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3

더 단크 타워 챕터 3 - 11

도타싫어! 2022. 11. 26. 18:47

 

 

일기

 

초고교급이 되는 기분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하루아침에 사람들이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과 역량과 태도와 삶을 강요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나와 같은 입장에 놓여 봤을까?

 

그런 이가 없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누구에게 물어야 답을 알 수 있을까…?

 

 

그 일기를 누가 쓴 것인지는 모르지만, 토키와 아유키는 그에게 공감이 갔다. 그 또한 답을 알고 싶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것을 제쳐둔 뒤 토키와는 다음 글을 읽기 시작했다.

 

 

…전세계의 신화를 막론하고 진명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고대 이집트의 신들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이들-신과 인간을 막론하고-에게는 대외 상의 이름과 함께 가까운 이들밖에 모르는 진명이 있었다. 그리고 어떤 수단으로든 이 진명을 밝혀내는 데에 성공한다면, 진명이 들통난 이는 알아낸 이들에게 커다란 약점을 잡혀 많은 것을 요구당할 수 있었다. 이름에 그들의 힘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신들에게 있어 이름만큼 큰 약점은 없었다. 정의와 지혜의 여신 마트조차 진명의 약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이 마트는 자신의 깃털과 죽은 이의 심장을 저울 위에 올려 사자의 죄를 측정하였으며, 이 심장의 무게가 깃털과 일치할 때 부활할 영혼을 일컬어. (Ka)라 하였다.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울며 용서를 비나이다… 누가 그런 말을 써? 무릎까지 꿇고… 일어나! 그러다 무릎 까지겠어!"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손을 내밀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잡기에는 염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망설이게 되었다. 이윽고 나는 한쪽 발을 땅에 짚고 몸을 일으키려다… 이끌리듯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물론 네가 잘했다는 건 아니야. 나도 잘한 건 없지만, 너도 마찬가지잖아. 내가 좀 모자라긴 했어도 말해주면 좋았을 텐데… 히무로."

 

나는 몸을 일으켰다.

 

"미안하다."

 

"…히무로."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말했다.

 

"나는 여기 있다."

 

"우린 어느 쪽도 완벽하지 않지만, 이번 일로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될 거야. 그렇지?"

 

나는 잠시 고민한 끝에 답했다.

 

"…당근이다."

 

"아하하하하하하핰!"

 

하기와라 우시오가 나를 보며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아. 비웃은 게 아니라 감탄한 거야. 해냈구만 히무로이드.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절대 못할 줄 알았는데! 사적인 감정을 버리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며 뻔뻔히 나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무엇을 근거로 삼았나?"

 

"네 평소 행실. 기계 같은 행실을 근거로 삼았다. 그야 아는 게 있어야지 말이야. 내가 너무 성급해 보이냐? 그래도 너보다는 신중했던 것 같아. 그냥 사람 얼굴이나 하는 짓 쓱 훑고선 프로필을 만드는 너보다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테지."

 

말한 적이 없었다. 하찮은 우정이니 가정사를 털어놓으라 종용한 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와 나 사이에 벌어진 간극은 당연한 일이었다.

 

"화해해서 다행이야. 마유즈미." 인공지능이 말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인공지능을 보며 웃었다. 손으로 V를 만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꼭 화해한 건 아니야. 아직 맘에 안 들어. 그러니 너 이리루 와."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자신의 옆 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나는 순순히 그 옆에 앉기로 하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나에게 명령을 내릴(심각한 무리가 없는 한) 권리를 얻었던 것이다.

 

"이… 혼자서 생각 많은 히무로 같으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밉살스러워. 이놈… 요걸 요걸."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손이 내 입술이나 볼을 꼬집어 뜯어버리려는 것처럼 슬그머니 다가왔다. 붙잡힐 만도 했으나 이윽고 그녀는 나에게 체벌을 주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내 어깨를 토닥였다.

 

"혼자 끙끙거리긴. 너만 잘났지 아주. 죄다 혼자 알고선 혼자 해버리려고? 그런 식으론 안 돼. 그러려고 나한테 총 준 거였잖아."

 

"네 말이 맞다. 내 잘못이다."

 

"너무 자책하진 말고. 앞으론 그러지 말아요. 착한 히무로야."

 

"알겠다." 그녀가 나를 왜 선한 사람으로 정의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나에 대해 몰랐다면, 그저 글씨만으로 내 인품을 판단했던. 탑에서의 살인 게임이 시작된 시점이었다면 몰라도 그녀는 나의 밑바닥을 보았다. 기만과 거짓말에 대해 알았다. 그럼에도 왜 여전히 그녀는 나에게서 선함을 보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도무지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질문은 내 입 안에서 말라죽었다. 

 

"자! 새 출발하는 의미로… 아스모나 먹자."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크래커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저 스모어를 먹자는 구실을 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스모어를 먹을 수 있다면 어떤 핑계라도 만들어내기 나름일 터였다. 중독자들의 심리가 전부 그 모양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하나 더.

 

"스모어 좋아하는 건 놀랐어. 진짜로! 너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 막 헤실헤실거리며 무너지는 게 아니라 충격받은 표정으로 간식이나 쳐먹으니 더 놀라웠어."

 

"설탕은 강력한 약물 중 하나다. 적어도 대몰락 이전에 흔했으며, 합법이었고, 중독의 여지가 비교적 낮은 약 중에서는 가장 높은 위치를 가지고 있다."

 

"맛이 있긴 해." 하기와라 우시오는 어느새 '스모어'를 하나 더 만들어 입에 넣었다.

 

"…나도 먹고 싶은걸. 입에 침이 고여." 나는 그렇게 말한 이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매끄럽고 견고한, 온전한 검은색의 다리가 교차하고 있었다. 인공지능은 우리의 탐식이 못마땅하다는 투였다.

 

"입… 없고. 침… 없고. 먹을 수도… 없고."

 

하기와라 우시오는 세 손가락을 편 뒤 '없고'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그만 놀려. 하기와라. 내 이해심도 한계가 있으니까."

 

"심(心?)" 손가락이 하나 더 펴진 뒤 접혔다.

