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단크 타워 챕터 3 - 10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흠. 이거 괜찮은데."
"내가 그랬잖아. 이거 맛있다고! 맛을 느껴 봐! 바삭한 크래커와 뜨겁게 녹아내리는 마시멜로에 누텔라가 모든 걸 부드럽고 달게 감싸 준다고."
"그래… 은근히 단 맛이 나오는 것 같아…" 카이다 쿠로하는 알쏭달쏭한 수수께끼를 풀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맛을 어떻게 하면 잘 느낄지 감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은근히 단 맛이 나온다니. 너 진짜 혀가 둔하구나? 매운 거라도 많이 먹었냐? 매운 걸 너무 많이 먹으면 혀의 신경계가 손상돼서 점점 맛을 느끼기 어려워진대." 주워들은 이야기라는 것은 덧붙이지 않았다.
"매운 음식… 주면 먹지." 그야 통각은 맛이 아니기에 카이다 쿠로하 또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카이다가 매운 음식을 즐기지는 않았다. 그녀는 음식에서 비롯되는 풍미와 깊은 맛은 느끼지 못한 채 얼얼한 통증만을 느끼기 때문이다. 달콤함도 짭짜름함도 없는 순수한 고통. 카이다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극이었으나 그 이상은 되지 못했다. 완곡한 자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 왜 그렇게 맛을 몰라?"
"죽여버린다. 야. 내가 간식 좀 먹었다고 해서 기어올라? 네가 한 일은 나도 똑같이 할 수 있어." 카이다는 카나리가 주눅 드는 걸 확인하고 마시멜로를 구우려 했다. 그리고 여러 번 실패했다. 입을 닫고 눈치만 살피는 카나리가 이윽고 소리치게 될 정도였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닥치고 보고 있기나 해!" 카이다는 오기가 차올라 마시멜로를 구웠다. 그리고 또, 또 다시 실패했다. 그것을 보다 못한 카나리가 나무 꼬챙이에 마시멜로를 하나 끼우고 모닥불 안에 넣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표독스러운 위협뿐이었다.
"너 가만히 있어! 이 푹신푹신한 건 내 거야! 오직 내가 할 일이라고!"
"다 태워먹으면서 무슨…! 안에 대놓고 넣는 게 아니라 근처에서 살금살금 그슬리는 거야. 자. 이렇게!" 카나리가 자신의 꼬챙이를 가리켰다. 마시멜로의 겉이 캐러멜 라이징 되며 먹음직스러운 갈색으로 변해갔다. 카이다는 대꾸 없이 자신의 마시멜로를 모닥불에 더 깊숙하게 넣었다. 순수한 흰색은 탄화되어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카나리는 자신보다 황소고집이고 의미 없는 자존심을 부리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이건 너무한 게 아닌가? 나도 다른 사람한테 저렇게 보이려나? 하는 식으로 그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문득 카나리는 우울해졌다. 나나시 그놈이 어이없게 여길 만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나이토를 죽여놓고 이제 와서 되살리겠다고 하니 무슨 놈인지 이해할 수 없을지도. 심지어 그는 나이토를 보디가드로 쓰려하는 것도 아니었다. 카나리는 곧잘 우둔하며 근시안적이라 여겨지지만 나이토를 되살릴 경우 자신의 보디가드를 해주리라고 온전히 믿지는 않았다. 그 정도의 멍청이는 아니었다. 고작 나이토가 자신을 용서해줄 거라 믿는 수준의 멍청이였다.
야. 너… 젠장. 어디 가는 거야? 돌아와…
이리 와가 아니라 돌아와였다. 카나리는 나이토가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어쩌면 과다 해석일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그는 당시의 일을 되돌리고 싶었다.
나는 혼자야. 돈만 많은 혼자. 그런데 탑에선 돈이 잘 안 통하니 당연히 이렇게 되지. 칸나즈키랑 더 친하게 지낼걸… 나이토가 무상으로 도와주겠다고 할 때 받아들일걸. 캐롤이… 뭐라고 했더라.
저기… 카나리 씨. 이건 제 생각인데요. 혹시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시는 건가요?
탑에서 그런 걸 원한 적은 없었으나, 카나리는 처음으로 자신이 함께할 사람을 원하게 되었다고 느꼈다. 그가 만약 그럴 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처지를 일종의 기회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약해빠진 몸뚱이와 의미 없는 수표 다발들 따위로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에 대한 기회. 하지만 그는 기연을 얻어 시계공의 기술을 전수받은 그때에서부터 조금도 성장하지 못한 채였다.
카이다는 카나리의 의중을 모른 채 반항하듯 마시멜로를 태웠다. 이제는 먹겠다는 최초의 목적마저 상실한 뒤였다. 그녀는 단순히 카나리가 하는 식으로 마시멜로를 먹기 싫었기에 마시멜로 자체를 먹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반동 의식과 반골을 넘어서서 그저 반발이었다. 아무런 의미조차 없는 일이었다.
나도 이런 건가? 자존심을 부린다고 이런 의미 없는 짓을 해왔던 거야? 옆에서 보니까 알 수 있어. 나는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나에게 내민 손을 쳐내 왔던 거였어. 당연히 혼자가 될 수밖에.
하지만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배신당할 거라고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것보단 처음부터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것이 무언가를 가진다는 것의 맹점이었다. 자본가라면 알 수 있다. 돈을 가지면 가질수록 만족감이 올라가고, 든든해진다. 마치 시간과 삶을 쌓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끊임없이 움직이는 돈의 흐름과 파도를 관측할 때면 그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언젠가 스러질 거라는 믿음이 차오르면, 차고 넘치는 돈을 잃을 날이 두려워지게 된다. 그렇기에 악착같이 벌어들이고 악착같이 일해야만 했다.
그리고 탑에 온 카나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카나리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돈을 주지 않고도 당연하다는 듯 유지되는 관계란 어떻게 생긴 걸까? 고용했기에 배신하지 않는 비서나 하인들이 아니라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바치지 않더라도 나를 지켜줄 사람이 있을까? 가족마저 돈을 위해 혈육을 팔아넘기는데. 과연 가족보다 가족 같은 사람이 그에게 나타날까?
카나리는 그런 일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나마 새로운 가족에 가까웠던 이도 사라진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도와줘… 똑딱맨."
카나리는 여전히 똑딱맨을 생생히 기억했다. 똑딱맨은 연령을 알 수 없는 수준의 노인으로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아닌 가죽과 잘 다린 옷의 편안한 냄새가 났으며, 회중시계의 아름다움과 작동 원리와 조형에 통달한 시계의 신선 같은 인물이었다. 똑딱맨은 자신을 똑딱맨이라고 소개했기에 카나리는 그의 진짜 이름도 알 수가 없었다. 똑딱맨은 그저 똑딱맨이었다. 늘 중절모를 썼고 기가 막힌 샌드위치를 만들 수 있었다. 카나리는 그와 피 한방울 이어지지 않았지만 자신이 그의 손자 같다고 느꼈다.
그리고 똑딱맨은 어느 날 똑딱맨 하기를 그만두었다.
"케이토야. 이제 네가 똑딱맨이다…"
그러나 그는 똑딱맨이 아니라, 그저 못난이였다.
"똑딱맨? 뭔 개소리냐?"
카이다는 이제 마시멜로를 모닥불에 던져 넣기 시작했다. 카나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카이다가 좋아서 깔깔 웃는 꼴은 보기 싫었기에, 카나리는 눈물을 꾹 참았다. 애초에 많이 참아왔으니 참지 못할 것도 없었다.
"혼잣말이야."
"미친놈." 카이다는 그렇게 대꾸했을 뿐이었다.
눈을 뜨고 처음 듣는 말은 카이다의 욕설이었다. 즐겁지는 않았다. 몸에 남아있던 피곤함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잠에 시달릴 틈이 없었기에 나는 조금의 졸음도 느끼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잔 거지?" 나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10분. 20분? 아니면 30분쯤 잤을 거다." 카이다 쿠로하가 말했다.
