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단크 타워 챕터 3 - 9
일기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이 내 가족이라는 건 무척 끔찍한 일이다.
왜냐하면 가족이라는 끈은 누가 어떻게 해도 끊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가족이 생기더라도 그 뿌리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섬겨야 하는 부모님이라던가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다. 말 그대로 나는 가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내 일부는 저 사람들일까. 나도 언젠가 저 사람들처럼 변모할까를 떠올리면 두려움에 벌벌 떨게 된다.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하기와라 우시오는 실타래를 써 영안로 밖으로 나갔다. 그 가능성밖에 없었다. 그가 시련을 일찍 완료하였다고 한들 '동행'하는 이상. 그는 먼저 나아갈 수 없었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두려움의 형체를 마주하자마자 도망친 것이었다.
"오… 오랫동안 보고만 있으면 된다는 거지?"
"그래. 마유즈미. 그런데 꼭 내가 손을 잡아줘야 해?"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인공지능의 기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주무르려 애쓰는 사람 같았다. 나는 인공지능의 음성에서 마뜩잖음을 들었다. 왜지?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존재가 달갑지 않은 건가?
"이러면 왜인지 안정이 돼서…"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너희… 아까까지 그러고 있었으면서 왜 새삼스럽게 나한테 이러는 거냐고. 그냥 너희 둘이서… 아. 사라졌어."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시련의 달성 조건을 이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련을 완료했다. 표지판(인공지능에게는 테세우스의 배, 마유즈미 나데시코에게는 귀신)이 증발한 듯 한순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신이 난 듯한 기계 음성이 뒤따랐다.
"아우. 대단해요! 한 분이 떠나셨지만… 그래도 굉장히 침착하시네요! 가장 어둡고 두려운 형상을 불러오는데. 심지어 여러분들에겐 리디큘러스도 없는데 말이에요. 완벽한 이성의 승리로군요!"
"하기와라 우시오는 영안로 밖으로 나갔다. 이것으로 명백해졌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와 인공지능에게 그 사실을 환기한 뒤, 내가 영안로 밖에 나가 하기와라 우시오를 데려오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냥 두고 갈 수는 없는 거야? 이 정도로 내뺐으면 사실 도움이 되리라곤 생각할 수 없어." 인공지능의 말이었다.
"나와 네가 특이한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마유즈미 나데시코만큼 두려워했을 것이다. 피하려는 것 또한 일리 있는 반응이다. 그리고 나는 그와 할 이야기가 있다."
이미 해버린 약속 또한 있었다.
"나도 있고."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말했다.
"사람의 부정적인 심리는 내가 잘 안다. 아무리 그가 공포에 압도되어 도망쳤다고 해도, 설득하여 데리고 올 수 있다."
"진짜…?"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날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그럼 나에게 그를 내칠 이유가 있다는 뜻인가?"
"…하기와라랑 친구가 되기 싫어서 굳이 놔두고 올 수도 있잖아. 그리고선 우리한테 이러겠지? 도무지 그를 설득할 수 없었돠. 치."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최대한 표독스럽게 보이려는 듯 팔짱을 꼈다. 남을 위협하기 위해 몸을 부풀리는 사마귀나 코브라 따위와는 반대되는 몸짓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녀는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가 못마땅함을 표현한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으로 내게 행동을 강제하니 기기묘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기와라 우시오와 친구가 되란 말이 아직도 유효한가? 나쁠 것은 없으나 우정은 상호적인 것이고. 그가 손을 잡지 않는다면 내밀더라도 의미가 없다."
"그럼 잡아줄 때까지 내밀어 줘! 지레 포기하지 말란 말이야."
그를 데리고 올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지만, 정말 하기와라 우시오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인지가 궁금했다. 우선 내통자가 나나시를 데리고 캐롤 브라이트를 부활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캐롤 브라이트는 부활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다급한 일이 그것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마저 도망치지 않았던 것 앞에서 내뺐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그 일이 벌어져버린 이상 내가 고평가 하던 그의 잠재력마저 빛을 일어갔고, 그가 추적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지금 그럴 만한 시간이 없다. 애초에 하기와라 우시오는 우리와 동행하지 않고 있다. 도중에 나가버렸기 때문에 끊긴 것이다. 그와 동행하기 위해 우리 또한 영안로에서 나가야만 하는가?"
"동행은 다시 하면 그만이에요!" 패트리샤가 다급히 말했다.
"뭐? 하기와라를 다시 데려오면 동행이 다시 이어진단 말이야?" 인공지능이 물었다.
"물론 가능하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은 그렇게 쉽게 끊어지지 않거든요. 같은 길을 걸으시겠다고 동의하신다면 언제든지 동행은 이어져요! 일행 분을 데려오시게요?"
그 순간 이야기가 달라졌다. 동행이 이어진다면, 그를 데려오기만 하면 된다면…
"…그렇다."
나는 그럴 생각이었다. 그에게 총잡이의 토대를 세우고 카텟을, 생존하기 위한 연합을 넓히고 싶지 않았던가? 아무리 그를 내칠 핑계가 많다고 해도 모든 것을 취합하면, 우리에겐 더 나은 그가 필요했다.
그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가치를 창출시킬 수 있느냐였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저울에 한 사람과 그를 둘러싼 상황들을 올리고 경중을 재던 나는, 억누를 수 없는(내가 그렇게 느꼈던 것이 아니라 공상하던 저울과 탬플릿이 이전되어 적용 되었다) 생각을 하나 떠올렸다. 스스로를 형이라 지칭하는 자의 목소리를 빌어.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 동생? 그녀에게 이렇게 휘둘러져서야 쓰나?"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흠… 잘 될지는 모르겠네요… 그래도 응원할게요!"
나는 그 당시 패트리샤가 어째서 비관적인 태도를 취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모노로그의 편이기에 나의 사기를 저하시키며, 동시에 위선을 떤다고 생각했다.
"일단… 나와 마유즈미는 영안로 안을 계속 나아갈게. 빨리 카이다를 붙잡기만 하면 되니까. 어쩌면 네가 오기 전에 붙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럴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나는 실타래를 입가로 가져갔다. 내 이름을 대고 아웃을 외친다면 영안로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지체하지 않으며 하기와라 우시오를 데리고. 곧바로 돌아오면 될 일이었다.
"저기… 히무로. 있잖아!"
"히무로 시라베. 아웃."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주저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히무로… 하기와라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바라 쿠리스는 여전히 광소하고 있는 하기와라 우시오를 보았다.
"저도 알 수 없군요. 이 사람. 대체 영안로 안에서 뭘 본 겁니까? 붙잡을 수도 없이 도망다니잖습니까. 정말 광인이 되 버린 것은 아니겠지요? 명석한 토대를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 되다니 아깝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독하다. 지독해. 원하지 않았던 만남이야. 원귀가 붙었어." 칸나즈키 시노부가 부채를 폈다.
"이해가 안 될지라도 우선 들어라. 영안로 속에서 우리는 깨달음 대신 시련을 택했다. 시련 속에서 우리는 다른 이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채로 스스로의 공포를 마주했지. 하기와라 우시오는 도중에 영안로 밖으로 나갔으나, 다른 이들을 여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보아하니… 영안로 밖까지 그의 공포가 쫓아온 듯하군."
"뭐? 너 누구한테 말하는 거냐? 정신 나갔어?" 하기와라 우시오는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이바라 쿠리스. 야가미 토가. 칸나즈키 시노부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네 눈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겠지만, 그들은 너의 곁에 있다. 영안로 속에서 너 혼자 남겨진 것이 기억나나? 나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네가 조금만 침착하게 남아 있었다면 곧 다른 이들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겠지만… 이토록 번거로워졌다."
"웃기시네! 씨발! 네 말을 내가 믿을까 봐? 하하하!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아주 방금 전까지 마유즈미한테 총 겨눠놓고 믿음직스러운 척을 쳐하시네?"
"그를 붙잡아서 저희들이 있다는 걸 알리는 편이 낫겠군요." 야가미 토가가 하기와라 우시오를 향해 걸어갔다. 발자국 소리를 숨기지는 않았다. 어차피 하기와라 우시오는 그 발자국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안 돼! 그럼 또 마구 날뛸 거야!" 이바라 쿠리스가 말했다.
"날뛰지 못하게 막는 겁니다."
"지금 그의 모습이 안 보이나? 억지로 붙잡는 것은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나는 말했다.
"그럼 어쩌란 겁니까? 이대로 두란 말입니까?"
"허공에 대고 말하지 말… 이런 개 같은 거. 그만 좀 졸라대라고! 돈?! 줘봤자 뭐해. 어차피 다 마셔버릴 거잖아! 다 마셔버렸잖아. 씨팔 가까스로 복직해놓고서는 결국 양복까지 팔아서 마셨잖아!" 하기와라 우시오가 말했다. 그야말로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목의 핏줄이 불거졌고 눈은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그 정도로 동요하는 그는 처음 보았다. 귀기어리다는 표현만이 적절했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다른 이들에게 관대한 사람이 아니었으나 결코 분간 없는 멸시에 빠져 사는 이는 아니었다. 그는 늘 혼돈의 파도에 의하여 흔들리되 나룻배에 타 있어 휩쓸리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 자신의 친구에게 칼을 들이댈 때에도 그의 일면은 충분한 이성을 띠고 있었다. 그 당시 이바라 쿠리스는 우연히 하기와라 우시오와 감시역을 맡았을 뿐이었고, 하기와라 우시오는 감시역을 인질로 잡기 위한 준비를 마쳐 두었다. 그는 의복에 도끼를 숨기고 모리 레이코의 도움을 받아. 미도리카와 아쿠토의 모든 무기를 일소했다. 그는 히스테리를 이기지 못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필요에 따라 친구를 인질로 잡았다. 그 스스로도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알았고 애초에 이바라 쿠리스를 해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당위를 위해 계획을 밀어붙인 것은 오히려 그가 지극히 이성적이기 때문이었다.