 

"적당히 해 줬으면 좋겠는데." 언성을 높이지 않고 인공지능이 말했다.

 

"하기와라. 그만 좀 해! 23T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안절부절못했다.

 

"미안. 미안. 그런데 왜 그러는 거야? 23T가 여자라는 이야기는 또 뭐고. 입에 침이 고인다던가, 단 걸 먹고 싶다던가 하는 걸 보면 꼭 인간 같잖아. 애초에 기계가 간식을 먹고 싶어 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원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지. 하기와라. 그러니까 기계 농담 좀 그만해주지 그래. 나한테 감정이 넘치도록… 그러니까 사람 시절만큼 남아 있었으면 너는 이미 큰일 났을 걸."

 

하기와라 우시오는 입을 떡하니 벌렸다. 턱이 빠져나올 것만 같았다. 인공지능은 '허!' 라는 소리를 냈다. 기가 찰 때 곧잘 날 법한 음성이었다.

 

"왜 느닷없이 놀라? 너 아까 인간 시절의 23T가 보고 싶다며?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잠깐. 다시 생각해 보니 너 그 뒤로 계속 알고 있는 거였잖아."

 

하기와라 우시오는 어깨를 으쓱였다. 왜 저 제스처를 저토록 좋아하는 거지? 그가 저러는 꼴을 지금까지 대여섯 번은 족히 봤던 것 같은데. 그는 어쩌면 어깨를 으쓱이는 것을 일종의 치외법권이라 생각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면책 특권. 자신은 어차피 농을 지껄이는 자이니 비판을 덜어달라는 몸짓이었다.

 

"주어진 선 어쩌고. 고의로 코미디언 의무 저쩌고. 대충 이해가 됐지?"

 

인공지능은 그의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바라는 어떻게 너랑 친하게 지내는지 모르겠어. 인내심도 좋고, 너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일까? 그 정도로 네 농담이 재미있지는 않은데."

 

"아야." 말에 찔린 듯이 그가 외마디 목소리를 냈다. "이거 히무로이드 2호기한테 맞는 기분이야. 아. 맞네. 네가 찐또 안드로이드였어."

 

"나는 차라리 휴머노이드라 불러주면 좋겠어. 그 편이 그나마 사람 비슷한 느낌이니까. 기계 몸 안에 있을지라도 말이야…"

 

"…사이보그 비슷한 거야? 그게 아니면 상상이 안 가. 사람이 기계 안에 들어간다고? 아무리 기억이 지워졌다고 해도 그렇지 과학기술이 너무 진보했잖아. 혹시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상용화됐어?"

 

"안타깝게도. 아직."

 

"제기랄!" 하기와라 우시오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빌어먹을 날아다니는 자동차 언제 나와!"

 

"자동차가 왜… 날아다녀? 날개가 달려 있으면 비행기잖아."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이해하지 못했듯이. 나도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어째서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기와라의 질문에 대답하자면. 나는 사이보그가 아니야. 몸의 전체가 기계야. 사람이라고 불릴 만한 건 이제 정신뿐이지. 카텟 기관에서 '승화 실험' 이라 불린 프로젝트 때문이야. 승화 실험은 사람의 신체를 분해함과 동시에 그 의식과 영혼을 추출해 기계에 이식하여. 정신이 영원히 살 수 있게끔 하는 실험이었어."

 

"어어? 그럼 설마…"

 

"내가 실험체인 건 아니야. 실수로 가동된 기계 안에 들어가. 몸이 분해되었어. 내 기계 몸은 실제 장기 구조와 한 없이 가까운 설계가 되어 있었지만… 가상현실 안에서는 뭉뚱그려지나 봐." 인공지능은 마네킹을 연상시키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아쉽단 말이야. 생전 노바디는 자신의 얼굴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거든."

 

"그런 미친 일이 벌어졌어? 참 얄궂다. 야… 힘내. 놀려서 미안."

 

"사과를 받아줄게. 노바디에 대해 말하자면, 노바디는 내 사람 시절의 가명이었어. 나나시와 노바디는 늘 가명을 썼지. 새로운 관계마다 다른 가명을 쓰려 노력해서, 얼마나 있는지 말하려면 한 세월이 걸릴 걸."

 

"피곤하게도 살았네…" 하기와라 우시오의 말에 드물게 동의했다. "23T5U130도 가명인가 보지?"

 

"사실. 이것만큼은 가명이 아니야. 이름의 변형이지. 변명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거야."

 

"그럼 23T의 본명이. 니산티 고유이치산레이…? 고유이치산제로…? 어. 노바디라는 사람의 본명이 니산티 고유이치레이. 23T가 니산티 고유이치…"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결국 23T(니산티)라고 부르면 돼. 하나하나 뜯어서 발음하면 어려울걸. 그리고 노바디의 본명과 내 본명은 달라."

 

"왜 그딴 식으로 번거롭게 사냐? 노바디라는 사람 말고 네 본명도 따로 있어?"

 

"나야 노바디의 가명을 많이 이어받았고, 오랜 시간동안 이름이 없어 단지 인공지능이라 불렸어. 하지만 결국 나는 나만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지."

 

"너는… 나의… ………야."

 

"그걸 변형한 것이 23T5U130인 거야. 이해가 돼?"

 

"가능하다. 허나 왜 굳이 네 이름을 변형한 거지?" 굳이 가명을 쓸 필요가 없이 23T5U130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면. 어째서 '인공지능의 본명'을 쓰지는 않는지가 의아했다.

 

"별 이유는 없어. 발음이 유쾌하지 않은 이름이거든. 굳이 이상한 한자를 쓴다던가, 독음과 한자가 맞물리지 않는다던가, 어감이 좋지 않던가. 그런 이름과 같은 맥락이었어." 인공지능이 대답했다.

 

"이름. 이름. 다들 이름이 그렇게 중요해? 만나는 사람마다 가명을 새로 쓴다던가… 왜 그래야 했는데? 카텟 기관이 다 그런 식이진 않을 거잖아."

 

"나나시와 노바디는 대몰락을 겪으면서 주변의 수많은 이들을 떠나보냈거든.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지."