이딴 걸 대답이라고 하는 건가. 내 표정이 문득 굳었다. 카이다 쿠로하의 꼴을 보니 막대기를 모닥불 안에 집어넣은 것부터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카이다가 극단적인 수준의 백치가 아닌 이상에야 마시멜로가 불에 타버릴 수 있다는 건 알 것이 아닌가. 그러나 카이다는 마시멜로를 태우고 있었다. 아마 자기만의 괴상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긴 꿈이었는데. 정작 잠든 시간은 짧았어." 나는 모닥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기운을 느꼈다. 왜인지 혼자가 아닌 느낌을 받았다. 당연히 혼자는 아니었다. 카이다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고 웬 카나리마저 내 눈앞에 있었다. 지금이야 떨어져 있지만 인공지능도 있었다. 왜 나는 여전히 외로울까.
결국 모든 사람은 혼자라던가 하는 시시콜콜한 답이 나올 것 같아 생각을 그만두었다. 나는 과연 인공지능이 얼마나 가까워졌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사실 카이다가 한 번 얼어붙어서 낭비된 시간이 있었다. 인공지능이 단신으로 오고 있다면 따라잡고도 남았다.
혼자 오는 게 아니거나, 착오가 생겼다. 둘 다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인공지능은 나를 구하러 오지 못하고 있었다. 모닥불에서 보내야 하는 1시간이 지나면, 결국 나와 카이다는 앞서갈 수밖에 없었다…
인공지능은 나를 막으러 올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분명 카이다에게 납치되어 있다. 그것과 내가 캐롤 씨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것은 서로 맞닿은 별개의 일이었다. 카나리는 나와 카이다를 앞서고 있었다. 내가 구조되어서 영안로에서 나가게 된다면, 카나리에게 부활을 기회를 내주게 될 터였다.
나는 구조될 수 없었다. 차라리 구조되지 않을 심산이었다. 카이다 쿠로하만을 영안로에서 내보내던가 영안로 안에서 죽여 깨어나지 못하게 만든 뒤, 다른 이들과 함께 캐롤 씨를 되살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기대할 수 없었다. 애초에 인공지능은 캐롤 씨를 경계해왔다. 나를 구하며 동시에 캐롤 씨의 부활을 막으려 하는 것일 테지.
인공지능에게 일행이 있다고 가정하면 전망이 더욱 나빠졌다. 탑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좋은 이들이었다. 누군가가 독단적으로 특정인을 되살리기보다 서로 의논과 합의를 마친 뒤 영안로에 들어가기를 원할 터였다. 나를 영안로에서 꺼내고 투표라도 할지. 애초에 영안로를 사용하는 게 맞는 일인지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었으리라.
그게 옳은 일이었다. 뒤처질 테지만, 또 욕심만 가득한 이들에게 패배하고 캐롤 씨는 영영 죽어버릴 테지만… 옳은 일. 무해한 일이었다. 그럴 바에야 앞서 나가야만 했다. 나는 카이다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후루미나미, 카나리처럼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해 독선의 길을 걷고자 했다.
"카이다. 너는 기억을 찾기 위해 모노로그에게 협조하고 있는 거였지?" 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카이다는 눈을 크게 뜨더니 살기가 등등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한테서 들었지? 어떻게 안 거야? 모노로그냐?! 날 이딴 식으로 쳐냈단 거냐고!"
"그렇게 경계할 일은 아니잖아. 나 스스로 알아낸 거야. 너는 미도리카와와 야가미에게 저지른 짓도 기억을 못 하고, 네 기억이 잘리는 과정도 봤으니 사실 당연히 알 수 있어. 모노로그는 우리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있으니… 네가 내통자가 될 법도 해. 그건 내가 판단하거나 비난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야."
"같잖게 이해하려 들지 마. 너는 아무것도 몰라. 창놈 새끼가… 차라리 욕을 해. 그럼 같이 욕해줄 테니까. 어디서 감히. 호의호식하고 자란 너 같은 게…!"
"나는 너를 싫어하지만, 그 한 부분만큼은 너를 비난하지 않아. 내가 미쳤다고 널 돕진 않겠지만 응원은 해 줄게. 잘해봐. 카이다. 진심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냐. 비꼬기는…!"
"야! 너 제정신이야?" 예상치 못한 반론을 들었다. 카나리의 것이었다.
"나는 탑에 온 이래로 가장 제정신이야." 정말 그랬다.
"카이다 쿠로하는 내통자잖아! 널 납치했어! 그런데 뭐가 어째? 응원을 한다고? 완전히 미쳐버린 거야. 너! 아무리 친한 사람이 죽었어도 무너져버리면 안 돼!"
"카이다는 해변에서 온갖 짓을 했으니 캐롤 씨의 죽음에 어느 정도 일조한 사람이기도 하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 셌다간 복수할 사람이 끝도 없어. 카나리. 너마저 날 피하지는 못할 거야. 후루미나미와 손을 잡은 사람 중 하나니까…"
내 피가 차갑게 식었다. 카나리를 영안로에서 따라잡는다면 어떻게 해 버릴까 고민하다가 멈추었다.
"그래도 당장은 아니야. 하루라도 더 빨리 복수하려 들었다간 자기 목만 조를 뿐이니까. 나는 무너지지 않았어. 어느 때보다 유연하고 단단해진 거야."
"뭐라는 거야… 무섭게." 카나리는 늘 겁을 집어먹었다.
"미친놈들… 오늘 너희 왜 이래. 이상한 거라도 주워 먹었어?" 카이다마저 그렇게 말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나는 그들이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기억을 잃고 빈 채로 사는 것이 어떤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왜 카이다마저 저런 반응을 하는 것일까. 왜 자신의 퍼즐 조각을 전부 끼워서 하나의 미싱 파츠도 없는 그림을 보고 싶은 갈망을 공감하지 못할까?
어쩌면 모노로그가 저지른 기억 소거가 어떻게 적용되었는지의 문제일지도 몰랐다. 탑 안의 모든 사람들은 결국 몇 년간의 기억을 잃고 고등학생 시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미 성인일 사람들이 고등학생의 몸에 갇혔지만 그들은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의 현재는 분명 과거임에도 그들이 잃은 것은 미래라 인식되기 때문이다. 나의 현재에는, 과거가 없었다. 나는 그 부자연스러운 공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빈 것을 채우고자 애쓰게 되었다.
카이다에게는 이 정도의 고찰이 불가능했다. 그러니 이런 종류의 공상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똑바로 걷는 이들 사이의 절름발이로서. 나는 생각했다.
'사람이 완전하게 되기 위해, 혹은 자신이 잃은 것을 되찾기 위해 저지르는 일은 그의 영역 안에서만큼은 모두 정당화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폭론일지라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이해 못 하겠으면 잊어버려도 돼. 너와 나는 영안로 안에서 협력하게 될 거다. 그 사실을 상기시켜준 것뿐이야."
"협력은 지랄. 임시 동맹이다.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너희 둘 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영안로 안에서는 다쳐도 안 죽는다며 아주 기세가 등등하겠지만, 바깥에서도 그럴 수 있나 볼까? 응?"
"그래. 여기서 나가면." 애초에 카이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카이다는 무력에만 치중된 인물이었고, 자기 과거에 나타난 회색 인간에게도 맥을 못 추리기 때문이었다.
여차하면 버리고 내 실타래만 챙겨야지. 나는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카이다가 기억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가질만한 동기고 고결할 정도였지만, 그게 나에게마저 정당화가 되지는 않았다. 내통자의 녹을 먹겠다면 나에게 배신당하는 것 또한 상정해야 하겠지.
그러나 당장은 아니었다. 그녀에 비해 나는 턱없이 약할 뿐만 아니라 대응할 무기도 없었다.
내 최후의 미련이었던 당신에게. 나의 일부를 남깁니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흰 장갑 없는 맨손.
이것은 무기가 아니다.
"이제 첫 번째 깨달음이니까 아직도 많이 남은 셈이지만… 아무튼 너는 큰일 난 줄 알아."
"저기요. 일단 거듭 말씀드리지만 싸우시면 안 돼요. 알겠죠?" 패트리샤의 목소리가 모닥불 근처에 울렸다.
"안 싸우고 있는데?" 나는 위를 보며 말했다. 내가 봐야 할 곳은 위가 아니었다. 다른 방향. 문을 통해 들어온 그들이 있는 방향이었다. 애초에 패트리샤는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나시!"