"이 탑에 처음 왔을 때 카이다가 어땠는지 기억하는 사람 있냐? 미도리카와는? 둘 다 이상한 점은 있어도 멀쩡했어. 우리랑 얘기도 했어. 후루미나미는 망할. 같이 영화도 달렸어! 근데 지금 그 자식들 꼬라지를 봐!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당신! 당신도 잘한 건 아무것도 없어. 왜 이게 내 탓인데? 당신들이 망가진 사람인 게 왜 내 탓이야? 그건 내 잘못일 수가 없는 거잖아! 내가 피를 안 준다고 이 개판이 내 책임이야? 심지어 피 꽤 줬잖아. 씨팔 몇 번은 실신도 했는데 나아진 게 없어! 당신만 더 미쳐갔지! 이미 죽었으면서 얼굴을 들이밀어?! 죽어. 죽어! 나가 뒈져!"
도중에는 차분함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으나. 그때의 격렬한 표출마저도 영안로에서 빠져나온 직후의 그를 능가할 순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관찰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기와라 우시오를 보고 있는 세 사람. 특히 이바라 쿠리스가 그것을 잘 알고 있으리라.
"하… 하기와라가 저러는 건. 처음이야…"
"저런 종류의 저주도 퍼부을 수 있는 사람이었군요."
"기껏 묻어놨더니 꾸득꾸득 기어 나오고선…! 꺼져… 꺼져…! 당신들은 내 안에서 죽은 지 한참 됐어… 그러니까 가라고… 다시는 오지 마…!"
숨길 수 없는 공포가 하기와라 우시오의 면면에 드러나 있었다. 그는 격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그것은 분노가 아닌 두려움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너에게 속하지 않는다. 하기와라 우시오. 영안로 안에 들어와라. 그러지 않겠다면 차라리 네 공포를 마주해라."
"닥쳐! 이 새끼야! 문제를 더 가져오지 마! 나는 지금 내가 감당하고 있는 것도 감당이 안 된다고. 그러니까 닥쳐!"
하기와라 우시오를 포기해야 하나. 나는 경중을 재게 되었다. 사실. 한시가 아까웠다. 첫 번째 시련은 돌파하기까지의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마저 시련의 달성 조건을 안 직후 이겨냈다. 하기와라 우시오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곧바로 카이다 쿠로하를 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치만 우린 어떻게든 이야기의 끝을 봐야 해.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친구들끼리."
그를 버리고자 한다면, 단지 조금만 더 지켜보다가 영안로 속에 들어가면 될 일이었다. '하기와라 우시오를 통제할 수 없었다. 간극이 벌어져버렸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핑계는 많았다. 여러 개를 섞고 이야기한다면 마유즈미 나데시코 본인 또한 의심할지언정. 자신이 나가 그를 데려오겠다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억지스러운 일을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나는 하기와라 우시오를 영안로에 굳이 데려와야만 했다. 그것은 경중이 아니라 당위성 때문이었다. 나는 마유즈미 나데시코에게 그를 다시 데려오겠노라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 뒤에야. 그녀에게 떳떳할 수 있을 터였다.
가짜 우정일지라도 그것은 내게 계약과 같았다. 하기와라 우시오를 버리는 것은 마유즈미 나데시코를 한 번 더 배신하는 일이었고, 영안로에 들어가기 전 내가 한 결의를 동전 뒤집듯 버리는 일이었다. 더 이상 물러날 구석이 없다고 느꼈다.
"정신 차려라. 네가 보고 있는 것은 영안로의 환영이다! 이 말이 그렇게도 이해하기 어려운 건가? 그 정도로 귀가 안 들리나?"
"안 들려! 안 들린다고. 듣기 싫어! 저딴 곳에 또 들어가라고? 어?! 내. 내 꼴을 봐! 말을. 말을 더듬잖아. 그놈 죽기 전이랑 또. 똑같아! 혀가 떨리고 턱이 떨리니 될 리가… 될리가 있나! 나를… 이렇게 헤집어놓은 곳에 다시 들어가라는 소리를 해? 내가 그 정도로 미친놈처럼 보여?!"
"그렇다면 평생 쫓기면서 살아라! 정말 그러고 싶은 건가? 네 통곡은 그저 당면한 어려움을 회피하려는 수단에 불과하다. 죽은 가족을 보고 있는 모양인데. 죽은 이는 죽은 이일뿐이다!"
나는 소리쳤다.
"아니. 그놈은 영원히 살아! 적어도 영원 중 내가 살아있을 작은 파편만큼 그놈은 살아있을 거다. 내가 눈을 뜨는 동안은 불멸이야! 왜냐면 내 안에 있으니까! 내 유전자 안에 알코올 중독이 있다. 이 중독이 바로 그놈이야. 내 일부라고!"
"그럼 스스로 목숨을 끊을 텐가? 네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싶다면 그게 가장 낫겠군. 혈통을 끊어버릴 수 있을 테니.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짓는 방법 중에서는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내 말을 들어라!"
하기와라 우시오는 나를 노려보았다.
"듣기 싫어… 이 싸이코 새끼야. 네가 뭘 알아? 너는 평범한 사람들이랑은 도무지 부대껴 살 수가 없는 인종이잖아. 네가 아무리 애를 써서 녹아들려 해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알아. 한 번쯤은 꼭 삐끗하게 되고 그 삐끗으로 모든 게 무너져 내린다는 거. 싸이코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자들이야. 그런 점에서 모리는 가짜 싸이코였지. 자아는 비대해도 그릇은 작았다고 해야 하나. 가차 없어지려 누구보다 애썼던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너는 항상 그들의 사고방식에 근접하지. 나 또한 그러려고 애썼다. 누군가의 기이한 발자취를 따라갈 때 그 보폭과 족흔을 측량하듯이 말이다. 그것은 통찰력만으로도 가능한 일이지만, 정작 그 사고방식을 가지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어딘가 비틀려있었다. 그 자신도 어느 정도 그걸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비판과 비웃음은 소위 비틀린 자들을 향했다. 그것은 자학이기도 했고, 비정상과 자신 사이에 선을 긋는 일이기도 했다.
"너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해라. 첫 번째 과제다. 너는 모르는 것이 아니다! 일부러 알지 않으려 하는 것이지!"
"나한텐 아무런 문제도 없어. 이 새끼야!"
죽은 부모가 걸어 다니는 꼴을 보고 있는 자의 말이었다. 나는 일련의 논쟁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했다. 아깝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벽창호를 상대하려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말을 뒤로한 채 영안로에서 빠져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윽고 나는 어느 정도의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시간을 아껴 쓰자는 결단이었다.
"히무로 씨.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둔 뒤 영안로에 넣는 겁니다."
"어이어이어이. 그게 될 것 같아? 되겠냐고. 저렇게 막 힘들어하는데…"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 씨. 내 얼굴만 보였어도 어떻게든 해 주는데…! 영안로 안에 들어갔다 나오면 하기와라 눈에 보여?" 이바라 쿠리스의 말은 고려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보인다고 하여 하기와라 우시오가 진정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를 강제로 영안로에 넣는 일은 그의 발광을 촉진할 테고, 그는 입으로 하는 설득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주어진 선을 넘는 것이 코미디언의 의무라고 그는 말한 바 있었다. 그것은 할 일을 반드시 해야 하는 자들의 공통적인 의무일 것이다. 이윽고 나는 그를 향해 걸었다.
"존나 악몽이야. 아. 존나…"
하기와라 우시오는 내가 아닌 다른 곳에 시선이 팔려 있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하고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그에게는 물론이고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옳은 일. 손을 그에게 뻗는 것만으로 할 수 있었다.
하기와라 우시오의 뺨을 내려치자 그가 바닥에 풀썩 떨어졌다.
내 눈에 보인 것은 무언가를 입 안에 잔뜩 넣고 우물거리는. 모닥불 앞의 카나리였다.
"이 새끼 뭐야."
카이다 쿠로하는 카나리를 향해 걸어갔다. 나 또한 의아했다. 카나리가 왜 여기에 있지? 얘는 분명 방 안에 박혀 있었을 텐데. 나는 꽤 당황했다. 영안로 속에 나보다 먼저 들어오는 게 가능하긴 한가? 카이다는 모노로그의 명령을 받자마자 나를 납치했을 것이다. 그리고 영안로 안에 데려왔다. 그러니 나와 카이다보다 늦게 들어왔는데, 정작 우리보다 앞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이 되었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나는 정말 놀랐다. 카나리가 그 정도의 성취를 낼 수 있으리라고는, 애초에 방 안에서 밖으로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카나리는 영안로에 왜 들어왔단 말인가?
카나리는 입 안에 있는 것을 꼴딱 넘기더니 금새 시끄러워졌다.
"이 자식들이 여기로 왜 와! 여긴 내가 쉬는 곳인데. 패트리샤. 패트리샤아아아아! 어디에 있어!"
카나리가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겁이 많았고 일이 틀어졌다 싶으면 자신을 지켜줄 구석에 도움을 호소했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어차피 그가 똑같은 사람이라면 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들어왔느냐는 것이었다.
