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단크 타워 챕터 3 - 17
"이야. 축하드려요! 여전히 1등이세요. 물론 한쪽은 깨달음을 거의 끝냈고, 시련을 겪는 분들도 무섭게 뒤쫓아오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앞서나가고 있다고요! 짜릿하지 않아요? 그렇게 남들한테 무시당하던 당신이 누구보다도 빠르게 영안로를 헤쳐나갔어요."
카나리 케이토가 미동도 하지 않자 패트리샤는 더욱 활기차게 소리쳤다. 그는 더 이상 러드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으나, 그는 달라진 공기를 느끼기도 어려워했다.
"이제 누가 생각 없는 멍청이고 겁쟁이죠? 돈의 힘 없이도 당신은 이렇게 잘나가는데. 멋있다. 멋있어! 유후! 이제 마지막 깨달음만 마치면 나이토 유즈루 씨가 되살아나요. 자. 힘내라. 힘!"
"…나이토는 이길 수 없어." 카나리는 중얼거렸다. 회중시계는 빙글빙글 째깍였다.
"그러나 그전에. 깨달음을 완료하신 것에 대한 상을 드릴게요!"
"나이토를 되살려 봤자야. 저 터치 앞에서는 무력해…"
"뭐. 당신이 나이토 씨를 되살리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캐롤 씨의 부활 기회는 사라지니 걱정할 일 없지 않을까요? 캐롤 씨가 무서우면 보디가드를 들임과 동시에 그녀를 무덤에 처박아 보세요. 와우."
"나이토는 쉬게 두어야 해." 카나리는 간신히 말하고 있었다. 방금까지 자신이 겪었던 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침수되었던 섬이 느닷없이 떠오르듯 그를 좀먹어갔다. "싸우는 걸 떠넘길 수는 없어. 그건 못할 짓이야… 여기에 있는 건 그 자체가 고통이니까."
"사과는 안 해요? 용서 안 빌어요?"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용서받으려는 건 내 욕심이야… 돌이킬 수 없는 잘못과 배신은… 있어. 당해본 사람은 알아. 깨끗해지려는 건 죄지은 사람의 욕심이야. 적어도 나라면 절대 나를 용서 안 할 거야. 그럼 난 나이토에게 그러겠지? 내가 살려줬는데 은혜도 모른다며 떽떽… 꽥꽥."
내가 저지른 일은 내 거야. 내가 가져가야 해. 카나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욕심이 많기에, 업보도 그의 몫이었다.
"이러면 본체를 보여줄 수고도 덜겠는데…? 그보다. 당장 나가시게요? 상은 받으셔야죠."
"뭔데." 카나리는 아주 조금 귀가 솔깃해졌다.
"세 가지 질문이요. 당신이 무슨 질문을 하든 세 가지 답해줄게요. 대신 Yes Or No 질문만 가능해요. 자. 시작!"
째깍째깍째깍째깍
"하나. 이 탑에 조율자 본인 혹은 그놈과 관련된 존재가 있나?"
"…있다고 말할 수 있죠?"
믿습니다. 3번 사도. 여제 카드. 몸을 멈춰. 믿어지지? 금발. 금색. 흰 옷. 스스로의 싸움. 오버룩. 딕테이트. 터치. 터치. 금발. 금색. 흰 옷. 평화. 혼자가 아니다. 믿습니다. 조율자. 믿어지지? 금발. 금색. 흰 옷. 빛.
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
카나리의 몸이 발작하듯 덜덜 떨렸다. 제기랄. 제기랄. 그놈이 여기 있을 순 없어. 그럴 순 없어. 괴물… 괴물이야. 터치는 괴물이야. 맞서야만 해. 캐롤은 잘 죽었어. 언젠가는 악용될 힘이야. 살아나게 두어서는 안 돼. 차라리 나이토를 살려야 하나?
안 돼. 더 이상은 내가 못 버텨. 더는 못 해. 무서워. 무섭다고. 이런 경험은 두 번 다시 안 해. 카나리는 그것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쓸수록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는… 일부였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 그의 몸은 컸다. 상상할 수 없으리만치 컸다.
카나리는 공황 속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잡았다. 아무튼 도망치고 싶었다. 영안로 밖으로 나가려는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카나리는 똑딱맨을 떠올렸다.
"그놈한테 대항할 방법이 있기는 해?"
"있기야 있죠. 그러나 당신이 대항하지는 않을 걸요."
그럼 누가 하는데? 카나리는 자신도 모르게 세 번째 질문을 쓰려다가 간신히 참아냈다. 그는 잠깐 골몰란 뒤에 다른 질문을 썼다.
"조율자 아니면 카텟 기관이 이 살인 게임의 배후인가?"
"조율자요?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조율자도 인간일 뿐이에요. 기관과 동등하지는 않다고요. 아무튼 질문의 요지는 알았으니 답해드리죠. 네. 맞아요."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그 둘 모두에게 맞서는 거다.
"…카나리 케이토. 아웃."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이야기를 나눕시다." 야가미 토가가 운을 떼었을 때. 토키와 아유키는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도전자를 보았다. 그는 사자와 다름없었다. 우두머리에 도전하고자 하는 사자가 이빨을 드러낸 순간 둘 중 하나는 거꾸러져야 했다.
"그렇게 날 서게 반응하지 마세요." 야가미는 두 손을 들며 말했다. "그저 이야기를 나눌 뿐입니다. 토키와 씨."
이야기는 토키와의 전용실에서 이루어졌다. 야가미는 텀블러에 커피를 담은 채 마셨다. 토키와는 그저 야가미를 노려보고 있었고, 야가미는 그의 눈을 똑바로, 허나 적의를 담지 않은 채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였다.
"부관이 되어 드리죠." 야가미의 첫마디였다.
"나는 부관 따위 필요 없어."
"필요합니다. 당신이 지속적으로 극단적인 방법을 쓰면 머지않아 탄핵될 테니까요. 칸나즈키 씨의 무력화는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지만 방법이 적절치 못했습니다. 불을 쓰면 다른 사람들이 부수적인 피해를 입기에 상황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요. 칸나즈키 씨는 체구가 조그마한 데다가 그 수호령이라는 것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기 좋아요. 이바라 씨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왜 부관이 필요하다는 건데?"
"머리 두 개는 더 나은 방안을 낼 수 있기 때문이죠. 적어도 끔찍한 방안을 여러 명이서 수행하면 집단의 구성원들을 안정시키기 용이합니다. 모든 것이 계획의 일부이며, 이게 가장 나은 계획임을 설득시킨다면 무엇도 가능합니다." 토키와는 그의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그의 생각과 똑같았다. 모든 게 계획의 일부면 아무도 패닉하지 않는다.
토키와의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토키와는 그가 야가미를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 야가미 또한 당연히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살인자이기에 평판이 나쁠 뿐 그는 지능과 힘은 평범한 고등학생의 수준(토키와의 수준과 같다)를 상회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머리를 숙이며 그에게 부관을 자처하였다.
거절한다면, 토키와의 입지는 좁아지리라. 차라리 야가미가 새로운 리더가 되어 그와 경쟁하게 될 수도 있다. 그는 살인자이기에 곧바로 지지를 얻지는 못하겠으나… 토키와에게는 경쟁자의 존재 자체가 껄끄러웠다. 또한 부관을 자처하는 이가 있다면 영안로에서 다른 이들이 돌아오더라도 그의 입지는 흔들리지 않는다…
"원하는 게 뭐야?"
"당신이 몸을 사리는 겁니다. 토키와 씨. 왜 불을 지르신 겁니까?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신체를 파괴하기엔 그 방법이 나을지도 모르지만, 겉으로 보기엔 당신이 광인처럼 보인단 말입니다. 그럴수록 당신은 입지를 잃게 돼요…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바로 이틀 전에 벌어진 일이에요. 탑은 안정이 필요합니다. 저희 모두에게요."
