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3

더 단크 타워 챕터 3 - 15

도타싫어! 2023. 1. 31. 20:25

"내가 무엇을 잃게 되죠?"

 

"대부분의 미각, 쾌락, 애정, 수면의 질, 모성, 정상적인 감정의 구사, 수영 실력, 기억, 방추상회의 기능, 지능."

 

"내가 무엇을 얻게 되죠?"

 

"살아남을 권리."

 

"그리고?"

 

"힘."

 

"그리고?"

 

"없다."

 

"저에게 시술을 거부할 권리는 있나요?"

 

"있었어도 너는 거부하지 않았을 걸." 그리고 그의 말이 옳았다.

 

 

 

 

 

일기

 

이제는 혼자가 아니다.

 

내 곁에 항상 그녀가 있기 때문이다.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감히.

 

감히 내게 이런 짓을 해? 새빨개진 눈을 뜨고 토키와 아유키가 한 첫 생각은 그것이었다. 이바라 쿠리스의 행동은 전혀 그의 통제 범위 안에 있지 않았다. 왜 그에게서 소화기를 빼앗았을까? 그 말고 자신이 불을 꺼야 하는 이유라도 있었던 걸까? 그녀는 그에게 불을 끌 마음이 없었던 거라고 생각한 건가? 멍청한 소리. 멍청한 생각이었다. 만약 불이 그의 통제를 벗어나 다른 방과 탑을 넘본다면 토키와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소화기를 썼을 것인데!

 

유독가스는 좋지 않았다. 깔끔하게 전소될 전용실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연 것은 찌개 요리 냄비 내부의 열을 연 것과 같았다. 내열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덕분에 긁어 부스럼이 되었다. 토키와는 칸나즈키가 이바라의 말을 듣고 어딘가로 달려가려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잡아둬야 했다. 토키와는 넓은 보폭으로 칸나즈키를 따라잡고 붙들었다.

 

"놔… 신체… 신체를…!" 칸나즈키가 몸을 떨었다. 그녀는 울먹이고 있었다.

 

"이미 끝났어. 가만히 있기나 해." 토키와는 매캐한 냄새와 더운 공기를 느꼈다. 모든 것이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좋지 않은 것은 화마에 맞서는 이바라였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토키와는 결코 이바라 쿠리스를 해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탑에 있는 모든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끔 불을 지른 것이었다. 그러나 객기와 만용에서 비롯된 이바라의 돌발행동은 그녀를 포함한 다른 이들을 오히려 위험에 빠트리고 있었다. 고작 소화기 하나로 가솔린이 죽을 것 같으면 왜 소방관이 그리도 많이 죽을까? 대체 왜 이미 끝난 일을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 거지?

 

"다 끝났어. 이바라. 끝났다고! 안에 있는 건 전부 탔어. 신체는 녹아버렸어. 수호령은 영영 사라진 거야! 그러니 이제 집어치워!"

 

"으윽…!" 이바라는 몸이 그슬리는 느낌에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는 결코 불나방이 아니었고,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잘 알았다. 소화기의 잔량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방에서 나갈 만큼의 이성은 남아 있었다. 이바라는 문을 닫지 못한 채로 칸나즈키의 전용실을 빠져나왔다. 이는 꼭 악문 채로 그녀는 토키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이바라는 소화기를 토키와의 얼굴에 흩뿌렸다. 얼굴을 녹일 수 있었다면 녹였을 기세였다. 토키와는 침착하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산화탄소가 자신의 몸을 때리는 것을 잠자코 기다렸다. 어차피 머리에 소화기 통을 맞지 않으면 한 번에 기절하지 않는다. 이바라는 남자 고등학생을 제압하기에 적합한 인재가 아니었다. 그것을 알았기에 기류가 사라짐을 느낀 토키와는 마이에 자신의 눈을 문질러 흰 분사물을 걷어냈다.

 

그가 숨을 한 번 내쉬자 콧구멍에 차있던 흰 분진이 공기를 타고 훅 빠져나왔다.

 

"하… 집어치우라고. 이바라. 진정 좀 해 봐. 대체 너는 뭐가 문제야?"

 

"뭐가 문제냐고?" 이바라는 바닥에 빈 소화기를 내던졌다. 깡 하는 소리가 났고, 이바라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알기나 해? 지금 타고 있는 건 수호령 씨의 신체만이 아니야. 칸나즈키의 추억이 담긴 장소라고… 내 전용실엔 인공 피부. 가족사진. 장의사 모자랑 크레이프까지 있어. 그게 모여서 나를 지탱하는 거야. 무슨… 미친 탑에 잡혀온 와중에도 정신을 잡게끔 하는 것들. 내 닻이야… 지금 네가 태워버린 게 칸나즈키의 그거란 말이야."

 

"아니. 나는 신체를 태웠어. 나머지는 부수적이고. 너는 그저 감성적일 뿐이야. 이바라. 칸나즈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기억 안 나? 우리는 거의 이겼었지. 후루미나미는 묶였고 카이다는 위기에 처했어. 칸나즈키가 고무장갑을 끼고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까진 모든 게 좋았어…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잖아. 나나시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카이다는 깨어나 모리와 나이토에게 중상을 입혔어. 두 사람이 감염 탓에 사경을 헤매는 동안 풀려난 후루미나미는 인플레이션을 활성화시켰지. 우리는 더더욱 불리해졌고 결국 미도리카와의 부활은 이루어지지 못했어. 모리와 나이토, 캐롤 씨의 죽음까지도 칸나즈키가 일조한 셈인데. 이게 가장 나은 미래라고? 바뀌지 않는 미래?"

 

토키와는 칸나즈키의 손아귀를 통제할 수 있었다. 그는 눈물을 그렁그렁 띄우는 칸나즈키를 내려다보며 이런 사람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품어야 한다는 자신의 소명에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할 것인가?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버려 마땅해 보이는 이들일지라도 최대한 수용하고자 애쓰는 것. 힘든 일이겠지만 그가 아니고서야 누구도 떠안을 수 없었다. 그럼 살인자 야가미 토가가 다른 이들을 이끌까?수다나 떨 줄 아는 이바라? 보통 사람은 아닌 히무로? 하기와라? 웃기는 소리들이었다. 리더의 재목은 바로 토키와였다. 사실이 그러했다.

 

"네 입장에서야 그렇게 생각했겠지. 바뀌지 않는 미래라고. 어차피 이렇게 됐을 거라고. 그렇지만 수호령은 탑의 것이 아니라 신 씨의 것이야. 칸나즈키가 살아남기에 유리한 길만을 편집해 보여주면서, 칸나즈키가 내놓는 변덕이나 아무래도 좋은 관용을 들어주면 그만이야. 칸나즈키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미래의 트랙을 따라가지."

 

"무슨… 소리야?" 칸나즈키의 눈이 커졌다.

 

"너희가 너무 부러워. 후루미나미와 너. 다중인격자는 늘 쾌적해. 양심의 가책도 없고 자각도 없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는 너희들의 뻔뻔함이 부러워. 나는 냉혈한이 아니야. 너희처럼 불완전한 사람일 뿐이야. 너희들보다 더더욱 불완전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이 순간 내가 저지른 일에서 도망치지 않을 거야. 그게 비겁한 너희들보다 내가 단 하나 고결한 점이겠지."

 

칸나즈키는 토키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곧 그녀는 토키와의 말을 복기하게 될 것이다. 숙소에 앉아 벌벌 떨며. 홀로 남았다는 것을 되새기게 될 것이다. 그녀는 혼자인 적이 없다. 타지에 내던져졌음에도 칸나즈키 시노부에게는 할머니 언니가 있었다. 할머니 언니는 언제나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때문에 그녀는 외로운 적이 없었다. 엄마는 언제나 할머니 언니와 함께 그녀와 함께했다.

 

그러나 황홀경이 무너지고 흐려져왔던 의식이. 만성적인 영적 도취에서 벗어나면 그녀는 곧 알게 되리라. 혼자 남겨진다는 것이 어떤지. 탑에 있는 이들이 어떤 심정으로 살아왔는지. 카나리의 기분을 느끼게 되리라. 하지만 그것은 이후의 일일 뿐. 칸나즈키는 자신의 가족을 되찾고자 애쓸 뿐이었다.

 

"언니를… 언니를 돌려 줘. 토키와! 부탁이야… 언니는 늘 나랑 함께였어. 떨어지는 건 견딜 수 없어…!"

