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3

더 단크 타워 챕터 3 - 18

도타싫어! 2023. 3. 25. 15:16

 

자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보라, 그들이 똑같은 가능성을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펼쳐가는가를,

그것은 마치 우리가 두 개의 똑같은 방 사이로

각각 다른 두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그들은 각자 서로 상대방을 받쳐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상대방의 도움에 피곤하게 기대어 있을 뿐 ;

그리고 그들은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피에다 피를 더하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예전처럼 서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가로수길을 따라서 상대방에 의해 인도되거나

상대방을 인도하려고 시도한다면 ;

아, 그들의 걸음걸이는 똑같지가 않구나.

 

 

 

 

 

 

머리에서 흐른 피는 곧 멎었고, 의식도 돌아왔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어지러웠고 뒤통수가 지끈거렸지만 움직일 수는 있었다. 다리 밑에는 여전히 검은 물이 조용히 흘렀다. 뭐 하는 녀석이지…? 느닷없이 나타나서는 사라져 버리다니.

 

다시 난간을 넘고 몸을 던질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난간을 향해 한 발자국을 디뎠으나 그보다 멀리는 나아가지 못했다. 소년. 그녀는 그가 어디에 있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아무런 인기척은 없었다.

 

애초에 진짜 있었던 일은 맞을까? 소녀는 그 일을 아득한 꿈처럼 느꼈다. 새벽에 느닷없이 다리를 찾아온 소년. 비현실적이었다. 기절하기 직전 보았던 옅은 분홍색은 또 뭐지? 옷이 분홍색이었던가? 그 앳된 목소리만이 귓전에 메아리쳤다.

 

그녀는 얼마든지 뛰어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 그 말이 걸렸다.

 

"그래도 죽지 마. 삶은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어. 정말이야. 아무리 네가 암울하고 지독한 불운 안에 있더라도 그 여정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외로워도 살아남아. 악착같이 살아남아…"

 

얼굴도 모르는 오지랖 넓은, 나보다 오래 산 것 같지도 않은 녀석의 말. 내가 무엇을 겪고 있는지 조금도 모르는 사람. 무지함으로 치부하고 내 일을 하면 되는데. 왜…?

 

어떤 이유가 사람이 다시 한 번 살기 위하기 충분한가. 생전 처음 본 사람의 말이 이유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그녀는 그 생각에 몰두하였다. 좋아. 한 번 살아보자. 라며 일어서기에 그녀는 비관적이었다. 모든 게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더 나빠지기만 할 것 같았다. 마음가짐만으로 모든 게 뒤바뀌지는 않으니까.

 

고아가 마음을 먹으면 마음을 먹은 고아일 뿐이다. 모두의 출발선상은 다르다지만 그녀의 것은 너무 뒤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돈이 없었고 낯선 환경에 적응해나가야만 한다. 그녀를 데려가고자 하는 이들을 내치고 홀로 서봤자 미래는 없었는데, 그들을 따라가서 더 좋아지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쭉 그랬지 않은가. 그럼. 무엇을 잡고 살아야 할까?

 

"재회…"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리에서 멀어져 갔다. 여전히. 왜 살아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기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매달릴 만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녀의 가족을 다시 보는 것이었다. 설령 그들은 그녀를 다시 보고 싶지 않더라도. 그게 투신의 문턱에서 그녀를 돌려놓은 미련이었다.

 

카프카는 이와 같은 것을 '파괴할 수 없는 것'이라 칭하였다. 이는 사람이 계속 걷게 만드는 것. 스스로 원하지 않을지라도 울고불며 나아가게 만드는 동력이다.

 

그러나 결코 희망은 아니다. 마지막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파괴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을 파괴한다. 기이한 범주로 사람을 몰아붙이며 변형된 채 절뚝이기를 강요한다. 마지막 희망이 말라 없어질지라도 여전히 파괴되지 않는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비인격의 신이다. 집착이고 저주이며, 사지를 조종하는 실이다. 그것을 마주한 자는 십중팔구 파괴할 수 없는 것을 제한 모두를 잃은 자다. 그는 자신이 아직 죽지 않은 이유를 찾으려다 일종의 그림자인, 자신이 외면하고 부정하고자 했던 어둠의 일면을 마주하고, 멍해져 버린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다시 살 수 있을까?' 고작 그 옅은 분홍색 무언가와 가족을 보기 위해? 그리고 답을 내지 못한 채 맨발로 걸었다. 한 쪽의 신발도 없었다.

 

그녀는 머리에서 피를 흘렸고, 언젠가 피투성이가 된다.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주사위에서 6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주사위를 굴리니 2가 나왔어. 이제 신통력은 없어.

 

나는 내가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고 여겼어. 카나리와 후루미나미를 돕는 거.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일은 카이다와 히무로가 살며, 나이토와 모리 그에 따라 캐롤과 나나시가 위기에 처하는 거야. 그러나 그게 변하지 않을 미래였고 할머니 언니의 말에 따르면 '가장 나은 미래'이기도 했어.

 

왜 그런 식이 되는지는 몰라. 나는 수학 답안지를 훔쳐보는 학생이야. 페이지를 넘겨 답지를 훑고선 답을 적는데 풀이는 못 적고, 주변에 말도 못 해. 천기누설의 업을 혼자 뒤집어쓰다간 내가 죽어.

 

그런데 토키와가 그랬지.

 

"네 입장에서야 그렇게 생각했겠지. 바뀌지 않는 미래라고. 어차피 이렇게 됐을 거라고. 그렇지만 수호령은 탑의 것이 아니라 신 씨의 것이야. 칸나즈키가 살아남기에 유리한 길만을 편집해 보여주면서, 칸나즈키가 내놓는 변덕이나 아무래도 좋은 관용을 들어주면 그만이야. 칸나즈키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미래의 트랙을 따라가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는 사람. 내가 언제부터 할머니 언니가 시키는 대로 했더라? 몰라. 기억도 나지 않아. 내 몸의 권력은 나도 모르는 방식을 통해 할머니 언니의 것이 되어 버렸어. 물론 언니가 조언을 하고 내가 귀담아듣는 식이겠지만… 온전히 그렇지는 않아. 은연중엔 다 알아. 표면에 나올 주도권은 언니한테 있어. 불쑥불쑥 튀어나와선 내 입을 빌려 말하지. 옛날부터 그래왔어. 첫 빙의는 일본으로 온 지 이주일도 되지 않았을 때 벌어졌지.

 

"내 머리 속에서 나가! 나가라고. 나가! 아빠. 아빠아아아아!"

 

"무월이 와의 마지막 약속이다… 너는. 너만을 생각하면서 살아라. 설령 네가 그러고 싶지 않다고 해도."

 

단명할 운명이여 큰 병에 걸린 엄마는 할머니 언니와 그런 거래를 했어. 나는 동의 안 했는데?

 

신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사람한테 사랑받는 거랑 똑같아. 대신 거부권이 없어. 사랑받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어떨 때 사랑은 이기적이고 남을 생각하지 않게 되지. 나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은 채 움직이는 꼭두각시… 나는 보급 특권이 닫히는 걸 기를 쓰며 막았지만, 그건 고작 변덕일 뿐이었던 거야.

 

나는 내가 주사위를 굴릴 때 나오는 눈을 맞출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나올 거라 생각했던 눈대로 주사위를 굴리는 식이었어. 나는 오른손으로 주사위를 굴리고, 캐롤을 죽인 거야…

 

죄를 지으면서, 꼴사납게 살았다… 부끄러운 생애를 살았어…

 

누군가 나만의 진실 알고 있을 거야

사랑과 우정 모두 괴로움인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날 괴롭히던 사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고 있네요

 

그것이 그대의 정말로 진심인가요?

나는 이젠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어

흐르는 물처럼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댈

비로소 조금은 알게 되겠죠

 

그때 그대가 전부였던 잠시 동안엔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믿고 싶었지만

이젠 모든 걸 잊으려 해도

잊으려 해도 잊으려 해도

 

 

 

 

 

 

"언니로군.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언니… 그렇지 않나."

 

마유즈미가 아닌 그녀는 순간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눈썰미 좋긴. 바로 알아내네? 내가 그 정도로 티를 냈니?"

 

"뭐야. 마유즈미한테 언니가 있어?" 하기와라 우시오가 물었다.

 

"아니다. 손윗누이가 아니다. 그녀의 호위. 사실상 보모 역할을 할 만치 그녀와 친했던 호위가 하나 있었다. 마유즈미 가문에서 근무했던 이의 증언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어릴 때. 그녀보다 두 살 정도 많은 호위가 그녀에게 붙었다는 것이다. 나이는 어렸지만 실력은 확실하다고 불린 호위. 그녀는 양친에게서 정서적으로 분리된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보모 노릇을 하면서 그녀와 유난히 친하게 지내다가. 어느 순간 마유즈미 가문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아스모데우스를 가르칠 수 있거나 비디오를 보여줄만치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자는 그 '언니'뿐이겠지."

 

"그 사람이 그러더니? 흠." 그리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애초에 댁은 마유즈미 몸에 어떻게 붙은 거야? 뭐. 마인드컨트롤이야? 대체 어디서 빙의된 건데?"

 

"초자연적 현상일지도 모르지. 대몰락 이후에는 마법이라 불릴 법한 기이한 현상이 대거 부활했으니. 허나 내게는 더 나은 답이 있다. 방어기제로 발현된 인격이다."

 

"지킬이랑 하이드 씨처럼?" 하기와라 우시오가 물었다. 그 소설의 대략적인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외로웠고, 외세계로부터 위협을 느낀(아마 대몰락 및 재단과 연관이 있겠지) 그녀는 홀로 남겨지고 말았다. 어디에도 그녀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언니. 왜… 왜 이제 왔어? 어디 갔다가 이제 온 거야. 나 정말… 정말 무서웠단 말이야. 언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 화폐의 가치는 뭉텅이로 떨어졌고 변질된 인간들은 입에 담지 못할 짓을 자행했다. 폭도들은 호의호식했던 자들에게 깊은 앙심을 품었기에 그녀는 계속해서 내몰렸겠지. 따라서 그녀는 스스로를 지킬 존재를 분리하여. 자신을 위해 만들어내야만 했다."