 

"세상에… 다 무너졌어. 모조리 무너져 버렸어! 어떻게 이럴 수가… 안 돼. 안 돼!" 그가 소리쳤다.

 

나는 팔을 뻗었다. 잔해를 향해 달려 나가려는 그를 막았다. 내 목소리가 떨렸다. 매번 보는 것이 몰락인데.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파괴는 그렇게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는 걸까? 재건은 늘 느려 터지고 골골거리고 조금씩 쌓이는데. 어떻게 파괴는 그 여러 방향에서 한 번이라도 성공하면 그대로 이뤄져 버릴까?

 

"가. 가지 마. 너까지 휘말려. 멈춰! 저… 정신 차리자고. 더 무너지면 너까지 깔려!"

 

"그래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구해야 하잖아. 저기 안에 다 갇혔어! 겐타 씨. 나오키 씨. 고쇼 씨도 저기 있는데!"

 

"뭐 하게. 네 곱상한 손으로 콘크리트라도 번쩍 들게? 정신 차려! 멀어지지는 못할 망정!"

 

"아. 안 돼. 또야…? 또냐고.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또 살아남았잖아… 또 우리만 살았어. 이게 대체 몇 번째지…?"

 

"이 정도로 큰 공동체만 셀까. 아니면 임시 거처나 텐트에 있던 사람들만 셀까." 나는 그를 당기며 말했다. 그의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한 수다였다. 그의 이타심이 너무 강해지게 두면 일이 번거로워지곤 했다. 환자인 척을 하는 어린둥이들의 비수에 몇 번을 겨누어져 봤던가.

 

"큰 공동체만 세도 이게 다섯 번째야. 예전에 그 코스트코가 무너졌을 때 몇 명이나 살았지…?"

 

"네가 모르면 나도 모르는 거야. 이제 도망치자. 이 근처에 철물점이나 제철소가 있으려나…"

 

우리는 또 도망쳤다. 또 간신히 살아남았고. 또 우리만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에 그쳤다. 이번 침공은 심지어 폭도들이 한 일도 아니었다. 다른 생존자 그룹이었다. 둘이 합쳐지기엔 백화점이 비좁았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살갑던 그들이. 하루아침에 돌변하였다. 백화점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들은 사제 폭탄을 가지고 있었다. 건물의 구조도 모르면서 어린아이에게 폭탄을 붙였다. 왜 그중 누구도 시한장치를 조절할 줄 몰랐던 걸까? 조절할 줄도 모르면서 그 폭탄을 왜 가지고 다녔지? 다른 사람에게서 약탈한 게 뻔한 폭탄이었다.

 

제철소 안에서 먼저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 못 버티겠어. 아무런 의미도 없어."

 

"무슨 의미? 살아남는 의미?" 나는 그의 정신상태를 우려했다. 사실. 트라우마로 무너지는 자들이 수두룩했다. 그가 버텨오는 것에 한계가 다가옴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뾰족하게 해 줄 일은 없었다. 나는 상냥하기보단 날이 선 사람이니까.

 

"잠을 못 자서 그렇게 약한 소리 하는 거야. 나를 봐. 일단 잠을 많이 자면 어지간한 건 다 넘길 수 있게 돼."

 

"울면서."

 

나는 그때 놀라지 않았다. 언젠가는 들킬 거라고 생각했다. 훌쩍이는 소리를 영원히 죽일 순 없으니까.

 

"배게 맡에서 울면서… 너도 지쳤으면서…"

 

"…어쩌겠어. 나도 사람이거든. 눈앞에서 사람이 떼죽음을 당하는데. 어제까지 얘기도 나눴어. 이 곰돌이 보여? 이거 미카가 나한테 선물로 준 건데… 나는 이제 미카를 영원히 몸에 폭탄이 붙은 꼴로 기억할 거라고.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응?"

 

"이젠 그만해야 하는 거야… 이제 내가 죽는 건 질렸어…"

 

"네가 죽는다니?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들이 죽으면서. 내가 함께 죽어. 그들과 알고 지낸 내가 죽고. 내가 준 나 자신이 끌려들어가."

 

"…우리는 일부분밖에 남지 않고."

 

무언가를 가진 채 그들은 영영 떠나버렸다. 나는 미카를 가지고 있는데 이제는 미카가 없다. 나는 아프고 잃었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지만, 우리는 너무 잃었다. 이제는 판돈이 없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얼굴을 가릴까? 목소리를 바꿀까? 눈에 띄지도 않을까?"

 

"이름을 없애자."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런 결론이 나와?" 하기와라 우시오는 머리를 긁적였다.

 

"노바디는 설득력 있다고 느꼈어. 지친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름을 여러 개 만든 거야. 계좌를 나누듯이 말이야. 그들이 서로 부를 가장 큰 이름; 노네임. 그리고 노바디가 만들어졌고. 그것 말고 수도 없어. 그가 우리아라면 그녀는 헬레나였고, 그가 엑스라면 그녀는 마키나였고, 그가 네임리스라면 그녀는 네벌더레스였어."

 

"이름이 그토록 중요한지는 모르겠군."

 

"설명하기에 복잡한 일이긴 해. 과도하게 관념적인 일이고 말이야. 하지만 분명 잘 통했어. 우리는 지하 기지에 꼭꼭 숨었고, 다른 사람과 접촉할 때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었지. 진짜 이름조차 주지 않고 결부되고자 했으니 안전할 수밖에. 그렇게 오랫동안. 노네임과 노바디는 함께 지냈어."

 

하기와라 우시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나나시… 노네임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나시도 네가 그렇게 됐을 때 충격 좀 받았겠는데."

 

"…단지 충격 정도가 아니야. 노네임은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어."

 

"사귀던 사람을 잃었으면 그럴 만도 하지. 우리 애비도 애미가 자기 심장 꺼낸 이후로는 더 난폭해졌거든. 나 때문이라면서."

 

"어우."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자신도 모르게 말하고서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노네임과 노바디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어." 인공지능은 고개를 저었다.

 

"왜? 나는 너희들이 당연히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생각했어. 지들끼리 드라마 찍으니 배겨?"

 

"이름 없는 남자는 캐롤 브라이트에게 홀린 것 같다만." 나는 말했다.