"…네 말이 맞아. 야가미. 칸나즈키의 반응은 어때?"
"방에 틀어박혔습니다. 식사도 하지 않으려 해요. 무섭다는군요. 방 안에서는 울음과 할머니 언니인가… 그 수호령을 부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토키와는 조금 가슴이 아팠다. 잘못된 일을 한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까지는 안 아팠다.
"재단… 재단이잖아."
초고교론자들. 그들의 '재단'. 노네임과 노바디가 꼭꼭 숨으려 했던 것은 폭도들이 아니었다. 폭도? 그들 자체는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폭도들이 아무리 미쳐봤자 가장 강하게 입힐 수 있는 피해는 자살폭탄 테러에 불과했다. 폭도들 개개인의 무력은 별 것 아니었다.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무서운 것은 추적자였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초고교급이라 불렸던, 범람한 그 많은 인재들의 삼 할이 사라진 뒤에야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조짐이 퍼졌다. 그리고 거기서 삼 할이 더 사라진 뒤에야. 재능을 빼앗을 수 있는 기술이 들통났다.
초고교급 재능을 가진 지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그렇게 불린다면, 희망봉 학원에 들어갈 만큼의 역량을 가지지 않은 이도 표적이 되었다. 그렇기에 노바디와 노네임은 지하기지 안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 그곳이. 러드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재단이야… 우리는 재단에 있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을 줄이야…"
"재단? 네가 아까 말한 그곳 말이냐? 날 개조해 준 곳? 잘 됐네."
"나는 네가 캐롤 씨와 무슨 관련이 있어서 그녀를 납치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어. 생각이 없었던 거야. 그녀는 예쁘니까 무슨 쿠파같은 놈이 납치해오라 시켰을 거라 생각했던 내가 바보야. 바보. 얼빠진 놈…"
나는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녀는 초고교급 상담사라 불렸어. 그리고 그건 큰 의미를 가지지. 적어도 초고교급을 사냥하는 재단에 있어서는…"
"뭐? 뭘 사냥한다고?"
"초고교급 사냥. 재단은 재능을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 뒤 초고교급이라 불린 이들을 납치해 재능을 빼앗았어. 빼앗긴 자들은 대개 죽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망봉 학원에 갈 역량 없이 그저 초고교급이라 불린 이들이 재단에서 죽었는지…"
그리고 재단이 캐롤 씨를 표식으로 삼아 카이다로 하여금 그녀를 납치하게 했다면, 카이다는 단순한 재단이 매수한 요원이 아니게 되었다.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재단.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캐롤 씨가 조율자의 파편임을. 하지만… 막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로 가야만 했다. 그녀가 초인을 만들겠다는 허황된 계획에 희생되게 둘 순 없었다.
"따라와… 따라와." 나는 카이다를 재촉했다.
"네가 따라와야지! 길을 알긴 하냐? 앞은 보이고? 나는 뭔가가 보이거든. 그러니까 내 말이나 잘 들어!" 카이다가 다시금 내 앞으로 치고 나가더니 나를 잡고 끌었다. 이런 식으로 캐롤 씨도 끌고 갔을까? 아니지. 그녀와 몸이 닿을 수가 없었겠지. 거리를 뒀을까? 아니면 그녀를 밧줄에 친친 묶고 앞에서 끌었을까? 목줄이라도 걸었을까? 고분고분히 발걸음을 옮기던 와중 나는 그녀를 항한 증오
Overlook, Dictate, Touch
가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당장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캐롤 씨를 납치한 대가를 카이다는 치러야만 했다. 죄악의 백지수표 따위는 있어서는 안 되니까.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하니까.
무슨 죄를 지었냐고? 그래. 네가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나도 너에게서 그런 걸 바라지는 않았어.
이런.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미도리카와. 우리 중에서 집요하게 카이다를 몰아붙였던 사람. 총이라는 무기를 가지고도 그것이 밖으로 새지 않게끔 애썼고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며 삼일을 새운 사람. 그녀를 나는 느닷없이 떠올렸다.
너는 대체 어디까지 앞서 있었던 거야? 너를 제압해서는 안 됐어. 너에게 가짜 총을 겨누는 게 아니라 너를 도와야 했어. 누군가는 쌓인 업보를 재고 값을 받아내야만 하니까.
너는 그저 할 일을 한 거야. 그렇지? 내가 지금 카이다 손에 붙잡혀서 하수구를 지나다니는 것처럼.
"무슨 생각하냐? 아가리를 다물었네." 눈치가 빠르기도 했다.
"너 죽이는 생각."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카이다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을 느꼈다.
"뭐. 뭐? 무슨 소리야. 농담이냐? 좆도 안 웃긴 새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드키나 내놔. 이 새끼야. 아무래도 저기에 대면 문이 열릴 것 같거든."
머리카락의 희미한 빛을 통해 나 또한 그것을 보았다. 철문에 리더기가 달려 있었다. 침입이 상당히 수월하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보안인가 2급' 카드를 리더기에 가져다 대었다.
내부에서 침침한, 철문이라는 가름막 하나에 막혀 먹먹하게 들리는 버저 소리가 울렸다. 그 뒤 두꺼운 철문이 밖과 내부의 기압을 조절하듯 칙 공기를 내부에서부터 내뿜더니, 녹슬고 부드럽지 않은 신음을 뱉어내며 천천히 열렸다.
"레이디 퍼스트." 카이다는 웃으며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카이다는 무슨 생각으로 저 경구를 말한 걸까? 뜻을 아는 것도 아니고, 먼저 들어가는 본인이 할 말도 아니었다. 심지어 카이다는 레이디도 아니었다. 그녀는 유치원에서 배운 단어를 뽐내려 애쓰는 어린이와 같았다. 온갖 치명적인 도구를 갖추고 그 사용에 능통하며 육탄전에 있어서 최강에 가까운 어린이.
그리고 나는 무고한 이들을 납치해 죽이고 개조인간을 만들어내는 연구소 속으로, 그 어린이를 따라 산책을 떠났다. 내 손에는 바람개비 대신 정인의 머리카락이 들려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연구소의 내부는 그리 밝지 않았다. 본래는 흰색이었을 타일들이 떨어지고 빛이 바라벼 변색된 점을 보면 그들 또한 법인단체에서 거리가 먼 이들이었다. 하수도 근처에 본거지를 뒀기 때문인지 내부에는 특유의 퀴퀴한 향이 남아 있었다. 벽 곳곳에서 팬이 시끄럽게 회전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을씨년스러운 복도가 길게 뻗은 와중 가지가 나듯이 복도와 이어진 다른 방들이 보였다. 머리카락의 가리킴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함이었다.
카이다는 연구원들에게 발각되지 않게끔 발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였다. 바퀴벌레가 하는 일과 비슷했다. 아무 소리 없이 사사삭… 구석탱이로 숨어드는 일이었다. 카이다는 어느새 복도와 가장 가까운 방 안에 쏙 들어가고선 내게 손을 까딱였다. 험악한 얼굴은 이렇게 말하려는 것 같았다. "와. 이 새끼야. 뭐 하냐?"
잠입. 재단의 수수께끼를 풀거나 안전하게 움직이려면 그게 필요할지도 몰랐다. 카이다는 영안로 속의 깨달음을 아직도 모르는 듯했다. 중요한 것은 되살아나야 하는 사람인 것을.
카이다의 표정이 점차 굳어갔다. "뭐 하냐고!" 그녀의 입술이 물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조용히 손을 까딱였다. 이리 와.