 

"아까는 신이든 악마든 좋으니 튀어나오라고 했으면서. 히무로이드 놈아."

 

"당시에는 그랬지. 허나 지금 보아하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그녀는 정신적인 문제의 산물로 보인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좋은 추측이지만 틀린 게 있어. 일단 나는 만들어진 인격 따위가 아니라 살아있었던 사람이었고, 외세계로부터 그녀를 지키기보단 그녀의 존재를 갉아먹고 싶어 한다는 거. 이 몸은 꽤 귀엽거든. 키가 작은 게 흠이지만." 그녀는 쿡쿡 웃었다. 마유즈미와 정반대의 웃음. 해가 아니라 새벽의 달과 같은 웃음이었다.

 

"이. 이딴 게 마유즈미…?" 하기와라는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내가 너무 원래 마유즈미한테 익숙한 건가? 귀엽긴 한데 왜 이렇게 꼴 받지? 무슨 칸나즈키 같은 소리나 하고. 살아있던 사람이 어떻게 죽어서 다른 사람한테 들러붙냐?"

 

"영혼을 뽑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영혼을 다시 넣는 일도 가능할 테니까."

 

나는 언니의 말을 듣고 샤이닝을 떠올렸다. 사람에게서 샤이닝을 추출할 수 있는 재단의 기술. 허나 그것을 연관 짓는 것은 과다해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유즈미에게 다른 이의 영혼이 주입되었다고? 허황된 이야기였다. 그 와중 자칭 산 자였던 언니가 계속해서 늘어놓는 폄하 또한 허황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애는 자기 역량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어. 내가 네 옆에 있었다면 후루미나미 고년이 플라잉 로봇 타고 도망가게 안 뒀을 걸. 바로 다리에 총을 쐈지. 탕. 탕."

 

그녀는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쏘는 소리를 냈다.

 

"상관없다. 너와 나눌 이야기도 없다. 이제 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마라. 이것은 제안이 아니라 요구이다."

 

"싫다면. 네가 어쩌게? 때리게? 이 애 몸인데?" 그녀는 상체를 조금 앞으로 숙이고 고개를 갸우뚱 비틀어 보였다. 마유즈미의 몸을 방패로 삼은 게 아니었다면, 망령에게 경고라도 주었을 터이다.

 

"너를 억압할 방법은 그것 말고도 있다. 허깨비 또한 살 자격이 있음을 역설한다면 부분적으로 존중해 줄 터이나, 그녀는 이미 너무 많은 자유를 침해받아왔다. 내면의 분열에 또다시 종속되게 둘 순 없다. 또 카텟에 해가 되는 일이기도 하지. 그러니 너를 억누르리라."

 

"실수하지 마. 나는 이 애보다 더 잘할 수 있어. 훨씬 더 말이야. 아. 도무지 못 견디겠다. 다시 온전한 몸으로 걷고 느끼고 싶어. 그렇게 해 줄거지. 으웅?" 갸웃거리는 것만큼은 닮았다. 그러나 그 기시감은 내게 구운 생선의 잔가시처럼 거슬리기만 할 뿐이었다.

 

"네가 그녀에 대해 무엇을 알지?" 나는 물었다. "그녀의 한계와 능력을 멋대로 재단하지 마라. 심지어 그녀마저도 스스로의 가능성을 온전히 보지 못한다. 나도 다를 바 없다. 그런데 네가 그녀보다 잘 안단 말인가?"

 

"다 알아. 안쪽에서 계속 봐왔다고. 수틀릴 때는 내가 표면에 나서 주기까지 했어. 카이다를 몰아낸 게 이 모자란 애 같아? 나야. 아직도 이 모지리한테서 가능성을 본다면 너야말로 돌머리지."

 

"씁. 어휘 사용을 보니까 마유즈미보다 나이가 든 것 같긴 한데. 진짜 누난가 봐." 하기와라 우시오가 쓴소리를 냈다.

 

"내가 말했잖아. 제대로 나이를 먹었으면 너희보다 나이가 많았을 거라고. 스물은 족히 넘겼을 거야."

 

"마유즈미 양도 스물은 족히 넘겼거든? 서류상이지만."

 

"내가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건데 이해가 안 되니?" 그녀의 말대로.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마유즈미가 아니라 언니가 인격 전환의 권한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중인격자들은 누가 표면의식에 위치할지를 서로 두고 싸운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인격이 누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것인지를 정하고, 또 필요하다면 의식 밑으로 가라앉힐 수 있다. 구경꾼처럼. 내가 마유즈미를 인위적으로 가라앉혔기에 '언니'가 표면의식으로 밀려 나온 것처럼.

 

언젠가 마유즈미 내부의 언니가 마유즈미를 완전히 좀먹기 전에 억눌러야만 했다. 인격체일지라도 모든 이들이 방조되어서는 안 되었다. 언니가 말을 하는 일분일초마다 마유즈미의 인생은 그 비율을 잃어가고 있었으니.

 

"말하는 것도 지긋지긋하네. 그러니 빨리 합의하자고. 내가 요구하는 건 하나야. 얘한테 나에게 몸을 완전히 넘기라고 말해. 그럼 우리 모두 안전할 테야."

 

"마치 네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다들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투로군. 제츠보 또한 이 영안로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었지… 하지만 내게는 네가 허장성세를 부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요구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해라. 망령아."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 당장 꺼져!" 하기와라 우시오가 거들었다.

 

"실수하는 거야. 사람이 죽는다니까? 이 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고." 그녀는 완강하게 말했다.

 

"계속 그 얘기만 반복할 건가? 아니면 그녀를 자유롭게 두겠나? 애초에 그녀가 내 말을 순순히 따르리라 생각하지 마라. 그녀는 나를 구타할 수 있을 만큼 독립적인 사람이다."

 

"그래. 맞고 사는 남편이라고. 언니 씨. 안에 있으면서도 이해가 안 되나? 나도 마유즈미 등쌀에 밀려서 여기까지 온 거야. 나름 할 때는 하는 똑 부러진 게 마유즈미 양이라고. 니가 카맛을 알아?"

 

"너희들에게서 독립적이 되어 봤자지. 나에게서 떨어지지 못하는데 말이야. 그 애는 평생 내 그림자에서 떨어질 수 없어. 거의 내가 키웠거든. 예술의 지평 자체를 내가 써 주었단 말이야."

 

눈가가 찌푸려졌다. 단순히 마유즈미를 폄하하는 발언 때문이 아니었다.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단순한 보모. 교육자. 보호자에게서 나온 발언이 아니다. 네메시스와 아스모데우스. 어느 정도의 고위 지식을 가졌고 규수에게 간섭할 수 있는 호위라?' 어딘가 맞지 않고 어색했다. 아들이 아비의 옷을 입은 꼴이다. 그러나 어차피 억누를 인격임을 안 이상 언니에 대한 상세 사항들은 묻어두어도 좋았다. 아무튼 한 시가 급했다.

 

카텟 기관에서는 정신의 수양이 권장되고 또 연구되었다. 개중에는 트라우마를 중화시키고 집단의식을 고취하는 종류의 것들이 있는가 하면. 조율자에 대항하기 위한 기술 또한 있었다.

 

내가 마유즈미에게 쓸 것이란 트라우마를 중화시키는 종류였는데. '상자'라 불렸다. 스스로가 억누를 수 없는, 좀먹어가는 것을 말 그대로 정신 속에 가두어 빠져나오지 못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마침 몽롱한 의식. 외부의 인도에 따르는 최면 상태. 자의식. 어느 정도의 분별력까지. 조건이 모두 갖추어졌다.

 

나는 옆에서 방법을 알려줄 뿐. 가두는 주체는 마유즈미이리라.

 

"마유즈미. 내 말 들려?"

 

히무로?

 

그 순간 언니는 어두운 의식 밑으로 밀려 내려감을 느꼈다. 그러나 온전한 밑은 아니었다. 인격이란 반대편에 있는 어린애와 그녀가 저울 사이에 올라온 꼴. 어린애가 표면으로 올라가야 비로소 그녀가 밑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저울은 평행을 이루고 있었다. 둘 모두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채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꿈을 꾸었다.

 

여기… 어디지?

 

어린애가 물었다. 애는 그녀에게 침식되고 있을지언정 본래의 인격이고, 그래서 밀려나 구경만 하는 기분을 몰랐다. 밀려나면 그대로 필름이 끊기듯 뚝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그녀는 어린애를 찾아서 어둠 속을 두리번거렸다. 더 말을 듣지 않게끔 막아야 한다. 그래야 내게 통제권이 돌아와!

 

"네가 가장 가고 싶지 않은 곳을 떠올려 봐."

 

"듣지 마! 듣지 말라고!" 그녀는 어린애에게 소리쳤다. 발 밑에는 다다미가 생겨났고 병풍. 미닫이문. 불단이 펼쳐졌다. 그녀는 미닫이문을 몇 개고 옆으로 밀며 어린애를 찾았다.

 

떠올렸어… 엣? 나 왜 집에 있지? 꿈인가? 최면 걸려서 그래?

 

"내 말 들으라니까! 어디야. 너 어딨니? 내게 말해. 네 인생은 내 거야! 내놔. 내놓으라고!"

 

"곧 그녀가 나타날 거야. 정신을 제대로 차려. 그녀를 마주해. 그런 다음에는…" 히무로가 말했다. 언니에게 있어서는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를 외면하면 돼. 장소 속에 떨어진 그녀를 장소째 외면하면, 그녀는 갇히고 말 거야."

 

그녀는 몸으로 문을, 종이로 댄 문들을 뚫었다. 그렇게 급박한 수색 끝에 카가 그녀에게 툭. 그녀가 원하는 것을 던져 주었다. 그녀는 어린애에게 윽박질렀다.

 

"내놔! 너는 내 거야! 네 몸을 나에게 주라고! 다시 땅을 내 발로 밟아야겠어…!"