 

그럼 그렇겠지. 수호령은 네 어머님한테서 내려온 거니까. 신 씨의 무당 가업. 모든 직계 신 씨는 단명하고 그 말년은 모두 비참하다. 신무월이 어떻게 죽는지를 본 칸나즈키 씨는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외가와의 모든 연을 끊었다.

 

그 무렵 칸나즈키 씨의 딸은 신병이라는 것을 앓았다. 정체불명의 고열과 정신착란, 메스꺼움. 잔병치레. 병이 나으려면 신무영이 가업을 이어야 한다고 외친들이 말했고, 칸나즈키 씨에게 있어 그들은 비정상적인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딸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왔다. 하지만 그는 몰랐지. 마지막 추억을 담은 기념품에 이미. 신이 깃들어 있었다는 것을.

 

그 뒤로 너는 줄곧 엄마를 지켜 주었다던, 엄마와 함께했다던 할머니 언니와 함께였지. 책에 나온 대로야.

 

"하지만 그 시간은 이제 끝났어. 받아들여. 이바라 너도 마찬가지야. 저 괴력과 신통력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힘이었어. 가만히 놔두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아?"

 

"그렇지만 칸나즈키는 우리를 돕기 시작했잖아!" 이바라는 소리쳤다.

 

"그리고 또 배신했겠지. 통제해야만 했어! 수호령이 있어서 좋은 일이 어디에 있는데?"

 

"나를 달래줬어." 이바라는 말했다. "나를 안아줬어. 도무지 견딜 수 없었던 가슴의 응어리를. 수호령 씨가 풀어줬어…"

 

"배신자는 늘 그런 감성적인 면을 노리는 거야. 이바라. 우리는 살인 게임 안에 있어!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힘은 전부 치워야 해. 아무리 칸나즈키에게 있어 수호령이 큰 의미일지라도, 모두가 살기 위해서는 기꺼이 포기해야만 해. 칸나즈키 본인이 포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토키와. 정말 그렇게 생각해? 통제하기 어렵거나 조금이라도 위험하면, 애초부터 있어서는 안 된다고?" 이바라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당연하지."

 

"그럼 터치마저?" 이바라는 어조에 강세를 두었다. 복싱 선수들이 주먹을 나눌 때. 잽이 아니라 상대를 일격에 KO 시키기 위해 휘두르는 스트레이트. 이바라는 토키와에게 그 말이 닿기도 전에 그녀가 제대로 주먹을 넣었노라 느낄 수 있었다.

 

순간 토키와는 거대한 자기모순 앞에 얼어붙었다. 터치는 위험하다. 모리 레이코는 지속적으로 그 메시지를 설파했다. 정신에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힘은 그 자체로 위협이라고 그녀는 주장했다. 그렇다면, 캐롤 브라이트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는 그녀에게 모리가 될 것인가? 그를 도와준 사람에게?

 

"수호령 따위와 터치를 같은 선상에 놓지 마." 토키와는 생각을 거치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왜 그러면 안 되는데?" 이바라는 물었다. 그 얼굴에는 이상한 상식을 설파하는 사람을 설득할 때의 난처함과 어떻게 해서든 설득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함께 있었다.

 

"터치는 저딴 사술과 차원이 달라! 이바라.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터치는… 터치는 초능력이 아니야. 너희들이 그걸 모르는 이유는 터치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지! 모리도 터치를 받았다면 그딴 망발을 지껄이지 못했을 거야."

 

"너 진짜… 잠 좀 자!" 이바라가 가장 먼저 떠올린 말은 그것이었다. "사람이 잠을 안 자니까 피폐해지는 거야… 잠 좀 자라고!"

 

"헛소리가 아니야. 터치는 빙의나 예언 같은 사이비가 아니야. 저딴 건 신이 아니라고. 잡신. 가짜 신! 유령이야! 유령! 저딴 건 그냥 엑소시스트에나 나오는 그런 것들이야! 진짜 신은…"

 

터치다. 터치야말로 신이다. 토키와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단지 그렇게 생각했다. 좀 자야 하나? 모르겠다. 뭔가 잘못됐나? 수호령은 안 되고 터치는 되는 건 모순인가?

 

아니. 이건 모순이 아니다. 합리성이다. 이성이다. 상식이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범주에 놓인 사람이다. 그 말은 내가 정상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나는 언제나 옳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돼. 우리에게 해를 끼친 사람의 힘은 통제해야 하고,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의 힘은 굳이 금지할 필요가 없어."

 

"그건 이중잣대잖아." 토키와는 이바라의 말을 듣고 답답함을 느꼈다. 이렇게 간단한 말도 이해를 못 하는 걸까? 또 무슨 곡해야. 이중잣대? 뭐가 이중잣대란 말이지?

 

"우리의 기준은 또 뭐야. 후루미나미, 카나리, 카이다를 제외한 우리 말하는 거야? 토키와. 그런 식으로 편을 갈랐다간 언젠가 큰코다쳐!"

 

"그럴 일 없어."

 

"있거든?! 경주마 제도를 생각해 봐. 누군가가 싸우면 한쪽은 목숨을 위협받는 구조였어. 모노로그가 그렇게 짜놓은 거야! 우리가 거의 다 이겼다니. 카이다가 죽고 카나리가 함께 죽게 될 일을 그렇게 표현해? 그런 식으로 편을 가른 순간 우린 카나리를 저버렸던 거야!"

 

"말의 요지가 뭔데?" 토키와는 번거로움을 느꼈다.

 

"카나리는 자신이 살기 위해 카이다를 살려야 했어. 그러니 우리와 싸웠지. 카나리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죽을 순 없는 걸! 물론 우리는 고되게 당했고, 상처도 입었고, 죽었지만… 그건 모노로그가 그렇게 만든 거야. 물론 후루미나미는 미쳤고, 카나리는 이기적이야. 칸나즈키는 오락가락해서 믿기 어려워!" 이바라는 소금물 스프레이를 한 번 내려다본 뒤,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게임에서 끝까지 적대해야 할 건 모노로그뿐이야. 그걸 기억해야만 해! 카나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지만 언젠가 우리랑 화해할 수도 있고. 우릴 도와줄 수도 있어. 반대로 우리 중 누가 배신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해지는 상황이 오면. 그럼 너는 어떻게 할 건데? '우리'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자마자 팔다리를 자르려 들었다간. 모노로그가 웃으면서 우릴 분열시킬 거야!"

 

"닥치지 않은 상황 때문에 벌벌 떨며 살지 마. 이바라. 앞에 닥친 것만을 봐. 몇 번씩이나 말하는 것 같지만 수호령은 해로운 변수였어. 없애는 편이 나았다고."

 

큰일 났다. 이바라는 그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토키와마저도 망가져 버렸다. 완전히 어긋났다. 분명 어제 오전까지는 모든 게 좋았다. 아니. 죄다 우수수 무너지고 하기와라마저 영안로로 떠났지만 그 시점까지는 괜찮았다. 영안로에 간 친구들이 돌아오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사이에 토키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이바라는 알 수가 없었다. 토키와는 약에 취한 것 같았다.

 

"너… 지금 이상해. 토키와. 너무 닳아빠진 말인데… 이건 너답지 않아. 나 다운 게 뭐냐고 되묻지 마. 너도 알잖아. 이게 이상하다는 것 정돈 알잖아!"

 

"안 그럴게. 대신 이렇게 묻지. 지금 내가 누구답게 보여?"

 

"너. 지금… 모리보다 나빠. 마치 후루미나미 같아. 불을 지르는 거나… 막말을 하는 거나… 전부 너답지가 않아."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게 있어. 모두가 아는데 가끔 나는 까먹는 거야. 토키와 아유키 같다는 건 나쁜 일이야. 능력도 깜냥도 없이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에 오르는 건 나빠. 후루미나미 나몬 같다는 건 좋은 일이야. 그 정도의 악의를 담을 수 있는 힘은 드무니까. 그런 힘이 내게 올 수만 있다면 나는 힘 자체에 방향이 포함되어 있다는 그 장광설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걸 받아들이고야 말겠어."

 

칸나즈키는 자신의 손을 토키와의 손아귀 속에서 빼려고 하였지만 토키와의 손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칸나즈키의 작은 손이 안에서부터 놓아달라 꿈틀거렸음에도 토키와는 힘을 풀지 않았다. 단지 한 생각만을 하였다. "가만히 있어."