 

"그래서 23T는 Ex-machina가 되는 거지. 이해가 가? 엑스 마키나."

 

마유즈미 나데시코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어느 쪽도 그의 농담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만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어깨를 갸우뚱 기울이자 나도 그렇게 하였다.

 

"이게 정말." 23T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쫓고 하기와라 우시오가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모욕일 터였다.

 

"으하하악! 무서워. 무서워라. 취소! 취소오! 그런데 내 추론이 이상해? 노바디랑 노네임 얘기는 아무리 들어도 친구 이상으로 찐했는걸?"

 

"친구 이상은 맞았어." 인공지능은 그를 쫓는 일도 번거로운 듯이. 다시 모닥불에 자리를 잡았다. "심지어는 연인 이상이었지."

 

"그건~ 네 생각이고요."

 

"조용히."

 

왜 우리는 친구로 남은 것일까? 대몰락 이후 출산율은 기이하리만치 올랐다. 피임도구 유통의 어려움도 요인 중 하나였겠지만, 모두가 자신의 삶을 불태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리라. 100년짜리 인생을 설계할 여유는 누구에게도 없었다. 모든 이들이 욕망에 충실해졌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서로를 취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혈기왕성한 두 청소년이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서로의 생활을 공유하였는데. 우리는 일선을 넘지 않았을까?

 

왜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은 걸까? 사실 나는 예쁘장한 편이었다. 이 정도면 차고 넘치지 않는가. 침침하고 곧잘 꺼지는 화장실의 조명 아래에서 몇 번이고 생각했다.

 

"저기요? 마네킹 얼굴로 그런 소리 해도 안 와닿아요. 아아아. 쏘리. 쏘리!"

 

"초는 그만 치고 이야기를 듣지."

 

그런데 왜 노네임은 내게 고백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노네임을 사랑하기에. 혹은 내 쪽에서 그에게 감정이 있기에 한 생각이 아니었다. 내가 그를 향해 품은 감정은 결코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는 내게 연애적인 감정을 품지 않았다. 왜일까?

 

그가 남색가일 가능성도 고려해 보았지만, 그는 분명히 이성애자였다. 그는 내가 여자임도 인식했고, 성취향에서 특이한 점을 보지도 못했다. 나는 이윽고는 당혹스러운 마음마저 느끼게 되었다. 같은 찻잔을 나누어 마셨는데도 수도에서 언제쯤 석회질이 나오지 않을까 말하는 그를 보며, 이 관계의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정상이었다. 비정상적인 것은 나였다. 그에게 끌리는 것은 일종의 나르시시즘 때문이리라 나는 자가진단을 내렸다. 그는 나의 반쪽이었기 때문이다.

 

"노바디와 노네임은 닮아 있었어. 기계를 잘 만지고, 꽤 똑똑하며, 명줄이 질기지. 운도 좋아. 다른 사람들을 뒤로하고 잘도 살아남았으니까. Am I blue를 듣고, 불렀고, 여름축제를 그리워했지. 릴케의 시와 홍차를 좋아했어. 그래. 그들은 서로가 있어서 좋았어. 그 점을 가장 닮았던 거야.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너무 잘 알게 되어선 매미 자석처럼 붙었어."

 

"카텟이 되었군." 나는 말했다.

 

"맞아. 둘의 운명은 묶였어. 둘은 단순히 개인이 아니었어. 한 사람이 되어버렸지. 노네임은 조금 더 감성적인 쪽. 노바디는 조금 더 이성적인 쪽이 된 거지. 너희들은 연인 이하의 친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죽은 친구가 들어갈 몸을 만드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아니. 노바디는 노네임의 일부였어. 그리고 그는 그녀를 영영 잃어버렸던 거야."

 

"그치만 23T 네가 있잖아. 사실상 노바디랑 똑같은 사람인 걸!"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말했다.

 

"나는 대체품보다 못해. 노바디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 건 오히려 악재야."

 

"기계 몸에 들어갔지만 사람이라며? 왜 아까부터 노바디라는 사람이랑 너랑 은근슬쩍 구분해? 구분하지 않을 때도 또 있고." 하기와라 우시오가 물었다.

 

"모호하기 때문이야. 나는 노바디의 영혼이 그대로 기계에 들어간 걸까, 아니면 정신 복사본과 재능의 입자가 탑재된 휴머노이드일까? 관점에 따라 다르지. 나조차도 몰라. 그러니 우리는 혼란을 느꼈던 거야. 나는 노바디가 그렇게 두려워했던, '사람의 자리를 차지한 복사본'이지. 그렇기에 노네임은 나를 긍정할 수 없어. 그러면 노바디를 외면하는 꼴이 되니까. 외통수지.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우리는 잃어버린 반쪽을 그리워하지만 결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지. 여전히 그는 나의 감성이지만 카텟은 이미 부서졌어. 노바디가 죽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나는 그녀의 부서진 그릇을 그대로 이어받았어. 연결은 끊겼는데도 여전히 나는 그가 필요해. 그와 함께해야만 나는 아주 작은 감정이나마 느낄 수 있어."

 

"나는 탑에 처음 떨어진 너보다 지금의 네가 감정 구사나 자아 표출에 있어 더욱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이름 없는 남자와 관련되었기에 그럴 수 있는 건가?"

 

인공지능의 이목구비 없는 얼굴이 내 쪽을 향했다.

 

"내가 지금 뭘 느끼는지 알아?"

 

"일종의 질투는 느껴지는군." 나는 부정적인 감정의 발현을 읽었다. 자신의 것을 빼앗아가는 한 유령에 대한 질투였다. 이미 죽었는데도 승리자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 오히려 죽음을 통해 그에게 있어 여신의 자리에 올라버린 한 여자에 대한 음심이었다.

 

"나나시는 자신의 반쪽을 채우려 해. 예전에 노바디를 되살리려 한 것처럼 캐롤을 되살리려 하는 거야. 나는 뒷전이지… 어쩌겠어? 내가 남자였어도 캐롤에게 반했겠지. 라푼젤이 걸어 다니는걸. 돌이켜 보면, 둘이 사랑에 빠지는 건 내가 막을 수 없는 일이었어. 하지만… 그는 원래 나와 함께였어. 내가 대체품이 아니라고. 캐롤이 나의 빈자리를 메꾼 거야…"

 

인공지능의 음성이 조금씩 작아졌다.