기계적인 소리. 반가운 음성이었다. 그리고 껄끄러움을 느끼게 되어 안타까운 음성이기도 했다. 나는 모닥불 너머에서 걸어오는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뭐야! 네 놈이 더 와?!" 카나리가 말했다.
곧 뛰어오는 두 사람, 그에 따라 뛰기 시작한 한 사람, 걸어오는 한 사람으로 나뉜 네 명이었다.
"와 보라며? 내가 왔다. 카이다 쿠로하!" 인공지능이 연보랏빛 윤곽으로 변했다.
"나는 이름 없는 남자를 확보하겠다!" 히무로가 그 뒤를 따랐다. 내 생각보다는 늦었지만 네 명치고는 빨리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기세만큼은 누구보다 든든했다. 그러나 패트리샤는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휴식 공간에서의 싸움은 안 돼요!"
네 명이 동시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물리적으로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이 아니라, 눈앞에 무언가가 튀어나와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멈추었다. 하기와라의 욕설이 크게 울렸다.
"씨이바! 애미애비잖아?!"
"끼아악! 귀신!" 마유즈미는 소리치며 우뚝 멈춰 섰다.
두 사람은 뭘 보고 있는 거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패트리샤의 의도대로 되었다. 다시 추진력을 얻고 카이다를 덮치려던 인공지능에게. 패트리샤가 크게 소리쳤기 때문이다.
"싸우시면 영안로에서 추방합니다. 다시 말할게요. 영안로에서 추방할 수도 있어요!"
"이름 없는 남자. 싸워라!" 히무로가 곧장 소리쳤다. "싸움을 걸어라! 의도적으로 걸면 되는 것이다. 추방될 수 있도록! 실타래를 빼앗기더라도 관리자는 너를 영안로 속에서 내보낼 수 있다!"
굉장히 빠르고도 좋은 생각이었다. 내가 카이다의 납치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그런 식으로 영안로에서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관리자의 입장에서 속이 뻔하게 보이는데 나를 내보내 줄 리가 없었다.
"패트리샤는 모노로그를 위해 일하잖아. 그렇게 쉽게 날 보내주진 않을 거야. 히무로." 나는 말했다. "애초에 모노로그의 목적은 내가 캐롤 씨를 부활시키게 만드는 거니까. 이유는 몰라도."
"내가 여기에 오게끔 만들기 위함이다. 이름 없는 남자. 나는 탈출 장치를 손에 넣어… 일종의 지식을 떠올렸다. 그에 의하면 캐롤 브라이트는 부활해선 안 된다. 절대로. 내가 이것을 떠올릴 줄 알기에 모노로그는 카이다 쿠로하를 시켜 너를 납치하게 만든 것이다. 탑의 인원들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논의하기 전에 뿔뿔이 떨어트려 놓기 위해서."
"왜 캐롤 씨가 부활해선 안 되지?" 심기가 조금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알 수 없다. 나조차도 잊어버렸다. 강물에 손을 담갔을 때 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물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듯, 그 이유 자체를 잊어버렸다. 하지만 명확하다. 캐롤 브라이트는 부활해서는 안 된다. 너는 카이다 쿠로하에게 저항해야만 한다."
"그런 식으로 무작정 말한다고 해서 신뢰감이 생기지는 않아. 이해도 안 되고. 심지어는 저항도 안 돼. 보여? 카이다 쿠로하잖아. 나는 무슨 짐짝처럼 끌려다닌다고." 나이토를 꺾었고, 인공지능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차라리 비위를 맞춰. 나나시. 걱정하지 말고… 내가 널 반드시 구해서… 영안로 밖으로 꺼내 줄게." 인공지능이 카이다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비위를 맞추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몸무게에 대해 이야기하면 꽤 화를 낸다는 것마저 알게 되었고, 영안로에서 나가면 뼈와 살이 분리될 듯했으니까.
인공지능은 좋은 친구였다. 노네임과 인공지능은 결국 화해했을까?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을 데이터 쪼가리라고까지 부른 사람을 이토록 도와주는데. 좋은 친구가 아닐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과분할 정도였다.
"고맙지만 괜찮아… 나는 캐롤 씨를 부활시킬 생각이니까."
네가 달갑게 여기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지만. 이라는 말이 내 입 안에서 말라죽었다.
"이야.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이거 가지고 싸움날 줄… 으엥?! 카나리. 네가 왜 여기 있냐?!"
그래. 당연히 저런 반응이 나올 것이다. 내가 했던 것과 같은 반응이.
세 명이 달갑지 않은 기색으로 모닥불에 앉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머지 한 명은 달갑지 않은 기색이 아니었다. 약간 긴장하긴 했지만, 둘러앉는 것 자체에는 거부감이 없어 보였다.
"싸우지 마시고. 다 같이 간식이라도 드세요. 이야기라도 나누시고요!" 패트리샤의 말이었다.
"어? 이거 뭐야. 스모어 재료들 아니야?"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간식들을 보며 하기와라가 말했다. "패트리샤 진짜 씹에이스네? 뭘 좀 아나 봐!"
"스모어? 그게 뭔데. 하기와라?"
"내가 저번에 마시멜로 먹고 싶다고 했던 거 기억나? 모닥불! 이거랑 똑같은 모닥불이었잖아."
"마시멜로? 포도랑 계란이랑 설탕? 윽!" 마유즈미가 혀를 내밀었다.
"그딴 거 아니라고! 잘 봐. 이거야! 이게 얼마나 푹신푹신하고 달콤한데. 자. 먹어 봐!"
"먹기 싫은데…"
"아. 먹어 보래도? 츄라이. 츄라이!"
"먹기 싫대도오!" 마유즈미가 투덜댔다.
"지금 이런 실없는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니다." 히무로는 말했다. "이름 없는 남자. 캐롤 브라이트를 되살리지 마라. 경고하겠다."
"실없어? 숨 쉬듯 무시를 하시네. 대단해요!" 나는 하기와라의 말을 뒤로한 채 히무로에게 물었다.
"경고? 네가 무슨 권리로?"
"무고한 사상자들을 내지 않게끔 노력할 권리다. 판단력이 흐려진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아라. 혹시 모노로그가 너에게 미리 귀띔해주지 않았나? 캐롤 브라이트가 부활할 수 있다고? 심지어 카이다 쿠로하를 시켜 너를 영안로 안으로 데려오기까지 했다. 모노로그는 무언가를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되살아난 캐롤 씨는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뜻이야? 그런 가정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해. 네가 탈출 장치에 정신이 오염되어 탑에 해를 끼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말도 안 된다고 느끼면 그게 내 심정이야."
"네 의사를 존중해주고 싶으나 양보할 수 없는 일이다. 캐롤 브라이트는 부활해선 안 된다. 나는 그것을 막기 위해 널 뒤쫓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아라. 네가 그렇게 행동하게끔 조종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 신중히 생각한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야. 히무로. 줄곧 나였다고. 칸나즈키랑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납치된 거지만, 나는 설령 납치되지 않았더라도 어떻게든 칸나즈키를 제치고 영안로로 향했을 거야. 오히려 훨씬 빨랐을 거고. 나는 누군가의 꾐에 넘어가 있는 게 아니야…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직시한 거야. 거짓 없이 솔직하게."
"그렇다면 십중팔구 저열한 욕망 때문이겠군."
"맞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나는 한 마디를 굳이 덧붙이려다가 참았다. 캐롤 씨를 되살려선 안 된다고? 과연 마유즈미도 그렇게 생각할까? 너와 캐롤 씨를 저울질하면 과연 마유즈미는 누굴 택할까?
그 와중 카이다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 이 자식이 네 친구냐? 사람이 아닌 주제에. 사람이랑 친구라고? 약골 너도 어지간히 친구가 없나 봐! 얼마나 심심했으면 기계를 만들어서 친구 자리에 놓냐?" 노네임 시절의 행적을 생각하면 사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사람이 아닌 건 너도 똑같잖아." 인공지능이 대꾸했다.
"허튼소리! 내가 아무리 그래도 너랑 비교될 처지야? 누가 봐도 기계인 주제에!"