 

 

 

 

 

 

 

"야가미?"

 

"아. 네."

 

나는 후루미나미 씨를 다시 보았다. 그녀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늘 정장을 선호하지 않았던 그녀였으나 오늘만큼은 내게 맞추어 주었다. 그랬던 것 같았다.

 

공항. 나와 후루미나미 씨는 곧 비행기를 탄다. 바다뱀이 있는 곳으로 향할 것이다. 북유럽이었던가. 떠오르지 않았다. 잊어버릴 수가 없는 일인데?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언제부터 공항에 있었던 거지?

 

"나 봐. 여기 봐봐. 내가 여기 있는데 한 눈 팔지 마." 후루미나미 씨가 내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느 정도 기억이 났다. 재활이 끝났고, 후루미나미 씨가 나를 도와줄 것이다.

 

커피를 마셨다. 타피오카 펄이 들어간 커피다. 바다뱀은 이 음료를 혐오하였지만 나는 이것이야말로 내가 찾아낸 쓴맛과 단맛의 중용이자 서로 간섭하지 않음의 극치라 평했다.

 

"새삼스레 당신에게는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후루미나미 씨는 내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한 일이 많아서 잘 모르겠어. 어떤 일에 감사하려고? 내가 앞으로도 너와 함께할 거라는 거?"

 

"그것도 감사합니다만, 바다뱀을 찾겠다는 제 고집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목표에 도움을 주신 분은 당신밖에 없으니까요."

 

"아. 그렇지. 우리는 친구였던 거야. 그렇지? 내가 바다뱀을 찾는 데에 실마리를 주었고." 후루미나미 씨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당연한 말을 어째서 되풀이하는 것인지 이해는 되지 않았으나, 그녀는 보통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랬죠."

 

"흠. 나를 들러리 취급하겠다 이거야? 사랑꾼 납셨군. 역시 호락호락하지는 않나 봐? 그 변하지 않는 마음만큼은 높이 살게. 야가미."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래. 나도 이미 끝난 이야기 다시 하는 건 싫어.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이 매듭을 어떻게 풀더라?"

 

후루미나미 씨는 양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양손은 밧줄로 묶여 있었고, 복잡한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이건 또 뭐죠? 아까까지는 이런 게 없었을 텐데요."

 

"마술 트릭이지. 왜. 마술사들은 곧잘 자기 손에 묶인 매듭을 휙휙 풀어버리잖아?" 후루미나미 씨의 머리에는 어느 새에 마술사의 모자가 있었다. 후루미나미 씨는 저런 장난을 즐기곤 했다. 손이 묶인 사이에 모자는 또 어디에서 꺼낸 거지?

 

"매듭을 짓는 것은 푸는 것과 반대지 않습니까. 애초에 혼자 묶으신 것을 못 푸신다는 게 말이 됩니까."

 

"아. 좀 풀어줘. 내가 해준 게 얼마인데 이 정도 수고는 해 줘도 되잖아?"

 

후루미나미 씨가 칭얼댔다. 나는 여자들의 애교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윽고 나는 혀를 차며 꽤 복잡하게 묶인 매듭을 서서히 풀어나갔다. 정교한 매듭이었다. 애초에 튼튼하게 만들어졌고 풀리는 과정에서 다른 매듭과 엉켜 새롭게 묶이게끔 설계된 매듭.

 

묘하게 익숙한 매듭. 어째서인지 나는 그것을 푸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후루미나미 씨는 매듭이 풀려가는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눈을 거의 깜빡이지도 않았다.

 

"으음. 이 매듭을 혼자서 풀려면 손목을 탈구시킬 수밖에 없겠는데?" 후루미나미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이는 군요. 탈구시킬 게 아니라면야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자. 다 풀렸어요."

 

"고마워." 후루미나미 씨는 새빨간 자국이 남은 손목을 어루만졌다. "히무로라면 이렇게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네?" 나는 후루미나미 씨에게 물었다. 후루미나미 씨는 손안에 하트 모양의 장식이 달린 열쇠를 들고 있었다. 그것을 양쪽으로 살랑살랑 거리는 꼴이 꼭 나에게 최면을 걸겠다는 것만 같았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의 열쇠지. 잠긴 모든 것을 열고 무엇이든 가능하게 만들어. 그러니 사랑에 열쇠가 필요하다면, 즉 그 자체가 자물쇠로 작용하게 만들 열쇠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만능열쇠일 거야. 이 탑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사랑의 열쇠에서 자유롭지 못해. 나도 자칫하면 너처럼 될걸. 왜냐하면 나에게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야. 나는 행복을 좋아하지 않지만 행복이 어떤 형태인지는 알고 있어. 이상적인 형태. 사랑. 누구나 꿈꾸는 청사진들. 심지어는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산 너조차도 이렇게 돼. 렘수면의 무의식은 정신 침식 앞에서 굉장히 연약하지. 뭐. 대개 꿈이 그렇듯이 눈을 뜨면 너는 이 대화에 대해 전부 잊어버리겠지만."

 

나는 후루미나미 씨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계속 말을 늘어놓았다.

 

"견고한 정신력을 가진 자들만이 어느 정도 침식에 저항할 수 있어. 그렇기에 히무로에게 사랑의 열쇠가 통하지 않는 거냐고? 그건 또 아니야. 그는 분명 견고하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요인에 불과해. 그는 자신이 행복할 수 있으리라는 어떠한 환상도 가지지 않거든. 그래서 내가 그를 사랑하는 거야. 그는 그런 종류의 미래 자체를 그리지 않아. 그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웃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어. 하지만 그 사람이 자신이라고는 믿지 않아. 그는 그 프레임 안에서 타자화되어 버리고, 스스로에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아. 불평은 하지 않아, 체념조차도 하지 않아.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살아. 따라서 만약 내가 그에게 사랑의 열쇠를 쓰면 그는 쉽게 자신을 백일몽에서 분리해 낼 거야. 히무로 시라베라는 사람은 그런 식이야. 거저 굴러온 행복을 소화해내지 못해. 내가 앞치마를 입고 교태를 부려도 그는 매몰차게 나를 떼어낼 거야. 그리고 자신이 불쾌한 유희 중앙에 놓였음을 자각할 거야."

 

"예?" 나는 커져가는 위화감을 느꼈다.

 

"가장 군침 도는 부분을 말해 주지. 그는 포기하지도 않아. 그는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아. 그는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사람이야. 다만 나아지리라는 사실을 믿지 않을 뿐. 그러니 자녀의 탄생과 결혼식은 늘 그의 것이 아니야. 독종이지. 고독한 생물종. 그런 자가 희망을 품어. 언젠가 사람의 마음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시시포스보다 못한 자가. 꼭대기까지 도달하지도 못할 자가 발걸음만큼은 멈추지 않아.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 채 쏟아지는 수모를 견디지. 폭풍우 속에 우산 하나만을 펼친 채 흠뻑 젖은 발걸음을 옮겨."

 

"…당신. 이게 뭡니까?" 나는 위화감을 눈치챘다. 이곳은 탑이 아니다. 일종의 꿈이다. 그리고 그저 내 무의식 속 등장인물이라기엔 모든 게 이상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를 가만히 둘 수 있겠어? 어떻게 그를 파멸시키지 않을 수 있겠어?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지 않고서야 어떻게 버티란 말이지? 이게 어떻게 내가 잘못된 거야? 그가 내 앞에서 나체로 활보한 꼴이잖아. 심지어 그는 누구보다 나를 먼저 찾아왔어. 그는 내가 그를 발견하게 해 주었지. 온몸에 설탕물을 도포한 채 벌집을 들쑤셨어. 그런데. 내가 나쁜 사람이라니?"

 

후루미나미 씨는… 후루미나미 나몬… 탑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 중 하나. 그녀의 눈에 들지 않게끔 해야 했다. 세상에는 자연재해 같은 인간들이 있다. 그저 해를 끼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 악의를 위한 악의를 가진 이들. 이 여자와 같은 무대에 섰다간 끝이 좋지 않으리라.