나는 랩코트를 입고 단추를 여몄으며(피가 묻긴 했지만 칼라를 접어 숨겼다) 보안인가 2등급의 카드 키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위장은 이미 해냈다. 그리고 설령 재단 안의 누군가가 처음 보는 남자 연구원에 이상함을 느끼더라도, 내가 거동수상자 취급을 받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재단이 부리는 비수가 내 신분을 보증할 것이기 때문이다.
카이다가 전혀 달갑지 않은 기색을 한 채로 내 뒤를 따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평범한 인상의 연구원이 카이다의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리고 나치들이 하듯이 오른팔을 뻗어 손을 어깨보다 높이 올렸는데, 이때 손의 모양은 소지와 약지를 붙인 것과 검지와 중지를 붙인 것을 서로 떼어놓은 뒤 엄지를 밑으로 빼 무언가를 움켜잡으려는 듯한 수인을 만들었다.
"재단의 흉조(凶爪)를 뵙나이다!"
그리고는 감히 카이다보다 앞에서 걷고 있냐며 그 일을 타박하듯 나를 노려보았다. 카이다도 은근히 그것을 눈치채고서는 내 어깨를 잡아 뒤로 내치며 내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위장을 위해 입었던 랩코트는 은근슬쩍 벗어던졌다.
"선생분들과 말씀 나누시러 접견실로 가신 줄만 알았습니다… 저. 몸에 묻으신 피는…"
"내 피 아니야." 카이다는 일축했다.
"예!"
"흉조께서는 그녀가 데려온 실험체를 보길 원하신다." 내가 옆에서 덧붙이자, 연구원은 나와 카이다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그녀는 지금쯤 무력화되어 유리관의 방으로 향했을 것입니다. 흉조시여. 이제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가장 어려우리라 여겼던 조율자의 완성이 머지 남지 않았노라고."
조율자. 조율자의 파편. 서둘러야 했다. 카이다는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 주는 연구원을 재촉했고, 나는 가능한 한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복도를 지났다. 곁눈질로 살핀 재단의 내부는 별반 깨끗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망스러울 정도로 후줄근했다. 그러나 나는 그 안에서 기이한 불일치를 보았다. 이런 식이었다. '이곳은 지옥이야.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자원과 땔감으로 봐. 잔인하고 끔찍한 이들만 모인 곳인데… 왜 이렇게 별 일이 없지?'
곳곳에 랩코트가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극단적인 용모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몰락 이전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보고서를 주고받고 타이핑을 했다. 음료나 도넛 따위의 간식을 나누어 먹는 이들도 있었다. 어찌 보면 평범한 소기업체나 물방개의 생태 따위의 사사로운 것을 연구하는 시설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괴물이었다. 나는 잠시 한눈을 팔고 경이와 혐오감, 이해할 수 없다는 느낌으로 가득 찬 채 생각했다.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지?
그들은 잡담도 나누었다. 잡담을. 그들은 평온했다. 일상의 틀 안에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그 범주 안에 민간인 납치와 재능 추출, 사실상의 인간 도살을 끼워 넣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집단적인 광기에 빠져 있었다. 아이히만과 같았다. 그들은 생각할 테다. '이것은 그저 숫자일 뿐이다. 우리가 추산해 낸 희생자는 사람이 아니라 숫자일 뿐이다. 통계. 일. 계산. 추량. 노동. 보고서다. 사람이 아니라 그저 숫자니 우리는 얼굴을 붉히지 않는다.'
어떻게 이토록 무신경할까. 나는 그들에게 사람이라는 이름을 주고 싶지 않았다. 카이다에게 또한 똑같은 생각을 했다. 지금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이 캐롤 씨를 납치한 장본인임을 알았을 때.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에 죄책감을 느꼈을까? 그게 잘못된 일임은 알고 있을까?
다 괴물들이다. 괴물들과 별종들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으나 원하는 이들에게 붙어야 하는 말이 아니라, 가진 마음을 저버린 이들에게 붙어야 했다. 카텟 기관. 그들 말고도 많았던 수많은 입. 뒤에서 속닥거리고 재간대는 입. 성게와 같이 먹는 곳으로 배설하는 그 입들은 너무도 잔인했다. 그런 멸시를 받아가면서도 히무로 시라베와 인공지능은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았는데, 그저 겉모습이 똑같고 생활에 종사하면 이유식에 비소를 타는 일을 하는 작자들도 정상의 범주에 들어갔다. 불공평했다.
'인공지능을 봐야 한다. 밖에 나가 이야기를 나누자. 인공지능은 사람의 마음을 가졌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연구원을 따라갔다.
"여깁니다. 흉조시여. 아마 곧 그 금발의 여인도 이곳으로 오겠지요. 재료가 거의 다 모인 겁니다…"
나는 연구원을 따라 문틀을 넘었고, 그 안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유리관. 나는 그 말에 매달리지 않았다. 유리관? 연구소에는 있을법한 물건이었다. 그러니 흘리듯 넘겼다. 유리관에 무엇이 들어갈지. 그리고 왜 캐롤 씨가 유리관의 방으로 향했는지에 대한 생각 없이. 그 방에 다다라 그들을 만났다.
대여섯 개의 관. 유리관. 투명해 안이 똑바로 비친다. 그 안 또한 투명한 액체로 차 있다. 그리고 산소를 공급할 마스크와 관. 혈관에 꽂혀 있는 어지러운 카테터. 삑. 삑 거리며 심전도와 혈압을 잰 수치가 한 모니터에 표시되어 있다. 그 모든 게. 사람이다. 기골이 장대한, 발육이 뛰어나다는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이 투명한 액체에 갇힌 채 유리관 안에 둥둥 떠 있었다. 자연적으로 있기 어려운 머리색. 누군가의 설명 없이도 나는 알아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조율자라는 허구를 만들어내기 위해 희생당하고 있음을.
그중 어린아이를 보고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참혹함에. 소름 끼침에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인두겁을 쓰고. 어떻게 어린애의 몸에서… 무언가를 착취하고자 할 수 있지?
순간 나는 그것들이 박제나 이미 죽은 시체는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다. 나는 그 어린아이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충혈된 눈. 옅은 노란색의 머리. 나의 동공이 커졌다. 나보다 훨씬 어린 소년의 어깨 골격을 보았고, 점차 뿌리에서부터 검게 변해가는 머리카락을 보았다. 눈은. 옅은 노란빛이었다.
아아. 살아있다.
이 자리의 모두가 살아있다. 산 채로 재능을 빼앗기고 있다. 문득 꺼낸 머리카락은 내 손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리관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이 무언가를 가졌다. 머리카락은 그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샤이닝? 아니다. 그랬다면 카이다나 나에게 머리카락이 찰싹 붙어 움직이지 않았으리라. 캐롤 씨가 가졌고, 그들 또한 가진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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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그게 뭐지?"
"정신에 간섭하는 능력이요. 그들이 그러더군요. 시선을 통한 것, 육성을 통한 것, 접촉을 통한 것."
"말 그대로야? 남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말을 따르게 할 수 있어?"
"가끔 마주치기 어려운 눈동자가 있죠. 눈빛 하나만큼은 예사롭지 않은 이들이요. 그런 이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누가 마지막 도넛을 먹을지 눈싸움이라도 하자면, 넌덜머리를 내며 포기하게 돼요. 꼭 이런 식이 아니더라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사람들은, 조금이나마 오버룩을 타고났어요. 딕테이트도 똑같죠. 달변가. 연설가. 고취하는 사람들. 구호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이 깃발을 따르게 만드는 자들은 딕테이트를 타고난 거예요."
"터치는? 다른 사람을 때려서 굴복시키는 사람들?"