"적어도 난 사람의 존엄성을 버리지 않았어. 기계의 몸 안에 갇혔지만, 너처럼 자신을 헐값으로 팔지는 않았다고. 애초에 쇳덩이보다 빨리 가라앉는 네 몸이. 정상적으로 보여?"
"기계의 몸 안에 갇혔다고? 이 얘기는 좀 듣고 싶네. 말해줄 수 있어?" 하기와라가 말했다.
"나중에. 들을 만한 이야기도 아니야."
"미안하지만 내 몸은 살아 있거든. 너랑은 다르게 심장도 뛰고 피도 흘러. 뭐 어때? 힘이 세면 그만인데. 그리고 내 말 믿어. 살아있는 게 죽는 것보다 훨씬 나아. 훨씬 더 기분 좋고 할 수 있는 일도 많다고. 봐. 나는 간식도 먹을 수 있다?"
카이다는 마시멜로를 뭉텅이로 집어 입에 넣으며 웃었다. 그녀에게 마시멜로 실험을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해졌다. 15분을 기다리면 마시멜로 하나를 더 주겠다고 말하면 아마 그녀는 실험자를 죽이고 마시멜로를 가져가지 않을까. 웃긴 일이었다. 마시멜로 실험의 맹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오직 절박하지 않은 이들만이 실험자를 믿고 기다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해서 마시멜로가 하나 더 떨어질 거라는 것을 믿지 않았기에 아이들은 마시멜로를 먹었다. 카이다는 누구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좋으시겠네. 맛도 못 느끼면서."
"…너는 대체 어떻게 아는 거냐?" 카이다는 씹고 있던 마시멜로를 뱉었다.
"웩! 더러워!" 마유즈미가 말했다.
"카텟 기관 새끼들은 대체 정체가 뭐야? 네가 그걸 알고 있으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 그걸 아는 사람은 조직 말고 어디에도 없단 말이다. 어떻게 아무도 모르는 걸 당연하다는 듯이 아는 거지?"
"너희도 아는 게 있어서 캐롤 씨의 부활을 막는 거야?" 나는 물었다. 나 또한 카텟 기관 소속이었으나, 떠올리지 못한 것은 무언가를 아는 기색의 둘에게 밖에 물을 수 없었다.
"이 얘기도 좀 듣고 싶어. 대체 왜 캐롤이 부활하면 안 돼? 나야 나이토 지지하긴 하는데 일단 들어는 봐야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끌려다니는 건 이제 질색이야. 히무로. 뭐라도 말을 해 줘야 해. 왜냐면 너는 이미 대몰락을 숨겨 봤거든. 이번에 시원하게 말을 해 줘야 다른 사람들이 아 얘한테 딴맘이 없구나 하고 신뢰를 회복하게 될 거야. 안 하면 똑같은 거고."
"이유는 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탈출 장치는 노출되는 순간 정보를… 갈무리할 수 없을 정도의 정보를 주입시킨다. 과도한 양이었기에 나는 대부분을 잊어버렸지만, 캐롤 브라이트가 부활해서는 안 된다는 것만큼은 기억한다. 모든 것을 잊어버려도 그것은 잊어버릴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중요한 일이다. 이해가 가는가?"
"너는 그걸 우리가 아 그렇군요 하고 믿어줄 것 같냐? 네가 지금 얼마나 수상해 보이는지 알아? 네가 자세한 이유도 모른 채 아무튼 안 된다고 우기는 게 캐롤을 되살리면 안 될 이유가 된다니. 씨팔 제정신이 아니잖아! 어떻게 된 게 카텟 기관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이상하지?"
"싸잡아 폄하하지 마. 나 같은 사람들도 있어." 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나나시." 이런.
"하기와라. 말이 좀 그래… 우리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이잖아."
"애초에 그걸 못 믿겠다는 거야. 마유즈미 너도 정신 차려야 해. 안 그러면 반드시 배신당한다. 그래서 왜 카이다에 대한 정보가 그렇게 많아? 23T. 진짜 너 뭐야? 우린 너희들에 대해 너무 몰라!"
"마유즈미 나데시코 또한 카텟 기관 소속이었다."
"아. 그랬지… 맞아." 히무로가 무덤덤하게 말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파장은 전혀 정적이지 않았다.
"내. 내가?!" 마유즈미 본인이 가장 놀란 듯이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눈은 땡그래졌다. 하기와라는 목소리를 크게 내기 시작했다.
"아니 너도 카텟이야?! 아니 다 카텟이야! 카텟 기관 아닌 사람은 나뿐인가? 아니. 나도 카텟이야?! 이거 진짜 좀 아닌데!"
"하하하하! 꼴들 좀 봐라. 아주 머리통이 뒤집히셨네!" 카이다는 그렇게 웃었지만, 나는 그녀의 몸이 한 번 움찔하는 것을 보았다. 카이다에게마저 놀라운 일이었던가?
"떠올린 건가. 이름 없는 남자."
"어느 정도. 네가 그랬듯이." 하지만 우리 모두 서로에게 얼마나 떠올렸는지를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이미 갈라선 편이기 때문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는 카텟 기관에서 나를 돕고 있었다. 이것은 최근에 떠올린 것이다. 이제 와서 털어놓게 되어 미안하군."
"…정말 최근에 떠올린 거 맞아. 히무로? 나나시. 너는 알면서 왜 말해주지 않았어?" 마유즈미가 물었다.
"대뜸 너희들의 과거에 대해 말해준다고 해서 믿을 것 같지가 않았고, 너희가 해변에 있으니 말해줄 수가 없었어. 대화할 틈이 더 있었으면 모를까 히무로는 탈출 장치를 만졌고 나는 영안로에 들어왔지." 내겐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히무로에게도 그런 것이 있나 궁금해졌다. 또 더 나은 선을 위해서?
"사실이다. 당장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언제쯤 진짜를 말해줄 거야?" 마유즈미의 목소리가 울컥 떨리며 무언가를 참는 기색이 드러났다.
"나는 너에게 거짓되지 않을 것이다." 주저 없는 대답이 나왔다.
"…나중에 계속 이야기하자. 아무튼… 카텟 기관에 대해 더 아는 사람 있어?"
"나는 시라유키 히메리에 대해 알아." 어쩌면 히무로 본인보다 내가 잘 알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과장이 아니라 그것이 사실이었다. 그가 만난 것은 그가 만난 때의 시라유키 히메리였다. 사람이 바뀌어선 인공지능에게 사과마저 한, 동물을 거리낌 없이 태워 죽이고 노바디마저 죽인 사람과는 달랐다. 달라 보였다.
"히메리? 메리? 혹시…" 하기와라는 무언가 알아챈 듯 입을 연 뒤 이윽고 닫아버렸다.
"무엇을 알지?" 히무로의 목소리는 놀랄 만치 평소와 같았다. 극도로 냉랭해진 때의 목소리는 시라유키 히메리에 대해 언급했음에도 똑같았다. 사실 조금은 동요하리라 예상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니, 놀라게 되었다.
"너에게 말한 적이 있잖아. 내가 그녀를 살인자라 부른 이유가 뭔지 알아? 시라유키 히메리의 잘못이기 때문이지. 너는 충분한 의도와 목적을 가졌던 이들만이 살인자라 불렸다고 말했지. 내 생각은 달라. 책임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살인자라 불린 거야. 피가 묻은 건 시라유키 히메리의 손이라고."
"전혀. 그녀를 음해하지 마라. 경고하겠다."
"카텟 기관에 대해서도 더 말해 볼까. 나는 카텟 기관이 기관이기 전에, 카텟이 카텟이기 전부터 그곳에 있었어. 내가 기관의 시초 중 한 명이라고. 히무로."
그러니 나는 너보다 카텟 기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이름만 번지르르한 가짜 운명과 가짜 공동체에 대하여. 그리고 시라유키 히메리가 꽁꽁 숨겨온 그림자에 대해서도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인공지능이 말했기 때문이다.
"나나시… 그러지 마. 이미 다 끝난 일이고, 히무로는 그 일에 책임도 없어."
나는 그러지 말기로 했다.