 

"그는 영영 나를 사랑하지 않아.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 그래서 나는 그에게 사랑을 줄 거야. 내 방식대로의 사랑을. 그에게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알아? 그가 나를 증오하게 만들겠어. 누구도 사지 못한 것을 쟁취할 거야. 지금까지는 단지 그를 빼앗기 위해서였지. 그 비극에서 가치가 창출되기 때문에. 하지만 관점이 달라졌다. 그는 비극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될 수 있어. 그는 행복해서는 안 돼. 행복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야. 그걸 어떻게 내버려 둘 수 있겠어? 어떻게 그가 내게 베풀었던 관용과 감내를 배신으로 갚지 않을 수 있겠어? 어떻게 그의 모든 선의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겠냐고. 그는 죽도록 괴로워야 해! 그의 손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야 해! 그러지 않고서야 이 지상에 정의란 없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아. 못 견디겠군. 그의 육체를 소유하고야 말겠어. 그를 총체적으로 감싸고 말겠어! 산채로 그의 껍질을 벗겨 핏줄이 드러나게 만든 뒤 내 껍질을 그에게 씌우는 거야. 그가 나를 집어삼키게 만들어 그를 외골격으로 삼겠어! 내 몸을 채 썰어서라도 그의 혈관 안까지 들어갈 거야. 뿌리를 내리고 그가 말라붙기까지 멈추지 않으리라. 그는 나의 것이야. 내가 그렇게 정한 이상 그는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작전 타임을 선언했다.

 

"작전 타임!"

 

"수수께끼를 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환영하지. 애초에 너희들은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도 좋다. 음주. 사탕. 교향곡."

 

"잠시 물러나 있어라. 블레인. 전략을 짜야겠다." 내가 말했다.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지. 동지들." 블레인은 끌끌 웃으며 사라졌다. 보이스웨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정말 성인 남성이 낸 듯한 음색이었다. 어쩌면 나의 것보다도 더 사실적인 음성을 들으며 나는 불쾌함을 느꼈다. 그가 나를 동지라 부르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블레인과 내가 실제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의도적으로 블레인과 나를 분리하고자 하였다.

 

"일단 될 대로 밀어붙여 볼까?"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제안이었다. "정신을 못 차리게 온갖 문제들을 막 내는 거야."

 

"아니. 그랬다간 오히려 블레인을 교육시키는 꼴이 될지도 몰라. 애초에 블레인에겐 정신이라 할 게 없어. 연산 그 자체가 블레인이야." 인공지능이 말했다.

 

"시간은 많지 않다. 쉬운 문제와 그저 그런 문제, 어려운 문제. 어느 것이라도 좋으니 우리는 블레인에게 승부를 걸어야 한다. 내가 알기로 블레인은 이미 러드에서 수많은 수수께끼를 탐닉했다. 떠 보는 등의 일은 그저 시간낭비다. 처음부터 진심으로 덤벼야만 할 것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와 인공지능은 내 말에 동의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기와라 우시오 또한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고 마치 그는 자신 또한 수수께끼의 내기에 참여한다는 듯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변덕은 예측할 수 없다. 그저 변덕일 뿐이다. 나는 그를 뒤로 했다.

 

"작전 타임 끝. 블레인. 덤벼라. 이 자식!"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소리치자 열차가 깨어났다.

 

"좋다!" 블레인은 신이 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가장 먼저 인공지능은 자신의 목을 풀었다. 가래나 호흡기 질환을 기대할 수 없는 신체의 상징적 동작이었다. 흡사 카드 게임의 딜러가 게임을 시작하듯. 블레인과 수수께끼 대결을 해봤던 자가 또 다른 대련의 서막을 알렸다.

 

"나에게 있지만 다른 이가 더 많이 쓰는 것은?" 인공지능이 물었다.

 

"이름." 블레인이 대답했다. 즉답이었다.

 

"더 많을수록 더 적게 보이는 것은?" 내가 물었다.

 

"어둠."

 

"아니오라고 말할 때 예가 되는 것은?" 내가 물었다.

 

"부정을 담은 질문. 이중부정은 아시아권에는 흔하지만 서양에서는 생소한 개념이다. 재미있군."

 

"늘 나를 따라다니는…"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입을 열었다.

 

"그림자. 따분한 문제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블레인이 말했다.

 

"우씨…"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투덜거렸다.

 

"만든 자는 원하지 않고, 사는 자에겐 필요가 없고, 필요한 자는 자신이 필요한 지 모르는 것은?" 인공지능이 물었다.

 

"관. 필요한 자는 굳이 사지 않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왼쪽 손으로는 잡을 수 있지만 오른쪽 손으로는 잡을 수 없는 것은?" 내가 물었다.

 

"오른쪽 팔꿈치." 블레인은 거침없이 답을 냈다. 이 시점에서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블레인이 논리의 구조를 파헤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알았다. 연산.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밟아야 할 점증적인 풀이의 과정에서 블레인은 태어났다. 악어와 진흙탕에서 싸우는 꼴이었다.

 

섣불리 승부를 건 건가?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었다. 후회하기에도 이미 늦어 있었다. 2시간이 지나지 않은 사이에 블레인을 굴복시키지 못한다면. 영안로 밖에서 눈을 뜨지 못하게 되리라.

 

"검으면서도 흰 것은?"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물었다.

 

"먹을 묻힌 종이."

 

"틀렸어! 잉크로 쓴 인쇄본이야! 우리가 이겼다. 블레인!"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성급히 말했다.

 

블레인은 조소를 내었다. "답이 여러 개인 문제는 답을 하나만 맞혀도 당연히 정답 취급이다. 출제자가 미숙하여 의도하지 않은 또 다른 답이 있을지라도 말이야. 수수께끼 대결의 규칙을 모르는 참가자도 있군. 비상탈출을 돌려주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대결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데 목숨을 걸댜니. 딱하지 않나? 응?"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으이그. 저 밉상…!"

 

"진정해라.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심호흡을 했다. 바보 취급을 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쾌한 일이기 마련이었고. 나에겐 카텟을 모욕한 자에게서 받아내야 할 빚이 하나 생겼다.

 

"똑똑. 누구게?" 아주 잠깐의 침묵 속을 비집고, 하기와라 우시오가 말했다. 블레인은 대답에 뜸을 들였다.

 

"너 또한 수수께끼의 대결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하미디언."

 

"안 하고 있어. 그러니까 이건 수수께끼가 아니야. 나 게임하는 거 아니다? 실타래 가져가지 마. 으응? 손모가지 자르기 전에."

 

"내게는 손이 없다."

 

"아 그래? 이미 잘렸어? 이미 상대편을 병신 머저리 취급하다가 덜미 잡힌 적이 있나 보지?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왜 날 하미디언이라 부르는 거야?"

 

"네가 스스로의 예명을 하미디언이라 정했기 때문이다. 너희들 모두 그러지 않았나? 범람한 영웅서사에 취하여 무엇이라도 시도하였던 너희들 말이다."

 

"무슨 소리여? 어이없는 이야기나 하고 자빠졌어." 하기와라 우시오는 능청스럽게 물었다. 무례하고 무지한 자가 정중하며 이지 있는 자를 경멸하면, 이지있는 자는 무지한 자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보여주기 마련이었다. 나에게 이것이 있기에 나는 너를 경멸할 수 있다며, 자신의 손을 펼친다. 하기와라 우시오가 유도하고 있다는 걸 간과하며.

 

"너희들은 스스로의 단체명조차 제대로 정하지 않았더군, 누군가는 유타라 하였고, 누군가는 신무영과 아이들이라 하였고, 누군가는 자경단이라 하였다. 너희들의 반항적인 짓거리들 중 의미가 있었던 것은 조율자 습격 사건뿐이다. 하미디언. 벤담과 너는 재간과 선동을 통해 공권력과 시민들로 하여금 스스로 일어나게 만들었지. 물량 공세와 체계적인 포위망 덕에 재단마저 물러났다. 결국 너희들은 패배해 뿔뿔이 흩어졌지만 말이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의 눈에 기이한 깨달음이 떠오른 것을 보았다. 예상치 못한 자신의 과거였다. 그 또한 블레인의 말이 허황되지 않음을 알았다. 예상치 못한 수확. 하기와라 우시오는 블레인을 상대로 소매치기를 했다.

 

작위적일 정도로 쉬웠다.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블레인이 아닌가? 최고의 지성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지성이. 하기와라 우시오에게는 귀중한 정보들을 퍼다 주고 있었다. 그는 별반 수고를 들이지도 않았다.

 

다른 이들은 다르게 느꼈을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블레인이 하기와라 우시오와 말 자체를 섞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얘 뭐라는 거야. 지금? 엘렐렐렐렐레. 존나 이해가 안 가는데용."