"아마 터치를 가진 사람은 곧바로 떠올리기 어렵겠죠. 터치는 가장 귀해요. 저도 터치의 소질은 가졌을지언정 발현한 사람은 못 봤어요. 그리고… 세 가지 능력을 전부 가진 사람은 더욱 드물었죠."
사이렌이 울리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서브젝트 탈출. 서브젝트 탈출. 흉조와 매발톱을 풀어라! 반복한다. 흉조와 매발톱을 풀어라!"
어딘가에서 시끄러운 안내방송이 들렸다. 연구실 안에 있는 랩코트의 괴물들이 한순간 우왕좌왕하더니 그녀를 발견했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카이다. 카이다 쿠로하. 그녀를 바라보며 그 악의 평범성을 가진 랩코트들이 일제히 오른팔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만들었다.
"하일. 흉조시여! 죽여라!" 그들은 재각각 소리쳐댔다.
장소는 비상 탈출용 엘리베이터다. 서브젝트는 그것을 타고 도주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까마귀 가면을 쓴 여자가 하나, 그리고 성별을 불문하고 모인 매 가면의 네 명이 있다.
"찢습니까?" 매 가면을 쓴 이들이 말했다.
"움켜쥔다." 까마귀 가면의 여자가 말했다.
"목표는?"
"캐롤 브라이트. 금발의 여성. 멜빵 치마와 털 스웨터. 광자 추적기를 통해 뒤쫓는다."
"보유한 정신조작은?"
"시선을 통한 것, 육성을 통한 것, 접촉을 통한 것."
"세기는?"
"전례가 없다."
"발현한 것은?"
"접촉에 편중되어 있다. 시선과 육성 또한 화산과 같지만 그 힘의 존재를 스스로가 자각하지는 못하고 있다. 어쭙잖게 덤볐다간 그것을 우리에게 쓰게끔 몰아넣는 일이다."
"붙잡습니까?"
"붙잡아라."
"재단의 흉조를 받드나이다." 그리고 매의 가면을 쓴 이들은 소지와 약지를 붙이고, 검지와 중지를 붙이고, 엄지를 밑으로 뺐다. 매의 발톱 모양이었다.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 다리의 난간에 매달린 사람들은 곧잘 생각한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어떤 기점에서 나의 삶이 망가지고, 여기까지 내몰렸을까? 오직 사람만이 그런 사유를 한다. 뱀의 뱃속 안에 들어간 어떤 쥐도 내가 어떤 발을 잘못 내디뎌 붙잡혔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재생하고 고쳐 다시금 일어서고자 하는 곱씹음은 위대한 것을 기대하는 지성체의 종특이다.
그녀 또한 생각했다. 숨이 차게 달리며, 두려움에 떨면서. 눈물을 흘리며 달렸다. 그녀에게는 아직 수많은 기회가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고 되찾고 싶은 것도 많았다. 가족. 평온. 총체적인 삶. 그녀의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다. 적어도 황폐한 도시의 대로변을 내달리며 숨을 흐느끼는 부분은 결코 그린 적이 없었다.
느껴진다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그녀는 멀리서부터 서서히 가까워지는 발소리. 그 진동과 건물과 건물 사이를 민첩하게 뛰어넘고 착지하는 소리를 들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감지할 수 있는 위협. 그것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달리기가 빠르지 않았다. 몸이 무거웠다. 그래서 치어리더단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은 그녀가 늘 검은 양 취급당하고 따돌림을 당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럴 수는 없어. 그녀는 거듭해 생각했다. 이럴 수는 없어.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는 없어. 어디에 있는 누군가에게 이런 일이 벌어질지언정 내게 벌어지는 일은 아니야. 그녀는 자신이 그 덫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다른 누구든지 그 안으로 끌어와 버리고 싶었다. 아주 잠깐 진심을 다해 그렇게 생각했다.
"도와 줘…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제발… 도와 줘…!"
어느 부분에서 내 삶이 망가졌을까? 생각나는 때가 너무도 많았다. 전부 다 잘못됐다. 그러나 그게 온전히 그녀의 책임은 아니었다. 전부 괴상망측한 초능력. 배신. 그리고 카 때문이었다.
그녀의 뒤를 바짝 무언가가 따라왔다. 가장 빠르고 또 위협적인 누군가였다. 따돌릴 수가 없음을 알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팔을 뻗었다. 운이 좋다면 한 번에 제압할 수도 있으리라. 그녀보다 머리의 금색이 옅은 '금발'들이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를 지적질해 댔지만 뒤로 팔을 뻗는 이 한 동작만큼은 지적하지 못했다. 하나. 둘.
셋!
그녀의 팔이 멈추었다.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 그녀는 알아보았다. 체구. 키. 아까까지 입고 있던 옷. 그리고 육감.
아. 너구나. 또 너구나…
까마귀 가면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 안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이전과 달랐다. 훨씬 사람 같지 않게, 무정하게 변조시킨 목소리였다.
"재단이 너를 원한다. 캐롤 브라이트."
"제인 캐롤 브라이트라니까." 그녀는 울먹였다.
저것들도 카이다와 같아. 개조인간이다. 나는 내 앞을 까마득히 앞서 나가는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비상용 엘리베이터는 총 세 개 있었는데, 한 개는 이미 지상에 도달해 있었고 한 개는 올라가는 도중, 나머지 하나가 탑승 대기 중이었다. 나와 카이다는 마지막 것을 타고 올랐다. 아직 올라가지 않았던 두 번째 것이. 아마 개조인간들의 것이었으리라.
카이다가 나를 따라잡고선 소리쳤다. 승용차 바로 옆을 뒤쫓는 타조 같았다.
"뒤처지잖아. 병신아! 객기 부리지 말고 태워달라 할 것이지!"
나는 나를 향해 가까워진 손을 탁 하고 쳐냈다. 손목이 찌릿하게 아팠다. 무슨 돌을 때린 기분이었다. 손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결국 그 아귀를 떼어내지 못한 채 나는 어깨를 붙들렸다. 그녀가 힘을 준다면 내 쇄골이 부서졌을 것이다.
"너는… 캐롤 씨의 부활을… 원하지 않을 거니까." 나는 헐떡였다. "모노로그가 그걸 원할 리 없어. 누군가 살아나는 것보다 부활시키려다 사람이 죽는 걸 원할 거야."
"나야 안 원하지. 모노로그도 그년을 살려달라 하진 않았어. 그렇지만 살리지 말라고도 안 했어. 게다가 빌어먹을 깨달음을 하려면…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난 무슨 기준으로 깨달음이 끝나는지도 몰라! 너는 기억나냐?"
"그런 식이니까 깨달음이 안 되는 거야. 캐롤 씨를 죽이면 깨달음이 성립되고 영안로의 다음 구역으로 갈 수 있다 말하면, 너는 그냥 죽여버릴 거잖아."
카이다는 '어쩌라고?' 라는 식으로 눈을 씰룩였다.
"그렇…지. 그게 뭐 어쨌다고?"
"첫 번째 깨달음에서 네가 나와 같은 것을 봤다면,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서 퀸으로 추대된 뒤 동물의 피를 뒤집어썼겠지. 두 번째 시련에서 우리는 그녀가 납치된 족적을 밟았고, 이윽고는 재단에까지 들어가 실험체를 마주했어… 이제 그녀를 찾아가기까지 해."
"나는 드레스만 입었는데." 카이다가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여기서 벌어지는 일을 아직도 이해 못 했으니까 시련 같은 곳에나 떨어지는 거야." 나는 내 어깨를 움켜쥔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하고 싶었지만, 카이다는 비틀린 우월감을 입꼬리로 보내며 더 힘을 줄 뿐이었다. "그 쉬운 걸 못 하니까… 이해할 줄은 모르니까."
"뭘 이해하라는 건데?"