"…진짜 꼴 한 번 복잡하게 꼬였네. 아직 못 푼 거 있는데. 카나리 너는 왜 여기 있냐?" 하기와라가 물었다. "모리 살리러 온 건 아닐 거고, 나이토도 아닐 거고. 또 캐롤이야? 캐롤이 예쁘장하긴 한데, 다들 이렇게까지 들이댈 정도인가?"
"카나리는 나이토를 살리려 하는 거야. 심지어는 나와 카이다보다도 빨랐어. 자기 말로는 그냥 살리고 싶었대."
"…어차피 이해 못 할 것 같으니 머릿속에서 지워버려야겠다. 카이다는 뭐 내통자 때문에 이러는 거지? 이렇게 된 김에 한 번씩 이야기 들읍시다. 왜 여기 왔어? 참고로 나는 달리 여기에 갈 사람 없고, 이 싸이코랑 친구 돼야 해서 그래."
"말해줄 것 같냐?" 카이다가 코웃음 쳤다. 그래서 대신 내가 말해주기로 하였다.
"카이다의 동기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거야. 내통자가 된 이유 자체가 그거거든. 우리가 당한 기억 소거와는 별개로 카이다는 계속 기억을 잃어왔고, 모노로그는 그 기억이나 정보를 카이다에게 넘기며 대신 도움을 받는 거야."
"아. 이 새끼가 진짜!" 카이다가 내 입에 손을 뻗었다. "기어오르려 하지 마. 찌질한 새끼가! 눈알을 뽑아서 피눈물이 흐르게 만들어 줄까?!"
"가만히 있어 봐 봐. 내통자가 된 건 카이다 입장에서야 당연할지도 모르는 일이야. 기억 상실로 사는 건 정말 텅 빈 느낌이거든. 가슴이 뻥 뚫려서 그 안에 손을 넣을 수 있을 것만 같아. 내가 기억을 되찾으려고 지금 발버둥 치듯이, 카이다 쿠로하 또한 줄곧 혈안이 되어 있었던 거야… 그리고 캐롤 씨는 과거의 나를 알아. 카텟 기관만큼 큰 비중이 있을지도 몰라. 나는 그녀를 다시 탑으로 데려와야 해. 그래야 내 모든 맥락을 되찾을 수 있어. 그게 내가 멈출 수 없는 이유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고 말했을 텐데." 히무로가 말했다.
"몇 번을 말해도 내 대답은 똑같아. 나는 그녀를 다시 보고야 말겠어. 나를 이해해달라고는 바라지도 않을 테니, 차라리 방해하지는 마. 그건 너와 나 모두에게 나쁜 일이니까. 너희가 나를 카이다의 마수에서 구하더라도 나는 캐롤 씨를 되살리려 할 거야."
"그건 너 혼자만의 욕심이다. 한 없이 이기적이군. 그녀의 존재가 불러올 파장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건가?"
"나도 생각 좀 하게 해 줘. 단순히 선문답을 나누는 게 아니라, 서툰 예언자나 종말론자의 입을 빌리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이유를 듣고 받아들이게 만들어 달라고. 너도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거잖아… 네게 남은 수가 몇 번이고 내게 강요하는 것뿐이라면. 우리에게는 대화의 여지가 없어. 나는 곧 이 모닥불을 떠날 거고… 너희의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빠르게 도망갈 거야."
"나는 끝까지 너를 붙잡을 것이다. 네 의사와는 관련이 없다. 네가 기억의 공백을 느껴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안된 일이지만, 예외를 둘 순 없다. 참작해줄 방법도 없다. 이름 없는 남자. 지금이 유일하게 원만히 일을 끝낼 수 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카이다 쿠로하에게 최대한 저항해라. 그러지 않는다면 너와 나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동행마저 위험에 빠질 뿐이다. 앞으로 마주할 영안로의 환경이 우리에게 친화적이라 기대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직감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히무로의 총에 맞게 되리라.
히무로의 눈에서 나는 무자비를 보았다. 내가 이윽고 그에게 패배하여, 그의 신발을 부여잡고 제발 캐롤 씨를 되살릴 수 있게 해 달라 빌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결의를 보았다. 그 정도로 확고하다는 것에 놀랐다. 히무로는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느꼈다. 하나의 벽처럼.
영안로에서 나갈 수 있을까조차 확신할 수 없는 내게는 지나치게 강대한 적이었다. 백발백중의 총솜씨를 가진 비인간.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왜. 대체 왜인지조차 모르면서 캐롤 씨가 부활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어금니를 깨물자 치열이 맞물렸다.
"그러면 다 같이 위험에 빠질 수밖에." 나는 말했다. 그렇게 합의점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다들 느꼈겠지? 캐롤년의 부활을 막고 싶다면 유혈사태뿐이다. 우릴 따라잡아 봐. 할 수 있다면 말이야."
카이다는 그녀와 똑같은 수준의 인간을 이미 자신과 함께 '우리'라 지칭하고 있었다. 단순히 계약이나 동맹이 아니었다. 어느 면에서 나와 그녀는 동지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도 그것을 원하지는 않았으나.
"굳이 피를 흘릴 필요는 없어! 서로 조금씩 양보한다면…" 마유즈미의 말이 곧 끊겼다.
"이 새끼들 죄다 또라이들 아니야?" 하기와라의 중얼거림 때문이었다.
"한 쪽은 무조건 부활이 안 된다, 한 쪽은 무조건 부활시켜야 한다. 그런데 히무로는 이유를 못 대고 나나시는 무슨 이유라도 갖다 붙이려 하네. 어떻게 된 게 정상이 없냐? 응원할 쪽이 없잖아. 지금… 몇 분 동안 얘기를 했는데 어떻게 달라진 게 없어. 뭐 했어? 말싸움이 다야? 뭐 하는 거냐고 지금."
"설득이다."
"어떤 놈이 이딴 식으로 설득을 해! 근거도 없으면서. 지금 너희 좀 봐라. 다 미쳤다니까?! 이성적인 대화 다 어디 갔어. 어? 이 개판 수습할 사람이 어디에도 없잖아. 이바라 말이 옳아. 마유즈미가 진짜 유일한 양심이야. 카나리가 차라리 나을 정도고!"
"이것은 중대한 일이다. 웃음거리로 만들지 마라."
"그럼 말을 하라고! 숨기지 말고 말을 해! 아니면 입을 다물어. 다 느낌 왔잖아. 서로 벽창호들이고 물러날 구석이 없다는 거! 부활 말고 할 이야기나 해. 그게 차라리 나을 거야. 지금 짚어야 할 게 차고 넘치잖아! 화해도 하고 할 거 많으면서 숙제를 쌓고 자빠졌네?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내가 추천 하나 할까? 후회 안 할 선택지를 줄게. 이거나 처먹어. 히무로."
나는 하기와라가 중지를 올릴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하기와라는 겉으로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스모어를 히무로에게 건넸다.
"간식을 먹으란 말인가? 지금 이곳에 탑의 미래가 달려 있는데도?"
"우리가 친구라면. 먹어."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우스웠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꼴이 멍청하다던가 하는 웃음이 아니었다. 하기와라가 히무로에게. 그 히무로에게 간식을 건네면서. 그 히무로와 자신이 친구라면 간식을 먹으라 하고 있었다. 모든 게 잘못되어 있었다. 일단 둘은 친구가 아니다. 거의 완전한 상극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서로 추구하는 가치도 달랐으며, 태도마저 달랐다. 히무로가 스모어를 먹을 리 만무했다.
설령 히무로가 하기와라에게서 스모어를 받아 들더라도, 그런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모닥불 안에 던지지 않으면 다행이리라고 생각한 나는. 철석같이 내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그래서 히무로가 스모어를 베어 물었을 때 나는 육성으로 크게 소리쳤다.
"먹었어?!"
"달아!"
히무로 또한 소리쳤다.
'나는 이것을 진실된 우정으로 만들어야 한다. 똑바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간식을 받아 들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를 위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베어 문 뒤, 외마디로 소리쳤다.
"달아!"
나는 충격에 빠진 채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를 씹고 있는 와중 입을 여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일뿐더러. 과자의 맛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맛에 놀라 소리친 것은 경솔한 짓이었다. 그러나 꼭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나는 순수하게 그 단맛에 놀랐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졌고, 나는 입 안에 든 것을 거의 씹지도 못한 채로 몇 초를 얼어붙었다.