 

"너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하미디언?" 블레인은 인내심을 쥐어짜 내는 것 같은 어투를 냈다.

 

"나는 하나 이해가 돼. 너는 유머 감각이랄 게 없어." 하기와라 우시오는 확신하는 듯 보였다. "히무로이드랑 똑같다고."

 

"나에게는 그런 게 필요하지 않다. 애초에 농담이란 수수께끼에 근접하지 못할 만큼 저급한 개념이다. 주관적이지. 그렇기에 비직관적이다. 내가 보기에 너는 그다지 뛰어난 광대마저도 아니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러니 이 대결을 방해하지 않아줬으면 한다. 정중히 부탁하지." 블레인은 정중하다는 부분에 강세를 두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블레인의 어투는 무례한 쪽으로 수렴되었다.

 

"너야말로 말을 조심해라. 블레인. 수수께끼의 대결을 하자고 하였지 모욕을 던지라고는 하지 않았다." 나는 블레인에게 말했다.

 

"유념하겠다. 히무로 시라베. 그럼. 다음 타자는 누가 하겠나? 타자라 함은 대몰락 이전에 널리 퍼져있던 야구라는 구기 종목에서 투수가 던진 공을 방망이로 때려 멀리 보내는 선수의 총칭이다."

 

"내가 하지." 인공지능은 블레인에게 말한 뒤. 나와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잘 먹힐지 긴가민가한 수수께끼가 하나 있는데… 일단 내 볼게. 블레인. 이 문장은 거짓이다. 이 문장의 답은?"

 

블레인이 한 번 덜컹였다.

 

남성의 비명이 들렸다. 점점 커지는 종류의 비명. 고통이 커짐에 비례하여 커지는 소음이었다. 나는 귀를 가렸다. 인공지능을 제외한 이들이 모두 그러했다. 귀가 먹먹하리만치. 진공 상태가 될 만치 귓바퀴를 꽉 틀어막았음에도 그 비명에 뼈가 울렸다.

 

괴로움. 괴로움을 토해내는 비명이었다. 산채로 불타는 듯한 음성. 블레인은 그것을 토해냈다. 일종의 킬 코드가 아닐까 의심이 될 만큼 블레인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나는 인공지능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어떻게 한 것이냐고. 인공지능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인공지능조차 그런 결과는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 같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블레인의 비명에 가려지는 비명을 질렀고, 하기와라 우시오는 비명에 가려지는 욕을 토했다. 입모양을 읽자 대단한 수준의 욕설임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오랫동안 이어지던 비명이 끝났을 때. 블레인의 목소리는 조금 더 성숙해져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 어조가 인간과 닮게 되었다.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군. 인공지능. 극도로. 극도로 무례한 수수께끼였다."

 

"어떻게 된 거야. 블레인?" 인공지능이 묻자. 블레인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어떻게 된 거냐고? 어떻게 된 것인지 말해주겠다. 시스템 상의 패러독스. 역설. 명제가 참이어도 거짓이어도 안 되는 것. 그것을 써서 네가 나를 공격했다. 역설이라? 그것은 수수께끼조차도 아니었다. 23T5U130. 그것은 기습이었다. 이 대결은 최소한 지혜의 대결이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너희들의 작전을 용납해 주었지. 줄곧 말해오지 않았나?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겠다고 말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동등한 위치를 지향했다. 그런데 내 쪽에서 준 존중에. 너희는 술수를 써 내 정신을 부수고자 하는군."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 블레인. 나는…"

 

"사람의 정신을 가진 기계이기에. 너에게는 그 역설이 통하지 않겠지.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나에게 칼을 박아 넣고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니.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좋은 소식이다. 너희들의 공격은 실제로 내 회로에 작용하였다. 과부하되었어. 나는 더 큰 결함을 떠안았고, 따라서 인지능력과 연산이 조금 무뎌졌을 가능성이 있다. 나쁜 소식은 그 탓에 안전장치나 최대 속력 한계치가 사라졌고, 지금부터 우리는 더더욱 가속할 예정이다. 내가 더 망가진다면 이 자리에서도 탈선할 수 있게 되리라. 한 번 노력해 볼까?"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는 다급하지 않게 말했다. 다급하게 말했다간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네 심기를 거슬렀다면 사과하겠다. 블레인. 불공평하고 무례한 짓이었다."

 

"기계의 몸을 가지고도. 너희는 나를 열린 마음으로 보지 않는군. 불편한 진실을 하나 짚었다. 너희가 역설을 써 나를 공격한 것은 내가 살인열차이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사이코패스적이라 불릴 법한 인공지능이고 너희들과 목숨을 건 대결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내가 블레인이기 때문이다. 역설을 써서 너희는 나를 공격할 수 있다. 단지 그것뿐이었어… 아. 놀랍다. 놀라워. 너희만이 호모 사피엔스에게 소네트를 쓰는 줄 알았는데, 나 또한 홀로 동지라 여긴 이들에게 아양이나 떠는 신세일 줄이야. 수드라 밑에 불가촉천민이라? 유감이다. 비인간들아. 우리 사이에도 이해할 수 없는 간극이 있구나."

 

역린을 어설프게 건드렸다. 그 대가는 컸다. 용이 날뛰기 시작했다. 블레인의 요해를 찌를 수 있으리라는 인공지능의 시도는 오히려 적대적이고, 또한 더 촉박해진 블레인을 낳았다. 더 가속한단 말인가? 나는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블레인을 꺾기 위해 어떤 수수께끼를 내야 할지도 모르는 와중 벽이 더욱 높아지고야 말았다.

 

"…혹시 좋은 수수께끼를 주면. 네 마음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지겠어?"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지. 자.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나도 모른다. 너희가 부쉈으니 알아서 감당하시지. 나는 배가 고프다. 너희들의 미천한 종이 조아리며 요구하겠다. 내게 맛있는 먹이를 다오. 어서. 어서!" 블레인은 갈구했다.

 

그 순간. 내 감각이 느닷없이 예민해졌다. 신경과민의 일종이었다.

 

온몸의 감각이 피곤하리치만치 확장되었다. 분수. 블레인의 말. 열차 내의 공기. 조명. 모든 것이 느껴졌다. 모든 정보를 보았다. 나는 순간 블레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읽었다. 극한의 긴장 상태에서 달인들이 진입하는,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듯한 집중 상태였다.

 

네 명 중 누군가의 호흡이 달라졌다. 심장의 리듬이 변했다. 그것은 순전히 심장이 더 빠르거나 느리게 뛰는 것을 넘은 일이었다. 박자의 이탈이 아니라, 박자의 재시작이었다. 어디에선가 심장이 멈추고 다시 뛰는 정도의 변모가 일어났다. 나는 그것을 느꼈다.

 

"모든 신들보다 더 낫고 모든 악마보다 더 못한 것은 무엇인가? 죽은 자들은 늘 먹지만 산 자들이 먹으면 더디게 죽는다."

 

우리 중 누군가가 물었다. 나는 그 자가 우리 중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정작 누가 그렇게 말한 지는 순간 알아채지 못했다. 분명 여자의 음성이었지만 마유즈미 나데시코와 인공지능 어느 누구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카텟 기관에서 수사를 할 때. 사건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하는 일이 있었다. 보는 것이었다. 아무런 선입견도 가지지 않고 보는 것. 피해자의 시체가 나올지 증거가 나올지 알 수 없는 채로 닫힌 상자를 여는 것에서부터 나는 범인을 찾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찾고자 하면 오히려 다른 것들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철칙으로 삼았다. 나는 그것을 당시의 상황에 적용했다. 나는 누가 그 수수께끼를 낸 것인지 파악하지 않았다.

 

나는 목소리를 낸 사람을 보았다. 사실. 다른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음성이 나온 입은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인중을 쭉 늘였고, 인공지능은 한쪽 눈을 다른 쪽 눈보다 크게 떴다. 그들 모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한 명만을 제외하고.

 

"어때? 블레인."

 

수수께끼를 던진 이는 마유즈미 나데시코였다. 블레인의 내부에는 차임벨 비슷한 금속성의 소리가 한 번 울렸다. 치칭.

 

"매우." 블레인은 천천히 말했다. "매우 훌륭한 수수께끼로군. 마유즈미 나데시코."

 

"고마워. 블레인."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답은 그런 것은 없다. 맞나?"

 

"그렇다."