 

"우왁! 귀신!" 어린애는 뒤로 오도도 도망쳤다. 그녀는 그 모습마저 꼴 보기가 싫었다. 이딴 게 초고교급이란 말인가? 그녀는 초조해졌다. 이미 꿈속 세계가 너무 많이 진행되었다. 더 주도권을 내어 주었다간 상자 속에 갇힌 꼴이 되게 생겼다. 눈앞에서 대놓고 나타났던 게 문제였나? 그걸 알아보다니. 눈썰미 좋은 놈…!

 

"밀어내! 그 장소를 떠나서. 다시는 열지 마!" 히무로가 소리쳤다. 그에 따라 어린애는 두 팔을 앞으로 뻗고 눈을 질끈 감았다. 벽을 쳤다.

 

"오. 오지 마아아아아!" 어린애는 언니를 날려 보내지 않았다. 대신 자기가 두둥실 뒤로 날아갔다. 수백 개의 미닫이 문이 어린애를 따라 생겨난 뒤 닫혔다. 가고 싶지 않은 트라우마의 온상 속에 갇힌 인격은 서서히 말라갈 것이다. 언니는 눈앞에 놓인 단조로운. 한 방 너머에 또 똑같은 한 방이 있는 전통 저택의 내부를 보며 이를 갈았다.

 

"이게 끝은 아니다. 나는 몸을 되찾을 거야! 망량과 요괴 따위를 사람 안에 가둬둘 수 있다 생각하면 오산이다. 내가 밖으로 나가기 전까진 그 짧은 생애를 즐겨라. 포로들아!"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어린애의 정신 속에서 메아리칠 뿐이었다.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는, 세 가지 질문이란 말이지?" 나는 패트리샤의 설명을 전부 듣고 물었다.

 

"네." 패트리샤가 대답했다. 나와 카이다가 두 번째 깨달음을 마침에. 패트리샤가 특권을 부여해 주었다. 세 가지 질문? 한 가지만 주어도 큰 도움이 될 텐데. 세 가지라?

 

"그럼 나는…" 카이다가 덜컥 입을 열려다가 그만두었다.

 

왜인지는 나도 몰랐다. 내가 한 일은 조금도 없었다. 이 자식이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데 날름 기회를 받아먹으려 들어? 하는 생각이 들어서 흘겨보았을 뿐이다. 내 눈치를 본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인데…

 

"이 살인 게임의 배후가 누구인지도 말해줄 수 있나?" 내가 물었다.

 

"예와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다면요. 혹시 그거 질문이었나요?"

 

"아니. 지금부터 쓰겠어." 흑막 쪽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확실한 답… 주관식이 아닌 것이 흠이었지만 칭출할 수 있는 가치가 넘쳤다.

 

살인 게임에서 할 수 있는 질문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이란 바로 그 배후에 관한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한 뒤에 물었다.

 

"이 살인 게임은, 재단이나 카텟 기관이 연관되어 있는 건가? 재단에는 이 살인 게임과 똑같은 종류의 언총이 있었어. 또 이상하리만치 카텟 기관 출신의 사람이 많아. 분명 둘 중 하나. 혹은 둘 모두와 이 살인 게임은 이어져 있어. 그렇지 않아?" 

 

"카나리 씨랑 비슷한 걸 물으시네요. 좀 더 구체적이긴 하지만요. 네. 대답은 네예요. 참고로 언총은 똑같은 종류가 아니랍니다. 좀 달라요."

 

"언총의 미세한 차이는 아무래도 좋아."

 

"…좀 많이 다른데. 재단의 언총은 명령하는 기능에 치우쳐져 있단 말이에요. 총 내부에서 샤이닝을 정제하여 쓰는 것만 비슷하지…" 패트리샤의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나는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두 번째 질문. 우리가 이 살인 게임에서 나갈 수 있긴 한 건가? 홀로 살아 나가는 게 아니라 여러 명이 함께 탈출하는 것 말이야."

 

"네." 패트리샤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정보를 덧붙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흑막의 입장에서는 알려주고 싶지 않고 또 민감한 내용임을 알 수 있었다. 일종의 편법 비슷한 것을 써야만 그런 시도가 가능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제 질문은 하나가 남았다.

 

순식간에 두 개의 질문이 사라졌다. 카이다는 초조한 개처럼 발바닥을 땅에 탁탁 두드렸다. 무언가의 뚜껑을 열고 닫는 듯했다. 내가 물끄러미 그녀를 지켜보아도 뭘 야리냐는 등의 핀잔은 들려오지 않았다. 생각이라는 걸 하는 건가. 그녀는 내 눈을 피했다.

 

"카이다 쿠로하."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ㅇ. 왜?" 카이다가 화들짝 놀랐다.

 

"네가 모노로그에게 충성하고 있는 이유를 말해."

 

"그걸 내가 왜…"

 

"말해." 나는 세 번 말할 생각이 없었다. 다행히도 카이다는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리고 답답하리만치 천천히 말하는 식이었어도 내 물음에 답하였다.

 

"…나는. 내 가족을 찾으러 간다."

 

"찾아서 죽이려고?" 내가 생각할 만한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왜냐고? 그녀가 카이다이기 때문이다. 어딘가 병적인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고, 미도리카와가 고아원을 언급한 것을 보면 가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지. 가족을 찾는 이유가 감동의 재회 이후 좋은 식사라도 한 끼 하는 것이라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 생각대로 카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날 버렸어. 똥통에 처박았지. 이 좆같은 흉터도 빌어먹을 고아원에서 생긴 거야. 보여?" 카이다가 자신의 얼굴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분명 흉했다.

 

"그렇지만 찾아내서 뭘 어쩌게? 나가야 복수를 할 텐데. 너는 이 살인 게임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자신이 있긴 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너도 알잖아. 우선은 기억을 되찾아야 해. 알아야지만 앞일을 꿈꿀 수 있어. 나는 그치들 이름도, 얼굴도 몰라. 얼마 전 모노로그가 나한테 알려주기 전까지는 그치들이 나를 왜 버렸는지도. 내가 고아원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도 몰랐어… 그자들이 나를 버린 건 확실한데도 맥락을 모른단 말이야. 그러니 영혼을 팔아서라도 알아내야만 하지… 알았냐?"

 

"무슨 뜻인지 알아. 네가 되찾을 방법 따위는 없었으니까. 잘 팔았어. 애초에 별반 가치도 없는 거잖아."

 

"씨발." 카이다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말았다. 아주 침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아빠다리를 하더니 몸을 굽히고 무릎에 팔을 괴었다. 꽤 순순히 포기해서 김이 샜다. 발광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여하튼 간에 나는 다시금 카이다에게서 눈을 떼고 대신 허공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질문. 여러 가지가 생각났다. 흑막의 성별을 묻는다면 어떨까? 흑막이 여러 명이라며 어물쩍 넘어갈지 몰랐다. 살인 게임을 설계한 사람마저 흑막으로 친다며 능청을 떠는 패트리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흑막이 우리의 내부에 숨어 있냐는 질문은 그럴듯해 보였지만 나는 왜인지 반드시 그러리라고 직감했다. 살인 게임들의 참가자들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CCTV로 가득 찬 방이라도 좋으니 탑에 흑막만을 위한 은신처가 필요할 터였다.

 

우리 중에 흑막이 있는지의 여부?… 사실. 흑막이 있는지 없는지보다는 누구인가가 더 중요했다. 나라면. 나라면 살인 게임에 직접 참여해서라도 게임의 일부로 관여하겠지만, 진짜 흑막은 그러지 않고 자신의 몸을 사릴지도 몰랐다. 사실 무엇도 뚜렷하지 않았다. 살인 게임의 동기를 물을까? 개인적인 원한인가를 물어야 할까? 아니. 동기 따위를 알아봤자 탈출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예와 아니오를 통해 나올 수 있는 좋은 질문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세 번째 질문은 분명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물어야 했는데. 내 머리가 모자란 것인지 혹은 생각만이 너무 많은 것인지 잘 구성된 질문을 던지기에 난황을 겪었다.

 

내가 살인 게임의 컴포저라 가정하였을 때 할 일이란 결국 모든 것이 제자리에. 틀어지는 일 없이 진행되게끔 두는 일이었다. 흑막에게 대적할 수단의 유무? 흰 물건이 이미 있었다. 흰 물건을 보내주는 자들이 카텟 기관인지? 아마 그럴 것이다.

 

시라유키 히메리의 생존 여부?

 

히무로라면 그것을 가장 알고 싶으리라. 히무로가 멍하니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탑에 온 직후. 그녀가 죽는 내용의 영상을 본 이후에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럴만치 시라유키 히메리는 히무로에게 있어 큰 단편을 차지했다. 히무로는 의식적으로 그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듯 인원들의 생존과 탈출에만 신경 쓰는 눈치였으나, 히무로 또한 시라유키 히메리의 생사를 알고 싶을 게 분명했다.

 

설령 히무로가 나를 쫓고 캐롤 씨의 부활을 완강하게 저지하려 들지어도. 그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목이 타겠지… 그것에만 매달리고 싶겠지. 설령 이해할 수 없는 경위로 그가 강압적으로 캐롤 씨의 부활을 저지하려 들지라도 그는 지금껏 분투해 왔다. 적어도 시라유키 히메리의 생사를 들을 자격이 있었다.

 

또 시라유키 히메리는 카텟 기관과 더불어 히무로, 나, 인공지능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다. 생사를 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되리라. 답은 나왔다. 시라유키 히메리의 생존 여부를 묻는 게 여러모로 나았다.

 

나는 입을 열려다가, 여전히 바위처럼 몸을 웅크린 카이다를 돌아보았다.

 

……그게 아니라면.

 

세 번째 질문으로 할 법한 것은… 있었다. 나는 별반 궁금하지 않았지만 이것을 심히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으며, 나와 그 자의 처지에서는 자력으로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그럼 아무래도 좋은 게 보통이다만…

 

언젠가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이전부터 그 일을 과제로 여겼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은 그 일에 있어 꼭 필요한 과정 중에 하나였다. 제대로 된 응보를 위해서는 밟아야 할 절차였다. 번거롭고 돌아가는 길일지언정 옳았다. 그래. 적절하리라.