 

"지금 추하다고 놀리면 때릴 거냐?"

 

"너 여기에서 당한 부상은 밖에 나가면 낫는다는 거 알지?"

 

"어어? 뭘 암시하는 것이지?" 하기와라 우시오는 얼어붙었다.

 

"아무튼 내 이야기는 이게 끝이야. 별로 재미는 없잖아. 나는 나나시를 붙잡고 싶어. 나나시가 영안로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돼. 기계 안에 들어간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잃고 그저 차갑게 식어버린 기계와 똑같아지겠지. 영혼이 꺼지는 거야. 영영…"

 

"히무로이드 비슷해지는 건 끔찍한 일이겠지." 하기와라 우시오는 고개를 저었다.

 

"결코 좋지는 않다. 혹시 차우셰스쿠에 대해 알고 있나? 이자는 루마니아의 독재자였고, 출산율을 올리기 위해 피임을 금지하고 낳아야 하는 아기의 할당량을 제정했다. 결과 출산율은 올랐으나 수많은 아이들이 유기되어 고아원에서 자랐지. 이 아이들이 적법한, 적어도 아기가 받아 마땅한 조치를 받았을까?"

 

"받아야지!"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소리쳤다.

 

"10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입을 열지 못했다.

 

"열악한 곳은 한 없이 열악했지. 문제는 아기들에게 필요한 것; 따뜻한 침구류, 영양분을 제공하더라도 아이들이 살아남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기가 사랑을 받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죽는다. 죽지 않는다면 영구적으로 손상을 입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람에게는 기본적인 감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모든 것에서 결부될 수는 없다. 그러려는 시도 속에서 사람은 어릴 때 죽는다. 살아남더라도 기형이 된다."

 

"너는 살아남아 있잖아." 인공지능이 말했다.

 

"기형으로 빚어졌기에 살아 있는 것이지. 한 없이 홀로 서더라도 살아남게끔 설계되었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나는 운이 좋아 은인을 만났지. 개조가 완전하지 않은 것 또한 요인일 것이다."

 

"아이고. 어려워라… 히무로이드. 한 번 들어나 보자. 너는 인체실험 때문에 그 꼴이 된 거야? 떡밥을 끼워 맞춰 보자고. 자… 대몰락이라는 일이 벌어진 뒤로 사람들은 다 조금씩 이상해졌다. 경찰도 무너졌고, 군대도 해산됐고, 정부도 맛탱이 갔으니… 초인을 믿는다던 그 또라이들도 들통나지 않고 세를 불린 거지?"

 

"그렇다. 초고교론자라 불린 이들이다. 대몰락은 초고교급 학생 한 명에서부터 시작된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곧 초고교급은 두려움과 외경심의 경지에 올랐다. 그리고 초고교급이 그토록 강력하다면 세상을 재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그들은 생각했지. 그러나 단순히 다수의 재능을 가진 자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개인에게 지나치게 강한 힘이 주어질수록 그 사람이 타락했을 때의 위험 또한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미 그런 사례가 있었지만, 지금 그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초고교론자들은 한 사람에게 다수의 재능을 주입하며 동시에 결점을 심었다. 한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앗아간 것이다. 누군가는 인내심을. 누군가는 자존력을… 나 같은 경우에는 감정의 구사와 공감 같은 것들이다. 단순하게 들리겠지만, 이 결점 하나만으로 로의 일원들은 타인들로부터 분리된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에게는 말한 바 있었지. 여덟 명의 초인. 로라 불린 그들을."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개의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협력해야만 하는 체계…"

 

"안 그러면 다 하자 있는 개인일 뿐이다 이거지? 흠. 그래서 네가 그 모양이군."

 

"로의 체계는 기본적으로 서로가 서로의 무언가를 대체할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름 없는 남자가 인공지능이 감성이 되었듯이. 판단자는 제어자의 자존이 되는 식이다. 그렇게 여덟 명이 된 뒤에야 비로소 완성되지. 카를 과학적으로 나누려는 시도다. 야만적이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꼭 로여야 서로 채울 수 있는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물었다.

 

"로에게는 로밖에 없기에. 그리고 서로 채울 수 있게끔 설계되었기에 로가 가장 나은 방법이다. 사실상 로에게는 자유가 없었기에 유일한 방법이었지. 그러나 내 생각에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로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개조를 무력화하고 극복할 만한 긴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면, 그리고 카와 소중한 이들의 도움이 함께한다면 언젠가는… 결실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 그렇구나…?"

 

"그렇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와 나는 스모어를 먹었다.

 

"아. 너희 진짜 맛나게도 먹는다." 인공지능이 말했다.

 

 

 

 

 

곰. 그 말을 듣고 떠올린 형체가 있었다. 모노쿠마. 폭도 측에서 대량 생산한 병기.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대조되는 흉포함. 그 역할에 맞게 짜인. 문명을 파괴하기 위해 세심히 나뉘는 종류.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의해 죽었고, 노네임과 노바디 또한 그것들에게선 도망치려 애썼다. 무기도 없는 판국이었으니 불안할 만했지만. 나는 오히려 차분했다.

 

"두 번째 깨달음은 대몰락을 배경으로 하는 걸까?"

 

"뭐라는 거냐? 괜히 나서지 말고 잘 숨어 있기나 해. 그러다 죽으니까. 저놈. 한쪽 다리가 어설픈데… 다쳤나? 굶주린 건 확실해. 살기가 느껴진다…"

 

카이다는 쿠나이의 구멍에 손가락을 끼우고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네가 말하는 곰은 모노쿠마야. 대몰락 시대에 양산된 살인 로봇이고. 두 발로 걸으면서 한쪽은 희고 한쪽은 검어. 발톱이 날카로우니까 조심…"

 

내 말은 곧이은 으르렁거리는 전조와. 뼈가 떨리게 만드는 울부짖음이었다. 입김과 진동이 느껴지는 듯한 짐승의 울음. 나는 문득 몇몇 맹수들이 생물체의 근육을 수축시키고 공포에 떨게 만들도록 특수한 파동으로 짖는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호랑이 같은 것들. 그리고 내가 들은 것이 바로 맹수의 그 외침이었다.