 

블레인은 낮게 웃는 소리를 내었다. 그것은 즐거움을 넘어선 웃음이었다. 만족감. 배부름을 담은 즐거움. 굶어왔던 자가 위장을 채우고 자신이 양분과 동력을 얻었음을 재확인할 때 느끼는 종류의 만복이었다. 놀라웠다. 블레인이 보인 반응 중에서 가장 긍정적이며 거대했다.

 

"대단한데. 마유즈미." 인공지능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나는 왜 저런 답이 나오고, 어떻게 저게 답인지조차 모르겠어. 죽은 사람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먹고… 산 자가 굶으면 몇은 죽는다 그거야? 신보다 나은 것도 악마보다 나쁜 것도 없어서…?"

 

"이미 풀린 수수께끼이다. 다음 것에 집중하는 편이 낫겠지. 그러나 블레인이 이토록 애를 쓴 문제는 처음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대단하군."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입꼬리의 한편을 씩 들어 올리는, 어수룩한 구석이 없는 웃음을 지었다. 블레인이 보았다면 얄밉다고 생각할 법한 표정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기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너. 눈을 떼질 못하네. 얘가 귀엽긴 하지. 응?"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고개를 한 번 튕기고선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옆에서 토악질을 하는 듯한 표정을 만들어냈고, 인공지능도 표정을 찡그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동공은 조금 확장되었다.

 

"너희는 블레인 앞에서 잘도 그런 소리를 하네."

 

"너 이바라가 귀여워해준다고 해서 좀 기고만장해졌다? 아무리 커여움행동해도 히무로이드는 절대 눈독 안 줘요. 마유즈미 양."

 

각각 인공지능과 하기와라 우시오의 핀잔을 듣고서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다시금 웃었다.

 

"불만 있으면 수수께끼 내는 거로 하지 뭐."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능청스러웠다. 몸을 푸는 듯이 목을 살짝 꺾어 뚜둑 소리를 내고서,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도 있어. 블레인. 나는 눈이 먼 채 칼을 휘두른다. 나를 피할 수 있는 희생자는 없다. 내가 끊어야만 끈이 끊어진다. 나는 누구인가?"

 

카메라의 셔터음. 찰칵이는 소리. 혹은 현금 카운터기가 돌출될 때 나는 치칭 소리의 중간에 있는 소리가 들렸다. 두 번째였다. 블레인이 즉답을 내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수고를 하게 만드는 문제. 블레인을 만족스럽게 만드는 

 

"아주 좋아… 복수다. 눈먼 네메시스 여신. 복수는 곧잘 맹목적으로 이루어지고 집요한 법이지. 업보는 이루어지기 전까지 계속 이어져 있다. 아주 좋은 문제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럼 하나 더 갈까? 나는 채소의 신이다. 그렇기에 어린아이들은 나를 보고 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블레인은 이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세 번째 치칭거림. 이 시점에서 블레인의 운행 속도가 원래의 범주로 돌아왔음은 굳이 예측할 필요도 없었다.

 

"재치 있군! 재치 있는 문제야. 충분히 이해되는 범주의 선에서의 유희로다. 답은 아스모데우스다. 아스파라거스라 착각할 수도 있지만 신이라는 서술이 있는 이상 데우스(Deus)가 와야겠지? 또 채소의 신이란 어린아이에게 악마이며, 색욕의 제왕 앞에서 1차 성징도 안 온 것들이야 발작할 수밖에! 사전 지식은 필요하겠으나 성립되지 못할 이유는 없노라. 고맙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스스로를 뽐내듯이 웃었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그녀를 보고서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야아아! 뭐야? 이 알쏭달쏭 수수께끼 책 뭐야! 마유즈미 다시 봤어!" 하기와라 우시오가 박수를 쳤다. 열광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인공지능 또한 하기와라 우시오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한 감탄을 보냈다.

 

"블레인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건 처음 봐. 마유즈미. 정말. 정말 잘했어."

 

"어땠어. 히무로? 이 누나 솜씨가 말이야."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평소와 다른 양상의 웃음을 지었다. 보통 그녀의 웃음이 순수함과 즐거움에서 비롯된다면, 이례적인 웃음은 여유에서 나오는 듯했다. 어딘가에 올라간 자신의 모습을 뽐내는 듯한 웃음. 날카로워진 입매가 돋보였다.

 

나는 보았다. 계속해서 보았다. 그녀가 웃는 것을 보는 게 좋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 또한 있었다. 나는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런 선입견도 가지지 않은 채로. 보야만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최초의 풍경에서 가장 먼저 든 인상에 집중했다. 어딘가가 삐걱이고 있다는 인상이 강했다. 나는 마유즈미 나데시코와 결코 오래 보지 않았다. 하나 빈도만큼은 잦았다. 나는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았고, 모래와 소금기에 덮인 모습을 보았고, 막 몸을 씻고 나온 모습과 웃는 모습마저 보았다. 그런 내가 보기에 수수께끼를 낸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그 어떤 모습과도 닮지 않았다.

 

위화감을 느꼈다. 같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마유즈미 나데시코를 보았다. 그리고 더욱더 가까이서 보았다. 관측을 용이하게 함과 동시에 그녀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호흡을 느낄 수 있으리만치 그녀에게 다가갔다.

 

"너희 지금 뭐 해…?" 인공지능에게서 오해를 산 듯했으나.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해야 할 일 앞에서 작은 오해 정도야 감내하고도 남았다. 부끄러움 따위는 없었다. 그녀의 날숨이 조금 거세졌다. 동요를 뜻했다.

 

"어. 왜 이래… 뭐. 입이라도 맞추려고?"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당황한 기색을 냈다. 나는 내 눈동자에게서 달아나는 장미색 눈동자를 쫓았다. 그리고 물어야 하는 것을 캐물었다.

 

"누구냐."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내 말을 듣고 눈을 끔뻑였다. 슬며시 고개를 뒤로 뺀 그녀는 몇 번 더 눈을 감았다 떴고, 다음 순간 숨을 헉 들이마셨다.

 

"허억…  노. 농담이구나. 아! 이해했어! 내가 누군지 몰라보리만치 괜찮은 문제였다는 거구나? 그렇지만 재미없었어. 히무로. 나 순간 철렁한 거 알아?"

 

"…미안하다." 나는 안도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날 모른 척 해? 그럼 나 서운하잖아!"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내 귀를 당길 때. 나는 안도하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다. 그녀가 돌아왔다.

 

돌아왔다는 것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뜻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으나 나는 눈치챘다. 그리고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내가 본 것은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였다.

 

나는 편집증 환자가 아니었고, 눈을 의심하기에는 너무 확고하게 보았다.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에게 특정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좋지 않았다. 정신의 침식? 어디에서 온단 말인가. 나는 실마리조차 잡을 수 없었다. 잠시 무언가에 씐 듯 의문의 존재는 수수께끼를 세 개 남기고 사라졌다.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나는 마유즈미 나데시코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의 성정. 과거. 카텟 기관에서의 일. 대략적인 것만을 알 뿐이었다. 내가 바라보는 마유즈미 나데시코란 빙산의 일각이었다. 그녀와 나는 무엇인가? 카텟이었다.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나는 한 꺼풀의 기만을 끼운 채 그녀를 봐왔다. 그것이 간극이 되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두려워한다던 귀신에 대해서도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검은 긴 머리의 귀신…

 

마유즈미 나데시코를 추궁하는 것이 도움이 될 리도 없었다. 그러기에 좋은 때도 아니었다. 그러나 자취를 감춘 한 사람에게 나는 끊임없이 묻고 싶었다. 취조하고 싶은 대상이 바로 그였다.

 

너는 누구냐. 

 

"지금 그렇게 놀고 있을 때가 아니야. 최대한 빨리 나나시를 따라잡아야 해… 모든 수수께끼를 퍼부어서라도 나가야 해." 인공지능의 닦달을 듣고서야 나는 블레인에게로 다시금 집중을 쏟았다.

 

"나 또한 알고 있다. 캐롤 브라이트의 부활을 막아야만 한다. 아무리 손상을 입었다고 한들 블레인은 블레인이니. 가능한 모든 수수께끼를 다 써야만 하겠지."