"그녀라는 사람. 그녀가 겪었던 일들… 그것을 내가 직접 들어가 느끼는 게 곧 영안로의 깨달음이야. 너는 그녀가 뭘 당했을지 상상이나 가? 아까 그 유리관 속에 갇히는 거야. 그녀는 조율자 후보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붙잡혀서 그저 자원처럼 여겨지는 건 똑같아. 네가 사람 하나. 어쩌면 여럿을 그렇게 만들어버렸어. 너는 아무렇지도 않겠지. 부끄러움도 모른 채 그렇게 살겠지…"
나는 그녀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카이다는 그게 달갑지 않은 듯 숨을 조금 거칠게 쉬었으나, 정작 반박의 말은 꺼내지 못했다. 나도 그런 대단한 일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나더러 어쩌라고? 사과라도 할까 싶어도 당사자가 죽었잖아. 너에게 사과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 네가 뭐라고? 날 도와줬어? 애초에 지금 그딴 게 중요해? 캐롤년 살리려면 너도 내 도움이 필요해."
이번엔 내가 숨을 거칠게 쉴 차례였다. 우리는 서로 화가 나 있었고, 무언가를 견디고 싶지 않아 했다. 우리는 우리가 캐롤 씨를 쫓아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가만히 서 있었다.
우린 서로를 쓰레기통으로 삼아 콤플렉스를 내던졌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에게 더 바라는 일은 그것 말고 없었다. 그저 서로를 이용할 뿐. 그 일에는 아무런 감정도 들어찰 수 없었다. 카이다는 아무 말 없이 내 다리를 붙잡고는 날 들어 업었고, 이때까지와는 본 적이 없는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빨랐는지 나와 카이다는 머지않아 괴인들의 후미를 밟을 수 있었다. 그들이 시시각각으로 가까워져 왔다. 몇십 초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곧 우리는 보았다.
"그녀다!"
나는 크게 소리쳤다. 아마 살면서 낸 소리 중 가장 클지도 몰랐다. 주변에 자리를 잡고 앉은 개조인간들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제히.
"하필 네가… 다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좋아. 다 괜찮아… 어차피 다들 나를 싫어해… 누구도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하필 너야…?"
"재단이 너를 원한다."
"나는 재단 따위 몰라!" 그녀가 손을 세게 내저었다. 까마귀 가면은 그 손가락에 닿지 않게끔 몸을 내던졌다. 팔로 착지한 뒤 팔로 몸을 일으킨 그녀는, 허리춤에 걸린 홀스터에서 총을 꺼냈다.
총.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도구. 그것을 자체 생산하거나 조달할 수 있는 규모가 된다면 그것은 세상을 상대로 싸움을 걸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납이든 고무든 무엇이든 탄환을 만들 수만 있다면.
그리고 재단은 이 시점에서 탄환 없는 총을 만들어냈다.
"재단을 위해 흉성을 토하라!" 매 가면 중 하나가 다시금 그녀의 쪽으로 시선을 돌린 뒤 외쳤다.
"굴종하라!" 까마귀 가면이 외쳤다. 검은 총알이 날아갔다.
아니. 검보라색이었다.
외상은 없다. 탄환에는 실체가 없다. 그것은 외적인, 물리적으로 보이는 이미지일 뿐이지 정말 총알은 아니었다. 과학자들이 말하기에, 그 총알은 영혼에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사람을 흔들어놓고 외상 없이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었다. 과학자 중 하나가 지나가듯이 말한 기억이 났다. '빛이 빛을 침식하고 서로 싸우게 됩니다'.
아닌가? 기억은 모호했다. 하지만 그저 흉한 발톱인 그녀에게 기억이 필요하던가? 그다지. 중요한 것은 그 총이 미래기관의 해킹 총에서 고안되었으며, 발전을 거듭한다면 모노쿠마들이 해킹 총앞에 터져나가듯, 사람도 무너뜨릴 수 있는 무기였다.
"그만 해… 아윽… 그만…!"
그녀는 가슴팍에 그것을 맞자, 총상 부위를 손으로 내리치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스웨터에는 구멍이 없었다. 살도 그슬리지 않았고 그녀는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형체 없는 고통. 그리고 한 발이 끝이 아니었다.
"캐롤 씨!" 나는 비명을 질렀다. 내 반쪽짜리 이성은 놀라 소리치고 있었다. 언총이다. 언총이! 살인 게임에서 모노로그가 나눠준 언총이 재단에도 있었어. 원래는 재단 거였다니! 그렇다면 모노로그는… 그리고 우리가 모인 이유는…?
"굴종하라. 굴종하라!" 까마귀 가면이 연거푸 외치며 검보라색 탄을 쏘아냈다. 나와 카이다를 경계하는 것은 매 가면들 뿐이었다. 그것을 보며 카이다는 난색을 표했다.
"총까지 있어?! 야. 너를 지키면서는 못 싸워. 여러 명이잖아! 알아서 살던가. 일단은 지켜보고서…"
"멈춰. 멈춰! 멈추라고. 카이다 쿠로하! 삶아 죽여도 시원치 않을 년아! 내 말이 안 들리나? 빌어먹을 년 같으니…!" 카이다 쿠로하의 몸이 움찔했다. 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나, 까마귀 가면을 쓴 카이다는 내 쪽을 보지 않았다. 매 가면을 쓴 괴인들은 각자의 날붙이를 꺼내며 나와 카이다를 향해 걸어왔다.
"굴종하라. 굴종하라. 굴종하라!" 뮤지컬에서 백그라운드를 채우듯이 매 가면들이 소리쳤다. 카이다와 비슷한 수준일지 모르는 개조인간 여러 명. 까마귀 가면을 쓴 카이다는 총까지 들고 있었다. 승산은 높지 않았으나 나는 그 사실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나의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생각지도 못할만치 빠른 재회였다. 백조의 목소리. 비명…
"날 붙여 주기만 해. 나머지는 너한테 떠맡기지 않을 테니까!"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에 쥐고 생각했다. 그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면 그 아이가 했던 것을 똑같이 할 수 있는 줄 알았느냐?! 어리석을뿐더러 잘못된 행동이다! 분명 그러했다. 나는 왜 이렇게 우유부단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그 같잖은 신념을 고수하다가는 캐롤 씨를 구하지 못하게 생겼다. 나는 머리카락을 손에 친친 감았다. 충분할까? 아직 충분히 금색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에서 금발이 돌아온 부분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내게는 아직 역량이 부족했고. 또 몇 시간 동안 뻗어버릴지도 몰랐다.
"…흉조시여?" "눈속임이다. 죽여라!" 매 가면들은 소리쳤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전부 살 자격이 없는 것들이었다. 한편 그녀의 몸은 천천히 무너져갔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개 같은 년. 카이다 쿠로하.
"제발…" 백조가 구슬프게 울었다. 그녀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까마귀 가면의 카이다는 캐롤 씨에게 다가갔다. 더 이상은 못 참아. 내 눈은 그대로 돌아가버렸다.
"그마아아아안!" 내가 악을 쓰며 소리침과 동시에 주변의 모든 이들이 어딘가를 찔린 듯 몸을 움찔거렸다. 그 직후. 나와 카이다는 어둠 속에 남겨졌다.
두 번째 깨달음은 끝났다.
내가 추측하기에 그것은 캐롤 씨가 납치당한 경위와 그녀가 당한 일을 깨닫는 게 아니었다. 하필 그녀의 앞에서 깨달음이 끝난 것을 보면, 두 번째 깨달음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과거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꿀 수 있는 것들은 너의 앞에 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 앞.
"……." 할 말을 잃은 카이다 쿠로하. 나는 그녀의 등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도 그녀는 잠시 몸을 까딱하지 않았다.