"까… 깜짝 놀랐네. 히무로. 그렇게 맛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몇 번 끄덕여 대답했다. 속으로는 한 마디의 낱말만이 뇌를 뒤덮었다. '달아! 달아! 달아!' 씹을수록 혀가 녹고 아려올만치의 단 맛을 느꼈다.
설탕의 힘이었다. 강력한 약물. 정제된 순수한 당. 혈류를 빠르게 만들고 고통을 완화시키는 약이었다. 놀랄 만치 달았다. 그렇게 단 것을 입에 대본 적이 있던가?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더 먹던가."
"어떻게 만드는 거지?" 나는 씹던 것을 전부 삼킨 뒤 하기와라 우시오에게 물었다.
"마시멜로를 굽고, 크래커 사이에 끼워서 누텔라를 바르면 돼. 그런데 그 정도로 맛있냐? 단 거 안 먹어봤어? 아까까지 탑의 미래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정신 못 차리냐? 좀 깼다."
나는 하기와라 우시오의 말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가 말하는 절차대로 간식을 만든 뒤. 하나를 더 베어 물었다. 만족스러울 뿐만이 아니라 훌륭했다. 먼저 삼킨 과자(스모어라 불렸던가?)가 엔도르핀을 분비시키는 것을 느꼈다. 화학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생명체 따위는 없었다. 심지어는 나조차도.
"저기요. 다시 한번 묻겠는데. 단 거 안 먹어봤어?"
나는 씹던 것을 삼키고 하기와라 우시오의 질문에 대답했다.
"적어도 이토록 극단적인 것은 처음이다. 이것은 필시 대몰락 이전의 음식이겠지? 설탕의 함유량에서 알 수 있다. 내가 아는 간식류 중 이 정도의 당도를 가진 것은 없다."
"대몰락? 그거 터진 이후에는 스모어가 없어?! 씨발 끔찍해라!"
"사탕무를 재배할 수 있는 구역이 좁아졌기에 설탕이 이전보다 희귀해졌다. 그렇지만 이 정도였단 말인가?" 대몰락 이전의 세계가 얼마나 풍요로웠을지 생각해 보았다. 설탕이 흔한 물질인 곳. 하기와라 우시오의 반응을 보면 그렇게 희귀한 간식도 아닐 텐데도 그 풍부하고 폭력적인 단맛은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런 진보한 세상임에도 왜 사람들은 불만족했을까?
"히무로가 먹던 찹쌀떡이 삼삼한 편이긴 했는데…"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말했다.
"삼삼하단 말인가? 그 찹쌀떡이?" 나는 놀랐다. 시라유키 히메리가 내게 제공했던 찹쌀떡은 내가 이론상으로만 알고 있던, 쌀을 씹어 당화 시킨 단맛보다 몇 배는 달아 나를 놀라게 한 물건이었다. 감시자는 무릇 모든 착(着)과 중독에서 자유로워야만 했기에 미각을 철저히 배제당했기 때문이다.
"응! 네가 그렇게 좋아할 만큼 달아? 좀 기대되는데… 어때? 포도랑 계란 맛이 나?"
맛을 진부하게 읊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재빨리 손을 놀려 간식을 만들었다. 온기가 모락모락한 것을 그녀에게 건넸다. "내가 느끼기에는 식기 전에 먹는 게 나을 것 같더군."
"고마워. 그럼. 잘 먹겠습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크래커 사이로 삐져나온 마시멜로라는 흰색 물체에 손을 델 뻔하며, 조심스럽게 간식을 받아 들었다. 나는 어미새의 기분으로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과연 나와 같은 것을 느낄까? 그럴 것이다. 혀의 감각만큼은 둔해지지 않았다. 적어도 이 간식에서만큼은, 그녀와 내가 동등한 선에 놓여 같은 것을 공유하리라. 다른 모든 이들이 무릇 그러듯이…'
"와!"
바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소리쳤다. 입을 벌렸으나 손으로 가렸기에 안에 든 것이 보이지는 않았다. 얼굴에 작은 주름이 얼핏 보였고, 그녀가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거 진짜 맛있다. 히무로!"
"나 또한 놀랐다." 나는 입꼬리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었다. 혀의 즐거움을 뒤로한 채 다시 설득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미쳤으나, 여전히 내겐 이름 없는 남자를 납득시킬 여지가 없었다. 더 이상의 진전은 없을 것이다.
"내가 마시멜로 이상한 거 아니랬지. 내 말을 잘 들었으면 얼마나 좋냐. 마유즈미?"
하기와라 우시오가 말하자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입 안에 든 것을 꼭꼭 씹어 넘기고 배시시 웃었다.
"그럴 걸 그랬어. 하기와라! 진짜로!"
즐거움. 순수한 즐거움. 은인을 되살리려는 누군가가 내통자에게 붙잡혔고, 자신을 기만한 친우는 은인의 부활을 막으려 하는 와중의 간식시간에도 웃을 수 있는 것. 그것은 결점이 아니다. 밝은 점을 볼 수 있는 눈은 내게 없었다.
"네가 그녀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는 게 좋을 것이다. 도망가지 말라는 뜻이다."
여러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는 내게 저 말을 돌려주었다.
아마 도망치지 말라는 말은, 하기와라 우시오에게 또한 적용될 수 있으리라.
"이제 말할 때가 되지 않았나? 네가 숨기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말이다. 네가 꺼리는 건 소중한 것뿐만이 아닌가?" 나는 하기와라 우시오에게 물었다.
"엥? 갑자기? 너 뭐라는 거야."
"너는 분명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을 두려워했다. 그로 인해 잃을 것이 두려웠겠지. 하찮은 것은 잃을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럼 어떤가?"
"뭐라는 거냐고! 화법이 가면 갈수록 이상해 지네. 진짜 뭐라는 거냐고. 이해가 안 돼서 이래!" 그는 답답함을 느끼는 듯했다. 벽창호 노릇을 하던 그의 모습을 보며 내가 느낀 번거로움과 비슷할까?
"소중한 것 말고 하찮은 건 잃을 수 있다고? 뭐가 하찮은데?"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내 의중을 이해했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마유즈미. 너 히무로이드랑 그만 놀아. 얘랑 커뮤니케이션이 되기 시작하는 건 절대 좋은 일이 아니야. 그러다가 나쁜 물 들어."
"너는 왜 그렇게 히무로를 싫어해?"
"그야 하찮은 우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의문에 답을 주었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네가 나에게 지배되는 일을 꺼렸다. 그것은 이바라 쿠리스가 너를 아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에게 이바라 쿠리스는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고 그 가치가 너에게도 이어진 것이다."
"어머!"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놀랐다.
"또 사랑싸움이야? 혈기들 좀 죽여." 인공지능은 덤덤한 음성을 냈다.
"뭐라는 거야. 네가 뭘 알아?"
"그렇기에 하기와라 우시오는 일종의 협잡꾼 노릇을 의도했던 것이다." 나는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심리적으로 장악하지 않게끔 그는 나를 견제코자 했다. 처음부터 거짓 위에 쌓인 탑이었다. 그러니 너는 이제 털어놓을 수 있다. 너에게 있어 소중하지 않은 이, 너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이. 너와 나는 친하지 않다. 그렇기에 너는 말할 수 있다. 어떤가?"
"네가 떠벌떠벌 떠들고 다닐지도 모르는데. 웃기시네. 친하지 않으니 오히려 말할 수 있다고? 이런 궤변이 어디 있냐? 네가 말하면서도 말이 안 되지?"
"오히려 당연한 일인 것 같다만. 그리고 너는 내 입이 무거우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왜 알고 있는 것조차 외면하지?"
"몰라. 이 새끼야."
"너는 상처 입은 인간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바라 쿠리스와 만나더라도, 너는 또다시 푼수 노릇을 할 것이다. 너와 가까워지려는 이들을 수동적으로 밀어내고, 쳇바퀴를 돌겠지. 연습을 한다고 생각해라. 시인(是認)의 재활이다."
"이바라랑 나 엮지 말라고! 우린 친구일 뿐이야!"
"내가 그렇지 않다고 말이라도 했나?"