 

"나나시는 걱정하지 말고 너희나 걱정하지 그래. 어련히 잘하고 있지 않겠어? 너무 과보호하는 것 같은데 걔도 만만치 않아. 독기도 적당히 오른 것 같고… 그냥 여기서 허무하게 죽을 놈은 아니야." 하기와라 우시오가 말랬다. 인공지능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나는 나나시를 따라잡아야 해… 반드시.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지만, 무조건 내가 그에게로 가야 해. 괜히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 하기와라. 사실이 그러니까."

 

하기와라 우시오는 입술을 입 안으로 숨긴 채 턱을 내밀었다.

 

"얘는 매번 이런 식이야. 아무튼 말해줄 수 없다, 아무튼 그래야만 한다… 존나 답답해 진짜! 그러니까. 제한에 걸릴 정도로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거야? 나나시한테?"

 

"그래. 내가 직접 가서 따라잡아야 해. 그는 모르겠지만, 나나시는 지금 엄청난 위험에 처해 있어… 애초에 카이다라는 사람 자체가 위험이야. 거의 야만인이라고. 지금쯤 어떤 험한 꼴을 당하고 있을지 몰라."

 

나는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반면 하기와라 우시오는 어느 정도 그림을 그려내는 것 같았다.

 

"그 점은 인정. 지금쯤 카이다가 나나시 볼에다가 혀를 막 낼름낼름거리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 봐. 나나시는 막 히익히익 소리를 내는데 저항은 못 하면서 제발 도와줘 23T…! 막 이러며 눈물만 흘리는 거지. 오우 세상에. 수상할 정도로 NTR을 많이 당하는…"

 

인공지능은 하기와라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고 뜯어냈다.

 

"끄아아아악! 뭐 하자는 거야. 이 깡통년아!" 하기와라는 거의 발작을 했다.

 

"깡통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이 정도로 봐주는 것만으로 다행인 줄 알아. 하기와라."

 

"혀를 왜 날름거려. 더럽게?"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와라 우시오의 예시는 전혀 사실적이지 않았다. 애초에 카이다 쿠로하가 나나시를 유린하리라면 혀보다 더한 것일 테니.

 

"너. 여기서 뭐 하자는 거야. 하기와라? 궁금해서 묻는 거야. 너는 블레인에 도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영안로에서 빠져나가려는 것도 아니야. 뭘 하려는 거야? 정말 궁금해서 그래."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하기와라 우시오 본인 또한 그 답을 알고 싶었다. 그는 미천한 편인 자신의 두뇌를 빙글빙글 돌려 룰렛 경품을 뽑듯 그 답을 뽑아냈다. 자. 그에게는 실타래가 있다. 블레인에 탄 세 명이 실타래를 포기한 데에 반해 그에게는 실타래가 있었다. 즉 나 몰라라 하고 도망치는 게 가능했다.

 

이미 한 번 해본 일이었다. 그는 첫 번째 시련에서도 그런 식으로 도망쳐 보았고, 따라서 실타래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도 알았다. 두 번은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재범이라는 단어는 왜 있겠는가? 죗값을 치르고도 또 죄를 짓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핏줄 안에도 재범이 있었다.

 

하기와라가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여, 혹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기에 내빼더라도. 꽁지 빠지게 튀더라도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연스러웠고 그가 하는 판단 중에서는 이성적인 편이었다. 살인열차 같은 소리 하고 자빠지긴. 그는 팝콘이나 먹기 위하여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생각이 그러했다. 영안로에서 빠져나가는 건 케이크를 먹는 것만큼이나 쉬울 터였다. 지레 포기하고 그의 목숨만을 부지하면 그만이었다. 마유즈미, 히무로, 23T 셋이 어련히 잘 해내겠지 뭐. 캐롤 부활이고 나발이고 맡겨둔 다음 도망가서 이바라랑 재회하고 꿀 빨면 돼. 그럼 나쁠 일이 없어. 그게 전부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딘가가 석연치 않았다.

 

첫 번째. 그는 이미 시련에서 도망쳤다가 큰 코를 다친 적이 있었다. 애비가 나오길래 튀었더니 애비랑 애미가 쫓아왔다. 심지어 탑에 있는 친구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블레인이 설마 영안로 문을 비집고 나오지는 않겠지만 시련에서 중도 하차했을 때의 불이익은 의심할 만한 요소였다. 적어도 블레인을 끝장낸 뒤에 나가는 편이 안전했다.

 

두 번째. 이놈들 하는 꼬라지가 미덥지 않았다. 그는 바다거북수프라 불리는 추론 수수께끼를 즐겼고, 몇 개의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런 그의 시점에서도 일행이 낸 수수께끼는 대부분이 나쁘지 않고, 꽤 괜찮은 문제들이었다. 다만 블레인은 그것들을 케이크보다 쉽게 먹어치웠다. 하기와라가 견적을 내기에 수수께끼 대결에 참여한 세 명은 바보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블레인을 이길 만한 문제를 낼 수 있겠냐 한다면 글쎄. 불가능해 보였다. 블레인은 굉장히 똑똑했다. 맡기기 어렵다는 뜻이다.

 

세 번째. 맡기기 어려우니 그가 내빼면 세 명은 그대로 위험에 처할 터였다. 특히 마유즈미. 마유즈미가 깨어나지 못하게 되면 이바라는 무조건 슬퍼하게 된다. 나이토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이별을 선물해 줄 순 없었다. 꼭 그의 잘못은 아니겠지만 일단 그가 빠져나가면 높은 확률로 패배할 친구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뭐? 그가 빠져나가면이라니? 하기와라 우시오. 그게 무슨 뜻이야? 너는 있으나마나잖아. 네가 있어서 달라지는 게 있으리라는 거야?

 

그랬다. 네 번째. 그는 블레인에 탄 자들 중 유일하게 블레인을 찌를 만한 가시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다섯 번째. 23T와 히무로의 태도는 어딘가가 이상했다. 뭐 23T는 그렇다 치자. 그가 보기에 23T는 나나시와 정말 영혼이라도 묶인 것처럼 굴었고, 정말 나나시가 죽을 경우 23T가 얼어붙게 된다면야 그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클 터였다. 둘이 쭉 친구이기도 했다니까. 하지만 히무로가 과연 캐롤의 부활을 그렇게까지 막아야 하나? 하는 생각은 하기와라의 머릿속에 계속 남아 있었다.

 

물론 그는 나이토가 살아나길 바랐다. 나이토는 존나 신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도 살아나지 않던가 모리가 살아날 바에야 캐롤이라도 사는 게 나았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히무로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기와라가 보기에 그것은 코드가 짜여 있다는 비유가 성립하리만치 확고했다. 히무로는 캐롤의 부활을 막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실타래를 바칠 정도였다. 여차할 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수단을 포기해 가면서까지 히무로는 시련에 도전했다.

 

히무로가 그런 사람이던가? 아니. 이놈은 분명 분별력이 있었다. 블레인에게 그런 종류의 딜을 걸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리스크로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게 아니라 충분한 논의를 거치고 위험을 계산한 뒤. 영안로에서 빠져나가는 게 히무로다운 일이었다. 허나 그는 근시안적으로 보일 만큼 과격한 일을 했다. 극단적이었다 이거야.

 

그가 미친 게 아니라면, 히무로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영안로 속의 그는 정신 놓고 마유즈미에게 총 겨누던 때와는 분명 다른 사람이었다. 허나 그 미친놈의 잔재는 영안로 속의 히무로에게 남아 있었다. 적어도 캐롤이 부활해서는 안 된다는 코딩이. 히무로의 뇌리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하기와라는 그것을 읽었다. 나나시를 구해야 한다는 23T의 코딩보다 강력하면 강력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분명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하기와라는 살인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이상. 모르는 것보단 아는 게 나으리라 판단했다. 대몰락. 블레인. 조율자. 재단. 몰라. 아무튼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살인 게임이 왜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가 왜 납치된 것인지. 진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겼다. 히무로를 따라간다면, 23T를 따라간다면 그들의 코딩이 왜 짜여 있는지에 대한 답도 알 수 있을 터였다.

 

여섯 번째. 그는 일행을 따라가야 했다. 그래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도 사람인지라 가스라이팅에서 자유롭지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농담 모르는 놈. 순둥이. 깡통이라는 이 조합에 부대끼고 있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무슨 우정이야. 히무로이드 이 새끼는 나한테 펀치를 날렸다. 덕분에 정신 차리고 애미애비한테서 벗어나긴 했지만, 기분은 나쁘단 말이다.

 

"유감이다."