하나는 영안로를 나아간 끝에 되살아날 캐롤 씨고, 다른 하나는 모든 일을 망쳐놓은 내 옆의 카이다 쿠로하였다. 흉조. 재단의 흉조… 캐롤 씨가 재단에 붙잡힌 원인. 만악의 근원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충분히 성숙한 사람인가? 카이다 쿠로하에게 복수하지 않을 만큼?
"뭐 해. 왜 안 움직여? 뭐라도 해." 내가 그렇게 말하자 카이다는 엉거주춤한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너… 아까 들었냐? 캐롤년이 하는 말 들었어?"
"못 들었어. 네가 캐롤 씨한테 언총을 쏘는 소리에 가려져서."
"나는 들었거든? 이봐… 캐롤년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한테 깏듯이 존댓말을 썼잖아. 심지어 땅꼬마 새끼들한테도 그랬어. 너한테도 그랬냐? 서로 물고 빠는 사이면서도 존댓말을 썼어?"
"입 닥쳐." 그러나 카이다는 닥치지 않았다.
"그렇게 착한 척하는 년이… 왜 나한테는 반말인데? 어쩌다가 나한테 반말을 쓰게 됐냐고."
"네가 다 망쳐놨으니까 그렇지. 납치하고 총까지 쐈는데 예의를 지킬 필요가 없으니까."
"아니야. 적대적인 느낌이 아니었어. 처음이야… 나한테 저렇게 살갑게 대해주는 경우는 처음 봤단 말이다. 어딘가 잘못됐어. 야…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내가 왜 캐롤년이랑 친한 건데? 언제부터 저렇게 친한 건데?"
"이제는 알 수 없지. 네가 그렇게 친한 사람을 재단에 바쳐서 생물 병기로 만드려 들었으니까. 아직도 모르겠어…? 네가 저지른 일이 바로 그거야. 그리고 돌이킬 수 없게 됐어."
그녀를 매도하면서도 내 의식의 반쪽은 골몰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친밀한 사이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어디서 만났고, 어떻게 친해졌고… 카이다는 어떻게 그런 사람을 또 재단에 내다 바친 걸까?
블레인은 머지않아 숨을 거두었다. 인공지능이 자신의 밖으로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버텼다는 듯이. 블레인은 외마디 신음을 토하며 작동을 멈추었다. 관성으로 인해, 그리고 블레인이 자기부상열차였던 덕분에 멈추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풍압으로 인해 황무지로 내던져지지 않을 정도까지 속도가 줄자, 블레인에 남은 세 명은 한숨을 내쉬며 팔에 쥔 힘을 풀었다.
"힘들었어어…"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자신의 팔을 주물럭거렸다.
"블레인. 아몬드가 죽으면?"
하기와라 우시오는 미심쩍은 눈빛을 하머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블레인은 죽었다. 시련은 끝났고, 주변은 눈이 깜짝할 사이에 변했다.
산. 산맥. 상당한 높이였다. 우리는 그나마 평평하고 주변에도 초목이 우거져 쉬기 편한 곳에 있었고, 앞에는 어두운 동굴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그것이 세 번째 깨달음 혹은 시련의 배경이었다.
곧 패트리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련을 마치셨군요. 축하드려요! 그렇지만, 보상은 없어요! 깨달음을 끝내신 분들에게만 상을 드리거든요. 그럼 30분의 휴식 후에…"
"계속 나아가겠다. 좋다. 그럼 사라져라."
"안 돼요. 제 말은 계속 들으셔야죠!" 패트리샤가 반론하자 나도 패트리샤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너도 내 말을 들어라. 너는 블레인을 죽였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건 중요하지 않은 일이에요. 다 끝났으니까. 잊으셨어요? 다 환상이라고요. 아무튼 마지막 깨달음에는 시련이 없어요. 왜냐하면 다음이 종착점이거든요. 모두 깨달음 속에서 동등한 환경에 놓일 거예요. 말씀드리자면. 여러분 거의 다 따라잡았어요!"
"30분의 휴식? 충분하겠네." 하기와라 우시오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생각보다 쉬웠는데, 마지막 발악은 쫄리더라. 진짜 23T…제츠보가 죽는 줄만 알았어. 기혐은 장난이고 솔직히. 엄청 딱해. 여기서 죽으면 그게 개죽음이지 다른 게 있어? 기계죽음이야. 제츠보… 망할. 이름이 정말이야. 아무리 로봇이라고 해도 어떻게 그런 걸 이름이라고 붙이냐?"
"일단 제츠보가 탈출해서 무사하다는 게 다행이야. 그런데…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뭔가를 말하려 하지 않았어? 대체 뭐였을까? 제한에 걸릴 만큼 중요할 텐데… 우리가 뭘 간과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츠보가 할 수 있는 추측이 무엇이었을지는 제츠보만이 알 터였다. 십중팔구 이름 없는 남자와 관련된 일이라고 추측했다.
일단 그를 붙잡는다면 간과해 온 것을 알게 되리라. 나는 하기와라 우시오에게 해야 할 말을 하였다.
"네가 한 일에 경의를 표한다. 하기와라 우시오. 네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블레인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큰 일을 하였다."
나는 고개를 숙였고, 하기와라 우시오는 나의 말에 손사래를 쳤다.
"그럴 필요 없어. 히무로. 내가 블레인을 깨부술 이유도 차고 넘쳤거든. 그중에는 단지 내 안위를 위한 것도 있어. 누가 먼저 구했냐를 놓고 따지면, 네가 먼저잖아. 이 새끼야."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고맙다고 했던가? 네가 내 머리끄덩이 잡고 영안로로 끌고 들어온 거."
"해야 할 일이기에 했을 뿐이다. 너는 무너지고 있었고, 명목상으로나마 너는 나와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친우였다."
"그래. 무너졌지. 내가… 그 사람들을 하도 안 봐서 잊고 있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처를 많이 받아왔던 것 같아. 그만큼 무서워하기도 했고. 탑에 혼자 남았는데 그 작자들이 날 잡으러 온다 생각하니 정신 놓겠더라. 그런데 네가 죽빵을 때려서 날 데려왔어. 네가 날 구한 거야. 이 존나 좋은 새끼." 하기와라 우시오는 부정적인 관념 없이 웃었다.
"카친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소리치며 하기와라 우시오의 손을 잡고서 방방 뛰어올랐다. "너도 카친이야. 와자뵤!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대도. 우리끼리 얘기해야 한다고 했잖아. 나 천재인가 봐!" 하기와라 우시오는 껄껄 웃으며 그녀와 함께 여기저기를 폴짝였다.
"네 말이 옳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는 총명하며, 우리는 카텟이다. 같은 카를 공유하는 자들. 여럿이서 하나가 된 이들이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방방 뛰기를 멈추기까지 그녀와 장단을 맞추었다. 그녀와 잡은 손을 놓고서, 그는 나와 그녀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이제 뭐함? 히무로이드. 내가 카텟이고 카펫이고 이거에 대해 몰라서 그런데. 카텟이 되면 좋은 게 뭐야?"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된다."
"으엥? 터치처럼?"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물었다.
"터치를 당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군."
"그럼 텔레파시처럼?" 이번에는 하기와라 우시오가 물었다.
"텔레파시도 당한 적이 없어 모른다. 허나 메리의 말에 따르면 말 없이 다른 이의 생각이 말처럼 들릴 수 있다고 하더군. 메리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다. 허나 그녀의 말처럼 마법적인 작용은 아니고, 내가 추측하기론 카텟의 구성원 사이의 이해도가 올라가 서로의 눈짓이나 손짓. 구언이 아닌 신호와 미묘한 정보들을 해석해 답을 도출할 수 있는 경지라 생각한다. 메리는 그 현상을 '케프'라 불렀는데, 이는 물이라는 뜻이다."