곧 패트리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휴식 시간은 다 같이 보내셔야 해요. 이곳은 경유지예요."
"카… 카나리 케이토. 아…"
카나리는 패트리샤의 말을 듣자마자 실타래를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그런 꼴을 두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카이다가 날아갔다. 한 달음만에 그녀는 카나리의 지척에 갈 수 있었다.
"안 돼! 어딜 가? 하하. 너 마침 잘 만났다!" 카나리의 손에서 실타래를 낚아채며. 카이다는 웃었다. 나는 순간 카나리의 표정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사실. 카이다가 내 실타래를 빼앗았을 때도 나는 비슷한 막막함을 느꼈다.
"어허. 휴식 시간에 다툼은 안 돼요. 카이다 씨! 카나리 씨에게 실타래를 넘기세요!" 패트리샤의 음성이 조금 커지자 카나리의 얼굴에 희망이 떠올랐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패트리샤는 한숨을 쉬었다. 곧이어 남성의 음성이 모닥불 옆에서 울렸다.
"처음부터…"
회색 인간이 어느새 모닥불 앞에 나타나.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카이다가 순간 영혼까지 뒤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아마 온몸의 털이 섬찟했겠지. 카이다는 실타래를 바닥에 내던지며 꼴사납게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끄아아아악! 알겠어. 알겠다고! 돼. 됐냐?! 허억… 허억…!"
"싸우지 마세요. 싸우면 그것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어요. 영안로 밖에서 강제 추방할 수도 있다구요!"
"알겠어. 알겠다고! 저 자식 치워! 치워어!"
"그냥 추방해! 이딴 자식 결국에는 폭력 행사야. 그것 말고는 답이 없으니까! 당장 추방시켜!"
둘이 묘하게 닮은 점이 있네…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패트리샤가 정의하기에 모닥불 근처는 휴식의 공간이겠지만, 달갑지 않은 두 사람과 함께 지내자니 전혀 편안하지 않았다. 나는 떽떽거리는 두 사람을 무시하며 모닥불 앞에 앉았다.
"흥. 어림도 없다. 혼쭐은 못 내줘도 네가 여기 있다는 건 알았으니… 너는 죽었어. 아주 죽었어. 따라잡으면 넌 내 손에 그냥…!"
"흐… 흐흥! 넌 날 못 따라잡아! 나는 나이토를 살리려 영안로에 왔어. 길 자체가 다르다 이 말씀이야! 하!"
"…나이토를 살리려 왔다고?" 나는 카나리의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느닷없이 카나리가 왜 그렇게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느끼기에 카나리는 자신이 안전하지 못한 상황에 놓이는 걸 피하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이득을 얻지 못할 상황에 놓이는 건 더더욱 싫어하는 그가 어떻게. 나이토를 살리려는 결심을 한 것인가?
"그게 왜."
"왜?" 나는 물었다.
"…그냥." 카나리는 작게 대답했다. 사람을 부활시키려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로 그만큼 바보 같은 게 있을까?
카이다는 회색 인간이 사라지자 반색을 하며 모닥불 앞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카나리의 옆에 있는 간식거리들을 물끄러미 보고는, 카나리의 바로 옆으로 은근슬쩍 자리를 옮겼다.
"너 뭐 먹고 있었냐? 나도 좀 줘봐."
"야. 네 거 먹어! 이건 내 거야!"
"싸우지 마세요. 원하는 대로 드릴 테니까요!"
"그래? 오냐 좋다. 무한정 주기로 약속한 거다. 패트…라시오. 였지. 아마. 1시간 동안 휴식하면서 마음껏 먹으면 된다 이거지? 하하하! 아무튼 꼬맹이 너는 나중에 죽었어! 영안로 안에서는 못 건드려도. 밖에서 보자고!"
"바… 밖에서도 내 방에 틀어박히면 그만인데? 아! 맞다! 그리고 보디가드도 있을 거야!"
"누가 너 같은 놈 보디가드를 해줘? 씨발 자기밖에 모르고 남 뒤통수나 치면서. 자기 잘난 티 내지만 잘난 점 하나 없는 못난이를. 누가 아끼고 도와주겠어? 부릴 허세를 부려라. 카하하!" 카나리는 카이다의 말에 입을 달싹거리다. 결국 다물어버렸다. 카나리가 별 말을 하지 않자 카이다는 더더욱 기고만장해졌다.
"킥킥킥. 아. 웃겨 죽겠네. 간식이나 내놔."
카이다는 바닥에서 솟아오른 그레이엄 크래커를 입 안에 던져놓고, 마시멜로를 질겅거리고, 초콜릿 잼을 맨손으로 퍼먹기 시작했다. 마치 동면에서 깨어난 곰이 너무 배고파 주변에 있던 걸 닥치는 대로 먹는 것 같았다. 잼통에 손을 넣고 손가락을 빠는 그 모습은 다분히 곰돌이 푸처럼 보이기도 했다. 참 게걸스럽고 교양 없는 것은 알았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애초에 그레이엄 크래커를 닥치는 대로 먹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통밀로 만들어서 별반 맛이 없고 목만 막힐 텐데…
"으. 달지도 않아? 그걸 통째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
"흠. 단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카이다는 입 안을 온통 초콜릿으로 물들인 채 말했다. 입술 언저리에 덕지덕지 묻은 잼을 혀로 핥자 놀랍도록 입술이 깨끗해졌다. 그 뒤에야. 그녀는 단맛을 느꼈다.
"단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니. 거기에 설탕이 얼마나 많이 들었는데…" 나는 그만 어이가 없어져 말했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약골 새끼야." 카이다는 그렇게 말하며 계속 혀를 날름거려 입술 주변을 핥았다. 이미 깨끗해진 지 오래인 입술이었다. 설마 맛을 잘 못 느끼니 일단 냅다 핥고 보는 걸까?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바로 카이다는 혀가 둔하다는 것이다. 단 맛을 거의 느끼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초콜릿 잼을 통으로 퍼먹는 건. 맛이 제대로 느껴질 때까지 시도해본 것이었다. 그레이엄 크래커를 마구 씹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차피 그녀는 맛을 잘 못 느끼니. 담백한 크래커와 달콤한 마시멜로우의 차이는 그저 식감에만 있었다. 아마 카이다에게 주어진 세 가지 재료로 할 수 있는 간식을 내주어도, 카이다 본인은 그 맛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게 퍼먹으니 제대로 느끼질 못 하지! 잘 봐. 이걸로 만들 수 있는 기똥찬 게 있는데…"
"가져가지 마. 이 자식이!" 카이다가 크래커에 손을 대는 카나리를 붙잡았다. 손목을 붙들린 카나리는 비명을 질렀다. 참 잘도 노는 두 명이었다. 나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1시간도 채 남지 않은 휴식을 즐기기로 했다. 문득 캠프파이어하던 때가 기억나려 했다. 좋은 때였다. 그때도 스모어를 구워 먹었는데…
"뭐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스모어? 카나리의 옆에 놓인 쿠키. 마시멜로. 초콜릿 잼으로 만드는 간식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기억도 없었다. 캠프파이어를 할 때의 기억? 언제야. 그게? 노네임 시절에도 그 전에도 캠프파이어를 한 적은 없는데?
스카우트 캠프 같은 곳에서 모닥불에 둘러앉는 건, 외국에서나 할 법한 일이잖아…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기분 나쁜 예감이 들어 나는 별 수 없이 모닥불을 들여다보았다. 그것 말고 볼만한 게 없었다. 문득 모닥불이 방출하는 적외선은 멜라토닌을 활성화시킨다는 지식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래서 캠프파이어 옆에서 자면 더 깊은 휴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 고개가 휘청거렸다. 잠을 자고 싶었다.
그것은 불멍(이라고 부르던가)때문이 아니었다. 피곤함조차도 아니었다. 정신을 유지할 만큼의 당이 없는 느낌. 나는 기절하듯 시름시름 졸기 시작했다. 내 몸이 좌우로 휘청거리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관성을 이기지 못하게 되었다. 내 몸이 한쪽으로 쏠렸다. 일어나기에는 너무 졸렸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이윽고 눈을 감았다.
나는 꽤 긴 꿈을 꾸었다. 꿈은 감미롭고도 애처로웠다.
나는 그 뒤로 며칠 동안 머리카락에 손을 대지 않았다. 잊어버렸다기보단 문득 경계하는 마음이 새삼스레 생긴 탓이었다. 다른 사람과 일상을 겹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야 할까? 적어도 인공지능마저 멀리하는 와중에 웬 머리카락 너머의 여인을 만나러 갈 필요성을 못 느꼈다. 머리카락 묶음만 잡으면 정신이 연결된다는, 말도 안 되는 일. 그게 바닥에 떨어졌을 때. 분명 위험인물의 소지품인데도 나를 제외한 누구도 심지어는 히무로 시라베조차 인식하지 못했다는 게 기이하고 묘했다.
나는 며칠 동안 기계를 설계하고 인공지능과의 침묵을 견뎠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생활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서랍 안의 머리카락에 점점 신경이 쏠리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대화가 고프다는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그냥 대화를 하면 그만 아닌가? 외딴 무인도에서 혼자 살기라도 하나? 대화가 고프다는 그녀. 기묘한 머리카락. 터치. 조율자의 파편? 이건 또 무슨 뜻일까?