 

뭐지? 모노쿠마가 저렇게 짖던가? 아닐 텐데. 쿠마 쿠마 우뿌뿌뿌거리는 우스꽝스러운 놈들인데…?

 

여전히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와중 어둠을 가르고. 저주파의 주인이 달려들었다. 갈색 털을 보자마자 나는 소리쳤다. 거의 나자빠질 뻔했다.

 

"진짜 곰이야?!"

 

곰이 다가옴과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밝아졌다. 나는 쇠퇴한 도시에 있었다. 끊어진 전깃줄과 무언가가 들러붙은 콘크리트. 벗겨진 페인트. 수도 없이 봐온 것들이었다. 그 사이로 카이다 쿠로하 또한 달렸다. 나는 그녀의 웃음을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웃음 뒤에 있는 것은. 저주파였다. 근육을 경직시키는 저주파. 사람의 탈을 쓴 맹수가 다른 맹수와 맞부딪혔다.

 

카이다가 맹수의 두 턱을 잡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거기서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 카이다는 곰의 턱을 짓눌러 그녀를 물게 만들게끔 하지 않았다. 카이다는 쿠나이를 곰의 턱관절에 깊게 찌르고선 체중을 실어 팔을 그었다. 곰의 턱에 숭덩 날이 파고들었다. 목까지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들렸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다그치며 그 처형을 지켜보았다.

 

규격 외의 강함. 내가 카이다에게서 본 건 그것이었다. 곰이 팔다리를 버둥거리자 내 눈에 곰의 왼쪽 앞발이 들어왔다. 기계. 조잡하지만 분명 기계였다. 누가 붙인 것인지는 몰라도 제대로 된 축과 관절 처리도 없고 심지어는 녹이 슬었으며, 원래 있어야 할 어깨에는 진물이 줄줄 흐르고 고름이 차 있었다. 누가 시술을 해 줬는지는 몰라도 어설펐고. 해주지 않으니만 못한 시술이었다.

 

기계 팔이 달렸지만 열악하기에, 곰은 그저 무거운 기계추를 팔에 달고 있는 꼴이었다. 나는 그제야 곰의 갈비뼈를 보았다. 수척한 뼈를. 뱃가죽과 등가죽이 달라붙은 모습을.

 

카이다는 곰의 아래턱을 붙잡았다. 곰이 비명을 질렀다. 나는 카이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했으나, 턱에서 배어나오는 핏물과 턱이 불가능한 각도로 젖혀지고 있음을 보자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카이다의 가학적인 성향은 비롯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줄곧 웃고 있었다.

 

카이다는 곰의 아랫턱을 밑으로 젖혔다. 턱은 180도를 이루었다. 곰이 구슬프게 울었다. 그러나 카이다의 손아귀가 쿠나이를 든 채로 윗턱만이 달린 아가리를 헤집자 그 울음은 먹먹해졌다. 곰이 몸을 떨었다. 그리고 곧 쓰러졌다.

 

카이다는 자신의 손에 들린 곰의 하악을 바닥에 던졌다. 핏물이 사방으로 튀는 딱딱한 소리가 울렸다. 반쪽만 남은 에리식톤이었다.

 

"모노쿠마? 로봇? 무슨 헛소리냐. 병신아." 카이다는 자신의 팔에 흠뻑 묻은 피를 옷에 문질러 닦았다. 늘 저런 식이었다면 저 보라색 피 무늬의 자켓에는 온갖 종류의 박테리아와 진드기가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세 시대에 카이다를 던져 놓으면 그게 흑사병의 시작일 것이다.

 

"기계 팔이 달린 곰이라니… 별 게 다 있네. 약골. 이것 좀 봐라. 팔에 이름표까지 붙어 있어. 샤딕이랜다."

 

"샤딕…?"

 

그 이름을 입 안에서 우물거리며 나는 주변을 한번 더 둘러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두 번째 깨달음의 장소가 왜 여기인 거야?"

 

"왜. 어딘데? 거의 폐허로구만. 기계 팔 달린 곰이 있는 폐허. 너 이딴 장소를 어떻게 아는 거냐? 별 고생도 안 하고 살았을 놈이."

 

"여기에 살았으니까 그렇지. 캐롤 씨가 여기와 연관이 있다고? 왜…?"

 

"이딴 똥통에서 살았단 말이냐? 네가?"

 

"그래. 여긴 러드(Lud)야. 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러드."

 

"두 번째 깨달음의 배경이기도 하죠!" 패트리샤의 목소리가 울렸다.

 

"뭐. 여기도 조금 버티면 알아서 다음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거야?" 나는 말했다.

 

"아뇨. 다음 깨달음으로 직접 걸어가셔야 해요. 체력이 좋으시면 순식간에 갈 수 있겠죠. 그다음엔 마지막 깨달음의 과정이 필요해요! 그 뒤에 부활이 이루어질 거예요!"

 

"다음 깨달음은 어디에 있는데. 야. 기계. 장난해? 길 안 터놔? 모노로그 끄나풀이면서 제대로 안 하냐고. 나는 그놈한테서 직접 일을 받은 거야!"

 

"아니 뭐… 빤히 길이 있는데 내놓으라고 우기시면 어떻게 해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갈 곳이 너무도 많았다. 부서진 건물 안. 사거리. 터널. 지하철로. 그런데 빤히 길이 있다고?

 

카이다는 투덜거리게 둔 채. 나는 불길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위로 올렸다. 그리고 땅을 내려다보았다.

 

구름이 일자로 뻗은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이름 모를 철새들이 V자로 날지 않고 레밍이 그러듯 일렬로 나는 꼴을 본 적이 있는가? 오염되어 쥐조차 폐사하는 토양에 더러운 색의 화초가 피었는데. 그마저도 한 선을 따라 나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내 눈에 그것이 보였다.