"시라유키 히메리라는 사람은 카니 케프니 이런 걸 어떻게 알았대? 유능한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 거 믿는 거 보면 좀 사이언톨로지 믿는 톰 크루즈 같아."
"그녀는 스티븐 킹이라 불리는 고대의 이야기꾼에 심취해 있었다. 카는 종종 여타 문명에서도 등장하는 개념이지만, 그녀가 인용했던 것은 스티븐 킹이 만들어낸 카였다.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다."
"물 흐르듯 흘러서 그러는 건가? 재밌다. 케프 하니까 케플렉스 생각도 나. 기억나? 나나시가 해변에 보냈던 항생제."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엉뚱하게도 말했다. 그러나 싫지는 않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라는 사람은 백치가 아니었다. 그저 사고의 폭이 굉장히 넓은 반면 지식을 차단당했을 뿐… 모든 게 억압적이었던 마유즈미 가문 때문이었다. 외세계와의 접속을 허락지 않았던, 딸아이를 더 빨리 도구로 삼기 위해 아직 없는 자식을 있다고 등록해 놓은 자들. 그녀가 서류상 25세임은 얼핏 보아 불일치로 인한 유쾌함을 자아낼지 모르나 조금의 사유 뒤에는 모두가 알게 되리라. 그것이 슬픈 일임을.
그녀는 깨끗하고 순수한 존재로 남아야 했다. 외국의 유화. 고흐. 미켈란젤로. 고갱에 대해 그녀는 모르리라. 오직 일본의 서예에만 통달해야 했기에 수많도록 이단으로 규정된 것들에. 그녀는 닿지 못해야 했다.
"모든 신들보다 더 낫고 모든 악마보다 더 못한 것은 무엇인가? 죽은 자들은 늘 먹지만 산 자들이 먹으면 더디게 죽는다."
"나는 눈이 먼 채 칼을 휘두른다. 나를 피할 수 있는 희생자는 없다. 내가 끊어야만 끈이 끊어진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채소의 신이다. 그렇기에 어린아이들은 나를 보고 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신과 악마. 고대의 신. 복수의 개념…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와 관련된 일이다." 나는 운을 뗐다.
"나? 뭔데?"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스스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블레인의 대결에서 너 본인이 아닌 누군가가 네 가면을 쓰고 말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네가 제출했던 세 가지 걸출한 문제들을 기억하나?"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수수께끼를 하나 내려다가 블레인이 바로 맞췄고, 하나 우기려다가 블레인이 안 넘어갔잖아. 세 가지라니? 걸출하지도 않았어."
"워워. 마유즈미. 나 겁 주지 마. 너 분명 수수께끼를 냈어. 블레인이 그래서 네 수수께끼가 좋다고 아주 칭찬을 한 거야. 웃기까지 했다니까?" 하기와라 우시오가 말했다. 나 또한 그 순간을 기억했다.
블레인은 이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세 번째 치칭거림.
"나는 전혀 기억 안 나. 나 가지고 놀리는 거야. 뭐야 지금?"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여전히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있었다.
"아니 지랄 말고. 진짜 몰라? 네 입으로 말했잖아! 귀신 들렸냐?"
"마유즈미 나데시코 본인은 그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경우는 결코 흔하지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해리성 인격일지도 모른다."
"무슨 인격?"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물었다.
"해리성 인격이다. 너는 스스로를 마유즈미 나데시코라 생각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성격과 사상과 스스로를 생각하는 관점도 다른 제2의 인격이 너에게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입을 샐쭉 내밀었다.
"너무 이해 안 되는 농담인데… 하기와라. 설명 좀 해주라! 농담은 네 전문이잖아."
"미안한데, 농담이 아닐지도 몰라. 빌리 밀리건이라는 사람은 스무 개가 넘는 인격을 가지고 있었어. 스무 명이 넘게 한 몸을 쓰고 있었다고. 그런 미친 경우도 있지만… 야. 히무로이드. 진심이야? 마유즈미가 무슨 애니 캐릭터야? 그런 경우가 어디에 있어!"
"무척 희귀한 사례이긴 하지. 아마 전체 인구에서 소수점을 찍은 퍼센티지만이 이런 사례에 속할 것이고, 더 적을지도 모른다. 동전 뒤집듯 인격이 바뀌는 사람은 허구에나 살지. 하지만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스모데우스에 대해 문제를 낸 기억이 있나?"
"아스모데우스? 그 사람 악마잖아. 아니 사람이 아니구나. 애초에 없기도 하고… 아무튼 색욕의 악마였을 거야. 아마도."
"…아스모데우스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지?" 나는 물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땀을 흘렸다. 무언가가 잘못됨을 느꼈는데, 왜인지는 모르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알고 있냐니. 그냥 알아."
"어디선가는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너의 집. 전통을 중요시하고 격식을 차려 차를 마시는 데에도 지나치게 불필요한 절차를 거치는 가정에서. 어떻게 기독교의 악마에 대해 알 수 있었지? 기독교의 박해는 이 나라에서 오래되었다. 당연히 관련 서적이 집에 있을 리 없고 있을지라도 네가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아스모데우스를 알지. 어떻게?"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어어… 어라…? 나. 어떻게 아는 거지…? 아스모데우스. 배웠는데…?"
"누구에게서 배웠지?"
"모… 모르겠어… 이상하다… 전혀 기억 안 나. 너무 이상해… 이럴 리가…"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손톱을 세워 머리를 긁었다. 호흡은 가빠졌다.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하카마 소매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야."
"…응. 히무로." 그녀가 대답했다.
"나 이거 알아! 인격들 중에서는 서로 지식량이 다른 경우도 있대. 누구는 스페인어가 되는데 누구는 안 되는 식이야. 심지어는 몸 상태도 다른 경우도 있대! A씨는 당뇨인데 B씨는 쌩쌩한 것처럼!" 하기와라 우시오가 옆에서 떠벌거렸다.
"그럼… 지. 진짜 나 아닌 사람이 내 안에 있어? 무서운데… 대화도 못 나누겠고. 어떻게 해야 하지? 나 어떡해. 정말 위험한 거 아니야? 으으으으… 어떡하지!"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는 편이었다. 인격과 인격이 적대적인 사이로 변해버려 서로 육체의 주도권을 놓고 싸워 정신의 균형이 깨져버리거나, 자해 혹은 자살을 시도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럼에도 분명.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은 권장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오싹해… 그 사람 대체 누구래? 언제 내 머릿속에 들어왔어! 진짜 언제?"
"진정해. 마유즈미… 이건 가능성의 일부일 뿐이야. 수수께끼를 해명할 답 중 하나지만 그 전부는 아니야. 개인적으로는 그것 말고도 네 꿈에 곧잘 등장하는, 그리고 네가 두려워하는 그 귀신에도 의구심이 들어. 누가 너에게 그런 종류의 이미지를 보여 줬을까? 너는 공포에서 차단된 채 자라야 마땅했는데. 어디서 그것을 마주한 걸까? 또. 네가 보았다던 패트와 매트, 토마스, 가제트 형사였던가… 비디오 테이프들. 그것들은 어디서 볼 수 있었을까. 너희 가문이 아주 잠깐의 휴식이라도 네게 비디오를 허용하였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어. 마유즈미. 나는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게 아직 많아… 너는 베일에 쌓여 있고 너의 배경과 모순되는 사실이 있어."
"히무로이드. 말투 풀어졌어." 하기와라 우시오가 지적했다.
"불만이 있나. 하기와라 우시오? 누군가를 안정시키는 데에는 그게 낫다만."
"나도 좀 안정시켜 주시죠. 매몰차게 대하지 말고. 씨입새야."