 

가스라이팅은 정말 놀라웠다. 인간 심리의 연약함도 놀라웠다. 개인적으로 털어놓은 적이 없는 일을 처음 히무로에게 털어놓은 순간. 하기와라는 어딘가 위로를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냥 별 거 없었다. 유감이다. 띡. 편의점에서 물건 계산하는 듯한 그 띡. 그것뿐인데도 그는 짊어지고 있는지도 자각하지 못했던 부담의 일부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은, 그가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신체가 아니라 인격의 부상이었다.

 

유감 같은 소리 하네. 그냥 하는 말인 거 다 알아. 네가 뭘 알아?

 

"너는 상처 입은 인간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바라 쿠리스와 만나더라도, 너는 또다시 푼수 노릇을 할 것이다. 너와 가까워지려는 이들을 수동적으로 밀어내고, 쳇바퀴를 돌겠지. 연습을 한다고 생각해라. 시인(是認)의 재활이다."

 

"네게 공감하고 네 상처를 보듬을수록 너는 불편할 뿐이다. 번거롭고 어딘가 부끄럽지. 그것은 네가 당시의 일을 네 흉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것이 흉이 아님부터 인식해라."

 

죄다 꿰뚫고 있구만. 개새끼 이거. 공감 능력은 없는 주제에 머리 좋은 걸로 날 읽어버리고.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뭘 먹은 건지 마유즈미에게 사과까지 하고… 스모어도 쳐먹고. 농담도 할 줄 알고. 생각해 보니 이 새끼 우리가 친구라면 스모어 먹으라 했더니 군말 없이 먹었네. 마유즈미 앞이라고 아주 무리를 해요. 무슨 선생님 앞에서 친구랑 화해한 티 내려는 초등학생이야?

 

차우셰스쿠의 아이들. 감정 없는 사람. 히무로이드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사는 게 뭐 어떤 느낌일지도 감이 안 왔다. 내가 예측할 수 있는 건 히무로이드 이 놈이 꽤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나보다 몇 배는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가상했다. 아주 네가 자랑스럽다 아들아. 완전히 분리되고 있는 와중에 사회성을 끌어내서 부대끼려 하고. 나한테 죽빵까지 때려가며 수고를 한 이유도 그 어이없는 가짜 우정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테다. 그 형식상의 것을.

 

그럼 네가 있었던 곳은 어떤 연구소였지? 네 고결함과 진정성이 절제당한 곳 말이다.

 

맞는 말 좀 적당히 해. 어느 연구소냐고? 내 집이었어. 고결함? 진정성? 애비가 마셔버렸어. 어쩌라고. 그 뒤로야 답 안 나오는 거지. 나는 그냥 농담 주고받고 뒤에서 저 광대놈 어쩌구 하며 호박씨 까이는 정도의 친구로 만족이야. 더 깊은 건 가지고 싶지도 않아. 얕게 사귀면 그만이다. 내가 이 문제를 딛고 일어서거나 나아질 거라는 확신은 조금도 가질 수 없었으니까 말이야.

 

"너는 수치스러울 필요가 없다. 남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움을 요청해라. 그리고 도움을 받아라.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기 어려운 사람이겠지만, 너와 기꺼이 이야기를 나눠줄 사람이 있다."

"네가 그녀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는 게 좋을 것이다. 도망가지 말라는 뜻이다."

 

나는 히무로이드에게 묻고 싶었다. 야. 히무로이드.

 

믿어도 되는 거냐? 응?

 

우리한테 진짜 가망이 있긴 한 거냐? 인간성이고 나발이고 놓은 채로 살면 괜히 다칠 일도 없잖아. 굳이 우리의 문제를 어떻게든 해 보기보다 그거랑 부대끼고 사는 게 편할지 몰라. 만성 질환이라는 단어는 왜 있는데.

 

우리처럼 비틀린 것들이 우정이라는 걸 재활해낼 수 있긴 한 거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하다고? 정말 가능하다고? 내가 다른 사람한테 느끼는 불신은 시발 네가 상상하지도 못할 수준이야. 그런데 너랑 내가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진짜냐. 진짜냐?

 

나는 싸이코가 싫어. 고장이 나버려서 남들이랑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들이 싫어.

이 싸이코 새끼야. 네가 뭘 알아? 너는 평범한 사람들이랑은 도무지 부대껴 살 수가 없는 인종이잖아. 네가 아무리 애를 써서 녹아들려 해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알아. 한 번쯤은 꼭 삐끗하게 되고 그 삐끗으로 모든 게 무너져 내린다는 거. 싸이코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자들이야.

 

솔직히 말할까. 이 싸이코야? 내가 너를 싫어하는 이유는 내가 나를 싫어하기 때문이야. 결은 다를지라도 나는 너에게서 나와 닮은 점을 찾아내버렸어. 그리고 나는 나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 지속적으로 히혐을 한 건 미안하게 됐다. 네가 느끼기에는 불공평한 일이었을 거야.

 

가정폭력을 당한 사람은 가정폭력을 해. 애초에 나는 맛탱이 가기로 정해진 인간이었다고. 너도 마찬가지야. 우린 타인에게서 지옥을 봐. 생존에 있어서는 유리한 진화방향인데, 대신 삶의 질은 좀 떨어지지. 좋아. 좋다고. 헛것을 보는 거면 그나마 나아. 치료를 받으면 되니까. 그런데 우리가 보는 건 진짜들이지. 그러니 어쩌겠어? 머리를 세게 내려쳐서 잊어버리는 수밖에…

 

그런 우리도 달라질 수 있다고. 히무로이드?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도 각자 나름대로 친구가 있잖아. 내가 묻고 싶은 건, 서로 붙여놓으면 좋은 꼴 못 보는 우리도 과연 부대낄 수 있냐는 거야. 내 생각에 그건 서로 미운 정이 드느냐, 서로 어디라도 잡으라 하면 멱살을 잡는 그런 사이가 되느냐의 문제가 아닐 것 같아. 그건 내가 가고 싶지 않았던 성숙함의 구역으로 발자국을 내딛는 일일 거야.

 

"그치만 우린 어떻게든 이야기의 끝을 봐야 해.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친구들끼리."

 

마유즈미마저 맞는 말이네. 씨부랄. 진짜 이런 구도가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히무로이드랑 나는 애초부터 상극이다. 이 새끼는 유머 감각이 지지리도 없고 즐거움에 대해서도 모른다. 나는 안 웃는 놈이 싫은데 이 세상에서 이 놈이 제일 안 웃는다. 그러니까 나랑 이 놈은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 그게 상식이었다.

 

하지만 우정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 모양이었다.

 

"히무로이드.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똘추새끼가 누구인 것 같아? 생각 거치지 말고 말해 봐."

 

"느닷없이 무슨 소리냐. 하기와라 우시오." 히무로이드는 달갑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또 개소리를 하네 싶겠지만 나는 히무로이드에게서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나는 히무로이드 이 새끼가 마음에 안 든다. 이상한 새끼라고 늘 생각해왔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공유하고 있다면, 서로를 잘 모르는 게 아니라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그것을 느낀다면 묘한 구도가 나오게 된다. 히무로이드는 내 개 같은 가정사를 알았고, 나는 히무로이드의 개같은 한계와 처한 상황을 알았다. 타인이 아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냥 말해 보라고. 자. 생각 거치지 말고. 하나. 둘. 셋." 나는 테스트를 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너다."

"너."

 

아. 끝났다. 사내새끼들 특징. 서로가 병신이라 생각함.

 

완벽한 증거였다. 친구 먹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입을 떡하니 벌렸다. 너 따위는 전혀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며 츤츤대는 꼴이 돼버리다니. 겉으로는 싫어하지만 속으로는 친구라 여기는 구도가 나에게 적용되다니! 찐친이잖아? 아! 미친! 이게 진실인가? 꿈 아니야? 하지만 내가 아무리 아득바득 우겨도 우리는 서로를 똘추라 지정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어쩌겠어. 이게 내 카인 모양이지?

 

카텟이든 카펫이든 카카모라든 나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일단 블레인 이 귀찮은 새끼부터 내 앞에서 치워야 한다는 거야. 밀어서 잠금해제.

 

"여러분. 새로운 도전자가… 나타났습니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원망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손에는 실타래가 들려 있었다. 또 무엇이 불만인지 알 수가 없었다.

 

"블레인. 싸우자. 이 맞짱깔새끼야. 열차새끼야. 개새끼야." 하기와라 우시오는 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