 

빔 형성(Beam forming). 다른 말로는 운명 미로. 필연의 길. 기만의 공간. 영안로 안은 실제 세계를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반영하고 있었다. 정말 내가 다시금 러드에 선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쉽겠어. 정말 길이 트여 있으니… 여기로 가면 돼."

 

"길이 있대도요! 이름 없는 남자분은 찾으셨잖아요!"

 

카이다는 패트리샤의 목소리를 듣고선 빔의 길을 향해 걸어가는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미친 놈아. 이젠 허공을 보고 중얼거리고 있냐? 정신줄 잡아! 캐롤년 못 되살리면 우리 둘 다 좋을 일이 없다고. 못 되살려도 되니까 적어도 히무로 그 새끼한테 위협은 줘야지!"

 

"그래. 너야 모르겠지. 하… 골치 아파. 너 빔 형성에 대해 얼마나… 모르겠지. 그냥 나를 따라서 걸어. 저 구름을 따라오기만 하면 돼."

 

"야. 아직도 이해를 못 한 것 같은데. 네가 내 뒤에 오는 거야. 어디서 길앞잡이가 되려 들어!"

 

카이다가 나를 따라오며 바락바락 소리쳤다. 

 

"너는 기억이 없겠지만, 예전에 이상한 과학자들이 실험을 한 번 한 적이 있었거든? 사람을 냉동시키고 여러 약물을 주입해 가사상태와 의식의 경계를 찾아내선. 사후세계를 파헤치려는 실험이었지. 대몰락 시대니 가능한 일이었어. 그때 실험체를 자청한 자가 한 말이 이거야. 만물이 빔을 섬긴다."

 

"빔? 광선 말하는 거냐?"

 

"대들보(beam)를 말하는 거야. 만물이 빔을 섬겨?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게 얼마나 보기 싫은 일인데."

 

카이다는 나를 따라 고개를 올리더니 눈을 땡그랗게 떴다.

 

"기막힌데… 이딴 건 살면서 처음 봐. 저게 북두칠성이지?"

 

"어디서 주워들은 말 써먹지 마. 별도 안 떠있는데 북두칠성은 무슨."

 

"망할. 네가 이걸 알아봤자 얼마나 알겠어? 너나 어디서 주워들은 빔 형성이니 대들보니 개 같은 소리 집어치워."

 

"빔 형성이다. 좋은 징조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징조야! 점점 확신이 생겨. 너희들을 영입하는 것은 분명히. 분명히 좋은 일이었어. 만물의 빔이 증거라고!"

 

차량 안에서 시라유키 히메리가 신나 소리쳤다. 방탄 처리(많은 총이 멸종했기에 무색해졌지만)된 유리 너머로 나와 노바디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지가 너무도 오래되어서 나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본 게 언제인지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주변의 거동수상자나 부비트랩. 위험한 요소들을 두리번거리느라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했다. 그 위에 아무도 없음을 알기에.

 

다시 본 하늘에는 구름이 일자로 껴 있었다.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보이지 않는 구름 밑으로는 새가 날았는데. 이 모든 새들이 일자로 즉슨 구름의 선에 일치하게 날아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쭉 뻗은 도로마저 일직선이었다. 도로의 벗겨진 페인트 선은 얼마 남지 않았으나 분명히 도로를 따라 흘렀다. 그것마저 직선이었다.

 

"구름이 저런 식으로 끼는 건 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 노바디가 말했다.

 

"세상 물정에 어둡군? 빔 형성이야. 만물이 빔을 섬긴다 알아? 모르겠지…?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운명의 길이 트인 거야. 새나 구름이나 자연물 같은 것들은 운명에게 이끌려 그쪽으로 향하지. 사실. 우리도 자연물이니 우리도 운명에게 이끌리는 거고."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어떤 원리로 저러는 거야?" 내가 물었다.

 

"내가 말한 게 곧 원리야! 이 빔 형성이 뭘 뜻하는지 알아? 이 길을 따라서 벌어지는 일은, 이 길 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곧 언젠가 벌어질 숙명적인 일이라는 거야. 이루어져야만 하는 일이라고. 이 길 위에서 사람들은 부모와 재회하고, 원수를 만나고, 평생의 목표를 이뤄. 정말이야! 내가 실험해봤어!"

 

"그래도 길일뿐이야. 벗어나면 그만 아닌가?"

 

"아니. 이해가 안 되나 본데 결국 일어날 일이라고. 잠깐 벗어나 봤자 돌고 돌아 그 길에 서 있게 돼. 심한 경우는 어떤지 알아? 길에서 못 벗어나. 공간이 부분적으로 일그러진다고 해야 하나? 옆으로 뛰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빔 위고. 반대로 뛰었더니 사실 그 방향이 운명이라는 식이 돼. 사실. 굉장히 무서운 현상이지. 자기 충족식 예언의 길이니까. 내 말 믿어도 돼. 마법과 예언과 기적이 부활한 세상이 도래했으니."

 

"…느낌이 좋지 않은걸." 노바디가 말했다.

 

"느낌이 좋은 거야! 이 길 위에 서는 영광이 몇 명에게 주어질까 봐? 신이 있다면-죽었겠지만 그건 차치하고-그 자가 우리에게 카메라를 가져다 대고 있는 거야.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어. 그런데 너희를 데려가는 길이 이토록 확실하게 뚫려 있다니. 이 끝에 뭐가 있을지 궁금하지 않아?!"

 

"그래. 이 끝에는 뭐가 있을까."

 

나는 빔의 길을 따라 있는 한 진흙탕에 발자국들이 하나 찍힌 것을 보았다. 카나리의 것이라고 하기엔 발이 너무 컸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의 발자국은 큰 발자국보다 조금 작았다.

 

그저 러드에 사는 주민이 진흙에 발을 담근 것이리라. 애초에 러드를 가상현실에 불러온 것에 불과할 테니 너무 마음을 쓰지는 않았다.

 

"하. 이 길만 따라가면 된다고? 쉬워 죽겠네. 야. 약골. 업혀!"