"망할. 내 말은. 내가 이바라를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거야! 나랑 이바라는 온전히 프렌드 존에 있어. 확고하게 말이야! 더 진전의 여지도 없어!"
"그야 너는 친구 이상을 얻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이상은 불편해지지. 더 많은 것을 보여줄수록 네 약점이 많아진다고 생각한다. 네게 공감하고 네 상처를 보듬을수록 너는 불편할 뿐이다. 번거롭고 어딘가 부끄럽지. 그것은 네가 당시의 일을 네 흉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것이 흉이 아님부터 인식해라."
"나는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왜 내가 말해야 하는 건데? 말할 필요가 하등 없는데도…"
"네가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너를 단지 생각 없는 바보라 취급하는 이들에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네가 어째서 웃음을 숭배하는지 다른 이들을 납득시키고 싶기 때문이다. 상처를 숨기고 싶은 마음만큼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본능이 지성체에겐 존재한다. 하기와라 우시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네 부모 때문인가?"
"워. 워. 워! 히무로이드! 탈룰라 만들지는 맙시다. 그리고 내 모든 문제가 애미애비한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진심으로?"
"전부 비롯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유년 시절에는 부모가 인격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이윽고 목소리를 높였다.
"계속 억까해 봐. 이 새끼야! 내가 그냥 불우한 가정사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 믿는다면 잘못짚은 거야! 애미는 훌륭한 사람이었거든!"
하기와라 우시오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명사 애미와 형용사 훌륭한을 조합시키지 않을 것이다.
"정말인가?"
하기와라 우시오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사실은 마녀였어."
"유감이다."
"나도 유감이야. 하하하하하!" 하기와라 우시오는 웃음을 터뜨렸다.
"성격이 나쁘셨던 거야? 마녀에 비견될 만큼?"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비견하는 게 아니라 진짜 마녀 말하는 건데? 애미는 부두술이랑 강령술에 심취해 있었거든. 인신공양이나 피로 하는 의식이나, 다른 사람 무덤 파서 시체를 빻아 흡입하던가…"
"분해된 시체를 흡입해?" 인공지능이 흠칫 놀랐다.
"어우."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외마디로 탄식했다.
"진짜 어우다. 그렇지? 한 번은 나한테 맛있는 거 먹여주고 좋은 옷도 입혀주는 거야. 나는 애미가 그래줄 때가 좋았어. 정말 사랑받는 것 같았거든. 집의 불행을 없애겠다며 내 피를 뽑긴 하지만 언젠가는 다들 정상으로 돌아올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애미가 그날 나를 폐건물에 묶어두고는 건물에 불을 붙이려고 했지. 행복하게 만들어야 제물의 가치가 높아진다나. 진짜 이건 좀 아니다 싶어서 빠져나왔더니 애미가 집에 돌아오질 않았어. 애비는 애미를 찾을 생각도 안 하더라. 어차피 언젠가는 돌아오려니 생각했던 것 같아. 나중에 경찰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오밤 산중에서 마법진을 만들더니 그 중앙에서 자기 심장을 돌칼로 갈랐대. 하하. 애엄마들이란."
"부모란 것들은 다 한심스러운 족속들이야."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카이다 쿠로하가 거들었다. 무시하기로 하였다.
"하기와라 우시오."
"애비는 대충 느낌 오지? 알콜중독. 뭐. 나 쥐어패면서 술 가져오라 시키고. 애미도 쥐어패고. 개판이지. 인생 말아먹은 패배자 주제에 그걸 내 탓이나 하고. 자제력을 잃고서 허구한날 술이나 마시는 거야. 그러다 간이 약해져서 죽었어. 이야기 끝."
"하기와라 우시오." 나는 그를 거듭 불렀다.
"왜? 왜 부르는데?"
"유감이다."
"그래. 유감이지." 하기와라 우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감이고. 그게 다야. 정말 그게 다야."
그 한 마디가 그토록 어려웠다. 그 한 마디. 그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있었다. 적어도 해소될 수 있고 새로운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그러나 첫 발을 내딛는 것이 어려웠다.
곧 내 입에서 나온 다른 한마디도 지독히 어려웠다. 나는 문장을 구성하는 데에 큰 공을 들였다. 나온 문장의 어떤 것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내가 듣기에는 어떤 것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던 도중 과연 납득시키는 것이 중요한가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보다도. 무엇을 해야 하는가?
"미안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 말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느꼈다.
"너에게 그래서는 안 되었다. 너에게만은 말해주어야만 했어. 네가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지레 넘겨짚는 것은 공평하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너를 과소평가했다. 카로 이어진 우리는 카텟이 될 거라고 말했으나, 너를 실망시켰다. 그러니… 미안하다."
숨이 막히는 정적이 있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대답을 기다리는 와중 나도 모르게 시선을 그녀에게서 돌렸다. 밑을 바라보게 되었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마유즈미 나데시코를 보았다. 압박하려는 듯한 기분을 느끼지 않게끔 그녀의 눈이 아닌 입과 턱을 보았다.
나는 호흡조차 더디게 되었다. 그러던 도중 어느 순간에는 호흡이 빨라지기도 했다. 신체를 통제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꼈다. 왜 그토록 몸이 긴장되는 것일까.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왜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대답이 그토록 염려스러웠는지.
대답을 기다릴 동안 내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모닥불이 타닥거리며 타는 소리뿐이었다.
"카나리 씨. 이제 나가셔도 돼요! 휴식 시간은 끝났습니다!" 패트리샤의 명랑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카나리 케이토는 멍하니 몸을 일으키고 한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러는 와중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눈에 눈물이 고이자,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큰일이었다. 나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고, 내가 감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정적을 깨지 못한 채로 나와 카이다 또한 곧 카나리의 뒤를 따랐다. 어두운 통로였다. 나와 카이다의 모습마저 보이지 않을만치 어두운 곳을 걸어가는 동안 나의 청력이 조금씩 예민해지는 것을 느꼈다.
"둘이 화해할 것 같아?"
"알 바냐. 알아서 하겠지. 영영 틀어져 버리면 좋겠는데."
"나는 화해했으면 좋겠어."
"어쩌라고? 나는 관심 없어. 애초에 왜 저것들이 화해하는 걸 신경 쓰는 거냐? 너랑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마유즈미는 사과를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캐롤 씨를 그리워하고 있기도 하니까… 하지만 히무로랑 틀어지는 게 마유즈미 본인한테는 나을지도 모르겠어. 위험한 길이 될 테니, 당장 실타래에 자기 이름을 말하고 나가는 편이 나으려나…"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아. 이제 곧 두 번째 깨달음이 올 거다. 창놈. 준비해."
"준비는 네가 해야지. 나는 뒤에서 구경만 할게."
편한 마음으로 뒷짐을 진 채 카이다의 뒤를 따랐다. 몇 걸음을 더 걸은 시점에서 나는 딱딱한 벽 같은 것에 부딪혔다. 강도로 보아 카이다 쿠로하였다.
"왜 멈춰?"
"조용… 곰이다. 앞에 곰이 있어."
나는 카이다 쿠로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웬 곰?"
"곰 말이다." 카이다 쿠로하는 날붙이를 꺼내 들었다.
"어우. 야. 마유즈미. 네가 왜 우냐? 쌍놈 새끼는 여기에 있는데. 자. 내가 허락해줄 테니까 펀치 한 번 날리자. 초고교급 격투가 펀치 보여줘!"
하기와라 우시오의 주접마저 마유즈미 나데시코를 웃게 만들지는 못했다. 나는 장미색 눈동자가 한 번 섬세한 장막에 가려질 때마다 조금씩 더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눈물이 더더욱 고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초고교급 격투가… 그런 거짓말도 했지. 얕은 거짓말이었어… 오사리잡것처럼 변명을 늘어놓아도 격투가 운운보다는 나았을 거야. 생각도 없었고… 겁만 많았어. 지금도 똑같지…"
"슬픈 마유즈미. 이거 못 막습니다…" 하기와라 우시오가 중얼거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내 손은 허공을 향해 뻗어져 갈 곳을 잃고 멈추었으며 뒤로 빠졌고 또 경련하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를 향해 나아가야 할. 적어도 무언가를 해야 할 손은 어떠한 파충류의 미끈하고 질긴 피막에 가로막힌 듯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토록 감정적으로 동요했다. 왜? 그야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나에게 있어 가볍지 않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동료가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심지어는 친구 이상이었다. 나와 그녀는 카텟이었다.