 

세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카이다 쿠로하의 가족들을. 카이다가 다시 찾을 가능성이 있나?"

 

흠칫. 카이다가 고개를 들고 다리를 벌떡 일으켰다. 할 말은 많은데 할 말을 정하지 못한 듯 그녀의 입이 뻐끔거렸다. '왜?' 나는 별반 후회하지 않았다. 곧 패트리샤가 내 질문에 답을 주었다.

 

"네. 잘하면 죽일 수도 있어요. 화해할 수도 있고요. 그건 카이다 씨 하기 달렸죠."

 

"정말이냐?!" 카이다는 눈을 크게 뜨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패트리샤가 눈앞에 있다는 듯한 몸짓이었는데. 패트리샤는 사실 실체가 없으니 카이다의 평범한 돌발행동일 뿐이었다. "정말이냐고. 정말… 가능성이 있어?!"

 

"왜 그렇게 가망이 없었다는 것처럼 반응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당신은 암살자잖아요.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요. 찾는 것마저 당신이 작정하면 꽤 쉬울 걸요. 사실 화해가 더 쉬운데 잘 안 풀릴지도 모르니… 이건 거짓말 아니에요. 거짓말해봤자 득이 될 게 없으니까."

 

"좋아. 됐어!" 카이다는 박수를 두 번 치더니 식사를 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듯이. 파리가 곧잘 하듯이 두 손을 비볐다. "좋았어. 제기랄. 좋아… 거의 다 온 거야. 이 탑에서 나가기만 하면 돼…"

 

카이다는 노골적으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까까지 놀랍게도 풀이 죽어 보이던 모습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저점 뒤에 고점을 찍었다. 조금이나마 무언가를 생각해 보던 그녀의 입꼬리에 다시금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망각은 정말이지 그녀에게 주어진 가장 큰 행운 같았다. 이제 그녀는 캐롤 씨가 자신의 무엇이었는지 까맣게 잊고 캐롤 씨를 되살리기 위한 여정을 떠나리라. 카이다는 탑에서 나간 뒤에 무엇을 할지 차곡차곡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잘 됐네. 카이다. 방법이 있어서. 네가 기뻐하는 걸 보니 나도 기뻐."

 

나는 그녀를 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작게 박수까지 쳐 주었다. 내 목과 이마에 핏줄이 오르고 귀에 피가 돌아 붉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웃음을 지었다. 카이다는 내 쪽을 흘끗 바라보더니 표정을 곧장 일그러뜨렸다. 보기 싫은 것은 그러기 전이나 후나 마찬가지였다.

 

"…왜 나한테 기회를 하나 준 거냐. 창놈아." 카이다는 사나운 혀를 내둘렀다.

 

"지금까지 영안로를 헤쳐나가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에 대한 보답, 기억상실자 동지에게 주는 최소한의 선물, 그리고… 네게 살고 싶다는 미련을 주기 위해서야. 이것으로 영안로 속에서 너를 타고 다니던가 네 손에 지켜지며 진 부채를 청산한 셈 치자. 그 정도 값은 되잖아. 너도 동의한 거지?"

 

카이다는 불길함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정작 무언가를 할 순 없었으리라. 그녀는 슬며시 나를 중심으로 발을 움직여 원을 그렸다.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하는 긴장이었다. 나는 계속 웃고 있었다. 카이다 본인은 누군가의 웃음 앞에 설 사람이 아님을. 그럴 자격이 없고 불과 몇 분 전에 카이다가 캐롤 씨를 납치한 장본인임을 내가 직접 보았음을 그녀 본인이 깨달을 때까지 나는 살갑게 굴기로 하였다.

 

"왜… 왜 그러는데. 갑자기."

 

"네가 생각해도 이상해? 피와 살 같은 질문의 기회 하나를 네 거로 쓰는 거. 캐롤 씨의 원수인 너에게 베풀기에는 과도한 호의야. 내가 아까도 말했잖아. 너에게 미련을 주기 위해서라고."

 

"나한테서 뭘 원하길래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는 저당 안 잡혀. 이 새끼야… 제발 내가 질문을 쓰게 해달라고 싹싹 빈 것도 아니야. 그냥 네가 멋대로 지랄한 거잖아. 다시 말한다. 나는 저당 안 잡혀. 제기랄… 너. 그 정도로 멍청한 놈 아니잖아. 나한테 왜 잘해주는데? 그만 좀 쳐 웃어…! 기분 나쁘다고! 씨발… 미쳤어?"

 

"전혀. 나는 그래야 하기 때문에 한 거야. 이게 가장 뒤탈 없이 이별할 길이니까. 카이다."

 

"이별? 지랄. 너 아까도 무슨 여기서 갈라서네 어쩌네 하면서도 여기까지 왔잖아. 너는 나한테 빌빌 기는 약골 창놈새끼야. 내가 네 상전이라고. 어디서 네 멋대로 이별하네 어쩌네야? 내가 네 옆에 없으면 네가 영안로에서 살 수 있을 것 같냐?"

 

"네 말이 일부분 맞아. 지금껏 네 도움을 받았지. 앞으로 나는 너를 즐겁게 이용할 때보다 더욱 고난을 겪게 될 거야. 그건 당연해. 하지만 더는 미루어서는 안 돼. 그런 종류의 타협은 이제 그만두어야 해." 나는 나의 대적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는 배워서는 안 되는 것들을 본받고 실천하는 안 좋은 버릇을 가진 모양이었다. 캐롤 씨를 본받기는 그렇게 어렵고 의식해야 하는 것을 의식하기는 피곤한데, 악행을 체화하기는 눈 깜빡이기만큼 쉽고 편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기분 나빠. 타협이니 뭐니 그 꼬맹이 같은 소리나 하고… 그리고 왜 그러면 안 되는데. 뭐. 갑자기 정의감이라도 솟구쳐 올랐어? 왜 나랑 협력이 싫은데?"

 

"그야 너는 배신자에다 창녀니까."

 

카이다의 몸이 잠시 굳었다. 어쩌면 카이다는 내 어디를 때려야 내가 안 죽고 멀쩡할까를 잠시 고민했을지도 몰랐다. 그 순간에 움직이지 못한 것이. 카이다의 마지막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카이다의 몸이 우뚝 굳었다. 나는 그녀의 양어깨를 슬쩍 밀어 그녀의 몸을 기울여 넘어뜨렸다. 동상이 뒤로 떨어지듯이 카이다의 뒤통수가 바닥에 퍽 쓰러졌으나, 그녀는 별반 아파하는 기색을 내지도 않았다. 오직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무슨… 어어… 이게 뭐야. 이… 씨발 새끼야!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그럴 만도 하였다. 아까까지 싱긋 웃으면서 가족의 행방마저 기껏 알려 주었는데. 갑자기 그 절차를 쓴다면 참 당황스러우리라. 기억을 지우는 절차. 카이다가 몇 번씩이나 당해왔고 그렇기에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는 낱말들.

 

"나도 내가 뭘 하는지 모르겠어. 너에게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말이야. 여러 가지 많아. 하지만 가장 하고 싶은 건 심판이야."

 

"네가 나를 심판해? 무슨 자격으로 그러는 거야. 이 새끼야…!" 카이다의 목소리가 점차 다급해졌다.

 

"편협함의 자격. 응보심의 자격. 기억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고 그로 말미암아 네 고통을 산출할 자격으로."

 

"그런 건 없어. 이 새끼야…!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어? 자… 잘못한 게 맞을지도 몰라. 때려서 미안해. 납치해서 미안하다고! 응?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모노로그의 내통자였어. 내 목숨을 가지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이 따른 거란 말이야. 응?"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은 내게 들리지 않아. 카이다. 더 이상 네 변명과 두꺼운 얼굴 가죽은 내게 별반 무언가를 느끼게 하지 않아."

 

카이다의 표정에 제발 한 번만 용서해 달라는 듯한 비굴한 미소가 오래 머물렀다. 하지만 내가 눈도 깜빡하지 않자 그녀는 이를 악물고 신음했다. 손가락이 조금 벌벌 떨리다가 다시금 멈추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본연의 추함으로 돌아갔다.

 

"이거 풀어… 이거 풀라고! 풀어! 이게 무슨 짓이야.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그래. 이 변태 새끼야! 좆같은 놈아! 이리 와. 거시기를 물어뜯어줄 테니까!" 사실 나는 기억 소거를 어떻게 푸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되었다. 풀어줄 생각이 없으니까.

 

"네가 하는 말을 유심히 들어보면 네 심리를 알 수 있어. 심리학의 기본이야. 사람들은 자신에게서 비롯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외면으로 직시할 때 견딜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지. 나에게서 나를 빼면 원수가 돼. 너는 늘 내가 음란하다느니 옷이 이상하다느니 웃긴 소리를 하더라."

 

"창놈 새끼야. 씨발…! 노출광! 애미 없는 놈아!" 카이다가 외치자 침이 후두둑 튀었다.

 

"지금도 그러잖아. 카이다. 엄마 없는 티 좀 그만 내고… 내가 추측하건대. 너. 첫 번째 깨달음에서 나와 똑같은 상황에 놓였지? 뭘 어떻게 망치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걸 거부해서 시련까지 내몰렸나 싶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 설마 너. 아름다운 드레스와 무도회 파티가 부끄러웠던 거야? 그렇게 하늘하늘한 옷을 입어본 적이 없어서?"

 

카이다의 얼굴이 붉어졌는데 화인지 수치심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그래서 내 좋을 대로 해석하기로 하였다.

 

"확실히 아름답긴 하더라. 무도회의 여왕에겐 환호가 쏟아졌어. 너는 과분한 관심에 몸이 뒤틀렸지. 뭘 했겠어? 주변 사람들 때리거나 죽이거나 도망치거나… 알만 하지. 그래서 너는 시련으로 쫓겨난 거야."

 

"씨발… 네가 뭘 알아. 네가 내 뭘 알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카이다는 한 마디의 구체적인 반론도 하지 못했다.