그녀를 단순한 심심풀이로 여긴 것은 절대 아니지만, 나는 조금씩 흥미를 느꼈다. 마법을 체험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나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넣어둔 서랍 쪽을 기웃거렸고 은근히 그것이 눈에 밟혔다. 지긋지긋한 기관 속의 변수를 나는 나쁘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시라유키 히메리는 싫고 인공지능은 불편했다. 나는 기관 속 누구에게도 내 본명을 주지 않을 터였다. 그러는 와중 새로운 현상은 반길 만한 일이었다.
그렇게 어느 날 내가 머리카락을 잡은 것은 당연히 정해진 일 같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누가 써놓은 듯이 나는 손을 떨지도 않았다. 마법에 손을 댄다는 느낌도 없었다. 그저 뻗고 잡았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두어 번 잡고 놓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신경이 거슬릴지도 몰랐지만. 할 일 하고 있는 와중에 누가 말을 거는 일을 반길 사람은 드물었다. 애초에 시도 때도 없이 누가 말을 거는 게 싫다고 그녀는 말했다. 적어도 내가 말을 곧 걸 것이라 경고해두는 게 최소한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로 머리카락을 잡았을 때는 그녀로부터 말이 들려왔다.
"여보세요. 얼마 전의 그분이 맞나요?"
"그 사람 맞아. 지금 달리 하는 일 있어?"
"없어요. 사실 늘 무료해요. 말을 거실 거면 언제든지 거세요."
"대몰락 시대에 무료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운데. 부유한가 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무인도 가설에 힘을 주기로 했다. 부잣집 아가씨가 본인 소유의 무인도로 갔는데 대몰락이 터진 거다. 그럼 뭐. 생선이나 잡아 먹으면서 살려나? 왜 늘 무료하지?… 나는 아무래도 좋은 공상을 잊어버렸다.
"평범한 대화나 할까요. 그러고 보니 당신의 이름도 모르는데. 자기소개 어때요?"
"내 이름은 알려주기 싫어."
대몰락의 시대에 익명의 누군가에게 신원을 알려주는 것의 위험함. 그런 고리타분한 것보다 더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연유를 설명하기보다 나는 그렇게 일축했다. 그저 알려주기 싫어 알려주지 않는 것으로.
"저는 처음 이야기 나눌 때부터 이름을 말씀드렸는데요. 당신은 싫다고 안 알려줘요? 조금 괘씸하지 않아요?"
"괘씸할 것까지야. 고작 이름 가지고?" 그렇게 말하는 나는 정작 이름을 중요시하기에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고작 이름이 아니에요. 이름의 교환이란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서로에게 공유하는 일이에요. 그 작은 것을 기억하며 가슴에 품고. 관계를 시작하는 첫 발걸음이죠. 나는 당신에게 이름을 주었는데 당신은 안 줘요?"
이 누님 나랑 생각이 비슷한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나는 저 사고방식을 가지고 고초를 좀 겪어서 오히려 이름을 아끼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건 나도 잘 알아. 그래서 이름을 말해주기 싫다는 거야. 그토록 중요하니까."
"가볍게 교환하는 것도 안 되나요? 명함 주고받듯이요. 아. 명함도 이름 교환이군요."
"당신이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나는 어차피 모든 사람을 상대로 가명을 쓰거든."
"피곤하게 사시네요.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도 된다고 하신 거죠? 그럼 얌체 씨라고 불러도 돼요?"
히무로 시라베도 그렇고 이름을 짓는 솜씨가 다들 말이 아니었다. 가명 마니아로 살기에는 좋지 않은 시대였다. 애초에 모든 이들이 살기 좋지 않은 시대이기도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려 했다. 그러자 육성으로 숨이 내쉬어지지는 않았지만 대신 폐는 수축함과 동시에 내 머릿속에 한숨 소리가 퍼졌다. 기이한 체험. 정신적인 한숨이라 해야 할까?
"정말 그렇게 부를 거면 그렇게 하던가. 제인 브라이트."
"참 차갑기도 하시네요. 끝까지 이름도 안 알려주고… 캐롤이라고 불러 주세요. 얌체 씨. 저는 그 이름이 더 마음에 들어서요."
"나는 내 게 마음에 안 들지만 말이야."
정신적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머리카락을 잡은 채로 나누는 대화는 묘하게 안정되면서 불안정한 면이 있었다. 입을 뻐끔거리지 않았고 상대도 내 앞에 없었지만 얼렁뚱땅 대화가 이어졌다. 점잖게 후후 웃는 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자기소개라… 이전에 말한 적이 있지만 나는 카텟 기관에서 일하고 있어. 그러기 싫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거든. 당신 차례. 하나씩 말하자고."
"전 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어요."
나는 내 손 안의 금색 머리카락 묶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도 눈이 있어. 손안에 있는 건 보여"
정신적 웃음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그렇네요. 당신한테 그게 있는 걸 왜 까먹었을까? 키는 174cm. 몇 년 전부터 조금도 자라고 있지 않지만요."
"뭐야. 나보다 크잖아?" 나는 170cm에 가까스로 닿은 시점이었다.
"그래요? 상관없지 않아요? 멀대같이 크기만 한 남자보단 적당한 남자가 더 나아요."
"상관이야 없지. 계속 얘기하자. 나는 초고교급이라 불려. 카텟 기관에 있는 건 재단을 피하기 위함이기도 해. 아. 종목은 날 특정할 수도 있으니 이야기하기 싫어."
"당신 진짜 얌체네요."
"내가 보통이야. 서슴없이 모르는 사람에게 이름을 알려주는 당신이 보통 범주를 벗어난 거야."
"그럼 더 벗어나 보죠 뭐. 저는 초고교급 상담사라 불렸어요. 희망봉 학원에서 스카우트되는 그런 게 아니라 지역 신문에 나는 초고교급이요."
"초고교급? 당신 지금 어디야?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래서 재단의 사냥꾼들한테서 벗어난 건가."
"다 방법이 있죠. 전 안전해요."
나는 그녀가 어떻게 숨어있는지 더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다 방법이 있으려니. 그게 다였다.
"그 무분별한 놈들은 결국 피해야만 한단 말이지. 초고교급이라 불려본 사람들을 다 찾아내 재능을 뽑으려 드니까… "
"정말 나쁜 부류의 사람들이에요." 나는 캐롤의 어투에서 잘 갈린 칼처럼 서늘한 적의를 느꼈다. "악당들. 악한들… 하나도 빠짐없이 끔찍해…"
댁 말이 백번 맞다며 찬동하려다가 어딘가 분위기가 이상해 그만두었다. 몇 초 동안 나와 그녀의 정신은 아무 사념도 보내지 않았다.
"계속할까요? 저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홍차를 즐겨요."
"홍차 좋지."
"홍차 좋아하세요?"
"나는 얼그레이 잎이 좋아. 살던 곳 지하수가 맛이 가서 물에 석회질이 섞여 나왔을 때가 있었거든."
"물이 오염되면 골치 아프죠."
"정수기를 만들어서 석회는 걸러내도 맛이 너무 이상해서 그냥은 못 마시겠더라. 즐겨 마시던 믹스커피 브랜드는 멸종했고. 그러니 홍차는 사실 좋은 대안이었어. 몇 개월 동안 마시니 오히려 그냥 물이 밍밍해지긴 했지만."
"이런 곳에서 홍차 마니아를 만나네요. 그보다 정수기를 만들 수 있다니 대단해요."
"다 구르는 재주가 있는 법이겠지. 나는 정수기를 만들 줄 알고 캐롤 당신에겐 마법의 머리카락이 있는 거야."
"저는 머리카락에 마법이 없었으면 하지만 말이죠."
하기야. 머리카락 탓에 다른 사람과 정신이 이어지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단순히 조금 불편하다는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에게는 끔찍한 악몽이었을지도 몰랐다.
"만약 삭발하면… 아. 이미 잘린 머리카락과도 이어지는 거였지? 머리카락 묶음으로 이어져있는 거니까… 그럼 당신은 머리를 어떻게 잘라?"
"보통 자른 다음에 태우곤 했어요. 그러면 머리카락도 안 남으니까요. 한 묶음 때문에 무슨 고초를 겪었는지 생각해 보면 신경 쓸 수밖에요."
번거롭고, 불편한 일일 터였다.
"힘들겠어."
"네. 어느 정도는요. 생체 전기 때문이래요. 저는 다른 이와 닿을 때 정신이 연결되는 체질을 타고났어요. 전기 신호가 뉴런과 연결되듯이요. 이미 잘린 머리카락에까지 이어지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요…"
"그것도 이토록 강력하게 연결되다니. 첨단 통신 시스템보다 더하잖아. 아무런 소리의 끊김도 없어."
"이건 강력한 축에 끼지도 않아요. 살과 살을 맞대는 터치는 더욱 강력하죠. 제 생각에. 제 터치는 샤이닝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샤이닝? 나도 알야. 재단에서 발견한 물질이잖아. 사실 따지고 보면 시라유키 히메리가 발견했지. 재단은 샤이닝을 추출할 방법을 고안했던 거고… 당신도 힘들겠어. 초능력자로 사는 거 말이야."
"결국 초고교급이라 불리는 모든 사람들이 초능력자의 고충을 일부분이나마 가지고 있기 마련이에요. 저는 단지 운이 안 좋았을 뿐이죠…"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괜히 들쑤셨나. 미안해. 캐롤."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전 이런 대화도 좋다고 보거든요. 서로 면식도 없는 사람이기에 더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느낌이에요."
"당신이 비범한 거야."
"당신도 나중에는 저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주지 않겠어요? 이름은 주지 않더라도 그건 할 수 있으시잖아요."
