이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
알 사람은 알았다. 이 중 누군가의 기억은 살인을 불사할 정도로 충격적인 정보를 담고 있으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