 

"내가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너는 단순하고 읽기 쉬운 사람이야. 김이 새. 사실 너에게서 찾아낸 걸 보면 놀랍기도 하고. 소녀의 마음. 야릇한 호기심. 사람이나 가질만한 게 너에게도 있다는 게 신기해. 네 몸무게가 많이 나간다고 했을 때 버럭 화를 내는 것도 다시 생각해 보면 웃긴 일이지."

 

"으아아아아아!"

 

카이다는 더더욱 큰 소리를 냈고, 살기는 더더욱 등등해졌다. 그러나 우리에 갇힌 맹수 꼴이었다. 그녀 자신만을 위해 고안된 부서지지 않는, 그녀에게만 있는 우리였다.

 

"내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대기만 해 봐… 몸으로 얇게 포를 뜰 거야. 불알을 손으로 쥐어 터뜨려 주겠어! 죽인다. 죽인다!"

 

"역겨운 소리 좀 그만해. 네게 손을 댈 생각은 조금도 없어. 네가 나를 싫어하는 만큼 나도 너를 그 이상으로 싫어한다고. 뭐가 그렇게 무서운데? 카이다. 내가 저번에도 물었잖아. 뭐가 그렇게 무섭냐고."

 

"왜 금색 눈이 무섭지? 너는 그 안을 들여다보지도 못했잖아."

 

나는 무릎을 구부려 쪼그려 앉은 채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네가 이 무서움에 대해 알기나 해? 그녀는 줄곧 자신의 강력함을 알고 있었어. 모두가 경계하는 그 정신조종의 위협이 될 수 있었지만 결코 그러지 않았지. 그런 자신을 그녀 본인이 가장 경계했기 때문이야. 터치를 기이하고 불길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어떤 상상을 모을지라도 그보다 더 두려운 게. 터치가 될 수 있었어. 그녀가 억눌러왔던 그것을 알기나 하냐니까."

 

카이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부릅뜬 채 내 눈동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만하였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카이다 쿠로하가. 언제나 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흉측한 여자가. 나를 보며 풀이 죽었다는 것이다. 나는 보았다. 그녀가 몸을 움츠리는 것을. 동공이 수축되고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을 뒤로 내딛는 것을. 카이다의 입은 작게나마 벌어져 있었고, 입술은 옴싹이며 떨렸다.

 

"개새끼야… 내가 그거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 징그러운 짓거리… 눈깔 그렇게 하지 말라고!"

 

캐롤 씨는 그 눈동자를 보인 적이 없다. 내가 본 환상조차 내가 그려낸 모습에 불과했다. 하지만 금색의 발현이 무언가와 연관이 되어 있다면.

 

"나나시… 너 눈동자 색이 왜 그래? 지금… 금빛이야."

 

그래. 그랬구나.

 

"잘 됐어. 그녀의 일부를 이어받은 내가. 그 배신자를 처단하게 되었으니 이만한 청산도 없을 테지."

 

Overlook, Dictate, Touch. 그것은 모노로그도 말한 바 있었다.

 

"딕테이트는 내게 써봤자 쓸모가 없다. 이름 없는 남자. 난 기계니까."

 

나는 모노로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 무시해 버렸다. 어차피 듣고 싶은 말은 그 직후에 왔다.

 

나는 미약하게나마 그것을 발현한 것이다. 오버룩. 카이다가 묘하게 고분고분히 다리를 들어주었던 일도 그 일환인가, 혹은 단순히 내 요구가 필요함을 이해한 걸까? 정신조작의 작용은 어쩌면 정말 묘하여, 그렇게 하는 이조차도 자신이 조작당하는 줄 모르고 자유로 그랬다 생각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정말 말하는 것만으로 사람을 조종할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 나는 확실한 방법을 택했다. 카이다의 몸을 굳히고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암시와 세뇌의 절차를. 그녀를 위해 주었다.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는 게 신기해. 입은 제멋대로 움직여대지만, 손가락을 움찔거리거나 몸을 떠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한다니 말이야. 꼴사나워."

 

나는 그녀를 향해 다가갔고. 카이다는 발작하듯이 비명을 지르며 고함을 질렀다. 내가 더욱 가까워지자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침을 퉤퉤 뱉어댔는데 냄새가 지독했고 기분도 나빴다. 양이 꽤 됐다. 라마가 동물원 관람객에게 뱉는 침 같아 나는 랩코트의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한숨을 쉬었다. 입을 닫게 만드는 코드는 없을까?

 

"으. 으아아아아아! 퉤. 퉤! 씨발! 씨이이발! 크아아아악! 변태 새끼! 꺼지라고! 그 짓거리 하기만 해 봐. 꺼져! 꺼져! 제발 꺼지라고… 이 씨발… 침 안 뱉을 테니까 좀…!"

 

"입 좀 가만히 둬봐… 짜증나게. 너한테 관심 없다고 계속 말했잖아."

 

아무리 그래도 카이다를 상대로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발상 자체가 나에게는 모욕적이었다. 어이가 없네… 나에게는 카이다에게도 음심을 품을 정도의 여유가 없었다. 훔친 양파를 들키지 않으려 생으로 베어 먹는 식의 일이었다. 남에게 해를 끼치기 전에 있어 내게 수치스럽고 또 좋을 일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자켓을 더듬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어디에 숨겨둔 거야? 더 뒤지기는 내가 싫은데. 카이다는 더 이상 침을 뱉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에 몸을 바짝 긴장시키고(근육이 땅겨져 피부가 팽팽해지는 것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가위에 눌린 사람이 귀신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는 것 또는 피할 수 없는 두려운 모욕을 버티려는 듯이 이를 악물뿐이었다.

 

"싫어… 싫어… 싫단 말이야…!"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잖아. 나는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쁜 일 안 하니까 안심하라고." 라 말해 주었지만 너무 전형적인 악당 대사인지라 나도 음. 하며 입술을 안쪽으로 말게 되었다. 카이다가 만들어낸 이상한 인식에 휘말리지 않으려 애쓰며 나는 분주히 손을 놀렸다.

 

이윽고 나는 카이다의 바지 주머니(하반신에 손을 대니 몸을 한 차례 움찔거리는 게 기분 나빴다)에서 실타래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분홍색, 하나는 검보라색이었다. "이거 꺼내려고 한 거야." 나는 그녀 앞에 나의 실타래를 들이대고 말했다. 정말 그것 말고는 다른 뜻이 없었다. 이것으로 입장은 뒤바뀌었다. 나는 영안로 속에서 언제든지 나갈 수 있게 되었고 카이다의 탈출은 오직 내 손에 달렸다.

 

나는 카이다의 머리와 꽤 떨어진 곳에 살포시 실타래를 두었다. 카이다는 그게 자신의 근처에 있음은 알아도 밖으로 나가지는 못하겠지. 탄탈로스의 사과와 같았다. 내 의중을 깨달은 듯 카이다의 눈은 천천히 뜨였고 얼굴에는 수치심과 두려움 대신에 원래 그녀가 가지는 일그러짐 따위가 대신 떠올랐다.

 

"왜 피와 같은 질문의 기회를 너에게 하나 주었는지 알아? 너도 알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야. 기억을 찾아 헤매는 입장에서 너도 희망을 가지게 두고 싶었어. 설령 내가 널 증오할지라도… 그래야 알고도 어찌하지 못하는 지금이 더더욱 비참해지지."

 

"고작 그런 거 때문에…?" 나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나는 사적인 복수심과 꼬인 심성으로 일을 굳이 꼬아놓을 권리가 없나? 카이다는 그 권리를 어디서 샀단 말이야?

 

"너에게 책임을 묻는 게 옳은 일일지는 모르겠어. 카이다. 너는 저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재단에 대해서도 몰라. 너는 그저 이용당하는 도구 신세일뿐이었어. 그 과정에서 네 잔혹함을 즉흥적으로 쓸 뿐. 미도리카와만을 죽이라는 명령에 굳이 야가미까지 해치는 식이지. 하지만 죄는 너에게 있을지언정 잘못은 명령한 자에게 있어. 언제나 네 팔에는 피가 묻었지만 그 피는 대신 묻었던 피야. 그러니 이 자리에서 네게 보복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알아."

 

"그러면 대체 왜…"

 

"왜냐하면 네가 저지른 일이니까. 캐롤 씨는 너를 당신이라 부르지 않았어. 심지어 나마저 당신이라 불렀는데… 너는 캐롤 씨를 어디서 본 거지? 어떤 경위로 너 따위 인간과 캐롤 씨가 마주친 거야. 그리고 왜 배신했어? 왜 그렇게도 가까운 그녀를 재단에 가져가 바친 거지? 말해. 카이다. 말하라고. 감히 거짓말은 마. 나는 다 알아!"

 

"모. 몰라… 이 새끼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카이다는 어물거렸다.

 

"그래. 늘 그런 식이지. 정작 너는 아무것도 몰라… 억울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야. 하지만 기억을 못 한다고 해서 네 과오까지 사라지지는 않아. 그러니 네게 할 일을 하겠어. 죽이는 건 아니야. 나한테 칼이 있는 것도 아니니… 대신 네가 싫어할 만한 일을 하려고."

 

우리 모두가 싫어할 만한 일. 나는 카이다에게 슬쩍 웃었다. 카이다가 어딘가의 희생자를 죽이기 전 지었을 가학적인 웃음이 비슷하게 생겼으리라. 그리고 카이다 정도의 지능의 소유자도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는 이해한 듯 보였다. 설마 이번에도 되지도 않는 오해를 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이상하게 눈에 힘이 들어갔고, 카이다는 몸을 덜덜 떨며 내 눈을 흐리멍텅하게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내가 한 구절을 읊으면 너는 그 직후 딸랑이는 방울소리를 네 번 듣는다. 너는 그 소리를 알아. 바로 그 소리다."

 

"안 돼… 안 돼. 멈춰. 멈추라고. 제발!"

 

그래. 제발이라고 말해야지. 그녀도 제발이라고 말했잖아. 너는 조금도 듣지 않았으니 나도 마찬가지다.