"글쎄…"
노바디와 인공지능에 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날이. 오기나 할지 의문이었다.
"전 상담사예요. 다른 사람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죠. 심심해지면 찾아오세요. 전 늘 심심하니 수다나 떨자고요. 다친 짐승들이 서로 상처를 핥듯이."
뭔가 야한데. 나는 생각했다.
"야해요?"
아. 서로의 생각이 들리는 거였지.
나는 그녀가 야하다고 생각한 바 있었다. 사실 언제나 마음의 아주 작은 한 켠은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캐롤 씨에게 자애와 반대되는 그림자가 있었고, 그 그림자가 그녀를 이윽고 집어삼켰듯이 내 자아와 그림자가 서로 섞여갔다. 그녀에게 벌어졌던 일은 그림자 동화가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참을성 버텨왔던 그녀가 자포자기하듯 내게 찾아왔을 리가 없었다. 과연 그건 잘한 일일까?-자아. 무조건 옳은 일이었어-그림자. 혹은 그 반대.
탄산음료와 유제품을 섞으면 그런 질감의 혼돈이 나오리라. 꿈 속이기에 어지러웠으나, 그녀의 형상만큼은 생생했다. 두 가지 형상의 그녀가 있었다. 첫 번째 그녀는 거룩했다. 두 번째 그녀는 정확히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후광이 비치는 듯한 그녀. 경외로 가득 차있으며 신적인 동력을 가진 그녀가 있는 데에 반해 매력적이고 아름다우며, 또한 관능적인 그녀의 모습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거의 바라보지도 못했다. 이따금씩의 꿈이 그렇듯 나는 내가 보고 있는 캐롤 씨가 꿈속 존재임을 알았고, 캐롤 씨를 그런 모습으로 꿈에서 보는 것 자체가 죄스럽다 느꼈기 때문이다.
대리석처럼 흰 어깨. 터틀넥 스웨터로 가려지지 않은 목은 올곧고 매끄럽게 뻗어 있었다. 유려한 속눈썹이 지긋이 감긴 눈에 기교를 더했고, 고대의 원반 거울과 같은 귓바퀴. 이마를 아스라이 덮고 허리까지 칠렁이는 머리카락. 비단결과도 같았다. 그녀는 팔이 있는 비너스 상이었다. 다만 서로의 샤이닝을 느꼈던 그날처럼 속옷을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레이스가 수 놓인 성숙한 흰색…
나체의 환각과 처음 마주한 고전소설 속 기독교도처럼. 나는 한탄했다. 아! 죄스럽다. 너무나도 죄스럽다! 이것은 아니 될 일이다! 내 어찌 그녀의 형상을 뇌쇄적인 모습으로 그려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나는 스스로가 놀랄 만치 부끄러워졌다. 어디에도 숨을 구석이 없이. 염치없는 나 자신의 번뇌라는 끔찍함을 바라보았다. 이게 나의 꿈인가? 그녀를 이해하고자 했던,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던, 품어서는 안 될 감정을 품고 그녀를 한 번이라도 다시 보려는. 나의 꿈이란 말인가! 이것이!
해류 속에서 흔들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어디부터 잘못되었던가? 그래. 잘못되었다. 이런 천박한 망상을 자행하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아아. 싫다. 너무 싫다. 내 맨얼굴이 싫다. 이게 내 진짜 모습이었다. 웅덩이에 비춘 내 모습을 보듯 나는 꿈이라는 반사물을 마주해 내 그림자를 보았다. 은인, 카텟, 이해자… 그 모든 변명 뒤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 유리로 변해 내 품안에서 부서져버린 그녀의 나체를 떠올리는 저속한 짐승. 그래. 짐승! 너절하고 추악한 음몽을 원하는 짐승이다!
나는 그렇지 않노라 되뇌지는 않았다. 프로이트의 말에 의하면 꿈은 리비도(libido)에 의해 발현된 이드(id)가 그린 그림이다. 성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고들 한다, 분명 그녀와 샤이닝을 교감하던 순간마저 나는 신체적 접촉에 정신이 팔려 있지 않았나. 그것은 내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이었으나, 반나체의 그녀가 나긋한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오니 일그러진 욕망이 나의 정신마저 일그러지게 만들었다.
나는 그 곡선을 기억했다. 그것은 금기였고, 곧 금기처럼 작동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더욱 그것을 떠올리게 되었다. 완벽한 곡선이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머리가 아찔해지는 육체. 그 압도성! 아아. 싫다. 내가 싫다. 그녀를 대상화하는 나 자신을 억눌러야 했다. 그럼에도 왜. 멈출 수가 없는가.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우아하고도 음심 가득한 동작을 하며 걸어오는 그녀가. 내 마음을 뒤흔들고 혈류를 빠르게 만드는지!
열병에 걸린 듯하다. 내 안에서 소스라치듯 솟구치는 열욕이 나를 어딘가 답답하여 견딜 수 없다 느끼게 만들었다. 몸 안에 고름이 찼다. 그러나 해소할 방법은 없다. 척추에 차오른 고름을 짜는 것은 어렵되 정신 속에 차오른 고름은 불가능한 법이었다. 이 해소할 수 없는 충동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일까. 더럽고 곪아버린 염증을 종양처럼 단 채로 나는 환상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래서는 안 돼…"
나는 캐롤 씨의 환영이 나를 잡아먹기라도 할 듯이 나의 양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 자신을 막기 위한 몸짓이었다. 집어치워야 한다고. 그녀를 향한 모욕을 멈춰야만… 한다고… 캐롤 씨에게 그런 마음을 품어서는…
그녀는… 나의 아프락사스다.
문득 떠올렸다. 당장 몇 분 전에 한 말이었다. 그러나 아프락사스가 뭐지? 잊히지 않은 지식 사전이 말해 주었다.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인 존재. 아니마면서 아니무스. 죄면서 미덕. 쾌락이자 고통. 안전이자 위험.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아프락사스에 대해 말하며 그 뜻조차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내가 아프락사스에 대해 말할 때. 그 단어는 당연하다는 듯이 떠오르고 그 직후 사라져 버렸다.
아프락사스. 신이면서 악마. 둘은 반대되는 이미지일지 모르지만 그 두 머리는 같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동전의 양면이 같은 동전이듯.
나는 반나체의 캐롤 씨에게서 눈을 돌리고, 반대편에 서 있던 거룩한 캐롤 씨를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보지 않았을 뿐이다. 두 가지의 모습, 하나의 존재.
신과 같은 캐롤 씨가 있고 악마같은 캐롤 씨가 있다고 본다면, 여기서 신과 같은 캐롤 씨란 그녀의 페르소나이다. 인내심이 많고 자상하며 결코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다른 이를 생각하고, 희생하고, 소위 선한 이가 바로 신적인 그녀이다. 그러나 악마같은 캐롤 씨가 있다고 하여 그 모습이 악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악마는 그저 신이 가지지 못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라면 가지는 모든 것을 그림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기적인 마음, 자신을 아끼는 마음, 화를 내고 싶은 마음, 윤리 강령을 무시하고자 하는 충동, 품어서는 안 될 충동과 애착. 나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의 본능 안에 그것이 잠재되어있다면, 제가 그것을 똑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마주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녀를 만났다. 유래 없을 정도로 흔들리던 그녀. 너무나 급작스럽다고 생각될만치 절박했던 캐롤 씨.
상담사 캐롤은 지금 이 자리에 없어요. 잠시 죽었죠.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억눌려온. 캐롤 브라이트라는 사람이예요. 내 그림자.
제가 지금까지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가 많지 않았나 봐요. 당신이 상담사 쪽을 더 좋아했다면, 제 입장에선 유감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군요. 지금 그 여자는 당분간 자리를 비웠으니까.
캐롤 씨는 그렇게 말했으나 그녀는 결코 이중인격자가 아니었다. 이중인격보다도 더욱 반발하는 두 가지 형태일지라도 두 인격은 하나였다.
당신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예요. 제가 당신을 보며 어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충동을, 그리고 환상을 가지는지.
과연 나만큼 어두우지는 않을 것이다. 나만큼이나 음습한 환상은 아니었을 테다, 그러나 나는 일말의 궁금증을 느꼈다. 과연 그녀가 말한 어두움이란 어떨지. 나에게서 그것을 볼 만한 구석이 있었을지. 내 보라색 상의 안 맨살에 과연 다시 볼 만큼의 매력이 있는가. 그러지는 않을 것인데.
나는 그녀를 다시 보았다. 매력을 넘어선 마력을.