어디에선가 눈은 영혼의 유리창이라는 비유를 들은 적이 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비유를 단어 자체로 받아들이자면 곧 눈물은 영혼의 슬픔이다. 애탄이고 비애였다. 실망과 배신을 몇 배로 증폭시켜 그 내적인 상처가 외부 세계로 배출되지 않으면, 스트레스의 화학 물질을 내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그녀가 내게 느끼는 감정이었다.
'싫다. 그녀가 우는 것은 싫다.' 나는 생각했다.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두렵다.' 두렵다고? 그래. 두렵다. 행복한 눈물도 있겠지만 그녀가 흘리는 것은 행복이 아니었다. 우울이었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어…?"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또박또박 말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 음성이 떨리는 것은 느껴졌다. 곧바로 아니라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해야만 했는데. 나는 너를 믿지 않은 게 아니라고, 네가 가족에 대한 사실을 이윽고는 이겨낼 만큼 강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말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는 마유즈미 나데시코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몸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무너지리라 확신한 적은 없었다. 나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무너지리라는 가능성을 포함한 것이었고, 나는 무너짐이 견뎌냄보다 더 크다고 보았다. 이런 생각은 어떤 면에서 보기에, 단순한 불신이기도 했다.
"네가 미덥지 않았던 게 아니다…"
"그렇다면 왜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거야?" 발음이 꼬이고, 목 안의 울음은 말을 가로막았다. 툭. 툭. 치듯이 혹은 고개를 들듯이 음성이 끊겼다. "여태 알고 있었으면서. 계속 알고 있었으면서…!"
"…일관성을 위해서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입장을 상상해보며 나는 말했다. 과연 내가 그녀라면 어떻게 했을까.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공상이 끝났다. 나는 뻔뻔하고 친구도 아닌 남자의 이를 부숴 놓았다.
"마유즈미 가문의 몰락을 발설한다면, 다른 이들 또한 자신의 영상에 나온 사건의 연유를 유추하게 될 테고, 이윽고 대몰락에까지 이어지게 될 테니까. 너에게마저 숨겨야 했다."
"항상 이유가 있네…? 나는 우리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어. 함께인 줄 알았어. 거의 함께 아니었어…? 그치만 멀었던 거구나… 이렇게 멀었던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나는 순간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입 안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왔다고 느꼈다. 너무나도 깊기에 그녀의 신체 일부가 기화되어 나오는 듯한 한숨이었다.
"처음에는 네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 히무로. 늦게 알면 늦게 알수록 안 좋으니까. 그럴수록 받아들이기 더 어려워지니까. 언젠가는 나도 알아야 했잖아. 평생… 숨길 생각은 아니었잖아? 나한테 총까지 주었으면서… 나. 카이다랑도 맞서 싸웠어. 네가 그만큼 나를 믿고 있다고 생각했고, 내가 그만큼 큰 거라 생각했는데."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소매로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눈을 꼭 감고 다시 나타난 그녀의 입가에 조소가 버섯처럼 피었다.
"…내가 왜 화를 내는 걸까. 히무로. 나 웃기다. 그치. 다 알고 있었잖아. 기억 나? 다들 영상을 보고 있는데. 다들 놀라거나 흔들리고 있는데. 혼자서만 태평해서 말했던 거…"
"마유즈미 본가가 활활 타는 일은 없어. 시종만 몇 명인데 우리 집을 그냥 타게 냅두겠어? 여기서 나가기는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마유즈미 본가는 타지 않으니까 난 안 흔들려. 이건 당연한 이치라고. 날 뭘로 보는 거래! 난 이런 거에 안 속아!"
"맹추야. 맹추. 히무로… 맹꽁이고. 푼수고. 천치고… 말짜야. 나 진짜 바보 같아. 늘 바보 같아… 바멍똥이야. 바멍똥. 무슨 뜻인지 알겠어? 하기와라."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리자 안면 근육이 움직임에 따라 눈물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뚝뚝 떨어진다. 입자 사이의 장력이 약해져 더 이상 중력을 이겨낼 수 없다는 듯했다. 밀어붙여져 견딜 수 없어진 것이다. 저 눈물은 마유즈미 나데시코 본인과 같다. 떨어지지 말아라. 부디. 그만 떨어져라… 부디…
"마유즈미. 안 웃겨."
"나만 이제 와서 이러고 있는 거야… 다들… 이미 지나온 곳을 이. 이제야 밟은 거야… 왜 이렇게 눈치가 없는 걸까? 나도… 나도 알아. 내가 모자란 거 말야. 다들 한 소리씩 안 해도 안다구. 그치만 이렇게 모자랄 줄 누가 알았겠어…? 응…? 나만 안 믿었고 다들 믿은 그 영상을… 아주 지금까지… 지금까지…!"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얼굴을 자신의 손에 묻었다. 목 안에서부터 차마 억누르지 못한 외마디 울음이 흘러나왔다. 많은 울음 앞에서 잔잔하던 나의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다.
"다들… 어디 간 거야. 왜 나만 두고 갔어? 엄마도. 아빠도. 다… 아니면, 내가 두고 간 걸까? 나만 도망쳐서 카텟 기관에 있는 거고. 나만 꼴사납게 다 버린 채로… 보고 싶어… 이건 너무하잖아…!"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히무로 시라베. 어떻게 할 생각이냔 말이다. 무슨 생각으로 마유즈미 나데시코에게 총을 겨눈 거냐.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그녀를 기만한 것은 무슨 생각으로 저지른 거지?
"그래… 이렇게 멍청한 사람이니까. 그랬던 거야…"
붉어진 눈시울. 한 번 눈동자가 숨고 다시 나타날 때마다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는 그녀에게서 반짝이던 그 바다를 보았다. 덧없던 파도. 장미색의 바다가 반짝거렸다. 그 눈빛이. 분함과 슬픔 속에 저온 화상을 입는 듯한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 무언가 부정적이며 어둡고, 차가운 것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전혀 좋을 게 못 되는 것.
"괜찮아. 이제 이해가 돼… 나라도… 그랬을 거야. 히무로… 이제 알 것 같아. 네가 왜 말하지 않았는지 말야. 걸림돌이 될 테니까… 말 안 하느니만 못 하니까…"
"그랬던 게 아니다."
"울고 불고 난리를 쳤을 테니까… 이해가 돼. 그치만… 왜일까? 엄청… 엄청 섭섭해… 내가 문제였던 건데. 어린애였던 건 나인데…"
"나는 너를 실망시켰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네가 느끼는 실망과 회의감은 너 스스로가 아닌 나를 향해야만 한다. 그게 옳은 일이고, 당연한 일이다. 나는…"
회한과 수치심을 느껴야 마땅한 일을 저질렀을 때. 혹은 명예롭던 과거와 동떨어지게 될 때. 아버지의 낯을 잊게 된다.
"아버지의 낯을 잊었던 것이다. 너에게 총잡이의 교리도문과 사고방식에 대해 알려주었으면서. 정작 나는 불명예스러운 짓을 자행했다. 옳은 일에서 멀어져 있었다…"
나는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나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가 나를 인식하더라도 압박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게끔.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얼룩진 얼굴이 나를 보았다. 재단에서 배운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가령 교리도문, 아버지의 낯, 그리고 잘못을 한 이에게 관용을 호소할 때 하는. 다음과 같은 낱말이 있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카텟 기관과 재단의 히무로 시라베가. 그대 앞에 울며 용서를 비나이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가 위에, 그리고 내가 아래에서 눈이 맞닿았다. 누구도 피하지 않았다. 모닥불이 나와 그녀를 밝혀 주었다. 몸이 따뜻했다.
문득 긴장이 해소되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웃었기 때문이다. 나는 놀랐다. 역효과가 난 것보다도 어떤 작용을 통해 그녀가 웃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깔깔거리는 종류의 웃음은 아니었으나 분명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폼 잡긴. 히무로. 유치해."
분명 고결하고 진실된 문장인데 어째서 유치하다고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웃는 것을 보는 게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