 

"우물에 빠지지 말 것."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것이 시작의 구령이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카이다는 비명을 질렀다. 이전에 들었던 것과 같은 애탄이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내 마음가짐으로, 당시 내가 그녀에게 외면할 수 없는 연민을 느꼈던 것과는 달리 나는 그녀의 발광을 보며 오히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되돌아온 듯 편안하였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쌍둥이자리."

딸랑 딸랑 딸랑 딸랑

"그만… 그만해… 제발…!" 카이다의 얼굴이 공포로 얼룩졌다.

 

"참회라면 들어줄 마음이 있어. 하지만 다른 건 안 들려." 내 말에 카이다는 눈동자 속으로 옅은 희망을 품었다. 어떻게든 타파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끓는 기름 지옥 속에서 거미줄을 잡은 사람의 눈빛을 보았다.

 

"잘못했어. 정말 잘못했다고. 너희를 사사건건 방해한 점. 내 생각만 하면서 니들을 위험에 빠트린 점. 내가 과거에 저지른 일 모두…"

 

"그리고?" 카이다가 말을 잠시 멈추자 나는 재촉했다.

 

"그리고… 그리고…" 더는 잘못이 없다는 거군. 나는 몇 초를 더 기다려 주었다가 말했다.

 

"독립 시행은 독립적인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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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과 함께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카이다가 자신의 혀를 삼키고 질식하지 않게끔 입 안에 손을 넣어 혀를 꺼내 주려다가, 수축된 턱의 움직임에 손가락이 잘릴 뻔했다. 제길. 모리가 될 뻔했잖아…

 

"왜. 왜…?! 이 씹새끼야! 씨발! 너 그냥 나 괴롭히려고 이러는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고? 좆같은 새끼야…!"

 

"네가 지어내는 게 눈에 보이니까 그렇지. 뭐더라… 그래. 고문은 자비이다. 고통은 안정이다. 구속은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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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르르으윽…! 끄아아아악! 멈춰! 멈추라고!"

 

"새벽에서 끄집어져 깨어남." 나는 멈추지 않기로 했다. 이 정도면 거미줄을 끊기에 충분한 자극이 되었으리라. 카이다의 얼굴은 새빨개졌고 목은 척추가 꺾일 것만치 뒤로 굽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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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기억이 잘린다는 거. 말 그대로야? 끝까지 전부 말하면 기억이 초기화되나? 아마 특정한 기억을 남기는 방법이 있겠지. 그게 써먹기 더 편리하니까. 그렇지만 나는 어떤 기억을 남기고 어떤 걸 지워야 할지 모르니. 죄다 지우려고."

 

"너는 그럴 자격 없어!" 카이다가 꿋꿋이 소리쳤다.

 

"너도 남들에게 행패를 부리며 살았잖아. 모리의 손과 발목을, 나이토의 발을 잘리게 만들고, 미도리카와의 살해를 돕고, 나까지 납치했어. 네가 이런 일을 당할 이유는 충분한 것 같은데."

 

"그러면 나보고 어쩌라고!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세상이 먼저 날 버렸단 말이다…!"

 

카이다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원망했다.

 

"아무도… 아무도 날 도와준 적이 없으면서…! 나더러 어쩌라고. 어쩌면 좋았던 건데… 이 방법밖에 없었는데…!"

 

"네가 선택한 방법이지."

 

"나는 고른 적 없어… 나는 이 꼴로 살고 싶은 줄 알아…? 이 씨발. 내 꼴을 봐. 나를 보라고!" 카이다의 윽박지름에 나는 그녀의 기형을 찾고자 했으나 눈에는 띄지 않았다. 진짜 기형은 그녀의 살갗 안에 있기 때문이었다. 비정상적 골밀도. 만독불침. 그리고 체온 조절 따위의 온갖 잡다한 동물적 기능들.

 

"내 혀에선 맛이 안 느껴져… 칼이나 총도 안 통해. 어지강한 밧줄은 몸무게를 못 견디고, 자는 동안 물방울 하나만 떨어져도 잠이 깨. 손톱을 자르려면 합금을 가져와야 하고… 빌어먹을 머리카락은 무슨 손가락처럼 느껴져. 이딴 게 사람 같아? 괴물이지! 별종이라고. 별종! 평생 아기도 못 낳을 거란 말이야…!"

 

"네가 아기는 무슨 아기야? 그런 걸 신경 쓰지도 않으면서."

 

"안 쓰겠냐고. 이 개새끼야! 나도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변하지 않고 살아남을 방법이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거야. 네가 알기나 해…? 살아남기 위해 빼앗아야 하는 걸 너희 샌님들은 몰라. 너흰 빼앗지 않은 게 아니라 빼앗을 필요가 없었던 거라고…! 힘이 없는 것들은 결국 영혼까지 털려 먹혀… 여자 몸으로 사람을 죽이려면 얼마나 잘해야 할 것 같냐고…"

 

나는 카이다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까딱였다. '계속 말해 봐'.

 

"나와 같이 일해봤던 스파이들은 죄다 '미인계'를 썼어. 그래야만 했대. 좆같은 미인계… 그리 어른도 아닌 년들이…! 그 돼지새끼들은 변태야. 다 목을 따야 해! 그 씨발 새끼들이랑 침대에 오른다고 생각해 봐… 병신 창녀 아니면 괴물이 되어야만 했다고…! 고작 그게 나에게 주어진 선택이었는데. 너희는 다 누리면서 살아왔잖아!"

 

카이다는 말을 하면서도 욕지기가 치미는 듯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그 표독스럽고 옆으로 찢어진 눈은 곧 깊게 파인 한 쌍의 우물이 되었다. 안에서부터 눈물이 나왔다. 정말이지 서러워 보였다.

 

"나도 고아가 아니었다면 달랐을 거야… 너희들 부럽지 않게 멋지게 살았을 거야! 적어도 이런 식으로는… 이런 식으로는… 흐흑… 살지 않았을 거라고오…!"

 

"…탑에서도 멋지게 살고 싶었어? 그래서 처음에 너는 첩자가 아니라 산업 스파이라 말하고 다녔던 거야?"

 

카이다가 본색을 드러내기 전 나와 그녀는 아주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더없는 한담이었기에 기억에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 이면에는 카이다 쿠로하라는 사람의 심층이 있었다.

 

"엑. 너 이상한 옷을 입고 있네. 노출증 있냐? 변태야? 나는 변태 싫은데."

 

"느닷없이 무슨…! 내 옷의 어디가 어때서? 평범하잖아. 조금 쌀쌀하기는 해도 괜찮은 옷인걸."

 

"아니… 치. 뭐. 그렇다 치지. 난 카이다야. 카이다 쿠로하. 초고교급 첩자니 뭐니 하는데 사실 스파이처럼 무지막지한 건 아니고… 산업 스파이. 그 느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사샥 들어가서 정보만 빼와. 사고 싶은 회사 기밀 있으면 싸게 들어줄게!"

 

"너는 또래와 친구가 되고 싶었어. 평범한 우정을 가지고 싶었지."

 

"뭐? 기억이 없어? 아무것도? 진짜? 그거… 참 힘들겠는데.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나도 몰라. 여기 왔더니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이름도 없다니. 허… 그럼 내가 이름을 하나 지어주지 뭐. 머리가 분홍색이니까… 분홍색이 영어로 뭐더라?"

 

"핑크."

 

"핑키! 핑키로 하자. 이름 좋네!"

 

"사실 이름은 하나 정해뒀어. 나나시야."

 

"나나시? 별로인데. 나카다시랑 발음이 비슷해. 노린 거 아니야?"

 

"핑키가 더 별로거든?!"

 

"과거와 결별하고서… 하지만 이곳이 살인 게임임을 안 뒤로 너는 연기를 그만두기로 했어. 우리와 즉각적으로 거리를 두었어. 자포자기였지. 왜냐하면 너는 다시금 사람을 죽이는 일 안에 놓였고, 그게 네 운명이었으니까. 벗어날 수 없는 길. 빔과 같아."

 

"어지간하면 너희들이랑 어울리고 잘 살아 보려고 했는데, 역시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가 보다. 팔자 한 번 씨발…"

 

"사실 네가 계속 연기를 했더라도 얼마 안 갔을 거야. 미도리카와가 네 진면모를 폭로한 뒤 네게 복수하러 갔을 테니. 그렇게 생각하면 네 잘못이 전부 다 돌아오기 마련이었어. 그렇지? 다 시궁창으로 빠트리려는 악의를 품었으면 너도 그 안에서 썩어야지."

 

"그게 나빠…? 그게 왜 나쁜데. 너희는… 흑. 너희는 다 가졌잖아아…! 가족. 돈. 맨날 배부르게 맛있는 걸 먹고 잘 자잖아…! 내가 원하는 건 다 가진 새끼들. 연애도 하고 물고 빨고 좋아 죽지 아주… 니들은 사랑할 자유가 얼마나 큰 건지 몰라! 그러니 다 나만큼 불행하게 만들 거야! 그래야 공평하잖아. 다 나만큼 아파야 하잖아! 그게 아니면. 그게 아니면 내 고통은 누가 보상해 주는데? 누가 되갚아 주냐고. 대답해 봐!"

 

카이다는 씩씩대며 눈물을 흘렸다. 그럴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악어의 눈물이 아닌 사람의 눈물. 비참한 울분이 그녀를 뒤흔들고 있었다. 열등감. 부채감. 카이다의 이유 모를 적개심은 시기와 질투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녀의 육체는 누구보다 단단했지만 정작 마음은 한 없이 유약했다. 심지어는 내 것보다도. 카이다는 그런 자신의 몸을 숭상했는데 그녀가 다른 이들에게서 우월감을 느낄 수단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었고, 그 기능을 우러러보지 않을 때 그녀에게 남는 건 시술이 앗아가 버린 것들의 부재이기 때문이었다.

 

"다 팔을 분지르고 눈과 혀를 뽑을 거야. 너희들 전부 다 그래 마땅해! 내 앞에 비굴하게 조아리고 살아남으려 서로를 헐뜯어야만 해. 그래야 옳은 거야. 지금까지 호의호식한 주제에… 돼지 새끼들이었던 주제에! 다 값을 받아낼 거다. 너희는 내가 잃은 것들 위에 누워 있었으니까! 다 죽여버릴 거야! 내가 다 빼앗을 거라고!"