필부들을 숙연하게 만들 자태. 숭배받을 만한, 마땅한 셰이프. 단순히 걷는 것만으로 겸손과 주눅의 의미를 관측자들에게 되새길 몸. 교만하게까지 느껴지는 유방의 봉긋함. 단추처럼 작은 배꼽으로 내려가는 선은 그 부드러운 모양이 무색하리만치 날렵하다. 과도하지 않을 만큼 얇은 허리를 따라 굴곡진 골반이 호리병을 만들었다. 마치 현존재할 수 없는 육체의 예시로 나올법했다. 허벅지는 매끈하고 맵시 있게 가득 찬 채로 뻗어 있었고 무릎과 종아리의 형태마저 완벽했다. 발에는 아무것도 신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 광경이 내 마음을 들썩이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교양과 예절 그리고 편의 기능을 상징하는 신발이 없다는 것은 내 앞에 있는 게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캐롤 씨임을 암시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자체로 황금 양가죽처럼 빛나는 머리카락의 커튼이 스스로의 허리를 달래듯 토닥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네 갈래로 땋은 묶음머리. 아. 그 하나하나의 오밀조밀함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영혼은 주머니 안에 넣지 못했으나 묶음 한 단 만큼은 주머니 안에 넣지 않았던가. 일류 방직꾼이 짠 피륙처럼 티끌만 한 틈새조차 없고 꽉 차게 땡땡한 그것, 섬세하게 촘촘하고 매끄러운 그것이 걸음걸이마다 물결쳤다. 눈꺼풀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눈동자는 보이지 않기에 보고자 하는 애달픔을 느끼게 한다. 는실난실한 웃음… 나를 놀리듯이 금색 커튼 속으로 팔을 집어넣고선 위로 끌어올리고 놓아버리자, 금빛 무리가 가냘픈 팔을 타고 밑으로 흐르며, 관성을 타고 작게 진자 운동했다. 내 숨이 점점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더욱 내 눈에 담을수록 애욕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정녕 그녀는 여신인가? 나는 멍하게 생각했다. 얼빠진 일이지만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면, 그러니까 내 말은 단지 그녀의 눈이라던가, 입술의 움직임이라던가, 등과 어깨 혹은 치마의 움직임을 보는 게 아닌 그녀 자체라는 사람을 온전히 들여다보겠노라 감히 시도하고 그 일말이나마 보았다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녀에게 깃들어 있는 신성함을. 이 존재는 특별하니 알아서 잘 알아보라는 듯한 후광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을 5년 동안 사랑해선 안 된다고? 그것은 형벌일 뿐이다! 그것은 기능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에게 애욕을 느끼지 않도록 억누르려면 나를 거세시키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를 도와주고 이끌어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은 분명 내 안에 가득 차 있다. 누군가에게서 대가 없이 따뜻한 빵 한 조각을 받았고, 그 빵만큼의 도움을 언젠가 다른 이에게 베풀고 싶다. 나는 분명 그녀에게 존경과 존중을 보내고 있었다. 해바라기가 해를 보는 듯한, 아난타가 싯다르타를 보는 듯한.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정신적 스승이나 우상에게 향해선 안 될 음산한 마음을 가졌다. 단지 내담자와 상담사. 살인 게임 속의 동료가 아니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고 옆에서 걷고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홍차를 마시는 게 아니었다. 사실 반대되는 것이었다. 경멸당할법한 것. 지금까지 날 그런 눈으로 본 거냐며 뒷걸음질을 칠법한 망상을 가졌다. 허나 그 둘은 결코 서로를 침범하지 않은 채 독자적인 범위를 유지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나는 그러고 있었다.
흑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그래?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과 밀폐된 공간에서 흉부에 손을 댔다. 그리고 그 영혼을 들여다보았지. 그런데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쓴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도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한 없이 안전한 사람. 숫기 없는 사람이 되려 했다. 캐롤 씨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을까? 나조차도 알 수 없지만 나는 알게 되었다… 한 가지 모습만을 추구하는 건 아집에 불과했다.
나는 나에게 솔직해야 했다. 그녀를 원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고해의 작업이었다. 캐롤 씨가 스스로의 구심점을 잃어가고 내담자에게 의존했을 때. 그녀를 온전히 걱정했던가? 이대로 캐롤 씨를 거부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 한 켠에라도 있었다.
미도리카와와 강제적인 터치를 나눈 그녀. 캐롤 씨는 미도리카와에게 영향을 받았다. 터치의 끈이 이어졌고 한 쪽이 일방적으로 사라져버렸다. 미도리카와에게 흘러들어간 캐롤 씨의 일부는 영영 죽어버렸고, 그것은 이름을 준 사람이 죽자 내 일부가 죽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캐롤 씨가 그토록 절박했던 이유는 모리의 후원자인 내가 모리를 따라 죽을 때, 캐롤 씨의 커다란 일부 또한 함께 죽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준 만큼 그 준 마음이 죽는 것이다.
모든 의복으로 자신을 둘러싼 캐롤 씨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견고했던 그녀의 페르소나. 어디까지나 살아남을 것만 같던 캐롤 씨도 이윽고는 쓰러졌다. 유리가 되어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는 온전히 내게 달려 있었다. 나는 그렇게 동력을 얻었다. 단순히 카이다 쿠로하에게 납치당해 동행하고 있으니 깨달음의 여정을 걷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숙원이고, 고행이었다. 깨달음의 길 위에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이기적이고 눈이 뒤집혀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도 그녀를 다시 보리라.
한 가지 모습만을 인정할 수는 없다. 나는 충분히 유해하고 독이 올라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빠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서야 내 동기는 완전해지지 않았다. 나는 이해했다. 한 가지 그녀만을 받아들일 순 없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생각을 했다. 한 가지의 나만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나는 옳은 선택만을 하려 했고, 선한 사람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악한 나 또한 긍정해야 했다. 그게 옳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런 나의 이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무엇도 잘못된 것은 없다. 오직 내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느냐였다.
"나의 아프락사스…"
신이자 악마. 미덕이자 죄.
그 앞에서 나는 깨끗하고 벌거벗은 채였다. 왜인지 나는 격렬하지 않았다. 그저 초연했다. 욕망을 인정한다면 그것을 다스리고 언제 분출할지 스스로를 타이를 수 있었다. 그 과정을 통해 내부에서 타오르는 불을 전신으로 옮겼다. 그 온기는 고통스럽고 해소하고 싶으면서도 나를 살아있게 만들었다. 환상이 변해갈 때조차 나는 놀라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헐벗은 캐롤 씨의 모습이 변해갔다. 금색의 양털 같은 것이 몸에 거품처럼 불어났다. 곧 민소매의 털조끼가 만들어져 가까스로 몸을 가렸다. 머리에는 뿔이 자랐다. 곧게 뻗은 염소의 뿔이었다. 검은 공간이 차츰 붉게 채워지고 그녀의 몸에도 또한 붉은 물감 혹은 핏방울 같은 침범물이 남았다. 지독히 선명한 이계의 석양 속에 선 듯했다. 그녀는 팔을 옆으로 벌렸다. 포옹을 원하는 듯한, 혹은 자신을 보라는 듯한 몸짓이었다. 종교적인 색채에서. 그녀는 나의 죄요 미덕이 되었다. 사탄 교리에서 주는 아도나이라는 이름의 악신이었다. 주의 입장에서 사탄은 루시퍼고 적그리스도고 뱀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게 하나의 사람이었다. 나는 그 불길하고도 충만한 날것의 꿈속에서 그녀가 눈을 뜨는 것을 보았다. 눈꺼풀이 열렸다.
그 게슴츠레 뜨인 눈은 금빛이었다.
나는 반푼이로 잠들어, 온전하게 깨어났다.
나는 왜 그날을 떠올렸을까. 애비의 손찌검을 못 버티고 바닥에 털썩 쓰러져버린 날. 나는 꽤 맷집이 세고 인내심도 좋은 꼬마였지만 그날만큼은 버티지 못했다. 아마 피를 뽑고 난 뒤였기 때문이리라. 제대로 먹이지도 않고 그 지랄을 놓으니 안 쓰러지고 배기나?
아무튼 답 대가리가 안 나왔다. 아. 이거 이대로 맞다가 세상 하직하시겠다 하는 느낌이 들고 눈을 게슴츠레 떴다. 눈을 부릅뜰 기력이 없었다. 신기했던 건 그날 내가 애비한테 두들겨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술을 못 사 오면(나한테 돈이 나오는 화수분이 있을 줄 아나? 용돈도 안 주고 술만 가져오라는데 내가 어떻게 가져와?) 나를 북처럼 두들기던 양반이. 날 보고 피식 웃으면서 자기 할 일이나 했단 말이다.
나는 일단 그 자리에서 일어나 스리슬쩍 거울로 향했다. 그리고 내 모습이 생전 어느 때보다 못생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경험 다들 있잖아? 너무 많이 울고 콧물도 질질 나오면 일단 세수도 하고 코도 풀고 해야 하니 화장실로 가는 거다. 그리고 서러워져서 흑흑 훌쩍훌쩍 울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내 꼴에 웃음이 터지는 거지. 그래. 웃음이다. 그게 답이었다. 애비놈도 내 웃긴 꼴을 보고 날 안 때리지 않았나?
나는 어린 나이에 삶의 이치를 깨달았다. 광대가 되는 거다. 남을 웃겨주는 거다. 그러면 누구나 주먹을 휘두르지 않게 된다. 그런 식으로 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 웃음은 곧 내게 있어 이득이다. 코믹한 환기물이 되어주기만 하면…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이윽고 내 꼴이 우스워 웃을 수 있었다. 모든 게 농담거리였다.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미쳤다. 그래도 뭐 어떤가? 웃기지 않은가? 내 애비가 좀비처럼 비틀비틀 걷고 애미는 이상한 사이비에 빠진 꼴이 말이다. 이 만한 개판은 드물단 말이지! 그러니 재미있다. 그러니 웃기다! 웃어 봐! 다들 웃어! 왜 안 웃지?
내 삶이 지독하게 불행하다는 것처럼 말이야.
아무런 웃을 부분이 없다는 것처럼.
"오늘 관객분들이 잘 웃어주시네. 내가 공식을 좀 잘 짰나 봐. 내 공식에 대해 말해 줄까? 야한 농담은 무조건 먹힌다. 자학개그는 곧잘 먹힌다. 애새끼들 욕하는 건 무조건 먹힌다."