그의 투덜거림을 뒤로하고 나는 44구경의 실린더를 젖히고 안에 남은 장탄 다섯 발 중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내 손바닥 위에 놓고 그녀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잠시 앉아서 이야기하자. 마유즈미. 너는 누워."
"누워? 땅바닥에?" 마유즈미는 느닷없게 느끼는 듯했다.
"분명한 이유가 있어. 그전에 묻고 싶은데. 너는 지금 네가 겪고 있는 이상현상을 인식하며, 그것을 파헤치고 싶어?"
마유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무 단순히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면 내가 알고 싶어… 내가 모르는 말을 막 하는 누군가가 너한테 주먹질을 하면,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너랑 틀어지잖아. 어떻게든 알아야 해!"
물론 파헤치는 것이 오히려 화를 부를지도 몰랐다. 나는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에 대해 분석하는 사람이지 누군가의 트라우마나 잠재의식을 헤집을 권한이나 학위는 가지지 않았다. 더 악화될 가능성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못 본 체를 할 수는 없었다. 카텟의 일이었다. 카에 대한 일. 그녀에 대한 일이었으니. 누군가가 마유즈미의 일부를 좀먹게 둘 생각은 없었다.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내가 알기로는 오직 전체 인구의 15%에게만 온전한 효과를 내는 방법이지만, 분명히 있기는 해. 일단 몸을 편안하게 해."
"야. 무릎베개라도 해 주고 눕혀야지 너는 낭만도 없냐." 하기와라 우시오의 지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릎을 어떻게 베개로 쓰지? 딱딱하고 면적도 좁아서 쓸 게 못 되는데."
"어? 그러게. 왜 허벅지베개가 아니라 무릎베개라 하지…?" 하기와라 우시오는 눈을 크게 떴고, 그대로 그는 자신만의 선문답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뭐지.
"아… 앉아서 할게. 누워있는 것보다 앉아있던 시간이 더 길어서. 이게 더 편해." 마유즈미는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앉았다. 다리에 혈류가 통하지 않을 자세가 편하게 느껴지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그녀를 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면 돼?" 그녀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총알을 살짝 위로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하였다.
"워치 미 노름판의 도박꾼이 컵과 곤봉 카드를 내려놓을 때 하는 말이 있지. Watch me."
나는 마유즈미가 총탄을 미심쩍지만 분명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 그것을 엄지로 옮겼다. 그 뒤로 검지. 중지. 약지. 소지. 사이와 사이. 손가락의 미묘한 움직임을 통해 물 흐르듯 그것을 움직였다. 절차의 절차. 반복 숙달된다면 쉬운 동작이었고 내가 기억하기로는, 꽤 유용히 쓸 수 있기도 했다.
"뭐 해?" 하기와라 우시오가 물었다. 그 탓에 동작이 몇 배는 길어지게 생겼다. 두 번 그러는 일이 없게끔 나는 그에게 쏘아붙였다.
"조용히 있어라. 하기와라 우시오… 그리고 마유즈미? 너는 지금 편안함을 느끼고 있어. 아무것도 너를 해치지 않아. 너는 지금 안전해."
마유즈미는 여전히 미심쩍어했다. 나는 계속하여 손가락을 놀렸다. 총알은 엄지쯤에서 사라졌다 소지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금 부드럽게 계단을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지만 내려가기도 했다. 핵심은, 그것을 보는 자가 자신도 모르게 총알을 눈으로 좇게 되고 집중한다는 것이다.
"너는 서서히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껴. 몸이 떠오르고… 서서히 졸음이 몰려오지. 꾸벅꾸벅 조는 종류의 기분 좋은 잠이. 네게 밀려오고 있어."
그쯤 운 좋게 산들바람이 불었다. 마유즈미는 한 번 옅게 웃은 뒤 몸을 휘청이기 시작했다. 이렇기에 눕히는 편이 나았는데. 그녀를 붙들기 위해 내 다른 팔이 움직였으나, 그녀의 상체는 휘청거렸으나 무너지지 않은 채 흔들거리고 있었다. 오뚝이를 보는 듯했다.
"몸이 따뜻해지고. 눈이 서서히 감기며…"
다른 팔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와중에도 내 손은 정해진 일을 정해진 절차대로 수행했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도 잘 먹혔다. 본래 이 동작은 상대를 최면 상태에 빠트린 뒤 잠재의식에서 무엇을 캐낼 때에 썼다.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잠재의식은 기억하는 등의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방식으로 묘기를 사용했다.
"너는 잠에 빠져들어."
멍한 무의식에 빠지는 대신 마유즈미의 두 눈이 감겼다. 긴 속눈썹이 내려앉았고, 그녀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마유즈미의 귀에 속삭였다.
"나와라. 마유즈미의 몸 안에 있는 것. 모습을 드러내라. 네가 그 안에 있는 것을 안다."
"야야야야. 히무로이드. 너 지금 미친놈처럼 보이는 거 알지?" 하기와라 우시오는 나와 졸고 있는 마유즈미를 번갈아 보았다.
"과격한 일을 시도할 뿐이다. 못 본 척 지나갈 수는 없다. 신이든 악마이든 간에 너는 뿌리내릴 자리를 잘못 구했다. 내가 모를 줄 알았나? 곰 앞에서 죽은 척을 했다간 내장을 파 먹히게 되지. 이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지금 당장… 마유즈미 본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너를 몰아붙일 방법은 수도 없이 많으니."
그 말은 과장이었으나 죽은 척하는 사람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마유즈미는 눈을 떴다. 그러나 그 눈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뜨고 있는 눈동자의 크기. 얼굴을 긴장시키는 정도. 발성. 시선처리. 모든 게 그녀와 달랐다. 다른 사람이었다.
"아이. 참… 왜 이럴까?" 마유즈미가 아닌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니. 내가 잘못이라도 했어? 내장 운운까지 하다니. 좀 무례하다는 생각 안 들어? 나는 신도 악마도 아니지만 사람이라고. 상처받는 사람."
"너는 누구냐." 나는 낮게 뇌까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야." 그녀는 단조롭게 말했다.
"거짓말 마라."
"거짓말 아니잖아? 이 몸으로 말하고 있으니. 너. 눈썰미 하나는 좋아. 그거 하나는 칭찬해 주마. 얘가 네 어디가 잘났다고 너와 함께 해주는지는 몰라도 말이야… 뭐. 내가 티를 좀 내긴 했지. 면전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다니 너희를 바보취급한 꼴이야."
웃음도 친근함도 천진함도 없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냉소. 깔봄. 여유였다. 전혀 다른 사람… 마유즈미의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씨발. 이왜진? 진짜 이중인격이야? 우와. 처음 봐. 이거 완전 후루미나미 한데!" 하기와라 우시오가 감탄했다.
"그 여자랑 동급으로 취급하지 마렴."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긍지라는 게 있는 사람이라. 그리고 반말 좀 그만해. 나. 제대로 나이를 먹었으면 너희보다 연상이었을 거야. 예의 좀 갖추지 그래? 가정교육 어디서 받았어?"
"망령에게 갖출 예의는 없다. 마음껏 저주해라. 다시 묻겠다. 너는 누구냐. 대답해라."
"대답해 줄 건데. 계속 재촉하긴…" 그녀는 목을 뚜둑 풀고서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천천히 상체를 굽혀 바닥까지 몸을 엎드렸다. 마지막에는 작게 웃었던 것 같기도 했다. 평소의 마유즈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낮고 어두운 음기의 웃음이었다.
"이 아이에게 아스모데우스에 대해 알려준 사람이지. 앞으로 잘 부탁해?" 그녀는 마유즈미를 흉내 내듯이 한쪽 눈을 감는 교태를 부렸지만, 그것은 전혀 마유즈미를 닮지 않았다. 그저 불쾌한 위화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