 

힘의 과시. 카이다는 병적으로 늘 그랬다. 그녀의 처지를 가장 혐오하는 게 그녀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녀를 겉으로나마 치켜세워주지 않았다. 따라서 카이다는 스스로의 등을 떠밀고 옆에서 박수를 치며, 외로운 지지를 보냈다. 단독자로 섰다.

 

"너희가 싫어! 행복하게 사는 꼴이 싫어…! 나보다 잘 사는 돼지새끼들. 내장을 파헤쳐 버리겠어! 나는 이 꼴이 되어서도 행복하지를 못하는데. 너희들은…!"

 

힘이 필요했음은 그녀도 알았지만 너무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그러니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그것은 곧 뾰족한 알약이 되어 목통에 걸렸다.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다. 그녀는 삼키는 척을 해봤지만 자꾸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겠지. 그야 그 약을 머금은 자는 다른 누구도 아니라 그녀이기에. 가장 역겨움을 느끼는 이마저도 그녀였다.

 

"가족을 찾고 싶은 것도 그냥 죽이고 싶은 게 아니겠지. 너무 늦었지만 그들과 다시 만났을 때 그들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면, 뒤늦게 찾은 피붙이에게 주어야 마땅할 사랑을 보내고 괴물마저 받아들여 준다면.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싶었겠지…"

 

카이다는 가상의 가족에게 그리움 혹은 애환을 느끼는 듯이 흐느꼈다.

 

"흐윽… 흐윽…! 다 어딨어… 어딨냐고… 찾을 방법이 있다는데. 찾을 수 있는데 여기서 죽을 순 없어…! 이럴 순 없어… 흐으. 나한테 이런 일이 있을 순 없어…!"

 

카이다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징징대기 시작했다. 어린애가 떼를 쓰듯이 바닥을 치는 걸 보아하니 처음 탑에 왔을 때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해낼 수 없고 어차피 탑에서 죽을 거라며 바닥에서 꿈틀대던 나.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카이다 쿠로하 이 여자는 내 증오를 사는 만큼 나와 닮았다. 그녀는 나의 상사체(相似體)였다. 텅 비고 갈구하는 배회자. 뿌리를 찾아 헤매는 접목.

 

나는 그녀에게 어느 정도의 동질감을 느꼈으며, 애잔함마저 느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거의 의무적이기까지 한 복수심을. 단지 그렇게 되어야 하기에 그녀를 나락으로 떠밀어야 하는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징수로 빵을 버는 이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에게서 악감정과 앙심. 불만. 혐오와 같은 사적 감정들을 잘라낸다면 나는 그녀의 악행에 대한 영수증이라도 내밀고 남았다.

 

"나는 너를 시기하지 않아. 너만큼이나 나도 너를 괴물이라 여기거든. 하지만 이 말만큼은 네게 돌려주지. 너를 나만큼 불행하게 만들 거야. 나처럼 아파 봐. 카이다. 모든 걸 다 잊어 보라고. 너라면 그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알겠지. 파산이다… 네가 그 비참한 신세에 매달려 살게 만든 미련도. 네가 그나마 소중히 여기던 추억도. 네 생각의 뿌리도. 모두 사라질 거다. 너는 너 자신이 아니게 될 거야."

 

내가 기억 상실의 키워드로부터 카이다의 귀를 막아준 것은 그게 캐롤 씨가 할 만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캐롤 씨를 배신하고 재단에 바친 자가 카이다임을 알게 된 이상. 카이다에게 캐롤 씨의 자비를 베풀 명목은 이제 없어지고 말았다.

 

카이다는 얼굴을 부들부들 떨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이제 표정에는 증오가 들어갈 틈이 없었다. 오직 공포와 비굴함 뿐이었다. 그만. 제발 그만. 입술에 그 모양만이 떠올랐다. 과거가 없음이란 아무것도 없음이라.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마주한 그녀 자신의 몸은 어떻게 느껴질까? 영문 모를 괴물의 몸뚱이 속에 갇힌 공허란 어떤 느낌일까? 그보다 당황스럽고 외로운 일은 없다. 영안로 속에서 빠져나갈 방법도 잊고 자신의 이름도 잊은 채. 카이다는 이 안을 영원토록 헤메이리라. 틈 하나 없이 완봉된 그녀만의 지옥. 카이다는 알았을까? 영안로 속으로 나를 납치하라는 지시는 나의 납치. 캐롤 씨의 부활에 대한 압박에 더불어 쓸모가 없어진(나의 추정이지만 카이다가 모노로그와 잘 지냈을 리가 만무했다. 이빨을 드러내었겠지) 내통자를 숙청하는 일 또한 포함되어 있었음을.

 

"제발 그러지 마… 부탁이야. 안 그럴게. 잘못했다고! 안 돼. 제발. 나나시!"

 

"실내에서 추운 바깥으로 나가다."

딸랑 딸랑 딸랑 딸랑

"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 잘린다. 잘린다고오오오오오!"

 

"상처. 소금. 염소의 혀."

딸랑 딸랑 딸랑 딸랑

"그만! 그마아아아아안!"

 

"그만이라는 건 없어. 카이다. 아직도 모르겠어? 이게 네 여정의 마지막이야! 내가 그걸 초래할 거라고. 영안로에서 굶어 죽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너는 누군가가 여기에 찾아올 때까지 남겨질 거야! 알아? 고립되었다고! 누구도 너를 구하지 못해. 비명을 질러 봐. 나도 같이 해 줄까? 아아아아아아아아… 동전의 양면!"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나나시… 나나시…! 그으으윽… 흐윽. 끅. 흐…"

 

카이다는 눈이 충혈된 채. 눈가가 새빨개진 채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훌쩍댔다. 창놈이니 어쩌니 해놓고 이럴 때만 나나시냐. 나는 이내 울화를 풀어내듯 그녀를 따라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악! 도와줘요! 도와주세요. 제발!" 제기랄! 나는 목의 혈관이 울거지고 머리에 피가 핑 도는 것이 느껴질 만치 소리쳤다! 짜증스러운데도 시원했고 막힌 목이 뻥 뚫리는 듯이 개운했다! 그러면 안 됨은 나도 알았다. 악의를 억누르지 못함은 미성숙이고 성급이었다. 부끄러워 마땅해! 하지만 나는 그것을 온전히 털어내 버리고 싶었다. 조금의 조절도 없는 대갚음이 내 정신을 중독시켰다.

 

아. 똑같은 복수인데 어째서 이렇게 시원스러울까? 모리를 상대로 했던 그 착잡하고 안타까운, 그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결투와 이 일방적 심판은 왜 이리도 다르단 말이야? 아마 모리는 분명 자신만의 옳음을 추구한 인간인 데 반해 카이다는 그저 금수임이 차이리라. 행위의 결과만을 놓고 정의를 맞대는 게 아니라 그 의도 자체를 도마에 올리니 과제라고 느껴지지. 그러나 그 모든 만족감과 통쾌함 따위는 곧이어 구슬프게 흘러나오는 영혼의, 꺼져가는 잔음 앞에서야 자기혐오로 돌아올 뿐이었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던가. 나는 나의 악한 일부분을, 내가 흡수했기 때문이라지만 일그러진 거울상을 죽이고 있었다. 바로 그 살해 자체가 나를 좀먹고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이중감정은 '죽여라' 쪽에 기울었다.

 

"훌쩍… 흐윽… 도와줘… 살려 줘… 아무나 좋으니 제발…! 으끅. 훌쩍… 흐윽…!"

 

나는 울고 있는 그녀에게 쐐기를 박았다.

 

"누구도 구해주지 않아. 카이다! 네가 전부 버렸잖아. 네가 우리 편에 서고자 했다면 우리는 너를 위해 미도리카와에까지 맞섰을 거야! 히무로가 그러지 않았을 것 같아? 캐롤 씨나 인공지능이 너를 버려둘 것 같냐고. 하기와라가 탑 반대편에서 너를 찾았을 때. 그와 손을 잡기만 했어도 달랐을 걸 전부 망쳤으니 이렇게 된 거야! 너는 불평할 자격도 구원받을 자격도 없어. 그러니 포기해. 30코페이카!"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끄흐으으으으륵……! 그으윽… 흐윽…!" 카이다가 몸을 비틀고자 신음을 내뱉었다. 아가리에서 게거품이 부글부글 끓었다. 카이다는 몇 번이고 절규했다. 목이 쉴만치. 내가 도무지 못 견디고 내 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을 만큼 소리를 질러댔다. 몸을 얼려 놓으니 고막을 터뜨려 죽일 셈인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아. 아아. 안 돼. 안 돼애! 기억이 잘린다…! 더는 안 돼… 제발. 제발. 아무나! 아무나! 아아… 아아아아아! 우우…!" 카이다는 짐승처럼 우는 소리를 냈다. 그것도 곧 끝나리라. 나는 그것을 느꼈다. 작은 종말이 도래함을 예견했다. 나의 손으로 누군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히는 야만을. 뜨거우리라 생각했던 그 야만성이란 왜인지 무척이나 차가웠다.

 

"으우… 흐윽. 잘린다…! 안 돼! 더는 안 돼! 아아. 꺄아아아아악!" 이윽고 새된 소리가 그녀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왔다.

 

"얼린 바다를 부순 도끼." 마지막으로 내가 그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라 말한다면, 카이다의 기억은 초기화될 것이다. 탑에서 겪은 일도 전부 잊겠지. 살수 일을 하는데 유리하게끔 기억을 되돌릴 방법이 있을지 몰라도 영안로 속에 내버린다면 그것조차 불가능하리라. "이제 끝이야. 카이다." 내가 그렇게 선고함에도 하늘에서 빛이 떨어지지 않자. 카이다는 울다 말고 눈을 번쩍 떴다.