(관객들 웃음, 야유)
"왜 이래. 애새끼들이라는 말이 맘에 안 들어? 아니 애초에 애새끼들이라는 표현이 왜 웃기다는 거야? 나는 애새끼들이 이 친구들의 정식 명칭이라고 생각하는데. 애새끼들을 어린애라고 부르는 건 마치 설사를 항문 구토라고 부르는 거랑 똑같아(입으로 뿌직 소리를 낸다)."
(관객들 웃음)
"이거 위험해. 마치 애새끼들이라는 단어 없이는 문장을 못 만드는 사람이 되어버렸어. 그런데 왜 다들 어린애를 욕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거기 아저씨(관객을 가리킴). 혹시 요식업 하세요?"
관객: 맞아.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 아까 야유하던데. 무슨 음식 하세요?(마이크 스탠드에 몸을 기댄다)"
관객: 포장마차를 해.
"그럼 오뎅도 있겠네? 내가 예시를 하나 듭시다. 당신 포장마차에 맛있는 오뎅과 계란들이 보글보글 끓고 있어. 아주 잘 우러난 국물에 무랑 막 띄워가지고 장난이 없어. 그런데 느닷없이 손님이 데려온 애새끼 하나가 오뎅 국물에 가래침을 뱉는 거야."
(관객들 웃음)
"그냥 퉤가 아니라 그냥 씻팔 짭짜름한 콧물 결정체가 오뎅 국물에 둥둥 떠다니는데. 그 자리에서 이럴 거요? 안 돼요 꼬마 손님! 내 오뎅에 침을 뱉으면 못 써!"
"내 말의 요지는 버르장머리 없는 꼬맹이들이 넘친다 이거야. 내 집에서는 그런 거 상상도 못 했어(가슴팍을 때린다)! 애비랑 눈이 마주치기만 하면 그냥 싸대기가 날아갔다고(팔을 휘두른다)."
(관객들 웃음)
"술 안 가져와도 막 욕을 하면서. 침 튀기고 그냥 애새끼 상대로 마운트 잡는 거야(마이크 스탠드를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탄다). 이 새끼야. 술 가져와! 술! 수우 우우 울(마이크 스탠드에 주먹질하는 시늉을 한다)!"
"말을. 안. 들어. 말을! 말을 안 들어 애새끼가. 씨발 애새끼야(마이크 스탠드에 발길질을 한다)! 카악. 퉤!"
"…분위기 왜 이래? 왜 안 웃지? 나는 이 공식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하하. 호호. 흐흐흐…"
"흐흐흐… 킥킥킥킥…"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건가." 나는 팔을 높이 들었다.
"아니야! 하하. 차렸어. 정신 차렸다고. 하. 그래. 영안로 속 시련이 밖까지 기어 나오는 게 반전. 여기 안에서 시련을 깰 수 없으니 영안로로 들어가라 이거지. 다 이해했어. 그 와중에 주먹 존나 매워. 하하! 히무로이드 이거 교육자 자질이 좀 있으셔? 좋아요. 좋아!"
하기와라 우시오는 몸을 털어내고는 스스로 일어났다. 어차피 손을 뻗어봤자 잡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에게 건네지는 않았다. 그는 얼굴에 맺힌 식은땀을 옷소매로 닦아 버리고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카이다 년이나 잡으러 가자고. 이야. 설마 지금 내 앞에 탑에 남아 있던 사람들 다 모여있어? 진짜로 다 투명인간이라 내가 못 보고 있을 뿐이라면, 내가 지랄하는 꼴을 이바라도 봤다 이거지? 그거 참… 쪽팔린데."
"그 수치는 네 몫이 아니다. 네 양친들이 스스로 수치스러워해야 할 일이지. 이미 죽은 것 같으니 불가능하겠지만."
"하하하하!"
하기와라 우시오는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가짜 웃음이 아니라 그는 죽은 부모에 대한 민감한 말조차도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미친 패드립 유망주 좀 봐. 그래. 다 죽었어! 그러니까 이제 정신 차려야지. 현실을 마주할 때입니다. 하기와라 우시오. 삐릭삐릭삐빅. 기기기기기긱. 그그극? 오케이!"
아직도 유쾌한가?
"너는 수치스러울 필요가 없다. 남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움을 요청해라. 그리고 도움을 받아라.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기 어려운 사람이겠지만, 너와 기꺼이 이야기를 나눠줄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야기를 나누기 싫네요."
"왜지?"
"왜냐면 나는 너무 이상하게 자랐거든. 그래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 다들 내 안을 꿰뚫어 볼 것 같아. 친구가 죽었는데. 그렇게 든든하던 놈이 갔는데 눈물 한 방울도 못 흘리는 사람이라는 걸 말이야… 그래서 내 바운더리 깊은 곳까지 사람이 들어오는 게 싫은 거다. 나는… 터부시되기가 싫어… 씨팔 사람이니까. 너 같은 취급은 받기 싫다고."
어떤 느낌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의 친구는 할 수 있었을지 궁금했다. 이바라 쿠리스 쪽을 돌아보았다.
"이게…! 나 지금 기분 상했어. 알아 둬? 내가 고작 그거 가지고 너를 멀리할 것 같아? 내가 그렇게 소인배 같냐! 나 울 거야. 섭섭해서 엉엉 울어버린다! 진심이야!"
이바라 쿠리스는 소리쳤다. 굳이 하기와라 우시오에게 전해줄 만한 가치의 말은 아니었다.
"너는 이미 보여줄 꼴을 전부 보여주었다. 받아들이는 것은 이제 구경꾼들의 몫이다. 너의 과제가 아니다. 너의 과제는 영안로 속에 들어가는 것이지."
"그래… 이제 어쭙잖은 연기도 끝이야. 하하. 웃기다 웃겨. 이제 보니까 나… 싸이코들이랑 진짜 닮았다는 게 말이야. 얼굴에 철판 깔고 연기를 하면서, 미친 짓도 서슴없었지…"
하기와라 우시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어느 순간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영안로의 문까지 후다닥 달려갔다. 목도리도마뱀의 질주를 보는 듯했다.
"어우. 이 새끼들. 잊고 있었네! 앰앱새끼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너만 괜찮다면 바로 출발하지."
"히무로! 히무로! 잠깐. 하기와라한테 내 말 좀 전해 주라!" 이바라 쿠리스가 소리쳤다.
"네가 영안로 속에 들어와 말을 전하고 실타래를 써 빠져나가는 건 어떤가? 훨씬 간편할 것이다." 나는 이바라 쿠리스에게 말했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내가 허공에 말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는 곧바로 내 말을 듣는 주체를 파악해냈다.
"뭐?! 지금 누가 영안로 속에 들어온대. 이바라지?! 어림도 없다고 전해. 쟨 여기 들어오면 안 돼! 튀자. 히무로이드! 빨리 들어와. 빨리!"
하기와라 우시오는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영안로의 문을 열었다. 도망치는 몸짓과 똑같았다. 그의 고질적인 문제를 보았다. 그는 진실된 우정을 버틸 수 없었다. 자신이 그것에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여하튼 간에 그는 소중한 것에서 멀어지려 했다. 해변으로 통하는 문 안으로 기꺼이 들어간 이유가 이바라 쿠리스와의 화해를 미루기 위함이었던 것처럼, 하기와라 우시오는 정작 자신의 친구와 감정적인 유대를 꺼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영안로 속의 어둠에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내가 참견을 하나 하겠다."
"참견? 하든가."
"네가 그녀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는 게 좋을 것이다. 도망가지 말라는 뜻이다."
"너나 제대로 해. 이 새끼야. 마유즈미랑 화해도 안 했으면서 훈계질이네? 말 나온 김에 너 오늘 안에 마유즈미랑 화해해."
"그건 네가 강요한다고 하여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때가 되면…"
"똑바로 바라보라며?"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보았다.
"논파. 임마."
그의 의기양양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옳은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23T5U130과 친해져 보기로 했다. 히무로와 하기와라가 돌야 오기 전까지의 시간을 보내기엔 꽤 효율적이고 좋은 방법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23T. 너는 아까 어떤 물건이 나왔어? 배? 내가 생각하는 선박 말이야?"
"시련을 선택했을 때를 묻는 거라면 테세우스의 배가 나왔어."
"테세우스? 그 사람 배가 무섭게 생겼어?" 23T5U130은 마유즈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유즈미에게 바보 같은 점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리고 바보 같은 점이 있다는 것은 그녀가 바보가 아니라는 뜻과 같았다. 그야 온전한 바보에겐 바보같은 점이 아닌 면 또는 전체가 있을 테니.
카텟 기관에서도 이랬었지.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그래서 곧잘 카텟 기관에서 무시되곤 했다. 카텟 기관은 결코 살아남은 자들의 유토피아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저마다 악착같이 살아남아 세상을 재건하고자 하는 음울하고 바쁜 조직이었다. 관사 내에 심리상담 팀이 꽤 본격적으로 짜여 있었고 사연 없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껏 잘 먹고 살다 카텟 기관에 건져진 관상용 물고기가 잘 지낼리 만무했다. 그녀는 다른 이에게 곧잘 무해했다. 카텟 기관원들이 악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몰락 이후 사람들은 많이 인색해졌고, 단지 상대가 가시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격을 가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결국 여기서도. 이렇게 되는 건가'. 23T5U130은 사유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마유즈미 나데시코에게 대답을 해 주었다.
"테세우스의 배가 무섭게 생긴 게 아니야."