 

"뭐? 싫어." 생리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카이다는 곰의 피를 뒤집어쓴 데다가. 자켓에도 그게 덕지덕지. 팔에도 그게 묻어 있었고 얼마나 자켓을 안 빨았는지 알 수 없는 피부병 매개체기 때문이었다. 먼지떨이로 툭툭 털면 이가 우수수 떨어지지 않을 것인가.

 

"닥치고 업혀! 격차를 최대한 벌려야지!"

 

"아. 싫다고. 싫어. 싫어어어어!" 나는 몸을 비틀며 저항했지만, 결국 카이다 쿠로하는 나를 붙잡았다. 아. 너무 싫다.

 

 

 

 

 

 

 

"…심심해 죽겠네. 하기와라랑 마유즈미가 다 영안로로 들어갔으니… 하기와라 전용실에서 영화 보기도 그렇고. 칸나즈키랑 놀까?"

 

이바라 쿠리스는 숙소에서 뒹굴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칸나즈키 시노부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미래. 정해진 미래. 이바라는 칸나즈키의 그 말이 궤변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모리를 따라 자신이 죽는 일이 없게끔 후루미나미 편에 합류해 놓고선 핑계를 대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칸나즈키는 보급 특권을 열어 놓으려 애썼고, 후루미나미의 탈출 장치를 빼앗으려고 했다.

 

대체 얘 뭐 하는 애지. 돌이켜 보니 이바라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나마 말이 잘 통하는 애라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니 웬 영적 존재에 씌여서 점도 치고 미래도 보는 괴력 꼬마 여자애가 있었다.

 

"영안로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뭐 못 보내나."

 

이바라는 다이얼로그의 메뉴를 뒤적거렸으나 경주마와 후원자 제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간식이라도 크레딧으로 사 먹을까 고민하던 그녀는 몇 분이 지나지 않아 크레딧 상점에서 파는 것들을 아무런 지성 없이 들여다보았다.

 

"사랑의 열쇠? 만능열쇠 뭐 그런 건가."

 

왜 그 하트 모양의 열쇠가 이상하리만치 비싼지는 알 수 없었다.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쓸 수 있는 열쇠'라니. 말장난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의 열쇠 따위는 잊어버리고 이바라는 다이얼로그의 스크롤을 내리기를 반복하다가. 스르르 잠에 빠졌다.

 

 

 

 

 

"어서 와. 파란 풍선."

 

"여기에 있는 내용들은 전부 사실이야?" 토키와는 종이를 팔락거리며 후루미나미에게 보여 주었다.

 

"모노로그가 준비한 함정일지도 모르지. 네 사고를 한 방향으로 몰아세우게 만들게끔 하려 드는 것일지도 몰라. 물론 함정이 아닐 수도 있고."

 

"제대로 말해. 죽여버리기 전에."

 

이런. 잘못 건드렸다간 동반자살하기도 전에 죽겠군. 후루미나미 나몬은 생각했다. 토키와 아유키는 텅 비게 강한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바로는. 전부 사실이야. 네가 얼마나 많이 아는지는 몰라도 전부 말이야. 어때?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지 그래."

 

토키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류다 이거지? 후루미나미는 화제를 바꾸기로 하였다.

 

"이제 와서 묻는 거지만. 너 왜 피어싱을 한 거야?"

 

후루미나미는 토키와의 귓볼을 뚫고 있는 한 쌍의 금속을 보며 말했다. 아무런 변명의 여지없는 치장용의 피어싱이었다. 토키와는 자신의 귓볼을 만지작거렸다. 말랑거리는 살점 속에 서늘하고 딱딱한 피어싱이 파고들었음이 느껴졌다.

 

"허용되지 않은 일이니까."

 

"아하. 교칙이었나? 그런데도 모범생인 자네는 왜 귀를 뚫고자 하였지?"

 

"이게 나한테 어울린다는 생각은 한 적 없어. 친구들을 따라서 한 거야. 그저 즐겁고 반동적이었던 무리를 따라서. 튀어나온 돌이 되는 것보다 그냥 땅에 함께 박혀있는 게 편하거든."

 

"다 같이 귀 뚫었는데 잘도 안 걸렸네."

 

"당연히 걸렸어. 그 자리에서 다 빼야 했지. 몇 번 끼고서 다 같이 등교를 했을 때마다 빼야 했어. 그런데 한 번은 나만 피어싱을 끼고 등교를 했던 거야. 그 때는 아무도 나에게 피어싱을 빼라 마라 설교하지 않더라. 왜인지는 모르겠어. 혼자 툭 튀어나왔으니 눈에 뜨여야 마땅한데. 다들 나를 보며 생각했을 텐데 말이야… '왜 피어싱을 한 거지?'라며. 친구들도 그랬어. 왜 너만 안 걸린 거냐고. 학생회장의 권력은 무섭구나 하며 투덜댔지."

 

토키와는 피어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돌돌 마는 버릇과 유사하다고. 후루미나미는 생각했다.

 

"풍기 위원장도 경고만 하지 차마 압수는 못했어. 그때 알게 된 거야. 학생회장의 자리는 허울이 아니었어. 적어도 피어싱 정도야 넘어갈 수 있는 자리였어. 특별하니까.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다는 거지. 업무도 많고 하는 일도 많고… 사람들은 알아서 이유를 가져다 붙였겠지만. 이 피어싱의 허용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해. 그냥 피어싱이 아니야. 다들 압수당하는 그 액세서리가 나에게만 허용되는 건 전혀 공정하지 않아. 아주 작은 특혜마저 불공정함이고 불합리함이지만 다들 투덜댈 뿐. 나에게서 피어싱을 앗아갈 수 없었지.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

 

"대충은."

 

후루미나미는 토키와를 보며 웃었다.

 

"남들보다 우월한 사람이 된 느낌이지. 그 아주 조그마한 권리가 나의 광휘가 되는 느낌. 그게 피어싱을 끼우는 이유로군. 충분하고도 넘치지. 이해해. 토키와. 특별함을 가진 사람의 기분 어때? 그게 초고교급의 삶이야. 네가 가지고 있는 그 문서들도. 네게 특별함을 주겠지."

 

"…나중에 다시 오겠어."

 

토키와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

 

"잠깐.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토키와? 어어? 토키와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