 

그 눈에는 깨달음이 스쳤다. 이게 정말 끝이다. 어떻게 솟아날 구멍도 꺼질 땅도 없었다. 그녀가 경멸스러운 행적을 꾸역꾸역 이어나가면서까지 찾고자 했던 것은 영원한 미지로 남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 모든 기억을 잃고 어딘지 모르는 영안로를 멍하니 시체처럼 배회할 것이다. 어쩌면 저대로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주마등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증오에 몸을 맡긴 채 살던 끝에 길가에 굴러다니는 쓰레기 꼴이 되어 죽다. 나는 그녀의 단말마가 곧 튀어나오리라 생각했고 그 예상대로. 카이다 쿠로하는 소리쳤다.

 

"삶에 살 가치가 있다는 건 씨발 개소리야!"

 

나는 카이다의 말에 흠칫 놀랐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떤 가치도 없어. 매달려 봤자였어! 좋은 날은 절대 오지 않아… 죄다 나만 버렸잖아! 나만 내버려 두고서 자기 잇속만 챙기는 새끼들…! 나는 혼자 남겨진 거다…! 그러도록 빚어졌고 저주를 받았어. 내가 다 저주할 거야… 미워할 거야. 죽는 순간까지 미워할 거야! 흐윽… 끄윽…!"

 

"뭐라고…?"

 

나는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딘가가 크게 잘못되어 내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음을 느꼈다.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도 몰랐지만, 막연히 직감이 그러했다. 왜 카이다가 저런 말을 한 것이 그토록 내 신경을 곤두세웠는지는 알 수 없었다.

 

"거짓말쟁이… 헛소리… 헛소리야…!"

 

카이다가 훌쩍이고 또 헐떡였다. 누가 너에게 그런 말을 했는데? 라고 물으려는 시도가 내 입안에서 맴돌았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그와 같은 말을 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는데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리 생각했다.

 

잘못될 구석은 어디에도 없음을 스스로 재확인하여도 기분 나쁜 느낌은 가시지가 않았다. 당연히 카이다와 나는 탑에 오기 전 만나지 않았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알지? 기억도 없으면서. 만났을지도 모르잖아?' 라는 물음에는 '내가 재단의 살수와 마주쳤다면 이미 죽었겠지.' 라 응수했다.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 눈의 그녀는 어딘가 낯이 익었다. 왜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지? 그 얼굴의 모양이. 그 눈이. 왜 묘하게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았다고 느껴지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이디푸스 왕. 선왕을 살해하고 자신의 어머니와 동침한 자 때문에 신이 테베에 역병을 내렸을 때. 그자를 찾아 눈을 뽑으리라 다짐함 뒤에 현자의 손가락이 그를 가리켰을 때. 그는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리라. 잘못된 그림의 바로잡힌 모습을 알지 못해 붓을 잡고만 있는…

 

멈추어야 하나? 더 했다간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몰랐다. 일말동안 그런 생각을 했으나 곧 내 안에서 솟구쳐 오르는 레볼루숑 속의 고함과 광기가 내게 윽박질렀다. '사악한 카이다를 잡았다! 이제 카이다는 끝장났다! 아! 그 카이다가! 내 머리를 때리고 납치하려 들었던 카이다가! 기관총을 쏘고 해를 끼쳐온 카이다가 잡혔답니다! 기억이 지워질 거래요! 오. 그 카이다가?! 캐롤 씨를 배신한 카이다가! 이 여자를 봐! 기억을 지워버려! 영영 바보 천치로 만들어! 피를 흩뿌리지 못할 것이라면 자아를 흐트러뜨려 다시는 주워 담지도 못하는, 토양에 스며드는 깨진 달걀과 같은 것으로 만들어라! 정의다! 정의를 다오! 영혼을 집어삼켜버려! 오. 신이시어. 나를 굽어 살피어 주세요! 나에게 목을 축일 물. 이가 시릴 정도의 냉혹한 복수를!' 그 목소리는 너무도 큰 나머지 다른 것들을 전부 덮어버렸다.

 

이대로만 하면 된다. 이대로만. 나는 되뇌었다. 이제 와서 물러설 곳도 없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였다. 내 외나무다리는 이중으로 나는 카이다를 떨어트리려는 와중에 나 자신과도 맞닥뜨렸다. 어느 쪽과도 물러설 수 없었다. 세상에는 관성과 중력과 가속도가 있다. 시작된 일은 멈출 수 없게끔 하는 법칙이 실재했다.

 

"그녀는…!"

 

"너 미워!" 카이다는 표독스럽다기보다, 증오스럽다기보다 섭섭하고 실망스러워 보였다. 떼를 쓰는 어린애. 그저 아무도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사람. 카이다의 심연 속에 들어있는 형체는 맹수나 괴물이 아니었다. 반대로 지극히 유약하며 왜소한 게 나타나자, 나는 그저 삼라만상의 묘함을 느끼며 말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변태. 나쁜 놈! 너 싫어! 미워할 거야. 영원히 미워할 거야!" 그 말은 나를 부추기다시피 했고. 나는 떠밀려나 결국 외쳤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아아!"

 

카이다는 외마디 비명을 지른 뒤. 눈을 뜬 채 움직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동공이 움직이지 않음에서 실신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얼굴은 눈물과 콧물, 침, 그로 인해 만들어진 게거품 따위로 더럽고 어지럽혀져 있었다. 

 

끝났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내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이제 카이다는 죽었다. 몸은 안 죽었더라도 그 사람은 죽게 되었다. 사실상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그녀를 다시 보는 일은 이제 없고, 나는 실타래마저 되찾았다. 언제든지 영안로에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내 목을 조이던 올가미에서 벗어남과 같았다. 나갈 수 있다…

 

그뿐. 나는 영안로를 나아가 캐롤 씨를 되살릴 수 있었다. 힘 하나는 센 호위 없이 나아갈. 모노로그가 준비한 마지막 관문.

 

"패트리샤. 지금 영안로 안에 누가 있지?"

 

"다른 참가자 분들을 여쭙는 걸 테니 알아서 대답해 드릴게요. 히무로 씨. 마유즈미 씨. 하기와라 씨. 세 분만 있어요."

 

"카나리와 인공지능은 나갔다 이거야? 인공지능은 무사한 거겠지?"

 

"무사히 나갔죠 뭐."

 

그렇다면 다행이다… 이것으로 누구도 죽지 않은 채 여기까지 도달했다. 나이토를 되살리려던 카나리도 탈락했으니 내가 밖으로 나가더라도, 누군가가 멋대로 부활 기회를 소진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가지 못할 이유 자체는 사라졌다. 카이다까지 무력화시킨 겸 밖으로 나가 캐롤 씨와 재단. 카이다에 대한 정보들. 패트리샤에게서 들은 대답을 공유하고 누구를 살려야 하는지 의논할 수 있게 되었다. 미약할지언정 살인 게임의 진상에 한층 가까워졌다.

 

나는 내가 해친 결과물을. 유쾌함보다는 불길함과 불쾌함을 주는 카이다의 형해에게서 눈을 돌리고, 반대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왜 걷느냐고?

 

한편으로. 세 사람만 따돌리면 캐롤 씨의 부활이 도래하기 때문이었다. 의논 따위 무가치했다. 아직까지도 탑에서 갈등 없는 해결이 상책이라 여기는 것은 어리석음이었다. 나이토의 부활을 지지하는 쪽 말씀해 주세요. 5분 드립니다. 다음은 반론 말씀해 주세요. 5분 드립니다. 시간이 아까웠다.

 

내가 멈춰야 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누구도 나를 대신해, 그녀를 책임지고 되살려주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해내야만 했다…

 

하지만 마유즈미는?

 

나는 우뚝 멈추었다. 비단 마유즈미가 아니라 히무로, 하기와라도 영안로 속에서 날 계속 따라온다면 위험에 처하게 되겠지. 카이다는 시련에서 자신의 유일한 약점. 코드를 이용한 기억상실을 마주하고 위기에 처했다. 내가 구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똑같은 꼴로 비참한 끝을 맞았으리라. 인공지능이 영안로에서 탈출한 것 또한. 인공지능이 감당하기 어려운 역경을 만나 그럴 수 밖이 없었음을 시사했다. 그들은 나를 뒤쫓고 캐롤 씨의 부활을 막고자 하는 추적자들이었지만 나를 카이다의 마수에서 구하고자 하는 이들이었고, 결코 위험해져도 싼 사람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멈추어야 하나?

 

이런. 나는 이마를 부여잡고 고개를 저었다. 어느 쪽도 옳았다. 영안로에 남은 셋 중 하나라도 잘못된다면 그건 내 책임이었다. 내 손이 묻을 피. 스스로를 용서하기 어려울 죄였다. 캐롤 씨마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한 부활은 달갑게 여기지 않겠지. 나마저도 그런 것은 원치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당연히 나는 캐롤 씨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총이 두 정이나 있고 지혜를 가진 그들이니 능히 해내리라 짐작하고 덮어둘 수 있었다. 허나 맨손으로 곰도 찢던 카이다가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하던 것이 그들에게도 있다면? 히무로의 말을 듣고 전진을 멈추기에는 탑의 주도권이 그에게 쏠려(총 때문이었다) 캐롤 씨의 부활 안건은 큰 반대에 부닥칠 게 분명했다. 어떻게든 내가 해결해야 했는데… 그래. 곧 나는 알았다.

 

목숨값을 저울에 올려야 했다. 어느 쪽은 포기해야 했다. 적어도 어느 정도 등한시해야 하는 운명이 내게 주어졌다. 마유즈미. 캐롤 씨와 이어진 터치파. 막역한 친우 사이는 아닐지언정 친밀감과 어느 정도의 소속감.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탑에서 성정이 순수하기로는 제일갈 사람이기도 했다. 히무로는 말할 것이 없었고, 하기와라는 돌발행동을 곧잘 할지언정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 세 명의 목숨을 판돈으로 걸만큼의 각오가. 감히 그 값을 내 어깨에 질 각오가 나에게 있을까?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추적자가 나를 아무런 위기 없이 따라올 수 있기를 바라다니. 묘한 일이었다.

 

그들이 처할 위험. 나의 죄. 되살아날 사람. 나의 미덕. 그 모든 것은 영안로 속에서 하나였다. 나는 그 신을 향해 날아가야 하는가…?

 

긴 생각 끝에 나는 실타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