23T5U130은 테세우스의 배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마유즈미는 알쏭달쏭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네. 뭐가 진짜 테세우스의 배인지가 어려워… 바뀌기 전은 분명 테세우스의 배가 맞는데, 같은 이름의 다른 배가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려나… 그런데 그게 왜 무서워?"
"내가 같은 이름의 다른 배니까."
마유즈미는 23T가 선박인가 따위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 23T에게 어려운 사정이 있으려니 하고 짐작했다.
"무슨 뜻인지 들어도 돼?"
"나는 원래 사람이었어."
마유즈미는 입 안에서 터져 나오려는 "엥? 정말?!" 을 꾹 눌러 참았다.
"사람의 몸에서 정신을 뽑아내 프로그램화하는 실험이었어. 내가 기계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 시험 가동이 시작됐고, 나는 제때 기계에서 나오지 못했어. 그리고 내 몸은 완전히 분해되어버렸지."
마유즈미는 작게 딸꾹질을 했다. 그녀는 히무로에게 말을 걸었을 때와 테세우스의 배에 대해 물은 것이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쭙잖은 마음에 듣기에는 너무 무거운 사연이었다. 단순히 너도 갇혀서 자랐느냐, 네가 무서워하는 것은 뭐였느냐를 물으려 했을 뿐인데 어느 새에 그녀와는 비교될 수 없이 슬픈 이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히무로는 납치당해 가혹한 환경 속에서 인체실험을 당하며 감정을 잃었다. 23T는 몸이 분해되었다. 세상에나.
"바깥 세계의 나나시는 나와 친구였어. 나나시가 기계 몸을 만들고 프로그램이 되어버린 나를 기계에 넣어 작동시켰지.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끼지만… 사실. 사람이던 나는 몸이 분해되는 순간 죽은 거지. 나는 사람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뿐. 인공지능과 같아."
마유즈미는 어떤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너는 사람이다? 그런 일을 신경 쓰지 마라? 어떤 말을 해야 23T에게 실례되지 않게 달래줄 수 있을지 골몰하던 마유즈미는 그 방법을 결국 떠올릴 수 없었다. 그녀는 23T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사실 아는 게 그리 많지 않았다. 힘세고 카텟 기관에서 왔다는 것 말고 뭐가 있을까?
"나는 같은 이름을 가진 채 그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애초에 사람이던 그녀의 존재가 나로 인해 점점 침몰하다 잊혀 버릴지도 몰라. 그게 무서운 거야. 사람이던 노바디의 공포를 가진 채 그 공포의 실현물이 되는 건 정말 끔찍한 기분이지. 그것도 내가 마음에 둔 사람에게서… 다만 시련 속에서는 그 형태만 나오니 무섭지 않았어. 애초에 뭔가를 무서워할 수 없는 몸이고."
"…미안. 괜히 물어봤어."
"괜찮아. 말하고 나니까 오히려 속이 후련해. 늘 비밀을 지키고 사는 처지라서 말이야… 너는 무슨 물건이 나왔어? 귀신이랬나? 폭도들이 아니었어? 곰인형 탈을 쓴 폭도들 말이야."
"곰인형 탈? 왜 그런 귀여운 걸 무서워하겠어? 나 곰인형 좋아해."
그야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마유즈미 가옥이 무너지는 기억을 잃었으니 다른 것 무서워하는 게 이치에 맞으리라 23T5U130은 생각했다.
"곰인형이 아니라. 나는… 악령? 귀신? 같은 게 나왔어."
"죽은 사람이 나왔다는 뜻이야?"
"아니. 그냥 귀신이야. 생각해 보니까 그냥 머리 길고 온통 흰 옷 입은 여자인데 귀신이라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네… 아무튼 막 귀신이야. 나한테 욕도 하고 막 겁을 주고… 꿈에도 나오고. 막 그래."
"꿈에도 나오다니. 그런 귀신을 어디서 봤길래 그래?"
"나도 몰라! 모르는 사람이야. 이제 안 보이니까 다행이지. 아무튼 괜찮아. 내가 무서워하는 건 다른 사람의 것보다 훨씬 약하니까. 그냥 생긴 거랑 말하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거니까… 히무로가 무서워하는 건 엄청나게 무서운 걸 거야. 히무로도 겁에 질리게 만들 만한 건 보고 싶지도 않아."
"히무로는 팻말이 무섭다던데. 그냥 글씨가 쓰인 팻말. 나와 똑같은 경우지. 관념적인 공포를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없으니 겉보기엔 농담거리처럼 보이는 것."
"뭐라 쓰여 있었대?"
"기능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감시자가 될 가능성이라 적혀 있었다."
나는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으꺅! 놀랬잖아!"
"두 분 모두 동행의 유지에 동의하시나요?" 패트리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하기와라 우시오는 이미 동의했기에 이제 마유즈미 나데시코와 인공지능만이 남아 있었다.
"요! 나 왔어. 친구들. 코미디언 아저씨야!" 하기와라 우시오가 등 뒤를 흘끗거리며 튀어나왔다. 몸은 떨리고 있는 채였다.
"하기와라 우시오를 데려왔다. 이제 네 공포를 일정 시간 마주하면 시련은 끝난다."
나는 마유즈미 나데시코와 인공지능에게 말한 뒤 하기와라 우시오에게도 말했다. 그는 영안로의 입구 쪽에서 다가오는 그의 부모를 보고 있을 터였다. 나에게는 팻말로밖에 보이지 않기에 그가 벌벌 떠는 이유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애초에 정황으로 보면 부모의 시체가 나온 것 같지도 않았는데. 가정폭력과 아동학대에 의한 트라우마일까? 그렇다면 그의 발작적인 행동도 이해가 되었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우. 씨발… 꼴 보기 싫은 새끼들. 저것도 애미애비라고…"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화들짝 놀라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야 부모님을 공경하게끔 자란 그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불행한 가정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었고 개중에는 지독한 것도 있을 터였다. 사실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것 또한 지독한 편에 속했다. 다만 그녀는 여전히 나쁜 부모를 사랑할 뿐이었다.
"엄마랑 아빠가 나왔어? 너흰 사이가 안 좋은가 봐." 인공지능이 말했다.
"그래. 애초에 이미 뒤진 몸들이라 사이가 좋을 것도 없는데 꼴 보기는 싫어. 너는 이해 못 하겠지? 미스터-미세스 젠더리스 핑크로맨스 슈퍼파워 깡통."
"나야 이해 못 하지. 부모님이 어떻게 된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난 엄연히 여자야."
"…엣? 뭬요?" 하기와라 우시오는 고개를 뒤로 돌려 인공지능을 보았다.
"네 공포를 바라보라고 했을 텐데." 시련의 달성이 늦춰지자 나는 그에게 상기시켰다.
"알겠어. 알겠어! 보면 될 거 아니야! 아니 잠깐 이거 맞아? 23T가 여자야?! 미세스 깡통이야?!"
"깡통이 아니라고. 이게 못 하는 말이 없어… 나라고 이 마네킹 머리가 좋을 것 같아? 기껏 타고난 얼굴인데 보여주지도 못하고, 나나시가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서 내 얼굴을 고쳐주지도 않을 텐데…"
"인간 시절의 23T 스킨 좀 내줬으면 좋겠다. 나중에 썰 좀 풀어 봐. 쥑이네. 반전 쥑이네에!"
"똑바로 바라보라고 말했다. 우리는 곧바로 다음 시련으로 넘어가야 하니까."
"쟤는 뭐가 저렇게 급해? 하기와라한테 말 좀 전해 달라니까 어딜 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캐롤 씨를 되살리는 것이 그토록 저지해야 할 일인 것 같습니다. 저희야 왜인지 알 수 없지만요. 후루미나미 씨를 심문하면 실마리라도 잡힐까요."
"…이상한 일이야."
"뭐가 말입니까?" 야가미 토가는 칸나즈키 시노부에게 물었다.
"토키와는 어디서 뭐 해? 이 난리가 났는데. 막 탑을 휘젓고 다니는 하기와라를 두고 할 일이 있나?"
"토키와한테도… 받아들일 시간을 줘야 하지 않을까. 대몰락 말이야. 아니." 이바라는 쓰게 웃었다. "사실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해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대몰락은 애초에 없던 일인데 우리가 너무 빨리 믿은 거야. 새로운 반전이…"
"그런 건 없습니다." 야가미는 말을 끊었다.
"…역시 그런가? 대몰락은 진짜고."
"아뇨. 토키와 씨가 받아들일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그는 비애에 빠져 있을 새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해야 할 일에 정신이 팔린 것이죠. 이른바 리더의 일입니다. 여러분 모두 느끼지 않았습니까?"
"딱한 토키와." 칸나즈키는 단지 그렇게 말했다.
"그라면 분명 하기와라 씨가 난동을 부릴 때 나타나 그를 막았을 겁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요. 그런데 아직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나는 책의 내용을 한 번 더 읽었다.
"우물에 빠지지 말 것, 쌍둥이자리, 독립 시행은 독립적인 움직임, 고문은 자비이다, 고통은 안정이다, 구속은 자유이다, 새벽에서 끄집어져 깨어남, 실내에서 추운 바깥으로 나가다, 상처, 소금, 염소의 혀, 동전의 양면, 30코페이카, 얼린 바다를 부순 도끼, 그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뒤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카이다 쿠로하를 억제할 수단은 이것으로 손에 넣었다.
다음은 칸나즈키 시노부인가. 나는 휘발유 통을 내려다보았다.